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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분명한 시작④ 요컨대 미작 경영은 한반도의 지리적 조건에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따지고 보면 이후 역사 시대 내내 우리 민족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처음부터 여건에 맞지 않는 미작 농경을 주업으로 삼은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단군신화가 미작 농경을 암시하고 있다는 건 어떻게 봐야 할까? 신화의 내용에서는 비슷한 점이 없지만 문명의 성격에서는 단군신화와 대단히 흡사한 게 바로 중국의 건국신화다. 중국의 경우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에 이미 초보적인 농경술이 발달했다. 삼황(三皇)의 시대에 중국에서는 농사가 발명되었으며, 오제(五帝)의 시대에는 농법이 완성되었고, 바로 뒤에 하(夏)나라를 건국하는 우(禹)는 황허의 치수(治水)에 성공함으로써 중국의 왕조 시대, 즉 본격적인 역사시대를 ..
분명한 시작③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한 가지 더 있다. 무릇 인류 문명이란 세계 어디서나 수렵채집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 때부터 발생했다. 따라서 모든 문명은 당연히 농경을 기본으로 한다(문명의 탄생 자체가 정착 생활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하니까). 그렇다면 단군이 한반도 토박이들에게 농경문명을 전했다는 사실 자체는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일 수 없다. 정작 특이한 일은, 단군은 그냥 농경 문명이 아니라 첨단의 선진 농경문명을 전해주었다는 점이다. 그게 뭘까? 그건 바로 미작 농경이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우기 이전에도 한반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도 초보적인 농경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쌀은 한반도에서 가장 늦게 경작되기 시작한 작물에 속한다. 태고적 한반도인들은 조..
분명한 시작② 이렇듯 신이 다스리는 세계가 먼저 출현하고 그 다음에 인간이 주역으로 등장하는 시대, 즉 역사 시대가 개막되는 게 민족신화나 건국신화의 기본 코스다. 그런 점에서 단군왕검이라는 ‘인간’이 주인공인 우리의 단군신화는 확실히 특이한 데가 있다. 물론 단군도 신과 관련된 인물이기는 하다. 그의 아버지 환웅은 천제(天帝)인 환인의 서자였다. 하늘에서도 서자는 차별을 받았을까? 그는 일찍부터 하늘 세상보다 인간 세상에 관심을 보였는데, 그 관심에 대한 보상으로 아버지에게서 바람과 비와 구름을 관장하는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받고 태백산이라는 땅으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세운다(태백산은 오늘날 한반도 북부 또는 랴오둥遼東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무리 비천한 인간 세상이라지만 신의 아들로서 신의 도시..
1장 신화에서 역사로 분명한 시작 역사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조(始祖)를 둔 민족만큼 부러운 게 또 있으랴? 시조가 있으면 민족의 기원과 역사의 시작이 분명하다. 다만 그렇게 분명한 시작은 역사가들에게 의지할 만한 출발점을 주지만, 그와 더불어 커다란 숙제도 안겨준다. 출발점 자체를 해명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이전의 역사는 미궁에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기원의 역사』 중에서 우리 역사는 처음이 아주 분명하다. 그 이유는 단군(檀君)이라는 민족의 시조가 있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역사를 봐도 우리 역사만큼 시조가 분명한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단군은 시조보다 국조(國祖)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물론 시조에 해당하는 존재는 흔히 있다. 그러나 다른 민족의 시조들은 거의 모두 인간..
1부 깨어나는 역사 지금으로부터 5천 년 전쯤 단군이라는 외래인 집단이 한반도 원주민들을 복속시키고 고조선을 세우면서 역사의 문이 열린다. 이후 2천 년 동안 한반도 문명권은 조금씩 신화에서 탈피하는 한편 중국사와 접촉하는 것을 계기로 ‘알려진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중화 문명권의 변방으로 출발한 한반도는 중심인 중국 한나라의 힘이 약해지는 시기를 맞아 도약의 기회를 맞는다. 그것이 삼국시대의 시작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현실과 사상 원래 역사는 두 가지 방향에서 서술되어야 한다. 하나는 현실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지성의 흐름이다. 현실의 역사와 지성의 역사는 각기 나름대로의 일관성(coherence)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에 대해 대응성(correspondence)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 현실의 역사를 그냥 역사라 부르고 지성의 역사는 사상사(철학사가 대표적이다)라 부르지만, 실은 두 가지가 한데 뭉뚱그려져야 온전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지성이 나오고 지성은 또 현실을 이끌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만이 아니라 동양사 전체에서 지성이란 곧 유학으로 대표된다. 중국에서 주나라가 탄생한 기원전 12세기에 유학의 초보 이념인 예(禮)가 생겨났고, 여기에 공자(孔子)가 인(仁)의 개념을 보태 유학이 성립되었다. ..
역사와 시사 역사를 배우는 가장 큰 목적이 바로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건 초등학생도 잘 안다. 하지만 역사에서 어떻게 오늘을 끌어낼 수 있는지는 역사학자도 잘 모른다. 그 이유는 역사를 통사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베이징의 나비 한 마리가 뉴욕의 날씨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현대 과학의 이론만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는 특정한 사건의 배경에 그 전까지의 모든 사건들이 크든 작든 연관되어 있으므로, 역사는 반드시 흐름으로 인식해야만 정체를 파악할 수 있고 아울러 오늘의 문제와도 접목시킬 수 있다. 역사 속에서 특정한 개념이나 인물을 끄집어내서 오늘의 시사와 비교하는 건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조용조(租庸調)라는 고대의 조세제도를 오늘날의 재정 정책과 비교한다거나, 과거제(科擧制)라는 ..
프롤로그: 한국사를 시작하면서 사람과 땅 우리의 교육 과정에는 국사(國史)라는 과목이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역사’라는 뜻이겠지만, 원래 역사에는 국적이라는 게 없다. 역사는 그저 역사일 뿐이다. 따라서 ‘국사’ 즉 ‘national history’라는 것은 없고 그냥 ‘history’만 있다. 최초의 역사가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역사』라는 책을 쓸 때부터 역사란 ‘지나간 이야기’라는 뜻일 뿐 특정한 국경을 내포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국사나 프랑스사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그 경우 영국이나 프랑스는 나라 이름이라기보다는 땅이나 지역을 가리키는 뜻에 가깝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정식 국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와서의 일이다.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국사..
