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06/13 (71)
건빵이랑 놀자
중국화의 물결④ 그 덕분에 경덕왕(景德王)은 신라의 달밤에 불국사의 종소리를 고즈넉이 들을 수 있었지만, 가장 신라적인 문화가 만개한 시기가 바로 가장 적극적으로 중국화 노선을 추진한 시기라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중국화의 마무리는 788년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이 처음으로 시행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장식한다. 이것은 일종의 과거제(科擧制)라 할 수 있지만, 중국의 과거제와는 다르다. 과거제는 수 문제가 처음 만들었고 뒤이은 당나라 때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런데 지명이나 관직명은 중국의 것을 가져다 써도 내용적으로는 크게 달라질 게 없겠지만 과거제(科擧制)는 다르다. 과거제는 관리 임용제도이므로 신라의 여건에 맞지 않는다면 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앞서 말했듯 중국의..
중국화의 물결③ 703년의 수교는 바로 이 진짜 일본과 한반도의 단독정권 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아시아의 평화, 팍스 아시아나(Pax Asiana)는 완전히 무르익었다. 과연 중국은 모든 질서의 중심이었다. 중국이 안정되면서 동아시아 전체가 평화를 되찾았으니까. 신라와 일본은 동아시아 평화와 문명의 중심인 당나라에 앞다투어 견당사(遣唐使)를 보내면서 본격적으로 당을 모방하기 시작했다(심지어 일본은 당의 수도인 장안을 모방해서 계획도시를 새 수도로 꾸며 천도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그런 운동이 당풍(唐風)이라는 정식 명칭까지 얻었지만, 신라는 일본과 달리 당의 일부나 다름없었으므로 ‘모국화’라고나 해야 할까? 모국화 드라이브는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 ~ 765) 치세 때 절정에 달한다. 우선 ..
중국화의 물결②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가 즉위한 직후인 703년에 일본에서 사신이 와서 수교를 맺었다는 점이다. 신라와의 첫 대면에 걸맞게 당시 일본에서는 무려 204명의 대규모 사신단이 파견되었다. 불과 40년 전 백제를 도와 당군과 싸웠던 일본이 신라를 외교 파트너로 선택한 이유는 뭘까? 말할 것도 없이 그 일본과 이 일본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더 엄밀히 말한다면 ‘이 일본이 진짜 일본’이다). 한반도에 대규모 전란의 구름이 드리워 있던 645년 일본에서는 당시의 집권자였던 소가(蘇我)씨 세력이 타도되고 천황 세력이 집권하는 다이카(大化) 개혁이 일어난다(다이카란 일본이 최초로 제정한 연호다). 그러나 671년에 개혁 주도자인 덴지 천황이 죽자 다시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한반도의 백..
중국화의 물결 국제정세가 안정되자 신라로서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대내적 정비다. 비록 중국의 지방정권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한반도 내에서는 단독정권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행정제도와 관제를 대폭 손봐야 한다. 그래서 신문왕(神文王)은 우선 수도가 영토의 동남부에 치우친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충주와 남원에 각각 소경(小京)을 두고 주민들까지 강제 이주시켰으며, 전국을 대상으로 삼아 여러 가지 관직도 신설했다【이 무렵의 신라는 사실상 신생국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왕권의 힘이 후대에 비해 오히려 강력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신문왕(神文王)은 689년에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관리의 봉급제도를 바꾸는 개혁을 실시한다. 녹음제에서는 관리들이 토지 생산물과 주민들을 모두 소유했으나 이제부터는 토지 생산물..
남북국시대?③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발해가 처음부터 스스로 당에게 복속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발해는 독자 연호를 사용하면서 신라와의 차별성을 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적극적인 대중국 사대 노선을 취했다. 여기에는 대외적인 위신을 강화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적어도 계속 ‘반란 세력’으로 남아 당의 집중 타깃이 되는 일만큼은 피해야겠다는 의도도 있다. 발해는 애초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새 질서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조영(大祚榮)이 ‘발해국왕’도 아닌 발해군왕이라는 직책에 만족한 것은(이때부터 진국 대신 발해渤海라는 국명을 수용하게 되지만, 발해란 고유명사도 아니고 당시 보하이만渤海灣 주변의 지역을 중국 정부에서 총칭하던 일반명사였으니 명백..
남북국시대?② 불과 20여 년 전에 한반도 정벌의 대역사를 치른 당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제국의 영향권 바깥인 만주로 도망친 반란 세력까지 진압할 여력은 없다. 아마 추격군의 임무는 대조영(大祚榮)의 반란 무리를 랴오둥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다시는 랴오둥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설사 만주까지 추격할 의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추격을 계속할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 거란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돌궐이 오히려 랴오시에 둥지를 틀어 버리는 바람에 당은 랴오둥으로 가는 교통로마저 여의치 않아진 것이다. 그래서 당은 대조영이 진국을 세우고 천통(天統)이라는 독자적 연호마저 정하는데도 달래고 어르는 정책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705년에 당의 황제 중종(中宗)은 대조영에게 화해의..
남북국시대? 신라가 당의 지방정권 노릇을 자임함으로써 적어도 한반도는 완전한 중국의 영향권 내에 들었지만, 새로운 동아시아의 질서가 탄생하는 과정은 중국이 바라는 만큼 쉽게 진행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문제는 랴오둥이다. 한족 왕조인 당의 입장에서 볼 때 친소(親陳)의 스펙트럼은 확연하다. 우선 중원 북방 몽골 초원의 오랑캐들은 전통적으로 노골적인 적이므로 초지일관 적대시하면 된다. 또한 한반도의 오랑캐들은 늘 자발적으로 중국의 한족 왕조에 접근해 왔으므로 특별대우만 해주며 다독거리면 만사 오케이다. 그러나 그 스펙트럼의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랴오둥 ― 압록강 이북 지역은 언제나 중국에 양면적인 태도, 중국의 힘이 강하면 사대하고 약하면 저항하는 태도 ― 를 취해왔으므로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태도 ..
지방정권의 한계③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의 지방자치제였다고 할까? 통일신라시대 신라 중앙정부의 힘은 경주 부근, 넓게 잡아 옛 신라의 영토까지밖에 미치지 못했다. 이 점은 신라의 토지제도인 녹읍제(祿邑制)에서도 확인된다. 통일을 이룬 뒤 중앙정부는 중국의 균전제(均田制)를 모방해서 토지를 분급하는데, 관리들에게 분배한 토지를 녹읍(祿邑)이라 부른다. 그런데 고을[邑]을 봉급[祿]으로 준다는 뜻이니 녹읍은 단순히 경작지만이 아니라 한 지역이나 촌락 전체를 의미한다. 즉 녹읍을 받은 관리는 그 지역의 토지 생산물은 물론이고 주민들에 대해서도 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렇잖아도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한 중앙정부는 녹습제가 실시되면서 더욱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녹읍 내에서는 녹읍의 임자가 사실상의 왕이었..
지방정권의 한계② 그런데 왜 신라 정부는 그런 차선책을 구사하지 않았을까? 사정에 따라 수도를 몇 차례나 옮긴 백제나 고구려의 역사를 보더라도, 수도를 옮기는 일은 비록 까다로운 프로젝트이기는 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백제나 고구려와 달리 신라는 1천 년에 가까운 사직을 유지하는 동안 도읍을 옮긴 적이 한 번도 없다. 삼국 분립기에는 사정상 그랬다 치더라도 삼국통일을 이룬 뒤에도 신라가 경주를 고집한 이유는 뭘까? 여기에는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첫째 이유는 앞서 말한 신라의 지위를 생각한다면 알기 쉽다. 신라는 비록 한반도의 중부까지 영토로 거느리고 있었지만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본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장수왕(長壽王) 시대에 고구려도 역시 북위에 조..
