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06/18 (30)
건빵이랑 놀자
낯부끄러운 공신들② 과연 1604년 7월에 발표된 공신 명단을 보면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그 난리를 겪고서도 정말 정신을 차렸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최고 수훈갑에 해당하는 호성공신(扈聖功臣)은 터무니없게도 적군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 아니라 선조(宣祖)를 의주까지 안전하게 도망치도록 하는 데 노력한 자들이다. 이항복(李恒福, 1556 ~ 1618), 정곤수(鄭崑壽, 1538 ~ 1602), 윤두수(尹斗壽, 1533 ~ 1601) 등 조정의 문신들과 내시들까지 포함해서 무기 한 번 잡아보지 못한 86명이 이 상을 받았다(그나마 유성룡은 종군기라도 썼으니 공신 자격이 있는 편이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직접 참전한 사람들과 명나라에 군사를 요청한 사람들이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선정된다. 이순신, 김시..
낯부끄러운 공신들 현대 사회라면 난리를 겪고도 정권이 바뀌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든 없든 임진왜란(壬辰倭亂) 정도의 재앙이 있었다면 권력자만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도 바뀌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왕조시대라 해도 충분히 그럴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성리학적 세계관에서도 민심은 곧 천심이라 했으니 그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면 온 백성을 도탄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은 조선의 지배층은 깨끗이 반성하고 말끔히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에게는 변명할 근거가 충분하다. 그것은 바로 조선의 권력 구조가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책임을 묻는다면 당연히 임금과 사대부(士大夫)들이 져야 한다. 그러나 임금인 선조(宣祖)는 전쟁이 터지고 한 달도 못 되어 버선발로 도망쳤으면서도..
협상과 참상② 하지만 정유재란(丁酉再亂)은 처음부터 임진왜란(壬辰倭亂)과는 딴판으로 전개되었다. 우선 일본군의 사기가 전만 못했으며, 개전 초부터 명나라 군이 출동했다. 또 1차전에서 무력하기만 했던 조선의 관군도 전열을 가다듬고 적극 대처하여 충청도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순신이 해상에서 버티고 있었다. 결국 1598년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일본군이 철수하는 것으로써 7년간에 걸친 일본의 조선 침략 전쟁은 끝났다. 유혈의 파티가 끝난 뒤 일본과 중국은 그냥 손을 툭툭 털고 가버리면 되었지만 파티장을 제공한 조선은 얘기가 다르다. 우선 오랜 전란으로 한반도 전역이 거의 폐허처럼 변했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삶의 터전을 잃었다. 임진왜란의 ‘..
협상과 참상 두 나라가 서로 영토 다툼을 벌인 것도 아니고, 한쪽은 엄연히 침략자요 다른 쪽은 분명한 피해자다. 그런데도 휴전 협상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일단 조선은 약자로서 굴욕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묘한 것은 휴전 협상 테이블의 좌석 배치다. 정작 전란의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협상 테이블에 조선 대표의 자리는 없다. 전통적으로 조선은 외교권과 군사권을 중국에 일임했던 탓이다. 그래서 협상의 양 주체는 일본의 도요토미와 명나라의 심유경으로 정해졌는데, 여기서 또 다시 묘한 일이 벌어진다. 도요토미가 제시한 강화의 조건이 워낙 터무니없는 것이다. 모두 일곱 개 조항 중에서 감합(勘合) 무역(오늘날의 무역 쿼터제에 해당한다)을 재개하라는 요구는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명나라의 황..
영웅의 등장③ 이순신이 해상을 장악하면서 적의 보급선을 차단한 것은 육지에서도 역전의 계기가 된다. 하지만 군대가 없는데 어떻게 싸웠을까? 유명무실한 관군의 몫을 대신한 것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병대 즉 의병이다. 김천일(金千鎰, 1537 ~ 93), 고경명(高敬命, 1533 ~ 92), 곽재우(郭再祐, 1552 ~ 1617), 조헌(趙憲, 1544 ~ 92), 그리고 승려인 휴정(休靜, 1520 ~ 1604, 서산대사)과 유정(惟政, 1544 ~ 1610, 사명당) 등이 이끄는 조선의 의병들은 절대 열세의 전력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적의 정예병들을 물리쳐 일본군의 북상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제자들 때문에 본의 아니게 당쟁의 근원을 만들었던 조식과 이황은 아마 지하에서 만족했을 것이다. 당시 의병장들..
