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2/10/24 (136)
건빵이랑 놀자
1. 시를 소리 내어 읽는 맛 ① 최치원 이전의 명작과 최치원의 명작 감상 1. 최치원 이전(以前)엔 두 작품이 명품으로 뽑힘. 1)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여수장우중문(與隨將于仲文詩)」: 우중문에게 이 시를 보내 화를 돋워 살수로 유인하여 대군을 물리쳤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실려 있음. 2) 정법사(定法師)의 「영고석(詠孤石)」: 중국의 어떤 시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기에 삼국시대에도 뛰어난 시인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음. 2. 최치원(崔致遠): 857~?, 신라의 학자ㆍ경세가. 호는 고운(孤雲)ㆍ해운(海雲)임. 12살에 당으로 건너가 18살에 급제했고, 28살에 귀국했고, 38살에 『시무책(時務策)』을 지었으나 채택되지 못해, 40살에 가야산(伽倻山)에 은둔함. 한시 문집을 남겼기에 문학의 비조..
프롤로그. 시를 읽고 즐기는 법 ① 시의 본령은 아름다움이며 음풍농월이다 (정조의 『강목강의(綱目講義)』) 정조가 주자(朱子)의 『자치통감절목(資治通鑑綱目)』을 열람하고 그 가운데 의문스러운 것들을 뽑아 문목(問目)을 만들었는데, 모두 695개 항목이었다. 그것을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에게 나누어 주어 한 사람이 각기 한 항목씩 조목별로 답을 짓도록 하고, 다시 초계문신(抄啟文臣) 심진현(沈晉賢) 등에게 답한 말을 산삭(산삭)하고 요약하여 문목 밑에 붙여 책자로 만들게 한 것이다. 『정조실록(正祖實錄)』 15年 5月 3日 해와 달과 별은 하늘의 무늬가 되고, 산과 천과 풀과 나무는 땅의 무늬가 되니, 글에도 무늬가 있음이 또한 그러하다. 반드시 씻어내고 닦아 윤택하게 하며 환하게 노출시키며, 찬란하게 드..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고뇌, 『금오신화』 목차 심경호(沈慶昊) 1. 『금오신화』란? 2. 김시습 1) 김시습의 삶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2) 김시습의 어릴 적은 3) 김시습이 방랑하게 된 것은 4) 김시습은 금오산에 정착하고는 5) 김시습이 환속하여 서울 근교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은 6) 세간의 영욕에서 벗어나 7) 김시습은 또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는데 8) 에필로그 3. 판본의 문제 1) 조선시대 초기 목판본 『금오신화(金鰲新話)』가 발견되었다 2)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언제, 몇 편이 지어졌는가 3)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목판으로 처음 간행한 윤춘년은 어떤 인물인가 4. 『금오신화(金鰲新話)』의 텍스트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나 5. 『금오신화(金鰲新話)』의 다섯 이야기는 ..
9. 김시습의 저술로는 어떠한 것이 있었다 김안로의 『용천담적기』 6에 보면, “매월당은 금오산에 들어가 책을 써서 석실(石室)에 넣어두고 이르길,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入金鰲山 著書藏石室 曰後世必有知岑者]”라는 기록이 있다. 남효온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는 “매월당이 쓴 시는 수만여 편에 이르지만, 널리 퍼져 나가는 동안에 거의 흩어져 사라져 버렸고, 조신(朝臣)과 유사(儒士)들이 몰래 자기의 작품으로 삼았다”라는 기록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용장사’ 조항에서는 김시습의 저술로 『매월당시집』과 『금오신화(金鰲新話)』 이외에 『역대연기(歷代年記)』를 열거하였다. 또한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 권14에 의하면, 김시습의 작품으로 『금오신화(金鰲..
