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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27. 공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27. 공

건방진방랑자 2019. 11. 11.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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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불교(佛敎)의 교리인 공허(空虛)를 가리킨 말이다.

공문(空門)과 같은 말로 불교를 말한다.

 

()

사천성 서창(西昌) 지구 일대에 살던 이민족의 이름이다. 한무제(漢武帝) 때 이곳에 월수군(越雟郡)을 두었다.

 

공가소(孔賈疏)

공가(孔賈)는 모두 당() 나라 때 사람으로서 오경(五經)의 소()를 저술한 공영달(孔穎達)주례(周禮)·의례(儀禮)의 소를 저술한 가공언(賈公彦)을 합칭한 것이다.

 

공간(公幹)

건안 칠자(建安七子)의 하나로 일찍이 조조(曹操)의 속리(屬吏)로 있었던 유정(劉楨)의 자()인데, 새로 부임하기 직전에 병을 앓아 취임하지 못했던 일화가 있다. 삼국지(三國志)21 魏書 왕찬전(王粲傳)

 

공간병(公幹病)

다른 것엔 관심이 없이 오직 시문(詩文)에만 몰두하는 일종의 문학병을 말한다. 공간(公幹)은 삼국 시대 건안(建安)7()로 일컬어졌던 유정(劉楨)의 자()이다. 일찍이 위 문제(魏文帝)가 태자(太子)로 있을 때, 문학사들을 초빙하여 술자리를 벌이면서 부인 견씨(甄氏)를 불러내었는데,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부복(俯伏)하였으나 유정만은 평시(平視)하였으므로, 태조(太祖)가 노하여 처벌을 가하였던 고사가 있다. 『「위지(魏志)」 「유정전(劉楨傳)

 

공간표상(空間表象)

시각과 청각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표상이다.

 

공강(共姜)

() 나라 세자(世子) 공백(共伯)의 아내이다. 공백이 일찍 죽자 공강은 수절하고 있는데, 부모가 개가시키려 하므로 공강은 백주시(柏舟詩)를 지어 수절을 맹세하였다.

 

공개(孔蓋)

공작새털 덮개. 공작(孔雀)의 날개로 만든 일산을 이르는 말이다.

 

공거(公車)

()은 관()과 같다. 즉 관거(官車)의 뜻이다. 본디 중국 진(() 때의 관명(官名), 관가의 수레를 두는 곳이라 하여 이렇게 이름 붙였다. 위위(衛尉)에 속하며 전문(殿門사마문(司馬門)을 관장한다. , 천하의 상장(上章)과 사방의 공헌(貢獻)이 이곳을 거치며 상장하는 자와 징소(徵召)된 자가 이곳에서 명을 기다린다. 조선 때에 승정원(承政院) 또는 승정원 망문(望門) 안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 과거(科擧사환(仕宦)을 위한 글공부를 공거업(公車業)이라 하고, 임금에게 글공부를 올리는 소장(疏章) 등을 공거장(公車章)이라 한다. / 인용: 麴先生傳(이규보)

천하의 상소문을 받아들였던 한() 나라 관청 이름인데, 동방삭(東方朔)이 처음 장안에 들어와 공거에 이르러서 3천 주독(奏牘)의 상서(上書)를 하였다는 유명한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골계열전(滑稽列傳)

 

공거(蛩距)

전설상의 짐승인 공공(蛩蛩)과 거허(距虛)는 서로 의지하여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공겸일자왕(功兼一字王)

충렬왕(忠烈王)이 원나라의 부마(駙馬)가 되고 고려왕(高麗王)으로 책봉한 위에 다시 심양왕(瀋陽王)으로 봉하였다.

 

공경(恭敬)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임금에게 어려운 일을 책임지우는 것을 공()이라 이르고, 선한 일을 진언하고 부정한 일을 막아버리는 것을 경()이라 한다(責難於君謂之恭, 陳善閉邪謂之敬).”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이루(離婁)

 

공경대부(公卿大夫)

공경(公卿三公九卿)이나 대부(大夫)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이른다. 벼슬이 높은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 삼공(三公)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구경(九卿)은 육조판서, 좌참판, 우참판, 한성판윤, 대부(大夫)는 벼슬을 한 모든 사람을 말한다.

 

공고(公孤)

주 나라의 관제(官制)인 삼공(三公)과 삼고(三孤)로 곧 높은 벼슬자리를 말한다.

 

공곡(空谷)

세상을 피해 빈 골짜기에 홀로 사는 사람은 사람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며 기뻐한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에 실려 있다.

 

공곡(公穀)

춘추에 주()를 낸 공양고(公羊高)와 곡량적(穀梁赤)을 합칭한 말인데, 이들의 주해는 특히 춘추의 경문(經文)에 매우 충실했다고 한다.

 

공곡공음(空谷跫音)

빈 골짜기에 들리는 사람의 발소리, 즉 지극히 반갑고 기쁜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혼자 빈 골짜기에 도망쳐 살 적에 인기척만 들려도 반가울텐데, 더구나 형제와 친척의 기침 소리가 옆에서 들려온다면 어떻겠는가[夫逃虛空者 聞人足音跫然而喜 又況乎昆弟親戚之謦欬其側者乎].”라고 하였다. / 유의어: 공곡족음(空谷足音) / 인용: 櫟翁稗說前序(이제현)

 

공곡인(空谷人)

시경(詩經)소아(小雅) 백구(白駒)흰 망아지가 저 빈 골에 있네[皎皎白駒, 在彼空谷].”라는 구절이 있는데, 처사(處士)를 가리킨 시()이다.

 

공공(悾悾)

정성스러운 모양, 우직한 모양.

 

공공(公公)

지극히 공변되고 떳떳함, 노인을 부르는 경칭, 조부를 이른다.

 

공공거허(蛩蛩巨虛)

전설상의 짐승인 공공(蛩蛩)과 거허(距虛)는 서로 의지하여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공공돌돌(空空咄咄)

속마음이 불평스러우나 밖으로는 표출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 나라 때 은호(殷浩)가 중군장군(中軍將軍)이 되었다가 남의 무함을 입어 신안(信安)으로 쫓겨났는데, 밖으로는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기색이 없이 평상시와 같이 담소하였으나, 매일 손가락으로 허공에다 대고 무슨 글자를 썼다. 이에 사람들이 몰래 엿보니 돌돌괴사(咄咄怪事)’라는 글자를 반복해서 쓰고 있었다고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출면(黜免)

 

공공부주지촉(共工不周之觸)

공공씨(共工氏)와 전욱(顓頊)이 다투다가 부주산(不周山)에 부딪치어 천주(天柱)를 꺾으니, 하늘이 서북(西北)으로 기울어지므로 여와씨(女媧氏)가 돌을 다듬어서 하늘을 기웠다 한다.

 

공공촉산(共工觸山)

태고(太古) 적에 공공씨가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아서 천유(天維)가 끊어지고 지주(地柱)가 부러졌는데, 부주산은 서북(西北)에 있다 하였다. 문선(文選)劉峻 변명론(辨命論)

 

공공탄(貢公彈)

장차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매 그 갓의 먼지부터 깨끗이 털어놓고 기다린다는 뜻이다. 한서(漢書)왕길전(王吉傳)공우(貢禹)가 왕길(王吉)과 절친한 사이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왕공이 벼슬길에 있으니 공공이 갓을 손질해 놓고 기다린다.”라고 하였다

 

공공환도(共工驩兜)

() 임금 때의 죄인을 말한다. 서경(書經)』 「순전(舜典)공공을 유주(幽州)로 귀양보냈고, 환도를 숭산(嵩山)에 내쳤다.”라고 하였다.

 

공과상반(功過相半)

공로와 허물이 반반이다. / 유의어: 공과상저(功過相抵).

