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06/14 (67)
건빵이랑 놀자
하극상의 시대: 아랫물③ 1198년 늦봄에 노비인 만적(萬積, ?~1198)은 동료 노비들과 함께 개경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일장연설을 한다. “무신란 이후 천한 노비가 고관대작에 오르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장군과 재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 무신으로서 집권한 자들은 경대승과 최충헌을 제외하면 모두 근본 없는 천민 출신이었으니, 대단히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얼핏 시대를 앞서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슬로건 때문에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당시 대부분의 민란을 신분해방운동의 일환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그런 관점에는 문제가 있다. 물론 천민들이 봉기한 데는 사회적 신분 차별에 대한 불만감이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당시의 정황에서 민란..
하극상의 시대: 아랫물② 비록 반란으로 중앙정부가 무너지는 일까지는 당하지 않았으나 이미 고려 사회는 총체적인 하극상으로 온통 만신창이가 되었다. 백성들은 걸핏하면 관청을 불사르고 양곡을 탈취하는가 하면, 관청의 노비들마저 들고 일어나는 상황이다. 경대승(慶大升)의 집권기에 중앙 권력이 안정되면서 잠시 주춤하던 민란은 이의민이 명종의 초대를 받아 권좌에 오른 것을 계기로 다시 터져나온다. 그 가운데 특히 1193년 김사미(金沙彌, ? ~ 1194)와 효심(孝心, ? ~ 1194)이 일으킨 반란은 신라 부흥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경상도 청도에서 봉기한 김사미와 멀지 않은 울산에서 일어난 효심은 자연스럽게 한 무리를 이루었고 신라를 부활시키겠다고 호기롭게 주장했다. 그들도 아마 동향의 집권자인 이의..
하극상의 시대: 아랫물 정중부의 난으로 비롯된 하극상은 정치 무대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윗물이 흐리니 아랫물도 맑을 수 없는 건 당연할뿐더러, 원래부터 중앙집권력이 약했던 사회였으니 한복판이 혼탁해진 판에 변두리가 멀쩡할 리 없다. 정계에서 권력을 놓고 무신들이 푸닥거리 굿판을 벌이는 동안 그 혼란스런 분위기는 금세 사회 전반으로 전염되었다. 김보당과 조위총의 난은 그나마 관료 집단이 이끈 반란이었고, 따라서 권력을 목표로 한 쿠데타라고도 할 수 있으나 그 다음부터는 일반 농민이나 천민이 들고 일어났으니 말 그대로 ‘민란(民亂)’, 즉 하극상의 극치다. 봉기의 신호탄이 터진 것은 조위총의 난이 미처 끝나기도 전인 1176년 1월이었다. 공주의 명학소에 살던 천민인 망이와 망소이는 동료 천민들을 이끌고 공..
하극상의 시대: 윗물② 반란은 그럭저럭 진압되었지만 이제 고려는 본격적인 하극상의 시대를 맞았다. 전통적인 서열은 이미 무너진 데다가 누구보다 서열을 특히 따지는 문신들도 거의 씨가 말랐을 정도니 나라꼴은 말이 아니다. 이듬해인 1174년에는 서경유수인 조위총(趙位寵, ?~1176)이 들고 일어나 북부 40여 개의 성을 장악하고 개경까지 쳐들어 오는 기세를 떨친다. 비록 개경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금나라에까지 구원을 요청하며 서경에서 2년간이나 버텼다(당시 금나라는 40여 개 성을 바치겠다는 조위총의 요구를 거부하고 그가 보낸 사신을 고려 정부에 인계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국정의 총책임자도 룸살롱에만 틀어 박혀 있을 순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진압 사령관으로 서경에 간 이의방은 오히려 반군에게..
하극상의 시대: 윗물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 우리 현대사에서 군사쿠데타의 대명사인 박정희가 온몸으로 증명해준 격언이지만, 그의 까마득한 선배격인 정중부도 역시 그 철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단 출발은 좋았다. 1953년 장성이 되고 나서 8년 동안 겨우 별 하나 늘렸다가 쿠데타 이후 2년 만에 별 두 개를 제 손으로 갖다 붙인 게 박정희라면, 정중부 일당은 한 술 더 떠서 집단으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 정중부의 벼슬 자체는 종2품인 참지정사(參知政事)에 머물렀지만 드디어 그때까지 ‘신성불가침’이었던 2품의 관문을 뚫은 데다 문관직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이제 무관이 오르지 못할 나무는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쿠데타 정권의 근본적인 문제는 정통성의 결여에 있다. 쉽게 말해 한 번..
한 세기를 끈 쿠데타② 왕과 군신의 행차에 호위 병력이 없을 수 없다. 전쟁과 내전의 시대가 지나자 군대의 가장 주요한 임무가 그런 행사를 호위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 런데 일행이 나들이의 중간 휴식처인 흥왕사를 향할 즈음, 그렇잖아도 손대면 터질 것만 같은 군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터졌다. 의종의 명으로 호위병들은 수박(手搏, 태껸과 비슷한 전통 무예인데 태껸이 주로 발을 쓰는 데 비해 수박은 손을 쓴다) 시범을 보였는데, 여기서 그만 예순 살의 노장 이소응(李紹膺, 1111 ~ 80)이 젊은 병사와 겨루다가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한뢰(韓賴)라는 젊은 문신이 그의 뺨을 치며 놀려댄 것이다. 일단 분을 참고 흥왕사에 도착한 호위대장 정중부(鄭仲夫, 1106 ~79)는 즉각 이의방(李義方, ?..
한 세기를 끈 쿠데타 역사적 대형 사건은 대개 사소한 계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사건을 촉발시킨 배경은 오랜 기간에 걸쳐 숙성된 것이지만 실제로 일이 터져나오는 계기는 필연이라기보다는 우연이다. 기원 전 264년 시칠리아의 작은 도시 메시나가 시라쿠사와의 다툼으로 로마 원로원에 SOS를 치지 않았다면 포에니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원후 303년 서진의 사마영이 흉노 족장 유연을 팔왕의 난에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중국의 남북조시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계기들이 없었다 해도 기원전 3세기에 로마는 어차피 지중해 세계를 통일했을 테고 기원후 4세기에 중국은 오랜 분열기로 접어 들었겠지만, 어쨌든 계기로만 보면 지극히 사소한 것일 뿐 아니라 당시 그 계기를 만든 자들은 ..
쿠데타의 조건② 그나마 생활의 안정이라도 보장된다면 승진의 꿈은 포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신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그것마저 불안하다. 무신의 봉급은 그들에게 주어진 영업전(永業田)이라는 토지다. 군인들은 현직에 있는 한 영업전의 수조권을 가지고 있었고, 죽은 뒤에도 식구 중에 군인직을 승계하는 자가 있으면 이 권리를 세습할 수 있었다(직업[業]을 계속하는 한 영구히[永] 소유할 수 있다는 뜻에서 이름이 영업전이다). 전란이 많았던 초기에 군인의 역할이 컸던 만큼 당연히 영업전의 수혜 폭은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로 굴러간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거란의 침략을 받은 현종 때 변방에서 공을 세운 상장군 김훈(金訓, ? ~ 1015)과 최질(崔質, ? ~ 1015)은..