책 머리에 통속적인 역사책에 싫증을 느낀 독자에게 역사라는 말을 앞에 놓고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따분하고 고리타분하다’는 부정적인 반응,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재미있는 교양 지식’이라는 긍정적인 반응. 서로 정반대 평가지만 둘 다 옳다. 역사란 옛날에 있었던 사건들을 다루는 것이니, 오늘을 바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따분하고 고리타분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역사는 철학이나 언어학과 같은 골치 아픈 인문학에 비해 그래도 쉽고 만만해 보이니, 학문 중에서는 그래도 재미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두 가지 입장 모두 옳지 않다. 어제 없는 오늘이 없으니, 역사란 실상 오늘의 모습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사실 오늘의 일도 내일이면 ‘따분하고 고리타분한 역사..
종횡무진 동양사 목차 남경태 연표 선사 ~ 위만조선 삼국건국 ~ 신라통일 남북국 고려 조선 건국~연산군 중종~임란 발발 임란~정조 순조~조선 말기 대한제국~현대사 책 머리에 2009년 통속적인 역사책에 싫증을 느낀 독자에게 2014년 지은이의 향기가 나는 종횡무진 시리즈가 되기를 바라며 프롤로그: 동양의 태어남과 자람, 그리고 뒤섞임 1부 태어남 제1장 중국이 있기까지 신화와 역사의 경계 구름 속의 왕조를 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 기나긴 분열의 시대 최초의 통일을 향해 동양 사상의 뿌리(유가, 묵가, 법가, 도가) 2장 인도가 있기까지 굴러온 돌의 승리 인도와 종교(불교, 자이나교) 정치적 공백이 이룬 통일 3장 일본이 있기까지 금속의 빛을 던져준 야요이 문화 빛은 서방에서 왜에서 일본으로 2부 자람 4..
3 이렇게 중심과 변방을 나누는 동양사의 틀은 일본사에서도 확인된다. 중국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사에서도 중심은 언제나 고정되어 있었다. 고대에는 천황이 있는 교토, 중세에는 바쿠후가 있는 도쿄 일대가 정치와 경제의 중심이었으며, 정신적이자 상징적인 중심은 늘 천황이었다. 고대의 귀족들부터 중세의 바쿠후와 다이묘 들에 이르기까지 세력가들은 중심을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중국에서 천하를 쟁패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 것과 규모만 작을 뿐 마찬가지다. 이 천하 쟁탈전이 벌어지는 동안 중국에서 중화 문명권이 넓어지고 강해졌듯이 일본에서도 그 과정에서 열도 전체가 단일한 체제로 편입되고 통합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에는 인위적으로 중화의 경계를 정해야 할 만큼 지리적으로 트여 있었지만(또 그래서..
2 그렇다면 서양사와 동양사는 뿌리부터 달랐다고 볼 수 있다. 발생만이 아니라 서양사와 동양사는 전개 과정도 사뭇 다르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문명의 중심에서 드러난다. 쉽게 말하면 서양사는 중심이 이동한 역사이고, 동양사는 중심이 고정된 역사다. 두 역사가 형성되고 전개되는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아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서양사는 오리엔트에서 발생하고 성장하다가 소아시아로 이동했다(오리엔트에서 문명이 소멸하고 다른 데로 옮겨갔다는 뜻이 아니라 중심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소아시아의 서쪽은 에게 해와 그리스다. 소아시아의 문명은 먼저 크레타 섬으로 전해져 미노스 문명을 이룬다. 한편 그리스에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아리아인이 발칸을 거쳐 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 남하해 토착 원주민들과 섞였다. 이들은 크..
에필로그: 문명의 뒤섞임, 차이와 통합을 아우르는 시대로 1. 이것으로 중국ㆍ인도ㆍ일본의 동양 3국을 다룬 동양사의 여정은 끝났다. 모두 1940년대 후반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전후 질서’가 수립된 시점 언저리에서 끝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후의 역사는 다른 시대, 즉 ‘현대‘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이 현대는 ‘진행 중의 역사’이므로 역사라기보다는 ‘시사(時事)’에 가깝다. 따라서 역사책보다는 신문을 참고하는 게 더 좋을 듯하다. 게다가 현대의 역사는 한 지역의 역사가 아니다. 지금까지는 동양사를 세계사에서 떼어내 별도로 이해하는 방식이 유용했으나 이제부터는 전 세계를 하나의 역사권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현대의 역사는 더 시간이 지나야만 지금과 같은 의미의 ‘역사’로 서술될 수 있..
정치와 경제의 부조화②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경제는 전후 패전의 충격을 딛고 눈부신 성장률을 보였다. 특히 경제 복구에 나선 초기에 한국전쟁이 터진 것은 일본 경제에 중요한 도약의 계기를 제공했다. 전쟁을 주도한 미국과 국제연합군이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서비스를 일본에서 조달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외환 보유고는 한국전쟁 전 2억여 달러에 불과했으나 3년 뒤 전쟁이 끝났을 때는 무려 다섯 배로 치솟았다. 이 자본은 일본이 단순히 전후 복구에 그치지 않고 세계 경제의 호황기인 1960년대에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20여 년 동안 일본 경제가 연평균 10퍼센트 이상의 고도성장을 기록한 데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1970년대..
정치와 경제의 부조화 경제에 대해서는 성장과 발전이라는 말을 쓸 수 있으나 정치는그렇지 않다. 정치는 경제를 담아내는 그릇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경제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기는 해도 그것을 성장이나 발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정치의 목적은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경제와 조화를 이루는 데 있다(예를 들어 자본주의 시대에 팽창한 경제를 봉건제의 정치로 감당할 수는 없다). 그래서 경제는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데 반해 정치는 다소 인위적으로 진행된다. 이 점에서 서양사와 동양사는 차이를 보인다. 동양의 역사에서도 경제는 꾸준히 성장하고 발전했지만, 정치는 경제와 조화를 이루기는커녕 어긋나고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예가 일본의 역사다. 일본은 1868년의 메이..
군국주의의 말로② 1941년 6월, 유럽에서 독일은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소련을 공격했다. 개전 초기부터 이 무렵까지 세계대전의 전황은 추축국 측에 유리했다. 10월, 미국과의 교섭에 실패한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1891~1945) 총리가 물러나고 드디어 전쟁의 주역이 일선에 등장했다. 일찍부터 중일전쟁을 주창했고 이제 대미 전쟁을 계획한 육군장관 도조가 총리를 겸임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군부는 비공식적으로 정부를 움직였으나 이때부터는 공식적으로 정부가 되었다. 그해 12월 1일, 천황은 도조가 주장하는 미국과의 전쟁을 허가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일본은 여느 때처럼 아무런 선전포고도 없이 미국의 태평양 해군기지가 있는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했다. 그때까지 제2차 세계대전은 명..