 

공관주후문(公寬柱後文)

황정견이 최공도(崔公度)를 보내는 시에 백성들은 허리에 찬 칼을 팔 것이고 공은 법조문을 관대하게 하리라[民賣腰間劍 公寬柱後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卷八

 

공광(孔光)

() 나라 사람이다. 사람됨이 공평무사하였고 조정의 일을 절대로 누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서(漢書)공광전(孔光傳) ()에는 선비의 옷을 입고 선왕(先王)의 말을 전하였으니 그 도량은 좋지만, 녹위(祿位)만은 끝까지 보유하려 하였으므로 아첨한다는 기롱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공광온실(孔光溫室)

공광(孔光)은 퇴궐하여 형제처자와 함께 집에 있을 적에도 조정에 관계된 일은 일체 말하지 않았는데, 누가 온실전 안에 있는 나무들의 종류가 무엇이냐고 물어도 전연 대답하지 않고 다른 말만하였다는 고사이다. 한서(漢書)卷八十一 공광전(孔光傳)

 

공구(攻駒)

말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공군(孔君)

후한(後漢) 헌제(獻帝) 때 북해상(北海相)이 되었다가 뒤에 조조(曹操)와 뜻이 맞지 않아 그에게 피살된 공융(孔融)을 말한다.

 

공군(贛君)

설선(薛宣)의 자()이다. 당시의 권세가 왕봉(王鳳)의 추천을 받고 장안령(長安令)이 된 뒤 고위 관직을 역임하며 장우(張禹) 후임으로 승상이 되었는데, 벼슬을 그만둔 주운을 만나 깍듯이 대접하면서 자기 집에 머물러 줄 것을 청하자, 주운이 소생(小生)이 나를 관리 취급을 하려고 하는가.”라 하고 면박을 주었던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 「주운전(朱雲傳)

 

공군원저어(孔君元齟齬)

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로서 일찍이 북해상(北海相)과 태중대부(太中大夫) 등을 역임하고, 뒤에 조조(曹操)와 사이가 좋지 않으므로 인하여 끝내 조조에게 처형되었던 공융(孔融)을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卷七十

 

공군저어(孔君齟齬)

공군(孔君)은 송 철종(宋哲宗)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낸 공문중(孔文仲)을 가리킨다. 성품이 강직하여 재상 왕안석(王安石)이 창안한 재정 관리와 군사 훈련하는 법이 옳지 않다고 논한 일로 파직되기도 하였다.

 

공군저어(孔君齟齬)

공군(孔君)은 후한(後漢) 헌제(獻帝) 때 북해상(北海相)이 되었다가 뒤에 조조(曹操)와 뜻이 맞지 않아 그에게 피살된 공융(孔融)을 말한다.

 

공규(孔戣)

() 나라의 명신이다. 헌종(憲宗) 때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어 이섭(李涉)의 망상(罔上)하는 죄상을 탄핵하고 이소화(李少和최이간(崔易簡)의 옥사(獄事)를 판결했으며, 목종(穆宗) 때에 사퇴를 빌자, 한유(韓愈)조정에 공규 같은 인재는 3~4명 밖에 되지 않으니, 사퇴를 만류해야 한다.”라 하였다. 신당서(新唐書)』 「공규전(孔戣傳)

 

공극(拱極)

공신(拱辰)과 같은 말로 뭇별이 북극성을 향하는 것처럼 덕정(德政)을 펼치는 중국의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말이다. 논어(論語)위정(爲政)덕정(德政)을 펴면,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북극성 쪽으로 뭇별들이 향하는 것처럼 될 것이다[北辰居其所 而衆星拱之].”라고 하였다.

 

공당(孔堂)

공자(孔子)가 사는 집의 당이다. 공자의 문인들이 자로(子路)를 공경하지 않자, 공자가 말하기를 ()는 당에는 올랐고 아직 방에는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由也升堂矣, 未入於室也].”라 하면서 자로(子路)를 추켜 주었다. 논어(論語)선진(先進)

 

공대부(孔大夫)

후한(後漢) 때의 태중대부(太中大夫)였던 공융(孔融)을 가리킨다. 그는 성품이 너그럽고 선비들을 좋아하여 항상 빈객(賓客)이 문에 가득하였는데, 그가 일찍이 감탄하기를 자리 위에는 빈객이 항상 가득하고, 동이에는 술이 항상 비지 않으니 나는 근심할 일이 없다.”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卷七十 공융전(孔融傳)

 

공덕천(功德泉)

불가의 말인데, ((((청정(淸淨불취(不臭불손후(不損喉음이불상장(飮已不傷腸) 등 여덟 가지의 공덕수가 있다 한다.

 

공도동망(共倒同亡)

같이 넘어지고 함께 망함을 이르는 말이다.

 

공도서계성일소(共渡西溪成一笑)

() 나라의 높은 중 혜원(惠遠)이 여산(盧山) 동림사(東林寺)에 있으면서 손을 전송할 때에 호계(虎溪)라는 시내를 넘어가지 않았는데, 하루는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을 전송하다가 모르는 사이에 시내를 지내고는 세 사람이 함께 한 번 웃었다.

 

공동(公桐)

감숙(甘肅) 평량시(平涼市) 서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공동(空桐)은 공동(崆峒)으로도 표기한다.

 

공동(空同)

북두성 바로 밑에 있다는 산 이름인데, 황제(黃帝) 때의 신선 광성자(廣成子)가 여기에 있었다고 한다. 장자(莊子)』 「재유(在宥)

 

공동(崆峒)

공동자(崆峒子)의 준말로 명() 나라 시인 이몽양(李夢陽)의 호이다. ()고문(古文)으로 당시 십재자(十才子)로 일컬어졌다.

서울을 말한다. 옛사람은 북극성이 하늘 중앙에 있고 북극의 아래는 공동(崆峒)이라고 여겼는데, 낙양(洛陽)은 땅 중앙에 위치하므로 낙양을 공동이라고 하였다. 중국의 낙양은 우리나라의 서울과 같다.

계주(薊州)에 있는 산으로 선인(仙人) 광성자(廣成子)가 살았던 산명인데,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일찍이 이 산으로 광성자를 찾아가 도()를 물었다고 한다. 장자(莊子)』 「재유(在宥)

 

공동산(崆峒山)

계주(薊州) 평량현(平涼縣)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헌원씨(軒轅氏)가 이곳에서 신선인 광성자(廣成子)를 만나 놀았다고 한다. 장자(莊子)』 「재유(在宥)

 

공동집(崆峒集)

() 나라 때 북지(北地) 사람으로 십재자(十才子)의 으뜸인 이몽양(李夢陽)의 문집을 말한다.

 

공래구절판(邛郲九折阪)

() 나라 왕양(王陽)이 익주 자사(益州刺史)가 되었을 때 그 험준한 산길을 보고 선인(先人)의 유체(遺體)를 받든 몸으로 어떻게 자주 이 길을 왕래하겠는가.”라고 하고는 마침내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는데, 그 뒤에 왕존(王尊)이 익주 자사가 되어 그 길을 넘을 때에는 빨리 가라고 마부를 재촉하며 왕양은 효자이지만 나는 충신이다.”라고 말했던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76

 

공룡(恐龍)

공포의 용이라는 뜻이다. 그리스어 디노사우르스(Dinosaurs)’를 한자로 옮겨 쓴 말이다. Dino무서운이란 뜻이고 Saurs도마뱀들이라는 뜻이다. 디노사우르스는 어떤 특정한 공룡을 가리키지 않고 공룡이라는 전체 종()을 가리킨다.

 

공률(公律)

공죄를 처벌하는 법규. 공죄는 사죄(私罪)보다 처벌이 가볍다.

 

공리(空理)

()가 아니라는 뜻으로 실체가 없고 자성(自性)이 없는 것. ()의 이치는 실답지 않은 자아(自我)를 인정하는 미집(迷執)을 부정하는 아공(我空)과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에 대하여 항상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미집을 부정하는 법공(法空)으로 대분할 수 있다.

