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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목차 도올 김용옥 서론 통서(通序) 인류문명전관(人類文明全觀)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 기독교와 근대화 서구의 정체 예수와 헬레니즘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태일생수 노예제의 허구, 발전사관의 허구 수메르문명과 이집트문명 사피르가 말하는 언어 언어와 문명 희랍문명의 강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자연과학이라는 우상과 허상 이신론과 무신론 과학과 권력, 과학의 초극 알파벳 단원설 신크레티즘(syncretism) 불교와 심리학, 그리고 공자 조선문명과 한문 유일한과 명동학교, 동아시아의 미래 서막: 공자의 생애와 사상 『논어』를 접근하는 인식론적 과제상황 곡부로 가서 느낀 것 사마천의 『사기』와 공자전기문학 예수 탄생과 베들레헴 예수의 케리그마, 공자의 케리그마 장자와 묵자와 맹자 「미자」 편을 만든 사람들..
범례(凡例) 1 기준으로 삼을 판본을 생각할 때 우리나라에는 현재 권위 있게 통용되는 정본이 없기 때문에 번민에 싸이게 된다. 나는 고판본들의 고졸하면서도 정직한 맛을 사랑하지만 통용본에서 너무 벗어나면 판본의 문제로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 더구나 본서는 상론에서 주자집주의 번역을 부속시키고 있기 때문에, 주자가 본 논어 원문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따라서 본서는 주자집주본 『논어』를 기준으로 하여 다양한 판본을 고찰하기로 하였다. 주자집주본은 우리나라 조선조에서 가장 많이 통용된, 명나라 영락대제 때 간행된 『사서대전(四書大全)』 본을 저본으로 하는데, 우리나라 영조시대 때 간행된 정유자(丁酉字, 1777) 내각본(內閣本)을 기준으로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내각본이 결코 정밀한 판본이라고..
17. 공자가 표준어를 쓸 때 7-17. 공자께서 아언(雅言)으로 말씀하신 바는, 『시경』을 읽으실 때, 『서경』을 읽으실 때, 그리고 중요한 의례를 집행하실 때였다. 이때 말씀하신 것은 모두 아언이었다. 7-17. 子所雅言, 詩, 書, 執禮, 皆雅言也. 이 장의 주석에 관해서는 이미 음운학자들 사이에서 명료한 컨센서스가 성립하고 있다. 신주는 도무지 애매하여 취할 바가 못 된다. 모든 것을 추상적 심성론과 관련시켜 해석하다 보니까 명백하게 해석해야 할 문의(文義)마저 애매하게 만들고 만다. 도학(道學)의 병폐의 대표적 사례라 해야 할 것이다. 아언(雅言)이란 문자 그대로 ‘우아한 말’이다. 그러나 우아하다는 것은 주관에 따라 제멋대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 명료한 객관적 기준이 있어야 한다...
번역론(飜譯論) 번역은 해석을 전제로 한다. 해석(Interpretation)은 이해(Understanding)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해석의 과정에는 매우 중층적이고 복잡한 이해의 구조가 얽혀있다. 지금 내가 해석하려는 것은 『논어』라는 텍스트다. 현존하는 나의 『논어』 텍스트는 이미 진한(秦漢)시대에 성립한 것이다. 최근에 묘혈에서 나오는 간백(簡帛)의 문자들로 미루어 생각해볼 때 거의 상응되는 문자체계의 고본 책자가 2천 년 이상 지속성(continuity)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해에 얽힌 주체들은 시공에 따라 다르지만, 이해의 대상이 되고 있는 텍스트 그 자체는 동일성을 유지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참으로 서양문화권에서는 흔히 있기 어려운 현상이다. 고전 희랍 텍스트나 이집트 텍..
16. 70살의 공자가 주역에 발분하다 7-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하늘이 나에게 몇 년의 수명만 더해준다면, 드디어 나는 『주역(周易)』을 배울 것이다. 그리하면 나에게 큰 허물이 없으리.” 7-16. 子曰: “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이 장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아 제가(諸家)의 설이 분분하지만 간략히 내 생각만을 논술하겠다. 공자의 시대에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주역(周易)』이라는 문헌이 있었을까? 『주역(周易)』에 미쳐 홀로 도통했다는 광인이 아닌 이상, 전문학자의 세계에서는 『주역』을 문왕(文王)의 작으로 본다든가 공자 시대에 「주역」이 엄존하고 있었다는 헛소리를 뇌까리는 사람은 없다. 주역이라고 해도 우리가 소위 『경(經)』이라고 하는 것은 64개의 여섯자리 음..
15. 뜬구름 같은 옳지 않은 부귀(富貴) 7-15.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거친 밥 먹고 물 마시며, 팔을 굽혀 베개 삼더라도, 나의 삶의 즐거움은 이 속에 있노라. 의롭지 못하게 부(富)를 얻고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은, 나에게는 뜬구름일 뿐.” 7-15. 子曰: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疏食’는 우리말로도 두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소식’이라고 읽으면 채식을 의미하며 주로 반찬에 관계된다(공안국 설: 蔬食, 菜食也). ‘소사’로 읽으면 이때의 ‘사’는 밥을 의미하며 ‘거친 밥’이 된다(신주). 우리나라 사람들 감각으로는 꽁보리밥이 될 것이고, 중국사람들 감각으로는 수수밥이 될 것이다. 둘 다 최소한의 소략한 식사를 의미한다는 데는 대차가 없다. 마지..
14. 백이숙제의 예시로 공자의 의중을 떠보다 7-14. 공자께서 위나라에 계실 때 염유가 말하였다: “부자께서 위나라 군주 첩(輒, 저, Zhe)을 도우실까?” 자공이 말하였다: “글쎄, 내가 한번 여쭈어볼께.” 7-14. 冉有曰: “夫子爲衛君乎?” 子貢曰: “諾. 吾將問之.” 자공은 공자 방으로 들어가서 여쭈었다.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시었다: “옛날 현자들이지.” 入, 曰: “伯夷, 叔齊何人也?” 曰: “古之賢人也.” 자공이 다시 여쭈었다: “후회했을까요?” 공자께서 다시 대답하시었다: “후회하긴, 인을 구해서 인을 얻었는데 또 뭘 후회해?” 曰: “怨乎?” 曰: “求仁而得仁, 又何怨.” 자공이 공자 방에서 나오면서 말하였다: “공자께선 아무도 돕지 않으실 것이다.” 出..
13. 소악(韶樂)을 배우니 고기 맛마저 잊다 7-13. 공자께서 제나라에서 순임금의 소(韶) 음악을 듣고 배우실 적에 삼개월 동안 고기맛을 잊어버릴 정도로 열중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었다: “한 악곡의 창작이 이러한 경지에 이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7-13. 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 曰: “不圖爲樂之至於斯也!” 예술가로서의 공자의 삶의 역정을 잘 말해주는 단편이다. 새로운 음악의 발견, 새로운 작곡 가능성에 대한 도전, 예술적 경지의 비상, 배움의 희열, 탐미적 경탄, 음악을 통한 문명의 발견ㆍ문화의 추구, 이 모든 느낌이 이 한 장에 압축되어 있다. 공자는 참으로 위대한 아티스트였다. 공자가 35세 때, 소공이 삼 환과 부질없이 싸워 일어난 노나라의 내란을 피해 제나라에 가서, 고소자(高..