군국주의의 말로 일본 군부는 중일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그것은 허세가 아니었다. 만주사변 이래 여러 차례 벌어진 국지전에서도 연전연패한 중국이 전면전으로 나온 일본을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당시 중국은 경제적으로 수십 년 동안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군사적으로는 아편전쟁 이래 국제전에서 단 한 차례도 승리하지 못한 약소국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전략은 승패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타격을 가해야만 중국이 항일을 포기할 것이냐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1938년의 난징 대학살은 바로 중국의 항복을 강요한 일종의 대규모 무력시위였다. 그러나 중국의 저항은 의외로 완강했다. 일본군은 곳곳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했으나 중국은 거점을 차례차례 빼앗기면서도 항전을 ..
중국을 먹어야 일본이 산다③ 그러나 만주야 원래 관동군이 통제하던 지역이었으므로 쉽사리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중국 본토 침략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본은 장제스의 국부군 만을 적수로 여겼으나 의외로 곳곳에서 일본군의 진출을 저지한 것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홍군이었다. 더구나 1935년 마오쩌둥이 내전 중지와 항일 민족통일전선을 주창하고, 이듬해 터진 시안 사건으로 장제스가 그에 동참을 선언하면서 2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지자 관동군의 속전속결 작전은 이미 물 건너갔다. 한편 일본의 정치 무대는 급속히 완벽한 군국주의로 옮겨가고 있었다. 1932년 군부는 새 내각의 총리인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1855~1932)가 적극적인 전쟁 추진의 의지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총리를 암살하는 ..
중국을 먹어야 일본이 산다②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의 일부 장교들은 평텐 교외의 남만주 철도를 자기들 손으로 폭파해놓고 그것을 중국군이 저지른 도발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전쟁을 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터진 만주사변은 일본이 도발한 예전의 전쟁들과 마찬가지로 선전포고 없이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사실 선전포고는커녕 이 계획은 관동군 사령관에게조차 사전에 통보되지 않고 소수의 하급 장교들이 도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후에 보고받은 사령관은 부하들의 불법 도발을 승인하고 즉각 전면전을 준비했다. 또한 관동군 사령관의 요청을 받은 조선군 사령관도 즉각 병력을 만주로 파견하고 탄약을 수송했는데, 이 과정에서도 역시 정부의 허가를 얻지 않은 것은 물론 사전 통보조차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보고받은 일본 정부는 ..
중국을 먹어야 일본이 산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경제적ㆍ군사적으로 명실상부한 대국이 된 일본의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독점자본주의로의 길이다. 이미 일본은 유럽 열강에 뒤지지 않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으므로 서구적인 독점 자본주의, ‘정통’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할 자격이 충분했다. 다른 하나는 군국주의로의 길이다. 군사적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일본은 경제적인 침략보다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군사적 침략을 실행할 힘도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경제 노선과 군사 노선 중 일본이 택한 것은 무엇일까? 힌트는 군부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던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1870~1931) 총리가 극우 세력에게 암살된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도 1929년의 세계 대공황이 없었다..
‘군부’라는 개념③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산둥의 점령으로 일본은 동양에서 더 이상 전쟁에 기여할 일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바라던 목표도 이루었다. 그래서 일본의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중국에서 독일 세력을 몰아낸 뒤에도 일본은 군대를 철수하기는커녕 오히려 병력을 증원했다. 이 무력을 바탕으로, 유럽에서는 여전히 포성이 한창이던 1915년에 일본은 중국의 실권자인 위안스카이에게 21개 조의 요구를 강요했다. 그 내용은 산둥에서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권리를 일본이 대신 차지하고, 남만주와 몽골, 중국 연안 일대를 일본이 관리하며, 중국 내 탄광 개발과 중국의 치안에 일본이 관여하겠다는 것이었다.결국 일본이 세계대전이라는 ‘피의 제사’에 참여한 이유는 이 잿밥을 먹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일본의 왕성한 식..
‘군부’라는 개념② 이 전쟁에서 일본은 생사가 걸려 있지도 않았고 당사자도 아니었다. 그런 여유에서 일본은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서와 달리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다(일본이 국제전에서 선전포고를 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유일하다). 참전의 명분은 영일동맹이었다. 영국과 일본 중 한 측이 전쟁에 개입할 경우 다른 측이 지원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영국은 일본의 참전에 난색을 표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억지로 참전한 것이니, 영일동맹은 그야말로 구실일 따름이었다. 어부지리(漁父之利)를 꾀하려는 일본의 의도는 누가 보아도 뻔했지만 연합국 측은 이미 참전하기로 했으니 유럽으로 군대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그 요구를 거부하고 동양에서 ‘제 역할’을 찾았다. 그것은 독일..
5. 동양식 제국주의의 결론 ‘군부’라는 개념 강대국인 청과 러시아를 상대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두자 일본 정치에서 군대의 지위는 더없이 확고해졌다. 이제 군은 행정부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렸으며, 정부의 대내외 주요 정책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영향력과 발언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군은 향후 일본의 최종 목표를 중국 정복으로 정했다. 조선을 병합하고 나서부터는 ‘군부(軍部)’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군대가 아닌 군부라는 말은 군이 정부에 못지 않은, 아니 그 이상의 위치에 있음을 뜻한다. 더구나 군부라는 말은 군 내부에서 만들어 사용한 것이므로, 이미 군 자체가 스스로 정치 세력으로 탈바꿈했음을 나타낸다. 19세기 전 세계를 주름잡았던 영국 제국주의를 뒷받침한..
제국주의의 명패를 달다④ 일본을 사지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준 것은 러시아의 내부 사정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활발해진 러시아의 혁명운동은 러일전쟁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실은 일본의 메이지 정부가 청일전쟁으로 숨통을 텄듯이 러시아의 차르 정부도 국내의 정정 불안을 전쟁으로 타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일본에 밀리자 혁명운동이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차르 정부의 무능함만 드러났다. 급기야 1905년 1월 22일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군대가 시위대에 발포하는 ‘피의 일요일’ 사태가 일어났다. 이로써 러시아 내부 정세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들었다. 사태가 급변하자 전쟁을 바라보는 열강의 태도도 변했다. 이제는 군국주의 일본의 성장보다 러시아의 혁명운동이 더 큰 위협이었다. 그래서 열강..
