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06/07 (59)
건빵이랑 놀자
사람 잡는 은납제④ 앞에서 보았듯이, 이갑제(里甲制)의 주요한 취지는 향촌 사회의 질서를 이용해 조세 징수와 요역 부담을 제대로 처리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마을에 균등하게 조세와 요역을 부담시킨 데서 생겨난다. 같은 110호의 마을이라 해도 마을마다 경제 사정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이 점이 무시된 것이다(세금의 용도를 사회적인 측면이 아니라 지배층을 유지하는 것으로 여기는 동양식 왕조의 한계다). 조세까지는 그런대로 견딘다 해도 요역은 큰 문제였다. 그렇잖아도 농민들의 부담이 큰 데다 향사(鄕士)라고 불리는 관료나 생원 등 마을의 지식인층은 요역이 면제되었고, 유력 지주들도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요역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생긴 요역의 공백은 일반 농민들이 메워야 했다..
사람 잡는 은납제③ 절대 권력의 시대에 정부의 방침은 전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정부의 명이 떨어지자 모든 백성은 세금을 내기 위해 은을 구해야만 했다. 상업이 발달한 도시에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일반 농민들에게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예전에는 수확한 곡식을 그냥 조세(‘租稅’라는 한자어에 곡식을 뜻하는 ‘禾’자가 들어 있는 것은 현물을 세금으로 냈던 흔적이다)로 납부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곡식을 팔아 은을 구입해서 내야하니 결과적으로는 세금이 더 무거워진 셈이 되었다(일찍이 당의 양세법으로 현물 납부를 금납제로 바꾸었을 때도 농민들은 똑같은 피해를 겪었는데, 수백 년이 지났어도 화폐경제가 실현되지 않은 것이다). 농민들은 은을 구입하기 위해 쌀이나 보리 같은 일반 작물만이 아..
사람 잡는 은납제② 경제성장이 지속되면 그에 따라 경제구조도 변해야 한다. 몸은 커졌는데 작은 옷을 그대로 입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가뜩이나 정치 불안에 시달리던 정부는 민간에서부터 급성장하는 경제를 감당하지 못했다. 산업과 상업이 발달하면 화폐를 더 많이 사용할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당시 정부가 발행하는 화폐로는 주화인 대명통보(大明通寶)와 지폐인 대명보초(大明寶鈔)가 있었다. 그런데 정부는 은을 아끼려는 얄팍한 생각에서 주화보다 지폐의 사용을 적극 권장했고, 민간에서 널리 쓰이던 은의 유통을 법으로 금지했다. 경제 규모의 성장으로 화폐 사용량이 급증하자 정부에서는 지폐만 마구 찍어댔으니 이게 온전할 리 없다. 지폐 가치는 급락을 거듭하다 나중에는 종잇조각과 다를 바 없어졌다...
사람 잡는 은납제 역대 한족 왕조들이 그렇듯이, 명 제국도 전성기는 짧았고 퇴조기는 길었다. 294년의 사직 중 처음 100년도 채 못 되는 시점에서부터 벌써 정치가 부패하기 시작했다【중국 역대 통일 왕조들의 평균 수명은 300년이 채 못 되는데, 세계사적으로 보면 결코 짧지 않다. 그러나 한반도에 들어선 역대 왕조들의 평균 수명은 무려 600년이 넘는다. 중국에 비해 한반도 왕조들이 정치를 잘했기 때문일까? 물론 아니다. 우선 한반도는 중국만큼 넓지 않기 때문에 중앙 정부의 통제가 지방에까지 쉽게 전해졌다. 또 한반도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외교와 군사 측면에서 중국의 지휘를 받았다. 중국 역대 왕조들은 한반도의 군대 징발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반도의 국제 관계도 거의 중국이 관장하는 식이었다. 왕..
환관의 전성시대③ 건국 초기 건강했던 시절이 지나고 명대 중기에 이르러 어리고 무능한 황제들이 출현하자 그러한 환관 정치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명 제국은 역대 어느 왕조보다도 환관들이 날뛰던 시대였다. 명 중대에 환관들은 숫자만 해도 무려 10만 명에 달했다. 왕진, 유근(劉瑾), 위충현(魏忠賢) 등 역대 ‘환관 스타들’의 상당수가 명대의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명은 그렇게 많은 환관도 부족해 조선에까지 환관을 보내라고 명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환관을 많이 쓰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무리한 요구였다. 처음에는 상국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조선에서도 이내 보낼 환관이 부족해졌다. 더구나 중국에 갔던 환관들이 방문이라도 할 때면 세도를 부리는 통에 각종 폐단이 많아졌..
환관의 전성시대② 영락제 자신이야 절대군주였고 당시 환관은 충심으로 그를 받들었으니 무슨 염려가 있을까? 그러나 그는 태조처럼 앞날을 내다보는 눈이 없었다. 영락제 이후 환관을 중용하는 악습은 아예 황실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1435년 일곱 살의 어린 황제 영종(英宗, 1427~1464)이 즉위하자 즉각 문제가 터져 나왔다. 태자 시절부터 영종의 시중을 들던 환관 왕진(王振)은 황제를 대신해 권력을 장악하고 태조가 세운 환관을 경계하라는 철패(鐵牌)마저 부수어 버렸다. 한동안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기고만장하게 앞으로만 내달리던 그는 1449년에 마침내 전복 사고를 일으키고 만다. 북방의 오이라트가 다시 흥기하자 왕진은 무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제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정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
환관의 전성시대 영락제는 대외적으로 한 무제와 당 태종에 맞먹는 탁월한 군주였으나, 대내적으로는 장차 제국의 운명을 위태롭게 할 씨앗을 뿌려 놓았다. 그것은 곧 환관이었다. 역대 한족 왕조들은 사대부 국가인 송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환관의 발호로 인해 정치 불안과 부패가 빚어졌다. 이 점을 일찌감치 간파한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환관의 정치 개입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 환관에게는 문자조차 습득시키지 말라는 유시를 남기고 이 내용을 적은 철패(鐵牌)까지 세웠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환관 문제에서도 어긋났다. 영락제는 조카의 권력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환관의 협조를 받은 일이 있었던 탓에 환관에 대한 경계심이 없고 오히려 그들을 깊이 신뢰했다. 권력의 정통성이 결여되었다는 불안도 작용했을 것이다. 정당한 권..