8. 『금오신화(金鰲新話)』는 후대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일본의 소설 『오토기보코(伽婢子)』에 영향을 주었다. 『오코기보코』는 아사이 료오이(淺井了意, ?~1691)가 1666년에 지은 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은 일본 괴담소설을 대표하며, 총 68화의 번안물로 이루어져 있다. 아사이 료오이는 번안을 할 때에 오조소설(五朝小說)로부터 44화, 『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로부터 18화를 이용하였고, 『금오신화(金鰲新話)』로부터 2화를 이용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금오신화(金鰲新話)』에서 직접 번안한 것은 그리 많은 양이 아니다. 다만 『금오신화(金鰲新話)』와 『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를 중심으로 하는 전기소설의 세계가 이 작품에 주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다. 『금오..
7. 『금오신화(金鰲新話)』가 담고 있는 문학적ㆍ철학적 메세지는 무엇인가 『금오신화(金鰲新話)』의 문학적ㆍ철학적 가치에 대하여, 기왕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점들에 주목하여 왔다【『금오신화』에 관한 기왕의 연구 가운데 대표적인 것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임형택(林熒澤), 「현실주의적 세계관과 금오신화」, 『국문학연구』 13, 서울대학교 국문학연구회, 1971. / 이재호(李載浩), 「금오신화 고, 작자 김시습의 저항정신을 중심으로」, 『논문집』 14, 부산대학교, 1972. / 조동일(趙凍一), 「초기 소설의 성립과 초기 소설의 유형적 특징」, 『한국소설의 이론』, 지식산업사, 1977. / 정병욱(鄭丙昱), 「금오신화 서설」, 『한국고전의 재인식』, 홍성사, 1979. / 설중환(薛衆煥), 「금오신화의..
6.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창작된 배경은 무엇일까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창작된 배경과 관련하여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문학사적 전통이다.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서사문학의 원초 형태인 설화가 끊임없이 발생하여 전승되고 변모되었고, 신라말 고려초에는 전기소설의 요소를 갖춘 우리 소설이 발생하여, 그것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물론 각 지역별로 설화를 정착시킨 풍토기(風土記)나 소설집이 실제로 발견되지는 않고 있으나, 이미 고려 중ㆍ후엽에는 많은 설화문학이 소설로 변모되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수이전(殊異傳)』의 일문(逸文)이나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에 실린 일부 설화들은 소설적인 요건들을 상당히 갖추고 있다. 곧 『금오신화와 같은 완성된 형태의 소설이 출현할 문학사적 기반이 진작에 마련되어 있..
5. 『금오신화(金鰲新話)』의 다섯 이야기는 어떤 특징을 지니는가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수록된 다섯 작품이 지닌 주요한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우리 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우리 나라 사람을 등장인물로 하였으며, 시대적 배경이 현실적이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는 고려말 왜적의 침략을 배경으로 하였고,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은 고려말 홍건적의 난을 배경으로 삼았다. 이 두 작품은 외적의 침략으로 민족 구성원의 삶이 유린당한 사실을 아프게 그려 내었다. 한편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는 옛 도읍 평양을 무대로 삼아, 풍경 속에 민족사의 흐름이 스며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는 조선초에 유행한 지옥 신앙을 소재로 삼으면서,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하여, 올바른 이념이 ..
4. 『금오신화(金鰲新話)』의 텍스트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나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완성된 직후에는 비교적 널리 읽혔던 것 같다.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를 비롯한 몇몇 문헌들을 통하여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이르러 희귀본이 되고 말았다. 조광형(趙光亨)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게 답한 서한에서,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자기 집에 있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아마 송시열도 금오신화를 읽고 싶어하였으나, 돌아다니는 판본이 희귀하였기 때문에 읽지 못하였던 것 같다. 국내에서 일찍 사라진 이 책은 오히려 일본에 전하였다. 즉 일본의 오오까(大塚) 집안에 220년 동안 보관되어 오던 것이 1653년 중춘에 곤산관도가처사(崑山..