영웅의 등장② 비보를 들은 선조(宣祖)는 서둘러 식솔들과 일부 중신들만 데리고 한밤중에 도성을 빠져나와 멀리 압록강변 의주까지 한달음으로 도망친다【믿는 도끼였던 신립의 패전 소식은 조정만이 아니라 민심에도 큰 동요를 가져왔다. 당시 백성들은 선조(宣祖)가 도망치려는 것을 알고 국왕의 앞길을 가로막았을 정도다. 그러나 이처럼 지배자가 국민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도망치는 경우는 350년 뒤 그대로 재현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통령 이승만은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노라고 큰소리치다가 개전 사흘 만에 남쪽으로 도망치면서 한강 인도교를 끊어 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한강을 건너던 무수한 국민들이 죽었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밖에도 임진왜란(壬辰倭亂)과 한국전쟁은 닮은 점이 많다】. 도망치는 와중에서 그가 ..
영웅의 등장 임진왜란(壬辰倭亂)은 흔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명나라를 칠 테니 문을 열라는 구실을 내세워 조선을 침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 정복이 단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구실’이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도요토미는 대륙을 공격할 의도를 품고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멀리 인도까지 침략할 구상을 품고 있었다(물론 그는 실패했지만 그의 구상은 20세기에 현실화된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대륙 침략은 이미 일본 열도가 통일되는 시기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셈이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폐쇄적이었던 중화세계와는 달리 일본은 이미 일찍부터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중국과 조선은 조공을 통하지 않은 사무역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15세기 중반에는 포르투갈 상인들과 ..
정세 인식의 차이③ 그제야 조선 정부는 처음으로 긴장한다. 1590년 실로 오랜만에 통신사(通信使)【이 통신사는 1510년 3포 왜란으로 단절된 이후 80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원래 조선 초기부터 조선과 일본의 바쿠후 정권은 정규 사절단을 주고받았는데, 조선 측에서 보낸 것을 통신사라고 불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양국의 자세다. 조선은 함께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지위이므로 일본도 중국의 제후국으로 여겼지만(그래서 ‘교린’의 대상이었다), 일본의 생각은 달랐다. 중국 황제가 책봉하는 것은 바쿠후의 쇼군일 뿐 일본 천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실권 없는 천황이지만 상징적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으니 조선과 달리 일본은 엄연히 중국의 제후국이 아니다. 조선 정부는 일본 측 사절단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
정세 인식의 차이② 사실 전란의 조짐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뚜렷했다. 15세기 중반에 시작된 일본의 센고쿠(戰國) 시대는 100년 이상 지속되다 16세기 후반에 들면서 점차 하극상의 분위기가 가라앉고 다이묘들 간의 서열이 정해졌다. 그 중에서 대권 후보로 떠오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2 ~ 82)는 라이벌들을 차례로 무릎 꿇리고 1568년 드디어 교토에 입성한다. 조선으로 치면 선조(宣祖)가 막 즉위한 시기였으니, 이 무렵에 중앙권력을 장악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당연히 일본의 변화에 주목했어야 했다. 그러나 곧이어 오다가 무로마치 바쿠후를 무너뜨렸을 때도, 또 그 다음에 최대의 라이벌인 다케타 세력을 쳐부수고 1580년에 드디어 사원 세력마저 정복해서 일본 열도의 통일을 눈앞에 두었을 때도 조선..
3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남풍) 정세 인식의 차이 정철(鄭澈)은 한직을 떠돌던 시기에 소일거리 삼아 노래들을 지었지만, 아예 그걸 업으로 삼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런 노래들이니까. 정여립의 사건을 계기로 화려하게 중앙 관직에 컴백했어도 정철은 평안한 만년을 즐길 팔자가 아니다. 그 공로로 그는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한 계급 특진했으나 얼마 안 가 동인의 역공을 받아 침몰하고 만다. 세자 책봉이 연관되어 있기에 건저(建儲, ‘儲’란 세자를 뜻한다) 문제라고 불리는 이 사건 역시 전형적인 말만의 음모다. 선조(宣祖)는 아들이 많으나 불행히도 ‘꼭 필요한 아들’이 없었다.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은 많지만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와의 사이에서는 아들은커녕 ..