영락제의 세계화③ 1405년에 시작된 정화의 원정은 이후 1433년까지 일곱 차례나 진행되었다. 주로 가까운 남중국해 일대를 순회했으나 때로는 멀리 인도양과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까지 가기도 했다. 1차 원정대는 62척의 큰 배와 2만 8700명의 병사들, 의사, 통역관, 목수, 사무원까지 거느렸으니 규모로만 보아도 얼마나 엄청난 계획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원정이 장기적으로 지속되었더라면 유럽보다 조금 앞서 중국의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지리상의 발견’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정화의 원정에는 큰 한계가 있었다. 유럽의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국책으로 장려되기는 했지만 주로 민간 상인들이 일선에서 뛰었고 무역 활동이라는 경제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반면 중국의 남해 ..
영락제의 세계화② 영락제가 즉위하자마자 맨 먼저 한 일은 수도를 난징에서 북쪽 연경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 목적은 몽골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는 것도 있었으나 여기에는 자신의 세력 근거지를 전국의 중심으로 만들려는 뜻도 있었다. 1420년 궁성(지금의 쯔진청紫禁城)이 완성되자 영락제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베이징(北京)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전 수도인 금릉(金陵)은 난징(南京)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편의상 베이징과 난징이라는 이름을 계속 써왔지만 실은 영락제가 처음으로 만든 이름들이다.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집권한 영락제는 대외 정책에서도 태조와 어긋났다. 적극적인 북방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일찍이 송 태조 조광윤은 전대(당말오대)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북방을 포기하면..
영락제의 세계화 걸출한 군주인 명 태조는 자신의 사후에 대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원래 나라를 처음 세운 건국자가 죽으면 후계를 둘러싸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는 법이다【우리의 조선조 역사에서는 이를 ‘왕자의 난’이라 부르지만 이런 종류의 사태는 거의 모든 나라의 개국 초기 역사에서 볼 수 있다. 고려의 건국자 왕건이 죽고 나서는 그의 배다른 아들들이 각자 자기 어머니의 외척 세력을 등에 업고 정권 다툼을 벌였으며, 조선의 이성계는 살아 있는 동안에 정권 다툼의 와중에 한 아들(이방원)이 두 아들(방석과 방번)과 개국공신(정도전)을 죽이는 비극을 목격했다. 중국 역사도 마찬가지다. 진시황(秦始皇)이 죽자 승상이 태자를 죽이고 자신이 지지하는 황자를 즉위하게 했는가 하면, 한 고조 유방(劉邦)이 죽었을 때..
황제가 된 거지③ 군사 제도 역시 독창적이면서도 과감하게 개혁되었다. 당의 부병제(府兵制)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역대 통일 왕조들은 초기에는 예외 없이 징병제, 즉 의무병제를 시행했다(오늘날과 같은 한시적인 의무병제의 개념이 아니라 평생 의무병, 즉 병농일치제도다). 그러나 이는 일반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게다가 병역 대신 병역에 상당하는 조세를 납부하는 제도가 일반화된 탓에 의무병제를 일관되게 유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초기의 ‘신성한 병역 의무’라는 정신은 사라지고 모병제, 즉 직업군인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렇게 갈 거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그렇게 하자. 명 태조는 순수 징병제를 포기하고 징병제와 모병제를 절충한 군사 제도를 ..
황제가 된 거지② 국호를 명이라고 정한 데는 평민 출신의 무명소졸이 세운 제국이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진우량이나 장사성만 해도 각각 중국의 옛 역사에 등장하는 한(漢)과 오(吳)의 후예라고 자칭했지만, 주원장(朱元璋)은 굳이 전통의 왕조를 계승할 필요가 없었다. 명 제국은 남쪽에서 흥기했다는 점에서도 여느 왕조와는 달랐다. 역대 중국의 통일 왕조들은 대부분 중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남쪽으로 확장하는 게 기본 공식이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강남에서 출발해 중원을 정복했다는 점에서 그 반대다(난징을 수도로 한 통일 왕조도 명이 유일하다), 그 이유는 주원장 자신도 원래 강남의 안후이 출신인 데다 당시 중원은 아직 몽골의 손아귀에 있었으므로 강남을 근거지로 삼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 이민족 지배를..
2. 전통과 결별한 한족 왕조 황제가 된 거지 몽골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한족의 품에 돌려준 주원장(朱元璋)은 1368년 새 제국의 국호를 명(明)으로 정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백련교(白蓮敎)의 한 갈래인 명교(明敎)의 우두머리인 탓에 국호를 명이라고 정했다지만, ‘밝다’는 뜻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명 제국을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역대 어느 왕조의 건국자보다도 희한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일찍이 수, 당, 송 제국을 세운 양견(楊堅), 이연(李淵), 조광윤(趙匡胤)은 모두 중원 북방의 유력한 무장 출신이었으며, 더 이전의 진시황(秦始皇)은 전국시대 제후라는 당당한 신분이었다. 실력이든 가문이든 배경이든 이들은 제각기 내세울 만한 요소가 있었다. 한 고조 유방(劉邦)도 이들에 비해서는 한참..
깨어나라, 한인들아! 대규모 정복 활동을 전개할 때 드넓은 전선을 하나의 일사불란한 지휘로 감독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몽골은 칭기즈 칸 때부터 전선에 파견된 군 지휘관들의 독자적인 작전권을 인정했다. 이 지휘관들은 언제 어느 방면으로 진격하라는 등의 기본 전략은 중앙의 지시를 받았으나 전투 지역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작전을 수립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방식은 몽골군 특유의 기동력을 더욱 활성화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이 아니면 효율성이 떨어졌다. 정복 전쟁이 끝나고 안정적인 정치와 행정이 필요할 때는 오히려 제국의 통합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칭기즈 칸이 죽은 뒤 원 제국이 몰락할 때까지 내내 이어진 치열한 권력 다툼과 분열은 바로 그 점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동서 문화의 교류② 이런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몽골이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동서 교류를 폭발적으로 증진시켰다. 우선 교류의 장애물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무역로 주변에 터를 잡은 작은 왕국들이 무역을 방해하거나 독점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제는 이 지역이 모두 단일한 정치 질서에 편입되었으므로 그런 문제가 없어진 것이다【유럽 역사가들은 몽골이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이룩하면서 국제적 정치 질서의 안정을 가져온 13~14세기를 ‘타타르의 평화(Pax Tatarica)’라고 부른다. 고대 로마가 지중해를 통일하면서 구가한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염두에 두고 만든 용어다. 그런데 몽골을 타타르라고 부른 것은 좀 문제다. 타타르는 오히려 몽골족을 통일한 칭기즈 칸이..
