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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화려한 겉과 곪아가는 속 이렇듯 강력하고 대내외적으로 안정된 기틀을 갖추었다면 한 제국은 오랫동안 존속하고 발전해야 마땅할 것이다. 실상 한은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존속한 나라다. 그러나 한은 무제의 지배 시절이 전성기인 동시에 퇴조의 시작이었다. 막강한 제국이 왜 일찌감치 퇴조기에 접어들었을까? 초기의 권력기관은 앞에서 말한 3공 가운데 우두머리인 승상이 관할하는 승상부(丞相府)였다. 그러나 무제는 전형적인 전제군주인데다 대외 정복 사업이라는 국가의 생존이 달린 명제가 시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승상부는 위축되었고 모든 것이 황제의 전권에 맡겨졌다. 하지만 거대한 통일 제국을 황제 혼자서 일일이 관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제는 실무를 담당할 행정 기구를 측근에 두..
흉노 정벌의 도미노② 물론 당시 한 무제는 자신이 한 일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에게는 그저 난적인 흉노를 물리쳤다는 게 중요했다. 그 뒤에도 무제는 팽창정책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여세를 몰아 남쪽으로는 월남을 복속시키고 동북 방면에서는 한반도를 공략했다. 당시 한반도와 요동 일대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이 터를 잡고 있었다. 한에 대해 강경책으로 대응한 위만조선의 우거왕(右渠王)은 적을 맞아 한껏 저항했지만 흉노마저 제압한 한의 군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위만조선은 한에 의해 멸망하고 그 지역에는 네 개의 군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낙랑(樂浪)ㆍ임둔(臨屯)ㆍ진번(眞蕃)ㆍ현도(玄菟)의 한4군(漢四郡)이다【한4군은 군이라는 이름만 보면 중국 내의 군현과 똑같았지만, 중국 본토가 아..
흉노 정벌의 도미노 한 무제는 내치에서 뒤늦게 국가 기틀을 만드느라 애썼지만, 정작 그의 야심은 바깥에 있었다. 바깥이 안정되지 않으면 안이 튼튼할 수 없고, 바깥을 안정시키려면 정복과 복속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대내적으로 분주한 상황에서도 대외 정복 사업을 서둘렀다.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건국 이후 한을 괴롭혀온 흉노와의 대결이다. 무제는 고조 때부터 이어오던 화친 정책을 버리고 강공으로 나아갔다. 그것도 단순히 방어에 치중하는 게 아니라 멀리 고비 사막을 넘어 흉노의 근거지인 몽골 초원까지 공략하는 것이다. 정복을 지휘한 인물은 위청(衛靑)과 그의 조카인 곽거병(霍去病)이었다. 흉노 정벌의 부산물로 무제는 바라던 것 이상의 큰 소득을 얻었다. 바로 서역 원정이었다. 그때까지 무제는 서역이..
한 무제의 두 번째 건국② 이런 관계가 역전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 역사상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걸출한 황제 한 무제(武帝) 때였다. 고조가 신생 제국 한의 명패를 올렸다면, 무제는 오랜 통치 기간(기원전 141 기원전 87) 동안 제국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완비해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업그레이드한 군주였다. 우선 무제는 즉위하자마자 연호부터 제정했다. 역사상 첫 연호답게 그것은 ‘기원을 세우다’라는 뜻의 건원(建元)이었다. 그전까지는 제후국마다 각기 나름대로 해를 셈했으므로 혼란이 많았다.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된 이상 공동의 연호를 쓰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무제의 의도는 그보다 깊은 데 있었다. 그는 나중에 주변국들을 차례차례 복속시키면서 중국의 연호를 쓰도록 강요했다. 연호는 단일한 중국 문화권..
