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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 삶을 만나다 목차 강신주 책을 시작하며 / 프롤로그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 1장 사유를 발생시키는 조건들 우리는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사유를 강요하는 사건 죽음이라는 사건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방식 교환 가능한 것과 교환 불가능한 것 사건과 무의미 더 읽을 책들 2장 철학적 사유와 인문학적 경험 삼단논법의 숨겨진 비밀 이성의 의미와 한계 반시대적이어야만 하는 철학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과 인문학적 경험 더 읽을 책들 3장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 인당수에 내리던 비를 상상하며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알튀세르 거꾸로 된 변증법을 바로 세우려는 맑스 필연성의 사유를 공격한 어느 동양철학자 두 가지 사유의 이미지 더 읽을 책들 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1장 사랑 그리고 가족..
3. 예상치 못한 일탈을 만끽하길 여러분은 거미가 어떻게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옮겨 가는지 압니까? 우선 거미는 자신의 거미줄을 힘이 닿는 대로 허공 속에 뿜어냅니다. 간혹 바람이 전혀 불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의 거미줄은 허무하게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미가 실망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다시 한번 힘을 내어 허공 속으로 거미줄을 뿜어냅니다. 다행히도 이때 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럼 이제 그 바람을 타고 거미줄은 다른 나뭇가지에 금방 들러붙습니다. 그런데 거미는 몹시 신중한 동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발을 그렇게 걸린 거미줄에 조용히 갖다대고 미세한 진동을 감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불행히도 어떤 사람이 거미줄을 찢고서 걸어갑니다. 다시 거미줄은 땅바닥으로 ..
2. 시궁창 같은 물에서 피어난 연꽃의 향기만이 그윽하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읽어보았던 이 책은 제가 소개한 가훈과 같은 역할을 하려는 의도 하에 쓰여진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이 어느 정도는 여러분의 삶에 신선한 자극이 되었으리라고 믿습니다. 아니, 어쩌면 많은 분들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느낌, 심지어는 불쾌한 느낌까지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아마도 여러분이 편안하게 여기고 있던 삶을 제가 낯설게 만들었기 때문일 테지요. 그러나 여러분의 낯선 느낌은 사실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연유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여러분이 가족, 국가, 자본주의로 요약되는 삶의 환경에 길들여져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물에 사는 것에 편안해지면 물고기는 자신이 물에 산다는 사실을 낯설게 여길 ..
에필로그 1. 철학이 의미 있어지는 순간 “여러분의 집에는 혹시 가훈이 있습니까?” 강의 시간에 저는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어느 학생은 자기 집의 가훈이 “정직과 인내”라고 말하고, 이어서 다른 학생도 자기 집의 가훈을 소개해주더군요. “하면 된다!”라고요. 저는 속으로 웃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자에서는 칸트식의 금욕주의가 느껴졌고, 후자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가주의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정직과 인내’는 좋은 가훈이지만, 무엇인가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습니까? 가족 성원 하나하나보다 가족이란 조직 자체를 위한 규율 같으니까요. 그러나 가훈은 가족 성원 각자의 행복한 삶을 위한 조언이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 학생에게 도대체 누구에 대한 정직이고, 무엇을 위한 ..
더 읽을 책들 윤수종 엮음, 『다르게 사는 사람들』(서울: 이학사, 2002) 우리 사회의 타자들은 소외받는 소수자들입니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타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그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이란 일방적인 구분이 지니는 의미와 문제점, 그리고 그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엠마뉘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양명수 옮김, 서울: 다산글방, 2000) 윤리를 생각하려면 타자를 사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는 가장 철저하게 타자를 숙고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레비나스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입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종영, 『가학증·타..
타자ㆍ사랑, 그리고 선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줄 수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소중한 것들, 즉 타자, 사랑, 고독을 우리가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반면 뇌물은 우리를 채권과 채무의 관계로 몰아넣습니다. 따라서 뇌물에는 받은 것 이상으로는 돌려주지 않고, 또한 준 것 이상으로는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뇌물의 논리 속에서는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주어야 상대가 좋아하고 또 얼마만큼 주어야 그 뇌물의 효력이 발생하는지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뇌물의 관계에서는 블랙홀과 같은 타자의 존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타자란 나의 기대나 예측을 벗어나는 존재가 아닙니까? 나와 삶의 규칙을 달리하는 존재가 바로 타자이니..
뇌물의 논리와 선물의 논리 「섬」이란 시를 지은 노창선 시인은 나와 타자 사이의 심연을 발견했습니다. 이 심연은 검은 바다와 같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의 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도 섬으로 머무는 것에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섬이 된 것 역시 타자에 대한 그리움, 그리로 건너갈 수 없다는 안타까움 때문이지요. 타자를 만나서 섬이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타자에게로 비약하려는 우리의 욕망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검은 밤바다를 건너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비둘기 한 마리’라도 보내어 ‘가슴속 까만 가뭄’을 전하려고 하니까요. 시인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타자를 만나서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독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타자는 나의 미래! 타자는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친숙하고 편안한 세계에 낯섦과 불편함을 가지고 오는 무엇입니다. 타자가 규칙적이고 편안한 나의 삶을 불규칙적이고 불편한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이유는, 그 타자가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의 삶을 가장 낯설게 만드는 사건은 바로 타자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도대체 그가 어떤 삶의 규칙을 따르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니까요. 집에서 학교나 회사로 가는 도중에, 우리는 어떤 사람과 마주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정지된 것처럼 우리의 모든 관심이 그 한 사람에게 몰입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강렬한 첫 만남을 경험해본 적이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
타자란 무엇인가? 노나라 임금의 슬픈 이야기는 우리를 ‘타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이끌어줍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타자란 우선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진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타자를 사랑하게 될 수도 혹은 미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의 삶의 규칙이 나와 완전히 동일하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힘이란 바로 ‘차이’의 힘에서 나오기 때문이지요. 노나라 임금은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규칙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맛있는 술을 권하기, 궁정 음악을 연주해주기, 맛있는 고기를 먹이기 등 그가 행했던 애정 표현은, ..
