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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정이 깡그리 무시 당한 네 가지 사건 02년 3월 14일(목) 오늘은 하루종일 나의 열정이 인정 받질 못했다. 아침엔 김영주 상병이 하드보드지는 냅다 던지더니, 암구호판을 다시 만들라는 것이다. 처음 만드는 것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이미 두 개나 만들었음에도 맘에 안 든다는 이유로 다짜고짜 또 만들라고 확 던지는 건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그런 상황이니 짜증이 확 날 수밖에 없었다. 더럽고도 야비하단 생각에 나의 손은 떨리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사실 처음 만들 땐 재료도 없고 노하우도 없이 열정만 넘쳤기에 거의 이틀 동안의 자유시간을 통째로 허비하면서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첫 작품은 되게 작았고 볼품없어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 현실이기에 이렇게밖에 못 만들 것을 왜 그리 시간을 허비하..
진지탐색 도보여행 02년 3월 14일(목) 오늘 역시 도보답사의 연장으로 우발 작계지역인 동송 고지에 갔다. 화요일에 299고지에서 285고지까지 도보로 탐사해서 가봤기 때문에 어느 정도 힘이 드는 줄 알고 있기에 이번에도 맘을 단단히 먹었다. 오늘도 저번처럼 차를 타고 이동한다기에 좀 수월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런 예상과는 달리 도보로 가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처음부터 걸어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좀 기대가 되었다. 대대 위병소를 나설 때 부풀었던 기대감은 이동하는 도중 더욱더 커졌다.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걷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나에겐 도보여행 같은 느낌도 들고 군장은 메지 않고 맘껏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밑엔 사단 전차대가 있었다. 우리 대대 앞마당을 시끄럽게 장식했던 장본인들이..
생일파티 02년 3월 13일(수) 별 특별한 일이 없다. 단지 오늘은 민증 상 내 생일이다. 그래서 저녁 식사 시간 후에 PX에 가서 분대 회식을 했다. 그렇게 기대를 많이 했는데 별로였다. 사실 맛있게 먹었지만 그걸 준비하는 시간이 거의 한 시간 정도 걸렸기에 오히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라 하겠다. 차라리 이럴 바에야 과자로 배부르게 먹는 게 나을 뻔했다. 이럴 때 GOP 회식이 그립기도 하다. 오늘 형식적인 생일임에도 별다른 것들은 없었다. 좀 섭섭하게 그렇게 지나가나 했고 싱겁게 회식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런데 깜짝 놀라고 말았다. 관물대에 빵과 우유가 들어 있지 뭔가. 놀랐다. 과연 누가 이렇게 개념 있는 짓을 했을까? 궁금했다. 쪽지가 놓여져 있어서 펼쳐 보니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내 동기..
지형정찰과 우공이산 02년 3월 12일(화) 오늘은 우리 지역 지형 정찰이 있는 날이다. 그래서 아침부터 부랴부터 단독 군장을 하고서 60에 올랐다. 이렇게 관광용(?)으로 60을 타보는 건 오랜만이라서 기대가 되었다. 그렇게 장시간을 달려 장벽 폭포, 전차대대 등을 지나 7R 2BN 후문에 있는 299고지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턴 우리가 알아서 지형 정찰을 하는 것이다. 훈련 뛸 때 어떻게 뛰는지에 대한 거다 명료한 해석을 하고서 좀 지친 몸을 이끌고 내려갔다. 그래서 60에 다시 타고 부대에 복귀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 맘에 안 들게도 가는 도중에 내려 285 고지까지 꽤 많이 걸어서 답사하게 된 것이다. 쉴 생각을 하던 차에 다시 한참을 걷게 되니 정말 짜증이 복받쳐 오르더라. 하지만 군대란 곳은 나의..
시범식 교육과 부엽토 작업 02년 3월 11일(월) 드디어 페바 첫 주의 시작이다. GOP와는 달리 주말, 주일엔 철저히 자유가 보장되었다. 아무래도 페바이니 이런 자유가 없으면 안 되겠지. 이번 주부터 좀 힘들 거라고 소대장님이 벌써부터 겁을 준다. 적어도 이번 한 달 정도는 진지 파악, 구축, 대대ㆍ중대ㆍ소대 정비, 개인 임무 숙지 등을 한꺼번에 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다시 입대한 그런 신병 같은 기분으로 지내야 한다. 그렇다면 성인이 말대로 1년 1개월짜리 군대에 다시 입대한 기분이라고나 할까나. 드디어 페바 첫 일과의 시작이다. 흡사 신교대와 같이 6시에 기상하자마자 전투복을 입고서 점오를 하러 사열대 앞으로 모였다. 신교대 이후로 점오를 해본 적이 없다가 새삼 이렇게 모이려니 기분이 좀 미묘했..
