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어휘사전 - 113. 무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113. 무

건방진방랑자 2020. 4. 18. 05:31
728x90
반응형

113.

 

 

()

옥 비슷한 돌인데, 간신을 비유한 말이다.

 

()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을 토벌한 주 무왕(周武王)의 공을 기리기 위해 만든 춤곡이다.

 

()

전한 시대 이전의 1무는 지금의 약 60평에 해당한다. 300무란 18,000평을 의미한다.

 

무가무불가(無可無不可)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중용(中庸)를 지키거나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옳다고 하는 것도 없고 옳지 않다는 것도 없다. 그것은 옳다고 하지 않고 또한 이것을 옳지 않다고 하지도 않는다. 즉 말하자면 하나의 입장을 고집하지 않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대처해 나가는 방법을 취한다는 것이다. 공자(孔子)가 초야(草野)에 묻혀서 살아간 현자(賢者)들을 평()한 다음 나는 이런 사람들과는 달리 그저 무가무불가(無可無不可)이니라라고 덧붙였다. 이 말은 공자(孔子) 자신은 그들과 달라서 은둔생활(隱遁生活)이 좋다거나 나쁘다고 먼저 정한 후에 그런 생활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미자(微子)

 

무감유해주(無監有蟹州)

() 나라 때 필탁(畢卓)이 술을 매우 좋아하고, 또 특히 게의 다리를 대단히 즐겨 먹었는데, 그가 이부랑(吏部郞)으로 있을 적에 한번은 술이 취하여 밤중에 이웃집의 술항아리 사이로 가서 술을 훔쳐 마시다가 술 관장하는 사람에게 포박되었다가 아침에야 이부랑 필탁임이 밝혀져 급히 포박을 풀게 되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卷四十九

 

무검기(舞劍器)

무곡(舞曲)의 이름이다.

 

무경(無經)

정해진 원칙이 없이 멋대로 하는 것을 이른다.

 

무계농수(武溪隴水)

무계심(武溪深) 농수음(隴水吟). 모두 옛날의 악곡 이름으로 무계심(武溪深)은 한() 나라 때 마원(馬援)이 지었다고 하는데 이별하면서 부르는 노래이며, 농수음(隴水吟)은 농두음(隴頭吟)으로 한 나라의 횡취적곡(橫吹笛曲)이며, 이연년(李延年)이 지었다고 한다.

 

무계로(武溪路)

궁벽한 고장에서 고달프게 군사 작전에 종사하는 것을 말한다. () 나라의 복파 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남정(南征)할 때 무계심(武溪深)이란 노래를 지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가도 가도 끝없는 무계 골짜기, 새도 날지 못하고 짐승도 살지 못하는 곳, 아 장독(瘴毒) 가득한 이 무계 골짜기여[滔滔武溪一何深 鳥飛不度 獸不能臨 嗟哉武溪多毒淫]”라는 표현이 있다. 고금주(古今注)音樂

 

무고(武庫)

옛날에 병기를 관장하던 관서이다.

왕발(王勃)등왕각서(滕王閣序), ‘붉은 번개 맑은 서리는 왕장군의 무고이다[紫電淸霜 王將軍之武庫].’라는 말이 있다.

 

무고무필(無固無必)

공자(孔子)는 고()도 없고 필()도 없었다 한다. 논어(論語)』 「자한(子罕)

 

무고삼라(武庫森羅)

() 나라 두예(杜預)가 마치 각종 병장기가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는 무고[森羅武庫]처럼 모르는 것이 없다 하여 두무고(杜武庫)’라는 별명을 얻었던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34 두예열전(杜預列傳)

 

무고자전광(武庫紫電光)

무고는 즉 무기고에는 없는 것 없이 다 갖추어져 있으므로 매우 다재다능함을 비유한 말이고, 붉은 번갯빛이란 바로 곧은 절조를 비유한 것으로, () 나라 왕발(王勃)등왕각서(滕王閣序)자줏빛 번개와 맑은 서릿발 같은 절조는 왕 장군의 무고로다.[紫電淸霜 王將軍之武庫]”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무골호인(無骨好人)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 아주 순하고 남의 비위에 두루 맞는 사람을 이른다.

 

무공년(武公年)

무공은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군주로 이름은 화()인데, 55년 간 재위하고 95세에 별세하였다. 그는 선정을 베풀었으며, 95세가 되어서도 벼슬아치들에게 나의 잘못을 경계하라.”고 하였는바, 시경(詩經)대아(大雅) ()과 소아(小雅) 빈지초연(賓之初筵)등이 그의 작품이라 한다.

 

무공향(無功鄕)

술에 취해 잠들었다는 뜻이다. () 나라 왕적(王績)의 자()가 무공(無功)인데, 술을 몹시 좋아하여 취향기(醉鄕記)라는 주보(酒譜)를 저술하였다. 후세에서는 이를 인하여 무공향취향(醉鄕)’이란 의미로 쓰게 되었다. 신당서(新唐書)196 隱逸列傳 王績

 

무곽공리렴(無槨孔鯉殮)

공리는 공자(孔子)의 아들인데, 그가 죽었을 적에 가난하여 외곽(外槨)이 없이 내관(內棺)만 사용하여 장사지냈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무광(務光)

은탕(殷湯) 때의 은자(隱者)로서, ()임금이 천하로써 양보하였으되 거절하고 요수(蓼水)에 투신자살하였다.

 

무구(無求)

세상을 따라 옮겨 다니는 자는 모두 구하는 것이 많다.

 

무구포(無口匏)

아귀가 없는 호리병박. () 나라의 어진 정승 이항(李沆)이 매우 과묵했는데, 사람들이 그를 무구포라 했다.

 

무국(牡菊)

씨가 없는 국화. 태워서 재로 만들어 뿌리면 개구리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본초(本草)

 

무궁(無窮)

고생하지 않는다.

 

무극옹(無極翁)

무극(無極)을 의인화한 말이다. 참고로 주자(朱子)의 탁청(濯淸)이란 시에 무극옹을 만나지 못한다면, 깊은 나의 마음을 마침내 누가 알아주리.”라고 하였다.

 

무근지설(無根之說)

근거 없는 이야기. 헛소문을 이른다.

 

무기(無紀)

규율이 없다는 것은 물이 이리저리 치며 세차게 흐르는 모습을 말한다.

 

무기사(繆其辭)

말을 빙 둘러서 쉽게 알 수 없게 하다. ‘()’()’와 같은 뜻으로 얽다’, ‘둘리다의 뜻이다.

 

무기영(戊己營)

천간(天干)으로 방위를 배치할 때 갑을(甲乙병정(丙丁경신(庚辛임계(壬癸)는 다 동···북의 정당한 방위가 있으나 무기는 중앙으로 빠져나가 일정한 소속이 없다 하여 변방의 진영을 말한다.

 

무기영(戊己營)

() 나라 때 서역(西域)에 주둔하는 군영(軍營)을 말한다. 무기는 곧 오행상으로 중앙(中央)에 해당하기 때문에 중앙에서 사방을 진압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무난(武亂)

무왕(武王)의 충성스런 신하들이란 뜻이다. 난신(亂臣)은 나라를 잘 다스리는 신하를 뜻하는데, 무왕(武王)이 이르기를 나에게는 난신 열 사람이 있으나, 모두 마음과 덕을 같이하고 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서경(書經)』 「태서(泰誓), 논어(論語)』 「태백(泰伯)

 

무녀(婺女)

무녀성(婺女星)으로, 군주(郡主)를 가리킨다. 이 별은 여수(女宿)로서 포백(布帛)을 맡았다고 한다.

 

무녀성(婺女星)

직녀성(織女星) 남쪽의 여수(女宿)이다.

 

무념무상(無念無想)

일체의 상념을 떠나 마음이 빈 듯이 담담한 상태. 아무 잡념이 없이 자기를 잊음을 이른다. / 유의어: 삼매경(三昧境), 물심일여(物心一如), 물아일체(物我一體), 명경지수(明鏡止水), 무장무애(無障無礙).

 

무단(無端)

까닭없이. 뜬금없이. 단정하지 않음을 이른다.

 

무단미(無端米)

고려 공민왕(恭愍王) , 국가 용도(用度)가 부족하자 정한 세액(稅額) 외에 쌀과 콩을 백성들로부터 가세(家勢)에 따라 차등을 두어 더 거두던 일을 이른다.

 

무당리(武當里)

중국 양양부(襄陽府)에 있는 산 이름인데 풍경이 아름답다 한다. 또 무당현(武當縣)이 있다.

 

무덕(武德)

당 고조(唐高祖)의 연호이다. 태평성대.

 

무도(舞翿)

꼭대기를 새털로 장식한 기()의 일종으로,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출 때 춤추는 자가 가지는 것이다.

