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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조선은 마침내 왕국에서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바뀌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사대부들은 권좌에 오르자마자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 새로운 권력다툼을 벌인다. 그들이 진흙탕 싸움에 몰두해 있는 동안 비중화세계는 거대한 도약을 시작한다. 일본과 여진이 차례로 중화세계에 도전함으로써 마침내 중화의 본산인 명나라가 멸망한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은 희한하게도 그것을 중화의 중심이 조선으로 옮겨온 거라고 판단한다.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사대부의 승리② 물론 연산군(燕山君)이 결함투성이의 폭군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군주가 폭군일 경우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도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폭군의 대명사라 할 옛 로마 제국의 황제 네로의 경우에서 보듯이(『종횡무진 서양사』, 「뿌리 2」 4장 참조), 또 숱한 권력다툼과 암살로 황궁이 조용할 날이 없었던 비잔티움 제국 황제들의 경우에서 보듯이(『종횡무진 동로마사』 참조), 중국 고대의 유명한 폭군인 은나라 주왕의 경우에서 보듯이, 폭군이 타도되면 반란 세력의 리더가 새 왕이 되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왕조 자체가 바뀌거나, 아니면 적어도 왕계의 혈통이 바뀌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점에서 조선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아주 색다르다. 쿠데타를 ..
사대부의 승리 어쨌든간에 국왕의 총체적 공격을 받은 사대부(士大夫)는 일단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덕분에 훈구와 사림의 수뇌부가 몰락한 것은 오히려 사대부 세력이 전열을 새로 정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친 뒤 2년이 지난 1506년 연산군(燕山君)에게 미움을 받아 이조참판과 경기도 관찰사에서 좌천된 성희안(成希顔, 1461~1513)과 박원종(朴元宗, 1467~1510)은 사대부의 기득권층이 물갈이된 틈을 타서 새로운 리더가 되고자 한다. 마침 성희안은 문신이고 박원종은 무신이니 역할 분담도 좋다. 이들은 화를 면한 조정의 대신들과 지방의 유배자들을 움직여 세를 불리고 무사들마저 끌어모아 정권 타도 계획을 구체화한다(연산군은 유배자들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걱정에서 그..
연속되는 사화②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훈구파와 사림파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숙청당했다는 사실이다. 사림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정여창(그는 사화士禍가 일어나기 불과 몇 개월 전에 죽었다)과 현실적 지주인 김굉필까지 화를 입은 데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연산군(燕山君)의 의도는 뭘까? 두 차례나 대규모로 사대부(士大夫) 숙청을 단행한 그의 난폭한 행위에서 이상성격에 기인하는 부분을 빼면 뭐가 남을까? 일단 그는 생모의 사건이 아버지 성종의 의도와 무관하게 순전히 사대부들의 책동으로 빚어진 것이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물론 후궁들과 인수대비도 관여했지만 그들의 배후에는 왕실 내의 알력을 이용해서 왕실을 조종하려 한 사대부들의 입김이 있었다. 따라서 연산군은 사대부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모..
연속되는 사화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연산군(燕山君)의 가슴 속에 품은 폭탄을 터뜨린 게 아니라 뇌관만 겨우 건드렸을 뿐이다. 그에게는 아직 풀지 못한 한이 있다. 그것은 바로 비명에 죽어간 그의 생모와 관련된 한이다. 포악하고 무도한 이상성격에다 출생의 비밀이 어우러졌다. 전형적인 3류 드라마의 주제다. 불행히도 그 드라마가 연극 무대가 아닌 현실의 무대에서 상연되면서 조선은 3류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무오사화를 통해 사대부(士大夫)들은 중요한 신무기를 얻었다. 모함만으로도 반대파를 숙청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구체적인 역모의 증거 같은 것도 필요없고 그저 세 치 혀만 잘 놀리면 된다. 그런 다음에는, 성질은 더러워도 멍청하기 그지없는 꼭두각시 연산군이 다 알아서 처리해줄 것이다. 그..
