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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비운의 왕② 317년 한족의 진나라가 강남으로 옮겨가서 동진으로 명패를 바꾸자 화북 일대는 북방 민족들의 세상이 된다. 이른바 5호(五胡)라고 불리는 민족들이 옛 중국 문명의 발원지이자 전통적인 중심지인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는데, 그 중 고구려에게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앞서 보았듯이 선비족이다. 봉상왕 때부터 고구려를 괴롭힌 그들은 고국원왕(故國原王) 때에는 아예 연나라를 세워 중원을 노리는 공식 대권후보로 등록한다. 옛 전국 7웅 중의 하나인 연과 구분하기 위해 역사가들은 이것을 전연(前燕)이라 부른다(옛 왕조의 이름을 따는 경우는 중국 역사에서 대단히 흔한데, 전연이라 이름지은 이유는 나중에 후연이 생기기 때문이다). 랴오시의 차오양(朝陽)을 수도로 삼아 전연을 세운 모용씨 세력은 당연..
3장 뒤얽히는 삼국 비운의 왕 이후의 역사까지 통틀어 백제의 최전성기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시대였다. 이 무렵 백제는 동쪽으로는 신라와의 해묵은 불화를 해소했고, 북쪽으로는 강국 고구려와의 실력 대결에서 승리했다. 게다가 서쪽 바다 건너로는, 비록 통일제국의 지위에서는 물러났으나 여전히 중국의 강남을 지배하고 있는 동진과 수교했고, 남쪽 바다 건너로는 일본과도 친교를 맺었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강대국의 면모다. 형세가 유리할 때 승부를 결정지어야 하는 건 바둑만이 아니다. 백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전사한 것은 판을 닦을 수 있는 결정적인 찬스였다. 아마도 그랬더라면 한반도의 역사에서 삼국시대라는 말은 일찌감치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초고왕(..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⑤ 어쨌든 승리의 대가는 무척 컸다. 당대의 평가로 보면 고구려의 남진을 분쇄하고 북쪽의 영토를 개척한 게 가장 큰 성공이었겠지만, 역사적으로 그보다 훨씬 중요한 성과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전까지 백제는 반도 남쪽과 동쪽의 소국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수준이었으므로 문명적으로 보면 오히려 어두운 오지를 항해 팽창하려 했던 셈이다. 그러나 북쪽의 강호 고구려를 압도적으로 물리치자 당연히 시야가 한층 넓어진다. 맨먼저 그 시야에 들어온 것은 넓은 중국 대륙이다. 372년에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백제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의 진(晉, 동진)에 사신을 보내 수교를 맺는다. 중국으로 가는 육로는 고구려에 막혀 있을 뿐 아니라..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④ 만반의 태세를 갖춘 근초고왕(近肖古王)에게 드디어 기회가 온다. 369년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이 직접 2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향해 남침해 온 것이다. 오래전부터 예정된 사건이고 튼튼히 대비를 해두었으니 백제로서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지금의 황해도 백천에 주둔한 고구려군을 맞아 근초고왕은 우선 태자를 보내 공격하게 한다. 그로서는 고구려의 힘을 한 번 테스트해본다는 심정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결과는 예상 외로 백제의 승리였다. 이 전쟁으로 백제는 고구려 군 5천 명을 포로로 잡고 고구려의 남침 야욕을 꺾었다. 고구려와의 사상 첫 접전에서 완승을 거둔 근초고왕(近肖古王)은 자신감을 얻은 반면 승리를 낙관했던 고국원왕은 당황했다. 굳어진 확신과 싹..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③ 모처럼만에 왕통을 바로잡은 탓에 비류왕(比流王)은 외정(外征)보다 내치에 주력하면서 왕권을 다지기에 힘쓴다. 아마도 그가 재임한 40년 동안 백제의 백성들은 역대 어느 시절보다도 태평한 세월을 누렸으리라(그 기간 한 차례 반란 사건 이외에는 전쟁을 벌인 기록도 없다). 그러나 한반도 중서부에 자리잡은 백제는 마냥 그런 태평성대를 향유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백제의 지배층도 그런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정중동(靜中動)! ‘정(靜)’의 시기에 ‘동(動)’을 준비하지 않으면 장차 다가올 것은 동에 그치는 게 아니라 화(禍)가 될 것이다. 그 준비의 첫째는 후방 다지기이고, 그 후방 다지기의 첫째는 신라와의 관계 개선이다. 그래서 322년에 비류왕은 신라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낸다..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② 고이왕(古爾王)이 즉위하던 3세기 중반 백제의 왕권은 두 계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 두 갈래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2세기의 왕인 개루왕에게서 이어진다. 그에게는 최소한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각 계파의 원조가 된다. 일단 맏아들(초고왕)이 왕위를 잇기는 했으나 둘째 아들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던 듯하다(기록에는 그 둘째 아들이 고이왕이라고 되어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이로 따지면 불가능하므로 고이왕은 아마 둘째 아들의 후손일 것이다). 초고왕(肖古王, 재위 166~214)과 구수왕(仇首王, 재위 214~234)의 시대 70년이 지나도록 그 세력은 계속 왕권을 노렸다. 이윽고 234년에 구수왕의 아들 사반왕(沙伴王)이 즉위하자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폐위하고 고이..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신라가 뒤늦게나마 김씨로 대권후보를 통일하고 단일한 왕계를 꾸리기 시작할 무렵 백제는 이미 눈길을 북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물론 신라와의 키재기는 여전했지만 반도 북부의 상황 변화로 인해 이제 백제에게는 동쪽보다 북쪽의 일이 더 궁금해지고 시급해진 것이다. 그 상황 변화란 말할 것도 없이 낙랑이 멸망한 사건을 가리킨다. 313년 고구려 미천왕(美川王)이 낙랑과 대방을 한반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기 전까지 백제와 고구려의 사이, 그러니까 지금의 평안남도와 황해도에 해당하는 지역은 중국 국적의 두 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국적을 따지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낙랑과 대방은 한나라가 무너지고 중국이 분열시대로 접어든 이후부터는 사실상의 독립국으로 존속해 왔다. 그런데 이제 그 지..
생존이 미덕③ 어쨌든 그런 근친혼 덕분에 신라 왕실에서는 아들과 사위가 얼마든지 같은 성씨일 수 있었고, 따라서 얼마든지 왕위계승권자가 될 수 있었다【신라 특유의 갈문왕(葛文王) 관습은 여기서 비롯된다. 갈문왕이란 신라 초기에 왕의 아버지, 장인, 형제 등에 두루 주어지는 일종의 관직 같은 신분이었다. 쉽게 말해 왕위계승권이 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족들에게 현직 왕이 위로(?)하는 의미에서 수여하는 작위라고 보면 된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의 아버지를 추서(追敍)하는 것은 조선시대에도 있었고(하권에서 보겠지만 대원군이라는 직함이 그런 예다) 유럽의 역사에서도 흔한 일이지만, 왕의 외가까지 전혀 차별 없이 대우한 경우는 드물다. 신라 왕실은 근친혼 때문에 아들과 사위가 모두 왕의 직계 후손이었고, ..