 

공리공론(空理空論)

실천이 따르지 않는 헛된 이론을 말한다.

 

공리렴(孔鯉殮)

공리는 공자(孔子)의 아들인데, 그가 죽었을 적에 가난하여 외곽(外槨)이 없이 내관(內棺)만 사용하여 장사지냈다[鯉也死, 有棺而無槨]. 논어(論語)』 「선진(先進)

 

공리현화(空裏玄花)

눈의 동자를 말한다.

 

공리환화(空裡幻花)

환화(幻花)’허공 속의 꽃이라는 말로 실체가 없는 가상(假像)을 일컫는 불교 용어다. ‘공중화(空中花)’라고도 한다. 능엄경(楞嚴經)에 나오는 제이월(第二月)’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있는 듯하나 실제로는 없는 사물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미망에 빠진 중생들은 늘 망령되이 가상을 진상(眞像)으로 믿는바 이것은 마치 눈이 흐릿한 사람이 공중에 꽃이 있고 하늘에 달이 둘 있다고 오인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 인용: 答京之(박지원)

 

공린(公麟)

() 나라 때의 이공린(李公麟)을 말하는데, 이공린은 박학(博學)한데다 특히 시((()에 모두 뛰어났다. / 인용: 소화시평, 지봉유설

 

공맹지도(孔孟之道)

공자(孔子)맹자가 주장한 인의(仁義)의 도덕을 이른다.

 

공명(孔明)

파촉에 있었던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의 자이다.

 

공명(空明)

달빛이 부서져 내리는 맑은 강물을 말한다. 소동파(蘇東坡)전적벽부(前赤壁賦)강물에 비친 달 그림자를 치며 달빛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擊空明兮泝流光]”라는 말이 있다.

 

공명경리설영잠(功名鏡裏雪盈簪)

옛날에는 머리를 끌어 올려서 상투를 짜고 그 상투에 조그만 관()을 만들어 씌웠는데, 그것을 상투관이라 한다. 그 상투관은 비녀를 만들어서 가로로 상투에 꽂는다. 여기 잠()이라 함은 그런 비녀를 말한다.

 

공명도노(孔明渡瀘)

제갈량(諸葛亮)이 노수(瀘水)를 건너서 남만(南蠻)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공명룡(孔明龍)

한 나라 말기(末期)제갈량(諸葛亮)이 출세하기 전에 사람들이 그를 와룡(臥龍)이라 하였다.

 

공명수록(公明壽祿)

공명(公明)은 송() 나라 이간지(李柬之)의 자()이다. 문정공(文定公) 이적(李迪)의 아들로 부필(富弼)에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며, 인종(仁宗), 영종(英宗), 신종(神宗) 3대에 걸쳐 지극한 은총을 받고 태자 태보(太子太保)로 치사(致仕)한 뒤 78세의 나이로 죽었다. 송사(宋史)310

 

공명수죽백(功名垂竹帛)

공을 세워 이름을 후세에 남긴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죽백(竹帛)은 대나무와 비단이다. 옛날에는 기록을 대나무나 비단에 했으므로 죽백이라는 말은 곧 기록이나 역사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말은 공을 세워 이름을 역사에 남긴다는 뜻을 담고 있다. 광무제가 후한을 세우는 데 공을 세운 개국공신(開國功臣)인 등우(鄧禹)가 소년 시절에 장안으로 가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유수(劉秀)도 장안(長安)으로 와서 공부하고 있었다. 등우는 유수를 만나자마자 그가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사귀게 되었다. 왕망(王莽)이 신()을 세운 뒤에 몹시 흔들리자 한()나라 후예(後裔)로 반란군 대장에 유현(劉玄)이 추대되어 갱시제(更始帝)가 되었는데 등우가 천거(薦擧)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유수가 황하 이북 땅을 평정(平定)하러 떠났다는 말이 들려오자 등우는 즉시 황하(黃河)를 건너가 업()이라는 곳에서 유수를 만났다. 유수가 자신을 따르고 섬기는 이유를 묻자, “다만 명공(明公)의 위덕(威德)이 사해(四海)에 더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는 얼마 안 되는 힘이나마 바쳐 공명을 죽백에 드리울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유수는 후에 광무제(光武帝)가 되었고 등우는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어서 뜻대로 되었다. 후한서(後漢書)』 「등우전(鄧禹傳)/ 유의어: 명수죽백(名垂竹帛). 명전천추(名傳千秋).

 

공명쌍표(孔明雙表)

공명(孔明)은 촉 나라 제갈량(諸葛亮)의 자이며, 두 표문은 전출사표(前出師表)후출사표(後出師表)를 가리킨다.

 

공명정대(公明正大)

공명(公明)하고 정대(正大)하다. 떳떳하다. 공변되고 명백하며, 바르고 큼. 맘이나 태도가 전혀 사사로움 없이 공정하고 정대하다.

 

공무도협거(公無度峽去)

무모한 죽음을 경계하는 뜻으로, 옛날 어느 백수 광부(白首狂夫)가 머리털을 풀어헤치고 하수(河水)에 뛰어들어 마구 건너가므로, 그의 아내가 따라가면서 그리 못하게 말리려 했으나 미처 붙잡지 못하여 그가 마침내 하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공후(箜篌)를 가져다 노래하기를 공은 하수를 건너지 말아야 하는데, 공은 끝내 하수를 건너다가, 하수에 빠져 죽었으니, 공을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악부가사(樂府歌辭)箜篌引 公無渡河 註

 

공묵(孔墨)

공자(孔子)묵자(墨子)를 가리킨다.

 

공문(空門)

불가에서 유()와 공()으로 교법을 분별하는데, 1이 유문(有門), 2가 공문(空門), 3이 역유역공문(亦有亦空門), 4가 비유비공문(非有非空門)이다. 지도론(智度論)

불교를 가리킨다. 만상(萬像)을 빈() 것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공문거(孔文擧)

문거는 후한(後漢) 때의 명사 공융(孔融)의 자()이다. 그는 요동(遼東)으로 피난하여 북해(北海)에 살면서 시주(詩酒)로 세상을 보냈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좌상에는 언제나 손이 가득하고 술동이엔 언제나 술이 가득하면 나는 아무런 근심이 없다.”라 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공융전(孔融傳)

 

공문도(孔門徒)

공문은 공자(孔子)의 문하(門下)를 말하는바, 태학에서 유가(儒家)의 경전(經傳)을 배우므로 한 말이다.

 

공문무우(孔門舞雩)

공자(孔子)가 여러 제자들에게 각각 뜻을 물었더니, 다른 이는 모두 자기의 능력과 포부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말하였는데, 증점(曾點)은 홀로 모춘(暮春)에 춘복(春服)을 새로 입고 관자(冠者) 5, 6인과 동자(童子) 6, 7인을 거느리고,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바람 쏘이고 읊으며 돌아오리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 하니, 공자가 탄식하며 나는 점()을 허여한다(吾與點也).”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공문중(孔文仲)

() 나라 사람으로 자는 경부(經父)이다. 철종(哲宗) 때 간의(諫議)를 지냈다.

 

공문현도(空門玄道)

공문(空門)은 불가(佛家), 현도(玄道)는 도가(道家)를 가리킨다.

 

공문현손(孔門賢孫)

중용(中庸)을 지은 자사(子思)공자(孔子)의 손자로서 유림(儒林)의 대표였다.

 

공방신(孔方神)

전신(錢神)으로 돈을 해학적으로 부르는 말이다.

 

공방형(孔方兄)

돈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말이다. 엽전(葉錢)에는 네모진 구멍이 뚫어져 있으므로 의인(擬人)하여 공방(孔方)이라 한다. “세상 사람들이 형처럼 친한 자를 공방이라 했다.”는 구절이 진() 나라 노포의 전신론(錢神論)에 있다.

