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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Ⅱ. 문제중심학습법(問題中心學習法)과 한문과(漢文科) 교육(敎育)의 접점(接點) 이제 선행 연구 성과와 PBL의 특징, 그리고 한문과 교육과정에서 PBL과 관련된 내용은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겠다. 한문과에서 PBL을 다룬 연구 성과는 많지 않다. 학술논문은 전무(全無)하고, 학위논문은 송분화의 『문제중심학습을 활용한 고사성어(故事成語) 교육 방안』이 있다. 선행 연구 성과가 적은 이유로는 PBL이 한문과(漢文科) 교육(敎育)과 맞지 않은 것이라 여겨서 그럴 수도 있고, 연구 주제로 삼기에 매우 지엽적인 것이라 여겨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PBL과 같은 ― 꼭 PBL이 아니더라도 ― 학습자 주도의 교수ㆍ학습 방법을 적용하고, 적용하고 난 뒤의 학습자 반응 양상을 소개하고, 학습 결과를 공유하는 것은..
한문과(漢文科)에서의 문제중심학습법(問題中心學習法) 연구(硏究) 백광호(白光鎬)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부교수 E-mail : khbaek@jj.ac.kr 【국문초록】 이 연구의 목적은 한문과에 적용 가능한 문제중심학습법을 살피고, 문제중심학습 법을 적용한 한문과 교수ㆍ학습 사례를 소개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필자의 선행 연구(「한문과에 적용가능한 웹기반수업과 문제중심학습」)에 이어지는 것으로, 선행 연구가 가진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2015 개정 한문과 교육과정에 등장한 ‘핵심역량’을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문제중심학습법의 특징과 한문과 교육과정과의 관련성을 개관한 후, 문제중심학습법을 적용한 한 문 수업 사례를 소개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한문과 교육과정 내용 중에..
Ⅴ. 맺으며 이상으로 한문과에서의 문제중심학습법 실천을 위해 다른 교과의 연구 성과와 문제중심학습법 이론과 사례를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문과 문제중심학습법 수업을 통해 학습자들은 자기주도적 학습능력과 문제해결능력을 기를 수 있었고, 그룹별 활동을 통해 의사소통 능력과 공동체 역량을 함양할 수 있었다. 이는 2015 개정 한문과 교육과정에서 강조하고 있는 교과 역량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앞으로 한문과 수업에서 문제중심학습법을 활용한 사례가 다양해지기를 기대한다. 또한, 문제중심학습법을 한문 과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한문과에 적합한 문제 상황 개발이 중요하므로, 현장 교사의 문제 개발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연수가 개최될 필요가 있다. 연구자는 한문과 교수・학습 방..
Ⅳ. 현장 수업 실천 사례 이제 교육 실습생들이 제작한 문제를 현장 실천가가 학교 실정에 맞게 수정・변형하여 현장 수업에 실적한 사례를 소개해 보겠다. 이 수업은 2개월(3~4월)간 진행되었는데, 교육 실습생들이 교육 실습을 나가는 4월에 맞춰 문제를 제작하였기 때문에 문제 범위가 한자, 어휘, 성어로 제한적임을 밝힌다. 《중학교 한문》 (미래엔) 교과서의 단원 가운데 의뢰받은 문제를 적용할만한 단원을 선정하고, 2015 개정 한문과 교육과정의 성취 기준【[9한01-01] 한자의 모양・음・뜻을 구별한다. / [9한03-01] 한자로 이루어진 일상용어를 맥락에 맞게 활용한다. / [9한03-03] 한자로 이루어진 성어의 의미를 이해하고 맥락에 맞게 활용한다.】과 교과 역량【∙ 의사소통 능력은 한자와 한문 ..
Ⅲ. 연구 내용 문제중심학습법의 일반적 절차는 ‘문제 파악→과제수행 계획 수립→문제해결모색→결과 정리→ 발표→성찰’ 순으로, ‘문제’를 중심으로 교육 활동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문제’개발이 매우 중요하 다. 이 연구의 핵심은 한문과(漢文科) 문제중심학습법(問題中心學習法)의 이론화(理論化)이고, 효과적인 실천 방안 모색이다. 이 두 가지를 통해 한문과에서의 문제중심학습법을 일반화할 수 있는 방안을 구안하는 것이다. 즉, 한문과에 맞는 ‘문제’를 개발한 후 ‘절차’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고, 그 과정을 통해 ‘학습’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수업에서 다루는 ‘문제’는 교과 지식이나 원리를 적용하는 단순한 문제로, 학습자가 개념이나 원리를 제대로 이해했는지를 점검하는 데에 사용된다. 그러나 문..
Ⅱ. 선행 연구 성과 이제 한문 교과나 타 교과에서의 문제중심학습법(問題中心學習法) 선행연구성과(先行硏究成果)를 살펴보겠다. 이를 통해 한문과에 유용한 핵심요소를 추출하고 한문과(漢文科) 교육실습(敎育實習)을 나가는 학생들이 중등학교 수업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문제 개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현장 교사가 활용할 수 있는 일련의 실천방안을 제시한다. riss에서 최근 5개년의 PBL 관련 선행 연구 성과를 검색한 결과【2019년 3월 5일 검색.】, 국내 학술지 논문만 1,600여 편이 나왔다.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이 연구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연구 성과만을 살피고자 한다. 우선 초등학교 관련 연구 성과는 제외하고, 중등학교 수업에 관련된 성과로 제한하겠다. 대학에서의 연구 성과가 ..
한문과(漢文科) 문제중심학습법(問題中心學習法)의 이론(理論)과 실천(實踐) 이 글은 2019년 1월 5일(토) 공주대학교에서 「한문과 수업 정교화를 위한 이론과 실천」이라는 주제로 열린 한국한자한문 교육학회 동계학술대회에서 기획주제로 발표한 글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백 광 호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부교수(제1저자) / khbaek@jj.ac.kr 공 민 정 두루중학교, 교사(제2저자) / rhdalswjd02@hanmail.net 국문초록 이 연구는 타 교과에서의 문제중심학습법을 이론적으로 탐색하여 한문과에서의 문제중심학습법 이론화를 모색하고, 중학교 한문과에서의 문제중심학습 실천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한문과에서의 문제중심학습법을 일반화할 수 있는 방안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중등학교 한문과 ..
