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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정경론 - 1. 가장자리가 없다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정경론 - 1. 가장자리가 없다

건방진방랑자 2021. 12. 6. 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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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정경론(情景論)

 

 

1. 가장자리가 없다

 

 

山沓水迎 樹雜雲合 산은 첩첩 물은 감돌고 나무들 섞여 있고 구름은 합해지네.
目旣往還 心亦吐納 눈길이 갔다가 돌아오면은 마음도 따라서 움직인다네.
春日遲遲 秋風颯颯 봄날 해는 느릿느릿 가을바람 스산해라.
情往似贈 興來如答 정을 줌은 건네듯이 흥이 읾은 답하는 듯.

 

유협(劉勰)문심조룡(文心雕龍)』 「물색(物色)의 한 절이다. 산첩첩(山疊疊) 수중중(水重重), 강산은 고운데 제각금의 나무들을 구름이 감싸 안는다.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물인가. 저 나무는 무슨 나무며, 어디까지가 구름인가. 그저 눈앞의 경물이건만 눈길이 한 번 갔다가 돌아오는 사이에 어느새 마음에는 느낌이 자리 잡는다. 사실 하루의 물리적 시간이야 봄가을이 다를 바 없고, 부는 바람 또한 차이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봄날의 해는 느릿느릿 좀체 흐르지를 않고, 가을바람은 공연히 뼈에 저미듯 스산한 마음을 일으킨다. 마음에 일어나는 정을 건네주듯 사물에 보내면, 사물은 답이라도 하듯 흥을 불러일으킨다. 눈앞의 경물은 이렇듯 시인의 눈에 들어오면서 어느 순간 정()으로 착색된다. 숲과 구름이 한데 합쳐지듯 경()과 정()은 하나로 결합되어 분리할 수 없게 된다.

 

일찍이 명()의 사진(謝榛)사명시화(四溟詩話)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 시의 매개이고, ()은 시의 배아(胚芽)이니 합하여 시가 된다. 몇 마디 말로 만 가지 형상을 부려서 원기(元氣)가 혼성(渾成)하니 그 넓음이 가이 없다

 

 

무심히 경()과 마주하여 마음속에 정()이 일어나매 경()은 정()의 매개가 된다. 가슴에 자욱한 정()을 품고 경()을 바라보면 무심한 경물도 내 마음의 빛깔로 물드니, ()은 경()에 의미를 불어넣는 배아(胚芽)가 된다.

 

()만으로는 시가 되지 않는다. ()만 가지고 시가 되는 법도 없다. 그래서 청()의 왕부지(王夫之)석당영일서론(夕堂永日緖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 경()은 이름은 둘이나 실제로는 나눌 수 없다. ()에 뛰어난 자는 합함이 묘하여 가장자리가 없다. 빼어난 시는 정() 가운데 경()이 있고, () 가운데 정()이 있다

 

 

이렇게 묘합무은(妙合無垠)’의 설을 주창하였다. 선녀의 옷은 꿰맨 자취를 찾을 수 없어 천의무봉(天衣無縫)이다. 정과 경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어디까지가 경이고 어디부터가 정인지 그 가장자리를 찾기가 어렵다. 정을 말하는가 했더니 어느새 경을 묘사하고 있고, 경을 그려 보이는가 싶어 보면 다시금 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 나라 도목(都穆)남호시화(南濠詩話)에서 시를 지음에는 반드시 정()이 경()과 만나고, ()은 정()과 합해져야만 비로소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다고 하고, 두 사례를 들었다.

 

芳草伴人還易老 방초는 사람마냥 다시금 쉬 늙고
落花隨水亦東流 지는 꽃 강물 따라 동으로 흘러간다.

 

위의 시는 정()이 경()과 만나 하나가 된 예이고,

 

雨中黃葉樹 燈下白頭人 빗속에 누렇게 잎 시든 나무 등불 아래 하얗게 머리 센 사람.

 

위의 시는 경()이 정()과 합하여 하나가 된 예라 하였다.

 

시든 풀은 탄로(歎老)를 부추기고, 덧없이 져 강물 위로 떠가는 꽃은 세월의 무상(無常)을 일깨운다. 경물과 마주 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인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경물과 마주하여 정()이 촉발된 것이다. 추적추적 가을비는 하염없는데, 마당엔 누렇게 시든 잎을 매달고 나무가 서 있다. 내일 아침이면 가지의 잎은 모두 떨어지고 없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화려하던 인생의 잎새들도 이제는 시들어 떨어지고 그 아래로 밤새 등불만 가물거릴 뿐이다. 삶의 얼룩을 지우지 못한 채 또 근심 깊은 가을밤은 깊어간다. 본시 이는 경물일 뿐인데, 시인의 정이 뭉클 묻어나 가슴을 저민다.

 

()과 경()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미묘한 줄다리기는 시 감상의 즐거움이다. 시인은 가장자리를 굳이 감추려 하지만 읽는 이는 뭉뚱그려 풀어놓은 경물 안에 감춰진 시인의 정의(情意)를 자꾸 들추어낸다. 한데 합쳐졌던 정()과 경()은 독자의 의경 속에서 어느 순간 분리되면서 새로운 미감을 불러일으킨다. ()과 경()이 만나 이루는 조합에는 여러 경우가 있다. ()을 보고 정()을 일으키는 정수경생(情隨景生), 촉경생정(觸景生情)’의 방식과, ()을 머금어 경()에 투사하는 이른바 이정입경(移情入景), 경종정출(景從情出)’의 방식, 둘 사이의 선후를 구분할 수 없는 정경교융(情景交融), 물아위일(物我爲一)’의 경우와, ()만을 묘사하면서도 글 속에 절로 정의(情意)를 드러내는 지수술경(只須述景), 정의자출(情意自出)’의 방식, 또 정()만을 말하여 경()을 보이지 않았으나 곡진함을 다한 즉정견경(卽情見景), 정의핍진(情意逼眞)’의 방식이 있다. 이제 이러한 도식에 따라 해당 작품을 감상해보기로 하자.

 

정수경생 촉경생정
(情隨景生 觸景生情)
경치와 사물을 보고 감정을 일으키는 것.
이정입경 경종정출
(移情入景 景從情出)
감정을 경치와 사물에 투사하는 것.
정경교융 물아위일
(情景交融 物我爲一)
감정과 경치ㆍ사물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
지수술경 정의자출
(只須述景 情意自出)
경치와 사물만을 묘사했는데 절로 감정이 드러난 것.
즉정견경 정의핍진
(卽情見景 情意逼眞)
감정만을 말해 경치와 사물은 없으나 핍진해진 것.

 

 

 이인문, 초옥독서도(草屋讀書圖), 18세기, 31X26cm, 개인 소장

봄이 오는 숲속 초옥에 주인은 책을 읽고, 숲 저편 마을에서 동자를 앞세워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건너오는 벗이 있다.  

 

 

인용

목차

1. 가장자리가 없다

2. 정수경생 촉경생정(情隨景生, 觸景生情)

3. 이정입경 경종정출(移情入景, 景從情出)

4. 정경교융 물아위일(情景交融, 物我爲一)

5. 지수술경 정의자출(只須述景, 情意自出)

6. 즉정견경 정의핍진(卽情見景, 情意逼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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