동서 문화의 교류 세조의 한화(漢化) 정책은 35년의 긴 재위 기간 동안 꾸준히 실천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중국식을 모방하는 데 그쳤을 뿐 그다지 독창적인 요소는 없었다. 겉으로만 보면 중국식 관료제를 충실히 따랐지만 핵심 부서의 최고책임자는 몽골인 또는 친몽골적 한인만 중용했기 때문에 내실 있는 관료제가 되지는 못했다. 1315년에 부활된 과거제(科擧制)도 합리적으로 운영된 게 아니라 철저한 신분 차별을 바탕으로 했다. 이를테면 문제 출제도 몽골인과 색목인에게 유리했을 뿐 아니라 한인들은 과거에 합격한다 해도 승진할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더욱이 민족마다 별도로 합격 정원제를 두었으니 요즘으로 말하면 심각한 ‘인종차별’이었다. 그러나 경제정책에서는 종전의 모든 한족 제국을 뛰어넘는 수준과 독창..
중국식으로 살자② 그러나 쿠빌라이의 즉위는 툴루이 가문의 재집권이었으므로 당연히 오고타이 가문의 반발을 샀다. 제국은 정상에 오른 순간부터 내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언뜻 보면 제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분쟁인 듯하지만, 실상 여기에는 몽골 제국의 성격과 향후 노선을 둘러싼 대립이 숨어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중국에 영지를 소유했고 주변에 중국의 유학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쿠빌라이는 유목 사회와 농경 사회가 융합된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 반면 오고타이 세력은 유목 사회를 중심으로 몽골의 전통 지배 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쿠빌라이가 즉위했다는 것은 제국이 장차 어떤 노선을 취할지를 예 고하고 있었다. 과연 그는 즉위한 즉시 자신의 구상을 실천으로 옮겼다. 우선 국호를 중국식 원(元..
중국식으로 살자 1211년 금을 공략하면서 시작된 몽골의 정복은 몽케 칸에게서 끝났다. 서유럽 입성을 눈앞에 두고 바투의 원정군이 유럽 전선에서 철수한 게 마지막이다. 몽케 칸은 왜 정복을 계속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남송 때문이었다. 주변의 모든 나라가 몽골군의 말발굽에 짓밟힐 때도 남송은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몽골은 서쪽으로만 진군했을 뿐 100여 년 전부터 금에 눌리면서도 강남에 버티고 있는 남송의 숨을 끊지는 않았다. 언제든지 손만 대면 집어삼킬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정복을 늦추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몽케 칸에 이르러 몽골의 대외 정책은 크게 바뀐다. 몽골 제국이 분열되어 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 그리고 바투의 킵차크 칸국이 사실상 독립했다. 이런 마당에 몽케 칸..
몽골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③ 한편 헝가리로 진입한 남쪽의 몽골군도 헝가리의 반격을 무찌르고 수도 부다페스트를 폐허로 만들었다. 폴란드와 헝가리의 함락으로 동유럽이 몽골의 손에 들어가자 이제 서유럽마저도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운명이 되었다. 더욱이 당시 유럽 세계는 십자군의 실패로 로마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어 분열 상태에 있는 데다 몽골의 진격을 막아내기란 불가능했다. 몽골군은 서유럽까지 정복할 계획이었는데, 만약 계획대로 실행되었다면 이후 세계사는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오늘날 우리가 서유럽의 아름다운 성이나 문화재를 구경하기는 어려웠을 게다. 몽골군은 곳곳에서 닥치는 대로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으니까【고려를 정복할 때 몽골군은 신라시대에 건립된 고찰인 황룡사와 동양 최대의 목탑인 황룡사탑을 ..
몽골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② 금을 정복한 것으로 몽골의 정복 활동은 끝났어야 한다. 중앙아시아의 무역로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과거에 몽골족을 억압한 여진족을 무너뜨렸으니 더 이상 군대를 앞세울 일은 없었다. 그러나 몽골 제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앞에서 본 것처럼 칭기즈 칸은 개인적인 집착이나 욕심 때문에 영토를 늘린 게 아니라 동서 무역을 독점하려는 경제적인 이유로 정복 사업을 벌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의문이 생겼다. 중앙아시아를 손에 넣고 보니 서역보다 더 서쪽의 세계가 궁금해진 것이다. 서쪽에는 어떤 세계가 있기에 오래전부터 서역과 활발하게 교역했던 걸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중앙아시아까지였던 정복의 목표는 더 서쪽으로 연장되었다. 1235년 오고타이는 새 수도 카라코..
몽골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불세출의 정복 군주 칭기즈 칸이 죽었으니 정복 사업은 끝난 걸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사실 그는 역사적 명성에서만 아버지에게 뒤질 뿐 실상은 아버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정복 군주였다. 보통 칭기즈 칸을 대칸이라고 부르지만 그 이름의 뜻이 ‘위대한 칸’이었을 뿐이고, 칭기즈 칸 본인도 대칸이라는 직위를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고타이는 스스로 대칸이라고 자처했으니 그의 야심을 짐작할 수 있다. 과연 오고타이는 즉위하자마자 쿠릴타이를 열어 칭기즈 칸의 정신을 이어받아 제국을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무시무시한 정복자가 죽었다는 소식에 혹시나 하던 주변 국가들, 특히 금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러나 눈을 ..
불세출의 정복 군주② 사실 칭기즈 칸은 원래부터 서역, 즉 중앙아시아에 관심이 컸다. 금을 공격한 것은 몽골족의 숙원을 이루는 동시에 후방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을 뿐, 정작으로 그의 관심은 당시 중국에 미지의 세계인 서역과 교역하려는 데 있었다【한족의 역대 중화 제국들은 한 무제가 비단길을 개척한 이후 대외적인 관심이 오히려 점점 더 퇴보했다. 한 → 당 → 송으로 갈수록 안방 제국으로 전락해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그에 비해 북방의 강성한 유목민족들은 고대부터 서역과 교역했고 중화적 관점에서 벗어나 있었다. 중화 제국들이 안으로 수그러들수록 그들은 바깥으로 향했다. 그 정점이 몽골 제국이다. 몽골은 갑자기 정복 국가로 등장했다기보다는 오랜 북방 민족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보아야..