생존이 미덕② 이렇게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힘을 키운 신라는 마침내 백제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당하는 처지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에 힘입어 3세기 초반에 내해왕(奈解王, 재위 196~230)은 자신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공격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소극적인 방어 자세 대신 성을 쌓고 경계하는 적극적이고 장기적인 방어 태세로 전략을 바꾸었다. 이윽고 파사왕 이래 대가 끊겼던 정복군주도 다시 등장했다. 내해왕의 뒤를 이은 조분왕(助賁王, 재위 230 ~247)은 231년 현재 김천에 해당하는 감문국을 공격해서 영토화하고, 다시 5년 뒤에는 영천의 골벌국을 병합한다. 김천은 경상북도의 남서부, 영천은 남동부에 있으니까 당시 신라의 영토는 적어도 지금의 경상북도 전역까지 확대되었을 것이다. 바야흐..
생존이 미덕 먼저 고구려가, 그 다음에는 백제가 차례로 선진 문명권에 합류하면서 한반도의 북부와 서부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에 비해 신라가 자리 잡은 동남부는 아직 잠잠하기만 하다. 이주민 국가로 시작한 출발부터 그랬지만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이질적인 성격이 다분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 문명권의 막내로 생겨났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대륙을 향하게 된 것과 달리 신라는 처음부터 대륙 문명과는 별개로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성장기에 접어들어서도 그 이질성이 상당 부분 잔존해 있었다(그런 점에서 보면 신라는 오히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한반도의 토착 문명을 이루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역사에서 과연 어느 것을 토착이라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겠지만). 그런 이질성 중 하나가 단일한 성씨로 고..
백제의 도약③ 제사만이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고이왕 때는 그 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260년에 여러 가지 관제를 신설한 것도 그 중 하나다. 백제 고유의 관직, 예컨대 좌평과 달솔, 은솔, 장덕, 시덕 등의 관직명이 바로 그 무렵에 생겨났으며, 관직의 품계도 그때 정해졌다. 이렇게 고이왕대에 이르러 백제가 여러 가지 변모를 보여주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그 시기에 비로소 백제가 고대 국가를 이루었다고 보기도 한다【한국 최초의 역사학 박사로 꼽히는 이병도(李丙燾, 1896~1989)가 그렇게 주장했는데, 물론 타당성은 있다. 그러나 사실 무엇을 고대국가의 기준으로 삼을 것이냐는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을뿐더러 별 쓸모도 없다. 적어도 국가라면 일정한 영토와 백성, 왕계, 군대, 달력..
백제의 도약② 어쨌든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 신라가 한강 유역을 공략하기에 이르렀다면 신라의 국력도 크게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 3만이라는 엄청난 대군이 실제로 동원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상당한 규모였던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과연 간헐적으로 조우했던 100년 전과는 달리 백제와 신라는 2세기 중반부터 치열한 다툼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삼국사기』에도 이 무렵부터는 초기에 두 나라를 괴롭혔던 말갈 같은 외부 세력이 등장하지 않고 거의 두 나라의 관계만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실상 전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백제가 일방적으로 신라를 침공하고 신라는 방어하는 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백제는 신라를 압도하지 못했고 신라도 역시 크게 패배하거나 뒤로 밀려나..
2장 깨어나는 남쪽 백제의 도약 고구려가 중국의 정세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무렵 한반도 중부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정식으로 첫 대면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양측의 상견례는 영 험악한 분위기다. 고구려에서 명림답부(明臨答夫)의 쿠데타가 발생할 즈음, 그러니까 167년에 신라가 3만에 가까운 대군으로 한강 중류까지 치고 올라가는 사태가 벌어진다. 다행히 신라의 병력을 보고 겁을 먹은 백제가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 전투 상황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았지만 이 사태는 장차 백제와 신라가 어떤 관계로 엮이게 될지를 말해주는 예고편인 셈이었다. 사실 두 나라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이미 100년 전부터다. 백제의 다루왕(多婁王)과 신라의 탈해왕(脫解王) 시절이던 기원후 64년에 두 나라는 오늘날 충..
남으로 기수를 돌려라② 거듭되는 외침에다 흉년과 기근,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도 봉상왕은 여러 차례 궁궐을 수리하고 증축하는 데 여념이 없다. 좋은 뜻으로 해석한다면 그의 의도는 어떻게든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임금이란 백성이 우러러봐야 하는 존재이므로 무엇보다 궁궐이 화려해야 한다”는 게 바로 그가 직접 한 말이니까. 그런 점에서 그가 취한 입장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300년이나 지나서, 게다가 심각한 인플레까지 감수하면서도 굳이 중건하려 했던 흥선대원군의 의도와 맥이 통한다. 사실 국가적 위기를 맞아 무엇보다 국왕을 중심으로 국력을 결집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리가 없지 않으며, 궁궐의 증축은 그것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측근들의 동의마저 얻지..
남으로 기수를 돌려라 일단 방침은 정해졌지만 고구려의 남행은 즉시 이루어지지 못한다. 건국 이후 내내 험난한 생존과 팽창의 과정을 거쳐왔음에도 고구려는 아직 지리적 여건에 따른 태생적인 불안정을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선 고구려는 중천왕(中川王, 재위 248~270) 때인 259년에 아직까지도 정복의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위나라의 테스트를 한 번 더 치러내야 했다. 게다가 권력의 불안도 여전히 고구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부자 세습이 정착된 지가 꽤 되었지만 아직도 고구려의 왕위계승은 매끄럽지가 못했던 것이다. 이럴 때 맏아들 계승이 몇 대쯤 계속해서 착실히 진행된다면 아마 그 불안은 제거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런 운도 따라주지 않아 맏아들 승계는 동천왕(東川王)과 중천왕의 겨우 2대만 ..
