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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이슬람이 지배한 힌두 평화와 안정에 지나치게 익숙해지면 변화에 무뎌진다. 인도는 결국 오랜 기간 평화(아울러 정체)를 누린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11세기부터 북인도에는 그전의 어느 이민족보다도 더 강하고 무자비한 이민족이 쳐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이슬람 세력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 자리 잡은 가즈니(Ghazni) 왕국의 마흐무드(Mahmud) 왕은 펀자브의 비옥한 영토를 노리고 북인도에 침입했다. 그는 재위 시절에 10여 차례나 인도를 침략해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으니, 인도의 입장에서 보면 두렵고도 끔찍한 원수였다. 오랜 평화에 나태해져 있던 인도군은 이슬람군의 빠른 기동력에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인도에는 원래부터 양질의 말이 태부족이었고 인도군은 전통적으로 코끼리를 ..
정체를 가져온 태평성대② 남인도 역시 여러 소국가가 분립된 형세를 기본으로 하지만, 그 중에서 촐라(Chola) 왕조는 주목할 만하다. 1세기경 조그만 부족으로 출발한 촐라는 굽타 제국이 북인도를 장악하고 있던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했으며,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 약 300년 동안에는 여러 속국을 거느리면서 일약 남인도의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특히 촐라의 걸출한 군주인 라젠드라 1세(Rajiendra I, ?~1044)는 11세기 초반 데칸의 패자였던 찰루키아(Calukya)를 정복하고 중부 인도까지 손에 넣었다. 이후에도 그는 북진을 계속해 갠지스강까지 진출했다. 인도 전체의 역사를 놓고 본다면 이때가 굽타제국의 사무드라굽타 이래 두 번째 맞는 남북 인도의 대통합 기회였으나 끝내 성사되지는 못했..
3. 이슬람과 힌두가 만났을 때 정체를 가져온 태평성대 굽타 제국이 붕괴한 이후 12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 동안 또 다시 인도의 고질병이 도졌다. 특별한 중심 세력이 형성되지 않고 소국들이 공존하는 분열의 시대다. 다행스런 것은 이 오랜 기간 동안 이민족의 침입이 거의 없었고 비교적 태평성대가 이어졌다는 점이다. 강적이었던 흉노는 인도 남하를 포기하고 터키와 유럽으로 가버렸다. 비록 소국가들 간의 충돌과 분쟁은 끊이지 않았으나 전체적으로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그러나 평화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진통이 없이는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듯이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는 태평성대보다는 적절한 자극이 필요하다. 더구나 당시 세계 무대는 땅 밑에서 용암이 막 분출되려는 듯한 기세였다. 유럽에서는 십자군 ..
가장 인도적인 제국② 가장 흥미로운 변화는 종교 분야에서 볼 수 있다. 아소카 시절 이후 불교는 인도의 지배적인 종교로 발달해왔다. 하지만 그런 불교가 인도에 널리 퍼지지 못한 이유는 바로 브라만교, 즉 힌두교 때문이었다(자이나교도 있으나 상인들을 중심으로 신도를 유지했을 뿐 교세가 불교와 힌두교에 필적하지는 못했다), 역대 제왕들은 대개 불교를 장려하고 포교에 힘썼으나 수천 년에 걸쳐 일반 백성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힌두교를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었다. 불교의 보급에 앞장선 바르다나의 하르샤 치세에는 북인도 동부의 파트나에 세워진 날란다(Nalanda) 사원이 불교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날란다는 불교 사원인 것만이 아니라 교육 시설과 기숙사 등을 갖춘 일종의 국립대학이었다. 특히 이 시기 날란..
가장 인도적인 제국 굽타와 바르다나 시절은 인도의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문화가 발달했다. 특히 이민족의 침탈이 잦은 시대였기 때문에 인도인들의 민족의식이 크게 성장하고 토착 문화가 꽃을 피웠다. 중앙집권이 미약하고 속국들이 거의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던 것은 이미 인도의 고유한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마우리아부터 굽타에 이르기까지 그 점은 거의 변한 게 없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후진을 면치 못했어도 학문은 전에 없이 크게 발달했다. 특히 인도의 수학과 천문학은 당시 세계 첨단의 수준이었다. 인도인들은 당시에 세계 최초로 0의 개념을 발견했으며, 십진법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오늘날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진 숫자 체계와 십진법은 사실 인도의 것을 아랍 세계에서 도입해 로마에 전한 것이었으니 근원을 찾..