2. 민생(民生)에 대한 응시(凝視)와 핍진(逼眞)한 사생(寫生) ‘진시’의 대상은 산수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그 산수 속 사람들의 삶 또한 시 속으로 깊이 끌어안았다. 성리학은 사민(四民) 가운데서 사(士)의 책무를 대단히 강조한다. 사대부는 위로는 임금이 성군(聖君)이 되도록 보좌하고 아래로는 왕화(王化)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계층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삶을 살피는 것은 벼슬살이의 여부와 상관없이 사대부라면 응당 해야 할 책무와 같은 것이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 또한 이러한 인식의 틀 위에서 백성을 사고하였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민(民)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아래 작품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田翁夢旐旟 夢後江雨盈 전옹(田翁)이 풍년 징조를 꿈에서 보았는데 깨고 나..
3. 물아교감(物我交感)의 이지적(理智的) 흥취 일상은 행위 주체와 대상이 교섭하는 관계의 총체로서 ‘반복적’이고 ‘특별하지 않은’ 속성을 지닌다. 그런 까닭에 일상을 형상화한 시편 속에는 주체가 대상을 인식하고 교섭하는 특징적인 면모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백악시단의 ‘진시’는 창작에 있어 천부(天賦)의 상태로 수양된 주체가 대상의 진면목을 포착하고 거기서 발현된 정감을 형상화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백악시단이 자신들의 일상을 형상화한 시편들은 그들의 일상이 어떤 특징을 보이며, 그들의 ‘진시’가 어떤 지향을 보이는지 살펴볼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자료가 될 수 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일상을 형상화한 작품들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모습 중의 하나는 바로 ‘고요[靜]’를 지..
4. 소통의 깊이와 진정(眞情)의 울림 사람은 누구나 일상 속에서 허다한 사태에 직면하고 다양한 감정을 표출하며 살아간다. 이번에 살필 작품들은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일상에서 발생한 다양한 감정들을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을 통해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일상에서 촉발된 감정을 어떻게 형상화하는지 그 특징적인 면모를 살펴보고 ‘진시’의 측면에서 그 의미를 탐색하고 한다. 앞서 본 시편들이 일상 속 경물들과의 교감에서 나온 시편이었다면, 이번 살필 작품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소통의 깊이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먼저 살펴볼 작품은 가족이나 벗을 잃은 슬픔을 형상화한 시편들이다. 죽음은 인간의 유한한 숙명이 충격적으로 돌출되는 일상사의 비극이다. 인위적인 노력으로는 도무지 어찌 할 수 없는 시원적 단절을 경..
Ⅴ. 진시(眞詩)의 시사적(詩史的) 의의 백악시단의 ‘진시’는 조선후기 한시사의 전개 속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성취를 일구어냈다. 먼저, 백악시단은 성리철학의 천기(天機) 개념을 시론으로 변용시킴으로써 복고 일색의 시단에 신시(新詩) 창작의 길을 개척하였다. 백악시단의 천기론은 대상에 오묘하게 발현되는 천기와 조우하여 천리를 체인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 까닭에 시적 대상은 흥취나 비애와 같은 주관적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종속물이 아니라 물(物) 자체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그들에게 대상[物]은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경계 대상이 아니라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탐구대상으로 심화되었다. 시적 대상[物]의 위상이 이렇게 설정되면서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대상을 통해 발현되는 천기와 조우하고 그것을 시로..
Ⅵ. 결론 본고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했던 백악시단을 대상으로 그들의 시론과 작품을 분석함으로써 조선후기 한시사가 보여주었던 다양한 변화의 실상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본고가 백악시단을 주목한 것은 그들의 시론과 작품이 보인 특징적 면모들이 조선후기 한시사의 다양한 변화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나아가 이들이 조선후기 한시의 다양한 변화들을 선도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존재는 인정되나 동인으로서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던 백악시단의 실체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백악시단은 ‘진시(眞詩)’ 창작을 목표로 17세기 후반인 1682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18세기 중반을 전후로 활동이 약해진 문인 그룹으로서 김창협, 김창흡, 홍세태, 조정만, 김창업, 김시보, 이해..
Ⅳ. 진시(眞詩)의 정신적 깊이와 미학(美學) 이하곤은 조선중기 이후로 진행된 시단의 변화상을 폐단 극복의 연쇄관계로 개괄하면서 백악시단의 ‘진시’가 출현하게 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國朝之詩, 自明宣以後, 盖累變焉. 蘇齋、芝川才具宏蓄, 氣力昌大, 然雅俗兼陳, 體裁未純, 故其弊也雜; 孤竹、玉峰以淸新秀警矯之, 然神寒骨薄, 氣象急促, 故其弊也隘; 東岳、石洲又以渾圓和平矯之, 然思冗語膚, 格調不高, 故其弊也腐; 東溟又以悲壯整麗矯之, 然叫呶紛拏, 情境不眞, 故其弊也虗. 於是乎金三淵、洪滄浪之詩出焉. -李夏坤, 『頭陀草』책16 「洪滄浪詩集序」】. “동명(東溟, 鄭斗卿)이 또 ‘비장(悲壯)’과 ‘정려(整麗)’로써 저들의 폐단을 교정하였으나 요란하고 혼란하여 정(情)과 경(景)이 참되지 않았기 때문에 허황된 폐..
