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진정한 벗을 위한 노래
① 이행과 박은의 사귐
1. 벗에 대한 정의
1) 박지원(朴趾源)은 「회성원집발(繪聲園集跋)」에서 ‘두 번째의 나[第二吾]’라 하기도 하고, ‘일이 잘 되도록 주선하는 사람[周旋人]’이라고도 함.
2) 이덕무(李德懋)는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서 “若得一知己, 我當十年種桑. 一年飼蠶, 手染五絲, 十日成一色, 五十日成五色. 曬之以陽春之煦, 使弱妻, 持百鍊金針, 繡我知己面. 裝以異錦, 軸以古玉. 高山峨峨, 流水洋洋, 張于其間, 相對無言, 薄暮懷而歸也.”
1) 두 사람은 우리 역사에서 내세울 만한 진정한 우정을 나눔.
2) 정조(正祖)는 박은(朴誾)의 시집을 편찬케 하며 「어제제증정읍취헌집권수(御製題增訂挹翠軒集卷首)」에서 ‘시성(詩聖)’이라 하고 황정견(黃庭堅)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서문에 씀.
3)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32번에서 “중종조의 대성해짐에 이르러 용재 이행이 서로 시학을 창시했다[至中廟朝大成, 以容齋相倡始].”라고 평함.
4) 이행(李荇)의 부친과 박은(朴誾)의 스승 최부(崔溥)는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학연이 있고 둘 다 남산 아래에 살아 어려서부터 절친했을 것임.
5) 이행(李荇)은 연산군 14년에 박은(朴誾)은 다음 해에 벼슬길에 오름 → 박은(朴誾)은 신숙주의 손자 신용개가 사위로 삼았고 이행(李荇)도 23세에 질정관(質正官)으로 중국에 갈만큼 인정을 받음 → 연산군 7년에 홍문관 수찬으로 연산군에 빌붙은 권세가를 비판했다가 박은(朴誾)은 하옥되고 이행은 좌천됨 → 3년 후에 동래(東萊)로 유배된 박은(朴誾)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사형되었고 이행(李荇)은 고문을 받고 충주로 유배됨 → 이행(李荇)은 중종반정 이후 출세가도를 달려 대제학까지 오름
② 박은과 이행의 우수에 찬 시
1. 박은(朴誾)의 성격
1) 고초는 있었지만 훗날 승승장구한 이행과는 달리 박은은 성격이 강직했음.
2) 죽음에 임박해서도 말을 바꾸지 않아 26살의 젊은 나이에 사형을 당함.
3) 이런 성격적인 차이에도 두 사람의 우정은 변하지 않았음.
寒雨不宜菊 小尊知近人 | 차가운 비는 국화에 어울리지 않으나 작은 술잔은 사람을 가까이 할 줄을 아네. |
閉門紅葉落 得句白頭新 | 문을 닫으니 붉은 낙엽 떨어지고 글귀 얻으니 백발 새로이 난다. |
歡憶情親友 愁添寂寞晨 | 기쁘게 정든 친구 생각하나 근심은 적막한 새벽에 더하다네. |
何當靑眼對 一笑見陽春 | 어찌 마땅히 푸른 눈으로 마주하며 한 번 웃으며 봄볕을 볼까나? |
1) 을씨년스럽게 비 내리는 날 지기 이행(李荇)을 그리워하며 지어 보냄.
2) 박은(朴誾)은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 등 중국강서시파의 영향을 많이 받음.
3) 성현(成俔)은 『문변文變』에서 “당시 사람들이 이백의 시는 지나치게 호탕하고, 두보의 시는 지나치게 깊고, 소식의 시는 지나치게 웅장하고, 육유의 시는 지나치게 호방하므로 오직 본받을 것은 황전견과 진사도라고 여겼다[謫仙太蕩 少陵太審 雪堂太雄 劍南太豪 所可法者涪翁也 后山也].”라고 적음.
4) 두보(杜甫)나 이백(李白)은 호탕하고 웅장하여 배우기에 어렵기에 시법(詩法) 연마를 주장하는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우고자 하는 열풍이 15세기 후반에 일어남
5) 강서시파(江西詩派)의 특징: 익숙하고 낡은 것 거부, 다소 난삽하지만 시어와 의경 획득, 주제면에서 인생의 비애와 우울한 사정이 주조 이룸.