중앙집권을 대신한 군주들② 그러나 느슨한 중앙집권 체제로 강적을 만나 장기전을 치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흉노의 남하를 간신히 막은 굽타 제국은 이후 쿠샨, 사산 등의 민족들에게 서부 변경을 계속 침탈당하면서 100년 동안이나 잦은 전쟁에 시달렸다. 그나마 전성기에는 유능한 군주들이 미약한 중앙집권을 보완해주었지만, 쿠마라 굽타 이후에는 그런 행운도 계속되지 못한다. 결국 굽타는 점차 추락하다가 5세기 중반 이후 급격히 쇠퇴했다. 굽타가 멸망한 뒤 또다시 100여 년 동안 인도는 분열과 정치적 혼란의 시대를 맞았다. 벌써 몇 번째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인지 모를 일이지만 또다시 통일은 이루어졌다. 난립하던 소국들을 통합하고 강력한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바르다나(Vardhana) 가문의 하..
2. 고대 인도의 르네상스 중앙집권을 대신한 군주들 쿠샨 왕조가 무너진 이후 약 1세기 동안 지속된 분열 상태를 해소한 사람은 찬드라굽타 1세였다(마우리아의 건국자인 찬드라굽타와 이름이 같기에 보통 1세라는 말을 붙여 구분한다). 그는 320년 소국가들을 통일하고 굽타 제국을 세웠다. 찬드라굽타는 마가다 지방의 지주출신이었다고 전하지만,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진 명문 귀족인 리치비 가문의 공주와 정략결혼하고 이후에도 그 혈연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 것을 보면 원래는 변변찮은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콤플렉스 때문인지 그는 쿠샨 왕조 때 생겨난 ‘마하라자 드히라자(maharia dhirajs, 왕 중의 왕)’, 즉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한 왕조의 건국자는 후대에 영원히 기억되지만, 따지고 보면..
인도판 춘추전국시대② 쿠샨 왕조는 2세기 중반 카니슈카(Kanishka)의 치세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카니슈카 왕은 동쪽으로 갠지스 강 유역까지 세력을 넓히고 남인도의 상당 부분까지 손에 넣어 거의 통일 왕조에 맞먹는 강역을 구축했다. 특히 그는 정복 사업뿐 아니라 불교의 진흥에도 열심이었으므로 제2의 아소카라고도 불린다. 그는 학문 활동을 적극 후원하는 한편 불교의 여러 종파를 통합하고 표준 이론을 세우기 위해 카슈미르에서 최초의 불교 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로 생겨난 대승불교의 교리는 훗날 중국과 한반도, 일본에까지 전해지게 된다【역사 교과서에는 아소카가 소승불교를 전파하고 카니슈카가 대승불교를 확산시켰다고 나오지만, 아소카의 시절에는 어차피 소승불교밖에 없었다. 실은 소승불교라는 명칭도 없었는데, ..
인도판 춘추전국시대 마우리아가 멸망한 뒤 4세기에 굽타 왕조가 들어설 때까지 인도는 500년간의 분열기를 겪게 되는데, 이 긴 기간 동안 수많은 나라가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분열된 상황에다 정치적 구심점조차 없었던 탓에 이 시기 인도에는 이민족의 침략도 잦았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게 바로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이다. 그가 잠시 펀자브를 장악한 것을 계기로 그리스인들의 일부는 아예 인도의 서북부에 눌러앉아 그 일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숭가 왕조와 그 뒤를 이은 칸바(kanva) 왕조는 전력을 다해 그리스계 민족의 남하를 저지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서북부 지역은 인도인의 손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다. 일찍이 아소카 왕 시절에 인도의 서북부에는 그리스계의 박트리아(대월지)와 파르티아(안식국)가 발..
