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07/27 (52)
건빵이랑 놀자
16. 샤헤일루와 미메시스와 브리콜라주 고고학은 수만 년 동안 현생인류의 마음의 구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는 것을 밝혀왔다. 인류의 마음 밑바닥에는 야생의 꽃이 피는 들판이 지금도 존재하는 것이다.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옮김, 『대칭성 인류학』, 동아시아, 2005, 323쪽. 이 전쟁에 지더라도 ‘배신자’ 제이크만은 확실히 처단할 태세인 쿼리치 대령은 사력을 다해 제이크에게 돌진한다. 쿼리치는 ‘아바타’와 ‘원본’ 사이의 링크를 끊어버리고 원본의 제이크마저 판도라의 유독가스에 노출시켜 죽이려 한다. 제이크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네이티리는 목숨을 걸고 쿼리치에 맞서 그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아바타’의 링크가 끊어졌지만, 네이티리는 ‘원본’인 제이크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
15. I will fly with you…… 제이크: 쯔테이. 당신 도움이 필요해. 나와 함께 싸워 주겠나? 쯔테이: 당신과 함께 날겠소. 신화는 인간과 풍토가, 시간과 공간이 빚어낸 영혼의 성감대지. -최인훈, 『회색인』 중에서 제이크는 자신의 힘으로 제6대 토루크 막토가 됨과 동시에 드디어 나비족의 일원이 된다. 그는 쯔테이와 함께 인간들과의 총력전을 지휘하며 나비족뿐 아니라 판도라 행성에 사는 다양한 부족들을 연합하는 데 성공한다. 급속도로 늘어나는 판도라의 전사들을 보면서 당황한 쿼리치 대령은 총력전을 계획하며 부하들을 다그친다. 그는 나비족의 믿음의 원천인 영혼의 나무를 공격하여 나비족들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충격과 공포’를 심어 주려한다. 쿼리치 대령은 나비족의 믿음의 원천을 조롱한다...
14. 과학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제이크: (영화가 시작된 직후, 제이크의 내레이션) 형은 대단한 과학자이지만 나는 부상당해 다리로 못 쓰는 퇴역 군인일 뿐이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내가 받는 연금으론 다리를 고칠 수 없다. 지구에선 자유를 위해 싸우던 군인이었지만 여기선 회사에 고용된 용병일 뿐이다. 쿼리치 대령: (아바타 프로그램에 지원한 병사들을 겁주며) 지옥도 여기에 비하면 휴양지나 다름없지.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가 제군들을 간식으로 먹어치울 것이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 중얼거리던 제이크가 이제는 자신이 ‘박멸’해야 할 적군의 리더, 나비족의 열혈 전사가 되었다. 판도라에서 나비족의 일원이 되지 않았다면, 제이크는 ‘다리도 쓰지 못하는 퇴역군인’이라는 사회가 부여..
13. I See You 에리봉: 당신은 자신의 자아를 잘 모른다고 생각합니까? 레비스트로스: 거의 몰라요. 에리봉: 그 점은 당신에게만 고유한 것인가요, 아니면 인류 정신의 특성인가요? 레비스트로스: 그게 나만의 특성이라고 자부하진 않겠어요. 개인적인 정체성의 감정을 우리에게 부과한 것은 바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 사회는 당신이 어떠 어떠한 사람이기를 원하며, 그 사람이 자신이 행하고 말하는 바의 책임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회적인 압력이 없다면, 개인적인 청체성의 감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체험한다고 믿는 것처럼 강렬하지는 않다고 확신해요. -디디에 에리봉 대담, 송태현 역,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강, 2003, 257~258쪽. 사경을 헤매는 그레이스 박사를 바라보며 제이크는 고민에 빠..
12. 아바타와 주인의 권력관계가 전도되다 네이티리: (어머니이지 부족의 샤먼인 모앗을 소개하며) 우리의 차히크야. 에이와의 뜻을 해석하시지. 모앗: (제이크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가득 찬 잔을 채울 순 없어. 제이크: 전 빈 잔이에요. 나는 어떤 주술사의 집을 함께 썼다. ‘바리(주술사)’는 하나의 특별한 범주에 속하는 인간으로 물리적 우주나 또는 사회적 세계의 어느 편에도 완전히 소속되지 않는 존재였다. 그들은 이 두 가지 계급 사이에서 조정 역할을 하는 자라 하겠다. (……) ‘바리’는 비사회적 존재이다. 그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영혼들과 개인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특권적인 존재이다. 예를 들면 그가 혼자서 사냥을 나가면 초자연적인 도움을 언제든지 얻을 수가 있었다. 또 그는 자기 뜻대로 동..
11. 슬픈 히트상품, 노스탤지어…… 제이크:(영혼의 나무 앞에서 기도하며) 에이와님. 정말 계신다면 저희를 도와주세요. 인간들이 대지를 파괴해버렸고 이젠 우리를 파괴하려 해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네이티리:(연민과 사랑이 교차하는 누으로 제이크를 바라보며) 대지의 어머니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세계의 균형을 지키실 뿐이시지. 언젠가 정부 당국에서 소총과 권총을 나누어 주었지만 인디언들은 그것을 집 안에 걸어놓기만 했다. 대신에 그들은 사냥을 할 때 총기류라고는 결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전통적인 기술로 만들어진 활과 화살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당국의 노력에 의해 날치기식으로 덮어 가리워졌던 예전의 생활방식이 재차 주장되었다. 황폐한 부락에서는 지붕들이 차례로 먼지 속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지..
