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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2. 김시습(金時習)의 사상적 내력 이러한 상반되는 평가는 그의 사상적 편력을 통하여 다시 문제를 제기해 준다. 스스로 성명으로 일찍 성대해졌지만 하루아침에 세상에서 은둔했다. 정신은 유학자인데 자취는 불자로 당시에 괴상하게 보여질까봐 부러 미치광이 행세를 하여 실제를 가리었다.自以聲名早盛, 而一朝逃世. 心儒蹟佛, 取怪於時, 乃故作狂易之態, 以掩其實. 율곡의 「김시습전(金時習傳)」 가운데 이 글에서 보면 ‘심유적불(心儒跡佛)’이라 하여 본심은 유교인데 행적은 불교(佛敎)였으므로 시대에 괴상하게 보일까봐 일부러 미친 짓을 함으로써 사실을 엄폐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이 점은 이자(李耔)도 ‘행유이적불(行儒而跡佛)’ ‘불적이유행(佛跡而儒行)’이라 하여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하물며 나는 청빈하여 유교를 행세..
2.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과 『금오신화(金鰲新話)』 김시습(金時習)에 대한 긍부정의 평가(評價) 김시습(金時習)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같이 공존하고 있다. 허균(許筠)의 물음에 답한 이퇴계(李退溪, 1501~1570)의 주장에서 다음과 같이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매월당(梅月堂)이 일종의 이인(異人)으로 색은행괴(索隱行怪)한 무리에 가까운데 마침 그러한 때를 만나 고절(高節)을 이루었을 뿐이며, 「여유양양서(與柳襄陽書)」나 『금오신화(金鰲新話)』 등을 보면 아마도 고견원식(高見遠識)함을 허여할 순 없다. 梅月, 別是一種異人, 近於索隱行怪之徒, 而所値之世適然, 遂成其高節耳. 觀其『與柳襄陽書』, 『금오신화(金鰲新話)』之類, 恐不可太以高見遠識許之也(答許美叔問目, 退溪集..
『금오신화(金鰲新話)』의 문학사적(文學史的) 위상(位相) 1. 머리말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지금까지 작가론적(作家論的) 측면(側面), 작품론적(作品論的) 측면(側面), 비교문학적(比較文學的) 측면(側面)에서 많이 연구(硏究)되어 왔다. 작가론은 그의 생애와 사상을 추적하는 연구(硏究)가 중심이 되었으며, 연구(硏究) 분량이 가장 많은 작품론(作品論)은 작가와 작품(作品)의 상관성, 작품(作品)의 구조분석, 사상성 내지 우의성(寓意性), 근래에는 성리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기까지 다양한 연구(硏究)성과가 집적되어 왔다. 비교문학적(比較文學的) 논문은 그리 많지는 않으나 주로 『금오신화(剪燈新話)』ㆍ가비자(伽婢子)와의 관계를 다룬 논문들【근래 東方比較文..
「의승기(義勝記)」의 주제 의식 고찰 이 연 순* 목차(目次) 1. 서론 2. 「의승기」 창작의 배경 1) 의승기 창작에 영향을 끼친 것: 병자호란과 심경부주 2) 가전체 소설과 달라진 소설의 위상 3) 16세에 의승기를 짓도록 만든 요인들 4) 임영은 19세 이후에 문학보단 학문에 심취하다 5) 짧은 벼슬길과 다시 빠져든 心學 3. 「의승기(義勝記)」의 주제 의식 1) 매우 간단한 천군 묘사 2) 전대 천군소설과의 확연한 차이점 3) 宦, 도둑이 사는 공간에 대한 묘사 4) 인물 형상을 통한 敬과 義의 조화 추구 5) 意馬와 浩然之氣 6) 기존 천군소설과의 다른 전개인 武의 중시와 남는다는 결말 7) 주제는 敬과 義의 조화다 4. 의의와 결론 인용 한문 논문
4. 의의와 결론 이상으로 「의승기」의 창작 배경과 주제 의식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본문에서 「의승기」의 창작 배경인 17세기 중반의 사회 분위기와 문단의 경향을 살피고, 창계의 생애와 학문에서 작품과 관련이 있는 부분을 파악한 후, 작품 속의 공간 설정과 인물들의 형상화, 그리고 제목의 의미 등을 통해 주제의식을 드러낸 면모를 연관하여 살필 수 있었다. 창계의 생애를 통해 의승기를 읽어야 한다 이를 통해 「의승기」는 지상에 국한한 공간을 설정하여 천군 또한 지상의 존재로서 처음에 덕을 지닌 점만이 소개되었다가 도적의 침입을 겪고 나서야 성성옹의 도움을 받으며 호(號)와 역수(曆數) 등을 정하는 것으로 나오는 점이 전대 천군소설들과 다른 점임을 밝혔다. 천군이 즉위한 지 3년이 지나 도적이 나타나나, ..
7) 주제는 경(敬)과 의(義)의 조화다 이상 「의승기」의 인물 형상에서 敬을 대변하는 성성옹의 묘사가 적은 대신 행적을 통해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고, 義를 대변하는 맹호연에 대해서는 그 자체의 형상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 사물들에도 의미를 부여하여 義와 仁을 함께 존중하고 부각한 면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경과 의 중 어느 한 쪽에만 치중하지 않고 둘을 조화롭게 추구한 작품의 주제 의식이 드러난다. 「의승기」는 제목에서도 경과 의의 조화를 꾀하고 있다. ‘의승’이라는 말은 원래 ‘태공단서(太公丹書)’, 곧 강태공이 지은 ‘단서’에 나오는데, 현재 『대대례기(大戴禮記)』 권6 무왕천조제59(武王踐阼第五十九)에 전해진다. 이의 전체 문장은 “공경이 태만을 이기면 길하고, 태만이 ..
6) 기존 천군소설과의 다른 전개인 무(武)의 중시와 남는다는 결말 맹호연의 강조는 무(武)에 대한 강조 이처럼 맹호연은 천군의 나라에 침입한 도적을 퇴치하는데 결정적이고 실제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로 묘사되며 그 주변 사물들까지 의물화되어, 그보다 묘사가 소략한 성성옹에 비해 더욱 부각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맹호연의 용맹함을 강조하여 묘사한 것은 당시 청나라의 무력적 침입으로 무너진 조선 사회에서 무(武)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들어간 것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부분에서 당시 유자로서 병자호란으로 인해 피폐해진 정신의 회복의지가 보이는 것이다. 한편 앞서 살펴본 성성옹의 묘사는 소략한 대신, 그 행적에는 의미가 부여되는데, 이는 마지막에 성성옹이 잔존하는 도적을 천군이 문교로 교화할..
5) 의마(意馬)와 호연지기(浩然之氣) 여러 천군소설에 나타난 의마(意馬) 또한 도적을 소탕하러 가기 전 맹호연의 맹세가 끝난 뒤 ‘의마(意馬)’, ‘충신갑(忠信甲)’, ‘인의순(仁義楯)’, ‘물자기(勿字旗)’ 등 주변의 사물들이 소개되는데, 이는 의물화되어 그의 됨됨이에 덧붙여 맹세의 각오를 담아내는 데 한몫한다. 의마는 본래 『유마경』에 나오는 불교 용어로, ‘심원의마(心猿意馬)’에서 취한 것이다. 여기서는 사람의 마음이 흘러 산란해진 상태를 마치 원숭이와 말이 제어하기 어려운 것에 비유하였다. 그러나 「의승기」에서는 충신인 맹호연이 천군을 대신해 도적의 세계에 타고 들어가는 말[馬]로 나왔다. 의마는 백호의 「수성지」와 후대 정기화의 「천군본기」에도 등장한다. 「수성지」에서는 천군이 의마를 타고 팔..
4) 인물 형상을 통한 경(敬)과 의(義)의 조화 추구 경(敬)을 대변하는 성성옹 「의승기」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는 맹호연의 묘사가 가장 많고, 성성옹의 묘사는 그에 비하면 소략하다. 먼저 성성옹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겠다. 성성옹은 처음 도적을 없애고 천군을 다시 왕위에 올리는 인물로서 등장한다. 마침 한 사람이 스스로 성성옹(惺惺翁)이라 하며 나라의 도적을 제거하고 임금을 불러 돌아와 대위(大位)에 다시 나아가게 하니, 마치 항량이 초왕을 얻은 고사와 같이 구하여 얻었다. 왕의 이름이 또 초왕과 같아 마침내 의제(義帝)라 호하고 화덕(火德)으로 임금노릇하며 하나라의 역수(曆數)를 썼다. 適有一人自稱惺惺翁, 稍除國賊, 喚君而歸, 復卽于大位, 以其求而得之, 如項梁得楚王故事, 王之名又與楚王同, 遂號義帝, ..
3) 환(宦), 도둑이 사는 공간에 대한 묘사 그 후 맹호연이 남은 도적을 공격하러 도적의 세계에 들어가면서, 그제야 도적이 사는 공간과 그 정체를 소개하는 부분이 자세히 묘사된다. 큰 바다가 있는데, 그 남쪽의 환(宦)이라는 데를 지나가니 이는 도적의 제일 요해처이다. 파도가 세차게 솟아올라 세상에 넘쳐 날 듯하였다. 앞의 배가 이미 뒤집어지고 뒤에 오는 것도 그치지 않아서, 돛대는 꺾어지고 노는 부러져 몇 천 개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 도적을 치러 온 병사는 왕왕 이곳에 이르러 회군하였다. 관문을 명리(名利)라 하고, 산은 분심(忿心)이라 하며 골짜기는 욕심(慾心)이라 하니 모두 도적이 의지하여 험한 것으로 여겼다. 有大海經其南曰宦, 乃賊第一要害處, 波濤洶湧, 沃日滔天, 前船旣覆, 後來者不止, 崩檣敗..
