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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해설. 비장하고 숭엄하게 김응하 장군을 그리다 17세기 전반 동북아의 정세는 질서의 재편이 진행되고 있었다. 명(明)ㆍ청(淸)의 교체로 결산되는 역사의 과정에서 이 지역의 삼국은 갈등 쟁투를 치열하게 벌인 것이다. 1619년 심하전투는 혈맹관계로 맺어진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누루하치의 후금에 대패하여, 앞으로 다가올 대국을 예견하는 사건이었다. 김응하는 그 싸움에서 비록 패군의 장수였으나 군인으로서 최후가 장렬하였으므로, 적국사람들의 입에서까지 그를 ‘유하장(柳下將)’ 혹은 ‘호남아’라고 칭송했다 한다. 더욱이 후금의 급격한 팽창에 위기의식을 가진 데다 명에 대해 정신적 연대감이 끈끈했던 당시 조선의 처지로서 김장군의 죽음은 비상한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 그에게 ..
후금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김응하 장군 김장군응하만(金將軍應河輓) 송영구(宋英耈) 皇帝四十七秊春 황제 47년(1619) 늦봄에 薄伐奴酋命將帥 오랑캐를 정벌하라 장수에게 명하셨다. 我國曾荷再造恩 우리나라는 일찍이 ‘재조은(다시 지어준 은혜)’를 져서 二萬兵因檄徵起 2만의 병사가 격문으로 인해 불러 일으켰네. 將軍脫穎爲營將 장군은 재주가 뛰어나 군영의 우두머리가 되었지만 人不知其死所矣 사람들은 그가 죽을 곳을 알지 못했네. 披甲上馬渡江去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강을 건너 떠나니 戰陣無勇其心愧 적진에서 용기 없음을 마음으로 부끄러워했지. 天兵謂虜在目中 명나라 군사가 말했네. “오랑캐가 눈 안에 있으니 要入虎穴得虎子 요컨대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 새끼를 잡지.” 期會未成綿竹計 모이길 기약했지만 면죽..
해설. 임란으로 도륙 당한 동래백성의 통곡소리 이 시는 임진왜란 당초에 동래성에서 왜적의 손에 백성들이 도륙당한 상황을 그린 것이다. 시의 작자 이안눌은 선조 40년(1607)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 4월 15일은 동래성이 적군에 함락된 날이다. 이날 아침은 성안이 울음바다를 이루는데 그 곡성이 역사적 사실을 재현시킨 것이다. 시는 시인과 고을 아전이 대화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는바, 아전의 구술을 통해 현재의 울음에 연관해서 당시의 참혹한 죽음의 사연들이 낱낱이 폭로된다. 16년 전의 사건을 회고하는 셈이지만 생생한 화폭처럼 펼쳐지고 있다. 시인은 “이야기 끝까지 듣다 못해 /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네[蹙額聽未終 涕泗忽交頤]”라고 중간에 한번 끼어드는 것으로 자기 정서를 간략히 표출할 뿐, 이내 “울어줄..
4월 15일에 동래를 뒤흔든 곡소릴 듣고 4월 15일(四月十五日) 이안눌(李安訥) 四月十五日 平明家家哭 4월 15일 새벽 집집마다 곡소리. 天地變簫瑟 凄風振林木 천지 스산하게 변했고 처량한 바람 숲을 뒤흔드네. 驚怪問老吏 哭聲何慘怛 놀라고 괴이하여 늙은 관리에게 물었네. “통곡소리 어째서 저리 슬픈가? 壬辰海賊至 是日城陷沒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와 이 날 성이 함락 당했습죠. 惟時宋使君 堅壁守忠節 오직 이때에 송상현(宋象賢) 사또만이 성벽을 굳건히 해서 충절을 지켜 闔境驅入城 同時化爲血 동래 백성이 빨리 성에 들어와 한 날 한시 죽었답니다. 投身積屍底 千百遺一二 쌓인 시체 더미 아래로 파고든 1000명 중 1~2명만 살아 남았으니, 所以逢是日 設奠哭其死 이 날이 되면 설전하고 죽은 이를 곡합니다. 父或..
