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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최초의 통일을 향해② 우선 전국시대의 전쟁은 춘추시대와는 달리 전면전이 많았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주로 각국의 지배 귀족들 간에 벌어졌지만, 전국시대에는 각국이 직접 백성들을 징집해 전쟁에 임했다. 말하자면 춘추시대에는 지배 엘리트들의 전쟁이었던 반면, 전국시대에는 본격적인 군대가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전술도 춘추시대에는 차전(車戰)이 위주였지만 전국시대에는 보병과 기마병 중심으로 바뀌었다. 전쟁의 목표도 달랐다. 춘추시대에는 적국을 복속시키는 데 주안점이 있었지만, 전국시대에는 토지를 빼앗고 적국의 병력을 말살하는 게 전쟁의 목표였다. 무기도 청동제에서 철제로 바뀌어 전쟁은 더욱 잔인해졌다. 전쟁을 수행하는 전략도 다양하게 개발되었고(이 시기에 손빈이 지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은 오늘날까..
최초의 통일을 향해 춘추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국시대의 막이 오른 계기는 남방의 초(楚)와 대립하던 전통의 강국인 진(晉)이 와해된 것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종법 봉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혈연관계가 희박해져 붕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있었다. 더욱이 진은 일찍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주 왕실의 혈연관계를 대폭 제거했으므로 주 왕실과는 다른 성의 귀족들이 세력 가문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다 결국 내분을 빚었다. 기원전 5세기 중반 진(晋)은 한(韓)ㆍ위(魏)ㆍ조(趙), 세 성씨의 세력가들에게 분할되었다. 이로써 가장 강대한 제후국이던 진은 사라지고 한ㆍ위ㆍ조의 3국이 생겨났다. 춘추시대에 춘추 5패가 있었다면 전국시대를 주도한 나라들은 전국 7웅이라고 부른다. 7웅이란 진이..
기나긴 분열의 시대④ 그러나 춘추시대의 후반기를 장식하는 초ㆍ오ㆍ월에 이르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 세 나라는 황하는 물론 화이허보다도 더 남쪽인 양쯔 강 유역에 자리 잡은 남방 국가들이다. 하ㆍ은ㆍ주의 삼대는 전부 북중국의 중원을 기반으로 삼은 왕조였다. 그러므로 전통 제후국의 입장에서 보면 초ㆍ오ㆍ월은 원래 ‘양이(攘夷)’의 대상인 오랑캐들이었다. 초나라는 이미 제 환공 시대부터 남중국의 넓고 비옥한 영토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 중원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제 환공은 초나라의 위협을 받는 중원의 약소국들이 도움을 요청하자 이를 무력으로 막아내고 중원을 지킨 바 있었다. 진 문공 역시 재차 북상을 추진한 초의 공격을 막는 데 최대의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제와 진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이제 초나라의 발목을..
기나긴 분열의 시대③ 하지만 주나라라는 중심은 상징에 불과할 뿐 현실적으로는 무력해졌다. 그래서 제후국들은 명칭만 제후국일 뿐 사실상 독립국이었다. 이들은 주나라 왕실에 대해 형식적인 예의만 갖추면서 자기들끼리 중원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춘추시대는 강력한 제후국들이 교대로 패권을 잡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초기에는 잠시 정(鄭)나라가 세력을 떨치지만 본격적인 패자의 시대는 제(齊)나라가 중원을 장악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이른바 춘추 5패로 불리는 제(齊)ㆍ진(晋)ㆍ초(楚)ㆍ오(吳)ㆍ월(越)이 번갈아 중원의 패권을 장악했다. 춘추시대의 전반기에 해당하는 제와 진의 지배기는 아직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상당히 살아 있던 무렵이었다. 제의 환공(桓公, 기원전 ?~기원전 643)은 제후들의 맏형..