제국주의의 명패를 달다③ 이것으로 일본은 삼국간섭의 치욕을 만회할 수 있는 ‘멍석’을 깔았다. 남은 일은 이 멍석 위에서 러시아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 것뿐이다. 때마침 러시아는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강제로 조차했고, 만주에서도 일본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다. 청일전쟁에서처럼 상대방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으나 일본은 이미 전쟁 준비를 완전히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청일전쟁에서처럼 일본은 1904년 2월 8일과 9일에 걸쳐 뤼순과 인천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기습하고 다음 날에야 선전포고를 했다. 이렇게 시작된 러일전쟁은 10년 전의 청일전쟁과 달리 조선과 만주의 지배권을 놓고 두 제국주의 국가가 벌인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청과는 전혀 다른 강호였다. 서구 ..
제국주의의 명패를 달다② 이래저래 일본에 미운 털이 박힌 러시아는 일본의 텃밭이나 다름없는 조선에서마저 일본과 대립했다. 당시 조선의 조정에서는 친일파와 친러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삼국간섭에서 일본이 굴복하는 것을 본 민씨 세력은 갑오개혁을 주도한 친일 내각을 몰아냈다. 이에 맞서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대원군을 옹립했다. 이 만행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서 1년 가까이 머물렀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조정은 친러파가 장악했다. 이제 일본이 조선과 만주, 나아가 중국에서 발언권을 강화하려면 러시아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본과 같은 체급이 아니다. 비록 유럽..
제국주의의 명패를 달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1000여 년이나 꿈꾸어온 동양의 패자가 되었다. 이제 일본은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넘어 중국을 압박하는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그것으로 일본이 서구 열강과 같은 반열의 명실상부한 제국주의 국가가 된 것은 아니다. 원조가 아니므로 어디까지나 후발 제국주의 혹은 아제국주의에 불과한 처지다. 이런 ‘서러움’은 당장에 현실로 나타났다. 원조가 텃세를 부린 것이다. 랴오둥 반도를 받는다면 일본은 대륙 침략에 교두보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지 불과 6일 만에 단꿈에서 깨야 했다.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이 함께 랴오둥을 청에 반환하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것을 삼국간섭이라고 부르는데, 실상 주도한 나라는 러시아였다. 겉으로 내세운..
300년 만의 재도전③ 외국군이 들이닥친다는 소식을 들은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은 서둘러 6월 10일에 조선 정부와 화의를 맺고 전주성에서 철수했다. 조선 정부도 그제야 사태의 위중함을 깨닫고 두 나라 군대의 철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 끝낼 거라면 애초에 군대를 보내지도 않았다. ‘진압 대상’이 사라지자 일본은 숨긴 의도를 드러냈다. 두 달 가까이 동학 잔당을 없앤다며 부산을 떨던 일본군은 7월 하순에 느닷없이 조선의 왕궁에 침입해 민씨 정권을 제거하고 대원군을 다시 옹립했다. 이 때문에 오히려 동학 농민군은 재차 봉기에 나섰으니, 일본군은 반란 진압을 구실로 왔다가 반란을 더욱 키운 셈이었다. 일본으로서는 이미 겉으로 내보인 발톱을 도로 감출 수 없는 입장이었다. 대원군을 옹립한 지 이틀..
300년 만의 재도전② 일본이 조선 침략을 계획한 경제적 이유는 시장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쌀과 금을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그러려면 단순히 무역을 통해서가 아니라 조선을 통째로 소유해야만 가능했다. 따라서 일본의 침략은 서구 열강의 중국 침략처럼 경제적 측면에만 국한될 수 없었던 것이다. 7장에서 보았듯이, 서구 열강(특히 독일)도 처음에는 중국을 영토 분할하는 데 큰 관심을 보였으나 실현 불가능함을 깨닫고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볼 때 조선은 영토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지역이 아니었다. 다만 수백 년 동안 한반도의 정치ㆍ외교ㆍ군사를 장악하고 지휘한 중국만이 걸림돌일 뿐이었다(일본은 300년 전 임진왜란도 중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성공했으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일본은 청..
300년 만의 재도전 내부의 저항을 진압한 일본 정부는 이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노골적으로 바깥을 향해 아(亞)제국주의 군국주의 노선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일차 목표는 일찍부터 노리던 한반도였다. 없는 계기라도 만들어야 할 판에, 때마침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발생했다. 개화파인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것이다. 일본은 김옥균을 지원해 쿠데타를 성공시켰으나 정변은 사흘 만에 수구파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본은 오히려 쿠데타가 성공한 것보다 상황을 더욱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소득을 얻었다. 하나는 일본 공사관이 습격을 당했다는 훌륭한 ‘전과’이고, 다른 하나는 청의 군대가 수구파를 지원했다..
유신의 결론은 군국주의② 자유주의자들은 일찍부터 일본의 제국주의화를 경계했다. 이들은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처럼) 서구 열강에는 군말 없이 복종하면서 조선과 중국 등 이웃 나라들에는 침략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유신 정부의 이중적 태도에 대해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비판했다. 그들은 오히려 동북아시아의 이웃들과 연대해 서구 열강에 대항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운 ‘동양 연대’는 이후 군국주의 정부에 차용되어 이른바 ‘대동아공영’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된다. 정부는 헌법 제정을 약속하면서도 자유주의 운동을 혹독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아직 토대가 취약한 자유주의 세력은 정부가 ‘응징’으로 돌아서자 불과 몇 년 만에 붕괴하고 말았다. 일부 급진적인 세력은 자신들의 궁극적 기반인 민중 속으로 들어가 각지에서 ..
유신의 결론은 군국주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자체에 군사적 성격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신 직후부터 곧바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 노선은 일본 사회 전체가 동의한 게 아니었다. 저항의 가능성은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메이지 유신의 기본적인 성격에 내재해 있었다. ‘위로부터’였으므로 민중의 권익을 위한 게 아니었다. 또한 ‘근대화’였으므로 전통적인 기득권층이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은 민중의 거센 저항과 상인, 지주층의 반발을 샀으며, 때로는 그 두 가지가 결합된 도전을 받았다. 민중 세력의 성장에 힘입어 서구적 자유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새로운 지식인층과 정치 지도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근대화의 이념에 동의했으나 방향은 정부와 반대로 ‘아래로터의 근대화..