해설. 전란에도 강인하고 고결한 여성의 품성 이 시는 한 여성의 구체적 경험을 통해 임진왜란에 우리 인민들이 겪은 고통을 표현한 것이다. 「풍악기행(楓嶽紀行)」의 시편 속에 들어 있다. 시인은 금강산을 찾아가는 도중 철원의 객점에서 한 늙은 여자를 우연히 만난다. 그로부터 소경력을 듣게 되는데, 그의 이야기가 곧 전편의 내용이다. 서울이 적군에 함락될 때 일가족이 피난을 나섰다가 시어머니와 남편은 왜놈의 손에 살해를 당하고 어린 아들을 빼앗기고 여자 혼자만 남는다. 일본에 의해 저질러진 전쟁이 우리 인민 일반에 얼마나 고난을 끼쳤던가 실감케 하는 하나의 전형적 정황이다. 그런데 주인공 여자는 외톨이의 고달픈 인생이지만 좌절하지 않고 끈덕지게 살아가고 있다. 왜군에 끌려갔던 아이 또한 적지에서 죽지 않고 ..
왜구에 의해 한 가족이 풍비박산나 홀로 남은 할매의 사연 노객부원(老客婦怨) 허균(許筠) 東州城西寒日曛 동주성의 서쪽은 춥고도 해는 지니 寶蓋山高帶夕雲 보개산은 높아 저녁 구름이 띠를 이루었네. 皤然老嫗衣藍縷 머리 세고 남루한 옷 입은 할매는 迎客出屋開柴戶 손님 맞으러 집을 나와 사립문 열며 自言京城老客婦 스스로 말하네. “서울의 접객 할매는 流離破產依客土 흘러다니며 파산해 타향에 의지했죠. 頃者倭奴陷洛陽 최근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해 提携一子隨姑郞 한 자식 데리고 시어머니와 남편 따랐어라. 重硏百舍竄窮谷 백 리마다 한 번씩 쉬며 물집이 겹으로 생기며 곤궁한 골짜기에 숨어 夜出求食晝潛伏 밤엔 나가 먹을 것 찾고 낮엔 숨었죠. 姑老得病郞負行 시어머니 병 들자 남편이 업고 다녔고 蹠穿峥山不遑息 가파른 산을 밟..
해설. 코는 베였지만 살아남은 사람의 증언을 기록하다 임진왜란의 잔혹상을 민중의 피해에 초점을 맞춰서 클로즈업시킨 작품으로 앞의 「부시행(負尸行)」과 나란히 「무비자(無鼻者)」를 들어볼 수 있다. 당시 왜군은 전과를 허위로 과장하기 위해 무고한 백성들의 코를 마구 잘라갔다는 것이다. 전래(傳來)의 일반적인 방식은 귀를 가지고 전과를 계산했는데 귀 대신 코였던 셈이다. 그때 잘라갔던 코를 모아 만든 무덤이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차야마치[京都市 東山区 茶屋町]에 조선인이총(朝鮮人耳塚)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시인은 왜군의 칼날이 번득인 마당에서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의 얼굴에 코가 무수히 달아나는 사실을 고발하여, 하늘도 응당 벌을 내려서 괴수는 천형을 받을 터요, 졸개들까지 모조리 도륙이 나 독수리밥이 되고..
코를 벤 왜구들아 하늘이 너희 가만 둘 것 같으냐 무비자(無鼻者) 임환(林懽) 無鼻者誰家子 코가 없는 이는 뉘집 자식인가? 掩面坐泣荒山隅 얼굴 가린 채 황량한 산 모퉁이에서 앉아 우네. 賊刀尖利揮生風 왜구의 칼은 날카롭고 예리해 휘두르면 바람이 생기니 一割二割千百傷 한두 번 베니 100~1000명이 다치네. 吁嗟湖甸淪毒手 아! 호서(湖西)와 경기(京畿)가 잔혹한 솜씨에 어지럽혀져 孑遺半是爲巫虺 혈혈단신의 남겨진 이 반이나 코 없는 무당과 뱀 되네. 皇矣上帝賦下民 하늘의 하늘님이 백성에게 부여하심에 耳目口鼻期全形 이목구비 온전한 형체를 기약하셨는데 胡爲割剝無辜人 어찌 무고한 사람을 베고 쪼아내어 忍逞淫刑發腥刑 차마 음탕한 형벌을 펴내고 비린 형벌을 발하는 것인가? 刑書鼻典雖古有 형벌 서적에 코 베는 전범이..