6) 박은(朴誾)과 이행(李荇)의 시는 거센 비가 퍼붓진 않지만 잔뜩 찌푸린 날씨 같음.
7) 최항(崔恒)의 「산곡정수서(山谷精粹序)」 “내가 이 말(소동파가 황정견을 칭찬한 말)을 외운 지 오래되었는데, 한스럽게도 전집을 눈으로 보질 못했다. 이제 이 선집을 보고 또한 나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으니, 과연 맑고 새로우며 기괴하여 일가의 격조를 이루었다. 읊조리는 나머지에 거의 잠자고 먹는 것을 잊었으니, 처음으로 ‘주옥(珠玉)이 곁에 있으면 내 모습의 더러움을 깨우친다’는 말이 나를 속인 게 아님을 알았다. 아! 황정견의 시가 몇 세대동안 돌아다니다 마침내 오늘을 기다려 글이 드러났으니, 때를 만나길 어찌 스스로 기다린 것이 아니랴?[愚之誦此言久矣, 恨未得目其全集. 今觀是選, 亦足反隅, 果淸新奇怪, 成一家格轍. 吟渢之餘, 殆忘寢食, 始知所謂珠玉在傍, 覺我形穢者, 不吾欺矣. 於虖! 黃詩之行幾世, 乃竢今日而表章, 其知遇豈非自有期乎?]”라고 말할 정도로 강서시파의 열풍이 대단했음.
佳節昏昏尙掩關 | 좋은 계절은 저물어가 오히려 문을 닫아걸고, |
不堪孤坐背南山 | 어찌 고독히 앉아 남산을 등지고 있나? |
閑愁剛被詩情惱 | 한가한 근심에 억지로 詩情으로 하여 고뇌케 하니, |
病眼微分日影寒 | 병든 눈에 세미하게 나눠진 햇빛 시리네. |
止酒更當嚴舊律 | 술을 금지했지만 마땅히 옛 禁酒의 규율 고치나, |
對花難復作春顔 | 꽃을 대하며 다시 봄의 얼굴 짓기 어렵구나. |
百年生死誰知己 | 백년의 생사에 누가 知己인가? |
回首西風淚獨潸 | 머리 돌리니 가을바람 불어 홀로 눈물 흩뿌리네. |
1) 박은(朴誾)은 파직되어 남산의 푸른빛을 마주한다는 뜻의 읍취헌(揖翠軒)에 칩거하고 있었음.
2) 이행(李荇)도 박은(朴誾)의 처지를 동정하고 눈병으로 햇살조차 희미하다고 함.
3) 주령(酒令)을 만들어 술 마시기를 약조했으니 한 잔 마셔보나 흥은 나지 않는다고 했고 지기와 만나야 풀린다고 함.
深秋木落葉侵關 | 깊은 가을 낙엽이 문을 침범해오고, |
戶牖全輸一面山 | 창엔 오롯이 한 면의 산이 실려 오네. |
縱有盃尊誰共對 | 비록 잔이 있더라도 누구와 함께 마실 것이며 |
已愁風雨欲催寒 | 이미 바람과 비가 추위 재촉할까봐 걱정되네. |
天應於我賦窮相 | 하늘은 응당 나에게 궁상맞은 삶 부여했고 |
菊亦與人無好顔 | 국화는 또한 사람에게 좋은 얼굴 없어라. |
撥棄憂懷眞達士 | 근심스런 회포 없애야 참된 달사이니, |
莫敎病眼謾長潸 | 병든 눈으로 하여 부질없이 긴 눈물짓지 마시라. |
1) 수련(首聯)은 기발하면서도 힘이 있는 표현임.
2) 경련(頸聯)은 명구로 일컬어지며 ‘어(於)’와 ‘여(與)’, 그리고 ‘궁상(窮相)’ 같은 것을 씀으로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이속위아(以俗爲雅)’의 이론을 실천함.