 

공백지처(共伯之妻)

시경(詩經)의 한 편이다. () 나라 세자(世子) 공백(共伯)이 일찍 죽으므로 그 처가 수절하였는데, 부모가 억지로 재가시키려 하니, 맹세코 거절한 노래이다. 그 중 한 구 어즈버, 그 이 뿐 내 임이시라 죽어도 딴 마음은 아니 먹노라(實維我儀之死失廉他)”라고 하였다.

 

공벽유서(孔壁遺書)

() 나라 때 노 공왕(魯恭王)이 궁()을 넓히기 위하여 공자(孔子)의 구택(舊宅)을 헐다가 그 벽() 속에서 얻은 고문상서(古文尙書예기(禮記)·논어(論語)·효경(孝經)등을 가리킨다.

 

공병(空甁)

빈 두레박. 한서(漢書)』 「진준전(陳遵傳)자네는 마치 우물 위에 매달려 있기만 하는 빈 두레박과 같다.”라 하였다.

 

공보(功甫)

신민일(申敏一)의 자()이다.

 

공보지기(公輔之器)

재상이 될 만한 인재를 이른다.

 

공봉관(供奉官)

왕의 측근에서 봉직(奉職) 하는 시종신(侍從臣)을 말한다.

 

공봉반(供奉班)

궐내(闕內)에서 임금을 공봉(供奉)하는 관원의 반열이라는 뜻인데, 공봉(供奉)은 즉 관직명이다.

 

공부(工部)

검교 공부 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을 지낸 두보(杜甫)의 별칭이다.

 

공부종무영(工部終無詠)

당 나라 시인(詩人) 두보(杜甫)의 시()에 온갖 화목(花木)을 읊었으나 집중(集中)에 해당시(海棠詩)만이 없다.

 

공북(拱北)

북신(北辰)은 북극성으로 중국에 귀의하는 간절한 마음을 말한다.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 덕정(德政)으로 귀의시켜야 하니, 이는 비유컨대 북극성이 있는 곳으로 뭇별들이 향하는 것과 같다[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라 하였다.

 

공북성망(拱北星芒)

사람의 충성을 비유한 말이다. 논어(論語)』 「위정(爲政)북극(北極)이 제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면 별들이 다 그쪽으로 향해 간다[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공북해(孔北海)

() 나라의 공융(孔融)이 북해상(北海相)을 지냈으므로 공북해(孔北海)라 하였다. 그는 선비들을 좋아하여 좌상에는 언제나 손님이 가득하고, 술통에는 술이 마르지 않으니, 나는 걱정이 없다.”라고 하였다.

 

공북화류(空北驊騮)

옛날에 중국 기주(冀州) 북방에는 화류(驊騮)가 많이 생산되었다. 그런데 말을 잘 알아보는 백락(伯樂)이란 사람이 한 번 그곳을 지나가면, 그곳 기주 북방에 좋은 말을 다 가져 가므로 그곳이 비었다고 한다. 시관으로서 인재를 뽑겠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공불이(公不易)

청국 군대가 다가와 마부대(馬夫大)가 선봉장으로 서교(西郊)에 왔을 때 최명길이 나가서 그와 얘기하며 그들 진격을 조금 늦췄던 바람에 주상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여 후인들이 그 일을 두고 하기 어려운 일을 했다고 하는 것이다.

 

공사(貢士)

옛날 제후(諸侯)가 재주와 학식이 높은 선비를 천자에게 천거하는 것을 말한다.

 

공산(公山)

공주(公州) 북쪽 2() 지점에 있는 진산(鎭山)으로, 산 모습이 공자(孔子)와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공산명월(空山明月)

사람 없는 빈산에 외로이 비치는 밝은 달. 대머리를 농으로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공상(公桑)

임금의 상전(桑田)을 이르는데, 옛날에 천자나 제후는 반드시 공상과 잠실(蠶室)을 두어, 왕후가 친히 잠실에 가서 누에를 길렀다. 예기(禮記)』 「제의(祭義)

 

공상(空桑)

지명(地名), 공자(孔子)가 출생한 곳이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生而首上圩頂란 것이 보이는데, 그 주에 徵在生孔子空桑之地 今名空竇 在魯南山之空竇中 今俗名女陵山이라고 하였다.

샌 김. / 옛날 비파(琵琶)의 이른다. / 속이 빈 뽕나무. 유신씨(有侁氏)가 속이 빈 뽕나무에서 나중에 은()나라 재상이 되는 이윤(伊尹)을 발견하여 임금에게 바친 전설에서, 소생이나 내력이 불분명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공상유신(空桑有莘)

공상(空桑)은 은() 나라 () 임금의 재상인 이윤(伊尹)이 태어난 곳으로, 이윤이 유신씨(有莘氏)의 들판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가 세 차례에 걸친 탕의 초빙에 마침내 응하였다. 맹자(孟子)』 「만장(萬章)

 

공색(空色)

불교의 말로 색()은 곧 형체가 있는 만물을 총칭한 것이고, ()은 곧 이 형체 있는 만물 또한 인연(因緣)을 따라 생긴 것이요, 본래 실유(實有)가 아니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는 것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니,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라고 하였다.

 

공생(工省)

힘이 적게 든다는 말이다.

 

공서산하(功誓山河)

() 나라에서 처음 천하를 통일하여 공신(功臣)을 봉()할 때에 맹세한 말이다. “황하(黃河)가 띠()만큼 되고, 태산이 숫돌()만큼 될 때까지 나라를 길이 보전하자.”라고 하였다.

 

공서양속(公序良俗)

공공의 질서와 선량한 풍속을 말한다.

 

공석불난(孔席不煖)

공자(孔子)묵자(墨子) 두 분은 세상을 구제하기 위하여 돌아다니기 때문에 앉은자리가 따뜻할 겨를이 없고, 구들에 그을음이 타서 검게 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공선계(公膳雞)

공선(公膳)은 대궐에서 대신에게 공적으로 먹이는 식사를 말하는데, 좌전(左傳)양공(襄公) 28년 조()공선은 매일 닭이 두 마리씩이다[公膳日雙雞].”라 하였다.

 

공성(空性)

진여(眞如)의 이명(異名). 진여는 우리의 이지(理智)로는 파악할 수 없으므로, 일체가 모두 실체와 자성이 없다는 공()한 이치를 체득할 때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공에 의하여 나타나는 실성(實性)이므로 공성이라 하는 것이요 진여 자체가 공이라는 것은 아니다.

 

공성계사(孔聖繫辭)

공자(孔子)주역(周易)을 좋아하여 계사(繫辭)의 상·, 문언전(文言傳) 등 십익(十翼)을 지었다.

 

공소공(空所空)

능공(能空)과 소공을 이른다. 실체(實體)와 자성(自性)이 없는 것. 불교에서 말하는 공의 종류가 많으나 이를 크게 나누면, 실답지 않은 자아(自我)를 실재(實在)라고 인정하는 미집(迷執)을 부정하게 하는 아공(我空)과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를 늘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미집을 부정하는 법공(法空)의 두 가지가 있다.

 

공손(公孫)

종실(宗室) 왕족(王族)을 일컫는 말이다.

 

공손검무(公孫劍舞)

공손은 당() 나라 때 교방(敎坊)의 기녀(妓女)였던 공손대랑(公孫大娘)을 이르는데, 그녀는 특히 칼춤을 잘 추기로 유명하였다.

 

공손대낭무검기가(公孫大娘舞劍器歌)

관공손대랑제자무검기행(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을 가리킨다.

 

공손대랑(公孫大娘)

() 나라 때 교방(敎坊)의 기녀(妓女)로서 검무(劍舞)를 매우 잘 추었는데, 그가 혼탈무(渾脫舞)를 출 때에 승() 회소(懷素)는 그 춤을 보고서 초서(草書)의 묘()를 터득했고, 서가인 장욱(張旭) 역시 그 춤을 보고서 초서에 커다란 진보를 가져왔다고 한다.