법에 의한 정복② 비록 영토는 넓었지만 마우리아 제국 전역이 황제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우리아의 통치 방식은 옛 마가다 왕국의 영토만 황제의 직할지로 두고, 나머지 영토는 네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총독에게 통치를 맡기는 것이었다. 각 지방에는 정기적으로 순회 감사관을 파견해 관리했다. 전반적으로 중앙의 황제와 지방 총독들 간의 연락 시스템을 통해 국가 조직이 운영되는 식이었으므로 일종의 종주국 속국과 같은 봉건제라고 할 수 있다. 강력한 상비군과 재판권, 관리 임면권, 조세제도 등을 중앙에서 관리한 점에서는 분명히 제국이지만, 비슷한 시기 중국의 진 한 제국과 같은 중앙집권 체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중국의 통일 제국과 달리 문자나 화폐의 전국적인 통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지배자는 ..
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1. 짧은 통일과 긴 분열 법에 의한 정복 인도 최초의 통일 제국인 마우리아 왕조는 기원전 322년부터 기원전 187년까지 불과 150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지중해의 로마 제국과 중국의 한 제국이 400년 이상이나 수를 누린 것에 비하면 마우리아는 미니 제국인 셈이다(인도 역사에서는 무굴제국을 제외하면 나중에도 수명이 200년 이상 지속된 왕조가 거의 없었다). 그런 만큼 제국의 성격도 크게 다르다. 마우리아를 비롯해 인도의 역대 통일 왕조들은 중국이나 유럽의 제국에 비해 그다지 강력한 힘을 지니지 못했다. 남인도(인도 반도)까지 포함한 인도 아대륙 전체를 강역으로 하는 국가가 출현한 것도 근대에 와서의 일이다. 사실 인도 역사에서는 중국의 역대 왕조들처럼 강력..
새로운 남북조시대? 송 제국이 당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즈음 요에도 강적이 출현했다. 요가 한창 강성할 때 복속되었던 여진족이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여진은 몽골계의 거란과 달리 만주에서 반농반목(半農半牧) 생활을 하던 민족이었다(요는 발해를 멸망시킨 뒤 발해 유민들도 여진이라고 불렀고 그들의 근거지인 만주는 옛 고구려의 영토였으니, 여진은 우리 민족과 대단히 가깝다고 할 수 있다). 12세기 초반 요의 국세가 약해지는 틈을 타서 완안부(完顔部)의 족장 아골타(阿骨打)는 여진 부족들을 통합해 1115년에 금(金)을 세웠다. 100년이 넘도록 요에 세폐(歲幣)를 바치고 있던 송은 금의 등장을 반겼다. 어차피 제 힘으로 적을 물리칠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송은 계책을 통해 요의 손아귀를 벗어날 마음을..
개혁의 실패는 당쟁을 부른다② 왕안석(王安石)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신종이 죽자 갈등은 어느덧 부국강병과 거리가 먼 정쟁으로 발전했다. 이리하여 송 제국의 정치를 좀먹게 되는 당쟁(黨爭)이 등장했다. 사실 당쟁은 당 시대에도 크게 일어난 적이 있었을 뿐 아니라(그때는 환관들의 당쟁이었다) 그 생리 상 어느 시대든 있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송대에 당쟁이 특히 치열한 데는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과거제(科擧制)였다. 과거제는 전통적인 귀족 집단의 혈연 대신 ‘학연(學緣)’이라는 새로운 ‘연줄’을 만들어냈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임용된 자는 자신을 길러준 스승보다 뽑아준 과거 시험의 감독관을 존경했고, 함께 시험에 합격한 동기와 선후배 등과 부지런히 연고를 맺었다. 관료의 임용이나 승진에는 고관의 보증이..
