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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 대담 1일차, 1. 불교와 기독교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 대담 1일차, 1. 불교와 기독교

건방진방랑자 2022. 3. 14.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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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출발

 

 

인도인들은 간지스 강 가트 건너편의 땅을 사악한 땅이라 불렀다. 그러나 싯달타는 바로 그 땅을 정토로 만들었다.

 

 

수보리야! 간지스강에 가득찬 모래알의 수만큼, 이 모래만큼의 간지스 강들이 또 있다고 하자! 네 뜻에 어떠하뇨? 이 모든 간지스 강들에 가득찬 모래는 참으로 많다하지 않겠느냐?

須菩堤 如恒河中 所有沙數 如是沙等 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금강경11분이 묘사하고 있는 그 현장, 바로 그 카시의 간지스 강 모래밭. 사악한 땅의 모래밭에서 정성스럽게 두손모아 기도하고 있는 저 여인을 보라!

 

 

 

 

나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갈 때 많은 승려들이 우리를 에워쌌다. 그 중 나에게 인사를 한 사람은 라크도르(Lhakdor)라는 승려였다. 라크도르는 달라이라마의 지적인 분신과도 같은 대 학승이었다. 영어를 거침없이 하는 대학자였다. 나중에 달라이라마와 나의 대화에 동석한 사람은 타클라와 라크도르였다. 타클라는 사회ㆍ경제ㆍ정치적 측면에서, 라크도르는 종교ㆍ철학적 측면에서 달라이라마의 대화를 보좌했다. 물론 달라이라마와 나의 대화는 통역없이 직접 영어를 매체로 이루어졌다.

 

날씨도 너무 화창했다. 꼬불꼬불 계단을 올라갔다. ~ 달라이라마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꿈에서 본 모습대로 나를 맞이하기 위해 문밖에 나와 계신 것이 아닌가? 나는 양탄자가 깔린 궁 안의 널찍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나는 궁 안에 들어가자마자 달라이라마님께 큰절을 올렸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나는 한국인으로서 장자에 대한 최상의 존경을 표시한 것이다. 달라이라마께선 꼭 꿈에서처럼 날 손수 일으키시며 자리로 안내했다. 사실 나는 그와 만나게 될 곳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의 대화의 장소로 택하여진 곳은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텅 빈 곳에 자그마한 서안을 하나 놓고 책상다리를 하고 둘이서 마주보고 앉아있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크나큰 행운이었다. 나는 평소 때도 걸상에 다리를 내리고 앉지를 않는다. 그리고 평생을 가부좌 자세로 살아왔다. 나는 그 많은 책을 모두 가부좌 자세에서 집필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서안 앞의 가부좌 자세는 서양인들에게는 지극히 불편한 포즈이겠지만 나에게는 모태의 자궁과도 같은 편안한 자세였다. 난 처음엔 송구스러워 좀 멀리 앉았지만 점차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사진을 남군에게 부탁했는데 앵글이 잘 안 나온다고 몰래 좀 가까이 붙어 앉으라고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난 달라이라마님께 양해를 구하고 서안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성하께선 꼭 어린 동생을 가슴에 껴안 듯, 가까이 오라고 편하게 손짓하시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우선 저는 우리 한국동포들과 함께 티벹인민의 고통에 대하여 충심의 동정(sympathy)을 표시합니다영어의 심파티’(sympathy)라는 말 속에는 우리말처럼 어떤 일방적인 연민의 뜻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 그냥 같이 느낀다는 공감의 뜻이다.. 저는 고전학자(Classicist)입니다. 이 세계의 다양한 문명의 고전을 섭렵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만 저는 중국의 고전들을 가장 깊이 있게 연구했습니다. 저의 학문적 디시플린은 철학(philosophy)이며, 그 영역으로 말한다면 중국고전학자(Sinologist)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인 친구들도 많고, 세계의 중국학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많은 양식있는 학자들과 두터운 교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티벹의 문제는 인류의 양심이 해결해야만 할 공통의 과제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티벹인민의 고통을 통하여 저는 인류가 인간의 가치있는 삶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그리고 사회정의ㆍ국제질서에 대한 명료한 도덕적 인식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저의 성하와의 대화가 그러한 인간의 진보에 대하여 조그만큼의 도움이라도 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붓다는 존재한 인간인가?

 

 

나는 사실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미국서 큰 사람도 아니고 미국교육이래야 6년간 박사공부를 한 것 뿐이다. 나는 한국말을 가장 잘 한다. 그것은 우선 한국말이 자유자재롭고 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난 영어를 하는 데도 그리 큰 불편을 느끼지는 않는다.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아무렇게든지 영어로 전달하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난 영어로 말하는 동안에 내가 영어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잊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냥 되는 대로 적당히 뇌까린다. 나의 거침없는 서두로 좀 장내가 숙연해진 듯했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제가 인도를 오게 된 것은 명백하게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 목적은 역사적 붓다’(Buddha as a historical person)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붓다의 모습은 금동(金銅)에 갇혀버린 차디찬 금인(金人)에 불과합니다. 생명있는 싯달타를 느껴볼 수 있는 역사적 현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역사적 현장을 몸소 가보고 그곳에서 나와 같은 현존재로서 실존했던 한 인간을 느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근 한 달 동안 많은 곳을 다녀봤고 그 첫째의 목적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상당히 달성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두 번째 목적은 오늘날 그 살아있던 붓다의 화신’(Reincarnation of Buddha)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바로 당신을 만나서 그 역사적 붓다의 실체를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인류에게 지니는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말하는 도중에 붓다의 화신이라는 말이 나오자 달라이라마는 갑자기 노우하면서 내 말을 끊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다음과 같은 선문답을 던졌다.

 

달라이라마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물론 여기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달라이라마는 말을 이었다.

 

달라이라마는 하나의 제도(an institution)입니다. 당신과 마주 앉은 나는 제도가 아닙니다.”

 

나는 이렇게 단도직입적인 그의 언변에 좀 충격을 받았다. 그의 목소리는 굵직했고 호소력이 있었으며 구슬이 굴러가는 듯, 아나운서의 목소리보다도 더 아름다웠다. 불경에서 말하는 칼라빙카(迦陵頻伽, kalaviṅka)의 묘성이 아마도 이런 소리려니 했다칼라빙카(kalaviṅka)새는 好聲,’ ‘妙聲,’ ‘美音,’ ‘好音聲鳥등의 한역이 있다. 미묘한 울음소리를 내는 새로서 히말라야산이나 극락정토에 사는 상상속의 새이다. 인도의 나이팅게일의 일종인 부루부루새가 이 칼라빙카새의 모습에 실제로 근접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지붕 처마끝 수막새에 칼라빙카 새를 새겨넣었다. 통일신라, 지름 14.1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물론 제도로서의 달라이라마는 불타의 화신이라기보다는 아발로키테슈바라(Avalokiteśvara), 그러니까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제1대 달라이라마, 그리고 제2대 달라이라마, 그리고 또 제5, 7대 이런 분들은 매우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비상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던 분들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을 둘러싼 그러한 비상한 이벤트(extraordinary events)에 대한 역사적 체험(historical experiences)들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나의 경우는 이런 신통한 것들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그냥 여기 앉아있는 나일 뿐입니다. 이게 전부지요(This is all).”

 

그럼 당신은 아무 것의 화신도 아닙니까?”