 

공손용검무(公孫龍劍舞)

공손랑(公孫娘)은 당() 나라 때 교방(敎坊)의 기녀로 칼춤을 매우 잘 추었는데, 그의 칼춤을 구경하고서 승() 회소(懷素)와 서가(書家) 장욱(張旭) 등이 초서(草書)의 묘리를 터득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

 

공손자(公孫子)

공손홍(公孫弘)을 말한다.

 

공손지(公孫枝)

당진(唐晉) 공실의 먼 친척으로 섬진 공자집(公子縶)의 추천을 받아 섬진의 목공에게 출사했다. ()는 자상(子桑)이다. 백리해(百里奚)를 목공에게 천거하였고 후에 백리해의 뒤를 이어 섬진의 재상을 지낸 사람이다.

 

공손홍(公孫弘)

한 무제(漢武帝) 때 사람으로 춘추(春秋) 등 경전에 밝아 박사(博士)를 지냈다. 나중에 어사대부(御史大夫)와 승상을 역임하였는데, 겉으로는 너그럽고 속으로는 각박하여 자기와 사적인 유감이 있는 자에 대해 겉으로는 좋게 대하면서 은근히 보복하였다 한다. 한서(漢書)卷五十八

 

공손홍(公孫弘)

() 나라 사람. 자는 계재(季齋), 한 무제(漢武帝) 때 승상(丞相)이 되어 평진후(平津侯)에 봉해졌고, 동각(東閣)을 열어 사류(士流)를 연접하여 그 봉록이 모두 빈객 접대에 들어갔으며, 자신은 현미(玄米) 밥을 먹고 베이불을 덮었다. 전한서(前漢書)』 「공손홍전(公孫弘傳)

 

공수(龔遂)

()의 순리(循吏)로 군현(郡縣)을 맡아 남다른 치적을 남겼다. 한 선제(漢宣帝) 때 발해(勃海)에 도둑이 일어나 수령이 제어하지 못하자, 공수로 발해 태수(勃海太守)를 삼으니, 도둑이 양민으로 화하여 발해가 크게 다스려졌다. 한서(漢書)卷八十九 공수전(龔遂傳)

 

공수래공수거(鱐腒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감.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허무하게 죽는다는 말이다. 허무한 존재.

 

공수신퇴(功遂身退)

공이 이루어지고 나면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 일을 할 때에는 최선을 다하되, 일이 끝난 다음에는 버리고 물러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함을 말한다. 노자(老子)9

 

공숙(公叔)

한양왕(韓襄王) 때 공중치(公仲侈)와 함께 한나라의 국정을 이끌었던 한나라 귀족 출신의 중신이다. 양왕(襄王) 12년 태자 백영(伯嬰)이 죽자 공자 구()와 공자 기슬(虮蝨)이 왕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이윽고 양왕이 죽자 위()의 지원을 받은 구()가 제()의 지원을 받은 기슬을 물리치고 양왕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가 한리왕(韓釐王)이다.

 

공숙좌(公叔座)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위혜왕(魏惠王) 10년인 기원전 361년에 죽었다. 성은 희()이고 씨는 위()이고 이름은 좌()이다. 위나라 공족 출신으로 위무후(魏武侯) 때 전문(田文)의 뒤를 이어 위나라 재상이 되었다. 왕착(王錯)과 함께 오기를 모함하여 오기가 초나라로 달아나게 했다. 위혜왕 8년 그는 위나라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회수(澮水) 북안에서 한(), () 두 나라의 연합군을 대파하고 조나라 땅으로 진공하여 피뢰(皮牢)의 땅을 점령했다. 같은 해 진나라가 위나라 땅인 소량(少梁)을 공격해 오자 공손좌는 군사를 이끌고 다시 출전하여 싸웠으나 진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후에 진나라로부터 석방되어 돌아와 위나라의 재상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공승(龔勝)

()나라 사람인데, 어릴적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경()에 밝아 애제(哀帝) 때 광록대부(光祿大夫)까지 되었다. 그 후 왕망(王莽)이 찬위(簒位)하여, 강학제주(講學祭酒태자사우(太子師友) 등의 벼슬로 승을 불렀으나 승은 병을 이유로 불응해왔는데, 왕망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더 융숭한 예로 승을 부르고 놔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자기의 사의가 관철되지 못할 것을 안 승은 자기의 두 아들과 문인 고휘(高暉) 등을 불러 간략하게 치상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는 그 길로 다시는 입을 열지 않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14일 만에 79세의 나이로 죽어갔다. 이때 수백 명의 조객 중에 어느 늙은이가 들어와 슬피 통곡하고는 하는 말이 ! 슬프다 향은 향기 때문에 제 몸을 태우고 …… 라는 말을 하였다. 한서(漢書)』 「양공전(兩龔傳)

 

공식대부례(公食大夫禮)

의례(儀禮)의 편명이다.

 

공식례(公食禮)

주국(主國)의 임금이 소빙대부(小聘大夫)들에게 향응(饗應)하는 것을 말한다. 주례(周禮)』 「공식대부례(公食大夫禮)

 

공신삼걸(功臣三傑)

한고제(漢高帝)가 천하를 평정한 뒤에 그 내력을 말하기를 장막(帷帳)가운데서 계책을 내어 천 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함은 내가 장량(張良)보다 못하고, 백성을 진무(鎭撫)하고 군량(軍粮)을 공급하는 것도 소하(蕭何)보다 못하며, 백만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는 것은 내가 한신(韓信)보다 못하나, 이 세 사람을 내가 썼으니 천하를 통일한 것이다[夫運籌帷幄之中, 決勝千里之外, 吾不如子房, 鎭國家撫百姓給饋餉, 不絶糧道, 吾不如蕭何, 連百萬之衆, 戰必勝攻必取, 吾不如韓信. 此三者, 皆人傑也, 吾能用之, 此吾所以取天下].”라고 하였다. 십팔사략(十八史略)

 

공심독역절편위(工深讀易絶編韋)

공자(孔子)주역(周易)을 좋아하여 가죽으로 만든 책끈이 세 번이나 끊겼다는 것을 말한다.

 

공심안마저일오(空心按摩佇一悟)

오로지 참선(參禪)과 양생(養生)을 행하면서 돈오(頓悟)를 목표로 한다는 말이다.

 

공안(公案)

공론에 맞는 안건을 말한다.

참선하는 사람의 화두를 이른다.

 

공안(公安)원굉도의 자이다.

 

공암진(孔巖津)

양천(陽川) 북쪽 5()의 북포(北浦), 즉 고양(高陽)의 행주진(幸州津)을 말한다. 바위가 물 복판에 서 있고 그 속에 구멍이 나 있으므로 그렇게 불려졌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0 양천현(陽川縣)

 

공야유설(公冶縲紲)

공야장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사람으로 공자(孔子)의 제자였는데, 자기 죄도 아니면서 애매한 옥살이를 하여, 공자는 그것이 그의 죄가 아님을 인정하고 그를 사위로 삼았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공야장(公冶長)

공야장은 공자의 제자로 새와 짐승의 울음소리를 알아듣는다는 사람이다. 그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가던 도중 시냇가에서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자.”고 지저귀는 까마귀 소리를 들은 뒤에 때마침 아이를 잃고 길가에서 울고 있는 한 노파를 발견하고 시냇가에 한번 가보라고 일러준 일이 화근이 되어 살인범으로 몰려 옥에 갇혀 있다가 무죄임이 밝혀져 풀려나왔다. 뒤에 공자가 말하기를 공야장은 딸을 그에게 시집보낼 만하다. 포승줄에 묶여 옥에 갇힌 적은 있으나 그의 죄가 아니었다[可妻也. 雖在縲絏之中, 非其罪也].”라 하고,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한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논어의소(論語集疏)

 

공양고(公羊高)

춘추에 주()를 낸 사람인데, 그의 주해는 특히 춘추의 경문(經文)에 매우 충실했다고 한다.