3)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목판으로 처음 간행한 윤춘년은 어떤 인물인가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목판으로 처음 간행하였던 윤춘년은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자는 언구(彦久), 호는 학음(學音)ㆍ창주(滄洲)이다. 그는 참판 윤안인(尹安仁)의 아들로, 1534년(중종 29년) 생원이 되고, 1543년(중종 38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그런데 명종 즉위년(1545)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친족인 소윤 윤원형(尹元衡)과 합세하여 대윤 일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1546년에 병조좌랑이 되어 윤원로(尹元老)를 제거하였으며, 윤원형의 총애를 받아 이조정랑, 장령, 교리 등을 거쳐 1553년 대사간에 발탁되었다. 2년 뒤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으나 윤원형의 서얼허통..
2)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언제, 몇 편이 지어졌는가 김시습은 경주 남산의 용장사 부근에 은둔하던 1465년(31세)부터 1470년(36세)까지 사이에 이 소설집을 엮었다. 그는 당시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동시에 인간 삶의 조건을 깊이 숙고하고 있었다.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창작된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었다. 하지만 따렌 도서관 소장의 조선 목판본에 「유금오록(遊金鰲錄)」의 후지가 그대로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시습이 30대에 경주 남산에서 저술하였다는 설이 더욱 유력해졌다. 이미 권문해(權文海, 1534~1591)도 1589년에 편찬을 끝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 “금오산은 동도(경주)에 있으니, 김동봉이 일찍이 이 산에 거주하면서 『전등신화』를 본받아 『금오신화(..
3. 판본의 문제 1) 조선시대 초기 목판본 『금오신화(金鰲新話)』가 발견되었다 『금오신화(金鰲新話)』는 그동안 주로 일본 목판본을 이용하였다. 그런데 1999년 여름에 고려대학교 중문학과 최용철(崔容澈) 교수가 중국 따렌(大連) 도서관에서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 목판본을 발견하는 쾌거를 올렸다【최용철 교수는 논문 「금오신화 조선간본의 발굴과 그 의미」(『중국소설연구회보』 39호, 1999)와 「금오신화 조선간본의 발굴과 판본에 관한 고찰」(『동아시아 전기소설의 전파와 수용』, 동방비교문학연구회 제92차 학술발표회 논문초록집, 2000)에서 이를 밝히고 있다】. 따렌 도서관의 이 책은 총 54엽에서 앞장과 뒷쪽이 떨어져 나가 52엽이 남아 있다. 판심[大黑口, 上下內向黑魚尾]의 특징과 을해자 활자의 자양(..
8) 에필로그 김시습은 숙종 25년(1699) 2월 10일에 최석정(崔錫鼎)의 발의로 증직이 되고 사제(賜祭)가 이루어졌다. 최석정은 “사인(士人) 김시습은 광묘(光廟, 세조) 때부터 입선(入禪)하여 머리 깎고 세상을 피하였다가, 중간에 환속하여 아내를 얻었으나 자손이 없습니다. 그의 문장과 절행이 우뚝하여 숭상할 만하니, 증직(贈職)시키고 사제(賜祭)해 주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김시습은 지절관 때문에 사대부의 전형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하지만 김시습은 온 세상을 흘겨보면서 산수 좋은 곳에서 휘파람 불며 거만떨고 형체 밖에서 방랑한 그런 인물이다. 이산해(李山海)가 말하였듯이, 그의 행동은 여유롭고 유쾌하여 외로운 구름이나 홀로 나는 새와 같았고, 마음속은 환하고 맑아서 얼음 든 옥병과 가을밤..
7) 김시습은 또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는데 그러나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부인 안씨가 죽자, 의지할 곳이 없어진 김시습은 1483년 나이 49세 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방랑의 길에 나섰다. 1482년에 일어난 폐비윤씨(廢妃尹氏) 사건이, 현실세계의 결함상을 다시금 환기시킨 까닭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ㆍ양양 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했다. 유학의 경전과 다른 고전들을 지방 청년들에게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1486년에 양양 부사로 부임한 유자한(柳自漢)은 그에게 가업을 일으키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김시습은 사양하였다. “선비는 세상과 모순되면 은퇴하여 스스로 즐기는 것이 그 본분이거늘, 어찌 남의 비웃음과 비방을 받아가며 억지로 인간 ..