당쟁의 사상적 뿌리③ 사상적 당쟁과 정치적 당쟁이 함께 어우러지면 뭔가 사건이 터져나올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1589년 드디어 서인과 동인은 한 차례 크게 맞부딪쳐 이른바 기축옥사(己丑獄事)라는 대형 사건을 일으킨다. 학문적으로는 라이벌이지만 학파로는 동지였던 이이와 성혼은 정파로도 서인에 속하는 동지다. 그런데 그들 두 사람의 주목과 관심 속에서 성장하던 정여립(鄭汝立, 1546 ~ 89)이라는 제자가 묘한 행적을 보인다. 스승인 이이를 배반하고 동인 편으로 붙는가 싶더니 이이가 죽자 서인의 단독 거두가 된 성혼을 거세게 비판한 것이다(그가 이이를 배신한 것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한 탓이었으니, 이래저래 이조전랑은 골치아픈 자리다). 그러나 당시는 서인이 득..
당쟁의 사상적 뿌리② 사실 선조(宣祖) 때 정치적인 당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미 명종(明宗) 때부터 ‘사상적인 당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제법 철학적인 양상을 띠며 진행되었는데, 대표적인 게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1527 ~ 72)이 벌인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쟁이다. 사단이란 인(仁), 의(義), 예(禮), 지(智)로 대표되는 유교적 인간 본성의 네 가지 단서, 즉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를 뜻하며, 칠정이란 인간 본성이 사물을 접했을 때 나타나는 일곱 가지 감정, 즉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慾)을 뜻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꾼다면 사단은 주로 이성적 측면이고 칠정은 감정적 측면인 데, 중요한 것은 양..
당쟁의 사상적 뿌리 심의겸과 김효원의 인물됨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치졸한 당쟁을 시작했다고 해서 그들이 치졸한 인물이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심의겸은 내내 검소하게 생활했고, 특별히 권세를 부리지도 않았으며, 공명정대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고자 했다. 또한 김효원 역시 나중에는 당쟁의 발생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 자중하여 지방관으로 일하다 죽었다. 따라서 당쟁의 책임을 그들 개인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당쟁은 왜 일어났을까? 그것은 사실 조선이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접어든 데 따르는 필연적인 현상이다(같은 시기 명나라에서도 역시 사대부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당쟁이 격화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중종(中宗) 대에 이르러 국왕은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
사대부들의 집안 싸움 국왕마저 선택할 만큼 권력을 확고히 장악했고, 숙적인 훈구파와 외척도 사라진 데다가, 이념도 성리학으로 완전 통일되었다. 그렇다면 사대부(士大夫)들 간의 권력다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제부터 사이좋게 권력을 분담하고 조선을 지배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실제의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다. 다툴 이유가 모두 사라졌는데도 사대부들은 오히려 전보다 더욱 큰 규모로, 더욱 심하게 다투기 시작한다. 외부의 적이 없어졌는데도 그들은 자기들끼리 파당을 만들어 싸운다. 이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당쟁이고, 세련된 용어로 포장하면 붕당정치(朋黨政治)다. 차라리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무장 조직을 동원해서 내전을 벌이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니다. 차라리 ..
동북아 질서의 근본 구조③ 그런데 그 문제가 무려 200년 만인 선조(宣祖) 대에 해결되었다. 1584년 『대명회전』의 개찬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마침내 이성계의 가계가 바로잡힌 것이다. 책이 완성되자 선조는 즉각 유홍을 보내 『대명회전』을 가져오라고 명했고, 드디어 그가 돌아오는 날 참지 못하고 모화관으로 달려나갔다. 두 달 뒤인 1588년 5월 선조는 종묘에 나가 뿌듯한 마음으로 조상들에게 수정된 책을 바치며 제사를 올렸다. 그러나 하필이면 선조의 치세에 200년 묵은 숙제가 풀렸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뭘까? 성리학의 이데올로기가 가장 화려하게 꽃피웠던 선조의 시대였기에, 그리고 그런 조선의 변화를 중국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당시 선조는 벅찬 감격에 못 이겨 이렇게 말했..