개혁의 실패는 당쟁을 부른다 화려한 문화의 선진국인 송이 물리력이 약하다는 한 가지 원인 때문에 일찌감치 쇠미의 징후를 보인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직 건국한 지 100년밖에 안 되는 젊은 나라이므로 반전의 실마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되었다. 그래서 등장한 게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신법(新法)이다. 스무 살의 청년 황제 신종(神宗, 재위 1067~1085)의 적극 지원으로 발탁된 왕안석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공격적인 부국강병책을 전개했다. 조공이 야기한 재정난은 부국책으로 막고, 부족한 군사력은 강병책으로 키운다. 왕안석은 부국책의 목적을 농민 생활의 안정, 생산력의 증가, 국가 재정난 타개로 삼고, 이를 위해 ..
문민정부의 아킬레스건② 아직 신생국인 송의 입장에서 북방의 동향은 잠재적 위기 상황이었다. 그저 대외적으로 안정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던 태조는 요와 무역을 계속하면서 평화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아우로 제위를 물려받은 태종(太宗, 939~997)은 같은 정세를 다르게 판단했다. 애초에 의도가 달랐을 수도 있다. 그는 형의 뜻을 거슬러 조카의 제위를 찬탈하다시피 했고 황제가 된 뒤 조카를 사실상 살해했으므로 권력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 어쨌든 태종은 미수복지 연운 16주가 못내 아까웠다. 그래서 979년과 986년에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대군을 이끌고 요에 도전했으나 결과는 일패도지(一敗塗地)였다. 힘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송은 이후 국경을 폐쇄하고 통상을 단절하는 노선으로 바꾸었는데, ..
문민정부의 아킬레스건 송대에는 학문과 예술만 발달한 게 아니었다. 도시와 상업의 성장으로 서민들의 생활수준도 높아지고 서민 문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웠으며, 해외 무역도 활발해 광저우(廣州)와 항저우 등 항구 도시들이 크게 번영했다. 또한 조선업과 제철업, 군수 산업 등 국가 기간산업도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게다가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눈부신 성과가 있었다. 송대의 발명품은 거의 다 세계 최초의 것들이다. 동양 세계의 4대 발명품 가운데 종이는 후한대인 2세기에 발명되었으나 화약과 나침반, 활판인쇄술은 모두 송대에 발명되었다. 지폐를 사용한 것도 세계 최초다. 문민정부를 토대로 했고 학문과 예술, 산업과 과학기술까지 두루 발달했으니 송은 명실상부한 최고의 강국이 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실은 정반대였다...
꽃피운 문화의 시대③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송의 문치주의에 가장 어울리는 문화적 현상은 학문의 발달이다. 송대에는 특히 유학(儒學)이 크게 발달했다. 오늘날까지도 그 시대의 유학을 송학(宋學)이라는 별도의 용어로 부르면서 유학 사상의 핵심으로 간주한다. 앞서 말했듯이 유학은 원리부터 현실 참여적인 사상이다. 그런데 유학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고, 한대에 국가 공식 이데올로기로 채택되었으나, 당 시대까지도 사회에 완전히 침투하지는 못했다. 사실 충효의 예를 강조하고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수직적 상하 질서의 세계관을 기본으로 삼는 유학의 성격은 지배자라면 누구든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한 제국 이래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늘 유학을 정치와 사회의 지도 사상으로 도입..
꽃피운 문화의 시대② 문치주의를 실시한 덕분에 송은 화려하고 찬란한 문화의 제국이 되었다. 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예술은 그 이후까지 포함해 중국 역사상 송 시대에 가장 번성했다. 특히 회화는 송대부터 독립적인 예술 장르로 자리 잡았다. 당 시대까지 회화는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초상화를 그리거나 건축물을 장식하거나 종교적인 목적에서 제작되는 등 기능적이고 장식적인 역할이 위주였다. 그러나 송대에 와서는 회화 자체가 독자적인 예술 활동으로 인정되었다. 또한 직업적 화공이 아닌 사대부 출신 문인들의 문인화가 발달했으므로 주제나 기법도 매우 다양해졌다. 과거에 회화 과목까지 포함시킬 정도였다고 보면 시절이 한참 달라졌다. 는 것을 알기 어렵지 않다. 12세기 초반의 황제 휘종(徽宗)은 권력자이기 전에 뛰어..