10. 두려워하지 마, 내가 너의 거울이 되어줄게 네이티리: 이크란은 평생 동안 교감이 이루어진 단 한 명의 전사와 날아가는 새야. 진정한 전사가 되려면 이크란과 전사가 서로를 선택해야 해. 제이크: 언제? 네이티리: 때가 되면……. 제이크: (네이티리 앞에서 날렵하고 확신에 찬 동작으로 짐승을 사냥하며, 죽어가는 짐승을 향해 속삭인다.) 미안해……. 에이와 여신이 네 영혼을 거둘 거야. 네 몸은 여기 나와 이곳 사람들의 일부가 될 거야. 네이티리: (대견하는 눈빛으로 제이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제 때가 되었구나. 제이크는 아름다운 네이티리의 노란 눈동자를 통해 이전에는 결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바라본다. 판도라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공격적인 호기심으로 자연을 바라보았던 제이크는 조금만 낯선 동물이..
9. 평범한 나무 VS 신선한 나무 파커: 도대체 나비족이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르겠어. 학교도 지어주고 영어도 가르쳐주었지만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고. 그레이스: 그들에게 총질을 해대니까 그렇죠! 쿼리치 대령: (……) 파란 원숭이놈들 마음을 움직일 당근을 알아봐!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채찍을 쓸 수밖에! 인디언의 동물에 대한 세심한 배려는 특히 동물을 죽이는 장면에서 클라이맥스를 맞습니다. 이때 인간에게는 최고의 경의와 성실함을 갖춘 태도가 요구됩니다. 이때 인간에게는 최고의 경의와 성실함을 갖춘 태도가 요구됩니다. (……) 동물을 공격하기 전에 사냥꾼이 끊임없이 변명하는 광경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동물이 지금 자신에게 가해지고 있는 공격을 납득해주어서 서로의 ‘양해’하에 죽는 것이 바람직했기 때..
8. 과잉 커뮤니케이션 VS 과소 커뮤니케이션 그레이스: 난 과학자라는 걸 잊지 마. 동화 같은 이야기는 안 믿어. 제이크: 나비족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줄 거예요. 그레이스: 그들이 왜 우리를 도와주겠어? (……) 그녀를 봤어. 에이와는 정말 존재해. 제이크: 그런데 왜 나를 구해준 거야? 네이티리: 넌 강한 영혼을 가졌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지. 하지만 넌 멍청해! 아이처럼 무지하지! 레비스트로스는 현대사회를 ‘과잉 커뮤니케이션’의 사회라고 진단했다. 문명과 문명 사이에 너무 많은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서 서로의 문명을 끊임없이 모방하느라 점점 더 ‘차이’보다는 ‘획일성’이 지배하게 되는 사회가 되어간다고. A문명이 B문명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문명을 비교하고 정복하..
7. 나는 왜 ‘너’일 수 없는가 당신은 몰라요. 당신은 땅을 소유할 수 있을 거라 하지만 그건 땅을 죽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일 뿐. 하지만 난 생명이 있고 영혼이 있고 이름이 있는 바위와 나무와 동물을 알아요. (……) 달을 보고 울부짖는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았나요? 야생 고양이에게 왜 우느냐고 물어봤어요? 산의 목소리에 맞춰 합창할 수 있나요? 바람의 색깔을 칠할 수 있나요? (……) 한 번만이라도 얼마짜리인가 생각지 말고 그냥 주위의 풍요로움을 즐겨보세요. (……) 바람의 색깔을 칠할 수 있어야 해요. 아무리 땅을 가진다 해도 바람의 색깔을 칠할 수 없으면, 그건 가진 게 아니에요. -『포카혼타스』 ‘Colors of the wind’ 중에서 원주민 여성에 대한 신비주의와 세련된 오리엔탈리즘, ..
6. 아바타의 신체가 거꾸로 인간의 영혼을 물들이다 에리봉: 돈키호테주의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레비스트로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박해받는 자들의 옹호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나는 돈키호테주의의 본질이 현재 너머에 있는 과거를 재발견하고자 하는 끈덕진 욕구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훗날 레비스트로스가 어떤 인물인지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혹 존재한다면, 난 그에게 이 열쇠를 제공하고 싶군요. -디디에 에리봉 대담, 송태현 역,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강, 2003, 150~151쪽. 문자 없는 부족들이 보기에 문명인의 가장 독특한 습관 중 하나는 ‘메모하는 습관’이라고 한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종이 부족’이다. 혹시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전..
5. 원시문명 그 속으로 들어가다 신화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몸속으로 스며들어온 것을 말한다. -레비스트로스 우리는 진화의 맨 꼭대기에서 살아가는 가장 우월하고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나무와 바위, 코요테, 독수리 물고기, 두꺼비들과 함께 각자의 목적을 완성하면서 삶이라는 성스런 고리를 구성하고 있는 일원일 뿐이다. 그들 모두가 그 성스런 고리 안에서 주어진 일을 해내고 있으며, 인간 역시 다르지 않다. -류시화,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김영사, 2003, 495쪽. 레비스트로스가 원시문명 탐험을 떠났던 시기, ‘문자 없는 사람들’의 원시문명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말리노프스키로 대표되는 기능주의 혹은 실용주의적인 관점. 이 관점에서는 ‘문자 없는’..
4. 내가 아닐 때, 가장 나답다? 저는 한 번도 제 개인의 정체성을 깨달았던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제 자신이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는 장소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든지 ‘나를’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사건이 일어나는 일종의 교차로입니다. -레비 스트로스, 임옥희 역, 『신화와 의미』, 이끌리오, 2000, 16쪽. 나비족의 여전사 네이티리는 평화로운 판도라를 침입한 외부자 제이크를 죽이려 하지만 불현듯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계시를 느끼고 차마 제이크에게 활을 겨누지 못한다. 나비족의 여신 ‘에이와’의 계시는 그녀를 비롯한 모든 부족민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네이티리는 나비족 전체를 소집한 부족회의에서 제이크가 정말로 ‘에이와의 계시’에 적합한..