 

난 나의 전생의 화신(the reincarnation of my previous life)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깔깔 어린애처럼 웃었다. 나도 그 웃는 모습이 우스워서 같이 깔깔 웃어댔다. 그러다가 나는 갑자기 진지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한마디 묻겠습니다. 붓다가 실제로 역사 속에서 우리와 같이 존재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붓다는 실제로 살아있었습니까?”

 

엉뚱한 듯한 이러한 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달라이라마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되쳐 물었다.

 

뭔 말씀이십니까?(What do you mean?) 그러한 질문을 나에게 던지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마도 그는 그를 방문한 사람들이 그에게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별로 체험해보지 못한 듯했다. 그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를 숭배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서양사람들도 그에게서 어떤 인생의 예지 같은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에게는 그러한 특별한 목적이 없었다. 그리고 일체의 타부가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식인들에게는 냉혹한 이성의 잣대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나의 모습이 그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호기심과 친근감의 대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전 그냥 성하의 솔직한 생각을 여쭙고 있는 것 뿐입니다.”

 

질문하신 문제를 일면적인 각도에서 대답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아시다시피 역사적 붓다에 대한 생각은 불교의 종파마다 다양한 견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응신불(應身佛, nirmāṇa-kāya, 역사 속에 인간의 형상에 응하여 태어난 부처라는 뜻)여기서 말하는 응신불(應身佛, nirmāṇa-kāya)은 내가 앞서 말한 색신(色身, rūpa-kāya)의 개념에 가깝게 오는 것이다. 사실 4세기 중기 대승불교시대까지만 해도 법신(法身)과 색신(色身)의 이신설(二身說) 밖에는 없었다. 그러다가 법신(法身)의 본체계와 색신(色身)의 현상계를 연결하는 제3의 개념으로서 보신(報身, saṃbhoga-kāya)이 생겨나 삼신불(三身佛)사상이 되면서, 색신(色身)은 응신(應身)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어져 불리게 된 것이다.을 영원한 법신불의 일시적 현현이라고 생각한다면, 카필라성에 태어난 싯달타는 수많은 역사적 현현체 중의 한 사람이 될 것이며, 그 자체의 역사성에 관하여 그렇게 큰 비중이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도인들이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하여 그렇게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다는 일반적 사유의 특징에서 유래되는 한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 개인의 생각을 집요하게 물으신다면 저는 저와 같은 한 인간으로서 실존했던 역사적 붓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달라이라마이기에 앞서 하나의 승려입니다. 승려라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사태가 아닙니다. 승려는 반드시 승가(僧伽, saṃgha)라고 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자기이해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승가공동체의 최초의 형성자로서의 그 사람(that historical person)의 역사적 존재를 믿습니다. 이것은 법신(法身, dharma-kāya)의 일시적 역사적 현현태로서의 싯달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불타의 법신은 역사적 불타의 색신(色身, rūpa-kāya)으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말들은 나로서는 신중히 말해야하는 것들이지만 나 개인의 솔직한 소견은 그렇습니다.”

 

역사적 싯달타조차도 설화적으로 구성된 픽션일 수는 없습니까?”

 

매우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하시는군요.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하겠습니다. 우리 티벹에는 방대한 장경이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이 티벹장경을 공부하는 엄격한 수련을 거치면서 성장하여 왔습니다. 우리 티벹장경 속에는 원시경전에 해당되는 삼장(三藏, Tipiṭaka) 뿐만 아니라, 그 후에 발전된 대승의 논서들이 엄청나게 들어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후기 밀교경전까지 엄청난 분량이 집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경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은 도저히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어떤 개인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초기에 결집된 삼장체계가 성립할 없다는 것을 너무도 절실하게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반열반경같은 것을 읽어보셨습니까? 쿠시나가르에서 숨을 거두는 인간 붓다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는 죽음을 거부하지도 않았고 보통사람처럼 순순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자기에게 본의 아니게 잘못된 음식을 공양한 춘다를 위로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장례식절차까지도 세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에 대하여 어떠한 신비로운 의미부여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존재를 우리가 회의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하늘과 인간을 소통시키는 영혼의 멧신지. 카시 간지스 강에서

 

 

예수와 신화

 

 

"저는 최근에 예수의 신비(The Jesus Mysteries)라는 책에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인류문명의 다양한 신비주의를 폭넓게 연구한 두 영국학자, 프레케(Timothy Freke)와 간디(Peter Gandy)의 역저인데, 예수라는 사건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사건이 아니고 신화적으로 구성된 픽션에 불과한 것이라는 어마어마한 가설을 설득력 있고 치밀하게 분석했습니다. 이것은 20세기 문헌학의 획기적인 대발견이라고 불리우는 나하그 함마하디 영지주의 문서(the Nag Hammadi Gnostic Library)의 연구성과와 그동안 우리에게 무시되어 왔던 지중해 주변의 토착문명의 신화적 세계관의 매우 복잡한 연계구조에 관한 새로운 인식의 성과를 반영한, 단순한 가설 이상의 치밀한 문헌적 근거가 있는 논증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지금 구약의 창세기 이야기나, 노아의 방주이야기, 그리고 간지스강이 시바신의 일곱 머리카락 중의 하나라는 이야기를 사실로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신화는 신화로서 우리에게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신화적 구상임에도 불구하고, 신의 아들 예수가 인간 처녀에게서 잉태되었고, 성령의 세례를 베풀며,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는 기적을 행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또 육신으로 부활하여 승천했다 하는 신약의 이야기는 반드시 사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시공간내의 과학적 사건과도 같은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비합리적인 사태야말로 모든 기독교신앙의 출발점이 되고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는 신화를 사실로서 강요하는 데서부터 모든 신앙의 논의를 출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달라이라마는 나의 말을 다음과 같이 받았다.

 

사실 불교에도 그러한 신화적 기술이 많습니다. 능인보살이 변화하여 흰 코끼리를 타고 구리찰제(拘利刹帝)의 딸의 태 안으로 들어갔다든가, 마야부인이 산기가 다가오자 친정인 구리성으로 가는 도중, 룸비니에서 오른손으로 무우수 가지를 잡고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던 사이에 오른쪽 겨드랑이로부터 아기가 툭 떨어졌다. 그런데 마야부인의 겨드랑이에는 피 한방울 나지도 않았다. 또 그 아이가 그 즉시 일곱 발자국을 걸어가서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나는 하늘 위 하늘 아래 가장 뛰어난 자이다. 이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마지막 삶을 살리라. 이번 삶 동안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리라고 외쳤다는 등등의 이야기는 이미 초기 아가마의 전승으로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설화양식이지요. 이것을 사실로 믿으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옛날에는 모든 전승이 암송이라는 구전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설화라는 것은 이야기의 한 방식일 뿐입니다. 부처님의 스투파(stūpa) 주변으로 모여든 일반신도들에게 재미있게 이야기해주기 위한 한 양식으로 고안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꾼들이 대부분의 본생담 같은 것을 지어냈다고 생각됩니다. 즉 말하는 사람이나 그 말을 듣는 사람이나 신화적 세계관이나 신화적 표현방식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방식으로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경을 읽어보면 역사적 사실로 여겨지는 부분과 그러한 설화적 표현의 부분이 혼동되지를 않습니다. 설화는 설화대로 사실은 사실대로 따로 이해를 하면 그뿐이지요. 설화에서 우리는 그 설화인이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의미만 취하면 되는 것이지요. 저도 신약성경을 읽어보았습니다만, 아마도 말씀하시는 맥락에서 보자면, 복음서의 기술은 그러한 신화적 표현과 사실적 기술이 구분이 안 되는 방식으로 섞여져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방식의 기술도 그 나름대로 충분한 역사적 이유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룸비니에 새겨진 마야부인의 출산상. 마야부인이 무우수 가지를 휘어잡고 있고 겨드랑이에서 떨어진 금빛의 아기가 보인다.