동북아 질서의 근본 구조② 이렇게 해서 혼탁했던 ‘윗물’은 어느 정도 맑아졌다. 그럼 조선의 병은 드디어 임자를 만난 걸까? 천만의 말씀이다. 일단 상처는 봉합되고 치료되었으나 문제는 바깥에 난 상처에 있지 않다. 권력을 잡은 사림파 사대부(士大夫)들은 그동안 조선사회를 얼룩지게 만든 혼란의 근원이 무질서에 있다고 판단했다. 무질서를 극복하려면 말할 것도 없이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대내적 질서만 뜻하는 게 아니다. 알다시피 조선은 중국의 명나라를 섬기는 입장, 따라서 근본적인 질서를 세우려면 명의 황제를 정점으로 하고, 그 아래에 제후들이 위치하며(여기에는 물론 조선의 국왕이 포함된다), 또 그 아래에 조선의 사대부들이 자리잡는 일사불란한 수직적 서열 구조를 확립해야만 한다. 이런 성리학..
동북아 질서의 근본 구조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던 윤원형의 권세는 1565년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끝난다. 조카 명종(明宗)은 외삼촌이 섭섭하다 할 만큼 곧바로 그의 관직을 삭탈하고 유배령을 내렸으며, 정치적 생명을 끝낸 윤원형은 얼마 안 가 유배지에서 생물학적인 생명도 끝냈다. 두 양아치가 죽자 그제서야 명종은 인재를 모으고 어지러운 정국을 수습해 보려 애썼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제 와서 새삼 조선을 왕국으로 복원한다는 것도 불가능했지만, 그보다도 2년 뒤인 1567년에 서른셋의 한창 나이로 병에 걸려 파란만장한 삶을 마친 것이다. 권신들도 죽고 왕도 죽으면서 오랜만에 사림파는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우선 그들이 할 일은 당연히 세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는 것이지만,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는 이미 ..
윗물이 흐리면③ 이쯤 되면 고려 말 무신정권기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비록 이제는 권력 주체가 무신이 아니라 문신이지만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세를 휘두르는 무질서와 하극상의 시대라는 점은 똑같다. 그렇다면 무신정권기에 민란이 많았듯 사대부 정권기의 조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도 흐리다. 중앙정치가 높아가자 지방정치도 문란해진다. 부패한 지방 수령들의 학정을 피해 유민들이 늘어나고 그들 중에는 산으로 들어가 화적이 되는 사람도 많아진다【만약 서원이 예전의 향교와 같은 역할을 했다면 부패한 지방관을 탄핵함으로써 중앙정치의 타락이 지방에까지 미치는 것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서원은 성격이 바뀐다. 처음 생길 무렵만 해도 서원은 향교를 대신..
윗물이 흐리면② 1555년 왜구가 다시 대규모로 남해안을 침략해왔을 때 그럭저럭 토벌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개혁의 자취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이른바 을묘왜변(乙卯倭變)이라 부르는데, 굳이 의의를 찾자면 이를 계기로 임시 기구인 비변사가 상설화되었다는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의 전형이지만, 아무튼 그것으로 조선은 최소한의 군사력이나마 보유하게 되었다. 물론 40년 뒤에 쳐들어오는 ‘거대한 왜구’를 상대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윤원형의 권력 기반은 누나인 문정왕후였으니까 1553년 수렴청정이 끝나고 명종(明宗)이 친정에 나서면서는 양아치 세상도 자연히 끝났어야 했다. 아무리 임금을 조카로 두었다 하더라도 성년이 된 임금이 자신의 고유 업무와 권한을 되찾겠다고 나선다면 윤원형이 그..