불세출의 정복 군주 12세기 후반까지 몽골은 금의 지배 아래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의 힘이 약해지면서 몽골 초원에도 통일의 바람이 불었다. 통일의 중심은 일찍이 부족들 간의 다툼에서 아버지를 잃은 테무진이라는 청년이었다. 테무진은 먼저 자신의 부족인 보르지기드족을 통합한 뒤 케레이트족의 왕칸, 같은 부족의 자무카와 동맹을 맺고 주변 부족들을 하나하나 복속시켰다. 예상보다 빠르게 테무진이 세력을 키운 데 놀란 왕칸과 자무카가 등을 돌리자 그들도 통일의 적이 되었다. 결국 케레이트족을 정복하고 마지막 남은 서쪽의 나이만을 복속시키는 것으로 몽골 초원의 주인은 정해졌다. 1206년 테무진은 쿠릴타이(몽골족의 부족 연맹 회의)에서 몽골 제국의 대칸(황제)으로 추대되었는데, 그가 바로 칭기즈 ..
슈퍼스타의 등장② 동유럽에 자리 잡은 흉노(훈족)는 5세기 중반 ‘신의 재앙’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아틸라(Attila)의 지휘 아래 유럽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다. 당시 로마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과 반달족 등 이미 적잖은 유목민족들의 침탈을 받은 일이 있었지만 동방에서 온 흉노는 전혀 다른 막강한 상대였다. 흉노의 최대 무기는 말과 었다. “그들은 말 등에서 밥을 먹고 밤에는 말의 목덜미에 엎드려 잠을 잤다.” 이런 로마 장군의 말처럼 흉노는 말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또한 짐승의 뿔과 나무를 덧대어 만든 흉노의 활은 길이가 짧으면서도 힘이 좋았다. 이 말과 활의 무기는 훗날 몽골에까지 이어지는 전통이 된다. 흉노 이후 북방 민족들은 5호16국 시대와 남북조시대에는 번갈아 중원을 지배하며 중국..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1. 역사상 가장 강했던 제국 슈퍼스타의 등장 한족의 송 제국을 강남으로 밀어내고 화북을 지배한 거란의 요나 여진의 금은 예전과 같은 유목 국가가 아니었다. 예전의 북방 민족들은 힘이 강성해지면 중국을 침략하고 약탈하는 데 그쳤지만, 요와 금은 아예 중원에 들어앉아 중국 대륙을 공동 명의로 하자고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흔히 이전의 유목 국가들을 침투 왕조라고 부르고, 요나라 이후의 유목 국가들을 정복 왕조라고 부른다【정복 왕조라는 용어는 20세기의 경제학자인 카를 비트포겔(Karl August Wittfogel)이 10세기 이후 크게 달라진 유목 국가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만든 용어다. 사실 이 용어는 문제가 있다. 중국의 한족 국가들을 기준으로 중국 역사를 볼..
3부 섞임 몽골 제국 시절부터 중국은 일찌감치 세계화의 길로 나선다. 그러나 낡은 제국 체제는 발전에 내내 걸림돌이 되었고, 결국 중국은 밀려오는 서양 세력 앞에 비참하게 몰락한다. 통일보다 분열이 자연스러웠던 인도는 영국의 손에 의해 통일을 이루면서 식민지 시대를 맞는다. 일본의 대외 진출은 곧 침략 전쟁이었다. 한반도를 놓고 중국과 경쟁하던 일본은 마침내 꿈을 이루지만 군국주의의 덫에 걸려든다. 인용목차한국사 / 서양사
떠오르는 별, 노부나가 하극상의 시대가 한동안 지속되면서 점차 실력의 우열이 드러났다. 처음에는 저마다 대권 후보로 나서겠다고 외쳤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이 어지러이 벌어졌다. 그 결과 남은 후보들은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라는 한 가지 용어로 통일되었다. 센고쿠 다이묘들은 누구나 대권을 꿈꾸었으나 이들 간에도 점차 떠오르는 별이 생겨났다. 가장 빛나는 별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였다. 노부나가는 능력도 출중했으나 인재를 보는 안목도 뛰어났다. 그는 고향인 오와리(尾張, 지금의 나고야 동쪽)에서 일어나 인근 미카와(三河)의 다이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를 휘하에 끌어들였다. 그 덕분에 불과 스물여덟 살인 1560년에 도카이(東海) 최고의 다..
하극상의 시대② 이렇게 사회 전반적으로 동요가 심해지자. 마침내 바쿠후 권력 상층부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무사 권력답게 대응책은 역시 싸움이었다. 남북조시대 이래 50여 년간 소규모의 반란 외에는 비교적 평화와 안정을 누린 바쿠후는 1467년에 둘로 편을 갈라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쇼군 직의 계승을 둘러싸고 당시 바쿠후의 세력 가문인 호소카와(細川)와 야마나(山名)가 맞붙은 것이다. 이것을 오닌(應仁)의 난이라고 부르는데, 단순한 권력투쟁에서 비롯되었지만 때가 때인 만큼 삽시간에 일파만파로 번졌다. 전국 각지의 슈고 다이묘들이 복잡하게 연루되면서 이 사태는 무려 11년간이나 질질 끌었다. 결국 나중에는 싸움에 참가하는 무사들이 없어 흐지부지되었으나, 이 와중에 그나마 꺼져가는 불씨..
하극상의 시대 바쿠후의 권력이 안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전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책봉으로 확보된 외부의 권위도 무사 정권 특유의 불안정성을 말끔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전통의 적인 세력 가문들의 도전은 그럭저럭 물리칠 수 있었으나, 그 대신 지역 사회에서 성장한 슈고들이 바쿠후의 권력을 위협할 만큼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무로마치 바쿠후는 권력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슈고들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슈고를 휘하에 복속시키면 유사시에 군사를 모으기도 쉬울뿐더러, 대개의 반란을 슈고가 일으키므로 위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의미도 있었다. 따라서 바쿠후는 슈고들을 배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슈고들은 전통의 장원 영주들을 잠식하면서 대영주로 성장했다. 슈고 출신이 다이묘가 되었기에 ..
그래도 답은 바쿠후③ 이 시대에 생겨난 일본의 전통적인 문화로 다도(茶道)가 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무사들을 중심으로 불교의 선종이 크게 유행했다. 명상을 중시하는 선종에서는 아무래도 졸음이 가장 큰 적이었다. 그래서 졸음을 쫓는 수단으로 차를 마시는 것이 널리 퍼졌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이것이 발달해 다도가 되었다. 다도는 원래 차를 재배하는 농민들이 차 품평회를 하던 ‘차 모임’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그 행위 자체를 즐기게 되면서 나름의 예법이 발달했다. ▲ 차를 마시는 무사의 모습 무로마치 시대에는 집 안에 다실을 갖추고 다도를 행했는데, 특히 쇼군들이 다도를 즐겨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림처럼 무사들은 조용한 다실에서 차를 마시며 세상의 번뇌를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다도보다 ..