기나긴 분열의 시대② 주의 동천이 중요한 이유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민족의 침입이 주의 동천을 불러 춘추전국시대의 막을 올렸다면, 그동안 강성해진 제후국들은 이렇게 마련된 무대에서 주나라를 조연으로 물러앉히고 주인공으로 활약하게 된다. 춘추전국시대는 약 550년간 지속된 중국 역사상 최대의 분열기를 가리키는데, 크게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양분된다. 춘추시대는 주의 동천에서부터 당시 가장 강력한 제후국이었던 진(晋)이 분열되는 기원전 5세기 중반까지를 가리키며, 전국시대는 이때부터 중원 서쪽의 강국인 진이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를 가리킨다. 춘추와 전국이라는 말은 모두 문헌에서 따온 명칭이다. 춘추는 공자(孔子)가 편찬한 역사서 『춘추(..
기나긴 분열의 시대 주나라의 봉건제는 일찍 도입되었으나 일순간에 완비된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봉건제는 주나라의 건국에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발달하고 숙성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나라식의 종법 봉건제는 처음부터 문제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다. 혈연에 바탕을 둔 관계는 가장 끈끈하지만 생명력이 짧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혈연관계란 세대교체가 거듭될수록 아무래도 엷어지게 마련이니까. 주나라가 성장과 발전을 지속하던 전성기까지는 종법 봉건제가 별 문제 없이 기능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혈연관계는 희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강역(疆域)이 팽창하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혈연은 힘을 잃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일종의 계약에 바탕을 둔 제도로 바뀌면서 종법 질서를 발전적으로 ..
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④ 그러나 주나라는 중국의 정치적ㆍ경제적 중심인 것만이 아니었다. 중국에 중심이 생겼다는 것은 단순히 현실의 정치적ㆍ경제적 ‘사건’에 불과한 게 아니었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대체했다고 하지만, 사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은나라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농업 생산에서는 은나라를 능가하지 못했고(농기구는 여전히 석기였고, 생산 방식도 은대와 같은 집단 경작이었다), 청동기 주조 기술은 오히려 퇴보했다. 주나라의 봉건제는 그런 생산적인 분야에 기여한 게 아니라 정치 이념에서 후대에 길이 영향을 미치게 되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앞서 말했듯이, 주나라는 건국할 때부터 하늘의 뜻, 즉 천명(天命)을 강조했다. 주나라가 동쪽으로 진출해 은나라를 멸한 것은 천명이다. 심지어 주나라 문..
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③ 그러나 주나라에서 아무리 애쓴다 해도 이웃 제후국들이 주나라의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 그래서 주나라는 제후국들과 혈연관계를 맺었다. 무왕이 동생들을 제후국에 파견했듯이, 주나라 왕실은 가족 관계와 혼인 관계를 이용해 인근 나라들과 봉건적 연관을 맺었다. 말하자면 주나라의 봉건제는 서양 중세의 봉건제처럼 계약에 의한 군신 관계라기보다는 본가와 분가의 관계와 같았다. 이렇게 혈연에 기반을 둔 관계를 종법(宗法) 봉건제라고 부른다. 주나라 초기에 제후국은 100개가 훨씬 넘었는데, 그 가운데는 주나라 왕실의 성인 희(姬)씨 제후국이 3분의 1 이상이었다(제후국이라고 해서 오늘날과 같은 정식 국경을 가진 나라를 연상하면 안 된다. 당시의 국가들은 서로 국경선을 맞..
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② 신생국 주나라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우선 은나라의 영토를 차지했으니 국토부터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넓어졌다. 그런 광대한 중원에는 여전히 수많은 씨족사회가 분립해 있었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멸망시킬 때 엄청난 격전을 치렀는데, 이는 은나라의 잔존 세력이 상당히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 은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졌어도 전 왕조의 귀족 세력이 전부 주나라에 복속되지는 않았다. 더구나 주나라는 은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했을 뿐 문화적으로는 선진국 은나라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이런 처지에서 무왕은 은나라의 옛 지배 집단을 회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은나라의 왕자인 녹부(祿父)에게 옛 영토를 다스리게 하고 제사도 그대로 지내도록 했다. 다른 귀족들도 주나라에 반기를 들..