3. 복종과 해방 사이 언옵타늄을 ‘자원’으로만 바라보는 인간들에게 판도라는 단지 정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아직 판도라에 대한 정보를 ‘아바타 사용 매뉴얼’ 정도로만 습득한 제이크도 처음엔 그랬다. 그는 ‘건강한 다리’를 얻기 위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노동이 바로 아바타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비참했다. 형의 비명횡사를 제대로 아파할 틈도 없이 형의 ‘대체재’로 아바타 프로그램에 투입되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잘할 수 있는 일(전투)도 이제는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가 형의 아바타, 아니 자신의 아바타가 될 생명체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연민과 비감이 교차한다. 너도 꼭 내 신세 같구나.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고, 그저 주어진 삶의 매뉴얼에 복종해야 하는 구나. 그..
2. 언옵타늄을 찾아 판도라에 오다 신화는 한 집단의 인물들이 다른 집단의 인물들에게서 달아나고 도망치려고 하는 이야기를 펼쳐 보여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추격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 이것은 천상의 권력과 지상의 권력, 하늘과 땅, 또는 태양과 지하의 권력 등등 사이에 초래된 갈등일 수 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 임옥희 역, 『신화와 의미』, 이끌리오, 2000, 101쪽. 하반신 마비로 고통 받는 전직 해병대 출신 제이크 설리는 ‘아바타 프로그램’의 일원으로 투입되어 머나먼 행성 판도라로 향한다. 에너지 고갈 문제로 신음하던 인류가 마지막 희망으로 점찍은 행성이 바로 판도라다. 판도라의 토착민 나비(Na'vi)족이 사는 영토에는 ‘언옵타늄’이라는 신비로운 물질이 있다...
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브리콜라주, 인류의 잃어버린 꿈의 조립법 1. 아마존의 눈물, 아바타의 비명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진 자라면 누구든 적(敵)으로 만들어 빼앗아야만 하는가? -영화 『아바타』 중에서 신화적인 이야기는 변덕스럽고, 무의미하며, 불합리합니다. 또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전 세계적으로 반복해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임옥희 역, 『신화와 의미』, 이끌리오, 2000, 32쪽.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아바타』를 본 후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관객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온 세계가 무의미해졌다”, “판도라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네티즌의 반응도 흥미롭다. 키는 3미터를 훌쩍 뛰어 넘고 인간보..
20. 우리는 시간의 지휘자가 될 수 없다 마코토는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등장한, 호두처럼 생긴 타임 리프 기계를 과학실에서 찾아낸다. 미래로 다녀온 마코토에게 이 기계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녀는 타임 리프 장치를 잃어버려 노심초사하고 있을 치아키에게 달려간다. 시간을 되돌려 간신히 되찾은 치아키를 마지막으로 만나기 위해 달려가는 마코토. 달리기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치아키를 향해 달리는 마코토의 표정은 더 이상 장난스럽지도, 철없지도, 어리지도 않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존재의 문턱을 넘은 사람의 강인한 아름다움이 마코토의 얼굴에서 배어나온다. 언제나 시간에 뒤처지던 그녀는 어느새 시간을 따라잡고, 시간이 더 이상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을 수 없도록, 시간의 중력에 휘둘리지 ..
19. ‘의미 없던’ 파편들이 의미를 안고 내 안에 깨어나다 한편, 치아키가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는 고스케의 마음도 편치 않다. “난 그렇다 쳐도, 너한테도 아무 말 없이 떠나다니. 널 좋아했으면서…….” “날 좋아한다고…… 치아키가 그렇게 말했어?” “딱 보면 알지. 몰랐냐? 하긴 넌 그런 데는 좀 둔하니까. 그래서 치아키가 더 말 못했는지도 몰라.” 치아키는 ‘아직 고백하지 않은 시간’을 살다가 떠났지만, 마코토는 ‘이미 고백을 받았으나 그 고백의 시간을 말소해버린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러나 마코토의 시간 속에서 이미 치아키는 고백을 했고, 그렇게 ‘들었으나 듣지 않은 고백’이 마코토를 뒤늦게 괴롭힌다. “나 정말 못된 애야. 치아키가 어렵사리 해준 얘기를,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렸어. 난 왜 더 귀..
18. 지나간 시간은 사후적으로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유목민은 물론 움직이지만, 앉아 있으면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앉아 있다. (……) 유목민은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 안다. 그들은 무한한 참을성을 갖고 있다. -들뢰즈· 가타리, 『천의 고원』2, 연구 공간 ‘너머’ 자료실, 2000, 165쪽. 우리에게 발생하는 것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그래서 그것을 원하고 그로부터 사건을 이끌어내는 것, 그 고유한 사건들의 아들이 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것, 탄생을 다시 이룩하는 것. -들뢰즈, 이정우 역,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261쪽. 왜 인간은 사건의 폭풍이 잦아들고 나서야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일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후적 깨달음의 동물일까. 지..