지방정권의 한계 문무를 겸비했던 삼국통일의 주역 문무왕(文武王)은 681년에 죽으면서 자신의 무덤을 따로 쓰지 말고 시신을 화장해서 바다에 뿌리라는 특이한 유언을 남긴다. 불교가 융성하던 때였으니 화장이 이상할 건 없으나 일국의 왕이 무덤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그가 걱정한 것은 왜구의 침략이었다. 그래서 그는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막아내겠다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신라의 동해안을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던 왜구지만 백제, 고구려와 치열한 다툼을 벌이던 시기에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신라의 큰 문제가 되지는 못했다. 이제 삼국통일을 이루고 신라가 건국된 이래 처음으로 정치적 안정을 찾았으니 문무왕은 그 ‘사소한 문제’나마 극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큰 통일과 작은 통일② 북위가 화북을 장악했던 5~6세기 150년 동안 중국과 한반도는 모처럼 균형을 맞추면서 안정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으나, 어차피 중국이 정치적으로 통일되면 한반도는 다시 변방의 지위로 돌아갈 처지였다. 과연 581년 통일제국 수나라가 들어서면서 예고된 변방 정리 사업에 착수했으며, 그 최종적인 결과가 바로 신라의 삼국통일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에 처음으로 단일 왕조시대가 개막된 것은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거대한 역사적 변동의 마무리에 해당한다. 중국은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고 신라를 복속시킴으로써 ‘큰 통일’을 완성했고, 신라는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하면서 한반도의 유일한 정권으로 새로 태어남으로써 ‘작은 통일’을 이룬 것이다. 이제 다시 중국과 한반도는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게 되었다..
1장 새 질서와 번영의 시대 큰 통일과 작은 통일 당의 식민지 총독부 격인 안동도호부가 랴오둥으로 옮겨간 것은 신라의 저항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의 정책 변화에도 이유가 있었다. 당시 신라는 당에 정면으로 대립할 처지도 아니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만약 신라가 당에 저항하면서도 사대하는 양면 정책을 취하지 않았더라면 당은 필경 한반도의 지도에서 신라마저 지워 버리는 계획을 추진했을 것이다. 이렇게 신라와 당이 서로에 대한 이중적인 노선을 취한 이면에는 중국 역대 제국의 전통적인 대한반도 정책이 반영되어 있다. 사실 이 정책은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단군과 고조선시대에까지 닿으며, 아래로 내려간다면 19세기 말까지도 이어진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성립과 발전에 중국의 대륙풍이 크게 작용했다는 ..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신라의 삼국통일은 중화세계의 완성이다. 따라서 중화 질서의 변방인 신라는 중국이 붕괴하면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중화의 질서가 정점에 달한 8세기 초반에 잠시 번영을 누렸던 신라는 중국이 당말오대의 위기에 빠지자 극심한 혼란기로 접어든다. 발해가 포기한 랴오둥을 무대로 거란이 비중화세계의 대표주자로 성장하는 가운데 한반도의 단독정권은 고려에게로 넘어간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삼국에서 일군으로③ 물론 문제 해결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당 고종은 크게 화를 냈고 문무왕(文武王)의 관직을 박탈하면서 정식으로 신라 정벌군을 편성해서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애초 통일전선의 목표였던 백제와 고구려가 사라진 이상 양측 모두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관점의 차이는 번진과 조공국의 차이였던 만큼 양측의 모순은 비적대적인 것이었다. 과연 왕은 재빨리 황제에게 사과했고, 황제는 짐짓 물러서며 관직을 회복시켜 주고 군대를 거둬들였다(당시 고종은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책봉했으나 물론 그건 제스처다). 이후 양측 간에 소규모 전투가 몇 차례 있었으나 그건 제국과 왕국의 새로운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한 절차에 불과했다. 문무왕은 한편으로 당의 파견군과 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의 비위를 거스르..
삼국에서 일군으로②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건 개인적인 성향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사실 백제 왕자 부여융에게 침을 뱉을 때만 해도 문무왕(文武王)은 모든 문제가 끝났다고 여겼다. 가문의 원수와 나라의 원한을 다 갚았으니 이제 신라는 왕실이나 백성들이나 두루 평안을 되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고구려 원정에서 당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할 때도 그는 군말없이 동생 김인문(金仁問, 629 ~694)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험한 북행길에 오르게 했다【비록 당에게는 꼬리치는 개의 노릇을 한 김춘추였으나 그래도 그는 지락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둘째 아들 김인문의 역할에서 김춘추의 탁월한 구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아마 자신의 사후에 자신이 했던 역할을 둘로 나누어 대내 정치는 태자인 법민에게, 외교는 둘째인 인문에게..
삼국에서 일군으로 연개소문의 삼형제 중 끝까지 저항한 사람은 둘째인 연남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특별히 기개있는 인물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형 남생을 쫓아내고 대막리지가 된 그였으니, 항복한다고 해서 고구려 원정군으로 온 형의 용서를 받을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평양성에 점령군이 들어오자 남건은 자살하려다가 실패했는데, 나중에 형과 아우는 당의 직책을 받은 반면 그는 혼자 유배형을 받아 줄을 잘못 선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백제의 선례를 좇아 고구려에도 즉각 ‘군정청’이 설치되었다. 한때 중국의 화북 왕조와 맞설 만큼 강력한 왕국을 이루었던 고구려의 영토는 아홉 개의 도독부로 나뉘어 당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그 중 평양에 설치된 안동도호부가 당 군정청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20세기..
시나리오 2 사슬을 해체한다② 과연 이적은 초장부터 전술 운용에서 한 수 위의 기량을 과시한다. 과거의 원정들이 모두 실패한 이유는 랴오둥을 방기하고 조급히 압록강을 건넜기 때문이라고 본 그는, 시일이 걸리더라도 랴오둥을 완전히 정복하고 나서 고구려 본토로 치고 들어가겠다는 기본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랴오둥의 판세를 읽은 다음 요처인 신성을 함락시키는 데 전력을 집중한다. 이적의 명성과 당의 대군에 겁을 먹은 성주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여 서전(緖戰)은 손쉽게 승리한다. 게다가 신성이 함락되자 인근 16개의 고구려 성이 와르르 무너지니 부수입도 짭짤하다. 하지만 이적은 서둘지 않는다. 667년 한 해 내내 그는 랴오둥을 차근차근 먹어들어 가면서도 압록강을 건너려고는 시도하지도 않았..
시나리오 2 사슬을 해체한다 김춘추 부자는 의자왕(義慈王)이 따르는 술을 마시고 매국노를 잡아죽인 것에 만족할 수 있었으나 소정방은 달랐다. 신라에게는 백제가 사슬이지만 당나라에게는 한반도 전체가 사슬이므로 백제는 그 하나의 고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소정방은 또 하나의 더 튼튼한 고리를 끊어야 사슬을 완전히 해체할 수 있었다. 그래서 660년 8월 그는 의자왕의 술을 마시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우선 의자왕과 왕자들을 비롯하여 88명에 이르는 백제의 대신들과 장군들, 게다가 무려 1만 2천 807명의 백제 백성들까지 장안으로 압송한 다음에 소정방은 곧바로 고구려 공략 작전으로 들어갔다. 그 해 11월에 고구려 원정군이 출발했으니 그는 가히 초인적인 체력의 소유자였던 듯하다(게다가 당시 그는 65세..