대륙 국가의 성격④ 이 전란으로 이제 중국과 고구려가 장차 어떤 관계에 놓이게 될지는 분명해졌다. 고구려는 건국 이래 내내 랴오둥 세력에 시달렸지만 사실 정작으로 큰 대적은 그 서쪽 너머 중국의 본체였다. 한나라와 위나라, 이름은 달라도 중국의 한족 왕조들은 모두 고구려를 잠재적 동맹 세력이 아니라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는 게 확실해졌으므로 고구려로서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저항해야 할 입장이었다. 한편 중국은 중국대로 고구려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정립해야 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아예 멸망시켜 영토화하고 싶지만 한 차례의 접전에서 확인되었듯이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 고구려는 랴오둥보다 멀고 랴오둥보다 강하다. 일찍이 만주와 한반도 지역이 무주공산이었을 때 한나라는 4군을 설치해서 지배할 수 있었..
대륙 국가의 성격③ 이제 고구려는 새로운 상황을 맞았으니 한시바삐 시나리오를 바꿔야만 한다. 그런데 웬일일까? 동천왕(東川王)은 아직도 위나라와의 동맹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 랴오둥 정복 전쟁에 1천 명의 병력으로 지원군을 보내 체면치레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판단미스였다. 고구려는 랴오둥의 주인이 바뀐 것을 환영해 마지 않았으나 그것은 늑대가 물러간 숲에 호랑이가 나타난 격이었다. 공동의 골칫거리였던 공손씨가 몰락했다는 똑같은 사건을 두고 고구려와 위나라 양측의 견해는 정반대였다. 고구려는 애초부터 맺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꺼이 위나라의 핵우산 밑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위 나라는 고구려를 우산 밑에 잡아두기보다 아예 제거할 심산이었다. 위나라에게 고구려는 처음부터 랴오둥과 같은 골칫..
대륙 국가의 성격② 중국의 어지러운 정세를 관망하던 고구려에게 드디어 행동 노선을 정할 계기가 찾아 온다. 새로 정착된 부자 계승의 첫 수혜자인 동천왕(東川王)에게 234년 위나라에서 화친을 맺지는 뜻으로 사신을 보내온 것이다.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 했던가? 멀리 있는 적과 화친하고 가까이 있는 적을 공격한다는 방책은 진 시황제만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위나라와 랴오둥을 사이에 두고 있는 고구려로서는 위나라가 내미는 손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사실 당시 위나라는 오와 촉이 서로 동맹을 맺고 거세게 도전해 오고 있는 상황을 맞고 있었으므로 후방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 판에 랴오둥 태수 공손연(公孫淵)이 오나라와 위나라 사이에서 농간을 부리며 외교적 이득을 취하고 있었으니 분통이 터질 따름이다(랴오둥..
대륙 국가의 성격 고구려는 특이한 나라다. 건국시조로 보나, 문명의 성격으로 보나 중국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한반도 역사에 속한다고 해야겠지만 백제나 신라만큼 토박이 냄새는 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 지리적 위치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남부, 랴오둥 동부에 두루 걸치고 있으므로 크게 보면 중국과 한반도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런 만큼 고구려는 애초부터 중국과 한반도 양쪽의 역사를 이어주면서도 단절시키는 이중의 역할을 해야 할 운명이었다【오늘날 우리는 고구려를 한반도 역사의 일부로 치는 데 반해 중국에서는 중국사에 포함시킨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화가 나겠지만 실상 초기의 고구려는 중국사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낙랑이 아직 멸망하지 않은 이상 중국에..
중국발 통신② 그래도 건국 이념이 살아 있던 얼마 동안은 그런 대로 제국의 모양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의 약발이 사라지자마자 후한은 곧 예정된 쇠락의 길을 걷는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은 정치가 무너진다 해도 나라 전체가 금세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치의 폐해가 일반 백성들의 삶에 전달되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잠시 번영과 안정이 찾아 왔던 초기 50년 이후에도 후한이 100년이 넘도록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 크다. 그러나 외척과 환관들이 중앙정치를 망가뜨리고 호족들이 지방정치를 말아먹은 데 따르는 폐해는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사회적 피라미드의 맨밑에 있는 농민들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래서 일어난 게 ‘황건(黃巾)의 난’이다. 184년부터 전국 각지에서 노..
1장 고구려의 역할 중국발 통신 다양한 미스터리와 숱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2세기를 마칠 즈음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의 왕조들은 그럭저럭 나라꼴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왕위 세습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관제를 비롯한 초보적인 제도들도 생겨났으니 이제부터는 버젓한 왕국이라 해도 별 하자는 없을 듯하다(거꾸로 말하면 그 전까지는 왕국이라고 부르기에 미비한 점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이 나라들은 서로 이리저리 얽히며 올망졸망 살아가면서 아주 조금씩 발전해 갔으리라. 하지만 세상에는 한반도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반도의 서쪽에는 이곳보다 훨씬 크고 일찍이 이곳에 문명의 빛을 전해주었던 중국 세계가 있다. 3세기부터 중국 대륙에 몰아친 격변의 회오리는 한반도 역사에 또 한 차례..
2부 화려한 분열 중국이 분열기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정치적 지배에서 벗어난 고구려는 북조의 왕조들로부터 랴오둥의 소유권을 인정받는 대신 사대의 의무를 약속하고 한반도 방면의 진출을 모색한다. 그러나 고구려가 노리는 한반도 중ㆍ남부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신흥 세력으로 착실히 성장해가고 있다. 고구려의 강력한 압박전술에 두 나라가 동맹으로 맞서면서 본격적인 삼국의 정립기가 시작된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마지막 건국신화③ 그럼 김수로는 어디서 온 인물일까? 물론 추측밖에 가능하지 않지만, 적어도 알에서 부화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믿지 않는다면 나름대로 짚어볼 만한 요소는 있다. 김수로가 새 나라를 어느 정도 안정시키고 새로 궁궐을 지어 이사할 즈음 한 인물이 그에게 도전을 해온다. 그는 바로 나중에 신라의 4대 왕이 되는 탈해였다. 김수로도 석탈해도 둘 다 젊은 시절이었으니 혈기가 부딪히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탈해는 감히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다”며 노골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밝힌다. 두 사람은 곧 싸움에 들어갔는데, 후대의 손오공이 보았다면 서러워할 만한 탁월한 술법으로 치열하게 싸운다. 탈해가 참새로 변하면 수로는 매로 변하고, 탈해가 매로 변하면 수로는 독수리가 되는 식이다. 결국 탈해는 수로에..
마지막 건국신화② 또 하나의 나라가 한반도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으니 또 하나의 건국신화가 필요할 것이다. 과연 가야라는 나라도 역시 출발점은 신화다. 『삼국사기』에는 가야의 건국자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를 이름밖에 언급하지 않았지만 『삼국유사』에는 그의 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김수로의 신화는 건국신화의 기본 코스를 충실히 따르는데, 박혁거세와 김알지의 신화를 섞어놓은 것과 비슷하다. 기원후 42년 가야 땅에 사는 아홉 부족의 족장들이 하늘의 명을 받고 산에 올라가 왕을 내려달라고 빌었다. 거북에게 왕을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는 위협을 가하는 것이었으니 기도 방법치고는 좀 괴상한 것이었지만 과연 효험은 있었다. 하늘에서 금빛 알이 여섯 개 내려왔는데, 거기서 나온 여섯 명이 각기 가야 6국의 왕..
