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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어휘사전 - 260. 장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260. 장

건방진방랑자 2020. 5. 3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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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

군중에서나 사신이 타는 수레다.

 

()

임금에게 올리는 글

 

장가(長歌)

군사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소리 높여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삼국 시대 오() 나라의 장군 유찬(留贊)이 적군 앞에서 먼저 머리를 풀고 목청껏 노래를 불러 군사들이 따라 부르게 한 뒤 진격하여 항상 승리를 거두었다는 장가입진(長歌入陣)’의 고사가 전한다. 삼국지(三國志)吳書 孫峻傳 注

 

장간리(長干里)

상인과 원주민이 혼거(混居)하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 나라 좌사(左思)오도부(吳都賦)()건업(建業) 남쪽 5리 지점에 산언덕이 있고, 그 사이의 평지에 이민(吏民)이 혼거하는데, 이곳을 장간(長干)이라고 하니, 이른바 대장간(大長干)과 소장간(小長干)의 마을이 이어져 있다.” 하였고, 이곳 상인의 처를 소재로 하여 그곳의 풍속을 절묘하게 묘사한 이백(李白)장간행(長干行)이 또 유명하다. 이태백집(李太白集)3

 

장감(張堪)

보리 이삭이 두 갈래가 생기는 것을 풍년의 조짐이라 하는데, 후한(後漢) 때 장감(張堪)이 어양태수(漁陽太守)가 되어 선정을 베풀자,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여 노래하기를 뽕나무엔 붙은 가지가 없고 보리 이삭은 두 갈래가 생기었네 장군이 고을을 다스리니 즐거움을 감당치 못하겠네[桑無附枝 麥穗兩岐 張君爲政 樂不可支].” 한 데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장감전(張堪傳)

 

장강(莊姜)

춘추 때 위 장공(衛莊公)의 비()인데, 어질고 덕이 있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장강루(長康淚)

장강은 진() 나라 고개지(顧愷之)의 자()이다. 그는 일찍이 환온(桓溫)의 대사마 참군(大司馬參軍)이 되었었는데, 환온이 죽자 슬피 곡하였다. 어떤 사람이 곡한 모습을 표현하라 하자 울음소리는 벼락이 산을 깨치는 듯하였고, 눈물은 하수를 쏟아 바다에 넣는 듯했다.” 하였다. 진서(晉書)』 「고개지전(顧愷之傳)

 

장강어(葬江魚)

초 회왕(楚懷王) 때의 충신 굴원(屈原)은 소인들의 참소를 입어 쫓겨나자, 울분과 시름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상수(湘水)에 빠져 죽었고, 오자서(伍子胥)춘추시대(春秋時代) 초 나라 사람으로 오() 나라에 망명하여 오왕(吳王)을 위해 월() 나라를 급히 치라고 극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오히려 태재 비(太宰嚭)의 참소에 의해 자결하라는 명이 내려지자, 죽음에 임하여 유언하기를 내 눈을 뽑아서 오 나라동문(東門) 위에 걸어놓아라. 월 나라가 쳐들어와 오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리라.” 하고 죽었는데, 오왕이 그 말을 듣고 대노하여 그의 시체를 말가죽 부대에 담아 강물에 띄워버렸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卷六十六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장강치절(長康癡絶)

세상살이가 그렇게 바보스러울 수가 없다는 말이다. 장강(長康)은 진() 나라 고개지(顧愷之)의 자(), 당시에 재절(才絶), 화절(畫絶), 치절(癡絶)3절로 일컬어졌다. 진서(晉書)92

 

장개빈(張介賓)

()나라 사람. 경악전서(景岳全書) 썼다. 호는 경악(景岳)이다. 회계현지(會稽縣志)

 

장객(掌客)

주 나라 때 빈객에 관한 일들을 맡은 관명(官名)이다.

 

장거(章擧)

문어의 한 종류이다.

 

장건(張騫)

한 무제(漢武帝) 때 서방 대월지국(大月氏國)과 동맹을 촉진할 목적으로 사신으로 떠나 서역(西域)을 두루 돌아다니며 동서(東西) 교역의 길을 열었다.

 

장건구목숙(張騫求苜蓿)

한 무제(漢武帝)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가서 말먹이인 거여목(苜蓿)의 씨앗을 가지고 온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대원열전(大宛列傳)

 

장건궁절역(張騫窮絶域)

한 나라 때 장건(張騫)이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간 것을 말한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무제(武帝)가 장건으로 하여금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을 타고 가다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 하였다.

 

장건궁한(張騫窮漢)

장건(張騫)이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은 것을 말한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무제(武帝)가 장건으로 하여금 대하에 사신으로 가서 황하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을 타고 가다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 하였다.

 

장건범해정(張騫泛海情)

한 무제(漢武帝)장건(張騫)을 대하(大夏)에 보내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다가 견우와 직녀를 만났다고 한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장건정후수사월(張騫正候隨楂月)

사명(使命)을 받들고 바다를 항해한다는 뜻이다. () 나라 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천하(天河)와 바다가 서로 통하는 곳이 있다. 해마다 8월이면 어김없이 부사(浮槎)가 왕래하는데, 어떤 이가 그 배를 타고 떠나 견우와 직녀를 만났다.”는 내용이 있는데,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그 사람을 장건(張騫)이라고 하였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원숭이 울음 세 번 들으면 눈물이 주르르, 사명 받들고 헛되이 팔월의 배 따라가네[聽猿實下三聲淚 奉使虛隨八月槎].”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17 秋興八首

 

장검동(張黔同)

장순손(張順孫)이 시기심이 많고 탐오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폄하는 뜻에서 이렇게 불렀다.

 

장경(長慶)

() 나라 장경(長慶) 연간에 서로 어울려 시를 지었던 원진(元稹)백거이(白居易)의 시풍(詩風)을 말한다.

 

장경(長卿)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이다. 그가 지은 자허부(子虛賦)를 한 무제(漢武帝)가 읽어보고는 자기와 같은 시대에 있지 않음을 탄식하다가, 동시대의 사마상여가 지었다는 것을 알고 급히 수소문해서 불러온 뒤 총애를 쏟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이다. 사부(辭賦)를 잘 지어 문장가로 유명한데, 늘 소갈병(消渴病)을 앓았다. 경제(景帝) 때 무기상시(武騎常侍) 벼슬을 지내다가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무제(武帝) 때 효문원 영(孝文園令)에 임명되었다가 또 병으로 그만 두었다. 자허(子虛), 상림(上林) 등의 부를 지어 무제의 사냥 즐김을 간하였다. 양효왕(梁孝王)의 객()으로 들어가 추양(鄒陽)ㆍ매승(枚乘)ㆍ장기(莊忌) 등 당대의 저명한 유세가들과 수년을 보냈으며, 양효왕이 죽은 뒤에 고향인 촉군(蜀郡) 성도(成都)로 돌아가 살면서 집이 매우 가난하여 생활을 꾸려나갈 수 없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장경(長鯨)

한없이 탐욕을 부리는 악인(惡人)을 가리키는 말이다.

큰 고래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큰 적()을 뜻하는 말로, 왜적을 가리킨다. 사통(史通) 서사(敍事)역신(逆臣)을 논할 때는 문정(問鼎)이라 부르고, 큰 도적을 일컬을 때는 장경(長鯨)으로 지목한다.”는 말이 있다.

 

장경(長庚)

저녁 무렵에 보이는 태백성(太白星)의 별칭인데, 태백성은 살벌(殺伐)을 맡은 별이라 하여 불길한 것을 말한다.

혜성(彗星)의 일종으로, 병란(兵亂)을 주관하는 별이다.

저녁에 서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 이백(李白)의 어머니가 꿈에 금성 곧 태백성을 보고 그를 낳았기 때문에 그의 자를 태백(太白)이라 했다 한다. / 인용: 道康瞽家婦詞(정약용)

 

장경공(長庚公)

금성(金星)의 딴 이른다. 원래 저녁에 서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을 장경성, 새벽에 동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을 계명성(啓明星)이라 하는데, 또 흔히 태백성이라고도 한다. 이백(李白)의 어머니가 꿈에 장경성을 보고 그를 낳아 이름을 태백(太白)이라 했다 하며, 흔히 시에서는 달과 짝하여 읊기도 한다.

 

장경구(長卿口)

장경은 한 경제(漢景帝) 때 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 그는 말은 어눌하였으나 글을 잘 지었다고 한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장경로(長卿壚)

장경(長卿)은 바로 사마상여의 자이다. 사마상여가 일찍이 임공령(臨邛令)으로 있던 친구 왕길(王吉)을 찾아갔다가 그의 주선으로 임공의 부호인 탁왕손(卓王孫)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갔는데, 마침 음률을 좋아하는 탁왕손의 딸 탁문군(卓文君)이 막 청춘과부로 집에 와 있던 터라, 사마상여가 거문고를 한 곡조 타서 은근히 탁문군의 마음을 돋운 결과, 탁문군은 과연 사마상여에게 반하여 밤중에 도주해서 사마상여에게로 갔다. 그리하여 사마상여가 탁문군을 데리고 성도(成都)로 돌아와서 사는데, 워낙 가난하여 살길이 막연하자, 목로집을 차려 탁문군에게는 술을 팔게 하고 사마상여 자신은 시중(市中)에서 품팔이를 하며 지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卷五十七

 

장경성(長庚星)

태백성(太白星). 태백성은 곧 금성(金星)인데, 해를 뒤따라 가면서 해가 진뒤에 서쪽 밤 하늘에 보이는 이 별을 장경성(長庚星)이라 부른다.

 

장경순(張景順)

당 현종(唐玄宗) 때의 목장 관리인 이름이다. 장열(張說)의 농우감목송덕비(隴右監牧頌德碑) 서문에 개원(開元) 원년에는 목마(牧馬)24만 필이었는데, 13년에는 무려 43만 필로 늘어났다. 이에 황제가 장경순을 돌아보며 말이 이처럼 번성하다니 모두가 그대의 힘이다.’라고 하자, 장경순이 황제의 힘이요, (왕모중(王毛仲))의 지휘에 의한 것일 뿐, 소신이 힘을 쓴 것은 없습니다.’고 대답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장경악(張景岳)

()의 장개빈(張介賓). 경악전서(景岳全書) 썼다. 경악(景岳)은 장개빈의 호이다. 회계현지(會稽縣志)

 

장경오훼(長勁烏喙)

인물됨이 좁고 의심이 많아서, 성취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고 나면 협력자나 동지에게 등을 돌릴 인상을 일컫는 고사성어다.

 

장경윤(張京尹)

() 나라 선제(宣帝) 때 경조윤(京兆尹)을 지낸 장창(張敞)을 이름이니, 평양(平陽) 사람으로 자는 자고(子高)이다. 벼슬에 있을 때마다 치적이 많았으며 일찍이 그의 아내를 위해 눈썹을 그린 일이 있었다. 한서(漢書)卷七十六 장창전(張敞傳)

 

장경제주(長卿題柱)

장경(長卿)은 한()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이다. 사마상여가 일찍이 꼭 출세하겠다는 각오로, ()에서 서(西)로 갈 때 승선교(昇仙橋)를 지나면서 교주(橋柱)에다 높은 수레와 사마(高車駟馬)를 타지 않고는 내가 이 다리를 다시 지나지 않으리라.”고 쓰고 갔다는 고사이다.

 

장경체(長慶體)

() 나라 시인 원진(元稹)백거이(白居易)의 문체를 말한다. 그들이 절친한 친구로서, 당 목종(唐穆宗) 장경(長慶) 연간에 각각 원씨장경집(元氏長慶集)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을 출간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장계(張繼)

당 나라 시인이다.

 

장계응(張季鷹)

계응(季鷹)은 진() 나라 장한(張翰)의 자()이다. 제왕 경(齊王冏)에게 벼슬하여 동조연(東曹掾)으로 있다가,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불현듯 고향의 고채(菰菜)와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나, 마침내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갔다는 고사가 유명하다. 진서(晉書)92

 

장계제약유(張溪題弱柳)

장정견(張正見)의 시에 맑은 시내 천 길이나 험한데 삼양에 섬약한 버들이 드리웠네[千仞淸溪險 三陽弱柳垂].” 하였다.

 

장고(張皐)

신라 때의 명장인 장보고(張保皐)를 이른다. 장보고는 흥덕왕(興德王) 때 당() 나라에 들어가 무령군 소장(武寧軍小將)을 지내고 본국에 돌아와, 당 나라의 해적(海賊)들을 소탕하기 위해 1만 명의 군사를 얻어 청해(淸海)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가 되어 해적을 소탕하여 세력을 크게 떨쳤었다.

 

장고(掌故)

전례(典例)를 맡은 벼슬아치를 말한다.

 

장곡구망(臧穀俱亡)

()과 곡() 두 사람이 함께 양()을 치다가 모두 양을 잃었는데, 장은 책을 끼고 글을 읽었고, 곡은 쌍륙(雙六)을 치며 놀았으니, 두 사람의 소업(所業)은 같지 않았으나 양을 잃은 것은 마찬가지다. 장자(莊子)』 「변무(騈拇)

 

장곡망양(臧穀亡羊)

장자(莊子)』 「변무(騈拇)()과 곡()이 함께 염소를 치다가 모두 염소를 잃었다. 장에게 묻기를 무슨 일을 하다가 염소를 잃었느냐하자 글을 읽었다하고, 곡에게 무슨 일을 하였느냐하자 장기를 두고 놀았다하였다. 두 사람이 한 일은 같지 않았지만 염소를 잃기는 마찬가지다.” 하였다.

 

장곡숙현(臧穀孰賢)

()은 노예이고 곡()은 어린아이이다. 장자(莊子)』 「변무(騈拇), 노예와 어린아이가 염소를 먹이는데 노예는 책장을 넘기며 글을 읽고 어린아이는 장기를 두며 놀다가 두 사람이 다 그 염소를 잃어버렸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하는 일은 다르더라도 중요한 것을 잃은 점은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곧 인생의 성패 영욕은 결국 허무하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장공(章貢)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장수(章水)와 공수(貢水), 이 물줄기가 합쳐서 감강(贛江)을 이룬다.

 

장공(長公)

()소식(蘇軾)을 말하는데, 소식이 귀양살이하는 동안에 절강(浙江) 이서의 항주(杭州)ㆍ호주(湖州) 등 명승지를 두루 구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나라 한연수(韓延壽)의 자()이다. 회양(淮陽)ㆍ영주(潁州)ㆍ동군(東郡) 등의 태수를 역임하는 동안 예의를 숭상하고 옛날 방식의 교화(敎化)를 펼쳐 천하 제일의 치행(治行)으로 일컬어졌다. 한서(漢書)76

 

장공곡(張公谷)

낙양(洛陽) 남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으로, 그곳에서는 좋은 배가 생산되기로 유명하다. 문선(文選)16한거부(閑居賦), “장공(張公)의 대곡(大谷)의 배, 양후(陽侯)의 조비(鳥椑)의 감, 주 문왕(周文王)의 약지(弱枝)의 대추, 방릉(房陵)의 주중(朱仲)의 오얏이 심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였는데, 그에 대한 유량(劉良)의 주(), “낙양에 장공이 있어 대곡에 살았다. 그 집에는 하리(夏梨)가 있는데, 천하에 오직 이 한 나무만이 있다.” 하였다.

 

장공맹(張公盲)

() 나라의 문장가 장적(張籍)을 말한다. 그는 늘그막에 눈이 어두웠는데, 그의 친구 이모(李某)가 절동 절도사(浙東節度使)로 나가자, 한유(韓愈)를 시켜 대신 편지한 글에 그대는 사람을 취할 적에 어진가 어질지 않은가를 따지고 봉사인가 봉사가 아닌가를 따지지 말아야 한다. 지금 천하에는 모두 마음이 봉사인데, 나는 눈만 봉사일 뿐 마음은 봉사가 아니어서 시비(是非)를 분별할 줄 안다.” 하였다. 한창려집(韓昌黎集)第十六 대장적여이절동서(代張籍與李浙東書)

 

장공사순(張公思蓴鱸)

멀리 고향 땅을 바라보니 고향이 몹시 그리워짐을 말한다. ()의 장한(張翰)이 자기 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갔던 사실이 있었음. 진서(晉書)文苑 장한전(張翰傳)

 

장공승사(張公乘槎)

() 나라의 장건(張騫)이란 사람이 뗏목을 타고 은하수로 올라가서 직녀를 만났는데, 직녀가 돌 하나를 주워서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서 엄군평(嚴君平)이라는 사람에게 보였더니, 그 돌은 직녀의 베틀 괴던 돌이라 하였다 한다.