두번째 멸망② 일본에서 출발할 새 왕에게 또 다른 선물을 주기 위해설까? 아니면 오히려 부여풍을 이름만의 왕으로 제한하려는 예비 공작일까? 자신을 얻은 복신은 수도 탈환을 계획한다. 이미 백제의 유민들이 속속들이 합류해 오면서 백제 부흥군은 3만의 병력으로 늘어났다. 한편 당과 신라 입장에서는 사비성까지 내주면 그동안 공들인 백제 정벌 자체가 수포로 돌아갈 터이다. 그래서 웅진도독(‘당 군정청의 장관’ 격이다)인 유인궤(劉仁軌)는 일단 다른 곳들은 제쳐두고 전 병력을 당의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수비를 담당하고 있는 사비성으로 집결시켜 방어에 나선다. 이쯤 되면 누가 정벌군이고 누가 방어군인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은 도성을 포위하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함락시킬 힘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유인궤..
두 번째 멸망 호가호위(狐假虎威)라 했던가? 항복한 부여융에게 더 가혹하게 군 사람은 실제 정복자인 소정방이 아니라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金法敏)이었다. 승자인 신라의 왕자는 패자인 백제의 왕자를 말 앞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는데, 놀라운 것은 그의 발언이다. “20년 전에 네 아비가 내 누이를 원통하게 죽인 일이 있는데, 이제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구나.” 말할 것도 없이 그는 642년의 대야성 전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항복을 받은 뒤 첫 마디가 20년 전의 이야기라면 김춘추 부자가 백제에 얼마나 큰 사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김법민은 정복자가 아니므로 말은 그렇게 해도 실제로 부여융의 목숨까지 빼앗을 권리는 없다. 따라서 그는 따로 화풀이 대상을..
시나리오 1 약한 고리 끊기③ 그제서야 비로소 다급해진 의자왕(義慈王)은 달솔(백제 16관등중 제2관등.)인 계백(階伯)에게 5천 결사대를 주어 신라군을 막게 하는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계백이 전장으로 출발하기 전에 가족을 모두 자기 손으로 죽인 것은 그런 백제의 운명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런 각오 덕분에 그는 황산벌(지금의 논산군 연산읍)에서 백제 병력의 열 배인 신라 병력을 상대로 네 차례 싸워 모두 이기는 탁월한 전과를 올리지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었다. 백제에 대한 신라군의 두려움만 없앤다면 승산은 단연 신라 측에 있다. 이 점을 감지한 김유신의 부관 김흠순은 아들 반굴을 전사시켜 사기를 고취하려 했고, 그에 뒤질세라 또 다른 부관 김품일도 열여섯 살의 아들 관창을 윽박질러 단기로..
시나리오 1 약한 고리 끊기② 660년 봄 당 고종은 소정방(蘇定方, 595~667)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13만의 대군을 배에 실어 인천 앞바다로 보냈다. 거기서 당군은 신라군과 접선한다(여기서도 신라가 한강 하류를 차지한 것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백제 원정의 기본 방침은 이미 태종 때 세워져 있었으니 필요한 건 세부 계획뿐인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신라와의 분업이다. 백제 정벌이야말로 신라가 바라마지 않던 꿈, 따라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적극적인 협력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분업 구도에서 신라가 맡은 임무는 그다지 적극적인 게 아니다. 신라의 가장 큰 임무는 전투보다 ‘보급’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군이 백제의 수도를 공격하는 동안 신라군은 동쪽의 공략을 ..
3장 통일의 무대 시나리오 1 약한 고리 끊기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행적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즉위 초기 빛나는 대외 전과를 올린 것과 달리 후기에 가서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방탕해지는 것이다. 전쟁보다는 주로 외교에 주력하던 아버지 무왕(武王)과 달리 그는 즉위 초부터 적극적인 신라 공략에 나서서 짭짤한 전과를 올렸다. 비록 대야성 정복으로 기세가 최대로 올랐을 때 원래부터의 목표였던 한강 하류 수복을 시도했다가 선덕여왕이 당나라에 SOS를 치는 바람에 물러서긴 했지만, 당나라가 고구려 원정으로 손이 비는 틈을 이용해서 다시 신라의 일곱 성을 획득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곳곳에서 신라의 명장 김유신에게 발목을 잡히는 일만 없었더라면 아마 의자왕은 그 참에 한강 하류는 물론 신라 본토까지 ..
사대주의 원년② 하지만 애완견이 주인에게 먼저 의사 표시를 할 수는 없다. 당의 수도 장안에 간 김춘추는 조급한 마음을 감추고 한동안 국자감을 둘러본다든가 강연을 듣는다든가 하며 짐짓 한가로이 지낸다. 이윽고 주인이 개를 불렀고 그제서야 개는 짖어대기 시작했다. 물론 주인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되니까 고구려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신라는 오래 전부터 천조를 섬겨왔는데, 교활한 백제가 괴롭히고 입조의 길을 막으니 어서 천병(天兵, 당나라 군)을 보내 백제를 멸해주소서.” 주인에게서 그만한 노력을 부탁하려면 아양떠는 것이외에 뭔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서 개는 주인의 모든 것을 따르겠다고 말하며 제 새끼들 중 두 마리를 주인의 곁에 머물게 한다(장남인 김법민金法敏은 왕위계승권자였으..
사대주의 원년 예나 지금이나 무장은 좋은 정치인이 되기 어렵다. 연개소문은 개인적 권력욕만이 아니라 국가적 야망도 지닌 인물이었고 당나라의 총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낸 영웅임에는 틀림없으나, 나라의 경영은 군사적 재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나라 이전에 집안의 경영에도 실패했다. 665년 그가 죽자마자 그의 세 아들 간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면서 맏이들 연남생(淵男生, 634~679)은 당나라에 투항해서 고구려 토벌의 앞잡이가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건 그의 사후에 일어난 일이니 전적으로 연개소문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그의 진정한 잘못은 고구려가 취해야 할 근본적인 노선을 잘못 결정했다는 점이다. 당시 고구려는 대중국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기보다는 당나라와 타협하면서 전통적인 남진정..
공존할 수 없는 두 영웅③ 이세민이나 연개소문이나 그것으로 고구려의 등불은 꺼졌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꺼진 불도 다시 보게 만든 것은 안시성이었다. 사실 연개소문이 지원군을 보내지 않는 편이 전황에는 더욱 유리했을 것이다. 안시성은 끄떡없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세민이 안시성을 포기하고 그대로 평양을 향해 남진했더라면, 남은 수비 병력이 없는 고구려는 견디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랴오둥을 포기하고 평양으로 진격했던 수나라의 실패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 그는 안시성 공략에 나섰고, 안시성은 위기의 고구려를 구했다.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은 이미 당대에 이름을 높이 날리던 명장이었다. 게다가 그는 당대의 명장답지 않게 정치적 야망이 없는 강직하고 충직한 군인이었던 듯하다(연개소문의 쿠데타를 지..
공존할 수 없는 두 영웅② 그러나 두 영웅이 공존할 수 없다는 ‘원칙’은 달라진 게 없다. 다만 앞서의 두 영웅이 영류왕(營留王)과 을지문덕(乙支文德)이었다면 이번에 자웅을 결할 두 영웅은 연개소문과 당 태종 이세민이다. 쿠데타라는 집권 방식도 닮은꼴이고 나이도 엇비슷한(연개소문의 출생 연도는 전하지 않지만 맡아들인 남생이 634년생인 것으로 미루어 598년생인 이세민보다 약간 아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세민과 연개소문은 점차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맞붙어야 할 호적수로 떠오른다. 연개소문의 집권은 그렇잖아도 구실을 찾고 있던 당 태종에게 행동에 나설 계기를 주었다. 중국에 맞서는 고구려, 그리고 그 고구려와 결탁한 백제, 이제 그는 임시 파트너로 여겨왔던 신라에게서 임시라는 딱지를 떼어주고 정식 파트너..
