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06/25 (12)
건빵이랑 놀자
7. 최소한의 성의만 있다면 누구나 가르친다 7-7.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한 다발의 육포라도 가지고 와서 예를 갖추면 나는 누구든지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7-7. 子曰: “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 배움은 ‘공짜’가 되면 안 된다. 공짜로 배우려는 자도 성의가 없는 것이 요, 공짜로 가르쳐주려는 자도 책임감이 없는 것이다. ‘수(脩)’라는 글자 속에 고기 육(肉)이 들어가 있듯이 그것은 육포인데, 옛날에는 요기가 될 수 있는 것으로써 돈처럼 통용가치가 있었다. 그 한 다발이면 사실 최소한의 예물이다. 많이 받을래서가 아니라, 그러한 정도의 성의라도 표시하고 배움을 청하는 자에겐 누구에게든지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다. 이것은 공자의 진실한 말일 것이다. 이 말을 매우 추상적인 학문전수..
6. 공자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 7-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도(道)에 뜻을 두며, 덕(德)을 굳게 지키며, 인(仁)을 항상 떠나지 아니하며, 예(藝) 속에서 노닌다. 이것이 나의 삶이다.” 7-6. 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이것은 공자가 자기 삶의 역정을 자술한 것이다.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상달(上達)의 궁극이 종교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데 공자의 삶의 위대성이 있고 초기공단의 건강함이 엿보인다. 여기 예(藝)라는 것은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와 같은 육예(六藝)를 말하는 것이나, 그 핵심은 역시 음악이었다. 그가 말하는 음악은 작곡과 연주를 동시에 말하는 것이다. 옛 사람들이 연주를 한다는 것은 곧 창작한다..
5. 꿈에서라도 주공을 뵙고 싶던 공자 7-5.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심하도다, 스러져가는 나의 몸이여! 오래되었구나, 꿈에서 주공(周公)을 다시 보지 못한 지가!” 7-5. 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위대한 문학이라 할 수밖에 없다. 공자와 주공의 시간격차가 600년은 된다. 그렇다면 공자가 주공을 만났을 리도 없고, 그 모습을 그릴 방도도 없었다. 그러나 공자는 젊었을 때 꿈에서 수없이 수없이 주공을 만난 모양이다. 주공은 역사적 존재라기보다, 공자에게 있어서는 자기가 구현하고자 하는 이상적 가치의 한 아이디알(ideal) 타입이었다. 공자의 삶의 동경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은 꿈에 나타날 정도로 리얼한 그 무엇이었다. 그런데 이제 노경의 공자에게 그 꿈마저 스러져가고 있다. 공..
4. 한가롭게 거처할 때의 공자 모습 7-4. 공자께서 공무로 밖에 나가지 않으시고 집에 한가로이 계실 적에는 그 모습이 날개를 사뿐히 펼친 듯했고, 얼굴엔 화색이 돌아 광채가 났다. 7-4. 子之燕居, 申申如也, 夭夭如也. 해탈인의 모습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공자는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1ㆍ 2ㆍ3장은 모두 공자의 학문에 대한 치열한 정신을 반영하는 자술(述)의 말씀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를 세 번 반복한 후 ‘공자는 이러이러한 인간이었다’하고 3인칭으로 서술하는 이 형식은 향후 8장군(章群)의 모델을 이룬다. 치열한 느낌 후에 전개되는 한가롭고 온화한 본 장의 모우멘트는 째즈 명곡의 자유로운 텐션 같은 느낌을 준다. ‘신신(申申)’은 ‘신신(伸伸)’의 뜻으로 새기면 새가 날개를 쭈욱 펴고..
3. 날마다 새로운 사람이 되려면 7-3.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덕(德)이 잘 닦이지 않는 것, 배운 것을 잘 강습하지 못하는 것, 의(義)를 듣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 나에게 불선(不善)이 있는 것을 알고도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평소 나의 삶의 걱정이다.” 7-3. 子曰: “德之不脩,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해설을 요하지 않는다. ‘강(講)’이란 문자 그대로 배운 것을 남에게 강의한다는 뜻이 있다. 사람들과 더불어 배운 것을 강의하고 토론하면서 습득해가는 것을 말한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의 ‘습(習)’과도 통한다. 예를 들면 노래 같은 것은 민요를 채록하거나 악사에게 배웠으면 제자들과 강습하고 같이 연주해보지 않으면 노래꼴이 갖추어지지 않는다. 예(禮)도 마찬..
2. 이해하고, 배우길 좋아하며, 가르치길 부지런히 한다 7-2. 공자께서 말씀하시였다: “묵묵히 사물을 인식하고, 끊임없이 배우며 싫증내지 아니 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하지 아니 하니, 나에게 또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7-2. 子曰: ”默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 ‘묵이식지(默而識之)’는 사물의 인식인 동시에 문제의 발견이다【주희는‘識’을 ‘지’로 읽고 ‘기억한다’는 뜻으로 풀이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인식의 문제로 본다】. 그 과정은 묵묵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꾸준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학이불염(學而不厭)’은 끊임없는 탐구의 과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배움의 성과를 가지고 후학들을 가르치는 데 게으름이 없다. 마지막의 ‘회인불권(誨人不倦)’은 공자 삶의 궁극..