 

장공역사(莊公櫟社)

장공은 장자(莊子)를 가리키고, 역사는 신사(神社)에 있는 큰 나무를 가리킨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 “장석(匠石)이 제() 나라로 가다가 곡원(曲轅)에 이르러서 토신묘(土神廟)에 있는 참나무를 보았는데, 그 그늘은 수천 마리의 소를 뒤덮을 만하였고, 그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다.” 하였다.

 

장공예(張公藝)

() 나라 사람인데, 그의 집은 구세(九世) 동안의 친족(親族)이 한 집에 동거(同居)하였으므로, 당 고종(唐高宗)이 일찍이 그의 집에 행차하여, 그 많은 친족이 한 집에 살면서 서로 화목할 수 있는 방법을 물으니, 장공예가 ()’ 자 백여 자를 써서 올렸다고 한다. 소학(小學)』 「선행(善行)

 

장공인자(張公忍字)

()의 장공예(張公藝)는 구세(九世)가 한 집에 살고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태산에 제사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집에 들러 그 방법을 물었다. 이에 장공예는 대답 대신 참을 인() 자 백 자를 써서 올렸다고 한다. 당서(唐書)卷一百九十五, 소학(小學)』 「선행(善行)

 

장공자(張公子)

장건(張騫). () 성고(成固) 사람. 월지국(月氐國)으로 사신 가다가 흉노에게 잡혔다가 10여 년 만에 돌아왔음. 사기(史記)卷一百十一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장공조술(張公操術)

장공은 후한 때의 장군 장환(張奐)을 가리키고, 조술(操術)은 곧 자신을 바르게 잘 지키는 방술을 말한다. 장환이 일찍이 안정속국 도위(安定屬國都尉)로 있으면서 남흉노(南匈奴)ㆍ동강(東羌) 등의 오랑캐들을 위엄과 은혜로 잘 다스린 결과, 그들이 장환의 은덕에 감격하여 강()의 두목은 말 20필을 장환에게 바쳐 왔고, 선령(先零)의 추장은 또 금기(金器) 16()를 바쳐 왔다. 그러자 장환이 여러 강()들의 앞에다 주부(主簿)를 불러 놓고 말하기를 가령 말이 양처럼 많아도 마구에 들일 수 없고, 황금이 좁쌀처럼 많아도 내가 차지할 수 없다.” 하고는 모두 되돌려 주게 하니, 위화(威化)가 크게 행해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卷六十七

 

장공조이비(長空鳥已飛)

사람의 일생이 마치 새가 언뜻 공중을 지나가듯 빠름을 비유한 말인데, 죽음을 말한다. 장협(張協)의 시에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새가 언뜻 눈앞을 지남과 같네[人生瀛海內 忽如鳥過目].” 하였다.

 

장과(莊窠)

장원(莊園)이나 논밭을 말한다.

 

장곽영(場藿詠)

심성이 고결한 사람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노래라는 뜻이다. 시경(詩經)소아(小雅) 백구(白駒)그대의 흰 망아지가 내 밭의 콩싹을 먹었다 하고, 오늘밤 다 가도록 붙잡아 매어두어, 바로 그분이 내 집의 귀빈이 되게 하였으면[皎皎白駒 食我場藿 縶之維之 以永今夕 所謂伊人 於焉嘉客].”이라는 구절이 있고, 그 말미에 당신의 목소리 금옥처럼 여기시어, 멀리 떠나려는 마음 갖지를 마오시라[毋金玉爾音 而有遐心].”라는 구절이 있다.

 

장괴애(張乖崖)

북송 초의 문신인 장영(張詠)을 말한다. 익주 자사(益州刺史)와 이부상서를 지냈다. 장영이 촉(:지금의 사천성泗川省)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다. 한 늙은 병사가 어린 자식을 안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장난으로 아비의 볼을 때렸다. 장연은 이를 보고 노하여 아무리 아이라 해도 그대로 둘 수 없다며 그 애를 죽인 일이 있다.

 

장교(莊蹻)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의 도둑인데, 성질이 포악하여 도척(盜跖)과 함께 흉악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 인용: 梁四龍傳(이기발)

 

장교비희차비노(長蛟贔屭佽飛怒)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검사(劍士) 차비(佽飛)가 강을 건널 때 두 마리의 교룡이 배를 습격해 오자, 보검을 빼어 들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교룡의 머리를 베었던 고사이다. 회남자(淮南子)』 「도응훈(道應訓)

 

장구령(張九齡)

당 현종(唐玄宗) 때의 명재상이며 뛰어난 문장이었음. 자는 자수(子壽). 저서에는 곡강집(曲江集)이 있다.

 

장구사운시(長句四韻詩)

7자를 1구로 하여 8구로 1편을 이루고, 2468구의 말미에 운자(韻字)를 쓴 시체(詩體), 칠언율시(七言律詩)의 한 변격(變格).

 

장구학(章句學)

학문이 훌륭하지 못하다는 겸사. ()과 구()의 해석에만 치우쳐 전체의 대의(大義)에는 통하지 않는 학문을 말한다.

 

장국(長鞠)

오랫동안 고생하다라는 뜻이다.

 

장군경병(將軍競病)

민첩한 재질을 발휘하여 멋진 시를 순식간에 지어내는 것을 말한다. 남조(南朝) ()의 장군 조경종(曹景宗)이 북위(北魏) 군대를 대파하고 개선한 뒤 열린 연회에서, 운자(韻字)를 서로 나누어 연구(聯句)로 시를 지을 적에, 마지막 남은 운자인 ()’()’ 두 글자를 가지고 한번 지어보겠다고 자청하면서, “떠날 때는 아녀자들 슬퍼했는데, 돌아오니 풍악 소리 다투어 울리누나. 길손이여 어디 한번 그대에게 물어보세, 나의 공이 곽거병과 비교해서 어떠한지[去時兒女悲 歸來笳鼓競 借問行路人 何如霍去病]”라고 하자, 황제 이하 조신(朝臣)들이 찬탄을 금치 못했다는 장군경병(將軍競病)’의 고사가 전한다. 남사(南史)』 「조경종전(曹景宗傳)

상대방의 훌륭한 시문(詩文)에 놀라움을 표현한 말이다. () 나라 때 장군 조경종(曹景宗)이 전쟁에 이기고 개선했을 적에 무제(武帝)가 화광전(華光殿)에서 잔치를 베풀고 연구(聯句)를 시험했는데, 가장 험운(險韻)인 경병(競病) 두 글자만 남았을 때 최후로 들어온 조경종이 즉시 붓을 들어 쓰기를 떠날 적엔 아녀자가 슬퍼하더니 돌아오매 피리 북소리 다투어 울리네 길가는 사람들에게 묻노니 어찌하면 곽거병과 같아볼까[去時兒女悲 歸來笳鼓競 借問行路人 何如霍去病].”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남사(南史)』 「조경종전(曹景宗傳)

 

장군로불용(將軍老不用)

존재 가치가 없다고 여겨져서 조정에서 버림받은 몸이라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62세의 나이로 출정(出征)을 자원하였을 때, 너무 늙었다고 여겨 광무제(光武帝)가 허락하지 않자, 말 위에 뛰어 올라타 주위를 돌아보며 용맹을 과시했던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24 마원열전(馬援列傳)

 

장군막하연(將軍幕下蓮)

막부(幕府)를 아름답게 일러 연화지(蓮花池)라 하였다. 남사(南史)

 

장군석(將軍石)

한 나라 때 장군 이광(李廣)이 우북평 태수(右北平太守)로 있을 당시 사냥을 나갔다가 우거진 풀 속에 있는 바위를 호랑이로 잘못 알고 활을 쏘아 명중시켜 화살촉이 끝까지 다 박혔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사기(史記)卷一百九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장귀(將歸)

금곡(琴曲)의 이름이다. 공자(孔子)가 조() 나라의 초빙을 받고 가는 도중에 조 나라의 현인 두명독(竇鳴犢)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기가 쓰이지 못할 줄을 알고 고향인 추향(陬鄕)으로 돌아가서 그를 슬퍼하여 지은 금조(琴操)라 한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장근(長勤)

오랜 고생. 허덕이다.

 

장금수(腸錦繡)

시와 글을 잘함을 말한다. ‘비단 창자에 수 놓은 배[錦膓繡肚]’라는 글이 있다.

 

장급사(張給事)

장현소(張玄素)를 말한다. 당 태종(唐太宗) 때 장현소가 시어사(侍御史)를 거쳐 급사중(給事中)으로 있으면서 태종이 낙양궁(洛陽宮)을 수축하려는 데 대해 현소가 상서(上書)하여 극간하자 태종이 그 일을 즉각 중지하였다. 당서(唐書)卷一百三

 

장기론(張機論)

의서(醫書)를 이른다. 동한(東漢) 영제(靈帝) 때의 장기(張機)는 자가 중경(仲景)이었는데, 자기 일가들이 당시 상한병(傷寒病)으로 많이 죽어갔기 때문에 의학을 전공하여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을 세상에 내놓았음. 사고제요(四庫提要)卷一百三

 

장길(長吉)

()의 문장 이하(李賀)의 자. 그는 문장이 매우 훌륭하였다. 하루는 낮에 한 붉은 비단옷 입은 사람이 나타나 상제(上帝)가 백옥루(白玉樓)를 짓고 자네를 불러 기문(記文)을 지으려 한다 하였는데, 꿈을 깬 후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서(唐書)卷二百二 이하전(李賀傳)

 

장길문장(長吉文章)

장길(長吉)은 당() 나라 시인(詩人) 이하(李賀)의 자이다. 그는 종실(宗室)인 정왕(鄭王)의 후예로 시가(詩歌)를 짓는 솜씨가 매우 민첩하고 문체(文體)가 독특하여 장길체(長吉體)를 창출한 사람이기도 하다. 악부사(樂府詞) 등 많은 작품을 남겼고 24세의 나이로 죽었다. 구당서(舊唐書)卷一百三十七 이하열전(李賀列傳)

 

장길통미(長吉通眉)

장길(長吉)은 당 나라 시인 이하(李賀)의 자인데 두 눈썹이 맞닿았음. 당서(唐書)』 「이하전(李賀傳)

 

장낙(長樂)

() 나라 때 태후(太后)가 거처했던 궁전 이름이다.

 

장남헌(張南軒)

() 나라 사람. 이름은 식(), 자는 경부(敬夫), 남헌은 호이다. 이학(理學)에 전심하였으며 주자와 교류하였다. 저서에는 남헌역설(南軒易說)ㆍ남헌집(南軒集) 등이 있다. 송사(宋史)宋元學案

 

장년삼노(長年三老)

주사(舟師), 뱃사공을 가리키는데, 혹은 사공을 장년, 노젓는 사람을 삼로라 하기도 한다.

 

장녹미인연일제(張祿微仁戀一綈)

남에게 조그마한 은혜를 입고 그에 보답한 것을 말한다. 장녹(張祿)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정승 범수(范睢)의 가명이다. 범수가 처음에 위() 나라에서 태중대부(太中大夫) 수가(須賈)를 섬겼는데, 범수가 수가로부터 어떤 일로 오해를 받아 그로 인해 매를 맞아 갈빗대가 부러지고 이가 부러져 거의 죽게 되었다. 범수는 곧바로 몰래 도망하여 성명을 장녹(張祿)으로 고치고 진 나라에 들어가 정승이 되었는데, 수가는 범수가 죽은 줄로만 알았었다. 뒤에 진군(秦君)이 위 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수가는 사신의 자격으로 진 나라에 갔는데, 범수가 그 소문을 듣고 일부러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미행하여 수가의 사관(使館)으로 찾아가니, 수가가 범수를 보고 깜짝 반기며 범수의 옷차림을 보고 추울 거라 생각하여 제포(綈袍) 한 벌을 내주었다. 그러자 범수는 그곳을 나와 상부(相府)로 들어가서 정승의 의용(儀容)을 갖추고 앉아 있었다. 수가는 범수가 진의 정승이라는 것을 그때야 알아채고 범수의 앞으로 나가 사죄하자 범수가 말하기를 그대의 죄가 세 가지나 되지만 살려주는 것은 나에게 제포 한 벌을 주는 데에 친구의 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사기(史記)79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

 

장니(障泥)

말다래로, 말의 배 양쪽에 늘어뜨려서 진흙 등이 옷에 묻는 것을 방지하는 도구이다. / 인용: 道康瞽家婦詞(정약용)

 

장다농(張茶農)

청 나라 시인이자 화가인 장심(張深). 자는 숙연(叔淵)이고 별호는 낭객(浪客)이다.

 

장단아미금곡춘(腸斷蛾眉金谷春)

아미(蛾眉)는 미인을 말한다. ()나라의 큰 부호(富豪)인 석숭(石崇)이 금곡(金谷)에 별장을 짓고 기첩(妓妾) 녹주(綠珠)를 데리고 향락(享樂)하였다. 조왕(趙王) ()이 반역(叛逆)하여 정권을 잡자 사람을 보내어 녹주를 달라고 청하였으나, 석숭이 거절하므로 석숭을 잡아가니 녹주가 누()에서 떨어져 죽었다.

 

장대(章臺)

()의 이름이다. 이문록(異聞錄), “韓翃將妓柳氏歸置都下 三歲不迓寄以詩曰 章臺柳章臺柳 昔日靑靑今在否라고 보인다.

장대(章臺)’는 원래 전국시대 진() 나라 장안(長安)에 있는 누대의 이름이었는데, () 나라 이후 장안 장대의 거리가 번화해서 기방이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었다. 당나라 때 한굉(韓翃)이라는 사람이 장안의 아름다운 유()씨 여자와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전란으로 인해 이별하게 되었다. 한굉은 그녀에게 장대류, 장대류. 옛날 푸르고 푸르더니 지금 그대로 잘 있는가? 비록 긴 가지 전처럼 늘어져 있더라도 남의 손에 꺾이지 않았을까[章臺柳章臺柳 昔日靑靑今在否 縱使長條似舊垂 亦應攀折他人手]라는 시를 지어 보냈다. 이에 유래하여 장대지(章臺枝)라는 이름은 오직 한 남자에게만 꺾임을 허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인용: 현호쇄담, 章臺枝(이광려)

 

장대궁(章臺宮)

() 나라 함양(咸陽)에 있던 궁전 이름이다.

 

장도가측(葬陶家側)

질그릇 굽는 집 옆에 장사 지내 달라는 뜻으로, 사후에 질그릇 굽는 사람이 무덤의 흙을 파서 술병을 만들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말한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죽어서도 술을 가까이 하고 싶어서 한 소원을 말한다. “오서(吳書)에서 말한다. 정천(鄭泉)의 자()는 문연(文淵)이고, 진군(陳郡)사람이다. 아는 것이 많았으며 기이한 뜻을 품고 있었으며, 천성이 술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는 틈만 나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맛 좋은 술 500(1=10)을 배에 가득 실어 사시사철 술에 빠져 첨벙거리고, 거기에 잠수하여 마셔대다가 이내 피곤해지면, 그제야 음식을 먹을 것이다. 술이 떨어질 경우 다시 채우면 되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吳書曰鄭泉字文淵陳郡人博學有奇志而性嗜酒其間居每曰 原得美酒滿五百斛船 以四時甘脆置兩頭 反覆沒飲之 憊即住而啖餚膳 酒有斗升減 隨即益之 不亦快乎]!’라고 말했다. 정천(鄭泉)은 임종에 이르러 문중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부디 나를 질그릇 굽는 집 옆에 묻어주게. 오랜 세월이 지나면 내 몸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고, 잘 되면 그 흙으로 술병을 빚게 될 것이니, 그때 내 소원이 이루어질 걸세[泉臨卒謂同類曰必葬我陶家之側. 庶百歲之後化而成土 幸見取為酒壺 實獲我心矣].’” 三國志(삼국지)47卷 吳書(오서) 吳主孫權傳(오주손권전)

 

장동객(墻東客)

시정(市井)에 파묻혀 숨어 사는 사람을 말한다. 후한(後漢) 왕군공(王君公)()에 정통하여 낭관(郞官)이 되었다가,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일부러 관비(官婢)와 사통(私通)하여 면직된 뒤, 짐짓 미친 척하면서 소를 파는 거간꾼이 되어 저잣거리에 숨어 살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피세장동왕군공(避世墻東王君公)’이라고 불렀던 고사가 전한다. 후한서(後漢書)』 「일민열전(逸民列傳)逢萌

 

장동복(牆東伏)

은거하다란 뜻이다. 담장 동쪽이란 곧 성()의 담장 동쪽을 가리킨 것으로, () 나라 말기의 학자 육문규(陸文圭)가 송 나라가 망한 이후로는 성 동쪽에 은거하였으므로, 학자들이 그를 일러 장동 선생(墻東先生)’이라 칭한 데서 온 말이다.

