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06/20 (20)
건빵이랑 놀자
소중화의 시작③ 그러나 당시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왜 예송논쟁을 벌였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조선 내부가 아니라 그 바깥, 즉 동북아의 정세 변화다. 알다시피 1644년에 유교적 국제 질서의 중심인 명나라가 멸망했고, 유교 문명의 고향인 중원은 오랑캐의 청나라가 정복했다. 중화세계가 사라진 것이다. 한동안 잃어버린 중화세계에 대한 향수를 허망한 북벌 계획으로 달래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제 조선을 또 하나의 중화, 작은 중화(소중화)로 만든다는 거창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러자니 이제부터는 모든 유교적 예법을 자신들이 직접 만들고 가다듬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예송논쟁은 그 소중화 프로젝트의 신호탄이다. 그렇다면 이제 비로소 조선은 사대주의를 완전히 극복한 걸까?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이..
소중화의 시작② 1674년 2월 효종의 아내이자 현종(顯宗)의 어머니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이제는 대왕대비가 된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초점이 된다. 다만 이번에는 며느리의 상인지라(며느리도 역시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다.) 1년 복상과 9개월 복상으로 내용은 바뀌었다. 물론 서인이 9개월이고 남인이 1년이다. 여기서 허목(許穆, 1595 ~ 1682)과 윤휴(尹鑴, 1617 ~ 80)가 1년 복상설을 관철시켜 보기좋게 역전승을 거두면서 남인은 드디어 권력을 쟁취한다. 같은 사안임에도 시차를 두고 정반대의 결론이 나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렇듯 복잡하고 근엄해 보이는 논쟁이 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양측은 온갖 폼을 잡고 마치 엄청난 철학 논쟁이라도 벌이듯이 옛 ..
소중화의 시작 효종(孝宗)의 죽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물론 북벌은 어차피 실행에 옮기지도 못할 허망한 꿈이었으니 북벌이 중단된 문제는 아니다. 또 그의 아들 현종(顯宗, 1641~74, 재위 1659~74)이 순조롭게 왕위를 이었으니 왕위계승 문제도 아니다. 새로 등장한 논란거리는 바로 장례 예절에 관한 문제다. 왕이 죽었으니 모두들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얼마나 입을 것인가, 즉 복상(服喪) 기간을 얼마로 정할 것인가는 문제가 된다. 알다시피 효종은 형인 소현세자가 죽음으로써 둘째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다. 집안의 혈통으로 보면 둘째지만 나라의 혈통으로 보면 국왕이니까 맏이에 해당하는 자격으로 볼 수도 있다. 그게 왜 중요할까? 우선 그의 계모인 자의..
허망한 북벌론④ 단독 콘서트의 주역으로 떠오른 인물은 바로 송시열(宋時烈, 1607 ~ 89)이다(송준길은 그의 친척인데, 둘은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게 된다). 그는 청서파에게서 명망이 높았을 뿐 아니라 봉림대군이 왕위와 무관하던 시절인 1635년에 그의 스승을 지내기도 했던 인물이니만큼 효종(孝宗)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그가 중용된 것은 당연하다【인조(仁祖) 때는 과거를 통하지 않고 재야에서 직접 인물을 추천받아 관직에 등용 시키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을 흔히 산림(山林)이라 부른다. 송시열과 그의 스승인 김장생(金長生, 1548 ~ 31), 김집(金集, 1574 ~ 1656) 부자가 그런 케이스다. 이들이 청서파의 주력으로 등장했음은 물론이다. 산림이 등용되었다는 것은 곧 그만큼 반정공신 세력이 ..
허망한 북벌론③ 1649년 인조(仁祖)가 죽자 봉림대군은 효종(孝宗, 1619 ~ 59, 재위 1649 ~ 59)으로 즉위했다. 서인 정권으로서는 2대째 연이어 국왕을 옹립한 셈이다. 인조도 반정으로 즉위했다는 약점 때문에 사대부(士大夫)들의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면, 그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그는 형이 죽음으로써 왕위에 올랐을 뿐 아니라 형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죄의식도 있었으니 여러 가지로 왕권을 내세울 수 없는 처지다. 사대부들은 그런 효종을 마음대로 조종하면서 소현세자를 살해한 음모보다 더 크고 더 황당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북벌(北伐)이다. 북벌이라면 청나라를 친다는 계획이 아닌가? 그런데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청나라에 복속된 ..