17. 되찾으려는 나의 시간 때문에 타인의 시간을 빼앗아버리다 그런데 그 순간. 고스케가 마코토의 자전거를 타고 소녀를 등 뒤에 태운 채 지나간다. 마코토가 고장 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죽을 뻔 했던, 아니 한 번 죽었던, 바로 그 기찻길 쪽으로. “마코토. 자전거 좀더 쓸게.” 마코토는 미친 듯이 달려가 고스케를 부르다가 내리막길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고 고스케와 소녀는 그 기찻길에서 사고를 당한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마코토는 고스케를 향해 절규한다. 멈춰, 멈춰, 멈추라고! 그 순간. 타임 리프를 암시하는 화면이 지나간다. 멈춰, 멈춰, 멈추라고! 고스케를 향한 그 피투성이 외침을 ‘무정한 시간’이 들은 걸까. 믿을 수 없는 마법처럼, 시간이 정말 멈춰버렸다. 길 위에 북적이던 사람들, 하늘을 나는..
16. 뭐 아무렴 어때 사유는 (……) 나 이외의 타자가 되기 위해 행해지는 모든 작업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심문하는 방법이다. -푸코, 폴 라비노우와의 인터뷰 중에서 타임 리프를 하기 전까지, 마코토에게 시간은 단지 ‘지켜야 할 시간’과 ‘지키지 않아도 되는 시간’으로 나뉘었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시간(학교를 중심으로 구획되는 기계적 시간표)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그녀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자유 시간). 그녀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란 뭔가 독특한 외부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뿐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시간의 충돌을 경험하면서, 그녀의 시간과는 다른 이질적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마코토는 조금씩 깨닫는다. ‘나의 시간’이란 무중력 상태의 물체처럼 외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15. 무한한 지성으로 시간을 움켜쥐려하다 수줍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소녀가 드디어 고스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마치 고스케의 마음의 문을 두드려도 되느냐는 허락(?)을 마코토에게 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제가 중학생 때였어요. 저희 할머니가 계신 양로원에 쿠라노세 고등학교 자원봉사부가 왔었는데 할머니는 그 중 한 학생이 아주 맘에 드셔서 그 사람 얘기를 많이 해주셨죠. 참 착하고 멋진 남학생이라면서, 몇 번이고 칭찬을 해주셨는데. 계속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머니에게서 듣다 보니……. 본 적도 없는 그 사람이 점점 좋아졌어요.” 마코토는 영문도 모른 채 어느새 이 이름 모를 여학생의 사랑 이야기에 푹 빠져 감탄한다. “와, 정말 예쁜 이야기네.” 여학생은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런데 ..
14.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 인류 역사에서 우연히 10세기 또는 20세기를 들어낸다 해도 우리가 인간 본성을 인식하는 감각적 방식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손실이 있다면 그것은 그 세기에 탄생하는 것을 봤던, 그러나 더는 볼 수 없는 예술 작품들의 손실이리라.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만든 작품에 의해서만 변화하고, 그 작품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작은 나무를 낳은 목각상처럼 작품들만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실제로 무엇인가가 일어났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비 스트로스, 고봉만 · 유재화 옮김, 『보다 듣다 읽다』, 이매진, 2005 마코토는 이모가 일하고 있는 박물관에서 불현듯 눈길을 잡아당기는 그림 한 점을 ..
13. 비자발적 기억이 가져다주는 치명적인 고통 내 상처는 나 이전에 존재했으며, 나는 그것을 체현하려고 태어났다. -조 부스케(Joe Bousquet) 영혼의 타임 리프는 ‘부분적으로’ 가능하다. 우리는 매일매일 ‘기억하고 싶은 것’을 더 명료하게 인지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압하거나 삭제하면서 비공인 타임 리프를 하고 있다. 어떤 시간에 분명히 그곳에 있었는데 완전히 그 시간을 건너뛰어 버린 듯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A와 B가 함께 있었는데, A는 그 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B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 B는 일종의 타임 리프를 한 셈이다. A에게는 분명히 일어났던 사건이 B에게는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이다. 소개팅에서 만난 상대방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12. 기억이 나의 등 뒤에서 나를 공격한다 저장하고 싶지 않았던 그 기억들은 애초의 내 의도와 달리 내 등 뒤에서 배회하며 나도 모르는 또 하나의 나를 만들고 있다. 타임 리프로 인해 나는 기억을 자유자재로 편집하여 내가 감독한 나만의 ‘UCC형 기억’을 가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되돌리고 싶었던 바로 그 과거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내가 버린 나의 기억이 나의 등 뒤에서 내 삶을 응시하고 있다. 내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나의 등 뒤에서, 내가 결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를 ‘공격하는’ 것만 같다. 나는 (……) 기억이라는 것에 대해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떠올린다’고 할 때, ‘사람’이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사람에게 도래하는 ..
11. 기억을 지배하는 인간 vs 인간을 지배하는 기억 호글런드는 아내를 간병하다가 잠시 침대를 떠나 휴식을 취했다. 침대로 돌아온 그는 아내에게서 오랫동안 어디에 가 있었느냐는 심한 불평을 들었다. 사실 그가 자리를 비운 시간은 아주 짧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경과한 시간은 그보다 아내에게 더 길게, 그것도 실제보다 더욱 길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 이유는 뭘까? 그러잖아도 생리학에 관심이 있었던 호글런드는 ‘화학적 시계’에 생각이 미쳤다. 그것은 두뇌나 신체 속에서 시간의 경과를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모종의 화학적 과정을 가리킨다. 물리화학의 법칙에 따르면, 모든 화학적 과정은 열을 받을 경우 속도가 증가하게 마련이므로 호글런드는 아내의 시계가 높은 체온에 의해 열을 받아 평소보다 훨씬 더 빨리 감으로써..