6) 세간의 영욕에서 벗어나 1481년에 김시습은 제문을 지어 조부와 부친을 제사지내고, 안씨(安氏)를 새 아내로 맞았다. 이때 수천부정(秀川副正) 이정은(李貞恩)과 남효온(南孝溫)ㆍ안응세(安應世)ㆍ홍유손(洪裕孫) 등 몇 사람과 깊이 교유하였다. 그 무렵, 노사신(盧思愼)에게서 『장자』를 배운 일이 있고 뒤에 송광사 주지가 된 조우(祖雨), 즉 우송광(雨松廣)이 수락산으로 김시습을 찾아왔다. 김시습은 그에게 밥을 짓게 해놓고는 먼지를 일으켜 한 숟갈도 들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월정만필(月汀漫筆)』 39에 전하는 일화다. 조우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박지화(朴枝華)는 “동봉은 주공과 공자를 대단찮게 여기고,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을 그르다고 여긴 적이 있다. 그런데 노사신이 그때 총애받는 정승이었..
5) 김시습이 환속하여 서울 근교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은 경주 남산의 산실에서 여섯 해가 지날 무렵, 어린 성종이 등극하였다. 김시습은 새 왕이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그래서 벼슬을 살 생각으로 유교 경전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교분이 있었던 서거정(徐居正)은 달성군에 봉해져 예문 관대 제학을 하고 있었다. 김시습은 서거정에게 차나 부채를 예물로 보낸다든가, 시를 보내어 옛 정분을 다시 확인하였다. 하지만 서거정은 그를 기이한 승려로 보았을 뿐이다. 사실 현실은 결코 이상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세조의 찬탈을 도왔던 훈구파는 그들의 세력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김시습은 서울 동쪽 수락산에 폭천정사(瀑泉精舍)를 짓고 은둔하였다..
4) 김시습은 금오산에 정착하고는 김시습은 29세에 호남 지방을 두루 보고 나서, 서울로 책을 사러 갔다. 이때 세조는 『연화경(蓮花經)』을 언해(諺解)하려 하였다. 김시습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추천으로 열흘 동안 내불당(內佛堂)에서 역경(譯經) 사업을 돕게 된다. 1463년 가을의 일이다. 31세 때인 1465년 봄에, 김시습은 경주로 내려가 남산의 용장사(茸長寺) 부근에 산실(山室)을 짓고 칩거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3월 그믐에 효령대군이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할 것을 종용하였다. 김시습은 잠시 망설였으나, “좋은 모임은 늘 있는 것이 아니고 번창하는 세대는 만나기 쉬운 것이 아니다. 달려가 치하하고 곧 돌아와 여생을 마치리라” 하고서, 날짜를 다투어 상경하였다. 원각사 모임의 찬시(讚詩)도..
3) 김시습이 방랑하게 된 것은 1453년 11월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仁)을 죽이고 안평대군 용(瑢) 부자를 강화도에 압송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당시 김시습은 안신(安信)ㆍ지달가(池達河)ㆍ정유의(鄭有義)ㆍ장강(張綱)ㆍ정사주(鄭師周) 등과 함께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는 1450년(세종 32년), 17세 때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였던 듯하다. 그뒤 유음자손으로서 성균관에 입학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김시습은 그러나 회시에 합격하지 못한 듯하다. 그뒤 1453년(단종 원년) 봄의 증광시에 응시하였지만 낙방한 듯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시습은 현실정치의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삼년 뒤 1455년 윤6월 1..
