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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개 야단쳤다고 내쫓긴 포영 처와 슬픈 효녀 심청의 프로토타입인 조아 한나라의 포영은 자(字)가 군장(君長)이었다. 포영의 처가 엄마 앞에서 개를 꾸짖었다. 그래서 포영은 부인을 내쫓아버렸다. 漢鮑永, 字君長. 妻於母前叱狗. 永遂去之. 이 고사는 매우 간단하다. 그 구체적인 상황설명이 없다. 그러나 시어머니 앞에서 개를 꾸짖었다고 조강지처를 내쳐버린다는 것은 바른 윤리라고 말할 수 없다. 소위 칠거지악(七去之惡)에 해당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고사에 대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의 개산조 중의 한 사람이며 여말 『효행록』을 엮은 권보ㆍ권준의 후손인 권근은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주석을 달아놓고 있다. 존장(尊丈)의 앞에서는 개도 소리쳐 꾸짖지 아니 한다는 것은 예의 소절(小節)이다. 지금 포영의 부인이 시어머니 앞에..
왕상빙어과 정란의 목각엄마 ‘왕상빙어(王祥冰魚)’의 이야기도 마음씨가 악랄한 계모가 겨울에 잉어를 먹고 싶어하니깐, 왕상이라는 효자가 꽁꽁 얼어붙은 연못 얼음을 깰 수가 없어 옷을 벗고 알몸으로 드러누워 얼음을 녹이려 하자, 얼음이 스스로 녹고 잉어 두 마리가 튀어올라 왔다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도 ‘효성감천(孝誠感天)’의 한 패턴으로서 곽거경 『이십사효」에 등장하여 권준의 『효행록』을 통과하여 『삼강행실도』로 들어갔다. 그리고 악랄한 계모에게도 효도를 다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민자건(閔子騫)의 이야기(『설원(說苑)』에 실림)로부터 내려오는 한 패턴이다. 이 이야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조선의 아동들이 계모에게 학대를 받으면서도 끽소리 한번 못냈을 것인가? 유향의 『효자전』에도 나오고 한대의 화상석에도 나..
모기에게 알몸을 준 오맹과 어린 아들을 묻은 곽거 곽거경의 『이십사효』에는 들어 있는데, 권준의 『이십사효」에 누락되자, 권보가 다시 집어넣은 고사 중에 ‘오맹문서(吳猛蚊噬)’라는 것이 있다. 오맹은 진(晋)나라 사람인데 불과 8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동이다. 집안이 빈곤하여 식구들이 여름철에 모기장을 치고 잘 돈이 없었다. 그래서 몸을 발가벗고 부모님 곁에 누워 잤는데 그 효심인즉 자기 몸을 모기들이 진냥 뜯어먹고 배가 불러 부모님을 물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어찌 이러한 어린아이의 행태가 효심의 예찬이 될 수 있을까? 어린이는 발가벗고 모기에게 진냥 뜯기고 어른은 편하게 잠을 잔다? 아니 모기들이 그토록 영민할까? 여덟 살 짜리 오맹의 피를 잔뜩 먹었다고 그 어린이의 효심을 생각하여 부모님은 안 ..
동영(董永)의 고사,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의 원형 순임금의 효도 이야기는 이미 『맹자(孟子)』에도 잘 소개가 되어있는 것이며, 70 먹은 노인 노래자(老萊子)가 100세가 된 부모 앞에서 5색의 색동저고리를 입고 어린애처럼 재롱을 부려 노부모를 즐겁게 하여 노쇠함을 방지케 하려 했다는 이야기나, 민자건ㆍ증삼의 이야기는 이미 고전을 통하여 알려진 상식적인 수준의 것이다. 자로는 공자의 수제자로서 일화가 많은 캐릭터이다. 동영(董永)의 이야기도 후한 무씨사(武氏祠) 화상석(畵象石)에 이미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지극히 낭만적인 이야기 틀을 가지고 있어 중국역사를 통하여 문학이나 다양한 희곡의 주제가 되었다. 동영은 본시 효행이 지극하여 품팔이로 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자기 몸까지 ..
유향의 『효자전』에서 곽거경의 『이십사효』까지 『효행록』에서 선정된 인물들이 『삼강행실도』에도 계속 등장할 뿐 아니라(선정과 배열에 출입이 있다), 그 이야기의 양식적 패턴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효행록』의 전편에 ‘24인의 효행’을 아들 권준이 실었다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권준이 독창적으로 중국 고사에서 뽑아 실은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이십사효’라는 것은 이미 당말(唐末)에서부터 시작되어 송대에는 확고하게 정착된 일종의 설화 문학양식이다. 이미 한나라 때의 유향(劉向)이 『효자전(孝子傳)』을 지은 이래 「벽암록(碧巖錄)」 첫 번째 공안의 주인공이며 우리나라에도 불사리(佛舍利)를 보내곤 했던(신라 진흥왕 10년) 양무제(梁武帝)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효자전을 지었다. 이러한 효자전류에서 ..