폭탄을 품은 왕④ 물론 사건이 이렇게 비화된 데는 유자광이라는 모리배의 역할이 컸으나, 이 사건을 단순히 개인들 간의 불화와 원한이 빚어낸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또한 역사가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훈구파와 사림파의 파워게임으로만 보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서 남이의 사건에서 보았듯이 다시 ‘말만의 역모’가 엄청난 피바람을 불렀다는 점이다.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독특한 현상은 조선식 유교 정치의 특이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유교 정치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설사 실력에서 앞선다 해도 명분에서 뒤지면 권력다툼에서 패배하게 된다. 성종의 치세에 사림파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왕의 지원도 있었지만 온갖 수단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급..
폭탄을 품은 왕③ 성종 치세에 사림파가 훈구파에 맞설 만큼 성장하자 불안해진 것은 훈구대신들이다. 특히 성종의 큰 존경을 받았던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들인 김굉필(金宏弼,1454 ~ 1504), 정여창(鄭汝昌, 1450 ~ 1504), 김일손(金馹孫, 1464 ~ 98) 등 이른바 영남학파 학자-관료들이 학문을 숭상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스승의 명성에 편승해서 사림파의 핵심으로 떠오르자 훈구파의 타깃은 자연히 김종직 일파에게로 향한다. 남이의 사건에서 보듯이 원래 꼬투리만 잡으면 실체가 없는 사건도 훌륭하게 역모로 엮어내는 게 훈구파의 특기가 아니던가? 과연 남이의 사건에서 ‘말만의 역모’로써 신흥 반대파를 쉽게 제거했던 유자광은 여기서도 크게 한 건 올린다. 사실 유자광은 개인적으로도 사림파를 물고 늘어..
폭탄을 품은 왕② 문제의 발단은 성종 때인 1476년 성종의 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가 죽으면서부터다(한명회에게 딸이 더 있었더라면 즉각 후임 왕비로 들였으리라). 그녀는 아들은커녕 딸도 남기지 못하고 열여덟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성종이 친정을 시작한 첫해였으니 후사도 후사지만 왕비 자리를 공석으로 남길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숙의(淑儀, 후궁의 하나)였던 윤씨(원래 왕의 이름은 기록에 남지만 왕비는 대개 이름 대신 시호만 전해지는데, 윤씨의 경우에는 폐위되었기 때문에 시호도 받지 못했다)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과연 그녀는 바로 그 해에 아들(연산군)을 낳아 성종을 흡족케 한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성종은 유달리 여색을 밝혔다. 윤비는 유달리 질투심이 강한 여자였으니 그냥 넘어..
3장 군주 길들이기 폭탄을 품은 왕 당연한 말이지만 원래 강한 왕권은 강한 왕의 것이다. 그런데 대개 강한 왕이란 새 왕조를 세우거나 정변으로 집권한 왕인 경우가 많다. 건국자나 성공한 쿠데타의 리더는 그 인물됨과 상관없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공인받을 수 있으며, 이는 자연히 강력한 왕권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본 조선 초기의 역사에서는 태종과 세조가 그런 임금이었다. 그 뒤를 이은 세종과 성종은 사실 전 왕들이 다져놓은 강력한 왕권 덕분에 왕권과 신권, 즉 국왕과 사대부(士大夫)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안정과 번영의 치세를 누릴 수 있었다. 이렇듯 왕권이 강하면 사대부는 자연히 국왕에게 협조하면서 관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왕권이라도 몇 대에 걸쳐 약발이 지속되기는 어렵다...
사대부의 분화③ 중앙에서는 성종의 간접 지원으로, 또 지방에서는 젊은 유림의 활약으로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여기에도 훈구파의 한명회(韓明澮)에 못지 않은 보스가 등장하게 된다. 한명회가 지위와 권력과 혼맥으로 보스의 자리를 꿰어찼다면 사림파의 보스는 재야 세력답게 학문과 실력으로 당당히 주변 인물들에게서 보스라는 인정을 받는다. 그는 바로 김종직(金宗直, 1431 ~ 92)이라는 학자다. 원래 그의 가문은 고려 말 신진사대부의 거두였던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 1353 ~ 1419)를 본받는 것을 전통으로 삼았으니 성리학적 이념에 대해서는 당연히 순도 높은 ‘진골’이다【여기서 눈여겨볼 게 하나 있다. 흔히 고려 말 고려 왕조에 절개를 지켰던 세 충신을 삼은(三隱)이라 부른다. 이색(李穡), 정몽주, ..