1장 왕이 다스리지 않는 왕국 쿠데타의 조건 강감찬(姜邯贊), 서희(徐熙), 윤관(尹瓘), 김부식(金富軾) -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쉽다. 모두 위기에 처한 고려를 구한 명장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 답이다. 위기의 국가를 구한 건 사실이나 ‘명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관이 아닌 문관이므로 명장이든 졸장이든 장수는 아니다. 이렇듯 문관이 안팎에서 벌어진 전란의 해결사로 역사에 이름이 남았다면 뭔가 사연이 있을 터이다. 960년에 송나라를 세운 조광윤은 자신이 후주의 절도사라는 신분으로 새 왕조를 건국했기에 처음부터 문치주의를 앞세웠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5ㆍ16 군사쿠데타를 성공시킨 박정희는 대통령 출마를 위해 군에서 전역하면서 “두 번 다시는 나 같은 불행한 군인(?..
6부 표류하는 고려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대내적 문제와 시대착오적인 중화세계의 일원으로 남으려 한 대외적 문제는 결국 고려 사회의 붕괴를 앞당긴다. 내부 문제는 무신정변을 불러 때이른 ‘군사독재’를 성립시켰고, 외부 문제는 몽골의 침략을 불러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식민지 시대를 열었다. 몽골이 물러가자 고려는 부활의 기회를 잡았으나, 신진사대부들은 다시금 중화세계의 낡은 우산 밑으로 기어든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삼국사기』 미스터리② 그렇다면 건국한 지 200년이나 지나서 새삼스럽게 삼국의 역사서를 편찬할 마음을 먹게 된 이유도 분명해진다. 우선 중국의 송나라가 멸망했으니 이제 고려는 사대의 대상을 잃었다. 더구나 중국의 중심인 중원을 오랑캐인 금나라가 차지하면서 고려 정부에게는 이제부터 모든 일을 독자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자각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 전까지 몰랐던 삼국에 관한 역사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그런 배경에서였을 것이다(인종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하도록 압력을 가한 인물이 당시 금의 황제인 희종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금의 입장에서도 고려가 송에 대한 사대관계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하는 게 유리했을 테니까). 하권에서 보겠지만 17세기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한 뒤 조선에서 실..
『삼국사기』 미스터리 묘청(妙淸)이 자랑스런 독립당이 아니라 ‘위장된 사대당’이었다는 사실은 신채호 같은 민족사학자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당시 사대주의의 핵심 인물은 물론 묘청이 아니라 김부식(金富軾)이다. 묘청의 난을 평정한 김부식은 그야말로 팔자가 늘어졌다. 이자겸(李資謙)의 몰락으로 외척 세력이 제거되었고, 묘청(妙淸)의 몰락으로 서경의 라이벌이 뿌리 뽑히면서 이제 세상은 개경 귀족들의 것이 되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 김부식은 정지상(鄭知常)이라는 학문적 라이벌이자 최대의 정적도 제거했고 반란 진압의 공로로 최고위직인 문하시중 자리까지 따냈다【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정지상(鄭知常)을 즉각 살해한 데서도 보듯이 김부식(金富軾)은 ‘점잖은 유학자’ 답지 않게 정적을 제거..
북벌의 망상③ 묘청(妙淸)은 새 나라를 세운 것이었으니 반란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고려 왕조로 볼 때는 명백한 반란이다(사실 그는 기사 소식을 당당하게 고려 조정에 전했으며, 국호와 연호를 제정하고 칭제까지 했으면서도 직접 황제나 왕을 자칭하지도 않았고 별도로 왕을 옹립하지도 않았다). 개경의 리더인 김부식(金富軾)은 즉각 인종에게서 평서원수(平西元帥), 즉 서경을 평정하기 위한 총사령관이라는 직함을 받고 토벌군을 조직한다. 맨먼저 그가 한 일은 묘청(妙淸)이 서경에서 그랬듯이 개경에 있는 서경의 스파이들을 잡아죽이는 일이다. 묘청이 급작스럽게 거사한 탓에 미처 서경으로 도피하지 못한 정지상(鄭知常)과 백수한은 김부식에게 잡혀서 처형당하고 만다. 이제 삼성은 ‘일성(一聖)’으로 줄었다. 묘청의 기대와는 ..
북벌의 망상② 왕의 태도에서 가능성을 읽은 묘청(妙淸)은 1128년 말에 석 달 동안 토목공사를 벌여 서경의 명당자리에 대화궁을 짓고 천도 준비를 완료했다. 혹한기를 무릅쓴 강행군이라서 백성들의 원성을 좀 샀지만, 어차피 고려의 수도가 서경으로 옮겨 온다면 그 원성은 곧 갈채로 바뀔 터이다. 대내적으로는 추락할 대로 추락한 왕권, 대외적으로는 오랑캐인 금나라에게 사대하는 치욕, 점차 인종의 마음은 그런 사태의 해결책이 천도에 있다는 쪽으로 기운다. 묘청은 지덕(地德)이 강한 서경으로 천도하면 왕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은 물론 금나라도 저절로 항복하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오늘날 같으면 미신으로 일축해 버리겠지만 풍수지리와 도참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시기였으니 그런 묘청의 주장이 먹혀..
북벌의 망상 척준경을 탄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자겸(李資謙)이 제기되고 나서 잠시 척준경은 이자겸의 역할을 대신하는 듯했다. 비록 그는 이자겸의 파트너였다는 전과가 있기는 하지만 그가 신발을 거꾸로 신지 않았다면 왕정복고는 불가능했으므로 누구도 그의 전력을 문제삼기 어려웠다. 하긴, 인종 스스로가 애초에 그의 과거를 용서하겠노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성공한 쿠데타라고 해서 처벌할 수 없다면 쿠데타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는 셈이다. 언제든 정권이 바뀔 수 있는 나라는 나라라고 부를 수 없다. 사람을 반쯤 죽여놓고도 치료만 해주는 것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면 폭력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척준경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든 제거되어야 했다. 그러나 누가 감히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
국왕의 쿠데타② 아무리 장인이자 외할아버지라 해도 인종은 이자겸이 노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때마침 1126년 이자겸의 전횡에 반대하는 대신들은 이제 열일곱 살이 된 인종에게 이자겸 일파를 제거하자고 부추긴다. 인종은 즉각 동의하고 비밀리에 음모를 꾸미는데, 말하자면 국왕이 반란을 획책하는 셈이니 왕의 체면도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자겸은 국왕의 반란을 진압할 만한 물리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자겸의 동업자이자 군사력을 담당한 그 인물은 바로 윤관(尹瓘)의 부관으로 9성을 개척하는 데 공을 세운 바 있는 척준경이다. 김찬(金粲), 안보린(安甫鱗), 지녹연(智祿延) 등 왕당파는 문벌 세력이 나라를 주무르는 데 반대하는 하급 무관들을 조직해서 착실히 반란을 준비한다. 이윽고 거사일을 맞아 그들은 ..