마지막 건국신화 2세기 왕계에 관한 미스터리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다만 그것은 삼국의 왕계가 아니므로 여기서 별도로 다룰 필요가 있겠다. 그 미스터리는 한반도 왕조의 마지막 건국신화와 관련된다. 주인공은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金首露王, 재위 42~99)이다. 김수로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라의 파사왕과 연루되면서부터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의 탈해왕(脫解王)이 김알지(金閼智)를 얻고 나서 기쁜 나머지 그를 태자로 책봉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석씨로서는 최초의 왕이자 일본 출신이었으니 탈해가 굳이 박씨를 다시 후계로 삼지 않으려 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김알지는 유리왕의 아들인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했고, 그 덕분에 신라는 다시 박씨 왕계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는 왜 그랬..
미스터리의 세기③ 마지막으로 신라의 경우도 그와 비슷하다. 신라 미스터리의 주인공도 역시 2세기 왕인 7대 일성왕(逸聖王, 재위 134~54)이다. 그에게 이르기까지의 신라 왕계를 보자. 5대 파사왕(婆娑王, 재위 80~112)은 3대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며, 재위 기간 32년이다. 유리와 파사 사이에는 석씨인 4대 탈해왕이 24년간 재위했다. 또 6대 지마왕(祇摩王, 재위 112~134)은 파사왕의 아들이며, 재위 기간 22년이다. 그런데 다음 일성왕은 3대 유리의 맏아들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기원후 57년에 죽었는데, 맏아들은 기원후 134년에 즉위했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더구나 동생인 파사와 조카인 지마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일까? 만약 그렇다면 일성왕은 최소한 77..
미스터리의 세기② 그러나 고구려의 그 이례적인 장수만세만 해도 백제의 경우와 비교하면 오히려 정상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백제 초기 왕계에서는 고구려의 경우보다 더욱 명백한 누락이 보이기 때문이다. 골치 아프겠지만 다시 한번 숫자 놀음을 해보자. 온조의 아들인 백제의 2대 다루왕(多婁王, 재위 28~77)은 온조왕 28년(기원후 10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8년 뒤에 즉위하여 50년간 재위했다. 그렇다면 갓난아기 때 책봉을 받았다 해도 ‘18 + 50 = 68’, 즉 최소한 68세 이상 수를 누린 셈이다. 여기까진 좋다. 그런데 그 아들인 3대 기루왕(已婁王, 재위 77~128)은 다루왕 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재위 52년이니 그의 수명은 ‘44(다루왕의 나머지 재위 기간) + 52’, 최소한 96..
미스터리의 세기 탈해왕(脫解王)으로 한 번 삐딱선을 탄 신라의 왕계는 그 다음부터 유리왕의 후손, 즉 박씨 세력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나 박씨 혈통이 파사-지마-일성-아달라까지 이어지다가 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재위 154~184)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는 다시 석씨 집안으로 옮겨간다. 왕의 성씨가 여러 차례 달라지는데도 별다른 마찰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이러한 초기 왕계로 미루어보면 기원후 2세기까지도 신라는 건국 당시의 이주민 국가적 성격이 유지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건국한 지 무려 200년이 넘어설 무렵에도 왕계가 고정되지 못했다면 사실 국가라고 보기에도 수준 미달이다. 따라서 앞에서도 말했듯이 신라의 건국 시기는 김부식(金富軾)의 노력(?) 덕분에 적어도 200년은 길어졌..
세 편의 건국신화④ 여기서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탈해의 고향이다. 앞서 말한 바에 따르면 그곳은 일본 동북방 천 리쯤 되는 나라다. 과연 그곳은 어딜까? 우선 당시의 왜국이란 오늘날의 일본 열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일본 전체가 하나의 나라를 이루게 된 것은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시대의 일이다). 섬이라는 독특한 조건에 있던 탓으로 일본은 약 1만 년 전부터 조몬 문명이라는 자체적인 신석기 문명을 유지해 오다가, 기원전 3세기 무렵에 한반도로부터 청동기와 철기 문명을 한꺼번에 받았다. 한반도 초기 삼국시대에 한반도인들에게 알려진 일본은 바로 금속기 문명이 전래된 일본, 즉 지리적으로 보면 기타큐슈(北九州, Kita Kyushu)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탈..
세 편의 건국신화③ 과연 곧이어 마지막 신화도 등장한다. 알에서 태어나는 것은 이미 유행에 뒤졌고 이제 첨단의 신화는 탈해처럼 궤짝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탈해가 왕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는 해(기원후 65년) 금성 서쪽 숲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곳으로 가보니 나뭇가지에 금색의 궤짝이 걸려 있다. 과연 그 안에는 사내아이가 들어 있다. 탈해는 하늘이 아이를 주신 것이라고 기뻐하며 그 숲을 닭 우는 숲, 즉 계림(鷄林)이라 이름짓고 아이에게는 금궤에서 나왔으니 당연히 금씨, 즉 ‘金’이라는 성과 ‘알지’라는 이름을 내린다. 그래서 가야의 김수로왕을 시조로 삼는 김해 김씨 외에 모든 김씨의 시조는 김알지다【알지는 한자로 閼智라고 표기하는데, 역시 이두문이니까 중요한 건 뜻이 아니다. 그러나 이두를 알..
세 편의 건국신화② 유리왕 대에 이르러 신라 사회의 모습이 어느 정도 드러나게 되므로 잠시 살펴보고 넘어가자. 옛날에 유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문학과 관련이 깊었거나 음악적 감성이 풍부했던 모양이다. 황조가(黃鳥歌)라는 청승맞은 연가를 지어 한반도 최초의 서정시인이 된 사람이 고구려의 유리왕이라면, 신라의 유리왕은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그에 못지않은 솜씨를 발휘한다(한자로는 고구려의 유리가 琉璃, 신라의 유리가 儒理로 서로 다르지만 둘 다 이두문일 테니 사실 같은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연대도 엇비슷해서 두 사람 다 1세기 초반의 왕이다). 또한 신라의 유리왕은 행정에도 남다른 감각을 선보인다. 일찍이 건국의 토대가 된 여섯 마을을 6부로 만들어 각각 새로운 성씨를 부여하고(..