한 무제의 두 번째 건국 전국시대를 거치며 초(楚)ㆍ오(吳)ㆍ월(越) 등 남중국의 이민족들도 중화 질서 속으로 편입되었고, 때마침 통일 제국이 들어서면서 중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 세계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중원과 북중국에서 보기에는 오와 월보다 지리적으로 멀지 않은 북방 민족들은 여전히 오랑캐로 배척을 받았다. 왜 그랬을까? 물론 그들의 강성함을 두려워한 중원 세력이 일찌감치 그들을 배척한 탓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북방 민족들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국시대 남중국 민족들은 중원의 질서를 동경하고 거기에 속하고자 애썼지만, 북방 민족들은 유목민족 특유의 생활 방식과 자주적이고 강인한 기질로 인해서 남에게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중원의 선진 문화를 높이 평가했지만, 언제나 ..
촌놈이 세운 대제국② 잠시의 분열기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한 유방은 기원전 202년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한의 고조(高祖)로 즉위했다. 새 세상이 되었으니 제도도 바뀌어야 했으나 워낙 진시황(秦始皇)이 기틀을 잘 잡아놓은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한은 진의 중앙 관료 기구인 3공과 9경도 그대로 유지했고, 진의 관료 제도도 거의 답습했다. 손보아야할 것은 행정제도, 즉 군현제였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수백 년간의 분열기를 극복하는 첫 단추는 이미 진의 군현제가 제시한 바 있었다. 다만 군현제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중앙집권제는 필요하지만 군현제처럼 강력한 제도는 부작용이 컸다. 게다가 평민 출신의 한 고조는 진시황보다 권위도 크게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군현제와 옛 봉건제를 병용해 새로이 군국제(..
촌놈이 세운 대제국 반란은 농민들이 먼저 일으키고, 지식인들이 뒤를 잇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죽은 지 불과 1년 만인 기원전 209년에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주동자인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하급 장교 출신이었다. 처음에는 이들이 징용에 끌려가던 농민 병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내 일반 농민도 가세하면서 삽시간에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반란군은 황허 이남의 수십 개 성을 함락하고 1년 가까이 맹위를 떨쳤다. 내친 김에 진의 타도를 목표로 삼은 진승은 장초(張楚)라는 국호까지 정하고 자신을 왕으로 자칭했다(국호에 초가 붙은 것은 옛날의 강국 초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이듬해 반란은 간신히 진압되었으나 이 사건은 진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
죽 쒀서 개 준 통일② 앞서 말했듯이, 춘추시대를 거치면서 ‘남쪽의 오랑캐(초나라)’는 중원의 질서에 편입되었다. 또한 전국시대에 서쪽 변방에서 발흥한 진이 대륙을 통일함으로써 중원 서부 지역의 이민족도 자연스럽게 중화 세계로 들어왔다. 끝까지 ‘오랑캐’로 남은 것은 북방의 이민족들뿐이었다. 북방 이민족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중국이 통일되었다는 것은 이제부터 중원의 한족 문화권과 북방 유목민족 문화권 간에 벌어질 기나긴 투쟁을 예고하고 있었다(만약 전국 7웅 중에서 북동부에 터를 잡은 연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면 북방 민족들도 중화 세계에 편입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사전 대비가 만리장성이었다. 진시황(秦始皇)이 동쪽의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의 중앙아시아까지 6000여 킬로미터나 길게 뻗은 만리장..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1. 중화의 축 죽 쒀서 개 준 통일 기원전 221년 최초로 드넓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나서 진(秦)의 왕인 정(政)이 최초로 한 일은 자신의 호칭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중국 대륙이 하나의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으니 과거 제후들의 호칭인 왕(王)이나 공(公)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만든 새 호칭은 바로 황제(皇帝)였다. 그는 최초의 황제가 되므로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고 불렀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보통 그를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른다. 또한 사극에서 흔히 보듯이, 왕이 자신을 지칭할 때 쓰는 ‘짐(朕)’이라는 호칭도 진시황이 처음 만들었다. 진 제국은 존주양이(尊周攘夷)를 이념으로 하는 전통의 제후국 출신이 아니었다. 서쪽 변방에서 오로지 자체의 힘만으로..