국왕의 쿠데타 금나라의 전광석화 같은 팽창 정책으로 한때 동아시아의 삼각 정립을 이루었던 3국의 신세는 처량해졌다. 요나라는 완전히 멸망했고 송나라는 망명정권으로 전락했다. 홀로 남은 고려는 이미 여진과 형제 관계를 약속한 바 있지만 동아시아의 새 주인이 그 정도의 계약에 만족할지는 의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북송을 멸망시킨 뒤 여진은 그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고 강요한다. 고려 조정에서는 당연히 반대했지만 유독 한 사람 당대 최고의 실력자만 홀로 금을 섬기자는 사금책(事金策)을 주장해서 마침내 관철시켰는데, 그는 바로 이자겸(李資謙, ?~1126)이라는 자였다. 당시 그는 지군국사(知軍國事, 앞서 ‘권지국사權知國事’의 경우처럼 ‘知’란 ‘맡는다’는 뜻이니, 군대와 국가의 총책임자라고 보면 되겠다)..
북방의 새 주인③ 적에게서 배운다는 말은 바로 금나라로 변신한 여진을 가리키는 말이리라. 오랜 기간 거란의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던 여진은 나라를 세우자마자 일찍이 거란이 보여준 행보를 답습하는데, 그 속도가 훨씬 빠르고 규모도 훨씬 크다. 요나라가 그랬듯이 금나라도 맨먼저 착수한 사업은 고려 길들이기였다. 언제 고려를 상국으로 섬겼던가 싶게 금나라는 건국 직후인 1119년에 고려에게 형제의 맹약을 강요한다. 9성의 자진 반납으로 기가 꺾인 예종은 여진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거란이 그랬듯이 여진의 목적은 한반도 정복에 있지 않았으니 그것은 후방 다지기에 불과하다. 이후 그들의 스피드는 더욱 빨라진다. 1125년에 그들은 마침내 랴오둥의 요나라를 멸망시켜 해방을 이루는가 싶더니 2년 뒤에는..
북방의 새 주인② 하지만 유목민족답게 기병 전술에 능한 여진은 오히려 엉성하게 편제된 고려 정벌군을 크게 무찌르며 기세를 올린다. 이때 숙종에게 발탁된 인물이 비운의 스타 윤관(尹瓘, ?~1111)이다. 기병 없이는 여진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별무반(別武班)이라는 군대를 편성하는데, 이름 그대로 여진 정벌을 위해 별도로 창설한 임시 군대다. 비록 숙종은 별무반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1107년에 윤관은 드디어 별무반을 선봉으로 삼아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동북 원정에 나선다. 아무리 여진이 날랜 기병대를 가지고 있고 한창 끗발이 오르는 시기라 해도 변변한 국가조차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고려의 대군을 맞아 이길 수는 없다. 결국 이 전쟁은 윤관과 척준경(拓俊京, ?~..
북방의 새 주인 성공하지 못한 개혁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이 용의 머리로 시작했다가 뱀의 꼬리로 끝나자 그렇잖아도 좌초할 지경인 송나라 호는 더욱 깊은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더구나 송 나라가 낭비해 버린 ‘찬스 카드’는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것이었다. 한동안 힘의 공백 상태였던 북방에서 새 주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거란을 대체한 여진이 바로 그들이다. 거란과 고려가 압록강 일대를 두고 흥정을 벌일 무렵 여진은 두 강대국의 손아귀에 운명을 맡긴 약소 민족의 처지였다.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북풍이 거세어지는 시대인 데다 더구나 그들은 거란과 고려보다 더 풍부한 잠재력을 지닌 민족이었다. 쇠가 달궈졌을 때 두드리지 못하면 좋은 연장을 얻을 수 없는 법, 카이펑을 함락시..
완성과 동시에 시작된 해체② 정상에 올랐으면 내려가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중국식 제국의 완성태인 송나라는 정상에 오른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일찌감치 하산을 서둘러야 했다. 요나라에게 치욕을 당한 것은 그 예고편에 불과하다. 자칫하면 예정보다 훨씬 이르게 제국의 문을 닫을 뻔했던 송나라가 명패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행히도 이후 요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려의 현종이 죽은 해(1031년)에 요의 성종이 죽으면서 요나라는 더 이상의 대외적 팽창을 포기하고 그간에 얻은 성과를 토대로 체제 안정을 도모하는데, 그 덕분에 송과 고려에 대한 북방의 압력은 한층 느슨해졌다(그러나 요나라는 번영을 얼마 누리지 못하고 곧 쇠퇴한다). 이 공백을 이용해서 고려도 짧은 번영기를 맞았고 서둘러 체제 정..
완성과 동시에 시작된 해체 고려 왕조는 왕건이 세웠으나 광종(光宗)과 성종(成宗)이 다듬었고 문종이 최종 마무리 작업을 하여 완성된 나라다. 국가 재정에서 가장 중요한 토지 제도를 비롯하여 지방행정구역 재편, 법 체계 등 제반 국가 체제를 완비한 게 문종 때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려가 건국되고 나서 나라꼴을 갖추게 되는 데는 무려 150년이나 걸린 셈이다. 어쨌든 그 결과로 그때까지의 한반도 역사상 가장 완벽한 왕국이 성립하게 되었다. 정복국가의 수준에 머물렀을 뿐 행정국가는 이루지 못했던 고대 삼국, 중국의 한 지방정권으로서 존재했던 통일신라와 달리 고려는 이제 명실상부한 왕국이 된 것이다. 또한 비록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는 처지이긴 하나 그래도 송, 요와 더불어 고려는 동아시아 국제..
전성기 코리아② 그러나 좋게 말하면 다원화지만 나쁘게 말하면 고유한 정체성이 부족하다는 말도 된다. 전성기의 고려 사회에서 크로스오버와 퓨전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곧 당시에 그만큼 지배적인 이념이 없었다는 뜻이다. 문묘종사를 제도화했던 현종이 독실한 불교도이기도 했고 궁궐에서 도교 제사도 지냈다는 사실이 바로 그런 점을 말해준다(물론 그것 역시 왕건이 물려준 유산이다). 이후의 국왕들도 이념적으로 잡탕을 즐긴 점에서는 마찬가지인데, 대표적인 경우가 예종(睿宗, 재위 1105 ~ 22)이다. 그는 최초로 경연(經筵)을 도입했고, 팔관회에서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읊었으며, 최초의 도관(道觀)인 복원궁을 건립했으니 가히 퓨전의 정수라 할 만한 군주다【경연이란 신하가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의하는 ..
3장 안정의 대가 전성기 코리아 1010년 요나라의 2차 침략을 받았을 때 현종은 대장경을 조판할 것을 명했다. 그 의도는 부처의 힘을 빌려 전란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거란도 역시 독실한 불교 국가였으니 부처라 해도 과연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 난감했을 것이다(이 대장경의 판은 나중에 몽골 침략 때 불타 없어졌고, 지금 전하는 팔만대장경은 몽골 침략을 막으려는 목적에서 새로 조판한 것이다). 차라리 현종으로서는 나주까지 도망치지 말고 개경에 남아 궁성과 수도의 백성들을 구하는 게 훨씬 당당한 태도가 아니었을까? 대장경의 조판 이외에도 현종은 성종(成宗)이 중단시켰던 거국적 불교 행사인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시켰으니 불교에 대한 신심이 상당히 깊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
동북아 국제사회② 얼굴을 들지 못하고 귀국한 소배압은 성종에게서 호된 꾸지람을 듣고 보직 해임되었으나, 실은 그 전략적 미스가 어찌 그의 탓일까? 성종은 강동 6주를 공략하지 않고 지나친 게 패인이라고 탓했지만 10만의 병력을 투입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그건 소배압의 단독 판단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그것으로 3부작 미니시리즈는 마무리되었다. 전란의 피해는 전장이 된 고려가 물론 더 컸지만 병력 손실이 큰 요나라도 그에 못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성종은 현종의 입조와 강동 6주의 반환 문제는 없던 것으로 하고 1차전이 끝날 당시의 상황으로 되돌리기로 결심한다. 즉 고려가 송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다시 요의 연호를 사용하는 정도로 마무리하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성종은 1019년 두 차례에 걸쳐 화해의..