1. 전술하되 창작하지 않는다 7-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는 전해 내려오는 것을 술(述)하였으되 새로 창작하지는 않았다. 나는 옛것을 신험하였고, 좋아하였다. 나를 슬며시 노팽(老彭)에 견주노라.” 7-1.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 선진문헌에서 ‘작(作)’이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단순한 창작이 아니라, 문명의 질서를 최초로 창조한다는 의미가 있다. 엄격히 말하면, 그것은 서구 신화학에서 말하는 ‘컬츄럴 히어로우즈(cultural heros)’, 혹은 “컬쳐 브링어즈(culture-bringers)‘, 그러니까 문명의 최초의 전기를 만든 신이나 영웅들의 창작행위를 지칭한다. 아테나 폴리아스(Athena Polias)는 최초로 올리브 나무를 심었고, 아테나 에르..
술이 제칠(述而 第七) 편해(篇解) 브룩스는 이 장이 증자가 무성(武城) 같은 곳에 따로 자기 학교(the Zeng-zi School of Confucianism)를 세웠을 것이고, 그 학교에 모여든 학생들이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으므로, 그들에게 공자 즉 우리의 위대한 스승님은 이런 사람이었다 하고, 공자의 인격을 가르쳐주기 위해 공자가 자기 삶과 학문에 관하여 자술(自述)한 것, 그리고 공자가 어떠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직전제자들 혹은 외부인사들이 묘사한 것 등등을 모아서 편집한 공자 언행록으로서 대강 BC 450년경에 편찬된 것이라고 본다. 물론 그것은 증삼 자신도 몰랐던 공자의 모습일 것이다. As the first outside school head, he will have neede..
28. 인을 실천하는 방법 6-28. 자공이 여쭈었다: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어서 많은 사람들의 삶을 유족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을 인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6-28. 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어찌 인한 정도이겠는가? 그 사람이야말로 반드시 성인이라 부를 만하다. 요ㆍ순도 이를 오히려 어렵게 여겼을 것이어늘! 대저 인한 자는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하며, 자기가 달성코자 하면 남도 달성케 해준다. 능히 가까운 데서 자기 몸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을 취할 줄 알면, 그것은 인을 실천하는 방법이라 일컬을 만하다.”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
27. 중용의 덕이 지극하다 6-27.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중용의 덕됨이 지극하도다! 중용을 실천하는 백성이 드문지가 오래되었도다.” 6-27. 子曰: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 『중용(中庸)』 제3장에도 같은 말이 실려 있는데, 그 파편에는 마지막 구가 ‘민선능구의(民鮮能久矣)’로 되어있다. 뜻에는 대차가 없다. 『중용』 제3장과 「옹야」 본 장이 동일한 로기온이라고 본다면 이 27장은 증자학파 계열의 전승이 「옹야」로 편입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 사상적 맥락은 정확하게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우나 증자-자사의 학통의 본원이 역시 공자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편집일 것이다. 하여튼 공자의 사상의 어느 측면이 ‘중용’이라는 개념으로 확대되어 나아갔을 것이다. ‘중(..
26. 공자, 남자(南子)를 만나다 6-26. 공자께서 남자(南子)를 만나시었다. 자로가 되게 기분나빠했다. 부자께서 이에 맹서하여 말씀하시었다: “내가 만약 불미스러운 짓을 저질렀다면, 하늘이 날 버리시리라! 하늘이 날 버리시리라!” 6-26. 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曰: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 공자는 외간 여인과 섹스를 했을까? 도대체 자로가 왜 ‘되게 기분나빠 했을까?’ 무엇 때문에 공자가 남자(南子)라는 여인을 만났다는 것이 자로를 기분나쁘게 했을까? ‘자로불열(子路不說)’은 아주 감정이 상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남자가 위령공의 부인으로서 소문난 음녀(淫女)라는 것은 이미 6-14에서 충분히 설파하였다. 남편 영공을 놔두고 버젓이 송조와 놀아나는 남자(南子)를 당대의 지식인으로..
공부자 연표(孔夫子 年表) 선성소상(先聖小像) 공자와 제자 안연의 모습을 그린 그림 (三十六幅 孔子聖蹟圖 中에서) ▲ 니산치도(尼山致禱) 공자의 모친인 안징재(安徵在)가 니구산(尼丘山)에서 기도를 올린 후, 아들 공자가 태어났다. 孔子的母親顔徵在, 在尼丘山上祈禱后, 生下兒子孔子. ▲ 기린옥서(麒麟玉書) 공자가 태어나기 전, 하늘이 내린 책을 기린이 토해 냄. 孔子還沒有出生時, 有隻麒麟在他家裡, 口吐天降之書. 1살(BC 551) - 주영왕(周靈王, 동주시대의 천자天子) 21년 노양공(魯襄公, 제후諸侯) 22년 ◇ 노(魯)나라 추읍(陬邑) 창평향(昌平鄕, 현재의 산동성山東省 곡부시曲阜市 동남쪽의 니산尼山부근)에서 태어남. ◇ 태어날 때부터 머리 위쪽 정수리 부분이 움푹 패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구(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