 

 

예수 신화의 변용과 재생산

 

 

바로 프레케와 간디는 그 역사적 이유를 소상하게 규명할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야기는 애초로부터 사실로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지중해연안문명에 공통된 신화양식의 유대사회적 변용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의 시대는 싯달타나 공자소크라테스의 시대보다는 몇 세기나 늦은 인류문명의 꽃이 만개한 시대이며, 불교사로 본다면 대승불교운동이 본격적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줄리어스 시이저 등, 플루타크(Plutarch, c. 46~119이후 죽음)영웅전(Bioi parallēloi, Parallel Lives)에 나오는 인물들이 활약하던 시기를 지나 제국문명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와 로마를 넘나들며 활약했던 플라비우스 요세프스(Flavius Josephus, c. 37~100)와 같은, 예수와 동시대의 사가들의 자세한 역사서술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시대는 인류가 매우 개명한 삶을 살았던 시대며, 현재의 우리와 콘템포러리(contemporary)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사실적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는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예수는 역사 속에 중요한 사건으로서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의 신화적 삶의 이야기가 거대한 물결로서 당대의 개명한 역사의 대세를 잡을 수 있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매우 신기롭게 느끼지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야기는 역사적 메시아로서의 바이오그라피가 아니라, 영원한 이방인의 신들의 이야기에 기초한 하나의 신화적 구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중해연안에 공통된 이방의 신비종교의 유대적 변용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이 전혀 새로운 계시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We have become convinced that the story of Jesus is not the biography of a historical Messiah, but a myth based on perennial Pagan stories. Christianity was not a new and unique revelation but actually a Jewish adaptation of the ancient Pagan Mystery religion. This is what we have called The Jesus Mysteries Thesis. -Timothy Freke and Peter Gandy, The Jesus Mysteries (New York : Random House, 1999), p.2..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아주 이성적인 철학자로만 생각하며 그가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지는 과정이나, 예수가 바리새인의 율법을 거부하고 예루살렘성전을 뒤엎고 유대인의 왕으로서 혁명을 꾀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지는 과정에 동일한 스토리의 스트럭쳐가 있다는 것,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준법정신 때문에 사형을 달게 받은 것이 아니라, 사후의 새로운 삶에 대한 종교적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도피할 수 있는 사형을 오히려 자초했다고 하는 그러한 과정이 예수의 스토리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별로 생각해보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피타고라스(Pythagoras, 581~497 BC)라고 하면 우리는 냉철한 공리를 발견한 수학자이며 과학의 원조라고만 생각했지, 그가 이집트, 페니키아, 바빌론 등지에서 신비종교를 체험하고 남부이태리 희랍식민지에 신비교단을 세운 교주이며, 인도인의 세계관과 동일한 윤회(the wheel of birth)관을 믿었고 윤회를 벗어나기 위하여 가혹한 금기의 계율을 실천했던 올페이즘의 신봉자였으며, 또 바람을 잠재우고 죽은 자를 일으키는 신비한 능력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서구문명의 뿌리를, 지나치게 근대과학의 근원으로서의 그레코로망의 합리적 전통에서 찾으려고 한 나머지, 그 문명의 형성과정에 대한 총체적 조망을 하지 않고 단지 근대과학적 사유에 합치되는 어떤 연역적 사유체계로서의 희랍문명의 그림만을 그린 데서 오는 오류들입니다. 우리는 철학, 즉 필로소피아를 소피아의 사랑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그 소피아가 단순히 이성적 사유로서의 지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신비를 체험하는 열쇠로서의 소피아라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소피아가 성서에서 말하는 그노시스(영지)와 근원적으로 상통되는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애써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던 것입니다.”

 

달라이라마는 내 말을 가로막지 않았다. 내 말이 재미있는 듯 호기심을 가지고 고개를 끄떡이며 계속 내 말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신이 나서 계속 영어로 씨부렁거렸다.

 

이러한 이방신비종교의 핵심에 있는 것은 죽음과 부활의 신화를 구현하는 신인(神人, a dying and resurrecting godman)입니다. 이 신인은 문명의 양태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는 오시리스(Osiris), 희랍에서는 디오니수스(Dionysus), 소아시아에서는 아티스(Attis), 시리아에서는 아도니스(Adonis), 이탈리아에서는 바카스(Bacchus), 페르시아에서는 미트라스(Mithras)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이 신인들은 모두 동일한 신화적 존재(the same mythical being)이며, 이 신화는 기원전 3세기부터 이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신화학자 조세프 캄벨(Joseph Campbell)이 말한 대로 이러한 신화들은 동일한 해부학적 구조’(the same anatomy)를 갖는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인간의 존재의 보편성인 동시에 한계상황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쥴리엘(Romeo and Juliet)은 이태리의 갑부집안들의 알력을 다룬 16세기 영국의 비극이고, 베른슈타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는 길거리 불량배들의 싸움을 다룬 20세기 미국의 뮤지칼이지만 결국 같은 이야기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의 이야기는 오시리스-디오니수스의 신화의 유대적 번안(a Jewish version)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예수신화와 완전히 동일한 이야기들이 산재해있음을 증명합니다.”

 

예수를 그렇게 신화적 사태로서 구성했다 할 적에 기존의 역사적 믿음과 많은 충돌이 생겨날 텐데, 그들의 가설은 이러한 충돌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가장 큰 충돌은 역사적 예수의 존재가 없이 어떻게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의 전도여행과 초대교회운동이 가능했겠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역사적 붓다가 없이 어떻게 왕사성이나 바이샬리, 슈라바스티벹의 승가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동일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참 재미있군요. 한번 그 해답을 들어보고 싶군요.”

 

 

코끼리를 타고 다니는 인도인, 룸비니에서, 코끼리는 인도대륙의 보편적인 동물이었다. 코끼리의 존재로써 인도 대륙이 아프리카대륙과 접합되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한다. 코끼리는 신화나 본생담에 항상 등장한다. 마야부인의 태몽도 흰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이었다. 시바신과 파르바티벹의 큰아들 가네샤(Ganesa)도 코끼리다. 지혜와 신중함의 상징이다. 윗 사진은 웨일즈 박물관의 가네샤,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전개

 

 

우선 예수의 신비의 저자들은 4복음서가 모두 사도바울의 편지 이후에 성립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에 착안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전혀 이들의 새로운 창안이 아니고 매우 정통적인, 그러니까 초대교회사를 연구하는 모든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예수의 전기로서 우리는 우선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들 수가 있는데 이 세 복음서는 공통된 관점에서, 그러니까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졌다고 해서 공관복음서(Synoptic Gospels)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세 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성립했다고 하는 것이 대부분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그런데 이 공관복음서의 원형을 이루는 마가복음조차도 사도바울의 죽음 이후에 성립한 것이 확실하며, 연대적으로는 AD 70예루살렘성전의 파괴라는 대사건의 직전 아니면 직후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서와는 전혀 색깔이 다른, 보다 신비적이고 보다 인간적인 요한복음서는 그보다 훨씬 후대, 2세기 중반경(AD 135~150 사이)에나 성립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전기는 사도바울의 죽음 이후에 초대교회의 어떤 필요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확실합니다.