2부 자람 나라와 민족의 꼴이 제법 갖추어지면서 중국, 인도, 일본은 독자적 발전의 시대를 맞는다. 제국 체제로 접어든 중국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중심이자 국제 질서의 핵으로 자리 잡는다. 중국과 달리 인도는 내내 분권화된 역사를 전개하다가 결국에는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는다. 일본은 대륙과의 교류를 끊고 치열한 내전의 역사로 접어드는데, 그 결과 무사 정권이 탄생하게 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왜에서 일본으로② 그러나 어떤 나라든 개국 초기에는 정권이 불안정한 법이다. 특히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669년 개혁의 일등공신인 가마코가 사망하고, 2년 뒤 덴지마저 죽자 국가의 기틀을 확립한 두 인물이 사라졌다. 이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을 단행한 것만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과 이후 정세마저도 쇼토쿠 태자-소가 우마코 페어를 재현한 셈이다. 덴지가 죽자 계승권자인 아들 오토모(大友)와 덴지의 동생인 오아마(大海)는 조카-삼촌 관계가 무색하게도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이 다툼은 삽시간에 일본 전역에 걸친 내전으로 발전했다. 이 내전은 한반도와 연관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당시 한반도에서는 신라에 의해 삼국 통일이 이루어진 직후였다), 일본의 조정에는 백제계 유민들이 많이..
왜에서 일본으로 불교를 일본에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쇼토쿠 태자는 만년에 들어 현실 정치에 흥미를 잃고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다가 622년에 세상을 떠났다. 또한 태자와 더불어 강력한 소가씨의 수장으로 군림한 소가 우마코도 4년 뒤에 사망했다. 이로써 약 30년 간 장기 집권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 고대사의 두 기둥은 사라졌다.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군림하는 법이다. 최고 세력가인 소가 가문은 제 세상을 만난 듯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때마침 대흉작과 대기근이 들어 사회 전체가 매우 어지러워졌다. 사회 불안은 사실 단기적인 흉년만이 원인인 게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왕족과 귀족, 세력가들이 각자 영지를 늘리고 세력을 키우기 위해 백성들을 수탈하기만 하고 재생산을 도모하지 않았던 것..
빛은 서방에서② 한편 야마토 정권은 부족 연맹체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정식 고대국가라고 부를 수 없다. 후기에 들어 왕권은 상당히 강화되었으나 아직 다른 부족장들을 경제적ㆍ군사적으로 굴복시킬 만한 수준은 되지 못했다. 왕위 세습 역시 왕이 직접 자기 아들에게 계승시키는 게 아니라 그저 왕가의 가계만 고정되어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왕족 중에서 누구를 옹립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부족장들의 발언권이 강했다. 당연히 세력이 큰 씨족들 간에 다툼이 없을 수 없었다. 대규모 씨족 집단들은 군사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권력 다툼이 대단히 치열하고 살벌했다(『니혼쇼기』는 왕위 계승을 둘러 싼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6세기 중엽 불교를 공인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싸고 대립한 끝에 불교 공인..
빛은 서방에서 조몬 문화처럼 채집과 어업에 의존하는 사회는 인구 이동이 잦기 때문에 온전한 정착 생활이 이루어질 수 없다. 야요이 문화의 도입으로 농경이 지배적인 생활 형태가 되면서 비로소 일본에서는 곳곳에 씨족사회들이 생겨났다. 일본은 가장 큰 섬인 혼슈만 해도 한반도 전체보다 조금 클 정도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인구 밀도는 적지 않았다. 이 인구가 씨족사회로 편제되자 이내 씨족들 간에 격심한 경쟁과 전쟁이 잇달았다. 제법 큰 규모의 씨족사회들은 이미 이 무렵부터 중국과 직접 교섭을 시작했다. 200~300년에 걸친 전란 끝에 드디어 강력한 씨족국가가 탄생했다. 당시 일본은 문자도 없었고 직접 역사를 기록하지도 못했으므로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三國志)』의 「위지(魏志)」(이 문헌은 한반도의 상고사에 관..