3. 성리학적 천기론(天機論)의 문학적 변용 주지하듯, 천기(天機)는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편의 “其嗜慾深者, 天機淺也.”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 까닭에 초기 연구자들 가운데서는 노장(老莊) 철학(哲學)의 ‘무위(無爲)’에 초점을 맞추고 천기론은 주자(朱子) 중심의 재도론(載道論)과는 상반되는 의식에서 제출된 것으로 인식했다【정연봉, 「조선전기(朝鮮前期) 성정(性情) 논의(論議)와 장유(張維)의 천기론(天機論)」, 『민족문화연구(民族文化硏究)』 23, 1990 참조.】. 그러나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즉각적으로 주자학에 대한 반발의 논리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조선조에 『장자(莊子)』는 문학적 능력을 배양하고, 사유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측면에서 문인이라면 누구나 할 것..
2. 진시(眞詩)의 제창(提唱)과 복고파(復古派)·공안파(公安派)의 비판적 수용 일반적으로 한국 한시사에서 조선후기는 전대 복고파 문인들이 노정한 폐단을 극복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안대회, 앞의 책, 37면 참조.】. 임란을 전후하여 조선에 들어 온 명대 복고파의 문학이론은 창작물의 질적 고양을 갈망하던 조선 문인들에게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모범이 되는 전범[文必秦漢, 詩必盛唐]을 설정하고 그것을 학습함으로써 전범에 버금가는 문학적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논리는 일견 개연성이 높은 매력적인 방법론이었다. 그러나 전범으로 삼은 텍스트의 구속은 역기능을 초래하였다. 시공간의 격차가 큰 텍스트는 그 시대의 어휘 사용, 표현 방법, 정서의 습득에 매몰되게 하였고, 그 결과 정작 추구하고자 했..
Ⅲ. 진시(眞詩)의 기저(基底)와 논리(論理) 1. 자득(自得)의 학문자세와 진(眞) 추구의 정신 백악시단의 ‘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백악시단 문인들의 학문 자세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학문 자세는 ‘박학(博學)’과 ‘자득(自得)’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자득을 중시하는 학문적 자세가 ‘진(眞)’의 논리와 긴밀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백악시단의 이론가들은 주자학을 정학(正學)으로 인식하고 주자학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사유를 전개해갔다. 그러나 그들의 학문 자세는 주자학만을 묵수하고 여타의 학설들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독서의 범위를 대단히 넓게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박학을 통해 자기의 식견을 세우는 자득을 중시하였다. 아래의 글은 백악시단의 이론가였던 김창협과 김창흡..
2. 동인(同人)들의 문학 활동 백악시단의 본격적 출범을 알린 것은 낙송루시사(洛誦樓詩社)였다. 낙송루시사는 1682년에 결성되어 1689년에 해체되었는데, 그 결성과 해체 과정은 홍세태의 다음 글에 자세하다. 나는 젊은 시절에 묘헌(妙軒) 이공(李公, 李奎明)을 종유하였는데 공의 집은 북산 아래에 있어 삼연 김공의 거처와 서로 가까웠다. 그때 삼연께서 고시를 창도하여 낙송루를 열고 여러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공은 같은 마을에서 나란히 우뚝하여 삼연과 더불어 겨루며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나는 두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한마디로 도가 합치되는 것이 마치 돌을 물에 던져 넣는 것 같아 망형지교(忘形之交)를 허락한 까닭에 두 공 사이에서 마음껏 종유할 수 있었다. … (중략)… 당시에 우리 세 사람은 ..
5. 맺음말 조선후기 활발하게 등장하는 음성언어에 대한 논의들은 명청교체(明淸交替) 이후 중화의 고유한 음성언 어를 규명하려는 경향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이적(夷狄)의 음성언어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중화의 음성언어를 찾아보려는 노력이 한문체계에 음성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부여하였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상적인 한자음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자음의 규명 은 한자가 가지고 있었던 중요한 장점, 즉 시대와 지역과 관련 없이 일관성을 유지하던 문자로서의 권위를 반감시켜 한문체계를 상대화·객관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왜냐하면 음성은 특성상 보편적·균일적이라기보다는 지역적·특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한시(漢詩)의 민요풍이나 국풍(國風)에 대한 관심, 한문체계 속에 ..
2) 방언(方言)ㆍ향어(鄕語)ㆍ속어(俗語)의 사용 이 시기에는 문체의 문제와 함께 조선의 방언(方言)·향어(鄕語)·속어(俗語)에 대한 관심도 함께 표출되고 있었다. 속담(俗談) 등 일상의 음성언어적 표현들을 한역화하려 노력하고 이에 대해서 새롭게 관심 갖는 것은 이 시기 특징적인 경향 가운데 하나였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열상방언(洌上方言)』을 통하여 고유한 속담들을 한역화하였다.【李德懋, 『靑莊館全書』 권62 「冽上方言」】 정약용(丁若鏞) 또한 속담을 한역하여 『이담속찬(耳談續簒)』을 지었다.【丁若鏞, 『與猶堂全書』 第一集 雜纂集 권24 「耳談續纂」 “王氏耳談者 古今鄙諺之萃也 經史所著 頗有脫漏 今復收錄 石泉申承旨綽亦以十餘語採而助之 因念星翁百諺 卽吾東鄙諺韻 今取可韻者韻之 因又 收其脫漏..
4. 백화문학(白話文學)과 방언(方言)·향어(鄕語)·속어(俗語) 1) 백화(白話)문학의 확대 이 시기 음성언어의 문제는 언문일치의 영역뿐만 아니라 백화문학(白話文學)과 방언(方言)·향어(鄕語)·속어(俗語)의 사용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18세기 후반은 문체반정(文體反正) 등 글쓰기에 대한 다양한 고민이 표출되던 시기였다. 새로운 문체의 글쓰기 문제가 고민되고 제기되는 것은 기존 진한고문체(秦漢古文體)와 당송고문체(唐宋古文體) 등의 고문(古文)에 입각한 정형화된 문언적 글쓰기가 이 시기에 오면 다양한 현실적 요구와 솔직한 욕망들을 표현하는 데 점차 한계에 부딪치게 됨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세부적인 감정과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다른 종류의 글쓰기가 고민되었던 것이다. 명대(明代) 『수호전(水滸傳)』, 『서..
