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06/05 (11)
건빵이랑 놀자
따로 또 같이② 북부의 이민족 정권들은 5호16국 시대부터 기본적으로 한화(漢化), 즉 중국화 정책을 추구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물리력에서만 앞설 뿐 문화적으로는 중원의 한족 문화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의 지배층은 중원을 차지한 참에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농경 사회에 합류하려는 강렬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중원에 입성하자 곧바로 부족제를 포기하고 유목민 부락을 해산한 것은 이제부터 ‘착하게 살겠다’는 결심의 표현이다. 그러자면 최고 권력은 손에 쥐더라도 관료 행정에는 한족을 끌어들여야 한다. 이민족 정권들은 한족 출신의 명문가를 정치와 행정에 참여시켜, 각종 관료제와 율령을 맡기고 조세 정책을 입안하게 했다. 특히 북위의 효문제(孝文帝, 재위 471~499)는 도읍을..
따로 또 같이 남중국의 주인이 송으로 귀착될 때까지 북중국도 심한 몸살을 앓았다. 중원에 진출한 북방 민족들은 유연(劉淵)이 한(漢)을 부활시킨 것을 필두로 전통적인 국호들을 총동원해 나라를 세웠다. 조(趙)ㆍ연(燕)ㆍ진(秦)ㆍ진(晋) 등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유명한 국호들이 부활했고, 심지어 삼대에 속하는 하(夏)까지 등장했다. 이 10여 개의 나라들을 ‘원조들’과 구분하기 위해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국호 앞에 전(前)ㆍ후(後)ㆍ동(東)ㆍ서(西)ㆍ남(南)ㆍ북(北) 등의 접두사를 붙였다(이를테면 後趙, 南燕, 前秦, 東晋 하는 식이다). 역사에는 통합과 분열의 시기가 교대하게 마련이지만 중국의 분열기는 특이한 데가 있다. 로마 제국 이후 분권화의 길을 걸은 유럽과 달리 중국 역사에서 분열은 늘 통일..
고대의 강남 개발② 한편 흉노에게 멸망당한 진의 귀족과 백성 들은 이듬해인 317년 강남으로 건너가 오나라의 도읍이었던 건업(建業, 지금의 난징)을 수도로 삼고 새 나라를 열었다. 뒤이어 중원이 북방 민족들의 놀이터가 되자 중원의 명문 세가와 호족 들도 속속 남하해 새 나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역사서는 이때부터의 진을 동진(東晋)이 라 부르고, 이전까지의 진을 서진(西晋)으로 기록한다. 동진은 일찍이 삼국시대의 오나라가 닦아놓은 터전을 밑천 삼아 본격적으로 강남 개발에 착수했다. 양쯔 강 이남은 원래 기후가 따뜻하고 물이 풍부한 지리적 여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진ㆍ한 시대부터 원시적 농업을 해왔을 뿐 물을 이용한 선진적인 관개농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북에서 내려온 호족들은 이러한 유리한 환경에..
고대의 강남 개발 권력의 정통성이 취약했던 위는 삼국을 통일하고도 오래가지 못했다. 위는 비록 선양의 형식으로 한 제국의 뒤를 이었지만, 한 황실의 전통과 역사를 이어받은 게 아니라 실력으로 패권을 잡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더 힘센 자가 나올 경우 위나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강적 촉한을 물리치는 데 빛나는 공을 세운 호족 가문인 사마씨가 곧 그 실력자로 떠올랐다. 과연 그 가문의 사마염(司馬炎, 236~290)은 265년 위의 원제(元帝)에게서 다시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진(晋)을 세우고 초대 황제 무제(武帝)가 되었다. 춘추시대의 옛 제후국들 가운데도 서열 1위를 자랑하는 진이라는 국호를 재활용했다면 사마염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새 왕조의 최대 문제는 정통성의 확립이었다. 진 무제는 ..
『삼국지』의 막후에는③ 특히 중요한 것은 둔전제(屯田制)였다. 이 제도는 한 무제가 처음 도입한 바 있지만, 당시에는 변방에서 군사적 목적으로만 사용했을 뿐이고 전국적으로 폭넓게 사용한 것은 삼국시대의 위나라였다. 병호제(兵戶制)처럼 이것도 역시 전란기였기에 가능한 제도였다. 잦은 전란으로 주인 없는 토지가 늘어난 게 문제였다. 자칫하면 또다시 후한 시대처럼 호족들이 겸병해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조조는 호족을 대신해 국가가 그 토지를 운영하도록 한 것이다. 주인 없는 토지나 새 개간지가 생기면 국가가 유민이나 가난한 농민들을 모집해 경작하게 하고 조세를 받는 것이다(국가가 지주로서 소작료를 받는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이 둔전민은 군 태수의 지배 아래 놓이지 않고 국가의 직접 관리를 받았으므로 ..