2) 전대 천군소설과의 확연한 차이점 전대 천군소설의 자세한 천군묘사 이처럼 「의승기」의 천군이 등장하는 첫 부분은 전대 천군소설들과 비교하면 사뭇 다르다. 곧 천군이 천상에서 내려오기까지 과정과 그 인물묘사가 장황하고, 충신들이 등장해 천군으로서 갖추어진 모습을 보이는 「천군전」이나 「수성지」 등과 달리 「의승기」의 천군은 처음부터 지상에서 자리 잡은 인물로 나오고 그에 대한 자세한 묘사도 없다. 동강의 「천군전」에서는 천군의 이름이 처음에 ‘理’였다가 인간세계로 내려오면서 ‘심(心)’으로 고쳤다하고, ‘신명전’에서 조회할 때 태재 경과 백규 의에게 명하는 등, 인간세계에서 천군이 자리 잡는 데 필요한 요소인 이름과 공간, 그리고 충신까지 함께 장황하게 소개하며 시작하는 것과는 대조된다. 또 백호의 「..
3. 「의승기(義勝記)」의 주제 의식 1) 매우 간단한 천군 묘사 「의승기」는 천군(天君)이 즉위한 지 3년이 지나면서 덕이 쇠해 盜賊이 침입하자 천군이 황야로 피해 10년간 방황하다 성성옹에 의해 다시 왕위에 오르고 맹호연을 뽑아 도적을 퇴치하는 일련의 사건들로 전개된다. 그런데 「의승기」에는 천상의 공간이 작품 속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으며, 의식상에서도 전혀 설정되어 있지 않다. 천군은 처음부터 천상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지상에서 가장 이상적이었던 시대인 요순임금이 계셨던 영대(靈臺)에서 어거하며, 태평세월을 구현하다 도적의 침입을 받고 방황하다 맹호연의 도움으로 도적을 퇴치하고 성성옹의 간언을 받아들여 남은 도적까지 교화시키는데, 그 후에도 천상으로 돌아갔다는 언급이 없는 것이다. 소략한 천군..
5) 짧은 벼슬길과 다시 빠져든 심학(心學) 32세에 벼슬에 나가며 갈등을 느끼다 창계 생애 중 16세에 「의승기」를 통해 드러냈던 마음[心]의 중요함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때는 37세 이후이다. 그 사이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은 창계 32세 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숙종 6)으로 남인이 몰각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창계도 기회를 얻어 벼슬길에 나서게 되는 일이다. 창계는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처음에는 사양하였다가【이우성, 『한국고전의 발견』, 한길사, 2000, p.306.】 결국 정언을 거쳐 부수찬, 이조 좌랑, 35세에 이조정랑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그해 모친상을 당하고,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면서 부여 용담 소림촌으로 이주하고 더 이상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길을 택하게 된다. 이처럼 창계는 ..
2) 인물 형상을 통한 경(敬)과 의(義)의 조화 추구 경(敬)을 대변하는 성성옹 「의승기」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는 맹호연의 묘사가 가장 많고, 성성옹의 묘사는 그에 비하면 소략하다. 먼저 성성옹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겠다. 성성옹은 처음 도적을 없애고 천군을 다시 왕위에 올리는 인물로서 등장한다. 마침 한 사람이 스스로 성성옹(惺惺翁)이라 하며 나라의 도적을 제거하고 임금을 불러 돌아와 대위(大位)에 다시 나아가게 하니, 마치 항량이 초왕을 얻은 고사와 같이 구하여 얻었다. 왕의 이름이 또 초왕과 같아 마침내 의제(義帝)라 호하고 화덕(火德)으로 임금노릇하며 하나라의 역수(曆數)를 썼다. 適有一人自稱惺惺翁, 稍除國賊, 喚君而歸, 復卽于大位, 以其求而得之, 如項梁得楚王故事, 王之名又與楚王同, 遂號義帝, ..
3. 주제 의식 1) 매우 간단한 천군 묘사 「의승기」는 천군(天君)이 즉위한 지 3년이 지나면서 덕이 쇠해 盜賊이 침입하자 천군이 황야로 피해 10년간 방황하다 성성옹에 의해 다시 왕위에 오르고 맹호연을 뽑아 도적을 퇴치하는 일련의 사건들로 전개된다. 그런데 「의승기」에는 천상의 공간이 작품 속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으며, 의식상에서도 전혀 설정되어 있지 않다. 천군은 처음부터 천상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지상에서 가장 이상적이었던 시대인 요순임금이 계셨던 영대(靈臺)에서 어거하며, 태평세월을 구현하다 도적의 침입을 받고 방황하다 맹호연의 도움으로 도적을 퇴치하고 성성옹의 간언을 받아들여 남은 도적까지 교화시키는데, 그 후에도 천상으로 돌아갔다는 언급이 없는 것이다. 소략한 천군에 대한 묘사 천군이 ..
2) 창계의 생애와 문학 성향 창계의 가계와 영향 창계 임영은 나주를 본관으로 하고, 1649년 서울 외가에서 출생하여, 17세에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 1628~1669)에게 수학하기 시작한 후,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1631~1695),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과 평생을 가까운 사이로 보냈고,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 1638~1689),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 등과 교유하였다. 창계의 선대에는 비록 직계는 아니지만 임제(林悌, 1549~1587)와 같은 유명한 문인이 있고, 외가에는 외증조부 조희일과 그 동생인 조희진의 손자 조성기와 같은 뛰어난 인물이 있었다【이종범, 「滄溪 林泳의 學問과 政論」, 『韓國人物史硏究』 제9호, 한..
2. 「의승기」 창작의 배경 1) 17세기 중반의 사회ㆍ문화적 배경 병자호란이 미친 지식인의 은둔 창계가 태어나기 전 조선 사회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병자호란이었다. 특히 병자호란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년) 인조가 청에 항복한 일은 당시 문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어서 그들의 출사(出仕)에도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으로 윤휴(1617~1680), 유형원(1622~1673), 윤증(1629~1714) 등이 그러한 삶을 보여주었다【이경구, 『17세기 조선지식인 지도』, 푸른 역사, 2009, pp.134~135; pp.160~162.】. 자신의 신념에 따라 출사거부를 선택하는 것이 당대 사회에 대한 문인들의 현실 대응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는 병자호란뿐만 아니라 붕당의 세력 형성 ..
「의승기(義勝記)」의 주제 의식 고찰 이 연 순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사 국문초록 본고는 창계(滄溪) 임영(林泳, 1649~1696)의 작품 「의승기」에 드러난 주제의식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먼저 「의승기」의 창작 배경으로 17세기 중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창계의 생애와 학문에 대해 살피고, 「의승기」의 주제의식에 대해 두 가지 점을 밝혔다. 「의승기」가 창작된 17세기 중반 조선 사회에서는 병자호란을 겪은 사대부들이 벼슬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문단에서는 산문이 유행하며 문학의 향유층이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시대에 창계는 어려서 누이들에게 언문 소설을 듣고, 조부께 궁리수심(窮理修心)의 학문에 힘쓸 것을 가학(家學)으로 전수받으며 「의승기」 창작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었..
16~17세기 한시 문학의 양상 이종묵(정문연) 목차(目次) 1. 서론 2. 16세기의 강서시풍(江西詩風)과 당풍(唐風)1) 송풍(강서시풍)의 전개 양상2) 송시에서 당시로의 전환, 그리고 강서시파의 영향력3) 삼당시인, 강서시풍 넘어서기 3. 16세기말~17세기 복고풍과 그 반발 1) 삼당시인의 한계2) 만당풍을 극복하기 위해 두보와 한유의 시를 배우다3) 기세를 높이기 위해 복고풍을 차용하다4) 명 복고파의 유행: 시경체 한시나 고악부체의 유행5) 17세기 다양한 시풍을 추구하라(feat. 장유와 이식)6) 17세기 후반에 등장한 의고주의 비판(feat. 김창협)7) 17세기 말에 다시 등장한 송시8) 17세기 후반 조선적 당풍의 대두 4. 결론 5. 토론문 인용한시사한문 논문한시를 읽다존당파ㆍ존송파..
5. 토론문 정민(한양대) 1. 16세기 후반 당시풍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해동강서시파의 공이 적지 않다고 했다. 해동강서시파 또한 두보에 대한 연구가 깊었던 점을 그 증거로 들었다. 그리고 박순, 백광훈, 이달 등과 해동강서시파 사이의 사승과 교류를 지적했다. 단순히 해동강서시파의 시인이 두보를 존숭한 사실과 16세기 후반 당시풍의 성향은 그 성격면에서 판연히 다르다. 우리의 관심은 그들이 강서시풍과는 전혀 다른, 두시풍과도 구분되는 낭만적 당시풍으로 선회했다는 점일 뿐인데, 단순히 강서시파와의 계기성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변별이 명확해지지 않는다. 공이 많았다는 말은 16세기 당시풍의 성립에 해동강서시파가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인가? 아니면 해동강서시파의 바탕을 딛고 그 극복과 계기선상에서..