해설. 참으로 지극한 말이기에 수사도 필요치 않았다 임진왜란에서 민중이 체감한 고통을 서사적 화폭에 담은 명편으로 다음에 실려 있는 허균의 「노객부원(老客婦怨)」과 이안눌의 「사월십오일(四月十五日)」을 손꼽는다. 후일에 상흔(傷痕)을 회상하는 트라우마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여기 새로 발굴해서 소개하는 임환의 「부시행(負尸行)」과 「무비자(無鼻者)」는 시인 자신이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웠거니와, 현재 시점에서 전쟁의 실상을 매우 극적으로 표출한 작품이다. 「부시행(負尸行)」은 삶의 터전인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고 민간인을 마구 학살한 참상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그네들 하는 말 들어보니 적군을 만나 목숨을 잃었다고 누군 아비 잃고, 누군 어미 잃고, 누구는 형제를 잃었다는 구나[皆言逢賊殞身命 或父或母或兄..
전쟁으로 죽은 가족의 시체를 등에 매고 가다 부시행(負尸行) 임환(林懽) 男丁傴僂負何物 남정네들 등굽은 채 어떤 물건을 짊어진 건가? 小屍在背大屍舁 작은 시신은 등에 있고 큰 시신은 마주 들었네. 皆言逢賊殞身命 모두 말하네. “적을 만나 몸의 운명이 떨어졌으니 或父或母或兄弟 혹은 아비이고 혹은 어미이며 혹은 형제인데 家爲灰燼殯無所 집은 잿더미가 되어 빈소 마련할 곳 없으니 落日轉向荒山路 해질녘 황량한 산 길 향해 가지요.” 紙錢鳴風哭一聲 지전이 바람에 우는데 통곡과 한 소리이니 天地有情應亦苦 천지에 정이 있다면 응당 또한 괴로워하리. 『習靜遺稿』 인용 목차 해설
해설. 임란 웅치전투에서 전사한 장수를 그리다 이 시는 임진왜란 때 웅치전투에서 용명을 떨치고 장렬히 죽은 한 장수의 사적을 그린 내용이다. 임진년 7월 황간(黃澗)에서 전라도 땅으로 침공한 적군은 금산(錦山)에서 고경명(高敬命) 부대를 격파하고 한편 순천 방면에서 또 적군이 쳐들어올라와, 아군은 이 양로의 적병을 저지하기 위해 진안서 전주로 넘어오는 웅치에 방어선을 구축했던 것이다. 전라도의 심장부인 전주를 지키는 일이 달려 있었다. 바로 작중에 다루어진 사실은 이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주인공은 당시 김제군수로 부임했던 정담(鄭湛)이라는 무장이다. 거기 싸움에서 생환한 사람이 전하기를, “김제군수는 적군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하면 꼭 맞히고 맞혔다 하면 꼭 꿰뚫었다. 그 혼자 죽인 수가 백여급(級)이..
왜군을 맞서다 당당하게 죽은 김제군수 정담을 기리며 비분탄(悲憤歎) 조성립(趙成立) 悲來乎憤長歎! 슬프구나! 비분강개한 긴 탄식이여! 截彼熊峴遙相望 깎아지른 저 곰치는 아득히 서로 바라보이네 蠢玆海寇分三道 꿈틀대는 해적은 삼도로 나누어져 一陣直向豐沛鄕 한 진은 곧장 전주로 향하네. 東萊已摧釜山陷 동래는 이미 꺾였고 부산도 함락되어 所過列郡爭走藏 지나친 마을은 다투어 도주하거나 숨는다지. 公獨有國不有身 김제군수 정담(鄭湛)은 홀로 나라만 소유하고 몸은 소유하질 않아 尺劍直欲前鋒當 한 척 검으로 곧장 군대의 선두에서 감당하려 했다네. 提携步卒不滿萬 보병들 끌어모아도 만 명이 채 되지 않지만 戰陣義勇何堂堂 전투 진영의 의기와 용기가 어찌나 당당한지. 冠衆我寡勢難敵 적군은 많고 우리들은 적으니 기세 대적하기 어..