그래도 답은 바쿠후② 그러나 풍운아 고다이고는 아직 날개를 완전히 접지 않았다. 그해 12월 그는 교토를 탈출해 남쪽의 요시노에 터를 잡고 측근들을 모아 새 조정을 구성했다. 이로써 일본의 조정은 다카우지가 옹립한 고묘(光明, 1322~1380) 천황과 고다이고 천황의 두 개로 나뉘었다. 이때부터 바쿠후가 지원하는 북조와 아시카가를 반대하는 일부 가문들이 뭉친 남조가 서로 대립하게 되는데, 이를 남북조시대라고 부른다【남북조시대는 중국과 한반도, 일본 등 동양 3국의 역사에 모두 등장한다. 중국의 남북조시대는 4장에서 보았듯이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약 250여 년간이다. 한반도에서는 신라의 통일 이후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 발해 왕조가 들어선 시대를 가리켜 남북국시대라고도 부른다(김부식의 『삼국사기』에..
3. 통일과 분열, 분열과 통일 그래도 답은 바쿠후 각고의 노력 끝에 권력을 잡은 고다이고 천황은 연호를 건무(建武)로 고치고 천황 정치를 부활하려 애썼다. 그러나 100여 년 전 고토바(後鳥羽)의 노력이 그랬듯이, 좋았던 옛날‘로 복귀하려는 고다이고의 꿈도 환상이었다. 우선 고다이고는 무사들의 반발을 고려해 이전의 고쿠시(國司)나 슈고(守護) 제도는 그대로 두고 그 지위에 자기 사람을 앉혔다. 다분히 절 충적인 방식이니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에게는 불만이다. 게다가 그는 바쿠후 타도에 앞장선 무사들의 논공행상에서 실패한 탓에 그들의 불만을 샀다. 나아가 천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대규모 건축 사업을 일으킨 것도 커다란 실책이었다. 고다이고의 중흥 정치는 1년도 못 되어 파탄에 이르렀다. 이런 사태의 추이..
곪아가는 바쿠후 체제② 바쿠후는 이런 사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곳곳에서 제기되는 무사 집안의 상속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권위가 실추되었고, 호조 일족의 독재가 오래 지속되면서 내분이 점차 심화되었다. 몽골을 물리치고 나서 10여 년 동안에만도 바쿠후 내에서 대규모 반란 사건이 세 차례나 잇달았다. 현실에 불만을 품은 세력은 해묵은 이념을 되살리고 상징을 중심으로 뭉치게 마련이다. 그 이념이자 상징은 바로 천황이었다. 때마침 당시의 천황인 고다이고(後醍醐, 1288~1339)는 바쿠후를 타도하겠다는 뜻을 품고 남몰래 세력을 키워오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에게는 바쿠후에 반대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문제는 수십 년 전인 1259년 고사가(後嵯峨, 1220~1271) 천황이 둘째 아들에게 제위를 물..
곪아가는 바쿠후 체제 비록 태풍의 덕이었으나, 일본 역사 전체를 통틀어 최대의 위기라 할 몽골 침략마저 물리친 바쿠후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일본 역사를 굴절시킨 것은 바깥의 적이 아니라 안에서 곪는 상처가 아니었던가? 바쿠후 체제도 안에서부터 곪아가고 있었다. 무사 계급은 전쟁을 기본 기능으로 한다. 전쟁이 없는 평화기에는 할 일도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일에 무능력할 수밖에 없다. 그전까지는 새로 생겨난 바쿠후 체제가 안정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진통과 후유증, 그리고 몽골이라는 대적의 침략 등으로 모순이 표면화되지 않았다. 역설적이지만 바쿠후 권력이 안정을 찾으면서 무사 계급 자체에 내재된 문제점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찍이 반전제가 무너지면서 탄생한 소규모 자..
시련과 극복③ 드디어 1274년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은 900척의 함선과 3만 3000명의 병력으로 원정을 출발했다(우리 역사에는 이것을 ‘여몽 연합군’이라고 부르지만 고려군은 몽골에 징발된 것이니 옳은 명칭이 아니다)【당시 몽골은 점령지의 군대를 징발해 정복 전쟁을 계속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예를 들면 1234년 금나라를 멸망시킬 때도 몽골은 남송인들을 써먹었다. 일본 침략을 준비할 때는 한술 더 떠서 고려에 병선의 제작을 맡겼는데, 이에 동원된 인부와 목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고려로서는 나라를 빼앗긴 설움에 젖기도 전에 남의 나라의 전쟁 준비에 제 나라 백성들의 피와 땀을 바친 것이니, 커다란 치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측에서 보면 고려는 몽골에 부역해 침략을 도운 용병인 셈이다. 일본 ..
시련과 극복② 이것만 해도 끔찍한 사태였으나 진짜 최악의 위기는 바깥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당대의 세계 최강 몽골 제국의 침략이다. 유사 이래 일본은 외부에서 도움은 받았어도 침략을 받은 적은 전혀 없었다(외부의 도움은커녕 무수히 외침만 겪은 우리 역사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고대에 일본에 문명의 빛을 전해준 것도 한반도의 도래인들이었고, 중국의 당 제국 시대에는 일본이 스스로 나서서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입했다. 굳이 외부와의 관계에서 입은 피해를 따진다면 7세기 중반 백제가 멸망할 무렵 함선 400척을 파견했다가 전멸당한 일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일본은 난생처음으로 외적의 침입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더구나 그 외적이란, 아시아는 물론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진출해 유럽 전역을 공포에 ..
