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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유교왕국의 모순② 조선 왕조 전체로 볼 때 이방원이 대권을 승계한 것은 단순한 파워 게임만이 아니다. 마치 무협영화처럼 전개된 그 사건의 이면에는 중대한 의미가 숨어 있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조선 왕조가 당당한 ‘왕국’ 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이 왕국이라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왜 그게 중요할까? 물론 형식상으로 보면 조선은 왕국으로 출발했고 20세기 초에 멸망할 때까지 내내 왕국으로 존속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다르다. 조선은 이성계가 왕국으로서 세운 나라지만, 건국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앞에서 보았듯이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국공신, 즉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들이다. 그들은 사실상 새 왕조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서 조선을 사대부 국가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바로 여기에 유교..
유교왕국의 모순 조선의 2대왕 정종은 고려의 2대왕인 혜종과 같은 처지다. 서열상 맏이인 덕택에 왕위를 물려받기는 했으나 오랜 기간 왕좌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안다. 더구나 그에게는 후사도 없다(아들은 있었지만 정비正妃 소생이 아니었으므로 방번, 방석 형제까지 서자로 취급된 판에 왕위계승권을 바랄 수는 없다). 그래도 시한부 삶을 조금이나마 연장해보기 위해 그는 즉위한 직후 개경으로 천도해서 한양의 악몽을 떨쳐내려 하지만 그가 물러나야 하는 상황은 예상보다 일찍 닥친다. 2라운드의 시작이다. 서열에 따르자면 다음 왕위계승권은 셋째인 이방의(李芳毅, ?~1404)에게 있으나 그는 일찌감치 왕위를 포기하고 다섯째인 방원을 밀고 있다. 그로서는 현명한 선택이지만 두번째 분쟁은 바로 여..
붓보다 강한 칼③ 결국 무모한 랴오둥 정벌 계획이 정도전의 명을 앞당기고 말았다. 정벌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1398년 여름 정도전은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私兵) 조직을 해체하고 왕자들도 진법 훈련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자들이 따르지 않자 정도전은 징계 삼아 그들을 모두 지방으로 보내려 했는데, 그게 곧 ‘왕자들의 반란’이라는 묘한 봉기의 빌미가 되었다. 8월 26일 밤 이방원은 휘하 병사들을 거느리고 남은의 첩실 집에 있던 정도전과 남은을 살해하고 간단히 권력을 장악했다【당시 정도전(鄭道傳)은 이웃집으로 도망쳤다가 주인의 밀고로 잡혀나와 이방원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 “예전에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살려주시오.” 그가 말하는 ‘예전’이란 바로 1392년 이방원이 정..
붓보다 강한 칼② 여기서 잠시 1392년 건국의 시점으로 되돌아가보자. 갓 탄생한 새 왕조가 한시바삐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권력의 승계가 분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장성한 여섯 아들이 모두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들이었으므로 이성계는 어느 아들을 특별히 편들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나름대로 공정하다고 생각되는 방책을 마련한다. 여섯 아들은 모두 지난해에 죽은 첫 아내(신의왕후)의 소생이다. 따라서 태어나면서부터 왕자의 신분이 아니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온전한 왕위계승자라고 볼 수 없다【왕위계승자의 신분이 태어나면서부터 왕자였는가, 아닌가는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사소하지만 당대에는 무척 중요한 기준이었다. 참고로 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현역 황제를 아버지로 두고 황궁에서 태어난 아이를 가리켜 포르..
2장 왕자는 왕국을 선호한다 붓보다 강한 칼 이성계는 조선의 건국이 최종 목표였겠지만 정도전(鄭道傳)의 목표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성계가 조선의 얼굴이라면 정도전은 조선의 두뇌이며, 이성계가 시공자라면 정도전은 건축가다. 그러므로 이성계는 건물이 다 올라간 것에 만족할 수 있어도 정도전은 인테리어까지 마쳐야만 완공이라고 본다. 게다가 중국의 까다로운 준공 검사에 합격하려면 인테리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성계가 아직도 조선 국왕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고려권지국사에 머물러 있는 게 그 증거다. 컴백한 유교제국 명나라와 좋은 짝을 이루려면 조선도 유교왕국으로 거듭나야 한다. 붓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조선경국전』으로 이념적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은 지배 이데올로기로 갓 자리잡은 유학을 확고히 안..
유교왕국을 꿈꾸며 주원장(朱元璋)이 조선을 회의적으로 바라본 데는 사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볼 때 조선은 생겨날 필요가 없는 나라다. 이미 고려 말에 명나라를 섬기겠다는 세력이 확실히 자리를 굳힌 마당에 왜 굳이 새 왕조를 세워야 했을까? 중국의 원-명 교체는 민족 주체가 바뀌었으니 나름대로 필연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겠지만, 고려-조선 교체에는 그런 필연성이 없다. 바꿔 말하면 고려와 조선은 성격상의 차이가 없고 겨우(?) 왕실의 성씨만 달라졌을 뿐이다. 주원장과 정도전(鄭道傳)이 허허실실한 신경전을 벌인 이유도 서로가 그런 배경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차이를 만들면 된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뀔 만한 타당하고 합리적인 명분을 만들어내야 한다. 정도전(鄭道傳)은..