3장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내가 원하는 것과 타자가 원하는 것 사랑을 해본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랑이 항상 어떤 고독을 동반한다는 것도 경험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고독하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 나선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사랑이 찾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고독에 빠지게 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분명 어떤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로 하여금 내가 하듯이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사랑의 고독을 안겨다줍니다. 사랑을 고백할 때 흔히 우리는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냥, 이렇게 멀리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아니 그 사람이 내가 아닌 ..
더 읽을 책들 김상봉, 『호모에티쿠스』 (서울: 한길사, 1999) 서양철학사를 윤리학적 시선에서 깔끔하고 분명하게 정리해놓은 책입니다. 그러나 칸트의 윤리학에 기초해서 서양의 윤리학적 전통을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나 니체의 즐거움의 윤리학을 다루는 데서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랄프 루드비히, 『정언명령』(이충진 옮김, 서울: 이학사, 1999) 칸트의 의무의 윤리학을 잘 정리해놓은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자유와 의무 사이의 기묘한 반전을 만끽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원전을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어서 마치 칸트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과 같은 생동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김주경 옮김, 서울: 동문선, 2000) 현대사회 속에서 우리..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는 방법② 여러분은 우울한 주체가 아닌 즐거운 주체, 그리고 자발적 복종이 아닌 행복한 자유를 얻고 싶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니체가 제안하는 참된 주체, 즉 즐거운 주체가 되는 방법을 엿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가 우리에게 권하는 방법은 칸트의 정언명령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겠지요. 충실한 니체주의자였던 들뢰즈의 설명을 통해 니체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법칙에 대한 증오와 운명애(amor fati), 공격성과 동의는 차라투스트라의 두 얼굴이다. 성서에 호의적이고 다시 성서를 적대시하는 차라투스트라, 그는 여전히 특정한 방식으로 칸트와 싸우고 있다. 도덕법칙 안에 있는 반복(répétition)의 시험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éternel retour)는 이렇게..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는 방법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고등학교 생활 자체를 수단으로 만드는 고등학생들이 있습니다. 또 취업이란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대학 생활 자체를 수단으로 만드는 대학생들이 있습니다. 또 월급을 받기 위해서 한 달의 삶을 수단으로 만들고 마는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물고기 한 마리를 얻기 위해 물 위로 솟구치는 놀이 공원의 돌고래처럼 살아간다면 과연 우리의 삶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었을 때, 우리의 삶은 불행, 우울, 슬픔으로 점철되기 마련입니다. 물로 목적이 달성되는 아주 짧은 순간에는 일말의 행복과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지속적인 즐거움과 행복의 상태에 있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방법은 바로 수단과 목적의 일치에..
불행한 주체와 행복한 주체 칸트는 보편적 입법자의 소리를 자율적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프로이트라면 이것은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 즉 초자아의 명령에 불과하다고 말하겠지요. 만약 프로이트나 니체의 지적이 옳다면, 장씨 부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칸트의 주체도 진정으로 자유로운 주체라고 말하기엔 거리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칸트의 도덕법칙, 즉 양심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하나의 숭고한 ‘목적’으로 드러나자마자, 우리의 구체적인 삶은 그 목적에 종사해야만 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된다는 점입니다. 며칠 밤을 새우고 일을 하느라 몹시 피곤할 때가 있다고 합시다. 이때 우리는 집에 들어와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이 더럽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피곤한 몸을 누이고 즉시 휴식을 취해야만 합니다..
니체가 칸트를 공격했던 이유 칸트에 따르면 일체의 외적인 간섭 없이 도덕법칙을 구성하고 그것에 복종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체, 즉 주인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도덕 주체야말로 자유로운 주체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도덕법칙을 스스로 따르는 것은, 분명 타인이 만든 도덕법칙을 타율적으로 따르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만든 도덕법칙이 초자아로부터 기원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질 겁니다. ‘자율을 가장한 타율’ 혹은 ‘자발적 복종’이란 기이한 논리가 출현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장씨 부인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초자아의 명령은 나의 내면에서 일체의 외적인 간섭 없이 작동합니다. 따라서 초자아의 명령을 듣는 것은 나의 자율적인 명령을 듣는 것처럼 보입..
이문열의 칸트적 ‘선택’② 장씨 부인의 선택을 이문열은 마치 그녀의 주체적인 선택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단이라는 겁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그 누구도 그녀에게 문장 배우기를 포기하고 가사를 배우라고 명령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볼 때 장씨 부인의 두 번째 선택이 자율적 선택이라는 이문열의 착각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율의 윤리학을 표방했던 칸트【칸트는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도 철학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상가이다. 그는 경험을 강조했던 경험론적 전통과 이성을 강조했던 합리론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
이문열의 칸트적 ‘선택’ 여성이 주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여성이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말이 쉽지,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 것일까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이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자유에 대해 치명적인 문제 제기를 했던 적이 있지요.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유아기 때의 역사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생존과 쾌락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모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하는 요령을 배웁니다. 만약 부모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결과적으로 자신이 무척 불편해질 테니까요. 가령 어린아이가 김치 먹는 법을 배운다고 해봅시다. 밍밍한 모유나 분유만 먹던 아이에게 마늘과 고추로 버무려진 김치는 얼마나 불쾌하고 자극적인..
노예의 길에서 주인의 길로② 생식에 관한 이와 같은 유학자들의 식물학적 상상력은, 후손들의 성씨가 당연히 남성의 것을 따라야만 한다는 쪽으로 진행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학자들의 이런 식물학적 상상력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생물이 어떻게 새로운 개체를 낳는 지 배우고 있습니다.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우리 인간의 염색체 수는 46개입니다. 남성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는 각각 이 숫자의 절반인 23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면서 하나의 완전한 수정체가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새로 태어난 수정체는 23+23, 즉 46개의 염색체를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이 수정체가 자궁 속에서 자라서 마침내 새로운 개체로 이 세..
2장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노예의 길에서 주인의 길로 ‘주체’는 기본적으로 주인과 자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 점에서 주체와 가장 거리가 먼 개념은 아마도 노예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여기서 주체에 대한 이야기를 여성의 사례를 통해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국가가 생긴 이래 가장 지속적이었던 사회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남녀 차별, 특히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지배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남성 우월주의를 흔히 가부장제라고 부릅니다. 다행히도 가부장제가 하나의 낡은 관습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성이 노예에서 주인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살게 된 것이지요. 이 점에서 여성을 통해서 우리는 ‘주체’가 가진 함의를 가장 분명하게 엿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전통..