사대부의 분화② ‘이대로 영원히!’라는 모토를 실현하기 위한 훈구파의 노력은 눈물 겨울 정도다. 우선 그들은 왕실과 각종 혼맥을 맺어 제도외적인 면에서도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는다. 또한 중앙정부만 손에 넣는 데 만족하지 않고 지방에까지 손을 뻗친다. 사실 중앙에서는 권력을 얻을 뿐이고 정작 권력에서 나오는 단물'은 지방을 장악해야만 빨아먹을 수 있다. 그래서 훈구파의 촉각은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경재소(京在所)와 유향소(留鄕所)에 집중된다【경재소란 지방 관청의 한양 연락소인데, 쉽게 말하면 한양에 파견된 각 지방의 유력자가 머물고 있는 거처다. 또한 유향소란 지방 유지들이 모인 곳으로서,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 수령을 보좌하는 역할을 한다. 성격과 기능이 그러한 만큼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경재소와 유..
사대부의 분화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변증법의 법칙만이 아니다. 사대부(士大夫) 세력도 점점 수가 늘면서 더 이상 동질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더욱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리고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공신들이 대거 인플레되는 탓에 이제 번듯한 사대부라면 누구나 공신 한 명쯤은 조상으로 두고 있을 정도다(공신의 부와 지위는 세습이 허용된다는 점을 상기하라), 특히 예종(睿宗)에 이어 성종에게도 딸을 시집 보내 2대 연속해서 임금의 장인이 된 한명회(韓明澮)의 기세는 자못 하늘을 찌를 듯하다【예종의 비는 장순왕후이고 성종의 비는 공혜왕후인데, 둘 다 한명회(韓明澮)의 딸이다. 그런데 예종과 성종은 삼촌-조카 사이니까 성종은 숙모의 동생을 아내로 맞아들인 격이다. 더구나 두 여자는 모두 후궁..
세종의 닮은꼴③ 또한 북변을 침략하는 여진을 내몰기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까지 북진을 시도한 것도 세종과의 닮은꼴이다. 이미 만주 지역의 판도도 여러 민족으로 분화돼 있어 여진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아우르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건주여진(建州女眞) 또는 야인(野人)이라 불렀다(建州란 중국 측에서 랴오둥과 만주를 가리키던 이름인데, 정작 중국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인데도 마치 중국의 주현인 것처럼 불렀으니 대단한 중국인들이다). 6진과 4군으로 압박전술을 가한 세종과 달리 세조는 4군을 철폐하고 여진에 대해 회유책을 썼지만, 세종을 추종한 성종이 어떻게 나갈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이미 이시애의 난이 진압된 직후 명나라의 제안으로 양국이 합동 토벌작전을 전개한 바 있었으나(어유소가 강순처럼 남이의..
세종의 닮은꼴② 이래저래 성종은 할머니가 고마웠을 것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왕위를 준 데다가 토지제도의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더욱이 할머니가 섭정을 맡은 기간 동안 그는 왕이 되기 위한 ‘속성 특별과외’를 통해 세종에 버금가는 문화군주로서의 자질을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친정을 시작하면서 그의 자질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우선 세조 때 중지된 경연을 부활시켜 학자들과의 토론을 즐기며 실력을 과시한 그는 도서관에 불과했던 홍문관(弘文館)에 집현전의 직제를 도입해 본격적인 정책 토론기관으로 탈바꿈시키는 한편, 나아가 중앙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를 적극적으로 육성해 유교 정치의 화려한 부활을 부르짖는다. 불안한 정국의 안정을 타개하기 위해서, 또 비정상적으로 즉위한 데 따르는 왕권을 위해서도 유교 이념은 만..
세종의 닮은꼴 예종(睿宗)은 남이의 기묘한 반란을 진압한 것을 거의 유일한 치적으로 남기고 재위 1년을 겨우 넘긴 1469년 11월에 병으로 죽었다. 그토록 강력했던 아버지 시절의 왕권을 크게 약화시킨 게 또 다른 ‘치적’이라 할까? 어차피 그가 살아 있을 때도 실제 국정은 어머니가 맡았으니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도 그녀의 몫이다. 예종의 아들이 너무 어려 즉위할 수 없다고 본 정희왕후는 예종의 형인 덕종의 열세 살짜리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데, 모두 자신의 아들이고 손자이니 그녀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예종의 조카가 왕위를 이은 셈인데, 아직도 부자 승계의 원칙이 확고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이렇게 해서 조선의 9대 왕인 성종(成宗, 1457~94, 재위 1469~94)이 즉위했다. 스무 살이..