2) 물명(物名) 유서(類書)의 편찬 18세기말과 19세기 초엽에 들어서면서 많은 물명(物名) 유서(類書)들이 편찬되었다.【홍윤표, 1988 「十八·九世紀의 한글 類書와 實學-특히 ‘物名攷’類에 대하여-」 『동양학』 18, 481~483면 참조.】 『물명고(物名攷)』, 『청관물명고(靑館物名攷)』, 『재물보(才物譜)』, 『물보(物譜)』, 『광재물보(廣才物譜)』, 『시명다식(詩名多識)』 등 다양한 물명(物名) 유서(類書)들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유서의 등장 배경에는 당시 유행한 명물도수지학(名物度數之學) 등의 영향 관계를 우선 상정해 볼 수 있다.【李晩永, 『才物譜』 序(金允秋),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3면) “吾友李成之 才高學博 老猶不懈 病世之學士 以名物度數爲不急 而卒然有所値 齎恨於固陋者有之”】 ..
3. 언문일치(言文一致) 인식의 대두 1) 언문불일치(言文不一致)의 문제 제기 18·19세기 동아시아의 활발한 지식소통과 함께 제기된 언문일치의 문제는 음성언어에 대한 이 시기의 고민과 깊이 연계되어 있었다. 18세기 후반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많은 양의 서적들을 들여왔고, 이것은 지식인 사회를 자극했다. 이러한 지적 자극 속에서 다양한 문예사조와 사유들이 생성되었다. 조선의 북학파(北學派)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들 이외에도 많은 지식인들은 중국 서적을 탐독하고 중국의 명사들과 교유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지적 네트워크가 국내를 넘어 중국에까지 확산되면서 그들 사이에는 같은 문자를 공유했다는 ‘동문(同文) 의식’과 한 시대를 함께 산다는 ‘병세(並世) 의식’이 형성되는 상황이었다.【이에 대해서..
2) 음성언어(音聲言語) 인식과 ‘조선적인 것’ 이 시기 한문체계 속에서 음성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 시도들은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었 다. 한문체계에서 음성적 측면에 대한 당대인들에 대한 관심은 광범위하게 포착된다.【한시에서의 민요취향의 대두도 이러한 문제와 깊은 관련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동환, 1978 「조선후기 한시에 있어서 민요취향의 대두」 『한국한문학연구』 3 참조.】 예컨대, 이희경(李喜經)은 『시경(詩經)』 삼 백 편은 모두 음(音)을 가져 악(樂)이 될 수 있었다고 하면서 후세 시에서는 악(樂)이 탈각되면서 시도(詩道)가 없어졌다고 탄식하였다.【李喜經, 『雪岫外史』 권1, 43면 “詩之爲道 皆爲樂章 故三百篇皆可以被之音而爲樂 自漢以下 所賦之詩 或徒爲詩 未必..
2. 음성언어(音聲言語)에 대한 관심 증대 1) 명청교체(明淸交替)와 음성언어(音聲言語) 인식의 계기 조선후기 음성언어에 대한 문제는 우선 『청구영언(靑丘永言)』(1728)이나 『해동가요(海東歌謠)』(1755)의 편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조선 고유의 노래와 가요에 대한 관심과 깊은 관련성을 가졌다.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여항(閭巷) 촌부의 노래가 사대부의 문자보다 더욱 진실하다고 하고,【金萬重(洪寅杓 옮김), 1987 『西浦漫筆』, 일지사, 388면. “今我國詩文 捨其言而學他國之言 設令十分相似 只 是鸚鵡之人言 咿啞而相和者 雖曰鄙俚 若論眞贋 則固不可與學士大夫所謂詩賦者 同日而論”】 유득공(柳得恭, 1749~1807) 이 여항(閭巷)의 이어(俚語)가 사대부의 글보다 자신의 性情을 솔직히 표..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조선 지식인의 어문(語文) 인식 경향 조 성 산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1. 머리말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은 조선의 지식체계가 많은 변화를 보이던 때였다. 이는 조선의 지적 수요와 함께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 등 청(淸)나라의 문화사업 수용에도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변화된 대청의식(對淸意識)을 통하여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인정하고 수용하고자 하는 의식이 확산되어 갔다. 이에 더하여 서학(西學)을 통한 서양문물의 도입도 조선의 지식체계를 자극하였다. 물론 이를 수용하고자 하는 조선 사상계의 내적 변화를 간과할 수 없다. 이처럼 당시 풍성하게 제기된 지식담론에 대한 문제들은 19세기 중반기까지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IV. 맺음말 한글 사용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서는 여성과 아동 그리고 하층민을 한글의 주요 사용자로 보고 있다. 이는 현재 남겨진 자료의 대부분이 아녀자와 하층민을 위해, 혹은 그들에 의해 쓰여졌다는 점에서 타당하다. 이 글에서는 기존 연구에서 소략하게 다루었던 한글 사용 계층인 사대부를 한글의 중요 사용자로 지적하고 그들의 한글 사용 양상을 분석해보았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우선 사대부는 번역서를 읽기 위해 한글을 사용했다. 사대부들이 주로 독서한 번역서는 『사서언해』와 『두시언해』이다. 이 둘은 표준해석을 확정하고 이 표준해석을 확산시킬 목적으로 당대의 학술역량을 결집하여 만든 책이다. 따라서 한문의 학습이 번역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한자..