閉眼深居不啓關 | 눈감고 깊이 은거하며 문 열지 않으니, |
翠軒閑却半簾山 | 읍취헌 한가로워 도리어 반쯤 걷힌 발에 산이로구나. |
孤如籠鳥長思侶 | 외롭기는 새장 속의 새 같으니, 길이 짝을 그리워하고, |
癡似秋蠅更怯寒 | 어리석긴 가을의 파리 같으니, 다시 추위가 겁나네. |
豈有顚狂舊時興 | 어찌 미칠 듯한 예전의 흥이 있으랴? |
漸成枯槁老容顔 | 점점 마르고 나이든 용모와 얼굴이 되어가네. |
百年身世誰非寓 | 백년 신세에 누가 나그네 아니랴. |
出處悠悠涕自潸 | 출세에 그윽하게 눈물이 절로 흐르네. |
1) 위의 시와 같은 스타일을 엿볼 수 있음.
③ 박은의 시참(詩讖)이 담긴 시
1. 『천마잠두록(天磨蠶頭錄)』
1) 개성의 천마산과 한강의 잠두봉을 유람한 시문필첩(詩文筆帖)으로 1502년 2월 박은(朴誾)과 이행, 승려 혜침(惠沈)과 질탕하게 유랑하여 「난정기(蘭亭序)」의 고사에 의거하여 술잔을 띄워놓고 술잔이 올 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 마시는 놀이 함.
2) 임술년에 남곤이 참여하여 7월 16일에(「적벽부(赤壁賦)」가 지어진 해와 간지가 같기에 이날 열림)에 서호 잠두봉에서 시회를 갖고 적벽부를 쓰게 함.
伽藍却是新羅舊 | 절은 도리어 신라의 오래된 것이고, |
千佛皆從西竺來 | 천개의 불상은 다 서축에서 왔네. |
終古神人迷大隈 | 예로부터 신인은 大隈에서 헤맸고 |
至今福地似天台 | 지금의 복된 땅은 천태산 같지. |
春陰欲雨鳥相語 | 봄에 어둑해져 비 내리려 하니 새들은 서로 지저귀고, |
老樹無情風自哀 | 나이든 나무 무정하여 바람이 절로 슬프네. |
萬事不堪供一笑 | 만사에 하나의 웃음도 감당하질 못하니, |
靑山閱世自浮埃 | 푸른 산에서 보니 세상은 절로 티끌이로다. |
1) 개성 천마산 유람할 때 복령사에 들러 지은 시임.
2) 수련(首聯)에서 대를 맞춰 표현함.
3) 함련(頷聯)에서 ‘황제가 구자산에서 대외(大隗)를 찾으려 했는데 양성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黃帝將見大隗乎具茨之山, 方明爲御, 昌寓驂乘, 張若·謵朋前馬, 昆閽·滑稽後車. 至於襄城之野, 七聖皆迷, 無所問塗]’는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의 고사를 끌어와서 복령사로 향하는 길의 험준함을 말했고, ‘한(漢)의 유신(劉晨)과 완조(阮肇)가 천태산에 약을 캐러 가서 길을 잃고 굶주리다가 매우 아름다운 두 여인을 만나 사시사철 봄경치를 즐겼다는 『태평광기』의 고사로 복령사가 별세계임을 말함.
4) 경련(頸聯)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구절로 20대 중반의 입에서 나오기 힘들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 이 구절은 후세 사람들이 시참(詩讖)으로 평가하며, 시참(詩讖)대로 박은(朴誾)은 26세에 죽음.
④ 이행, 박은을 그리워하다
1.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를 편찬하다.
1) 박은(朴誾)이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사형당한 후 2년이 지나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났고 이행(李荇)은 복귀함.
2) 이때 박은(朴誾)의 흩어진 시를 수습하여 이 유고집을 편찬함.
3) 이 둘은 『논어(論語)』 「안연(顔淵)」에서 말한 ‘이문회우(以文會友)’의 뜻을 이루었다고 할 만함.
卷裏天磨色 依依尙眼開 | 책 속의 천마의 산색 흐리나 오히려 눈앞에 펼쳐지네. |
斯人今已矣 古道日悠哉 | 이 사람 지금은 없어졌고 옛길 날로 그윽하네. |
細雨靈通寺 斜陽滿月臺 | 가랑비 영통사에 내리고, 비낀 해 만월대에 비치네. |
死生曾契闊 衰白獨徘徊 | 죽고 살아 일찍이 보질 못하니, 쇠한 백발로 홀로 배회한다. |
1) 박은(朴誾)이 죽은 지 3년 후에 『천마잠두록(天磨蠶頭錄)』을 꺼내 읽으며 그때를 떠올림.