참고. 고흥읍지에 실린 기록 『고흥읍지(高興邑誌)』의 쌍충사조(雙忠祠條)에 다음의 사적이 실려 있다. “녹도진(鹿島鎭)에 있다. 만력 정해년 우리나라 선조 20년(1587)에 이대원이 녹도의 만호로 왜군과 손대도(損大島)에서 싸웠는데 3일 동안 혈투를 벌였으나, 수사(水使) 심암(沈巖)은 구원해주지 않았다. 이대원이 스스로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서 자기 옷에 절구 1수를 써서 가동(家僮)에게 주며 ‘이것을 가지고 고향집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라고 말하였다. 시는 이러하다. 日暮轅門渡海來 해 저문 원문(轅門)에서 바다로 나가 싸우는데, 兵孤勢乏此生哀 군사는 적고 형세도 고단하니 이승이 애닯구나. 君親恩義俱無報 임금님 은혜를 다 갚지 못했으니 恨入愁雲結不開 한이 구름 속에 맺혀 풀리지 않노라. 그..
해설. 임란 이전에 왜구와 싸운 인물의 형상 일본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키려 하면서 조선의 내부를 정탐하는 활동을 은밀히 벌이는 한편, 해안 지역에 부분적인 도발행위를 감행해왔다. 이 「녹도가」의 첫 머리에서 “만력 정해년 우리 임금 21년이라 / (…) 왜구가 우리 변경을 침입해서 / 백성들을 붙잡아 배에 싣고 / 아무 거리낌 없이 횡 하고 돌아갔더라네[萬曆丁亥吾王二十一年 (…) 島夷竊發來驚邊 不復畏忌飄然以旋]”라고 한 사건은 그런 상황에서 일어난 일의 하나다. 이때 녹도 만호로 있던 이대원이라는 무장은 왜군을 추격해서 적선 20여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곧 다시 규모를 갖춰 침공한 적과 싸우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마침내 붙잡혀 죽게 된다.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가 개인적인 악감을 품고..
왜구를 맞아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이대원 장군을 기리며 녹도가(鹿島歌) 정기명(鄭起溟) 萬曆丁亥吾王二十一年 만력 정해년 우리 임금 21년(1587)년 月孟春旣望 그 달 정월 16일에 島夷竊發來驚邊 왜놈들이 몰래 출발하여 국경을 놀래키고 掠我民人載之船 우리의 인민을 납치하여 배에 싣고 不復畏忌飄然以旋 다시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않고 나부끼듯 돌아가버렸다. 鹿島李將軍聞其事 녹도의 이대원 장군이 이 사실을 듣고서 卽杖劍起 곧장 검을 잡고서 일어났는데 時天寒雨雪多 날씨는 춥고 비와 눈이 많이 내리니 海上師人涷墮指 바닷가 군사들은 동상에 걸려 손가락 떨어지네. 將軍鳴角弓 장군은 소나 양의 뿔로 장식한 각궁을 올리고 一葉舟萬杖滄波裏 일엽편주(一葉片舟)로 만 길이의 파도 속으로 나가 身穿百萬 몸이 백만 적군을 ..
을묘왜변을 겪은 달량성의 노래 달량행(達梁行) 백광훈(白光勳) 1. 왜구로 달량성 사람들 죽어나네 達梁城頭日欲暮 達梁城外潮聲咽 平沙浩浩不見人 古道唯逢纏草骨 身經亂離心久死 慘目如今那更說 當年獠虜敢不恭 絶徼孤城勢一髮 將軍計下自作圍 士卒不戰魂已奪 達嶼峯前陣如雲 洪海原頭救來絶 天長地闊兩茫茫 解甲投衣生死決 哀汝誰非父母身 無辜同爲白刃血 烏鳶銜飛狐狸偸 家室來收頭足別 山川索莫草樹悲 境落蕭條灰燼滅 遂令兇醜入無人 列鎭相望竟瓦裂 羯鼓朝驚鎭南雲 腥塵夜暗茅山月 妻孥相失老弱顚 草伏林投信虎穴 → 해석보기 2. 시간이 흘렀음에도 비바람 불면 원혼들 곡소리 낸다 迂儒攬古泣書史 不意身親見此日 流離唯日望官軍 彼葛旄丘何誕節 聞說長安遣帥初 玉旒親推餞雙闕 天語哀痛皆耳聞 臣子何心軀命恤 錦城千羣竟無爲 朗州一戰難補失 月出山高九湖深 水渴山摧恥能雪 至..