2) 김시습의 어릴 적은 김시습은 자(字)가 열경(悅卿)이고, 호는 청한자(淸寒子)와 매월당(梅月堂), 동봉산인(東峯山人) 등을 사용하였다. 근본은 명주(溟州) 즉 강릉의 오래된 가문이라고 한다. 그 집안은 일찍부터 많은 명공과 문장 석학을 배출하여 왔다. 증조 김구주(金久柱)는 고려 때 안주목사를 지냈다. 조부는 겸간(謙侃), 혹은 윤간(尹侃)이라고 하며, 오위부장(五衛部將)을 지냈다. 부친 일성(日省)은 음직으로 충순위(忠順衛)에 봉해졌으나 병약하여 취임하지는 않았다. 김시습의 가까운 시기의 직계는 무반(武班)의 직을 받았으나, 그렇다고 그 집안이 무계였다고 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충순위는 1445년 7월에 유음자손(有蔭子孫)을 위하여 특별히 설치된 병종(兵種)으로, 가자(加資)되는 기간이 매우 짧..
2. 김시습 1) 김시습의 삶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김시습의 생애에 대하여는 김시습 자신이 쓴 「양양부사 유자한(柳自漢)에게 속내를 토로한 서한[上柳襄陽自漢陳情書]」과 윤춘년(尹春年, 1514~1567)의 「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 이자(李耔, 1480~1533)의 「매월당집서(梅月堂集序)」, 이산해(李山海, 1538~1609)의 「매월당집서(梅月堂集序)」, 이이(李珥)의 「김시습전(金時習傳)」 등을 통하여 개괄할 수 있다. 윤춘년의 「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은 조선 목판본 『금오신화(金鰲新話)』의 권두에 실려 있고, 또 활자본 『매월당집』의 권두에도 실려 있다. 윤춘년의 문집인 필사본 『학음고(學音稿)』에는 「매월당서(梅月堂序)』라는 제목으로 들어 있다. 이이의 「김시습전..
1. 『금오신화』란?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조선 전기의 천재 문인이자, 사상가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창작한 단편소설집이다. 김시습은 현실 상황을 우울하게 응시하고 인간 존재의 문제와 결함(缺陷) 세계의 본질을 소설구조로 형상화하였다. 모두 5편이 현재 전하는데 인간과 귀신의 만남 남염부주[저승세계]와 용궁으로의 여행을 소재로 인간 삶의 문제를 다룬 전기소설(傳說小說)【전기소설(傳奇小說)이란 중국 당나라 때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소설의 한 양식이다. 당 나라 때 문인들은 온권(溫卷)을 만들어 문장력을 과시하고 출세의 기회를 잡으려고 하였는데, 문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기소설을 창작하는 예도 많았다. 배형(裵刑)은 기문(奇聞)을 모아 『전기(傳奇)』 3권을 엮었다. 명(明)·청(淸) 때에는 ..
『금오신화(金鰲新話)』의 문학사적(文學史的) 위상(位相) 목차(目次) 1. 머 리 말 2.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과 『금오신화(金鰲新話)』1. 김시습(金時習)에 대한 긍부정의 평가(評價)2. 김시습(金時習)의 사상적 내력3. 『금오신화(金鰲新話)』, 중국의 영향만 볼 것인가, 자생적인 의미로 볼 것인가4. 작품별 분류와 특징, 그리고 감상 3. 작품별 분석1.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1) 만복사저포기의 의미 탐구2) 만복사저포기 총평2.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1) 이생규장전, 구조적 측면의 의미2) 이생규장전, 의미론적 측면의 의미3.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1) 취유부벽정기란 몽유소설2) 취유부벽정기, 역사적 상상력을 담아내다4.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1) 남염부주지는 김시습의 사상소설2)..
4. 맺음말 지금까지 『금오신화(金鰲新話)』의 문학적 위상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근년에 와서는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소설문학(小說文學)의 효시로 보아 온 학설에 이의를 제가한 논문도 여러 편 학계에 보고된 바 있다. 『수이전(殊異傳)』나 『삼국유사(三國遺事)』 유편들 가운데서 이미 전기소설(傳奇小說)의 싹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진술한 바와 같이 조선의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출현하기까지의 제반 여건들은 매월당(梅月堂)시대를 여는 예비 과정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르면, 역시 본격적 전기작품(傳奇作品)으로서의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위상을 원상회복할 수밖에 없다. 『금오신화(金鰲新話)』가 『금오신화(剪燈新話)』의 영향을 입었다고 볼 때 그 시간적 격차가 40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瞿..
