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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격변기의 비중화세계 대원군 자신도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끝나고부터는 쇄국의 결심을 굳혔다. 그렇다면 조정의 분위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항로(李恒老, 1792~1868), 기정진(奇正鎭, 1798~1879) 등 원로대신들은 물론이고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유인석(柳麟錫, 1842~1915) 등 소장파와 유생들까지 일제히 존화양이(尊華洋夷, 중화를 숭상하고 서양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정신)를 목청껏 외친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실학의 냄새마저도 없는 골수 성리학자들이었으니, 말하자면 실로 오랜만에 수구 대통합이 이루어진 셈이다(더욱이 그들은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사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갈등도 사라졌다). 중화세계라는 자신들의 ‘지구’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나선 이 ‘독..
한 가지 해법(문 닫기)③ 비록 규모는 크지 않은 전투였지만 중국과 일본이 모두 실패한 제국주의 열강과의 교전에서 조선은 일단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진짜 승리일까? 사실 프랑스군은 마음만 먹는다면 야포를 동원해서 산성을 재점령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조선을 정복할 목적으로 온 게 아닌 이상(그랬다면 겨우 1천 명의 병력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실제로 베이징에 돌아간 로즈는 성공적인 전투였다고 자평했다). 더욱이 조선은 승자였으면서도 잃은 게 훨씬 많았다. 전쟁의 사상자보다도 더 큰 손실은 프랑스군이 철수하면서 300여 권의 도서들을 가져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와의 외교에서 숙제로 남아 있는 ‘외규장..
한 가지 해법(문 닫기)② 하지만 프랑스 함대보다 먼저 들이닥친 것은 미국의 상선이다. 한강의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그 해 7월 미국 국적의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 하구에 와서 통상을 요구한다. 당시 평안도 관찰사였던 박규수(朴珪壽)는 당연히 그 요구를 거부했으나 대포까지 장착한 상선답지 않은 상선은 물러가기는커녕 오히려 대동강을 거슬러오더니 급기야는 선원들이 평양에 무단으로 상륙해서 관민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마침내 조선 군인이 대포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터지자 분노한 박규수는 셔먼 호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무리 증기선에 대포까지 있다 해도 스물네 명의 선원이 수천 명의 관민들을 당해낼 수는 없다. 결국 군함 같은 상선과 깡패 같은 선원들은 이역만리까지 와서 제 무덤을..
한 가지 해법: 문 닫기 왕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여러 가지 방책을 저울질하던 대원군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간 사건은 어찌 보면 우연한 ‘사고’에서 비롯되었다. 1865년 말 두만강 쪽에서 러시아가 통상을 요구해 온 게 그 계기다. 물론 조정의 분위기는 결사 반대인데, 그때 대원군의 측근 인물로 그리스도교도였던 남종삼(南鍾三, 1817~66)이 대원군에게 묘한 제안을 했다. 영국, 프랑스와 결탁해서 러시아의 진출을 막자는 것이다(아마 그는 선교사들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과 아시아 곳곳에서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저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 그 제안이 옳든 그르든 그는 조정의 개구리들 보다는 훨씬 시대의 흐름에 밝았다고 하겠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면 ..
다시 온 왕국의 꿈② 결과적으로 보면 세도가를 뿌리뽑겠다는 이유로 민비(閔妃)를 선택한 대원군의 판단은 잘못이었다. 쇠붙이라면 모조리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권력의 속성상, 가문에서 왕비가 나왔다는 소식은 민씨 성붙이들을 총집결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당대의 실권자인 대원군의 아내도 같은 가문이었으니, 그들에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세도가와 왕실 외척을 배제하겠다는 대원군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그 자신마저도 오히려 그들에게 배척당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고 당장 대원군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 세도정치(勢道政治)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림으로써 모처럼 만에 조선은 다시 왕국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아마 정조(正祖)의 꿈과 실험이..
3장 위기와 해법 다시 온 왕국의 꿈 대원군이 처음부터 어린 아들이 져야 할 국정의 부담을 대신 떠맡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는 어린 아들을 위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었겠지만, 남의 이목이 많고 오늘의 그를 있게 해준 조대비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 게다가 공식적으로는 엄연히 대비의 수렴청정이 진행되고 있는 시기가 아닌가? 비록 대비는 대원군에게 모든 사안에 대해 일일이 자문을 구했지만, 젊은 시절 눈칫밥이라면 원 없이 먹은 그는 아직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대원군이 조대비는 고맙고 미더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국태공(國太公)으로 임명하고 창덕궁 출입 전용문까지 만들어주면서 각별히 배려했으며, 국가의 최대 행사인 경복궁 중건 사업도 그에게 일임했다【186..
서학에는 동학으로② 개인권과 평등의 이념이 당연시되는 오늘날 같으면 특별할 게 없는 사상이지만, 당시 그런 주장은 엄청난 충격이고 대단한 파격이었다. 성리학적 질서, 중화적 질서에 따르면 이 세상은 신분의 구분이 당연한 것이다. 중국의 천자가 북극성이라면 사대부(士大夫)와 제후들은 그 주변을 날마다 한 바퀴씩 도는 별자리들이며, 백성들은 우주 곳곳에 흩어진 뭇별들에 해당한다. 이것은 하늘이 정해준 질서, 즉 천명이자 순리이므로 아무도 거역할 수 없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나 한반도의 역대 왕들이 노상 입에 올리는 말이 바로 천명이 아니던가? 그런데 동학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게 오히려 하늘의 질서라고 주장했으니 그야말로 천지개벽할 사상이 아닐 수 없다(실제로 이후 동학東學에서는 개벽開闢을 모토로 ..
서학에는 동학으로 순조(純祖) 때부터 전통으로 자리잡은 ‘국왕 = 허수아비’의 등식이 있으니 고종(高宗)은 열한 살이 아니라 스물한 살이라 해도 아무런 실권을 가질 수 없다. 그럼 또 다시 풍양 조씨가 컴백한 걸까? 그런데 여기서부터 사정이 달라진다. 일단 캐스팅에 성공하면서 자신의 뜻을 이룬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으로 고종(高宗)의 치세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 번 가세가 몰락한 풍양 조씨는 대비의 소망과는 달리 세력을 회복하지 못한다(아무리 무도한 세도가문이라 해도 세도를 휘두를 만한 ‘인재’가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권력은 자연히 그녀의 파트너인 이하응에게로 옮겨온다. 그가 바로 조선의 마지막 대원군이자 그 전까지의 대원군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실권을 지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다(그도 그럴..