4. 결론 이상에서 16세기 강서시풍(江西詩風)이 문단의 중심에 서 있다가, 후반부터 강서시풍이 당풍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피고, 17세기 초반 다시 당풍 중에서도 명 의고파의 영향으로 의고성이 강해졌다가 이에 대한 반발로 조선적인 당풍과 새로운 기풍의 송시가 등장하게 되는 한시사의 변화 양상을 고찰하였다. 이어 17세기 후반 의고풍을 반대하고 조선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시풍이 개진되어 18세기 새로운 시풍의 선성이 되고 있는 양상을 살폈다. 본고에서는 시풍의 변화 양상을 중심에 두고 논하였기에 특히 17세기의 시단의 활동적인 면모는 고찰하지 못하였다. 특히 인왕산 아래의 침류대, 청풍계, 백운동, 삼청동, 필운대 등지나 한강 일대에서 벌어진 시회의 멋진 풍류와 같은 문학 활동에 대한 연구는 훗날..
8) 17세기 후반 조선적 당풍의 대두 송풍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등장한 복고풍 주자의 존숭이 생활되면서 큰 유행이 되었던 구곡가 계열이나 그 밖의 연작시 중 상당수가 주자학의 내재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거니와, 이 같은 근체시 자체가 성정(性情)을 자연스럽게 유로(流露)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들어, 고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17세기 후반 시단의 한 경향이었다. 물론 만당을 극복하고자 한 복고풍의 시인들에 의하여 가행체나 악부 등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 또 다른 양상에서 『시경(詩經)』과 『문선(文選)』이 주자학적 문인들에 의하여 숭상된 것이다. 학자풍의 문인들은 17세기에 온유돈후(溫柔敦厚)의 시교를 다시 강조하게 되는데 이때 전범이 되는 시가 바로 『시경(詩經)』과 『문선(文選)』이었..
7) 17세기 말에 다시 등장한 송시 당시의 무개성에 다시 대두된 송시 이러한 주장은 앞서 본 대로, 이식(李植), 장유(張維) 등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거니와, 당시에 대한 일방적인 추종을 거부하는 흐름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는 점차 한나라와 당나라의 시를 부화하게 본뜨는 명시에 싫증을 느끼고 송시를 표창하는 분위기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비평에서도 이러한 주장이 점차 강해지고 시단의 풍상도 점차 송시를 배우는 이들이 많아졌다. 당시를 모범으로 생각했던 홍만종(洪萬鍾)조차 『시평보유』(하)에서 세상에 당시를 하는 사람들은 송시가 비루하여 배울 만하지 못하다고 하고 송시를 배우는 사람들은 당시가 위약하여 배울 필요가 없다고 배척하는 풍조를 비판한 바 있거니와, 실..
6) 17세기 후반에 등장한 의고주의 비판 김창협의 의고주의 비판 장유(張維)와 이식(李植)에 이어 17세기 후반 무렵 본격적인 의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강서시(江西詩)나 의고주의에 대한 비판의 공통점은 眞에 있거니와 이러한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은 17세기 말엽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에 이르러 논리화된다. 김창협(1561-1708)은 진시(眞詩)를 주장하면서 자연(自然)과 천기(天機)를 거듭하여 강조하였다. 김창협(金昌協)은 이반룡이 당나라 이후의 시어를 쓰지 못하게 한 것을 비웃었다. 그는 이반룡이 옛것을 배운다면서 언어의 모방만 하여 당시를 배우고자 하면서도 당시의 시어만을 썼으니, 당 이후의 것으로 용사를 하면 그 말이 당시와 같지 않을까 금제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이러..
5) 17세기 다양한 시풍을 추구하라 장유, 17세기 초부터 다양한 시풍의 수용 주장 17세기 한시사는 복고풍의 시대다. 비평에서도 17세기 후반까지 당시풍을 존숭하는 일련의 시화가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 비평서들은 대부분 실제 비평을 중심으로 한 것이며, 작품의 우수성은 당시에 얼마나 핍진(逼眞)한가가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시사의 중심적인 흐름 이면에 18세기 새로운 시학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17세기 초반부터 싹트고 있었다. 명나라 복고파가 수용되기 시작하는 17세기 초반 장유(1587~1638), 이식(1584~1647) 등은 복고풍을 비판하고 다양한 시풍을 개성에 맞게 수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장유는 당시 문단의 폐해가 명시를 배우는 데서 발생하였다면서, 명나라 시문이 애초에 나쁜 것은..
4) 명 복고파의 유행: 시경체 한시나 고악부체의 유행 한위(漢魏)의 시를 본뜨다 이러한 고시의 관심은 명 복고파의 시가 수입되면서 더욱 강도를 더하였다. 명 복고파(復古派)는 시경체(詩經體)의 한시나 고악부체를 크게 선호하였는데 명 복고파를 배운 우리나라의 시인들 역시 고시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의현은 전대 김종직(金宗直), 이행(李荇), 박은(朴誾), 박상(朴祥), 노수신(盧守愼), 정사룡(鄭士龍), 황정욱(黃廷彧) 등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고시선체(古詩選體)에서 그들이 남긴 것이 없는데 이는 한위(漢魏)의 시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라 하고, 신흠(申欽)과 정두경(鄭斗卿)이 비로소 한위(漢魏)의 시를 받들어, 본뜬 작품을 내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명(明) 복고파의 시를 배운 시인들로는 ..
3) 기세를 높이기 위해 복고풍을 차용하다 지명과 인명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복고파의 방법 명 복고파의 시를 수용한 것도, 시의 기세를 높게 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였다. 명 복고파들은 두보의 웅장한 시를 흉내내어 기세를 강하게 하려 하였는데, 그때 가장 손쉬운 방안이 인명과 지명을 시어로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것이었다. 성당의 시인들이 지명의 구사를 즐겨하여 시의 기상을 높였는데, 명 의고파들이 성당의 시를 배울 때 이를 첩경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른바 “여지지지(輿地之志)”, 혹은 “점귀지부(點鬼之簿)”가 이러한 시풍의 단적인 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명대의 복고파(復古派)를 배운 시인들은 고유명사를 적극 구사하고 있다. 17세기 한시에는 지명과 인명을 구사하는 것이 큰 유행이 되었다. 17세기 시에는 한..
2) 만당풍을 극복하기 위해 두보와 한유의 시를 배우다 시의 기세를 올리기 위해 두보를 존숭하다 삼당시인이 일시를 풍미할 때 동시에 그들의 시가 갖고 있는 위와 같은 약점에 대한 인식도 보편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권필(權韠)은 삼당시인의 한계가 약한 기세에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고, 정두경(鄭斗卿)은, 기가 쇠약하여 떨치지 못한 한계를 극복하였다고 평가된다【최석정, 「동명집서(東溟集序)」, 『동명집』】. 특히 명 복고파(復古派)가 수용된 이후에는 김득신(金得臣)이 「평호소지석시설(評湖蘇芝石詩說)」에서 “근래 학사대부의 무리가 모두 명나라의 시를 본받아서 권필의 시를 가지고 원기가 시들었다고들 생각한다.”고 증언한 것처럼, 권필의 시조차 기세가 약하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그만큼 17세..
3. 16세기말~17세기 복고풍과 그 반발 1) 삼당시인의 한계 개성이 사라지다 소단(騷壇)의 풍상을 당시로 옮겨 놓은 공을 인정받은 삼당시인이지만, 그 한계 또한 지적되었다. 삼당시인은 만당을 배웠다는 것으로 주로 비판되었다. 부분적으로 최경창(崔慶昌)이 초당이나 중당, 혹은 성당의 풍격이 있다고 한 바 있지만【余嘗聞諸先輩, ‘我東之詩, 唯崔孤竹終始學唐, 不落宋格,’ 信哉! 『소화시평(小華詩評)』 상권 107번】, 전체적으로는 만당의 기습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비평가들에 의하여 만당의 증거로 들고 있는 것은 기력의 부족이며, 특히 맹교(孟郊)와 가도(賈島)에 비교되었다【『학산초담(鶴山樵談)』 2b】. 그들의 시에 빈번히 나타나는 곤궁과 비애의 주제가 이러한 비판을 낳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을..
3) 삼당시인, 강서시풍 넘어서기 절구로 당시의 언어를 그대로 가져다 쓴 당시풍 그러나 16세기 말 당시를 추구하였던 인물들은 전대의 대가인 호소지(湖蘇芝)를 극복의 대상으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정통의 당풍을 구사하려 하였을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송시(강서시)가 혼효되지 않은 순수한 당시를 쓰고자 하였고, 구체적으로는 그들의 시가 당시와 비슷하게 보이도록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호소지(湖蘇芝)로 대표되는 송시(강서시)와 다르게 시를 쓰기 위하여, 삼당시인을 위시한 당풍을 추구한 시인들은 율시보다 절구를 선호하였다. 송시, 특히 강서시는 시의 작법을 중시한다. 이 땅에 강서시가 널리 유포되게 된 것은, 강서시파가 천재적 재능이 아니라 학습에 의하여 좋은 시를 쓸..
2) 송시에서 당시로의 전환, 그리고 강서시파의 영향력 16세기에 일어난 당시풍 추숭 16세기는 송풍, 특히 강서시풍이 문단이 주류를 형성하였지만, 그런 속에서도 당시풍을 추숭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16세기 전반 이주(李冑), 유호인(兪好仁), 신종호(申從濩), 신광한(申光漢) 등이 당시(唐詩)의 명맥을 이었다. 호소지(湖蘇芝)가 시대를 앞뒤로 하면서 활약하던 16세기 중반부터 박순(朴淳),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이순인(李純仁), 이달(李達) 등 걸출한 시인이 등장하여 당시풍을 이끌면서 소단(騷壇)의 중심을 서서히 당시(唐詩)로 옮겨 놓게 된다. 송시에서 당시로의 전환엔 강서시파의 영향이 있다 그런데 16세기 후반 당시풍으로 시단의 움직임이 옮아갈 때, 강서시(江西詩)를 배운 시인..