세 편의 건국신화 외래인 집단이 많았으니 신라의 초기 왕계가 일정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왕이라는 직함의 명칭부터 혼란스럽다. 건국자인 박혁거세는 거서간(居西干)을 칭호로 썼다. 그러나 그의 아들 남해왕(南解王, 재위 기원후 4~24)은 차차웅(次次雄)이라는 다른 호칭으로 불린다. 이렇게 거서간과 차차웅을 한 명씩 배출한 뒤 그 다음 신라 왕들은 이사금(尼師今)이라는 직함을 가진다. 이사금이 4세기의 16대 흘해왕까지 약 300년간 사용되면서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다음의 내물왕(奈勿王)부터 22대 지증왕까지는 또 마립간(麻立干)이라는 호칭을 쓴다. ‘왕’이라는 중국식 명칭을 쓰는 것은 6세기 초반의 지증왕 때부터다(여기서는 그 이전의 시기라 하더라도 간편하게 그냥 왕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이주민 국가② 어쨌든 신화를 그대로 수용하면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열세 살 소년 박혁거세가 건국했다. 연도로 보면 고구려보다도 이르지만 당시 신라는 거의 촌락 규모에 불과했을 게 분명하다. 백제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온조만 해도 어느 정도의 신민들을 거느리고 나라를 열었으므로 처음부터 걱정한 것은 새 나라의 안위였다. 그러나 박혁거세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할 필요가 없다. 신라의 문제는 오히려 내부가 부족하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가 사과 한 알로 출발했다면 신라는 달랑 사과 씨 하나로 출발한 격이다. 따라서 백제는 그나마도 남에게 빼앗길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했지만 신라는 오히려 자꾸만 살을 붙여나가야 하는 형편이다. 그래서 신라는 건국하자마자 부지런히 외부..
이주민 국가 고구려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신라의 경우에도 나라가 있기 전에 먼저 사람들이 있었다. 건국신화에서 보았듯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한 여섯 마을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들 역시 그 지역의 원주민은 아니다. 『삼국사기』의 맨 첫머리에는 조선(고조선)의 유민들이 내려 와서 여섯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고 되어 있다. 이 점은 신라라는 국가의 독특한 성격을 암시한다. 우선 앞에서 보았듯이 건국신화도 독특하다. 신화적 성격이 유달리 강할뿐더러 같은 계통에서 출발한 고구려와 백제의 두 나라와는, 의도적이라고 여겨질 만큼 관련을 두지 않고 있다. 신라의 건국신화에서 신화적인 요소를 빼고 역사적인 요소만을 추출하면, 신라의 건국은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중국과도 무관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
포위 속의 생존③ 과연 온조는 마한의 약화가 가시화되자 곧바로 마한의 변방을 공략해서 영토를 확장한다. 마한은 반격할 힘이 없다. 마한이 최종적으로 병합되는 것은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의 일이지만 이미 온조 때부터 마한과 백제의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계기로 온조는 적극적인 팽창 정책으로 전환해서 치세 말기에는 이미 북쪽으로 임진강, 동쪽으로 오늘날 춘천에 이르는 강역을 이루게 된다. 기원후 20년, 최초로 그는 전국 순시에 나섰는데 무려 50일이나 걸릴 정도였다. 이제 백제는 신생국의 딱지를 떼고 왕국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건, 즉 일정한 강역과 백성을 얻은 것이다. 조상을 잘 둔 덕분에 온조 이후의 왕들은 바깥에 대해 어느 정도 안심하고, 주로 내치에 주력할 수 있게 된다. 예나 지금..
포위 속의 생존② 그런 형편에서 백제가 취해야 할 가장 좋은 생존 방법은 뭘까? 백제는 서쪽으로 바다에 면하고 북의 낙랑, 동의 말갈, 남의 마한으로 삼면이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다. 한 가지 다행스런 것은 세 세력이 연합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낙랑은 명색이 한나라의 군이고, 말갈은 만주족의 갈래로서 목문명권에 속한 부족이며【말갈이 나온 김에 지금까지 말하지 않 은 한반도 동북부, 즉 오늘날 함경도와 강원도의 사정에 관해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삼국시대가 본격화되는 3세기 무렵부터는 한반도 역사 속으로 편입되지만, 당시까지 이 지역은 한반도 문명권이라기보다는 반농반목(半農半牧) 성격의 만주 문명권이었다. 이곳에 있었던 부족국가로는 옥저(沃沮)와 동예(東濊)가 있는데, 옥저는 만주 동남부와 함..
포위 속의 생존 지금까지 살펴본 고구려 초기사에서도 연대나 사실에서 부정확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나마 고구려의 경우는 한결 나은 편이다. 한반도 중남부로 오면 상고사를 가리고 있는 안개층은 더욱 두터워진다. 왜 그런지는 알기 쉽다. 전등에서 멀어질수록 빛이 흐려지듯이 중국 문명권에서 먼 중남부는 반도 북부보다 문명의 빛이 어두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북부의 고구려와 낙랑이 동방으로 오는 문명의 빛을 흡수, 차단하고 있는 탓에 북부의 정세가 안정되기 전까지는 그 빛이 남부에까지 퍼질 수 없는 형편이다(그래서 백제와 신라의 역사가 선명해지는 시기는 고구려가 반도 북부의 확고한 패자로 떠오르는 4세기부터다). 하지만 지금 우리로서는 안개가 있으면 있는 대로 볼 수밖에 없다. 고구려가 나라 꼴을 갖추는 2세기 말..
물보다 흐린 피② 그러나 그토록 왕권 안정에 노력한 고국천왕이었지만 불행히도 그에게는 왕위를 상속시킬 아들이 없었다. 용의 그림을 다 그려놓고 눈만 찍지 못한 격이랄까? 게다가 그에게는 장성한 남동생이 셋이나 있었다. 다시 고구려의 왕위계승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결국 그가 죽으면서 해묵은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여기에는 그의 아내까지 한몫 거든다. 왕비 우씨는 남편의 죽음을 숨기고 시동생을 찾아갔다. 첫째 시동생 발기(發岐)를 유혹해서 왕비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의도다. 당시 고구려에는 형이 죽으면 시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옛 부여의 풍습이 남아 있었으니 오늘날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수상쩍게(?) 여길 행동은 아니다【이런 풍습은 전세계 여러 문명권에서 볼 수 있는데, 아마 남편이 죽으..