윗물이 흐리면 양재역에 대자보를 붙인 인물이 지적한 대로 차라리 조선이 곧 망했다면 우리 역사 전체로 볼 때 더 좋았을 것이다. 어떤 왕조, 어떤 체제라 해도 그 무렵의 조선보다는 나았을 테니까. 사실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바뀐 조선에서 만약 반란이 일어나 당시 세계적 추세에도 어울리는(그 무렵 서유럽 각국에서는 절대왕정이 탄생되고 있었다) 강력한 왕권의 왕국이 들어섰다면, 한반도는 사회 진화의 정상적 궤도로 복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최소한 얼마 뒤에 벌어지게 될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그토록 무력하게 대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자보의 필자가 전망한 것과는 달리 조선은 중앙정치가 높아가는 가운데서도 망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한다. 그렇게 생명이 질긴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
양아치 세상② 권신의 시대는 가고 외척의 시대가 되었다. 인종(仁宗)에게 윤임이라는 외삼촌이 있다면 명종(明宗)에게는 윤원형(尹元衡, ? ~ 1565)이라는 외삼촌이 있다. 둘 다 윤씨이기에 나중에 명종실록을 엮은 사관들은 윤임을 대윤(大尹), 윤원형을 소윤(小尹)이라 부르는 기지를 발휘했지만, 큰 윤이나 작은 윤이나 조카를 국왕으로, 누나를 대비로 둔 것을 믿고 권세를 휘두르던 자들이니 사실 구분할 가치도 없다. 굳이 비교하자면 ‘큰 윤’보다는 ‘작은 윤’이 더 음험하고 흉악한 자였던 듯하다. 윤임은 무관 출신으로 왜구와 싸운 경력도 있는 데다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고자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윤원형은 이미 그 전부터 파벌을 이루어 권력다툼이나 일삼는 ‘양아치’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쓴맛을..
2장 병든 조선 양아치 세상 고려의 묘청(妙淸)과 신돈(辛旽), 조선의 조광조(趙光祖) -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실패한 개혁가라는 사실이다. 세 사람 모두 처음에는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국왕에게 중용되었으나 지나치게 개혁을 서둘다가 결국 국왕의 신임을 잃으면서 수구 반대파의 역공에 휘말려 죽음으로 급행료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같은 실패라 해도 고려와 조선의 경우는 서로 다르다. 조광조는 묘청이나 신돈처럼 군사 행동을 일으키거나 실제로 역모를 꾀한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당했으니 말하자면 가장 억울한 케이스다. 영리하고 유능한(?) 음모가만 있으면 ‘말만의 역모’로 반대파의 수많은 인물들을 떼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을 정도로 조선의 병은 깊어졌다. 이런 사건을 사화(士禍)라고 부르니까 뭔가 그..
비중화세계의 도약② 또 한 가지 조선의 사대부들이 어두웠던 것은 북방의 정세다. 일본 열도가 통일을 위한 몸살을 겪고 있던 무렵 만주에서도 역시 통일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원래 만주는 중국의 영향권 바깥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중국의 역대 통일제국들 가운데 만주를 지배한 것은 몽골족의 원나라밖에 없다.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만주는 다시 중국의 직접 지배권에서 벗어났다. 명나라에게 만주는 ‘변방’에도 포함되지 않는 그 바깥이었고, 따라서 정복과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제어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이런 명나라의 대외 정책은 그대로 조선에게로 이어져 조선은 만주의 여러 민족들을 이른바 교린의 대상으로 삼았다(교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재정 지출이 많았음은 앞서 본 바 있다). 당시 만주..
비중화세계의 도약 사실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은 시대적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그가 꿈꾼 성리학 이념의 사대부(士大夫) 국가가 최선의 선택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라도 조선은 근본적으로 개혁되어야 했다. 그 이유는 바로 바깥에 있다. 이 세상에 조선이라는 나라 하나만 존재한다면 개혁의 범위와 스피드가 전혀 중요하지 않겠으나, 한반도를 둘러싼 바깥 세상이 크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만이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혹시 조광조(趙光祖)는 그러한 시대적 조류를 인식한 탓에 개혁에서 조급증을 보인 게 아니었을까? 우선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는 종교개혁의 바람이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조선이 건국 준비에 여념이 없던 14세기 말부터 유럽 사회는 후대에 ..
시대를 앞서간 대가② 그들의 교활한 안테나에 중종(中宗)의 태도가 변했다는 사실이 포착된다. 조광조(趙光祖)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사실 중종은 최근 들어 개혁파의 급진성에 신물이나 있는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조광조는 중종에게까지 수기치인(修己治人, 수신과 치인)의 도리를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도(王道) 정치를 내세우는 성리학적 이념에 따르면 군주도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이렇게 조선의 개혁적 사대부(士大夫)들이 국왕에게까지 군주의 도리를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 황제의 존재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처음부터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해 왔고(『조선왕조실록』은 전체가 중국 황제의 연호에 따라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2층 건물조차 짓지 않을 만큼 스스로 알아서 명나라의 속국으로 처신해 ..