임란 직후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또 편찬 『삼강행실도』의 간행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적 국난을 거치면서 조선왕조는 기강이 흐트러지고 민심이 이반된다. 왜적을 막지 못했고 국민을 도탄에 빠뜨렸으니 국가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질 수밖에, 그러자 조정에서는 또다시 『삼강행실도』를 대규모로 증보하는 사업을 벌인다. 문제의 본질을 파고들지 않고 헛치레로 역사의 과실을 땜방하는 치자의 꼬락서니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왜란 이후에 정표(旌表)를 받은 효자ㆍ충신ㆍ열녀를 중심으로 자그마치 1600여 명의 케이스를 모두 17권 17책으로 편찬하였는데 이름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라 하였다. 이 증보판의 특징은 수록된 인물이 모두 조선사람이라는 것이다. 광해군 7년(161..
『속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연이어 펴낸 중종 중종 6년 8월 28일의 조령의 내용에, 국조 이래의 열녀ㆍ효자 중에서 『삼강행실도』에 언급되지 않은 자들을 편찬하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 명령은 중종 9년(1514) 10월 신용개(申用漑, 1463~1519: 김종직의 문인) 등에 의하여 간행된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로써 구현되었다. 기존의 『삼강행실도』가 우리나라 사람보다는 중국사람의 윤리실천 사례를 들고 있다면【효자의 경우 35명 중 31명이 중국인, 4명만이 한국사람이다. 누백포호(婁伯捕虎), 자강복총(自强伏塚), 석진단지(石珍斷指), 은보감오(殷保感烏)의 4 케이스】, 『속삼강행실도』는 조선왕조의 윤리실천사례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효자의 경우 36명이 실렸는데 중국인이 3명..
중종의 시대는 『삼강행실도』의 전성기 『삼강행실도』 산정언해본을 만든 성종 본인은 물론 위대한 군주였지만 어우동과의 스캔들도 야사에 남길 정도로 삼강행실에 어긋나는 로맨스를 즐길 줄도 아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투기가 심한 부인 윤씨의 감정처리를 잘못하여 결국 연산군의 폭정과 무오사화ㆍ갑자사화라는 엄청난 비극의 씨를 남기었다. 연산군의 패륜행위를 문제삼아 그를 몰아내고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대장금’이라는 드라마의 배경이 된 임금)은 초기에 공신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급진적 개혁론자인 신진 사림의 거두 조광조를 끌어들여 지치주의(至治主義)적 도학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조광조는 너무도 형식주의적 도덕정통론에 치우쳤고 중종은 훈구대신들의 입지를 살려가면서 세력의 밸런스를 취할 수 있는..
『삼강행실도』 다이제스트 언해본의 등장 그러나 330설화의 한문본 『삼강행실도』는 3권(卷) 3책(冊)으로 그 분량이 방대하기 때문에, 대량으로 인출(印出)하여 대중에게 보급하기가 힘들었다. 『경국대전』을 완성하고 『동국여지승람』 등 각종의 문화서적을 편찬하여 대중의 삶의 질을 높이고, 또 도학이념에 충실하면서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새로운 사림세력에 의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성종(成宗)은 『삼강행실도』의 민중보급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세종이 『삼강행실도』를 만든 것은 훈민정음 반포 이전의 사건이었다. 따라서 성종은 『삼강행실도』를 간략화시키고 그것에 언해를 첨가하여 포퓰라 다이제스트(popular Digest)판을 만들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구상은 경기 관찰사 박숭질(朴崇..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와 조선왕조 텔레비젼 『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를 지방의 관찰사와 수령들에게 배포하면서, 학식 있는 자들을 구하여 먼저 그 내용을 숙지케 하고, 그들로 하여금 일반 백성에게 강습하도록 하였으나 이러한 하달방식의 강습이 아름답게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향교에 일반백성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한다는 것도 당시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고 또 이렇게 구차스러운 일에 지방 수령들이 열심일 까닭이 없었다. 국민들은 상부로부터 일방적으로 하달되는 도덕교육이라는 것에 신물이 날 뿐이었다. 그러므로 예조(禮曹)에서는 지방수령들이 『삼강행실도』를 통한 국민교화를 자기 임무 이외의 귀찮은 일로 여기는 풍조가 생겨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관찰사로 하여금 수하 수령들이 『삼강행..
『효행록』과 『삼강행실도』 『효행록(孝行錄)』이란 어떤 책인가? 이것은 고려 말 충목왕 2년(1346) 경에 안향(安珦)의 문인으로 주자학의 보급에 혁혁한 공을 세운 문신 권부(權溥, 1262~1346)가 그의 아들 권준(權準, 1280~1352)과 함께 효행에 관한 기록을 모아 엮은 책이다. 늙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권준이 중국의 효자 24명에 관한 이야기를 화공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한 뒤, 그것을 당대의 명문장가였던 이제현(李齊賢, 1287~1367)에게 찬(贊)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여 만들었다. 이것이 전찬(前贊)이다. 이 전찬을 보고 아버지 권보는 자기 스스로 또 다시 38명의 효행을 골라 다시 이제현의 찬을 지어 받았다. 이것이 후찬(後贊)이다. 이 전ㆍ후편을 합하여 여기에 다시 이..