꽃피운 문화의 시대 문벌 귀족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 사격이라도 하듯이, 송 태조는 당의 최고 행정기관인 3성 6부에서 귀족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던 문하성과 상서성을 중서성에 통합해버렸다. 이에 따라 문하성이 지니고 있던 황제 명령에 대한 거부권도 없어져 황제의 전제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렇게 보강된 중서성과 더불어 군사권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추밀원(樞密院)을 두어 중서성과 추밀원의 2부(二府)가 최고 정책 결정 기관이 되었다. 또한 지방 행정 기구로는 전국에 15개의 로(路)를 설치했는데, 절도사가 전횡하던 시대처럼 지방 권력이 권력자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로(路)를 관장하는 책임자는 따로 임명하지 않았다. 그 대신 로에도 중앙 관제를 도입해 각 로를 부서별로 나누고 행정을 전문화하는 방..
군사정권이 세운 문민정부② 송 태조 조광윤의 앞에 놓인 정치적 과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통일 제국이면 당연한 의무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비록 자신은 절도사로서 새 제국을 열었으나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어야만 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돌팔매질은 하나, 문치(文治)에 입각한 군주 독재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중앙집권은 태조 자신이 절도사들의 우두머리였으므로 가능했지만, 문치주의는 다른 때 같으면 실현 불가능한 과제였을 것이다. 문치주의를 위해서는 전문 관료 집단이 필요한데, 당시까지 수백 년 동안 전통의 귀족 가문이 득세하면서 관료 집단의 형성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 송을 건국한 시기의 주변 환경은 그 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우선 5호16..
4. 중원과 북방의 대결 군사정권이 세운 문민정부 거대 제국 당이 쓰러지면서 중국은 남북조시대가 끝난 이래 400년 만에 다시 분열기를 맞았다. 당이 멸망한 907년부터 960년까지의 분열기를 5대10국 시대라고 부르는데, 남북조시대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5호16국 시대와 이름도 비슷하고,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나라가 떴다 지는 양상도 닮은 데가 있다. 사실 이 시기는 남북조시대를 압축해놓은 것 같은 정치적 격변기였다. 제국의 심장을 쏜 주전충(朱全忠)은 후량(後梁)을 세워 5대의 첫 단추를 꿰었다. 5대는 후량(後梁) - 후당(後唐) - 후진(後晉) - 후한(後漢) - 후주(後周)로 이어지는 북방 이민족들의 다섯 개 중원 왕조이며, 10국은 전촉(前蜀)ㆍ후촉(後蜀)ㆍ형남(荊南)ㆍ초(楚)ㆍ오(吳)ㆍ남당(南..
쓰러지는 세계 제국 균전제(均田制)의 붕괴로 뿌리가 흔들리는 가운데 중앙에서는 환관, 지방에서는 절도사의 전횡이 나날이 심해지자 당 제국은 이제 존망의 기로에 놓였다. 사실상 당은 이 무렵(9세기 초반)에 무너졌어야 하는데, 그나마 양세법(兩稅法)과 환관들의 당쟁이 멸망을 지연시켰다고 할 수 있다. 당 제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후 중화 제국들의 원형이었다. 각종 법과 제도도 그렇지만 붕괴하는 과정도 그랬다. 개국 초기에는 너무도 완벽했던 제국이 쓰러지는 과정은 이후 중국 역대 왕조들에서 자주 보게 되는 전형적인 드라마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믿었던 양세법마저 약효를 잃자 정부에서는 어떻게든 재정을 늘리려는 일념에서 지극히 단기적인 처방을 내세웠다. 이를테면 소금의 전매를 강화하는 조치다. 소금 전매는 일..
정점에서 시작된 퇴조⑤ 이렇듯 사회경제가 무너지자 더 이상 율령 정치도 불가능해졌다. 당 제국을 있게 한 율령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정치 현실은 더욱 혼탁해졌다. 이미 여러 차례 보았듯이, 외척과 환관은 중국 역사에서 전통적인 정치 불안 요소였다. 측천무후와 위씨 황후의 몰락을 계기로 외척 세력은 잡았다 싶더니 이번에는 환관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원래 환관은 개국 초부터 황실의 대소사를 맡아 처리하던 집단이었는데, 현종 때부터는 직접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안사의 난에서 교훈을 얻은 후대의 황제들은 절도사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감군사(監軍使)를 보내 그들을 감독했는데, 환관들이 주로 그 업무를 맡았다. 이래저래 환관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당 말기인 9세기에 이르면 환관들의 세력은 황제도 ..
