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06/08 (63)
건빵이랑 놀자
식민지적 발전?③ 그렇다면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함으로써 오히려 발전을 이룬 걸까? 이것을 이른바 식민지적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남의 나라에 주권을 넘겨주고 나서 달라진 것을 발전이라 부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인도는 애초부터 하나의 통일된 나라가 아니었다(지금까지 우리는 인도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인도를 마치 하나의 나라인 것처럼 취급했지만, 사실 인도는 나라라기보다는 한 지역, 아대륙의 명칭이다). 앞서 여러 차례 보았듯이 인도는 역사적으로 통일기보다 분열기가 압도적으로 길고 많았다. 중국의 역사에서는 분열이 비정상적이었으나 인도의 역사에서는 통일이 오히려 비정상이었다. 인도는 ‘주권’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없었으므로(나라가 아닌 대륙, 문명권에 주..
식민지적 발전?② 그러나 근대화를 추진하는 주체가 영국이었으므로 ‘영국화’도 자연스럽게 추진되었다. 초대 인도 총독인 벤팅크(william Bentinck, 1774~1839)의 통치는 근대화와 영국화의 양면을 잘 보여준다. 그는 여러 가지 복지 정책을 실시했고, 인도인을 공무원으로 채용해 승진도 가능하게 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따라 죽는 사티(sati)와 같은 전근대적이고 불합리한 관습도 뜯어고쳤다. 여기까지가 근대화라면 영국화의 사례는 영어 교육 시행령이다. 인도에 영어 교육을 도입하는 문제를 놓고 10년간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진 끝에(이슬람 세력이 주로 반대했고, 힌두교 세력이 지지했다) 1835년에 벤팅크는 영어 교육을 채택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뒤부터 인도인들은 사고와 행동방식에서 영국..
식민지적 발전? 영국의 ‘정식’ 식민지가 되었으니 이제 그에 걸맞은 통치 기구가 필요했다. 인도에 영국식 관료 행정 기구를 이식하는 작업은 벵골을 식민지화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지나치게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부패와 착취만을 일삼은 동인도회사의 짧은 통치 경험은 영국에 커다란 교훈이 되었다. 1772년 동인도회사의 벵골 지사로 파견되었다가 운 좋게도 정부의 방침이 바뀌는 바람에 느닷없이 총독(벵골 총독)으로 신분이 상승한 헤이스팅스와 그 후임 총독인 콘월리스는 뛰어난 행정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두 총독이 지배하던 시기에 벵골의 식민지 행정은 확고한 골격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 전 인도 지배에도 관철된다. 벵골에서 영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관리들의 급료를 챙겨주는 것이었다. 동인도회사 시절에..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다② 하지만 저울의 균형은 잠시뿐이고 결국은 한쪽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마라타 동맹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하자 균형이무너졌다. 1775년 마라타의 권력 다툼에서 밀린 세력이 봄베이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에 도움을 청하면서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영국은 인도에 진출한 이후 첫 패배를 기록했다. 전쟁의 결과가 충격적인 탓에 여파도 컸다. 전쟁에서 발생한 재정적 타격을 만회하기 위해 초대 벵골 총독 헤이스팅스(Warren Hastings, 1732~1818)는 완충국인 오우드를 공격해 영토의 일부를 빼앗았는데, 그 때문에 그는 본국에 송환되어 탄핵 재판을 받았다. 본인에게는 불행이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에서는 벵골 총독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그..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다 인도 전체를 통틀어 아직 영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 최후의 세력을 꼽자면 마라타가 있었다【실은 카르나타카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인도에는 영국에 당당히 맞선 나라가 있었다. 마이소르(Mysore)라는 왕국이었다. 마이소르는 특히 하이데르 알리와 그의 아들 티푸 술탄이 지배하던 18세기 후반에 남인도에서 영국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일찍부터 영국의 진출에 위협을 느낀 하이데르와 티푸는 군대를 근대화하고 내정을 개혁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들은 당시 인도인으로서는 드물게 국제적인 안목을 지니고 있어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인근의 여러 나라와 동맹을 맺으려 백방으로 노력했다. 특히 티푸는 유럽에서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을 때 스스로 자코뱅당에 가입하는 등 특이하다 할 만큼 세계..
나라를 내주고 얻은 통일② 처음 몇 년간은 만사가 순조로웠다. 영국에서는 인도에서 돈을 많이 벌어 귀국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상류층의 파티에서도 인도 이야기가 단골 화제로 올랐다. 그러나 회사 직원이나 인도에 파견된 회사 소속의 군인들이 그랬다는 것이고, 회사 자체는 사정이 달랐다. 동인도회사는 예전에는 무역을 통해 돈을 벌었다면, 이제는 세 수입을 더 노리게 되었다. 이것은 주식회사의 업무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수익을 낳는 분야가 늘었으니 회사의 재정은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동인도회사의 직원들은 온갖 불법과 탈법으로 개인적인 부만 쌓았으므로, 회사 전체의 이익은 예상만큼 크지 않았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경비만 늘어났다. 급기야 동인도회사는 큰 적자를 내게 되었고, 은행 융자..
나라를 내주고 얻은 통일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은 남인도가 무대였지만, 영국의 승리를 결정지은 전투가 벌어진 플라시는 인도 동북부 벵골의 한 지방이었다(영국은 이미 전쟁 전부터 벵골의 중심지인 캘커타[2000년 콜카타로 이름을 고침]에 진출해 있었다). 이는 곧 전후 영국의 지배가 남인도에만 국한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사실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한 것은 한낱 30대 초반의 병참장교에 불과한 클라이브의 공적만이 아니었다. 당시 벵골의 장군이었던 미르 자파르(Mir Jafar, 1691~1765)는 벵골의 태수 자리를 노리고 영국을 적극 지원했다. 현직 태수와 미르 자파르의 싸움은 곧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이 벵골 내부에서 전개되는 것과 같았다.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자 자연히 미르 자파르..
남의 집에서 벌인 힘겨루기② 18세기 중반까지 인도에 진출한 영국과 프랑스는 힘이 서로 엇비슷했다. 그러나 한 집의 호주가 둘일 수는 없는 법, 먼저 호적을 정리하자고 한 것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국내에서 통한 중상주의 정책을 해외로 연장하기 위해 1741년에 뒤플렉스(Joseph-François Dupleix, 1697~1763)를 프랑스령 인도의 수도인 퐁디셰리의 지사로 파견했다. 인도에 프랑스 제국을 건설하는 게 그가 받은 지시이자 그의 야망이었으므로 그는 지사 따위에 머물려 하지 않았다. 1746년에 그는 프랑스 함대를 동원해 영국 세력의 근거지인 남인도의 마드라스를 함락했다. 이로써 인도 경영을 놓고 두 나라의 한판 승부가 불가피해졌다. 무대는 남인도의 카르나타카였다. 여기서 영국과 프랑스는 ..