제5장 조선왕조 행실도(行實圖)의 역사 조선왕조의 불교탄압, 대한민국의 반공교육 주자학의 교조주의적 성행으로 조선왕조는 불교를 탄압했다[崇儒抑佛]. 그 탄압의 수준이 이승만ㆍ박정희 정권하에서 좌파지식인을 탄압하는 것보다도 더 악랄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탄압은 물리적 탄압 그 자체로 유지될 수가 없다. 반드시 성공적인 ‘반공교육’이 수행되어야만 한다. 정신적인 가치관의 전환이 대중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으면 탄압은 지속될 수가 없는 것이다. 권력의 압제란 부정적인 방법만으로는 무기력한 듯이 보이는 대중 속에서도 곧 한계를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대중교육이란 추상적인 논리로써는 가능하지 않다. 대중에게 격조 높게 역사 필연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
용주사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의 효심 양주동이 왜 『부모은중경』을 가지고 노래를 지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조선후기부터 『부모은중경』이 대중에게 보편화되어, 누구나 그 가사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모은중경』은 대부분이 정조 때 용주사에서 간행한 판본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좀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11세에 체험하였다. 그리고 과묵하고 시세를 외면한 듯한 현명한 행동거지로 위험에 대처하며 어려운 세월을 견디어 내었다. 그리고 25세에 등극한다(1776). 정조는 등극한 후 가슴앓이로만 간직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고, 파당을 배격하고 새로운 인물을 대거 등용하여 새로운 국가기풍을 진작시키려..
양주동 작사의 「어머님 마음」과 『부모은중경』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기억하고 잘 부르는 노래에 「어머님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 양주동이 작사하고 이흥렬이 작곡한 것이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뉘시며 손발이 다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무엇이 넓다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양주동의 작사는 바로 우리나라 정조 때 간행된 화산(花山) 용주사(龍珠寺) 판본의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정종분(正宗分)」속에 나오는 십게찬송(十個讚頌)에 기초한 것이다. 우선 그 게송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일 회탐슈호은(懷耽守護恩) 나를 잉태하여 지켜주신 은혜 제이 님산슈고은(臨産受苦恩) 해산에 즈음하여 고통을 감내하신 은혜 제삼 생자망..
목련존자와 우란분회: 초윤리와 일상윤리의 접합 이러한 불교의 아폴로지는 표면적인 불효(不孝)를 본질적인 대효(大孝)로 한 차원을 높이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는 맥락에서 보편주의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불교는 본시 가족윤리나 세속윤리를 초월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 효와 같은 세속윤리는 근원적으로 고해(苦海)의 한 원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초윤리적(trans-ethical) 주장만으로는 민중의 삶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기가 불가능했다. 보편적 가치는 일상적 가치가 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이러한 초윤리와 일상윤리의 접합을 위하여,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해내는 신통제일(神通第一)의 목련존자(目連尊者, MahāMoggallāna)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이 이..
제4장 불교에서 말하는 효 불교와 유교의 충돌 효의 문제는 기독교의 격의(格義)의 틀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지만 이미 불교가 한자문화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민중 속에 그 정체성을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거치지 않을 수 없는 통과의례였다. 양(梁)나라의 스님 승우(僧佑)가 찬한 『홍명집(弘明集)』이나 당(唐)나라의 스님 도선(道宣, 596~667)이 증보한 『광홍명집(廣弘明集)』에 이미 불교와 유교의 가치의 충돌이 잘 묘사되어 있다. 우선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그 자체로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윤회한다는 신불멸(神不滅)의 생각은 음양ㆍ귀신ㆍ혼백의 자연주의적 논리로 볼 때 매우 황당한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유자들은 신멸론(神滅論: 인간의 영혼은 신체와 더불어 멸한다)을 강력히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출가인이..
가온찍기 몸나와 얼나는 결국 ‘가온찍기’에서 통합되는 것이다. ‘가온찍기’란 물론 원래 있던 우리말이 아니고 다석이 만든 말이다. ‘가온’의 뜻은 역시 ‘가온데’라는 뜻이 일차적인 것으로 나의 내면 중심이면서 우주의 중심이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가온’의 의미 속에는 ‘온전함’이라는 의미도 들어가 있다. ‘찍기’란 ‘점을 찍는다’는 말의 동명사형이다. 가온찍기란 우주의 중심으로서의 참나를 영원히 오가는 시공간 속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순간 속에서 영원을 만나는 생명사건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합되는 찍음이다. 그 가온찍기가 씨ᄋᆞᆯ이요 해탈이요 견성이요 십자가를 짐이다. ‘찍기’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그것은 삶의 순간순간에서 끊임없이 찍는 것이다.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효라는 것은 돈오(頓悟..