공존할 수 없는 두 영웅 두 영웅은 공존하지 못하는 걸까? 콤비를 이루어 나라를 구해냈던 두 영웅인 영류왕(營留王)과 을지문덕(乙支文德)은 막상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나서는 화합을 이루지 못했다. 영류왕은 장수왕(長壽王) 이래 고구려 왕실의 전통적인 정책인 남진을 고집했으나, 그에 반해 을지문덕은 중국의 왕조 교체기를 틈타 랴오둥을 다시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물론 고구려는 아직 랴오둥의 성곽들을 보존하고 있었으나 수나라의 침략 이후 랴오둥은 사실상 소유권이 불분명해져 있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당연히 영류왕에게 줄을 섰다. 아마 무관들은 상당수 을지문덕의 견해에 따랐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는 패기만만한 한 젊은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바로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이다【『삼국사기』..
새로운 동맹② 고구려에서는 파란만장한 치세를 보낸 영양왕(嬰陽王)이 618년에 죽자 수나라와의 대회전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과 더불어 구국의 영웅이었던 건무(建武)가 영류왕(營留王, 재위 618~642)으로 즉위했다. 때마침 자신이 즉위한 그 해에 중국에서도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됐으니 영류왕으로선 신흥제국에 유감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집권 초기에 그는 적극적으로 당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한다. 그 일환으로 당 고조 이연(李淵)의 요청에 따라 만여 명에 달하는 중국 포로들도 송환시켰고, 624년에는 당나라로부터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수입하고 도사들을 초빙해 시리즈 특강도 하게 했다【도가 사상은 원래 남북조시대에 크게 성행했는데 당나라 초기에는 정부의 특별 지원을 받았다. 여기에는 ..
새로운 동맹 백제 무왕(武王)은 아마 당나라와 고구려, 신라를 놓고 한참 저울질을 했던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백제는 그 세 나라와 모두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당나라는 언제든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래야 할 대상이고, 고구려와는 신라에게 영토를 빼앗겼다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으며, 신라와는 진평왕(眞平王)과의 친분이 있다. 그래서 그는 세 나라를 모두 확실한 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줄다리기 외교를 펼쳤다. 그런 대치 국면이 장기적으로 지속된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훌륭한 방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동북아 정세는 마냥 그렇게 전개될 수 없었다. 특히 태풍의 핵과 같은 당나라가 곧 안정을 찾으면 언제든지 한반도를 복속시키려 들 것이며, 그때 가서는 백제도 어떻게든 분명한 노선을 정하지 않으면..
중국의 낙점② 비보를 전해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몸을 기대고 하루종일 망연자실해 있다가 이렇게 부르짖는다. “슬프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리.” 백제의 윤충은 아마도 100년 전 성왕(聖王)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했다고 여겼겠지만 딸을 잃은 김춘추의 마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나라 신라는 복수를 해줄 만한 힘이 없다. 사무치는 개인적 원한에다 국가적 과업을 덧붙여 그는 마침내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는다. 사적인 복수와 공적인 과제, 어느 것이 그의 마음에서 더 큰 자리를 차지했을까? 추측하자면 아무래도 전자인 듯싶다. 냉정하게 판단했다면 일찍이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영토가 있으니 고구려가 그의 요청을 들어줄 리 없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
중국의 낙점 654년에 김춘추는 왕위에 올랐으나 이미 그때 그의 나이는 쉰이었고, 불과 7년간 재위하고 죽었다. 따라서 그의 즉위는 개인적으로는 아버지 김용춘의 맺힌 한을 풀었다는 것, 공적으로는 그동안 그가 세운 공로에 대한 포상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후 신라의 왕위계승이 매끄러워졌다는 것 이외에는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처남인 김유신과 더불어 사실상 신라의 리더로서 중대한 시기에 신라의 중대사를 모두 처리했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치세에 기록된 거의 모든 일은 그 두 사람의 업적이나 다름없다. 수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할 줄 알았던 고구려가 부활하자 한반도 삼국의 관계는 일단 예전으로 돌아갔다. 물론 618년에 수나라를 대체한 당나라가 아직 몸을 추스르기 전이니까 말하자면..
신라의 성장통③ 다행히 여왕을 옹립한 모험은 결과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최초의 여왕답지 않게(?) 선덕여왕은 처음 맡은 나랏일을 능숙히 처리했던 것이다. 일단 여왕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그녀는 백성들에게 1년간 조세를 면제해주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책봉도 거뜬히 받아냈다. 게다가 백제와 고구려가 침략해 왔을 때도 효과적으로 대처해서 군사적 능력도 뒤지지 않음을 과시했다. 말년에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라는 자가 여성 군주를 탓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옥에 티를 남겼으나 그 정도쯤은 탓할 일이 못 된다. 문제는 국내외적으로 혼란기였던 15년간 그녀가 무사히 나라를 다스리고 나서 또 다시 후계 논란이 대두되었다는 점이다. 여성인 데다 출가했던 몸이었으니 여왕에겐 당연히 후사가 없었다. 덕..
신라의 성장통② 그러나 여기에는 의문이 있다. 물론 골품제의 전통은 중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부장제가 당연시되었던 그 시대에 중국에도 전례가 없는 여왕을 옹립하는 일이 쉬웠을까? 고대 일본에는 신화시대에 여성 천황이 있었지만 적어도 역사시대에 동북아시아에서 여성이 국가 수반에 오른 경우는 없었다【중국의 경우 여성이 집권한 사례는 있다. 일찍이 한 고조 유방(劉邦)의 아내 여태후는 남편이 죽은 뒤 제국의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녀는 실권만 지녔을 뿐 스스로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7세기 말에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남편인 태종이 죽자 그의 아들 고종(高宗, 재위 649 ~ 683)의 후궁이 되었다가 병약한 고종 대신 권력을 장악했으며, 690년에는 직접 제위에 올라 15년간 재위..
신라의 성장통 나제동맹(羅濟同盟)이 신라의 배신으로 깨지고 백제 성왕(聖王)이 전사한 게 불과 50년 전의 일인데도 백제 무왕(武王)이 신라의 진평왕(眞平王)에 접근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아무리 대고구려 정책에 관한 한 공동의 이해관계로 묶여 있다고는 하지만 백제는 신라와 앙숙인 데다 신라로부터 반드시 되찾아야 할 영토도 있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무왕은 어떻게 진평왕과 보조를 같이 할 마음을 먹었던 걸까?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역사에 기록된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지만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이다. 서동이라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해지는 서동요의 주인공이 아닌가? 백제 왕자 서동이 마 장수로 변장하고 신라에 와서 아이들에게 마를 공짜로 나누어주며 ‘선화공주가 밤마다 남몰래 서동의 방..