총체적 난국③ 애초에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왕위에 올랐던 철종은 재위 중에도 자신의 뜻과는 달리 민란으로 얼룩진 시대를 보내고서 1863년에 죽었다. 그는 익종, 헌종(憲宗)과 달리 서른을 넘겨 살았지만 딸 하나만 두었을 뿐 후사를 남기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미 철종의 경우에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어 이제는 조정에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이제는 공식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왕실의 또 다른 후손을 찾아낸 다음 ‘국왕 과외’를 교습시키고, 그동안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왕을 장가보내 외척을 붙여주고 친정을 하도록 독립시키는 게 그 공식이다. 각본은 있으니 캐스팅만 하면 된다. 대비의 역할은 익종의 과부인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 ~ 90)다. 그녀는 오랫동안 시어머니 순원왕후..
총체적 난국② 불과 며칠 만의 모의로 거사한 것치고는 상당히 면밀하고 조직적인 봉기였다. 시위대는 우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인근의 장터로 달려가서 장을 취소하고 규모를 불렸다. 초군(樵軍, 나무꾼 부대)이라는 이름으로 자칭한 것에 어울리게 그들은 이마에 흰 수건을 두르고 농기구를 무기로 움켜쥐었으니, 오늘날 역사 기록화에 흔히 등장하는 전형적인 농민군의 모습이다. 게다가 그들은 봉기에 불참하는 농민들에게서는 벌금을 받고 반대하는 농민들에게는 보복을 가하는 등 급조된 시위대답지 않은 노련미를 과시했다. 이렇게 해서 수가 크게 늘어난 농민군은 곧바로 진주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최종 목표가 그것일 수밖에 없다는 게 애초부터의 한계였다. 백낙신에게서 도결을 철폐한다는 결정을 받아내고, 탐학을 일삼..
총체적 난국 밖에서는 서양 열강의 군함과 상선들이 돌아다니고 안에서는 백성들의 조짐이 심상치 않다. 조선은 점점 총체적인 난국으로 빠져든다. 어찌 보면 정부가 무능하고 부패한 탓만도 아니다. 환곡의 폐단을 없앨 방법을 모색하고, 뇌물을 받는 지방관에게 가중처벌법을 적용하고, 방납(防納)【방납이란 조선 초부터 성행한 것으로서, 중앙 관청의 서리들이 지방에서 올라 오는 공물을 가지고 농간을 부려 이익을 사취하는 행위다. 그 절차를 보면,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을 갖가지 구실을 달아 퇴짜를 놓은 다음 공물 납부를 대행해주겠다면서 그 과정에서 떡고물을 받아 먹는 식이다. 물론 불법이지만 정부에서는 서리들에게 따로 급료를 주지 않았으므로 알고서도 묵인해주었으니 관례나 다름없었다(말하자면 ‘공인된 불법’인 셈인데,..
원범 총각, 한양에 가다② 다행히 이광은 박복한 삶을 살았어도 자식복은 있었다. 그가 죽고 나서 얼마 뒤에 아들인 이원범(李元範)이 왕위에 오른 덕분에 그는 사후에라도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으로 추존되는 영광을 얻었다(선조宣祖와 인조仁祖의 아버지에 이어 역사상 세 번째 대원군이다). 열여덟 살의 강화도 총각 이원범은 영문도 모르는 채 한양으로 가서 생면부지였던 할머니 순원왕후를 만나 헌종(憲宗)의 대를 잇는다. 그가 바로 조선의 25대 왕인 철종(哲宗, 1831 ~ 63, 재위 1849 ~ 63)이다. 순조(純祖)부터 비롯된 새로운 전통에 따르면 철종은 그냥 왕궁에서 놀면 될 뿐 아무런 할 일도 없다. 따라서 다시 수렴을 내리고 청정에 나선 순원왕후가 해야 할 주요 임무도 촌놈 손자를 왕실 법도에 맞게 ..
한양에 간 원범총각 피로 얼룩진 헌종(憲宗)의 치세는 물로도 얼룩졌다. 15년에 이르는 그의 재위 기간 중에서 9년이나 홍수 피해를 입었으니 그 점에서는 순조(純祖)의 치세에 못지 않다. 한 가지 더 닮은 꼴이 있다면 사실상의 통치자(세도가의 보스)가 수를 다하고 죽자 얼마 뒤에 왕도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사실이다. 김조순(金祖淳)이 죽고 순조가 뒤를 따랐듯이, 1840년에 조만영(趙萬永)이 죽자 헌종(憲宗)도 3년 뒤에 스물두 살의 나이로 죽었다. 순조(純祖) 부부의 운명은 기구하기도 하다. 일찍이 순조는 아들 익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가 아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다시 재위하는 고초(?)를 치렀지만, 순조의 아내는 손자인 헌종(憲宗)에게 친정을 맡기면서 수렴청정을 거두었다가 헌종이 일찍 죽는 바람에 ..
무의미한 왕위계승② 1841년 순원왕후가 형식적인 수렴청정을 마치고 헌종(憲宗)이 친정을 시작하자 세도가문은 안동 김씨에서 풍양 조씨로 바뀐다. 그 이유는 물론 헌종의 외가가 풍양 조씨이기 때문이다. 하기는, 왕조의 성씨는 바꿀 수 없어도 세도가문의 성씨는 바뀌어야 정상 아닌가? 한 가문이 대대로 왕실 외척이 된다면 유교 예법에도 어긋날 테니까. 비록 왕실 외척이 바뀌면서 세도가문도 교체되었다고는 하지만, 왕보다 더 비중이 큰 권력 주체가 바뀌었으니 여기에도 뭔가 사연이 없을 수 없다. 계기가 된 것은 당쟁 시대가 끝난 이후 첨단(?)의 쟁점으로 등장한 그리스도교다. 원래 종교란 박해가 심할수록 더욱 확산되게 마련이지만, 그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어느 종교보다도 독한 데가 있다. 출발부터 로마 제국의 격심..
2장 허수아비 왕들 무의미한 왕위계승 아무 할 일도 없는 자리지만 순조(純祖)는 그것조차 귀찮았던 모양이다. 1827년에 그는 아직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열여덟 살의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난다. 이후 세자는 3년 동안 대리청정을 하는데, 물론 그에게도 역시 특별히 업무라 할 만한 일은 없다. 그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으나 그래도 두 가지 업적은 남겼다. 하나는 대리청정 기간 동안 사실상의 국왕이었으므로 죽은 뒤에 익종(翼宗, 1809~30)이라는 왕의 묘호를 받은 일이고, 다른 하나는 안동 김씨 대신 풍양 조씨 가문에서 아내를 취함으로써 이후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주인이 풍양 조씨로 바뀌게 만든 일이다. 어쨌든 당장 난처해진 것은 순조다. 일찌감..