군신관계로 충화(忠化)된 기독교신앙 속 얼나와 몸나 현재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다석이 말하는 보편적ㆍ쌍방적 효의 실천의 대상이 아니라 군신(君臣)의 관계로 충화(忠化)된 하나님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철저히 인간화된, 그러니까 타종족의 신앙을 배타하기 위하여 폭력화된 하나님이며, 그것은 타종족(이단)을 무찌를 수 있는 군주(a secular King)로서의 하나님이다. 다석의 효기독론이 철저히 배제하는 것은 충화(忠化)된 유교의 형식주의적 측면과 서구전통의 인격성의 배타성과 폭력성이다. 다석의 하나님은 인간화된 모습으로 칠정(七情)의 식색(食色)을 드러내는 하나님【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관이나 희랍 신관의 일반적 모습】이 아니라, ‘없이 계신 하나님’이다. 그것은 표전(表詮)으로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쌍방적이어야 한다 큐자료【마태와 누가에서 마가자료를 제외시키고 남은 자료에서 또 다시 공통되는 자료로서 공관복음서에 내재하는 어록복음서(sayings gospel)이다. 공관복음서의 가장 오리지날한 층대를 형성한다】에 속하는 예수의 주기도문(마 6:9~13, 눅 11:2~4)도 인자하기 그지없는 아빠의 나라(바실레이아, βασιλεία), 곧 사랑밖에 모르는 아빠의 다스림(Reign)이 이 땅에 실현되기를 간구하는 기도일 뿐이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김명수, 『큐복음서의 민중신학』 제8장 ‘큐복음의 주기도문’ 참고, 통나무출판사에서 2009년에 출간됨. 김명수의 큐복음서에 관한 함부르그대학 박사학위논문은 세계큐연구학회(IQP)의 권위 있는 정경으로 선정되었다】. 예수를 하나님 아버지..
다석 유영모(柳永模)의 언어세계 서양인에게 그런 책은 물론 『신약성서』이다. 여기서 서양인이라고 하는 것은 로마제국문명의 직ㆍ간접 영향권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땅에 가톨릭의 역사는 교황청체제에 의한 교권의 확립에 주력한 역사이기 때문에, 순교와 정의로운 항거의 역사는 있을지라도 독자적인 사상의 역정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데 비하면 그래도 개신교는 인간의 사유를 규제할 수 있는 중앙의 통제력이 박약하고, 교회(에클레시아) 단위의 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구속력만이 일차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러한 구속력을 벗어나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신학적 사유를 전개할 수 있다. 이렇게 자유롭게 살면서 독창적인 자신의 신학적 사유를 전개한 격동기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로서..
제3장 다석(多夕)의 효기독론 문화유형에 따른 효의 행동 패턴 이런 예를 한번 들어보자! 3세동당(三世同堂)의 집에서, 그러니까 연로하신 노모가 한 분 계시고 어린 자식 둘을 거느리고 있는 부부가 사는 작은 집에서 불이 났다고 가정을 해보자! 불이 훨훨 타올라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 모두를 구출하기란 어렵다, 노모나 자식 중에 누구를 먼저 구출해야 할까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선택의 기로에 있는 가장(家長) 갑돌이! 과연 갑돌이는 본능적으로 누구를 먼저 구출할 것인가? 갑돌이가 미국사람이라면 아마도 100 중 99는 어린 자식 둘을 먼저 데리고 나올 것이다. 미국영화를 보아도 대개 그러한 분위기로 그려지고 있다. 어린 자식에 대한 보호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처럼 절대적인 그 무엇으로..
주자 존숭만 있고 주자 판본에 대한 검토가 없다 조선왕조에서 『효경』」이라고 하는 것은 동계형의 『효경대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용으로 『효경언해(孝經諺解)』를 만들었는데【선조(宣祖) 때 안동 하회 사람,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大提學) 류성룡(柳成龍)이 주관하여 만들었다】, 그 언해도 『효경대의」의 경과 전만을 도려내어 그 경전(經傳)에 대해서만 언해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동계형의 대의주석 부분은 번쇄하다고 생각하여 언해의 대상으로 삼지 않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효경언해』는 사마광의 『효경지해』를 주자가 간오(刊誤)한 대로 배열해놓은 경전에 한글 토를 달고 한글해석을 겸하여 단 것이다. 『효경언해』로서 조선왕조의 최고본(最古本)인 경진자(庚辰字) 귀중본은 불행하게도 이 땅에 보존되어 있지 않..
『효경간오』의 뜻을 실현한 동정의 『효경대의』 그러니까 주희의 『효경간오』는 사마광의 『효경지해』 원문을 놓고 거기에 자신의 간오(刊誤) 작업을 한 것인데, 이 『효경』 원문변형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삭제할 부분과 바꾸어놓을 부분을 지시만 한 것이며 원문을 일단 전통방식대로 실어 놓았다. 그러니까 『효경간오』는 미완성작이며 일체의 주석을 가하지 않았다. 이 『간오』를 경(經) 1장과 전(傳) 14장의 체제로 삭제할 부분은 삭제하고 전 14장을 원문의 순서를 바꾸어 다시 배열하여 간오가 지시하는 바 대로의 원문을 만든 다음에 그 경(經) 1장 전(傳) 14장에 대하여 상세하고 화려한 주석을 가한 것이 그 유명한 동정(董鼎, 자는 계형季亨)의 『효경대의(孝經大義)」라는 책이다【동정의 정확한 생몰연대가..