8장 외부에서 온 인도의 통일 1. 분열된 조국과 통일된 식민지 남의 집에서 벌인 힘겨루기 18세기 중반 이후 무굴 제국은 1차 부도가 난 상태에서도 100년이나 더 존속하다가 1858년에야 ‘최종 부도’ 처리되었다. 이 기간 동안 무굴은 제국의 지위가 아니라 한낱 지방정권에 불과한 위상으로 그저 명맥만 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무굴이 남긴 정치적 공백은 누가 메웠을까? 중국과 달리 인도의 역사는 통일 제국이 아니라 늘 분권화된 상태가 중심이었다. 그렇다면 인도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 쇠락했을 때 그 찬란한 통일의 빛만큼 짙은 분열의 그늘이 드리워진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번은 그 이전의 어떤 분열기와도 달랐다. 과거의 분열은 기본적으로 인도 토착 왕조들이나 인근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이 세력 다툼을..
중국식 사회주의의 문제③ 이것이 자본주의 단계를 생략한 데 따르는 경제적 문제라면, 정치적 문제는 제왕적 사회주의다. 서구에서 자본주의는 의회민주주의 정치제도와 쌍둥이처럼 함께 생겨나 함께 발달했다. 자본주의는 의회민주주의의 경제적 표현이고, 의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정치적 표현이다. 그러나 중국은 제국 시대를 끝내고 수십 년간의 분열기를 겪은 뒤 곧바로 사회주의로 이행했기 때문에 의회민주주의가 성립할 토양이 없었다. 그 결과 중국은 명색이 사회주의 ‘공화국’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전의 제국들처럼 1인 집권 체제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말하자면 ‘사회주의 황제’인 셈인데, 지위가 세습되지만 않았을 뿐 절대 권력에다 임기가 정해지지 않은 종신 권력인 것은 옛날의 천자와 다를 바 없었다(북한처럼 권력 ..
중국식 사회주의의 문제② 마오쩌둥은 분명히 사회주의자였지만 그가 구상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달랐다. 우선 중국은 노동자보다 농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 점에 주목한 마오쩌둥은 기존의 사회주의 이론을 수정해,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 사회주의혁명을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농민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인민해방군도 거의 농민으로 구성되었다. 사실 노동자와 농민의 차이는 크지 않다. 피착취계급이라는 점에서 처지가 같고, 따라서 해방을 지향하는 계급의식도 별로 다를 바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단계를 생략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는 사회주의혁명을 이루기 전에 이미 해결되었어야 하는 문제들이 사회주의국가를 수립한 뒤에 과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그것은 ..
중국식 사회주의의 문제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을 취한 정당이다. 1920년 전국대표회의에서 공산당을 창립한 코민테른 대표 보이틴스키(Grigori Voirinsky)와 중국의 지식인 리다자오(李大釗), 천두슈(陳獨秀)는 모두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들에 비해 이론적인 깊이는 부족했지만, 그들과 창당을 함께한 마오쩌둥도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처음부터 그들과 달랐다.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한 마르크스는 원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면 낡은 체제가 되어 자동으로 붕괴한다. 그 과정에서 사회 발전의 다음 단계인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떠한 사회 질서도 그 내부에서 발전할 여지가 있는..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생③ 전환점의 신호탄으로 마오쩌둥은 옌안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 시기에 홍군을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그 명칭에 걸맞게 국면은 거짓말처럼 급변했다. 인민해방군은 밀릴 때까지 밀린 다음 소도시부터 하나씩 수복하기 시작했다. 국부군이 장악한 대도시는 자연히 고립 상태에 빠졌다. 1947년 말에 마오쩌둥은 비로소 자신감을 보이며 내전이 전환 국면을 맞이했다고 선언했다. 과연 이듬해인 1948년 초부터 인민해방군은 대대적인 공세로 전환했다. 병력은 이미 비등해졌고, 전투의 주도권은 인민해방군으로 넘어왔다. 그 해 말에는 린뱌오의 부대가 만주 전체를 수중에 넣었다. 이어 한 달 만에 화북을 장악하고, 쉬저우에서 벌어진 내전 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인 회해(淮海) 작전에서 ..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생② 1945년 12월, 미국의 주선으로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회담이 이루어졌고, 이듬해 1월에는 양당 간에 정전협상이 체결되었다. 일견 평화가 깃들듯 보였다. 그러나 장제스는 오로지 단독 정권만 염두에 두었을 뿐 협상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먼저 배신한 측은 당연히 장제스였다. 1946년 3월에 열린 국민당 중전회(中全會)에서 장제스는 협정을 팽개치고 반공을 가결해버렸다【타고난 반공주의자라는 점에서 장제스는 한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과 비슷하다. 같은 세대의 두 사람은 완고한 성품도 비슷하고 지독한 권력욕도 닮았다. 이승만은 중국의 정황과 비슷한 해방 직후의 한반도에서 민족 지도자 김구는 물론 미군정까지도 권하는 좌우 합작을 줄기차게 거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해 결..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생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일본과 싸우는 중국은 자연히 연합국의 반파시즘 국제 통일전선의 일부가 되었고, 중일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었다. 그 덕분에 중국은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연합국 측의 직접적인 군사 원조를 받기 시작했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 혼자만의 힘으로 강대국 일본을 맞아 선전한 중국은 비로소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항일 전쟁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미국의 주선으로 중국이 연합국 4대 강국에 포함되어 장제스는 1943년 12월의 카이로 선언에서 루스벨트, 처칠과 자리를 함께하는 영광을 누렸다. 전황은 크게 호전되었어도 한 번 금이 간 국민당과 공산당의 관계는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회복은커녕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향해 달려갈수록 ‘전쟁..
합작의 성과와 한계④ 전선의 교착이 길어지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불화의 골은 깊어져만 갔다. 급기야 양측은 무력 다짐까지 벌이기에 이르렀다. 먼저 배신한 것은 장제스였다. 1941년 10월에 그는 황하 이남에 있던 홍군에게 황허 이북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홍군은 마지못해 따랐는데, 그것은 장제스의 교활한 계략이었다. 그는 8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 홍군을 습격했다. 7일간의 전투 끝에 7000명의 신사군이 궤멸을 당했다. 이 완난(皖南)사변으로 2차 국공 합작은 사실상 결렬되었다. 이렇게 적정이 내분되어 있을 때 만약 일본군이 총공세에 나섰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당시 일본도 그럴 처지가 못 되었다. 중국을 점령하는 게 여의치 않자 일본은 1940년 9월에 유럽의 독일, 이탈리아와 3국 군..