 

공언무시(空言無施)

빈말만 하고 실행이 없는 것을 이른다.

 

공염(公鹽)

소금이 생산되는 지역에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거둘 때에는 쌀 1석당 소금 3석씩을 징수하는 것을 말한다.

 

공염불(空念佛)

부처님의 법에 대한 신심 없이 입 끝으로만 되뇌이는 헛된 염불을 가리킨다. 그 같은 염불은 아무리 외어도 헛일이라는 데서 나온 말이다. 말한대로 실행하지 않는 주장이나 선전을 가리킨다. 공수표(空手票). 상대의 잘못을 아무리 타일러도 효과가 없을 때도 공염불이라 한다.

 

공영달(孔穎達)

() 나라 초기에 공영달이 칙지(勅旨)를 받들어 여러 학사(學士)들과 함께 오경(五經)의 정의(正義)를 찬술하였다.

 

공옥이석(攻玉以石)

옥을 다듬기를 돌로써 한다. 하찮은 것으로 귀한 것의 가치를 빛냄을 이른다.

 

공옥타산(攻玉他山)

다른 산의 험한 돌도 자기의 아름다운 옥()을 가는 데에 도움이 됨을 이른 말로, 즉 하찮은 사람의 언행일지라도 자신의 지덕(智德)을 연마하는 데에 도움이 됨을 비유한 말이다.

 

공왕(空王)

모든 부처의 통칭이다. 법을 공법(空法)이라 하고 부처를 공왕이라 하는데 이는 모든 그릇된 집착을 여의고 열반에 들어가는 요문(要門)이 되는 까닭이다. 불가에선 일체 공과 무()를 주장하기 때문에 공왕이라 한다. 원각경(圓覺經)

 

공우(貢禹)

() 나라 때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뒤에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을 지낸 사람이다.

전한(前漢) 원제(元帝) 때의 문신(文臣)이다. 명경결행(明經潔行)으로 추천되어 벼슬이 어사대부(御史大夫)에까지 이르렀다. 자는 소옹(少翁)이다. 한서(漢書)卷七十二

 

공우탄관(貢禹彈冠)

탄관(彈冠)은 벼슬에 나갈 준비로 갓의 먼지를 턴다는 뜻인데, () 나라 때 명사 왕길(王吉)과 공우(貢禹)는 서로 친구 사이로서 취사(取捨)를 똑같이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그들을 일컬어 왕양이 벼슬에 나가면 공우가 관의 먼지를 턴다[王陽在位 貢禹彈冠]”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卷七十二

 

공원(貢院)

과거에 선비를 시험보이던 곳으로 예부(禮府)에 소속되어 있었다. 송사(宋史) 선거지(選擧志)경덕(景德) 4년에 유사에게 명하여 진사(進士)의 정식(程式)을 상고·상정(詳定)하여 예부의 공원에 보내고, 제주(諸州)에도 반포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공유(公劉)

후직의 자손으로 사방으로 흩어졌던 주족을 다시 일으키고 후직이 시작했던 농사의 일을 부흥시켰다. 후직이 죽고 그의 아들인 불줄(不窋)이 뒤를 이었다. 불줄 말년에 하후씨의 정치가 문란하게 되어 농사(農師)의 관직을 폐하여 다시는 농사(農事)의 일을 돌보지 않았다. 불줄이 농사(農師)의 직을 잃게 되자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융적(戎狄)의 땅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불줄이 죽고 아들 자국(子鞠)이 뒤를 잇고 다시 자국이 죽고 그의 아들 공유(公劉)가 뒤를 이었다. 공유(公劉)는 비록 융적의 땅에서 살았지만 다시 후직의 업을 일으켜 농사의 일을 돌보며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과 곡식의 종자를 찾아 나섰다.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고 다시 위수(渭水)를 건너 목재를 벌목하여 가져와 종족들이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나누어주었으며 종족들 중 외지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여비를 주고 나가지 않고 종족들과 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그들을 위해 저축을 해 주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편안하게 되었다. 다른 종족들도 모두 그의 선행에 감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에게 귀의하였다. 주나라의 기업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인들이 노래를 불러 그의 덕을 칭송했다.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

 

공유예씨각중앙(空遊羿氏殼中央)

예씨의 활줄 한복판에 공연히 놀았다.”라 함은 과거에 여러 번 응했으나 급제하지 못했음을 말한다. 예씨(羿氏)는 유궁후예(有窮后羿)로 활을 잘 쏘았다.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

 

공융(孔融)

후한(後漢)의 학자이다. 소년 시절에 천하에 명망이 높은 이응(李膺)으로부터 재주를 인정받아 명사가 되었다. 공자(孔子)20세손이며, 자는 문거(文擧)이다. 헌제(獻帝) 때 북해(北海)의 상()이 되어 학교를 세우고 유학(儒學)을 가르쳤으며, 한실(漢室)의 부흥을 꾀하다 실패, 뒤에 조조(曹操)에게 피살되었다. 저서에는 공북해집(孔北海集)이 있다. 후한서(後漢書)』 「공융전(孔融傳)

 

공융비음(孔融悲吟)

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 공융이 한직(閑職)에 물러나 있을 적에 많은 후진(後進)들이 찾아와 배우곤 하였는데, 그는 항상 탄식하기를 자리에는 빈객이 항상 가득하고 술동이에는 술이 항상 떨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걱정이 없겠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卷七十三

 

공음파자위(跫音頗自慰)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그윽한 곳에 혼자 있는 사람은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반긴다[聞人足音跫然而喜矣].”라 하였다.

 

공의발(公儀拔)

공의(公儀)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공의휴(公儀休)를 말하는데, 그가 노 나라 재상이 되었을 적에 자기의 채소를 먹어 보고는 맛이 좋으므로, 자기 채소밭의 아욱을 모두 뽑아 버렸던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卷一百十九 순리열전(循吏列傳)

 

공의준거(公儀捘去)

공의휴가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국록을 먹는 자들이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는 것을 꺼리었다. 한번은 자기집 밭에 난 아욱을 삶아서 먹어 보고 맛이 있음을 알자 남김없이 뽑아버렸다는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사기(史記)卷一百十九 순리열전(循吏列傳)

 

공의휴규발(公儀休葵拔)

청렴한 관리는 작은 일의 이익으로 백성과 다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기(史記)卷一百十九 순리열전(循吏列傳)공의휴(公儀休)가 노() 나라 정승이 되었을 때 그 채마밭에 있는 아욱을 뽑아 버렸다[食茹而美, 拔其園葵而棄之].”라고 하였다.

 

공이치(恭已治)

제왕이 단정하고 엄숙한 태도로 자기 몸을 약속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이른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무엇을 행하는 것이 없이 능히 천하를 다스린 이는 순임금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는 무엇을 했는가. 그저 자기 몸을 공경히 하여 천자의 자리에 단정히 앉아 있었을 뿐이다[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라 하였다.

 

공자련(公子戀)

공자(公子)는 진천(秦川)의 귀공자(貴公子)였던 왕찬(王粲)을 가리킨다. 왕찬이 한() 나라 말에 난리를 피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지해 있으면서 누각에 올라가 등루부(登樓賦)를 읊어 시름을 달래었는데, 두보(杜甫)의 시 지우(地隅)’상란 당한 진천의 공자요, 슬퍼하는 초 나라 대부로다[喪亂秦公子 悲涼楚大夫]”라고 하였다.

 

공자앙(公子卬)

위혜왕(魏惠王)의 아들이다. 기원전 340년 진나라의 상앙(商鞅)이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공격하자 공자앙은 위군(魏軍) 대장이 되어 대항하였다. 그는 상앙과는 어렸을 때부터 일찍이 교분이 있었다. 강화회담을 구실로 상앙의 초청을 받은 공자앙은 주연석상에서 진나라의 군사들에 의해 사로잡히고 그가 이끈 위나라 군사들은 싸움에서 패하고 그 자신은 살해되었다.