12. 공자가 조심했던 세 가지 7-12. 공자께서 평소 신중하게 대처하시는 것이 셋 있었다: 재계(齋戒), 전쟁(戰爭), 질병(疾病). 7-12. 子之所愼: 齊, 戰, 疾. 공자가 산 시대의 노나라나 제나라와 같은 나라들이 모두 고희랍의 폴리스와도 같은 도시국가들이었다. 도시국가란 기본적으로 전쟁국가였다. 전쟁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문제는 모든 국인(國人)의 의무에 속하는 일이며 또한 생존의 관건이었다. 신중히 대처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도시국가는 또 제정일치의 국가였다. 전쟁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일은 국가의 수호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이었다. 종묘, 사직이 모두 제사의 문제였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목욕재계(沐浴齋戒)라는 과정을 거친다. 요즈음 사람들은 매일 집 목욕탕에서 샤워..
11. 부귀는 맘대로 할 수 없으니, 맘대로 할 수 있는 좋아하는 걸 하리라 7-1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돈을 번다는 것이 내가 구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채찍을 잡는 자의 천한 일이라도, 내 기꺼이 그것을 마다하지 않겠다. 그러나 구해서 얻어질 수가 없는 것일진대, 나는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을 하리라.” 7-11. 子曰: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이 장의 첫 구절의 의미에 관해서는 실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견해가 돈을 번다는 것, 부를 추구한다는 것에 대한 가치판단을 깔고 있다. ‘부(富)라는 것이 추구할 만한 것이라고 한다면…’ 혹은 ‘부를 추구하는 것이 부도덕하지 않다고 사회가 허용한다면…’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
10. 안연을 칭찬한 공자, 그런 안연을 질투한 자로 7-10. 공자께서 안연을 앞에 두고 말씀하시었다: “세상이 기용하면 정확히 행동하고 세상이 버리면 조용히 숨어지낼 수 있는 미덕을 지닌 자, 오직 너와 나밖에는 없겠지.” 7-10. 子謂顔淵曰: “用之則行, 舍之則藏, 唯我與爾有是夫!” 옆에 있던 자로가 질투가 나서 여쭈었다: “선생님께서 세 군단의 대군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야 하신다면 누굴 데리고 가시겠습니까?” 子路曰: “子行三軍, 則誰與?”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으려 하고 큰 강을 맨몸으로 건너려 하면서 죽어도 후회없다고 외치는 그런 놈하고 난 같이 가지 않아. 일에 임하면 두려워할 줄 알고, 뭔 일이든 꼼꼼히 생각해서 꼭 성공시키는 사람, 난 반드시 그런 사람과 같이..
9. 초상집에서의 공자 모습 7-9. 공자께서 초상 치르는 사람 곁에서 식사를 하실 때에는 배불리 드시는 적이 없었다. 공자께서 이 날에 곡(哭)을 하시면 그 자리를 뜬 후에도 노래를 부르시는 법이 없었다. 7-9. 子食於有喪者之側, 未嘗飽也. 子於是日哭, 則不歌. 아주 사소한, 별 의미없는 장 같이 느낄 수도 있겠으나 공자라는 인간을 느끼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파편이다. 4복음서에 바로 이러한 식의 인간 예수의 기술이 없기 때문에 그 의도가 순결하지 못한 것이다. 불트만의 말대로 이미 초대교회의 종말론적 케리그마를 정당화 시키기 위한 필터가 깔려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기술이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논어』는 인간 공자를 말한다. 이 장은 실제로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러나 편집자들..
8. 배움의 자세 7-8.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는 분발치 아니 하는 학생을 계도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의심이 축적되어 고민하는 학생이 아니면 촉발시켜 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한 꼭지 들어 말해주어 세 꼭지로써 반추할 줄 모르면 더 반복치 않고 기다릴 뿐.” 7-8. 子曰: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공자의 교육방법은 참으로 위대하다. 공자가 엘리티즘을 과시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아니 된다. 인간의 자발성, 촉발성, 분발성을 깊게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공자는 지식을 통째로 전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선생의 역할은 학생이 스스로 깨우치는 것을 촉발하는 산파역에 그칠 뿐이라고 겸허한 자세를 유지할 뿐이다. 공자는 참으로 구체적 교육방법론을 갖춘 훌륭한..
6. 등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재주를 익혀야 했던 공자 9-6. 오나라의 태재(大宰: 수상)가 자공에게 물어 이르기를 “부자께서는 진실로 성인이시군요. 그토록 재능이 다방면에 넘치시니!”하였다. 9-6. 大宰問於子貢曰: “夫子聖者與? 何其多能也?” 그러자 자공이 대답하였다: “그럼요. 진실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 우리 공자님을 성인으로 만들려 하시니, 또한 그토록 많은 재능을 주셨구료.” 子貢曰: “固天縱之將聖, 又多能也.” 공자께서 후에 이 말을 들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태재, 그 사람이 나를 아는구나! 나는 어렸을 때 천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비속한 잔일에 재주가 많을 뿐이로다. 군자가 재주가 많아야할까? 그러하지 아니 하니라.” 子聞之, 曰: “大宰知我乎! 吾少也賤, 故多能..
5. 공자, 광땅에서 위협을 당하다 9-5. 공자는 광(匡) 땅에서 포위되어 그 일행은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곤경에 빠져있었다. 공자께서는 그 난 중에서도 이와 같이 말씀하시었다: “문왕(文王)께서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지만 그 문(文)이 여기 나에게 있지 아니 한가? 하늘 이 이 문을 버리시려 한다면 그대들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그대들은 내 몸에 있는 이 문(文)을 더불어하지 못하리라! 만약 하늘이 이 문(文)을 정녕코 버리지 않으신다면 광(匡) 사람인들 감히 나를 어쩌랴!” 9-5. 子畏於匡. 曰: “文王旣沒, 文不在茲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정확한 사건의 내막은 구성이 어렵다. 광(匡) 땅만 해도 위나라 변방의 읍(邑)이라는 설, 정(鄭)나라의 읍..
논어집주서설(論語集註序說) 주희(朱熹) 史記世家曰: “孔子, 名丘, 字仲尼. 其先, 宋人. 父, 叔梁紇; 母, 顔氏. 以魯襄公二十二年庚戌之歲, 十一月庚子, 生孔子於魯昌平鄕陬邑. 爲兒嬉戱, 常陳俎豆, 設禮容. 及長爲委吏, 料量平; 爲司職吏, 畜蕃息. 適周, 問禮於老子, 旣反而弟子益進. 昭公二十五年甲申, 孔子年三十五, 而昭公奔齊, 魯亂. 於是適齊, 爲高昭子家臣, 以通乎景公. 公欲封以尼谿之田, 晏嬰不可, 公惑之. 孔子遂行, 反乎魯. 定公元年壬辰, 孔子年四十三, 而季氏强僭, 其臣陽虎作亂傳政. 故孔子不仕, 而退修詩書禮樂, 弟子彌衆. 九年庚子, 孔子年五十一. 公山不狃, 以費畔季氏, 召孔子, 欲往而卒不行. 定公以孔子爲中都宰. 一年, 四方則之. 遂爲司空, 又爲大司寇. 十年辛丑, 相定公, 會齊侯于夾谷, 齊人歸魯侵地. 十..