합작의 성과와 한계③ 원하던 형세는 아니었지만 일본도 이제는 장기전의 태세를 취해야 했다. 한 가지 방법은 만주를 점령할 때 써먹은 수법이었다. 일본은 베이징과 몽골, 상하이, 난징 등 주요 점령지마다 괴뢰정권을 세웠다. 특히 난징 정부는 매우 깔끔하게 구성되었다. 일찍이 국민당 좌파의 중심인물로 장제스와 맞수였던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해 일본의 품에 안긴 것이다. 정치 지도자에서 좌파의 변절자로, 또 민족의 매국노로 변신한 왕징웨이는 1940년 3월에 일본이 모든 괴뢰정부를 난징 정부로 통합하자 통합 괴뢰정부의 수반, ‘허수아비의 왕’이 되었다【마침 3개월 뒤인 1940년 6월 독일은 일본의 전례를 커닝이라도 한 것처럼 프랑스를 점령하고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비시 괴뢰정권을 구성했다. 공교롭게도 왕징웨..
합작의 성과와 한계② 그러나 일본의 낙관은 국공합작에 대한 과소평가였다. 우선 장제스가 예전과 달리 강력한 대일 항전을 선언하고 나섰다. 게다가 규모와 화력에서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늘 국부군과 대등한 전투를 벌인 홍군이 항전에 동참했다. 화북의 홍군은 팔로군(八路軍)으로, 화남과 화중의 홍군은 신사군(新四軍)으로 편성되었다. 홍군을 이끌던 주더(朱德, 1886~1976),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 린뱌오(林彪, 1907~1971) 등 유격전의 명수들은 비로소 ‘진정한 적’을 맞아 벼르고 있었다. 베이징과 톈진을 함락시킬 때까지는 그런대로 일본의 일정에 들어맞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산둥과 산시에서 팔로군의 거센 공격을 받았고, 상하이에서는 장제스가 이끄는 정예 부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
합작의 성과와 한계 1차 합작은 군벌이 신생 공화정을 위협하는 대내적 상황에서 이루어졌지만, 2차 합작은 바깥의 일본 제국주의에 공동으로 맞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 달랐다. 공동의 적을 눈앞에 둔 만큼 1차 때와 달리 이번 합작은 일단 결정이 난 뒤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열세에 놓여 있다가 합작에 한껏 고무된 공산당은 토지개혁이나 계급투쟁 등 사회주의의 기본 이념에서 크게 양보하고, 필요하다면 홍군이라는 명칭도 바꾸겠다고 제안했다. 공산당의 전향적인 자세에 국민당도 기분 나쁠 리 없었다. 양당 간에는 자못 따뜻한 화해의 기류가 흘렀다. 행정 수반은 장제스가 맡았으며, 홍군은 국부군 내로 편입되었다. 곧이어 합작의 효과를 과시할 만한 사건이 터졌다. 1937년 7월 7일, 베이징 외곽의 루거우차..
안이 먼저냐, 바깥이 먼저냐③ 국민당과 달리 공산당은 항일을 최우선으로 들고나왔다. 봉건 지주층의 지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과는 이념적으로도 다른 데다 피착취계급을 대변한다는 명분으로도 당연히 항일에 몰두해야 했지만, 국민당이 항일을 포기했으니 전략적으로도 항일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직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몰아치는 국민당의 집요한 공격을 견디기란 쉽지 않았다. 뭔가 전환점이 필요했다. 인력과 비용이 들지 않는 전환점은 바로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표방하는 것이었다. 대장정 중이던 1935년 8월 1일에 마오쩌둥은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자는 8ㆍ1선언을 발표했다. 때가 때인지라 이 선언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오랜 정쟁과 내전에 진저리가 난 중국 민중의 전..
안이 먼저냐, 바깥이 먼저냐② 당시 만주는 청년 군벌인 장쉐량(張學良, 1898~2001)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관동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손쉽게 만주 전체를 장악했다. 이참에 만주를 완전한 일본 영토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겠지만, 서구 열강의 보는 눈이 많은 마당에 아직 그러기에는 일렀다. 그래서 일본은 그 이듬해인 1932년 청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불러 만주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만들었다. 물론 장쉐량이 관동군을 막아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텃밭에서 제대로 싸움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적에게 그렇듯 쉽게 만주를 내줄 수 있는 걸까? 사실 여기에는 단지 군사력의 차이만이 아닌 정치적ㆍ정략적 의도가 있었다. 장쉐량은 장제스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근거지를..
안이 먼저냐, 바깥이 먼저냐 장제스가 공산당의 토벌에 여념이 없던 1931년 9월 18일에 만주에서는 한밤중의 정적을 뚫고 느닷없이 포성이 울렸다.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의 관동군이 남만주철도 폭파사건을 조작하고, 그것을 구실로 만주의 중국군을 기습한 것이다. 이 9ㆍ18사건이 바로 만주사변의 시작이다. 본국 정부의 승인도 없이 관동군이 독자적으로 시작한 전쟁이었으므로 선전포고 같은 절차도 없었다(사실 일본은 임진왜란壬辰倭亂부터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숱한 침략 전쟁을 도발했으나 한 번도 선전포고를 한 적이 없다). 관동군은 단기전으로 만주를 점령해버릴 속셈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서구 열강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만주를 중점적으로 개발했다. 관동군은 일본이 건설한..
한 지붕 두 가족④ 겨울을 눈앞에 둔 그해 10월, 마오쩌둥은 중대한 결심을 한다. 근거지를 버리고 탈출하는 것이다. 홍군이 태어난 곳이자 7년이나 근거지로 삼았던 장시 소비에트를 포기하는 것은 살을 깎아내는 듯한 아픔이었으나 홍군의 주력을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방책이었다. 8만 6000여 명의 홍군은 비교적 느슨한 서쪽의 포위망을 뚫고, 역사에 대장정(大長征)이라고 기록된 기나긴 행군에 나섰다. 그로부터 꼭 1년 만인 1935년 산시의 새 근거지에 도착하기까지 홍군은 열여덟 개의 험준한 산맥과 열일곱 개의 큰 강을 건너며 약 1만 킬로미터를 행군했다. 게다가 국부군과 지방 군벌군의 집요한 추격을 뿌리치면서 행군해야 했다. 장정 도중에 새로 홍군에 편입되는 농민들도 적지 않았으나 끊임없는 전투와 가혹한 ..