허망한 북벌론② 그러나 적진 한복판에서 보인 세자의 행동은 본국의 사대부(士大夫)들에게 어떻게 비쳤을까? 그들이 볼 때 그것은 좋게 말해서 방종이고 나쁘게 말하면 추태다. 당연히 그들은 인조(仁祖)에게 부지런히 상소를 올려 세자를 단속하라는 압력을 가한다. 그들은 세자가 적의 편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심지어 적국에서 지나치게 많은 경비를 쓰고 있다는 비난까지 퍼붓는다. 하지만 오히려 소현세자는 열심히 새로운 문물을 배우는 한편 청나라 황족 및 장군들과 시귀면서 두 나라의 외교를 도맡아 청이 무리한 요구를 하려 할 때면 현지에서 무마시키고 차단하는 성과도 올렸으니 사대부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인조(仁祖)는 사대부들의 편이다. 그 자신이 국치의 주인공이기도 한 데다가 ..
허망한 북벌론 집권 사대부(士大夫)들이 온통 오랑캐에 대해 절치부심하고 있을 무렵, 그들과는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오히려 오랑캐 나라의 심장부에 머물면서 오랑캐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오랑캐를 통해 멀리 서양의 문물까지 열심히 익히려 한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사대부 신분이 아니었기에 고리타분한 성리학적 세계관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쯤이면 그가 누군지는 명확해진다. 바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끝난 뒤 청나라의 선양(瀋陽)【랴오둥 한복판에 자리잡은 선양은 누르하치 시대에 청나라의 수도였다. 청나라가 대륙을 정복하면서 수도는 베이징으로 옮겼으나 그 뒤에도 동북 지역의 주도로 기능했으며, 현재도 랴오닝성의 성도(省都)다. 선양을 우리식으로 읽으면..
시대착오의 정신병② 삼국시대에 겪은 침략(고구려 초기 한나라와 랴오둥 정권의 침략, 후기의 삼국통일 전쟁)은 중국의 한족 왕조가 한반도를 중화세계로 끌어 들이는 과정이었다. 이것이 성공하면서 한반도는 중화세계의 막내로 편입되었는데, 불행히도 이후 중화세계는 동북아의 중심에서 서서히 물러나고 북방의 비중화세계가 강성해진다. 고려 초기에 거란의 침략을 당하고, 중기에 여진의 금에 사대하고, 후기에 몽골의 속국이 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고려는 내내 중화세계의 일원이 되고자 노력했으며, 그 결과 조선이라는 역사상 가장 완벽한 유교왕국이 성립했다. 여기에는 때마침 중국에서 복고 바람을 타고 한족 왕조가 부활한 덕분이 크다(그런 의미에서 명나라는 단지 이민족 지배에 반발하는 분위기에 편승해서 성립했을 뿐 ..
5장 복고의 열풍 시대착오의 정신병 불과 두 달 동안의 전쟁이었지만 병자호란(丙子胡亂)은 7년 동안 벌어진 임진왜란에 비해 결코 피해가 적지 않았다. 전란으로 인한 파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다지 큰 피해는 없었다. 청군은 온갖 약탈과 방화, 강간을 저질렀지만 기간이 길지 않았으므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일본군이 저지른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임진왜란으로 이미 주요 궁궐들이 소실되어 있었으니까 더 이상 불타 없어질 건물도 별로 없었다. 따라서 이번 전란의 피해는 물질적인 것보다 사회적인 데 있다. 우선 청군에 의해 붙잡혀간 사람이 무려 50만에 달한다는 게 커다란 사회문제다. 전쟁포로가 그렇게나 많았을까? 물론 그건 아니다. 청나라는 조선을 마음대로 유린하면서 돈이 있거나 신분이 높은 ..
중화세계의 막내④ 어이없고 무의미한 그 논쟁을 종식시킨 것은 강화도에서 들려온 소식이다. 일단 강화도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 왕족과 관료들은 그곳이 남한산성보다 훨씬 안전할 것으로 믿었다【아마 그들은 400년 전 몽골 지배기에도 고려 정부가 강화도에서 30년이나 버티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겠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침략군의 의지가 그때와는 달랐던 것이다. 당시 몽골군은 이미 중국 대륙을 정복한 마당에 굳이 고려 정부를 끝까지 핍박할 필요와 의지가 없었다(일설에 전하는 바처럼 몽골군이 뱃길에 약해 강화도를 공격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사실로 믿기 어렵다. 일본 정벌에서도 보듯이 그들은 현해탄도 건넜을 뿐 아니라 중국 대륙을 공략하면서 바다처럼 넓은 큰 강들을 건넌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청군은..