4. 공자에게 없었던 네 가지 9-4. 공자께서는 평소 삶에 네 가지의 태도가 전혀 없으셨다. 주관적 억측이 없으셨다. 무리하게 관철시키려는 자세가 없으셨다. 변통을 모르는 고집이 없으셨다. 나[我]라는 집착이 없으셨다. 9-4. 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 이 파편은 곽점죽간 중 「어총삼」에 나타나고 있다. 거기에는 ‘母意, 毋固, 毋我, 毋必’로 되어있어 순서의 변화가 있다. 「어총」에는 공자의 말이라는 것이 지시되어 있지 않다. 당시 이러한 이야기들이 격언으로서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 죽간 중 이러한 문구의 존재가 곧 『논어』의 성립연대를 입증하는 준거로 사용되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성급한 중국학자들의 논의를 세밀히 객관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의(毋意), 무필(..
3. 변해가는 세태를 따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9-3.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고운 베로 만든 관을 쓰는 것이 본래의 예였다. 그러나 요즈음은 생사로 만든 관을 쓴다. 검약하다. 나는 시속을 따르겠다. 9-3. 子曰: “麻冕, 禮也; 今也純, 儉. 吾從衆; 예로부터 당 아래서 절하는 것이 본래의 예였다. 그러나 요즈음은 사람들이 당 위에서 절한다. 오만하다. 나는 시속(時俗)을 따르지 않고 그냥 당 아래서 절하겠다.” 拜下, 禮也; 今拜乎上, 泰也. 雖違衆, 吾從下.” 여기 논지는 매우 명료하다. ‘면(冕)’은 왕이 쓰는 면류관이 아니고 지위 있는 자들이 쓰는 둥글둥글하게 생긴 관이다. 원래 그것은 고운 베로 만드는데 지금은 오히려 생사(生絲)로 만드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고 한다. 세상이 변한 것이..
2. 공자는 널리 배워 위대하나, 한 분야에 이름을 날리질 못했다 9-2. 달항당(達巷黨)의 사람이 말하였다: “위대하십니다. 우리 공자님! 그렇게 넓도록 배우셨어도 한 가지로 이름을 날리지는 않으셨으니!” 9-2. 達巷黨人曰: “大哉孔子! 博學而無所成名.” 공자가 후에 이 말을 들으시고 문하(門下)의 제자들에게 일러 말씀하시었다: “내가 무엇을 전공으로 삼을꼬? 말몰이를 전공할까? 활쏘기를 전공할까? 아~ 나는 역시 말몰이를 전공삼아 이름을 날리고 싶다.” 子聞之, 謂門弟子曰: “吾何執? 執御乎? 執射乎? 吾執御矣.” 나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다. 그런 연고로 전신이 유도대학이었던 용인대학교에서 무술철학을 두 해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최근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우리나라 무예의 고수들이 총집..
1. 공자가 드물게 말한 것 9-1. 공자께서는 이(利)와 명(命)과 인(仁)은 드물게 말하시었다. 9-1. 子罕言利與命與仁. 『논어』의 구절 중에서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빈도가 매우 높은 유명한 장이다. 사실 편명이 여기서 ‘공자’와 ‘드물게’를 합성하여 이루어져 매우 임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편자들은 ‘공자의 드물게 멋있는 격언들’이라는 의미를 노렸을 수도 있고, 황소는 또 이미 공자의 말을 느낄 줄 아는 자들이 희소해진 말년의 쓸쓸한 느낌을 나타내준다는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세상에 대한 욕심도 없어졌고 그래서 그만큼 공자의 경지는 높아졌고, 따라서 감응할 수 있는 자들이 적어진 분위기에서 드물게 말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여튼 ‘자한’이라는 편명도 만만치는 않다. 이(利)와 명(命)과 인(仁..
자한 제구(子罕 第九) 편해(篇解) 나는 도올서원에서 『논어』를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논어』의 핵은 「술이(述而)」와 「자한」이다”라고 곧잘 말하곤 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자한」에 오면 「태백」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싹 걷혀버린다. 무엇인가 오리지날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 자한」의 편집자는 일단 증자학파와는 무관한 타 직전제자계열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연하게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30장의 내용은 전부가 공자 직전제자들의 구송으로 전해내려온 것이다. ‘자한(子罕)’이라는 편명은 임의성이 강하다. ‘공자 드물게’라는 단어구성방식이 어떤 전체적 개념을 담으려 한 노력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만큼 이 편의 내용도 어떤 통일성이나 일관성이 유지되기보다는 다양한..
21. 헐뜯길 만한 꺼리가 없는 우임금 8-2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우임금은 내가 흠잡을 틈이 없는 분이시다. 마시고 드시는 것을 아주 소략하게 하시면서도 하늘과 땅의 하느님께는 인간의 정성을 다하셨다. 당신이 평소 입으시는 의복은 조촐하게 하시면서도 의례용 무릎가리개와 면류관에는 아름다움을 다하셨다. 당신이 거하시는 처소는 보잘 것 없게 하시면서도 백성을 위한 치수(治水)의 도랑 파기에는 몸소 있는 힘을 다 하셨다. 아~ 우임금은 진실로 내가 흠잡을 틈이 없는 분이시로다.” 8-21. 子曰: “禹, 吾無間然矣. 菲飮食, 而致孝乎鬼神; 惡衣服, 而致美乎黻冕; 卑宮室, 而盡力乎溝洫. 禹, 吾無間然矣.” 고성왕을 찬양한 공자의 로기온 중에서는 가장 가슴에 와닿는 위대한 언설이다. 우(禹)는 요(堯)가..
20. 인재 얻기의 어려움 8-20. 순(舜)임금이 어진 신하 다섯을 두시니,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일찍이 말하였다: “나는 세상을 다스리는 훌륭한 신하 열을 두었다.” 8-20. 舜有臣五人而天下治. 武王曰: “予有亂臣十人.” 이를 평하여 공자가 말씀하시었다: “인재를 얻기 어렵다 한 옛말이 정말 맞는 말 아니겠는가? 당(요임금 시대)ㆍ우(순임금 시대) 이래 주초(周初)에 이르러 그토록 문화가 성대했는데도, 열 사람 중에 부인이 들어 있으니 인재는 아홉밖에 되지 않는다. 주나라의 토대를 닦은 문왕은 천하를 이미 삼분하여 그 둘을 소유했는데도 복종하여 은(殷)나라의 주임금을 섬기었다. 주나라의 덕이야말로 지극한 덕이라 일컬을 만하다.” 孔子曰: “才難, 不其然乎? 唐ㆍ虞之際, 於斯..