2) 용궁부연록과 최생우진기(崔生遇眞記)과의 유사점과 차이점 최생우진기(崔生遇眞記)와의 유사점 용궁을 박연폭포(朴淵瀑布) 표연(飄淵)으로 설정한 것은 「수궁경회록(水宮慶會錄)」에서 여선문(余善文)이 체험한 해중의 용궁과는 다르나, 후대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이 「최생우진기(崔生遇眞記)」에서 최생이 두타산(頭陀山) 용추(龍湫)를 통하여 용궁에 나아가는 수법과 비슷하다. 「수궁경회록(水宮慶會錄)」에는 광리왕(廣利王)의 초청을 받은 여선문이 용궁에 나아가 신축한 영덕전(靈德殿)의 상량문(上樑文)을 짓는다. 초대연의 참석자로는 광연왕(廣淵王)ㆍ광덕왕(廣德王)ㆍ광택왕(廣澤王)이 등장한다. 미녀들이 등장하여 능파지사(凌波之詞)와 채련곡(採蓮曲)을 노래하고 선문(善文)은 수궁경회시이십운(水宮..
5.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용궁부연록, 몽유록 방식으로 하고 싶은 말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는 한생(韓生)의 용궁체험을 담고 있다. 이 작품(作品)에서는 바다 속의 용궁이 아니고 송도(宋都, 開城) 천마산(天磨山)의 용추(龍湫) 박연(朴淵)이 용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어느 날 한생(韓生)은 천상에서 내려온 청삼(靑衫) 복두(幞頭)의 종자를 따라 날개 달린 준마(駿馬)를 타고 하늘을 날아 용궁에 다다른다. 함인지문(含仁之門)을 지나 용궁에 이르니 용왕이 반겨 맞이하고 함께 초대한 조강신(祖江神)ㆍ낙하신(洛河神)ㆍ벽란신(碧瀾神)과 더불어 자리를 같이 하게 된다. 용왕은 자신의 무남독녀가 화촉동방(花燭洞房)을 꾸밀 별당을 지어 가회각(佳會閣)으로 이름하고 상량문(上樑文)을 지어 바치게 하기 위해 문사(..
2) 남염부주지란 사상서로 현실을 비판하다 염라의 자기부정 여기서 염라왕(閻羅王)은 세간의 상식이 용인하는 염라왕(閻羅王)이 아니다. 박생(朴生)의 지론에 동조하여 인간을 심판하는 염라국을 오히려 부정하고, 백성을 그릇 인도하는 왕의 횡포를 비판하고 세상과 다른 생각을 가진 박생(朴生)을 옹호하고, 끝내는 그 박생(朴生)이 마음에 들어 염라국왕의 자리까지 물려주는데 이른다. 작자의 의도는 박생(朴生)과 염라왕(閻羅王)의 대화를 통하여, 오히려 염라왕(閻羅王)이나 저승의 존재를 부인하고, 거부하는 패러독스를 이용함으로써 현실적 행위와 사상을 더 강하게 부인해 보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매월당(梅月堂)은 염라왕(閻羅王)이라는 가상 인물을 통하여 작가가 처한 시대의 이념적 모순과 정치 사회의 모순과 정치 사회의..
4.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남염부주지는 김시습의 사상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 가운데서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는 매월당(梅月堂)의 사상을 압축하고 있는 대표적 사상소설(思想小說)이다. 작자 자신의 철학적 온오(蘊奧)를 설명하기 위하여 서정성을 제거하였으며, 따라서 여타 작품(作品)에서 볼 수 있는 시적 문체를 거세(去勢)하였다. 박생(朴生)과 염라왕(閻羅王)과의 대화를 통하여 박생(朴生), 즉 매월당(梅月堂)이 평소 생각하던 철리와 현실에 대한 자신의 사회관을 낱낱이 피력하고 있다. 자유로운 논술을 펴기 위하여 그는 몽유(夢遊)의 형태를 빌려와 염부주(閻浮洲)라는 한 가상의 공간을 설정해 두고 그곳을 탐방하여 염라왕(閻羅王)을 만나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염라와의 문답으로 자신..