 

무도환문(無道桓文)

제환공(齊桓公진문공은 모두 패도(覇道)의 군후(君侯)였으므로, 왕도를 주장하는 공자(孔子)는 그들을 들어 말하지 않았다[仲尼之徒無道桓文之事者, 是以後世無傳焉].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무동인소(撫銅人笑)

구리로 주조하여 궁문(宮門)과 묘문(廟門) 앞에 세웠던 동상이다. 계자훈(薊子訓)이 장안(長安) 동편에 있는 패성(霸城)에서 한 노옹(老翁)과 만나 함께 동인을 어루만지며 우리가 이를 주조한 것을 목격한 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5백 년이 되었다.”고 말하고 크게 웃었다 한다. 후한서(後漢書)』 「방술전(方術傳)

 

무동적(撫銅狄)

동적은 구리로 주조하여 만든 인형이다. 후한(後漢) 때의 신선술(神仙術)을 배웠던 계자훈(薊子訓)은 장안(長安) 동쪽 패성(霸城)에서 한 노인과 동적을 어루만지며 이것을 만들 때 보았는데 벌써 5백년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한다. 신선전(神仙傳)卷五

 

무두어(無頭語)

해결의 실마리를 전혀 찾을 수 없는 선불교(禪佛敎)의 이른바 화두(話頭)를 가리킨다.

 

무등산두편석횡(無等山頭片石橫)

광주(光州) 무등산 서쪽 양지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 개가 즐비하게 서 있어 일명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하는데, 하늘이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할 때나 오랫동안 비가 오다가 개려고 할 때에는 산이 우는 소리가 수십 리 밖까지 들린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35 광산현(光山縣)

 

무란(瞀亂)

어지러움을 이른다.

 

무량겁(無量劫)

광대한 뜻인데 섭대승론석인(攝大乘論釋人)어느 물건과 비유하고 추리하여 알아 낼 수 없는 것을 무량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무려(無閭)

만주(滿洲)에서 중국 본부로 가는 길이다. 요하(遙河) 서쪽 북방에 있는 산인 의무려산(醫無閭山)을 말한다.

 

무렴발건(無斂髮巾)

머리를 깎은 오랑캐족이 차지하여 고유의 문물제도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무론고여하(無論高與下)

정월 대보름날 달맞이를 할 때 달이 떠오를 때의 형체, 대소, 용부(湧浮), 고하(高下) 등을 보고 한 해 농사의 풍흉을 미리 점쳤다.

 

무루(無漏)

불교(佛敎) 용어로서 번뇌(煩惱)가 떠나감을 말한다.

 

무루자(無漏子)

나무가 곁가지 하나 없이 곧 바로 삼사십 길을 커 올라가 맨 꼭대기에 가서야 여남은 가지가 돋고 5년 만에 과실 하나가 여는데 아주 크고 달며, 일명 천년조(千年棗만세조(萬歲棗해조(海棗)라고도 한다고 한다. 남방초목상(南方草木狀)

 

무루정(蕪蔞亭)

광무제가 일찍이 적병(賊兵)에게 쫓기어 도망하다가 무루정에 이르러 배가 고팠는데 풍이(馮異)가 콩죽 한 그릇을 얻어다 바쳤더니, 뒷날 황제가 된 후에 풍이를 보고 무루정 콩죽을 내가 어찌 잊으랴.”라 하였다.

 

무릉(茂陵)

무릉은 무제(武帝)의 능으로 무제를 가리킨다.

중국 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에 있는 지명이다. 한 무제(漢武帝)의 능이 이곳에 있으므로 이렇게 이름하였다 한다.

 

무릉(武陵)

() 나라 태원(太元) 연간에 무릉(武陵)에 사는 한 어부(漁父)가 배를 타고 시내를 따라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 복숭아나무 숲이 있는 데를 지나서 굴을 발견하고 그 안에 들어가 보니 선경(仙境)이 있었다는 고사가 있다. 도정절집(陶靖節集)卷六 도화원기(桃花源記)

 

무릉다병(茂陵多病)

무릉은 한 무제(漢武帝)의 능인데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병으로 사직하고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여기에 비유하여 쓴 말이다.

 

무릉도원(武陵桃源)

속세(俗世)를 떠난 별천지(別天地).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적인 중국의 명승지를 일컫는 말로 곧 속세를 떠난 별천지를 말한다. 도연명(陶淵明)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유래한 말이다. / 유의어: 이상향(理想鄕).

 

무릉백발선(茂陵白髮仙)

무릉은 한 무제(漢武帝)의 능호이고, 백발(白髮)의 신선 또한 한 무제를 뜻한 말로, 한 무제가 죽은 뒤 능령(陵令) 설평(薛平)에게 현몽하여 이르기를 내가 죽기는 했지만 너의 임금이거늘, 어찌하여 이졸(吏卒)들이 내 능에 올라와 칼을 갈도록 하느냐?”라 하였으므로, 설평이 그 사실을 추문한 결과 과연 이졸들이 능의 방석(方石)에 늘 칼을 갈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무릉생추초(茂陵生秋草)

무릉(茂陵)은 한 무제(漢武帝)의 능이며, 그가 신선을 구하다가 되지 못하고 죽어서 땅에 묻혔다는 말이다.

 

무릉선(武陵船)

()나라 태강(太康) 연간에 무릉(武陵)의 어부(漁父)가 배를 타고 시내를 따라 올라가다가, 수원(水源)에 이르러 산에 구멍이 뚫린 데로 들어간 즉, 복숭아꽃 속에 촌락이 있었는데, ()나라 때에 피란하여 들어온 뒤에 5·6백 년 동안 세상과 통하지 않고 살아왔다 한다. 이것이 무릉도원이다.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있다.

 

무릉선촌(武陵仙村)

도연명(陶淵明)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이른바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서 속세와 떨어져 있는 이상적인 별세계(別世界)를 말한다.

 

무릉소갈객(茂陵消渴客)

() 나라 때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사마상여가 일찍이 소갈병이 들어 관직을 사퇴하고 이 무릉현(茂陵縣)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무릉유초(茂陵遺草)

() 나라의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남긴 봉선(封禪)에 대한 글을 말한다. 상여가 병이 들어 효문원 영(孝文園令)을 그만두고 무릉(茂陵)에서 여생을 보냈으므로, 상여의 별칭으로 보통 무릉을 쓰게 되었다. 그가 죽고 난 뒤에 한 무제(漢武帝)가 사신을 보내 그의 저술을 모두 가져오게 하였는데, 오직 황제에게 봉선(封禪)하기를 권하는 글 한 편만이 남아 있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사기(史記)117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무릉인의운운대(茂陵仁義云云對)

무릉(茂陵)은 한무제(漢武帝)이다. 무제가 조정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내가 이러이러하려 한다.”라 하니, 급암(汲黯)이 나서며 폐하께서 안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 경으로 인의(仁義)를 베풀려 하시니 어찌 요순(堯舜)이 정치를 본받으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무릉제주(茂陸題柱)

무릉은 한()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만년(晩年)에 살았던 곳으로, 이후 사마상여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사마상여가 처음에 촉() 땅을 떠나 장안(長安)으로 향할 적에, 성도(成都)의 승선교(昇仙橋) 다리 기둥에 시를 적어 놓기를 화려한 고관의 수레를 타지 않으면 이 다리를 건너서 돌아오지 않으리라.”라고 했던 고사가 있다. 화양국지(華陽國志)』 「촉지(蜀志)

 

무리간화(霧裡看花)

두보(杜甫)의 시에 봄 물결에 배를 띄우니 하늘 위에 앉은 듯 늙은이 꽃구경이 안개 속의 그림일러라.”라고 하였다.

 

무마(舞馬)

명황잡록(明皇雜錄)임금이 말 1백 필을 뽑아 춤을 가르쳤는데 좌우부(左右部)로 분류하여 각기 모가(某家)의 교마(驕馬)’라는 명칭을 붙였고 그 곡()경배악(傾柸樂)’이라 하여 10곡이나 된다. 말들에게는 다 금수(錦綉)로 옷을 지어 입히고 금()으로 고리()를 만들어 갈기 위에 장식했다. 풍악이 시작되면 말들이 머리를 들고 꼬리를 치면서 종()으로 횡()으로 음절(音節)을 맞췄다. 또 삼중(三重)의 목탑(木榻)을 설치한 다음 말들을 그 위에 올려놓고 빙빙 돌면서 그 묘()를 더욱 다하게 했다. 안녹산이 입경(入京)하여 수십 필을 범양(范陽)으로 몰아갔고, 녹산이 패한 뒤에는 전숭사(田崇嗣)의 군()으로 들어갔는데, 춤추는 재주를 가진 줄은 알지 못했다. 하루는 큰 잔치를 베풀고 풍악이 시작되었다. 말들이 풍악 소리를 듣고 춤을 추자 말 다스리는 사람[廐人], 요괴(妖怪)스럽다 하여 쳐서 죽기에 이르렀다.”라 하였다.

 

무마곡(舞馬曲)

당현종이 말 백필에게 춤을 가리켜서 근정루(勤政樓) 아래에서 춤추게 하였는데 그 악곡 이름이 경배곡(傾杯曲)이다.

 

무마기(巫馬期)

공자(孔子)의 제자이다.

 

무망(無妄)

()은 망()과 통하므로 기망(期望)이 없이 얻는 것을 이른다.