동북아 국제사회 비록 드라마는 조기 종영되었어도 아직 미니시리즈가 다 끝난 건 아니다. 스토리가 2부작으로 마무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출자인 요 성종은 피곤하지만 어떻게든 이 인기 없는 시리즈를 끝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로서는 고려의 현종이 입조의 약속을 지켜준다면 그것으로 종결을 지으려는 마음도 있다. 하지만 현종은 사신을 보내 병 때문에 출연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한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갓 배우가 감독의 요구를 거부했다는 생각에 성종은 열받지 않을 수 없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3부를 제작할 구실은 된다. 그러나 이미 2부작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성종은 가급적이면 여기서 시리즈를 끝내고 싶다. 그래서 그는 출연 거부에 따른 피해 보상을 요구한다. 즉 사전에 출연..
전란에의 초대③ 강력한 라이벌인 대량원군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김치양과 헌애 부부는 그를 절에 보내 승려로 만들어 놓고도 안심이 안 돼 여러 차례 암살을 시도한다. 위험을 감지한 목종은 서북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장수 강조(康兆, ? ~ 1010)를 불러들였는데, 그것은 대량원군에게는 행운을 가져다주었으나 목종 자신에게는 오히려 목숨을 앞당기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개경의 혼탁한 정세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강조는 군사 5천을 거느리고 개경으로 와서 김치양 일당을 잡아 죽였다. 목종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는 거기서 멈추려 하지 않았다. 내친 김에 강조는 대량원군을 왕으로 옹립하고는 이내 목종마저 살해해 버린 것이다. 개국 초기의 내전 이후 오랜만에 재발한 킹메이커의 쿠데타다. 더구나 그 킹메이..
전란에의 초대② 이것으로 안개 정국은 끝났고, 동아시아 3국의 서열이 정해졌다. 고려에겐 요나라가 형님이고 요나라에겐 송나라가 형님이니까 공식 랭킹은 송-요-고려의 순서다. 그러나 국력으로 평가한 실제 랭킹 1위가 거란이라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다. 랴오둥을 근거지로 삼고 중원과 한반도를 휘하에 거느리게 된 거란, 영토와 위세로 본다면 옛 전성기 고구려의 후예는 고려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다(다만 거란은 오늘날의 한국처럼 역사를 관리해줄 후손이 없었기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한족이 아닌 민족으로서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을 건설했다는 자부심에 가득한 요 성종의 심기를 건드리는 게 있다. 그것은 막내 격인 고려가 작은 형님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형님 대우를 하지 않는다는 ..
전란에의 초대 도덕성의 문제는 있지만 어쨌든 고려의 입장에서 국가적 위기를 외교로 넘긴 서희(徐熙)의 성과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실리외교’의 전형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명분이 실리보다 중요하던 시대에 실리외교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법이다. 과연 고려 조정의 대신들은 대부분이 서희의 외교를 폄하하거나 반대한다. 신라계 귀족들의 그런 태도는 사실 예견된 것이었다. 한족 왕조인 송나라를 저버리고 오랑캐인 거란에 굴복하다니, 그런 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여론을 충분히 예상했음에도 서희가 ‘굴욕적인’ 외교를 강행한 데는 아마도 그가 지방 토호 출신이라는 배경이 한 몫 하지 않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서희에게는 신라계가 장악한 중앙정부를 다른 색깔로 바꿔 보려는 ..
외교로 넘긴 위기② 다행히도 운은 아직 고려의 편이다. 항복하겠다는 대답을 듣지 못한 소손녕은 급한 마음에 군대를 움직였다가 청천강 부근의 안융진(安戎鎭)에서 가로막혀 주춤하게 된다. 어차피 고려의 항복만 받아가면 될 뿐 정복하려는 의지는 없었으므로 그는 다시 고려 측에 대화를 요구한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했던가? 고려 측 협상 파트너는 당연히 주전론을 주장한 서희(徐熙)가 될 수밖에 없다. 거란군 진영에 마련된 협상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은 우선 기 싸움으로 시작한다. 소손녕이 신하의 예를 갖추라고 하자 서희는 그러지 말고 대등한 관계에서 협상하자고 맞섰다. 자랑거리는 못 되지만 한반도 역대 왕조들은 모두 중국의 한족 왕조 이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머리를 굽힌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서희의 당당한..
외교로 넘긴 위기 성종이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고 뿌듯해 하던 그 해에 압록강 부근의 여진족은 머잖아 요나라 황제 성종이 침공해 오리라는 불길한 소식을 고려 측에 전한다(고려의 왕은 成宗이고 요의 황제는 聖宗이지만 공교롭게도 한글 발음으로는 같다). 당시 여진은 랴오둥의 요나라와 대동강 이남의 고려 사이에 해당하는 중립지대에서 살고 있었으나 아직 부족 통일을 이루어 국가 체제를 형성할 만한 단계는 아니었다(이렇듯 랴오둥은커녕 옛 고구려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압록강 주변 지역조차 관장하지 못했으니, 영토적으로 봐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말이 중립이지 실상 여진은 이 지역을 제패하려는 거란에게서 시달림을 받고 있었으므로 상대적으로 고려에 친화적이었다. 고려에 거란의 준동을 경고해..
중국화 드라이브② 중앙관제가 자리잡았으면 그 다음 차례는 지방이다. 물론 지방은 아직 호족들의 세상이었으므로 함부로 중앙집권식 제도를 추진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마냥 방치해 둔다면 나라꼴이 나지 않는다. 뭔가 절충책이 필요한 상황에서 최승로가 제안했던 방책은 전국 각지에 지방관을 상주시키는 것이었다. 지방관이 직접 지방의 행정을 담당할 수는 없다 해도 최소한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연락관의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성종은 전국의 주요 도시에 12목(牧)을 두고 목사(牧使)들을 파견한다(쉽게 말해서 전주나 상주처럼 주州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 즉 주현이 목으로 편성되었다고 보면 된다. 이때 생겨난 목은 조선시대에도 지방행정구역으로 사용되며, 오늘날 도道라는 행정구역의 시초이기도 하다). 목사가..
2장 고난에 찬 데뷔전 중국화 드라이브 송나라 초기에 고려가 잠시 중국과 교류를 단절한 이유는 새로 생긴 송나라가 과연 대륙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기야 907년에 당나라가 망한 뒤 50년도 채 못되는 기간에 벌써 다섯 왕조가 교체되었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우려다. 게다가 당시 광종(光宗)은 5대의 마지막 왕조인 후주와 우호를 맺은 지 얼마 안 되었던 터라, 후주의 무관으로 있다가 제위를 빼앗고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 수는 없었다(그랬기에 광종은 연호를 별도로 정하고 황제를 자칭하며 한껏 호기를 부린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광윤이 대륙의 새 임자라는 사실은 점차 분명해진다. 그래서 972년에 광종은 송에 사신을 보내 수교를 청하는데, ..