사마광의 엉터리 『효경지해』를 계승한 주희 그런데 북송 옹희(雍熙) 원년(984), 일본의 동대사(東大寺)의 스님인 쵸오넨(奝然, 우리말로는 소연이라 발음)이 입송(入宋)하여 송태종에게 정주(鄭注) 한 책[一本]을 헌상하였다【『송사(宋史)』 권491 「일본전(日本傳)」】. 태종은 쵸오넨을 직접 만났으며 그를 후대하였다. 그리고 자의(紫衣)도 사(賜)하였다. 이 일본에서 보존된 정현주 금문효경을 황실도서관인 비각(秘閣)에 보관하였는데 사마광은 비각에 접근이 용이하였고, 바로 이 쵸오넨이 헌상한 정주 금문효경을 보았던 것이다【애석하게도 사마광이 본 후로 언젠가 이 판본도 사라지고 말았다. 일본사람들이 애써 보관하여 헌상한 것을 중국인들은 유실하기만 한 것이다】. 그리고 물론 『어주효경』도 보았을 것이다【이상..
주희가 『효경간오』에 준거로 삼은 텍스트는? 그런데 주희는 뜬금없이 갑자기 어주(御注)의 금문에 의존치 아니하고 고문효경을 텍스트로 삼겠다고 한 것이다. 상투적인 통용본 텍스트를 버리고 무엇인가 더 오리지날한 텍스트에 의거하여 간오(刊誤)작업을 하겠다는 주자의 자세는 높이 살 만하다. 그런데 과연 주자가 고문효경이라는 오리지날 테스트를 두 눈으로 본 것인가? 그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앞에서 주희가 『효경』의 경문(經文)을 만들기 위하여 제1장부터 제7장까지를 하나로 뭉뚱그리면서 각 장의 앞에 원래 있던 ‘자왈(子日)’을 두 개 빼버려야 한다고 했는데, 만약 주희가 고문 텍스트를 기준으로 했다면 그것이 두 개가 아니라 여섯 개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사소한 하나의 실례이다. 자세하게 『효경간오』 텍스트와..
제2장 사마광의 『효경지해(孝經指解)』로부터 동정의 『효경대의(孝經大義)』까지 당현종의 『어주효경』 이후 금ㆍ고문 다 사라지다 『효경간오(孝經刊誤)』의 문제도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간오’의 문제가 아니라, 간오의 대상이 된 『효경』이 과연 어떤 텍스트였나 하는 것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효경』은 한대로부터 이미 금문(今文)ㆍ고문(古文)의 시비가 있는 텍스트이다【금ㆍ문 『효경』의 문제에 관해서는 제12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조금만 참아주면 좋겠다】. 당대(唐代)에도 이미 금고문의 시비가 문제시되었고 이러한 금문학파와 고문학파의 시비를 잠재우기 위하여 희대의 로만티스트(romancist)이며 지식인인 당현종(唐玄宗)은 스스로 금ㆍ고문학파의 주장을 ..
가정(Family)과 교회(Church) 회창폐불(會昌廢佛)【842년부터 4년에 걸친 당무종(唐武宗)의 불교탄압】 이래 지속된 송대의 배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선종(禪宗)이 쇠퇴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대장경의 율장, 그러니까 원시불교의 승가계율에 기초한 법규(法規)와는 달리, 독자적으로 중국사찰에 맞는, 승단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중국식 청규(淸規)가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타종파와는 달리 선종은 사찰 자체가 개별적으로 독립되어 있었으며 승려의 노동력에 기초한 자급자족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대종(大宗)이 아니라 소종(小宗)이었던 것이다. 논장(論藏)【부처님의 말씀을 크게 경ㆍ율ㆍ논 삼장(三藏), 곧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으로 나눈다. 경장(經..
대종주의와 소종주의 주자가 『가례」를 만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고전학자로서 고경의 내용을 축약시켜 놓은 다이제스트(digest)판 의례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효경』을 이론적으로 탐구하지 않았다. 『효경』이 계몽하고자 하는 효의 덕성을 구체적인 제도로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효는 추상적 함양이 아니라 제도적 실천이다. 이렇게 되려면 당대의 사람들이 누구든지 집안에서 당하는 일상적인 사태로서 익숙하게 알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주자 「가례서(家禮序)」의 첫 문장을 한번 살펴보자. 대저 예(禮)라는 것에는 본질과 형식이 있다. 일상가정에 시행되는 것으로부터 이러한 문제를 접근해 들어간다면, 명분을 바르게 지킨다든가, 사랑(愛)과 공경(敬)을 실천한다든가 하는 것은 예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凡..