2. 16세기의 강서시풍(江西詩風)과 당풍(唐風) 1) 송풍(강서시풍)의 전개 양상 소식의 송시풍이 고려~15세기까지 맹위를 떨치다 우리나라 한시는 고려 중기 소식(蘇軾)을 중심으로 한 송시(宋詩)가 수용된 이래, 16세기에 이르기까지 가장 주도적인 흐름을 장식하였다. 송시풍이라 하더라도 그 중심이 특히 소식(蘇軾)에 있었는데, 조선이 건국되고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든 15세기 무렵에는 소식 일색에서 벗어나 다양한 송시를 접하게 된다. 15세기 중반 문단의 중심에 있던 안평대군은 『팔가시선(八家詩選)』을 엮으면서 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위응물(韋應物)ㆍ유종원(柳宗元)ㆍ구양수(歐陽脩)ㆍ왕안석(王安石)ㆍ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의 시를 선발하였고, 또 황정견의 시집인 『산곡정수(山谷精髓)』를 엮었으며, 매..
16~17세기 한시 문학의 양상 이종묵(정문연) 1. 서론 정두경(鄭斗卿)은 송시풍(宋詩風)이 주류를 이루다가 16세기 중반부터 당시풍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진단한 바 있으며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西浦漫筆)』(619면)에서 선초(鮮初)에 오로지 소식(蘇軾)의 시를 숭상하다가 16세기에 강서시풍(江西詩風)이 문단의 중심을 이루었으며, 16세기 말엽 점차 당풍(唐風)으로 변화하고, 다시 17세기부터 명 복고파(復古派)의 영향권에 들게 되는 조선 문단의 추이를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거시적인 흐름을 적시한 비평을 바탕으로 하여, 최근 몇 편의 우수한 논문이 보고되면서 16~17세기 문단의 풍상을 더욱 자세한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시사(詩史)의 본령 시풍은 유행처럼 끊임없이 변화한다. 앞선 시기에 ..
향랑(香娘)고사를 수용한 한시(漢詩)의 의미 전경원(전통문화연구회 상임연구위원, 건국대 강사) - 목 차 -1. 서론 2. 향랑의 죽음과 가족 제도2.1. 선산읍지에 소개된 향랑전 전문 보기2.2 개가에 거부감을 드러낸 향랑2.3 개가금지란 사대부의 법이 평민에게도 확산되다 3. 향랑 고사를 수용한 한시와 가족제도3.1. 유교적 열이념의 강조3.2. 개가의 불가피성 옹호3.3. 각박한 인정세태 고발3.4. 질곡된 가족제도 비판 4. 결론 인용 논문 한시사 서사한시 문학통사
4. 결론 지금까지 향랑고사를 수용한 한시가 당대의 가족제도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논의한 내용을 요약하여 결론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열(烈)’ 이념을 강조함으로써 당시의 가족제도를 더욱 공고히 하고자 했던 의도를 지닌 작가로 이광정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그는 향랑의 죽음을, 여성에게 부과되었던 유교적 이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열(烈)’ 이념으로 수용하여 해석함으로써, 그 죽음을 칭양․칭송하면서 유교적 교화의 수단으로 삼고자 했던 경우를 들 수 있다. 둘째는 향랑고사의 비극성을 강조하면서도 당시 혼인제도 아래에서 향랑의 ‘개가(改嫁)’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그다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은근히 제3자의 발화를..
4. 질곡된 가족제도 비판 앞에서는 한 여인의 삶을 비극적으로 이끌어간 원인을 ‘인정(人情)’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각박한 인정세태를 고발하고 있었던 신유한과 이덕무의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향랑고사를 수용하여 형상화함에 문제의 원인을 ‘인정(人情)’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제도(制度)’에 주목하여, 당시의 질곡된 가족제도를 인식하고 이를 비판하고 있는 이학규와 이안중의 작품을 대상으로 그들의 문제의식을 고찰하기로 하겠다. 山有花上江隖 산유화는 강 언덕 위에 있고 砥柱碑下江渚 지주비 아래로는 강 물가라네 愁愔愔采薪女 시름겨운 소리로 나무하는 아낙의 長傷嗟向誰語 길고 슬픈 탄식은 누굴 향해 말하는가 還歸家見猶父 친정에 돌아와 아버지를 뵈었지만 噫不諒以威缺 슬프다! 위엄 없어 살펴주시지 못하..
3. 각박한 인정세태 고발 앞에서는 유교적 이념인 ‘열(烈)’을 교화의 목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의도에서 형상화한 이광정의 「향랑요(香娘謠)」와 향랑의 비극적인 죽음을 낭만적인 태도로 재구성하면서, ‘개가(改嫁)’를 옹호하고자 한 최성대의 「산유화여가(山有花女歌)」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신유한, 이덕무 등은 또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기본적인 서사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당대의 각박한 인정세태를 고발하는 정도의 현실인식을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향랑고사를 통한 가족제도에 대한 인식에서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는 데에 도달하고 있다. 물론 그같은 인식 경향은 아직 미미(微微)하여 새롭고 보편화된 제도로의 확립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인정세태의 그릇됨 등을 시적 화자의 발화 행위를 빌어 지적하..
2. 개가(改嫁)의 불가피성 옹호 최성대의 「산유화여가(山有花女歌)」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이광정의 경우와는 다른 시각에서 향랑 사건을 형상화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이광정이 한시를 통해 가족제도를 인식하고 형상화한 방식은 ‘열(烈)’이라는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유교적 이념 구현을 목표로 삼았던 반면에 최성대는 110 행으로 구성된 장편 서사한시를 통해 향랑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사건을 바탕으로 삼았으되, 낭만적인 상상력을 기초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으며, 개가(改嫁)를 긍정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 같은 점이 다른 여타의 작품들과 구분될 수 있는 특징이다. 阿叔語香娘 阿女勿悲啼 삼촌이 향랑에게 말하기를 “얘야, 슬피 울지 말거라 濛濛黃臺葛 亦蔓黃臺西 저 수북한 언덕의 칡들도 덩굴져 언덕 서쪽으로도..
3. 향랑고사 수용 한시와 가족제도 1. 유교적 ‘열(烈)’이념의 강조 앞장에서는 향랑의 사건을 기초로 향랑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하는 점을 가족제도와 관련하여 제도적 차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향랑 사건을 토대로 형상화된 한시 작품들에서 가족제도에 대해 어떠한 수용방식과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겠다. 향랑사건이 있던 당시 선산 부사였던 조귀상이 향랑의 전(傳)을 입전한 이후로 많은 사대부들에 의해 향랑 고사가 한시의 중요한 소재로 부각되었다. 그 가운데 조귀상이 남긴 전(傳)을 중심으로 한시를 창작하되 작가별로 작품 내에서 가족제도에 대해 반응하는 태도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광정의 「향랑요(香娘謠)」는 장편 서사한시로서 전체 148행으로 이..
2.3 개가금지란 사대부의 법이 평민에게도 확산되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당시의 가족제도 가운데 ‘개가(改嫁)’와 관련된 재가(再嫁)의 문제를 사적인 근거에 입각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녀자의 재가(再嫁)를 금지시키려는 법문(法文)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공양왕 원년(1389년) 9월의 법문에 의하면, 산기 계급(散騎階級) 이상의 처(妻)로 명부(命婦)된 자의 재가(再嫁)를 금하고, 판사 이하 육품 계급의 처(妻)는 부(夫)가 사망한 후 삼 년 이내의 재가를 금하니, 이것을 위반하는 자는 실절(失節)이라 할 것이며, 산기(散騎) 이상인 자의 첩(妾)과 육품 이상인 자의 처첩으로 스스로 수절(守節)을 원하는 자는 정표문(旌表門)을 세우고 가상(加賞)한다고 하였다【高麗史 卷八十四 刑法 1戶婚條】. 이러한..
2.2 개가에 거부감을 드러낸 향랑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숙부와 향랑의 언급을 통해 드러나는 사고(思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하루는 숙부님께서 나를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떻게 백년토록 너를 부양하겠니? 네 남편이 너를 영원히 버린 것은 기필코 너의 잘못이 아닌데 떳떳하고 한창인 젊은 여자가 어찌 혼자 살아가겠니? 다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시더라.一日 叔父 謂我曰, “吾何以百年養女乎? 汝夫永棄汝 必無更推之理 常漠少女 何以獨居乎? 莫若更適他人云” ㉯ 내가 대답하기를, 「숙부님께서는 어찌 차마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비록 떳떳하고 한창인 나이인데다가 또한 부도(婦道)의 덕을 행하지는 않았으나 몸은 이미 남에게 허락했건만 어찌 남편의 어질지 못함으로..
2. 향랑의 죽음과 가족 제도 향랑의 죽음을 제도적 측면에서 검토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향랑이 어떤 과정을 통해 자결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하는 점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1702년에 일어난 향랑의 사건을 최초로 기록한 사람은 당시 선산의 부사로 있었던 조귀상(趙龜祥)에 의해서였다. 그는 선산의 부사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약정(約正)’이란 직함을 지닌 사람으로부터 향랑의 사건을 보고 받게 되어 이를 방백(方伯)에게 보고하고 방백은 다시 조정에 상계(上啓)하였으나 아무런 조치가 없자 조귀상은 그 사실이 훗날 잊혀질까 걱정되어 이듬해인 1703년 5월에 판각(板刻)본을 내기에 이른다. 그 기록에는 향랑의 죽음에 대한 과정이 사실에 입각하여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기에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 ..