특이한 ‘반란’② 유자광도 역시 뛰어난 무예와 비위를 잘 맞추는 재주로 세조의 사랑을 듬뿍 받은 처지였으나 그밖에도 그에게는 남이에게 없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잔머리와 눈치가 바로 그것이다. 1468년 10월 그는 타고난 재능을 십분 발휘한다. 궁성에서 남이와 함께 당직을 서던 중에 들었던 남이의 속내를 예종에게 고한 것이다. 물론 남이의 입장에서는 세조가 죽고 난 뒤 흔들리는 시국을 논한 것이겠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정치적 견해로 탈바꿈될 수 있다. 유자광의 전략은 멋지게 성공한다. 남이는 곧 체포되었고 조직을 대라는 추궁과 고문 끝에 엉뚱하게도 강순마저 끌어들여 함께 처형된다. 그 공로로 한명회(韓明澮), 신숙주, 노사신 등이 다시 공신으로 추대되었으며, 유자광은 공신의 지위와 더불어 ..
2장 진화하는 사대부 특이한 ‘반란’ 아무리 3차 건국자로서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지만 세조에게는 단종(端宗)의 폐위와 살해, 금성대군을 위시한 형제들 간의 분쟁, 소장파 사대부(士大夫)들의 거센 도전 등 일련의 사건들이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었다. 그가 소수의 측근들만 믿고 중용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덕분에 한명회(韓明澮)를 비롯해서 정인지, 권남, 신숙주, 정창손 등 일찍이 수양대군 시절부터 세조를 따랐던 3차 건국의 공신들은 막강한 정치적 권세와 막대한 경제적 부를 누렸다【특히 한명회는 세조의 심복을 넘어 수족과 같은 사랑을 받았다. 심지어 세조는 그를 나의 장량 이라고 부르면서 끔찍이 아꼈는데, 세조 역시 자신이 조선의 새 건국자임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정도전이 조선의 장량이라고 자칭한 것을..
3차 건국③ 그런 노력 덕분에 세조는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유교 이념의 농도가 가장 옅은 왕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그만큼 강력한 왕권을 지닌 왕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 왕권의 행정적인 표현은 중앙집권과 문치주의의 강화로 나타난다(송 태조 조광윤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모름지기 강력한 전제군주는 그 두 가지를 정국 안정의 주무기로 삼게 마련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방 군정의 총책임자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중앙의 문신으로 임명한 것이다. 병마절도사는 수신(帥臣)이나 주장(主將)이라는 별칭에서 보듯이 유사시에는 지역의 군사권을 완전히 장악해서 작전에 임할 수 있는 직책으로서 원래는 중앙에서 임명하는 것이었으나, 세조는 무신 대신 문신을 기용한 점이 다르다. 당연히 지방의 토호 세력은 반발한다..
3차 건국② 1466년에 시행된 직전법(職田法)도 세조의 3차 건국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다. 앞서 보았듯이 태종과 세종 대에 이르러 이미 과전법(科田法)은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근본적인 문제는 과전으로 지급된 토지가 세습되는 데 있다. 원래 명목이야 만들기 나름이므로, 현직 관리가 죽어도 그에게 주어진 과전은 수신전(守信田, 관리의 과부에게 수절을 지키라고 주는 토지), 휼양전(恤養田, 관리의 어린 자식들을 구호하기 위한 토지) 등 각종 명목으로 유가족에게 자연스럽게 세습된다. 게다가 관직이 없는 양반, 즉 산관(散官)에게도 과전이 지급되니 가뜩이나 부족한 토지는 더욱 부족해진다. 그래서 세조는 현직 관리들에게만 과전을 지급한다는 원칙을 다시금 강조하는 데, 그게 바로 직전..