2. 시가의 가창(歌唱)과 한글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기의 생각과 정서를 드러낼 때 기존의 여러 관습과 장르를 두루 실험하고 상황에 알맞은 형식을 찾아내고자 고민했다. 이때 한문과 한시는 사대부들의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자연스럽고도 중요한 수단이었지만 한글을 이용한 시조와 가사 또한 그만의 정서와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었다. 한문을 사용한 문학과 한글(혹은 우리말)을 사용한 문학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혹은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3-3] 오늘의 시는 옛날의 시와 달라서 읊을 수는 있어도 노래할 수는 없다. 만약 노래를 부르려고 한다면 반드시 한글로 엮어 지을 수밖에 없다. […] 아이들로 하여금 조석으로 이를 연습하여 노래 부르게 하고 나는 궤에 기대어 듣기도 한다.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
Ⅲ. 사대부들의 우리말 음가의 표현 1. 한자음의 혼란과 운서의 편찬 한자의 정확한 음이 무엇인가는 사대부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한자의 정확한 음가 표기는 한글 창제의 이유 중 하나로 거론될 만큼 중요한 문제였으며 학술의 중요 토론거리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문헌 도처에서 한자의 정확한 음이 논란이 되거나 정확한 음을 표시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3-1] ① 주강할 적에 상께서 ‘觔’자의 음과 뜻을 물으셨는데 승지 유전이 “음이 ‘근(斤)’입니다” 하였고 나는 “모르겠으니 물러가 자서를 상고해보고 알외겠습니다” 하였다. ① “晝講. 上問觔字音義如何. 承旨柳㙉對以音斤. 希春對以未詳, 請退考字書, 然後乃啓.”(1568년 7월 15일); ② 15일 주강 때 신이 시강관으로 입시했는..
2. 표준 번역으로서의 언해 경서 외에도 사대부들을 위한 번역은 다양하게 꾸준히 진행되어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두시언해』이다. 이 책이 간행된 이유에 대해서는 장유(1587~1638)가 쓴 서문에 자세하다. [2-6] 시는 마음속으로 이해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니 주해 따위를 낼 필요가 있겠는가. 주해도 낼 일이 없는데, 더구나 우리말로 번역할 필요가 있겠는가. 견식이 뛰어난 자의 입장에서 논한다면야 물론 이 말이 당연하다 하겠지만,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마음속으로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을 경우 어찌 주해를 보지 않을 수 있겠으며, 또 주해를 보아도 시원하게 풀리지 않을 경우 어떻게 번역을 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 점이 바로 『두시언해』가 시인들에게 공이 있게 된 이유라고 하겠다. ..
Ⅱ. 백악시단(白嶽詩壇)의 형성과 문학 활동 1.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 백악시단의 실체를 가늠해볼 수 있는 문헌으로는 다음과 같은 자료를 들 수 있다. ① 북리(北里) 문회(文會)의 성대함은 삼연(三淵, 金昌翕) 선생께서 실로 창도하고 북리의 여러 이름난 분들이 서로 겨루고 좇았으니 풍치(風致)가 남들보다 뛰어났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미 여러 공들의 이름을 외며 추앙하고 상상하기를 마치 하늘에 계신 분들처럼 여겼다. 중년이 되어 비로소 북리에 들어갔는데 지난 날 여러 공들은 이미 여러 곳으로 흩어져 붓을 고르고 먹을 갈며 술을 마시는 후미에서 한번 조용히 받들지 못했다. 다시 수십 년 뒤에는 여러 어른들께서 차례로 세상을 떠나심에 남은 풍모와 큰 운치를 다시 볼 수 없었다. 北里文會之盛, 三淵先生實爲之..
백악시단(白嶽詩壇)의 진시(眞詩) 연구(硏究) 김 형 술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국문학전공 국문초록 백악시단(白嶽詩壇)은 ‘진시(眞詩)’ 창작을 목표로 1682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18세기 중반을 전후로 활동이 약해진 문인 그룹으로서, 주요 구성원은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부현(金富賢), 홍세태(洪世泰), 조정만(趙正萬), 김창업(金昌業), 김시보(金時保), 이해조(李海朝), 조유수(趙裕壽), 이병연(李秉淵), 권섭(權燮), 김영행(金令行), 이병성(李秉成), 이하곤(李夏坤), 박태관(朴泰觀), 신정하(申靖夏), 김시민(金時敏), 안중관(安重觀), 정내교(鄭來僑) 등이다. 이들은 사우(師友), 인척(姻戚)관계로 맺어진 결속력 높은 문학 동인(同人)으로서 『시경(詩經)』의 ..
조선시대 사대부의 한글사용과 그 의미 김인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임연구원, 국문학 전공 kkimins@hanmail.net 1. 머리말 한글은 모든 사람을 위해 창제되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의 서문에서 “사람들이 쉽게 익히고, 나날이 편하게 쓰도록 하기 위함”【나랏말ᄊᆞ미 中듀ᇰ國귁에 달아 文문字ᄍᆞᆼ와로 서르 ᄉᆞᄆᆞᆺ디 아니ᄒᆞᆯᄊᆡ 이런 젼ᄎᆞ로 어린 百ᄇᆡᆨ姓셔ᇰ이 니르고져 호 ᇙ배 이셔도 ᄆᆞᄎᆞᆷ내 제 ᄠᅳ들 시러 펴디 몯ᄒᆞᇙ 노미 하니라 내 이ᄅᆞᆯ 爲윙ᄒᆞ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듧 字ᄍᆞᆼᄅᆞᆯ ᄆᆡᇰᄀᆞ노니 사ᄅᆞᆷ마다 ᄒᆡᅇᅧ 수ᄫᅵ 니겨 날로 ᄡᅮ메 便뼌安ᅙᅡᆫ킈 ᄒᆞ고져 ᄒᆞᇙᄯᆞᄅᆞ미니라】이라고 밝혀 한글이 모든 사람을 위한 문자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한글의 실..
II. 사대부를 위한 번역 1. 번역의 전통과 사대부 한글 창제 이전에도 번역은 있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설총(655?~?)이 “방언으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했다[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라고 했고 『삼국유사』에는 “(설총이) 우리말로 화이(華夷)의 풍속과 물명을 이해하고 육경과 문학을 훈해(訓解)하니, 지금도 우리나라의 경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전수하여 끊이지 않는다[以方音通會華夷方俗物名, 訓解六經文學, 至今海東業明經者, 傳受不絶]”라고 했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설총이 유가 경전을 구결이나 이두·향찰 등을 이용하여 우리말로 번역했음을 알 수 있다【조선시대 구결을 붙여 경전을 해석하고 언해하는 전통은 설총이 창안한 구결을 이용한 번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결이란 용어는 『세조실록』에 처음 보이지..