 

장동피세(墻東避世)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시정(市井)에서 은자(隱者)처럼 사는 것을 말한다. 동한(東漢)의 왕군공(王君公)이 난리 통에도 시내를 떠나지 않고 소를 매매하는 거간꾼 노릇을 하면서 숨어살자, 사람들이 避世牆東王君公이라고 일컬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후한서(後漢書)』 「일민전(逸民傳)봉맹(逢萌)

 

장두백전(杖頭百錢)

() 나라 때 완수(阮脩)가 외출할 때면 언제나 지팡이 끝에다 백 전씩을 걸고 나가서 주점(酒店)에 이르러 혼자 즐기며 마셨던 데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卷四十九

 

장두유사공방신(杖頭唯事孔方神)

지팡이에 돈을 걸고 다닌다는 뜻으로, 술값을 말한다. 공방신은 전신(錢神)으로, 돈을 해학적으로 부르는 말이다. () 나라 때 완수(阮脩)가 항상 지팡이 끝에다가 돈 백전(百錢)을 걸고 걸어다니다가 술집이 보이면 그 돈으로 혼자서 술을 마셔 취하였다. 진서(晉書)49 완적열전(阮籍列傳)

 

장두전(杖頭錢)

장두백전(杖頭百錢)의 준말로, 지팡이에 걸린 돈이란 뜻으로, 술값을 말한다. () 나라 때 완수(阮脩)가 항상 지팡이 끝에다가 돈 백전(百錢)을 걸고 다니다가 술집이 보이면 그 돈으로 혼자서 술을 마시고는 취하였다. 진서(晉書)49 완적열전(阮籍列傳)阮脩

 

장두체(藏頭體)

일부러 주어(主語)를 생략하고 짓는 문체를 말한다.

 

장득아손유로분(長得兒孫有老盆)

두보(杜甫)의 시(), “전가(田家)의 오래된 와분(瓦盆)을 웃지 말라. 술을 담기 시작한 뒤 아손(兒孫)들을 길러 냈네[莫笑田家老瓦盆 自從盛酒長兒孫].”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도기(陶器)로 된 술동이가 손자를 길러 내도록 오래 되었다는 뜻이 시경(詩經)소아(小雅) 사간(斯干)에 나온, “딸을 낳았을 때에 기와를 희롱한다[弄瓦].”는 것을 인용한 듯하다.

 

장락(長樂)

()나라 때 태후(太后)가 거처하던 궁전 이름이다. 한 혜제(漢惠帝) 때부터 이후로는 항상 모후(母后)를 장락궁(長樂宮)에 모시었다.

 

장락궁(長樂宮)

() 나라 때 항상 모후(母后)를 장락궁에 모시었으므로, 전하여 모후가 거처하는 궁전을 말한다.

 

장락현(將樂縣)

현의 이름이다.

 

장량(張良)

() 나라의 개국공신으로, 그의 선대(先代)는 한() 나라의 다섯 왕에 걸쳐 재상이 되었다. 한 나라가 망한 뒤에 장량은 가재(家財)를 털어 복수를 꾀하다가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도와 마침내 진 나라를 멸망시키고는, “이제 세 치 혀로 제왕의 사부(師傅)가 되어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졌으니, 포의(布衣)의 선비로서는 극치라 나의 분수에 족하다. 원컨대 인간사를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고자 한다.” 하고는, 신선이 되고자 벽곡(辟穀)을 하였다 한다. 한서(漢書)』 「장진왕주전(張陳王周傳)

 

장려향(瘴癘鄕)

기후가 좋지 않아 장기(瘴氣)가 많은 고장이라는 뜻이다. 여기는 안남국(安南國)을 말한다.

 

장려화(張麗華)

남조(南朝) 진 후주(陳後主)의 비(). 임금의 총애를 입어 임금의 무릎에 늘 안겨 정사를 결단했으며, 국정(國政)을 문란하게 하였다. 수군(隋軍)이 입성(入城)하자 후주(後主)와 함께 숨었다가 수군에게 참살되었다.

 

장로(張老)

중국 어느 필기소설(筆記小說)에 나오는 선인(仙人)인데 처음에는 홀아비로 채소를 심어 팔고 있었다. 하루는 중매하는 노파를 보고, “건너 마을 아무 집 처녀에게 중매를 하여 주오.” 하니, 노파가 놀래며 그 집 귀한 딸을 왜 채소장수하는 가난한 늙은이에게 주겠소.” 하고 거절하니, 장로는 한번 말이나 해 보시오.”라고 굳이 간청하였다. 노파가 그 집에 가서, “우스운 일이 있습니다. 채소 장수하는 장로가 댁의 딸에게 중매하여 달라합니다.” 하였다. 주인은 어이가 없어 웃으며, “그러면 내일이라도 황금(黃金) 얼마를 예물로 가져 오라.” 하였다. 그것은 가난한 늙은이가 황금이 없을 줄 알고 거절하는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다음날 장로는 황금을 요구하는 수량대로 가져 왔다. 주인도 어이가 없고 그 처녀도 그리로 시집가기를 원하므로 할 수 없이 허락하였다. 장로는 장가든 지 며칠 뒤에 처를 우차(牛車)에다 싣고 어딘지 가버렸다. 몇 해 후에 그 집 종 곤륜노(崑崙奴)가 왕옥산(王屋山) 천단(天壇) 남쪽에서 만났는데, 장로는 신선(神仙)이요, 그의 아내도 신선이 되어 인간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장뢰약계(張耒藥戒)

장뇌가 지은 약계(藥戒)를 말한다. 장뇌는 송() 나라 회음(淮陰) 사람으로 자는 문잠(文潛). 약계의 내용은 대략 복약(服藥)을 경계한 것이나 본 의미는 치국 수신(治國修身)의 요법(要法)을 이른 것이다. 고문진보(古文眞寶)후집(後集)에도 실려 있다.

 

장료(張遼)

삼국 시대 위() 나라 장수로 문제(文帝; 曹丕) 때 진양후(晉陽侯)에 봉해짐. 삼국지(三國志)』 「장료전(張遼傳)

 

장루(粧樓)

곱게 단장한 누각으로, 부인의 거실을 말한다.

 

장륙(藏六)

거북의 이칭(異稱)이다. 거북이 머리, 꼬리, 네 발 등 여섯 부분을 거북껍질 속에 숨기므로 이렇게 이르는 것이며, 전하여 선비가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시골에 은거하는 것을 말한다.

 

장륙(丈六)

한 길 여섯 자, 16척을 말한다.

 

장륙귀(藏六龜)

4()과 머리, 꼬리를 숨기는 거북이처럼 안(), (), (), (), (), ()6()을 단속하는 불교의 수행자를 뜻하는데, 보통 속세를 떠나 은둔하는 것을 말한다. 잡아함경(雜阿合經)43

 

장륙신(丈六身)

불상(佛像)을 이른다. 보통 사람의 키가 8척이므로, 부처를 존경하는 뜻에서 보통 사람의 키의 배가 되는 16척으로 불상을 주조한 데서 온 말이다.

 

장릉(長陵)

파주(坡州) 교하(交河)에 있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의 능으로, 뒤에 인조(仁祖)의 능 역시 이곳에 자리하였다. 인열왕후는 한준겸의 딸이다.

한 고조(漢高祖)의 무덤을 말한다.

 

장리(長離)

남방(南方)의 주조(朱鳥)를 말한다. / 유의어: 봉황(鳳凰).

 

장리(長吏)

현성(縣城)의 높은 관리를 말한다.

 

장리(將離)

작약의 별명이다. 고금주(古今注)將離相別 贈之以芍藥이라 하였다.

 

장림(張林)

() 나라 때 한림공봉(翰林供奉)을 지낸 장열(張說)을 가리킨다. 뒤에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고, 문장(文章)은 당시에 으뜸이었는데, 조정의 크다는 술작(術作)들은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고, 그는 비문(碑文)에 더욱 뛰어났다 한다. 당서(唐書)卷一百二十五

 

장림륵일비(張林勒一碑)

장 한림은 당() 나라 때의 대문장가로 일찍이 한림학사를 지낸 장열(張說)을 가리키는데, 장열은 특히 비문(碑文)을 짓는 데에 뛰어났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당서(唐書)卷一百二十五

 

장맥분흥(張脈憤興)

사람이 격분하거나 흥분하면 혈맥의 펼쳐 움직임은 강한 모습을 띄게 되지만, 그 속은 마르게 됨을 말한다.

 

장면(墻面)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너는 주남(周南)ㆍ소남(召南)을 배웠느냐? 사람으로서 주남ㆍ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마치 담장에 얼굴을 대고 선 것과 같다.” 하였다. 이것은 앞이 막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는 말인데, 학문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말을 인용한다.

 

장명등(長明燈)

부처 앞에 있는 등불로, 꺼지지 않고 언제나 타오르기 때문에 장명등(長明燈)이라 한다.

 

장명루(長命縷)

오월 오일 단오절(端午節)에 액을 쫓고 장수를 비는 뜻으로 팔에 감던 오색실을 말한다. / 유의어: 명실(命縷)

 

장명분옥(長鳴噴玉)

말의 웅맹(雄猛)한 기세를 뜻하는 말이다. 주옥은 말이 입으로 뿜어내는 침을 가리킨다.

 

장몽(掌夢)

꿈풀이를 맡은 관리이다.

 

장묘식(場苗食)

친구가 찾아온 것을 반갑게 여겨 한 말로, 시경(詩經)소아(小雅) 백구(白駒)깨끗한 흰 망아지가 내 채마밭 곡식 먹었다 핑계 대고 발과 가슴을 얽어 놓고서 이 아침을 길게 늘이어 귀한 우리 이 손님을 더 놀다 가게 하리라[皎皎白駒 食我場苗 縶之維之 以永今朝 所謂伊人 於焉逍遙].” 한 데서 온 말이다.

 

장무선(張茂先)

이름은 화(). 진 혜제(晉惠帝) 때 탁지 상서(度支尙書)를 지냈고, 광무후(廣武侯)에 봉해짐. 박학(博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초료부(鷦鷯賦)를 지었음.

 

장문(長門)

장문궁(長門宮)을 가리킨다. 진황후(陳皇后) 아교(阿嬌)가 처음에는 한무제(漢武帝)의 총애를 듬뿍 받다가 나중에는 폐후(廢后)되어 장문궁에 유폐된 고사가 있다. / 인용: 長門春曉(조위)

 

장문부(長門賦)

악부(樂府) 가곡 이른다. ()의 무제(武帝) 때 진황후(陳皇后)가 제의 노여움을 사 장문궁(長門宮)에서 별거하게 되었는데, 이때 황후는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문장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황금 1백 근을 내리면서 자기의 억울한 심사를 문장으로 표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상여가 쓴 것이 바로 이 장문부이다. 황후는 그 일로 하여 다시 무제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악부해제(樂府解題)

 

장문창(張文昌)

문창은 당() 나라 시인 장적(張籍)의 자()이다. 두보(杜甫)의 시집을 불태워 그 가루를 마신 일화가 유명한데, 특히 고체시(古體詩)와 악부(樂府)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장물(長物)

두 개 이상의 여유 있는 물건을 말한다. () 나라 왕공(王恭)이 숙부인 왕침(王忱)의 요청을 받고 단 하나밖에 없는 돗자리를 주었는데,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왕침이 미안하게 생각하자, “숙부께서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저는 원래 장물(長物)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 고사가 유명하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 소식(蘇軾)의 시에 장물을 쌓아 두는 것은 천진한 본심을 해치는 일, 늙어 시골에 돌아갈 건 오직 이 한 몸뚱이뿐[平生長物擾天眞 老去歸田只此身].”이라는 표현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25 送竹 여사수재(與謝秀才)

 

장미로(薔薇露)

장미꽃으로 만든 향수. 유종원(柳宗元), 한유(韓愈)가 보내온 시를 읽으려면서 우선 장미꽃 향수로 손을 씻고나서 펴보았다고 한다. 운선잡기(雲仙雜記)

 

장미산(薔薇山)

충주(忠州) 서쪽 28리 지점에 있는 산 이름이다.

 

장박망(張博望)

한 무제(漢武帝) 때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진 장건(張騫)을 가리킨다. 황제의 명을 받고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나가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았는데, 이때 배를 타고(乘槎) 은하수로 올라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는 전설에 기인하여 그를 선사객(仙槎客)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장발(壯髮)

이마에까지 내려와서 머리털이 난 것으로 제왕의 기상을 갖춘 것을 말한다. () 나라 원제(元帝)가 장발이라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두건으로 감추었던 고사가 있다. 철경록(輟耕錄)』 「건책고(巾幘考)

 

장변록록변장(獐邊鹿鹿邊獐)

왕안석(王安石)의 아들 원택(元澤)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어떤 사람이 노루와 사슴 한 마리씩을 왕안석에게 보낸 적이 있었는데, 원택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혹자가 묻기를 어느 놈이 사슴이고 어느 놈이 노루인가라고 하자, 원택이 답하기를 노루 옆에 있는 놈이 사슴이고 사슴 옆에 있는 놈이 노루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후 경전을 해석할 때도 이와 같았다. 주자는 왕안석의 경전 해석이 엉성하다는 것을 드러내려 이런 얘기를 실었다. 주자어류(朱子語類)130 / 인용: 漫錄(김창흡)

 

장보(章甫)

공자(孔子)가 썼다는 갓 이른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나라 어떤 사람이 장보관을 팔기 위해 월() 나라에 갔으나 월 나라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깎고 갓을 쓰지 않았던 까닭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였다.

 

장보관(章甫冠)

() 나라 때 쓰던 모자로(子路), 흔히 선비들이 쓰는 관을 말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 나라 사람 중에 장보관을 사 가지고 월() 나라로 팔러 간 사람이 있었는데, 월 나라 사람들은 모두 단발(斷髮)을 하고 문신(文身)을 새겼으므로 소용이 없었다.” 하였다.

 

장본(獐本)

술그릇의 하나로 모양이 도고(鼗鼓)와 같이 생겼는데 배()에 입이 있다.

 

장봉(藏鋒)

날카로운 칼끝을 감추다라는 말로, ‘서법(書法)의 하나 재능을 감추고 밖에 드러내지 않다 글씨를 쓸 때에 붓끝이 드러나지 않게 쓰는 법을 말한다.

 

장봉의마(莊蓬倚麻)

쑥대가 삼 속에서 자라면 자연히 곧아진다는 뜻이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쑥대가 삼 속에서 자라면 자연히 곧아지고, 흰 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면 똑같이 검어진다.”고 하였다.

 

장부(醬瓿)

쓸모없는 저서(著書)는 장독이나 덮는다는 말로, 서투르게 지은 시문(詩文)을 버린다는 뜻이다. 한서(漢書)』 「양웅전(揚雄傳)()후파(侯芭)가 늘 웅에게 태을법언(太乙法言)을 배웠다. 유흠(劉欽)이 그것을 보고 웅에게 부질없이 괴로울 뿐이다. 아마도 후세 사람들이 장독이나 덮으려 할 것이다.’ 했다.”는 말이 있다.

 

장부계(壯夫戒)

양웅(揚雄)법언(法言)』 「오자(吾子), “동자들 잔재주 부리는 짓을 장부(壯夫)라면 하지 않는다.” 하였다.

 

장부일언중천금(丈夫一言重千金)

장부(丈夫)의 한 마디는 천금보다 무겁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

 

장비(將非)

장불(將不)ㆍ장무(將無) 등과 같은 용법으로 혹시(거의, 어쩌면, 아무래도)아닌 듯 하다의 뜻이다.

 

장비뇌만(腸肥腦滿)

시상(詩想)이 한창 활발한 젊은 때를 말한다.