 

둘째로, 사도바울과 예수의 만남의 과정이 전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울이라는 세리였으며, 예수의 사후에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어떤 황홀한 신비적 체험에 의하여 공중에서 예수의 음성을 들은 것으로 사도바울 자신이 몇 군데서 기술하고 있는데, 이 기술들조차도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질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와 바울의 만남은 한 인간과 한 인간의 역사적 만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와의 만남의 과정에 있어서 전혀 예수의 직전 제자들을 개입시키고 있질 않습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라는 사람을 통해 예수 얘기를 들었다든가 하는 식의 기술이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의 예수라는 사건과의 만남의 계기는 전혀 추상적인 것이며 바울의 주관적 의식내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스콜세지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에서도 바울과 인간화된 예수가 직접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수가 바울에게 그대가 전파하는 예수는 거짓 예수라고 힐난하니까, 바울이 당신같이 인간화된 예수는 나에겐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내가 전하는 예수는 오직 사망을 이긴 부활한 예수일 뿐이며 사람들은 나로부터 그러한 말만 듣기를 원한다고 선포합니다.

 

셋째로, 사도바울의 편지의 대부분이 사도바울이라는 인간의 이름을 빌어 날조된 것이며(당대에는 이러한 식의 날조가 날조가 아니라 당연한 관행이었습니다), 그 중 갈라디아서, 로마서, 고린도 전ㆍ후서가 그래도 오쎈틱(authentic)한 역사적 바울의 편지로 간주되는 것인데, 이러한 서한문 중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 즉 바울의 예수는 역사적 인간이 아니라, 죽음과 부활의 추상적 상징체이며, 우리 모든 개개의 인간이 그것의 지체일 뿐인 하나의 우주적 영성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12:4~5, 고전12:12~20), ‘나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러므로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2:20의 설법이라든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낡은 자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스러운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로움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니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와 같은 6:6~10의 바울설법을 잘 분석해보면, 예수의 수난(Passion)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회적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영원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신비적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부활도 단순히 미래에 닥쳐올 어떤 역사적 심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야 하는 영적인 이벤트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Christ)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the Anointed)이며 상기의 맥락에서 말한다면 모든 죄로부터 해방된 자라는 뜻이며 깊은 맥락에서 비유하자면 붓다깨달음을 얻은 자라고 하는 의미맥락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는 역사적으로 살아있던 현실적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와 더불어 죽고 더불어 사는 부활의 상징체로서의 예수(Christ in you)이며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이것이다. 너 안에 있는 그리스도요, 그것은 영광의 소망이니라. To them God chose to make known how great among the Gentiles are the riches of the glory of this mystery, which is Christ in you, the hope of glory. 1:27.이러한 추상적 예수의 의미 체계는 당대의 모든 이방신비종교의 공통된 신화구조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라는 신비주의적 사상가가 예수라는 추상체를 통하여 일으킨 종교운동이 당대의 헬레니즘세계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었던 개명한 유대인 콤뮤니티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또 호응을 얻었다는 것이죠. 예수(Jesus)라는 이름도 원래의 희랍이름은 ‘Ἰησος인데 이것은 ‘888’이라는 신비적 숫자를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체계일뿐이라는 것입니다ησος(10+8+200+70+400+200=888). 희랍어의 각 자모에는 신비적 숫자가 할당되어 있다. 이 숫자를 합치면 888이 된다. 사실 예수라는 이름은 매우 평범한 히브리 이름인 죠슈아(Joshua)를 희랍어로 전사하는 과정에서 신비적인 숫자의 느낌을 창출해내기 위해 억지로 꿰어 맞춘 이름이라는 것이다. The Jesus Mysteries, p.116..

 

이러한 바울의 신비주의를 우리는 그노스티시즘(Gnosticism) 즉 영지주의라고 부릅니다. 영지주의의 핵심은 인간이 영지(靈知, Gnosis)를 획득함으로써 그 자신이 기름부은 자, 곧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됨으로서 죄의 삯에서 해방되고 우주와 하나가 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영지를 요한복음의 저자는 로고스(Logos), (Light) 등의 말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사도바울을 오히려 초대교회운동의 저변에 깔려 있었던 영지주의의 날카로운 비판자로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이미지가 영지주의 반대파들에 의하여 왜곡되어간 모습을 반영하는 날조과정의 파편들로부터 오는 인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야말로 영지주의자였으며, 영지주의의 원조였으며, 이 영지주의야말로 초기 기독교의 원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지주의운동이 크게 성공을 거두자, 이제는 거꾸로 추상적인 예수를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던 것처럼 전기문학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기 승가운동이 크게 성공을 거두게 되니까 붓다 전생의 보살의 본생담(자타카, Jātaka)들이 지어지게 되는 과정과 매우 유사합니다. 불교도들은 예나 지금이나 본생담의 이야기를 싯달타 전생의 다양한 전기문학장르로 파악하지,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이야기하거나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본생담의 주제는 매우 단순합니다. 자기헌신이며 희생이며, 자비며, 사랑입니다. 즉 역사적 싯달타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거친 자비행을 통하여 해탈(解脫, mokṣa)을 이룩할 수 있었나 하는 대승정신의 드라마틱 프리젠테이션인 것입니다. 즉 자타카는 사실적 스토리로서의 역사성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승 6바라밀의 제1명제인 보시의 멧세지를 구현하기 위한 문학적 선포로서 그 일차적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예수의 전기도 자타카와도 같은 하나의 문학적 양식으로서 초대교회에 유행했던 하나의 현상이었으며, 이 현상의 단초를 형성한 것의 전형을 마가복음서라든가, Q자료라든가마가복음서의 자료를 마태누가의 기자가 공통으로 참고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마가복음서에 없는 것으로서 마태누가에 공통된 제3의 자료가 약 200(verses) 정도 되는데 이것을 신학계에서는 쿠벨레’(Quelle, 자료)라는 독일어의 첫머리를 따서 ‘Q자료’(Q material)라고 부른다., 하는 것들을 들 수 있지만 최소한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서 이외로도 수백개의 다른, 매우 다양한 주제와 고유명사들이 등장하는 복음서(전기문학)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수백개의 일부를 우리가 지금 체노보스키온 문서(나하그 함마하디 라이브러리)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백개의 복음서 중에서 오늘의 4복음서 체제가 성경으로서 고착된 것은 AD 4세기경에나 내려와서 이루어진 사건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주도한 사람들은 지독하게 영지주의를 혐오하고 박해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3~373)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의 요체는 초기 기독교의 원래 모습은 영지주의라는 영적인 운동(spiritual movement)으로 출발한 것이며,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의 모든 것은 오히려 그러한 영적 운동을 구체적인 역사적인 사건으로 만들기 위한 후대의 문학적 구성이었다 하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다해도 그러한 영적 운동의 실체를 인정한다면, 그 영적운동의 배경으로서, 지금 우리가 말하는 예수의 생애를 구현한 어떤 역사적 인물이 나사렛과 예루살렘에서 활약했다고 하는 사실 그 자체마저 거부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시바는 인도의 가장 인기 높은 신이다. 그런데 시바신은 인간의 형상으로 숭배되지 않는다. 그를 나타내는 것은 그의 성기이다. 모든 시바의 사원의 핵심부, 지성소에는 거대한 남성의 성기가 모셔져 있다. 인도는 이 지상에서 가장 노골적인 남근숭배(phallic cult)의 문명이다. 이 발기한 남근 링감(Lingam)은 반드시 여성의 성기, 요니(Yoni) 속에 박혀 있다. 요니는 시바의 모든 여성배우자(Shakti)의 성기를 상징한다. 성교 그 자체를 우주의 생성의 근원으로 간주한 것이다. 링감과 요니는 음과 양이 분리될 수 없다는 세계관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이 링감ㆍ요니의 숭배는 아리안 이전의 드라비다 토속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하랏파유적에 링감의 조형이 발견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 거대한 남근앞에 싱싱한 꽃, 청정한 물, 풀잎의 새싹을 바치면서 경배한다. 엘로라 카일라사 사원(Ellora Kailasa Temple)에서.