두 신생국의 신경전③ 이제 사태는 명확해졌다. 명나라는 처음부터 정도전을 타깃으로 삼고 있었다. 왜? 정도전은 조선의 기획자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명나라는 한반도에 조선이 들어서는 것보다 고려의 온건파이자 친명파인 개혁 세력이 집권해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해서 환골탈태한 고려 왕조가 적극적인 친명 정책으로 나와 충실하게 사대해주기를 원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역성 쿠데타가 발생해서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새 나라가 생겨났다. 게다가 그 주체 세력은 이색(李穡)과 정몽주 등 적극적인 친명파를 제거하고 집권했다. 따라서 명나라의 의도는 조선의 브레인이자 기획자인 정도전(鄭道傳)을 제거하거나, 최소한 그에게서 충성의 다짐을 받아둬야겠다는 것이다【물론 고려 말에는 정도전도 친명파였으며, 새 국호를 정하..
두 신생국의 신경전② 국호 문제가 통과된 시점에서 이제 명나라의 수중에 남은 카드는 바로 이성계에 대한 승인장이다. 조선을 승인했는데 이성계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애를 먹일 수는 있다. 1395년 11월에 이성계는 정총(鄭摠, 1358 ~ 97)을 명에 사신으로 보내는데, 그 임무는 자신의 승인장, 즉 조선 국왕 임명장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고상한 용어로 말하면 이것은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이라고 부른다. 고명이란 왕위를 승인하는 임명장이고 인신이란 그에 부수되는 인장을 말한다. 쉽게 말해 책봉의 절차라고 보면 된다. 원래 고명과 인신은 당나라 시대에 5품 이상의 관리를 임명할 때 주던 임명장과 인장을 뜻하는 용어였으니, 중국의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
두 신생국의 신경전 가장 중요한 국호가 결정되자 정도전의 조선 기획은 더욱 가속화되고, 그에 따라 그의 재능도 더욱 빛을 발한다. 우선 그는 이성계의 덕을 칭송하기 위해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일종의 간이 오페라인 「문덕곡(文德曲)」,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錄)」을 지어 작사ㆍ작곡ㆍ안무의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현재 음률은 전하지 않고 『악학궤범樂學軌範』에 가사와 일부 춤동작만이 전한다). 그러나 이런 예능의 자질은 그가 지닌 능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곧이어 그는 군사제도를 정비해서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만들어 병권을 장악하고 직접 군사 조련까지 담당하면서 폭넓은 오지랖을 마음껏 과시한다. 1394년에 접어들자 그는 잠시 짬을 내서 국가 운영 지침서인 『조선경국전』을 저술하는가 싶더..
조선의 기획자② 여러 문헌을 뒤적거리며 국호 후보감을 찾던 그는 아마 고려를 건국하던 무렵의 왕건이 부러웠을 것이다.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취지였으니 고려라는 국호는 지을 것도 없이 당연했을 테니까(고려가 그 취지와는 달리 신라를 계승한 왕조라는 점은 앞에서 본 바 있다). 게다가 왕건의 시대에는 중국이 분열기에 있어 간섭할 나라도 없지 않았던가? 그 반면에 지금은 새 나라의 국호조차 독자적으로 짓지 못하고 중국의 허가를 얻어야 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허가 여부가 국호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고심 끝에 그는 결국 두 개의 후보를 찾아낸다. 하나는 ‘화령(和寧, 지금의 영흥)’이다. 화령은 이성계의 출생지니, 이것은 건국자의 출생지를 국호로 정하는 중국의 고대 전통을 따른 작명이다. 물론 하자는 없지만 ..
1장 건국 드라마 조선의 기획자 작은 사물이 큰 사물에 이끌리는 것은 자연 법칙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면서도 다른 면에서 보면 ‘자연 현상’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자연과 달리 의지를 지닌 사물, 이를테면 인간이나 인간 집단은 그 자연 법칙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사대(事大)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선택적인 행위다. - 『역사의 물리학』 중에서 14세기 말의 동북아시아는 활기에 넘친다. 한 세기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다가 다시 한족 왕조가 들어선 중국과 새 왕조로 말을 갈아 탄 한반도는 바야흐로 건국과 재건의 활발한 시즌을 맞았다. 몽골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었던 같은 처지의 신생국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두 나라는 죽이 잘 맞지 않지만 어차피 서로 바쁜 초기의 건설기가 끝나..