시련과 극복 가마쿠라 바쿠후의 새 주인이 되고 나서도 호조 가문은 몇 차례 고비를 더 넘어야 했다. 호조는 가문의 이름도 ‘도쿠소(得宗)’로 바꾸고 가문의 수장을 ‘싯켄(執權)’이라고 불렀지만, 현실은 마냥 도쿠소와 싯켄으로 머물게 놔두지 않았다【도쿠소나 켄이나 말뜻으로는 권력을 장악했다는 의미다. 도쿠소는 원래 요시토키의 법명(法名)이었으나 호조 가문의 대명사가 되었고, 켄은 도쿠소의 지배자라는 직책의 명칭이었으나 호조 가문이 세습함으로써 이 가문의 우두머리를 가리키게 되었다. 쇼군은 형식상으로 여전히 바쿠후의 서열 1위였지만 바쿠후를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호조의 켄이었다】. 조큐의 난 이후 호조에 반대하는 호족 가문들이 단결해 도전해오는가 하면 심지어 쇼군이 바쿠후를 타도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자유경쟁을 통해 독점으로② 마침 고토바는 자신의 애첩이 소유한 장원에 지토를 두지 말라고 바쿠후에 부탁했다가 거절당해 체면을 구겼다. 개인적인 원한과 정치적인 원한이 쌓여 1221년 고토바는 전국의 무사들에게 호조를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모든 무사가 바쿠후 편인 것은 아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바쿠후조차 내분이 있었으니 지금이야말로 ‘좋았던 옛날’, 천황 독주 시대를 되살릴 기회다. 이게 고토바의 생각이었는데, 실은 완전한 착각이었고 과거 천황의 권위에 대한 환상이었다. 바쿠후의 내분은 무사 정권의 약화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순수한 무사 정권으로 도약하기 위한 진통일 따름이었다. 말하자면 가마쿠라 바쿠후의 탄생에 기여한 실력 가문들이 무력을 통한 ‘자유경쟁’을 벌여 승자인 호조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게 ..
자유경쟁을 통해 독점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지닌 지도자가 죽고 나면 혼란이 뒤따르는 법이다. 드라마틱한 일생을 산 초대 쇼군 요리토모가 1199년 쉰셋의 나이로 죽자 신생 바쿠후 정권은 위기를 맞았다. 바쿠후 체제의 수립에 공을 세운 지방 호족들이 점차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요리토모의 치세에 그들은 요리토모의 고케닌으로서 철저히 복종했으나 그의 아들 요리이에(賴家, 1182~1204)가 2대 쇼군이 되자 태도가 달라졌다. 특히 호조(北條) 가문의 도키마사(時政, 1138~1215)와 그의 아들 요시토키(義時, 1163~1224)는 요리토모의 미망인이자 요리이에의 어머니인 마사코(그녀는 요리토모가 사망하자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었으나 남편의 후광으로 ‘여승 쇼군’이라 불리며 여전히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를..
권좌에 오른 무사들③ 이 비정상적인 국면은 오래가지 않았다. 1185년 요리토모의 동생 요시쓰네(義經, 1159~1189)가 지휘하는 군대가 단노우라(壇の浦, 지금의 시모노세키 부근 해협)에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다이라와 최후의 해전을 벌여 마침내 적을 궤멸시켰다. 여덟 살의 어린 천황 안토쿠를 비롯해 다이라 측 황족들 대부분이 바다에 투신하는 비극으로 끝난 단노우라 해전은 일본 역사상 가장 비장한 전투로 꼽힌다. 오랜 전란이 끝났다. 후지와라 시대부터 따지면 근 한 세기에 걸친 내전이었다(물론 내전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최후의 승자, 즉 새로이 일본의 패자가 된 요리토모는 다이라 기요모리보다 훨씬 치밀하고 냉정한 데다 정치적 수완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제 두 번 다시 내전이 없도록 하겠다는 결심..
권좌에 오른 무사들② 일찍이 후지와라의 무사 집단으로 출범한 미나모토는 주군인 후지와라 가문이 몰락하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된 데다 호겐, 헤이지의 난 시절에 다이라와의 2연전을 모두 패한 이후 군소 가문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면 기회는 오게 마련이다. 헤이지의 난에서 체포되었다가 열세 살의 어린 나이 덕분에 처형을 모면하고 유배된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 1147~1199)가 수장이 되면서 미나모토 가문은 다시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게 되었다. 하지만 다이라와 더불어 양대 무가를 이루었던 미나모토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다이라와 맞붙은 싸움에서 또다시 패했다. 호겐과 헤이지까지 합치면 3연패를 당한 셈이었다. 더 이상 정면대결을 벌여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요리토모는 먼..
2. 무인들의 세상이 열리다 권좌에 오른 무사들 미나모토를 무찌르고 권력의 핵심에 오른 다이라 기요모리는 순수한 무장이었으니 정치와 행정의 경험이 있을 리 없다. 모르면 베껴라. 그는 바로 전까지의 권력 구조였던 칸 정치를 흉내 내기로 한다. 우선 천황의 외척이 되면 부족한 권력의 정통성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려면 천황부터 갈아치워야 한다. 그래서 그는 1169년에 자신의 조카, 즉 고시라카와(後白河, 1127~1192) 천황과 자기 처제의 여덟 살짜리 어린 아들을 내세워 다카쿠라(高倉, 1161~1181) 천황으로 삼고 자기 딸을 황후로 들였다【이 천황 부부는 서로 이종사촌인 셈인데, 고대에는 어느 나라 역사에서는 왕실 내에 근친혼이 잦았다. 우리 역사에서도 신라의 김유신과 김춘추는 서..
모방을 버리고 독자 노선으로② 이 시기에는 불교의 성격도 확연히 달라진다. 불교가 도입된 초창기인 쇼토쿠 태자 시절의 불교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호국 불교였어도 종교의 성격이 명확했다. 그러나 다이카 개신 이후 귀족 지배기를 거치면서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귀족들의 개인적 질병이나 재앙을 막아주는 주술적 용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주술과 기도를 특징으로 하는 진언종(眞言宗)이 널리 퍼졌고, 천태종(天台宗)이 밀교처럼 변질되었다. 훗날 일본의 불교가 무속이나 민간신앙, 혹은 일본 고유의 신사(神社) 신앙과 뿌리 깊은 연관을 가지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시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언제 중국의 것을 모방하기에 급급했느냐는 듯이 일본의 정치적ㆍ문화적 노선 전환은 순식간이었다. 그 덕분에 일본은 오늘날까지 지..
모방을 버리고 독자 노선으로 일본이 진통을 겪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동북아시아 전체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한동안 국제 질서의 핵심이었던 당 제국은 8세기 중반 안사의 난 이후 당말오대의 말기적 증상에 시달렸다. 당의 율령제가 붕괴하는 시기와 일본의 율령제가 붕괴하는 시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일본은 율령제의 성립만이 아니라 붕괴까지도 모방한 셈이다. 아니면 율령제의 한계가 그랬거나. 그러나 중국의 동요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한반도와 일본은 서로 달랐다. 통일신라는 당과 함께 중앙 권력이 무너지고 혼란기에 빠졌으나【신라는 당과 함께 말기적 증상을 보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난 8세기 중반의 혜공왕(재위 765~780)부터 당이 수명을 다하는 9세기 말 진성여왕(재위 887~897)까지 신라 ..