 

공자액진채(孔子厄陳蔡)

주경왕(周敬王) 31년 초소왕(楚昭王) ()이 채()와 진()나라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던 공자(孔子)에 관한 소식을 듣고 공자의 일행을 초나라에 초빙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채와 진 두 나라의 대부들은 공자가 초나라로 가서 중용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군사를 보내어 공자 일행을 포위함으로서 공자와 그 제자들이 양식이 떨어져 매우 곤란한 처지에 노이게 되었던 것을 말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재액(在厄),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공자영(公子郢)

위영공의 서자로 자는 자남(子南)이다. 영공에 의해 대부에 봉해졌고 현능하다는 이름이 있었다. 영공의 태자 괴외가 영공의 부인 남자에게 참소를 받아 송나라로 도망치자 영공은 공자영을 그 후계로 삼으려고 했으나 그는 한사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윽고 영공이 죽자 남자가 다시 그를 군주로 세우려고 했다. 이에 공자영은 태자 괴외의 아들 첩()이 있다고 말하여 결국 영공의 뒤는 위출공(衛出公)이 이었다. 그는 완고하게 군주의 자리를 사양했음으로 절조가 있다고 이름이 났으며 당시 사람들은 공자영을 수절(守節)이라고 칭했다. 후에 괴외와 출공이 부자지간임에도 서로 군주자리를 놓고 일어난 내란에서 그는 몸을 피해를 해를 입지 않았다. 시호는 소자(昭子).

 

공자천주(孔子穿珠)

공자(孔子)가 구슬을 꿰다. 공자가 시골 아낙에게 물어 구슬을 꿰었다는 뜻으로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묻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말라는 의미이다. 공자가 아홉 굽이 굽은 구슬에 실을 꿰매지 못하여 애를 쓰는 것을 보고, 시골 여자가 개미의 허리에 실을 매어 그 구멍으로 내보내니 실이 제대로 꿰어졌다는 고사로, 어리석은 사람에게도 배울 만한 좋은 지혜가 있다는 말이다.

 

공자탄관(貢子彈冠)

공자(貢子)는 한() 나라 원제(元帝)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던 공우(貢禹)를 말한다. 벼슬을 그만두었다가도 친구인 왕길(王吉)이 조정에 몸담고 있으면 관의 먼지를 털면서 불러 주기를 기다렸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한서(漢書)72 왕길전(王吉傳)

 

공작(公綽)

논어(論語)』 「헌문(憲問)맹공작(孟公綽)은 조() 나라나 위() 나라 대부의 가신(家臣)은 될 수 있지만 등() 나라나 () 나라의 대부는 될 수 없다[孟公綽爲趙魏老則優, 不可以爲滕薛大夫].”라고 한 말이 있는데, 그 주에 공작은 노 나라 대부인데, 염정(廉靜)하고 욕심은 없으나 재주가 적은 사람이다[公綽, 魯大夫. 蓋廉靜寡欲, 而短於才者也].”라고 하였다.

 

공전옥수화(空傳玉樹花)

()나라가 망할 때에 후주(後主)가 밤낮으로 술과 여색에 미혹하여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라는 음란한 곡조를 불렀다. 당나라 시인 두목지(杜牧之)가 그의 고도(古都)를 지나다가 장사치 계집들은 나라 망한 한()도 모르고 강가에서 아직도 정화를 부른다[尙女不知亡國恨 隔江猶唱後庭花].”라는 시를 지었다.

 

공전절후(空前絶後)

전에 한 번도 일어난 일이 없고 앞으로 절대로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일을 이른다. 매우 드문 일을 가리킨다.

 

공정명(孔鼎銘)

() 나라 공회(孔悝)의 공을 솥()에 새긴 글이다. 예기(禮記)』 「제통(祭統)

 

공존공영(共存共榮)

함께 살고 함께 번영한다. 함께 잘 살아감.

 

공죄(公罪)

관리가 공무를 집행하다가 사의(私意) 없이 과실·불참 등으로 범하게 된 죄를 이른다.

 

공주오손만리정(公主烏孫萬里程)

() 나라 공주(公主)가 오손왕(烏孫王) 곤막(昆莫)에게 시집가면서 슬픈 회포를 비파의 곡조로 탔다.

 

공준(孔樽)

후한(後漢) 때에 공융(孔融)이 북해(北海)에서 살았는데, 호기가 많아 좌중에는 손님이 늘 가득했고, 술동이에는 술이 마르지 않았다 한다. 사요취선(史要聚選)列傳上 공융(孔融)

 

공중누각(空中樓閣)

허공에 누각 짓기. 허황되고 이루어 질 수 없는 일. 공중(空中)의 누각(樓閣)이란 근거(根據)없는 가공(架空)의 사물(事物)을 말한다. , 사물의 기초가 견고하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명철하고 통달함을 비유한 말로, 정자(程子)가 송 나라 때 학자 소옹(邵雍)공중누각으로 일컬은 바 있다. 주자어류(朱子語類)卷一百

 

공중부단연가향(空中不斷連耞響)

집선전(集仙傳)왕노(王老)란 사람이 도()를 사모했는데 온몸에 부스럼이 난 도사가 찾아와 말하기를 술에다 몸을 담그면 바로 낫겠다.’라 하므로 왕노가 술을 만들어 항아리에 가득 채워 주자 도사는 항아리 속에 들어 앉아 3일 만에 머리털이 다 새까맣게 되어 동자(童子)와 같았고 부스럼도 다 나았다. 그를 말하기를 이 술을 마시면 신선이 되어간다.’고 하므로 이때 바야흐로 보리를 두들기면서 온 집안사람이 다 마셨더니 문득 바람이 일어나 한때에 공중으로 올라가는데 오히려 보리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라 하였다.

 

공중소공(空中邵公)

공중누각은 명철하고 통달한 것을 뜻하고, 소공은 송 나라의 학자 소옹(邵雍)을 가리킨다. 주자어류(朱子語類)100권에 정자(程子)가 소강절(邵康節)을 일러 공중누각 같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공중치(公仲侈)

전국 때 한나라 선왕(宣王) 때 재상으로 한군이 진군에 의해 수어(修魚)에서 패하자 그는 진나라와의 강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초나라가 한나라에 원군을 보내줄 것이라고 믿고 있던 한왕이 공중치의 말에 따르지 않고 안문(岸門)에서 진군과 싸워 대패하자 공중치는 태자를 인질로 진나라에 보냈다. 기원전 312년 초나라가 한나라의 옹지(雍氏)를 포위하자 그는 진나라에 구원을 청하려고 했으나 진나라 사자 공손매(公孫眛)를 통해 지나라가 한나라를 돕는 체 하면서 실은 한나라를 도모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간파하고 마음을 바꿔 제()와 초() 두 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려고 했다. 선왕의 뒤를 이은 양왕은 그를 계속해서 재상으로 등용했다. 후에 진나라가 의양(宜陽)을 점령하자 그는 명을 받고 진나라에 들어가 사죄를 하고 강화를 맺었다. 이때 공중치와 교유를 맺은 진나라의 재상 감무는 후에 진나라가 점령한 무수(武遂)를 돌려주었다.

 

공천(公薦)

성균관에 기거하는 생원·진사중 대과(大科)에 오랫동안 합격하지 못한 나이 많은 자로(子路)학행과 덕행을 지닌 자중 본관의 동료 선후배인 생인·진사들이 권점(圈點)하여 권점의 숫자가 가장 많은 3명을 뽑아 이조에 이문하여 입계해서 의망하는 제도이다. 공천은 성균관 기거 생원·진사의 음사(蔭仕)의 통로로 기능하였다.