 

장빈(漳濱)

와병(臥病)을 뜻하는 시어이다. 삼국 시대 위() 나라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하나인 유정(劉楨)내가 고질병에 한번 걸려들어, 맑은 장수 물가에 몸을 숨겼노라[余嬰沈痼疾 竄身淸漳濱].”라는 표현을 쓴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문선(文選)23 증오관중랑장(贈五官中郞將)

 

장빈봉수제(漳濱逢水帝)

장빈(漳濱)은 장수(漳水)의 물가로, 병들어 누워 있는 곳을 말한다. 수제(水帝)는 물의 신인 전욱(顓頊)인데, 그의 아들 둘이 죽어서 역귀(疫鬼)가 되어, 하나는 강수(江水)에 살면서 학귀(虐鬼)가 되었고, 하나는 약수(若水)에 살면서 망량귀(魍魎鬼)가 되었다고 한다.

 

장빈시(漳濱詩)

벼슬에서 물러나 시골에 누워 있는 병자(病者)의 심회를 읊은시를 말한다.

 

장빈질(漳濱疾)

장수(漳水)는 중국 복건성(福建省)에서 발원하는 강이름인데, 삼국시대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유정(劉楨)이 한때 병이 들어 그곳에 물러가 살았다고 한다. 그의 증오관중랑장시(贈五官中郞將詩)나는야 해가 묵은 고질에 걸려, 장수 가에 물러가 살았었다네[余嬰沈痼疾 竄身淸濱].” 하였다. 문선(文選)卷二十三 贈答

 

장사(張槎)

사신이 탄 배를 말한다. () 나라 무제(武帝)장건(張騫)으로 하여금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다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고 한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장사(長史)

() 나라 때 대장군 왕돈(王敦)의 주부(主簿)를 지냈던 하충(何充)을 가리킨다. / 유의어: 유담경양(劉惔傾釀)

 

장사(長沙)

한 문제(漢文帝) 때 장사왕(長沙王) 태부(太傅)로 쫓겨난 가생(賈生) 즉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가의(賈誼)가 장사(長沙)에 좌천되어 갔으므로 귀양살이를 장사라 한다.

무장현(茂長縣)의 고호이다.

 

장사기불평(壯士氣不平)

두보(杜甫)의 시에 장사들은 피눈물로 서로들 쳐다보고, 충신은 울분에 마음 편치 못했어라[壯士血相視 忠臣氣不平].”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16 八哀詩 贈左僕射鄭國公嚴公武

 

장사비습(長沙卑濕)

한 문제(漢文帝) 때 가의(賈誼)가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던 고사에 연유하여, 유배되거나 좌천된 지역을 뜻하게 되었다.

 

장사일세천(長沙一歲遷)

장사(長沙)는 한 나라 때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를 지낸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제자 백가를 통달하여 20여 세 때 박사(博士)로 있으면서 문제(文帝)가 조령(詔令)을 내려 어떤 일에 대한 의견을 물을 때마다 다른 노선생들이 엄두도 못내는 것을 빠짐없이 대답하자, 문제가 그 재주를 인정하여 1년 사이에 태중대부(太中大夫)에까지 승진하였다. 사기(史記)卷八十四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장사재자적상류(長沙才子吊湘纍)

() 나라 때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였던 가의(賈誼)가 모함을 받고 쫓겨난 뒤 상수(湘水)를 건널 때 백여 년 전 멱라(汨羅)에 빠져 죽은 굴원을 애도하면서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은 것을 말한다.

 

장사태식(長沙太息)

한 문제(漢文帝) 때 권신(權臣)의 배척을 받아 장사왕(長沙王)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던 가의(賈誼)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때 불길한 새라고 여겨지던 올빼미가 방 안에 날아든 것을 보고 비탄에 잠겨 지은 그의 복조부(鵩鳥賦)’가 유명하다. 사기(史記)』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장사투가의(長沙投賈誼)

() 나라 때 가의가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있다가 참소를 입어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좌천되었던 것을 가리킨다.

 

장산(章山)

경산(慶山)의 고호(古號)이다.

 

장삼영(張三影)

()의 장선(張先)을 말한다. 그가 읊은 시구 중에, ‘()’ 자가 든 시구 셋이 걸작이라 하여 사람들이 그를 삼영(三影)이라고 지목하였다. 통산청화(通山淸話)

 

장삼이사(張三李四)

장씨(張氏) 의 삼남(三男)와 이씨(李氏)의 사남(四男)이란 뜻으로 평범한 사람을 가리킨다.

 

장상(將相)

고려 시대 장군(將軍) 이하 별장(別將) 이상의 군관(軍官)을 일컫던 이른다. 중랑장(中郞將), 낭장(郎將)이 포함되었다.

 

장상(張相)

()의 장열(張說)을 말한다. 일찍이 요숭(姚崇)과의 혐의가 있어 상주 자사(相州刺史)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장상군(長桑君)

전국(戰國) 시대에 신인(神人)인 장상군이 편작(扁鵲)에게 약()을 주면서 이 약을 이슬에 타서 30일 동안 복용하면 귀물(鬼物)도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飮是以上池之水, 三十日當知物矣].” 하므로 편작이 그의 말대로 그 약을 복용한 결과, 과연 눈이 매우 밝아져서 담장 너머에 있는 사람까지 환히 보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卷一百五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

 

장상동심(將相同心)

한 고조(漢高祖)가 죽자 여씨(呂氏)가 왕이 되려 하므로 육가(陸賈)가 승상(丞相) 진평(陳平)에게 장상이 조화가 되어야 하오.” 하니, 진평이 그의 말대로 태위(太尉) 주발(周勃) 등과 여씨의 세력을 제거한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97 역생육고열전(酈生陸賈列傳)

 

장상사(長相思)

악부(樂府)의 편명인데, 이 곡은 길이 서로 생각하는 것을 주제로 한 것이다. 36자 또는 1백 자 또는 103자로(子路)되어 있다. 사율(詞律)卷二

 

장상인(張相印)

개원(開元) 11년에 장열(張說)이 상주(上奏)하여 정사당(政事堂)을 고쳐 중서문하(中書門下)라 불렀고, 정사당의 인()도 중서문하의 인으로 고쳤는데, 이는 중서문하의 관인(官印)을 가리킨 말이다.

 

장상인(張相印)

장상(張相)은 전국 때 진() 장의(張儀)인데, 그가 소진(蘇秦)의 합종(合從)을 깨뜨린 연횡(連衡)의 공으로 상()이 되었고, 그가 죽은 뒤에 서수(犀首)가 입상(入相)하여 인()을 찼다.

 

장상주(掌上珠)

손에 쥔 구슬이라는 뜻으로, 전하여 사랑하는 자식을 가리킨 말이다.

 

장생(鵬鷃)

대붕(大鵬)과 척안(斥鷃). 대붕은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큰 새, 척안은 메추라기와 같은 작은 새로서, 각각 대소(大小)를 나타낸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장생(莊生)

장자(莊子)인 장주(莊周)이다.

 

장생곤(莊生鯤)

장생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장주(莊周)를 가리킨다. 그가 지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북쪽 바다에 곤어라고 하는 큰 고기가 있는데, 크기가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으며 다시 붕새()로 화하여 9만 리 창공을 난다.” 하여 우언(寓言)으로 뜻이 높은 자신을 비유하였다.

 

장생기오인간세(莊生寄傲人間世)

장생은 장주(莊周)를 이르는데, 그가 그의 저서인 장자(莊子)에서 우언(寓言)과 황당무계한 말들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한 말이다.

 

장생식미(張生識微)

장생은 진() 나라 때의 장한(張翰)을 가리킨다. 장한은 일찍이 대사마 동조연(大司馬東曹掾)이 되었다가, 가을 바람이 일어남을 보고는 자신의 고향인 오중(吳中)의 순채국(蓴鱸)과 농어회(鱸魚膾)를 생각하여 말하기를 인생은 자기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중요한데, 어찌 수천 리 밖에서 벼슬하면서 명예와 작위를 구하겠는가.” 하고, 즉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가버렸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卷九十二

 

장생월음(莊生越吟)

고향을 그리워함을 말한다. 장생(莊生)은 월() 나라 장석(莊舃)을 가리키는데, 장석이 초() 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병이 들었을 때, 초왕(楚王)이 사람을 시켜 그가 고향을 생각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게 한 결과, 그는 병중에도 과연 고향을 생각하여 월 나라 노래를 하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진진전(陳軫傳)

 

장생자감위저산(莊生自甘爲樗散)

볼품 없고 쓸모 없는 물건이 생명이 길다는 장주(莊周)의 논리. 혜자(惠子)가 장자(莊子)에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남들이 가죽나무라고 하는 큰 나무가 있는데, 그 몸통이 울퉁불퉁 옹이가 많아 목재로 쓰기에 맞지 않고 가지들도 오글오글하여 쓸모가 없으므로 길가에 있어도 장인(匠人)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오⋯⋯하자, 장자(莊子)가 답하기를, “⋯⋯그 나무를 무하유(無何有)의 고장 광막한 들판에다 심어두고 그 곁에서 거닐고 그 밑에서 눕고 하면 도끼에 의하여 중도에 잘려지지도 않을 것이며 해치는 물건도 없을 것 아닌가⋯⋯하였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장생자시희지리(莊生自是喜支離)

장생(莊生)은 장자(莊子)이다. 지리소(支離疏)는 꼽추와 같은 불구자로서 세상에서 치지도외 되어 해를 받지 않고 몸을 온전히 보전하는 자를 말한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

 

장생전(長生殿)

당나라 때에 장생전에 공신의 화상을 그렸다.

 

장생제물론(莊生齊物論)

장생(莊生)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장주(莊周)를 말하고, 제물론은 장주의 저서인 남화경(南華經) 2(第二篇)의 이름이다. 장자(莊子)

 

장생춘(莊生椿)

장생은 곧 장주(莊周)를 이르는데, 그의 저서인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상고 시대에 대춘(大椿)이란 나무가 있어 8천 년을 봄으로 삼고, 8천 년을 가을로 삼았다.”고 한 데서 온 말로, 즉 장수를 비유한 말이다.

 

장생해수(張生解綬)

() 나라 장한(張翰)을 말한다. 동조연(東曹掾)으로 벼슬살이를 하던 중,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오중(吳中)의 순채(蓴鱸)와 농어회가 생각나서 곧바로 인끈을 풀고 고향으로 돌아간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92

 

장생허주(莊生虛舟)

장자(莊子)』 「산목(山木)편에, “방주(方舟)를 하여 하()를 건널 적에 빈 배가 와서 이쪽 배를 부딪치면, 아무리 성급한 사람일지라도 성내지 아니하니, 사람이 능히 허기(虛己) 하여 세상에 노닌다면, 그 누가 해치려고 하겠느냐?”라고 하였다.

 

장서(葬書)

장지(葬地)에 관한 책으로, 곽박(郭璞)의 저()이다.

 

장서(掌誓)

민간에서 맹세할 때 손뼉을 쳐서 신용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손뼉을 쳐서 맹세를 한다[擊掌爲誓].’라 한다.

 

장서선(掌書仙)

문재(文才)가 있는 기녀(妓女)를 비유한 말이다. 상원은 선녀(仙女)인 상원부인(上元夫人)을 가리키고, 문서 맡은 신선이란, 옛날 장안(長安)의 한 기녀가 문필(文筆)이 관중(關中)의 제일이었으므로 당시에 그를 문서 맡은 신선(掌書仙)’이라 호칭했던 데서 온 말인데, 임생(任生)은 그에게 시를 지어 부치기를 옥황전 위에서 문서를 맡던 신선이, 한번 세속 마음에 물들어 구천을 내려왔네[玉皇殿上掌書仙 一染塵心下九天].”라고 했다 한다.

 

장석(丈席)

스승의 강석(講席)을 말한다. 예기(禮記)곡례상(곡례(曲禮))스승과 제자 자리 사이에 한 길의 여지를 둔다[席間函丈].” 하였다.

 

장석(匠石)

()은 장인(匠人)을 말하며, ()은 옛날 유명한 장인의 이름이므로 합하여 훌륭한 장인을 말한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 땅 사람이 백토가루를 코 끝에 매미 날개처럼 얇게 바르고는 장석을 시켜 깎아내게 하였더니, 장석은 자귀를 돌리어 바람을 일으켜서 코를 상하지 않게 백토를 모두 깎아냈다.” 하였다.

()나라의 유명한 목공(木工)

 

장석병(莊舃病)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사람으로 초() 나라에 가서 벼슬하다가 병이 나서는 고국 생각을 하였다 한다. 사기(史記)70 장의열전(張儀列傳)

 

장석사향련(莊舃思鄕戀)

장석(莊舃)은 월() 나라 사람으로 초() 나라에 와서 현달하였다. 초왕(楚王)장석은 월 나라 사람인데, 지금도 월 나라를 그리워하는가?”하니, 중사(中使)가 아뢰기를, “대개 사람이 병이 들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법입니다. 장석이 월 나라를 그리워한다면 월 나라의 소리로 신음할 것이고, 월 나라를 그리워하지 않는다면 초 나라의 소리로 신음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초왕이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니, 장석이 과연 월 나라의 소리로 신음하였다. 사기(史記)70 장의열전(張儀列傳)

 

장석음(莊舃吟)

고향을 생각하고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부르는 슬픈 노래를 말한다. 전국시대(戰國時代) 때 월() 나라 사람 장석(莊舃)이 초() 나라에서 벼슬하여 높은 관직에 올라 부귀를 누리게 되었으나, 고국을 잊지 못하여 병중에도 월 나라의 노래를 불러서 고향을 그리는 정을 부쳤다. 사기(史記)70 장의열전(張儀列傳)

 

장성(長城)

사물(事物)의 가장 의뢰할 수 있는 것을 이른다. () 나라 장수 단도제(檀道濟)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자처하였다.

 

장성(長星)

혜성(彗星)의 일종으로 빛나는 긴 꼬리를 끌고 해를 중심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운행하는 별로, 예로부터 병란(兵亂)을 예고하는 요성(妖星)이라 하여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종류에 따라 패()ㆍ혜()ㆍ참창(欃槍)ㆍ치우기(蚩尤旗)ㆍ순시(旬始)ㆍ왕시(枉矢) 등으로 나뉘었다. 한서(漢書)文帝紀 注說苑 辨物

 

장성계운(長星繼隕)

소열(昭烈)이 죽은 뒤에 제갈량(諸葛亮)이 후주(後主)를 도와 중원(中原)을 수복(收復)하려고 위() 나라를 치다가 오장원(五丈原) 진중(陣中)에서 병이 들어 50여 세로 죽었는데, 그 때에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 얼마 후에 촉한(蜀漢)은 망하고 말았다.

 

장성괴(長城壞)

국가의 동량(棟樑)인 인물이 사망했음을 말한다. () 나라 명장 단도제(檀道濟)는 죄 없이 형을 받게 되자, 노기가 충천하여 마침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하였다. 남사(南史)』 「단도제전(檀道濟傳)

 

장성만리(長城萬里)

송나라 명장(名將) 단도제(檀道濟)가 참소로 죽임을 당하면서, “너의 만리장성을 무너뜨리는구나.” 하였다.

 

장성태백(長星太白)

장성(長星)은 살별이고 태백성(太白星)은 샛별인데, 모두 병란(兵亂)을 상징하는 별이다.

 

장소(張昭)

삼국 시대(三國時代) () 나라 사람으로 손권(孫權)의 밑에서 보오장군(輔吳將軍) 등을 지냈는데, 일찍이 손권이 자기의 간언(諫言)을 들어주지 않는 데에 분심을 품고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자, 손권 또한 그가 조정에 나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그의 문()을 흙으로 막았더니, 그는 또 그 안에다 흙더미를 더 쌓았다는 고사가 있다. 즉 그의 성격이 괴팍하고 고집스러웠음을 의미한 듯하다.

 

장소(張所)

() 나라 사람. 고종(高宗) 때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어 황잠선(黃潛善)과 왕백언(汪伯彦)의 간사함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강주(江州)로 귀양갔다. 그 뒤 승상 이강(李綱)의 천거로 하북초무사(河北招撫使)가 되자, 장소는 사방의 호걸들을 모아 상실한 국토 수복의 계획을 하였으나, 이강이 승상에서 파직되자 그도 파면되어 영남(嶺南)에 안치, 거기에서 여생을 마쳤다.