3장 일본이 있기까지 금속의 빛을 던져준 야요이 문화 우리나라 역사를 처음 배울 때 신석기시대의 유물로 빗살무늬토기라는 것이 나온다. 일본의 신석기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줄무늬토기가 있었다. 빗살무늬는 한자어로 즐문(櫛文)이지만 줄무늬는 새끼줄로 만들기 때문에 승문(繩文)이라고 하는데, 일본식 발음으로는 조몬이다. 그래서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시작된 일본의 신석기 문화를 조몬 문화라고 부른다. 앞서 중국이나 인도의 역사에서는 생략한 신석기시대를 일본의 역사에서 소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중국은 문명의 발상(황허 문명)에서부터 씨족국가, 고대국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자생적이고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또 인도는 인더스 문명이라는 발달한 자생적인 문명이 있었으나 아리아인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이후에는 예전과 ..
정치적 공백이 이룬 통일③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인도에서 처음으로 불상이 제작된 것이다. 불교의 발생과 더불어 불교 예술도 발달했지만, 원래 인도에서는 부처의 모습을 조각상으로 만드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인도의 초기 불교 예술가들은 부처를 인간의 형체가 아니라 발자국이나 빈 의자 따위로 묘사했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을 마음대로 인간과 똑같이 묘사했다(세속과 거리를 둔 부처와 달리 그리스 신들은 인간처럼 사랑도하고 화도 내고 질투로 속도 끓이는 인격신이었던 탓이 크다). 처음 만드는 불상이니 모델이 필요했다. 그리스인들은 불상의 영감도 주었지만 기법도 제공했다. 그리스 조각상이 좋은 모델이 되었다. 그 때문에 처음 등장한 불상은, 웅장하고 이상적인 묘사를 ..
정치적 공백이 이룬 통일② 인도를 가장 먼저 침공한 사람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Darius)였다. 한때 그는 펀자브 지방을 점령해 통치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강국인 페르시아를 무찌른 자가 바로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였다. 당시 알렉산드로스는 인도가 세상의 동쪽 끝이라 믿었고, 인도를 정복하면 아시아의 주인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히말라야를 넘기는 어려웠겠지만 혹시 인도를 침공한 뒤에도 동방 원정을 계속했더라면 전국시대 말기 한창 강성했던 진(秦) 제국과 한판 승부를 벌였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는 동쪽 끝을 정복한 뒤 말머리를 돌려 멀리 세상의 서쪽 끝인 에스파냐를 정복할 계획이었다. 그러던 차에 기원전 323년 병사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보병 3만과 기병 5000의 군대로 동방 원정을..
정치적 공백이 이룬 통일 카스트 제도가 처음 성립할 때와 같은 강력한 힘을 이후에도 내내 발휘했다면, 인도에는 고대국가의 성립이 훨씬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신분 질서가 워낙 강한 탓에 국가라는 질서의 중심이 존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아인의 지배가 계속되면서 카스트의 힘은 점차 약해졌다. 처음에는 아리아인과 인도 원주민이 외양에서부터 현저한 차이가 나서 카스트의 구분도 쉬웠으나, 나중에는 서로 융화되면서 인종적 구별이 사라져 직업으로 카스트를 구분해야 했다(코가 뾰족하고 눈동자와 피부색이 검은 오늘날의 인도인들은 수천 년에 걸쳐 아리아인과 원주민이 혼혈을 이룬 결과다). 카스트 제도가 약화되면서 그에 반비례해 각 도시국가에서는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종의 원시적 공화정과 같..
자이나교(Jainism) 자이나교도 힌두교나 불교처럼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답게 윤회와 업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자이나교의 교리는 힌두교보다 불교와 유사한 측면이 많았다. 우선 『베다』 성전의 권위를 부인한 데다 종교 의식을 거부하고 카스트 제도를 배척했으므로, 자이나교 역시 불교처럼 힌두교 질서에 반발하는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불교에서처럼 금욕을 강조하고 불살생의 계율을 중시했다. 그러나 자이나교는 그 점에서 불교보다 한층 극단적인 성격을 지녔다. 자이나교의 5대 계율은 살생, 거짓말, 도둑질, 음행, 소유의 다섯 가지를 금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살생을 하지 말라는 계율이었는데, 그 대상으로 인간과 동식물은 물론 바람이나 물, 흙, 불까지도 포함시켰다. 자연의 모든 ..