더 읽을 책들 니니안 스마트, 『종교와 세계관』 (김윤성 옮김, 서울: 이학사, 2000) 저자는 자신의 관심사가 ‘세상을 움직이는 믿음과 감정의 힘을 지닌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기독교, 유대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세계의 주요 종교를 흥미진진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불교를 포함한 여러 다양한 종교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함의는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브루스 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맹정현 옮김, 서울: 민음사, 2002) 동양에서는 불교가 마음의 고통을 다루었다면, 서양에서는 정신분석학이 그 임무를 자임했습니다. 이 책은 풍부한 임상적 사례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이 구체적으로 어떤 학문인지를 매우 ..
집착 없이 살아가기② 그렇다면 이 화두의 답은 무엇일까요? 답을 안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몽둥이로 맞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화두가 던져지자마자 정확한 답을 이야기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깨달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화두의 대답은 하나가 아닙니다. 그중 몇 가지만 제시해볼까요? “바람이 시원합니다.” “새가 울고 있네요.” “하늘이 푸릅니다.” “개울 소리가 맑습니다.” 화두는 사실 아주 교묘하게 짜여 있었던 셈입니다. 몽둥이를 등장시킴으로써 여러분으로 하여금 몽둥이에 집착하도록 만들어버렸으니까요. 만일 몽둥이에 집착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몽둥이는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있다’고 해도 맞고..
집착 없이 살아가기 이제 약속한 시간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앞에서 여러분에게 화두 하나를 내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요? 그때 저는 여러분께 약속했습니다. 이 화두만 풀 수 있다면 여러분은 깨달은 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미 화두를 푼 분도 있겠지만,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이란 책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지요. 이 이야기는 깨달음, 즉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스님 같지도 않던 스님 한 분이 단하(丹霞)라는 스님으로 인해 깨닫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 날이 저물자 단하 스님은 하룻밤을 묵기 위해 혜림사라는 절에 찾아갔다. 그러나 이 절을 홀로 지키고 있던 스님은 단..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 ‘모든 것은 나의 마음이나 의식이다’라고 말하면서 스님이 의도했던 것은 사실 ‘없음이란 단지 우리 마음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베르그손의 생각과 공명하는 것입니다. 물이 시원하다는 느낌도 단지 내 마음으로부터 유래한 것이고, 썩은 물이라서 토할 것 같다는 느낌도 단지 내 마음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이죠. 이런 두 가지 느낌은 단지 내 마음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너무 목이 마를 때 우리는 이전에 마셨던 시원한 물을 마음에 담아둡니다. 즉 물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무덤 속의 물을 찾아서 마셨을 때 원효 스님은 시원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효 스님이 토할 것 같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님은 어젯밤 시원하게 마신 물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원효 스님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만약 우리가 약속한 친구가 오지 않는 것에 대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건 우리의 마음이 오지 않은 친구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에 와 있어야만 하는 친구가 지금 내 생각 바깥에서는 없다는 것이죠. 결국 마음의 고통은 내 마음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 내 마음 바깥에 없을 때, 전자에 집요하게 집착하는 경우 발생하는 것입니다. 친구가 오지 않는다고 여러분은 카페에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냅니까? 차라리 그 친구를 만나러 왔다는 생각을 지우는 것이 어떻습니까? 물론 친구를 만나러 왔다는 생각 자체를 완전히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런 생각 자체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죠. 만약 마음으로부터 그런 생각을 지울 수만 있다면, 여러분에..
집착의 메커니즘 어떤 젊은 엄마가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녀는 옆에 잠들어 있는 아이를 바라봅니다. 갓 돌이 지난 귀여운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천사입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설마 하며 아이의 몸을 만져 보니, 목숨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그녀의 천사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 그리고 아이를 화장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시장에 갔다가 돌아와 문을 열고 장난스런 목소리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우리 왕자님, 많이 기다렸지. 엄마 왔네.” 그러나 거실 한쪽의 조그만 상 위에 있는 아이의 영정과 국화..
마음의 고통과 불교의 가르침② 그래서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싯다르타와 그를 따라 깨달았던 많은 사람처럼 깨달음을 배우겠다는 의지를 지니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그 깨달음을 얻는다면 우리도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에서 내려올 때 스님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합장하곤 합니다. “성불(成佛)하십시오!” 여기서 ‘성불’이란 말은 ‘부처[佛]가 된다[成]’는 뜻입니다. 이제 싯다르타가 깨달은 내용이 조금 궁금하지 않습니까? 싯다르타가 깨달은 내용은 『법구경(法句經, Dhammpada)』이라는 경전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습니다. 거룩한 부처님과, 그가 이야기한 가르침과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에게 귀의하면, 네 가지 진리를 자세히 명상하여 반드시 바른 지혜를..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1장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 마음의 고통과 불교의 가르침 여러분은 마음이 쓰리도록 아플 때 어떻게 하나요? 넘어져 다리에 상처가 나거나 혹은 음식을 잘못 먹어서 배가 아플 경우, 우리는 가까운 병원이나 약국을 찾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플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야 하나요? 그러나 정신과 의사는 약간의 상담을 거친 후 우리에게 신경을 안정시켜주는 약을 처방해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약을 먹으면 마음의 고통이 조금 완화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약 기운은 곧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또다시 약을 먹어야 할까요? 약을 먹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더라도 분명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을 복용해야 할 겁니다...
더 읽을 책들 칼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김호균 옮김, 서울: 청사, 1998) 자본주의의 모든 비밀은 기본적으로 상품과 화폐 사이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양자는 등가인 것처럼 교환되지만, 화폐가 상품보다 우월한 지위를 점유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책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김경원 옮김, 서울: 이산, 1999) 화폐와 상품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맑스의 통찰을 인문학 전반으로 확장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맑스의 사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철학, 종교학, 언어학에 대한 이해도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제국』(윤수종 옮김, 서울: 이학사, 2001)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출현하는 새로운 제국을 분..