대외 진출은 늘 침략으로② 다만 아직 내치가 안정되지 못했으므로 시기상조라는 정부 내반대 여론이 비등한 탓에 정한론은 곧장 한반도 침략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한론의 기본 정신은 부정된 게 아니라 연기되었을 뿐이다【일본의 제국주의 노선은 한반도를 겨냥하기 전에 소규모로 실천에 옮겨져 상당한 성과를 낳았다. 1874년의 대만 침략과 1879년의 오키나와 복속이 그 결과다. 오키나와는 원래 독립국으로, 청과 일본 양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벌였으나 일본이 먼저 선수를 쳐 강제로 합병했다. 현재 오키나와보다 중국과 대만에 훨씬 더 가까운 센가쿠 열도(중국 명칭은 釣魚島)가 중국과 일본의 영토 분쟁에 휘말린 것은 당시 일본이 오키나와를 선점했기 때문이다】. 그런만큼 정한론은 이후부터 노골적인 측면을 ..
4. 제국주의의 길 대외 진출은 늘 침략으로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은 외부의 침입을 막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대외로 진출하는 데는 커다란 걸림돌이다. 물론 하기에 따라서는 대외 진출에도 얼마든지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외부의 간섭 없이 완벽한 내부 준비를 갖추고 나서 내실 있게 대외 진출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 여기서 핵심은 내부를 다지는 주체의 역량이 어느 정도냐에 있다. 주체가 무능하면 내정도 불안정하고 당연히 대외 진출도 무리수가 되지만, 주체가 유능하면 성공적인 내정이 그대로 대외로 연장될 수 있다. 지금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제외하면, 2000년에 걸친 일본 역사에서 국가적인 규모의 대외 진출은 두 차례 있었다(무역이나 문화 교류와 같은 민간 부문은 ..
일본의 머리에 서양의 손발③ 이렇게 단기간에 뚜렷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유신 지도부가 유능할뿐 아니라 청렴했기 때문이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던 만큼 정권의 도덕성은 개혁의 성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였다. 유신 정권은 신생 정권답게 청렴했으며, 핵심 세력의 나이도 ‘부패 연령’에 이르지 않고 젊었다. 최고 수뇌부의 최고 연장자라고 해봐야 40대 중반이었고 주로 30대 소장파가 모든 실무를 담당했다(훗날 조선의 안중근에게 암살당하는 이토 히로부미도 젊은 시절에 메이지 정부에서 일했다). 젊은 그들의 신세대적 감각은 내정 개혁 만이 아니라 대외 관계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이들은 옛 바쿠후가 불평등조약을 통해 서구 열강에 빼앗겼던 각종 이권을 하나씩 회수해 ..
일본의 머리에 서양의 손발② 여기까지는 서론에 불과하다. 메이지 유신의 본론은 근대화를 통한 부국강병 작업이다. 1871년 체제 정비를 완료한 유신 정권은 최고 수뇌부의 절반에 달하는 48명의 대규모 사절단을 편성해 미국과 유럽으로 파견했다. 당면 목적은 그때까지 서구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조약들을 수정하려는 것이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구 열강의 선진 문물을 현지에서 시찰하고 새 일본 건설에 적용하려는 장기적인 목적이었다. 1000여 년 전 당 제국이 건강했을 때 일본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견당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당시의 견당사가 주로 유학생들이었던 반면 메이지 사절단은 직접 통치를 담당하는 관료 집단이었다. 사절단은 1년 반에 걸쳐 미국은 물론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일본의 머리에 서양의 손발 천황이 실권을 가지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양식 절대왕정 같은 체제가 수립된 것은 아니다. 영국의 튜더와 스튜어트 왕조,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로 대표되는 서양의 절대군주는 군주 자신이 최대의 봉건영주로서 정치와 외교, 군사 등 모든 분야의 최고 결정자였다. 그러나 일본의 천황은 법제상으로만 절대 권력을 지닐 뿐 현실적으로는 휘하 관료들이 권력을 소유하고 집행했다. 그렇다 해도 천황은 이제 과거의 상징적 존재와는 달랐다. 관료들은 모든 권력을 ‘천황의 이름으로’ 행사했으므로 천황은 모든 권력의 원천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일본의 천황은 절대 권력자를 넘어 신적 권위를 지닌 존재였다. 이 점에서 천황은 유럽의 어느 절대군주도, 심지어 중국의 황제조차 미치지 못하는 위상..
바쿠후의 몰락② 그러나 바쿠후는 이권을 제공하는 대가로 프랑스로부터 모든 측면의 지원을 받았으나, 반바쿠후파는 영국으로부터 군사와 재정 원조는 의도적으로 거부했다. 이는 무사 집단 특유의 강렬한 반외세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반바쿠후파가 바쿠후보다는 민족의식이 강했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일반 민중에게도 바쿠후에 대한 반감이 절정에 달할 즈음인 1866년 겨울, 드디어 고메이 천황이 죽고 열네살의 메이지(明治, 1852~1912)가 즉위했다【원래 고메이는 10대 시절 일본이 강제 개항되는 것을 목격한 이후 외세와 바쿠후를 다 혐오했다. 그런 그가 바쿠후와 손잡은 것은 조슈파를 더 혐오했기 때문이다. 천황의 비중이 커지던 무렵 고메이는 서른여섯 살의 한창 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죽었는데, 반바..
바쿠후의 몰락 전통의 지배층인 다이묘들이 바쿠후에 집착하는 동안 새 시대를 담당할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다이묘와 번주(藩主) 들의 휘하에 있던 무사들을 비롯해 로닌, 지주, 상인 계층이었다. 그들은 정치 개혁에 뜻을 두었으므로 시시(志士, 우리말에서는 민족을 위해 몸 바친 ‘지사’를 가리킨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시시들은 바쿠후 정권이 흔들리고 부패한 17세기 중반부터 성장한 민중 세력이 결집된 표현이었다(물론 그들이 민중의 이익을 대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바쿠한 체제가 붕괴하면서 시시들도 받들어 모시던 바쿠후와 번주 등 기존의 지배층과 어느 정도 유리되었으므로 비교적 발언과 주장이 자유로웠다. 그들은 바쿠후의 개혁에 동참하기보다는 바쿠후 자체를 거부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내세운 대체 권력..
타의에 의한 복귀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한 것은 서구 열강으로서도 놀라운 사건이었지만 일본으로서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일본은 늘 중국과 대등하다고 천명하면서도 힘에서나 국제 무대의 권위에서나 동양 질서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것을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중국이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열강에 무릎을 꿇었다. 그렇다면 일본이 견디지 못하리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바쿠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힘을 앞세운 무사 집단으로 출발해 전국을 통일하고 지배했던 만큼, 바쿠후의 힘이 외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곧 권위의 뿌리가 흔들린다는 것을 뜻했다. 마치 이런 기미를 눈치라도 챈 것처럼, 1846년 영국과 프랑스의 군함들이 일본 근해에 출몰하자 오랫동안 현실 정치에 간여하지 못했던 천황..