3차 건국 성삼문은 아마 세조에 대해서보다 그 측근들에 대해 더 큰 분노를 품었던 듯하다. 김질에게도 그는 한명회(韓明澮) 같은 무리를 처단해야 하며 신숙주는 오랜 친구지만 죽어 마땅하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가 그렇듯 분노한 이유는 명백하다. 불사이군(不事二君), 세조 앞에서도 당당히 밝혔듯이 신하의 몸으로 두 임금을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임금을 기꺼이 섬기는 한명회나 신숙주가 오히려 세조보다 더 미웠을 것이다. 물론 그의 충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의문점이 남는다. 어쨌거나 세조는 현직 왕이므로 그의 거사는 반역이요 쿠데타다. 그렇다면 단종(端宗) 복위라는 그의 대의명분은 과연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 걸까? 사실 조선 건국 이후 세조까지 일곱 임금 가운데 정상적으로, 즉 맏..
사육신의 허와 실④ 애초부터 조직력이 부족했던 쿠데타 세력은 좋은 기회가 무산되자 급속히 무너진다. 게다가 성삼문은 조급했거나, 아니면 지휘자감이 못 되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결국 그의 경솔한 행동으로 그들 세력이 세조에게 노출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거사가 시도해 보지도 못하고 실패로 끝난 것은 오히려 기회주의자들에게 노선을 정해준 셈이 된다. 그 중 하나가 정창손의 사위인 김질(金礩, 1422 ~ 78)이다. 6월 2일 그는 장인과 함께 세조에게 달려가서 전에 들은 성삼문의 음모를 털어놓는다. 원래 성삼문은 세조의 인맥인 정창손을 끌어들이려는 목적으로 김질을 회유하려 했으나, 무릇 정치 세력의 리더라면 확실히 자기 편으로 만들지 못할 인물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짓은 피했어야 하지 않을까? 세조의 고문을 ..
사육신의 허와 실③ 그것으로 수양은 모든 게 끝났다고 믿었다. 비록 삼촌이 조카의 왕위를 물려받은 격이라서 적법한 왕위 승계는 아니지만, 어차피 개국 초부터 장자 승계로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더구나 얼마 전에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선례도 있었으니 그리 허물이 되지는 않으리라고 여겼을 법하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지도 않은 데서 터진다. 집현전 학자 출신의 소장파 관료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 2년 전 계유정난으로 수양이 실권을 차지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중립을 취했다. 왕의 삼촌이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한명회처럼 출신도 모르는 모리배가 권세를 휘두르는 꼴이 결코 보기 좋을 리는 없지만(한명회는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고 문음, 즉 음서로 관직에 올랐다), 그래도 그들은 안평대군과 김종서 일당이..
사육신의 허와 실② 실권을 손에 쥔 수양대군의 다음 조치는 누가 봐도 편파적이라 할 만큼 분명하고 단호했다. 김종서와 황보인은 현장에서 제거했으나 동생마저 그렇게 다루면 남 보기에 좋지 않다. 그래서 그는 안평대군에게 각종 죄목을 붙여 강화도로 유배 보낸다. 당시의 유배 조치란 곧 분위기를 봐서 죽이겠다는 뜻, 과연 안평은 얼마 못 가서 사약을 마시고 죽는다. 그러나 사약을 받은 안평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왕위를 노리고 있었고 국정을 제 마음대로 주물렀다는 죄목까지는 각오했지만, 그가 숙모를 비롯하여 여염집 여자들과 간통 행각을 벌이고 다녔다는 대목에서는 그저 아연실색할 따름이다(안평의 삼촌, 즉 세종의 동생인 성녕대군은 열네 살 때 홍역으로 죽었는데, 수양의 고발에 ..
사육신의 허와 실 단종(端宗)이 즉위하면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알력이 노골화되자 조정 대신들도 앞다투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어느 줄이 더 길까? 말할 것도 없이 안평의 줄이다. 황보인과 김종서 같은 원로들만이 아니라 집현전 출신의 젊은 학자-관료【여기서 ‘학자-관료’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조선의 경우 학자와 관료의 구분이 없거나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유학의 본성 자체가 국가 경영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인 데다가 조선은 처음부터 유교왕국을 표방하고 나섰으므로 학자와 관료는 이념적으로나 신분적으로 거의 일치한다. 물론 관직에 진출하지 않은 학자들도 있었고, 또 거꾸로 학문적 소양이 깊지 못해 학자라고 불릴 자격에 미달하는 관료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소수였고 정치 엘리트가 되지 못했기에 큰 의미가 없다. ..