향랑(香娘)고사를 수용한 한시(漢詩)의 의미 전경원(전통문화연구회 상임연구위원, 건국대 강사) 1. 서론 사회는 언제나 규범과 욕망 사이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조화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끊임없이 만들어간다. 욕망과 규범에는 자연(自然)과 인위(人爲)의 법칙이 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준거들이 지향해야 할 당위는 대동(大同)과 상생(相生)의 원리이다. 따라서 우리는 늘 욕망과 규범 사이에서 힘겹게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고단한 현실 가운데서도 규범과 욕망이 과연 우리의 삶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지에 대하여 성찰해야 하는 현실 앞에 서 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많은 규범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가 만든 규범에 의해 우리의 인간다운 삶이 파괴되거나 질곡될 수도 ..
한국시화(韓國詩話)에 나타난 존당파(尊唐派)ㆍ존송파(尊宋派)의 평론연구(評論硏究)- 李白, 杜甫, 蘇軾, 黃庭堅 評論을 中心으로 - 박 순 철 ―――――――― 「 목차(目次) 」 ――――――――1. 시화라는 명칭의 등장과 흐름 2. 한국시화(韓國詩話)의 당송시(唐宋詩)에 대한 총론(總論)1) 홍경우~홍만종까지의 흐름2) 김창협, 천기와 성정이란 잣대로 시를 비평하다3) 당시를 극찬한 이수광4) 송시를 만당풍보다 높게 친 이의현 3. 존당파(尊唐派)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1)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남용익과 김만중의 평론(評論)2)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이식의 평론(評論)3) 이수광, 두보 시를 낮추어 평가하다4) 이수광, 두보시를 강서시와..
5. 결론 한국시화에 기록된 중국문인과 시에 관련된 내용은 양과 질적인 면에서 대단한 수준이다. 한국시화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시와 관련된 총론, 시론, 풍격, 시의, 자구의 오류 등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시화에는 거의 동시대의 중국의 유명 시화의 내용을 직접 인용하고 혹은 중국문인의 시나 시구를 들어 비평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한국의 문인들이 중국시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시의 주석에 대하여 그 정오(正誤)를 논할 만큼 시 해석에 있어서 대단히 정확하고 치밀하였다. 본 논문은 한국시화의 내용 중에서 당시와 송시에 대한 평론을 중심으로 존당과 존송의 내용과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이백, 두보와 소식, 황정견에 대한 평..
4. 이의현, 존송파(尊宋派)임에도 두보를 시의 정맥으로 보다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역옹패설(櫟翁稗說)』에서 두보는 시의 표현이 절묘하고【위의 책, 제1권의 「櫟翁稗說」, 144쪽, “杜少陵有‘地偏江動蜀, 天遠樹浮秦’……方知此句少陵爲, 秦ㆍ蜀傳神, 而妙處正在阿堵中也.”】 동파의 시는 호탕하다【위의 책, 제1권의 「櫟翁稗說」, 158쪽 “東坡云: 火色上騰雖有數, 急流勇退豈無人? 又豪宕可人.”】고 하였는데 이는 소식 시에 나타나고 있는 호탕한 풍격을 평한 말이다. 두보를 정점으로 삼은 이의현 한편 이의현(李宜顯)은 『도곡잡저(陶谷雜著)』 4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는 성정을 말하는 것으로 시경삼백 편에 비록 정(正)과 변(變)이 있을지라도 대략 온유돈후라는 네 글자를..
3. 최자, 『보한집』에서 존송(尊宋)의 가치를 드러내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 이외에도 존송파로서 송시의 뛰어남을 평론한 문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후기의 학자 최자(崔滋, 1188~1260)는 존송파로서 『보한집(補閒集)』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소식 시의 “짙푸른 못은 마치 내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 같고, 흰 탑은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네.”라는 시구를 들어 이 시구가 참신한 뜻(新意)이 있다【이는 소동파 시구의 신의(新意)에 대하여 최자가 유숭단의 말을 인용하여 비평한 것이다.】. 予嘗謁文安公, 有一僧持『東坡集』,質疑於公, 讀至“碧潭如見試, 白塔若相招”一聯, 公吟味再三, 曰:“古今詩集中, 罕見有如此新意. 뜻이 가는대로 즉석에서 지은 시로는 이백의 “버들눈은 황금색으로 부드럽고, 이화..
2. 김창협, 존송파(尊宋派)의 기본 위에 성당풍(盛唐風)을 갖추라 말하다 김창협(金昌協)은 『농암잡지(農巖雜誌)』 외편 16에서 황정견과 진사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송(宋)나라 시에서 황정견(黃庭堅)이나 진사도(陳師道)의 시는 한때 최고의 으뜸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황정견(黃庭堅)의 시는 마음대로 비틀어대어 자연스럽지 못하고 진사도의 시는 앙상하며 매우 엄혹하니 이미 온화하고 두터운 뜻을 잃어버렸으며, 또한 초탈하고 구속을 받지 않는 운치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진실로 당나라 시로부터도 멀고 두보로부터도 잘 배우지 못했으니, 색과 향기가 흐리지 않는다고 이몽양이 비판한 것은 참으로 정확한 주장이다. 진여의(陳與義)는 비록 기가 조금 막힌 바가 있지만 두보의 음절을 얻었고, 육유(陸游)는 비록..
4. 존송파(尊宋派)의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이인로와 권응인의 존송파(尊宋派)에 대한 평론(評論) 조선 전기의 학자 조신(曹伸, 1450~1521?)이 쓴 『소문쇄록(謏聞瑣錄)』에는 (李定이) “하루는 궁중의 잔치에서 술에 매우 취하여 임금 앞에 나아가 ‘소식과 왕안석 중에 누가 더 낫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아직 잘 모르겠다.’라고 했다. 이정이 ‘왕안석이 더 낫습니다.’라고 했다[一日侍內宴, 醉甚, 近就御前平坐, 請曰: ‘蘇與王孰優?’ 上不答, 但曰: ‘未可知.’ 永川曰: ‘荊公優矣.’].”【위의 책, 제1권의 「謏聞瑣錄」, 237쪽】는 기록이 있다. 『소문쇄록(謏聞瑣錄)』은 중종(中宗) 20년 1521년에 만들어진 책으로 조선전기의 대표적 시화..
6. 이수광의 송풍(宋風)의 모방과 산문화를 비판하다 송풍의 모방을 비판하다 이수광은 또한 소식과 황정견의 시에 대해서도 시의 자구선택, 시구의 정확성, 구법과 대구에 관한 문제 등에 대하여 평하고 있다. 우선 소식의 시의 자구 선택문제에 대한 평을 보도록 하자. 당나라 유가(劉駕)의 「조행(早行)」시에 이르기를 “말 위에서 남은 꿈을 계속 꾸다가, 말이 울 때마다 다시 놀란다.”라고 하였다. 소식이 이것을 모방하여 말하기를 “말 위에 서 우뚝 남은 꿈을 꾸다, 아침 해가 올라온 것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 자세히 음미하여 보면 잘됨과 졸렬함이 저절로 드러난다. 그리고 동파의 “올잔몽(兀殘夢)”이라고 한 “올(兀)”자를 후인이 나무라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唐劉駕「早行」詩云: ‘馬上續殘..
5. 이수광, 이백와 황정견의 시를 비교하다 이수광은 이백 시에 대하여서도 많은 평을 하였는데 주로 표현의 자연스러움, 시법, 시구의 원류【위의 책, 2권의 「芝峯類說」, 191쪽, “喬知之詩曰: ‘草綠鴛鴦殿, 花紅翡翠樓.’ 按李白詩‘水綠南薰殿, 花紅北闕樓.’; 又‘玉樓巢翡翠, 金殿鎖鴛鴦.’ 蓋出於喬矣.”】, 시구의 주석, 인품과 시품의 관계, 습작문제, 정확성 문제 등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백의 악부에 말하기를 “홀로 물속의 진흙을 거르려하나 물은 깊은데 달을 볼 수 없네. 보지 않아도 달은 그냥 있겠지만, 물이 깊어서 행인이 빠지겠네.”라고 하였다. 이 사의 구법은 희롱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뜻이 있어서 기뻐할 만하다. 산곡 황정견이 이것을 본받아짓기를 “돌은 내가 너무 좋..
4. 이수광, 두보시를 강서시와 비교하다 강서시보단 두보시 다음은 강서시파의 한 사람인 진여의(陳與義)의 시와 두보 시를 비교하여 그 우열을 논한 부분으로 『지봉유설(芝峯類說)』 「시평(詩評)」에 나온다. 진여의(陳與義)의 시에 “만 리를 와서 노닐면서 도리어 먼 곳을 바라보려고, 삼년 동안 어려움도 많았거니, 다시 위태한 곳에 기대어 섰네.”라고 한 것이 있다. 나는 이 시구를 매우 좋아한다. 두시에 말하기를 “만 리에 가을이 슬프다. 이 몸은 항상 나그네 되어, 백년에 병 많은 몸 홀로 누대에 오른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여의의 이 글귀가 오로지 두보 시에서 나온 것을 알겠다. 그러나 두보시가 더 좋다.簡齋詩‘萬里來游還望遠, 三年多難更憑危.’ 余常喜之. 杜詩云: ‘萬里悲秋常作客, 百年多病獨登臺.’ ..