『삼국지』의 막후에는② 소설 『삼국지』는 이 과정이 주요 내용이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은 그 막후에 있다. 삼국 정립기는 전란으로 얼룩진 시대였으나 그와 동시에 여러 가지 내외적 개혁과 쇄신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삼국이 대립하면서 경쟁적으로 부국강병에 힘썼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최초의 통일 제국인 진ㆍ한 시대의 경험에서 노출된 모순이 해결되고 새로운 통일을 위한 토대가 조성되었다. 특히 삼국 중 가장 강성했던 위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각종 개혁을 단행했다. 새로운 관리 임용 제도인 9품 중정제(九品中正制), 병역제도인 병호제(兵戶制), 세금 제도인 호조제(戶調制) 등 본격적인 국가 체계의 골격이 모두 이 무렵에 만들어졌고, 둔전제(屯田制)도 새로이 정비되었다. 후한..
2. 분열 속의 발전 『삼국지』의 막후에는 후한 말기 황건적(黃巾賊)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들고일어나 각 지방을 할거(割據)한 호족들의 세력 판도는 한동안 매우 혼란스러웠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분할과 정립의 구도가 고착되었다. ‘정립(鼎立)’의 ‘정(鼎)’이란 원래 세 발 달린 솥을 뜻하는 말이다. 당시의 세 발은 위(魏)ㆍ오(吳)ㆍ촉(蜀)의 삼국인데, 이들이 벌인 60여 년간의 전쟁이 소설 『삼국지』, 즉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진수(陳壽)가 편찬한 역사서 『삼국지』와는 다른 책이지만 다루는 시대는 같다】의 소재가 되었다.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하고 세력 판도에서도 선두를 달린 주자는 후한의 무관 출신인 조조(曹操, 155~220)가 세운 북중국의 위나라였다. 조조의 가문은 후한의 정치를 ..
또다시 분열의 시대로② 부패한 외척ㆍ환관 정치에 호족들의 등쌀이 더해지고, 게다가 그 영향으로 탐관오리들이 들끓게 되자 농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져갔다. 강력한 시황제의 진 제국도 진승과 오광의 농민 반란이 일어나면서 무너지지 않았던가? 그보다 훨씬 오래 존속한 한 제국의 말기도 비슷했다. 후한 중기부터 치솟던 농민들의 분노는 이윽고 184년에 대규모로 터져 나왔다. 이번의 농민 반란은 진승과 오광의 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우선 중국 전역에서 36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농민이 일제히 봉기한 것은 규모로 보나 조직력에서 보나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노란 깃발을 두르고 있다고 해서 정부로부터 황건적(黃巾賊)이라 불린 이 반란군은 장각(張角)을 우두머리로 삼고 치밀한 모의 끝에 거사한 것이었다. 그럴 ..
또다시 분열의 시대로 후한은 처음부터 호족 연합 정권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 역시 황족이긴 했으나 원래부터 황위 계승권자인 게 아니라 지방 호족 출신이었다. 이처럼 후한 시대에는 한 황실의 일족이나 옛 전국시대 명문가의 자손, 전직 고위 관리, 상업으로 부를 쌓은 부호 등이 지방 호족으로 각지에 군림하고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토지를 소유했다는 것이다. 호족은 전한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들이 성장할 만한 여건이 좋았다. 철제 농구가 전면적으로 사용되고 관개시설이 확대됨에 따라 농업 생산력이 크게 발달하고 황무지도 많이 개간되었다. 게다가 비교적 평화로운 통일 제국 시대가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계급 분화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대토지 소유자가 대거 출현했..
외척과 환관의 악순환② 2세기 초반부터 나이 어린 황제들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전한을 멸망시킨 바오밥 나무에 대한 경계심도 점차 엷어졌다. 외척 정치가 부활한 것이다. 나이 어린 황제는 섭정을 필요로 했고, 섭정은 자연히 외척이 도맡았다. 하지만 여기서 전한과는 다른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어릴 때 즉위한 황제는 나이가 들면서 친정(親政)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당시 발달한 유학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척의 힘을 물리치려면 황제의 개인적 세력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왕당파(王黨派)가 있어야 한다. 외척이 아니면서 외척만큼 의지할 수 있는 세력, 황제가 선택한 것은 바로 환관(宦官)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답일지언정 정답은 아니었다. 외척은 밀어낼 수 있었으나 환관이 그 자리를 꿰찼기 때문이다. 이 ..
외척과 환관의 악순환 후한은 시기적으로만 전한과 구분될 뿐 권력 구조와 각종 제도 등은 전한 시대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고 답습했다. 이는 곧 전한시대의 문제점들이 후한에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왕망(王莽) 같은 모리배(謀利輩)조차 개혁을 구상했을 정도라면 다시 복귀한 제국 정부가 당장 개혁에 착수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과제는 제국을 재건하고 왕망 시대의 후유증을 치유한 후한의 첫 황제인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 정권의 몫이었다. 전한을 멸망시킨 외척 정치의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무엇보다 새로운 관료 정치를 구축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를 위한 무기는 역시 유학이었다. 후한 초기의 황제들이 유학을 적극 장려한 덕분에 국가의 제도적 뒷받침 속에서 유학의 여러 학파가 생겨나고 토론이 활성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