정점에서 시작된 퇴조④ 새로운 세금 제도가 좌초한 것과 더불어 병역제도를 개선하려는 노력도 실패로 돌아갔다. 부병제(府兵制)는 원래 병농일치(兵農一致)를 기본으로 하는 징병제다. 즉 변방의 농민들에게 다른 세를 면제해주는 대신 농한기에 군사 훈련을 시켜 유사시에 군사로 동원하는 제도다. 그러므로 농민들이 토지를 이탈해버리면 부병제는 유지할 수 없게 된다(부병제의 가혹한 부담으로 인해 도망치는 농민들도 많았으니 뭐가 원인이고 뭐가 결과인지 모를 일이다). 병역 의무제를 유지할 수 없다면 상비군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병역제도는 점차 징병제를 포기하고 모병제와 직업군인 제도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종의 용병이므로 자신을 고용한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게 마련이다. 당 초기에는 변방에 도호부를 설치했지..
정점에서 시작된 퇴조③ 우선 세금 제도에서는 조용조(租庸調)를 버리고 양세법(兩稅法)을 실시했다. 기본적인 골격은 토지를 부과 대상으로 삼는 것인데, 1년에 두 차례 징세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양세’라는 명칭이 붙었다. 그 취지는 두 가지다. 첫째, 조용조는 먹을 것[租]과 입을 것[調], 그리고 국가사업이 있을 때 노동력을 부리는 것을 뜻하므로 모두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세금이다. 그런데 사회가 발달하고 다변화됨에 따라 농민만이 아니라 상업,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백성도 많아졌다. 조용조를 고집하면 농사를 짓지 않는 이들에게서 세금을 거둘 방법이 없다. 이 문제를 해소하고자 한 게 양세법이다. 둘째, 토지가 거의 사유화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대토지 소유가 엄존하고 있는 마당에 애초에 농민들에게 분급한..
정점에서 시작된 퇴조② 언제나 그렇듯이 계기는 대토지 겸병이 성행하면서 농민들이 몰락하는 것이었다. 무릇 새 나라가 출범할 무렵에는 항상 토지가 남아돌게 마련이다. 이전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하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해 새로 농민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중기쯤 되면 새로 분급할 토지가 사라진다. 미개간지를 개간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데, 인구는 자꾸만 늘어나고 나라 살림은 갈수록 커진다. 먹고살기 힘들어진 농민들은 토지를 팔아넘기고, 그 토지를 부패한 지방 관리나 대토지 소유자 들이 사들이거나 빼앗아 겸병한다. 중기에 든 당 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지방 관리의 횡포와 상업 자본, 고리대 자본의 압박으로 농민들의 생활은 점점 빈궁해졌다. 게다가 관료 기구가 팽창하고 변방에서 전란이 끊임없..
정점에서 시작된 퇴조 태종이 ‘정관의 치’를 펼쳤다면, 현종의 치세는 ‘개원(開元, 현종의 연호)의 치’라고 부른다. 이 무렵 당은 정치도 안정되고, 경제ㆍ사회ㆍ문화ㆍ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어 전성기를 맞았다. 외척 정치를 직접 깨부수고 황제가 된 현종은 당연히 외척과 환관을 멀리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재위한 탓일까? 아니면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인륜을 저버리는 게 당 황실의 전통으로 굳어져버린 탓일까? 치세 40년 가까이 되자 현종은 며느리 양귀비에게 빠져 국사를 등한시하기 시작한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을 중용한 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반란을 부른다. 원래 양국충과 사이가 좋지 않던 절도사 안녹산(安祿山)은 양국충..