한 지붕 두 가족③ 1930년 공산당 지도부는 대도시를 거점으로 하는 도시 혁명론을 방침으로 정하고 홍군에게 창사(長沙)를 총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국부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데다 미국의 군수 지원을 받아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무모한 전투는 무참한 패배를 낳았다. 마오쩌둥도 이 작전에 참여했으나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지도부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휘하 군대를 후퇴시켰다. 이 사태로 리리싼(李立三)은 실각하고 당권은 소련 유학파의 손으로 넘어갔다. 현명한 판단으로 병력의 손실을 막은 마오쩌둥은 한껏 입지를 굳혔다. 1931년에 개최된 제1차 전국공농병(工農兵) 대표대회에서 그는 공산당 주석의 자리에 올랐다. 당을 조직한 지 11년 만에 드디어 당권을 장악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
한 지붕 두 가족② 때마침 국부군(國府軍, 국민당의 군대)이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한 것은 장제스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마뜩잖은 합작을 피해 그는 상하이로 옮겨 우한 정부와 딴살림을 차렸다. 그러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저장(浙江)의 한 재벌이 그에게 경제적 지원을 보장했다. 게다가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일본의 5개국이 공동성명을 통해 공산당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장제스는 날개를 달았고, 왕징웨이의 우한 정부는 초조해졌다. 장제스와 결탁할까, 아니면 그에게 등을 돌리고 공산당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까? 그러나 공산당이 후베이와 후난에서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하자 왕징웨이는 장제스와 손을 잡았다. 결국 공산당은 국민당에서 이탈해 지하로 숨어들었다. 이로써 4년간에 걸친 어..
한 지붕 두 가족 초라하게 시작한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금세 세력을 확장했다. 코민테른은 쑨원과도 접촉해 혁명당과 혁명군을 조직하라고 권고했다. 당시 코민테른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을 이루어 함께 반제국주의 투쟁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는 통일전선 전술을 권장하고 있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아직 조직력에서 미약한 공산당이 국민당의 조직을 이용해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에 따라 공산당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해 일부는 중앙 집행위원에 올랐다. 이로써 국민당과 공산당은 1924년에 1차 국공 합작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념과 노선이 크게 다른 두 세력이 하나의 조직에 속해 있다는 것은 언제나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공산당 세력은 국민당 ..
전혀 새로운 정치 세력② 중국의 뜻있는 지식인들은 소련의 조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미 그 몇 년 전부터 중국에는 근대적 교육을 받은 선각자 지식인층이 형성되어 신문화(新文化)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던 터였다. 이런 배경에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급속히 사회주의사상으로 기울었다.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이 중국에 앞날의 전망을 열어주었다면 이번에는 중국 민중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때마침 터진 1919년의 5ㆍ4운동은 중국 민중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대 쾌거였다. 원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국은 군벌들의 주장에 따라 연합국 측으로 참전해 승전국 협상 테이블에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했다. 패전국 독일이 중국 내에 가지고 있던 각종 이권은 당연히 반환되어야 했다. 그런데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회의..
전혀 새로운 정치 세력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터졌다. 유럽 최후의 전제군주국이던 제정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타도된 것이다【유럽과 아시아의 전통적 전제군주국인 청과 러시아는 불과 5년의 간격을 두고 차례로 무너졌다. 공교롭게도 1910년대는 세계적으로 제국들이 무너지는 시기였다. 두 제국 이외에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멸망했다. 15세기 부터 터키와 발칸 반도, 동유럽 일대를 지배했던 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의 동맹국으로 참전했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해체되고 터키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수천 년간 세계를 이끌었던 제국 체제는 이미 낡은 체제가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에는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새로운 사회..
험난한 공화정③ 드디어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될 꿈에 부풀었는데, 이 문제는 워낙 사안이 중대한 탓에 전국에서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그동안 그에게 지지를 보냈던 서구 열강도 제국이 부활하는 것만은 찬성하지 않았다. 이 기회를 틈타, 일본에 망명 중이던 쑨원의 지시를 받은 국내 혁명당원들은 ‘타도 위안스카이’를 부르짖으며 군사를 일으켰다. 그들은 현재의 공화국이라는 국체를 수호한다는 의미에서 호국군(護國軍)이라고 자칭했다. 위안스카이는 그것을 무시하고 황제 즉위를 강행하려 했으나 그의 심복 부하들마저 반대하고 나섰다. 비로소 대세의 불리를 깨달은 위안스카이는 눈물을 머금고 계획을 포기했다. 울분을 억누르지 못한 그는 그 뒤 석 달 만에 병사했다. 독재자가 죽으면 분열기가 온다. 위안스카이가 죽자 그..
험난한 공화정② 그래도 공화정이니까 내각과 정당까지는 갖추었는데, 껍데기일 뿐 내실은 없었다. 제대로 하려면 공화정을 담당할 정치 세력이 필요하지만, 중국 자체의 역사에서 탄생한 체제가 아니었기에 그 정치 세력이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청일전쟁 이후 꾸준히 세력을 키우면서 각 지방에 할거하고 있던 군벌과 관료 출신, 자칭 개혁가 등 어중이 떠중이가 그 역할을 자임하고 앞다투어 정당을 조직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정당들은 이내 합종연횡을 이루었다. 상당수는 여당인 공화당을 결성하고 위안스카이의 지지 세력이 되었으며, 자연히 난징 세력도 한데 뭉쳐 야당인 국민당을 창당했다. 위안스카이는 처음부터 국민당의 존재에 심히 부담을 느꼈다. 국민당은 1913년에 치러진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5. 새 나라로 가는 길 험난한 공화정 시행착오를 거듭하던 중국의 근대화 노력은 결국 공화정 체제로 개혁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결론으로 모아졌다. 19세기 이후 100여 년이나 중국의 근대화가 질척거린 것은 외세의 침략이라는 바깥 요인 때문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치의 무능과 부패에도 큰 책임이 있었다. 더욱이 외세야 중국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정치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개혁이 가능한 게 아닌가? 그런 점에서 공화정을 택한 것은 필연이자 올바른 결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길 역시 쉽지 않다는 데 있었다. 서구 공화정의 역사는 로마 시대까지 무려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며, 영국의 의회민주주의도 700년의 역사에 이른다. 근대 서구 공화정만 해도 수백 년 동안 중세와 절대주의..
마지막 황제 푸이② 이 소식을 들은 쑨원은 서둘러 귀국했다. 1912년 1월 1일을 기해 그는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수도는 난징으로 정해졌고, 쑨원이 임시 대총통을 맡았다. 한 나라에 두 개의 정부(제국 정부와 공화국 정부)가 들어선 꼴이 되자 청 조정에서는 위안스카이에게 전권을 맡겨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다. 위안스카이는 그 기회를 이용해 오히려 쑨원 측과 협상에 나섰다. 정치적 욕심보다는 조국에 공화정이 들어서는 것을 우선시한 쑨원은 선뜻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제의했다. 쑨원과의 약속에 따라 위안스카이는 거꾸로 청 황실을 정리하기 위한 해결사가 되었다. 이것은 새로 생겨난 중화민국 정부를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결국 위..