 

장소(莊騷)

장자(莊子)굴원(屈原)의 이소(離騷).

 

장소(長嘯)

()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이 일찍이 소문산(蘇門山)에서 손등(孫登)을 만나 신기(神氣)를 수양하는 방법 등을 물었으나 손등이 모두 응답하지 않자 완적이 길게 휘파람을 불며 물러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卷四十九 완적전(阮籍傳)

 

장송탁여라(長松托女蘿)

형제와 친척들이 모두 모여 잔치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소나무에 여라(女蘿)가 타고 오른다는 것은 곧 형제 친척이 서로 의지함을 비유한 것으로, 형제 친척이 모여 잔치한 것을 노래한 시경(詩經)소아(小雅) 기변(頍弁)우뚝한 관이여 그것이 무엇인고 네 술이 이미 맛 좋고 네 안주가 아름다우니 어찌 다른 사람이리오 형제이고 다른 사람 아니로다 조와 여라가 송백에 타고 오르도다[有頍者弁 實維伊何 爾酒旣旨 爾殽旣嘉 豈伊異人 兄弟匪他 蔦與女蘿 施于松柏].” 한 데서 온 말이다.

 

장송풍일(長松風日)

소식(蘇軾)이 일찍이 여산 백학관(白鶴觀)에서 노닐 때 관 안의 사람들은 다 문을 걸고 잠을 자는데 바둑 두는 소리가 고송 유수(古松流水)의 사이에서 들려오므로 시를 지어 이르기를 五老峯前 白鶴遺址 長松蔭庭 風日淸美라 하였다.

 

장수(張䇓)

()의 도강(導江)사람. 왕백(王柏)에게서 배우고 종유자가 매우 많아 도강 선생(導江先生)이라고 불렀다. 그의 저서는 논리가 정확하고 전거가 분명했으며 논의가 종횡무진하여 오징(吳澄)은 그를 일러, 신안 주씨(新安朱氏)의 시축(尸祝)이라고 하였다. 원사(元史)卷一百八十九

 

장수(莊叟)

장자(莊子)를 가리킨 말로, 장자(莊子)의 저서에는 특히 인간의 생사(生死)에 관한 말이 많이 하였다.

 

장수(漳水)

물 이름으로, 삼국(三國) 시대 유정(劉楨)이 고질이 있어 이곳에 가서 요양을 했다 한다.

 

장수(藏脩)

조용한 곳에서 포부를 감추고, 공부를 닦는다는 말인데 예기(禮記)에서 나온 말이다.

 

장수거지어(莊叟詎知魚)

장자(莊子)가 혜자(惠子)와 함께 호량(濠梁)에서 고기가 노는 것을 보다가 말하기를, “피라미(鯈魚)가 조용히 나와 노니 이것은 고기의 낙()이로다.” 하니, 혜자가 말하기를, “자네가 고기가 아닌데 어찌 고기의 낙을 아는가.” 하였다. 장자(莊子), “자네는 내가 아닌데 내가 고기의 낙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어찌 아는가.” 하였다. 장자(莊子)』 「추수(秋水)

 

장수동(張瘦銅)

수동(瘦銅)은 장훈(張塤)의 호인데 청 나라 오현(吳縣) 사람으로 자는 상언(商言)이다. 건륭 때 진사로 벼슬은 내각중서(內閣中書)이다. 저술로는 죽엽암집(竹葉庵集)이 있다.

 

장수마(莊叟馬)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나의 엉덩이는 수레바퀴로 변화하고 나의 정신()은 말()로 변화한다.” 하였다.

 

장수선무(長袖善舞)

긴 소매는 춤을 잘 춘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도 조건이 좋은 사람이 유리하다는 말이다. 한비자(韓非子)』 「오두(五蠹)

 

장수선무 다전선고(長袖善舞多錢善賈)

조건이 좋은 사람이 성공하기도 쉽다. 한비자(韓非子)』 「오두(五蠹)

 

장수양(張睢陽)

() 나라 때 장순(張巡)을 가리킨다. 장순이 수양성(睢陽城)을 지키면서 안녹산(安祿山)의 군대와 싸웠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장수유(莊叟柳)

장수는 곧 장주(莊周)를 말하는데, 장자(莊子)』 「지락(至樂)조금 있다가 그 왼팔뚝에 유()가 생겼다[俄而柳生其左肘].”고 하였는데, 주소(註疏)()는 류() 자와 음()이 같으므로, []으로 풀이한다라고 하였다.

 

장수유식(藏修游息)

장수는 항상 게을리함이 없이 학문을 수습(修習)하는 것을 말하고, 유식은 정과(正課) 이외의 휴식 시간에도 항상 학문에 마음을 두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악기(樂記)

 

장수충비(莊叟蟲臂)

장수는 곧 장주(莊周)를 가리키는데,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자래(子來)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자려(子犁)가 문병가서 자래에게 말하기를 조화옹(造化翁)은 자네를 또 무엇으로 만들려는고? 자네를 장차 쥐의 간으로 만들려는가, 아니면 벌레의 팔로 만들려는가?’고 했다.” 한 데서 온 말로, 즉 만물의 타고난 형체가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모두 제 역할이 있음을 의미한 말이다.

 

장순(張巡)

() 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이다. 천보(天寶) 연간에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처음에 진원 영(眞源令)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인솔하고 당 나라의 시조인 현원황제(玄元皇帝)의 묘()에 나아가 통곡한 다음 기병(起兵)하여 반란군을 막았다. 그 뒤에는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인 수양성을 몇 달 동안 사수하고 있었는데, 구원병이 오지 않아 양식은 다 떨어지고 힘은 다 소진되어 성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태수(太守)로 있던 허원(許遠)과 함께 사절(死節)하였다. 구당서(舊唐書)187충의열전(忠義列傳)張巡

 

장순원(張順院)

중종때 장순손(張順孫)이 판서(判書)의 지위에 있으면서 광주(廣州)에 외람되이 원을 짓고 신원(新院)’이라 이름하였는데, 지나는 행인마다 장순손의 위인을 비루하게 여겨 신원을 그의 이름에 빗대서 장순원이라고 기롱해 부른 말이다.

 

장신(臟神)

오장신(五臟神)을 말한다. 도교(道敎)에서는 심()ㆍ폐()ㆍ간()ㆍ신()ㆍ비()의 오장을 각각 주관하는 신이 있다고 주장한다.

 

장신초(長信草)

한 성제(漢成帝)의 궁녀 반첩여(班倢伃)가 조비연(趙飛燕) 자매에게 미움을 받아 장신궁(長信宮)에 물러가 있던 고사를 읊은 시로, 전문은 다음과 같다. “長信宮中草 年年愁處生 時侵珠履跡 不使玉階行

 

장실(丈室)

유마경(維摩經)에 있는 말인데, 유마거사(維摩居士)가 거처하는 방이 사방(四方)으로 한발(一丈)이므로, 그 방을 방장(方丈), 또는 장실(丈室)이라 한다. 뒤에 고승(高僧)의 거처하는 방을 그렇게 부른다.

 

장실망언시법문(丈室忘言是法門)

유마 거사가 대승 보살들 앞에서 시현(示現)한 중도(中道)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말한다. 유마경(維摩經)』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無有文字語言 是眞不二法門也라 하였다.

 

장실봉산(藏室蓬山)

모두 장서실을 가리킨다. 후한 때 장서실인 동관(東觀)을 가리켜 노씨장실(老氏藏室)ㆍ도가봉래산(道家蓬萊山)이라 일컬은 데서 온 말인데, 즉 노씨장실은 옛날 노자(老子)가 장실주하사(藏室柱下史)를 지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도가봉래산은 곧 봉래산의 선부(仙府)에는 유경 비록(幽經祕錄)이 다 쟁여져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후한서(後漢書)卷二十三

 

장심(漳潯)

유정의 시에 내가 고질병에 모질게 걸려들어, 맑은 장수 물가에 숨어서 살았노라.(余嬰沈痼疾 竄身淸漳濱)”라는 구절이 있는데, 문인의 병을 일컬을 때 흔히 공간병(公幹病)’이 거론된다.

 

장심문(將心問)

달마조사(達摩祖師)가 소실산(少室山)에 있을 때에 혜가(惠可)가 와서, “마음이 불안하니 편안케 하여 주소서.” 하고 물은즉, 달마(達摩), “마음을 가져오너라. 너를 안심시켜주마[將心來與汝安].”하였다.

 

장씨득금(張氏得金)

비둘기를 구한 줄 알았던 장씨는 구리 갈고리를 얻게 됐고 그걸 허리에 차자 승승장구했지만 잃어버리자 망하게 됐다. 몽구(蒙求)』 「장씨동구(張氏銅鉤)/ 인용: 梁四龍傳(이기발)

 

장씨지족(張氏知足)

장량(張良)이 한() 나라 고조(高祖)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유후(留侯)로 봉해졌으나, 만년에 즐겨 신선 벽곡(辟穀)의 술을 배웠다.

 

장악(莊嶽)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수도(首都)의 이름으로, 전하여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번화한 곳을 이른다.

 

장안교환(長安巧宦)

벼슬살이의 처세에 교묘하여 잘 승진되는 것이다.

 

장안미(長安米)

서울에 올라가 벼슬을 구한다는 의미다. ()백거이(白居易)가 약관 시절에 고황(顧況)이라는 이를 찾아가 인사를 올렸더니 그는 백거이의 성명을 한참 보더니만 하는 말이, “장안에는 쌀이 귀해서 살기가 매우 쉽지 않을 것이네[長安米貴 居大不易].” 하였다. 전당시화(全唐詩話)/ 인용: 酒吃翁夢記(허균)

 

장안살불오(莊雁還宜殺不嗚)

장안(莊雁)장자(莊子)』 「산목(山木)에 나오는 기러기. 장자(莊子)가 친구의 집을 찾으니 친구는 기뻐하여 종에게 기르는 기러기를 잡아 대접하라 하였다. 종은 하나는 잘 울고 하나는 잘 울지 못하는데, 어떤 놈을 잡아야 합니까?[其一能鳴, 其一不能鳴, 請奚殺]’ 하고 묻자, 주인은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 했다는 말에서 온 것이다.

 

장안십일니(長安十日泥)

한번 비가 오기만 하면 열흘 동안 진흙탕이 되는 서울 거리를 말한다. 두보(杜甫)의 시에 長安秋雨十日泥 我曹鞴馬聽晨雞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14 狂歌行贈四兄

 

장안와설인(長安臥雪人)

후한(後漢)의 원안(袁安)을 말한다. 원안이 곤궁했을 때 낙양(洛陽)에 큰 눈이 내려 한 길이나 쌓였었는데, 남들은 다 허기진 창자를 메우기 위하여 구걸행각을 하였으나 원안은 홀로 그 눈속에 반듯이 누워 일어나지 않았음. 후한서(後漢書)卷七十五

 

장안총죽(長安叢竹)

() 나라 백거이(白居易)가 처음 벼슬길에 올라 장안(長安)에 우거할 때 그 집에 있는 대숲이 돌보는 사람이 없어 황폐한 채 버려져 있는 것을 보고 잘 손질한 다음 양죽기(養竹記)란 글을 지어 대나무를 현인에 비유하였다. 고문진보(古文眞寶)後集 양죽기(養竹記)

 

장안추우니막막(長安秋雨泥漠漠)

두보(杜甫)의 시에 장안의 가을비에 열흘이나 질퍽질퍽, 새벽 닭 울 때에 우리들 말 안장 얹었지요[長安秋雨十日泥 我曹鞴馬聽晨雞].”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14 狂歌行贈四兄

 

장야(長夜)

영원히 깜깜한 땅속 무덤을 말한다.

 

장야유천이운주(長夜幽泉已隕珠)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말한다. 구슬은 사랑하는 아내를 이른 것으로, 부현(傅玄)의 단가행(短歌行)전에는 그대가 나를 손에 쥔 구슬처럼 사랑하더니 무슨 뜻으로 하루아침에 나를 도랑에 버리는가[昔君視我 如掌中珠 何意一朝 棄我溝渠]”하였다.

 

장야지음(長夜之飮)

날이 새어도 창을 가리고 불을 켜논 채 계속하는 주연(酒宴)을 말한다.

 

장양(長楊)

궁전(宮殿)의 이름, 본래 진() 나라의 옛 궁전인데, () 나라에서 수리하여 행행(行幸)할 때 사용하는 장소로 삼았다.

 

장양궁(長楊宮)

() 나라의 옛 궁궐이었는데, () 나라가 중수(重修)하여 사용하였으며, 한 나라의 역대 황제들은 이 궁에서 수렵을 많이 하였다. 한 나라 때 양웅(揚雄)은 일찍이 왕을 호종(扈從)하여 이 장양궁의 사웅관(射熊館)에 가서 장양부(長楊賦)를 지어 임금을 풍간(諷諫)한 일이 있다.

 

장양부(長楊賦)

성제(成帝)가 원연(元延) 2년 가을 백성들을 동원시켜 남산(南山)ㆍ포()ㆍ사()등 계곡과 홍농(弘農)ㆍ한중(漢中) 지방까지 돌아다니며 그물로 짐승을 사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로잡은 곰ㆍ멧돼지ㆍ표범ㆍ여우ㆍ사슴 등 각종 짐승을 행궁(行宮)인 장양궁의 석웅관(射熊館)에 운반하여 그것들을 울타리 안에 몰아넣고 호인(胡人)으로 하여금 맨손으로 때려잡도록 한 뒤에 그 광경을 구경하며 즐겼다. 양웅(揚雄)이 성제를 따라 석웅관에 왔다가 돌아가서 묵객경(墨客卿)과 한림주인(翰林主人)이란 가공인물을 등장시켜 문답체로 만들어진 글로, 천자를 풍간한 것이다. 한서(漢書)卷八十七下 양웅전(揚雄傳)

 

장양헌부옹(長楊獻賦翁)

한나라의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장양부(長楊賦)라는 부를 지었다.

 

장어민(藏於民)

인정(仁政)을 하는 임금은 재물을 국고(國庫)에 저장하여 두는 것보다 백성이 잘 사는 그것이 곧 나라의 재물을 백성에게 저장하여 둠이 된다는 것이다.

 

장열(張說)

당 현종(唐玄宗) 때의 문장가이며 정치가.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고 연국공(燕國公)이 봉해졌다. 당시 허국공(許國公) 소정(蘇頲)과 연허대수필(燕許大手筆)이라 칭해졌으며, 조정의 큰 편찬 사업이 거의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음. 저서에는 장열공집(張說公集)이 있다. 신당서(新唐書)구당서(舊唐書)』 「장열전(張說傳)

 

장영(長纓)

적을 사로잡아 묶는 긴 밧줄을 말한다. () 나라 때 남월왕(南越王)을 입조(入朝)하게 하기 위해 남월로 사신을 보낼 적에 종군(終軍)이 자청하기를 바라건대 긴 끈을 주옵소서. 제가 반드시 남월왕을 묶어 궐하에 끌어오겠습니다.” 하였다. 한서(漢書)卷六十四 종군전(終軍傳)

 

장영불사공하대(莊靈不死公何代)

제 경공이 우산(牛山)에서 놀다가 제 나라를 바라보며 아름답도다 이 나라여, 울창한 태산(泰山)은 예부터 죽음이 없는데 나만 죽어서 여기를 떠나겠구나.” 하자, 곁에 있던 안자(晏子)가 비웃으며 장공(莊公)ㆍ영공(靈公)이 죽지 않았다면 임금께서 어떻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불인(不仁)입니다.” 하였다.

 

장영사계노추두(長纓思繫老酋頭)

() 나라 간의대부(諫議大夫) 종군(終軍)이 남월(南越)에 사신으로 가겠다고 자청하면서 긴 밧줄 하나만 주시면 남월왕을 꽁꽁 묶어 대궐 아래에 바치겠다[願受長纓 必羈南越王而致之闕下].”고 장담한 고사가 전한다. 한서(漢書)64 종군전(終軍傳)

 

장영지(長纓志)

장영(長纓)은 긴 노끈이라는 뜻으로, () 나라 때 종군(終軍)이 왕에게 자청하기를 원컨대 저에게 긴 노끈을 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제가 남월왕(南越王)의 목을 묶어서 대궐 아래 바치겠습니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자원하여 입대(入隊)하는 데 비유한 말이다. 한서(漢書)卷六十四 종군전(終軍傳)

 

장오(檣烏)

()를 말한다. 까마귀가 물길을 잘 안다 하여 배 돛대에 그려 붙이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후풍(候風)의 용도로 쓰이는 새의 깃으로 만든 까마귀. 이것을 돛대 위에 장치하였으므로, 장오라 한다.