3차 왕자의 난③ 하지만 기선을 제압당한 수양대군의 자세는 다르다. 아마 그에게는, 호방한 성격에다 학문은 물론이고 시와 글씨와 그림에 능해 일찍이 삼절(三絶)이라 불리면서 문인들과 폭넓게 교류하는 동생에 대한 콤플렉스가 적지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 권력마저 동생에게 빼앗기니 수양대군은 참담한 심정이다. 여러 모로 그에게는 안평대군처럼 막후의 실력자를 택하기보다 왕위 자체를 노릴 만한 동기가 충분하다. 그래서 그는 동생이 미처 신경쓰지 못한 분야, 그러나 조선의 대권후보라면 가장 중시해야 할 분야를 개척한다. 그것은 바로 명나라와의 관계다. 마침 명 황실에서 황태자를 새로 책봉하자 수양은 이게 역전의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타진해 본다. 중국의 황태자가 책봉되면 조선에서는 사은사(謝恩使), 즉 ..
3차 왕자의 난② 그래도 조카의 왕위에 흑심을 품은 삼촌이 없었다면, 혹은 그 삼촌이 하나뿐이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 왕에게는 삼촌이 무려 열일곱 명이나 있었을뿐더러 (세종은 여섯 아내에게서 열여덟 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 중에서도 첫째와 둘째 삼촌, 그러니까 문종의 바로 아래 동생들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 ~ 53)은 조카의 왕위 승계를 인정하는 대신 실권을 장악하려 했다. 말하자면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상 단종의 섭정을 자처한 셈인데,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삼촌이 섭정을 맡는 것은 오히려 미덕이니까 거기까지는 좋다(원래는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정식 섭정을 맡아야 하겠지만 그녀는 단종을 낳고 사흘 만에 죽었다). 조카가 자랄 때까지 서로 사이좋게 권력과..
1장 왕권의 승리 3차 왕자의 난 세종의 기대와는 달리 ‘조선의 영락제(永樂帝)’는 그의 아버지 태종이 아니라 아들인 수양대군이었다. 태종은 그래도 왕위를 놓고 형제들 간에 다툼을 벌인 것이지만, 수양대군은 바로 50년 전 명나라 영락제가 그랬듯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조카를 죽인 비정한 삼촌이 된다. 게다.가 그런 그의 행위는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후대에 더욱 오명을 떨친다. 박팽년(朴彭年, 1417~56), 성삼문, 이개(李塏, 1417~56), 하위지(河緯地, 1412~56), 유성원(柳誠源, ?~1456), 유응부(兪應孚, ?~1456) 등 여섯 명의 충신이 죽음으로써 단종(端宗)에 대한 충의를 지켰다는 데서 나온 사육신이라는 이름은 지금까지도 불의에 항거한 절개의 상징으로 받들어지지만..
8부 왕국의 시대 이미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는 단순한 관료의 선을 넘어섰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도전은 일단 실패로 끝나고, 조선은 다시 왕국화의 행정을 밟는다. 문제는 세조의 강력한 지배 전략으로 위축된 가운데서도 권력을 향한 사대부들의 야망은 결코 사그러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들은 먼저 자기들끼리의 세력 다툼을 통해 힘을 결집한 다음 사림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왕권 타도 작업에 들어간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세종이 뿌린 악의 씨② 세종으로서는 필경 아버지 태종과 영락제(永樂帝)가 서로 닮은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 왕권이 안정되었고 나라가 기틀을 잡았으니, 두 번 다시 명 황실과 조선 왕실을 얼룩지게 만든 ‘왕자의 난’ 같은 사건은 없으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영락제의 치세가 끝난 다음 명나라는 그의 아들들이 순탄하게 제위를 이어가면서 번영기를 맞는다(비록 명나라의 번영기는 역대 어느 제국보다도 짧았지만), 아마 세종은 조선도 그런 길을 걸으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즉위 초까지만 해도 그는 태종이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육조 직속 체제를 강화한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면서 각종 프로젝트의 시동을 걸었지만, 대내외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그의 마음도 한결 느긋해..