『가례』는 주희의 혁명적 시안 우리는 현재 『주자가례』가 관혼상제에 관한 가장 신빙성 있는 정통의 기준이라고 그냥 믿어버리지만, 그것은 역사적 본말을 전도시키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가례』는 주희에게 있어서는 매우 혁명적인 시안일 뿐이었다. 우리는 여기 ‘시안(試案)’이라는 말을 주목해야 한다. 주희 시대에 주희는 전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따라서 『가례』는 주자가 하나의 민간사상가로서 송대 사회가 지향해야 할 규범으로서의 가정의례를 시험적으로 구성해본 하나의 모델(이데아 티푸스, ideal type)일 뿐이며, 우리나라 조선왕조에서와 같이 전혀 구속력을 지니는 절대적 의례질서가 아니었다. 주자는 후대로 내려올수록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서 추앙받게 되었고, 따라서 『주자가례』는 덩달..
주희 당대에만 해도 가례는 정설이 없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주자학의 체계가 『사서』 중심주의로 특징 지워지고 『효경』이 경시되며 그 대신 『소학(小學)』이 부상한다는 것은 동아시아문명권의 주자학 700년의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프레임웍(framework)임에 틀림이 없지만, 『소학(小學)』과 더불어 반드시 고찰해야만 할 중요한 문헌이 바로 『주자가례(朱子家禮)』라는 것이다. 조선조에서 『주자가례(朱子家禮)』는 번쇄한 권력다툼인 예송(禮公)의 주역이었으며, 또 송시열(宋時烈)이 『주자가례(朱子家禮)』야말로 주자가 고금을 참작하여 시의적절하게 정립한 의례로서 그 절대적 권위가 고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래【송시열도 『가례』의 위작설에 관한 문제의식은 있었다 한다】 아무도 본격적으로 그 권위에 ..
『소학』의 편집자 유청지(劉淸之)와 주희의 관계 그는 효(孝)의 중요성은 확고하게 인식하였다. 그러나 효는 그의 이기론(理氣論)적 코스몰로지(Cosmology)의 논리적 결구 속에서 분석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었다. 효는 일차적으로 감성의 문제이며, 당위의 문제이며, 실천의 문제이다. 그것은 성인(聖人)의 문제이기보다는 소아(小兒)의 문제였다. 성인에겐 효를 가르친다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그것은 어린이의 일상거지로부터 스며드는 것이라야 했다. 효는 논(論)의 문제가 아니라 습(習)의 과제였다. 인(仁) 효(孝) 성인(聖人)의 문제 소아(小兒)의 문제 논(論)의 문제 습(習)의 과제 주희의 판단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그가 『효경간오』를 쓴 것이 57세인데, 『소학(小學)』을 그 이듬해 58세 때 완성..
공자의 효 담론과 주자의 효 중시 그렇다면 주희는 자신의 사상체계 속에서 『효경』을 파기해버렸을까? 효(孝)라는 것은 인륜의 대본(大本)이요 유교의 대강(大綱)이다. 공자가 인(仁)을 말하였다고는 하나, 인은 너무 어렵고 구름 잡는 것 같아 이해하기가 어렵다. 『논어(論語)』를 펼치면 바로 두 번째로 유약(有若)의 말로서 기록된 “효제야자, 기위인지본여(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라는 로기온이 나오고 있다. 효야말로 인(仁)을 실천하는 근본이라는 뜻이다. 인의 구체적인 실천덕목이 효라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인을 가깝게 실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효(孝)이다. 위정편에 보면 제5장부터 제8장까지 쪼로록 효에 관한 담론이 나오고 있다. 공자의 효에 대한 생각을 매우 절절하게 알 수 있다. ..
『사자서』가 세상에 나오게 된 까닭 『효경』은 첫머리부터 공자가 증자에게 “삼(參, 증자의 이름)아, 게 앉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겠다”하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증자의 책으로서 『대학(大學)』과 『효경』은 라이벌 관계에 있게 된다. 『대학(大學)』을 경(經)과 전(傳)으로서 나누어 장구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주희는 당연히 『효경』마저 같은 방식으로 경(經)과 전(傳)으로 나누어 새로운 장구작업을 시도하려 하였다. 물론 그는 그의 도학적 틀 속에 『효경』을 편입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효경』에 손을 대고 보니 『효경』이라는 경전은 전혀 자기의 도학적 틀과 맞아떨어지는 책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경문을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부분들을 삭제하게 되었고, 또..
도통(道統) 속 문제는 증자의 책 마찬가지로 중국의 오경(五經)은 읽어야 하는 책이지만 읽기가 어렵다. 주희는 따라서 오경에 접근하기 전에 일반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을 편찬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자서(四子書)라는 것이다. ‘사자서(四子書)’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사자(四子)’라는 표현이다. ‘사자’는 네 책이라는 뜻이 아니라 ‘네 선생(Four Masters)’이라는 뜻이다. 이 네 선생은 과연 누구일까? 당대(唐代)의 문호 한유(韓愈, 768~824)의 「원도(原道)」로부터 촉발되어 형성된 송대의 도통론은 다음과 같은 계보를 말하고 있다.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 공자 증자 자사 맹자 堯 舜 禹 湯 文 武 周公 孔子 曾子 子思 孟子 한유(韓愈)는 맹자(孟..