 

장옥(場屋)

과거 시험장을 말한다.

 

장옹(莊翁)

장주(莊周)를 이른 말이다.

 

장왕(長往)

멀리 가서 영원토록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은사(隱士)들의 은거를 의미한다. 공치규(孔稚珪)북산이문(北山移文)장왕했던 유인을 탄식한다[或歎幽人長往].” 하였다.

 

장왕(張王)

북망행을 지은 진() 나라 장협(張協)과 당() 나라 왕건(王建)을 말한다.

 

장외(墻外)

담장 밖을 말한다.

 

장요미(長腰米)

몸통이 좁으면서 긴 쌀로, 질이 좋은 쌀을 가리킨다.

 

장요손사자(張曜孫四姊)

장요손은 청 나라 양호(陽湖) 사람. 자는 중원(仲遠). 호는 부생(復生). 원문의 四姊三姊의 오()인데, 녹괴서옥시고(綠槐書屋詩稿)가 있다. 서에도 능하였는데 특히 육조체(六朝體)를 잘 썼다.

 

장용대(壯勇隊)

함경도에서 공사천 중의 인원을 선발하여 변방 수비에 보낸 자들에게 이 명칭을 붙여 토병(土兵)들과 구분하였다.

 

장우(張禹)

() 나라 성제(成帝) 때에 당시 외척(外戚) 왕씨(王氏)가 전정(專政)하였는데 장우(張禹)는 감히 곧은 말을 못하고 아첨하는 말을 하였다. 주운(朱雲)이 그를 탄핵하다가 난간까지 꺾은 일이 있다.

 

장욱(張旭)

당대의 서예가. 자는 백고(伯高)로 초서(草書)가 교묘했는데, 술을 좋아하여 머리털에다 먹을 묻혀 미친 듯이 초서를 썼으므로 장전(張顚)’이라고 불렸다. 당서(唐書)卷二百二

 

장욱필(張旭筆)

당 나라 때 장욱이 초서에 매우 뛰어나, 문종(文宗) 때에 이백(李白)의 가시(歌詩), 배민(裵旻)의 검무(劍舞)와 함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는데, 당시에 장욱을 초성(草聖)이라고까지 하였으므로 이름이다. 당서(唐書)卷二百二 장욱전(張旭傳)

 

장원백(壯元柏)

성균관(成均館) 서쪽 뜰에 있던 잣나무. 과거(科擧)를 앞둔 어느 날 세종(世宗)의 꿈에 한 마리의 용()이 그 나무에 사려 있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긴 끝에 궁노(宮奴)를 시켜 그곳에 가보게 하였더니 어느 선비가 전대를 베개 삼아 잣나무 가지에다 발을 걸친 채 자고 있었는데 그 후 과거를 치르고 방()을 부를 때 장원(壯元)을 한 최항(崔恒)의 얼굴이 바로 그 얼굴이었으므로 그때부터 그 잣나무를 장원백(壯元柏)이라 불렀다.

 

장원수(張元帥)

장만(張晩, 1566~1629)을 가리킨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ㆍ이호주인(梨湖主人),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1591(선조24) 별시 문과에 합격하여 정언, 지평, 봉산 군수(鳳山郡守), 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주청부사(奏請副使)로서 두 차례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전라도와 함경도의 관찰사, 평안병마절도사, 형조와 병조의 판서 등을 지냈으며, 이괄(李适)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진무 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집인 낙서집(洛西集)이 전한다.

 

장원정(長源亭)

고려 문종(文宗) 10(1056)에 창건한 이궁(離宮). 현 개풍군(開豊郡) 광덕면(光德面) 유정동(柳井洞) 영좌산(領座山) 남록(南麓)에 유지(遺址)가 있다. 고려 역대의 왕이 자주 그곳에 유행(遊幸)하였다.

 

장원홍(壯元紅)

분꽃인 자말리(紫茉莉)의 이명(異名)이다.

 

장월(杖鉞)

큰 도끼를 짚거나 큰 도끼를 가진다는 뜻으로, 병권(兵權)을 장악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장월회황도(杖鉞恢皇圖)

황도(皇圖)는 제왕(帝王)이 통치하는 판도(版圖)이니, 곧 장군이 부월(鈇鉞)을 잡고 싸움터에 나가 국토를 넓힌 것을 말한다.

 

장위례(杖尉禮)

매 때린 수고에 대해 위로하는 예. 공형(公兄) 즉 호장(戶長), 이방(吏房) 등이 수령에게 장()을 맞으면 그 본청(本廳)에서 수령에게 대향(大饗)을 올렸는데 이를 장위례라 하였다.

 

장위위(張衛尉)

한 고조 때 태중대부(太中大夫), 조우(趙禹)와 함께 율령을 제정했던 장탕(張湯)을 가리킨 듯하다. 위위(衛尉)는 진() 나라 때 궁중의 수비를 담당하는 벼슬 이름인데, 한 나라 때 중대부령(中大夫令)으로 바꿨다가 도로 환원하였다. 장탕은 나중에 정위(廷衛)와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어 옥사를 엄하게 다스리고 국가에서 염철(鹽鐵)을 전매하도록 건의하여 장사꾼의 이익 독점을 제한하는 등, 법을 올바르게 집행하였으나 결국 주매신(朱買臣) 등에게 몰려 자살하고 말았다.

 

장유(長孺)

() 나라 때의 직신 급암(汲黯)의 자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의 하내(河內)에 화재가 나서 천여 가호가 불탔으므로, 급암에게 그 곳을 시찰하도록 하였는데, 급암이 그 곳을 다녀와서 보고하기를 이번 길에 신()이 하남(河南)을 지나다 보니, 빈민(貧民)들이 수재ㆍ한재로 인하여 만여 가호가 혹은 부자(父子) 간에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므로, 신이 편의에 따라 부절(符節)을 가지고 하남의 관곡(官穀)을 풀어서 빈민들을 진구했으니, 조칙을 꾸민 죄를 받겠습니다.” 하니, 무제가 그를 어질게 여겨 용서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卷一百二十 급정열전汲鄭列傳/ ()의 급암(汲黯). 장유는 그의 자()이다. 성품이 우직 호협하고 기절(氣節)을 숭상하여 황제도 그를 대하기 꺼려할 정도로 바른말을 잘했기 때문에 한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하였다. 무제(武帝)는 그를 일러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고 하였다. 한서(漢書)卷五

 

장유강엄만천해(長孺剛嚴曼倩諧)

장유는 한 무제(漢武帝) 때의 직신(直臣) 급암(汲黯)의 자인데, 그는 특히 성품이 강직하고 엄정하여 직간을 잘하기로 명성이 높았고, 만천(曼倩)은 역시 한 무제의 신하인 동방삭(東方朔)의 자인데, 그는 특히 해학과 풍자를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사기(史記)卷一百二十 급정열전汲鄭列傳, 一百二十六 골계열전(滑稽列傳)

 

장유박회양(長孺薄淮陽)

장유는 한() 나라 때의 직신(直臣) 급암(汲黯)의 자인데, 임금이 급암에게 회양태수(淮陽太守)를 임명하자, 급암이 회양에 가기를 싫어하여 내직(內職)을 요청하므로, 임금이 이르기를 경은 회양을 박하게 여기는가?”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卷五十

 

장유유서(長幼有序)

오륜(五倫)의 한 가지로,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지켜야 할 순서가 있다

 

장유입한광대양(長孺入漢光大梁)

장유(長孺)는 한() 나라 때 양 효왕(梁孝王)의 중대부(中大夫)였던 한안국(韓安國)의 자()이다. 한 나라 경제(景帝)가 동모제(同母弟)인 양 효왕을 미워하자, 한안국이 사신으로 들어가서 경제의 마음을 풀어 주고 우애의 정을 돈독하게 했던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108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장유타여(長孺墮輿)

장유(長孺)는 한() 나라 한안국(韓安國)의 자()이다. 그가 승상의 일을 행하다가 수레에서 떨어져 절뚝거렸다는 기사가 있다. 사기(史記)108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장유후(章留後)

()은 장구(章仇)인 복성(複姓)의 약칭이요, 유후(留後)는 절도사(節度使)의 별칭이니, 이는 장구겸경(章仇兼瓊)을 지칭한 것이다. 그는 영천(潁川) 사람으로 검남 절도사(劍南節度使)를 지냈다.

 

장육(丈六)

일장 육척(一丈六尺)이 되는 불상을 말한다.

 

장윤(張允)

오대(五代) 후한(後漢)의 진주(鎭州) 사람. 젊어서는 장문례(張文禮)의 참군(參軍)이 되었고 뒤에 당에 투항, 수부원외랑(水部員外郞)을 지냄. 구오대사(舊五代史)』 「장윤전(張允傳)

 

장읍평원군(長揖平原君)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의 고사(高士)이다. 노중련(魯仲連)이 조() 나라에 가 노닐 적에 조 나라 평원군(平原君)이 그에게 높은 관작을 봉해주려고 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받지 않았던 사실을 가리킨다. 전국책(戰國策)』 「조책(趙策), 사기(史記)』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장응(張鷹)

갈바람이 일자 고향의 순채국ㆍ농어회가 생각이 나서 벼슬을 그만두고 오()로 돌아왔던 진()의 장한(張翰). 자가 계응(季鷹)이다. 진서(晉書)92

 

장의(張儀)

전국(戰國) 시대 위()나라 사람. 유명한 변사(辯士)로서 6국을 유세(遊說)하여 진() 나라를 섬기게 하였다. 합종책(合縱策)으로 6국의 재상을 겸임했던 소진(蘇秦)과 함께 수수께끼의 종횡가인 귀곡 선생(鬼谷先生)에게 종횡의 술책을 배움. 위나라의 재상으로 있다가 진()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임을 받아 진나라의 재상이 됨. 소진이 제()나라에서 살해되자 6국을 순방, 유세(遊說)하여 소진의 합종책을 깨고 연횡책(連橫策)을 성사시켜 6국으로 하여금 개별적으로 진나라를 섬기게 한다. 혜문왕이 죽은 후 참소(讒訴)를 당하여 위나라에서 객사(客死)한다.

 

장이(張弛)

팽팽하게 캥기는 것과 늦추는 것. 성함과 쇠한다. 물이 밀렸다 나갔다 한다.

 

장인(長人)

우대(禹代)의 방풍씨(防風氏)라고 한다. 우왕(禹王)이 제후(諸侯)들과 회견(會見)할 때, 방풍이 늦게 도착한 죄로 봉우산(封隅山)을 지키게 했다고 한다. 국어(國語)에 땅을 파는데 뼈가 나와 수레에 실으니, 한수레 가득한지라 혹자(或者)가 공자에게 물으니. “이것은 옛날 봉우산을 지키던 방풍씨의 뼈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장인사길연희효(丈人師吉演羲爻)

주역(周易)』 「사괘(師卦)의 괘사(卦辭)군사를 쓰는 도는 곧고 발라야 되니, 장인(丈人, 점잖은 장수)이라면 길하고 허물이 없으리라.” 하였다.

 

장인유옹불수기(丈人有甕不須機)

장인은 노인을 지칭한 말이다. 자공(子貢)이 진() 나라로 돌아가다가 한음(漢陰)에서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은 물동이를 안고 우물로 들어가 물은 퍼다가 밭이랑에 물을 주었다. 그런데 힘은 매우 많이 들고 공효는 작아 보이므로, 자공이 그 에게 말하기를, “여기에 기계가 있는데 하루에 백이랑의 물을 댈 수가 있습니다.” 하니, 그 노인은 버럭 성을 냈다가 곧 웃으면서, 기계가 있으면 반드시 꾀를 부리게 되고 꾀를 부리게 되면 반드시 꾀를 내는 마음이 생기어 순박한 천성을 잃게 되는 것이므로 그것을 쓰지 않는다고 거절한 데서 온 말이다. 장자(莊子)』 「천지(天地)

 

장인포옹(丈人抱瓮)

자공(子貢)이 한수(漢水)의 남쪽을 지나가다 보니, 때마침 어떤 노인이 밭이랑을 일구기 위하여 우물을 판 다음, 그곳으로 들어가 물동이를 안고 나와서 밭에 물을 대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노력에 비하여 공효는 매우 보잘것없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천지(天地)

 

장인항(丈人行)

존장자(尊長者)를 일컫는 말인데, () 나라 때 당경(唐庚)이월견매(二月見梅)에 의하면 지금 이미 장인항이 되었는데 어찌 연소배와 춘풍을 다투려 하리오[只今已是丈人行 肯與年少爭春風]”하였다.

 

장자(長者)

()이 있는 노성한 사람을 말한다. / 인용: 회음후열전, 聞隣家哭(송순)

 

장자거(長者車)

() 나라 진평(陳平)이 젊을 때에 가난하게 살았는데, 부인(富人) 장부(張負)가 그를 범상치 않게 보고 그를 따라가 본즉, 오막살이에 떨어진 자리로 문을 달았으나, 문밖에 장자(長者)들이 찾아 왔던 수레바퀴 자국이 많았다. 장부는 진평에게 손녀를 아내 삼아 주었다.

 

장자방(張子房)

자방은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항우(項羽)를 멸망시키고 한() 나라를 세우게 한 장량(張良)의 자()이다. 한 고조가 천하를 평정하고 황제의 위에 오르자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초연히 물러나 신선(神仙)의 술()을 즐기며 공명(功名)을 완전히 보전하여 천명으로 죽었음. 사기(史記)한서(漢書)』 「장량전(張良傳)

 

장자아(長者兒)

마원이 말하기를, “내가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므로 국사에 죽는 몸이 되지 못할까 염려하였더니 이제는 소원대로 되게 되었다. 다만 장자가(長者家) 아이들이 혹 좌우에 있거나 혹 종사(從事)가 되었을 때에 그것을 다루기 어렵다.” 하였다. 장자아(長者兒)는 권세 있는 집 자제를 가리킨 것이다.

 

장작(張鷟)

() 나라 장작(張鷟)이 글을 잘 지으니 원반천(員半千)이 그의 글을 청동전(靑銅錢) 같아서 가려내고 추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칭찬하니, 그때 사람들이 장작을 청전학사라고 불렀다.

 

장작관(將作官)

토목과 건축에 관한 사항을 관장했던 선공감(繕工監)의 관원을 말한다.

 

장작청전(張鷟靑錢)

시험을 볼 때마다 모두 합격했음을 비유한 말이다. 당 고종(唐高宗) 때 장작이 시험을 볼 때마다 반드시 합격하였는데, 청동전(靑銅錢)은 만 번을 골라 뽑아도 규격이 서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뜻에서, 당시 사람들이 장작의 문장을 청동전에 비유하여 그를 청전학사(靑錢學士)라 호칭한 데서 온 말이다. 당서(唐書)卷一百六十一

 

장장(將將)

대장(大將)의 대장이란 뜻으로, 대장을 잘 부릴 수 있는 재능을 이른 말이다.

 

장장(丈丈)

예전에, 손윗사람이나 존장(尊長)을 이르던 말

 

장장하일(長長夏日)

기나긴 여름 날.

 

장재(長齋)

불가(佛家)에서 일생 동안 율행(律行)을 정진하며 낮 한 때만 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음식을 취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불가(佛家)에서 한낮이 넘도록 굶는 것을 재()라 하고, 그것을 반복하는 것을 장재(長齋)라고 한다. 반야삼매경(般舟三昩經)

 

장재명(張載銘)

서진(西晉)의 장재(張載)가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갔다가 험준한 산세를 보고 검각명(劍閣銘)’을 지었는데, 세조(世祖)가 이를 보고서 감탄한 나머지 비석에 새겨서 그곳에 세우도록 한 고사가 전한다. 문선(文選)56 검각명(劍閣銘)

 

장저걸닉(長沮桀溺)

공자(孔子)와 동 시대에 살았던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의 은자(隱者)들로서, 논어(論語)』 「미자(微子)에게 자기들의 생활 방식을 따르라고 권하면서 계속 농사일을 했던 고사가 전한다.