7부 유교왕국의 완성 유교왕국이란 원래 왕과 사대부를 축으로 하는 이중 권력 체제다. 초기의 승자는 왕이었다. 건국 초기부터 사대부 체제를 이룩하고자 했던 정도전(鄭道傳)의 구상은 당연히 왕국 체제를 선호하는 왕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그 덕분에 세종까지는 국왕이 사대부를 관료로 거느리는 정상적인 왕국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으나, 머리가 커진 사대부들은 점차 왕권에 대한 도전을 꿈꾸게 된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개혁이냐, 건국이냐③ 건국의 또 다른 계기는 명나라에서 온다. 명나라에 파견되어 있던 윤이(尹彛)와 이초(李初)라는 무신들이 1390년 5월 명 황실에 야릇한 보고를 올린 것이다. 내용인즉슨 공양왕은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며 이성계의 인척이라는 것, 그리고 이성계가 장차 명나라를 침공할 의도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이 아닌 허위보고였지만 가뜩이나 신군부 정권을 바라보는 명나라의 눈길이 곱지 않아 전전긍긍하던 삼총사가 그대로 덮어둘 리 없다. 개경에서는 곧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져 온건파의 태두인 이색(李穡)을 비롯하여 이숭인(李崇仁, 1349 ~ 92), 변안렬(邊安烈, ? ~ 1390), 우현보(禹玄寶, 1333 ~ 1400) 등이 유배되기에 이른다. 이것으로 사태가 종결되었더라면 조선 건국은..
개혁이냐, 건국이냐② 예상했던 대로 기득권층은 물론 신진사대부들조차도 조준의 전제 개혁안에는 반대 일색이다. 비양심적인 세력은 이미 가질 만큼 가졌으니 당연히 반대였으나 양심적인 세력도 개혁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급진파 삼총사가 보기에 그것은 개혁도 하기 전에 개혁피로증을 걱정하는 격이다. 조준의 개혁안에 반대 상소가 잇따르자 이성계는 준비해둔 칼을 끄집어낸다. 당시 시중은 이색(李穡)이었고 이성계는 부총리격인 수시중(守侍中)이었지만 권력과 물리력을 지니고 있으니 시중은커녕 국왕도 두렵지 않다. 그는 재빨리 반대 세력의 핵인 조민수를 탄핵해서 유배를 보낸 다음 창왕을 폐위시킨다. 이렇듯 준비된 수순이 일사불란하게 실행에 옮겨질 수 있었던 것은 삼총사의 탁월한 팀워크 덕분이다...
개혁이냐, 건국이냐 이색(李穡)이 창왕의 옹립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쿠데타 세력이 사대부와 손을 맞잡았다는 것을 뜻한다. 쿠데타가 성공하자 기득권층인 권문세족은 최영과 운명을 함께 했고(여기에는 원나라가 재기할 가능성이 희박해졌다는 점도 배경이 되었다), 사대부 세력은 즉각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접근해서 신군부와 인연을 맺으려 들었다. 그동안 물리력에 취약점이 있어 권력에 다가가지 못했던 그들이었으니 이제 한풀이를 할 때가 온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대부는 동질적인 세력이 아니었다. 권문세족이 집권하던 시기에 그들은 공동의 적을 앞에 두었으므로 친명반원(親明反元)의 이해관계로 통일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으나, 이제 세상이 달라졌으니 저마다 색깔을 드러낼 것은 당연하다. 개혁이라는 대의에서는 모두가 같은..
구국의 쿠데타?② 졸지에 해결사로 나서게 된 이성계는 고민한다. 마음으로야 그도 자신의 고향인 화령(영흥)이 있는 철령 이북의 땅을 명나라에게 내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랴오둥을 정벌하라는 최영의 강경책은 지나치다 못해 황당할 정도다. 그래서 그는 그 전략이 무모하다는 점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약소국이 상대국을 치는 격이고, 그 틈을 타서 왜구가 침범할 우려가 있으며, 농번기에다 장마철인 여름에 군대를 움직이면 농사를 망칠 뿐 아니라 전염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게 그의 논지다. 그러나 최영의 의지는 단호했다(아마 최영은 무리한 랴오둥 정벌을 계기로 라이벌 이성계를 제거할 의도를 품었을 테고 이성계 역시 그 점을 알았기에 반박했을 것이다). 일단 상관의 명령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북..
구국의 쿠데타? 원나라를 몰아낸 명나라와 친원파가 장악하고 있는 고려, 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두 나라의 관계는 결국 영토 분쟁으로 번진다. 갑자기 웬 영토 문제일까? 사실 여기에는 가깝게는 100년, 멀게는 고려의 개국 초기부터 수백 년간에 달하는 역사가 관련되어 있다. 우선 명나라는 원나라를 정복한 만큼 원나라의 옛 영토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건 정당한 주장이니까 고려로서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원나라의 그 옛 영토 중에 고려의 영토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바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와 동녕부(東寧府)에 속했던 땅이 쟁점 지역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몽골 지배가 시작된 이래 함경도와 평안도는 원나라의 두 지배기관에 속해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 전까지 고려의 영토였던..