시대를 앞서간 대가 현량과(賢良科)를 관철시킨 것만 해도 괜찮았다. 비록 반발은 컸으나 기본 취지가 좋은 데다 전 사회가 개혁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어 반대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못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간의 성과에 지나치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탓일까? 조광조(趙光祖)는 내친 김에 코너에 몰린훈구파에게 치명타를 가했는데, 결국 그 펀치는 자신에게 돌아오고 만다. 현량과를 통해 자파 인물들을 많이 등용한 데 자신감을 가진 조광조는 1519년 10월 드디어 정국 공신들에 대한 숙청 작업에 나섰다. 아마 그 자신도 개혁의 롱런과 완성을 위해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고비라 여겼겠지만, 최종 타깃이 된 공신 세력의 입장은 그보다 훨씬 비장할 수밖에 없다. 개혁 세력은 칼자루를 쥐었고 수구 세력은 칼날을 움켜..
꿈과 현실 사이③ 그러나 이번 개혁의 범위는 국가 이념을 바로잡는 데만 국한되지 않고 일상생활의 영역까지 대상으로 삼고 있다. 유교적 관념과 예식, 생활양식이 조선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나, 고려 말에 들어온 『주자가례』의 예법이 일반 백성들의 가정에서까지 생활상의 원칙으로 지켜지게 된 것은 모두 이때부터다(이를테면 유교식 관혼상제라든가 과부의 재가가 금지된 것 등이 그런 예다). 한마디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선 사회에 관한 인상은 바로 그 무렵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이 정치와 행정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까지 겨냥하고 있음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바로 향약(鄕約)의 보급이다. 1517년 조광조는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조선 8도에 시행하게 함으로써 개혁의 바람을..
꿈과 현실 사이②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조광조(趙光祖)다. 그는 논쟁의 초점인 단경왕후의 복위 문제에서 벗어나 그보다 훨씬 중요한 쟁점을 제기한다. 그것은 바로 대사간의 기능에 관한 지적이다. 무릇 대사간이라면 조정에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교통정리를 담당해야 하는데, 이행(李荇)이 마음대로 상소자들을 유배보낸 것은 언로를 막은 큰 잘못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현대의 언론관에도 전혀 뒤지지 않는 탁월하고 논리적인 그의 지적에는 이행 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 그의 입장이 공신들의 반발을 부른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당장 그보다 중요한 것은 중종(中宗)의 신임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조광조(趙光祖)가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마당을 얻었다는 뜻이다【이 장면..
꿈과 현실 사이 연산군(燕山君)이 일으킨 무오사화(戊午士禍)는 훈구파의 사주를 받아 사림파를 박살낸 사건이었으나, 대형 사건들이 으레 그렇듯이 예상하지 않았던 엉뚱한 결과도 낳았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림파의 새로운 리더를 길러낸 것이다. 열일곱 살 때 지방의 관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평안도 희천으로 간 소년 조광조(趙光祖)는 거기서 뜻하지 않은 기연을 맺게 된다. 때마침 희천에는 무오사화로 유배된 김굉필(金宏弼)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김굉필은 그 이듬해에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겼으나 1년 동안 조광조(趙光祖)가 그에게서 배운 것은 적지 않았다. 학문과 경륜만이 아니라 장차 미래의 조선을 이끌게 될 사림파의 학맥을 얻었으니까. 친구들에게서 ‘광인(狂人)’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학문에 전념했던 조..
1장 개혁과 수구의 공방전 개혁의 조건 ‘반정(反正)’이라는 이름의 쿠데타로 즉위한 왕답게 중종의 치세는 대대적인 개혁의 바람으로 시작된다. 태종과 세조가 그랬듯이 원래 정변으로 즉위한 왕은 개혁의 기치를 높이 치켜세우게 마련이다. 그러나 중종의 경우는 좀 다르다. 국왕의 ‘임명권자’가 사대부(士大夫)였던 만큼 중종이 개혁의 주체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종의 옥새가 찍힌 각종 개혁 조치는 실상 사대부가 입안하고 시행한 것이었다(게다가 중종은 형과는 달리 성품이 유약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니 사대부의 입맛에 꼭 맞는 군주다). 연산군(燕山君)의 전제 왕정을 타도한 사대부가 꿈꾸는 조선은 국왕이 상징적 존재로 군림하면서 사대부가 국정의 모든 부문을 관장하는 나라다. 그럴듯한 용어로 윤색하자면 사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