19. 크구나! 요의 임금되심이여! 8-19.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아~ 위대하도다! 요(堯)의 임금되심이여! 높고 또 드높은 저 하늘, 저 거대함, 오직 요임금만이 본받는구나! 그 덕이 넓고 또 드넓으니, 백성들은 그 이름을 몰라라! 높고 또 드높아라, 그 공을 이루심이여! 찬란하게 그 문화가 빛나는도다!” 8-19. 子曰: “大哉堯之爲君也! 巍巍乎! 唯天爲大, 唯堯則之. 蕩蕩乎! 民無能名焉. 巍巍乎! 其有成功也; 煥乎! 其有文章.” 지금 우리는 요임금이나 순임금을 매우 신화적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나 공자 당시의 사람들에게만 해도 요순은 퍽 리얼하게 느껴졌던 역사적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전국시대에 집중적으로 형성된 일종의 프로파간다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여튼 그러한 관념의 역사는 ..
18. 순과 우는 천하를 소유했으나 관여하지 않다 8-18.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드높고 또 드높도다! 순임금과 우임금의 다스림이여! 천하를 소유하면서도 간여치 아니 하시고 능력있는 신하들이 역량을 발휘토록 하시었다.” 8-18. 子曰: “巍巍乎! 舜ㆍ禹之有天下也, 而不與焉.” 고주는 ‘불여(不與)’를 구하지 아니 하고 얻었다[美舜禹己不與求天下而得之]하여 그 선양의 전통을 찬양한 것으로 푼다. 그러나 새로 나온 정현 주는 ‘불여(不與)’를 직접 간여하여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고 현명한 신하들을 잘 선택하여 그들에게 맡김으로써, 공을 이루는 훌륭한 정치를 하였다고 풀이한다[美其有成功, 能擇任賢臣]. 나는 정현을 따른다. 모기령(毛奇齡)도 ‘이것은 곧바로 현명한 신하들에게 맡기고 능력있는 자들로 하여금 ..
17. 배우는 자의 자세, 배운 걸 잃을까 두려워하라 8-17.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배움이란 영 따라잡지 못할 듯, 그런데 따라잡아도 따라잡아도 또 놓치고 말 듯.” 8-17. 子曰: “學如不及, 猶恐失之.” 귀로 후의 공자의 고백일 것이다. 그가 말년에 70세 전후로 얼마나 지독하게 공부했는지를 알려주는 위대한 파편이다. ‘학여불급(學如不及)’의 ‘급(及)’이란 도망치는 도둑놈을 쫓아가듯 죽으라고 달려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배움이란 따라잡지 못할 듯하면서도 죽으라고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猶], 그런데도! 그 도둑놈이 사라져버리고 말 듯 가물가물하다는 것이다[猶恐失之]. 너무도 절실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말년 공자의 호학의 이 열렬한 태도를 배우자! 사람이..
16. 한쪽으로 치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라 8-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미친 듯이 정열적으로 보이면서도 정직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보이면서도 견실하지 않고, 촌스러운 듯 고지식하게 보이면서도 신실치 않아 믿을 수 없는 자들, 이런 놈들을 나는 상대하지 않는다.” 8-16. 子曰: “狂而不直, 侗而不愿, 悾悾而不信, 吾不知之矣.” 고주ㆍ신주가 제각기 뉘앙스가 다르나 이렇게 추상적 언어는 정밀한 주해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내가 이해한 대로 나는 써놓았을 뿐이다. 13-21, 17-16의 논의를 참고할 것이다. ‘광(狂)’하면 ‘직(直)’한 미덕이 있어야 하고, ‘통(侗)’하면 ‘원(愿)’한 미덕이 있어야 하고, ‘공(悾)’하면 ‘신(信)’한 미덕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미덕이 없으면 봐..
15. 황홀한 관저의 노랫가락 8-15.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노나라의 위대한 음악가인 악사(樂師) 지(摯之)의 창으로 시작되는 그 「관저(關雎)」의 종장 마지막 순간까지, 그 장엄한 관현악 연주가 아직도 내 귀에 양양(洋洋)하게 넘실거리고 있다!” 8-15. 子曰: “師摯之始, 關雎之亂, 洋洋乎! 盈耳哉.” ‘사지(師摯)’는 노나라의 악장으로서 위대한 음악가였고 공자가 음악의 세계에 있어서 극히 존중한 인물이었으며 공자는 그에게서 금(琴)을 배웠다. 사양자(師襄子)라는 이름으로도 등장하는 그 인물은 음악에 있어서는 공자의 선생이었다. 주도(周道)가 쇠미(衰微)해지면서 정나라. 위나라 음악들이 일어나고 주나라 정통의 정악이 없어지고 실절(失節: 박자가 개판이 되어버렸다)되었는데 이를 노나라 태사인 지..
14. 그 지위에 있어야 정치를 도모할 수 있다 8-1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정확한 벼슬자리에 있지 않으면 정사를 도모하지 않는다.” 8-14. 子曰: “不在其位, 不謀其政.” 공자의 삶의 한 원칙이었을 것이나, 편해에서도 밝혔듯이, 이것은 「헌 문」 27에 중출(重出)하고 증자학파의 채록이 분명하므로, 아마도 증자학파의 정신을 나타내는 로기온 파편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증자는 함부로 정치에 간여하는 것을 싫어했을 것이다. 공자학단을 지키는 어떤 원칙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 요즈음의 여론정치시대에는 이 말은 적합하지 않다. 이 말은 왜곡되면 재야의 사상가가 일체 정부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얘기로 악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시대에서는 재야의 사상가들일수록 정치에 대하여 발언을 해야..
13. 나라에 도가 있을 땐 가난한 게, 도가 없을 땐 부귀한 게 부끄럽다 8-13.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증험하는 것을 착실하게 해가면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도덕적 가치를 지켜야 한다. 위험한 나라에는 들어갈 필요가 없고, 어지러워진 나라는 거(居)하지 말고 떠나라.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자신을 드러내도 좋으나, 천하에 도가 없으면 숨어버려라.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가난하고 비천하게 사는 것이 치욕이요,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부유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치욕이니라.” 8-13. 子曰: “篤信好學, 守死善道. 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공자의 유랑경험을 반영한 파편일 것이다. ‘독신호학(篤信好學)’과 ‘수..
12. 배움에 뜻을 둔다는 것 8-1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삼 년쯤 공부하고서도 녹봉에 뜻을 두지 않는 자를 얻기가 쉽지 않구나.” 8-12. 子曰: “三年學, 不至於穀, 不易得也.” 이것 역시 후기 학단의 사정을 반영하는 파편일 것이다. 공자 때는 그렇게 인재등용이 활발히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삼 년이라는 숫자는 당시로서는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인간이 삼 년 공부한다고 뭘 그리 알겠는가? 그러나 삼 년만 공부하면 모두 벼슬길로 팔려나가는 상황이 된 것이다. 피상적인 배움을 가지고 사회에 나가서 지배층이 되어 설치는 것이다. 삼 년 배웠다고 나대지 않고 지긋하게 더 공부하려는 인물이 드문 상황이 된 것이다. 학문에 있어서 3년이라는 세월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엉덩이를 붙이고 더 지긋하게 ..