우리와 세계화②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상품으로 그리고 화폐를 신으로 만드는 체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돈을 벌기 위해서 고단하게 보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언제 올지 모를 먼 훗날의 행복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이제 세계화라는 거역하지 못할 현실 속에서, 우리 대부분은 돈을 벌기 위해서 더 힘든 일에 종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행복은 우리로부터 더 멀어지겠지요. 그러나 사실 자본주의 속에는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단지 소비의 행복, 소비의 자유만이 존재했을 뿐이니까요. 우리는 자신만의 삶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못합니다. 아니 그런 방법마저도 완전히 잊었다고 말해야 옳을 겁니다. 오직 잘 팔리는 상품으로 자신을..
우리와 세계화 우리의 현실은 단순한 산업 자본주의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산업자본이 국가를 탈출해서 세계로 탈주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지요. 몇몇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그저 현실로서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젊은 엄마들도 이제는 아이가 우리나라 말을 배우기도 전에 세계어인 영어를 아이의 머릿속에 각인시켜주려고 노력합니다. 바로 조기 영어 교육, 조기 영어 캠프, 영어 마을 등이 극성을 부리는 것이지요. 심한 경우 어떤 지식인은 당당하게 아예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몇몇 대학에서도 이제는 수업의 반 이상을 영어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세계화에 발맞추어 인재를 양성하자는 것이..
세계화의 논리는 새로운 것인가?② 그렇다면 자신의 잉여가치를 부단히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산업자본은 폐쇄된 민족국가라는 모델 안에서 안주해서는 안 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산업자본의 세계적 팽창 현상이 어떤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는지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선 세계사적으로 살펴보면 두 차례에 걸쳐 발발한 세계대전도 바로 이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산업 자본주의 국가들이 기존의 다른 산업자본주의 국가들이 지닌 ‘식민지-시장’을 놓고 한판 대결을 벌인 것이니까요. 이것은 거대하고 탐욕스러운 코끼리들 사이에서 벌어진 목숨을 건 투쟁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최종 승자가 바로 미국과 미국에 속하는 산업자본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미국에 거점을 둔 다국적 산업자본들..
세계화의 논리는 새로운 것인가? 상인자본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산업자본은 가치의 증식, 즉 잉여가치를 부단히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따라서 산업자본의 메커니즘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역으로 어떻게 하면 산업자본의 잉여가치가 줄어들 수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차피 잉여가치는 M-C와 C-M′의 두 가지 과정 사이의 차이로부터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잉여가치를 떨어지게 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인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M-C의 과정에서 산업자본가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화폐를 더 많이 지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원료의 가격이 상승하거나, 공장 유지비가 올라가거나, 혹은 인건비가 올라가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상인자본의 논리와 산업자본의 논리② 그러나 여러분은 이렇게 얻어진 5000원에 만족할 수 있나요? 만약 여러분이 현명한 자본가라면, 여러분의 수중에 모인 5000원으로 다시 공동체 B에서 인삼을 구입할 것입니다. 물론 이 인삼을 공동체 A에 팔기 위해서지요. 결국 공동체 A에서 출발해서 공동체 B를 거쳐서 다시 공동체 A로 돌아올 때, 여러분의 자본은 1000원에서 자그마치 2만 5000원으로 증식되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공동체 A에서 1000원으로 소금을 산 것, 즉 M-C는 등가교환인 것처럼 보이고, 또한 공동체 B에서 소금을 5000원에 판 것, 즉 C-M′도 등가교환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에게는 이윤이 발생했습니다. 이 이윤은 어디서 발생한 것일까요..
상인자본의 논리와 산업자본의 논리 보통 자본주의는 산업혁명 이후 새롭게 도래한 경제구조라고 이해됩니다. 그래서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를 전자본주의 시대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전자본주의(pre-capitalism) 시대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서 산업자본주의(industrial capitalism) 이전의 시대를 가리키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전자본주의 시대에도 이미 자본주의 자체는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것은 산업자본주의가 아니라 상인자본주의(merchant capitalism)의 형태였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자본주의의 뿌리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얕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요컨대 전자본주의 시대가 상인자본주..
자본의 충동과 자본주의의 일반 공식② 결국 자신이 가진 우월한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화폐를 가진 사람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암초를 오디세우스처럼 지혜롭게 잘 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 암초는 화폐를 유통 과정에서 빼내어 금고에 담아두려고 하는 ‘얼빠진’ 생각이겠지요. 반면 두 번째 암초는 유통 과정에서 볼 수도 있는 손해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 암초를 현명하게 잘 피했다면, 여러분은 ‘영리한 자본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영리한 자본가’가 되는 공식, 즉 맑스가 ‘자본주의의 일반 공식’이라고 부른 유명한 공식이 출현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100원에 구매된 면화가 100+10원, 즉 110원에 다시 판매된다고 해보자. 따라서 이 과정의 완전한 형태는 M-C-M′..
자본의 충동과 자본주의의 일반 공식 화폐를 가진 자는 그 화폐의 가치만큼 교환 가능한 모든 상품을 잠재적으로 소유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하나의 특수한 상품을 소유한 자는 이제 다른 상품을 소유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제한받게 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보다 화폐를 가졌을 때 더 우월한 위치를 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앞서 200만 원의 현금과 노트북 중 전자를 선택했던 것은 탁월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화폐를 편집증적으로 소유하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굶어 죽어도 화폐를 쓰지 않고 오로지 화폐를 소유하려고만 하는 구두쇠, 즉 맑스가 이야기한 ‘화폐퇴..
화폐와 우리② 『자본론』이란 유명한 책에서 맑스가 깊이 숙고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발견했던 것은 화폐가 가진 이런 무자비하기까지 한 힘이었던 것입니다. 화폐는 무엇이 자신으로 바뀌었는지를 노출하지 않기 때문에, 상품이든 상품이 아니든 간에 모든 것이 다 화폐로 전환 가능하게 된다. 이제 모든 것이 매매의 대상이 된다. 유통은 모든 것이 그곳에 뛰어 들어갔다가 화폐라는 결정으로 변화되어 다시 나오는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용광로가 된다. 이 연금술에는 성자의 뼈조차도 대항할 수 없는데, 하물며 그보다 연약한, 인간의 상거래에서 제외되고 있는 성스러운 물건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화폐에서는 상품의 온갖 질적 차이가 없어져버리듯이 화폐 자체도 철저한 평등주의자로서 일체의 차이를 제거해버린다. 그런데 ..