무망지재(無妄之災)의 준말로, 뜻밖의 재난이란 뜻이다. 주역(周易)』 「무망괘(无妄卦)63효사(六三爻辭)매어놓은 소를 행인이 가져갔는데 고을 사람이 곤욕을 치른다[或繫之牛 行人之得 邑人之災].”에서 나온 말이다.

예기치 않게 걸린 병을 말한다. 주역(周易)』 「무망괘(无妄卦)구오(九五)예기치 않았던 병이다. 약을 쓰지 말라. 기쁨이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무망지복(毋望之福)

바라지 않아도 자연히 들어오게 되는 행복을 이른다.

 

무망지재(無妄之災)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재앙을 받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무망괘(无妄卦)육삼효(六三爻)애매하게 당하는 재앙이니, 누군가가 매어 둔 소를 길 가는 사람이 훔쳐갔건마는 마을 사람들이 누명을 쓰게 된다[無妄之災 或繫之牛 行人之得 邑人之災]”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무망채(無妄瘥)

주역(周易)육심사괘 중의 하나인 무망괘(无妄卦)구오(九五)약을 쓰기도 전에 병이 나을 것이다.”에서 인용하였다.

 

무명(無名)

노자(老子)의 도가사상에서 나온 말로 천지의 모든 만물은 물체가 형성되고 나서 인간에 의해 규정지어 진 것임으로 그 이전의 상태를 무명이라 한 것이다. 그럼으로 도란 것도 무명인 것이다. 인위적인 예악, 인의 등을 반대하는 노자의 무명론은 유가의 정명론(正名論)과 대립된다.

 

무명(無明)

불교 용어인데 어리석거나 지식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무명굴(無明窟)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계(無明界)를 이른다. 즉 진리를 알지 못하는 세계란 뜻이다.

 

무무(武舞)

궁중에서 아악(雅樂)을 할 때에 악생(樂生)들이 무()를 상징하는 옷을 입고 추는 일무(佾舞)이다.

 

무무(懋懋)

힘쓰는 모양.

 

무미(蕪蘼)

잎에서 향기가 나는 궁궁이[芎藭]의 싹을 가리킨다.

 

무미랑(武媚娘)

당 태종(唐太宗)이 사심(士彠)의 아름다운 딸을 불러들여 재인(才人)으로 삼았는데, 그 뒤에 고종(高宗)의 황후(皇后; 則天武后)가 되어 당실(唐室)을 망쳤다.

 

무미만굴(霧迷蠻窟)

한여름철 남쪽 변방의 장기(瘴氣) 어린 지독한 운무를 말한다. () 나라 마원(馬援)이 교지국(交趾國)을 남정(南征)했을 때 독한 증기(蒸氣)가 하늘까지 치솟아 소리개가 물 속으로 툭툭 떨어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동관한기(東觀漢記)』 「마원(馬援)

 

무병자구(無病自灸)

질병이 없는데 스스로 뜸질을 한다는 말로, 불필요한 노력을 하여 정력을 낭비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공자(孔子)의 친구 유하계(柳下季)에게는 도척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도척은 천하의 큰 도적으로 9천 명의 졸개를 거느리고 온갖 잔인하고 포악한 짓을 자행하여, 그가 지나가면 큰 나라에서는 성을 지키고, 작은 나라에서는 농성하여 난을 피하는 형편이었다. 공자는 천하에 도척이 있다는 것은 유하계의 수치일 뿐 아니라 인의와 도덕을 가르치는 자신에게도 큰 수치라고 생각하여 그를 설득하러 찾아갔다. 공자가 도척의 산채로 찾아가 만나기를 청하자, 도척은 공자의 위선을 비웃으며 만나기를 거절했다. 공자가 재삼 간청을 하고서야 만나기를 허락한 도척은 공자를 보고, “네가 말하는 것이 내 뜻에 맞으면 살아남을 것이고 내 뜻에 거슬리면 죽음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며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공자는 도척의 기세에 눌려 한껏 도척을 칭찬하였지만, 오히려 도척은 그러한 공자의 비굴을 들어 칼자루를 만지며 공자를 꾸중하였다. 놀란 공자는 설득은커녕 오히려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어 한달음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는 수레에 올랐지만 세 번이나 고삐를 잡으려다 놓치고, 눈은 멍하여 보이지도 않았으며,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 수레 앞의 가로막대에 엎드린 채 숨도 쉬지 못할 정도였다. 그 길로 돌아와 노()나라 동문 밖에서 유하계를 만났다. 유하계가 요즘 볼 수가 없더군. 거마(車馬)를 보니 여행을 갖다온 모양인데, 혹 도척을 만나고 온 것은 아닌가?”라고 묻자, 공자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면서 그렇다고 하였다. 유하계가 다시 그래, 도척이 내가 전에 말한 바와 같지 않던가?”라고 하니, 공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맞네. 나는 이른바 병도 없이 스스로 뜸질을 한 격이네[丘所謂無病而自灸也]. 허겁지겁 달려가 호랑이 머리를 쓰다듬고 호랑이 수염을 가지고 놀다가 하마터면 호랑이 주둥이를 벗어나지 못할 뻔 했네.”라고 하였다. 장자(莊子)』 「도척편(盜跖篇)

 

무복(誣服)

죄 없이 핍박에 못 이겨 죄를 인정하다.

 

무본(無本)

가도(賈島)를 말한다.

 

무봉연우(無捧硯牛)

술과 안주를 제공할 사람이 없음을 이른다. / 유의어: 우모봉연(牛某捧硯)

 

무부(碔砆)

옥돌. 즉 옥과 비슷한 아름다운 돌의 한 가지이다.

 

무부리현(無復理絃)

춘추시대(春秋時代) 때 금()을 잘 탔던 백아(伯牙)라는 사람이, 그의 금 소리를 알아주던 벗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금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다 하여 금의 줄을 모두 끊고 다시는 금을 타지 않았다는 고사를 차용한 것으로, 지음(知音)의 벗이 죽었음을 말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무부잔기격장도(無復殘機激壯圖)

맹자(孟子)가 어릴 때 학문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어머니가 때마침 베를 짜고 있다가 칼로 베를 끊어버리며 말하기를 자식이 학문을 폐하는 것은 내가 이 베를 끊어버리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는 것과 후한의 악양자(樂羊子)가 멀리 나가 글을 배우다가 집이 그리워 1년 만에 돌아오자 그의 아내가 칼을 들고 베틀로 달려가 역시 학문을 중단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하였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흔히 부인의 덕을 찬양할 때 인용하는 말이다. 열녀전(列女傳)卷一 母儀 鄒孟軻母·후한서(後漢書)卷八十四 樂羊子妻傳

 

무불간섭(無不干涉)

간섭하지 않는 일이 없다. 함부로 남의 일에 간섭함을 말한다.

 

무불위(無不爲)

만물을 생육한다는 뜻이다. 도가의 무위사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연의 변화에 순응한다는 뜻이다.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정정함을 지켜 나간다면, 만물은 장차 자화하여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무불통지(無不通知)

환히 통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음. 무슨 일이든 모르는 것이 없음을 이른다. 무소부지(無所不知)

 

무비의주식(無非議酒食)

부녀자로서의 법도를 지켰다는 말이다. 시경(詩經)소아(小雅) 사간(斯干)딸아이를 낳아서는 땅에다 뉘어 놓고, 포대기로 감싸주며 실패 가지고 놀게 하네. 비난이나 칭찬받을 일을 함이 없이, 그저 술과 음식 마련할 의논만 하는지라, 부모님 걱정 끼칠 일이 없으리라[乃生女子 載寢之地 載衣之裼 載弄之瓦 無非無儀 唯酒食是議 無父母詒罹].”라고 하였다.

 

무사(蕪史)

()의 탈탈(脫脫)과 구양현(歐陽玄) 등이 편찬한 송사(宋史요사(遼史금사(金史)를 가리킨다. 이들 삼사(三史)는 정통(正統)과 윤통(閏統)이 없으므로 부당하다 하여 명()의 가유기(柯維騏)는 새로 송사신편(宋史新編)을 찬하여 송()을 정통으로 하고 요(()을 부록으로 하였다.

 

무사(無似)

편지글에서, 아버지나 할아버지만 못한 자식이란 뜻으로, 스스로를 겸손하게 가리키는 말이다. / 인용: 重答張籍書(한유)

 

무사(膴仕)

후한 봉록을 받는 높은 벼슬이란 뜻이다. 시경(詩經)소아(小雅) 절남산(節南山)자질구레한 인척들은 고위직에 등용하지 말라[瑣瑣姻亞, 則無膴仕.]”라고 하는 시구에 보인다. ()은 사위의 아버지이고, ()는 사위끼리 서로 부르는 말이며, ()는 후()하다는 뜻이다. / 유의어: 漁村記(권근)

 

무사송(無邪頌)

공자(孔子)시경(詩經)에 있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思無邪].”는 말을 인용하여 () 삼백 편의 내용을 한마디로 덮을 수 있으니, 그것은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말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시경(詩經)노송(魯頌) (), 논어(論語)』 「위정(爲政)/ 인용: 무사시폐훈(無邪詩蔽訓), 무사주시(無邪周詩)

 

무사음(無事飮)

할 일이 없어서 마시는 술을 이른다.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공손연(公孫衍)어째서 술을 그렇게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을 받고서 심심해서 그렇다[無事也].”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장의열전(張儀列傳)

 

무산고(巫山高)

초 양왕(楚襄王)이 일찍이 고당(高唐)에서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여인이 와서 저는 무산(巫山)의 여자로서 임금님이 이곳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왔으니, 침석(枕席)을 같이 해주소서.”하므로, 양왕이 그 여인과 하룻밤을 잤는데, 다음날 아침에 그 여인이 떠나면서 저는 무산의 양지쪽 언덕에 사는데, 매일 아침이면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됩니다.”고 했다는 고사를 근거로 하여 노래한 것이다.