 

공축(工祝)

종묘의 제사에 있어서 축을 고하는 일을 맡은 직책이다. 즉 축관(祝官)을 말한다.

 

공충원(孔沖遠)

양 무제(梁武帝) 때의 명신 공휴원(孔休源)을 이른다. 공휴원이 죽었을 때 무제가 그를 대단히 애석하게 여기어 내린 조서에서 공휴원은 풍업이 바르고 아량이 넓고 심원했다[風業貞正 雅量沖邈].”라고 한데서 온 말이다. ‘으로 바꾸어 썼다. 특히 공휴원은 식견이 높고 고사(故事)에 매우 해박하여 사무를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척척 잘 처리하였으므로, 고사를 혼자만 외고 있다는 뜻에서 당시 임방(任昉)은 항상 그를 일러 공독송(孔獨誦)’이라고까지 하였다. 양서(梁書)卷三十六

 

공탁(龔卓)

한 나라 때의 명관 공수(龔遂)와 후한 때의 명관 탁무(卓茂)를 합칭한 말이다. 공수는 선제(宣帝) 초기에 발해 태수(渤海太守)가 되어 전부터 극심해 오던 도적과 민란(民亂)을 깨끗이 다스리고 선정을 베풀어 발해군이 대단히 잘 다스려졌었고, 탁무는 일찍이 밀현령(蜜縣令)이 되어 백성들을 예의로써 다스리어 수 년 동안에 교화(敎化)가 크게 행해졌는데, 심지어는 온 천하에 황재(蝗災)가 만연하였으나 오직 밀현에만은 황재도 들지 않은 신비한 일이 있기까지 하였다. 한서(漢書)卷八十九·후한서(後漢書)卷二十五

 

공택산방(公擇山房)

공택(公擇)은 송() 나라 이상(李常)의 자인데, 그는 평생에 손수 베낀 서책 만 권을 서실(書室)에 쟁여 두고 이씨산방(李氏山房)이라 이름했었다. 송사(宋史)卷三百四十四 / 인용:李君山房記(소식)

 

공퇴지가(公退之暇)

하루의 업무를 끝내고 퇴청(退廳)한 다음의 여가를 이른다.

 

공판(邛阪)

공래구절판(邛郲九折阪)의 준말이다.

 

공평무사(公平無私)

사사로운 이익이나 욕심을 버리고 공정하게 사물을 보는 것을 이른다.

 

공포(孔誧)

궐리(闕里)지역의 인물지(人物志)()의 자는 중조(仲助)이고 노()의 상사(相史).”라고 하였다.

 

공피고아(攻彼考我)

상대를 공격하려면 자기 자신을 먼저 살펴야 함을 말한다.

 

공핍군흥오자부(恐乏軍興汚資斧)

군량이 결핍되어 자부를 더럽힐까 두렵다. 이 말은 주역(周易)()괘 상구(上九) 효사(爻辭)上九 巽在牀下 喪其資斧 貞凶이라고 보인다. 자부(資斧)는 재화(財貨)와 기용(器用)을 말한다.

 

공행공반(空行空返)

행하는 것이 없으면 돌아오는 것(소득)도 없음을 이른다.

 

공형(公兄)

조선조 각 고을의 상급 관속(官屬). 호장(戶長이방(吏房수형리(首刑吏)를 일러 삼공형(三公兄)이라고 한다. / 인용: 波池吏(정약용)

 

공혜장(空蕙帳)

공치규(孔雉珪)북산이문(北山移文)산 사람 가고 없으니, 혜초 장막 비었네(山人去兮黃帳空)”라고 하였다.

 

공화(共和)

두 사람 이상이 화합하여 정무(政務)를 시행한다. 소공(召公)과 주공(周公) 두 사람이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을 가리키는 말에서 기원되었다.

 

공화(空華)

불경(佛經)일체의 세간(世間)은 허공에 아른거리는 꽃과 같다.”라 하였는데, 그것은 눈에 병이 있는 사람이 허공을 쳐다보면 꽃 같은 것이 아른거리나 실제로는 꽃이 없다는 뜻이다.

 

공화(空花)

공중의 꽃이란 뜻으로, 허공중에는 본디 꽃이 없는 것이지만, 눈병 있는 사람이 혹시 이를 보는 수가 있다. 본디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한 것이라고 잘못 아는 것을 비유한 말로, 즉 망상(妄想)을 의미한다.

눈으로 천공(天空)을 쳐다볼 적에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서 마치 꽃 같은 것이 어른어른하게 보이는 것을 말하는데, 불가(佛家)에서 이르는 번뇌(煩惱)의 일종인 망상(妄想)을 말한다.

 

공화만안(空花滿眼)

눈병에 걸리면 허공에 꽃이 만발한 듯 보이는 것처럼 중생의 번뇌로 말미암아 떠오르는 여러 가지 망상을 뜻하는 불교의 용어이다.

 

공회정(孔懷情)

시경(詩經)소아(小雅) 상체(常棣)죽어 장사하는 두려움에 형제간에 몹시 걱정한다[死喪之威 兄弟孔懷].”라 하였다.

 

공황(龔黃)

() 나라 때의 순리(循吏)인 발해 태수(渤海太守)의 공수(龔遂)와 영천 태수(潁川太守) 황패(黃霸)의 병칭이다. 유자휘(劉子翬)의 시에 백성 잘 다스리기론 한 나라 공황이 최고일레[治民漢許龔黃最]”라고 하였다. 정약용(丁若鏞)봉지염찰도적성촌사작(奉旨廉察到積城村舍作)에서는 공수와 황패 같은 선정자(善政者)가 다시 나와도 선발되기 어렵네[龔黃復起難自拔].”라고 했다.

 

공황황(孔遑遑)

황황(遑遑)은 바쁘다는 말인데 공자(孔子) 맹자도 역시 황황하였다.”는 구절이 송 나라 구양수(歐陽修)의 글에 있다. 공자와 맹자가 때를 만나지 못하여 사방(四方)으로 바쁘게 돌아다녔다는 말이다. 맹자(孟子)』 「등문공(縢文公)()에 공자(孔子)가 벼슬을 잃은 지 석 달만 되면 마음이 황황하여 국경을 나갈 때에 반드시 폐백을 준비했다고 하였다[孔子三月無君, 則皇皇如也, 出疆必載質].

 

공후(箜篌)

현악기(絃樂器)의 한 종류이다.

 

공후사(箜篌詞)

고조선(古朝鮮)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처() 여옥(麗玉)이 지었다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공후인(箜篌引)이라고도 함)’를 말한다. 한 노인이 미쳐서 머리를 흩뜨린 채 술병을 들고 강물을 건너다가 빠져 죽자, 이를 말리던 노인의 처 역시 공후(箜篌)를 끌어다 노래를 부르고는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내용이다. 악부시집(樂府詩集)相和歌辭 箜篌引

 

공후인(箜篌引)

고조선(古朝鮮)의 진졸(津卒)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은 악부곡으로, 어떤 백수광부(白首狂夫)가 하수(河水)를 건너다 빠져 죽자, 그의 아내가 공후(箜篌)를 가져다 슬피 노래한 다음 그 역시 하수에 투신자살한 사실을 남편으로부터 전해 듣고 이 곡을 지었다 한다. 공무도하가(公无渡河歌)라고도 한다.

 

공후입몽(箜篌入夢)

미래에 자기 아내가 될 여인을 꿈에 본 것을 일러 공후입몽(箜篌入夢)이라고 한다.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

 

공휴원(孔休源)

양 무제(梁武帝) 때의 명신이다.

 

공휴일궤(功虧一簣)

흙을 돋우어 산을 만들 때 한 삼태기의 흙 때문에 산이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다. 잠깐의 사소한 방심으로 된 일이 실패로 돌아감을 이른다. 논어(論語)』 「자한(子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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