물보다 흐린 피 일단 신대왕의 왕위는 그의 아들인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179~197)이 계승해서 왕위계승의 문제는 진정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면 왕위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고국천왕의 동생들에게도 과연 부자 상속의 의지가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그 문제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당시 고구려의 상황을 말해주는 주요한 제도를 하나 보고 넘어가자. 우리에게 고국천왕은 진대법(賑貸法)이라는 획기적인 제도로 잘 알려져 있다. 194년에 처음 시행된 진대법은 사실 국상 을파소(乙巴素, ?~203)의 작품이지만, 원래 어느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모든 업적은 그 왕의 치적으로 기록되게 마련이니(그래서 동서고금을 통틀어 오래 재위한 지배자는 거의 대부분 치적도 많다) 고국천왕의 업적이기도 하다. 더욱이 을..
고구려의 성장통③ 대외적 성공으로 한껏 주가를 높인 수성의 경우가 그랬다. 랴오둥을 정벌한 혁혁한 전공을 바탕으로 그는 형인 태조왕을 능가하는 인기와 권력을 누리면서 내치에도 일일이 간섭하게 된다. 여기에는 아마 칠순을 훨씬 넘은 늙은 형의 말없는 양보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수성은 오랜 2인자의 생활을 겪은 뒤에 맛보는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있었다. 용맹과 포악은 동전의 양면 같은 걸까?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군인이 정치를 하면 안 된다는 걸까? 전장에서 더없이 용맹했던 수성은 권력자가 되자 곧바로 포악한 심성을 드러냈다. 형은 혈육의 처지였으니 동생이 하는 일을 그냥 봐넘겼겠지만 태조왕의 신하들은 그럴 수 없었다. 수성이 사실상의 왕으로 처신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한 태조왕의 우보 고복장은 이윽고 14..
고구려의 성장통② 그러나 결과적으로 귀족들의 선택은 좋았다. 일곱 살 소년으로 즉위한 고구려 제6대 태조왕(太祖王, 재위 기원후 53~146)은 이후 93년 동안 재위했고 119세를 살아, 고구려는 물론이고 한반도 역대 왕조의 모든 왕들 가운데 가장 오랜 재위에다 최장수를 기록한 왕이 되기 때문이다(그의 기록을 능가한 왕은 가야의 김수로왕인데, 나중에 보겠지만 그의 경우는 신화이므로 믿을 수 없다)【우리 역사상 모든 왕조의 왕들(왕계가 불확실한 가야와 삼한을 제외하면 고구려 28명, 백제 31명, 신라 56명, 발해 15명, 고려 34명, 조선 27명 모두 합쳐 191명이다) 가운데 태조왕은 재위 기간과 수명에서 단연 으뜸이다. 4세기의 장수왕도 워낙 오래 살아 그런 이름이 붙었지만 78년의 재위에 98..
고구려의 성장통 우리 역사상 최초의 정복군주였던 대무신왕(大武神王)은 사실 대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신생국 고구려를 크게 업그레이드한 왕이다. 특히 좌보와 우보라는 관직을 신설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한 것은 고구려가 고대국가로서의 위상을 지니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제도였다(좌보와 우보는 고구려 고유의 관직인 대보大輔가 분리된 것인데, 조선시대의 좌의정과 우의정이라고 보면 된다). 왕이 전권을 가지는 것까지는 좋지만 모든 국사를 홀로 처리한다면 그것은 왕이 아니라 부족장일 뿐이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에는 대가(한자로는 ‘大加’라고 쓰지만 당시에 어떻게 발음했을지는 확실치 않다)라는 씨족장들이 권력을 분점하고 있어 중앙집권이 시급한 과제였다. 그러므로 관직이 분화된 것은 초보적인 관료제로의 발돋움..
중국의 위기 = 고구려의 기회③ 그러나 고구려의 진출 방향은 남쪽의 낙랑이 아니라 북쪽의 랴오둥이다. 낙랑은 이미 한나라의 제후국이 아니라 사실상의 독립국이었으므로 고구려에게 특별한 위협이 되지 않는 데 비해, 랴오둥은 신생국 고구려의 생존을 위해 일단 제압해 놓아야만 했다. 한편 랴오둥 태수의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가 부여를 마음대로 정복한 행위는 제국에 대한 반란이다. 그래서 28년에 태수는 고구려를 선공하지만,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이미 고구려의 기세는 욱일승천하는 중이었다. 결국 그는 본전도 건지지 못했고, 고구려는 제국의 군대를 물리쳤다는 자신감마저 가질 수 있었다. 비록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으나 그래도 그 경험은 북으로 향하는대무신왕의 시선을 남쪽으로 돌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장차 고구려가 제국..
중국의 위기 = 고구려의 기회② 이러한 한나라의 위상 변화를 가장 잘 포착한 것은 삼국 중에서도 단연 고구려다. 사실 말이 삼국시대지 당시 백제와 신라는 간신히 역사에 명패만 올려놓았을 뿐 나라라 할 것도 없는 처지였다(후대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백제와 신라라는 이름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고구려에 비해 대륙 문명권에서 먼 한반도의 중부와 남부는 그때까지 국가라 부르기에도 부끄러울 만큼 보잘것없는 부족연맹체들이 난립하면서 문명적으로도 후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할 기회가 없을지 모르니 이 참에 반도 중부와 남부를 간단히 개괄하고 나서 고구려의 활약상으로 넘어가자. 건국신화는 백제와 신라의 것만이 전해지지만 두 나라가 탄생할 무렵 한반도 중남부에는 수십 개의 부족국가들이 존재하..
중국의 위기=고구려의 기회 앞서 고조선이 멸망하면서부터 한반도 역사는 독자적 정체성을 얻는 것과 동시에 중국 역사와의 관련성도 한층 커지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사실 고대 삼국이 신화로나마 건국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서 변화가 일어나면서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달라진 덕택이 크다. 어떤 변화일까?) 한4군을 설치한 무제의 시대는 한나라의 최전성기이자 쇠락기의 시작이기도 하다【나중에도 보겠지만 이것은 중국 역대 왕조들의 기본 코스다. 중국의 통일 제국들은 건국한 뒤 초기에는 불안정하게 유지되다가 50년쯤 지날 무렵에 유능한 황제(이를테면 한 무제, 당 태종, 명나라의 영락제)가 등장해서 기틀을 잡고는 곧바로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걸어 200여 년쯤 더 지나면 멸망하는 게 공식이다. 그 점에서도 한나라..
새 역사의 출발점④ 우선 내용으로 볼 때 박혁거세 이야기는 신화치고도 지나치게 신화적이다. 같이 알에서 나온 처지였지만 주몽의 경우는 탄생을 둘러싼 정황만 제거하면 그대로 역사라고 해도 좋을 만큼 스토리가 탄탄한 데 비해, 박혁거세는 날 때부터 왕위가 내정되어 있었으니 황당무계하기 이를 데 없다. 더욱이 박혁거세의 아내 알영부인(閼英夫人)의 경우는 한술 더 뜬다. 박혁거세가 13세에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뒤 5년이 지났을 무렵 용이 내려와 옆구리를 통해 여자아이를 낳는다. 닭의 부리를 입술 대신 달고 있던 그 아이는 사람들이 목욕을 시키자 부리가 빠지고 정상아로 돌아왔는데, 사람들은 이 신기한 여자아이를 박혁거세와 짝맺어준다. 김부식(金富軾)이 농간을 부린 게 아니라면 신라의 건국신화는 김부..