3장 살아 있는 형이상학으로서의 자본주의 화폐와 우리 여기 왼쪽에 200만 원의 현금이 있고, 오른쪽에 200만 원 상당의 노트북이 있다고 해봅시다. 자! 여러분은 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어느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이런 경우라면 아마 우리 대부분은 별로 주저하지 않고 현금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럼, 왜 우리는 현금을 선택할까요? 이런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셈입니다. 왜 우리는 상품이 아닌 화폐를 선택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상품이 가지는 가능성은 유한한 것인 데 반해, 화폐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방금 상품이 유한한 가능성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특정 상품이 그것이 충족시켜주는 목적에만 국한된 사용가..
더 읽을 책들 전인권, 『박정희 평전』 (서울: 이학사, 2006)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재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핵심적 이념은 국가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박정희 독재 정권에 의해 훈육되었으며, 국가주의가 개인을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신주,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서울: 태학사, 2004) 노자는 단순히 자연을 노래한 철학자라는 통념을 깨고 있는 책입니다. 노자의 사유는 기본적으로 통치자를 대상으로 전개된 것이며 아울러 그의 정치철학은 거대한 통일 제국을 위한 형이상학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소유란 무엇인가』 (이용재 옮김, 서울: 아카넷, 2003) 프루동은 부르주..
국가가 아닌 사회를 꿈꾸며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라는 역동적 교환관계로 유지되는 기구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핵심은 재분배라기보다 압도적 폭력을 바탕으로 하는 수탈이라고 말해야겠지요. 문제는 이렇게 수탈되고 있는 대다수 국민이 스스로 국가 없는 사회를 꿈꾸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환자인 셈이지요. 국가의 폭력을 두려워하다가 어느 사이엔가 국가의 폭력이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맑스는 『자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깊이 통탄했던 것이지요. 어떤 인간이 왕이라는 것은 다만 다른 인간들이 신하로서 그를 상대해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왕이기 때문에 이제 자기들이 신하가 아니면 안..
세계화와 국가② 흔히들 지금은 세계화(globalization)의 시대, 신자유주의(Neo liberalism)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세계화를 지지하는 세력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취지를, 자본의 세계적 흐름을 방해하는 국가의 간섭을 줄이는 것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세계화의 시대에는 국가의 역할과 기능이 축소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인간이 더욱 자유롭게 된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윌리엄 탭(William K. Tabb, 1942~)【윌리엄 탭은 퀸스칼리지의 경제학과 교수이자 뉴욕시립대학 대학원 정치학과 교수인데, 자본주의의 세계화 경향에 대한 심도 높은 연구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제3세계 국가에서 세계화가 어떤 효과를 낳는지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에 많은 ..
세계화와 국가 국가는 기본적으로 약탈의 역사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약탈만으로는 효과적으로 이윤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곧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국가는 피약탈자 위에 군림하면서 영속적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이제 피약탈자는 국민으로 변하게 된 것이지요. 지속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국가는 국민에게 여러 시혜적인 정책들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모든 국민에게 똑같이 그렇게 해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효율적으로 수탈할 수 있는 계층에게만 국가의 시혜가 집중됩니다. 다시 말해 세금을 가장 많이 걷을 수 있는 계층에 대해 국가의 정책적 시혜가 이루어진다는 말이지요. 결국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누가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는 세금..
덕의 논리와 자발적 복종② 동양에서는 덕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로 흔히 누구를 떠올릴까요? 이를테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라는 대하 역사소설의 주인공 유비(劉備, 161~223)【유비는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을 통해서 이미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린 군주이다.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덕이 있는 인물로 평가되며 아직도 외적인 통치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이자 상징으로 남아 있다. 역사적으로 유비는 삼국 시대를 연 주역 중의 한 명이다. 그는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마침내 삼고초려를 통해서 제갈량이라는 뛰어난 재상을 얻음으로써 촉나라를 창건하여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를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타인의 마음을 얻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삼국지연의』의 한 장면을 보도..
덕의 논리와 자발적 복종 여러분은 이제 국가가 국민을 위해 온갖 정책을 펼치는 이유를 알았을 겁니다. 국가는 국민에게 마치 선물인 것처럼 온갖 정책을 시행한다고 자랑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위해 존재할 뿐이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국가와 국민 간의 관계는 마치 축산업자와 소 사이의 관계와도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를 기르고 있는 한 축산업자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정성을 다해서 소들에게 음식을 공급하고, 그들의 잠자리를 청결하게 유지합니다. 가끔 그는 소들의 정서 안정을 위해서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음악도 자장가처럼 들려줄 수 있습니다. 그의 소 사랑은 너무나 지극해서, 어떤 소가 병이라도 나면 ..
수탈과 재분배의 논리 사실 국가주의는 박정희만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국가가 생긴 이래 국가가 국민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강요해온 것은 너무나 오래되고 익숙한 일입니다.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선전하지 않은 문명은 없었으니까요. 이 점에서 국가주의는 인류의 문명 만큼이나 오래된 사유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위대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도 인간을 편들기보다는 국가를 편들었던 사람이니까요. 그럼 이제 그의 말을 직접 경청해보도록 하지요. 국가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며, 개인에 선행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명제의 증거는, 국가는 전체이며 개인은 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개인은 ..
2장 국가라는 가장 오래된 신화 국가를 문제 삼기가 어려운 이유 여러분은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란 말을 들어 보았나요? 이것은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어떤 은행에서 일어났던 인질·강도 사건에서 생긴 용어입니다. 당시 강도들에게 잡힌 인질들이 오히려 강도들에게 협조하고, 반대로 자신들을 구하려는 경찰들에게 극도의 적대감을 보였었지요. 경찰에 포위된 인질범들이 인질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줌으로써 이와 같은 병적인 심리 상태가 더욱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강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자기 나름대로 그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인질로 잡힌다는 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심각한 스트레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
더 읽을 책들 이숙인,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서울: 여이연, 2001) 서양 문명이 들어오기 이전 동아시아 사람들이 어떻게 여성과 가족을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아직도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전통적인 여성관과 가족관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여성과 가족에 대해 새로운 전망을 꿈꿀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장 자크 루소, 『에밀』 (김중현 옮김, 서울: 한길사, 2003) 가족과 사랑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고전입니다. 책 중간 중간에서 번뜩이는 루소의 날카로운 통찰력 을 엿보는 것은 우리에게 독서의 커다란 즐거움을 안겨줄 것입니다. 알랭 바디우, 『윤리학』 (이종영 옮김, 서울: 동문선, 2001) 기존..