3. 이수광, 두보 시를 낮추어 평가하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당시(唐詩), 오대시(五代詩), 원시(元詩), 명시(明時) 등 각 조대의 시인의 시에 대하여 비평을 하였다. 그가 평한 당대와 송대의 시인을 총괄적으로 살펴보면, 당(唐) 시인 중에서는 우세남(虞世南)ㆍ왕발(王勃)ㆍ낙빈왕(駱賓王)ㆍ송지문(宋之問)ㆍ이백(李白)ㆍ교지지(喬知之)ㆍ이교(李嶠)ㆍ진자앙(陳子昻)ㆍ맹호연(孟浩然)ㆍ왕유(王維)ㆍ두보(杜甫)ㆍ김운경(金雲卿)ㆍ위응물(韋應物)ㆍ한유(韓愈)ㆍ유가(劉駕)ㆍ원진(元稹)ㆍ이하(李賀)ㆍ왕건(王建)ㆍ두목(杜牧)ㆍ두공(竇鞏)ㆍ이상은(李商隱)ㆍ허혼(許渾)ㆍ육구몽(陸龜蒙)ㆍ두상(杜常) 등을 거론하여 그들의 시와 자구에 대하여 비평하였고, 宋 시인 중에서는 구준(寇準)ㆍ안수(晏殊)ㆍ양휘지(..
2.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이식의 평론(評論) 왕세정의 견해를 이어받아 두보를 더 높게 평가한 이식 조선 중기의 학자 이식(李植, 1584~1647)은 「학시준적(學詩準的)」에서 이백과 두보의 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이백(李白)의 고시(古詩)는 표일(飄逸)해서 모방하기가 어렵다. 두보 시의 변체는 성정(性情)과 사의(詞意)에 있어 고금을 통틀어 최고이다. 그의 기행이나 「삼리(三離)」, 「삼별(三別)」 등 작품은 아낄만한 점이 분명히 있으니 숙독하고 모방하지 않으면 안 되며 이를 준칙으로 삼아야 한다. 「팔애(八哀)」와 같은 장편은 학식이 풍부하고 재주가 뛰어나지 않으면 배울 수 없으며 또 시의 정통도 아니니 우선은 그냥 놔두어도 된다.李白古詩飄逸難學. 杜詩變體, ..
3. 존당파(尊唐派)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남용익과 김만중의 평론(評論)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한 총론에서 각 시를 추존(追尊)하는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나 한정된 몇 사람만이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하여 총론(總論)을 전개함으로써 각각의 추존(追尊)의 근거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다. 이에 따라 존당파가 추존했던 당시(唐詩)를 대표하는 이백과 두보, 존송파가 추존했던 송시(宋詩)를 대표하는 소식, 황정견에 대한 양파(兩派)의 평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존당파와 존송파의 이론적 근거를 좀 더 파악하여 각 파의 당ㆍ송시에 대한 평론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尊唐派尊宋派 이백, 두보소식, 황정견 다시 말하면 각..
4. 결론 한국시화에 기록된 중국문인과 시에 관련된 내용은 양과 질적인 면에서 대단한 수준이다. 한국시화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시와 관련된 총론, 시론, 풍격, 시의, 자구의 오류 등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시화에는 거의 동시대의 중국의 유명 시화의 내용을 직접 인용하고 혹은 중국문인의 시나 시구를 들어 비평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한국의 문인들이 중국시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시의 주석에 대하여 그 정오(正誤)를 논할 만큼 시 해석에 있어서 대단히 정확하고 치밀하였다. 본 논문은 한국시화의 내용 중에서 당시와 송시에 대한 평론을 중심으로 존당과 존송의 내용과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이백, 두보와 소식, 황정견에 대한 평..
2. 존송파(尊宋派)의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평론(評論) 1. 이인로와 권응인의 존송파(尊宋派)에 대한 평론(評論) 조선 전기의 학자 조신(曹伸, 1450~1521?)이 쓴 『소문쇄록(謏聞瑣錄)』에는 (李定이) “하루는 궁중의 잔치에서 술에 매우 취하여 임금 앞에 나아가 ‘소식과 왕안석 중에 누가 더 낫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아직 잘 모르겠다.’라고 했다. 이정이 ‘왕안석이 더 낫습니다.’라고 했다[一日侍內宴, 醉甚, 近就御前平坐, 請曰: ‘蘇與王孰優?’ 上不答, 但曰: ‘未可知.’ 永川曰: ‘荊公優矣.’].”【위의 책, 제1권의 「謏聞瑣錄」, 237쪽】는 기록이 있다. 『소문쇄록(謏聞瑣錄)』은 중종(中宗) 20년 1521년에 만들어진 책..
3. 존당파(尊唐派)와 존송파(尊宋派)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존당파(尊唐派)의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평론(評論) 1. 이백(李白)보다 두보(杜甫)를 더 우위에 둔 남용익과 김만중의 평론(評論)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한 총론에서 각 시를 추존(追尊)하는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나 한정된 몇 사람만이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에 대하여 총론(總論)을 전개함으로써 각각의 추존(追尊)의 근거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다. 이에 따라 존당파가 추존했던 당시(唐詩)를 대표하는 이백과 두보, 존송파가 추존했던 송시(宋詩)를 대표하는 소식, 황정견에 대한 양파(兩派)의 평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존당파와 존송파의 이론적 근거를 좀 더 파악하..
2. 한국시화(韓國詩話)의 당송시(唐宋詩)에 대한 총론(總論) 1. 홍경우~홍만종까지 시화집의 흐름 홍경우~홍만종까지 시화집의 흐름 한국 역대(歷代) 시화(詩話) 중의 존당(尊唐)ㆍ존송(尊宋)의 논쟁은 고려후기로부터 시작된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고려후기(高麗後期) 이래 조선전기(朝鮮前期)까지는 대개 송시(宋詩)가 우세를 보인 반면, 중기(中期)에는 당시풍(唐詩風)이 우세를 보이고 후기(後期)에는 당시(唐詩)와 송시(宋詩)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향을 보인다【안대회, 『조선후기시화사』, 소명출판사, 43쪽】고 하였다. 이를 토대로 연구의 편의를 위하여 한국에서는 존당파(尊唐派)ㆍ존송파(尊宋派)【이 양파(兩派) 사이에 당송겸존파(唐宋兼尊派)도 있었는데 대표적 인물은 홍만종(洪萬宗), 김창협(金昌協) 등을 ..
한국시화(韓國詩話)에 나타난 존당파(尊唐派)ㆍ존송파(尊宋派)의 평론연구(評論硏究) -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평론(評論)을 중심(中心)으로 - 박 순 철 1. 시화라는 명칭의 등장과 흐름 한ㆍ중 양국은 동양 한자문화권 속에서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교류를 진행하였다. 문학 방면에서도 많은 교류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분야 중의 하나는 시 분야이다. 시는 한ㆍ중 양국에서 모두 극성하였고 이로 인하여 시에 대한 창작과 감상, 비평에 대한 책들이 저술되어 시화(詩話)라는 이름으로 명명되기에 이르렀다. 최초 시화(詩話)라는 명칭의 등장과 성격 시화(詩話)라는 명칭은 송대(宋代)의 구양수(歐陽脩)가 자신이 쓴 시화를 『육일시화(六一詩話)』라고 이름 지..
이계 홍양호의 의원전(醫員傳)에 나타난 인물 형상 진재교(성균관대) 1. 머리말 2. 이계전(耳溪傳)의 현황과 그 특징 3. 작품의 분석 1) 시정(市井)의 의원(醫員)에서 어의(御醫)로: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 2) 침술(鍼術)로 하층민에게 인술을 베푼 의의(義醫):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 4. 맺음말 인용 목차 / 지도
4. 맺음말 이계(耳溪)는 과거사에서 애국 인물을 뽑아 입전한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을 제외하고, 모두 11개의 인물전을 창작하였다. 이계가 입전한 대상 인물은 개성과 계층이 다양한데, 이 작품 중 특히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과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은 의원전(醫員傳)에 해당된다.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전통적인 도덕규범 예컨대 충ㆍ효ㆍ열과는 애초 거리가 먼 인물들이다. ‘의원전’은 이조 호기 문인들의 인물전에서도 흔하지 않는 사례에 해당된다. 그런 점에서 이계가 의원을 비롯하여 여항의 세계에서 재예(才藝)를 지니고 그 나름의 가치 있는 특이한 삶을 살았던 인물을 주목한 자체는 의미가 적지 않다. 이미 알려진 바 있듯이 이조 후기 전의 입전 대상이 신선(神仙)ㆍ이인(異人)ㆍ거지ㆍ예인(藝..
8. 논찬을 통해 조광일을 칭송한 이계 더욱이 조광일이 인술을 베풀어 새로운 의원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인간상에 대한 이계의 후평도 서사에 조응한다. 이계는 조광일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토대로 정당한 평가를 내리는 한편 그의 품성과 삶의 미덕을 극구 칭송하고 있다. 뛰어난 의술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명예나 보답을 바라지 않은 점, 곤궁한 사람을 우선하는 자세 등을 들어 호감 어린 시선으로 극찬하고 있다[趙生術高而不干名, 施博而不望報, 趍人急而必先乎窮無勢者, 其賢於人遠矣]. 요컨대 이계는 논찬을 통해 조광일의 인술과 인간적 풍성에 대해 최대치로 끌어올린 표현으로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계가 인술을 베푼 조광일을 의의(義醫)로 바라보는 시각은 대단히 시사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에서 사회적 의미도 ..
7. 세상의 꼴불견 의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다 이어지는 조광일의 대답은 당시 인술을 저버린 의원들의 태도를 신랄하게 꼬집는 것으로 채워진다. 조광일이 진단한 의원들의 비뚤어진 의술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을 위해 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는 의술을 믿고 교만하게 행동하는 의원들의 꼴불견, 재상들의 요구에도 거들먹거리며 마지못해 가는 행위, 권세 있는 부유한 집이 아니면 가지 않는 작태, 그리고 가난하거나 권세가 없으면 아프다고 핑계를 대며 부재중이라고 딴청을 피우는 모습 등[吾疾世之醫, 挾其術以驕於人. 門外騎相屬, 家設酒肉以待, 率三四請, 然後肯往. 又所往, 非貴勢家則富家也. 若貧而無勢者, 或拒以疾, 或諱以不在, 百請而不一起, 是豈仁人之情哉]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의원으로서의 본분을 저버린 세태를 경멸적인 시선으..