11. 후천적 노력이 정말 중요하다 8-1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주공의 자질을 타고난 아름다운 인간이라 할지라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 8-11. 子曰: “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不足觀也已.” ‘주공의 자질[周公之才]’이라는 것은 공자로서 한 인간에 대하여 찬미할 수 있는 극도의 표현이다. 사실 이러한 표현을 공자 당대에 공자 스스로 썼을까, 도무지 의문이 간다. 역시 공자이든, 주공이든, 관념화되어버린 후대의 언사임이 분명하다. 그 뜻인즉, ‘주공지재(周公之才)’라는 것은 인간이 타고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천적 재질이다. 인간에게는 타고나는 선천적 조건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다. 잘생긴 사람도 있고, 머리가 좋은 사람도 있고, 키가 큰 사람도 있고, 피부..
10. 난리를 일으키는 두 부류의 사람 8-10.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용맹을 사랑하면서 자신의 빈곤한 처지를 증오하는 자들이 대체로 반란을 일으킨다. 어떤 사람이 불인(不仁)하다고 해서, 그를 너무 심하게 증오하고 휘몰아치면 그 또한 반란을 일으킨다.” 8-10. 子曰: “好勇疾貧, 亂也.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 여기 ‘난(亂)’이라는 표현 자체가 고정된 체제를 전제로 한 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에 대한 깊은 증오로부터 출발해서는 아니된다. 혁명의 깊은 심연에는 항상 보편적 가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맥락의 전제하에서만 의미 있을 수 있는 장이다. ‘호(好)’는 거성이다. ○ 용맹을 좋아하면서 주어진 분수를 ..
9. 유교의 우민화정책인가 합리적 방법인가 8-9.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백성은 말미암게 할 수는 있으나, 알게 할 필요까지는 없다.” 8-9. 子曰: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이 장은 『논어』 중에서 실로 많은 해석이 가능하고 또 그만큼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장이다. 간단히 나의 생각만을 논술하겠다. 가장 전통적인 해석은 물론 고주의 입장이며, 반드시 그렇게 해석되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수도 있겠지만, 유가의 우민(愚民)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백성들이 정부의 시책을 따르게 할 뿐이며[可使由之] 그 시책이 왜 그러한 것인지 그 이유나 내막을 알게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不可使知之]이다. 요즈음 같은 민주세상의 감각으로 볼 때, 더구나 정보가 유통되어 야만 모든 것이..
8. 시와 예와 악으로 보는 배움의 과정 8-8.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람은 시(詩)에서 배움을 일으키고, 예(禮)에서 원칙을 세우며, 악(樂)에서 삶을 완성시킨다.” 8-8. 子曰: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제가(諸家)의 설이 분분하지만 공자의 시대의 실제 정황에 즉하여 왜 이런 말이 나왔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증자의 말이 끝나고 공자의 말이 시작되면서 편의 분위기가 격상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들은 앞서 말했듯이 증자학단 내에 전승되어 오던 공자의 말들이었을 것이다. ‘시(詩)’는 요즈음의 시(poems)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노래다. 물론 노래가사가 시로 남았지만, 그것은 반드시 멜로디와 악기를 동반했던 노래였다. 인생은 시에서 흥한다[興於詩]. 여기서 흥이란 단..
7. 유학자의 삶의 무게 8-7. 증자가 말하였다: “선비는 모름지기 드넓고 또 굳세지 않을 수 없다.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도다. 인(仁)을 어깨에 메는 나의 짐으로 삼으니 또한 무겁지 아니 하뇨? 죽어야만 끝날 길이니 또한 멀지 아니 하뇨?” 8-7.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고, 유가의 세속적 휴매니즘 정신의 고매함을 잘 드러내는 명구라 하겠다. 여기서 사(士)는 일정한 위를 가진 관리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반교양인의 뜻으로 확대되어 있다. ‘홍(弘)’은 ‘인간세를 널리 유익하게 한다[홍익인간(弘益人間)]’(『삼국유사』 「고조선」)의 ‘홍(弘)’이며, 지식인의 포용적 삶의 자세를 나타낸다. ‘의(毅)’는 ..
6. 증자가 생각하는 군자다운 사람 8-6. 증자가 말하였다: “부모를 조실(早失)하고 고아가 된 어린 군주를 맡길 만하고, 사방 백리 한 나라의 운명을 기탁할 만하며, 사직이 위태로운 생사존망의 대절(大節)에서 아무도 그 절개를 빼앗을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은 군자다운 인물이런가? 군자다운 인물이로다!” 8-6. 曾子曰: “可以託六尺之孤, 可以寄百里之命, 臨大節而不可奪也. 君子人與? 君子人也.” 해석은 고주와 신주를 두루 참작하였다. 이 말도 역사적으로 『논어』 중 에서 가장 인용이 많이 되었던 구절 중의 하나이다. 공자의 사후 공자학단을 잘 리드해나갔던 것을 보면 증자는 얌전한 사람이었으며 내면적 성찰이 깊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격이 치우친 곳이 없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 순화로워 많은 사람..
5. 증삼이 묘사한 안연의 모습 8-5. 증자가 말하였다: “능하면서도 능하지 못한 이에게 물으며, 학식이 많으면서도 학식이 적은 자에게 물으며, 가지고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여기고, 가득 차 있으면서도 빈 것처럼 여기고, 누가 시비를 걸어와도 따지며 다투지 아니 한다. 옛적에 나의 친구들이 이런 경지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8-5. 曾子曰: “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昔者吾友嘗從事於斯矣.” 고주에 마음은 여기 증자가 말하는 ‘우(友)’가 안연(顔淵)이라고 말한다. 새로 나온 당사본 정현 주는 안연, 중궁, 자공 등의 복수인물들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증자는 이들에 비하면 한참 어린 후배일 뿐 아니라, 감히 그들을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위치에 있질 않았다..
4. 증자가 죽기 전에 위정자에게 해주고 싶던 말 8-4. 증자가 병환이 깊었다. 맹자가 병문안을 왔다. 8-4. 曾子有疾, 孟敬子問之. 이에 증자는 정중하게 말 문을 열었다: “새도 죽으려하면 그 울음소리가 애처롭게 아름답고, 사람도 이 세상을 하직함에 그 말이 착하여 들을 만한 것이라오. 군자가 귀하게 여기는 도(道)가 세 가지가 있다오. 용모를 움직일 때는 반드시 폭력과 태만을 멀리하시오. 얼굴빛을 바르게 할 때에는 반드시 신실함에 가까워야 하오. 말을 입 밖에 낼 때에는 비루함과 거역함을 멀리하시오. 예라는 것은 사소한 규정이 아니라오. 제기를 어떻게 진열할까 하는 일 따위는 유사(有司)에게 맡기시오.” 曾子言曰: “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 君子所貴乎道者三: 動容貌, 斯遠暴慢矣;..