방법론적 고독의 필요성 헤겔은 사랑이 ‘하나’를 지향하기 때문에 ‘가족’으로 완성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카프카는 ‘가족’ 속에서 ‘사랑’이란 결국 유기체로서의 가족 자신의 생존 논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점에서 카프카는 바디우에 앞서 이미 ‘하나’라는 통일의 원리를 문제 삼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디우에 이르러 헤겔의 ‘하나’라는 이념은 가장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바디우는 사랑이 가능하도록 하는 조건으로서 ‘둘’이란 공리를 제안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이 옳다면 우리는 사랑의 주체로 머물기 위해서 ‘둘’이란 공리를 끈덕지게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사건에 충실해야 한다’는 바디우의 말은, 결국 우리에게 ‘둘’을 지키겠다는 의지와 결단을 촉구하는 말..
사랑을 ‘둘’로 생각하는 바디우 카프카의 통찰은 헤겔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카프카에게 가족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며, 오히려 가족이란 유기체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랑을 생산해낸다는 것입니다. 그의 통찰이 옳다면 ‘남녀의 사랑이 객관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가족’이라는 헤겔의 생각은 전도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카프카의 말대로 가족이 사랑을 만드는 걸까요? 아니면 헤겔의 말대로 사랑이 가족을 만드는 걸까요? 사랑-가족-사랑-가족으로 이어지는 무한한 연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일까요? 카프카의 통찰이 옳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가족이 생산하는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랑을 숙고해볼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 실마리로 우리는 왜 헤겔이 그렇게도 사랑에..
‘하나’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던 카프카 헤겔의 논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가족은 기본적으로 사랑의 객관성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형식일 것입니다. ‘하나’를 추구하는 헤겔의 사랑은 ‘남자-여자-자식’으로 구성되는 ‘가족’을 통해 객관적인 ‘하나’로서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헤겔의 이런 생각이 사랑과 가족에 관한 우리의 일상적인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남녀 사이의 황홀경적인 일체감,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2세 그리고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가족이란 통일체, 이런 일상적인 이해에 따르면 사랑은 가족으로 완성되어야만 하고, 가족은 사랑으로 충만한 ‘하나’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낭만주의적인 가족 이미지 밑에 일종의 억압과 배제의 논리가 숨어 있다는 것..
‘하나’를 지향했던 헤겔 사랑과 가족에 대한 일상적 이해 방식은 사랑의 완성을 가족을 구성하는 데서 찾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사랑을 결혼이란 형식을 통해서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만약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결혼에 실패하게 된다면, 우리는 두 사람의 사랑이 일종의 미완성, 혹은 비극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사랑과 가족에 대한 이런 일상적 이해를 낯설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헤겔【헤겔은 영원한 진리를 추구했던 철학에 역사성, 혹은 시간성을 도입했던 철학자이다. 그는 개인이나 사회도 절대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 즉 변증법적 과정의 결과물이라고 이해했다. 어른이 어린아이의 부정을 전제하는 것처럼 변증법은 부정의 논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변증법은 단순한 방법이..
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1장 사랑 그리고 가족 이데올로기 생각하기 힘든 사랑 그리고 가족이라는 테마 종교, 국가, 심지어 주체마저도 철학이 휘두르는 비판의 칼날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철학의 힘이 있습니다. 철학은 자명하다고 전제되어온 모든 친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일종의 고별 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철학의 날카로운 칼날을 가소롭다는 듯이 피하고 있는 영역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란 테마입니다. 물론 철학이 사랑 자체를 사유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까지 철학이 사랑을 우리로부터 충분히 낯설게 만들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아니 낯설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철학은 사랑이란 테마를 더욱 자명한 것으로, 마치 건드려서..
더 읽을 책들 루이 알튀세르, 『철학에 대하여』(서관모 · 백승욱 옮김, 서울: 동문선, 1997) 저자는 우발성의 유물론에 대한 도전적인 논문을 쓴 다음 이 논문에 대해 나바로(F, Navarro)라는 멕시코 철학자와 진지한 토론을 하는데, 이 책은 이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의 우발성의 유물론이 어떤 철학적 의의를 가지는지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동욱, 『차이와 타자』(서울: 문학과지성사, 2000) 현대철학의 쟁점이 차이와 타자라는 두 범주에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들뢰즈의 철학이 현대 프랑스 철학의 흐름에서 어떤 고유성을 지니는지를 해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들뢰즈가 강조했던 철학의 두 가지 이미지에 대한 매우 친절하고 문학적인 설명이 돋보입니다. 다니엘 벤사이드..
두 가지 사유의 이미지② 마지막으로 들뢰즈의 이야기를 읽어보는 것도 이 문제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알튀세르와 마찬가지로 그도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을 발견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리좀’은 출발하지도, 끝에 이르지도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는 ‘사이’ 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친자 관계(filiation)를 이루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alliance)를 이루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 존재한다(être)’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와(et) ……와(et)……’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이 존재한다’라는 동사에 충격을 주고 뿌리를 뽑을 수 있는 힘이 충분하게 들어 있다. 『천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두 가지 사유의 이미지 사실 동양철학에서 필연성의 철학과 우발성의 철학이 갈라서는 가장 극적인 장면은 동중서와 왕충의 대립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노자(老子, 생몰연대 미상)【노자는 고대 중국의 가장 심오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세계의 근본에는 ‘도’라는 실체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 도를 인식하면, 인간이 세계 속에서 갈등과 대립 없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도의 인식이 모든 인간에게 제안된 것이 아니라,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군주에게만 한정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사상은 81편의 철학시로 쓰인 『도덕경』에 압축적인 형식으로 실려 있다】와 장자(莊子, BC 369?~286?)【장자는 인간의 삶이 타자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통찰했던 ..