2장 통일 시나리오 동북아 네 나라의 입장 반도 북쪽에서 수나라와 고구려가 대회전을 벌이던 무렵 반도 남쪽의 두 나라는 숨죽인 채로 그 승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 전쟁에 영향을 미칠 수 없지만 전쟁의 결과는 곧 그들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두 나라는 무엇보다도 줄을 잘 서야 한다는 생각에 사태를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고구려에 적대적이고 중국에 사대하고 있는 처지였으므로 그들이 응원하는 측은 당연히 수나라다(당시까지는 한반도 단일민족의식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백제와 신라의 입장이 약간 다르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 전쟁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예고되어 있었으므로 백제와 신라 역시 팔짱만 끼고 앉아 있지는 않았다. 수 양제가 마음 속으로 원정 일정을 ..
고구려의 육탄 방어④ 수나라의 대군은 수륙 양면에서 완벽히 패했다. 그러나 수 양제는 좌절 대신 분노와 복수심을 불태운다. 이듬해인 613년, 그는 측근들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고구려 정벌을 계획했다. 사실 1차전에서 건무와 을지문덕(乙支文德)이 구국의 영웅으로 활약했다지만, 고구려가 승리했다기보다는 수나라가 자멸했다고 봐야 한다. 랴오둥의 고구려 성곽들을 그냥 지나친 것은 하루라도 빨리 고구려의 수도로 진격하겠다는 조급증의 발로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선 요동성부터 확실히 정복하고 천천히 진격하는 작전이 채택된다. 요동성은 랴오둥 방어망의 핵심, 따라서 이곳이 무너지면 랴오둥도 넘어간다. 새로운 전략은 과연 효험이 있었다. 요동성 수비대는 악착같이 버텼으나 워낙 병력의 차이가 큰 탓에 점차 힘..
고구려의 육탄 방어③ 수 양제(煬帝)는 대담하게도 고구려의 주요 성곽인 요동성(지금의 랴오양) 서쪽 부근에 자신이 머물 진을 차렸다. 그의 전략은 본군으로 랴오둥의 고구려 성들을 하나씩 부수는 한편 선박에 병력을 나눠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직접 공략하는 것이었다. 이런 공격측의 전략에 따라 방어하는 고구려도 전선을 둘로 나누었다. 이 두 전선에서 위기의 고구려를 구한 구국의 영웅 두 명이 등장한다. 수나라의 수군 총사령관인 내호아(來護兒)는 거칠 게 없다. 비록 고구려에도 수군이 있다지만 함선들의 길이만도 수백 리나 뻗을 정도의 대군을 감당할 수는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수나라의 수군이 대동강 입구로 들어오는 동안 고구려의 선박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순조롭게 대군을 상륙시킨..
고구려의 육탄 방어② 수 문제는 영양왕의 일탈(?)을 용서했으나 그의 아들로 수나라 2대 황제가 된 양제(煬帝, 재위 604~618)의 생각은 달랐다【아버지와 형을 살해할 만큼 잔혹한 인물이긴 해도 양제는 통일제국의 황제답게 스케일이 큰 군주였다. 특히 대외적 안정에만 힘쓴 아버지와는 달리 그는 제국을 제국답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래서 벌인 게 대운하 건설이다. 이것은 정치적 중심인 화북의 황허와 경제적 중심인 강남의 양쯔강을 남북으로 잇는 엄청난 규모의 운하인데, 당대의 백성들은 그 대역사 때문에 죽어나야 했고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수 양제는 큰 욕을 얻어 먹어야 했지만 이 운하는 오늘날까지도 잘 사용되고 있으니 지금의 중국인들은 오히려 양제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이집트..
고구려의 육탄 방어 같은 사건을 두고 이해관계에 따라 평가와 대책이 달라지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같은 한반도 땅에서 서로 접경하고 있는 처지에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의 변화에 대처하는 방식이 판이하게 다른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은 중국의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뜸 수나라의 침략을 걱정했으나 백제의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598)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다. 즉각 수나라의 천하통일을 치하하는 사신을 보낸 것이다. 나아가 598년에 위덕왕(威德王)은 수 문제가 고구려 정벌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기꺼이 길잡이가 되겠다고 나서기까지 한다. 지리적으로 백제가 중국의 고구려 침공에 길잡이를 맡을 수는 없는 데다 그 자신도 이미 일흔..
대륙 통일의 먹구름② 아마 남중국의 왕조가 통일을 이루었다면 그런 예상대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족 왕조들이 꾸려 온 남중국의 여러 왕조들은 남북조시대 내내 물리력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민족들이 세운 호전적인 북중국의 왕조들은 북위가 지배하던 안정기를 제외하고는 내내 자기들끼리 중원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따라서 새 통일제국인 수나라가 북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그 정치적 통일이 예상 외로 강력하리라는 점을 말해주는 하나의 증거였다【그 가운데서 남조의 왕조들은 후대에 ‘육조(六朝) 르네상스’라 불리는 찬란한 문화의 시대를 열었다(오, 동진, 송, 제, 양, 진 등 남조의 여섯 왕조를 육조라고 부른다). 화가 도연명(陶淵明), 고개지, 서예가 왕희지 등이 바로 이 시대의 예술가들..
대륙 통일의 먹구름 사위가 남부 전선에서 고군분투할 즈음 평원왕은 서쪽에서 들려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중국 천하가 통일되었다는 소식이다. 북주의 외척이었던 양견(楊堅)이라는 자가 제위를 찬탈하고 새로 수(隋)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이미 9년 전에 들은 바 있었고, 그때 평원왕은 즉각 수 문제(文帝)가 된 양견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과 책봉을 교환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그 수 문제가 진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워낙 대륙의 정세가 어지러우니 수나라도 그냥 스쳐지나가는 왕조려니 생각했었다. 당시 대륙 왕조들의 평균 수명은 50년이 채 못 되었고 북주 같은 경우는 그 절반도 못 되었으니 이번엔 또 얼마나 갈까 싶은 게 평원왕의 예상이었다. 그러나 수나라는 달랐다. 북주가 간신히 통일해놓은 화..
기회를 놓치는 고구려② 그 찬스가 순수한 가정으로만 남은 이유는 당시 고구려의 사정 때문이다. 장차 중국 대륙에 격변이 있을 것임을 하늘이 고구려에 예고해 주기라도 하듯이 북위가 멸망하던 바로 그 시기에 고구려에는 홍수와 지진, 전염병, 태풍, 가뭄, 기근 등이 차례로 덮치며 전국을 재앙에 가까운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게다가 안원왕 말기에는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귀족들이 치열한 파워게임을 벌이기까지 한다. 두 왕비의 소생을 둘러싸고 귀족 세력이 추군과 세군의 두 파로 나뉘어 무력 충돌까지 빚었으니 나라 밖의 정세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그런 상황에서 추군 귀족의 지원으로 545년에 어렵사리 양원왕(陽原王, 재위 545~559)이 즉위했으니 당연히 귀족들의 입김이 거세어지고 왕권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
기회를 놓치는 고구려 6세기 중반 한반도에 신문이 있었다면 남부일보」의 톱기사는 단연 나제동맹(羅濟同盟)의 파괴와 백제 성왕(聖王)의 죽음, 신라의 한강 하류 점령이었겠지만, 북부의 경우는 달랐을 것이다. 장수왕(長壽王) 시대부터 거의 매년 북위에 조공해 왔던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북위가 534년에 동서로 분열된 소식이 일면 톱기사가 되지 않았을까? 150년 동안 중국 화북의 패자로 군림했던 북위가 사라진 것은 곧 향후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크게 변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북위는 완전히 멸망한 게 아니라 동위와 서위로 분리되었지만 더 이상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축으로 역할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아닌 게 아니라 동위는 곧 북제로 명패를 바꾸었다가(이 때문에 남조의 제를 남제라고 부르게 된다) 서위에..