마지막 황제 푸이 서양의 문물을 본받으려는 자구책(양무운동과 변법)이나 서양의 것을 배척하려는 자구책(의화단운동)이나 다 실패했다. 이제 중국에는 남은 카드가 없다. 마지막으로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은 양자를 절충하는 것뿐이다. 서태후 보수파 정권은 ‘신정(新政)’이라는 이름으로 뒤늦은 변법에 착수했다. 신정의 목표는 명백했고, 그래서 그 과정도 뻔했다. 우선 군사제도를 개혁하고 서양식 군관 학교를 세웠다. 근대식 상업을 육성하기 위해 상부(商部)라는 기구를 설치했다. 그리고 교육제도를 개혁해 서양식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것으로 수 문제가 만든 이래 1400년간이나 관리 임용 제도의 근간을 이루었던 과거제(科擧制)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통치 능력을 상실한 정부가 하는 개혁이 효과를 볼 리 없었다. 신정이 ..
자구책Ⅱ② 의화권은 산둥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단체였다. 당시 산둥은 중국의 분할을 주장한 독일이 터를 잡은 곳이었다. 후발 제국주의의 조급함으로 독일이 그악스럽게 나오자 의화권도 조직을 더욱 확대하고 명칭도 의화단으로 고쳤다. 급기야 그들이 공개적으로 그리스도교도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독일보다 먼저 급해진 것은 청 조정이었다. 서태후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정부의 실권자로 군림하던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는 군대를 보내 진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의화단은 그것을 계기로 톈진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이제는 의화단 소속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철도를 파괴하고 교회를 불태우고 관청을 습격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화북 일대로 들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자구책Ⅱ 캉유웨이(康有爲)가 서양의 정신적 힘이 그리스도교에 있다고 본 것은 옳았다. 오랫동안의 중세를 거치며 종교적 통합을 이룬 유럽은 비록 국가는 여럿이었으나 정신적ㆍ종교적으로는 한 몸이나 다름없었다【오늘날 유럽연합이 결성된 것도 그런 배경 덕분이다. 반면 한ㆍ중ㆍ일 3국은 수천 년 동안 동질적인 한자 유교 문화권을 이루어왔어도 지역적 블록을 이루기는 어렵다】. 영국, 프랑스, 독일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서구 전체의 이익이 문제시될 때는 즉각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다. 그러나 캉유웨이가 보지 못했던 것은, 그리스도교는 서양의 ‘정신적 힘’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중국에 온 서양의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를 포교하려는 의도만 가진 게 아니었다. 16세기 명대에 온 선교사들은 유럽에서 신교가 세력을 장악한 탓에..
자구책Ⅰ③ 양무운동과는 다른 뭔가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다. 군수 산업만 육성한다고 해서 강국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광둥 지방의 지식인이었던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는 하루빨리 변법(變法, 개혁)하지 않으면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루자는 주장은 양무운동과 같았으나 캉유웨이의 변법은 그와 달랐다. 그는 서양의 무기나 제도와 같은 게 아니라 과학기술 자체를 도입해야 하며, 무조건적인 수입이 아니라 중국적인 중심을 튼튼히 마련한 조건에서 서양의 것을 접목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서양에 그리스도가 있다면 중국에는 공자(孔子)가 있다. 그는 공자가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개혁가였다고 주장하면서 유교를 역동적인 사상..
자구책Ⅰ② 1894년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반란이라 해도 제 나라 백성들이 일으킨 반란이었지만 제 힘으로 무마할 수도, 진압할 수도 없었던 조선 정부는 상국인 청에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청은 톈진 조약(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과 달리 1885년 청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에 묶여 있어 조선에 파병하려면 먼저 일본 측에 통보해야 했으나 이홍장은 통보를 생략하고 즉시 병력을 보냈다. 그렇잖아도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에 그것은 군대를 보낼 좋은 구실이었다【전통적으로 조선을 속국화하고 있었던 중국의 입장에서는 사실 ‘남의 나라의 내정’에 간섭한다기보다는 지방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조선의 명성황후 정권도 마치 중앙 정부에 관군을 요청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
자구책Ⅰ 외세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태평천국 세력은 청의 뒤를 이어 중국에 다시 한족 왕조를 세울 가능성이 컸다. 역대 왕조들의 흥망을 고려해볼 때에도 그게 ‘순리(順理)’였다. 이렇게 본다면 이 역사의 순리를 간단히 거스른 서구 열강의 힘은 과연 놀라운 것이었다. 태평천국군은 순전히 서구의 우세한 무기와 화력에 당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특히 반란의 진압을 계기로 중앙 정치에 발언권을 얻게 된 증국번(曾國審, 1811~1872)과 이홍장(李鴻章, 1823~1901) 등 유력 군벌들은 서양의 힘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아편전쟁 때도 서구의 무력을 실감했으나 이번에는 우군의 입장이었으므로 바로 곁에서 똑똑히 본 터였다. 증국번과 이홍장, 좌종당(左宗棠, 1812~1885)은 서양식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정..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천국③ 수백 년 만의 한족 정권인 탓일까? 태평천국의 기세는 초기에 엄청났다. 난징을 수도로 삼고 태평천국은 서쪽과 북쪽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는데, 순식간에 강남 일대의 16개 성(省)과 무려 6000여개의 성(城)을 수중에 넣었다. 그들의 주력은 빈농과 유랑민의 기층 민중이었던 데다 무능한 만주족 정부에 커다란 분노를 품고 있었다. 이미 팔기군이 무력해진 청 조정은 각 지방마다 자체적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대응하라고 명했다. 심지어 조정은 자치군에 관직과 군비 징수권까지 부여했다【이 조치는 훗날 아무도 의도하지 않은 역사적 결과를 낳았다. 역대 한족 왕조들을 위협한 지방의 번진들이 청대에는 성장하지 못했는데, 그 조치로 인해 부활한 것이다. 이들은 태평천국의 난이 끝나고서도 군대를 해..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천국② 이리하여 2차 아편전쟁이 벌어졌는데, 지난번에도 손쉽게 이겼지만 이번에는 크림 전쟁에서 동지로 싸운 프랑스와 손잡기까지 했으니 승패는 볼 것도 없었다. 1857년에 연합군은 광저우를 점령하고 이듬해에는 베이징의 관문인 톈진을 함락시켰다. 할 수 없이 청 조정은 다시 불평등조약인 톈진 조약을 맺게 되는데, 여기에 러시아가 중재를 자임하고 나섰다. 프랑스와 러시아까지 참여했으니 난징 조약 때보다 입이 두 개나 늘었다. 청 조정이 조약에 불만을 품고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재차 군대를 동원해 굴복시키고 베이징 조약을 맺었다. 텐진조약으로 베이징에 외교 사절을 주재시킬 수 있게 되었고 그리스도교 포교의 자유를 얻었던 서구 열강은 베이징 조약을 통해 더 ..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천국 난징 조약의 또 다른 문제점은 그것이 하나의 전범이 된다는 데 있었다. 이제 중국의 실력은 백일하에 드러났으며,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은 아무도 청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양 질서의 핵이었던 중국이 그럴진대 다른 나라는 볼 것도 없었다. 1854년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이 일본을 개항하는 것은 난징조약의 후속 조치나 다름없었다(당시 서구인들은 한반도를 중국의 일부로 여겼으므로 조선에 대해서는 직접 통상 요구를 하지도 않았다). 곧이어 1844년에는 미국과 프랑스가 청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아편전쟁으로 중국의 문을 연 주체는 영국이었고 난징 조약에는 엄연히 영국에 최혜국(最惠國) 대우【최혜국 대우란 이후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 그 나라에 부여하는 이익은 모두 자기 ..