3. 「검녀」의 여성 캐릭터 분석 1) 「검녀」 작품 소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종이다. 그녀는 주인댁 소저와 함께 검술을 익혀 주인댁의 원수를 갚은 다음, 선비로 이름이 높았던 한 양반의 소실이 되기를 자청했으나 그가 큰 인물이 아님을 깨닫고는 따끔하게 충고를 남기고 도로 남장을 하고는 떠나버린다는 내용이다. 주인집 소저와 동갑인 그녀는 소저의 소꿉놀이 시중을 들며 같이 자란 사이인데, 소저가 아홉 살 때 주인집이 권세가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하고 오로지 소저와 유모 그리고 그녀만이 목숨을 건져 도망을 할 수 있었다. 10살이 되자 소저는 그녀와 상의해서 남장을 하고 검객을 찾아 길을 떠났고 2년 후 비로소 검객을 만나 검술을 전수받았으며 5년이 되자 마침내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무협..
5. 끝맺음 순종(順從)과 인고(忍苦)를 체화한 여성 이미지든 혹은 균열을 꿈꾸며 자의식을 벼렸던 여성 이미지든 전통적인 여성의 이미지는 ‘방내(方內)’에서 살아갔던 다수 여성들의 이미지들이다. 조선 시대 여성과 방외 및 협을 연관 지어 보는 이 논의는 조선 시대에는 그 경계를 넘어서는 여성들은 전혀 없었을까? 하는 궁금함에서 시작되었다. 당시를 살아갔던 조선 시대 여성들은 제도가 규율하는 대로만 살았던 것일까? 조선 사회의 질서를 내면화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적인 원형으로 그녀들 내부에 자리 잡아버린 것일까? 어우동이나 감동처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 할지라도 제도가 금했던 사이를 틈타 자기들끼리 살짝살짝 그 금기를 넘나들었던 사례들이 없지는 않았다. 규방 여성들은 규제 속에서도 나들이하고 놀이하고 구경..
4. 체제 밖의 삶을 선택한 조선시대 여성 인물 검녀가 향한 ‘절해공산(絶海空山)’은 ‘강호(江湖)’의 다른 이름이며, 규범 밖에 위치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강호는 ‘방외(方外)’와 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본고에서 검녀가 선택한 강호를 방외와 연결지어 설명하는 것은 여성 중에서도 방외인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갖는 체제저항적인 힘, 체제를 거부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그녀의 면모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녀가 기존의 질서에 포섭되지 않은 것은 그녀가 스스로를 성의 주체로 세운 데서 비롯한 것이었다. 남성을 스스로 선택하고 또 버리기도 했던 검녀는 자기 성의 주체로서 행동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그녀의 태도는 조선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했던 윤리와 부합되지 않는다. 조선 사회에서 ..
조선 후기 한문소설의 발전 박희병(朴熙秉) Ⅰ. 기존 연구의 방향 조선 후기의 한문소설은 허균(許筠)의 작품을 중심으로 다양한 경향으로 발전한다【김시습 금오신화, 우화소설 의인(擬人)소설, 화사(花史) 수성지(愁城誌) 등의 심성(心性) 가전. 대 한학자들이 즐겨 쓴 몽유록(夢遊錄)은 인간의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꿈이라는 환상적인 비전을 통해 새로이 해석하고 있는 우화적 서사양식이다.】. 17세기 초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螺藁)』에 실려 있는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엄처사전(嚴處士傳)」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장산인전(張山人傳)」 「장생전(蔣生傳)」 등은 ‘전(傳)’이라는 한문 서사양식의 구조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는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 작품은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사는 선비가 주인..
Ⅲ. 결론(結論) 지금까지 한문소설사를 시대 순으로 살펴보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 한문소설은 한문이라는 표기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사상 몇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첫째, 형성 초기에는 중국 소설문학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중국적 규범에서 벗어나 독자적 발전을 모색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독자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당대의 역사적 현실이나 인물을 대상으로 하였다. 하지만 후기의 ‘연암소설’에 이르러서는 격변하는 전환기의 역사현실을 살아가는 양반사대부를 비롯하여 최하층 천민에 이르는 당대 사회의 전계층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옮겨놓았다. 둘째, 국문소설이 주로 중국을 무대로 하고 상층가문의 인물..
Ⅱ. 본론(本論) 1. 라말려초(羅末麗初)의 전기소설(傳奇小說) 한문소설의 연원은 고대 설화 문학까지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수 있으며, 그 구체적인 모습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 그리고 『수이전(殊異傳)』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들 문헌에선 ‘전기(傳奇)’의 양식에 속하는 작품들이 발견된다. ‘전기(傳奇)’란 ‘기이(奇異)를 진술한다’라는 뜻으로 육조시대의 ‘지괴(志怪)’와 구별하여 당대의 개인적 창작물을 지칭하는 말로써, 중국문학사에서는 소설로 다루기도 한다. 이들 작품에는 『김현감호(金現感虎)』 『수삽석남(首揷石枏)』 『조신(調信)』 등이 있다. 『김현감호(金現感虎)』에서는 신분이 낮은 처녀가 귀공자를 연모는 이야기로 전개되며, 『수삽석남(首揷石枏)』이나 『조신(調信)』에서도..
2. ‘무(武)’와 ‘협(俠)’ 그리고 여성 인물들 검녀가 오늘날 독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서는 이유는 그녀가 무공에 뛰어난 조선시대 여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협(俠)에 대한 정의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사마천이 『사기』 「유협열전」에서 서술한 말이다. 그는 유협(游俠)에 대해 정의하여, ‘비록 그 행위가 정의에 합치되지는 않지만 그 말은 반드시 신의가 있고 또 행동은 과감하여 이미 허락한 일에는 성(誠)을 다한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남의 괴로움으로 달려가 생사존망의 사이를 넘나들면서도 그 재능을 뽐내지 않으며 그 덕을 자랑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니,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박희병, 「조선후기 민간의 유협 숭상과 유협전의 성립」 한국고전인물전연구, 한길사, 1992, 277면.】고 하였다...