밀월의 끝④ 그러거나 말거나 진흥왕(眞興王)은 이제 마음껏 휘파람을 불 수 있게 되었다. 관산성 전투에 대가야가 참여한 것은 그에게 좋은 빌미를 주었다. 이 참에 선왕이 남긴 숙제를 해결하자! 그래서 이듬해부터 그는 본격적인 가야 정벌에 나선다. 그렇잖아도 그는 4년 전 가야 출신의 우륵(于勒)이라는 음악가가 들려준 가야금의 매혹적인 선율을 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창녕을 정복하고 여기에 완산주를 설치하니 이제 가야는 거의 손 안에 들어왔다【풍부한 철광산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철기 문화를 발전시켰던 가야는 적어도 3세기까지는 신라보다 확실히 강국이었다. 한창 때 가야는 백제와 일본의 중계 무역에다 철을 주요 수출품으로 삼아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도약의 계기를 맞아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게 우선 결정..
밀월의 끝③ 과연 그 기지를 발판으로 성왕(聖王)은 이윽고 그 이듬해에 한강 유역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참에 신라는 거칠부를 시켜 죽령 이북에서 철령 이남까지 고구려의 군 10개를 손에 넣었다(죽령은 오늘날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이고 철령은 함경남도와 강원도의 경계니까 당시 신라는 강원도 전체를 차지했다고 보면 된다. 이것으로 신라의 영토는 무려 두배로 늘어났다). 백제는 원하던 한강 하류를 수복했고, 신라는 그 동쪽 한반도 중부의 넓은 땅을 새로 얻었다. 동맹의 완벽한 합작이다. 성왕은 이렇게 여겼으리라. 그러나 그는 아직까지도 진흥왕(眞興王)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있다. 도저히 십대의 청소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진흥왕은 교활했다. 강적인 고구려를..
밀월의 끝② 551년 아직 소년왕의 티를 벗지 못한 열일곱 살의 진흥왕(眞興王)은 어머니의 섭정이 끝나고 친정(親政) 체제를 시작하자마자 중대한 결심을 굳힌다. 120여 년 동안 신라의 성장에 결정적인 발판을 제공했던 나제동맹을 깨기로 한 것이다. 새는 알을 부수고 나온다. 그 새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했던가? 원래 껍질이란 자신이 연약할 때는 보호막이 되어주지만 더 이상의 성장을 위해서는 깨어져야 하는 법이다. 진흥왕은 기꺼이 아프락사스가 되려 한다.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꾼 것은 그런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백제 성왕(聖王, 재위 523 ~554)은 아직 나이 어린 진흥왕(眞興王)이 그렇게까지 노회한 구상을 품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사실 동맹으로 이득을 본 것은 백제도 마찬가지였..
1장 역전되는 역사 밀월의 끝 지증왕과 법흥왕의 2대에 걸쳐 급속히 진행된 신라의 ‘재건국’ 과정을 보면 후발주자의 이득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고구려와 백제가 수백 년 동안 서서히 이룬 선진화 프로젝트를 신라는 불과 50년도 못되는 기간에 완수했다. 이것으로 새 나라의 하드웨어 정비는 끝났다. 뒤이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초기에 신라는 소프트웨어 분야까지 손을 댄다. 544년에는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가 완공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이사부의 건의로 거칠부(居柒夫)가 신라 최초의 역사서인 『국사(國史)』를 편찬했다【지금까지 나온 삼국시대 인물들의 이름이 대개 그렇듯이 이사부와 거칠부라는 희한한 이름도 역시 이두 이름이다. 한자로는 異斯夫, 居柒夫로 표기되어 있지만 한자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
3부 통일의 바람 중국의 질서가 변한 것은 삼국 중 가장 후발주자인 신라에게 찬스를 제공한다. 백제와 고구려가 가지고 있었던 한반도 중부의 영토를 손에 넣은 신라는 자연히 두 나라의 타깃이 된다. 신라를 이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중국의 새로운 통일제국인 수와 당이다. 변방 정리의 일환으로 중국이 고구려를 침공함으로써 고구려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중국적 질서를 재빠르게 받아들인 신라가 한반도의 단독 정권으로 발돋움한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제2의 건국③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왕실이 아니라 귀족들에게 불교가 퍼지는 것이다. 극동의 불교는 대부분 호국불교였으므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대환영이지만 신라 귀족들의 입장은 약간 다르다. 지증왕 때부터 제2의 건국을 추진하면서 개혁의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자 그들은 한편으로 나라가 선진화되는 게 싫지 않으면서도 왕이 직접 개혁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떨떠름한 심정일 수밖에 없다. 국왕과 국가의 명칭을 확정하는 문제, 순장을 금지하는 조치 등에 관해서는 찬성과 지지를 보낼 수 있으나 자신의 국가관과 인생관까지 영향을 미치는 목을 베었고 이차돈이 미리 예언한 대로 그의 목에 불교의 문제라면 마냥 동의하기 어려운 처지다. 더구나 전통적인 무속 신앙에 별다른 문제점이 없는 데도 머리를 박박 밀고 이상한 옷..
제2의 건국② 하지만 지증왕의 개혁 드라이브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과거로부터 전해지던 악습인 순장의 풍습을 폐지하는데, 이건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이 장기기증운동에 참여한 것에 해당하는 충격적인 조치다. 신라의 순장 풍습은 국왕이 죽었을 경우 남녀 다섯 명씩을 함께 매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이 철저했던 시기에 지증왕이 그런 결심을 굳힌 것은 실로 대단히 용기있고 혁신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게다가 그는 소를 이용하여 논밭을 경작하는 우경(牛耕)을 최초로 도입하는가 하면 이사부(異斯夫)를 시켜 우산국, 즉 지금의 울릉도를 영토화하기도 했으니 다방면에서 획기적인 개혁을 이룬 팔방미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바탕에는 신라가 시대에 크게 뒤처졌다는 자각이 있었으리라. ..
제2의 건국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운 지 500년 이상이 지나도록 신라는 기나긴 잠을 자고 있었다. 물론 그 오랜 시절 동안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백제와 지난한 다툼을 벌였고 동해안을 수시로 침범하는 왜구에 시달렸는가 하면 고구려의 속령이 되는 경험까지 겪었다. 또 그런 가운데서도 꾸준히 강역을 늘리고 외부로부터 이주민들을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신라의 부족국가적 성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물왕(奈勿王) 이전까지 400여 년 동안 왕계조차 고정되지 못했다는 게 그 단적인 사례다. 이렇듯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여러 면에서 뒤처지게 된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선진적인 대륙 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신라가 일찍부터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삼국시대를 이루..
바뀌는 대륙풍② 만약 북위가 그 전성기에 남조까지 정복해서 대륙의 통일을 꾀했더라면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효문제(孝文帝)는 한반도에서 남진정책을 편 장수왕에게서 별로 자극을 받지 않은 듯하다. 워낙 넓은 대륙이라 한반도와는 사정이 다르다는 판단이었을까? 그러나 쇠는 뜨거울 때 두드려야만 연장을 얻을 수 있다. 효문제의 시대에 번성했던 북위는 그 이후 급격히 약화된다. 이런 북위의 쇠퇴는 중국에서는 물론이지만 한반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분열기치고는 비교적 오랜 기간 북중국을 장악하면서 동아시아의 정치적 구심점을 이루었기에 북위에서 불기 시작한 대륙풍의 변화는 동아시아 전체에 심상치 않은 기류를 만들어낸다. 우선 즉각적인 결과는 중국의 다원화다. 중국은 다시 분열기의 ..