전쟁 아닌 전쟁④ 이리하여 1840년에 아편전쟁이 터졌다. 실은 전쟁이랄 것도 없었다. 인도에 주둔한 극동 함대를 주축으로 한 영국 원정군은 순식간에 황해를 남북으로 누비며 광둥에서 톈진까지 중국의 동해안 전체를 휩쓸었다. 해전만이 아니라 몇 차례 맞붙은 육전에서도 영국군은 연전연승했다. 중국과 영국은 금세 진실을 깨달았다. 영국을 비롯해 서구 열강이 잠자는 용처럼 은근히 두려워한 중국은 실상 이빨 빠진 공룡에 불과했다. 1842년 청의 항복으로 영국과 중국은 동서양 최초의 조약이자 세계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난징 조약을 맺었다【청과 러시아가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은 국경을 확정하는 정도였고 역사적 의미는 크지 않았다. 그때까지 중국은 역사상 어느 나라와도 조약을 맺은 적이 없었다. 조약이란 대등한 두 나라..
전쟁 아닌 전쟁③ 이때 동인도회사는 묘수를 생각해냈다. 수출품을 바꾸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잘 먹히는 것으로, 회사는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기로 했다. 아편은 마약이므로 약용 외에는 당연히 수입이 허가되지 않았으나 물불 가릴 것 없는 동인도회사는 밀무역을 통해 중국에 아편을 수출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아편은 무역 역조를 타개하는 주력 상품이 되었다. 현대 세계에서 마약 수출국이라면 국제적 왕따를 당해야 마땅하지만 제국주의 시대에 도덕, 그것도 국제적 도덕이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영국으로서는 애써 팔아도 팔리지 않는 모직물과 달리 스스로 시장을 개척하는 신상품 아편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반면 중국에서는 단순한 경제문제가 아니라 중대한 사회문제였다. 아편 중독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전쟁 아닌 전쟁② 하지만 최초로 동양에 자본주의적 침략을 개시한 영국은 ‘선두 주자의 벌금’을 톡톡히 물어야 했다. 원래 영국은 명대 말기인 17세기부터 중국 정부의 허가를 얻어 중국과의 무역을 시작했다. 조건은 몹시 나빴다. 중국은 광둥의 광저우 한 곳만 영국에 개방했고, 공행(公行)이라는 상인 조합 한 곳을 지정해 영국 무역을 전담하게 했다. 중국은 다분히 감합 무역의 방식을 거의 그대로 적용한 것이었다. 항구와 상인 조합을 한 곳만 개방한 것은 감합을 발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역을 하려는 자세라기보다는 형식적인 교류에 불과했다(광저우의 영국 상인들에게 예의범절까지 요구한 것은 당시 중국이 대외 무역을 어떻게 여겼는지 잘 말해준다). 그래도 무역에서 이득을 보았다면 영국으로서는 불만이 없었을 것..
4. 중국으로 몰려오는 하이에나들 전쟁 아닌 전쟁 꾸준한 한화 정책은 청을 여느 한족 제국과 별로 다를 바 없이 만들었다. 한족의 선진 문화를 본받은 것까지는 좋지만 문제는 나쁜 점도 닮는다는 데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전성기 직후 곧바로 쇠락기가 시작되는 역대 한족 왕조의 운명이다. 너무 오래 통치한 탓일까? 중국 역사상 최대 영토를 일군 건륭제는 기나긴 재위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황제가 국정에 대한 관심을 놓으면 부패가 잇따르게 마련이다. 북방 민족의 제국들은 한족 제국과 달리 환관 정치에 휘말리지 않았는데, 청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등잔 밑이 어두웠을 뿐이다. 우선 건륭제가 신임하고 국정을 맡긴 신하가 부정을 저질렀다. 이래저래 짜증이 난 건륭제는 1795년에 아들에게 제위를 넘겨버렸다..
안정 속의 쇠락 예전까지 중국의 역대 통일 제국들은 대부분 전성기가 건국 초기 수십 년에 불과했고, 100년을 넘겨 번영한 나라는 당 제국이 유일했다. 그에 비해 청은 사직도 여느 왕조에 못지않았고 번영을 누린 시기도 당보다 좀 더 길었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어느새 근대의 문턱에 들어왔다. 중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것은 이제 중국 자체보다 동북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의 정세였다. 일단 대내적으로 청은 번영을 누릴 만한 모든 요건을 갖추었다. 강희제의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 조치 덕분에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1712년부터 백성들은 아무리 아이를 많이 낳아도 인두세를 추가로 물지 않았다. 장기간의 번영으로 가뜩이나 불어나는 추세에 있던 중국의 인구는 그것을 계기로 봇물 터진 듯 늘어났다. ..
장수의 비결② 한족과의 관계를 잘 정립한 게 장수의 첫째 비결이라면 둘째 비결은 영토와 관련이 있다. 실은 북방 민족이 중원을 지배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여느 한족 왕조에 비해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지배자가 북방 출신이므로 북방의 수비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한 당ㆍ송ㆍ명 등 중국 역대 한족 왕조들의 국력이 약화된 것은 늘 만주와 서북변의 북방 민족들에게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주 출신의 청이 중원을 차지했으니 만주 쪽의 국방은 자동으로 안정적이었다(그 이북은 러시아와의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정리되었다). 또한 강희제와 건륭제의 정복 사업으로 서북변까지 평정됨으로써 청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이민족의 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장수의 셋째 비결은 대내적인 요인, ..