중화세계의 막내③ 조선의 태도를 확인한 홍타이지는 우선 1636년 4월에 국호를 중국식 이름인 청(淸)으로 바꿔 중원 정복의 의지를 분명히 한다(그래서 나중에 그의 묘호도 중국식의 태종太宗이 되니까 이때부터는 그를 청 태종이라 불러도 되겠다). 스케줄이 확실히 잡힌 만큼 후방을 다지는 일은 9년 전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었는데, 일단 그가 취한 조치는 외교의 형식이다.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고 아울러 청에 대해 호전적인 태도를 가진 주전론자들을 압송하라는 게 그의 주문이다. 그러나 그도 예상했겠지만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그 요구를 받아줄 리 없다. 드디어 그 해 12월 청 태종은 직접 12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 침략에 나서는데, 이것이 이른바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전쟁의 양상은 9년 ..
중화세계의 막내② 그래서 후금은 황해도에 주둔한 채 강화도의 피난 정부에 화의를 제안한다. 그들의 요구 조건은 간단하다.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말고 조선 왕실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것인데, 그들이 침략해 온 이유가 뭔지를 명백히 말해주는 요구다. 즉 후금은 장차 명나라를 칠 때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의도다. 승전국의 입장에서 요구하는 게 그 정도라면, 조선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다행이다. 그러나 강화도 정부는 그것을 수락하는 데도 난항을 겪는다. 명과의 전통적인 사대 관계라는 대의명분이 걸림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반정공신 1등인 최명길이 나서서 매듭을 푼다. 일부 주전론자가 있었지만 실력자가 주화론으로 기울면서 노선이 결정된다. 후금군이 철수하는 조건으로 후금과 조선은 형제관계가 되었고,..
중화세계의 막내 홍타이지는 조선이 적대관계로 돌아서지 않는 한 조선을 침략할 의도는 없었다. 원래 역사적으로도 북방의 비중화세계는 중화세계의 본진인 중원을 정복 대상으로 삼았을 뿐 한반도를 타깃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후금의 조상인 금나라 시절에도 그들은 고려가 사금(事金, 금나라에 사대함)의 자세로 돌아서자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중원으로 쳐들어가지 않았던가? 한반도를 공격한 것은 오히려 중화세계였지 비중화세계가 아니었다(고대에 한족 왕조인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침략한 게 그것이다). 고려시대에 거란과 몽골의 공격을 받은 이유는 고려가 이상하리만큼 중화세계에 강한 소속감을 보이면서 그들을 적대시했기 때문이다(왕건의 「훈요 10조」가 그런 예다). 따라서 그때도 고려가 최소한 중립적인 입장이라도 취했다면 전란..
수구의 대가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리고 왕국을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복원시켰다는 점에서 인조반정(仁祖反正)은 100여 년 전의 중종반정(中宗反正)과 같은 이름으로 불릴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수많은 공신들이 책봉되는 것은 당연할 터이다. 왕당파를 주도한 대북파의 보스들인 이이첨과 정인홍 등은 처형되었고, 반정을 주도한 소장파 서인들을 비롯해서 50여 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새 정권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부터 삐걱거린다. 사실상 반란의 물리력을 담당하고서도 2등 공신으로 책봉된 데다 중앙 관직이 아닌 평안도로 배속된 이괄은 불만이 가득하다. 굳이 말하자면 새 정권의 의도는 북방의 정세가 워낙 화급한지라 국경 수비를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괄로서..
곡예의 끝② 그런 상황에서 1622년 이이첨이 폐위된 인목왕후를 살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은 반대파의 공분을 자아내기에 족했다. 특히 정철(鄭澈)이 실각한 이래 오랫동안 권력 맛을 보지 못한 서인들은 이런 분위기를 틈타 뭔가 일을 엮어내야 한다고 판단한다. 실제로 사대부들의 상당수가 왕당파로 변신해 있었으니 그대로 간다면 조선을 사대부 국가로 되돌릴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질 것이다. 그래도 늙은 관료들이었다면 노골적으로 나서진 못했을 것이다(게다가 그들의 주무기는 말만의 역모인데, 지금은 그게 통할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현 정권에 항거했다 관직을 박탈당한 김류(金瑬, 1571 ~ 1648), 최명길(崔鳴吉, 1586 ~ 1647), 김자점(金自點, 1588 ~ 1651), 그리고 성균관 ‘제적생’으로..