셋째 모순 먼 친구 vs 가까운 적② 하지만 그건 중대한 판단미스였고, 더구나 고려가 신흥국임을 고려한다면 심각한 사태를 부를 수도 있었다. 927년에 발해를 멸망시키면서 북방의 패자로 발돋움한 거란은 대륙의 지배자인 송나라마저 위협하는 강성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거란은 처음부터 랴오둥 진출을 포기했던 발해보다는 분명히 한 급 위의 민족이었다. 그들은 최소한 랴오둥을 터전으로 삼지 않으면 왕조를 존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으며, 나아가 랴오둥을 발판으로 대륙의 중심인 중원을 정복하려는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왕건이 궁예에게서 정권을 인수받기 2년 전인 916년에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국호를 중국식 이름인 요(遼)로 바꾸고 연호를 제정하고 황제를 칭한 것을 보면 그 야망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
셋째 모순 먼 친구 vs 가까운 적 또 하나의 모순이 없었다면 고려 왕조는 그런 대로 별탈 없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첫째 모순 때문에 완벽한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고 둘째 모순으로 인해 정상적인 관료제 사회조차 이룰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런 정도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셋째 모순은 고려 사회 내부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훨씬 강력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훈요 10조」의 4항과 5항에서 왕건은 거란을 금수(禽獸)의 나라로 규정하고 배척하라고 가르치면서 서경을 중시하라고 한다. 거란이라면 당시 랴오둥을 장악하고 있던 북방 민족이므로 고려와 거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왕건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그들을 적대시하고 그 적대감을 시위하듯이 서경을 ..
소유권과 수조권② 문제는 여기서도 이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싹튼다는 점이다. 이념적으로 전국의 토지 소유권자는 국왕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각 수조권자(관리)가 자신에게 할당된 토지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관리가 현직에 있을 경우에는 수조권과 소유권이 일치하므로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 관리가 퇴직하고 나면 어떻게 될까? 산관(散官, 퇴임한 관리)은 임기가 끝났으므로 원칙적으로는 토지의 수조권을 반납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퇴직금이 있는 것도 아니니 수조권을 반납하고 나면 관리와 그의 식솔들은 먹고 살 길이 없다. 그래서 관리가 퇴임한 뒤에도 사실상 수조권은 계속 유지된다. 이런 관행이 자리잡으면서 그 토지의 수조권은 자연스럽게 자식에게도 상속된다. 애초에 녹봉으로 받은 토지가 사실상..
소유권과 수조권 광종(光宗)은 왕위계승 문제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해결했다. 경종은 광종의 맏아들이니까 고려 왕실로서는 개국 이래 처음으로 평온한 왕위세습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갓 스물의 이 젊은이는 아버지와 같은 카리스마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가 추진한 개혁의 후유증에 심하게 시달려야 했다. 광종 대에 대대적으로 숙청된 호족 세력들이 자기들끼리 살벌한 복수극을 펼친 것이다. 그나마 그들이 한 목소리로 결집되어 왕을 탓하고 나서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 그랬더라면 경종은 불과 6년밖에 안 되는 재위 기간마저 유지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 짧은 치세 동안 경종은 유일한 치적이자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업적 하나를 남기는데, 그게 바로 전시과(田柴科)라는 토지제도다. 통일왕조답지 않게 고려는 그..
과거제가 어울리지 않는 체제② 과거제(科擧制)는 처음부터 실패였다. 하기야, 애초에 무력으로도 이루지 못한 중앙집권을 과거제라는 제도로써 이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과거제는 처음부터 근본적인 목적을 실현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사실 그런 한계는 과거제 바깥에서만이 아니라 안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고려의 과거제는 제도 자체로도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릇 국가고시를 통해 관리를 선발하는 방식이라면 모든 관리, 적어도 일정한 직위 이상의 관리는 반드시 과거를 통해서만 임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만이 고려 사회의 유일한 등용문은 아니었다는 게 문제다. 적어도 가문이 좋은 집안의 자제들은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관직에 오를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음서(蔭敍)라는 제도다. 말 그대로 조..
과거제가 어울리지 않는 체제 과거의 핵심이 유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광종(光宗)이 과거제(科擧制)를 시행한 데는 단순히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신흥 왕조인 고려를 유학 국가로 만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요컨대 과거제의 ‘형식’은 (관리 임명권을 중앙에서 쥐게 되므로) 호족 세력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고, 과거제의 ‘내용’은 (유교 체제를 성립시키는 데 도움이 되므로) 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광종은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평생의 노력을 기울인 군주였으며, 실제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아쉽게도 그의 성적표는 별로 좋지 않다. 왜 그럴까? 문제는 고려 사회 자체가 과거제와 어울리지 않는 체제였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과거제..
둘째 모순 관료 vs 귀족③ 더구나 유학은 불교나 도참설에 비해 훨씬 체계적이고 문헌에 의존하는 학문이므로 과거의 과목으로 채택하기에도 최고다. 모름지기 시험이라면 문제를 출제할 수 있어야 하고 교과서도 필요한 법인데, 유학은 마치 과거를 위해 태어난 학문인 듯 거기에 딱 들어맞았다. 이렇게 해서 시행된 과거의 과목은 명경과(明經科), 제술과(製述科), 잡과(雜科)의 세 가지였다. 우선 명경과란 이른바 5경(『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으로 대표되는 유학의 경전들을 달달 외워서 문제를 푸는 것이니, 오늘날 대학입시로 말하자면 수학능력시험에 해당한다. 또 제술과는 시(詩), 부(賦, 산문), 송(頌, 제문), 책(策, 시사) 등 여러 장르의 글을 짓는 것이니, 이를테면 논술고사다. ..
둘째 모순 관료 vs 귀족② 그러나 광종(光宗)의 개혁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호족들의 물리력은 제압했지만 지역에서 그들이 행사하는 행정력은 여전하다. 사실 치열한 왕위계승전이 끝나고 나라가 정상화된 지금에 와서는 그들에게도 군사력은 부차적인 권력 기반일 뿐이다. 그들의 실제적인 권력은 자기 마음대로 지방 관리를 임명하고 지방행정을 주무르는 데서 나온다. 따라서 그것마저 뿌리 뽑지 않으면 호족들의 세상은 여전할 것이다. 그래서 광종은 958년에 2차 개혁을 추진하는데 그게 바로 과거제(科擧制)다【오늘날 우리는 시험을 통해 인력(공무원, 학생 등)을 선발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지만, 그래서 공부를 잘해야 성공한다는 걸 철칙처럼 여기지만, 막상 과거가 처음 실시될 때는 얼마나 낯선 것이었을까? 사실 이런 ..
둘째 모순 관료 vs 귀족 피비린내 나는 내전 끝에 즉위한 처지였으니 광종(光宗)은 당연히 은인자중하지 않을 수 없다. 배다른 형 혜종은 불과 2년, 친형인 정종은 겨우 3년간 재위했고, 둘 다 한창 젊은 나이에 죽었다. 왕권을 능가하는 호족들의 권력, 광종으로서는 괴로운 일이었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왕위는커녕 목숨조차 위협받을지 모른다. 그가 즉위 후 7년간이나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광종(光宗)은 결코 왕위 유지에만 급급한 쭉정이가 아니었다. 비록 자신이 즉위하는 데도 호족의 도움을 입기는 했지만 호족들의 세상을 그대로 놔둔다면 고려는 무질서와 무정부 상태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형들의 재위 기간을 훌쩍 뛰어넘고 어느 정도 왕권이 공고해지자 이윽고 광종은 서서히 질서를 바로잡는 일에..