불모의 땅에 핀 꽃③ 그래도 전제 개혁론과 왕도론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정약용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었다(아마 그는 당대의 집권자이자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문을 연 노론 세력과는 의식적으로라도 입장을 달리 하고 싶었을 것이다). 옛 주나라의 정전법(井田法)에서 영향을 받아 여전론을 전개한 것이라든가, 맹자(孟子)를 원조로 하는 왕도정치의 이념을 주창한 것은, 비록 유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해도 최소한 성리학보다는 더 이전의 유학과 맥을 같이 한다. 바로 정조(正祖) 치세에서 시파 세력의 이념이었던 육경학이 그의 사상을 낳은 뿌리다(정약용이 정조와 개인적 친분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학문적 동질감 덕분이다). 하지만 정약용은 시파보다도 한 걸음 더 앞서갔다..
불모의 땅에 핀 꽃② 그러나 여기서 정약용(丁若鏞)은 그 전까지 다양한 전제 개혁론을 주장한 다른 실학자들과 같은 착각을 범하고 있다. 토지의 실제 경작자와 명목상 소유자가 다르다는 게 토지제도의 근본적인 문제점이라는 지적은 옳다. 그러나 그 문제를 개선하려면 조선의 체제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아니면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거나). 조선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역대 왕조들, 나아가 중국의 역대 왕조들까지 중화세계에 존재했던 모든 왕조들은 예외없이 모든 토지가 왕 또는 국가의 소유라는 왕토(王土)의 이념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토지만이 아니라 나라 안의 모든 게 왕의 소유였으므로 사유재산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비록 그것은 형식적인 규정이었고 ..
불모의 땅에 핀 꽃 난세를 살았던 만큼 정약용의 사상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복잡다단하다. 우선 그는 무척 폭넓은 오지람을 자랑한다. 지금의 학문 분류로 말하면 그는 철학, 문학, 역사, 언어학 등 인문학은 물론이고 정치학, 행정학, 법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 나아가 과학기술과 종교 분야까지 아우르는 백과사전적 지식인에 속한다. 사실 정약용이 실제 이상으로 과대포장된 데는 그렇듯 분야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으로 활약한 덕택이 크다. 물론 처음부터 정약용(丁若鏞)이 박학다식과 팔방미인을 자랑했던 것은 아니다. 무릇 조선의 학자-관료라면 거의가 그렇듯이 그도 역시 관리로 재직하던 젊은 시기까지는 학문이라 해봤자 ‘과거용’ 유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라면 거의가 다 그렇듯이 그도 역시 정쟁..
혼돈의 시작④ 내분의 요소가 있는 한 장기적인 농성이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군은 이후 4개월이나 정주성에서 버텼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저항의 주체가 급료를 받는 반군의 ‘정식’ 병사들이 아니라 인근의 소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보다 오로지 반란을 진압하겠다는 일념으로 관군은 대대적인 초토화 전술을 폈는데,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농토를 잃었을 뿐 아니라 관군의 태도에 적개심을 품은 것이다. 반군을 따라 성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오히려 반군 주력군보다 더 적극적으로 항전했다. 하지만 반군이 정주성으로 퇴각하는 순간 이미 대세는 결정되어 있었다. 한동안 공성하는 측과 농성하는 측은 대등하게 맞서는 듯하다가 결국 관군이 화약으로 성벽을 무너뜨리면서 전세가 확연히 기울었다. 비..
혼돈의 시작③ 그러나 이념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니다. 거사가 성공하려면 그에 필요한 인력과 경제력과 물리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잔반(殘班, 몰락한 양반)들을 비롯해서 체제에 대한 불만을 품은 인물들을 끌어모으고, 중앙의 대상인들과 갈등 관계에 있던 현지 상인들과 중소 부호들을 규합하는 한편, 광산노동자와 빈농, 유랑민들을 군대로 조련했다. 이렇게 해서 김사용(金士用), 김창시(金昌始) 등이 중간 보스로 가담했고, 우군칙과 이희저의 재력은 거사 자금이 되었으며, 홍총각(洪總角)과 이제초(李濟初)를 비롯한 뛰어난 무사들이 반란군의 무력을 담당하게 되었다【홍경래는 잔반, 우군칙은 서얼, 이희저는 노비, 홍총각은 양인 출신이었으니 반란 세력은 그야말로 각계각층을 망라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반군은 ..
혼돈의 시작②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된 지 불과 5~6년 만에 조선 사회는 완전한 혼돈의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기존의 토지제도가 무너진 이후 대토지 겸병이 유행처럼 번져 자영농이 대부분 소작농으로 바뀐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 그래도 백성들의 삶이 그럭저럭 모양새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동법과 균역법(均役法) 등의 개혁적인 제도들이 임시방편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앙과 지방의 정치가 극도로 문란해지면서 대동법(大同法)과 균역법도 기능 마비 상태에 이른다. 그나마 대동법은 중앙으로 오는 대동미가 지나치게 많아진 탓에 지방에서 다시 요역을 부과하는 제도로 역행하면서 자체 붕괴하는 식이었지만, 균역법은 애초부터 권력이 청렴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제도였기에 세도정치(勢道政治..
혼돈의 시작 개인적으로 보면 김조순(金祖淳)은 품성이 너그럽고 권력욕이 없을뿐더러 탕평책(蕩平策)의 지지자였던 탓에 정조(正祖)에게서도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세도정치(勢道政治)의 초대 보스가 되었다는 사실은 세도정치가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발명품이 아니라 수백 년간 진화해 온 사대부(士大夫) 체제의 피할 수 없는 결론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따라서 세도정치의 책임을 김조순에게 묻거나, 그의 가문이자 나중에 세도정치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안동 김씨 집안에게 전가할 수는 없겠다(무사안일주의적 성향 때문에 기생 출신의 첩실이 국정을 주무르는 것을 용인했으니 김조순(金祖淳)의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역사학자들은 흔히 세도정치의 기원을 정조(正祖) 초기에 집권했던 홍국영이라고 말하는..
과거로의 회귀② 이 사건으로 최초의 외국인 신부 주문모는 서울 용산 부근 한강변에 있는 새남터라는 모래사장에서 참수되었고, 몇 차례나 배교 선언을 하면서 용케 살아남았던 이승훈도 이번만은 살아남지 못했으며, 정씨 삼형제도 하나(정약종)가 처형되고 둘은 유배형을 받았다. 그밖에 전국적으로 300여 명의 그리스도교도가 처형당함으로써 이 사건은 한국 그리스도교사에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로 기록되었다【그러나 살아남은 교도들이 산간 지방으로 숨어들면서 오히려 이후 그리스도교는 전국 각지로 확산되고 기층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갔다. 그리스도교의 초기 역사에서 보듯이 무릇 종교란 정치적 탄압이 심할수록 더욱 널리 퍼지는 법이다. 이렇게 탄압 속에서 교도가 꾸준히 늘어간 탓에 그 뒤에도 19세기 내내 거의 정기적으로..