3. 증자 ‘전이귀지(全而歸之)’에서 해방되다 8-3. 증자가 병이 깊어졌다. 이에 문중(門中)의 제자들을 불러 죽음의 침상에서 말하였다: “열어 내 발을 보아라! 열어 내 손을 보아라! ‘벌벌떠네, 오들오들. 깊은 연못에 임한 듯, 엷은 얼음 위를 걸어가듯’ 시(詩)에 이런 노래가 있지 않니. 아~ 이 순간 이후에나, 나는 비로소 온전한 몸을 지키는 근심에서 벗어나게 되었노라! 아해들아!” 8-3. 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冰.’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 참으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이 장면을, 『효경』이 말하는 ‘신체발부(身體髮膚), 수지부모(受之父母), 불감훼상(不敢毁傷), 효지시야(孝之始也)’라는 판에 박힌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해..
2. 무례한 인간의 특징 8-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공손하면서 예의 원칙이 없으면 피곤하기만 하고, 삼가되 예의 원칙이 없으면 주눅 들기만 하고, 용감하되 예의 원칙이 없으면 어지럽게 되고, 정직하되 예의 원칙이 없으면 사람 목을 조른다. 8-2. 子曰: “恭而無禮則勞, 愼而無禮則葸, 勇而無禮則亂, 直而無禮則絞. 사회지도자인 군자가 가까운 사람들을 돈독하게 하면 백성들이 인한 풍속을 일으키고, 연고 있는 자나 친구를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각박해지지 않는다.” 君子篤於親, 則民興於仁; 故舊不遺, 則民不偸.” ‘공(恭)’에서 ‘교(絞)’까지 예의 원칙을 말하는 4개의 전반 문장과 ‘군자(君子)’로 시작되는 후반 문장이 원래 분리되어 있던 다른 파편들이라는 오역(吳棫)의 지적은 적확하다. 그리고 후반..
1. 고공단보의 맏아들 태백에 대해 8-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태백은 지극한 덕의 소유자라고 일컬을 만하다. 세 번이나 천하를 동생에게 양보하였으나, 양보하는 티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를 칭송할 수도 없었다.” 8-1. 子曰: “泰伯, 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 民無得而稱焉.” ‘태백(泰伯)’은 주나라 창업 전기(前期)의 현인(賢人)이다. 주왕조의 선조들은 은왕조의 치하에서 섬서성 서부의 서방 일제후(一諸侯)로서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때의 군주가(물론 후대에 추존되었겠지만) 주태왕(周太王) 고공단보(古公賣父)이다. 후직(后稷)의 12대손이라 한다. 이 주태왕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이 태백(泰伯), 차남이 중옹(仲雍), 막내가 계력(季歷)이었다. 계력에게 어진 부인 태..
태백 제팔(泰伯 第八) 편해(篇解) 「태백」이라는 편명도 결코 우발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다. 태백은 오나라의 시조로서 주태왕의 세 아들 중의 장자이며 문왕(文王)의 삼촌 되는 사람이다.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주나라를 있게 만든 현자이다. 이 태백의 이야기에 대한 공자의 멘트는 18ㆍ19ㆍ20ㆍ21장에 고성왕(古聖王)들의 지덕(至德)을 칭송한 공자의 멘트와 일군(一 群)의 로기온 컬렉션으로서 연속성을 이루는 것이다. 18장은 순(舜)과 우(禹)를, 19장은 요(堯)를, 20장은 순ㆍ무왕ㆍ당우(唐虞)의 시대와 주초(周初), 21장은 우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1장만 앞으로 떨어져나가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편집자의 놀라운 구성감각을 엿볼 수가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고성왕 칭송어군 앞으로, 그러니까 제1..
37. 공자란 사람에 대해 7-37. 공자께서는 따사로우시면서도 엄격하셨고, 위엄이 있으시면서도 사납지 않으셨고, 공손하시면서도 자연스러우셨다. 7-37. 子溫而厲, 威而不猛, 恭而安. 유학이든 도가의 학문이든 선진고경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의 학문의 핵심은 결국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라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는 데 있다. 남을 위한 배움이 아니요, 나를 위한 배움이라는 것이다. 초월적 존재를 신앙하며 주체를 버리는 상향(上向)의 배움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의 내면에 덕을 온축시 켜 내면적 초월을 이룩하는 주체적 향상(向上)의 배움이다. 이러한 나의 내면적 덕(德)의 상달이 지향하는 것은 어떤 초월적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적 큰 인격을 형성하고자 함에 있다. ‘큰 인격’이란 항상 피..
36. 늘 걱정투성이인 사람에게 7-3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인품이 틔여 너르고 여유롭고, 소인은 인품이 좁아 늘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 7-36. 子曰: “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 정주한간(定州漢簡)본에는 ‘君子靼蕩, 小人長戚’으로 되어있다. 아마도 한간본이 고본의 모습일 것이다. 필사자들이 읽는 재미를 더하기 위해 ‘탕(蕩)’과 ‘척(戚)’ 한 글자씩을 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이미 정현시대 이전에 일어났을 것이다. 돈황문서 정현주도 ‘탕탕(蕩蕩)’ ‘척척(戚戚)’으로 되어 있고, 주석도 본문의 그러한 모습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당나라 때의 『경전석문』은 ‘魯讀坦蕩爲坦湯, 今從古’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정주한간본처럼 두 글자로 중복되지 않는 판..
35. 사치스럽기보단 검소하라 7-35.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람이 지나치게 사치하면 불손케 되고, 지나치게 검약하면 고루케 되나, 그래도 고루한 것이 불손한 것보다는 낫다.” 7-35. 子曰: “奢則不孫, 儉則固. 與其不孫也, 寧固.” 황본은 ‘불손(不孫)’이 ‘불손(不遜)’으로 되어있다. ‘여기(與其)A녕(寧)B’는 ‘A 보다는 차라리 B’라는 뜻으로 현대백화문에서까지 잘 쓴다. 중국어의 연속성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1899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은허의 갑골문도 오늘날의 중국어와 기본적 신택스(syntax)가 동일하다. ‘손(孫)’은 거성이다. ○ ‘손(孫)’은 공순(恭順)한 것이다. ‘고(固)’는 고루(固陋)한 것이다. 사치나 검약이 모두 그 중(中)을 잃었으나, 차라리 사치의 폐해가 더 ..
34. 중병을 앓는 공자에게 기도하길 청한 자로 7-34. 공자께서 병이 걸리셨는데 위중한 상태에 이르렀다. 자로가 하느님께 기도할 것을 청하였다. 공자께서 이에 말씀하시었다: “아프다고 하느님께 비는 그런 일도 있는가?” 7-34. 子疾病, 子路請禱. 子曰: “有諸?” 자로가 대답하여 아뢰었다: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습니다. 뢰문(誄文)에 ‘그대를 하늘과 땅의 하느님께 기도하노라’라고 쓰여 있지요.” 子路對曰: “有之. 誄曰: 禱爾于上下神祇.”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자로야! 나는 이미 하느님께 기도하며 살아온 지가 오래되었나니라.” 子曰: “丘之禱久矣.” 참으로 다시 한 번 공자의 인품의 깊이와 그의 종교적 심성의 심연을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장이다. 공자가 귀로하여 애..