장수의 비결 청 제국 이전에 북방 민족들이 세운 국가는 대개 정복에는 능했어도 통치에는 서툴렀다. 남북조시대에 화북을 지배한 북조 나라들이나 10세기 거란의 요, 12세기 여진의 금, 13세기 몽골의 원 등은 모두 군사력에서는 뛰어났으나 지배 기술이나 문화에서는 전통의 한족 왕조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중국에 북방 민족의 제국이 들어설 때에는 언제나 지배 민족이 소수였고 피지배 민족이 다수였다. 그래서 소수의 북방 민족은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 주로 차별과 억압의 수단을 사용했다. 그러나 힘만 세다고 해서 뒤진 문화가 앞선 문화를 오래도록 지배할 수는 없다. 더구나 힘이란 언제까지나 강할 수만은 없는 법이다. 차별과 억압을 통한 지배는 지배하는 측의 힘이 약해지면 금세 밑천이 드러나고 만다. 북방..
현대의 중국 영토가 형성되다 옹정제가 만든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의 첫 수혜자는 건륭제 고종(高宗)이다. 건륭제 역시 아버지 옹정제처럼 맏이가 아닌 다섯째 아들로서 제위에 올랐으며,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문무를 겸비하고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걸출한 군주였다. 건륭제는 강희제의 『고금도서집성』과 더불어 청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편찬 사업으로 꼽히는 『사고전서(四庫全書)』를 11년에 걸쳐 완성했다. 『사고전서(四庫全書)』는 당대의 문헌들을 유학ㆍ역사ㆍ사상ㆍ문학의 네 가지[四庫]로 분류해 총정리한 대규모 출판 사업이었다. 『고금도서집성』과 마찬가지로 『사고전서(四庫全書)』 역시 일종의 백과사전이었으나, 학문적인 목적 이외에 정치적인 의도를 상당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우선 편찬 과정에서 만주 ..
아이디어맨 옹정제③ 옹정제의 치세에는 세제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 이전까지 청의 세제는 명대에 만들어진 일조편법(一條鞭法)이었다. 그러나 명대에도 중기 이후부터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던 일조편법이 청대에 제대로 기능할 리 없었다. 항상 골치 아픈 문제는 사람에게 매기는 세금, 즉 정은(丁銀)이었다. 토지가 없는 가난한 농민들은 인두세를 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요역 위주라면 몸으로라도 때우겠는데 은납제(銀納制)에서는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더구나 지주나 관료, 부호 상인 들은 갖가지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이 부담해야 할 정은마저 요리조리 탈세했다. 이러한 정은의 손실분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전가되었으므로 백성들은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었다. 그동안 그런 모순을 알고도 고치지 못..
아이디어맨 옹정제② 그렇듯 모든 정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옹정제의 태도는 태자밀건법(皇太子密建法)에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강희제가 오랜 기간을 통치한 탓에 그 아들들은 수도 많았고 장성해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랜만에 이루어지는 제위 계승이 복잡하지 않을 수 없다. 강희제의 넷째 아들인 옹정제 자신도 치열한 암투 끝에 즉위한 터였다. 그는 가뜩이나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는 판에 제위 계승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하면 제국의 안정이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전혀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제위 계승 제도를 만든다. 전통적인 방식은 황제가 재위할 때 태자를 책봉하는 것이었다. 그 장점은 명확하다. 후계자가 미리 확정되면 중앙 권력을 안정시킬..
아이디어맨 옹정제 실로 오랜만에 중원을 정복한 이민족 왕조였으므로 강희제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민심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중심이 약해지면 언제든 다수가 들고일어날 것이다. 지배하는 소수는 관용만이 아니라 강력한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그다음 황제인 옹정제(雍正帝, 1678~1735)의 과제였다. 지배 체제를 공고화하려면 무엇보다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하다. 우선 그는 의정왕대신회의(議政王大臣會議)와 내각으로 이원화되어 있는 통치 체제를 단일화하기로 결정하고, 군기처(軍機處)를 설치해 두 기관의 기능을 한데 통합했다. 군기처는 만주족과 한족의 군기대신으로 구성된 최고 의사 결정 기구였으나 황제 직속이었으므로 황제의 비서실과 같은 기능을 했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이 국무..
해법은 또다시 한화 정책③ 우선 그는 그동안 정복 사업에 가려 미루어져온 통치 제도를 손보았다. 입관 이전 후금 시대의 통치 제도는 일종의 부족 연맹체인 사왕회의제(四王會議制)였다가 태종 시절에 중앙집권화가 추진되면서 의정왕대신회의(議政王大臣會議)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것은 최고 결정 기구일 뿐이므로 실무를 위한 중앙 기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강희제는 중국식 내각을 도입하고 영락제(永樂帝)를 본받아 내각대학사를 두었다. 또한 강희제는 유학의 지식인들을 존중하고 학문을 장려했다(다만 명대에 발달한 양명학보다는 그 전대의 주자학을 더 중시했는데, 아무리 포용력이 넓다 해도 적국의 학문을 지지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의 역사서인 『명사(明史)』, 한자들을 총정리한 『강희자전(康熙字典)』, 특히 중국식 ..
해법은 또다시 한화 정책② 기왕 정복 전쟁을 시작한 판에 강희제는 국방을 두루 손보기로 결심했다. 이 과정에서 청은 유럽의 러시아와 처음으로 접촉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강희제에 못지않은 걸출한 황제인 표트르 대제가 유럽의 후진국 러시아를 일약 강대국으로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17세기 말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팽창정책은 유럽이 주요 무대였지만, 부동항(不東港)을 찾아 동진을 계속하면서 표트르는 시베리아 경략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전의 중국 왕조, 예컨대 명 제국이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중국 북쪽에는 몽골이 있었고 만주에는 여진이 있었으므로 이들 북방 민족과 러시아가 접촉했을 테 니까. 그러나 만주가 고향인 청이 중국을 지배함으로써 이제 중국의 강역은 만주까지 포함하고 있다...
해법은 또다시 한화 정책 베이징을 점령한 뒤에도 청은 한동안 통일 제국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다. 한 번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는 한족의 저항은 매우 거셌다. 강북은 그런대로 지배할 수 있었으나 강남은 여의치 않았다(남북조시대부터 북방 민족은 중원을 여러 차례 지배했으나 강남까지 손에 넣은 이민족 왕조는 몽골이 유일했다). 그래서 청은 강남에 대해 간접 지배의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마침 청이 중원을 지배하게 된 데는 투항한 한인들의 공이 컸으니 이들을 이용하면 된다. 청은 오삼계를 비롯해 한인 공신 세 명에게 각각 번국(藩國)을 할당해 그 세 개의 번국으로 강남을 통제했다. 한동안 번국들은 거의 독립국이나 다름없이 행세했다. 각자 군사권을 지니고 있었던 데다 청 제국으로부터 막대한 재정 지원까지 ..