2) ‘이의(已矣)’, ‘재(哉)’를 활용하여 자신의 통곡소리를 담음.
3) 3연에서 서술어를 두지 않아 독자가 눈을 감고 긴 생각에 잠기도록 함.
3. 이행(李荇)의 「독취헌시 용장호남구시운(讀翠軒詩 用張湖南舊詩韻)」
挹翠高軒久無主 | 읍취헌 높은 누각 오래도록 주인이 없었고, |
屋樑明月想容姿 | 누각 대들보의 밝은 달 용모와 자태 그리게 하네. |
自從湖海風流盡 | 이때로부터 강산의 풍류는 다하였으니, |
何處人間更有詩 | 인간 세상 어느 곳인들 다시 시가 있을꼬? |
1) 좌의정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만년의 벗 김안로(金安老)와 사이가 멀어져 54세에 평안도로 귀양감. 서울로 돌아오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함. 이 시는 유배지로 떠나기 얼마 전인 1531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됨.
2) 박은(朴誾)이 죽은 지 30년이 흘렀지만 읍취헌(挹翠軒)에 뜬 달을 보니 박은(朴誾)이 떠오름.
3) 박은(朴誾)이 죽고 없으니 인간 세상에 진정한 의미의 시가 없다고 선언함.
4) 『국조시산(國朝詩刪)』에선 “마음에 맞는 벗이기에 이런 시가 나올 수 있었다‘고 평가함.
⑤ 죽은 벗을 그리는 절절함을 담은 권필의 시
1. 권필(權韠)의 「곡구김화상구우양주지산중 인왈모유숙 천명출산(哭具金化喪柩于楊州之山中 因日暮留宿 天明出山)」
幽明相接杳無因 | 유명이 서로 접하나 아득하여 닿질 않고, |
一夢殷勤未是眞 | 하나의 꿈 은근하더라도 이것은 참이 아니지. |
掩淚出山尋去路 | 눈물 닦고 산을 나서서 돌아갈 길 찾으니, |
曉鶯啼送獨歸人 | 새벽 꾀꼬리 울며 홀로 돌아가는 나를 전송하는 구나. |
1) 김화현감을 역임한 구용은 권필(權韠)ㆍ이안눌(李安訥)과 시명(詩名)을 나란히 다툼.
2) 김화현감으로 있다가 죽었는데 권필(權韠)은 양주의 장지까지 따라갔다가 날이 저물어 유숙함.
3) 꿈속의 구용은 그대로였으나 깨니 벗의 죽음이 현실로 느껴졌고 터벅터벅 울며 걸으니 꾀꼬리가 구용의 넋인 양 전송한다는 내용임.
城山南畔是君家 | 성남의 남쪽 언덕, 이곳이 그대 집이지. |
小巷依依一逕斜 | 작은 마을 어렴풋하게 하나의 길이 갈라지네. |
浮世十年人事變 | 뜬 삶 10년에 사람의 일은 변했지만, |
春來空發滿山花 | 봄이 와 부질없이 산의 꽃만 만발했네. |
1) 구용의 옛집을 방문하고 통곡함.
2) 자주 방문했던 길이기에 근처만 가도 그 집이 떠오름.
3) 예전처럼 핀 꽃과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비애가 극대화되어 더욱 처절함.
4) 『국조시산(國朝詩刪)』에선 「독취헌시 용장호남구시운(讀翠軒詩 用張湖南舊詩韻)」의 평과 같이 “마음에 맞는 벗이기에 이런 시가 나올 수 있었다‘라고 함.
인용
'책 > 한시(漢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한시를 읽다 - 17. 당시와 비슷해지기 (0) | 2022.10.24 |
---|---|
우리 한시를 읽다 - 16. 풍경에 담은 감정의 변화 (0) | 2022.10.24 |
우리 한시를 읽다 - 14. 시로 읽는 소설 (0) | 2022.10.24 |
우리 한시를 읽다 - 13. 춘흥과 가진 자의 여유 (0) | 2022.10.24 |
우리 한시를 읽다 - 12. 금강산을 시에 담는 두 방식 (0) | 2022.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