 

 

그노스틱스와 리터랄리스트의 대립

 

 

나는 달라이라마의 날카로운 질문에 좀 충격을 받았다. 그에게 나의 언변은 매우 생소한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장황할 수도 있는 나의 이야기를 매우 진지하게 경청했을 뿐 아니라, 중간에 이해가 안되는 대목이 있으면 반드시 되묻고 이해를 하고서야 넘어갔다. 나의 이야기를 막는 법이 없었으며 나의 이야기가 소기하고자 하는 의미맥락이 완벽하게 드러날 때까지 나로 하여금 이야기를 계속하게 만들었다. 내가 대화의 초장부터 받은 달라이라마의 인상은, 그는 매우 이지적인 사람이었으며, 무한한 지적 호기심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을 홀대하는 자세가 전무했다. 그는 자비와 지혜의 상징이었다. 나는 곧 편안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어떤 추상적 정신운동이 구체적인 현실적 사례의 모델이 없이도 크게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그노스티시즘의 영적 운동이 예수에 해당되는 어떤 역사적 실체로부터 연유된 것일 수도 있지만, 이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역사적 실체는 당시 로마의 압제 속에서 신음하던 유대인 식민지 사회에서 수없이 존재할 수 있는 사례의 한 계기에 불과한 것이며, 그것의 역사성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사도바울이나 초대교회인들의 비젼은 그러한 역사성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며, 더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라는 사건을 역사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힌두교도들이 시바와 파르바티, 카마, 강가의 이야기나 비슈누의 일곱번째 화신인 라마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서 해석하기 때문에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전기를 만든 사람들은 점점 예수를 신빙성있는 역사적 인물로서 꾸미게 되었고, 또 그러한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 사실로서 이해함으로써 그 구속사적 사건 속에서 강력한 신앙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한 사람들의 부류가 점차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부류를 프레케와 간디는 리터랄리스트(the Literalists, 직역주의자)라고 부르는데, 결국 초대교회의 역사는 이 영지주의 기독교인과 리터랄리스트 기독교인의 대립과 투쟁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지주의 신화론자에 대한 리터랄리스트 사실론자들의 승리를 기록한 사건이 바로 콘스탄티누스 대제(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280~337)가 주재한 니케아 종교회의(Council of Nicaea, 325년에 열림. 니케아는 현 터키의 이즈니크İznik)였습니다.

 

니케아 종교회의의 목적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아리우스 죽이기였습니다. 그것은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리우스(Arius, c. 250~336)로 인하여 동방교회에 야기된 아리아니즘(Arianism)의 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인데, 아리아니즘의 핵심은 예수는 인간일 뿐이며, 따라서 성부ㆍ성자ㆍ성신의 삼위일체는 본질적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리우스의 주장은 외면적으로 보면 매우 역사주의적이고 사실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주장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 정반대입니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규정한 대로 성부와 성자가 하나의 실체(homoousios)라고 한다면, 성자는 인간일 수밖에 없으며, 성자의 성부와의 절대적 동일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곧 인간이 신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통파의 삼위일체론은 실제로 예수에게서 인성을 제거시키려는 것이며 로고스로서의 예수를 격하시키려는 것입니다. 예수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무신론의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네오플라토니즘(neo-Platonism)적인 신성의 일체감을 표현하는 말이며, 리터랄리스트의 주장보다 훨씬 더 신비주의적이며 기나긴 영지주의 전통을 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케아 종교회의는 아리우스가 예수를 인간구원의 능력이 없는 허약한 피조물로 타락시켰다고 몰아쳤고,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이로써 리터랄리스트들이 삼위일체론의 정통파가 되었고 로마교회의 주류가 되었으며, 영지주의자들은 하루아침에 이단으로서 철저히 왜곡되기 시작됐고, 모든 문헌으로부터 말살되는 수난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조선왕조의 말기에 카톨릭교리를 서양에서 들어왔다고 해서 서학이라고 했고, 그 서학은 인간을 옥황상제 밑에 예속시키는 굴종적인 샤마니즘적 종교라고 보았고, 이에 대하여 우리의 본래적인 사상을 표방하는 혁명적인 민중운동으로서 동학이라는 종교가 대립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학은 인간이 하느님께 예속되는 것이 아니며 인간과 하느님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인내천(人乃天)사상을 주장했습니다. 사실 우리 동학의 인내천사상은 그노스틱스의 로고스사상과 더 잘 통할지도 모르겠습니다바울이 말하는 우리 몸 안의 그리스도우리는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시천주(侍天主)의 존재라고 하는 동학의 사상은 상통되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論學文, 東經大全..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나라 동학과 서학의 대결의 정신사적 디프 스트럭쳐가 니케아 종교회의 속에도 똑같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로마교회가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몰았습니까?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신앙을 공인하면서AD 313년 밀란칙령(the Edict of Milan)으로 기독교는 공인되었다.아리우스 같은 사상가의 입장을 포용할 수도 있었던 것 아닙니까?”

 

 

 동네 서낭당 같은 곳에 모셔진 미니 링감과 요니, 시바의 성기 링감을 그의 충직한 시종 난디(황소)가 무릎끓고 쳐다보고 있고, 시바의 큰아들 가네샤(코끼리)가 같이 지키고 있다. 사람들은 여기 오면 위에 매달려 있는 종을 쳐서 신들을 부른다. 때로 요니의 홈에 우유를 부어 성교의 생생한 느낌을 나타내기도 한다. 정말 코믹한 성소의 모습이었다. 요니는 시바(남성) 속에 내재하는 여성적인 성적 에너지일 수도 있다. 아그라 시장에서.