바뀌는 대륙풍 317년 진(서진)이 강남으로 터전을 옮기고 북중국이 이민족들의 세상으로 바뀌었을 때, 중국은 유사 이래 최대의 혼란기를 맞았다. 1차 분열기인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는 그 기간이 워낙 길었던 데다 제후국들이 주나라 왕실을 상징적 중심으로 섬기며 쟁패했으므로 이처럼 무질서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한족’의 개념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던 탓에 이민족이라고 해서 특별히 배척되지는 않았지만, 지금 북중국을 주름잡는 민족들은 전통적으로 중국 한족 왕조에 의해 ‘오랑캐’로 취급되며 적대시되던 자들이다【오랑캐의 개념은 중화 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주나라 시대부터 있었으나, 민족적으로 분명히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부터다. 그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부터 장성 이북의 민..
기묘한 정립② 역설적이게도 나제동맹이 통일전선의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은 장수왕(長壽王)이 백제를 싹쓸이하고 난 다음부터다. 그것은 아마도 백제가 더 이상 신라에 대해 우위를 말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두 나라가 서로 어울리자 골치 아프게 된 것은 장수왕이다. 그로서는 아예 백제의 뿌리를 잘라 버리는 건데, 하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481년 고구려는 신라 북변을 침략했다가 신라, 백제, 가야의 연합군에게 패하는 수모를 겪는다. 3년 뒤 다시 공략해 보지만 나제동맹의 방어망은 더욱 강력해져 있다. 심지어 488년에 백제는 바다를 건너 공격해온 북위마저 격퇴시키는 개가를 올린다. 재건한 지 10여 년 만에 백제는 옛날의 명성을 절반쯤 되찾았다. 북위의 효문제(孝文帝)에게는 베옷을..
4장 진짜 삼국시대 기묘한 정립 장수왕(長壽王)의 백제 정벌로 이제 한반도의 서열은 분명해졌다. 고구려는 충청도 일대까지 영역을 넓혀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북위와 한층 돈독해진 우애를 유지했다. 북위의 효문제(孝文帝)는 고구려의 힘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개인적으로 장수왕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다소 있었던 듯하다. 서열상으로는 고구려가 북위를 받드는 처지였으나 효문제는 특히 고구려에 대한 안배에 신경을 썼다. 당시 북위의 황실에 오는 사신들의 공식 서열을 보면, 물론 강남의 제(齊, 479년 송나라가 멸망하면서 강남의 남조는 제나라로 바뀌었다. 그래서 남제라고도 부른다)나라 사신이 서열 1위였고 2위는 단연 고구려였다. 잘 나가는 고구려,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자의 단골..
백제의 멸망?③ 이것으로 장수왕(長壽王)은 증조할아버지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원한을 완전히 풀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것으로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역관계가 완전히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두 나라의 건국 이후 500년간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건국 이후 두 나라는 400년 가까이 지나도록 낙랑을 사이에 두고 있었던 탓에 직접 조우할 기회가 없었다. 완충지가 사라지자 두 나라는 곧바로 접경하게 되는데, 불행히도 그 결과는 교류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서전(緖戰)은 예상과 달리 백제의 완승,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고구려가 대중국 관계에 주력하느라 남부 전선에 전력을 다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근초고왕은 그점을 알았기에 승리한 뒤에도 고구려의 침략을 걱정했던 것이다), 중국은 ..
백제의 멸망?② 이렇게 고구려의 남침 의도가 점점 가시화되자 다급해진 것은 물론 백제다. 광개토왕(廣開土王) 때 역전된 이래 백제는 한번도 단독으로 고구려와 맞붙어 승리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품어본 적이 없다. 따라서 아신왕(阿莘王) 이후 전지왕(腆支王) - 구이신왕(久爾辛王) - 비유왕(毗有王)의 치세 50여 년 동안 백제는 늘 고구려의 남침을 최대의 국가적 고민으로 간직해왔다. 나름대로 대비는 하지만 아무래도 힘이 부치는 건 누가 봐도 분명하다. 따라서 백제가 기댈 것은 오로지 외교 즉 어떻게든 동맹을 확대하는 것뿐이다. 비유왕의 아들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475)은 이제 마지막 외교로써 다가올 국난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의 스폰서인 북위와 접촉하는 것이다. 장수왕(長壽王)이..
백제의 멸망? 정복군주란 원래 요절하는 걸까? 서른셋에 죽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처럼 광개토왕(廣開土王)도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비록 정복의 규모로 보면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알렉산드로스가 그랬듯이 광개토왕도 짧은 생애 동안 이룰 수 있는 모든 정복을 이루었다. 그러나 닮은 점은 여기까지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자마자 그의 세계제국은 후계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세 개의 헬레니즘 왕국으로 쪼개졌지만, 광개토왕은 훨씬 든든한 후계자를 두었다. 그의 아들 거련(巨連)은 아버지가 외형적으로 성장시킨 나라에 확고한 토대를 놓았으며, 무려 78년 동안 재위하면서 아흔여덟 살까지 살아 여러모로 요절한 아버지를 섭섭하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묘호가 장수왕(長壽王)이었을까? 앞..
뭉쳐야 산다② 아버지 내물왕(奈勿王)과 달라진 것은 협상의 파트너다. 아버지와 달리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 ~458)은 고구려를 안식처로 여기지 않았고 지속적인 파트너로 믿지도 않았다. 실성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쿠데타에는 고구려 측의 지원이 있었으므로 눌지왕은 즉위 초기에는 고구려에 대해 사대의 자세를 취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략일 뿐 진심은 아니었다. 사실 신라를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고구려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에게 신라는 좋게 말해 보호령일 따름이다. 광개토왕이 백제와 가야, 일본 연합군을 물리쳐준 이래 고구려는 신라에 상주군을 주둔시킬 정도였으니 현대사로 비유하면 1945년 남한에서 ‘점령국’ 행세를 톡톡히 한 미군의 지위나 다름없었다. 미 군정청 지배기에 이승만이 미군과 한편..
뭉쳐야 산다 한편 신라는 백제와 달리 부모처럼 받들어 섬길 나라도, 형제처럼 허물없이 지낼 나라도 없다. 신라는 아직 중국과 교류할 루트조차 확보하지 못했고, 가야와 일본은 이미 백제 측으로 노선을 정했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신라도 응당 이웃인 백제에게 접근해야 하겠지만, 백제는 건국 초부터 동진 정책으로 신라를 정복하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전통적인 앙숙이었다. 『삼국사기』 유례왕(儒禮王) 조의 기사에는 백제에 대한 신라의 증오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295년 왜구의 잦은 해안 침략으로 신라 왕실에서는 백제와 연합해서 일본을 쳐들어 가는 게 어떻겠느냐는 논의가 있었다(당시에 말하는 일본은 전통적으로 왜구의 본거지였던 쓰시마를 가리킨다), 이때 홍권이라는 자가 나서서 ‘백제는 거짓이 많고 ..
믿을 건 외교뿐④ 그래도 아신왕(阿莘王)은 자신의 죽음으로 백제에 한 가지 선물을 남겼다. 그의 죽음은 백제와 일본 두 나라의 관계를 더욱 두텁게 만드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건인즉슨 이렇다. 태자가 국내에 없는 탓에 일단 태자가 귀국할 때까지 아신왕(阿莘王)의 동생인 훈해(訓解)가 섭정을 맡았다. 그런데 왕위에 뜻을 품은 막내동생 설례(碟禮)가 형을 죽이고 조카가 계승할 지위를 찬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는 태자에게 일본 왕은 100명의 군사를 붙여준다. 태자가 일단 사태 관망을 위해 해안 부근의 섬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 쿠데타에 반대한 대신들의 손에 설례가 죽는다. 이렇게 해서 태자는 어렵사리 왕위를 되찾고 전지왕(腆支王, 재위 405 ~420)이 되었는데,..