곡예의 끝 만주쪽에서 보기에는 중원보다 더 가까운 게 한반도이며, 중국보다 더 약한 게 조선이다. 누르하치는 물론 조선을 타깃으로 삼고 있지는 않지만, 중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걸림돌이라고 판단되면 언제든 공격해 올 것이다. 일단 광해군은 대포를 새로 만들게 하고 북도의 군 지휘관들을 교체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하지만 새 지휘관들이 새 대포를 사용하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게 그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 국방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북아의 새로운 정세를 맞아 외교에 주력한다. 그에게는 일찍이 조선의 어느 임금도 해본 적이 없고 할 필요도 없었던 국제 외교라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알다시피 열강 사이에서 약소국이 벌이는 외교란 줄타기처럼 섬세하고 ..
남풍 뒤의 북풍② 광해군(光海君)은 왕당파를 움직여 권력을 얻었고 대동법(大同法)을 만들어 민심을 얻었다. 이렇게 해서 혼란스러웠던 국내 상황은 어느 정도 다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광해군이 정작으로 신경을 집중한 분야는 국내 정치가 아니라 나라 바깥의 동태다. 세자 시절에 전란으로 고생했던 경험은 그를 그 전의 어느 왕보다도 국제적 감각에 밝은 군주로 만들어주었다. 조선의 사대부(士大夫)와 백성들이 거의 모두 일본에 대한 원한에 사무쳐 있는 분위기 속에서도 즉위 이듬해인 1609년에 쓰시마 도주와 수교를 복원한 것은 아마도 국제적 감각을 갖춘 그였기에 가능했을 터이다(이 해가 기유년이기에 이를 기유약조己酉約條라 부른다). 게다가 그는 동북아의 풍향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수..
남풍 뒤의 북풍 국왕의 승리일까? 그럼 조선은 왕국으로 되돌아간 걸까? 아직 확실치 않으나 광해군(光海君)은 그렇다고 믿었다. 벌써 100년을 지배해 온 사대부 세력이 그렇듯 쉽게 권력을 내놓을 리는 없지만, 사태를 낙관한 그는 이제야 비로소 국왕 본연의 임무를 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사실 그는 왕권을 다지는 중에도 전란으로 얼룩진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건축을 서두른 게 상징적인 재건이라면, 즉위하자마자 시행한 대동법(大同法)은 실질적인 국가 재건 사업에 해당한다. 전란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으니 가장 시급한 게 토지와 조세제도다. 남아 있는 토지라도 추슬러 놓아야 농업 생산이 이루어질 뿐 아니라 무엇보다 전후 복구를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한데 그 재..
사대부에 도전한 국왕② 왕국을 만들기 위해 국왕도 당파가 필요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일찍이 세조(世祖)가 그러했듯이 왕국으로 컴백하려면 왕당파라는 측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세조 때와 달리 사대부(士大夫) 체제가 굳어져 있는 지금은 더더욱 측근의 힘이 튼튼해야 한다. 그래서 광해군(光海君)은 자신의 즉위를 도운 세력 중에서 왕당파의 리더를 발탁하고자 한다. 이이첨은 책략이 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별로 한 게 없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최적임자는 바로 정인홍이다. 연배도 높고 의병장으로 활약한 경력이 있을 뿐 아니라 이황과 더불어 성리학의 최고 권위자였던 조식의 수제자가 아닌가? 게다가 그는 광해군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적도 있었다(유영경이 선조가 광해군에게 양위하려 한 사실을 숨기려..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사대부에 도전한 국왕 정철(鄭澈)이 이루지 못한 ‘건저(建儲)의 꿈’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마자 실현되었다. 북쪽으로 도망치던 선조(宣祖)는 평양에 이르렀을 때 황급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가 왕실 사직이 끊어지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해결했어도 죽어 조상들을 뵐 수 없으리라는 판단이었을 게다. 광해군(光海君)에게는 친형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성질이 포악해서 세자 책봉을 받지 못했다(물론 사대부들의 구미에 맞는 후보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난리 덕분에 세자가 된 광해군은 공교롭게도 그 난리가 끝나면서 세자 자리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1600년에 의인왕후가 죽은 게 그에게는 큰 불운이다. 어차피 마흔이 넘은 그녀가 아이를 낳을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