조선의 여협(女俠), 검녀(劒女) 조혜란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1. 들어가기 이 논의는 고전문학의 연구 결과가 새로운 문화콘텐츠【문화콘텐츠는, 기존의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보다 좁은 범주의 내용물을 가리킨다. IT나 디지털기술을 이용하지 않고도 문화적 내용물을 생산하고 서비스했던 산업을 문화산업이라고 한다면, 문화콘텐츠는 방송,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음반, 캐릭터, 전자책 등 영상미디어나 디지털미디어와 같은 뉴미디어를 이용하여 저장, 유통되는 문화예술의 내용물들을 일컫는다.】 창작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 즉 문화콘텐츠 창작 원천 소스(sauce)로서의 연구가 되기를 염두에 두면서 진행된 작업으로, 본고에서 연구 대상으로 삼은 인물은 조선후기 한문단편 「검녀(劒女)」)에 등장하는 여성 검객이다. ..
Ⅲ. 관계설정과 한문소설의 의의 조선 후기의 한문소설로는 이밖에 「오유란전(烏有蘭傳)」 「옥루몽(玉樓夢)」 등이 언급되고 있다. 「오유란전」【작자·창작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한문 필사본. 선비와 관장(官長)의 위선과 호색을 풍자한 작품으로, 「배비장전」과 의취가 같은 소설이다. 한양에 동갑·동학(同學)인 김·이 두 선비가 있었다. 먼저 장원하여 기백(箕伯)이 된 김생을 이생이 동행한다. 이생을 위하여 선화당(宣化堂)에서 베푼 잔치자리에서 이생은 기생을 냉안시한 처사 때문에 중인(衆人)의 빈축을 산다. 친구 기백은 기생 오유란으로 하여금 이생을 훼절시키도록 종용한다. 이생은 오유란의 함정에 빠져 유명(幽明)을 혼돈하고 온갖 추태를 자행한다. 결국은 선화당 잔치자리에서 나신(裸身)으로 대무(對舞)하다가 중인..
Ⅱ. 초석 마련과 한문단편의 규정 한편 임형택은 개인문집과 각종 야담집에 수록되어 있는 수많은 한문단편들을 학계에 새로 소개함과 동시에 몇 편의 논문을 통해 이 시기에 한문단편이 광범하게 발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원인 및 그 발생의 일반적 과정과 양태를 논급한 바 있다【조선 후기의 전환기적 사회 상황을 배경으로 ‘한문단편(漢文短篇)’이라고 지칭되고 있는 독특한 서사 양식이 등장한다. 한문단편은 그 형식이 ‘전(傳)’이나 ‘민간설화’와 유사하며, 야담(野談)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문단편은 시정의 이야기를 옮겨놓은 것으로, 조선 후기 사회상의 변화, 양반계층의 몰락과 신분갈등, 남녀의 욕정, 사회 규범의 혼란과 모순 등 당대의 현실을 소박하게 그려놓고 있다. 이희준(李羲準)의 『계서야담(溪西野談..
한국한문소설약사(韓國漢文小說略史) 차용주(車溶柱) Ⅰ. 서론(序論) 한문소설사(漢文小說史)를 정리하기 전에 무엇보다 ‘소설(小說)이란 무엇인가?’하는 개념 정립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소설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목적지도 모르고 무작정 길을 떠나는 것처럼 방향성을 상실한 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小說)의 개념은 크게 광의적(廣義的) 개념(槪念)과 협의적(狹意的) 개념(槪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소설의 광의적 개념은 중국식의 소설 개념을 받아들인 것으로 고대로부터 우리가 사용해온 개념이기도 하다. 광의적 개념에서의 소설이란 ‘대단치 않다고 여긴 잡스러운 글’이라는 말이다. 바로 지괴(志怪), 전기(傳奇)라 일컬어지는 것들이 그것이다. 한문문화권에서 ‘소설’이란 용어가 처..
2. 문학 창작의 재료로 활용 1. 함축과 비유, 참신성의 조성 문장에서 속언의 가치를 적극 인정하며 활용하고자 했던 홍길주는 문자의 아(雅)ㆍ속(俗)은 문장에서의 활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풍(風)ㆍ연(烟)ㆍ화(花)ㆍ월(月) 같이 흔히 사용되는 글자도 사용하기에 따라서 속되지 않고 금(金)ㆍ보(寶)ㆍ금(錦)ㆍ기(綺) 따위의 아름다운 글자도 더러워 가까이할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또 무이(武夷)ㆍ왕옥(王屋)ㆍ마당(馬當)ㆍ광려(匡廬) 따위는 본래 시(詩) 속에 넣을 정도로 아름다운 글자는 아니지만 산 이름으로 사용하면 영험한 신선의 기운을 풍기는 듯하다고 하며 문자의 활용을 중시하였다【洪吉周, 『睡餘放筆』 80. 文字雅俗, 亦在於使之之如何. 如風ㆍ烟ㆍ花ㆍ月等字, 反或俗不可耐, ..
여항문학(閭巷文學)과 서민문학(庶民文學) 임형택 1. 정의 ‘여항의 노래’로서의 시조문학(時調文學)과 ‘여항의 시’로서의 한시 문학 2. 성립 조건 직업과 관련된 문학적 교양, 태평한 기운 속에서 문학의 보급 확대, 사대부 시인의 지원 3. 성격 1. 직업: 조선에 필요한 기능적인 직업과 말단의 행정실무 담당. 2. 성격: 신분의 한계로 진출엔 문제가 있었으나 평민에 비해 풍요로웠으며 상당한 교양을 소유함. 3. 시대적 배경 1) 대동법(大同法) 실시 이후 화폐경제가 발달되고 상공업이 발전함으로 17ㆍ18세기 서울 여항 사정은 활기를 띰. 2) 여항의 자제들을 교육하는 학자 등장 3) 여항인들이 백련사ㆍ옥류동 등지에서 시회(詩會)를 자주 열었음 → 여항 문학이 발생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 시대 17C~18..