10. 중요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거나 중대한 의미를 갖는 아이온의 시간 무한일 필요가 없는 이 시간, 단지 “무한히 분할될 수만” 있으면 되는 이 시간은 어떤 시간일까? 그것은 바로 아이온이다. (……)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동일한 시간성의 세 부분이 아니다. 그들은 각자가 완전하고 독자적인, 또 시간에서 읽어낼 수 있는 두 측면이다. 한편으로 언제나 한계 지어지는, 원인들로서의 물체들의 활동과 이들의 혼합 상태를 측정하는 현재(크로노스)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결코 한계지어지지 않으며, 효과들로서의 비물체적 사건들을 표면에 모으는 과거와 미래(아이온)가 존재하는 것이다. -들뢰즈, 이정우 역,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136쪽. 타임 리프가 마코토의 삶에 던져준 메시지는 ‘네 맘대로..
9. 크로노스의 시간과 아이온의 시간 신들은 시간을 구별하는 법을 처음 알아낸 사람을 저주한다. 또한 이곳에 해시계를 세운 사람도 저주한다. 나의 하루를 마구 깎고 쪼개어 작은 조각들로 만들었다고! 어렸을 때 나의 배는 나의 해시계였다. 어느 누구의 배보다 확실하고 올바르고 정확한 시계였다. 이 시계는 내게 밥 먹을 때를 말해줬다. 하지만 지금은 태양이 허락하지 않으면 왜, 언제 밥을 먹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시내에는 이런 저주스런 해시계들이 가득하다. -기원전 3세기 후반 로마의 희극작가 플라우투스, 스튜어트 매크리디 엮음, 남경태 역, 『시간의 발견』, 휴머니스트, 2002, 145~146쪽. 시간이 ‘의식’되는 순간, 시간을 ‘훈련’해야 한다고 느끼는 순간, 인간은 ‘내 몸이 느끼는 시간’의 고유..
8. 돌아가는 시간과 돌아가지 않는 마음 마코토: 고스케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면 잘 챙겨주겠지? 치아키: 그럴 녀석이지. 마코토: 그럼 같이 야구 못하잖아. 치아키: 캐치볼을 야구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 않아? 마코토: 왠지 쭉 셋이서 같이 있을 것만 같았는데. 지각해서 고스케한테 잔소리 듣고, 공 못 잡는다고 치아키한테 놀림 받고……. 치아키: 마코토……. 마코토: 응? 치아키: 나랑……. 사귈래? 마코토는 생각지도 못한 치아키의 고백에 당황한다. 왠지 쭉 셋이서 같이 있을 것만 같았던 그 느낌, 고스케의 잔소리와 치아키의 핀잔 속에서 은근히 보호받는 듯한 그 행복한 느낌. 그것은 ‘커플’이라는 성숙한 관계, 말하자면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져야 하는 관계와는 거리가 먼, 규정되지 않은 모호한 관계의 기..
7. ‘현재’라는 말뚝에 고정된 한계 내에서 진행되는 크로노스의 시간 시간은 스승이 없는 자의 스승이 될 것이다. -아라비아 속담 고스케와 치아키와 마코토. 세 사람은 방과 후 매일 캐치볼을 하고 함께 집에 돌아가는, 그들만의 우정이 창조하는 시간의 리듬을 즐긴다. 마코토의 일과는 크게 세 가지 시간의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교의 시간표로 분절되는 기계적 반복의 시간,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자유로운 유희적 시간, 가족과 함께 집에서 보내는 휴식과 몽상의 일상적 시간. 이 시간의 삼각형은 마코토의 삶을 균형 있게 유지하는 축이었다. ‘타임 리프’의 능력을 이용해 시간의 퍼즐 놀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지금, 마코토는 하루하루가 날아갈 듯 행복하다. 그런데 아무리 기상천외한 타임 리프를 구사한다 할..
6.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호 다시 시작된 7월 13일. 마코토는 그토록 좋아라 하던 늦잠도 팽개치고 일찍 일어나 부리나케 학교에 나가며 가족과 친구들을 놀래게 만들고, 가정 시간에 했던 실수도 ‘다른 남학생’에게 떠넘기고, 쪽지 시험도 무진장 잘 보며, 평소처럼 야구를 하지 않고 노래방에 가서 절친 치아키와 고스케에게 10시간도 넘는 ‘노래방 런닝타임’을 선사해준다. 온 힘을 다해 전력 질주하거나 온몸을 던져 곳곳에 충돌하는 행위를 통해 그녀는 타임 리프의 노하우를 체득하게 된다. 타임 리프 능력으로 그녀가 고안해낸 가장 ‘즐거운 일’들은 이렇게 일상의 사소한 장면들을 바꿔치기하는, 거창한 시 간여행이 아닌 자잘한 시간의 소꿉놀이다. 이모를 만나 타임 리프의 이점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는 마코토의 표..
5. ‘내 시간’은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일까 타임 리프 능력을 갖게 된 마코토처럼 시간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지만, 똑같은 시간을 매일 반복하게 됨으로써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영화 속의 주인공이 있다. 바로 『사랑의 블랙홀』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국가대표 에고이스트인 TV 기상 통보관 필 코너스(빌 머래이)다. 그는 매년 2월 2일에 개최되는 성촉절(Groundhog Day) 취재를 위해 펜실베니아의 펑추니아 마을을 방문한다. 성촉절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2월 2일에 마못(북미산 다람쥐)이 자기 그림자를 보면 겨울이 6주나 길어진단다. 함께 일하는 PD인 리타(앤디 맥도웰)의 눈에 비친 필은 출세와 성공에만 눈이 먼데다가 공격적인 시니컬함으로 무장하여 타인에게 상습적인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한..