급변하는 만주② 명에 있어 만주는 ‘변방’에도 포함되지 않는 그 바깥이었고, 정복과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제압의 대상일 뿐이었다. 당시 만주의 주인인 만주족(여진족)에게 명은 관작도 주고 조공 무역도 허락하는 등 북변을 침범하지 않도록 무마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 정책이 계속 약효를 지니려면 명의 힘이 강해야 했으나 명이 쇠약해지면서 만주에는 서서히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1588년 만주족의 영웅 누르하치(Nurhachu, 1559~1626)는 만주 일대를 통일했다. 이후에도 계속 세력을 확장하더니 1616년에는 칸(후금 태조)을 자칭했다. 수도는 남만주의 선양이었고, 국호는 300여년 전 조상들이 세운 강국 금을 좇아 후금(後金)으로 정했다. 누르하치는 국호만이 아니라 북중국을 지배한 조상들의 ..
3. 최후의 전성기 급변하는 만주 역대 통일 왕조가 그랬듯이 명 제국도 외부의 침략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멸했다. 마지막 황제인 의종이 즉위하던 해부터 발발한 농민 반란은 점차 전국으로 번지며 규모가 커졌다. 비가 잦으면 벼락이 치는 법이다. 중원 북서쪽 산시에서 벼락이 울렸다. 지방관이던 이자성(李自成, 1605~1645)은 그 지역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관직을 팽개치고 반란군을 규합했다. 쿠데타와 건국의 차이는 나라를 바꾸느냐, 못 바꾸느냐에 있다. 1643년에 그는 시안에서 대순(大順)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베이징을 공략해 손에 넣었다. 도성이 함락되고 의종이 목을 매 자살하는 것으로 명 제국의 사직은 명이 끊겼다. 이자성이 계속 권력을 유지했더라면 명 제국을 대신해 ‘순(順) 제국..
우물 안의 제국② 중국 내부 역시 느리지만 변화의 움직임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윗물(정치)에서는 침체와 정체를 면하지 못했어도 아랫물(민간 영역)에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끓고 있었다. 사무역이 금지되고 해금령이 내려졌어도 민간의 욕구는 활발한 밀무역으로 분출되었고, 국가가 은의 통용을 금지했어도 민간에서는 은 본위의 화폐경제를 밀고 나가 결국 은납제(銀納制)를 시행하도록 만들었다. 농민들이 주도한 변화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명대 초기부터 성장한 자영농과 신흥 지주 들은 부패한 정치 상황에서도 대주주들을 견제해 대토지 겸병을 늦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명대의 대토지 겸병이 다른 왕조에 비해 더디게 진행된 이유는 전적으로 그들의 덕분이다). 전호(소작인)들의 힘과 의식도 크게 성장해 지주와 근대적인 의미의..
우물 안의 제국 정확한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서양에 비해 경제와 문물에서 앞섰던 동양이 서양에 뒤처지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명대부터라고 볼 수 있다. 몽골족의 원 제국은 처음부터 동양과 서양의 교류에 대한 관심 때문에 중앙아시아로 진출해 세계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뒤이은 명대에는 원대에 발달한 해외 무역과 교역이 거의 단절되었으며, 송대에 비해서도 상업과 무역이 크게 위축되었다. 여기에는 몽골이라는 이민족의 지배가 100여 년간 지속된 탓도 있다. 명은 오랜만에 복귀한 한족 왕조였으므로(내내 북방 민족에 억눌려 지낸 송대까지 합치면 당 제국 이후 무려 400년 만의 제대로 된 한족 통일 왕조다) 초창기부터 제국 운영에서 경제 논리보다는 정치 논리를 앞세웠다. 정화의 원정이 서양에서와 같은 대항해로 ..
기회는 죽고 당쟁은 살고② 게다가 이 시기부터는 예의 환관 정치에다 당쟁까지 겹쳐 정치의 실종에 한몫을 거들었다. 정치에 관해 무능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한 신종의 치하에서 본격적인 붕당이 형성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조정의 관료들은 이미 다섯 개의 붕당을 만들어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게 된 계기가 생겨났다. 일찍이 당쟁이 극성을 부렸던 송대의 유학자 구양수(歐陽修, 1007~1072)는 『붕당론(朋黨論)』에서 대도(大道)를 논하는 군자의 붕당과 눈앞의 이익을 따지는 소인배의 붕당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소인배들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붕당을 이루어 다투다가도 군자의 붕당이 출현하면 이에 대항하여 약삭빠르게 일치단결하는 생존의 본능..
기회는 죽고 당쟁은 살고 명대에는 농업과 공업, 상업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황제와 무능한 정부, 무능한 정치에 발목이 잡혀 사회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총체적 무능으로 일찌감치 쇠락의 길을 걸었던 명이 그나마 300년 가까운 사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따금씩 운 좋게도 수명을 늘리는 특효약을 처방 받은 덕분인데, 그중 하나가 장거정(張巨正, 1525~1582)의 개혁이다. 송에 왕안석(王安石)이 있었다면 명에는 장거정이 있다. 장거정은 1572년 신종(神宗, 1563~1620)이 열 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어린 황제를 대신해 전권을 위임받았다. 그 전대 수십 년간의 정치 문란을 목격하면서 개혁의 뜻을 품고 있었던 장거정은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강력한 혁신 정치를 폈다. ..
조공인가, 무역인가② 조공 무역의 골자는 “공(貢, 공물)이 있으면 사(賜, 하사품)가 있다.”라는 것이었다. 즉 주변국 입장에서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것이고, 중국 입장에서는 임금이 신하에게 물건을 하사하듯이 조공의 대가를 내주는 것이다. 명 정부는 이 조공 무역만을 정상적인 무역으로 간주했으며, 그 이외의 모든 무역 관계는 사무역, 즉 밀무역으로 규정하고 해금령으로 다스렸다. 주변국이 중국의 종주권을 무시할 경우 조공 무역조차 중지되었다【이런 무역 방식은 조선도 그대로 답습했다. 중국을 본떠 조선은 주변국인 일본이나 여진에 대해 조공을 바치면 그 대가를 하사한다는 식으로 무역에 임했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첫째, 조선은 중국에 사대하는 처지였으므로 그 자신도 조공을 바치는 위치였다..
조공인가, 무역인가 중화사상(中華思想)이 이론과 현실에서 완성된 것은 송대의 일이었으나 물리력이 약한 송은 중화사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이상으로만 간직했다. 그러다 결국 ‘오랑캐’인 몽골족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그런데 100여 년 뒤 한족의 명 제국이 복귀했다. 송대에 지금은 비록 오랑캐 세상이지만 한족이 다시 중심이 되리라던 주희(朱熹)의 이론이 사실로 증명된 걸까? 한족 왕조 명은 그 점을 의식했는지 개국 초부터 적극적으로 중화적 세계관을 주변에 강요했다. 영락제 시대 정화의 남해 원정도 그 작업의 일환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정화의 원정은 유럽이 본격적인 대항해시대를 여는 것보다 시기적으로 앞섰으므로 충실하게 진행되었더라면 이후 중국사, 아니 세계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