수구와 진보② 그러나 이인임(李仁任) 일파의 시대착오적인 자세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은 명나라가 아니라 고려 내의 신진사대부다. 그 대변인 격인 정몽주(鄭夢周, 1337 ~ 92)와 이색(李穡)의 제자로서 그와 친교가 두터웠던 정도전(鄭道傳, 1337 ~ 98)은 친원정책에 반대하다가 귀양까지 가면서도 친명(親明)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바야흐로 고려 내 권력구도는 본격적으로 수구 대 진보의 전선으로 나뉘었다(친명 노선을 진보적이라 부르기는 좀 곤란하지만 수구파와 대립되는 면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멤버로 볼 때 그 전선은 권문세족 대 신진사대부이며, 외교적으로는 친원 대 친명, 종교적으로는 불교 대 유교의 대립이다. 왕권이 사실상 실종된 상황에서 두 세력이 다툼을 벌인다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
수구와 진보 신돈(辛旽)이 실각의 조짐을 보이던 1368년에 주원장(朱元璋)은 원나라를 북쪽으로 내몰고 실로 오랜만에 한족 제국인 명(明)을 세웠다. 그리고 신돈이 처형된 뒤 고려의 권력은 다시 권문세족이 장악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중국의 신흥국 명나라와 식민지에서 갓 해방된 고려의 관계가 장차 순조롭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반원을 내세웠던 공민왕(恭愍王)은 명나라의 등장이 반갑기만 하다. 그래서 그는 주원장(朱元璋)이 명 태조(太祖, 재위 1368~98)에 즉위하자 곧바로 사신을 보내 축하하면서 명나라를 섬길 뜻을 전한다(식민지에서 해방되자마자 또 다른 모국을 찾은 격이니, 고려의 반원 운동이 결코 자주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에 대해 명 태조는 공민왕의 책봉 문서와 ..
개혁의 실패가 부른 몰락③ 그러나 단지 기득권층을 제압하는 게 개혁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개혁이 장기적으로 성공하려면 사회의 새로운 주도층을 만들어내야 한다. 신돈(辛旽)이 낙점한 그 신진 세력은 바로 사대부들이었다. 1367년 그는 성균관(成均館)을 새로 짓고(성균관은 충렬왕 때 처음 설치되었으나 당시에는 기존의 학교들을 모아 성균관이라 이름지은 정도였다) 공자를 ‘천하의 스승’이라 칭하면서 유학자들을 적극적으로 발탁한다. 그들이 바로 신흥 학문인 주자학을 숭상하는 유학자들, 즉 신진사대부들이다(공식적으로는 그들을 신진사류新進士類라 부르는데, 여기서는 조선과의 연관성을 기해 사대부로 통일하기로 하자). 승려의 신분으로 유학을 공식 이념으로 채택했다는 것은 독자적 세력이 없는 그였기에 가능했을 것이..
개혁의 실패가 부른 몰락② 그 기세에 공민왕(恭愍王)은 잠시 관망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나 1356년에는 2차 개혁에 나섰다. 원 황실과 혼맥을 구축하고 세도를 부리던 골수 친원파 기철(奇轍, ? ~ 1356)이 반란을 꾀한 것은 오히려 공민왕에게 좋은 계기가 되었다. 기씨 집안을 처단한 것을 기화로 공민왕은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최종적으로 폐지하고, 100년간이나 존속하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제거하는 한편, 원나라식 관제를 고려의 옛 관제로 되돌리고 원나라의 연호마저 폐지함으로써 개혁의 성격이 반원에 있음을 천명한다(첨의부도 다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2차 개혁은 절반의 성공만을 거두는 데 그쳤다. 권세가들의 저항도 저항이려니와 개혁의 주도 세력이 왕실 외척인 탓으로 한계가 ..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개혁의 실패가 부른 몰락 권문세족의 태생적 결함은 결국 현실로 드러났다. 원나라와 운명공동체로 출발한 그들이었으니 몰락도 원나라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13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원나라가 급작스럽게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세조 이래 원 황실은 한화 정책에 열심이었으나 북방민족이 한족으로 탈바꿈할 수는 없었고 유목문명이 농경문명을 흡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일찍부터 제위의 세습제가 발달한 한족 왕조와는 달리 몽골의 관습에는 제위 계승을 위한 고정된 제도가 없었으므로 권력다툼이 더욱 심했다. 장기 집권했던 세조 이후 14세기 후반까지 70여 년 동안 즉위한 황제만도 10명에 이를 정도였다. 게다가 경제에 어두웠던 원 황실은 국가재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
식민지적 발전Ⅱ④ 남의 나라 지배를 받고 있는 식민지 시대에 우리 역사의 유구함과 자주성을 특히 강조하려는 입장이 생겨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유구함은 어디까지나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자주성 역시 참된 것이어야 한다. 일연(一然)과 이승휴의 노력(?) 덕분에 우리 역사는 2천 년이나 크게 늘어 이른바 ‘반만 년 역사’가 되었지만, 그것이 실제 사실과 무관한 가공의 역사라면, 혹은 민족 자주의식에서 나온 게 아니라 뿌리깊은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결과라면 결코 달갑지 않은 ‘역사 왜곡’에 불과하다【이런 사례는 우리 역사상 또 다른 이민족 지배기였던 20세기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도 볼 수 있다. 일제 시대에는 영원한 사대의 대상이었던 중국이 서양 세력에게 무릎을 꿇은 뒤이므로 사대주..