킹메이커들의 내전② 만약 왕규가 혜종을 암살했다면 그건 죽 쒀서 개 준 격일 것이다. 광주원군은 단독 대권후보가 아니었고 또 다른 막강한 라이벌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주 호족인 유씨를 외가로 둔 왕자 요(堯)는 외가만이 아니라 장인도 든든한 ‘빽’이다(그의 장인은 바로 견훤의 사위로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공을 세운 박영규였는데, 왕건도 박영규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인 적이 있으니 왕요도 배다른 형인 혜종처럼 아버지 왕건과 부자간이자 동서간이 된다). 게다가 그는 혜종에 이어 왕건의 차남이므로 형식상의 서열로 봐도 광주원군보다 앞선다. 사실 혜종이 살아 있을 때부터 왕규가 진정한 적수로 여겼던 것은 혜종이나 박술희가 아니라 바로 충주 세력이었다. 과연 왕규가 걱정한 것처럼 혜종이 남긴 왕위는 광주원군이..
킹메이커들의 내전 왕건이 각지에 뿌려놓은 혈연의 씨앗은 그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왕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으나 그의 사후에는 오히려 불화의 씨앗으로 변한다. 많은 아내를 두고 많은 아들을 얻은 것까지야 당시의 사회적 통념에서 보면 복 받았다 하겠지만, 그 때문에 상속자가 많아진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된다. 943년에 왕건이 죽자 일단은 맏이인 무(武)가 혜종(惠宗, 재위 943~945)으로 즉위하지만, 그가 오래 버티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는 비록 맏이라는 장점은 있으나 스물다섯 명의 왕자들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더구나 그는 그 왕자들의 실제적 서열을 가르는 기준에서 결격 사유가 있다. 그 기준이란 바로 외가의 힘이다. 왕자들 모두 아버지는 왕건이므로 진짜 킹메이커는 어머니 집안의 세..
첫째 모순 중앙정부 vs 지방 호족②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자칫 호족들이 왕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면 곤란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종의 안전장치가 필요해지는데, 일단 그가 생각한 장치는 신라의 상수리제도를 모방한 기인(其人)제도다. 그러나 지방 관리가 아닌 호족의 자제를 수도에 볼모 삼아 억류하는 것이므로 상수리보다는 강력하지만, 그것으로 호족 세력을 완벽하게 통제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따라서 더 안전한 통제 메커니즘이 필요한데, 여기서 왕건은 아주 대단히 효과적인 방안을 구상해낸다. 혈연보다 더 강력한 안전판이 또 있을까? 호족들과 통혼으로 혈연관계를 구축하면 된다. 호족들은 국왕의 권위를 빌릴 수 있고 국왕은 호족들의 힘에 의지할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그 덕분..
1장 모순된 출발 첫째 모순 중앙정부 vs 지방 호족 무혈 쿠데타로 고려를 세웠고, 평화롭게 신라 정권을 인수했으며,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후백제마저 접수해 후삼국 통일을 이룬 왕건은 정말 억세게 운좋은 사나이였다. 그러나 역시 공짜란 없는 걸까? 두꺼비한테도 헌 집을 줘야 새 집을 얻을 수 있듯이 대개 새 왕조가 들어설 경우에는 헌 왕조를 허무는 아픔을 겪어야 정상이다. 그런 과정이 생략됐기에 고려는 새 나라답지 않게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걷지 못하고 모순에 찬 첫 걸음을 내딛게 된다. 건국자 왕건은 죽을 때까지 승자의 행복한 삶을 누렸지만 그가 생전에 심어놓은 모순의 씨앗 때문에 이후 고려는 재건국이나 다름없는 진통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 첫 번째는 중앙정부와 지방 호족 세력 간의 모순이다. ..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당 - 신라에서 송 - 고려로 멤버를 교체한 중화세계는 어느새 강성해진 비중화세계의 거센 도전에 시달린다. 왕건의 모순에 찬 「훈요 10조」는 중화 대 비중화의 대결 구도를 예고한다. 하지만 고려는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데다 고구려의 후예라는 구호와는 반대로 신라의 경주 정권을 계승한 데 불과했기에 중화 세계의 ‘약한 고리’로 남았고, 거란의 요와 여진의 금으로 이어지는 비중화세계의 만만한 타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러키보이 왕건② 이제 왕건은 대권후보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 선 가장 중요한 군사력에서 최강일 뿐 아니라 안 취약했던 외교에서도 큰 결실을 얻었다. 내에서는 신라의 충성을 서약받았고, 대외적으로는 중국 화북 왕조의 승인을 받았다. 분위기가 반전 되자 오히려 견훤의 휘하에 있는 호족들이 왕건에게로 줄을 서기 시작한다. 그 무렵 왕건은 이제야 후삼국시대의 종점이 보이는구나 싶은 기분이었을 법하다. 하지만 대세는 장악했으나 상황이 종료되려면 꽤나 시일이 필요할 것이다. 아직 신라를 합병한 것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후백제의 근거지가 튼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은 허무하리만큼 빠르게 다가왔다. 이미 그때까지의 행운만으로도 억세게 운좋은 사나이라 불릴 만한 왕건에게 또 다른 행운이 찾아왔다. 935년 3월 후백제의..
러키보이 왕건 이제 신라는 사실상 멸망하고 후삼국시대는 후백제와 고려가 대립하는 이국 시대로 바뀌었다. 실제로 이후 견훤은 신라 지역에 성들을 쌓으면서 신라의 주인 노릇을 톡톡히 한다. 게다가 경순왕(敬順王) 김부 역시 견훤을 맹렬히 비난하던 경애왕과는 달리, 자신을 권지국사로 봉해준 견훤을 상왕(上王)으로 받들면서 왕건과의 관계를 멀리 하려 한다. 그러나 비록 견훤의 지원으로 왕위에 올랐다 해도 왕실을 유린하고 나라를 멋대로 주무르는 견훤에게 진심 어린 복종심이 우러나올 수는 없다. 따라서 경순왕은 여러 가지로 착잡한 심정이다. 그러나 왕건의 심정은 착잡을 넘어 참담하다. 어느새 이 지경이 되었을까? 눈치빠른 호족들은 벌써 대세를 좇아 견훤에게 투항하기 시작한다. 신중하기 그지없던 그였으나 이제 더 이..
후삼국의 쟁패⑤ 927년 견훤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느닷없이 신라의 왕궁으로 쳐들어갔다. 오로지 왕건만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경애왕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오히려 포석정에서 질탕하게 놀고 있던 참이었다. 손쉽게 왕궁을 접수한 견훤은 병사들에게 약탈 허가를 내주었으며, 후궁 한구석으로 달아나 숨은 경애왕을 찾아내서 다시는 쓸데없이 입을 놀리지 못하게 했다(핍박해서 자결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것으로 일단 신라는 멸망한 것이지만 고려가 있는 한 견훤으로서는 신라를 합병할 처지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신라 지역을 맡아 관리할 대리인으로 김부(金傅)라는 자를 세우는데, 그가 바로 신라의 56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 될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이다【견훤은 경순왕을 권지국사(權知國事..