 

무산대관(巫山臺觀)

성천의 이름난 관소(館所)와 누각을 가리킨다. 특히 강선루(降仙樓) 아래에는 대동강(大同江)이 흐르고, 강 건너편에 유명한 무산(巫山) 12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예로부터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로 꼽혀 왔다.

 

무산모우(巫山暮雨)

남녀의 정사(情事)를 비유한 말이다. 초 양왕(楚襄王)이 일찍이 고당(高唐)에서 놀다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여자가 와서 저는 무산의 여자로 임금님이 여기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왔으니, 침석(枕席)을 같이 해 주십시오.”하므로 임금은 하룻밤을 같이 잤는데, 다음날 그 여자가 떠나면서 저는 무산의 양지쪽 높은 언덕에 사는데, 매일 아침이면 구름이 되고 저녁에 비가 됩니다.”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송옥(宋玉)』 「고당부(高唐賦)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峯)

망하(望霞취병(翠屛조운(朝雲송만(松巒집선(集仙취학(聚鶴정단(淨壇상승(上昇기운(起雲비봉(飛鳳등룡(登龍성천(聖泉)인데, 바로 선경을 말한다. 방여승람(方輿勝覽)

 

무산우운(巫山雨雲)

초 양왕(楚襄王)이 고당(高唐)에서 놀다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부인이 와서 여기에 임금님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왔으니, 원컨대 침석을 같이 해 주십시오.”하므로, 하룻밤을 같이 잔 뒤, 이튿날 아침에 부인이 떠나면서 저는 무산의 양지쪽 높은 언덕에 사는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됩니다.”하였다는 고사이다. 송옥(宋玉)高唐賦

송옥(宋玉)의 고당부서(高唐賦序)()은 무산(巫山)의 남쪽 고구(高丘)의 깊숙한 데 있어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며, 아침저녁으로 양대(陽臺)의 아래서 보낸다.”하였으므로, 뒷사람이 이를 근거하여 운우(雲雨)로써 남녀의 정사에 비하였다.

초 회왕(楚懷王)의 고사. 고당부주(高唐賦注)시집가기 전에 죽은 적제(赤帝)의 딸 요희(姚姬)를 무산 남쪽에 매장한 때문에 무산의 계집이라 전해 왔다. 회왕이 그곳에 출유(出遊)하여 낮잠을 자는데 꿈속에 한 신녀(神女)가 나타나, 무산의 계집이라 자칭했다. 드디어 그녀와 교합(交合)하고는 그곳에 관()을 짓고 이름을 조운(朝雲)이라 했다.”하였다.

 

무산음금수(巫山吟錦樹)

두보(杜甫)의 부수시(復愁詩) 십이 수(十二首) 가운데 제일수(第一首)인가의 연기는 궁벽한 곳에서 나오고 범의 자취는 새 발자국이 보이네[人煙生處僻 虎跡過新蹄]”라 하였고, 제십수(第十首)무산엔 아직 아름다운 나무가 있고 남국엔 또 누런 꾀꼬리로다[巫山猶錦樹 南國且黃鸝]”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두소릉집(杜少陵集)卷二十

 

무산일단운(巫山一段雲)

사조(詞調) 또는 악부(樂部)의 이름이다. 본문의 시체(詩體)무산일단운(巫山一段雲)’의 체로 지은 것이라는 뜻이다.

 

무산지몽(巫山之夢)

무산(巫山)의 꿈이란 뜻으로, 남녀간의 밀회(密會)나 정교(情交)를 말한다. 특히 미인과의 침석(枕席)을 말하기도 한다. 陽臺, 陽臺不歸之雲

 

무색(無色)

무색계로서 색계 위에 있으며 물질세계를 떠난 순 정신세계를 말한다.

 

무생(無生)

무생법인(無生法印)의 준말로서 즉 불법(佛法)을 말한다. 무생멸(無生滅) 또는 무생무멸(無生無滅). 무생(無生)의 이치는 삶도 죽음도 없는 이치를 말한다.

 

무생(無生)

생명이 없음. 인간은 그 원초를 살펴보면 원래 생명이라는 게 없었다. 생명만 없었던 게 아니라 형체가 없었고, 형체만 없었던 게 아니라 작용하는 기()도 원래는 없었으므로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다시 그 원초 상태로 돌아가는 순환의 필수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장자(莊子)』 「지락(至樂)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다시는 육신을 받아서 태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천지 만물이 본래부터 생()과 멸()이 없음을 의미한 말로,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무생을 배우는 것이 제일이니, 무생이 바로 무멸이다[不如學無生 無生卽無滅].”라고 하였다.

 

무생법인(無生法印)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삼법인(三法印)의 하나로, 만물이 무생(無生)임을 깨달아 마음의 평정(平靜)을 얻는 것이다.

 

무생인(無生忍)

무생법인(無生法忍)과 같은 뜻으로,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법성(法性)을 인지(忍知)하고, 거기에 안주(安住)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무서작경(無棲鵲驚)

백성들이 평화롭게 산다는 말이다. 당서(唐書)』 「형법지(刑法志)그 전에는 대리옥(大理獄)에 살기가 크게 성한 탓으로 새들도 오지 않더니, 오늘에 이르러서는 대리옥 뜰앞의 나무에 까치가 집을 짓고 산다.”고 한 고사에서 인용하였다.

 

무석(無錫)

강소성(江蘇省)에 소속된 지명(地名)으로 오현(吳縣) 서북에 위치하였다.

 

무선(茂先)

() 나라 장화(張華)의 자()이다. 진 무제(晉武帝) 때 하늘의 두우(斗牛) 사이에 자기(紫氣)가 어려 있자, 장화가 뇌환(雷煥)에게 부탁하여 용천(龍泉), 태아(太阿) 두 보검이 묻혀 있는 곳을 찾아내 발굴하게 했던 고사가 전한다. 진서(晉書)36

 

무성(武城)

지금의 산동성 비현(費縣) 경내의 남무성(南武城)으로 노나라 계손씨(季孫氏)의 봉읍이었다.

 

무성금(武城琴)

무성(武城)은 노()의 변읍이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 읍재(邑宰)가 되었는데, 예악(禮樂)으로 고을을 다스렸기 때문에 공자(孔子)가 그 고을에 갔을 때 현가(弦歌)소리를 듣고 기뻐하였다. 논어(論語)』 「양화(陽貨)

 

무성담(武城澹)

담대멸명(澹臺滅明). 공자(孔子)의 제자. 얼굴이 못생겼으나 덕행을 닦아 유명해졌다 한다.

 

무성취(無聲臭)

도의 지극함을 말한다. 성인과 천도는 견줄 대상이 없는 것이므로, 견줄 수 있다면 지극한 것이 아니다. 오직 냄새도 소리도 없는 지경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중용(中庸)33

 

무성칭(無星稱)

저울에 달아 볼 것도 없이 마음속으로 다 안다는 말이다. 덕청(德淸)의 산거시(山居詩)동기(動機)에 맞추어 눈금 없는 저울만을 사용하고, 골동품이 좋아서 다리 부러진 다당(茶鐺)만 남겨 두었네[酬機但用無星稱 娛老惟留折脚鐺].”라고 한 글귀가 있다.

 

무성현단(武城絃斷)

고을을 잘 다스려 백성을 편안케 해 주던 어진 수령이 떠나갔다는 뜻이다. () 나라의 자유(子遊)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예악(禮樂)으로 가르쳤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였다고 한다. 논어(論語)』 「양화(陽貨)

 

무소부지(無所不知)

모르는 것이 없음을 이른다.

 

무소불능(無所不能)

능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이른다.

 

무소불위(無所不爲)

하지 못하는 바가 없음. 즉 못할 것이 없음. 이 말은 흔히 권세(權勢)를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 또는 그러한 경우에 쓴다.

 

무수(武遂)

지금의 하북성 서수현(徐水縣) 서북이다.

 

무수지정(舞獸之庭)

당요(唐堯)가 천하를 잘 다스려, 그의 뜰아래 온갖 짐승과 봉()이 와서 춤추고, 토기(土器석기(石器)의 온갖 음악이 아뢰어졌다 한다.

 

무숙(茂叔)

송 나라 때의 유학자인 주돈이(周敦頤)를 가리킨다. 주돈이의 자가 무숙이다.

임숙영(任叔英)의 자()이다.