2) 취유부벽정기, 역사적 상상력을 담아내다 반존화주의 사상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의 특색은 홍생(洪生)과 기씨녀(箕氏女)의 교환처럼 역사적 사건을 그 배경으로 깔고 있는데 있다. 나는 은나라 임금의 후손이며 기씨의 딸이라오. 나의 선조(기자)께서 실로 이 땅에 봉해지자 예법과 정치제도를 모두 탕왕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였고, 팔조(八條)의 금법(禁法)으로써 백성을 가르쳤으므로, 문물이 천년이나 빛나게 되었었소. 갑자기 나라의 운수가 곤경에 빠지고 환난이 문득 닥쳐와, 나의 선친(준왕)께서 필부(匹夫)의 손에 실패하여 드디어 종묘사직을 잃으셨소. 위만(衛滿)이 이 틈을 타서 보위(寶位)를 훔쳤으므로, 우리 조선의 왕업은 끊어지고 말았소. 弱質, 殷王之裔, 箕氏之女. 我先祖, 實封于此, 禮樂典刑, 悉..
3.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취유부벽정기란 몽유소설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는 홍생(洪生)과 기씨녀(箕氏女)의 만남을 작품화(作品化)하고 있다. 개성(開城)의 홍생(洪生)은 팔월 한가위날을 맞아 동무들과 평양 저자에 피륙과 면사를 싣고 와 대동강가에 배를 대어 놓고 그곳 기생들과 수작하게 된다. 마침 성중의 친구 이생(李生)을 만나 잔치를 벌이고 배를 불러 달빛을 싣고 부벽정(浮碧亭) 밑에 이르러 배를 매어두고 부벽루(浮碧樓)에 올라 고국의 흥망을 탄식하며 회고의 시를 읊는다. 그러자 문득 한 여인이 나타나 홍생(洪生)이 시를 듣고 자신도 시를 써 화답(和答)하였다. 그녀는 은왕실(殷王室)의 후손인 기씨(箕氏)의 딸인데 선고(先考)가 필부(匹夫)의 손에 패하여 나라를 잃고 위만(衛滿)이 그 틈을..
2.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이생규장전, 구조적 측면의 의미 송도(宋都)의 이생(李生)은 국학에 가던 도중 최가의 담장 안을 엿보다가 아름다운 최낭자(崔娘子)를 보고 마음이 끌리게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곧 꽃다운 인연을 맺지만, 이를 눈치 챈 이생(李生)의 아버지는 그를 멀리 울주농장(蔚州農場)으로 쫓아버리고, 이를 상심한 최낭자(崔娘子)는 그를 사모하여 몸져눕게 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그녀의 부모는 곧 매자(媒者)를 이가에 보내어 이 사실을 알리고, 드디어 양인은 결혼하여 끊겼던 사랑을 다시 잇게 된다. 그러나 그 뒤 홍건적의 난을 만나 이생(李生)은 겨우 목숨을 구하였으나, 최낭자(崔娘子)는 끝내 정조를 지키려다 피살되고 만다. 난 후 이생(李生)은 죽은 최낭자(崔娘子)의 환신(..
2.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1) 이생규장전, 구조적 측면의 의미 송도(宋都)의 이생(李生)은 국학에 가던 도중 최가의 담장 안을 엿보다가 아름다운 최낭자(崔娘子)를 보고 마음이 끌리게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곧 꽃다운 인연을 맺지만, 이를 눈치 챈 이생(李生)의 아버지는 그를 멀리 울주농장(蔚州農場)으로 쫓아버리고, 이를 상심한 최낭자(崔娘子)는 그를 사모하여 몸져눕게 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그녀의 부모는 곧 매자(媒者)를 이가에 보내어 이 사실을 알리고, 드디어 양인은 결혼하여 끊겼던 사랑을 다시 잇게 된다. 그러나 그 뒤 홍건적의 난을 만나 이생(李生)은 겨우 목숨을 구하였으나, 최낭자(崔娘子)는 끝내 정조를 지키려다 피살되고 만다. 난 후 이생(李生)은 죽은 최낭자(崔娘子)의 ..