1장 사대부 체제의 최종 결론 과거로의 회귀 정조(正祖)는 뚜렷한 병명이 없이 등과 머리에 종기가 돋는 일종의 열병을 앓다가 죽었다. 그런 탓에 한참 뒤까지도 그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대수롭지 않은 병인 데다가 발병한 지 20일도 채 못 되어서 죽은 과정이 아무래도 미심쩍기는 하다. 그러나 정황상으로 보면 독살의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범인은 노론 벽파밖에 없는데, 만년의 정조는 이미 개혁을 포기했으므로 그들과 갈등을 빚을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독살설이 완전히 잦아들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그의 사후 곧바로 모든 체제가 예전 상태로 돌아갔기 때문일 터이다. 정조가 죽자 규장각(奎章閣)은 본래의 기능인 도서관으로 권한이 축..
11부 불모의 세기 사대부(士大夫) 체제의 완결판은 결국 황폐한 세도정치였다. 국왕은 완전한 허수아비가 되었고, 사대부들은 사리사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아들을 왕으로 앉힌 아버지가 시대착오적인 쇄국을 내세우는가 하면 며느리는 그런 시아버지를 내쫓고 외세를 마구잡이로 끌어들였다. 지배층의 이런 무책임과 무능은 급기야 나라마저 빼앗기는 결과를 빚고 만다. ▲ 영화 [자산어보]의 장면. 신유박해로 체포된 정씨 삼형제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미완성 교향곡② 그렇다 해도 외부적인 요인이 없었다면 청나라는 그런 대로 존속했을 것이다. 만약 더 이상 제국이 견디지 못할 정도에 이른다면 필경 다른 제국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그게 중국식 제국의 일반적인 진화 과정이다. 그런데 당시는 유럽 열강이 일제히 중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특히 인도를 정복한 영국은 모직물 수출이 여의치 않자 인도산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해서 막대한 무역흑자를 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청나라는 내외의 우환에 시달리면서 늙은 공룡이 되어간다. 이것이 바로 18세기 말 건륭제 치세 말기 중국의 사정이다. 정조(正祖)가 본받을 모델로 삼았던 인물은 둘이다. 하나는 역사적 인물로 300년 전 조선의 왕인 세조(世祖)이고, 다른 하나는 당대의 인물인 청나라의 건륭제다. 그럴 ..
미완성 교향곡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고 개혁 의지에 충만했던 정조(正祖)는 조선 역사상 보기 드문 출중한 군주였다. 비록 어린 시절 겪었던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 그에게 내내 심적ㆍ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한 탓에 다소 불안정한 행마를 보이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그가 설정한 왕국 건설의 목표는 옳았고, 그것을 위해 그가 추진한 여러 개혁도 대체로 올바른 것이었다. 그러나 꿈이 실현되려는 순간에 느닷없이 수구적인 자세로 돌아 버렸다는 점에서 그는 할아버지인 영조(英祖)와 닮은꼴이다. 조선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던 북학을 갑자기 거부하고,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기묘한 조치를 들고 나와 복고주의로 역행한 이유는 뭘까? 영조처럼 과속을 겁낸 탓일까? 개혁피로감일까? 아니면 그리스도교가 퍼지는게 그토록 두려웠을까..
정조의 딜레마② 대형사고를 면하고 사태는 그럭저럭 마무리되었으나 이 사건을 대하는 정조(正祖)의 심정은 착잡할 수밖에 없다. 개혁은 지속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나라의 기틀을 뒤흔드는 그리스도교마저 용인할 수는 없다(사실 그리스도교야말로 서학 중의 서학이었으니, 그런 점에서 보면 북학에 상당 부분 의지하는 그의 개혁론은 처음부터 모순이었던 셈이다). 그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학 이념에 기초한 왕국이지 당시 유럽에 즐비한 ‘서학 왕국’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개혁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그리스도교처럼 이질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방법은 없을까?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고심하던 그에게 한 가지 방법이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그동안 개혁의 대세였던 북학을 위축시키고 육경학을 권장하는 방법이..
정조의 딜레마 규장각(奎章閣)을 정치 개혁의 실무자로 삼고, 실학자들에게는 전반적인 사회 개혁에 필요한 이론과 이데올로기를 만들게 한다.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보수파의 반동에 대해서는 장용영(壯勇營)을 물리력으로 구축하고, 화성을 미연의 사태에 대비하는 대피처로 삼는다. 정조(正祖)의 이런 시나리오는 완벽했다. 그러나 시나리오가 좋다고 해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대박이 터지려면 좋은 시나리오에 감독의 능력과 의지가 보태져야만 한다. 개혁 드라마의 모든 일을 도맡은 정조는 기획, 제작, 시나리오 작업까지 완벽하게 진행했으나 마지막 감독의 단계에서 무너진다. 조선의 마지막 실험이 실패의 조짐을 보이는 것은 이때부터다. 공교롭게도 그 단초는 그리스도교가 제공했다. 이수광(李睟光)과 소현세자가 ..
반정의 예방조치③ 아닌 게 아니라 당시 정조(正祖)가 수원에 보인 애착은 이상할 정도로 강했다. 우선 그는 그 전까지 수원부(水原府)로 불리던 이곳을 부사(府使)가 관장하는 곳에서 유수(留守)가 관장하는 곳으로 승격시키고 화성(華城)으로 개칭했다(오늘날로 치면 광역시로 격상된 것이다). 게다가 정조는 성(지금은 이 성을 화성華城이라고 부른다)을 새로 축조하고 네 개의 대문을 만드는가 하면 여기에 각종 누대와 포대까지 설치해서 완벽한 신도시로 탈바꿈시켰다. 1794년부터 2년이 넘게 걸린 이 대형 토목공사에는 무려 1만 명이 넘는 기술자가 동원되었고 100만 냥에 가까운 돈과 1500석의 양곡이 소요되었다. 10년치의 국방 예산을 앞당겨 쓰면서까지 그가 화성의 축조를 서두른 이유는 뭘까? 수원의 4대문에 ..
반정의 예방조치② 물론 정조(正祖)도 뒤통수에 꽂히는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몰랐을 리 없다. 아마 그도 익히 알고 있었겠지만, 사대부(士大夫)들이 왕권에 도전할 때 가장 우려할 사태는 단 한 가지, 반정(反正)뿐이다. 왕이 허수아비일 때 사대부들은 자기들끼리 권력다툼을 치열하게 벌이는데, 그 경우 그들이 구사하는 수단은 언제나 말만의 역모다. 수많은 당쟁에서 보았듯이 한 편이 다른 편을 역모로 엮어 왕의 이름을 빌려 처벌하는 식이다. 그러나 왕이 왕권을 행사하고 있을 때는 말만의 역모가 아무런 소용이 없으므로 사대부(士大夫)들도 실력 행사에 나서게 된다. 그게 실패하면 반란이 되고 성공하면 반정이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의 조선 역사상 사대부들이 왕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경우는 모두 세 차례가 있었다. 그 ..