세종이 뿌린 악의 씨 역사와 법, 인문학과 과학 등 각 분야의 학문을 발전시키고, 독자적인 한글을 만들고, 북변의 영토까지 개척한 세종의 활약은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세종은 조선이라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물론 통신장비(대외 관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갖추어 명실상부한 유교왕국의 모범 답안을 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세종의 개인적 능력과 집현전 학자들의 성실한 노력이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성과를 순전히 주체 역량의 공로로만 돌릴 수는 없다. 무엇보다 세종은 좋은 무대를 만났기에 좋은 공연을 남길 수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개국공신 사대부들이 물러나고 국왕의 직속 사대부들이 성장하는 세대교체기였기에 그는 처음부터 왕권에 대한 위협을 전혀 받지 않을 수 있..
유교왕국의 모범 답안③ 멀게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래로, 가깝게는 고려 중기 여진의 금나라와 사대관계를 맺은 이래로 한반도 북부는 사실상 한반도 왕조들의 관할 구역이 아니었다. 급기야 몽골 지배기에는 동녕부(東寧府)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설치되면서 공식적으로 원나라의 영토가 되기도 했으니 조선시대에 이르면 말할 것도 없다. 비록 몽골이 물러갔어도 이 지역은 만주와 함께 여전히 여진의 텃밭이었다. 한 가지 다행스런 사실은 금나라가 무너진 이후 여진의 여러 부족들 간에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개국 초기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일은 있었으나, 사실상 명나라도 이 지역을 영토로 거느릴 입장은 못 되었고 또 그럴 의사도 없었으니 이곳은 정치적 공백..
유교왕국의 모범 답안② 1432년 세종은 장영실(蔣英實)을 시켜서 천문 관측기구인 간의(簡儀)와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게 하고, 2년 뒤에는 역시 장영실에게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와 물을 이용한 자동시보장치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게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444년에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과 『칠정산외편』이라는 두 권의 역서(曆書)를 편찬한 사실이다. 이 역서들은 비록 명나라의 역법인 대통력(大統曆)을 참조한 것이지만 방법론만 차용했을 뿐 그 내용은 조선의 실정에 맞게 대폭 수정한 것이다(이를테면 일식과 월식, 일출과 일몰 시간의 기준을 한양으로 정하고 있다). 한반도 역사상 천체를 직접 관측하고 독자적인 역서를 발간한 건 이번이 최초다. 그런데 천체의 운행을 살피고 역법을 계..
유교왕국의 모범 답안 세종이 굳이 훈민정음을 만들어내려 했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독자적인 문자가 없어서 불편한 적이 한두 해도 아닌데 하필 그 무렵에 한글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공식적인 이유는 ‘백성에게 바른 소리를 가르친다’는 훈민정음의 뜻 그대로다. 『훈민정음』의 유명한 첫 구절을 보면 한글을 만든 분명한 취지가 밝혀져 있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한자)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편하게 쓰도록 하리라[나랏〮말〯ᄊᆞ미〮 中듀ᇰ國귁〮에〮달아〮 文문字ᄍᆞᆼ〮와〮로〮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 이〮런젼ᄎᆞ〮로〮어..
문자의 창조② 하지만 만들어 놓고도 쓰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갓 태어난 훈민정음의 시운전은 집현전 학자들 중에서도 고참에 속하는 권제(權踶, 1387 ~ 1445)와 정인지, 안지(安止, 1377 ~ 1464)가 맡았다. 14세기에 출생한 노장파에 어울리게 1445년에 그들이 지은 최초의 한글 작품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이성계의 조상들에서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조선 왕실의 인물들을 칭송한 시가다. 이듬해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首陽大君, 1417 ~ 68)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며 부처의 일생을 묘사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었고, 여기에 세종은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직접 지어 화답한다. 이렇게 왕실과 사대부의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한글은 그 해 말..
문자의 창조 문화군주 세종의 풍모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업적은 바로 한글을 창제한 것이다. 숱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오늘날 화폐의 주인공이 되는 영예까지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1446년 9월 세종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발표하면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우리 문자 시대’의 문을 연다. 물론 한글이 없었을 때는 한자를 썼다. 또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고유의 말은 한자의 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吏讀)를 썼다(향가에서처럼 순수하게 한자의 음만을 빌려 문장 전체를 표기한 것을 향찰鄕札이라고 부르지만 이두와 같은 원리이므로 이두에 포함시키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말은 전통적인 우리말을 쓰되 글은 중국의 한자를 가져다 쓴 셈이니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알다시피 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