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 하나라와 은나라는 말기의 현상이 매우 비슷하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은 말희(妹喜)라는 미녀에게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고,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달기(妲己)라는 미녀에게 탐닉한 폭군이었다. 둘 다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이루었다는 주지육림(酒池內林)이라는 고사성어를 낳은 인물들이다. 수백 년이나 존속한 두 왕조가 결국 한낱 여인 때문에 망했다는 것은 공교로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새 왕조가 옛 왕조를 무너뜨리고 나서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쿠데타의 주역들이 지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전 나라의 마지막 왕을 폭군으로 묘사하는 것은 사실 중국 역대 왕조의 특기이기도 하다. 폭군인 걸왕(桀王)을 무너뜨리고 은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은 당연히 걸왕과..
구름 속의 왕조를② 갑골문의 내용은 점괘였다. 점괘를 어떻게 역사 기록물로 볼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은나라의 성격을 알면 해소된다. 은나라는 점을 쳐서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던 제정일치의 신정(神政) 국가였다(제정일치 사회의 종교를 오늘날과 같은 개념의 종교로 여기면 곤란하다. 당시의 종교는 오늘날처럼 개개인이 신앙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생활 방식 자체였다). 그러므로 갑골문은 어느 것보다 은나라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훌륭한 기록이다. 갑골의 재료로는 사슴ㆍ양ㆍ돼지ㆍ소 등의 뼈를 사용했고, 나중에는 ‘갑골(甲骨)’이라는 뜻 그대로 거북의 등껍데기도 썼다. 국가의 중요한 결정 사항이 있을 때면 은나라의 지배 집단은 이런 동물 뼈의 한 면에 몇 개의 홈을 판 다음 제사를 지내고 나서 그 뼈..
구름 속의 왕조를 치수(治水) 사업의 공적으로 선양을 통해 순임금의 뒤를 이은 우임금에 이르러 중국은 역사시대로 접어든다.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중국의 첫 고대국가는 하(夏)나라다. 하나라는 기원전 약 23세기 말부터 기원전 18세기 중반까지 500년 가까이 존재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기록으로는 전하지만 그 기록을 뒷받침할 만한 ‘물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공자(孔子)가 편찬한 『시경(詩經)』에 등장하지만, 공자 역시 자신의 시대보다 1000년 이상이나 앞선 옛날의 역사를 정확히 기록할 수는 없었을 터이다. 공자가 상상만으로 책을 쓰지는 않았을 테니 그의 시대까지는 전설이나 기록이 전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역사 자료라고 할 만한 것은 현전하지 않는다. 하나라는 황허 중류, 지금의 뤄양(낙..
신화와 역사의 경계② 황제도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로 어려울 정도라면 그 이전은 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황제 이전의 시대는 역사보다 신화에 속한다. 실제로 그 시대를 해주는 전설이 있다. 중국의 건국신화에 당하는 삼황(三皇)의 전설이다. 삼황이란 농씨(神農氏)ㆍ복희씨(伏羲氏)ㆍ수인씨(燧人氏)를 리키는데, 이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신화인 존재다. 신농씨는 농경을 발명했고, 씨는 수렵술을 발명했으며, 수인씨는 불을 발명했다. 이 삼황이 문명의 기반을 닦았고, 그 토대 위에서 황제가 중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다. 삼황은 신화적인 존재이므로 더 이상의 조상을 찾을 필요는 없다. 말하자면 삼황은 인류 역사의 시작이고, 황제는 중국 역사의 시작인 셈이다. ▲ 인신우두의 신. 삼황 가운데 하나인 신농의 초상이다...
1장 중국이 있기까지 신화와 역사의 경계 나는 바오밥 나무란 교회만큼이나 큰 나무라는 것을 어린 왕자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영리하게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오밥 나무도 크기 전에는 조그마할 거 아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아무리 큰 나라라도 처음에 생길 때는 아주 작고 평범하게 마련이다. 고만고만한 여러 마을이 뒤섞여 살아가다가 어느 마을에서 약간 인구가 늘고 기름기가 돈다 싶으면 느닷없이 자기가 이 지역의 주인입네 하고 큰소리치고 나서면서 이웃 마을들을 차례로 복속시킨다. 그런 식으로 어느 정도 나라의 꼴이 갖추어지면 이내 기원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에는 전해지는 이야기나 약간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사실적 근거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기원 이야기의 기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