반정의 예방조치 정조의 즉위가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를 죽인 노론은 정조가 세자로 책봉되자 그마저도 살해하려 했으며, 실제로 ‘작업’에 들어가기도 했다(물론 그들은 그가 즉위한 다음에 있을 정치 보복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때 정조를 구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은 홍국영(洪國榮, 1748~81)이라는 자였다. 이미 여러 차례 보았듯이 중요 사건이 있을 때마다 입장에 따라 분열하는 것은 조선 사대부(士大夫)들의 생리다. 장헌세자의 죽음을 두고도 노론은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세자의 죽음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는 매파는 벽파(僻派)를 이루었고 그 사건을 안타까이 여기는 비둘기파는 시파(時派)로 분류되었는데, 시파에는 옛 소론과 남인의 세력까지 가세했다. 소수였기에 ‘치우친 파’, 즉 벽파라고 불리..
도서관이 담당한 혁신④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당내민주주의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개가 웃을 일이듯이, 혁신을 꾀하는 규장각(奎章閣)이 그 내부 운영부터 혁신적이지 못하다면 말도 안 될 것이다. 과연 정조(正祖)는 우선 인사 행정부터 파격적으로 가져간다. 도서관의 기능을 하는 이상 규장각에서는 검서관(檢書官)이 중요한 실무인력이다(상위 서열로는 제학과 직제학 등이 있었으나 이들은 원로로서 형식적으로 임명되었을 뿐 규장각의 실제 운영은 검서관들이 도맡았다). 정조(正祖)는 이 검서관직에 과감히 서얼 출신을 기용한다. 초대 검서관 네 명 중 이덕무(李德懋, 1741 ~ 93)와 박제가(朴齊家, 1750 ~ 1805)가 바로 서자의 신분이었다는 것은 정조가 의식적으로 신분 차별을 철폐하고 실력 위주의 인사를 ..
도서관이 담당한 혁신③ 우선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의 본연의 임무를 확대해서 도서관과 출판의 기능을 부여하는 것으로 개혁의 운을 뗀다. 세자 시절부터 수입하고 싶어했던 청나라의 『사고전서(四庫全書)』【『사고전서』란 건륭제 때 이루어진 도서 집대성이다. 강희제의 『고금도서집성』 편찬 작업을 이어받은 작업인데, 『고금도서집성』처럼 항목별로 분류한 백과사전이 아니라 당대의 수많은 서적들을 모아 새로 교정하고 정서하고 지은이 소개까지 붙여서 총정리한 것이다. 무려 8만 권 가까이 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청나라 조정에 반대하는 입장의 서적들은 내용을 자의적으로 첨삭하기도 하고 금서로 분류하기도 했으니 정치적 잣대가 상당히 반영된 총서라고 봐야겠다. 제목에서 사고(四庫)란 네 군데 서고를 가리키는데, 모두 네 질..
도서관이 담당한 혁신②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세자의 아들로서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즉위한 희한한 기록을 보유하게 된 정조는 마음 속에 깊숙이 가라앉은 앙금을 결코 씻어 버릴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할아버지가 남긴 숙제를 완수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이렇게 아버지를 해원(解寃)한다는 사적 과제와, 왕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공적 임무가 결합되면서 그는 조선 역사상 가장 근본적이고도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이번이 아마도 조선 역사상 마지막 체제 실험이 되리라는 것을 그도 예감했던 걸까?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조선은 완전한 왕국이 되어 격변하는 동북아의 정세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될 테고, 실패한다면 조선은 동아시아로 밀려오는 서구 열강의 제물이 되고 말 터이다. ..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도서관이 담당한 혁신 영조(英祖)가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탕평책(蕩平策)이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또한 그가 출중한 재질과 뛰어난 학문, 강력한 카리스마 등 군주적 자질을 두루 지녔고 무척 오래 재위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 모든 요소들이 왕권 강화와 조선의 왕국화에 나름대로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보다 훨씬 중요한 요소가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북아의 질서가 송두리째 변했다는 사실이다. 청나라가 대륙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곧 황제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물론 청나라에도 황제는 있다. 그것도 건륭제(乾隆帝, 1711~99)라는 뛰어난 황제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는 조선을 포함해서 역대 한반도 왕조들이 충심으로 사대했던 ..
사대부의 거부권③ 그것은 가뜩이나 세자의 처신에 분노하고 있던 영조로 하여금 세 번째이자 마지막 실수를 저지르게 하기에 족했다. 나경언의 고발이 있었던 날부터 세자는 석고대죄를 시작했으나 영조는 20일이나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나라의 앞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세자에게 자결하라고 명한 것이다. 한 번 아들에게 등을 돌린 아버지는 가혹했다. 신하들이 세자의 자결을 극구 만류하자 영조(英祖)는 세자를 서자로 강등시켰다. 사실 세자는 계비의 소생이 아니므로 원래 서자였으나 세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적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그 조치는 곧 세자를 폐위하겠다는 뜻이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았겠으나, 영조는 세자를 이미 정치적으로 죽여놓고도 생물학적으로도 죽이려 했다. 결국 세자..
사대부의 거부권② 사회적 분위기와 학문적 흐름은 새 시대를 지향하고 있는데도 조선의 정치 현실은 여전히 수구적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명나라 때부터 정치 지상주의가 한물 갔는데도 조선에서는 여전히 모든 사회 부문들을 정치의 고삐가 꽉 틀어쥐고 있다. 원래 경제는 진화론적으로 성장하지만 정치는 단속적으로 발전하게 마련이다. 바꿔 말하면 정치에는 반드시 적절한 혁명이 필요하다. 과연 조선이 처해 있는 시대적 모순은 곧 두 차례의 혁명적 변화로 표출된다. 하나는 사대부(士大夫)들의 반동이고 다른 하나는 급진적인 왕정복고다. 그러나 두 사건의 뿌리는 하나다. 탕평책(蕩平策)으로 당쟁의 열기를 잡았다 싶은 순간 영조(英祖)는 마음이 약해진다. 그동안 사대부 정치의 가장 큰 폐단이었던 당쟁이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
사대부의 거부권 비록 현실 정치에 반영되지는 못했어도 조선에서 새로운 학풍이 만개할 무렵 때마침 중국에서도 주목할 만한 학문적 발전이 있었다. 그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강희제의 시대에 시작된 백과사전 프로젝트가 오랜 작업 끝에 옹정제(雍正帝, 1678~1735) 대에 이르러 완성된 것이었다. 1725년에 간행된 백과사전은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라는 거창한 제목답게 현재까지 나온 모든 문헌들을 총망라해서 무려 1만 권의 책으로 엮은 엄청난 규모다【비슷한 시기에 서양에서도 방대한 백과사전이 편찬된 것을 보면 가히 세계적으로도 백과사전의 시대였던 모양이다. 1751년 프랑스에서는 계몽사상가들이 모여 인류의 모든 학문을 백과사전으로 담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주도하고 볼..