페바의 첫 일주일 적응기 02년 3월 11일(월)~17일(일) 타임라인 오전오후03.11(월)시범식 교육(위병소, 탄약고, 근무요령, 5대기 요령, 매복요령)중대 뒷산으로 부엽토(腐葉土) 모으러 감. 03.12(화)299고지, 거점 지형 방문(7R 1BN)Co 앞 뜰 족구장 정비(능력에 비해 의욕만 앞서서 암구호판 만들다 욕 먹음)03.13(수)국지도발FTX 진지 방문 축조(2Co 옆 도로 뒤)2P 대청소, 간부 축구로 인한 자율시간(생일 PX 파티, 늦게 상남가 편지와 빵을 줌)03.14(목)우발 직계 지역 방문(동송고지, 아이스고지 후방)도보로 2차 지연 진지 방문(19BN 후방 → 77포대 → C3 오르기 전 진지)의욕이 인정 받지 못함(식기, 임무 숙지 안 함, 암구호 카드)03.15(금)지뢰교육..
페바 체육대회와 뒷풀이 02년 3월 10일(일) 화창 페바의 생활, 그건 흡사 신교대와도 비슷했다. 새벽 내내 걸어서 잠 한 숨 못 자고 이곳에 왔건만, 그래서 오후에까지 잘 수 있겠거니 기대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짐 정리를 대충 하고 벅찬 가슴을 안고 아침을 먹으러 갔지만 이제 웬일? GOP에서 밥을 먹고 싶을 때 조금만 기다리면 먹고 싶을 만큼의 밥을 먹을 수 있었기에 그게 바로 자대의 생활인 줄만 알았건만 그게 아니었다. 여기 와서 보니 신교대와 별반 다를 바 없이 팔을 휘두르며 군기왕성하게 군가를 부르며 걸어가다가 식당 앞에 도착해서 길고 긴 줄을 차례대로 기다려야 한다. 막상 차례가 오면 “입장!”이라 크게 외치며 식당으로 입장해서도 거기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들어가서 식기를 씻을 때에도 한참..
철수의 순간을 기록하다 02년 3월 7일(목) 맑음 후반야 근무자와 비번자들은 대기막사에서 쉬면서 7중대 아저씨들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도착하면 바로 탄띠를 바꾸고 군장끈을 결속해야 하기 때문에 대기하면서 있어야 했다. 하지만 전반야들은 여전히 상황에 상관없이 근무에 투입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미 우리들의 기분은 한결 업그레이드 되어 있었기에 보통 때 근무하는 것과 같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들떠서인지 시간이 무지 더디게 갔다. 원랜 여섯 타입 근무제지만 오늘은 22시까지 근무하고 그 뒤로 A형 근무였기에 세 타임 근무만을 서면 되었다. 마지막 근무지인 대공에 올라갔더니 벌써 2대대 사람들이 입성했댄다. 다른 때는 전혀 볼 수 있던 거무스름한 무리떼가 신3번 도로로 북상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는..
마지막 근무와 첫 행군의 기대 02년 3월 7일(목) 맑음 끝은 시작의 다른 말이다. GOP 생활의 끝, 그건 곧 FEBA 생활의 시작이란 말이다. ‘마지막 주간 대공근무’ ‘마지막 전반야 근무’ ‘마지막 새벽 취침’ 등으로 GOP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렇게 끝이라 생각하고 나니 무척이나 아쉽고 무척이나 섭섭했다. 지겹도록 보아온 곳이고, 질리도록 굴러온 곳이련만 막상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새삼스레 더욱 주의 깊게 보게 되었던 것이다. 문득 몇 년 전에 수능을 볼 때 농고까지 버스를 타고 가던 어둠이 짙게 깔린 야경이 생각난다. 분명 별스럽지 않은 일상 속에서 늘 특별히 신경 쓰지 않던 주위 풍경이었지만 감정에 변화가 생기니 평이하던 장소가 한순간에 뭔가 의미 있는 장소로 탈바꿈했다. 그러한 생각의 변화..