2) 만복사저포기 총평 결말에 대한 각 학자들의 평가 강진옥【강진옥, 『금오신화(金鰲新話)』와 만남의 문제 古典小說硏究의 方向, 새문사, 1985.】은, 비현실적 존재인 상대와의 만남은 주인공에게 공간적 이동을 통한 내면적 변모를 체험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고, 그 결과 그들의 존재 양식까지 변모시켜 새로운 차원의 존재론적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혜순(李慧淳)【李慧淳, 『금오신화(金鰲新話)』에 나타난 人鬼交換說話의 類型的 考察, -李崇寧先生 古稀記念 國語國文學論叢, 1977.】은 이 작품(作品)이야말로 김시습(金時習)의 솜씨가 가장 많이 번뜩이는 작품(作品)으로, 남자의 호구를 얻으려는 적극성과 여자의 괴로움을 면하고자 하는 원망이 잘 짝을 이루고 있는 작품(作品)으로, 결합과 이별이 반복되는..
3. 작품별 분석 1.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만복사저포기의 의미 탐구 남원의 노총각 양생(梁生)은 어느 날 만복사(萬福寺)를 찾아가 부처님과 함께 저포(摴蒲)놀이를 하여 이긴 대가로 아름다운 한 여인을 배필로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그 여인은 왜란에 의해 죽은 처녀의 환신(幻身)이었다. 이튿날 양생(梁生)은 그녀의 권유에 따라 여인이 살고 있다는 마을로 따라가 거기서 사흘 밤을 머물게 되는데 그곳은 무덤 안이었다. 다음 날은 여인의 대상날로 양생(梁生)은 헤어짐에 앞서 그녀에게서 은주발 하나를 선물로 받게 되는데, 이것이 증거물이 되어 그들은 보련사(寶蓮寺)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재(齋)가 끝나자 여인은 양생(梁生)과의 인연이 다하였음을 말하고 마침내 혼자서 훌훌 저승으로 떠나 버렸다. 양..
4. 작품별 분류와 특징, 그리고 감상법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작품(作品)의 성격상 크게 두 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ㆍ「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ㆍ「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가 하나의 그룹이다. 이 가운데서도 전 2자와 후자의 성격은 또 조금 다르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의 양생(梁生),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의 이생(李生)은 각각 죽은 여인의 환신(幻身)과 동서(同棲)하다가 여인을 따라 모두 현세를 등진다. 명혼소설(冥婚小說)로 인귀교환(人鬼交換)이 특색이다. 왜구난(倭寇亂)ㆍ홍건적란(紅巾賊亂) 등 전란이 비극의 시원이 되고 있음도 공통적이다. 그러나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는 전자에 비해 몽유소설(夢遊小說)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고 성애가 거세..
3. 『금오신화(金鰲新話)』, 중국의 영향으로만 볼 것인가, 자생적인 의미로 볼 것인가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를 흔히 우리 문학사(文學史)에서 최고의 전기소설(傳奇小說)로 평가한다. 이러한 위상에 대한 평가는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시비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두고 지금까지 두 가지 상반되는 관점에서 작품(作品)의 생성을 논해 왔다. 그 하나는 중국 문학(文學)의 영향을 강하게 의식하는 측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의 문화사적 분위기에 더 비중을 두고 평가하는 측이 그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구우(瞿佑, 1341~1427)의 『금오신화(剪燈新話)』(1378)를 거론한다【『금오신화(金鰲新話)』는 剪燈을 모방하였다 함은 그의 체제와 내용이 혹사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