닫힌 문을 두드리는 열강② 그런 탓에 일본에 최초로 통상을 요구해온 나라는 전통적인 제국주의 열강이 아니라 유럽의 ‘변방’인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18세기 내내 끊임없이 동진해온 끝에 마침내 유라시아의 ‘땅끝’인 베링 해에 이르렀다. 그 동진의 목적은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질러 동진하면서 러시아는 남쪽 방면으로는 무주공산이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서유럽은 러시아로서 넘볼 수 없는 선진국이고,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는 막강한 튀르크 제국이 점령하고 있다. 더 동쪽으로 가보니 러시아의 영웅 표트르마저 국경 조약(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은 데 그친 강력한 청 제국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의 동진은 베링 해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 덕분에 러시아는 드넓은 시..
닫힌 문을 두드리는 열강 일본 바쿠후가 쇄국의 기치를 드높이 치켜들고 있던 18세기 후반 무렵 유럽 세계는 유사 이래 가장 활발한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대륙 국가들에 비해 봉건제의 굴레가 약했던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자본주의의 새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미 17세기 초반부터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경영하는 데 앞장섰던 영국은 18세기 중반 프랑스를 꺾고 단독으로 인도를 식민지화하는 데 성공했다(8장 참조). 영국에 패한 프랑스는 엄청난 변화의 회오리를 맞게 되었다. 바로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다. 이 혁명과 뒤이은 나폴레옹 전쟁은 전 유럽의 지각을 뒤흔들어 근대적 국민국가의 성립을 촉진시켰다. 이와 같은 전통의 강호들 외에 새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 나라들도 등장했다. 러시아는..
일본식 시민사회?③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1716년 요시무네(吉宗, 1684~1751)가 8대 쇼군에 올랐다(이후의 쇼군들은 무능한 인물들이 이어졌으므로 그는 사실상 마지막 쇼군이나 다름없다), 도쿠가와 가문 중에서도 비적통계로 쇼군이 된 요시무네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위기의 원인이 두 가지인 만큼(재정난과 농민 저항) 그가 준비한 위기 해결책도 두 가지였다. 첫째는 절약, 또 절약이다. 우선 쓸데없는 행사 비용 같은 것을 과감히 줄여 바쿠후 재정의 거품을 뺐다. 아울러 전국의 번과 무사, 백성 들에게 사치를 금하고 엄격한 내핍 생활을 하도록 명했다. 심지어 그는 “이제부터 새로운 물건이나 도구를 고안하는 일을 엄금한다.”라는 명을 내렸는데, 사회적 창의성 자체를 거부하고 수구적으로 돌아설 만큼 ..
일본식 시민사회?② 서양의 역사에서는 봉건제가 무너지면서 생겨난 신흥 시민계급(부르주아지)이 사회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자본주의의 발생과 발전에 큰 몫을 담당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에는 바쿠후라는 강력한 권력의 중심체가 지배하는 가운데 도시가 발달했기 때문에 사정이 크게 달랐다. 바쿠후 자체가 봉건제의 주체였으므로 반란 같은 사건을 통하지 않고서는 서양에서처럼 봉건제가 자연스럽게 붕괴하기 어려웠고, 시민들이 곧 무사들이었으므로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어려웠다【무사들을 제외한 도시의 일반 시민들은 조닌(町人)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도시의 수공업자와 자영 상인이었는데, 전통적인 다이묘들에게서 배척을 당했지만 개인적 노력으로 상당한 부를 쌓은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돈은 있어도 서양의 시민계급처럼 ..
3. 번영을 낳은 쇄국, 유신을 낳은 개항 일본식 시민사회? 세계와의 접촉을 전쟁으로 시작한 일본은 쇄국 이후 다시금 기나긴 독자적 역사를 전개하게 된다. 그러나 쇄국은 의식적으로 세계와의 단절을 기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쇄국기의 역사는 종전의 쇄국기(9~16세기)와 달랐다. 집 안에 틀어박혀 산다 해도 바깥의 존재를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를 테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이 시기 일본의 역사는 세계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해당한다. 바쿠한 체제는 봉건적이면서도 탈봉건적인 요소를 품고 있었다. 지방의 번들은 원래 정치적인 목적에서 성립된 것이었으나, 에도 바쿠후의 장기 집권으로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고 쇄국으로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데 힘입어 점차 경제ㆍ행정상에서의 비중을 더해..
쇄국을 통한 안정③ 1639년부터 바쿠후는 쇄국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하고 모든 서양인의 출입을 금지했다. 심지어 해외에 오랫동안 거주한 일본인마저 그리스도교 신도일지 모른다는 이유로 귀국이 금지되었다. 한 가지 예외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만은 제한적으로나마 무역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이에야스 시절부터 생긴 네덜란드와의 각별한 친교 때문인데, 지금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일본에는 특별히 네덜란드와 관련된 근대의 유적들이 많이 있다【18세기 초반부터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의 과학과 군사학, 세계의 지리와 역사를 연구하려는 학문이 크게 성행했는데, 이것을 란가쿠(蘭學: 네덜란드는 한자로 和蘭이라고 표기했다)라고 불렀다. 바쿠후는 네덜란드에 대해서만큼은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으며, 네덜란드 역시 그 호의..
쇄국을 통한 안정② 그런데 바쿠후는 황금 알을 낳아주던 해외 무역을 스스로의 손으로 금지하게 된다. 그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교 때문이었다. 해외 무역이 활발하던 17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에 오는 서양인들은 바쿠후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에 표류한 네덜란드의 선원들을 고문으로 삼았으며, 유럽 상선들의 입항을 허락하고 항구에 통상처까지 마련해주었다. 시기를 놓고 본다면 일본은 오히려 가까운 동남아시아 국가들보다 유럽과 먼저 거래를 튼 셈이다. 서양인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자연히 서양의 문물도 함께 들어왔다. 서양의 그리스도교는 이미 센고쿠 시대 말기부터 일본에 들어와 민간에 퍼졌다. 중국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종교개혁 이후 유럽에서 세력이 크게 위축된 구교의 선교사들은 먼 동방에서 ..