조선전기 사대부(士大夫) 문학 임형택 1. 문학관 1. 사대부의 성격 규정 대부(大夫) 사(士) 출(出) 처(處) 치군택민(致君澤民) 사명응제(辭命應製) 한유자적(閒遊自適) 음풍농월(吟風弄月) 관각문학(館閣文學) 처사문학(處士文學) 경국(經國)의 문장으로 불후(不朽)의 성사(盛事)를 장식하는 문학 일세(逸世)의 정취를 추구하고 한적한 인생을 자락(自樂)하는 문학 2. 처(處)의 분화 산림(山林) 관(官) 처(處) 도의와 심성에 편안히 즐기는 자(山林處士) 현허(玄虛)와 고상을 사모하여 즐기는 자(方外人) 아유(阿諛) 문학과 시군(時君)에 영합하는 문장 전호(佃戶)와 노비(奴婢)에 기생, 예악(禮樂)에 속박 ⇒방달불기(放達不羈) 3. 문학관: 한문학을 본령으로 삼고 우리의 감정을 담아 우리 문학으로서의 개..
고려(高麗)시대 고문의식(古文意識) 김건곤 나말여초(羅末麗初): 변려문(騈驪文)과 만당풍(晩唐風) 1. 문풍(文風): 만당풍(晩唐風) ① 특징: 고사(故事)와 정치(精緻)한 대구, 성률의 해화(諧和), 극도의 수식과 인위적 표현) ② 이유: 유미주의적 선집인 『문선(文選)』의 영향, 도당(渡唐)유학생인 최치원(崔致遠)을 비롯한 인물들이 저물어가는 당에서 배워왔기에. ③ 고려초기에 만당풍이 완고해진 이유: 과거제 실시, 사학(私學) 흥기, 교육제도 완비, 예종ㆍ인종의 호문 장려 여초(麗初): 변려문(騈驪文) VS 고문(古文) 1. 재도적(載道的) 문학사상(文學思想)의 대두와 변려문(騈驪文)의 비판 ① 최승로는 ‘시무이십팔조(時務二十八條)’로, 최충(崔沖)은 사학으로 유풍 진작에 힘썼으며 예종ㆍ인종 연간에 ..
한문소설약사(漢文小說略史) 여말선초(羅末麗初) 1. 현전하는 작품 최치원(崔致遠), 조신전(調信傳), 호원(虎願: 金現感虎) / 온달(溫達), 설씨녀(薛氏女)는 소설이었으나 역사로 정착된 걸로 봄 2. 한문소설이 성립될 수 있었던 요인 역사전환기 상ㆍ하층의 언어와 사고방식이 뒤섞이기 쉬움으로 소설 발생의 좋은 조건이 됨. 문학 수준 발전 당사까지 축적된 문학의 역량은 인간의 삶과 그 삶의 조건을 소설로 형상화하는데 기초 제공. 문인들의 갈등 실존에 탐구를 문학만으로 표현하기 어려움 → 허구에 입각한 새로운 장르의 출현 고독감이나 문제 제기를 애정 갈등에 결부시켜 우회적으로 표출함. 고려(高麗) 1. 한문소설 창작이 안 된 이유 가전(假傳)은 산문의 한 종류로 보기에, 이 시기를 공백기로 봄 사회가 안정되..
당시풍 정리 초당(初唐, 618~712): 건국 ~ 예종(睿宗) 태극(太極) 원년(元年)특징: 당시(唐詩)의 맹아기 성당(盛唐, 713~765) : 현종(顯宗) 개원(開元) ~ 천보(天寶) 말년특징: 시의 격률(格率)이 정형을 이루고 당시를 최고로 올림변새파(邊塞派)최호(崔顥), 왕창령(王昌齡)변방(邊方)의 경치와 전쟁 참상을 비장, 호방하게 묘사. 전원파(田園派)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자연속에서 정신적 해탈 추구.자연파(自然派)이백(李白)대담한 과장, 교묘한 비유, 화려한 수사. 굴원의 뒤를 이어 낭만주의적 전통 발양,열렬한 정감과 강렬한 개성으로 자아 표현의 주관적 색채 강함. 사회파 (社會派)두보(杜甫)인정애민(仁政愛民)의 유가 사상과 전통적 충군 사상, 현실과 사물의 본질을 예술적으로 반영,..
한국한시약사(韓國漢詩略史) 1. 송풍(宋風) 주도의 시기 고려 중엽 ~ 15C 소식(蘇軾)을 중심으로 한 송시(宋詩)가 주도함. 15C 소식(蘇軾)을 벗어나 다양한 송시(宋詩) 추구 ※ 안평대군의 『팔가선시(八家詩選)』 당(唐) 송(宋) 이백ㆍ두보ㆍ위응물ㆍ유종원 구양수ㆍ왕안석ㆍ소식ㆍ황정견 15C 후반 강서시파(江西詩派)인 황경견ㆍ진사도(시법 연마 중시)에 관심 가짐 16C 박은ㆍ이행ㆍ박상ㆍ정사룡ㆍ노수신ㆍ황정욱이 강서시 수학 →박은ㆍ이행ㆍ정사룡 해동강서시파(海東江西詩派) ※ 관각삼걸(館閣三傑): 호소지(湖蘇芝)의 해동강서시풍(험벽한 용사, 까다로운 성률 제한, 기계적인 수사) ※ 수식과 기료를 중시하는 강서시풍을 사림이 비판함: 온유돈후(溫柔敦厚), 외물한적(外物閑寂)의 내면 수양 중시 2. 당풍(唐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