 

 

예수신화를 사실로 믿는 사람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종교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매우 교활한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서로마의 운세는 이미 기울기 시작했고, 그가 기독교를 공인하려 했던 것은 기독교의 대세에 밀렸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기독교를 역이용하여 쓰러져가는 로마제국을 재건하려 했던 것이죠.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기울어져가는 로마제국의 새로운 정신적 일체감의 기초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에서 본다면 영지주의와 같은 신비주의ㆍ개인주의, 그리고 우리 동학처럼 신과 인간을 하나로 이해하는 신인(神人, godman)의 로고스론은 제국주의의 하이어라키를 정당화시키는 데는 매우 불편합니다. 즉 리터랄리스트의 권위주의적 주장이 로마제국의 정치적 음모를 위해 더 적합했던 것이죠. 하나의 신, 하나의 종교,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 밑에 모든 것이 예속되는 것을 리터랄리스트들이 정당화시켜 주었고 이러한 로마 제국의 하르모니아(harmonia, 기독교와의 제휴)의 기반은 비잔틴제국(4~15세기), 카로링기안제국(8~9세기), 그리고 중세 게르만의 신성로마제국(8세기~1806)에 의하여 계승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가장 근본적인 소이연은 종교는 정치적 권력과 분리되기 어렵다는 것이며, 종교가 정치적 권력의 정당화를 위하여 사용될 때, 정통과 이단의 심각한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예수의 신화를 사실로서 믿고 사는 사람들은 암암리에 로마제국의 정치적 권력의 음모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제국은 사라졌지만, 로마제국의 정신적 구속력이 아직도 허깨비로 남아있는 셈입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서양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는 그의 주저 과정과 실재속에서 서양인들은 신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로마황제를 믿고 있다고 말했는데 참으로 날카로운 지적이지요.”

 

 

 석양에 땔감을 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인도의 여인들, 파트나로 가는 길에. 이들에겐 과연 신이나 신화의 의미가 무엇일까?

 

 

부록 9. 서구인들의 세 가지 신의 관념

 

 

화이트헤드는 그의 유기체적 우주론의 구상을 밝힌 대저, 과정과 실재의 마지막 장에서 서구인들의 전통적인 신의 관념을 세 가지로 분류하여 요약하고 있다.

 

그 첫째가 황제의 이미지로서의 신(God in the image of an imperial ruler)이다. 서구세계가 기독교를 받아들였을 때는 마침 시저가 세계를 정복한 후였으며, 따라서 서구신학의 표준 텍스트는 시저의 법률가들에 의하여 편찬되었다. 그리고 서구교회는 전적으로 시저에게 속해있던 속성들을 신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이집트ㆍ페르시아ㆍ로마의 황제와 같은 이미지로 신을 만들어 내는 뿌리깊은 우상숭배의 전통이 이미 그 초창기로부터 확립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두 번째가 도덕적 에너지를 의인화한 이미지로서의 신(God in the image of a personification of moral energy)이다. 이것은 유대교 전통에 있어서의 예언자상으로 대변된다.

 

그리고 그 세 번째가 궁극적 철학원리의 이미지로서의 신(God in the image of an ultimate philosophical principle)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부동의 사동자(the Unmoved Mover)의 개념이 잘 대변해주고 있다.

 

황제의 이미지로서의 신 God in the image of an imperial ruler
도덕적 에너지를 의인화한 이미지로서의 신 God in the image of a personification of moral energy
궁극적 철학원리의 이미지로서의 신 God in the image of an ultimate philosophical principle

<서구인들의 전통적인 신의 관념>

 

 

화이트헤드의 신은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이다. 그것은 창조성(Creativity)과 영원적 객체(Eternal Object)들을 매개하는 기능을 갖는 현실적 존재이다. 그것은 세계 밖에 군림하는 어떤 영원한 명사적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이 세계 속에 내재하는 부사적 존재라 할 수 있다. 신은 모든 창조에 앞서(before)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창조와 더불어(with) 있을 뿐이다. 그것은 모든 새로움의 원천이다. 그것은 이 세계와 대칭적 관계에 있다. 세계가 끊임없이 생성중에 있는 불완전한 것이라면 신 또한 끊임없이 이 세계를 보완하는 생성중의 존재이다. 이 세계가 물리적 파악에서부터 개념적 파악으로 나아간다면, 신은 거꾸로 개념적 파악에서부터 물리적 파악으로 나아간다. 이런 맥락에서 신과 세계는 대칭적(the mirror image)이다.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한다고 말한다면 동시에 이 세계는 신을 창조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A. N.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corrected edition (New York : The Free Press, 1978), pp.342~351..

 

화이트헤드의 신의 개념은 매우 난해하다. 우리말로 그것을 가장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책으로서는 사계의 권위인 문창옥의 두 책을 들 수 있다.

문창옥, 화이트 헤드철학의 모험(서울: 통나무, 2002), pp.101~124,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종교

문창옥, 화이트헤드과정철학의 이해(서울 : 통나무, 1999), pp.85~112, ‘형성적 요소: 창조성, 영원적 객체, 을 보라.

 

 

 

 

신앙은 이성이다

 

 

이런 얘기를 주욱 듣고 있다가, 갑자기 달라이라마는 나보고 칭호를 무엇으로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모국에서는 보통 도올선생이라는 말로 불리운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도올선생이라는 호칭에 대한 나의 영역은 마스터 스톤’(Master Stone)이었다. 그랬더니 왜 하필 마스터 스톤이냐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돌대가리라고 불리었기 때문에 그런 호칭이 붙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그는 깔깔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돌대가리가 아니라 불ㆍ법ㆍ승 삼보의 보석대가리라고 해야겠군요. 여태까지 도올선생께서 기독교역사나 교리에 관한 최근의 학설을 친절하게 소개해주신 것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도올선생처럼 그렇게 다방면으로 디테일한 학문적 성과들을 섭렵할 수 있는 기회는 별로 없었습니다만, 한가지 명료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은 반드시 이성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종교에 대한 이성적 탐구가 종교적 신앙을 해치지는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신앙은 어떠한 이성적 공세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티벹말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성에 바탕을 두지 않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 데로나 흘러갈 수 있는 개울물과 같다.’”

 

신앙에 관해 이성의 검증을 강조하는 달라이라마의 이러한 태도는 나로서는 너무도 반가운 것이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세계의 많은 신앙인들이 이성적 탐구는 신앙의 체계를 붕괴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중세기의 모든 신학체계가 이성의 빛(lumen naturale)과 은총의 빛(lumen gratiae)을 대립적으로 파악했으며, 이성의 힘으로는 도저히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신앙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의 신비가설(The Jesus Mysteries Thesis)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신앙을 근원적으로 붕괴시키는 위험한 학설로서 생각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렇게도 재빨리 서구 신학사조를 소개하는 한국의 신학계가 아직도 이 책에 대해서는 함구불언하고 있는 정황만 보아도 그렇지요. 그렇지만 저는 이러한 가설이, 저자들도 말하는 것이지만, 기독교신앙을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신앙의 잃어버린 측면들, 기독교가 정치권력과 결탁되면서 크라이스트의 적으로서 휘몰아 친 이단사상들의 긍정적 측면들을 재생시킴으로써 오히려 기독교신앙의 본질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While the Jesus Mysteries Thesis clearly rewrites history, we do not see it as undermining the Christian faith, but as suggesting that Christianity is in fact richer than we previously imagined. The Jesus story is a perennial myth with the power to impart the saving Gnosis, which can transform each one of us into a Christ, not merely a history of events that happened to someone else 2,000years ago. The Jesus Mysteries, p.13.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후에 승영조에 의하여 예수는 神話(서울 : 동아일보사, 2002)라는 제목으로 번역ㆍ출간되었다. 그러나 상세한 주가 번역되어 있질 않고 전문용어 선택에도 문제가 있어 원서의 파우어를 충분히 전달하지는 못하고 있다. 완역으로 간주될 수 없다. 신화학자 이윤기는 말한다. ”이 책의 내용이 충격적이라기보다는 이 책이 대한민국이라는 풍토에서 번역되어 읽힐 수 있고 또 공개적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더 충격적이다.“ 한국의 뜻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이 책의 본지가 깊게 이해되기를 바란다. 이 책의 내용은 분명 불트만신학의 가설을 뛰어 넘고 있다..”