쇄국을 통한 안정 제국의 면모를 갖추면서 내부가 안정되자 일본의 시선은 다시 밖으로 향했다. 중국이 수비형 제국이라면, 히데요시의 야망에서 보았듯이 일본은 기회만 닿으면 밖으로 눈을 돌리는 공격형 제국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히데요시와 같은 침략이 아니라 경제적 해외 진출이었다. 어느 바쿠후보다도 경제에 관심이 많았던 에도 바쿠후는 노부나가 시절부터 맛들이기 시작한 해외 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무역은 상인들이 하는 일이지만 바쿠후가 앞장서는 무역이니 당연히 바쿠후의 이익이 최우선적으로 보장되어야 했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사무역을 금지하고 모든 무역은 바쿠후의 허가를 받도록 하면 된다. 마침 명의 감합 무역이 본받을 만한 모범이 되었다. 에도 바쿠후는 바쿠후의 면허장을 받은 선박에게만 해외 무역을 ..
바쿠후를 보완한 바쿠한② 집권 후 수십 년쯤 지난 17세기 중반에 이르자 에도 바쿠후의 직할 영지에서 생산되는 쌀 생산량은 전국 총 생산량의 4분의 1에 달했다. 거느린 직속 병력만도 무려 8만 명에 달했다. 이제 에도 바쿠후는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명실상부한 일본의 최고 권력체가 되었으며, 도쿠가와 가문에 세습되는 쇼군은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하지만 정치와 행정은 중앙집권이 가능해도 국방은 그렇지 않다. 한반도의 1.5배가 넘는, 결코 작지 않은 일본의 영토를 수비하는 일이 중앙의 지시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게다가 사소한 일들까지 일일이 중앙이 간섭하기도 어렵다. 중국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정치에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유지했으면서도 드넓은 중국 대륙을 수비하기 위해 군사..
바쿠후를 보완한 바쿠한 오랜 전란의 시대를 거치며 최후의 승자에 오른 데다 강적인 오사카의 히데요리마저 물리친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 바쿠후는 선배 바쿠후 가문인 가마쿠라나 무로마치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무엇보다 전란의 시대 동안 자연스럽게 전국이 통일되었다는 게 가장 큰 차이였다. 예전의 바쿠후들은 무사 계급의 우두머리라는 점에서는 전국적인 세력이었지만, 정치ㆍ행정의 측면에서는 교토에서 간토에 이르는 도카이 일대의 패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에도 바쿠후는 무사들만이 아니라 전국 다이묘들을 지배함으로써 군사적인 측면은 물론 경제적인 측면까지 장악했다. 또한 예전 바쿠후들이 전제 권력을 행사하는 데 늘 걸림돌이 되었던 교토의 천황과 전통적인 귀족 세력은 에도 시대에 이르러 이름과 상징적 지위만 남았을 뿐..
마지막 내전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와 미쓰나리의 싸움이었으나 그와 동시에 오사카와 에도의 싸움이기도 했다. 여기서 에도 측이 승리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일본의 수도는 도쿄가 아니라 오사카가 되었을 것이다. 승자가 이에야스였기 때문에, 천황이 있는 교토에서 오사카보다 훨씬 더 먼 쇼군의 텃밭이 일본 전체의 중심이 되었다. 센고쿠 시대 이래 한동안 맥이 끊겼던 쇼군이 부활했으니 바쿠후도 부활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일본 역사에서 마지막 바쿠후가 될 이에야스의 에도 바쿠후다. 바쿠후가 부활했다는 것은 이제야 비로소 하극상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음을 뜻한다(하극상은 바쿠후 권력을 부인하면서 시작된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바쿠후의 지휘자인 쇼군 직도 세습되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쇼군에 오른..
2. 작은 천하와 작은 제국 최후의 승자가 된 2인자 죽는 순간까지 히데요시가 가장 걱정한 것은 여섯 살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秀賴, 1593~1615)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신뢰하던 5대로(五大老)에게 아들을 부탁한다는 특별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그 자신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아들과 손자를 팽개치고 권력을 잡은 터에 그 유언이 충실히 지켜지기를 바랐다면 지나친 욕심이다. 5대로 중에는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Tokugawa Ieyasu)가 포함되어 있었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를 섬기면서 무려 40년 동안이나 2인자의 역할을 고수한 이에야스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히데요시가 살아 있을 때도 그는 사실상 동국(東國, 교토 동부에서 에도까지)의 지배자로 군림했으며, 히데요시에게서..
대외로 연장된 하극상④ 정작으로 놀란 것은 히데요시다. 1596년 명의 사신이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한다는 칙서를 전하자 그는 격노했다. 사실 자신의 요구도 터무니없었지만 그 요구와 전혀 무관한 칙서를 보내는 건 또 뭔가? 모욕을 느낀 그는 다시 전쟁을 결심한다. 명은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려 했지만 그게 오히려 전쟁을 불렀다. 이듬해 1월 히데요시는 재차 원정군을 보냈다. 명의 일개 무관에 불과한 심유경의 어처구니없는 농간 때문에 조선은 정유재란(丁酉再亂)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정유재란은 임진왜란과 달리 처음부터 히데요시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우선 일본군의 사기가 전만 못했고, 개전 초부터 명의 지원군이 출동했다. 또 1차전에서 무력하기만 했던 조선의 관군도 전열을 가다듬고 적극 대..
대외로 연장된 하극상③ 애초에 히데요시의 전략은 일이 아주 잘 풀리면 중국 정복, 덜 풀리면 조선 정복, 안 풀리면 강화를 체결하고 대외 무역을 재개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손쉽게 한성을 점령한 것에 고무된 그는 중국만이 아니라 멀리 인도까지 정복하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이후에 전개된 전황으로는 셋째 단계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의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일본과 명은 지금의 창원 부근에 협상 테이블을 마련했다. 그런데 히데요시가 강화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을 보면 도무지 강화하자는 의도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첫째, 명의 황녀를 일본의 천황비로 달라. 둘째, 감합 무역을 허용하라. 셋째,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에 할양하라. 넷째, 조선 왕족 12명을 인질로 달라. 당시에도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대외로 연장된 하극상② 1592년 4월 13일 새벽, 일본은 16만 명의 대군으로 조선 침략을 개시했다. 최종 목표는 중국이니까 조선 정벌은 일본에 있어 예선전에 해당한다. 초기 전황은 실제로 예선전이나 다름없었다. 개전 초기 일본군은 승승장구하면서 부산에 상륙한 지 한 달이 채 못 되어 한성을 점령했다. 믿었던 신립이 충주 탄금대에서 무너졌다는 소식이 도성에 전해진 4월 29일에 조선 국왕 선조는 수도와 백성을 버리고 야반도주해버렸다. ▲ 야반도주하는 선조의 모습이다.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한 장면. 전쟁이 이대로 진행되어 마무리되었더라면 일본은 실제 역사보다 300여 년 앞당겨 한반도를 접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국운은 아직 다하지 않았다. 육지에서 연전연승하던 일본군은 바다..