송나라는 매스컴시대 앞서 말했듯이 주희는 45~6세 때에 학용장구(學庸章句)의 초고를 완성했다. 그리고 57세 때 『효경간오』를 썼다. 46세 때 탈고한 『대학장구』가 과연 어떠한 모습의 것이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주희는 『대학장구』에 대하여 각별한 애착을 지니고 끊임없이 수정작업을 가했기 때문이다. 그는 71세로 세상을 뜨기 사흘 전까지 『대학장구』에 수정을 가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여튼 『대학장구』의 초고를 46세 때 탈고한 후 11년 후에 『효경』에 손을 대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각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주희가 사서(四書)를 새로운 유학운동의 시발점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우선 그의 정통론의 구상과 관련이 있다. 주자는 학문의 보편성을 매우 강조한 사람이다. 학문의 보편성이란, 우선..
천자와 사에 대한 주희의 강조 ‘천자(天子) - 제후(諸侯) - 경대부(卿大夫) - 사(士) - 서인(庶人)’의 하이어라키(hierarchy, 계층)에서 제후ㆍ경대부ㆍ서인이 빠져버리고 천자와 사만 전(傳)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주희의 의식세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천자 - 제후 - 경대부 - 사 - 서인’이라는 하이어라키(hierarchy, 계층)는 주대의 봉건질서를 전제로 한 것이며 송대의 정치제도나 사회조직에는 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왕조의 유자들은 주희가 막연하게 복고적인 사상가인 것처럼 떠받들었을지 모르지만 주희는 과거지향적 인물이 아니라 철저히 현재지향적 인물이었다. 주희는 정강지변(靖康之變, 1127년) 이후 굴욕적으로 여진족의 금나라와 대치하고 있었던 남송(南宋)..
『효경』 수술에 대한 주희 자신의 변명 『효경장구』라 말하지 않고 『효경간오』라 말한 것 자체가 이미 『효경』이라는 문헌을 학용(學庸)에 비해 낮잡아 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이유는 『효경』이, 「대학(大學)」처럼 한 경의 한 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독립된 경(經)이었으며 주희가 손을 대기 이전에 이미 장(章)의 구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금문효경은 18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고문효경은 22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분장(分章)을 무시한 전체 경전의 내용은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주희가 「대학(大學)」을 모델로 삼아 감행해야 할 작업은 우선 삼강령 팔조목에 해당되는 경(經)을 만드는 작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효경』의 앞대가리 제1장부터 제7장까지..
왕양명의 주자 『대학장구』 비판 주희는 「대학(大學)」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대학지도(大學之道)’로부터 ‘미지유야(未之有也)’까지의 한 단, 즉 삼강령 팔조목의 한 섹션만을 경화(經化, canonization)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도학(道學)의 출발경전으로서의 최고의 권위를 「대학(大學)」의 첫머리에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나머지에 오는 문장은 이 경(經)을 부연설명하는 전(傳)으로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고 본 것이다. 명도(明道)는 주희가 경으로 간주한 부분에 이미 뒷 문장을 삽입해 넣었지만, 주희는 「대학(大學)」의 앞대가리 한 단은 온전하게 경(經)으로서 보전했다. 그러나 그것을 부연설명했다는 나머지 부분을 10장으로 나누어 배열하려고 하였을 때, 순서의 재배치가 불가피했다. ..
「대학(大學)」과 수기치인(修己治人) 주자는 「대학(大學)」이라는 텍스트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가장 이상적 전범을 이루는 텍스트라고 생각했다. 수기(修己)라는 것은 나라는 개인 존재의 내면적 덕성의 함양이며, 이것은 매우 도덕주의적인 실존활동(subjective moral activities)이다. 그리고 치인(治人)이라는 것은 나 이외의 타인을 어떻게 다스려서 사회적 질서(Social Order)를 형성시키는가에 관한 것으로 이것은 매우 사회과학적인 객관적 외재활동(objective governing activities)이다. 주자는 이 수기와 치인의 두 다른 층면(層面)을 동일한 연속적 차원에서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수기 修己 개인 존재의 내면적 덕성의 함양 도덕주의적인 실존활동 (subjectiv..