경계를 넘지 못한 실학④ 실학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현실적 정책으로 입안하고 실천할 수 있는 관학자(官學者)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으나, 성리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학문적 한계는 여러 가지로 아쉬움을 남긴다. 알다시피 참된 개혁을 이루려면 과거와 단절하는 아픔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마약을 끊는 고통을 고통이라 부르지는 않으며, 밖으로 나오기 위해 알 껍질을 깨는 아픔을 아픔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실학자들은 현실안주적인 성향이 강했고 유럽의 종교개혁가들보다 과감하지 못했다. 새로운 학풍의 담당자라는 역할에 어울리지 않게 그들 역시 기존의 당파적 노선에 따르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그런 한계를 볼 수 있다. 영조(英祖)의 치세에 여당은 노론이고 야당은 남인이다..
경계를 넘지 못한 실학③ 북학파가 중상학파라면 내부 개혁론자들은 중농학파라고 부를 수 있다. 또한 당시에 중국에서 유행했던 용어를 빌려 말하면 이용후생(利用厚生)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하는 학자들이 중상학파에 해당하고,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창하는 학자들은 중농학파에 해당한다고 구분할 수도 있다(강조점은 약간씩 다르지만 이용후생, 실사구시, 경세치용은 모두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고민을 하자는 뜻이다). 북학파 내부 개혁론자 중상학파(重商學派) 중농학파(重農學派)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 경세치용(經世致用) 박지원, 박제가 이익, 정약용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름이나 이론이 아니다. 중상이든 중농이든 다 좋다. 이용후생이든 경세치용이든 다 잘 해보자는 이야기다. 문제는 실학자들이 내놓은 ..
경계를 넘지 못한 실학② 그렇다면 실학은 성리학이 위기에 처했을 때 생겨났을 것이다. 과연 최초의 실학이라 할 만한 연구가 나온 시기는 바로 비중화세계가 중화의 본산인 중국을 정복했을 때와 일치한다. 1634년 이수광(李睟光, 1563 ~ 1628)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 20년 전에 쓴 원고를 정리해서 『지봉유설(芝峰類說)』이라는 일종의 백과사전을 펴냈는데, 이것이 사실상 최초의 실학서다. 광해군(光海君)과 인조(仁祖)의 두 시대에 걸쳐 정부 요직을 맡았다면 얼마나 영악한 인물이겠느냐고 여기겠지만, 실상 이수광은 눈치빠른 모리배와는 거리가 먼 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험난한 시대에도 참된 선비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으며, 참된 선비였기에 편협한 중화적 세계관에 물들지 않고 중국에 가서 ..
경계를 넘지 못한 실학 실학이라는 용어는 18세기에 새로 등장한 학풍을 가리키지만, 원래는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던 무렵에 민족 주체성을 고취하기 위해 학자들이 만들어낸 말이다(그러므로 당대에는 실학이라 부르지 않았다). 물론 실학이라는 용어는 예로부터 있었고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두루 쓰던 말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이를테면 고려시대에는 불교에 대해 유학을 가리켜 실학이라 했고, 조선 초에는 원시 유학, 즉 육경학이나 사장학(詞章學)에 대해 성리학을 실학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의미는 달라도 여러 용례에서 공통점은 찾을 수 있다. 즉 실학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기존의 학풍에 대해 새롭고 진보적인 학풍을 가리키는 용어였던 것이다. 호락논쟁(湖..
새로운 학풍③ 중화가 아니라면 사람도 아니다? 이런 호론의 주장은 그게 과연 18세기의 사상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사상이지만(그 시기에 서유럽에서는 인간 이성을 예찬한 계몽사상이 발달했다), 정작 그것을 주창한 성리학자들은 오히려 오랑캐를 원시적이고 야만적으로 봤으니 여러 가지로 웃기는 일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앞서의 예송논쟁과 마찬가지로 소중화(小中華) 이념이 있다. 비록 현실적인 힘에서는 오랑캐가 앞서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중화세계의 적통인 조선이 우위에 있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이런 변형된 중화 이념은 곧이어 자민족 중심주의로 발전하면서 예술에도 영향을 미쳐 진경산수화라는 기묘한 미술 장르를 낳는다. 진경(眞景)이라면 ‘진짜 경치’, 즉 조선의 경치를 뜻한다. 조선 ..
새로운 학풍② 앞서 말했듯이 사단칠정 논쟁은 원래 정치 이데올로기로 출발한 성리학의 태생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성리학에 철학적 옷을 입히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논쟁의 결론보다는(실은 결론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성리학자들 간에 그런 철학적 논쟁이 처음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50년이 지나는 동안 성리학의 현실적 토대인 중화세계는 크게 변했다. 대륙의 주인이 바뀌었고 조선이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남은 중화세계가 된 것이다. 이런 엄청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다면 성리학은 더 이상 발전하기는커녕 존립 자체가 불확실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이번 논쟁은 사단칠정 논쟁과 같은 철학적 면모를 유지하면서도, 그것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측면에 치우치지 않고 훨씬 ‘현실적인 문..
2장 한반도 르네상스 새로운 학풍 정치 행정이 정상화되고 제도가 정비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왕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건물의 골조가 튼튼해지고 외관이 다듬어졌다면 실내 인테리어도 그에 어울리도록 꾸며야 할 것이다. 당당한 왕국의 면모를 갖춘 새 조선에 어울리는 인테리어 작업이란 바로 학문, 지식, 예술 등의 문화 부문을 강화하는 일이다. 사실상의 재건국이라는 중요한 시기의 왕이라면 무엇보다 카리스마와 다재다능이 필요할 터이다. 이 두 가지 재질에서 영조(英祖)는 과연 시대적 요구에 정확히 부응하는 군주였다. 그는 권력과 권위로도 사대부를 확실히 제압했을 뿐 아니라 학문에서도 결코 여느 사대부(士大夫)에 뒤지지 않았다. 조선의 역대 어느 왕보다도 경연을 많이 실시했다는 게 그 점을 말해준다【경연의 기록은 후..
건국의 분위기③ 그런데 몸으로 때워야 할 일을 돈으로 대신하는 격이니 아무래도 비리가 없을 수 없다. 특히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상비군에 해당하는 5군영이 설치되기 시작하면서 군사 재정의 확충이 현안으로 떠오르자 그 제도는 가뜩이나 어려운 백성들의 삶을 더욱 곤궁하게 만드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다. 우선 국가에서 군포의 양을 대폭 늘린 게 문제의 발단이다. 차라리 예전처럼 사적으로 사람을 살 수 있다면 값싸게 군역을 해결하겠는데, 국가에서 군포 수납을 대행하니 그럴 수도 없다. 있는 자들이 더 쩨쩨하다고 했던가? 비록 내세에서는 바늘구멍으로 들어가야 하는 낙타의 신세가 될지 모르지만, 현세에서는 힘있고 돈많은 부자일수록 국가의 의무에서 빠져나가는 구멍이 크다. 그나마 체면치레로 군포를 냈던 양반층은 ..