대외로 연장된 하극상 히데요시의 통일로 일본은 사상 처음으로 강력한 중앙집권 제국이 되었다. 일찍이 고대의 율령 국가도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국가라기보다는 권력 구조에 불과할뿐더러 일본 전역을 지배한 것도 아니었다. 초기 바쿠후 정권 역시 그 점에서 마찬가지다. 따라서 히데요시의 일본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중앙집권 제국이라고 할 수 있다【정치 체제를 중심으로 볼 때 동서양의 역사는 대체로 다음 단계들을 거친다. ① 도시국가(그리스의 폴리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 일본의 야마토 정권), ② 고대적 전제 국가(유럽의 로마 제국, 중국의 고대 제국들, 일본의 고대 천황제, ③ 중세적 봉건제 국가(유럽의 중세, 일본의 귀족 지배 체제, 중국의 한 당 제국 시대에 발..
하극상의 절정②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태도다. 20년 동안 노부나가를 보좌하면서 빛나는 전공을 세운 이에야스는 사실 어느 면으로 보나 히데요시에게 꿀릴 게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그는 1584년 히데요시와 벌인 전투에서 형세를 유리하게 이끌고서도 갑자기 강화를 맺었다. 그에게는 천하를 경략하겠다는 웅대한 꿈이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는 아직 자신이 그럴 만한 세력을 지니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이후 히데요시의 휘하에 들어가 히데요시가 전국 통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후방에서 지원했다. 나중에 그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천하의 새 주인으로 떠올라 ‘영원한 2인자’의 이미지를 불식하게 되지만 아직은 속에 품은 칼날을 아무에게도 내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의 하극..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1. 내전을 국제전으로 하극상의 절정 100년에 걸친 센고쿠 시대를 끝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장수로서의 용맹과 정치 지도자로서의 지략이 두루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 자신이 센고쿠 시대를 특징지은 하극상의 제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1582년에 노부나가는 출병을 앞두고 교토의 혼노사(本能寺)에 머물다가 예기치 않게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 1528~1582)의 배신으로 반란군에 포위된 상황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당시 그가 혼노사에 간 이유는 모리(毛利) 가문을 공격하던 부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노부나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모리 측에게 그 사실을 숨긴 채 즉각 강화를 ..
인도에서 종교란 종교적 자유가 완전히 허용된 사회에서는 오히려 종교를 편협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특정한 신을 모시거나, 특정한 내세관을 가지거나, 특정한 종교적 규율에 따르는 것, 요컨대 ‘신앙’을 종교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종교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이 첨단의 시대에 아직도 종교를 가지고 싸우느냐고 혀를 찬다. 종교를 첨단과 대비시킬 만큼 낡아빠진 것으로 보는 견해다. 하지만 종교가 단순한 신앙이라기보다 생활 방식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도 많다. 수천 년에 달하는 역사를 통해 그 점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나라가 바로 인도다. 고대에 인도는 아소카와 카니슈카 등 불교를 기반으로 통치한 군주들이 많았고, 중세에는 외래 종교인 이슬람교의 지배를 받았으며, 영국의 식민지..
독립과 동시에 분열로③ 갈라설 명분만 노리고 있던 이슬람 측에 구실을 준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다시 영국은 인도의 협조가 필요해졌다. 그런데 지난번에 골치 아픈 일을 겪은 탓인지 이번에는 협조를 요청하기는커녕 아예 처음부터 인도를 연합국 측으로 등록시키고 인도의 이름으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약속 위반을 괘씸하게 여긴 인도인들은 격분했다. 국민회의는 즉각 협조를 거부하고 모든 각료가 사퇴해버렸다. 그런데 이 정치 공백이 엉뚱하게도 이슬람 연맹 측에 좋은 기회가 되었다. 힐라파트 운동에서 힌두 세력이 배신했다면 이번에는 이슬람 세력이 배신할 차례다. 이슬람 연맹의 지도자인 진나(Mohammed Ali Jinnah, 1876~1948)는 재빨리 파키스탄이라..
독립과 동시에 분열로② 때마침 국제사회에서는 윌슨(Woodrwo Wilson, 1856~1924)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약소민족의 자결권 보장이라는 구호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를 비롯한 당시 지도자들은 영국의 약속을 믿고 130만 명의 용병을 유럽, 아프리카, 서아시아 등에 자원군으로 보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17년 인도 장관 몬터규(Edwin Samuel Montagu, 1879~1924)의 성명이 발표되었을 때 인도인들은 이제야 진정한 자치가 실현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 인도인들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종전 직후인 1919년에 공포된 인도통치법에는 도저히 자치라고 부를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영국은 납..
독립과 동시에 분열로 애초부터 인도인들의 반영 감정을 적당히 얼버무리기 위해 실시된 유화책은 오래가지 못했다. 1880년대 영국에서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 (1809~1898)의 자유당 정부가 집권하면서 정점에 달한 유화책은 그 이후부터 본격적인 반동으로 돌아섰다. 급기야 영국은 인도의 영토마저 손을 대기 시작했다. 1903년 영국은 행정을 개선하다는 명목으로 벵골을 동과 서의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서벵골은 캘커타가 중심이고, 동벵골은 아삼 지방, 그러니까 지금의 방글라데시가 중심이었다. 인종도 벵골인으로 같고 언어도 벵골어로 같은 데다 특별한 지리적 경계선마저도 없는 지역을 왜 굳이 둘로 나누었을까? 서벵골은 힌두교권이었고 동벵골은 이슬람교권이었다는 점을 알면 영국의 진..
2. 간디와 인도 독립 민족의식에 눈뜨다 근대화에는 빛과 그늘이 있다. 식민지만이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영국의 산업혁명은 영국을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로 끌어올린 동시에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아동 노동으로 악명을 날리게 했다. 주체적 근대화를 이룬 서구세계에서도 그럴진대 식민지적 근대화 과정을 거친 인도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근대적인 지세 제도가 들어서면서 인도의 전통적 관계는 뿌리째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토지 소유자가 자기 재산에 해당하는 만큼의 세금을 낸다는 원칙은 영국에서 보면 지극히 간단하다. 그러나 근대적인 토지 소유 관계에 익숙하지 못한 전통의 지주들은 당혹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무엇보다 사유지에 대한 관념이 미약하다. 그냥 ‘이 언덕에서부터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