4. 어제의 나는 과연 오늘의 나와 같은 존재일까 하루 종일 좌충우돌했던 하루를 마감하고 이제 집으로 가려는 마코토에게 또 한 번의 끔찍한 ‘머피의 유령’이 도사리고 있다. 기찻길까지 내려오는 급경사 길에서 신나게 질주하던 중 자전거 브레이크가 고장 나버린 것이다. 이 순간이 마치 영원히 이어질 듯, 마코토의 몸은 하늘 높이 떠올라 정지된다. 죽기 직전의 마코토는 생각한다. “오늘이 만약, 오늘이 만약 평소와 다름없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잊고 있었어. 오늘은 최악의 날이란 걸. 설마 했는데 죽는구나.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일어날걸. 늦잠을 안 잤으면 지각도 안 했을 테고 튀김도 더 잘 튀겼을 거고 어리바리한 남자애한테 부딪히지도 않았을 테지…….” 그런데 눈을 ..
3.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헛되이 보내버린 이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이다. -질 들뢰즈, 서동욱 · 이충민 역,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47쪽. 고층빌딩이 조각조각 찢어버려 토막 난 하늘에 익숙해진 관객의 눈은 문득 『시간을 달리는 소녀』 속의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이 한없이 낯설다. 우리가 저토록 아름다운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았던가. 하늘뿐만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고등학교 교정으로 보이는 공간 구석구석이 문득 고풍스러운 유물처럼 신비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칠판에 적힌 글씨에 드리운 석양의 그림자조차 우주의 비밀을 간직한 듯 느닷없는 애수를 자아낸다. 인물의 액션과 대사가 그려내는 눈부신 역동..
2. 내가 변하면 시간도 변할 수 있다 타임 리퍼(time leaper)와 투명인간은 ‘주체의 책임’을 삭제함으로써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신의 전지전능함을 떠올리게 한다. 타임 리프나 투명인간 되기는 신의 권능을 훔치는 일처럼 짜릿하면서도 은밀한 쾌감들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엄청난 모범생도 아닌, 언뜻 보면 그저 평범한 소녀인 마코토는 이 눈부신 초능력을 다소 엉뚱한 곳에 사용한다. 노래방 시간을 연장하거나 동생이 푸딩을 꿀꺽 집어삼키기 이전으로 돌아가기 같은, ‘정말 시답잖은, 하등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말이다. 그러나 이 대단한 능력을 이토록 하찮은 일에 써먹는 소녀의 천진함이야말로 이 소녀에게 ‘타임 리프’라는 위대한 능력이 주어질 자격이 있음을 ..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 시간을 잴 수 없는 시간의 무한 탈주 1. 시간의 단위는 무엇일까 우리가 우주로 나갈 때 가져가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주도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336쪽. 쏜살같이 달리는 시간의 뒷덜미를 슬쩍 낚아채어, ‘헤이, 그만 좀 달리고 웬만하면 쉬어 가지 그래?’라고 속삭일 것 같은 소녀. 등교시간의 압박과 알람시계의 난리법석만 없다면,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과 도란도란 수다를 떨고, 눈길을 끄는 모든 장소마다 기꺼이 멈춰 요리조리 두리번거릴 것만 같은,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남을 오지랖을 펄럭이는 명랑 소녀 마코토. ‘차라리 지각을 하는 게 낫겠다!’라는 친구의..
15. 사랑은 결핍이 도드라질수록, 결점이 눈에 띌수록, 더욱 완전해지는 신비다 동화들은 흔히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난다. 하지만 『슈렉2』와 『슈렉3』는 간신히 서로의 사랑으로 맺어진 슈렉과 피오나 커플이 정말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장애물들이 남아 있음을 증언한다. 아무리 위대한 커플이라도 ‘결혼’만 했다 하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자동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여곡절과 산전수전을 ‘함께’ 했다는 수많은 추억의 퍼즐들이 모여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행복’이라는 커다란 모자이크로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행복’은 단지 주어진 유리한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아닐까. 그러므로 행복은 불행의 요소들을 ‘배제’하는 ..
14. 우리 안에 숨죽이고 웅크린 숨은 욕망 여성적 윤리는 죽지 않는 것, 사랑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우리는 ‘아브젝트’가 추방되고 사형되고 사라지는 수많은 영화들을 감상한 경험이 있다. 『조스』에서 끔찍한 식인 상어들은 인간의 단결된 힘으로 처치되었으며, 『프랑켄슈타인』에서 인간의 시체에서 나온 잔해들로 만든 ‘괴물’은 인간의 지혜로 살해되었으며, 『괴물』에서는 힘없는 소시민 가족의 좌충우돌 모험기를 통해 ‘어쨌든’ 괴물을 소탕했다. 혐오와 공포의 대상인 괴물은 영화의 종반부에서는 반드시 퇴치되는, 주인공에게 가장 ‘적대적’인 조연급 배우였다. ‘괴물’이 주로 ‘인간’이 아닌 존재로 등장하거나 누구나 분노할 만한 엄청난 죄를 지은 존재로 묘사되는 것은 괴물의 제거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곤 했다. 그..
13. ‘우울한 결핍’에서 ‘유쾌한 차이’로 슬픔은, 그 사람이 좌절감을 느끼기 때문에 적대적으로 생각되는 타인에 대한 숨겨진 공격이 아니라, 상처 입고 불완전하며 텅 빈 원초적 자아의 증거이다. 그러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공격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어떤 근본적인 결함, 선천적인 결여로 인해 고통 받는다고 생각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스스로를 향한 타인들』(1989) 중에서 슈렉은 슬픔을 방패로 삼아 타인의 접근을 불허하고, 마침내 거대한 슬픔의 커튼 뒤에 숨어버린다. 오랫동안 슈렉은 슬픔의 벽돌로 지은 마음의 성벽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슈렉은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이웃도 없이 오랫동안 자기만의 늪에 갇혀 지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절망은 처음에는 슬픔의 ‘원인’이었지..