 

무승지칭(無蠅之秤)

저울에 달아 볼 것도 없이 마음속으로 다 안다는 말이다.

 

무시(無始)

시작도 끝도 없이 순환 반복하는 현상계를 주재하는 절대적인 도()의 경지를 말한다. 근사록(近思錄)1권 도체류(道體類)동정은 끝이 없고 음양은 시작이 없나니, 도를 아는 자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이치를 제대로 알겠는가[動靜無端 陰陽無始 非知道者 孰能識之].”라고 한 정이천(程伊川)의 말이 실려 있다.

 

무시공(無是公)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자허(子虛오유 선생(烏有先生무시공 등 세 가공인물을 등장시켜 자허부(子虛賦)를 지었는데, 그 중에 무시공은 자신을 지칭한 것이다.

 

무신군(武信君)

사기에 무신군의 칭호를 갖은 사람은 세 사람이 있다. 항우(項羽)의 숙부인 항량(項梁), 소진(蘇秦)과 함께 종횡가(縱橫家)를 대표했던 장의(張儀)와 진나라 폭정에 항거하여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난을 일으킬 때 같이 참여한 무신(武臣)이다. 무신은 진승에 의해 장군으로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 땅을 점령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무신군(武信君)이라고 칭하고 조왕(趙王)이 되었으나 후에 부하 장수인 이량(李良)에 의해 살해되었다.

 

무심가입백구군(無心可入白鷗群)

바닷가에 사는 어느 사람이 매일 갈매기와 친하게 놀아서 갈매기가 사람을 피하지 않았더니,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갈매기를 한 번 갖고 오너라. 내가 구경해야겠다[吾聞漚鳥皆從汝遊, 汝取來吾玩之].”라 하였다. 이튿날 바닷가에 나간즉 갈매기들이 공중에만 날고 날아오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갈매기를 잡겠다는 기심(機心)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일에는 기심을 잊었기[忘機] 때문에 갈매기와 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열자(列子)』 「황제(黃帝)

 

무쌍장(無雙將)

() 나라의 명장인 우북평 태수 이광이 천하무쌍의 장수라는 찬탄을 받은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卷一百九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무아도취(無我陶醉)

즐기거나 좋아하는 것에 정신이 쏠려 취하다시피 되어 자신을 잊어버리고 있는 상태를 이른다. / 유의어: 무아지경(無我之境)

 

무아묘(巫娥廟)

무산 신녀(巫山神女)의 사당이다. 초 양왕(楚襄王)이 일찍이 고당(高唐)에서 놀다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여자가 와서 저는 무산의 여자로서 고당의 나그네가 되었는데 임금님이 여기 계시다는 말을 듣고 왔으니, 침석(枕席)을 같이 해 주시기 바랍니다.”라 하므로 임금은 하룻밤을 같이 잤는데, 아침에 여자가 떠나면서 저는 매일 아침이면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됩니다.”라 하기에 지켜보니 과연 그 말과 같으므로 임금이 거기에 조운묘(朝雲廟)를 건립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송옥(宋玉)』 「고당부(高唐賦)

 

무아지경(無我之境)

마음이 한 곳에 온통 쏠려 자기를 잊고 있는 경지를 이른다.

 

무안(武安)

지금의 하북성 무안현(武安縣) 서북의 전국 때 조나라의 성읍이다.

 

무안옥와진(武安屋瓦振)

무안은 진() 나라 장수 백기(百起)가 조() 나라 장수 이목(李牧)을 격파한 성인데, 그때 큰 바람이 불어 가옥(家屋)이 대파(大破)됐다. 사기(史記)

 

무안왕묘(武安王廟)

무안왕은 관우(關羽)로 관왕묘(關王廟)를 가리킨다.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 무안후 전분은 효경제의 부인 왕태후의 이부동모제다. 연왕 장도(臧荼)의 손녀인 장아(臧兒)가 왕중(王仲)과 혼인하여 그 사이에서 개후(蓋侯) 왕신(王信)과 왕태후 지()를 낳고 왕중이 죽자 후에 장릉(長陵) 전씨에게 개가하여 전분(田蚡)과 전승(田勝)을 낳았다.

 

무안후(武安后)

한 효경후(漢孝景后) 전씨(田氏)의 동생인 전분(田蚡)의 봉호이다. 왕실의 외척으로서 두영(竇嬰)의 시중을 들다가 태위(太尉)로 제수된 뒤 두태후가 죽고 나자 승상에 이르러 천하에 권위를 떨쳤다. 두영과 관부(灌夫)를 무함하여 죽게 하였다. 사기(史記)卷一百七

 

무앙(無央)

무궁(無窮)과 같은 뜻이다. 곽거병(霍去病)의 금가(琴歌)국가가 편안하니 즐거움이 끝없도다[國家安寧 樂無央兮].”라 하였다.

 

무애(無涯)

넓어서 가이 없는 것으로 사람의 지혜를 말한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

 

무양(無恙)

근심이 없다는 말이다. 후세에 병()이 없다는 뜻으로 전용되었다.

 

무양(舞陽)

무양(武陽)이라고도 하며 하남성 엽현(葉縣) 동남의 고을이다.

 

무양(舞陽)

번쾌(樊噲)를 이른다. 무양후(舞陽侯). ()이 망한 후 유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할 때 큰 공을 많이 세웠다. 사기(史記)卷九十五

 

무양(巫陽)

상고 시대 신무(神巫)의 이름이다. 그는 점을 쳐서 사람의 생사존망과 화복수요를 사전에 귀신같이 알아맞혔다고 한다. 여무(女巫)로 상제의 명을 받고 혼백을 주관하는 일종의 저승사자이다. 초사(楚辭)』 「초혼(招魂)상제가 무양에게 이르기를 하토(下土)에 있는 사람을 불러다 나를 보좌하게 할 테니 그대는 이산(離散)된 그의 혼백(魂魄)을 찾아 나에게 데려오도록 하라.’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소식(蘇軾)의 시 징매역통조각(澄邁驛通潮閣)’餘生欲老海南村 帝遣巫陽招我魂이라는 구절이 있다.

 

무열사(武烈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선에 대한 구원병의 파견을 적극 주장해 실현시키고 뒤에 억울하게 옥사(獄死)한 명() 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을 추모하기 위해 선조 26(1593)에 평양에다 세운 사우(祠宇)의 이름이다. 뒤에 이여송(李如松), 양원(楊元), 이여백(李如柏), 장세작(張世爵) 등 명 나라 장수들도 여기에 배향하였다.

 

무염(無鹽)

본디 중국 산동(山東) 동평현(東平縣) 동쪽에 위치한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의 지명인데, 얼굴이 못생기기로 유명한 제 선왕(齊宣王)의 후비 종리춘(鍾離春)이 그 고을 사람이라 하여 매우 못 생긴 여자를 가리킨다. 열녀전(列女傳)』 「종리춘전(鍾離春傳)

 

무염(無鹽)

제 선왕(齊宣王)의 부인인 무염읍의 여자 종리춘(鍾離春)을 말하는데, 그는 둘도 없는 추녀(醜女)였다고 한다. 열녀전(列女傳)』 「종리춘전(鍾離春傳)

 

무영전(武英殿)

명 나라 때의 궁궐 이름으로, 지금의 북경고궁박물관 곁에 있다.

 

무예(蕪穢)

논밭이 거칠고 잡초가 많음을 이른다.

 

무와(無吪)

시경(詩經)왕풍(王風) 토원(兎爰)尙寐無吪에서 나온 말로,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않고 싶다는 말이다.

 

무왕(武王)

주 무왕(周武王)이 주()를 칠 때에 백이(伯夷)가 말리기를 신하가 임금을 쳐서는 안 되오[以臣弑君, 可謂仁乎].”라 하였다.

 

무외(無畏)

무외시(無畏施)를 말하는데 삼시(三施)의 하나이다. 무서움이 없는 것을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으로 부처가 대중 가운데서 설법할 적에 태연하여 두려워함이 없는 덕을 말한다.

불교(佛敎)의 설법(說法)에 두려움 없는 네 가지[四無畏]가 있으니, 모든 보살(菩薩)들이 모든 것을 잘 기억하는 것, 모든 사람의 마음과 자질을 다 알고 있는 것, 문답(問答)을 잘하는 것, 모든 사람의 의심되는 것을 해결하여 주는 것이다.

 

무외국사(無畏國師)

고려의 중으로 속명(俗名)은 정오(丁午)이다.

 

무욕지심(無慾之心)

욕심(물욕物慾)이 없는 마음

 

무용용(無用用)

혜자(惠子)가 말하기를 내가 큰 나무가 있는데, 큰 뿌리는 옹종(擁腫)하여 먹줄에 맞지 아니하고, 작은 가지는 굽어 규구(規矩)에 맞지 아니하여 길가에 서 있어도 대목이 돌아보지 아니한다.”라 하니 장자(莊子)는 말하기를 자네가 큰 나무가 있고도 쓸데가 없다면 무하유(無何有)의 고을 광막(廣莫)한 들에 심어 두고, 그 밑에서 소요(逍遙)하면 그 나무가 도끼에 찍혀 죽지 아니할 것이 아닌가.”라 하였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무용지물(無用之物)

쓸모없는 물건을 이른다.