필연성의 사유를 공격한 어느 동양철학자②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동중서가 필연성의 철학을 주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왕충(王充, 27~100)【왕충은 중국 후한 시대에 활동했던 탁월한 자연주의 철학자였다. 그는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이나 귀신설 같은 일체의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사유를 공격했다. 그가 모든 종교적인 사유를 공격할 때 취한 이론적 무기가 바로 우발성이란 관념이었다. 우발성이란 관념의 파괴력을 은폐하기 위해 주류 중국철학 전통은 아직도 그를 숙명론자라고 비난하면서 폄하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의 사상은 『논형』이란 저서에 잘 드러나 있다】이라는 자연주의자가 또다시 중국에 태어납니다. 헤겔이 등장하자 맑스가 등장했던 것과 매우 유사하게 말이죠. 어떤 사람의 품성은 어질 수도 있고 어리석을 수도 있다. 그..
필연성의 사유를 공격한 어느 동양철학자 앞서 보았듯이 알튀세르는 서양철학사에 면면히 흐르는 상반되는 두 가지 사유 경향을 발견합니다. 그 하나가 필연성의 철학이라면, 다른 하나는 우발성의 철학이겠지요. 그렇다면 이런 구분은 단지 서양철학의 흐름에서만 발견되는 것일까요? 분명 그렇지는 않습니다. 순자의 사유에서 엿볼 수 있었듯이, 동양철학에서도 방금 언급했던 두 가지 사유 흐름이 서로 대립하며 전개되어왔기 때문입니다. 순자는 기우제를 지내는 것과 비가 내리는 것 사이의 관계가 단지 우발적인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뒤 같은 유학 사상가였던 동중서(董仲舒, BC 176~104)【동중서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로 유명한 한나라 때의 유학자이다. 천인감응설은 글자 그대로 하늘..
거꾸로 된 변증법을 바로 세우려는 맑스② 그렇다면 변증법을 바로 세운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합’이라는 의미가 발생하기 이전에 ‘정’과 ‘반’이라는 차이 나는 두 계기를 그 자체로 사유하자는 것, 나아가 이 두 계기의 마주침을 사유하자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맑스의 변증법은 ‘합’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정’과 ‘반’으로부터 출발하려는 시도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맑스의 바로 세워진 변증법이란 ‘우발성의 변증법’ 혹은 ‘마주침의 변증법’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었겠지요. 맑스의 『자본론』 이란 바로 이렇게 마주침의 변증법에 입각해서 쓰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생산물의 교환은 서로 다른 가족, 부족 또는 공동체가 접촉하게 되는 지점에서 ..
거꾸로 된 변증법을 바로 세우려는 맑스 인당수에 심청을 희생물로 바쳤던 뱃사람들, 그리고 비가 오지 않아 절실하게 기우제를 지냈던 고대 중국인들! 이들은 알튀세르가 ‘마주침의 철학’이라고 부른 사유 전통과는 정반대의 길을 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주친 사건의 우발성을 두려워 합니다. 인당수의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두려워하고 끝나지 않을 듯한 가뭄을 몹시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서 그들은 무의미한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점점 몰입합니다. ‘신이 존재하고 계실 거야. 그리고 그 신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거야. 만약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신이 없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다는 걸 의미하는 거야.’ 이렇게 해서 이 세계에는 어떤 마주침도, 사건이란 것도..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알튀세르② 그런데 이 사유의 흐름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중요한 사람은 바로 에피쿠로스입니다. 그는 우발성의 철학, 마주침의 철학을 근본적으로 숙고했던 최초의 사상가이니까요. 그럼 에피쿠로스의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튀세르의 말을 통해 잠시 들어보도록 하지요. 에피쿠로스는 세계 형성 이전에 무수한 원자가 허공 속에서 평행으로 떨어졌다고 설명한다. 원자는 항상 떨어진다. 이는 세계가 있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동시에 세계의 모든 요소는 어떤 세계도 있기 이전인 영원한 과거로부터 실존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는 또한 세계의 형성 이전에는 어떤 의미(Sens)도, 또 어떤 원인(Cause)도, 어떤 목적(Fin), 어떤 근거(Raison)나 부조리(Déraison)도 실존하지 않..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알튀세르 순자가 죽고 2000여 년이 지난 뒤, 프랑스에서는 알튀세르【알튀세르는 사유나 문체에 있어서 가장 탁월했던 프랑스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적 목표는 맑스의 사유에 ‘철학’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그가 스피노자, 루소, 마키아벨리 등을 철학적으로 다시 읽어내려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궁극적으로 그가 맑스에게 부여하고자 했던 ‘철학’은 헤겔과는 다른 반목적론적인 변증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요 저서로 『맑스를 위하여』, 『철학에 대하여』 등이 있다】라는 탁월한 철학자가 태어납니다. 그는 맑스(K. Marx, 1818~1883)의 정치경제학에 철학을 부여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던 위대한 정치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정신병 발작으로 자신의 아내를 ..
인당수에 내리던 비를 상상하며② 인당수의 비와 심청의 희생에 대해 철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우발성’을 주장하는 입장인 반면 뱃사람들은 ‘필연성’을 주장하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필연성을 믿는 것이 초래할 수도 있는 일종의 완고함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비와 심청 사이에는 ‘우발성’이 있을 뿐이라고 충고하더라도, ‘필연성’을 믿고 따르는 뱃사람들은 결코 자신들의 확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심청을 인당수에 던졌는데 비가 전혀 그치지 않았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우리는 즉각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것 보세요. 인당수의 비와 심청의 희생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잖아요.” 그러나 뱃사람들은 양자 사이의 관계가 우발적이라는 우리의 생각에 조금도 동요되지 ..
3장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 인당수에 내리던 비를 상상하며 마침내 인당수에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곧 바람마저 강하게 불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를 뒤섞어버리는 폭풍우가 배를 덮치려고 할 것입니다. 심청을 태운 배는 15일에 출항했습니다. 인당수의 폭풍우를 잠재우기 위해서 뱃사람들은 이미 희생물도 준비해두었습니다. 심청이 바로 그 희생물이지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삼백 석의 공양미가 필요했던 그녀는 자진해서 희생물로 배를 탔던 것입니다. 이제 마침내 그녀가 배에서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더 난폭해진 폭풍우가 그녀를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청은 비를 맞으며 뱃전으로 걸어갑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죽는다는 것이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자신의 희..