식민지적 발전Ⅱ③ 유학의 도입을 문화적 측면에서의 식민지적 발전이라 한다면, 이와 비슷한 발전은 역사 분야에서도 찾을 수 있다. 비록 논리는 다르지만 역사에서도 몽골 지배에 반대하면서 자주적인 외피를 쓴 ‘발전’이 있었다. 무신정권기에 활동한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은 그 선구자이며, 몽골 지배기에 간행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와 이승휴(李承休, 1224 ~ 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는 마무리이자 완성에 해당한다. 「동명왕편(東明王篇)」은 아마 미완성으로 끝나지 않았다면 제목이 달라졌을것이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라는 이규보의 개인 문집에 실린 이 영웅 서사시는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동명왕)의 탄생과 생애, 업적, 그리고 그의 아들 유리왕의 시대까지를 다루고 있는..
식민지적 발전Ⅱ② 주자학에 열광한 것은 고려의 지식인들만이 아니라 중국의 한족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점에서 고려가 주자학을 수입한 루트가 원나라라는 것은 아이러니지만 당시에는 중국에 한족 왕조 자체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원 세조 이후 적극적인 한화(漢化) 정책이 아니었다면 주자학도 그렇게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순수한 철학 자체만으로 보면 별 문제가 없지만 정치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면 주자학은 화이(華夷), 즉 중화세계와 오랑캐 세계를 분명히 구분하려 했기 때문이다(아마 원나라는 중국 대륙을 현실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탓에 주자학의 그런 정치철학적 측면을 간과했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당시 중국의 사정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정신사적으로 보면 중국 한족 제국들의 역..
식민지적 발전Ⅱ 몽골 지배기가 남긴 ‘혜택’은 새 시대의 주역을 탄생시킨 것 이외에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건국 초부터 고려는 여러 이민족 국가들의 간섭과 지휘를 받았고 때로는 자발적이거나 반강제로 그들을 섬겼지만 정식으로 남의 지배를 받은 일은 없었다. 이제 처음으로 속국 신세를 경험하면서 고려인들, 특히 생각있는 지식인들은 새삼 고려라는 나라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지금이야 속국이나 식민지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쓰지만 당시는 그런 개념이 없었던 때였으므로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나라를 과연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려의 상류층은 자발적으로 몽골풍을 따랐고 백성들도 대부분 몽골 지배를 현실로 받아들였으나, 상당수 지식인들은 원나라에 사대하..
식민지적 발전Ⅰ③ 무신정권에게 배운 수법일까? 권문세족은 자기들끼리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서로 혼맥을 통해 끈끈한 이해관계를 유지하며, 과거보다는 음서를 통해 지위와 기득권을 대물림하는 등 철저한 ‘문민독재(文民獨裁)’로 일관한다. 당대에는 그런 권력형 부조리가 큰 문제였으리라. 그러나 후대의 관점에서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들로 인해 대단히 좋지 않은 역사적 선례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20세기 일제 식민지 시대 친일파의 조상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권문세족들은 적극적인 친원파였다【여기서 권문세족과 무신정권기 이전까지 고려 사회의 지배층으로 군림했던 전통적인 개경 귀족의 차이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물론 권문세족들 중에는 개경 귀족 출신도 많으니까 양자는 상당 부분 겹치기도 ..
식민지적 발전Ⅰ② 정치가 허물어지면 그 틈을 노려 득세하는 자들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권문세족은 몽골 지배기에 떵떵거렸지만 그 뿌리는 정치가 제 기능을 못하기 시작할 무렵, 바로 무신정권 시대에 이미 싹텄다. 당대 최고의 재산은 뭐니뭐니해도 토지, 따라서 그들의 전략은 토지 겸병이다. 전시과(田柴科)의 근본적인 결함(관리들의 토지 세습으로 토지가 부족해지는 현상)은 앞서 말한 바 있지만, 정치의 기강이 살아있으면 그럭저럭 제도를 유지하는 게 가능하다. 공권력으로 수조권(收租權)이 세습되는 관행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신들이 중앙 권력을 장악하고 치부에만 집중하게 되면서 공권력 자체가 혼탁해진 마당에 전시과(田柴科)가 더 이상 유지될 리 없다. 그러자 세도가들은 각종 편법을 구사해서 토..
식민지적 발전Ⅰ 일국의 왕실에서 왕위를 장난처럼 주고받았을 정도라면 나라꼴이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장장 30년간의 무모한 대몽 항쟁으로 전 국토는 피폐해졌고 더 무모한 일본 정벌의 준비로 백성들의 삶은 파탄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기업은 망해도 사장은 살아남는다는 말은 자본주의 사회의 격언만이 아니다. 왕실이 그랬듯이 고려 사회의 지배층도 나라와 백성의 처지와는 무관하게 멀쩡히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찍이 없었던 영화를 누렸다. 식민지적 발전이라는 용어가 성립할 수 있다면 그것을 누린 자들은 바로 그들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선진국의 첨단 유행을 맨먼저 받아들이는 것은 상류층이다. 식민지 시대가 시작되자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앞다투어 몽골 복장을 몸에 걸치고 몽골식 변발을 했다. 게다가..