불교(佛敎) 불교를 창시한 석가(釋迦, 본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전 6세기 중반 지금의 인도와 네팔 국경 언저리에 있었던 카필라의 왕자로 태어났다. 당시는 아직 영토 국가의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고만고만한 도시국가들이 많았는데, 카필라도 그중 하나였다. 싯다르타는 열여섯 살에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낳고 평온하게 살다가 스물아홉 살에 갑자기 출가(出家)를 결심한다. 당시 출가는 널리 행해지던 사회적 관습이었으므로 출가 자체로 싯다르타의 사람됨을 평가할 수는 없다. 이후 그는 6년여 동안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현인들을 만나고 온갖 고행을 하지만, 애초부터 그가 품고 있던 생로병사의 문제에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고행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하고 명상을 통해 진리를 구하고자 ..
인도와 종교 인도하면 언뜻 생각나는 것이 종교다. 석가모니와 불교가 탄생한 나라이기도 하지만 오늘날에도 종교를 떼어놓고는 인도를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의 인도에서 종교를 연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불교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현재 인도는 힌두교(브라만교를 모태로 하고 있다) 국가이기 때문이다(힌두와 인도는 같은 어원이니, 힌두교는 결국 인도의 전통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인도 서쪽의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과 한 몸이었지만 20세기 중반에 종교 문제로 분리되었다. 또 인도 동쪽의 방글라데시도 이슬람 국가다. 그래서 현재 인도 아대륙 주변에서 불교 국가로 남아 있는 나라는 스리랑카뿐이다. 오히려 타이나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나라들이 불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지만,..
굴러온 돌의 승리② 인더스 문명에서 보듯이, 고대 인도는 상당한 수준의 문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리아인은 문명보다 무력에서 뛰어난 민족이었다. 유목민족이었으므로 정착 문명의 수준은 보잘것없었으나, 아리아인은 그 당시에 이미 철기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1500년경이라면 동서양 어느 곳에서도 철기시대가 도래하기 전이었다. 아리아인이 인도를 침입한 것은 단기간에 작정하고 이루어진 게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인도 북서부의 펀자브 지방에 들어와서 한동안 정착 생활을 했다. 여기서 농경 생활을 익힌 그들은 이윽고 유목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인도 중부 지역과 동부 갠지스 강 유역에까지 진출했다. 당연히 원주민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인도 원주..
2장 인도가 있기까지 굴러온 돌의 승리 인도의 서쪽 경계 부근을 흐르는 인더스 강 유역은 유명한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다.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마셜은 인더스 강 일대의 모헨조다로에서 대규모 작업을 벌인 끝에 인류 초기 문명의 유적을 찾아냈다. 사막 한가운데 있었던 덕분에 비교적 잘 보존된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 모헨조다로 유적은 바둑판 모양의 도시 구획에다 벽돌로 쌓은 주택, 도로와 하수도 시설, 커다란 목욕탕, 공회당 등 고대 로마에 못지않은 수준의 문명을 보여주었다. 로마에 비해 3000년이나 앞선 기원전 3000년 무렵에 이미 인도에는 이런 선진 문명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도의 역사는 인더스 문명 이후 1000여 년 동안 후대에 알려지지 않았다. 인도의 역사가 다시 ‘진행’되는 것은 기원..