『사람의 아들』을 통해본 종교성 02년 3월 5일(화) 구름 많음 ‘종교가 무엇인가? 종교의 본의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종교를 믿고 그 종교에서 내세우는 교리를 이행하려 하는가?’ 뭐 이러한 물음은 종교적인,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이 라면 원초적으로 지닌 물음이리라. 그 물음에 대한 당연한 대답은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에 버거운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러하다 보니 인간 이상의 초월적 존재를 희구하게 되어서 결국 형이상학적인, 즉 우리들의 두뇌 활동을 벗어난 초월자인 신을 만들고 섬기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자연히 같은 초월자를 모시는 사람들이 등장했을 것이고 그들은 한 곳에 모여 공동생활을 했을 것이다. 어떤 모임이든 법적 체계가 갖춰져야 공동체가 분란이 생기..
두려움에 대한 두 가지 반응 02년 3월 5일(화) 구름 많음 요즘은 겨울이 아니라 봄인 것만 같다. 분명 시기상으로 틀림없이 꽃 피는 봄이 왔지만, 작년 3월의 스산하고 매서운 바람이 불고 희뿌연 눈이 흩날리던 때와 비교해보면 너무 생판 다르기에 작년의 철원이 꿈인양 까마득하게만 느껴진다. 요즘 새벽의 온도라 봐야 영하 5도 밖에 안 내려갈 뿐더러 날씨가 흐려지더라도 눈 내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춥디 추운 겨울이 다 지나고 생명이 약동하는 봄이 이렇게 선뜻 찾아와서 한 편으로, 기쁘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 철원의 겨울다운 겨울을 나지 못했음이 못내 섭섭하기도 하다. 이렇게 변화된 날씨에 맞추어 우리의 생활도 변했다. GOP에서 FEBA로의 철수가 그것인데, 사실 저번 주까진 그다지 실감이..
GOP 생활 정리기 02년 2월 25일(월) 맑음 이제 다음주면 GOP 철수다. 과연 내 자대 생활 내내 있었던 GOP를 다음 주면 정말 떠나게 될 것인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역시 이래서 ‘백문불여일견 백견불여일행(百聞不如一見 百見不如一行)’이라 하는가 보다. 이쯤에 이르러서 사람들 반응이 참 이채롭다. 몇 달 전만해도 ‘빨리 나가고 싶다’를 연발하던 사람들 입에서 이상하게도 ‘잔류’라는 말이 드문드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FEBA가 더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기대와 함께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정말로 너무나 익숙해져서 뭘 해도 편해져 버린 이곳에 남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과정이기에 이겨내야만 한다는 생각도 든다. ‘도전의식’과 ‘현실 안주의..
계급과 성장시기 02년 2월 25일(월) 맑음 입대하고 나서 자대에서 한 좌담회에서 ‘이래도 저래도 2년 2개월이니 잘 지내보자’란 얘기를 나누면서 안 가는 시간에 불만을 토로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다. 과연 일 년이란 시간이 순간순간마다 빠르게 흘러갔냐 하면, 전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지 않은 걸로 봐서는 이 생활이 그렇게까지 즐겁다거나 슬프지 않다는 얘기이며 생각 이상으로 잘 적응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닐까? 상병을 달았다. 군 생활한 지 일 년이면 누구나 달게 되는 계급이기에 별 감흥은 없다. 단지 일 년이란 시간이 더디게라도 이렇게 지나갔다는 것이 기쁠 뿐이요, 계급장의 크기가 더욱 커졌기에 시각적인..
소대 중간에 대한 조언 02년 2월 16일(토) 조금 눈 옴 그렇게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2월이 오고야 말았다. 2월엔 내가 군에 온 지 1주년 되는 날이기도 하고 G.O.P에서 보내는 마지막 달이기도 해서 아주 많이 뜻깊은 한 달임에 틀림 없다. 상병이 되었다. 덩달아 군 생활을 한 지 1년이 됐단 뜻이다. 시간이 그만큼 지났다는 건 무언가에 많이 능숙해지고 익숙해졌다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걸 뒤집어 보면 타성에 많이 젖었다고도 할 수 있다. 나만은 그렇지 않다고 선뜻 부인하기가 힘들다. 시시때때로 수양록을 쓰면서 나를 되돌아보고 달라진 점이 뭔지, 잘못된 점이 뭔지 되새겨 보고 바꾸려 노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익숙해진 삶 속에 타성에 쪄들어버릴 대로 쪄들어 버린 내 의식이 그런 걸 쉽게 감지해내지 못..