건국의 분위기② 이와 같은 새로운 건국의 분위기 속에서 1746년에는 『속대전』이 간행된다. 무엇의 후속편이기에 이름이 『속대전』일까? 말할 것도 없이 『경국대전』의 후속편이다. 『속대전』은 『경국대전』이 편찬된 이후에 공표된 각종 법령들을 총정리한 새 법전이다. 그런데 『경국대전』이라면 15세기 중반 세조(世祖) 때, 바꿔 말하면 조선이 왕국이었을 때 만들어진 법전이 아닌가? 그 뒤 무려 300년 동안 법전의 개정판이 없다가 영조(英祖) 때에야 비로소 개수되었다는 것은 두 가지 명백한 사실을 말해준다(숙종肅宗 때인 1688년에 법전을 편찬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소폭의 개정만 이루어졌다). 하나는 지난 3세기 동안 사대부(士大夫) 정치가 판을 치면서 새 법전조차 마련하지 못할 만큼 혼란스러웠다는..
건국의 분위기 왕국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는 왕과 신민이다【서양식 왕국이라면 또 한 가지의 중요한 요소로서 영토를 들어야겠지만, 일찍부터 영토국가의 개념이 발달했던 동양식 왕국에서 영토란 나라가 존재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므로 굳이 왕국의 구성 요소에 포함시킬 필요가 없다. 문명의 발생기부터 동양에서는 지리적 중심이 튼튼했던 탓에 왕조 시대가 개막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영토국가가 발생했다. 그에 비해 서양에서는 왕과 신민의 역사는 오래지만 영토국가의 면모를 갖춘 왕국이 등장하는 것은 16세기 절대주의 시대의 일이다. 중세 유럽의 왕국들은 ‘선 개념’의 국가가 아니라 장원을 중심으로 하는 ‘점 개념’의 국가였다(서양사와 동양사를 비교해보면 확연히 알 수 이 지리적 차이는 서양 문명과 동양 문명의 성격..
왕국으로 가는 길③ 자칫하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치명타를 얻어맞을 뻔했던 영조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탕평책(蕩平策) 덕분이었다. 1727년 쌍거호대(雙擧互對)의 전략에서 소론을 등용한 정책이 절묘한 타이밍으로 맞아 떨어진 결과다. 이로 인해 유화 국면이 되면서 갑자기 동조자들이 적어지자 그동안 보이지 않는 그늘에서 우후죽순처럼 뻗어가던 반란 세력의 기세는 일순간 크게 휘청거린다. 급기야 그들은 그늘에 있다는 장점마저도 잃어 버리게 된다. 소론의 한 보스였던 최규서(崔奎瑞, 1650 ~ 1735)라는 자가 마음을 돌려먹고 조정에 역모의 정보를 알린 것이다. 이제 이인좌 일당은 호랑이 등에 탄 형국이 되었다. 이래저래 역적으로 찍혔으니 그동안 준비했던 무력으로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다...
왕국으로 가는 길② 왕국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왕당파를 육성하는 길이다. 일찍이 세조(世祖)가 그랬듯이, 그리고 100년 전의 광해군(光海君)이 그랬듯이, 측근 세력을 키우면 국왕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세조와 광해군이 결국 실패한 데서 보듯이 그것은 오히려 왕의 측근들이 훈구파를 형성해서 권세를 휘두르는 또 다른 폐해를 가져왔다(게다가 그 훈구파가 당쟁을 유발한 기폭제로 작용했다). 그나마 세조는 임기 내내 카리스마를 유지했지만 광해군은 재위중에 사대부(士大夫)들의 역공을 받아 실각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뭘까? 측근을 키우지 않으면서 당쟁을 막는 제3의 길은 뭘까? 그것은 사대부들의 당파를 현실적으로 인정해주되 각 당파 간의 세력 균형을 유도하는 방법..
왕국으로 가는 길 사대부(士大夫) 정치를 더 보편적인 개념으로 표현한다면 과두정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과두정치의 장점은 어느 누구도 권력을 독점하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역사적으로 그 대표적인 사례는 고대 로마의 원로원 정치다(흔히 이 시기 로마의 정치 체제를 공화정이라 부르지만 근대적 의미의 공화정과는 크게 다르므로 과두정치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원래 원로원이 생겨나기 이전에 로마는 에트루리아 왕의 전제적 지배를 받고 있었다. 기원전 6세기 말에 로마인들은 폭정을 일삼던 독재자 타르퀴니우스를 내쫓고 원로원을 성립시켜 최초의 고대 공화정을 이루었다. 여기에는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발달한 고대 민주주의 정치의 영향이 컸다(당시 이탈리아 남부는 마그나 그라이키아라..
되살아난 당쟁의 불씨② 경종(景宗)의 즉위에 합의해준 대가로 노론은 정승직을 비롯해서 조정의 요직에 포진하게 된다. 그러나 실권은 아무래도 현직 왕을 끼고 도는 소론에게 있으므로 노론은 적잖이 당할 수밖에 없다. 1721년 노론은 경종이 국왕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실정을 감안해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했다가 오히려 소론의 역공을 받아서 이이명, 김창집(金昌集 1648 ~ 1722), 이건명(李健命, 1663 ~ 1722), 조태채(趙泰采, 1660 ~ 1722) 등 이른바 ‘노론 4대신’이 역모 혐의를 받고 쫓겨나게 된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이듬해에는 일개 지관(地官, 풍수지리 전문가)에 불과한 목호룡(睦虎龍)이라는 자가 노론에게 반역의 기운이 있다며 무고를 하자 소론은 그것을 빌미로 6..
1장 조선의 새로운 기운 되살아난 당쟁의 불씨 장희빈은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뒤 곧바로 사약을 받았으나 그래도 그녀가 남긴 아들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복위된 뒤에도 인현왕후는 끝내 후사가 없었고 이듬해에 맞아들인 셋째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도 아이를 낳지 못한 탓에, 장희빈의 소생인 세자를 교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태생에 결격사유가 있는 세자의 왕위계승이 순조롭기는 어렵다. 마침 숙종(肅宗)에게는 적자는 없어도 서자는 또 있었다.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있었던 1694년 또 다른 후궁인 숙빈 최씨가 아들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을 낳은 것이다. 최씨 역시 원래 궁녀의 시중을 드는 무수리의 신분이었으니 연잉군도 신분상 하자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따라서 세자나 연잉군이나 서자에다 하자까..