믿을 건 외교뿐③ 그 다음 후보로 떠오른 것은 일본이다.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서로 안면을 익혔다가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일본, 그러나 현 위기를 타개하는 데 유일하게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세력은 일본뿐이다. 해답을 찾았다 싶은 아신왕(阿莘王)은 황급히 397년에 일본과 정식 수교를 맺기로 한다. 태자까지 일본에 볼모로 보낼 정도였으니 그의 다급한 심정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이후 백제와 일본은 여러 차례 사신을 주고받으면서 돈독한 우애를 다진다. 비록 두 나라의 거리는 상당히 멀지만 가야라는 징검다리가 있어 국제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당시 가야는 마치 오늘날의 자유무역항과 같은 일본 전용 무역기지를 두고 일본과 활발한 무역을 벌이고 있었는데, 특히 백제와 일본을 이어주는 중계무역이 ..
믿을 건 외교뿐② 백제가 선택한 방법은 동맹을 구하는 것이었다.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평생 씻지 못할 수모를 당한 아신왕(阿莘王)은 차라리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처럼 전장에서 죽는 편이 낫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았으니 광개토왕 앞에서 맹세한 ‘영원한 노예’가 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백제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 그러나 도움을 얻는 일도 쉽지 않다. 우선 동쪽을 돌아보지만 비류왕(比流王) 시절에 느슨한 동맹을 맺었던 신라는 이미 고구려에게 붙어 있다. 고민하는 아신왕에게 유력한 동맹자로 중국의 동진이 떠오른다. 아닌 게 아니라 동진과의 관계는 각별한 데가 있다. 379년에 할아버지 근구수왕(近仇首王, 재위 375~384)이 처음 인사를 텄고 아버지 침류왕(枕流王, 재..
믿을 건 외교뿐 고구려의 남진정책이라고 하면 대뜸 장수왕(長壽王)이 떠오르지만 앞서 본 것처럼 고구려가 남쪽의 한반도를 노리기 시작한 시기는 상당히 오래다. 일찍이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랴오둥과 낙랑을 함께 공략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는 처음부터 서쪽의 랴오둥만이 아니라 남쪽의 한반도도 전혀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랴오둥이 생존에 필수적인 비타민이라면 한반도는 고구려의 성장을 돕는 단백질이다. 그래서 고구려는 늘 중국쪽에 대해서는 방어적인 자세로 일관했고, 남쪽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더욱이 낙랑이 멸망하면서 백제와 접경하고, 백제와 신라가 제법 살집이 붙은 고대국가로 성장하자 남쪽을 향한 고구려의 시선은 더욱 탐욕스러워진다. 고국원왕(故國原王) 이래 고구려가 아직 불안정한 정세에..
고구려의 대중국 노선② 그렇다면 광개토왕의 중국관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랴오둥의 서쪽까지만 중국으로 인정하고자 했다. 바꿔 말하면 랴오둥을 고구려의 영토로 인정해주는 중국 왕조라면 어느 나라든 기꺼이 서열상의 우위를 인정하고 조공을 바칠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도였으므로 광개토왕(廣開土王)은 백제를 정벌하고 나서 곧바로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 그런데 그 중국은 30년 전 소수림왕(小獸林王)과 친교를 맺은 전진이 아니라 후(後燕)이었다. 전진에게 멸망당한 모용씨 세력이 권토중래(捲土重來) 끝에 다시 전진을 타도하고 연나라를 부활시킨 것이다. 외교 파트너가 옛 원수로 바뀌었으니 광개토왕도 떨떠름했을 테고 후연의 왕 모용성(慕容盛)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고구려의 대중국 노선 원래 광개토왕(廣開土王)은 한반도를 평정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철갑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군대와 더불어 탁월한 전략적 감각을 지닌 그가 왜 중국 대륙이라는 넓은 천하를 외면했을까? 여기에는 고구려의 역대 대중국 정책이 반영되어 있다. 이 참에 그때까지 400년간 고구려가 취해온 대외 노선의 변화를 정리해보자. 건국 이후 고구려는 우선 생존을 위해 팽창해야 했다. 사방에 크고작은 부족국가들이 득시글거리는 압록강변에서 탄생한 약소국 고구려는 팽창을 통해 어느 정도의 영토 확보를 이루어야만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몽의 초기 정복사업과 대무신왕(大武神王)에서 태조왕(太祖王)에 이르기까지 랴오둥 세력과 벌인 다툼은 그 일환이다. 중국에서 후한이 무너지고 랴..
불세출의 정복군주③ 덕분에 광개토왕(廣開土王)은 무려 1500년이나 지나서야 마땅한 평가를 받게 되지만, 어쨌든 묘호에 가장 어울리는 정복군주임에는 틀림없다. ‘광개토’를 향한 그의 첫번째 사업은 단연 백제를 정벌하는 일이다. 광개토왕의 어깨에 걸린 아버지(고국양왕)와 큰아버지(소수림왕)의 야망, 할아버지(고국원왕)의 복수는 모두 백제를 타깃으로 하고 있다. 약관의 젊은 나이인 광개토왕에게 그 어깨 위의 짐은 부담이 아니라 추동력이다. 즉위 이듬해에 그는 백제의 북변을 공략해서 황해도 일대를 수복한다. 특히 강화도의 관미성을 함락시킨 것은 후속 사업을 위한 결정적인 교두보가 된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백제의 아신왕(阿莘王, 재위 392~405)은 예성강 전선에서 도전해봤지만 해안 일대를 빼앗긴 상황에서 ..
불세출의 정복군주② 북방의 모든 사태가 일단락되자 이제 고구려는 본격적인 남행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미천왕(美川王)의 낙랑 정벌 이후 70여 년 만에 홀가분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남쪽이다. 여유가 생겼으니 전과 달리 전 투에 급급하지 않고 큰 전략부터 구상할 수 있다. 그래서 고국양왕(故國壤王)은 먼저 신라를 백제에게서 분리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일에는 군대를 파견할 필요조차 없다. 그저 사신을 보내 핍박하는 것으로 신라의 내물왕은 조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고 백제와의 인연을 끊겠다고 서약한 것이다【사실 백제 비류왕(比流王)이 신라와 화친을 맺을 때도 신라의 힘에 의지해서 고구려를 치고자 한 의도는 아니었다. 고이왕(古爾王) 때도 백제는 혼자 힘으로 대방과 낙랑 남부를 장악했고 근초고왕(近肖古..
불세출의 정복군주 비록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으로 뜻하지 않게 일찍 왕위를 승계하긴 했지만,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 ~384)은 이미 16년 동안의 태자 시절을 통해 국제 정세에 대한 후각을 체득하고 있던 터였다. 아버지 고국원왕(故國原王)은 용맹했으나 경솔했고 투지만큼 지혜가 따라주지 못했다. 적어도 그는 연나라의 힘을 얕보았고 백제는 더욱 무시했다. 그러나 직접 뚜껑을 열어본 결과 전연, 백제, 고구려의 삼국 중 가장 약한 나라는 오히려 고구려였다. 소수림왕은 고구려의 약해진 위상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전연이 전진에게 몰락한 것은 고구려에게 일단 다행스런 일이었으나 새로운 사태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그게 위기인지 기회인지 판단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오판이 엄청난 화를 부른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