황제의 사위들③ 그러나 고려 왕실의 웃지 못할 해프닝은 그 다음에도 연출된다. 1308년 충렬왕이 죽은 뒤 충선왕(忠宣王)은 몽골에서 돌아와 다시 왕이 되었지만, 겨우 두 달만에 원나라로 돌아가 버린다. 고려 왕은 다시 궐위 상태가 되었고, 더구나 국왕의 호사스런 해외 생활비를 대느라 국가 재정도 엉망진창이다. 그래서 고려 정부만이 아니라 원나라 황실에서도 왕의 귀국을 종용했으나 충선왕은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잠시 귀국해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절차를 밟은 다음 원나라로 돌아가 죽을 때까지 귀국하지 않았다. 이쯤 되자 고려 왕위는 권력을 행사하고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성가시고 부담스런 자리가 되었다. 아버지가 떠맡긴 왕위를 영문도 모르고 덥석 받은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 ~ 30, 1332 ..
황제의 사위들② 기대와는 달리 즉위 초부터 일본 정벌 뒷바라지에 시달린 충렬왕이었으나 사위로서 장인의 뜻을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감내할 수밖에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재위 기간 중 그는 열 차례 이상이나 원의 황실을 방문할 정도로 정성스럽고 충성스런 사위였다. 따라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僉議府)로, 추밀원을 밀직사(密直司)로, 어사대를 감찰사(監察司)로 바꾸고 6부를 4사(司)로 개편한 데는 원의 요구에 따른 것만이 아니라 충렬왕의 뜻도 있었을 것이다(속국이므로 6부六部라는 이름도 6조六曹로 격하되었는데, 이 명칭이 조선시대까지 계속된다). 기관들의 기능은 그대로지만 이름에서 보듯이 성(省)이 부(府)로, 원(院)과 대(臺)가 사(司)로 한 급씩 격하된 것은 속국 행정부의 체제임을 말..
황제의 사위들 2차 일본 정벌이 전개되기 1년 전인 1279년 남송이 멸망함으로써 고려는 영원한 사대의 대상을 잃었다. 정작 충심을 바쳐 섬기고 싶은 대상인 중국의 한족 왕조가 사라지고 난데없이 오랑캐 몽골을 ‘모국’으로 받들게 되었으니 고려의 신세도 여간 딱한 게 아니다. 그나마 남송처럼 오랑캐의 손에 멸망하는 것보다는 오랑캐의 속국으로라도 존속하는 편이 낫다고 할까? 물론 몽골의 관점에서는 고려가 남송과 달리 변방에 불과했기에 그냥 놔둔 것이지만. 사실 고려 왕실은 불만이 없다. 왕실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원나라가 고맙기 그지없다. 그 덕분에 지긋지긋하던 무신집권을 종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적 왕권?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어차피 개국 초부터 주변 강대국들의 연호를 사용해 왔고 이민족 왕조..
반군과 용병③ 그러나 당시 일본의 집권자인 호조 도키무네는 겨우 스물세 살의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무신 집권자들처럼 교활하고 비겁하게 책임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 천황을 방패막이로 내세우지 않고 결연하게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비록 때맞춰 불어온 태풍으로 원정군의 선박들이 깨져나가는 바람에 싱겁게 끝났지만 가마쿠라에서 멀리 규슈까지 군대를 파견한 기개는 대단했다. 정복의 한을 풀지 못한 쿠빌라이는 1280년 개경에 정동행성(征東行省, 말 그대로 동쪽의 일본을 정복하기 위한 관청이다)을 설치하고, 이듬해 무려 14만 명의 병력과 4천 척의 함대로 다시 규슈에 상륙했는데, 불행히도 또 태풍이 불어닥쳐 200척의 선박만 남기고 모조리 침몰해 버렸고 인명 피해도 10만 명에 달했다【두 차례의 태풍..
반군과 용병② 애초에 배중손이 믿었던 것은 미처 강화도에서 나오지 못한 왕족과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왕족인 승화후 온(溫)을 왕으로 옹립하는 등 부산 떠는 틈을 타 인질들은 재빨리 육지로 도망쳐 나온다. 그렇다면 삼별초(三別抄)도 더 이상 강화도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배를 타고 멀리 남쪽으로 가 진도에 근거지를 트는데, 그들이 기세를 떨치는 것은 이때부터다. 선박을 이용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제주도에서 거제도까지 남해상의 섬들을 점령하니 옛 장보고(張保皐)가 부럽지 않다. 특히 항구들을 장악하고 중앙으로 가는 조운을 방해한 것은 개경 정부에게 심각한 재정적 타격을 준다.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반란이 아니라 또 다른 나라의 건국이 될 판이니, 개경 정부는 장보고 시대 경주 정부..