10부 왕정복고 중국이 중화로 컴백할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일부 사대부(士大夫)들은 소중화(小中華)의 정신병을 버리고 실학의 학풍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더 중요한 변화는 조선의 국왕이 비로소 왕정의 의미와 필요성을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탕평책으로 당쟁을 잡았다 싶은 순간 영조는 개혁의 고삐를 늦췄고, 왕당파와 친위대를 육성함으로써 왕권을 다잡았다 싶은 순간 정조는 복고로 돌아섰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왕국의 조짐② 한동안 동북아시아를 뒤흔들었던 전란의 조짐이 종식된 것은 청나라와 일본의 비중화세계가 동북아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중화세계가 사라졌다고 믿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조선이 중화세계의 유일한 보루로 나섰다 해도 과거의 진짜 중화세계처럼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조선이 왕국으로의 길을 순조롭게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그 덕분이다. 청나라는 분명 조선의 상국이지만 국제적 서열상으로만 그러할 뿐이고 과거처럼 조선이 존경과 복종과 충성을 보여야 할 사대의 대상은 아니다. 또한 청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은 비록 계속 중화세계를 부르짖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에 중화세계가 부활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냥 내버려둬도..
왕국의 조짐 숙종(肅宗)의 치세는 당쟁의 정점이라 할 만큼 사대부(士大夫)들의 극심한 정쟁로 조정이 얼룩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남긴 후유증이 완전히 극복된 시기이기도 했다. 광해군(光海君) 때부터 시작된 양전사업이 완성을 본 것도, 대동법(大同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도, 5군영이 최종적으로 완비된 것도 모두 이 시기의 일이다. 상평통보가 유통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사회경제적 배경이 숙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압록강변의 무창(茂昌)과 자성(慈城)에 2진을 설치하고 청나라와 국경을 명확히 설정했으며, 일본에 오랜만에 통신사를 보내 교역을 재개했고, 어부 안용복(安龍福)의 노력으로 울릉도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안용복은 일본의 바쿠후 정권으..
당쟁의 정점③ 숙종(肅宗)은 1680년에 첫 아내가 두 딸만 남기고 죽은 뒤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 ~ 1701)를 들였지만 후사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바람을 피운 것은 반드시 후사를 낳겠다는 마음보다 아직 이십대의 젊은 혈기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본능이었을 것이다(게다가 왕에게는 얼마든지 ‘외도’의 권리가 있었다), 그가 건드린 여자는 후궁도 아니고 역관(譯官) 집안 출신의 미천한 궁중 나인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왕과 연애한 덕분에 그녀는 숙원(淑媛)을 거쳐 소의(昭儀)로 수직 상승한다. 이윽고 그녀는 1688년에 아들까지 낳아 숙종(肅宗)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면서 희빈(嬉嬪)의 지위에까지 오른다. 정비의 이름조차 실록에 전하지 않으니 그녀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후대에 장희빈(張嬉..
당쟁의 정점② 1680년 봄 허적은 집안의 경사를 맞았다. 그의 할아버지 허잠(許潛)의 시호가 내려진 것이다(허잠은 생몰년도가 전하지 않으나 당시 일흔인 허적의 나이로 보면 이미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늦게 시호를 받은 것은 아마도 허적이 힘을 쓴 탓이리라). 사대부(士大夫)라고 해서 누구나 그런 영광을 누리는 게 아니니 당연히 잔치가 없을 수 없는 일,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날따라 폭우가 쏟아졌다. 그러자 숙종(肅宗)은 늙은 영의정을 배려해서 유악(油幄, 기름 천막)을 그의 집으로 보내게 했는데, 문제는 거기서 터진다. 비가 오는 것을 보고 허적은 왕의 허락을 받기도 전에 유악을 가져다 사용한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궁중 비품을 가져다 쓴 허적의 방자함에 숙종은 분노했다. 그러나 이제 ..
당쟁의 정점 비록 용두사미였으나 그래도 북벌 준비로 바빴던 효종(孝宗)에 비해 현종(顯宗)은 그저 15년 동안 왕으로 무위도식하면서 지내다가 죽었다. 조선의 왕명록에 18대 왕으로 이름을 등재한 게 그의 가장 큰 업적이랄까? 그래도 그의 치세에 관해 사대부들은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치세 말기에 예송논쟁으로 남인이 집권했기에 『현종실록』은 남인의 관점을 반영했으나, 이후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으로 개찬되는 등 곡절이 있었으니 말이다. 선조(宣祖)에 이어 두번째로 실록이 수정된 경우다. 그러나 이 전통은 다음 왕들에게도 이어져 『숙종실록』 다음에는 『숙종보궐실록(肅宗補闕實錄)』이, 『경종실록』 다음에는 『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이 새로 편찬된다. 이 시기 당쟁이 얼마나 치..
세계화 시대의 중화란?③ 조선인들은 그 서양인들을 어떻게 보았을까? 당시 제주 목사 이원진(李元鎭)은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한 사건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배안에는 약재와 짐승 가죽 따위의 물건을 많이 싣고 있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천인가?’ 하니, 다들 ‘야야’ 하였고, 우리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라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제주 관헌이 일본어를 하는 자를 시켜서 서양인과 대화를 시도했다는..
세계화 시대의 중화란?② 유럽인들이 극동 3국 중 유독 조선에만 오지 않은 이유는 뭘까? 조선이 중화세계가 되었음을 알기라도 한 걸까? 물론 그럴 리는 없다. 그럼 조선의 영토가 작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다. 비록 한반도가 일본보다는 조금 작다 해도 일본과 중국에 자주 왔던 서양의 무역선들이 한반도의 존재 자체를 발견조차 못했을 리는 만무하다. 조선에 서양인이 온 사례가 있기는 하다. 한반도에 처음 온 서양인은 네덜란드 선원 벨테브레(Jan Jansz Weltevree, 朴延, 朴燕)이다. 그는 인조(仁祖)의 치세인 1628년에 왔지만, 원래부터 조선에 오려 한 게 아니라 일본으로 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상륙한 것이었다. 동료 두 명과 함께 관원에게 잡힌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박연(朴燕)이라는..
6장 조선판 중화세계 세계화 시대의 중화란?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이제 조선만이 지구상에 홀로 남은 문명 국가라는 허구적 위기감과 허황한 자부심을 키우며 안으로 웅크러들고 있을 무렵, 공교롭게도 지구상의 수많은 지역들은 오히려 속속들이 개방되고 있었다. 바야흐로 유럽 문명이 세계 각지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후대의 동양 역사가들은 이 과정을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극동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인류 문명사 전체로 보면 그 과정은 서로 독립적으로 발생하고 발전해 온 지구상의 모든 문명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거대한 ‘세계화’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그 세계화의 완성은 20세기에 이루어진다). 세계 진출에 나선 유럽인들의 전략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토착 문명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