12. 아무도 사랑하지 못한 편협함 동키: 슈렉, 난 너랑 같이 살고 싶어. 슈렉: 이봐, 내가 전에도 말했지! 나는 너랑 같이 살지 않아. 난 혼자 살아! 내 늪! 나! 딴 사람은 아냐! 알겠어? 다른 사람은 싫어! 특히 쓸모없고 짜증나는 말하는 당나귀는 필요 없어! 마침내 파쿼드 영주는 아름다운 피오나 공주의 ‘실물’을 보게 되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즉석에서 청혼한다. 전리품을 챙기듯 피오나 공주를 차지하려는 파쿼드의 부담스런 프러포즈. “아름다운 피오나 공주님, 완벽한 신랑의 완벽한 신부가 되어주시겠습니까?” 완벽한 신랑과 완벽한 신부의 조합. 파쿼드가 꿈꾸는 결혼은 신랑 신부의 계약을 통해 재산과 권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피오나 공주의 섹시함은 이 결혼으로 인해 쟁취할 경제적 ·정치적 가치..
11. 사랑은 불안과 슬픔과 혼돈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동키: 당신은 그렇게 못생기지 않았어요. 흠, 거짓말이었고요, 사실 못 생겼어요. 하지만 밤에만 그렇잖아요. 슈렉은 하루 종일, 24시간 못생겼어요. 피오나: 동키, 나는 공주야, 공주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괴물’, 동화 속에 나오는 각종 도깨비, 다양한 괴담 속에 존재하는 ‘귀신’들이 매혹과 공포의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야말로 크리스테바가 말한 ‘아브젝시옹’의 대표적 대상들이다. 그 더러움과 끔찍함이 ‘우리’의 정체성을 더럽힐까 봐 추방하고 배제했던 아브젝트들. 우리는 의식의 차원에서는 아브젝트를 밀어내지만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아브젝트에 대한 미련과 애정을 버리지 못하는 게 아닐까. 『슈렉』..
10. 동화의 철책에 갇힌 주인공들 동키: 두 사람 서로 좋아하잖아. 이봐. 슈렉, 감정을 무시하면 안 돼. 그녀에게 네 감정을 말해 줘. 슈렉: 안 돼. 그녀는 공주야. 나는, 나는…… 동키: 괴물이라고? 오랫동안 성 안에 갇혀 있던 공주답지 않게 우울증의 기미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명랑소녀 피오나. 특히 동화 속 캐릭터 중 하나인 로빈 후드가 나타나 그녀를 슈렉에게서 빼앗아 가려하는 대목에서 명랑소녀 피오나의 진면목이 발휘된다. “전 당신의 구원자입니다! 당신을 구출하러 왔습니다! 저 녹색 괴물로부터!” 잘난 척, 잘생긴 척, 멋진 척은 혼자 다 하는 로빈 후드에게 슈렉이 괴력을 보여주기도 전에, 피오나는 『미녀삼총사』의 유쾌한 패러디 액션으로 로빈 후드 일당을 일거에 퇴치해버린다. 슈렉의 엉덩..
9. 미워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슈렉: 당신은 제가 상상했던 공주하고는 좀 다르네요. 피오나: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판단을 내리면 안 되겠죠. 나는 가끔 ‘사람 미워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누군가를 싫어할 때 그 이유를 곰곰이 따져보면 알 수 있지만 그 이유를 따지기도, 말하기도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누군가를 싫어하는 이유를 말하려면 결국 우리 자신의 치부(恥部)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서버린 존재, 그 한계를 똑바로 노려보기엔 우리의 자의식이 너무 견고한 것은 아닐까.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블랙리스트는 곧 나의 ‘한계’를 드러내는, 숨기고 싶은 마음의 카탈로그이기도 한 셈이..
8. 동화 속의 세계는 너무 안전하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소모되어버린, 추방되어 사실상 굶고 있는 나를 보라. -디즈니 에니메이션 『인어공주』 중에서, 마녀 어슐라의 대사 디즈니가 각색한 애니메이션에서는 막판에 주로 악당이 살해되거나 마녀가 추방된다. 소름끼치고 역겨운 것들을 반드시 배제해버려야만 세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긋, 디즈니형 애니메이션은 동화에서 선악의 경계, 미추의 경계를 확실히 구분한다. 그러나 실제 세계도 그럴까. 디즈니의 ‘우월한 유전자’를 향한 지독한 선망은 ‘나와 다른’ 사람들의 주체성을 희생시켜서라도 ‘안전한 세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질병 아닐까. 슈렉은 피오나를 구하지만 피오나는 자신의 ‘이상형’에 슈렉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으며 실망하기 시작한다. 자..
7. 코라(chora): 내가 버린 나의 가능성들의 총집합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그러한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도 최소한 이 괴물은 신비스럽잖아요? -영화 『미녀와 야수』 중에서, 야수를 죽이려는 주민들의 목소리 슈렉은 동키와 함께 피오나 공주를 구하러 떠난다. 이 모험의 첫 번째 난관은 거대한 용암 위에 펼쳐진 흔들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고소공포증이 도진 듯 벌벌 떠는 동키를 보며 슈렉은 우리가 함께이니 괜찮다고 말해준다. “동키, 내가 바로 옆에 있잖아, 걱정 마. 천천히 건너가면 되는 거야. 밑을 보지 말구.” 아래를 쳐다보지 말라는 슈렉의 경고를 어긴 동키는 두려움에 질려 더 이상 못가겠다고 버티고, 슈렉은 특유의 재치를 발휘해 동키가 오히려 다리를..