해프닝으로 끝난 복고주의② 여제가 이상하다면 아예 나라를 바꿔주마. 제위에 오른 무후는 대담하게도 신성황제(神聖皇帝)라고 자칭하면서 국호를 주(周)로 바꾸었다(여기서도 주나라는 중국 역대 왕조들의 이상향이자 영원한 고향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가리켜 무주혁명(武周革命)이라고도 부르는데, 제위를 잠시 찬탈한 것일 뿐 실제로 혁명적인 성격은 없었다. 측천무후의 지배는 15년간에 불과했다. 705년에는 아들 중종이 측천무후를 퇴위시키고 다시 황제로 복귀하면서 무후의 정치 실험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비해 그녀의 치세는 이후의 권력 구조에 상당히 의미심장한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 첫째는 측천무후로 인해 관롱(關隴) 집단이 몰락했다는 점이다. 관롱 집단이란 관중(關中)과 농서(隴西) 일대의 ..
해프닝으로 끝난 복고주의 아무리 관료제가 발달했다 하더라도 황제의 권력과 권위는 천자라는 별칭(別稱)처럼 하늘에 이르는 것이었다【르네상스를 거치며 종교적ㆍ정신적 굴레를 벗고서야 비로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 체제인 절대왕정이 탄생하는 서양 역사와 달리, 이미 고대부터 합리적인 관료제와 절대적인 황권이 공존한 중국의 역사는 서구 역사가들에게 커다란 수수께끼다】.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은 아버지가 이룩한 성과를 이어받아 과업을 마무리했을 뿐 개인적으로는 병약하고 무기력한 인물이었다. 신생국의 중앙 권력이 미흡하다면 아무래도 문제다. 이때 고종의 총애를 받아 권력자로 나선 인물은 놀랍게도 무조(武曌)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었다. 후궁의 신분으로 실권을 장악한 그 여성은 바로 역사에 중국 최초의 여제(女帝..
중화 세계의 중심으로 수ㆍ당 시대는 진 한 시대와 비슷한 출발을 보였으나 성격은 크게 달랐다. 사실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국가의 성립은 수ㆍ당에 이르러서였다고 할 수 있다. 진ㆍ한 제국은 다분히 봉건적 질서에 의존한 반면, 수ㆍ당 제국은 처음으로 율령(律令)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율령이란 말하자면 오늘날의 헌법에 해당하는데, 수 제국 때 처음 도입되었다가 당 제국 때는 통치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다. 당 고조 이연(李淵)은 수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다(이연은 수 양제와 이종사촌 간으로 반란 세력도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3성 6부와 어사대(감찰 및 사법), 구시(九侍, 제사 주관), 감(監, 황실의 교육 담당) 등 중앙 행정 기구도 기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핵심 관..
반복되는 역사④ 오랜만의 통일로 중국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된 수 양제에게는 골칫거리가 있었다. 바로 중국의 분열기에 힘을 쌓고, 강성해진 북방의 ‘오랑캐’였다. 중원의 북방에는 한 무제 이래 오랜 토벌과 동화 정책으로 흉노가 사라진 대신 돌궐(突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건국자 수 문제는 탁월한 이간책을 구사해 돌궐을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리시켜 세력을 약화시킨 바 있었다【흉노의 경우도 그랬듯이, 수 제국이 돌궐을 압박한 것은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대규모 민족이동을 낳았다. 서돌궐은 옛 흉노처럼 비단길을 거쳐 중앙아시아로 가서 그곳의 작은 나라들을 짓밟았다. 게다가 명칭도 돌궐에서 음차되어 튀르크(Türk: 오늘날 터키의 어원)로 바뀌었다. 계속해서 튀르크는 서아시아의 이슬람권과 융화되어 족장의..
반복되는 역사③ 과거의 진 제국을 연상시키는 또 한 가지 닮은꼴은 대운하의 건설이다. 진이 만리장성을 쌓았다면, 수는 대운하를 건설했다. 건국자인 문제의 뒤를 이은 수 양제(煬帝)는 옛날의 진시황(秦始皇)처럼 여러 가지 대형 토목 사업을 일으켰는데, 그 가운데 진의 만리장성에 해당하는 업적이 대운하였다. 중국 지도를 보면 서쪽에서 동쪽의 황해로 흘러드는 세 개의 큰 강이 있다. 북쪽에서부터 말하면 황허(黃海), 화이허(淮河), 양쯔 강(揚子江)의 세 강이다. 이 강들은 모두 큰 강이므로 상류에서 하류까지 선박을 이용한 운송이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남북 방향의 운송로가 없다는 점이다. 이 단점을 해소하려 한 것이 바로 대운하였다. 남조와 북조로 분립하던 시대가 끝나고 통일 제국이 들어섰으니, 수 양제로..