 

저는 세계평화에 대한 의식이 들면서부터 줄곧 종교간의 대화를 강조하여 왔습니다. 저는 여태까지 많은 기독교의 영적 지도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것은 기독교의 교리는 매우 배타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 기독교를 통하여 높은 영적 차원에 도달한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유치한 방식으로 유일신관을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에 대해서도 상당히 개방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도 달라이라마께서 베네딕토 수도회 세계 그리스도교 명상공동체(The World Community For Christian Meditation)에서 주관하는 존 메인 세미나에서 행하신 연설을 묶어낸 더 굳 하트(The Good Heart)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어보았습니다Dalai Lama, Robert Kiley, The Good Heart A Buddhist Perspective on the Teachings of Jesus, Somerville : Wisdom Publications, 1998. 이 책은 류시화에 의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달라이 라마 예수를 말하다, 서울 : 나무심는사람, 2000.. 그러나 그 책 속에서는 아무런 본질적 논의가 오가고 있지 않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실망을 느낄 것입니다. 제가 받은 감명이란 그저 달라이라마께서 개방적 태도로서 그러한 자리에 서서 자신의 느끼는 바를 담담하게 이야기한다는 그 자체가 주는 감동이랄까, 혹은 그 자리에 있었던 몇몇 사람들이 현장에서 느낀 감동적 분위기를 전달하는 언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느낀 약간의 감상에 그치는 것이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복음서들의 몇 구절을 달라이라마께서 느끼신 대로 강의한다는 것은 매우 인상론적, 그러니까 좀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피상적인 인상 몇 마디를 주고받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의 경건주의적 분위기, 이러한 것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생각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구체적 생각의 실마리를 던져주지 못합니다. 즉 달라이라마께서 주장하시는 종교간의 대화가 그러한 인상의 교환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저의 표현이 좀 지나쳤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적하신 비판은 나도 달갑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임 자체가 사상가들간의 지적 대화의 자리가 아니라, 현실적인 종교적 지도자들 사이의 정중한 만남의 자리며, 그러한 만남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를 좀 평가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기성종교간의 문제는 매우 섬세합니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본격적인 교류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조금씩 조금씩 접근해가야겠지요.”

 

모든 종교는 그 윤리적 측면에서는 공통분모를 찾기가 매우 쉽습니다. 즉 모든 종교가 인간의 보편적 선을 지향한다든가,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노력한다든가, 인간을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구원한다든가, 정신적인 평화를 안겨준다든가 하는 윤리적 목표에 있어서는 모든 종교는 쉽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윤리적 목표가 근원적으로 거부된다면 그것은 사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교주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든가, 한 교단의 재정적 축적을 위한 것이라든가 하는, 보편적 윤리감각이 결여된 종교운동은 모두 그 자체의 결함에 의하여 괴멸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윤리적 목표의 씰링(천정)이 낮을수록 그 종교는 영향범위가 좁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윤리적 목표의 씰링이 높은 보편종교의 경우에도 그 윤리적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 그리고 그 언어적 감각이 담고 있는 문화적 양태는 매우 상이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이성의 배후에는 매우 본질적인 인식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이 인식의 차이는 조화시키기 어려운 교리의 상이성을 유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 선택의 자유

 

 

내가 종교의 대화라는 말을 할 때에는 종교간의 상이성을 거부한다는 맥락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는 종교간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서 대화를 해야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종교는 서로간의 차이를 명료하게 인식하기 위해서 대화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간의 대화가 개종이나 교리의 혼합을 유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인 나름대로, 불교도는 불교도 나름대로 자기의 종교적 목적을 충실히 달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티벹에는 양의 몸에 야크의 머리를 올려놓지 말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중론의 완성자인 나가르쥬나모든 것을 같게만 보려고 하면 모든 것이 같아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극단적으로 밀고 들어가면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가 단 한 개의 일양적 존재로 축소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며, 모든 사람들의 음식의 기호가 다르듯이 자기에게 맞는 종교를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인도사람들은 흔히 이 지구상의 인구 숫자만큼의 다른 종교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개별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라는 서양의 신학자가 신을 가리켜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고 표현했다는데, 그렇다면 그 궁극적 관심은 인간마다 다 다를 것이 아닙니까? 물론 그 궁극성에 어느 정도의 공통성은 있다 하더라도. 나는 보편종교를 신봉하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의 교리를 인수분해해서 만든 하나의 보편적 종교의 가능성을 믿지 않습니다. 무굴제국아크바르(Akbar)는 매우 종교에 대해 관용심이 컸던 사람이고 모든 종교를 섭렵한 끝에 그 모든 종교의 장점만을 딴 딘 이 일라히’(din-i-Ilahi, Religion of God)라는 보편종교를 만들었지만아크바르 대제는 딘 이 일라히’(din-i-llahi)1582년에 반포하였다. 그러나 결국 아무런 추종세력도 못얻었고 그의 사후에는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특히 이슬람신민들의 불만이 컸다. Bamber Gascoigne, The Great Moghuls, p.115., 결국 그가 포섭한 어떠한 종교인들에게도 만족감을 주지 못했습니다. 종교를 서로 풍성하게 만드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다양성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 지구에는 다양한 정신적 성향과 관심, 영적 기질, 그리고 문화적 풍토, 언어적 감각과 기호, 심미적 통찰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양성에 따라 종교적 해결도 다양한 선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다양성을 말살시키면 오히려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입니다.”

 

 

무굴제국이 남긴 가장 위대한 예술품으로서 나는 서슴치 않고 이 아크바르(Akbar)대제의 초상화를 들겠다. 비록 자화상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공재 윤두서의 초상화와 비견할 만한 걸작이라 하겠다. 가장 위대한 제국의 풍모를 완성한 황제의 모습이건만 그 조촐한 인간미, 확고한 판단력, 인간의 희비를 관조하는 듯한 관용미, 그리고 거친 전투적 삶의 역정이 역력히 드러나 있다. 이 초상으로 무굴제국의 지배자들이 우리나라 시골 아저씨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몽골리안들이었다는 것을 너무도 실감할 수 있다. 후마윤의 뜻밖의 죽음으로 13세에 왕위에 오른 그는 무용과 관용, 탁월한 치세의 방략을 과시하면서 50년간 무굴제국의 기틀을 완성하였다. 이 초상화는 1605년 죽기 직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성하의 말씀은 너무도 지당하신 것이며 양식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러한 성하의 견해에 충심의 동의를 표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하의 그러한 논의는 매우 원초적이며 목가적입니다. 우리가 종교간의 대화를 논의하는 가장 큰 이유는 종교와 결탁된 정치권력이 인간세상에 더 말할 나위 없는 폭력을 행사해왔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대부분의 전쟁이 종교적 신념의 차이를 빌미로 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인류의 참혹한 전쟁의 대부분이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종교전쟁인 것입니다. 성하의 말씀처럼 종교간의 다양성을 공인하고 관용하고 존중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이러한 현상의 가장 나이브한 결론은 또 다시 그러한 다양한 종교간의 공존상태에서 어느 종교가 가장 인기를 얻어 헤게모니를 잡느냐 하는 위장된 에반젤리즘의 병폐로 귀결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파테푸르 시크리에 있는 아크바르 대제의 개인 접견실, 디완이카스(Diwan-i-khas), 2층으로 되어 있는 건물인데 들어가면 하나의 거대한 홀이고 그 중앙에 한 돌기둥이 우뚝 서있다. 구자라트 공포 양식을 겹쳐 만든 힌두 만다라양식의 기둥 꼭대기에 대제가 앉아있다. 그리고 그곳은 사방으로 통로가 나있다. 아크바르는 사람들을 여기서 접견하였다. 알현하는 사람은 바닥에 있기 때문에 그를 볼 수가 없다. 이 접견실은 신비로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는 엄청난 지적 호기심의 사람이었고 끊임없이 다양한 신념의 사람들과 대화를 즐겼다. 그리고 모든 종교와 인종을 관용했고, 그들로부터 배울려고 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크바르는 완전히 문맹의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대화, 대독, 암송, 그림책을 통해서 지식을 흡수했다. 이 접견실의 구조는 그의 개방성과 동시에 암살을 방지하려는 무장의 치밀함을 보여준다. 그의 자리는 우주를 굴리는 법륜의 주축을 상징한다.