33. 실천하길 싫어하지 않았으며, 가르치길 게을리 하지 않았다 7-33.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성(聖)과 인(仁)에 관해서는 내 어찌 감히 자처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도를 실천함에 싫증내지 아니 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데 게으름이 없는 데는 자신 있다 말하리라.” 7-33. 子曰: “若聖與仁, 則吾豈敢? 抑爲之不厭, 誨人不倦, 則可謂云爾已矣.” 공서화가 옆에 있다가 말하였다: “선생님, 바로 그 점이 저희 제자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오니이다.” 公西華曰: “正唯弟子不能學也.” 이 장의 내용은 이미 본편 제2장(7-2)에 나왔다. ‘가위운이이의(可謂云爾已矣)’는 강력한 자신감을 나타내는 어기(語氣)이다. 공서화가 여기서는 히트를 한 방 쳤다. 그런데 ‘불능학야(不能學也)’를 모두 ‘배울 수 없다’..
32. 군자의 도(道)는 행하기 어려워 7-3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문자의 세계에 있어서는 내가 남만 못할 것이 없다. 그러나 군자의 인격을 몸소 실천함에 있어서는 나는 아직도 한참 미흡하다.” 7-32. 子曰: “文, 莫吾猶人也. 躬行君子, 則吾未之有得.” 무엇을 주해하리오? 오로지 나 또한 군자의 인격을 실천함에 한참 미흡하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막(莫)’은 의문사이다. ‘유인(猶人)’은 사람들의 수준을 뛰어넘는다는 말은 못해도 그 수준에는 확실히 미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미지유득(未之有得)’이라는 것은 온전하게 얻지 못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자겸(自謙)의 말들이다. 이러한 말씀들로서 공자 언행의 난이완급(難易緩急: 어려움과 쉬움, 천천히 함과 급히 함)을 족히 볼 수 있다..
31. 함께 노래 부르는 모습에서 보는 공자의 호학정신 7-31. 공자께서는 사람들과 더불어 노래를 잘 부르셨다. 그때 누군가 노래를 잘 한다고 생각되면 반드시 그로 하여금 노래를 다시 부르게 하셨다. 그리고 다 듣고 나서 또 따라 부르셨다. 7-31. 子與人歌而善, 必使反之, 而後和之. 아주 하찮은 일 같지만, 공자의 마음 씀새와, 그가 공부해간 열정의 역정을 리얼하게 느끼게 하는 파편이다. 옛날에는 『시경』의 시가 노래 아닌 것이 없었다. 한국사람처럼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민족도 세계적으로 드물다. 모이면 꼭 노래 부르라 하고, 술 먹고나면 반드시 같이 노래 부르고, 또 이차ㆍ삼차 가다보면 노래방으로 골인하기 일쑤다. 위지동이전의 기술에서부터 내려오는 조선인의 노래습관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다...
30. 자신의 잘못을 바로 인정한 공자 7-30. 진(陳)나라 사패(司敗: 법무장관)가 공자께 여쭈었다: “노나라의 소공이 예를 알았습니까?” 공자께서 이에 말씀하시었다: “예를 아셨습니다.” 7-30. 陳司敗問昭公知禮乎? 孔子曰: “知禮.” 공자께서 자리를 물러나시었다. 그러자 사패는 제자 무마기(巫馬期)에게 읍하여 다가오게 하였다. 그리고 말하였다: “나는 군자는 본시 편당 들지 않는다고 들었소. 그런데 그대 군자께서는 편당을 드시는군요? 소공께서는 오나라 여자를 부인으로 취하였소. 그런데 오나라와 노나라가 동성이 되니까 부인의 성을 숨기기 위해 부인을 오맹자(吳孟子)라 부르셨소. 소공께서 예를 아신다고 한다면 세상에 누 구인들 예를 알지 못한다 하겠소?” 孔子退, 揖巫馬期而進之, 曰: “吾聞君子不黨..
29. 인(仁)은 멀리 있지 않다 7-29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인(仁)이 멀리 있다구? 내가 원하면 당장 여기로 달려오는 것이 인(仁)인데!” 7-29. 子曰: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논어』의 째즈적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유명한 장이다. 후세의 점(漸)ㆍ돈(頓)의 논의의 원형을 이루는 것이다. 째즈는 역시 돈(頓)이다. 공자는 인(仁)을 어느 누구에게도 쉽게 허여(許與)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구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테오스)이나 천국(바실레이아)이나 종말(에스카톤)이나 로고스 같은 것이다. 쉽게 실현되지 않으면서도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리면, 인간의 실존 위에 항상 부담스럽게 매달려 있는 거대한 바위덩어리 같은 것이다. 공자도 인(仁)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쉽게 구현되는 것으..
28. 자기의 울타리를 깨고 나아가는 공자 7-28. 호향(互鄕)이라는 지방의 사람들은 편협하고 투박하여 더불어 말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호향의 젊은 청년이 뵙기를 청하자 공자께서는 기꺼이 그를 만나주셨다. 공자의 문인들은 걱정과 의혹에 휩싸였다. 7-28. 互鄕難與言, 童子見, 門人惑. 그러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는 자기발전을 도모하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퇴폐적인 인간과 더불어 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대들 같은 젊은이를 만난 것을 탓하다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사람이 자기 몸을 정결히 하고 찾아오면 그 정결함을 허락하는 것이다. 어찌 나에게서 떠난 이후를 내가 보장할손가?” 子曰: “與其進也, 不與其退也, 唯何甚! 人潔己以進, 與其潔也, 不保其往也.” 나의 번역은 고주를 잘 뜯어보면 그 정당..
27. 많이 듣고 많이 보는 것이 지식을 쌓는 길 7-27.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대저 소상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구 지어내는 녀석들이 많다. 나에게는 그러한 삶의 태도가 전혀 없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듣는다. 그리고 그 중에서 훌륭한 것을 택하여 따른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보면서 문제를 인식한다. 이것이야말로 앎의 올바른 차서(次序)일 것이다.” 7-27. 子曰: “蓋有不知而作之者, 我無是也. 多聞擇其善者而從之, 多見而識之, 知之次也.” 여기 ‘지어낸다[作之]’는 많은 주석가들이 창작의 의미로 취하는데 공자에게 있어서는 역시 악곡의 창작이 가장 중요한 삶의 테마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알지도 못하면서 마구 지어낸다!’ 이것은 공자의 세태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
26. 많이 잡기보다 적당히 7-26. 공자께서는 낚시질은 하셨으나 그물질은 하지 않으셨다. 주살로 새를 잡기는 했으나 모여 잠자는 새들을 쏘지는 않으셨다. 7-26. 子釣而不綱, 弋不射宿. 인도인들의 논리로 본다면 어차피 살생인데 뭘 가리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인간의 생존의 현실이 살생을 기피할 수 없다는 조건하에서는 공자의 마음씀새는 보다 섬세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동학 ‘하늘님’ 사상의 진실한 실천가이며 제2세 교조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은 ‘이천식천(以天食天)’을 말한다. 천지만물이 모두 하느님이며, 따라서 인간의 인권(人權)만을 존중할 것이 아니라 만물의 물권(物權)도 동일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타 생물을 죽여 먹는다는 것은 하나된 일체생명에 대한 파괴..