 

무용지용(無用之用)

쓸모가 없는 것이 도리어 크게 쓰여진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어느 날 장자(莊子)가 제자들과 함께 산길을 가다가 유독 나뭇잎이 무성한 큰 나무를 보고 있었는데, 마침 나무꾼 한사람이 나무주변을 둘러보더니 나무를 베지 않고 그냥 가버리는 것이었다. 장자(莊子)는 그 나무꾼에게 까닭을 묻자 나무꾼은 옹이가 너무 많아 재목으로는 쓸모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장자(莊子)는 제자들에게 이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다 누리게 되었다라고 일러 주었다. 그 뒤 산을 내려온 일행은 장자(莊子) 친구 집에서 하루 밤을 유숙하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오랜만에 찾아온 장자(莊子) 일행을 반가이 맞이하면서 동자를 시켜 자신이 기르고 있는 기러기 한 마리를 잡아 올리도록 했다. 동자가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잘 울고 한 마리는 울지 못하는데 어느 것을 잡을 까요라고 묻자 잘 울지 못하는 놈을 잡도록 해라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한 제자가 장자(莊子)에게 선생님 어제 산속에서의 나무는 재목이 못되어 천수를 누리고, 이 댁의 기러기는 재목이 못되어도 죽음을 당했습니다. 선생님께선 어느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했다. 이에 장자(莊子)나는 재목이 되는 것과 못되는 것의 중간 것을 택하겠다라고 대답했다. “산의 나무는 그 쓰임 때문에 스스로를 해치고, 기름등불은 그 빛이 밝기 때문에 스스로를 태운다. 개수나무는 향이 많아 베어지고, 옻나무는 칠로 쓸 수 있기 때문에 베어지게 된다. 사람들은 쓸모가 있는 것만 쓸 줄 알지 쓸모가 없는 것에도 쓰임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人皆知有用之用, 而莫知無用之用也]”라고 했다. 장자(莊子)』 「산목(山木),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

 

무용호(無用瓠)

너무나도 커서 쓸모가 없는 박이라는 뜻으로,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舞雩)

노나라 군주가 하늘에 기우제를 올리는 장소로 지금의 곡부시 남쪽에 있었다.

 

(舞雩)

하늘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던 명소(名所)이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제자들에게 각기 포부를 물었는데, 모두들 정치에 관심을 두었으나, 증점(曾點)만은 봄에 여러 친구들과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 바람 쐬고[浴乎沂 風乎舞雩] 시 읊으며 돌아오겠다.”라 하였다. 이에 공자는 자연을 즐기려는 그의 높은 뜻을 칭찬하였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무육칠영귀동(舞雩六七詠歸童)

논어(論語)』 「선진(先進)동자(童子) 6~7명과 함께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 부르며 돌아오겠다.”라 하였다.

 

무흥(舞雩興)

자연을 즐기는 쾌락을 이른다. 무우는 기우(祈雨)하는 제단(祭壇)으로, 옛날에 비를 빌 때는 무녀(巫女)들이 단 위에서 춤을 추었으므로 무우라 칭하는데, 논어(論語)』 「선진(先進)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읊고서 돌아오리라.”라 한 데서 온 말이다.

 

무위(無爲)

자연.

도가 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의 하나이다. 도가사상에서는 일체의 만물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면서 그 자신을 생멸(生滅)을 넘어선 초감각적 실재 내지 천지자연의 이치로서의 도의 본질을 체득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데, 그 도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무위(無爲)라는 개념이다. 무위란 인위의 부정을 뜻하며,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 영위를 위()로서 부정하고 천지자연의 이치에 그대로 따른 참된 위를 실현하는 일이며, 정확히는 무위의 위이다. 노자(老子)는 인간이 지() 또는 욕()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세상에 대위대란(大爲大亂)을 초래하는 계기가 됨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무리하지 말고 모든 것을 자연에 맡겨 두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하였다.

 

무위도식(無爲徒食)

아무 하는 일 없이 먹고 놀기만 한다. 아무 하는 일이 없이 한갓 먹기만 한다.

 

무위수공(無爲垂拱)

주역(周易)황제(皇帝)와 요순(堯舜)은 의상(衣裳)을 드리우매 천하가 다스려졌다.”라 하였다.

 

무위이민자화(無爲而民自化)

위정자(爲政者)가 덕()을 지니고 있다면, 함이 없어도 백성들이 스스로 그 덕에 교화된다.

 

무위이민자화(無爲而民自和)

하는 것이 없지만 백성들이 저절로 감화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무위이치(無爲而治)

인위적으로 뭔가를 하려고 꾀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잘 다스림을 이른다.

 

무위인(無位人)

선가(禪家)에 무위진인(無位眞人)이란 말이 있다.

 

무위지리(無爲之理)

일하는 표시와 자랑이 없이 감화하여 다스림을 말하는데, 요순(堯舜)의 정치는 이른 바 무위이화(無爲而化)’인 즉 하는 일 없이도 다스린 자는 그 순인저[無爲而治者 其舜也與之]”라 하였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무유서(武攸緖)

당 무후(唐武后)의 형()의 아들로, 천성이 담박하여 욕심이 없었다. 그는 무후가 집권하자 벼슬을 내놓고 숭산(嵩山)에 숨어서 일생을 유유히 보냈으므로 무씨가 패한 뒤에도 그에게는 화가 미치지 않았다.

 

무을(武乙)

() 나라 임금으로, 가죽 주머니에다 피를 넣어 나무에 매달아 놓고 활로 쏘아 맞히고 나서 내가 하늘을 쐈다[射天].”라고 자랑하다가, 들에서 벼락에 맞아 죽었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 인용: 梁四龍傳(이기발)

 

무의무탁(無依無托)

의지하고 의탁할 곳이 없음을 이른다.

 

무이군(武夷君)

전설 속에 나오는 신선으로, 무이산(武夷山)에 산다고 한다.

 

무이루(撫夷樓)

나주에 있는 누각이다.

 

무이무우(無貳無虞)

시경(詩經)노송(魯頌) 비궁(閟宮)두 마음 품지 말고 근심하지 말지어다. 상제가 너를 굽어보고 계시노라[無貳無虞 上帝臨女].”라는 말이 나온다.

 

무이산(武夷山)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산으로, 주자가 이곳에서 살았다.

 

무이시(武夷詩)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를 이른다. 주문공집(朱文公集)淳熙甲辰仲春 精舍閒居 戱武夷櫂歌十首 呈諸同遊 相與一笑라 하여, 무이구곡시를 짓게 된 동기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무이험(無夷險)

()는 평탄한 것인데 이험이 없다는 것은 평탄한 길, 험한 길을 가리지 아니하고 직분을 다한다는 뜻이다.

 

무인(無因)

별 도리 없다.

 

무인경폐견(無人驚吠犬)

지방의 태수로 가서 정치를 잘하여 경내에 도적이 없으므로 개가 놀라서 짖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인지경(無人之境)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경지를 이른다.

 

무일(無逸)

안일하게 지내지 말라는 말로서 주공(周公)이 나이 어린 조카 성왕(成王)을 경계한 글의 이름이다. 서경(書經)』 「무일(無逸)

 

무일고(無逸誥)

무일은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인데, 편히 놀기만 하지 말라는 뜻으로서, 이 또한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훈계한 글이다.

 

무일편(無逸篇)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으로 주공(周公)이 이 글을 지어 조카 성왕(成王)을 일깨웠다.

 

무일호가론(無一豪可論)

()’()’와 통한다. 조금도 논할 게 없다. 즉 조금도 언급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위진대(魏晉代)의 명사(名士)들은 조용하고 느긋한 풍격을 중시하여 성급한 사람을 좋게 보지 않았다.

 

무자(武子)

() 나라 왕제(王濟)의 자(), 그지없이 사치스럽게 맛 좋은 음식만 찾아다녔으므로 미식가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인데, 왕개(王愷)가 애지중지하며 팔백리박(八百里駮)’이라고 부르던 황소를 탐낸 나머지 내기를 걸어 뺏어서는 그 자리에서 심장을 꺼내 한 점만 맛본 뒤 그냥 떠나버렸다는 고사도 전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汰侈

 

무자(撫字)

어루만져 사랑한다는 뜻으로, 즉 지방관이 선정(善政)을 베푼 것을 말한다.

 

무자경(無字經)

무자법문경(無字法門經)을 이른다.

 

무장(武帳)

비상사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정전(正殿) 대신에 임시로 거처하며 국사를 처리하는 곳이다. 한서(漢書)汲黯傳 注, 곽광전(霍光傳)

 

무장공자(無腸公子)

창자가 없는 것, 곧 게를 가리킨다. 주로 기력이 없는 사람을 이른다.

 

무장무애(無障無碍)

아무런 장애(집착, 번뇌)되는 것이 없음을 이른다.

 

무재(茂宰)

지방관을 높여 일컫는 말이다.