더 읽을 책들 버트런드 러셀, 『철학의 문제들』 (박영태 옮김, 서울: 이학사, 2000) 지금은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철학 개론서입니다. 러셀 특유의 간명하고 분명한 문체가 장점인 이 책은 좁게는 현대 영미 철학 개론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넓게는 철학하기가 무엇인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른스트 투겐트하트·우슬라 볼프, 『논리-의미론적 예비학』(하병학 옮김, 서울: 철학과현실사, 1999) 논리학은 단순히 형식적인 추론 규칙을 탐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미론적 지평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책입니다. 나아가 이 책은 ‘논리 의미론’이란 지평에서 서양철학의 논리학적 전통을 요령 있게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이경신 옮김, 서울: 민음사, 19..
철학과 인문학적 경험 철학은 ‘지금-여기’를 비판적으로 다루지만, 또한 동시에 아직은 없는 세계를 꿈꾸는 학문입니다. 따라서 ‘지금-여기’를 문제 삼기보다 여러모로 정당화하기에만 급급한 제도권의 철학, 혹은 ‘지금-여기’를 전혀 숙고하지 않고 ‘아직은 없는’ 세계만을 추구하는 종교적인 철학, 이 모두가 거짓된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설악산의 공룡능선과 같은 매우 날카로운 능선을 걸어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오른쪽에는 ‘시간’이라는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고, 왼쪽에는 ‘영원’이란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능선을 걷다보면, 여러분은 자신만의 철학, 그 정상부에 오를 수 있게 될 겁니다. 마치 우리가 험준한 길을 걸어..
철학이란 무엇인가?② 자, 그럼 이제 문제의 상황에 좀 더 접근해봅시다. 들뢰즈는 ‘반시대성’이 ‘시간’과 ‘영원’보다 더 심오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반시대성’이 ‘시간’보다 심오한 이유를 먼저 설명하는 것이 순서이겠지요. 앞에서 살펴보았던 비만한 여성의 삶과 비교해봅시다. ‘시간’이란 특정한 시기, 즉 이 경우는 ‘그녀가 비만했던 때’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니체의 반시대성이란, 그녀의 비만함이 단지 특정한 시간에만 가능했던 제한적인 것임을 폭로하고, 그녀가 날씬해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그녀는 ‘날씬함’을 지향하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자신이 비만했던 ‘시간’을 이제 과거로 만들어버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비만함을 당당하게 거부함으로써 비만했던 때를 ..
철학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성이란 ‘어떤 주장에 대해 이유나 근거를 댈 수 있는 능력’을 의미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정의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에게 자신의 주장이나 근거를 제시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레셔라면 그 ‘누구’를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 즉 ‘우리’라는 이름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보겠지요. 그렇다면 이제 그들에게 철학이란, 공동체의 삶의 규칙, 즉 일반성의 원리를 수용하는 한에서만 가능한 것이 될 겁니다. 따라서 그들은 주어진 삶의 규칙에 입각해 어떤 주장을 정당화하고 설득하는 논쟁의 기술 정도를 철학이라고 부르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이성을 ‘공동체가 인정할 만한 주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는 능..
반시대적이어야만 하는 철학② 가령 여러분이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시대에 갔다고 해봅시다. 이때 여러분은 지금처럼 삼종지도는 전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주장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목숨을 내놓는 결단이 필요할 겁니다. 만약 그런데도 여러분이 삼종지도를 거부하는 이런 위험한 주장을 내놓는다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그것은 여러분이 이미 조선 시대라는 일반성을 벗어난 경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상황을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시대로 건너간 여러분이 삼종지도를 비판했을 때, 그 주장에 동조하는 어떤 조선 시대 사람을 만났다고 해봅시다. 여러분이야 이미 조선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에서 왔기 때문에 그런 비판을 할 수 있었지만, 도대체 ..
반시대적이어야만 하는 철학 특정 공동체에 속한 어떤 사람과 논쟁할 때 우리는 반드시 그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규칙에 따라 주장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상대방을 전혀 설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상대방이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나 근거를 제시한다면, 일체의 대화나 논쟁이란 것이 모두 무의미해질 겁니다. 따라서 모든 논쟁에서 우리가 이성적으로 추론하는 과정은 ‘우리’라는 맥락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레셔의 주장을 음미해볼 가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홀로 사유하는 과정에서도 ‘우리’라는 것, 즉 특정한 공동체를 매번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일까요? 진정 그렇다면, 공동체가 수용하기 힘든 새로운 주장, 즉 자신만의 고유한 사유란 전혀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 ..
이성의 의미와 한계 어떻습니까? 삼단논법에도 나름대로 어떤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철학적 사유란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선 어떤 것에 대해 의미 있는 주장을 내세웁니다. 만약 이것으로 그친다면, 우리는 철학적 사유를 했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주장을 지지해줄 수 있는 어떤 근거를 찾는 것이니까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삼단논법을 최초로 체계화했던 아리스토텔레스도 바로 이런 문제점에 주목했다는 점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봅시다. 이제 주어진 문제에 응답하기 위한 삼단논법이 적합하게 제공되도록 하려면, 어떻게 찾을 것인지 그리고 무슨 방법으로 이 문제에 적합한 출발점(전제)을 파악할 것인지를 서술해야 한다. 우리는 삼단논법의 구조에 대해 ..
삼단논법의 숨겨진 비밀②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사정은 정반대이지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머릿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어떤 구체적인 생각 하나를 떠올립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익숙한 현상 가운데 하나이니까요. 그런데 이제 우리가 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다고 해봅시다. “내 생각에 소크라테스는 분명 죽을 거야.” 이 말을 들은 다른 사람이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고 내 주장에 동의해준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생각에 연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상대방이 우리의 주장을 반박하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우리의 생각은 증명..
2장 철학적 사유와 인문학적 경험 삼단논법의 숨겨진 비밀 여러분은 철학이란 학문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왠지 멀게만 느껴지는 학문, 무엇인가 심오하기는 한 것 같지만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학문, 삶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현학적인 학문, 배우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배울 필요는 없는 고급 교양……. 철학에 대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아마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몇몇은 과거에 철학을 공부해보겠다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던 적이 있었을 겁니다. 혹은 앞으로 어떤 계기로 인해 그런 결정을 내릴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어떤 이유로든 철학을 좀 제대로 배워보려고 시도하자마자, 여러분은 논리학(logic)이라는 학문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흔히들 철학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