목록2021/06/16 (9)
건빵이랑 놀자
역사상 유일한 문화군주② 이러한 일련의 작업에 세종은 단순히 감독자로서만 관여한 게 아니라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작업자들을 독려했고 때로는 ‘실무’까지도 담당했다. 예를 들어 중국 송대에 나온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주해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를 간행할 때는 50여 명의 집현전 학자들을 투입하고도 세종이 직접 교정까지 보면서 작업을 진행시키기도 했다. 하기야, 경연청(經筵廳) 건물을 새로 짓고 학자들과 스스럼없이 학문적 토론을 나눌 정도의 실력이었으니, 세종은 교정이 아니라 시간이 허락된다면 직접 저술까지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종은 한반도 역사상 유일무이한 문화군주였다(심지어 그는 젊고 유능한 학자들에게 다른 일은 하지 말고 오로지 공부만 하라는 뜻으로 휴가를 주기도..
역사상 유일한 문화군주 결과적으로 보면 사대부의 선택은 옳았다. 즉위 과정에 문제가 있었지만 어쨌든 세종은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그를 세자로 책봉하는 근거로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에 부지런하다’는 것과 ‘정치에 관한 큰 줄기를 안다’는 것을 들었는데, 후자의 자질이 그의 즉위를 결정한 요소라면(그 말을 바꾸면 사대부와의 관계가 좋다는 뜻이니까) 전자의 자질은 즉위 후 그의 활약을 예고하는 요소다. 그래서 세종의 치세는 조선 역사상 가장 번영하고 평화로운 시대이자, 한반도 전체 역사로 보면 8세기 초반의 제1기, 11세기 중반의 제2기에 이어 세번째로 맞이하는 ‘팍스 코레아나(Pax Koreana)’의 시대가 된다(그 세 차례의 번영기가 모두 50년을 넘지 못했다는 게 큰 아쉬움이지만), 더..
무혈 쿠데타③ 양녕대군이 분방한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하지만 그게 반드시 군주적 자질과 무관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품성을 가진 세자가 왕위를 계승했더라면 아버지 태종이 18년 동안 다져 놓은 튼튼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층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정치를 펼쳤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에게 군주적 자질이 모자란다는 말은 그가 일반적인 군주가 아니라 특정한 성향의 군주, 즉 유교적 군주감이 못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냥을 좋아하고 시와 음악을 즐기는 취미는 아무래도 엄격한 유교적 제왕의 법도와는 무관한 자질일 테니까. 그렇게 본다면 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은 사람은 아버지 태종이라기보다 바로 사대부들이었을 것이다【이 점을 분명히 말해주는 기록이 있다. 문귀라는 신하를 시켜 세자 교체..
무혈 쿠데타② 이렇듯 각종 프로젝트가 추진됨으로써 태종의 시대에 비로소 조선은 명실상부한 왕국의 풍모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태종의 ‘역사적’ 위업은 그것에 있지 않다. 물론 왕권다툼으로 한동안 지연되었던 조선의 건국사업에 박차를 가한 것도 적지 않은 공로지만 그의 최대 업적은 바로 후계자를 잘 골랐다는 데 있다. 자신의 시대에 건국사업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했던 걸까? 아니면 왕위계승으로 골육상잔의 비극이 다시 재현되는 사태가 없도록 하기 위한 걸까? 셋째 아들을 후계자로 선정하고 자신의 생전에 왕위를 물려준 것을 보면 그는 아마 그 두 가지 사항을 다 고려했을 것이다. 과연 그의 기대에 걸맞게 그의 셋째 아들 이도(李祹, 1397 ~ 1450, 충녕대군)는 아버지의 지원으로 순..
3장 팍스 코레아나 무혈 쿠데타 제2의 건국자답게 태종은, 그리 길다고 볼 수 없는 18년의 재위 기간 동안 다방면으로 폭넓은 치적을 남겼다. 그것도 중앙관제나 지방 행정제도, 군제, 토지제도 등과 같은 굵직한 하드웨어의 정비 작업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에서도 섬세하면서 창발적인 솜씨를 보였다. 비록 자신의 손으로 사대부 세력을 제거하기는 했으나 그도 역시 유학 이념을 지향하는 군주였다(다만 국왕 중심의 유교왕국을 꿈꾸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념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는 유학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을 강화하고 지방의 향교(鄕校)를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또한 백성들을 위해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는가 하면 호패(號牌)를 도입해서 유민을 방지하는 등 철의 군주답지 않은 모습도 선보였다【물론 신문고..
2차 건국③ 그러나 여기서 개혁의 세세한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흔히 역사교과서에서 중시되는 내용, 즉 관리들의 등급에 따라 토지(봉급)가 어떻게 주어졌고 어떤 토지를 어떤 이름으로 불렀는지 따위는 지극히 사소한 문제다. 중요한 것은 과전법(科田法)의 구체적 시행보다도 그 바탕에 깔린 정신과 기본 성격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요소들이 예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고려의 토지제도는 중대까지 전시과(田柴科)가 적용되었다. 전시과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면서 관리에게는 토지의 생산물을 수취할 권리, 즉 수조권(收租權)만을 허용하는 제도다. 원리상으로는 훌륭한 제도이므로 그대로만 집행된다면 아무 문제도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고려의 경우에서도 보았듯이 전시과에는 현직 관리가..
2차 건국② 그 모든 개혁 조치, 2차 건국사업의 최종 목표는 조선을 분명한 왕국으로 만드는 데 있다. 그러나 단순히 정치와 행정 개혁만으로는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또 뭐가 필요할까? 바로 재정이다. 국가 재정이 튼실하지 못하면 왕국은커녕 사대부 국가조차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개인적으로도 쿠데타로 집권한 태종 자신이 조선 왕계의 새로운 적통으로 자리 잡으려면 안정된 재정 확보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그동안 다져놓은 권력을 기반으로 그는 드디어 최종 마무리 작업인 경제 개혁에 들어간다. 국가 재정의 기초는 단연 토지이므로 우선 필요한 것은 양전(量田), 즉 토지 측량이다. 가용할 수 있는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야 어디 다 쓸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을 테니까. 양전은 이미 고려 말 창왕 때..
2차 건국 태종은 정식 임금으로 즉위하기 전, 그러니까 형인 정종의 세제(世弟)로 책봉된 다음부터 곧바로 사실상의 국왕으로서 국정을 담당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뻔하다. 쿠데타로 집권한 경우 늘 그렇듯이 두 번 다시는 그런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아무리 개국초기증후군이라 해도 고려의 경우보다 왕자들이 직접 칼을 들고 나선 조선의 경우는 좀 심했다. 사태가 그렇게까지 격화된 이유는 왕자들이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종은 정치와 군사를 확실히 분리하기로 마음먹는다. 몽골 지배기 초에 설치된 귀족들의 의결기구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議政府)로 개편하고, 지휘권이 저마다 다른 사병 조직들을 흡수해서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한 것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