순수 무장의 집권② 그러나 문제는 체제가 아니라 정치의 내용이다. 3대째 상황의 원정이 지속되었어도 전혀 개혁 정치는 없었고 셋칸 시대와 달라진 것도 없었다. 정치가 현저하게 퇴보와 후진성을 보이자 정치 세력 간의 다툼은 더욱 치열해졌다. 후지와라 독재가 끝난 뒤 형세는 황실과 후지와라 셋칸 가문, 귀족, 그리고 여기에 유력 사찰들이 조직한 무장 승병 집단 세력까지 더해져 더욱 오리무중에 빠졌다. 일본 전역에서 이들 세력의 사병 조직들 간에 무장 충돌이 빈발했다. 난세에는 무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장악하게 마련이다. 혼란의 와중에 후지와라의 무사단(사무라이) 이었던 미나모토(源) 가문과 천황 측의 사병 조직인 다이라 가문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귀족들에게 고용되어 무력을 제공하는 역할이었으나 세상이 혼탁해..
순수 무장의 집권 천황의 지위는 쇠락 일로에 있었다. 당대의 실력가인 후지와라 가문은 자기 딸을 황후로 집어넣어 외손을 천황으로 즉위시키는 방법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외척 정치와 같은 셈인데, 차이가 있다면 그래도 실권을 가진 중국의 천자에 비해 일본의 천황은 한층 초라한 존재였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후지와라 가문의 독재라고 할 수 있었으나 권력의 정상에 오르면 분열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내 후지와라도 네 가계로 나뉘어 권력투쟁을 일삼았다(그 가운데 북가北家의 세력이 가장 컸다). 마침내 858년에 섭정이 된 후지와라 요시후사(藤原良房, 804~872)는 천황을 완전히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시켰다. 황족이 아닌 사람이 섭정에 오른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섭정 정치가 ..
귀족이 주도한 율령제② 장원제의 발달은 경제적인 측면에만 관련이 있는 게 아니었다.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이후 일본의 토지제도는 반전제(班田制)였다. 이것은 농민들 개개인에게 구분전(口分田)이라는 토지를 할당하는 제도였다. 누구에게나 갈아먹을 토지를 나누어주는 것이므로 어찌 보면 국가의 시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보다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고 귀족들의 사치스런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였다. 무엇보다 조용조(租庸調)의 세금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세금의 비율은 얼추 수확량의 2할가량 되었는데, 당시의 농업 생산력에 비추어볼 때 구분전을 경작해 이 세금을 내면서 멀쩡히 살아갈 수 있는 농민은 거의 없었다. 조용조(租庸調) 가운데 특히 가혹한 것은 용, 즉 요역이었고, 그중에..
귀족이 주도한 율령제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으로 탄생한 율령 체제의 경제적 토대는 모든 토지가 국가, 즉 천황의 것이라는 공지제(公地制)였다【앞에서 보았듯이, 왕토 사상은 동북아시아 문화권에 내재해 있었다. 일본의 공지제가 아니더라도 어느 나라 어느 왕조는 개국 초에는 왕토 사상을 철저히 지키게 마련이다. 사회적 원리의 면에서도 그렇지만 지배층에게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이전 왕조의 경제적 토대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개국 공신을 비롯한 새 정치 세력에게 토지를 분급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신라를 접수한 고려, 고려를 타도한 조선은 초기에 왕토 사상을 표방하고 나섰다. 그러나 처음에는 관리들에게 독봉으로 토지의 점유권만 인정하지만 얼마 못 가서 점유권은 사실상 소유권이 되어버린다. 왕토 사상..
모방의 한계② 그러나 현존하는 제도와 문물을 모방할 수는 있어도 역사와 전통까지 모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일본의 한계는 바로 그것이었다. 우선 수도인 헤이조(‘평평한 성’이라는 뜻)의 이름에도 ‘성(城)’이라는 글자가 버젓이 들어가 있지만, 그 성은 여느 성과 크게 달랐다. 헤이조에는 건물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 한 나라의 수도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성벽이 없었다. 성벽이란 외적의 침입을 막아 수도를 보위하는 한편 성 안에 사는 주민들의 생활 근거지와 바깥의 일반 농촌 사회를 구분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일본에는 중국이나 한반도와 달리 이민족이 없어 침입할 만한 외적이 없었고, 수도라고 해야 정치 행정만을 위한 장소일 뿐 시민 생활이 없었기 때문에 성벽이 애초에 필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
6장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1. 무한 내전의 출발 모방의 한계 645년의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을 통해 일본은 비로소 고대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당대의 동북아시아 여러 민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7세기 중반이면 한참 늦은 출발이기는 하지만, 중국 문화권의 한반도보다 800년이나 늦게 신석기시대를 졸업한 일본 민족으로서는 비약적인 발전이라 하겠다. 그런 성과를 이룬 데는 섬나라라서 외적의 침입이 없었다는 지리적 여건과 아울러 일본 민족 특유의 뛰어난 모방 솜씨가 큰 역할을 했다【섬이란 사실 양면적인 조건이다. 외부의 ‘침략’을 막기에는 더없이 좋지만 동시에 외부의 ‘영향’마저 가로막혀 폐쇄적으로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양면적 조건은 주체의 역량에 따라 좋게 작용할 수도 있고 나쁘게 작용할 ..
유능한 군주들이 일군 전성기③ 그러나 무굴의 전성기를 가져온 유능한 군주들은 아우랑제브에게서 대가 끊겼다. 공교롭게도 최대 강역을 자랑하던 그의 치세 이후 무굴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실은 음으로 양으로 무굴 제국에 힘을 실어주던 힌두인들이 인도의 이슬람화를 진심으로 환영할 리 없었다. 관료제의 실무자인 이들이 황제에 반감을 품으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중앙 권력이 약화되자 그간 무굴의 지배하에 있던 소국들도 조공만 계속할 뿐 예전과 같은 충성심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내부 정세 이외에 바깥에서도 무굴의 목줄을 죄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데칸 지방에서는 마라타(Maratha)가 크게 일어나 델리 근방을 자주 침략했다. 마라타족은 산악 지방 특유의 강인함과 기동성을 갖추고 유..