 

무쟁비사부(撫箏悲謝傅)

사부(謝傅)는 진() 나라 때 태부(太傅) 사안(謝安)을 말한다. 진 효무제(晉孝武帝)가 일찍이 도독(都督) 환이(桓伊)를 불러 놓고 주연(酒宴)을 베풀 때 사안도 함께 있었는데, 환이가 쟁을 어루만지며 원망을 노래한 시()임금되기도 쉽지 않거니와 신하되기는 진실로 어렵구나. ()과 신()은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의심만 받았네. 주공(周公)문왕(文王무왕(武王)을 도왔으나 금등(金縢)의 공이 새겨지지 않았고, 마음을 다해 왕정(王政)을 도왔건만 관숙(管叔채숙(蔡叔)이 유언비어를 퍼뜨렸네.”라 하자, 사안이 그 노래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셨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무저지수(無底之水)

열자(列子)』 「탕문(湯問)편에 발해의 동쪽에 몇 억만 리인지 모르는 곳에 큰 골짜기가 있는데, 밑이 없어서 이름을 귀허(歸虛)라 한다.”에서 인용한 말이다.

 

무적(無適)

뜻을 바꾸지 않다.

 

무전가환형(無錢可喚兄)

혈기 방장한 소년 시절의 기백을 되살려 호기 있게 술을 마셔 보고 싶다는 말이다.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아직도 소년의 호기 부리고 싶은 구석 있어, 장장이며 은형 모두 나오라고 소리치네[猶有誇張少年處 笑呼張丈喚殷兄].”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後集 卷7 歲日家宴戲示弟姪等兼呈張侍御二十八丈殷判官二十三兄

 

무정(武丁)

상왕조의 제 23대 왕으로 기원전 1325년부터 1266년까지 59년간 재위에 있었다. 일설에는 기원전 1329년 제위에 올랐다고 했다. 묘호(廟號)는 고종(高宗)이다. 소을(小乙)의 아들이고 조경(祖庚)의 아버지다. 전설에 의하면 무정이 어렸을 때 그의 부왕인 소을이 그를 민가에 보내 농사를 짓게 하면서 노역들과 함께 살게 하고, 다시 그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나가 국경 밖의 이민족을 정벌하게 했다고 했다. 소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무정은 상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현인을 찾다가 부암(傅岩)이란 곳에서 노역을 하던 노예 출신의 부열을 얻어 재상으로 삼았다. 부열의 도움으로 정치를 쇄신하고 덕을 베풀었으며 서북쪽의 귀방(鬼方)과 강방(羌方)을 정벌하였으며 남쪽의 형만(荊蠻)을 공격하여 상나라의 국세를 획기적으로 신장시켰다. 상나라는 부열의 도움으로 무정 치세시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무정하(無定河)

일통지(一統志)에 의하면, 陝西 延安府 靑澗縣 東六十里에 있다 한다. 진도(陳陶)농서행(隴西行)誓掃匈奴不顧身 五千貂錦喪胡塵 可憐無定河邊骨 猶是春閨夢裏人에 보인다.

 

무족지언비우천리(無足之言飛于千里)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무종(無從)

어디서 내려오는지 모른다.

 

무종극(無終極)

끝이 없다.

 

무지기(巫支祈)

신의 이름이다. ()가 치수하면서 세 번이나 동백산(桐柏山)에 가 만난 수신(水神)으로 우는 그 수신을 경진(庚辰)이라는 신에 맡겨 제어하게 했던 바, 경진이 그를 귀산(龜山)의 발에다 묶어두고 꼼짝 못하게 하여 회수(淮水)가 비로소 제 길을 찾아 흐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繹史)』 「하우기(夏禹紀)

 

무지기루대(無地起樓臺)

송 나라 처사(處士) 위야(魏野)가 재상(宰相) 구준(寇準)에게 지어주는 시()벼슬은 삼공(三公)인데, 누대(樓坮)를 지을 만한 땅이 없다[有官居鼎鼐 無地起樓坮].”라는 구()가 있었다. 그 뒤에 거란(契丹)의 사신(使臣)이 조정에 와서 묻기를 어느 분이 무지기루대(無地起樓坮) 상공(相公)이요.”라 하였다.

 

무지만염어니(無枝蔓染淤泥)

연꽃은 가지가 뻗지 않고, 넌출도 없으며, 진흙 속에서 자라지만 깨끗하다는 뜻이다. 염계(濂溪)애련설(愛蓮說)진흙 속에서 자라지만 물들지 않고, 깨끗한 물결에 씻기면서도 시들지 않으며, 속은 비고 겉은 곧으며, 넌출이 뻗지 않고 가지도 치지 않으며 향기가 멀리 풍기는 연꽃을 나는 사랑한다[予獨愛蓮之出於淤泥而不染, 濯淸漣而不夭, 中通外直, 不蔓不枝, 香遠益淸].”라 하였다.

 

무지이장초(無知羡萇楚)

시경(詩經)회풍(檜風) 습유장초(隰有萇楚)습지에 보리수가 있으니 그 가지 보드랍도다. 아리땁고도 윤택하니 너의 무지함이 부럽도다[隰有萇楚, 猗儺其枝. 夭之沃沃, 樂子之無知].”라 하여, 행역(行役)을 나간 사람이 고통스런 신세를 한탄하였다.

 

무지천진공(無知薦陳公)

무지는 곧 위무지(魏無知)를 이르는데, 그가 한 고조에게 진평(陳平)을 천거했었다.

 

무지회(無祗悔)

주역(周易)』 「복괘(復卦)초구(初九)후회함에 이르지 않으니 크게 좋고 길하리라[無祗悔 元吉].”라 하였고, 복지곤괘(復之坤卦)란 곧 복괘와 곤괘(坤卦)가 합한 괘상으로서 매우 길한 괘상이므로 한 말이다.

 

무진장(無盡藏)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는 자연의 풍광을 가리키는 말이다. 소식(蘇軾)전적벽부(前赤壁賦)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속의 밝은 달은 귀로 들어오면 소리가 되고 눈에 담겨지면 색깔을 이루는데, 이를 취하여도 막는 사람이 없고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나니, 이는 그야말로 조물주가 우리에게 선사한 무진장한 보배로서[是造物者之無盡藏也]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기고 있는 것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무진처(無盡處)

대개 모든 것을 변하는 것으로 보면, 천지도 한 순간이 못 되나, 변치 않은 것으로 보면, 외물과 내가 다 다함이 없다.

 

무창남루객(武昌南樓客)

() 나라의 유량(庾亮)이 태위(太尉)가 되어 무창(武昌)에 있을 때, 속관(屬官)들이 가을밤의 맑은 흥취를 억누르지 못해 남루(南樓)에 올라가 음영(吟詠)을 즐기고 있었는데, 이때 그 자리에 찾아온 유량을 피하기 위해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량이 이들을 만류하며 함께 흔쾌히 노닐었던 고사가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용지(容止)

 

무창류(武昌柳)

보통의 양류(楊柳) 혹은 관아의 뜰에 서 있는 버드나무를 가리킨다. () 나라 하시(夏施)가 관청의 버드나무를 훔쳐다 자기 집 문에 심었는데, 도간(陶侃)이 지나가다가 이를 보고는 이것은 무창(武昌)의 서문(西門) 앞에 있던 나무인데 어째서 훔쳐 왔는가.”라 하니, 그가 극구 사죄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서(晉書)』 「도간전(陶侃傳)

 

무창석(武昌石)

호북성(湖北省) 무창의 북산(北山) 위에 있는 망부석(望夫石)을 이른다. 옛날에 어느 열녀(烈女)가 국난(國難)에 징병되어간 남편을 이 산 위에서 바라보며 전송하고는 그대로 화()하여 돌이 되었던 데서 온 말이다. / 인용: 李少婦詞(최경창)

 

무창어(武昌魚)

무창 지역에서 생산된 물고기. 삼국(三國) 시대 오()의 손호(孫皓)가 도읍을 건업(建業)으로 옮길 때에 백성들도 무창에 머물러 살고 싶어하여 건업의 물을 마시고 무창의 고기를 먹겠다.’는 동요(童謠)가 있었다.

소동파(蘇東坡)가 즐겼을 적벽강의 물고기라는 말이다. 전적벽부(前赤壁賦)서쪽으로 하구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을 바라보니[東望武昌], 산천은 서로 뒤엉켜서 울울창창한데, 여기가 바로 조조(曹操)가 주유(周瑜)에게 곤욕을 치렀던 곳이 아닌가.”라는 말이 나온다.

 

무창적니(武昌赤泥)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칼에 생긴 흔적을 말한다. 무창(武昌)은 삼국 시대 오() 나라 손권(孫權)이 처음 설치한 군() 이름으로, 유명한 적벽대전(赤壁大戰)이 벌어진 곳이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湖廣 武昌府

 

무채(舞綵)

색동옷을 입고 춤춘다는 것으로,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은사(隱士)노래자(老萊子)70세의 나이에도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떨어 부모를 웃게 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예문유취(藝文類聚)卷二十 列女傳

 

무채흔흔(舞彩欣欣)

노래자(老萊子)처럼 부모를 기쁘게 하여 효도했다는 말이다. 노래자는 주() 나라 때의 효자로서, 나이 70세가 되어서도 색동저고리를 입고 어린애 흉내를 내어 부모를 즐겁게 하였다 한다. 고사전(高士傳)

 

무청(蕪菁)

순무 또는 무이다.