사단장님과 설날을 보낸 사연 02년 2월 12일(화) 맑음 2월 12일은 민족 대명절 설날이었다. 이 날은 보통 설에 비해 아주 특이한 날이었는데 기본적으로 군에서 보내는 첫 번째로 보내는 설이란 게 그것이며 특히 사단장님하고 동석 식사를 하며 새해를 열었다는 게 그것이다. 새해 첫날에 전망대에서 해돋이를 본다며 사단장은 1월 1일에 우리 부대에 오신다는 거다. 그래서 아침 식사를 우리 중대 대기 막사에서 하신다는 것이었는데, 그걸로 인해 우리들은 동석 식사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단장님을 맞이한다는 건 그렇게 그저 친구를 맞이하듯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사단장이 지나가는 곳에서 지적을 받아선 안 되기 때문에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청소하고 또 청소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린 며칠간 대기 막..
바닥에서 일어서기 02년 1월 27일(월) 매우 맑음 지난 날, 지나버린 그 곳에서의 암울하며 처량하기까지 했던 과거 편린(片鱗)들이(그 편리들로 인해 삶이라는 것이 버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하나의 기억 조각 정도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2주 정도의 시간만으로도 아무렇지 않아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 이유에서 아무리 생각하고 아무리 달리 바라보려 해봐도 시간만한 만사(萬事) 해결사(解決士)는 없는 것 같다. 정말 견디기 힘든 순간들을 꿋꿋이 견뎌낸 내 자신이 지금은 너무나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느껴질 뿐이다. 지금은 모든 게 시간 속에 파묻혀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의 의식 저편에서 여전히 꿈틀꿈틀 거리고 있는 나 자신의 잠재적 올무이며 얽매임이다. 그래서 지금 그저 태연한 척 웃으며..
제설 중 맞이한 새해 01년 12월 31일(월)~1월 1일(화) 대설 후 맑음 그렇게 안 갈 것만 같던 2001년과 그렇게 오지 않을 것만 같던 2002년 새해가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 진짜 다사다난했던 2001년이 그렇게 가고야만 것이다. 연말이면 으레 교회에 가서 올라이트를 하고 새벽의 해가 뜰 때쯤 되어선 학산에 진규와 함께 올라 일출의 기쁨을 느꼈었는데 이젠 그럴 수 없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후반야였기에 묵은해에서 새해로 접어드는 기쁨을 그나마 만끽할 수 있다는 것 정도이다. 연말인 오늘을 난 그저 평일처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낮에 기상함과 동시에 밤엔 무지하게 많은 눈이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였다면 기쁨의 한 획이었겠지만 적어도 여긴 그렇지 않다. 화려한 새해..
선임병의 상(像) 01년 12월 28일(금) 맑음 선임병과 후임병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어 갈등을 겪는 곳이 바로 군대이다. 하지만 이곳은 사회와는 달리 느슨한 시간 뒤에 서서히 입장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단시간 뒤에 입장이 바뀌는 것이기에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입장적 행동에 대해 오류를 일으킬 때가 있다. 군이란 계급 사회가 원래 그렇다라는 관념에 의해 군대의 입장이 많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임병은 지존의 하늘이요, 후임병은 비하의 땅이요라는 의식이 팽배해져 있는 것을 입장적 행동에 대한 오류라 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적인 무의식 속의 괴리가 숨어져 있기 때문에 선후임병은 같은 존귀한 인간임에도 일방적으로 먹고 먹히는 그런 양육강식적 관계일 수밖에 없다. 후임병일 때 무슨..