도가 사상(道家 思想) 도가 사상을 창시한 노자(老子)는 공자(孔子)보다 한 세대쯤 위의 인물이었으나 실존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 공자와 만났다는 기록도 전하기는 하지만 『도덕경(道德經)』이라는 짧은 책 한 권 이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가 사상이 발달한 것은 노자의 시대보다 수백 년 뒤인 전국시대 중기 장자(莊子)에 의해서였다. 도가 사상은 제자백가 가운데 가장 철학적인 냄새가 강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유(有)다. 유는 경험 세계에 존재하며, 누구나 그 존재를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유를 만드는 것은 무(無)다. 유는 무에서 생성되어 운동하다가 다시 그 근원인 무로 되돌아간다. 이 우주 만물의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 과정을 관장하는 것이 곧 도(道)다. 그렇..
법가 사상(法家 思想) 법가 사상은 제자백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전국시대 중기에 현실 정치의 경험을 토대로 형성된 사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법의 개념은 춘추시대부터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었다. 춘추시대 정나라에서 제정한 법은 중국 최초의 성문법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진(晋)에서는 형법 서적을 편찬했다고 전한다. 법가는 원래 술(術)을 중시하는 파, 세(勢)를 중시하는 파, 법(法)을 중시하는 파로 나뉘었는데, 이 세 유파를 전국시대 말기에 한비자(韓非子, 기원전 280년경~기원전 233)가 종합해 완성했다. 법가의 기본적인 정신은 성악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람은 본래 도덕을 내재하고 있지 않으므로 법의 다스림을 필요로 한다. 군주가 백성을 지배하는 질서는 유가..
묵가 사상(墨家 思想) 묵가는 전국시대 초기에 묵적(墨翟, 기원전 480년경~기원전 390년경)이 주창했다(묵적은 현인들을 ‘子’로 존칭하는 관습에 따라 墨子라고도 부른다). 묵가 사상가들은 주로 무기나 공구의 제작에 종사한 수공업자 집단이었다. 그래서 유가 사상이 예에 기초한 엄격한 신분 질서를 주장한 데 비해 묵가는 훨씬 평민적인 사상을 전개했으며, 이 점에서 유가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묵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사랑이다. 묵적은 이기적인 사랑을 뜻하는 ‘차별애(差別愛)’를 버리고 화해적인 사랑인 ‘겸애(兼愛)’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시대에 만연한 수많은 전쟁은 모두 자기만의 이익[自利]을 취하기 위한 차별애에서 비롯되었다. 반면 겸애는 상호적인 이익[交相利]을 도모한다. 따라서 겸애를 ..
유가 사상(儒家 思想) 유가를 창시한 공자(孔子)는 노나라 태생이었다. 춘추시대 말기에 유서 깊은 제후국에서 성장한 만큼 공자는 전통적 가치와 이념을 자연스레 몸에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유가 사상에는 과거에 대한 향수, 복고주의의 냄새가 풍긴다. 태평성대의 대명사인 요순시대라는 말을 만들어 쓴 사람도 공자다. 그러나 그가 주로 염두에 둔 ‘과거’는 그의 시대보다도 1000년이나 더 전인 머나먼 요순시대가 아니라 그 바로 전대인 주나라, 즉 서주(西周) 시대였다. 하지만 공자가 오로지 과거에 대한 동경만 품고 있었다면 학문의 일가를 구축하지는 못했을 테고 후대에 위대한 사상가로 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서주(西周) 시대의 전통적 가치는 주나라의 건국이념이라 할 예(禮)의 개념으로 집약된다. 이 예의..
동양 사상의 뿌리 분열기라고 해서 내내 전쟁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는 수많은 전쟁이 전개되면서 아울러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발전도 이루어졌다.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농업혁명이다. 서주(西周) 시대까지 답보 상태에 있었던 농업 생산력은 춘추전국시대에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소를 경작에 이용하고 철제 농구를 사용하게 된 덕분이었다. 이제 농민들은 집단 농경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가족 단위로 단독 농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서주 말기부터 씨족 공동체가 해체되기 시작하자 단독 농경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전쟁이 많았던 만큼 전쟁과 관련된 산업도 크게 발달했다. 사실 당장의 필요 때문에 살상용 무기를 개선하려는 각국의 노력이 없었다면 중국의 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