6. 미처 발현되지 못한 우리 안의 가능성 아브젝시옹은 ‘자기 자신’에게 ‘다른’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추방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주체성의 경계를 한정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노엘 맥아피, 이부순 역, 『경계에 선 크리스테바』, 앨피, 2007, 111쪽. 아브젝시옹이 ‘나답지 않다’고 판단되는 모든 것을 추방하는 과정이라면, 아무것도 몰아내지 않고 품어내려는 열정, 자기를 가득 채우는 것에서 힘을 얻는 것이 ‘코라(chora)’다. 코라는 단지 생성하는 모든 것들의 저장소가 아니라 모든 생성의 유모 같은 존재다. 코라의 속성은 안정감이나 균형의 유지가 아니라 불안, 불균형, 불규칙, 동요 그 자체를 끌어안는 엄청난 에너지의 파동이다. 동화 속 주인공들이 서로 갈등하다가도 언젠가는 화해하고, 법률과 규칙..
5. ‘세균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버려지는 타자들 내가 그녀이고, 그녀가 나인데, 어떻게 그녀를 증오할 수 있을까? -줄리아 크리스테바 내 안의 더럽고 역겹고 불쾌한 모든 것들, 그건 내 것이 아니야. 그것들만 사라지면, 난 완벽해질 수 있어. 각종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마초형 남성 파쿼드 영주는 그가 통치하는 ‘완벽한 세상’을 망치는 주범으로 동화나라의 주인공들을 지목한다. 파쿼드는 과자인형을 잔인하게 고문하며 동화나라 캐릭터들의 행방을 묻는다. “너와 이상한 요정 생물들이 내 완벽한 세상을 망치고 있다. 다들 어디 갔지?” 의리로 똘똘 뭉친 과자인형은 동화나라 생물들의 행방을 발설하지 않는다. 한편, 백설공주의 계모가 애용하던 ‘말하는 거울’을 공수해온 파쿼드는 자신의 ‘미모’가 아니라 ‘왕국’..
4. 인권과 주거권을 탈환하기 위한 모험에 나서다 그들은 나를 알기도 전에 나를 평가해버려(They judge me before they even know me). -영화 『슈렉』 중에서. 나를 알기도 전에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고 배제하는 사람들. 슈렉은 그런 사람들에게 지쳐버렸다. ‘판단’은 바로 차별과 배제의 전초전이다. 아기들은 악취에 코를 찌푸리지 않는다. 좋은 냄새와 나쁜 냄새를 분별하는 기준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어른들은 악취, 특히 부패로 인한 악취에 매우 민감하다. 부패한 생물에 풍기는 악취, 그것은 바로 ‘죽음’의 냄새를 연상시키기에. 사람들은 슈렉에게 가까이 와서 그를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괴물은 냄새나고, 더럽고, 혐오스런 존재’라는 편견의 울타리 밖으로 슈렉을 밀어낸다. ..
3. 동화 속 생물들이 모여든 곳 ‘바람직한 주체’로 사회화되기 위해 현대인은 자기 안의 수많은 가능성을 버리고 ‘나다운 것’의 경계를 구축해야 한다. 보다 깨끗하고, 보다 적절한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 야생적 본능을 버려야 한다. 부패한 우유, 똥, 구토물, 시체들을 보고 구역질을 참지 못하듯이 우리는 ‘한때 내 것이었으나 이제는 억압하거나 배설해버린 욕망들’을 자아의 경계 바깥으로 멀리 추방하고자 한다. 크레스테바는 이렇게 문명화한 현대인의 자아, 그 경계바깥에 추방된 존재들을 ‘아브젝트’라 불렀다. 프로이트는 문명이 개발되기 위해서는 주체의 다채로운 욕망이 무의식 깊숙한 곳에 억압되어 숨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억압된 것의 귀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적어도 인간의 ‘부끄러운 욕망’은 무의식 ..
2. 괴담 주인공의 실체 ‘아브젝트(abject)’는 우리가 혐오하고, 거부하고, 거의 폭력적으로 배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시큼한 배설물, 심지어는 어머니의 과격한 포옹도 여기에 속한다. -노엘 맥아피, 이부순 역, 『경계에 선 크리스테바』, 앨피, 2007, 92쪽. “사람들은 날 보면 하다 못해. 으악! 못생기고 냄새나는 괴물이다!” 슈렉은 한 번도 ‘이름’을 제대로 불려보지 못한 존재다. 이름 불린다는 것.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친밀성을 만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문턱이다. 이름 불리지 못하는 슈렉은 단지 ‘괴물’일 뿐이며 존재하지만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타자다. 괴물 주의! 괴물 수배 중! 현상금 있음! 그가 사는 주변에는 이런 무시무시한 팻말이 흩어져 있다. 사람들은 현상금이 ..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바람직한 주체’가 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 1. ‘바람직한 주체’가 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 행동은 오직 반항의 대가로만 존재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어린 시절 동화를 읽고 나면 종종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더라’는 결말의 주인공의 되지 못한 존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그들은 어른들의 말처럼 죽거나 사라지거나 개과천선(改過遷善)했을까. 내 마음속 네버엔딩 스토리 공화국에서는 백설공주에게 독이 든 사과를 준 마녀가 아직도 복수심을 삭이지 못하고 새로운 음모를 준비하고 있었고, 신데렐라처럼 왕자와 결혼하지 못한 심술쟁이 언니들이 아직도 짝을 찾지 못한 채 ‘결혼 시장’을 헤매고 있었으며, 해님이 되고 달님이 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