25. 떳떳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되어라 7-25.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성인은 참으로 만나기 어렵구나! 그러나 군자만 만날 수 있어도 나는 행복하다.” 7-25. 子曰: “聖人, 吾不得而見之矣; 得見君子者, 斯可矣.” 공자께서 또 말씀하시었다: “선인을 만나기도 참으로 어렵구나! 그러나 원칙 있는 사람만 만나도 나는 행복하다. 없으면 서 있는 체하고, 비어있으면서 차있는 체하고, 빈곤하면서 풍요로운 체하는 인간을 어찌 원칙 있다 말할 수 있을까.” 子曰: “善人, 吾不得而見之矣; 得見有恆者, 斯可矣. 亡而爲有, 虛而爲盈, 約而爲泰, 難乎有恆矣.” 여기 나오는 ‘성인(聖人)’은 ‘귀 밝은 사람’의 뜻에서 이미 완전한 덕성을 구현한 자, 즉 니체가 말하는 초인(超人)에 가까운 의미로 진화하였다는 것을 ..
24. 공자의 네 가지 가르침 7-24. 공자께서는 항상 네 가지로써 배우는 자들을 가르치셨다. 그것은 문(文)ㆍ행(行)ㆍ충(忠)ㆍ신(信)이었다. 7-24, 子以四敎: 文ㆍ行ㆍ忠ㆍ信. 문(文)이란 일차적으로 문자의 터득과 관련되며 문헌을 통하여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이요, 문헌학이다. 행(行)이란 사회적 실천이며 사회과학적 측면이다. 충(忠)이란 인간의 내면적 덕성의 함양이며 도덕의 함양이다. 신(信)이란 항상 사람들이 잘못 해석하는데 그것은 신험(信驗)이며, 입증(verification)이며, 과학적 사유와 관련된 것이다. 공문사교(孔門四敎) 문(文) 문자학․어학(philology), 문학(literature) 행(行) 사회과학(social science), 사회적 실천(soci..
23. ‘그게 바로 나야 나’라 말한 공자 7-23.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얘들아! 내가 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에게 숨기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뿐만 아니라 나는 행(行)하여 너희들과 더 불어 하지 않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나 구(丘)로다!” 7-23. 子曰: “二三子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丘也.” 내가 『논어』를 읽으면서 전율에 가까운 감명을 받았던 구절이 바로 이 ‘시구야(是丘也)’라는 한 마디이다. 어찌 성인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정직하고 적나라한 말을 할 수 있을까? 어찌 이토록 자신을 따르는 자들 앞에 벗겨 드러낼 수가 있는가? 어찌 이토록 자신의 현실태에 대하여 강렬한 자신감을 토로할 수 있는가? 나는 이 구절에서 인간 공자를 절감하고 또 절..
22. 사마상퇴가 공자를 죽이려 하다 7-2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하늘이 나에게 덕(德)을 내려주셨으니, 환퇴인들 감히 나를 어찌하랴!” 7-22. 子曰: “天生德於予, 桓魋其如予何?” 이 사건은 「공자세가(孔子世家)」 15에 기술되어 있다. 애공 3년, 공자 나이 60세 즈음, 유랑 길에서 송(宋)나라를 지날 적에 당한 봉변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어디쯤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환퇴는 송나라의 중신이었고 사마의 벼슬에 있는 자였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공자를 죽이려 하였다. 서둘러 피해야 할 상황에서 피하는 데 급급하지 아니 하고 이 말을 발한 것이다. 환퇴는 성이 상(向)이고, 이름이 퇴(魋)이다. 송나라 환공(桓公)의 후예이기 때문에 환퇴(桓魋)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
21. 사람의 장단점, 모든 게 나의 본보기 7-2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세 사람만 길을 가도 반드시 그 속에 내 스승이 있다. 그 선한 자를 가려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는 나를 고치는 귀감으로 삼는다.” 7-21.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어려운 주석을 달 필요가 없다. 세 사람이라는 표현도 반드시 3인에 한정되는 말은 아닐 것이지만, 그 문학적 표현의 아름다움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의 ‘개지(改之)’는 불선자를 귀감 삼아 나를 고친다는 뜻으로도 해석 가능하고, 불선자 그를 고쳐준다는 뜻으로도 해석은 가능하다. 후자는 사회적 실천이 될 것이나 공자의 기질로 볼 때, 좀 과한 해석이다. 「이인」 17을 참조하는 것이 좋다. 세..
20. 공자가 말하지 않았던 네 가지 7-20. 공자께서는 괴(怪)와 력(力)과 난(亂)과 신(神)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7-20. 子不語怪, 力, 亂, 神. 『논어』의 가치가 이 장 하나의 존재만으로도 전 우주를 뒤덮고도 남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내 말을 과장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내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논어』는 한 사람의 말을 적어놓은 일시의 기록이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했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읽고 공감하며 그들의 삶을 구성해왔던 공동체의 공동가치의 기반이다. 20세기에 들어서서 급격히 서구적 가치가 동점(東漸)의 세(勢)를 과시하면서 일시적 가치의 혼란이 생겨났고, 마치 기독교의 신ㆍ구약성서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힌 책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 출판물 통계에도 그..
19. 공자, 옛 것을 좋아하여 민첩히 구하는 자라고 천명하다 7-19.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아니요, 옛 것을 좋아하고, 민첩하게 구하여 아는 자이로다.” 7-19. 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 敏以求之者也.” 『중용(中庸)』 20장에 ‘생이지지(生而知之)’, ‘학이지지(學而知之)’, ‘곤이지지(困而知之)’라는 말이 있어 인간의 지혜의 단계를 3분하여 말한 듯한 인상을 주고, 「계씨」 9에도 비슷한 논의가 있다. 그러나 본 장에서 공자는 그러한 3단계를 근원적으로 전제하여 말한 것 같지 않다. ‘생이지지’, ‘학이지지’, ‘곤이지지’의 문제도 지(知)의 차원이 근원적으로 삼 단계로 나뉜다는 것이 아니다. 생지나, 학지나, 곤지나 결국 지(知)에 이르기는 매한가지라는..
18. 공자의 호학, 발분망식(發憤忘食) 7-18. 섭공(葉公)이 공자의 위인(爲人)에 관하여 자로에게 물었다. 자로는 대답하지를 않았다. 7-18. 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공자는 이에 말씀하시었다: “자로야! 너는 왜 말하지 않았느냐? 우리 선생의 사람됨은, 분발하면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움을 느끼면 세상 근심을 다 잊어버린다오. 그러기에 늙음이 다가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런 사람 이라오.” 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이 사건은 공자가 유랑하던 시기, 63ㆍ4세 즈음에 일어난 해프닝이다. 섭(葉)은 남방의 대국 초(楚)나라의 영지였다. 현재 하남성 섭현(葉縣) 지역이다. 섭공은 이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로서 내외의 신망을 크게 얻고 있었던 큰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