반복되는 역사② 관료제를 완성하려면 관리 임용 제도를 완비해야 한다. 종래의 임용 제도인 9품 중정제(九品中正制)는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원래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위나라가 도입한 9품 중정제는 그 핵심인 중정이 부패한 인물일 경우에는 오히려 해가 많은 제도였다. 아닌 게 아니라 남북조시대에 귀족 세력은 9품 중정제를 악용해 세력을 키우고 관직을 기의 독점한 터였다. 귀족의 그런 전횡을 막으면서 더 합리적으로 운용될 수 있는 관리 임용 제도는 없는 걸까? 고민 끝에 절묘한 답이 나왔다. 바로 과거제였다. 관리 후보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해서 고득점자를 관리로 선발하면 된다. 귀족의 자의적인 관리 임용을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험 점수는 객관적이므로 누구도 합..
3. 안방의 세계 제국 반복되는 역사 중국 역대 왕조는 망할 무렵에 이르면 거의 대부분 외적의 침입이나 농민의 반란과 같은 말기적 증상을 보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권력의 부패와 대토지 겸병 같은 사회적 모순이 수백 년씩 덧쌓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후한이 멸망한 때부터 6세기 말까지 수백 년간의 분열기에는 하나의 왕조가 오래 지배하지 못했으므로 그런 모순이 쌓일 겨를이 없었다. 그 덕분에 북조의 마지막 나라인 북주의 귀족 양견(楊堅, 541~604)이 새로운 통일 제국 수(隋)를 세우는 과정은 예상외로 순탄하게 진행된다. 그는 먼저 자기 딸을 태자비로 넣어 외척 권력을 손에 쥐고 나서 반대파를 제거한 뒤 제위를 양도받아 581년에 손쉽게 수 제국을 세웠다(5호16국이나 남북조시대의 여느 ..
문화의 르네상스② 이 시대의 문화 현상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사상의 발달이다. 한 제국의 지도 이념이었던 유가 사상은 고문학과 금문학의 대립을 통해 큰 발달을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유가의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허식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또한 유가 사상은 원리상으로 현실 정치와 깊은 연관을 지닐 수밖에 없는데, 이 점은 남북조시대의 분방한 개인주의적 사고방식과 마찰을 빚었다(개인주의의 측면에서 보면 6조시대의 문화는 이후까지 통틀어 가장 서양 문화와 가까웠을 것이다). 더욱이 후한 말기에 유학자들이 현실 정치의 참여를 위해 국가 권력에 도전했다 패배의 쓴잔을 맛본 경험은 지식인들의 좌절을 가져왔다. 유가에 대한 반발로 성행한 것은 도가, 즉 노장(老莊) 사상이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
문화의 르네상스 남조의 네 나라(송ㆍ제ㆍ양ㆍ진)는 평균 수명이 40여 년밖에 안 된다. 이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네 나라는 전부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군사력도 북조의 이민족 국가들보다 약했다. 그러나 중원의 호족과 지식인 들이 이민족 치하를 피해 대거 남하하면서 강남 지역의 귀족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처음으로 강남에 중원을 능가하는 화려한 문화가 꽃피우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의 오(吳)와 동진(東晋), 그리고 남조(南趙)의 네 나라를 합쳐 보통 6조(六朝)라고 부른다. 이 6조시대에 남중국에서 발달한 귀족 문화(6조 문화)는 동양의 르네상스로 불릴 만큼 다채롭고 화려했다(시대로보면 서양의 르네상스보다 1000년이나 앞서니까 오히려 르네상스를 ‘서양의 6조시대’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치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