 

장저업(長沮業)

장저(長沮)춘추시대(春秋時代)의 은자이다. 논어(論語)』 「미자(微子)장저와 걸익(桀溺)이 나란히 짝을 지어 밭갈이를 하였다.”에서 나온 것으로, 세상을 피해 은거하는 것을 말한다.

 

장적(張籍)

() 나라 때의 문장가인데, 한유(韓愈)가 일찍이 장적을 대신하여 이 중승(李中丞)에게 준 편지에 지금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마음이 깜깜하지만[盲心], ()의 경우는 스스로 유독 눈만 깜깜하다고[盲目]할 뿐이요, 그 마음은 시비(是非)를 능히 분별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장전(張顚)

() 나라 서예가 장욱(張旭)의 별호이다. 초서(草書)를 아주 잘 썼는데 술이 한껏 취하면 머리털에다 먹을 묻혀 미친 듯이 초서를 썼으므로 남들이 전장(顚張)이라 했다 한다. 당서(唐書)卷二百二

 

장전(帳殿)

왕이 궁궐을 나와 잠시 휴식할 때 휘장을 둘러쳐 만든 행궁(行宮)이다.

 

장전(杖錢)

장두백전(杖頭百錢)의 준말로, () 나라 때 완수(阮脩)가 외출할 때면 언제나 지팡이 끝에다 백 전씩을 걸고 나가서 주점(酒店)에 이르러 혼자 즐기며 마셨던 데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卷四十九

 

장전(張顚)

()은 미치광이란 뜻으로, 당 나라 때 서가인 장욱(張旭)의 이칭(異稱)이다. 장욱은 술을 매우 즐겨 항상 대취(大醉)되어 미친 듯이 떠들어대며 광주(狂走)하다가 곧 붓대를 잡고 글씨를 쓰면 신기한 작품이 나왔다고 한다.

 

장전(章殿)

한당(漢唐) 시절의 궁전 이른다.

 

장전선(張錢選)

() 나라 장작(張鷟)이 진사(進士)에 등제(登第)했을 때, 원외랑(員外郞) 원반천(員半千)이 여러 차례나 공경(公卿)의 면전에서 그의 문장은 마치 청동전(靑銅錢)과 같아서 한 편의 글마다 찬란한 색채를 발휘하니 만번을 뽑아도 만번 다 뽑힐 것[萬選萬中]이다.”라고 칭찬했던 고사가 있다. 신당서(新唐書)』 「장작전(張鷟傳)

 

장전익(章全益)

() 나라 때 장전익(章全益)이 어려서 고아가 되어 그의 형 전계(全啓)에게서 양육되었으므로, 그의 형이 죽자 참최(斬衰)를 입어서 그 은혜에 보답하였다. 그래서 당시에 그를 장 효자라고 칭했었다.

 

장절(杖節)

병마절도사가 지닌 부절(符節)과 부월(斧鉞)을 의미한다. 부절(符節)은 깃발이고 부월(斧鉞) 도끼로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지니고 있음을 상징한다. / 인용: 鏡浦新亭記(안축)

 

장절공(壯節公)

평산 신씨(平山申氏)의 시조이며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申崇謙)을 말한다. 장절은 그의 시호이다.

 

장절염황백안희(仗節炎荒白鴈稀)

염해(炎海)는 몹시 더운 남쪽 지방으로, 여기서는 일본(日本)을 가리킨다. () 나라 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19년 동안 억류되어 있을 때 기러기의 발에 편지를 매달아 보냈다고 한다.

 

장점(粧點)

부녀의 단장에서 근본된 말인데, 모든 수식(修飾)에 대한 용어로 발전되었다.

 

장접(莊蝶)

옛날에 장주(莊周)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자신이 장주인 줄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깨어나니 바로 장주였다. 이에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속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장정(長亭)

노정(路程)을 표시하는 정()이 있는데 5리에 있는 것을 단정(短亭), 10리에 있는 것을 장정(長亭)이라 한다.

 

장정(長亭)

역참(驛站)을 말한다. 행인의 휴식과 전별을 하는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진()ㆍ한() 시대에 10리마다 설치했던 정자로서 길가의 정자를 가리킨다. 5리마다 설치한 것은 단정(短亭)이라 한다.

 

장정위(張廷尉)

한 문제(漢文帝) 때 정위로 있었던 장석지(張釋之)를 말한다. 장석지는 정위로 있으면서 법을 엄히 지키고 죄인을 공평하게 다스리어, 당시에 장석지가 정위가 된 후로는 천하에 원통한 백성이 없게 되었다.”는 칭송을 받기까지 하였다. 한번은 처사(處士) 왕생(王生)이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어와 공경대부가 다 모인 자리에서 장석지에게, 내 대님이 풀렸으니 대님을 매달라고 하자, 석지가 꿇어앉아 그의 대님을 매어주었다. 그러자 어떤 이가 왕생에게, 왜 장 정위를 조정에서 그렇게 모욕하느냐고 하니, 왕생이 말하기를 나는 늙고 천한 몸으로 본디 장 정위에게 도움을 줄 것이 없는데, 정위는 지금 천하 명신(天下名臣)이므로 내가 짐짓 나의 대님을 매게(結幭) 하여 그의 인품을 더욱 중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한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卷五十

 

장조(張趙)

() 나라 때 다 같이 경조윤(京兆尹)으로 명망이 높았던 장창(張敞)과 조광한(趙廣漢)을 합칭한 말이다.

 

장조염승명(莊助厭承明)

장조(莊助)는 한() 나라 엄조(嚴助)를 가리키고, 승명려(承明廬)는 한 나라 때 시종신이 숙직하던 거소의 이름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엄조에게 회계 태수(會稽太守)를 제수하면서 내린 조서 가운데 그대가 승명려에 있는 것을 지겹게 여기고 시종신의 일을 고단하게 여기면서 고향을 그리워하기에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바이다[君厭承明之廬 勞侍從之事 懷古土 出爲郡吏].”라는 구절이 있다. 한서(漢書)64엄조전(嚴助傳)

 

장족(張鷟)

당 예종(唐睿宗) 때 학사(學士)가 되어 문장에 이름이 있자, 신라(新羅)ㆍ일본(日本)에서 오는 사신(使臣)들이 그의 문장을 구입해 갔다. 호는 부휴자(浮休子) 혹은 청전 학사(靑錢學士)라 하였다. 당서(唐書)卷一百六十一

 

장족(長足)

빠른 걸음. 진보나 발전 속도가 매우 빠름을 비유.

 

장족자율사(將哫訾栗斯)

아첨하면서 우물거리며, 무서워 떨다.

 

장주(掌珠)

손 위의 구슬. 남의 자녀를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장주(長洲)

장원(莊苑)의 이름으로, 합려(闔廬)가 사냥하면서 놀던 곳이다.

 

장주(藏舟)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배를 골짜기에 감추고 거물을 못에 감춰 두면 누구나 다 견고하다 하겠다. 그러나 힘 있는 자가 밤중에 짊어져 가는데, 어리석은 자는 알지 못한다.”고 한 데서 인용된 말이다.

 

장주(莊周)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의 사상가이자 도학자(道學者). 만물일원론(萬物一元論)을 주창, 인생은 사생(死生)을 초월하여 절대 무한의 경지에 소요(逍遙)함을 목적으로 하였고, 또 인생은 모두 천명(天命)이라는 숙명설(宿命說)을 주장하였다.

 

장주(長洲)

황해도 장연(長淵)을 가리킨다.

 

장주류생주(莊周柳生肘)

버들()은 곧 종기를 뜻하는데, 장자(莊子)』 「지락(至樂)버들이 왼팔에 났다[柳生其左肘].” 한 주에 ()는 유()와 같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장주지몽(莊周之夢)

장주라는 사람이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실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는 고사가 있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장중울(張仲蔚)

후한(後漢)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같은 고을의 위경경(魏景卿)과 함께 몸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는데, 박학다식하여 천문(天文)에 정통하고 시부(詩賦)에 능했다 한다. 그런데 늘 빈한하게 사는 그 집에 사람의 키를 넘을 정도로 쑥대가 우거졌으므로 중울봉호(仲蔚蓬蒿)”라는 몽구(蒙求)의 표제가 전해 온다. 고사전(高士傳)장중울(張仲蔚)

 

장중주(掌中珠)

손에 쥔 구슬이란 뜻으로, ‘사랑하는 자식을 비유한 말이다.

 

장지(張芝)

() 나라 사람. ()은 비백(飛白), 특히 초서(草書)를 잘 써 초성(草聖)이라 일컬었다.

 

장지(張摯)

() 나라 장석지(張釋之)의 아들로, 대부(大夫) 벼슬에 이르러 면직된 뒤, 강직한 성품을 굽히지 않은 채 종신토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사기(史記)102 장석지풍당열전(張釋之馮唐列傳)후대에 세상에 아부하지 않는 사람의 대명사로 그의 자() 장공(長公)이 자주 쓰인다.

 

장지국(張持國)

지국(持國)장유(張維)의 자이다.

 

장지화(張志和)

산수화(山水畵) 잘 그리는 화가. ()의 장지화(張志和)의 어릴적 이름은 귀령(龜齡)이었는데, 나이 16세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고 숙종(肅宗)으로부터 총애를 받으면서 지화(志和)라는 이름을 왕에게서 받았고, 산수화를 잘 그렸으며 안진경(顔眞卿)과 친했다. 당서(唐書)卷一百九十六 隱逸화사(畵史)

 

장진(藏眞)

당 나라 승()인데 초성(草聖)으로 유명하였으며 호는 회소(懷素)이다.

 

장진응참양졸구(張陣應慚養卒口)

장진(張陣은 장이(張耳)ㆍ진여(陳餘)를 가리키며 양졸(養卒)은 나무와 밥의 천역(賤役)을 맡은 시양졸(廝養卒). () 나라 말기 군사를 일으켜 조왕(趙王)을 세웠던 장이ㆍ진여가 연() 나라에 조왕이 잡혀가자 걱정하니, 시양졸 하나가 나서서 연 나라 장군을 만나 설득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장진응참양졸구(張陳應慙養卒口)

()나라 말기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조왕(趙王)이 연왕(燕王)에게 잡히니, 그의 신하 장이(張耳)와 진여(陳餘)가 사람을 여러 번 보내어 조왕을 돌려주기를 청하였으나 연왕이 듣지 않았다. 말 기르는 종이 몰래 연왕에게 가서 구변(口辯)으로 달래어 조왕을 모시고 돌아왔다.

 

장진주(將進酒)

당나라 이하(李賀)는 이름 높은 시인(詩人)인데 장진주(將進酒)란 제목으로 지은 시가 있다.

 

장창(張敞)

경조윤(京兆尹)과 기주 자사(冀州刺使)로 있으면서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여 도적을 소탕하고 청명한 정치를 행하였다.

 

장창(臧倉)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사람이다. 맹자(孟子)가 노 나라 평공(平公)을 만나 보려고 하였으나, 장창이 가로막아서 만나 보지 못하였다. 후대에는 어진이를 해치는 소인배를 지칭하게 되었다. 맹자(孟子)』 「앙혜왕(梁惠王)

 

장창무치(張蒼無齒)

장창(張蒼)은 진() 나라 말기에 유방(劉邦)을 따라 군사를 일으켜 공을 세우고 문제(文帝) 때는 15년 동안 승상을 지낸 인물로, 백여 세가 넘게 살았는데 노년에 이가 없어 젖을 먹고 살았다 한다. 한서(漢書)卷四十二 장창전(張蒼傳)

 

장창치(張蒼齒)

() 나라 때 장창(張蒼)은 치아가 없어서 오직 젖()만 마시면서 백여 세를 살았다는 데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卷四十二

 

장채(章蔡)

북송 시대의 소인(小人) 재상으로 일컬어지는 장돈(章惇)ㆍ채경(蔡京)을 합칭한 말이다.

 

장초(萇楚)

일명 양도(羊桃)라고 하는 풀의 이른다. 어려서는 곧게 자라다가 조금 크면 가지가 휘어져서 덩굴처럼 엉긴다고 한다. 시경(詩經)회풍(檜風) 습유장초(隰有萇楚), “습지에 보리수가 있으니 그 가지 보드랍도다. 아리땁고도 윤택하니 너의 무지함이 부럽도다[隰有萇楚, 猗儺其枝. 夭之沃沃, 樂子之無知].”라 하여, 백성들이 번거로운 정사와 무거운 구실을 견디지 못해 부른 노래다. 자신들의 삶이 습한 곳에 자라는 잡초만도 못하다는 표현이다. / 유의어: 습장(隰萇), 무지이장초(無知羡萇楚) / 인용: 嶺南歎(윤현)

약초의 이름으로 맛이 매우 쓰다고 한다.

 

장초(章草)

초서의 한 가지. 한 원제(漢元帝) 때에 사유(史游)가 급취장(急就章)의 체에서 만든 것이다.

초서의 별체. 후한 장제(章帝) 때 두조(杜操)가 이를 잘 썼고, 장제가 그를 칭찬한 데서 유래한다.

 

장추(長楸)

서울의 대로(大路)를 말한다. 옛날 도성의 큰길 거리에 가래나무()를 길게 심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큰 가래나무. 조식(曹植)의 명도편(名都篇), “동교 길에서 닭싸움하고, 장추 사이에서 말 달리네[鬪鷄東郊道 走馬長楸間]” 하였다.

() 나라 때 태후(太后)가 거했던 장추궁(長秋宮)으로, 뒤에 와서는 황후의 궁전 혹은 황후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장추곡(將雛曲)

어린 자식을 키우며 사는 것을 내용으로 한 옛 악곡(樂曲) 봉장추(鳳將雛)를 말한다.

 

장추궁(長秋宮)

황후가 거처하는 궁전. 전하여 황후의 별칭으로 쓰인다. 후한서(後漢書)』 「명덕마황후기(明德馬皇后紀)

 

장춘(莊椿)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옛날에 대춘(大椿)이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8천 년을 봄으로 삼고 8천 년을 가을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후세에 이를 축수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장춘오(藏春塢)

() 나라 때 조약(刁約)의 실명(室名). 조약이 일찍이 벼슬을 하다가 사직하고 돌아와 윤주(潤州)에다 실()을 세우고 이를 장춘오라 이름하였다. 소식(蘇軾)의 시에 장춘오 안에 꾀꼬리와 꽃이 들레고[藏春塢裏鶯花鬧].” 하였고, 사마광(司馬光)의 시에는 장춘이 어디에 있느뇨. 수많은 송림 무성도 하리[藏春在何處 鬱鬱萬松林].” 하였다.

 

장타유(張打油)

저속한 시()를 말한다. 양승암집(楊升庵集)에 의하면, () 나라 장타유(張打油)가 눈()에 대한 시를 지었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노란 개는 몸 위가 하얗게 되고, 하얀 개는 몸 위가 부어올랐다[黃狗身上白 白狗身上腫].”고 했다 한다.

 

장탕(張湯)

전한(前漢) 때 법관으로서 아주 혹리(酷吏)였다. 무제 때 태중대부(太中大夫)로서 율령(律令)을 만드는 데 참여했고,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어서는 법문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어 뒤에 주매신(朱買臣)등의 무함을 받고 자살하기에 이르렀음. 한서(漢書)卷五十九 서옥(鼠獄)

한 나라 때 공신 세족(功臣世族)으로 자손으로 선제(宣帝)ㆍ원제(元帝)이후 시중(侍中)과 중상시(中常侍)를 지낸 사람이 10여 인이나 되었다.

 

장탕교무문(張湯巧舞文)

한 무제(漢武帝) 때에 혹리(酷吏) 장탕(張湯)이 법문(法文)을 교묘히 환롱(幻弄 舞文)하여 가혹하게 다스렸다.