 

무타장(無他腸)

다른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에서 황제는 청렴하고 충실하며 다른 맘이 없다고 여겨 위관을 하간왕 태부로 제수했다[上以爲廉, 忠實無他腸, 乃拜綰爲河閒王太傅].”라고 했다. / 인용: 梁四龍傳(이기발)

 

무탕(武湯)

주 무왕(周武王)과 은나라의 ()임금을 말하는 것이니, 그들은 모두 적은 나라의 임금으로 전 중국을 통일한 대국가를 건설한 임금들이다.

 

무택(無澤)

물이 없는 못, 왕의 은총을 받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무파(無波)

주 무왕(周武王) 때 교지(交趾) 남의 월상씨(越裳氏)가 멀리 사자를 보내어 중역(重譯)으로 와 말하기를 바다가 3년 동안이나 물결을 일으키지 않사오니, 중국에 반드시 성신이 나셨는가 하여 왔나이다.”라 하였다 한다.

 

무파역이중(無波譯已重)

교지(交趾)의 남쪽에 있는 월상씨(越裳氏)가 중역(重譯)을 통하여 주() 나라에 와서 말하기를 바다가 물결이 일지 않은 적이 삼년이니 중국에 성인이 있는 줄 알겠습니다.”라 하였다.

 

무패임(撫珮衽)

의복의 정돈.

 

무편무당(無偏無黨)

어느 한 쪽에 기울지 않고 중정(中正), 공평(公平)한다.

 

무폭기기(無暴其氣)

그 기를 포하지 말라.” “夫志 氣之帥也 氣 軆之充也 夫志 至焉 氣 次焉 故曰持其志 無暴其氣라고 보인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무표(霧豹)

검은 표범(玄豹)이 자신의 아름다운 터럭을 보전하려고 배가 고픈 것도 참고서 보슬비[霧雨]가 내리는 7일 동안이나 산 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는 전설이 있다. 열녀전(列女傳)2 도답자처(陶答子妻)명성을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는 사람을 비유한다.

 

무표장(霧豹藏)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은거하여 수신(修身)하면서 세상의 해를 피하는 것을 말한다. 일주일 동안이나 안개비[霧雨]가 내리자, 남산(南山)의 흑표범이 자신의 아름다운 털을 상하게 할까 봐, 배고픔을 참고서 먹이를 구하러 산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열녀전(列女傳)』 「도답자처(陶答子妻)

 

무표초성만체반(霧豹初成滿體斑)

숨어 살며 문덕(文德)을 닦고 있다는 말이다. “안개비 내리는 7일 동안 남산의 표범이 사냥하러 나가지 않는 것은 아름다운 털이 상하지 않게 보전하면서 문채를 이루기 위함이다[南山有玄豹 霧雨七日而不下食者 欲以澤其毛而成文章也].”라는 말에서 기인한 것이다. 열녀전(列女傳)』 「도답자처(陶答子妻)

 

무하씨(無何氏)

가공의 인물을 말한다. 오유선생(烏有先生)과 같은 뜻이다.

 

무하유(無何有)

아무것도 없이 끝없이 펼쳐진 적막한 세계로 장자(莊子)가 설정한 이상향(理想鄕)이다. 세상의 번거로운 일이 없는 낙토(樂土)를 말한다. “지금 자네에게 있는 나무가 너무 커서 쓸모가 없을 염려가 있으면 왜 그것을 호호망망 가도 끝도 없는 세계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다가 옮겨 심지 않는가.”라 하였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유의어: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 인용: 雙明齋詩集序(이인로)

 

무하주(無何酒)

무하는 공상의 세계로, 장자(莊子)에서 말한 무하유향(無何有鄕)을 이른다. 곧 술을 마시면 근심 걱정이 없어진다 하여 술의 대명사로 쓰인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무함(巫咸)

고대의 신통한 점장이이다. 세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황제(黃帝) 때 사람이고, 하나는 당요(唐堯) 때 사람이고, 하나는 은 중종(殷中宗) 때 사람이다.

이름이 함()인 상고 시대 신무(神巫)를 말하는데, 그는 사람의 사생존망(死生存亡)과 화복수요(禍福壽夭)를 미리 알았다고 한다.

옛날 신무(神巫)인데 은() 중종(殷中宗) 때에 하늘에서 내려왔다 한다[巫咸將夕降兮 懷椒糈而要之]. 초사(楚辭)』 「이소경(離騷經)

() 시대의 사람으로 의술이 좋아 요 임금의 의원이었고 살아서는 상공(上公), 죽어서는 귀신(鬼神)이 되었다고 한다. 郭璞 巫咸山賦序

() 나라 중종(中宗)의 어진 신하로, 무무(巫戊)라고도 하는데, 이 사람이 고()를 처음으로 발명하여 이것을 가지고 점을 치는 술법을 창시하였다고 한다.

황제(黃帝) 때의 신무(神巫)인 계함(季咸)의 준말이다. 열자(列子)』 「황제(黃帝)()에서 온 신무 계함이 인간의 사생(死生존망(存亡화복(禍福수요(壽夭) 등의 운명을 마치 귀신처럼 잘 알아맞혔다.”라고 하였다.

 

무합(無合)

혼인하지 않다는 뜻이다.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

살아가는 데 일정한 생업(恒産)을 가지지 못하면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고 궁핍하게 되어 그에 따라 필요 이상으로 재물에 신경을 쓰게 되고, 재물을 탐하게 되어 바른 마음을 갖기 어렵다. 즉 착한 마음(恒心)이 흔들리게 된다는 말이다.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무현금(無絃琴)

도연명(陶淵明)은 음곡(音曲)을 모르는데도 무현금(無絃琴) 하나를 마련해 두고 항상 어루만지며 거문고의 취미만 알면 되지, 어찌 반드시 줄을 퉁겨 소리를 내야 하느냐.”라고 하였다.

줄 없는 거문고. 도정절전(陶靖節傳)연명(淵明)은 음률(音律)을 알지 못하므로 무현금 한 개를 마련해 두고는 술이 얼근해지면 무현금을 어루만지며 그 뜻만을 의탁할 뿐이었다.”라고 하였다.

 

무협(巫峽)

양자강의 상류에 있는 세 협곡 가운데 하나로 험하기로 유명하다.

 

무협연우(巫峽煙雨)

전국시대(戰國時代) 초 양왕(楚襄王)이 고당(高唐)에서 노닐다가 꿈에 무산(巫山)의 여자와 정을 통하였다 한다.

 

무협우운연(巫峽雨雲緣)

전국시대(戰國時代) 초 양왕(楚襄王)이 고당(高唐)에서 놀다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여인이 와서 저는 무산(巫山)의 여자로 임금님이 여기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왔으니, 침석(枕席)을 저와 같이 해주시기 바랍니다.”라 하므로, 양왕이 하룻밤을 같이 지낸 뒤 다음날 아침에 여인이 떠나면서 저는 무산의 양지쪽 언덕에 사는데, 언제나 아침이면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됩니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무호동중와작호(無虎洞中狸作虎)

범 없는 골짜기에 살쾡이가 범 노릇한다. 곧 뛰어난 사람이 없는 곳에서 되지도 못한 자가 내노라고 뻐기는 모양을 이른다.

 

무화(武火)

맹렬하게 타는 불로, 약을 달일 때 강한 불로 달이는 것을 말한다.

 

무황(武皇)

당 현종(唐玄宗)이다.

 

무회(無懷)

상고 시대의 제왕(帝王)으로, 아주 이상적인 정치를 행하여 태평성대를 이루었다고 한다. 담박한 마음을 말한다.

 

무후(武侯)

삼국(三國) 시대 촉한(蜀漢)의 승상이었던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시호(諡號)인 충무후(忠武侯)의 준말이다.

 

무후소(武侯蔬)

무를 이른다.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이 군사들에게 항상 무만을 심어서 먹게 한 데서 이를 원래 제갈채(諸葛菜)라 한 것인데, 여기서는 제갈량의 시호로 전용한 것이다.

 

무후입유간(無厚入有間)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지만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으로 틈이 있는 곳에 밀어 넣으면, 공간이 널찍하여 칼날을 놀려도 반드시 남는 공간이 있습니다[彼節者有閒, 而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閒, 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라 하였다.

 

무후초려시(武侯草盧詩)

유비(劉備)가 남양(南陽)초당(草堂)으로 제갈량(諸葛亮)을 찾아갔을 때 제갈량이 읊은 시이다.

 

 

인용

목차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어휘놀이터 > 어휘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휘사전 - 115. 문  (0) 2020.04.18
어휘사전 - 114. 묵  (0) 2020.04.18
어휘사전 - 112. 묘  (0) 2020.04.18
어휘사전 - 111. 몽  (0) 2020.04.18
어휘사전 - 110. 몰  (0) 2020.04.18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