6. 의술로 세상을 통찰하다 이계(耳溪)는 “무릇 의원은 천한 기예로 여항(閭巷)의 비천한 곳에 해당된다. 그대의 능력으로 어찌 귀하고 현달한 사람들과 교류하여 명성을 얻으려 하지 않고, 이에 여항의 소민(小民)들과 교우하면서 어찌 자신을 자중하지 않는가[夫醫者賤技, 閭巷卑處也. 以子之能, 何不交貴顯取聲名, 乃從閭巷小民遊乎, 何其不自重也]?”라는 세속적인 질문을 하자, 이에 대한 조광일의 대답은 그야말로 그가 도달한 인생관의 정점을 보여준다. 장부가 재상이 되지 못하면 차라리 의원이 되는 것이 낫지요. 재상은 도로써 백성을 구제하지만 의원은 의술로 사람들을 살리니, 궁(窮)하고 현달(顯達)하는 것이 그 공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같을 뿐이라오. 그러나 재상은 때를 얻어서 그 도를 행하더라도 행(幸)..
5. 인술을 택한 조광일의 두 가지 일화 이러한 그의 성격과 행동에서 당시 의원들이 인술을 저버리고 돈 있고 권세 있는 사람만을 치료하는 행위와 정반대의 모습을 예견할 수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일화의 한 부분을 보자. ① 내가 일찍이 조생의 집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동틀녘에 어떤 노파가 남루한 옷차림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그 문을 두드리며 말하길, “나는 아무 마을에 백성으로 아무개의 어미입니다. 나의 자식이 아무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으니 감히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조생은 “그러지요. 우선 가 있으면 나도 즉시 가겠소.”라 대답하고 바로 일어나 뒤따랐다. 걸어가면서도 난처한 기색이 없었다.吾嘗過生廬. 淸晨, 有老嫗藍縷匍匐而扣其門曰: “某也. 某村百姓某之母也. 某之子病某病殊死, 敢丏其命..
4. 서두에 드러난 호감어린 시선 여기서 먼저 서두의 의론 부분을 보기로 한다. ‘뛰어난 의술은 나라를 다스리고, 그 다음이 병을 다스린다’ 하니 이것은 무엇을 일컫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병을 다스리는 것과 같으니 의술의 도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비는 반드시 현달하여 높은 지위에 있어야 나라에 병든 것을 다스릴 수 있다. 혹 궁하여 시험할 수 없으면, 음양(陰陽)ㆍ허실(虛實)ㆍ약석(藥石)에 기술을 펼치니, 널리 베풀고 백성을 구제한 공이 나라를 다스리는 공에 버금간다. 때문에 옛날의 어진 선비이면서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은 왕왕 의가에 의거하였던 것이다. 醫居九流之一, 蓋雜流也. 吾聞上醫醫國, 其次醫病, 此何以稱焉? 治國猶治病, 有醫之道焉. 然士必顯而在上, 國可得醫也, 或窮而無所試, 則寓其術於陰..
3. 서사분절에 따른 내용분석 그러면 작품으로 들어가 본다.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은 빈부(貧富)를 고려하지 않고 그야말로 하층민들에게 인술을 베풀어 의원의 진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과 그 서사지향부터 차이가 난다. 하층민에게 의술을 베푸는 인물의 서사는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보이기도 하지만【『용재총화(慵齋叢話)』를 보면 백귀린(白貴麟)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백귀린은 의술(醫術)을 잘하였으나 자신의 처지와 경제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하층민을 치료하는 데 진력을 한 특이한 인술(仁術)의 소유자로 그려져 있다. 그런 점에서 조광일의 의술행위와 상통하는 바 있다.】, 이조 후기 인물전에서 이러한 인물을 형상한 경우는 적은 편이다. 여항인이 편찬한 『이..
2. 조광일을 다룬 여러 출전 비교 조광일에 대한 내용은 유재건(劉在建: 1793~1880)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서 『이계집(耳谿集)』을 원출전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이경민(李慶民: 1814~1883)의 『희조일사(熙朝軼事)』도 『이계집(耳谿集)』을 원출전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과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의 「조의사광일(趙醫師光一」을 비교해보면,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의 내용은 축약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계(耳溪)의 평을 대신하여 유재건 자신의 평을 첨가시켜 놓고 있다. 그리고 이계가 직접 견문한 사실을 없애거나 축약시켜 작품의 서사도 평이하게 만들고 있어 이계의 전에서 느낄 수 있는 서사의 흥미와 생동성을 반감시키고 있다. 이경민(李慶民)의 『희조일사..
2) 침술(鍼術)로 하층민에게 인술을 베푼 의의(義醫):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 1. 서사분절 피재길이 ‘웅담고(熊膽膏)’로 내의원의 침의로까지 발탁되어 이름을 날린 인물이라면, 조광일은 독특한 침술로 시정공간을 누비면서 오직 민(民)을 위해 인술을 베푼 의의(義醫)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광일의 삶은 피재길의 삶과 상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서사분절을 보기로 한다. ① 의술의 공은 나라를 다스리는 공에 버금가며, 어진 사람이면서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이 의술에 은거한다는 작가의 전평(前評). ② 충청도 내포에 조광일(趙光一)이라는 의원이 있었는데, 그의 선조는 본래 태안(泰安)의 대성(大姓)이었으나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나그네로 합호(合湖)의 서쪽에 정착한다. ③ 조생은 침(針)으..
5. 작품에 드러난 이후의 삶에 대해 작품은 여기서 그치고 있으나, 이후 피재길은 계속 내의원의 침의로 계속 활동한다. 그러다가 정조의 사망과 함께 그는 정조의 사인(死因)에 연루되어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는 인물로 다시 부각된다. 종지로 임종한 정조의 사인은 당시 정치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약원(藥院)의 의원들 역시 역의(逆醫)로 지목되어 국문을 당하거나 문책을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정조의 병을 치료하였던 내의(內醫) 강명길(康命吉)과 방외의(方外醫) 심인(沈鏔) 등이 국문을 당하게 된다. 그 결과 강명길은 역의로 지목되어 작처(酌處)하기 전에 물고(物故)되고, 심인(沈鏔) 역시 역의로 지목되어 경흥부로 유배형을 당하게 된다. 또한 침의였던 피재길(皮載吉)ㆍ백성일(..
4. 이계의 피재길을 향한 부정적 시선 그런데 당시 피재길은 의학을 정상적인 수학하지도 않은 데다, 의서조차 제대로 읽지 않은 처지였기 때문에, 임금의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실사에 가까운 것으로 보여진다. 이계(耳溪)는 이를 마치 현장에서 일어난 정황을 직접 견문한 듯한 필치로 포착하여 피재길의 인간적 모습과 행동양식을 전해준다. 문면(文面)에 보이듯 작품에서는 피재길의 자신 없는 듯한 어눌한 말투, 자신이 처방한 약에 대한 답변, 그리고 그만이 소유한 비방(秘方)과 인간적 면모가 서로 교차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외견상으로 정상적인 의학 수업을 받지 못해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과, 비법으로 조제하여 당당하게 웅담고를 지어 바치는 대목은 어찌 보면 썩 어울리..
3. 이계집과 실록의 차이 서사분절 ④에서 ⑫에 해당되는 두 번째 일화는 피재길이 웅담고를 조제하여 정조의 종기를 낫게 하여 침의가 되는 등 포상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언뜻 보면 앞의 설명 부분과 두 번째 일화는 계기적 관계를 가지지 않은 듯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부적으로는 연결되어 있다. 피재길이 고약으로 명성을 획득하여 명의(名醫)로까지 알려지게 된 부분과, 이를 계기로 종국에는 관료의 추천을 받아 정조의 종기를 치료하는 적임자로 불려간 것은 인과관계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일화는 피재길의 인간적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의원으로서의 진멱모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작품의 눈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그러면 이 부분을 보자. 피재길이 처음에는 비..
2. 작품의 서두를 분석하다 위의 작품에 나타나 있지 않으나, 본래 피재길의 본관은 홍천(洪川)이며 자(字)는 여성(汝成)으로 1749(己巳)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1793(癸丑)년에 입사(入仕)하여 나주 감목관까지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야말로 그는 시정을 돌아다니던 무명의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기실 그의 구체적인 인적 사항을 알 수 있는 점은 흥미롭다. 아마도 그는 웅담고로 정조의 종기를 낫게 한 보상으로 내의원(內醫院)의 침의(鍼醫)로 입사하여 『태의원선생안(太醫院先生案)』에 기록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가 한다. 작품은 피재길이 민간의 떠돌이 의원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 작가의 설명 부분과 이후 정조의 종기를 낫게 하여 내의원의 침의가 되는 일화 부분, 그리고 작가의 의론 등..
3. 작품의 분석 앞서 살펴 본 대로 이계(耳溪)가 남긴 11편의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작품 성취와 개성적인 작가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는 그의 작가의식이 두드러진 ‘의원전(醫員傳)’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과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이 그 분석의 대상이다. 1) 시정(市井)의 의원(醫員)에서 어의(御醫)로: 「피재길소전(皮載吉小傳)」 서사분절 동아시아 서사에서 ‘전(傳)’의 양식으로 의원(醫員)을 주목한 사례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을 하나의 독립 제목으로 마련하여, 당내 최고의 명의였던 태창공(太倉公)과 편작(扁鵲)의 의술과 삶을 주목한 바 있다. 이를 시원(始原)으로 하여 이후 의원에 대한 전(傳)은 여러..