후삼국의 쟁패④ 삼국의 정세는 불안정한 곡선을 그리며 바야흐로 고비를 향해 치닫는다. 처음에는 후백제나 고려(후고구려)나 같은 ‘반란군’의 처지였기에 신라를 공동의 적으로 삼고 암묵적으로 이해관계를 같이 했다. 그러다가 906년부터 910년까지는 고려가 신라와 후백제를 크게 압박하면서 우위를 점했다. 곧이어 고려는 신라에 괴뢰정권(박씨 왕실)을 수립하고 후백제를 고립시켰으며, 그 휴지기를 이용해서 후백제는 몸을 추슬렀고 중국 외교에서 선수를 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 위기감을 느낀 신라는 친고려 노선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후삼국 시대가 오리지널 삼국시대와 가장 닮은 부분은 바로 이 장면이다. 옛 백제가 그랬듯이 후백제는 신라만을 타깃으로 할 뿐 고려와는 적대시할 의도가 없다. 또한 신라 역..
후삼국의 쟁패③ 아마 왕건이 페이스를 늦춘 이유는 그동안 궁예의 카리스마로 유지되어 온 고려를 일순간에 자신의 스타일로 개조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도읍을 즉각 옮기지 않고 2년 뒤인 920년에야 송악으로 옮긴 데서도 그의 침착함을 엿볼 수 있다). 신민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그는 쿠데타로 집권한 것이므로 자중하는 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을 기회로 견훤의 숨통이 트였다는 데 있다. 견훤으로서는 강적인 궁예가 죽은 데다 왕건이 해빙 노선으로 바꾸었으니 사태의 반전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그는 왕건이 집권하자 즉각 사신을 보내 축하한다. 그러나 그 사신은 외교적 제스처를 위해 파견되었을 뿐이고 실상 견훤이 더 애타게 귀국을 기다린 사신은 같..
후삼국의 쟁패② 이 시점에서 앞에 말한 신라의 왕통이 갑자기 박씨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록에는 그 과정에 별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지만, 700여 년 만에 다시 박씨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사태에는 혹시 궁예가 관련되어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을 낳은 김씨 왕실에 대한 적대감, 후삼국을 통일해서 통일 왕조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야망, 이 두 마리 토끼를 쫓기 위해 궁예는 신라의 왕위계승을 비트는 데 뭔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닐까? 상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서도 견훤의 명맥을 조이지 않은 것은 마침 그때 신라에 대한 공작으로 분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박씨인 신덕왕의 재위 시절에 신라는 후백제와 전투를 벌였을 뿐 태봉..
후삼국의 쟁패 비록 공식적인 출범으로는 후삼국의 막내격이 되었지만, 후삼국시대의 초기를 주도한 것은 궁예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던 그는 후고구려가 정복 국가에만 머문다면 오래 갈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고【궁예는 젊은 시절에 승려가 되어 선종이라는 법명까지 얻었다. 게다가 그는 미륵불을 자처하기까지 했으므로 마진이라는 국호는 불교 용어일 것으로 추정된다. 산스크리트어에서 ‘크다. 위대하다’는 뜻의 수식어인 마하(maha)라는 말은 보통 한자로 마하(摩訶)라고 표기되는데(물론 음역이다), 마진의 ‘마’는 그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은 ‘진단(震旦)’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진단 역시 산스크리트어를 음차한 것인데, 원래는 동방이라는 뜻으로..
다시 분열의 시대로② 한반도 중부를 잃으면서 이제 신라의 영토는 한반도 남부로 축소되었다. 아직 만주에 발해가 존속하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남북국시대가 아니라 ‘남중북국시대’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신라는 이미 남부에서마저도 주인이 아니었다. 양길이 봉기한 이듬해 이번에는 전주에서 견훤(甄萱, 867?~936)이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변변치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로 장군이 된 그는 한반도 남해와 서해를 지키면서 갈고 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무주(지금의 광주)까지 손에 넣어 호남 전역을 지배한다(이 지역은 불과 한 세대 전에 장보고가 지배했던 곳이었으니 견훤은 아마 그 덕을 봤으리라). 옛 백제의 영토를 차지했으니 백제의 화려한 옛날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는 900년에 ..
다시 분열의 시대로 효공왕(孝恭王)이 불명확한 태생과 불안정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16년 동안 재위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전국의 상황이 어수선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전까지 왕권을 노리던 경주 귀족들은 효공왕(孝恭王) 대에 이르러 더 이상 왕권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라가 없다면 왕권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당시 신라는 나라 자체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위기의 시작은 진성여왕이 김위홍을 잃고 상심에 잠겨 있던 889년에 전국적으로 터져나온 반란이었다. 반란이야 9세기 초부터 늘상 있어오던 것이었으니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이번의 반란은 색다르다. 그 전까지의 무수한 반란은 거의 대부분 중앙 관직을 가진 경주 귀족들이 왕권을 노리고 일으킨 것이..
왕실의 진통② 불행히도 진성여왕은 200년 전의 선배들과 같은 조건에서 출발하지 못했다. 그때는 비록 왕실은 흔들렸어도 나라는 튼튼했을뿐더러 무엇보다 진골 귀족들의 충실한 지원을 받았으니까. 역사서에는 여왕이 즉위 초부터 삼촌인 김위홍(金魏弘)과 놀아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 고립무원인 그녀로서는 그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근친혼 시대에 삼촌과 조카의 사랑은 전혀 욕먹을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보겠지만 고려 왕실에서도 이런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 그 전부터 두 조카(헌강왕과 정강왕)를 충실히 보좌했던 김위홍은 사실상 진성여왕에게서 국정을 위임받고 왕처럼 군림했다. 승려인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을 공동 편찬한 것을 보면 그는 상당한 문화적 소양을 갖춘 인물..
3장 단일왕조 시대의 개막 왕실의 진통 만주에서 발해가 전성기의 마지막 단꿈에 취한 나머지 랴오둥 진출의 찬스를 놓치고 있을 무렵 한반도의 신라에게는 아예 아무런 찬스도 없었다. 중국이 힘을 잃자 신라는 마치 부모를 여린 아이처럼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진성여왕이 최치원(崔致遠)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에서 보듯이 왕실에서는 나름대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나 이미 신라는 경주 귀족들이 왕권마저 좌지우지하는 단계였으므로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사실 7세기 초반 두 여왕의 시대 이래 200여 년 만에 다시 여왕이 즉위하게 된 사정도 그런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200년 전의 두 여왕은 비록 비정상적이기는 해도 신라의 도약을 마련하기 위한 토대로 기능했지만, 88..
북방의 새로운 기운② 발해가 만주에 안주한 것은 곧 북방에서 부는 새로운 바람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발해를 대신해서 세대교체의 선두주자로 발돋움한 것은 거란이었다. 몽골 초원의 동부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던 거란은 당의 약화를 틈타 서서히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들은 남북조시대에 북조를 지배했던 옛 선비족의 후예, 당시에는 북중국을 차지한 대신 랴오둥을 고구려에게 넘겨주었지만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 노릇을 포기한 이상 랴오둥의 임자는 그들이 될 수밖에 없다. 황소의 난을 진압한 절도사 주전충(朱全忠, 852 ~ 912)이 장안의 황궁으로 들어가 환관들을 잡아죽이고 당의 마지막 황제인 애제(哀帝)【‘애제(哀帝)’라면 ‘슬픈 황제’라는 뜻이니까 황제의 시호로는 영 이상하게 보이는데,..