새 역사의 출발점③ 마지막으로 신라의 건국신화를 보자(건국될 당시에는 서라벌이라는 이름이었지만 편의상 신라로 통일하기로 하자. 초기 신라를 뜻하는 서라벌, 서벌, 사로, 사라 등의 이름은 모두 음차어이며 신라와 뿌리가 같다). 사실 연대로만 보면 박혁거세가 주몽보다 약간 앞선다. 그는 주몽보다 9년 앞선 기원전 69년에 부화했기 때문이다. 경주 부근에 있는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어느 날 하늘에게 왕을 내려달라고 빌었다. 기도를 마친 뒤 그들은 우물가에서 백마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가보니 붉은 알이 하나 있었다. 촌장들은 이 아이가 장차 세상을 빛나게 하리라는 예감으로 혁거세(赫居世)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바가지 같은 알에서 나왔다 해서 박(朴)씨 성을 붙여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박씨는 중국..
새 역사의 출발점② 신생국 고구려가 차츰 안정을 찾아갈 무렵인 기원전 19년, 고구려 왕궁으로 느닷없이 한 젊은이가 찾아온다. 그는 바로 주몽이 부여에 두고 온 예씨 부인의 아들 유리였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헤어진 탓에 정표로 남겨둔 부러진 칼을 맞춰보고서야 아들임을 확신한 주몽은 즉각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 덕분에 비류와 온조는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유리가 주몽의 적자라지만 비류 형제가 주몽의 친자였다면 20년 가까이 지나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를 찾아온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는 일이 가능했을까? 더구나 형제의 어머니 소서노는 고구려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지 않았는가? 유리가 태자로 책봉되는 데는 모르긴 몰라도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
새 역사의 출발점 시대가 달라졌으니 새 출발점이 필요하다. 단군신화가 고조선 시대를 열었듯이 이제 한반도 역사의 새 시작을 맞아 새로운 건국신화가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고구려의 주몽(朱蒙)【중국 측 사서,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한 『삼국사기』에 ‘주몽(朱蒙)’으로 표기되어 있어 주몽이라 부르지만, 실제로 이 발음과 같았는지는 의문이다. 주몽의 이름은 그 밖에도 추모(鄒牟)ㆍ상해(象解)ㆍ추몽(鄒蒙)ㆍ중모(中牟)ㆍ중모(仲牟)ㆍ도모(都牟) 등으로 다양한데, 고구려 시대에는 한자의 음만 따서 발음을 표기하는 이두문을 썼다. 하지만 그 이름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것은 ‘추모’다. 고구려인들이 세운 광개토왕릉비에 ‘추모(鄒牟)’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건국시조 이름을 소홀히 기록할 리가 있겠는가?..
마이너 역사② 이렇게 구축된 동아시아의 기본 질서와 구도는 20세기 초반 청나라가 멸망하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2천 년 동안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메이저 문명권 내에서도 몇 개의 마이너 문명이 성장하고 발전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한반도 문명이다【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중국에 대한 역대 한반도 왕조들의 사대주의도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문명적 관점에서 중국 문명은 동아시아 세계의 가장 밝은 빛이다. 따라서 이 빛을 중심으로 사방의 작은 문명들이 명멸하는 것은 사실 지극히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의 천자와 중화세계를 북극성에 비유하고 사방의 제후들과 소문명권들을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二十八宿)에 비유한 사마천(司馬遷)의 유학적 세계관은 고대 동아시아 세계를 올바르..
왕조시대의 개막 마이너 역사 신화로 시작해서 역사를 남긴 고조선과 함께 한반도 역사의 가장 초기 시대도 끝났다. 기원전 2333년이라는 단군기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고조선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를 뭉뚱그려 고조선 시대라고 부르는 데, 어떤 면에서는 달리 이름을 지어 붙일 만한 게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고조선이 우리 역사에 남긴 흔적은 상당히 뚜렷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은 언제 있었다 사라졌나 싶을 만큼 자취가 묘연하다. 더구나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한반도 역사에 등장하는 왕조들은 고조선을 계승하지도 않았고 문명적 연속성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은 어떤 의미일까? 그저 단군이라는 상징적인 시조..
지배인가, 전파인가③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군이 우리 역사의 태동기에 한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사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한4군의 지배 역시 양면적이다. 정복지를 지배했던 만큼 피정복민에 대한 상당한 정치적인 억압이 뒤따른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와 동시에 그 지배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명이 한반도에 이식되는 과정이 더욱 가속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4세기 초반까지 존속한 낙랑군은 한반도에 왕조 시대가 개막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기록에는 전하지 않지만 중국의 사상(유학)과 문자(한자)가 전래된 것은 바로 낙랑이라는 중국의 전초기지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낙랑군이 없었다면 과연 고구려가 한반도의 왕조 시대를 열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한군의 이민족 지배는 우리 고대사의 질..
지배인가, 전파인가② 우거왕은 과연 항전의 의지만큼 승산에 대한 믿음도 있었을까? 그건 확인할 길이 없으나 어쨌든 고조선은 예상 외로 오래 버텼다. 한나라는 수도인 왕검성을 1년 이상이나 공략한 끝에 비로소 고조선을 정복할 수 있었다. 중국 역사에서 이 사건은 변방 정리 작업에 불과한 작은 일이었지만, 한반도 역사에서는 엄청난 격변이었다. 이로써 단군조선 이래 2천 년 동안 존속해 오던 고조선이 마침내 최종적으로 멸망했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땅이 한나라의 영토로 바뀌었으니 이제 제국의 행정 체제에 따라 재편되는 것은 당연하다. 알다시피 한나라의 기본 체제는 군국제다. 초기에는 중앙정부의 힘이 약한 사정을 감안해서 봉건제의 속성을 취할 수밖에 없었으나, 무제의 시대에 이르러 오히려 진 시황제를 능가하는 강..