2.4 이계전과 후대 야담 발전상 마지막으로 이계(耳溪)의 인물전은 『청구야담(靑邱野談)』이나 『청야담수(靑野談藪)』와 같은 후대 야담의 발전에 적지 않게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계의 전 작품이 『어우야담(於于野談)』이나 『천예록(天倪錄)』과 같은 전대의 필기(筆記)와 야담집 등에 보이지 않는다. 이를 보면 『청구야담(靑邱野談)』 등에 수록된 작품들은 원출전이 이계의 전(傳)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 이계의 전 작품과 야담집의 서사를 비교하면 글자나 표현 등에서 부분적인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인 골격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이 점에서도 이계의 전 작품이 후대 야담 성립에 적지 않게 기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계의 전은 『청구야담(靑邱野談)』에 6편, 『동야휘집(東野彙輯)』에 2편 ..
2.3 이계전의 특징② 이계전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경향은 전통적 입전의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사건 자체와 사건 속의 인물이 주는 ‘흥미’에 보다 큰 관심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계는 단순히 교화적 서술에 치중하지 않고, 사건 자체에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서사로 교직하고, 현실 상황에서 일어난 문제적 사건을 사실대로 제시하는 데 초점을 둘 경우가 많다. 이러한 서사방식은 전통적 인물전에서 볼 수 있는 ‘입전의식’에서의 ‘도덕적 교화’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침은조생광일전(針隱趙生光一傳)」에서 이계는 하층민에게만 인술을 베풀고, 세리(勢利)를 위해 상층의 권귀(權貴)와 전혀 교유하지 않는 조광일의 일화를 서사에 넣어 교직하고 있다. 이계(耳溪)는 조광일의 독특한 삶과 인생..
2.2 이계전의 특징① 위에 제시한 11편의 작품을 살펴보면 전통적 입전 대상인 효자ㆍ의병장ㆍ처사를 비롯하여 무인ㆍ여항인ㆍ수문장ㆍ의원ㆍ천주교 지도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는 당대의 새로운 인간형으로 주목받았던 인물들까지 아우르고 있다. 더욱이 홍차기【홍차기는 풍산 홍씨로 홍인보의 아들인데, 이계와는 인척간이다. 홍차기는 사후 국가에서 정려질(旌閭秩)을 하사받았다. 순조 22년 3월에 예조에서 각 식년에 서울과 지방에서 충(忠)ㆍ효(孝)ㆍ열(烈)을 정부에 보고하면서 올린 효자 정려질에 홍차기의 이름이 들어 있다. 1795년 충주목사로 있던 이가환(李家煥)은 홍차기를 추모하여 비문(碑文)을 지어주었는데, 현재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특히 홍차기의 행동과 아버지를 신원(伸寃)한 이야기는 당대는 물론 그..
2. 이계전(耳溪傳)의 현황과 그 특징 이계(耳溪)는 민족의 고대사를 위시하여 임진ㆍ병자 양 전쟁에 이르기까지 국란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역사적 업적을 남긴 수다한 애국 인물을 입전하여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을 창작한 바 있다. 이 작품은 기존의 자료에 실려 있는 것을 토대로 편찬한 것인데, 주로 역사서에 실린 것과 개인 문집류(文集類), 그리고 실기류(實記類)를 비롯하여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여 엮은 것이다. 여기서 이미 전(傳) 작가로서의 이계(耳溪)의 재능과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은 대개 전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작품으로 옮겨 놓았다. 예컨대 이계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의 열전을 근거로 약간의 윤색을 가한 경우도 있고, 개인문집이나 실기류라..
이계 홍양호의 의원전(醫員傳)에 나타난 인물 형상 진재교(성균관대) 1. 머리말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개방적 사유로 탁월한 행정능력을 보인 개명적(開明的) 관료(官僚)다. 그는 민의 삶과 지방 고유의 향토 정서를 시로 포착한 점에서 실학파(實學派) 문학과 동일한 성취를 이룬 바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18세기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선점하고, 다양한 양식으로 그 새로움을 포착한 점은 남다른 것이거니와, 학계에서 이 점을 진작 주목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간의 연구 또한 주로 이계의 시와 사유양식, 문학론과 문학 활동 그리고 학문 성향 등에 주목하여 성과를 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나 성과에 가려, 이계가 탁월한 전(傳) 작가라는 사실에 시선을 두지 못한 것 또한 사..
고문(古文)이란? 한문학에서 고문이라 불린 세 가지 경우 근대 이전의 한문학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 ‘고문(古文)’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첫 번째는 문자인 고대자체(古代字體)로서의 고문이다. 선진(先秦)시대의 과두문(蝌蚪文)이나 전서(篆書)같은 문자를 통칭하는 경우이다. 우리나라에서 허목(許穆)이 편찬한 『고문운율(古文韻律)』의 내용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자체(字體)로서의 개념이 고문이 가지고 있던 본래적인 뜻이다. 두 번째는 고대 전적(典籍)이나 학파로서의 고문이다. 한나라 사람들이 유가의 전적을 공자(孔子)의 옛 집에서 발견하여 ‘벽중서(壁中書)’라 불렀던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후대에 경학연구자들 사이에서 금고문논쟁(今古文論爭)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고문의 개념이 학파를 ..
한문학에 나타난 이속(俚俗)의 수용 양상 -속언(俗諺)을 중심으로- 김영주(金英珠) *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 한문교육과 부교수 / 전자우편 : kyjkyj333@hanmail.net 목차(目次) 1. 문제의 제기 2. 조선조 제가의 속언 인식 3. 속언 활용의 제양상 1. 공식적 언어생활에의 활용 2. 문학 창작의 재료로 활용 1) 함축과 비유, 참신성의 조성 2) 한시의 소재로 활용 3) 해학과 조롱의 수단 4) 변증 재료에의 활용 4. 마무리 인용 목차 / 지도
5. 마무리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한문학에서의 이속(俚俗)의 수용 여부는 특정한 시기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작가 개인의 문학관 내지 창작관의 영향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비리하고 저속하다고 여겨지는 속언으로 제한하기는 하였지만, 조선 전기부터 작가들은 비리한 속언을 그들의 문학 작품 속에 수용하고 있으며 그 수용 의도 역시 실용성과 교훈성의 측면에서부터 유희적인 해학이나 조롱 그리고 문학의 효과적인 수사기교 그리고 대상을 직관이나 경험에 의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분석하려는 변증적 연구의 자료로서도 활용하고 있다. 이로 볼 때, 한문학에서의 ‘이속’의 수용은 특정 시기에 집중되는 한문학의 특화된 양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전시기에 걸치는 한문학의 다양한 양상의 한 부분으로 이..
4. 속언을 변증 재료로 활용하다 이규경(李圭景)은 조부인 이덕무에서부터 부친 이광규로 이어져 온 박학과 실용의 학문 성향을 계승하여 명물도수(名物度數)와 박물학(博物學)을 중시하였다. 그의 학술의 집대성으로 평가되는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완성에는 사물의 시말을 밝히려는 벽(癖)이라고 부를 정도의 열정적인 학문 자세와 박학다식을 열망하며 사소한 기록조차 소중히 간직하는 기록정신, 차기(箚記)와 변증(辨證)의 서술방식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 한 예가 충주 지역의 형세를 변증하기 위한 재료로 속언을 활용한 것이다. 속언에 전하기를, “충주에는 삼다(三多)가 있으니 석다(石多)ㆍ인다(人多)ㆍ언다(言多)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충주는 고을에 돌무더기가 많고, 고을이 많아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다른..
3. 해학과 조롱의 수단 해학(諧謔)은 예교(禮敎)를 앞세운 조선 지식인들에게 금기시되는 단어 중의 하나였다. 조선전기에 긴장된 관료생활의 경직성을 해소하고 사대부의 심심파적으로 이용되던 골계류(滑稽類)의 찬집과 유행이 중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점차로 사라지게 된 것도 어쩌면 엄숙한 유교적 예교주의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허균(許筠, 1569~1618)은 이와 같이 엄숙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방달한 삶의 방식을 택하였고 이단으로 취급되던 도불(道佛)에 경도되었으며 서얼과 통교하였다. 한편 고문가로 자처하면서 옛사람의 글을 본뜨지 말고 평이하면서도 유창한 자신만의 글쓰기를 강조하였다【許筠, 『惺所覆瓿稿』 卷12, 「文說」, 238면.】. 그의 방달불기한 이단적 성향과 고문 지향의 창작의식은 문학적으로 어떻게 ..
2. 한시의 소재로 활용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은 속언 중에서 절묘한 것들은 가락이 착착 들어맞는다는 김상숙(金相肅, 1717~1792)의 말을 인용하며 ‘蜻蛉蜻蛉, 往彼則死, 來此則生[잠자리야 잠자리야, 저리 가면 죽고 이리 오면 산다]’와 같은 속언은 아무런 이치가 담겨 있지는 않지만 가락에 맞는 협운의 특성을 지닌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三尺髥, 食令監[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영감이다]’, ‘看新月, 坐自夕[새벽달 보자고 저녁부터 기다린다.]’, ‘久坐雀, 必帶鏃[오래 앉은 참새 화살 맞는다.]’ 등의 속언도 운어를 이룬다고 하였다【成大中, 『靑城雜記』 卷4, 醒言. 金坯窩曰, 俚語之妙者, 無不合韻. 蜻蛉蜻蛉, 往彼則死, 來此 則生, 此直無理俚謠, 而亦諧於韻. 如所謂三尺髥食令監, 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