 

 

성군 아크바르의 입김이 서려있는 파테푸르 시크리로 가는 새벽 길. 위의 사진은 아크바르가 짓기 시작한 아그라 포트(Agra Fort)의 야경, 아크바르는 군사적 요새로 지었으나 그의 손자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이 이 성채를 화려한 궁전으로 개축, 완성시켰다. 그러나 결국 이 아그라 포트는 샤 자한의 감옥이 되고 말았다.

 

 

 아크바르 진묘로 가는 길. 나는 그곳에서 『꾸란 구절을 묘지기를 따라 암송했다. 묘한 여운이 지하의 어둠속으로 깊게 퍼져나갔다.

 

 

에반젤리즘의 한계

 

 

그것은 또다시 에반젤리즘(evangelism, 전도주의)의 본질에 관한 논의를 해야겠지요. 모든 종교현상에 있어서 에반젤리즘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자기가 깨달은 바나 믿는 바가 자기실존에 거대한 기쁨으로 다가올 때, 그 기쁨을 타인과 나누고 싶어하는 충동은 거의 본능적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가 깨달은 것이나 믿는 것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무리가 발생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채식을 실천해보니 너무도 좋다고 해서, 고기를 안 먹고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채식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 좋은 것이 꼭 타인에게도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실천해보니 정말 좋다고 생각될 때에 그것을 남에게 권유해볼 수는 있습니다. 나는 종교적 진리도 권유(exhortation) 이상의 전도주의를 표방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 진리의 선택은 전도인의 소관이 아니라 피전도인의 주체적인 결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종교적 진리는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체험진리가 될 수밖에 없으며, 체험의 진리라 하는 것은 자각의 진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인간 개인의 자각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에반젤리즘은 타인에게 자각의 계기를 제공하는 그러한 선업(善業) 의미를 지닐 수 없습니다. 교세를 확장한다든가, 나의 신념의 동조자를 구한다든가 하는 세속적인 행위를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전도가 아니라 권력의 야욕에 불과합니다. 불타의 45년간의 전도의 삶은 끊임없는 유행’(遊行)이었습니다. 그것은 안주’(安住)가 아니며 상주’(常住)가 아니었습니다. 상주는 결국 집단적 권력의 확대를 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유행의 수단은 걸식이었습니다. ‘걸식은 남에게 폐를 끼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소유의 실천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불교는 인류사에 있어서, 기독교십자군전쟁 등 끊임없는 제국주의 전쟁의 주도적 역할을 한 것과는 달리, 인류를 파멸로 휘모는 그러한 전쟁의 주체가 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박해를 당했으면 당했지 폭력으로 맞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가 지니는 교리내용이나 승가의 성격이 기독교와는 좀 상이한 어떠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불교의 에반젤리즘의 성격이 기독교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라 할지라도, 역시 에반젤리즘이라는 측면에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불교는 전혀 전도를 하지 않는 종교처럼 생각했는데, 미국 대학에서 강의를 듣는데 미국인 교수들이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세계사에 유례를 보기 힘든 전도주의적 열정운운하는데 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1920세기에 기독교의 선교사들이 동아시아를 침투하는 과정이나 위진남북조시대에 인도의 승려들이 중국을 침투하는 과정이 결과적으로 별 차이가 없는 세계사적 사건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눈이 번쩍 뜨이게 되었습니다. 불교는 전도를 표방하지 않는 듯하면서 무서운 전도의 괴력을 발휘하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독일학자 취르허(E. Zürcher)는 위진남북조 시대 불교의 전래를 불교의 중국정복’(the Buddhist Conquest of China)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콘퀘스트’(conquest, 정복)라는 단어를 그의 명저의 제목에 썼던 것입니다. 오스왈드 슈펭글러(Oswald Spengler, 1880~1936)의 말대로, 중국문명과 인도문명처럼 지정학적 격절에 의하여 독자적으로 성장해온 유기체들이 이렇게 대규모의 교류를 단기간에 집약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에반젤리즘의 열정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불교가 공격적 이래서가 아니라 중국문명내에 불교를 수용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내적 여건이나 사상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불교는 중국인들의 자각을 도와주었을 뿐일 것입니다.”

 

상당히 통찰력 있는 말씀이십니다. 슈펭글러는 인도와 중국의 불교교류에 있어서도 불교의 외연(denotation)은 전래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내포(connotation)는 전달되지 않았다고 얘기했습니다. 같은 언어체계, 같은 제식, 같은 상징이 전이되었다 할지라도 양자는 자기의 고유한 길을 걸어갈 뿐인 두 개의 다른 영혼이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결국 불교가 중국문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던 것은 동한제국문명의 말기로부터 위진시대에 걸쳐 현학(玄學)이라고 하는 노장사상이 성행하여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정신적 토양을 깔아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며칠 전에 작고하신 저의 스승 후쿠나가 미쯔지(福永光司, 1918~2001)선생은 중국에 있어서의 불교의 전개는 노장사상에 의한 격의불교(格義佛敎)의 역사일 뿐이라는 테제를 제시했습니다. 여기 격의불교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생소한 이론들을 자기들에게 친숙한 도가계열의 개념을 빌어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타’(Buddha)장자가 말하는 진인’(眞人)으로 이해한다든가, '열반(涅槃, nirvāṇa)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 ‘보리’(bodhi)’()로 이해한다는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티벹불교는 중국불교에 비해 격의가 최소화된 인도 본연의 모습에 가까운 불교를 보존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죠.”

 

모든 문명의 교류는 필연적으로 왜곡과 변용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잔타 제19 석굴의 한 부조. 저 구석에 싯달타가 득도한 후 카필라성에 돌아와 부인 야쇼다라와 12세의 아들 라훌라를 만나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부인 야쇼다라는 유산을 요구한다. 그러나 붓다는 불법이외의 어느 것도 자식에게 유산으로 남겨줄 것이 없었다. 라훌라는 최초의 사미가 되었다. 붓다와 그 외의 인물묘사에 동체 비례가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바로 붓다의 위대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수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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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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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sakang.tistory.com/9 [🦘 40대 캥거루족: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