지배인가, 전파인가 어차피 한나라 초기의 권력 공백을 틈타 성립한 나라였기에, 위만조선은 처음부터 한시적 수명밖에 누리지 못할 운명이었다. 언제라도 제국이 안정된 기반 위에 오르면 동북 변방에 위치한 위만조선은 즉각 제국의 토벌 대상이 되리라. 과연 한 무제는 흉노를 멀리 내쫓은 다음 곧바로 동북방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에게 고조선은 천자에 대한 충성을 팽개치고 반기를 든 나라일 뿐 아니라 랴오둥의 패자로 군림하면서 부근의 중계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얄미운 존재였으며, 자칫 흉노의 잔당과 결합한다면 간신히 꺼놓은 불씨를 다시 타오르게 만들 수도 있는 골칫거리였다. 이윽고 한 무제는 칼을 뽑았다. 기원전 109년 그는 5만의 대군을 파견하여 고조선 정벌을 명한다. 한 갈래는 만리장성이 끝나는 산해관을 통해,..
중국과의 접촉③ 이제 고조선은 한층 더 중국과 밀접해졌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시대에는 지배집단만 이주민이었으나 위만조선 때부터는 관리들과 백성들의 상당수가 중국 출신이다. 사실 우리 역사니까 고조선을 마치 독립적인 나라인 것처럼 말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서는 아마 한나라의 동북쪽 변방에 위치한 일개 지방에 불과했을 것이다. 아울러 중국인과 한반도인 같은 구분도 그다지 명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제국에 반기를 든 유민들이기에 위만조선을 보는 한나라 중앙정부의 눈길은 고울 수가 없었다. 다만 한나라 조정으로서는 아직 동북 변방에 관심을 기울일 만한 처지가 못 된다. 왜? 바로 흉노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한자(漢字)와 한족(漢族) 등 중국적인 것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전할 만큼 한나라는..
중국과의 접촉② 그 무렵 고조선을 다스리고 있던 준왕(準王)은 위만에게 벼슬을 내주며 환대했으나 위만의 속셈은 후진국인 고조선의 관직에 있지 않았다. 그는 기회를 노려 왕위를 찬탈할 속셈이었다. 과연 이후의 사정은 그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 위만의 성공 사례에 자극받은 연나라의 하급 관리와 유민들이 잇달아 짐을 꾸린 것이다. 게다가 산둥을 터전으로 하는 제(齊)나라나 멀리 중원 옆에 있는 조(趙)나라의 백성들마저 동방 길을 택하면서 고조선으로 오는 유민의 수는 급증한다. 이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것은 시간문제다. 원래 준왕은 위만에게 서쪽 변방의 수비를 맡겼는데, 이는 곧 동쪽으로 오는 중국의 유민들을 차단해 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 되고 만다. 오히려 고향 ..
중국과의 접촉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인물은 진나라의 시황제였지만 진은 불과 14년 만에 멸망하고, 유방(劉邦)의 한(漢)나라가 항우의 초(楚)나라를 물리치고 새로운 통일 제국을 열기 때문에 실질적인 중국 최초의 제국은 한나라다. 그러나 통일을 이루었다지만 아직 신생 제국의 힘으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크게 확장된 넓은 대륙을 직접 통치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한 고조 유방은 기존의 제후 세력들에게 복종과 충성을 서약받고 봉토를 주어 다스리게 한다. 이 제도를 군국제(郡國制)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중국식 봉건제(封建制)의 원형이 만들어진 셈이다(유방보다 더욱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시황제는 중앙집권적 성격이 강한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한 바 있다). 이 새로운 체제하에서 제후들은 황제인 천..
두번째 지배집단④ 한편 그렇게 중국의 역사가 기틀을 잡아가는 시기에 한반도의 역사는 다시 기나긴 침묵 속에 빠져든다. 주나라와 기자조선이 성립한 기원전 12세기부터 전국시대가 끝나는 기원전 221년까지 약 천 년 동안 한반도에는 여전히 고조선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어떻게 존재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사실 고조선이 존속했던 것도 확실하다고 볼 수는 없다). 단군조선의 경우에는 하다 못해 단군이 2000세 가까이 살면서 다스렸다는 신화라도 전하지만, 기자조선은 얼마나 그 사회 체제가 유지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로서는 일단 다른 변화가 있기 전까지 고조선은 계속 기자조선의 체제로 존속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국 대륙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통일을 이루고 ..
두번째 지배집단③ 300여 년 동안 중원 일대를 지배하던 주나라는 점차 주변 세계가 문명의 빛으로 밝아짐에 따라 오히려 영항력이 줄어들게 된다. 급기야 주나라 왕실은 기원전 771년 견융의 침입을 받아 도읍을 호경(鎬京)에서 동쪽의 뤄양(洛陽)으로 옮기는 치욕을 당하고, 왕실만 겨우 보존하는 약소국으로 전락한다. 이 사건을 주의 동천(東遷)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신호탄으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가 개막된다. 이때부터 진시황제가 대륙을 최초로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 약 550년 동안 중국은 통일적인 구심점이 사라지고 제후국들이 주름잡는 기나긴 분열시대를 보낸다. 제후들은 상징적으로는 주나라 왕실을 섬기고 있으나 사실상의 독립군주나 다름없다. 이 화려한 분열의 시대에 중국 문명은 (그 후 두 번 ..
두번째 지배집단② 오늘날 국내 역사학계에는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단군을 한반도의 토착 세력으로 여긴다면 기자가 외부로부터 와서 단군조선을 대체했다는 게 영 찜찜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단군의 경우에도 한반도 토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까마득한 고대에 토박이냐 아니냐를 엄밀하게 따질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내외의 경계가 뚜렷해야만 그런 구분이 가능할 텐데, 그 시대에는 중국에도 한반도에도 그런 민족적 경계나 강역 상의 구분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단군조선이든 기자조선이든 실제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영역으로 삼은 영토국가는 아니었으며, 어쩌면 혹시 고만고만한 여러 부족집단들 중에서 어쩌다가 우연히 후대에까지 흔적을 남기..
두 번째 지배집단 기자는 원래 중국 은나라의 신하였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역사상 유명한 폭군이다(원래 전 왕조의 마지막 왕은 실제와 무관하게 폭군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새 왕조의 건국 세력이 전 왕조의 역사서를 편찬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난잡한 파티를 뜻하는 주지육림(酒池內林)이라는 말이 그에게서 나왔을까? 그런 자에게 충신의 말이 통할 리 없다. 기자는 주왕에게 충언을 했다가 그만 미움을 사서 옥에 갇힌다. 그러나 결국 무왕(武王)의 쿠데타로 은나라가 무너지자 기자도 석방되었다. 새로 주나라의 문을 연 무왕은 은나라의 정치범인 기자를 어떻게 대했을까? 당시 기자는 높은 경륜과 뛰어난 학덕으로 이름이 높았으니 아마 무왕은 그를 자기 사람으로 쓰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