반군과 용병 마치 종전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몽골 황제 몽케 칸과 고려 국왕 고종은 1259년에 함께 죽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운명은 황제와 왕이라는 신분 차이보다도 컸다. 오히려 고종과 비슷한 삶을 산 인물은 수백 년 뒤에 등장하는 조선의 고종이다. 두 임금이 같은 묘호를 받았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같은 운명을 암시한 걸까? 고려의 고종은 내내 최씨 정권의 꼭두각시였고 30년을 강화도에서 보내야 했으며, 조선의 고종은 나중에 자세히 보겠지만 아버지와 마누라에 휘둘려 바지저고리로 지내다가 급기야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까지 했으니 말이다. 공교롭게도 두 고종 모두 예순일곱 해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안은 채 죽었다. 그래도 일제 식민지 시대와 달리 몽골 식민지 ..
무모한 항쟁③ 이 명백한 사기극에 몽케는 당연히 격분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의 위기와 정권의 위기를 혼동하고 있는 최항은 1253년에 몽골군이 침략해 오자 또 다시 사기극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 강화도 맞은 편에 임시 궁궐을 마련하고 고종이 마치 뭍으로 나온 것처럼 꾸며 거기서 몽골 사신을 영접하도록 한 것이다. 고종이 강화도에서 나온 것은 그게 처음이긴 했으나 같은 사기에 두 번 속을 바보는 없다. 결국 이듬해 여름부터 시작된 몽골의 6차 침략은 사상 최대의 피해를 가져온다. 기록에 따르면 “이 해에 몽골군에게 사로잡힌 백성은 무려 20만 6천 800여 명이고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몽골군이 지나간 지방은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고 되어 있으니 사기의 대가는 엄청나다. 국제 사기극으로 ..
무모한 항쟁② 비록 각지에서 군민이 합세한 고려 측의 저항을 받았으나 속도만 가끔 느려졌을 뿐 몽골군은 거침없이 한반도 전역을 유린한다. 평안도와 함경도는 물론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사람 사는 곳 중에는 그들의 말발굽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같은 시기에 바투의 유럽 원정군은 러시아와 동유럽의 도시들을 짓밟고 있었으니 가히 몽골군이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에서 동쪽 끝까지 구세계의 전체를 초토화시킨 시기라 할 만하다. 문화재의 측면에서 볼 때 이 3차전으로 고려는 한 가지 문화재를 만들었고 다른 한 가지 문화재를 잃었다. 불타 없어진 초조대장경을 대신해서 새로 대장경을 조판하기 시작한 게 전자라면(현재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이 그것이다), 최대의 사찰인 경주 황룡사가 불타 무너진..
무모한 항쟁 설사 강화도 천도가 항쟁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국토와 백성을 버리고 싸우자는 격이니 그건 항쟁이라 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항복은 굴욕적인 것이지만 일단 항복을 했으면 자신의 처지와 역할에 충실해야만 실익이라도 거둘 수 있다. 치욕을 씻고 복수를 꾀하는 것은 그 다음의 수순이다【그런 점에서 강화도 천도를 반대한 참지정사 유승단(兪升日, 1168~1232)은 냉철하고 현실적인 안목을 가진 인물이었던 듯싶다. 그는 몽골에 사대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는데, 당시의 현실에서는 단연 그게 더 현명한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도 고려는 몽골의 속국이 되지만, 이길 수 없는 전쟁을 고집하는 게 기백 있는 태도인 것은 아니니까. 게다가 유승단은 강화도로 천도하면 ‘변방의 백성들은 다 ..
다시 부는 북풍② 어쨌든 몽골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살리타는 몇 차례 북부의 성곽들을 찔러보다가 이내 공성을 포기하고 곧장 개경을 향해 내달렸다. 다급해진 최우는 서둘러 병사를 모았으나 교활하게도 자신의 친위대 병력인 별초군을 동원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산성이 없으면 힘을 쓰지 못하는 데다 알맹이까지 빠진 군대가 전군이 기병인 몽골군을 막을 수는 없다. 몽골군은 가볍게 방어군을 무찌르고 순식간에 개경을 포위했다. 게다가 포위 병력을 그대로 둔 채 남하를 계속한 몽골군은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궁성은 포위되었고 국토는 유린되고 있다. 이렇게 누가 봐도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최우(崔瑀)는 항복할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항복하는 주체는 상징적 국가대표이자..
2장 최초의 이민족 지배 다시 부는 북풍 처음부터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양측이 첫 대면을 한 것은 1218년 몽골에 쫓긴 거란이 한반도 북부로 밀려들어왔을 때다. 몽골군은 서경 동쪽의 강동성에 거란을 몰아넣고 고려에 군량 지원을 요청했다. 고려의 중앙정부는 고민했으나 당시 서북면 원수(元帥)를 맡고 있던 조충(趙沖, 1171~1220)이 군량을 보내자 정부에서도 김취려(金就礪, ?~1234)를 지휘관으로 삼고 병력을 보내 이듬해 1월에 양측이 함께 거란의 잔당을 소탕하는 형식을 취했다(당시 조충은 고려로 보내진 거란 포로들을 북부의 각 주현으로 분산시켜 특정 구역에 모여 살게 했는데, 이것이 후대에 거란장契丹場으로 불리게 된다). 이렇듯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충과 김취려는 몽골 ..