유능한 군주들이 일군 전성기② 샤 자한은 모계가 힌두 왕비였기 때문에 힌두의 피를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런 탓인지 샤 자한은 예술을 매우 사랑했고, 역대 인도 왕들 가운데 손꼽히는 낭만적인 군주였다. 특히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왕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 1593~1631)을 추모하며 지은 무덤 궁전인 타지마할은 오늘날까지 당당한 위용과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세계적 건축물이다. 문화를 사랑한 낭만 군주라고 해서 샤 자한이 심약한 군주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남쪽으로 데칸 일대의 소국들을 병합해 영토를 늘렸고, 북쪽으로는 왕조의 고향에 해당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까지 정복했다. 그의 사후에 아들들이 권력다툼을 벌였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이내 또다시 걸출한 지배자가 제위를 계승했다...
유능한 군주들이 일군 전성기 역사에 이름을 남긴 뛰어난 군주는 대개 한 측면에서만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는다. 아크바르도 역시 대외 정복이나 정치와 행정 같은 제국의 하드웨어에서만 성과를 거둔 게 아니라 문화와 예술 같은 소프트웨어에서도 치적을 남긴 군주였다(그가 해결한 종교 문제는 일반적으로 제국의 소프트웨어에 속하겠지만 인도의 경우에는 하드웨어로 보아야 한다). 또한 그는 호화로운 궁전에서 각종 화려한 행사를 주최해 절대 권력과 권위를 과시하면서도 매일 이른 아침에 창문을 열고 백성들의 인사를 직접 받을 정도로 여론에 민감했다. 그런 자질을 갖추었기에 아크바르는 정복 군주이자 문화 군주라는 보기 드문 선례를 보여주었다. 전통과 첨단을 매끄럽게 접합하는 아크바르의 솜씨는 종교만이 아니라 문화에서도 ..
최초의 중앙집권 제국 아크바르는 1556년 열세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50년 가까이 재위하면서 무굴 제국을 크게 발전시킨 탁월한 군주다. 무굴 제국 초기만 해도 라지푸트족의 반발과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델리까지 위협하는 이들을 복속하지 않고서는 제국이 반석에 오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라지푸트와 격전을 벌여 제압했다. 거기서 그쳤다면 아크바르는 평범한 군주에 머물렀을 텐데, 과연 그는 싹수가 달랐다. 힘으로 적의 항복을 받아낸 다음에는 그들을 포용해 사회의 지도층으로 폭넓게 등용한 것이다. 아크바르가 어떤 의도를 품었는지는 몰라도 그 정치적 효과는 매우 컸다. 북인도의 전통적인 지배층이자 상류층인 라지푸트를 제압하고 동화시키자 이내 나머지 인도인들도 뒤따르게 되었다. 나아가 아크바르는 라지푸트의..
다양한 매력의 지배자② 바부르의 무굴 제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과 간다라를 포함해 데칸 고원의 일부, 동쪽으로는 벵골에까지 이르는 드넓은 영토를 장악했다. 인도 지역에 국한한다면 고대의 마우리아나 쿠샨, 굽타보다 통일 제국으로서의 위상이 약하겠지만, 북인도만을 놓고 따지거나 그 북쪽의 중앙아시아까지 포함시킨다면, 무굴 제국은 인도 역사상 가장 강력한 통일 제국일 것이다. 게다가 수명도 중세 이후 어느 인도 왕조보다 긴 200여 년에 달했다. 바부르는 파괴적인 정복자일지언정 적어도 무지한 정복자는 아니었다. 정원에 심취한 데서 보듯이 심미안을 가진 지배자였으며, 문학에 조예가 깊고 시와 산문을 즐긴 팔방미인이었다. 튀르크어로 된 그의 저서 『바부르의 회상』은 오늘날까지도 이슬람 문학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
4. 최초이자 최후의 제국 다양한 매력의 지배자 16세기 초반 아프가니스탄계의 로디(Lodi) 왕조가 델리 술탄국의 맥을 잇고 있을 무렵, 우즈베크 출신의 한 영웅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칭기즈 칸의 16대손이자 중앙아시아의 ‘칭기즈 칸’이었던 티무르(Timur, 1336~1405)【티무르는 14세기 중앙아시아 튀르크족의 지배자인데, 인도사에 속하는 인물은 아니므로 여기서 간단히 살펴보자. 몽골이 중앙 아시아에 수립한 차가타이 칸국이 와해되자(7장 참조) 티무르는 그 혼란을 수습하고 몽골 제국의 후예로 자처했다(물론 종교와 문화는 이슬람이다). 뛰어난 정복자였던 그는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남 러시아 일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손에 넣었다. 1405년 그가 병사한 뒤 후손..
이슬람이 지배한 힌두③ 그러나 사실은 예상을 거스른다. 아무래도 타지에서 온 이민족 정권인지라 델리 술탄국의 나리들은 기반이 그리 튼튼하지 못했다. 더구나 지배층은 하나로 뭉쳐 인도를 지배하는 데 힘쓴 게 아니라 자기들끼리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였다. 술탄들은 모두 전제 군주였으나 중국의 경우처럼 세습되지 않고 주로 무장들이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자고 나면 암살로 정권이 바뀌는 일도 대단히 흔했다. 따라서 이슬람의 침입과 지배로 북인도는 수많은 문화재만 잃었을 뿐 정치나 행정의 쇄신은 거의 이루지 못했다. 백성들에 대한 통치도 상당히 느슨했다. 지배층이 이슬람인 만큼 피지배층에게도 서서히 이슬람교가 전파되었지만 다수의 백성들이 개종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소수의 이슬람교도를 위해 다수를 차별하기에는 권력..
이슬람이 지배한 힌두② 이후 노예 왕조는 터키계의 칼지(khalji)에 정복되었고, 칼지는 또 투글루크(Tughluq)에게 정복되었다. 이런 식으로 15세기 전반까지 200년 동안 북인도는 터키와 아프가니스탄 세력이 번갈아가면서 장악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델리를 중심으로 했고, 예전처럼 소국가들이 분립한 시대와 달리 서로 같은 시대에 공존한 게 아니라 대체로 정복을 통해 맞교대했다. 그래서 그 나라들을 총칭해 델리 술탄국이라고 부른다. 분열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통일 국가가 지배한 시대라고 보기에도 어정쩡하다. 그래도 북인도의 패자가 된 델리 술탄국은 내친 김에 데칸과 남인도에까지 진출하려 했다. 하지만 남인도의 힌두 왕조인 비자야나가라(Vijayanagara)가 사력을 다해 저지했기 때문에 그 시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