화이트 크리스마스 01년 12월 24일(월)~25일(화) 구름 껴있다가 폭설 어느덧 올해 마지막 대축제인 크리스마스가 내일로 다가왔다. 이건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며 새해 또한 며칠 후에 다가올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이렇게 눈 깜빡할 사이에 다가오고 나니깐 내 군 생활도 일년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에 새삼 신기함이 느껴진다. 과연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시간이 흐르긴 흐르나 보다. 오늘도 여전히 후반야다. 그것도 B블록 말대기인 B5조이고 부사수는 안전조장에서 벗어나 투입한 지 얼마 안 되는 현호이다. 잘 근무설 수 있을까라는 기대를 가지고 어김없이 11시 30분에 기상했다. 역시 매우 일상적인 평일이요, 그저 의식화된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맞이할 참이었다. 그러..
그저 이루어지는 건 없다 01년 12월 17일(월) 눈 조금 내림 성경 첫 구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라는 글귀가 써 있음을 볼 수 있다. 혹자는 자연이란 어감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연적으로 누군가와 상관없이 생성되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분명 그런 사람들은 인간의 출현 또한 누구의 입감이나 창조력이 없는 것쯤으로 생각할 게 분명하다. 과연 누군가의 의지에 의한 창조가 맞냐, 그렇지 않냐는 약간의 종교성과 비종교성 가운데 대립이요, 그저 불명확하게 끝날 형이상학적인 논쟁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선 길게 논하지 않을 것이며 논쟁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여기서 일축하겠다. 하지만 이런 논쟁거리를 떠나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어떠한 형상, 사물이든 그저 이루어진 건 없다는 사실이..
영하시대 개막과 다짐 01년 12월 14일(금) 무지 추움 어젠 영상의 날씨였다. 그래서 흐린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EENT일 땐, 눈 대신 비가 내린 것이다. 겨울에 비가 오다니, 얼마나 포근한 날씨인 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김없이 나의 은근한 바람대로 합동근무 투입하려 할 땐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온도는 영상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바람으로 인해 체감 온도가 낮았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그렇게 조금의 눈이 내린 밤이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 아침엔 그저 평이한 겨울의 날씨여서 별반 걱정이 없이 구보 후 잠이 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오후였다. D조 근무 사수였기에 일찍 12시 50분에 일어나야만 했다. 그런데 다른 때완 달리 진짜로 침낭에서 나오기 싫다는 걸 느꼈다. 도대체 ..
첫 폭설에 바뀐 감정 01년 12월 1일(토) 폭설 그렇게 눈이 많이 내린다던 철원에 눈이 내리지 않고 있었다. 작년엔 11월 초순에 첫 눈이 왔다던데 여긴, 아니 올해는 이상하게도 눈이 내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작업이란 의미 밖에 없음을 알지만 그래도 은근히 군에서 맞이하는 첫눈이니만치 기다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사실 신교대에 도착하던 날에 눈이 엄청 내리긴 했다). 그렇게 나름의 조바심을 느끼게 하던 눈이 지금 밖에 엄청 내리고 있다. 그것도 화려한 신고식이라도 하려는 듯 진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내리고 있다. 싸리눈이었기에 쌓이리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그렇게 작은 눈들도 계속적으로 많이 내리다 보니 어느덧 보지 못하던 사이에 쌓이기 시작했다. ..
연탄 갈이 01년 11월 5일(월) 어둡고 비내림 11월 1일(목)엔 비가 부슬부슬 온 터라 춥지도 않아서 근무를 서기에 정말 좋았다. 영상 8℃에서 그날의 근무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11월 2일의 근무는 무엇이 달라도 한참 달랐다. 11월 2일(금)은 후반야 근무였다. 전원투입 때도 왠지 어제완 다른 차디찬, 아니 매서운 추위가 느껴졌지만 말이다. 전반야 말대기였던 민호가 “영하입니다.”라는 말을 되뇌이며 있었던 건 암담한 현실을 직시해줬던 것이리라. 그 말에 이어 부소대장님은 모든 동계용품을 다 갖춰입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정도로 춥단 말이던가!’라는 생각을 하며 처음 입어보는 방상내피(깔깔이와 조끼), 방상외피(스컷파카)와 방하내피(깔깔이 바지), 방하외피(건빵바지)를..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01년 10월 29일(월) 구름 많이 낌 흔히 태양을 희망에 비유하곤 한다. 그렇기에 낮이 지나 밤이 오면 암흑천지(暗黑天地)라는 표현을 쓰며 암울(暗鬱)하다고 하는 걸 거다. 그런 연유에서 오늘 해가 지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내일도 해가 뜬다는 말들이 생겨난 거고 그건 좀 더 간단히 말하면, 지금의 희망이 꺾여 절망스럽다 한들 언젠가는 그 희망 가득한 날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또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오르막길이 다하면 내리막길이 시작된다[登途盡始下途]’라는 말 말이다. 아주 간단하면서 당연한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오르막길[登途]’과 ‘내리막길[下途]’이란 어떤 것일까? ‘오르막길’은 쉽게 말하면, 버거운 일, 삶의 편협적인 괴로움, 전혀 예측치 못했던 사고 등으로 육..