격변의 동북아② 이 시기에 최충헌(崔忠獻)이 독재의 기반을 구축하고 이들 최우(崔瑀)에게까지 권력을 물려줄 수 있었던 데는 몽골이 한반도에까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탓이 크다. 칭기즈 칸은 사실 한반도는커녕 중국 대륙에도 관심이 없었다. 남송 시대부터 비약적으로 발달한 서역(중앙아시아)과의 경제적 교류에 일찌감치 주목했던 그는 금나라를 제압해 놓는 선에서 동방 경략을 일단락짓고 서역 원정에 나섰다. 예부터 동서 무역의 중추였던 실크로드를 장악해서 경제 대국을 이룩하는 게 그의 목표였으니, 과연 이 민족 왕조의 리더답게 그는, 중화세계에 만족하는 한족의 천자였다면 품지도 못했고 품을 필요도 없었던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아시아를 넘어 멀리 호라즘(지금의 이란)까지 정복해서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되자..
격변의 동북아 최우(崔瑀)가 정작으로 걱정해야 할 것은 자기 집 바깥이 아니라 나라 바깥이었다. 그에게 최소한의 역사적 안목만 있었더라도, 고려의 대내적인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는 반드시 대외적인 국제질서가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리라. 송과의 국교를 트면서 광종(光宗) 대에 왕권 강화의 기회가 주어졌고, 거란의 요나라에 복속되면서 현종 대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기회를 맞을 수 있었던 고려가 아니었던가? 비록 여진의 금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은 이후에는 안정을 누리는 대신 내란을 겪어야 했지만, 그것은 고려의 권력 구조 내부에 누적되어 오던 외척 세력과 문치주의의 모순이 분출되고 해소되는 과정이었으니 나름대로 필요한 단계였고 긴요한 시기였다. 이렇게 고려 왕조가 틀을 갖추고 발전해 오는 ..
틀을 갖춘 군사독재③ 그래도 정방은 무신들이 완전 독점한 교정도감과 달리 문신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킨 지배기관이란 점에서 나름대로 정치기구로서의 면모는 더 분명하다고 하겠다(그 덕분에 훗날 무신정권이 끝났을 때 교정도감은 폐지됐으나 정방은 계속 남게 된다). 이제 최우(崔瑀)는 문무 양측을 다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권력자가 됐다. 정방보다 문신 참여율이 더 높은 서방까지 창설한 것은 그런 자부심의 발로다. 정방이 집행기관이라면 서방은 국정 자문기관이므로 문신과 유학자들을 대거 참여시킬 수 있는 데다 무신정권기에 소외됐던 문신 세력을 회유하는 부수적 효과도 거둘 수 있으니 최우의 입장에서는 일석이조다. 이렇게 해서 바깥에는 별채(교정도감), 집안에는 방 세 개(도방, 정방, 서방)를 갖추고 수많은 사랑방 손..
틀을 갖춘 군사독재② 출발부터 그랬으니 교정도감의 첫째 기능은 당연히 정치인과 관리에 대한 사찰이다. 그러나 권력이 실린 기관은 기능도 확대되게 마련이다. 사찰기구로 출발했던 교정도감의 기능은 점차 넓어져 행정과 세무는 물론 전반적인 국정의 중대사까지 총괄하게 된다. 교정도감을 상설화하면서 최충헌(崔忠獻)은 그때까지 찾지 못했던 자신의 적절한 직함도 얻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정도감의 책임자, 곧 교정별감이다(1205년에 그는 꿈에도 그리던 문하시중이 되었으나 낡아빠진 문신의 최고위직이란 이미 그에게 어울리는 직함이 될 수 없었다). 이것을 계기로 교정도감은 무신정권기 내내 사실상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하며, 무신 집권자는 자동으로 교정별감이 되는 전통이 생겼다. 당대 일본사에 비유하면 바쿠후의 쇼군에 ..
틀을 갖춘 군사독재 1196년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했을 때 아마 사람들의 관심은 과연 그가 얼마나 버틸까였을 것이다. 정중부 이래로 30년 남짓 지나는 동안 권좌의 임자는 벌써 다섯 차례나 바뀌었고, 경대승(慶大升)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후임자의 손에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비록 최충헌이 나름대로 소신있게 나오고 있지만 결국에는 본색이 드러날 테고 누군가에 의해 칼로 일어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그러나 최충헌은 난세의 리더답게 잔머리와 냉혹성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봉사 10조를 이용해서 임금을 갈아치운 게 잔꾀라면, 동생인 최충수(崔忠粹, ?~1197)를 죽인 것은 그의 단호함을 보여준다. 자신이 집권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동생(터무니없게도 그들 형제는 이의민의 아들이 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