『예기』 「중용(中庸)」은 그대로, 『예기』 「대학(大學)」은 재구성 『중용장구』의 경우 『예기』 제31편의 「중용(中庸)」과 비교해보면 거의 텍스트의 변형이나 가감이 없이, 있는 순서대로 장을 33개로 나누어 배열했다. 본시 「중용(中庸)」에도 텍스트의 이질적 요소가 융합된 느낌이 있고, 『한서』 「예문지」에 예가(禮家)로 분류되어 수록된 『중용설(中庸說)』 2편이라는 서물이 의문부호로 남아있기 때문에, 텍스트 비평의 시각에서 본다면 「중용(中庸)」 텍스트 그 자체의 정합성(整合性)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누가 보아도 전반의 중용론(中庸論)과 후반의 성론(誠論)은 그 텍스트의 성격이 다르다. 그러나 주희가 이것을 변형없이 그대로 수용했다고 하는 것은 「중용(中庸)」을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로서..
사서운동, 아타나시우스와 주희 주자학(Zhuxiism)의 출발이 사서운동(四書運動)에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서(四書) 중에서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는 기존의 독립된 서물이다. 그런데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은 독립된 책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예기(禮記)」라는 잡다한 유가 저선집(An Anthology of Confucian Treatises on Rites) 중의 두 편이었다. 『예기』 중의 두 편(two chapters)인 「대학(大學)」(제42편)과 「중용(中庸)」(제31편)을 독립시켜 『논어(論語)』ㆍ『맹자(孟子)』와 함께 4개의 책으로 묶어 도학(道學) 즉 성리학(性理學)으로 불리는 새로운 유학운동을 전개하는 핵심 바이블로 삼았던 것이다. 4세기에 아타나시우스(At..
『효경』은 한대의 위작이라는 것이 주자의 생각 주희는 아무리 『효경』의 내용이 공자가 증자에게 직접 타일러 훈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액면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허구적 구성으로 보았던 것이다. 『효경』을 공자 자신의 저작[自著]으로까지 보는 관점은 가소롭고 또 가소로운 일이라고 질책하였다[至或以爲孔子之所自著, 則又可笑之尤者]. 그리고 심지어 『효경』을 『공총자(孔叢子)』와 같은 위서(僞書)로 보아 그 위작연대가 후한대(後漢代)에까지 내려올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주자의 논의는 오늘날의 문헌학적 성과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엉성하기 그지없는 주장이다. 『효경(孝經)』은 엄존하는 문헌의 형태로 이미 『여씨춘추(呂氏春秋, BC 241년에 성립)』에 인용되고 있다. ..
『효경간오』는 실패작이다 그 대강의 사정은 이러하다. 주자의 『효경간오(孝經刊誤)』는 우리가 독립된 작품으로서 읽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책자가 아니다. 우선 ‘간오(刊誤)’라는 말을 살펴보자! 간오란 오류[誤]를 도려낸다[刊]는 뜻이다. 즉 외과의사가 암덩어리를 잘라내듯이 『효경』이라는 텍스트 속에 박혀있는 암덩어리들을 후벼 파내버린다는 뜻이다. 즉 『효경간오』는 수술대 위에서 의사가 도려낼 것을 도려내기만 한 상태에서 멈춘 작품으로, 제대로 다시 봉합도 하지 않았고, 수술이 끝난 후 치유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았다. 그런데 수술은 제대로 되었는가? 천만에! 수술 자체가 엉터리로 되고 말았다. 이 덩어리를 자르다가 저 덩어리도 건드리게 되고, 그러다가 또 자르고 또 자르고, 그러다 보니까 엉망이 되어 버렸..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본(最古本)과 조선조 효경인 『효경대의』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효경』 판본 중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홍무(洪武) 6년, 그러니까 공민왕 22년(1373)의 발문과 간행기가 붙어있는 목판본 『효경』인데 이것은 백낙천 「장한가(長恨歌)」의 주인공이며 양귀비와 로맨스를 속삭인 사람으로 유명한 당 현종이 직접 주석한 『어주효경(御注孝經)』 계열의 금문 효경 텍스트로서 사료된다【이재영(李宰榮)의 석사논문 ‘조선시대 효(孝)사상의 전개와 『효경(孝經)』의 간행’에 언급되어 있으나 자세한 서지정보가 없다. 불행하게도 이재영과 연락이 안 닿아 실물을 확인하지 못했다. 귀중본일 것이다. 이러한 고판본에 대한 영인작업과 함께 치밀한 고증학적 연구가 절실하게 요청된다. 임화보(林華甫..
서람(序覽): 효경개략(孝經槪略) 제1장 주자학(朱子學)과 『효경간오(孝經刊誤)』 효의 나라 조선에서 『효경』이 읽히지 않은 것을 아시나요? 한국인의 혈관 속에는 『효경』이 흐르고 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효경』이 소기한 가치가 적혈구에 배어 흐르고 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한국인들은 『효경』이라는 문헌, 그 텍스트는 별로 접한 적이 없다. 요즈음 신세대 고전학자들도 사서오경(四書五經)은 읽었을지언정, 『효경』은 거의 읽지 않는다. 그런데도 『효경』」이 표방한 가치, 그리고 그 가치를 활용하여 사회질서(social order)를 유지 시키고자 노력한 이들의 땀방울이 한국인 모두의 체취 속에는 흥건히 젖어 있다. 『효경』이라는 책을 접한 적이 없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