비 그리고 비 01년 10월 10일(수) 계속 비 엊그제 전광판에 ‘내일의 날씨, 전국적 비’라고 써 있는 걸 보면서, 난 굳이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 전혀 믿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찬란한 태양빛이 내리쬐다가 저녁엔 달빛과 별빛들이 온 하늘을 새하얗게 수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지 다른 때와는 달리 그 예보가 불길한 전조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왠지 불길함이나 여러 증조들이 보일 때는 그게 현실로 다가오든, 그렇지 않든 조심하라고 누가 그랬던가! 암튼 그건 현실이었고 거부하거나 피할 수 없이 직면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어제 오후는 1소초 작업지원과 사격으로 인해 꽤나 바빴다. 바쁜 건 그래도 좋다. 하지만 사격하러 이동하는 사이에 비가 온 것이다. 조금씩 비는 그렇게 내..
철원의 가을 01년 9월 23일(일) 맑음 가을, 하늘이 드높은 천고마비의 계절. 모든 만물이 성숙의 절정에 이르는 계절. 그런 완숙미를 자랑하는 가을이 철원에도 오고 말았다. 그 추운, 매섭게 추운 겨울 뒤에 봄이 안 올 것만 같았는데, 모르는 사이에 녹색창연의 봄이 찾아왔듯이, 그 무덥고 짜증 나는 여름이 어느덧 흘러가고 가을이 오고야 말았다. 비록 이주일 정도 밖에 안 되지만 말이다. 대공 후방, 그러니까 우리 중대 뒤쪽으로 보이는 벌판에 녹색의 새싹들이 피어나는 걸 본 게 어제 같은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진짜 눈으로 미처 확인하지 못한 사이에 녹색 벌판이 황금물결 일렁이는 바다로 변해버린 것이다. 황금의 바다, 그건 작년 대학교 가는 길 벌판에 황금물결 일렁이는 것을 보고서 ‘자연은 어쨌든 이치..
일체유심조 01년 9월 16일(일) 매우 더움 오늘 교회에 가서 잠언 4장 20~23절 말씀으로 설교를 들었다. 내 아들아,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주의 깊게 들어라. 그것을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네 마음에 깊이 간직하라. 내 말은 깨닫는 자에게 생명이 되고 온 몸에 건강이 된다. 그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여기서부터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 현대인의 성경 이 구절의 핵심은 ‘모든 관념적 생각은 다 마음에서 나온다’라는 거였다. 원효대사의 명언, 그건 당연하다는 생각에 기반한 이야기다. 해골 바가지에 담겨진 물(썩은 육수)과 바가지에 담겨진 물(이슬), 둘 사이엔 엄청난 괴리가 숨어 있다. 썩은 육수는 감히 먹으려는 사람이 없을 테지만, 이슬은 감히 안 먹으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그 ..
천고마비의 계절에 01년 9월 27일(목) 맑음 하늘이 드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 한마디로 자연이 가장 보기 좋게, 아름답게 변하고 모든 게 너무나 풍성한 계절이다. 그건 누가 뭐라 해도 가을의 이미지이자 가을의 모습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의 대자연의 변화는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누구의 노력 없이 순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무더위에 지쳤던 여름이 어느덧 지나고 이젠 대자연의 아미(雅美)를 느끼게 하는 가을이 온 것이다. 녹색으로 짙게 물들었던 들판이 어느덧 황금색으로 변하여 황금물결 일렁이는 좀 사치스러울 수도 있는 부미(富美)를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드높은 하늘에 새까맣게 물들인 철새들의 행렬은 자유롭고 싶은 우리들에게 대리만족을 제공한다. 누런 벼와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