북방의 새로운 기운 구심력이 약해지면 원심력이 작용하는 게 이치다. 소용돌이의 동아시아에도 중심인 남과 변방인 북의 분위기는 달랐다. 당나라가 기침하고 신라가 몸살을 앓으며 동아시아 남쪽의 중화세계가 무너져갈 때 비중화세계인 북쪽에서는 새로운 기운이 싹트기 시작한다. 중국의 통일제국이 약화되면 항상 장성 이북의 이민족들이 흥기했던 것은 이제 동아시아 역사에서 하나의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것이 농경문명과 유목문명의 주고받음이라면 그 신호탄은 두 문명의 중간, 즉 반농반목 문명이라 할 수 있는 발해다. 남쪽의 신라에서 장보고의 야망과 최치원(崔致遠)의 개혁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무렵 발해는 오히려 전성기를 맞았다. 8세기까지 아홉 명의 왕을 왕명부에 올린 것 말고는 별다른 활동이 없던 발해는 9세기 초 선..
두 명의 신라인④ 결국 총체적인 난국에 빠진 당나라의 명맥을 죄는 사태가 터졌다. 875년 소금 밀매업자였던 황소(黃巢)가 일으킨 반란이 그것이다. 산둥에서 봉기한 그들은 소금 밀매 유통망을 이용하여 순식간에 전국으로 세력을 확대했으며, 880년에는 수도인 장안까지 접수하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 당의 관리로 있던 어느 신라인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는 문장을 지어 황소에게 보냈는데, 워낙 명문이었던 탓에 그것을 읽은 황소가 깜짝 놀라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가 바로 최치원(崔致遠)이다. 최치원이 당에 유학을 떠난 것은 열두 살 때니까 아마 장보고보다도 어린 나이였을 것이다. 최씨라면 왕족은 못 되지만 신라 초기 6성 가운데 하나다. 성씨로 짐작할 수 있듯이 최치원은 신라의 두품 ..
두 명의 신라인③ 장보고는 문성왕에게서 청해장군이라는 직함을 받은 것에 만족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에 이르기까지 그는 얻을 수 있는 것을 모두 얻었다. 심지어 840년에 그는 일본에 무역을 요청하는 특파원까지 마음대로 보낼 정도였으니 사실상 신라의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진 자의 욕심이란 원래 끝이 없게 마련이 아니던가? 비록 자신이 직접 신라의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킹메이커의 자리만큼은 계속 유지하고 싶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낸 방책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딸을 왕비로 만들면 되니까. 근친혼이 행해지던 왕실의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으므로(그에 따르면 신라 왕비는 무조건 김씨나 박씨여야 한다) 장보고는 딸을 둘째 왕후로 집어넣으려 한다. ..
두 명의 신라인② 836년에 스폰서였던 흥덕왕이 죽은 것은 그에게 좋은 기회다. 흥덕왕은 즉위 초에 왕비가 죽고 나서 시녀조차 가까이 하지 않으면서 평생 수절(?)한 왕이었으니 후사가 있을 리 없다. 왕위계승을 놓고 흥덕왕의 동생과 조카가 다툼을 벌이자 여기에 귀족들이 편을 갈라 합세했다. 여기서 삼촌 김균정(金均貞)은 일찍이 김헌창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가 있었으나 결국 조카인 김제륭(金悌隆)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김제륭이 희강왕(僖康王, 재위 836~838)으로 즉위하자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은 권력을 추구하기 이전에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신세가 된다. 그래서 그는 황급히 식솔들과 함께 배를 타고 낙동강을 빠져나가 완도에 있는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당시 신라 중앙정치의 혼탁..
두 명의 신라인 원래부터 경주 부근에만 중앙정부의 힘이 미칠 만큼 중앙집권력이 약했던 데다, 마땅히 등대가 되어줘야 할 중국이 당말오대에 접어들면서 구심점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취약한 신라 호가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은 뻔하다. 중앙이 약해지면 지방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거의 물리적 법칙이다. 앞서 말한 김헌창(金憲昌)의 반란은 이런 배경에서 터져나왔다. 물론 김헌창 개인으로서는 아버지(김주원)가 원성왕(元聖王)에게 왕위를 빼앗겼다는, 따라서 자신도 왕위계승자가 되지 못했다는 원한에 사무칠 수 있었겠지만, 이미 40년이나 지난 일인 데다 원성왕의 증손인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826)이 재위하는 중에 새삼스럽게 해묵은 문제를 제기한 것은 어지러운 정세를 이용해서 왕위를 찬탈하려는 의..
흔들리는 중심③ 그러나 세계제국 당은 현종의 시대에 산꼭대기에서 갑자기 절벽으로 추락하게 된다. 사실 갑자기'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초기부터 제국의 골간이었던 균전제(均田制)가 서서히 무너져온 게 화근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제국의 몸집은 커가는데 제도의 옷은 전혀 늘리지 않은 탓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균전제란 쉽게 말해서 토지[田]를 농민들에게 고르게[均] 나누어주고 일정량의 생산물을 조세로 거두어들인다는 제도다(일본의 반전제도 내용은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평범해서 굳이 제도라 부를 필요도 없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아주 깜찍하고 참신한 제도였다. 그러나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균전제도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래 새 나라가 출범할 무렵에는 토지가 흘러넘치게 마련이다..
흔들리는 중심② 바로 한 세대 전만 해도 최전성기를 구가하다가 갑작스럽게 혼탁해진 이유는 뭘까? 아무리 어린 왕이 즉위했다 해도 그것만으로 시대의 흐름이 갑자기 바뀐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 더구나 시대의 흐름이 급박해진 것은 신라만이 아니다. 중국을 모방하는 데 신라와 함께 누가누가 잘하나를 벌이던 일본도 8세기 후반부터 급격히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그런 탓인지 경덕왕은 전 왕인 성덕왕과 달리 일본과의 교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기서 잠시 일본의 사정으로 눈을 돌려보면, 당시 동아시아를 휩쓴 혼란의 파도를 좀더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 혼란의 신호탄은 최첨단 수입품인 율령이 유명무실화된 것이다. 원래 율령은 관료제의 바탕 위에서만 기능하게 마련이다. 율령이란 지금으로 치..
2장 소용돌이의 동아시아 흔들리는 중심 사실 원성왕(元聖王)이 독서삼품과를 시행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다는 핸디캡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 왕인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상대등이었던 그는 다른 대권 후보였던 왕손 김주원(金周元, 김춘추의 6세손)을 누르고 즉위했던 것이다【이 문제는 한참 뒤인 822년에 반란을 부르는 계기가 된다.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은 아버지가 즉위하지 못한 원한을 40년이나 잊지 않고 있다가 웅천주 도독으로 부임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지금의 전북과 충청도 일대를 장악하고, 장안국이라는 국호와 경운이라는 연호까지 제정하면서 한때 기세를 올렸으나 결국 경주 귀족들에게 진압되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