 

장탕옥(張湯獄)

장탕(張湯)은 한() 나라 때의 옥관(獄官)이다. 그가 어렸을 적에 집을 보다가 쥐에게 고기를 도둑맞은 일이 있었는데,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에게 심한 꾸중을 듣고서는 쥐 굴을 파헤쳐 쥐를 잡고 먹다 남은 고기도 꺼내어 뜰에다 감옥의 모양을 갖추어 놓고 핵문(劾文)을 지어 쥐를 신문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그 글을 보니 노련한 옥리(獄吏)보다 나았으므로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한다. 한서(漢書)卷五十九

 

장탕우거반(張湯牛車返)

장탕(張湯)은 한 무제(漢武帝) 때의 옥관(獄官)으로 법 집행이 혹심(酷深)하기로 유명하였는데, 그가 뒤에 탄핵을 받고 자살하여 그의 형제들이 후장(厚葬)을 하려 하자, 그의 모친이 말하기를, “탕은 천자의 대신으로서 나쁜 말을 듣고 죽었는데, 어찌 후장을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도 없이 관()만 갖추어 우거(牛車)에 실어서 장사지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卷五十九

 

장평(長平)

성 이름으로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백기(白起)가 조() 나라 조괄(趙括)의 군사를 대파하고 항졸(降卒) 40여만 명을 땅에 파묻어 죽였다. 사기(史記)』 「조세가(趙世家)/ ()의 장수 백기(白起)가 장평관(張平關)에서, 전쟁에 패하고 항복해온 조()40만 대군을 속임수를 써서 한꺼번에 갱살(坑殺)하였다. 사기(史記)』 「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 유의어: 장평갱(長平坑)

지명(地名)으로 조()나라 상당군(上黨郡)의 읍이다. 장평 대전(長平大戰)은 기원전 262년에서 기원전 260년에 걸쳐 진()나라와 조()나라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투이다. 중국의 전국 시대의 판도를 변하게 만든 대표적인 전투의 하나이다. 장평의 승리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패전국인 조나라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인 전투였다.

 

장평자(張平子)

장형(張衡)의 자()이다. 벼슬하다가 돌아와서 귀전부(歸田賦)를 지었다.

후한(後漢) 시절의 장형(張衡). 평자(平子)는 그의 자이다. 자기 심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유명한 사현부(思玄賦)를 지었음. 후한서(後漢書)卷五十九

 

장포(張酺)

자는 맹후(孟侯). 후한 화제(後漢和帝) 때 사도(司徒)를 지냈으며 상서(尙書)에 밝았다. 후한서(後漢書)卷七十五

 

장포(漳浦)

옛날 삼국 때 위()의 유정(劉楨)은 병이 있어 늘 장포에 누워 있었으므로 앓고 있는 시골을 가리키게 되었다.

 

장포자리거(漳浦子離居)

병으로 말미를 청해 시골에서 쓸쓸히 지낸 것을 말한다. 한말(漢末)에 유정(劉楨)이 조비(曹丕)에게 보낸 시 가운데 余嬰沈痼疾 竄身淸濱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고휴장포(告休漳浦)”라는 숙어가 파생되었다. 문선(文選)』 「증오관중랑장(贈五官中郞將)

 

장풍(長風)

웅대한 뜻을 펴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장풍은 멀리 부는 웅대한 바람을 말하는데, 남조 송(南朝宋) 때 종각이 어렸을 적에 그의 숙부(叔父)가 장래의 포부를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장풍을 타고 만리의 물결을 헤쳐 나가고 싶습니다.” 하였는데, 뒤에 그는 과연 진무장군(振武將軍)이 되어 임읍국(林邑國)을 정벌하여 이기고 조양후(洮陽侯)에 봉해졌다. 송서(宋書)卷七十六

 

장풍파랑(長風破浪)

남조 송(南朝宋) 종각(宗慤)이 소년 시절에 내 소원은 장풍을 타고 만리의 물결을 헤쳐 보는 것이다[願乘長風萬里浪].”라고 포부를 밝힌 고사가 있다. 송서(宋書)』 「종각전(宗慤傳)

 

장하(丈下)

장실(丈室) 밑이라는 말인데, 유마경(維摩經 )에 유마거사(維摩居士)의 거처하는 방이 사방 10척이므로 방장실(方丈室)이라는 문자를 인용하였다.

 

장하아(帳下兒)

병졸(兵卒)을 가리킨다.

 

장한(張翰)

() 나라 오군(吳郡) 사람으로, 자는 계응(季鷹)인데 문장가이다. () 나라에 벼슬하여 동조연(東曹掾)이 되었는데, 가을 바람이 불자 오군의 고채(菰菜)ㆍ순채(蓴鱸) 국과 농어회(鱸魚膾)가 생각나서 벼슬을 내놓고 돌아왔다고 한다. 진서(晉書)』 「장한전(張翰傳)연리(掾吏)가 되었을 때 가을철을 만나 그의 고향 고채(菰菜)와 순갱(蓴鱸)ㆍ농어회(鱸魚膾)가 생각나 그만 벼슬을 버리고 오군으로 돌아갔다.” 하였다.

 

장한강동행(張翰江東行)

동진(東晉) 때 오군(吳郡)의 장한이 낙양(洛陽)에 들어가 대사마 동조연(大司馬東曹掾)으로 있다가, 가을 바람이 불어오자 고향인 오군의 순채국(蓴鱸)과 농어회(鱸膾)가 생각나서 인생이란 가난하게 살아도 뜻에 맞는 것이 좋지, 어찌 벼슬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수천 리 밖에 몸을 얽매일 필요가 있겠느냐.” 하고는 수레를 명하여 고향으로 곧장 돌아와버렸다. 강동(江東)은 곧 오군을 가리킨 말이다. 진서(晉書)』 「문원전(文苑傳)장한(張翰)

 

장한귀강동(張翰歸江東)

장한(張翰)은 진() 나라 사람인데, 벼슬하는 중에 나라의 정치해 가는 꼴이 멀지 않아서 난리가 날 것 같으므로, 고향인 강동으로 갈 생각이 많았었는데, 마침 가을이 되어서 고향의 농어회와 순채의 아름다운 맛을 생각하고 그만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한다.

 

장한귀심만일범(張翰歸心滿一帆)

() 나라 사람. 자 계응(季鷹). 그가 낙양(洛陽)에 들어와 제왕형(齊王冏)의 동조연(東曹掾)으로 벼슬하다가 가을 바람이 불자 고향인 오중(吳中)의 순나물ㆍ농어회 생각이 나서 벼슬을 버리고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장한귀흥(張翰歸興)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말이다. 장한은 진() 나라 오군(吳郡) 사람으로 자는 계응(季鷹), 호는 강동보병(江東步兵)이다. 제왕(齊王) ()이 그를 불러 대사마 동조연(大司馬東曹椽)을 삼았는데, 하루는 가을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문득 오중(吳中)의 순채(蓴鱸)와 노어(鱸魚)가 생각나서 말하기를 인생이란 제 마음에 맞는 대로 살아야지 무엇 때문에 고향을 떠나 천리 밖에 나와서 명작(名爵)에 얽매이겠느냐?” 하고서 바로 고향에 돌아갔다는 고사이다. 진서(晉書)卷九十二 장한전(張翰傳)

 

장한범고회순풍(張翰帆高會順風)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가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나라 때 장한은 낙양(洛陽)에 들어가 동조연(東曹掾)이 되었다가 가을 바람이 일어나자 자기 고향인 오중(吳中)의 순채 나물과 농어회가 생각나서 당장 벼슬을 버리고 떠났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장한사(張翰事)

()의 장한(張翰)은 오군(吳郡)사람이었다. 그의 별호가 강동 보병(江東步兵)이었는데, 어느 날 하순(賀循)을 따라 낙양(洛陽)에 와서 벼슬하고 지내다가 갈바람이 일자 자기 고향의 순채국, 농어회가 생각나서 관직을 버리고 오군으로 돌아갔었음. 진서(晉書)卷九十二

 

장한흥(張翰興)

() 나라 장한이 벼슬살이를 하다가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는 오중(吳中)의 순채국과 농어회 생각이 나서 말하기를 인생이란 유쾌하게 사는 것이 제일이다.” 하고, 벼슬을 버린 채 곧바로 고향에 돌아갔던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文苑 장한전(張翰傳)

 

장함석(丈函席)

지팡이를 용납하는 자리로, 후에 스승을 함장이라 일컬었으니 강석(講席)이라는 뜻과 같다.

 

장해(章亥)

대장(大章)과 수해(豎亥), 모두 전설 속에 나오는 걸음을 잘 걸었던 사람들이다.

 

장해(藏海)

대장경의 분량이 많음과 뜻이 깊고 넓음을 형용하기 위해 장경의 바다(藏海)라는 뜻에서 한 말이다.

 

장현소(張玄素)

당 태종(唐太宗) 때 장현소가 시어사(侍御史)를 거쳐 급사중(給事中)으로 있으면서 태종이 낙양궁(洛陽宮)을 수축하려는 데 대해 현소가 상서(上書)하여 극간하자 태종이 그 일을 즉각 중지하였다. 당서(唐書)卷一百三

 

장협가(長鋏歌)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며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 노래이다. () 나라 사람 풍훤(馮諼)맹상군(孟嘗君)의 식객으로 있을 때 장검으로 박자를 맞추면서 보다 나은 대우를 요구하는 노래를 불렀던 데에서 유래한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4, 사기(史記)卷七十五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장협가(長鋏歌)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사람 풍훤(馮諼)맹상군(孟嘗君)의 식객으로 있을 적에 칼자루를 치면서 불우한 처지를 호소했다는 노래이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4, 사기(史記)卷七十五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장협비가(長鋏悲歌)

장검을 치며 슬프게 노래부른다는 것은 전국시대(戰國時代) ()나라 맹상군(孟嘗君)의 식객 가운데 한 사람인 풍환(馮驩), 처음 맹상군을 찾아갔을 때 대접이 변변치 않자 장검을 치며 밥상에 고기가 없고 밖에 나다닐 때 수레가 없다는 뜻으로 노래를 불렀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사기(史記)卷七十五 맹상군전(孟嘗君傳)

 

장협운관(長鋏雲冠)

굴원(屈原)처럼 시름겹다는 뜻이다. 초사(楚辭)구장 석송(九章 惜誦)허리에 장협을 길게 차고 머리에 절운관을 높이 썼네[帶長鋏之陸離兮 冠切雲之崔].” 하였다.

 

장협탄(長鋏彈)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맹상군(孟嘗君)의 식객인 풍환(馮驩), 풋나물만 먹이고 고기를 주지 않는 맹상군의 박대에 불평을 품고, 긴 칼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음식에 고기가 없으니 그만 돌아가자.”고 하였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사기(史記)卷七十五 맹상군전(孟嘗君傳)

 

장협풍환(長鋏馮驩)

장협은 긴 칼을 이른 말인데,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맹상군(孟嘗君)의 식객(食客) 풍환(馮驩)이 맹상군의 대우가 나쁜 데에 불만을 품고 장협아, 돌아가자! 밥상에 고기가 없구나.”라고 노래하자, 맹상군이 고기 대접을 해 주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사기(史記)卷七十五 맹상군전(孟嘗君傳)

 

장협화풍환(長鋏和馮驩)

()을 잘 대접하는 주인을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뜻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맹상군(孟嘗君)의 식객(食客)풍환(馮驩)이 대접에 불만을 품고는 장협(長鋏 장검)에 기탁하여 노래를 부르며 뜻을 표현하자, 맹상군이 몇 번이나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사기(史記)卷七十五 맹상군전(孟嘗君傳)

 

장형(張衡)

후한 안제(安帝) 때의 시인. 자는 평자(平子). 그는 부()에 능했다. 자기 심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유명한 사현부(思玄賦)를 지었으며, 벼슬하다가 돌아와서 귀전부(歸田賦)를 지었음. 특히 이도부(二都賦)10년을 걸쳐 지은 것으로 매우 유명한다. 후한서(後漢書)卷五十九

 

장호(張鎬)

당 숙종(唐肅宗) 때 재상(宰相)으로 환관(宦官)에게 굽히지 않다가 파직당하였으나 대종(代宗) 때 다시 기용되었다. 자는 종주(縱周)이다. 당서(唐書)卷一百三十九

 

장호(張祜)

() 나라 사람으로 자는 승길(承吉)인데 궁사(宮詞)에 능하여 유명하였다. 신당서(新唐書)』 「장호전(張祜傳)

 

장호호(張好好)

() 나라 때 명기(名妓)의 이른다. 가창(歌唱)에 매우 뛰어났고 당시의 유명한 시인 두목(杜牧)이 그에게 시를 지어 보낸 일도 있다.

 

장홍(長紅)

옛 풍속에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지방관에게 그 지방의 부로들이 꽃가지에 채색을 걸어서 주는 것을 이르는데, 소식(蘇軾)의 파서주왕남경시(罷徐州往南京詩)부로들은 왜 스스로 찾아오는고 나에게 준 꽃가지는 장홍이 간들거리네[父老何自來 花枝裊長紅]” 한 데서 온 말이다. 소동파집(蘇東坡集)卷十八

 

장화(張華)

() 나라 혜제(惠帝) 때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지냈으며 박학다식하여 참위(讖緯)ㆍ방기(方技)의 책에 이르기까지 상람(詳覽)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박물지(博物志)는 바로 현존하는 그의 유일한 저서이다. 진서(晉書)36

 

장화구검(張華求劍)

장화(張華)는 진()의 시중(侍中)을 지낸 현사. 그가 한번은 북두성 사이에 이상한 빛이 있는 것을 보고 천문을 잘 아는 뇌환(雷煥)에게 물었더니, 보검(寶劍)의 정기(精氣)가 뻗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풍성(豐城) 땅에서 명검인 용천(龍泉)ㆍ태아(太阿) 두 개를 얻었다 한다. 진서(晉書)卷三十六 장화전(張華傳)

 

장화록(藏花錄)

명부 이름이다. 취홍원(聚紅院)에 선입된 흥청을 패()를 나누어 이름을 쓰고, 그 이름 밑에 생년, 본적, 소속된 날짜 등을 기록하고서 그 책을 장화록이라 하였다.

 

장화일(藏火日)

불을 금지하는 날로 즉 한식일(寒食日). 육홰(陸翽)업중기(鄴中記)병주(幷州) 풍속은 개자추(介子推)가 불에 타 죽었으므로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3일 동안 불때기를 금한다.” 하였다.

 

장활태(杖滑苔)

지팡이가 이끼에 미끄러지다.

 

장횡거(張橫渠)

북송의 철학자 장재(張載)로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오다가 중도에서 병으로 죽었다 한다.

 

장효여석치(長筊與石甾)

하수가 터진 것을 막느라고 나무를 다 잘랐으므로 땔감이 모자랐고 드디어는 기원(淇園)의 대나무를 베어 물막이로 썼는데, 이 공사가 쉬이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천자가 직접 이루어지게 하여 달라는 뜻의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백마를 잡아 물귀신에게 제사하였다 한다. 사기(史記)』 「하거서(河渠書)

 

장효자(章孝子)

() 나라 때 장전익(章全益)이 어려서 고아가 되어 형 전계(全啓)에게 양육되었는데, 형이 죽은 뒤 참최복(斬衰服)을 입어 그 은혜를 갚았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장효자(章孝子)라 불렀다.

 

장효표(章孝標)

당 나라 사람으로 시에 능하였다.

 

장후(張侯)

춘추시대(春秋時代) ()의 대부(大夫) 해장(解張). 좌전(左傳)成公 二年

 

장후경(蔣詡逕)

() 나라 장후(蔣詡)왕망(王莽) 정권 때 벼슬을 내놓고 향리에 은둔한 뒤, 집안의 대나무 밭 아래에 세 개의 오솔길을 내고는 오직 친구인 구중(求仲)과 양중(羊仲) 두 사람과만 종유(從遊)했던 고사가 전해 온다. 몽구(蒙求)장후삼경(蔣詡三逕)

 

장후경존내이중(蔣詡逕存來二仲)

은거해 사는 사람이 찾아온다는 뜻이다. 이중(二仲)은 한() 나라의 양중(羊仲)과 구중(裘仲)이다. 한 나라 때 장후의 집에 세 개의 사잇길이 있었는데, 오직 양중과 구중만이 그를 따라 노닐었다고 한다. 초학기(初學記)18

 

장후만리사(張侯萬里槎)

() 나라 장건(張騫)이 뗏목을 타고 은하(銀河)에 올랐다. 실은 멀리 천산(天山) 길을 뚫어 서역에 가는 것을 말한다.

 

장후삼경(蔣詡三逕)

번잡한 도시 속에 숨어 사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후한(後漢) 장후가 집 안에 세 갈래 오솔길을 만들어 놓고 오직 구중(求仲), 양중(羊仲) 두 사람과 노닐었던 고사가 있다. 삼보결록(三輔決錄)逃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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