해설. 을묘왜변 사건의 진실을 알리려는 애국적 정서 ‘을묘왜변(乙卯倭變)’이라 일컫는 역사사건을 취재해서 쓴 것이다. 명종(明宗) 10년(1555) 5월 중국 연해에서 해적 행위를 일삼던 왜구들이 선단(船團) 60~70척을 이끌고 전라도 남서 해안으로 침입해왔다. 전라병사 원적(元積)은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작전에 나섰으나 달량성 싸움에서 지휘의 과오로 대패하였다. 적군은 해남ㆍ강진ㆍ장흥 등 고을을 휩쓸며 학살ㆍ방화ㆍ약탈을 일삼았다. 그리고 마침내 영암성을 에워쌌는데 여기서 다행히 적군을 격퇴해 큰 위기는 모면했다. 시는 달량성의 패전을 중심으로 엮어가고 있다. 시인은 지금 “발길에 채이느니 풀에 얽힌 해골[古道唯逢纏草骨]”인 옛 싸움터에 서 있다. 그리하여 지난 달량성 싸움을 회상하며 무고히 희생된 수많..
2. 시간이 흘렀음에도 비바람 불면 원혼들 곡소리 낸다 迂儒攬古泣書史 우활한 선비인 내가 옛 전적을 보며 눈물지었었는데 不意身親見此日 몸소 친히 이런 날을 볼 줄 몰랐다네. 流離唯日望官軍 유리걸식하며 오직 날마다 관군을 바라나 彼葛旄丘何誕節 저 모구의 칡덩굴은 어찌하여 길게 뻗을 정도로 구원병은 오지 않던가. 聞說長安遣帥初 듣자니 장안에서 장수를 파견할 초기에, 玉旒親推餞雙闕 천자가 친히 추천하여 궁문까지 나와 전별했다지. 天語哀痛皆耳聞 천자의 말 애통한 것을 모두 귀로 들었으니 臣子何心軀命恤 신하된 자 무슨 마음으로 몸과 목숨을 아꼈단 말인가. 錦城千羣竟無爲 금성의 숫한 백성들은 결국 하릴없게 되었고 朗州一戰難補失 낭주 한 번 싸움으로는 잃은 것 보전하기 어려웠다네. 月出山高九湖深 월출산 높고 구호봉 ..
1. 왜구로 달량성 사람들 죽어나네 達梁城頭日欲暮 달량성 머리의 해가 저물려 하니 達梁城外潮聲咽 달량성 바깥의 조수 소리는 흐느끼네. 平沙浩浩不見人 모래톱 넓디넓어 사람조차 보이질 않고 古道唯逢纏草骨 옛 길에선 오직 풀과 얽힌 해골만 만났네. 身經亂離心久死 몸은 난리를 겪느라 마음이 오래전에 죽어 慘目如今那更說 지금 같은 참혹한 광경을 어찌 다시 말하겠으리오. 當年獠虜敢不恭 그 해에 왜적 감히 불공하여 쳐들어와 絶徼孤城勢一髮 변방이며 외로운 성은 터럭 한 올 형세였는데, 將軍計下自作圍 장군은 계책 부족해서 스스로 포위되고 말았으니 士卒不戰魂已奪 사졸은 싸우지 않았음에도 넋 나갔지. 達嶼峯前陣如雲 달양성 섬 봉우리 앞에 왜적이 구름 같이 진을 치니 洪海原頭救來絶 너른 바다 어귀 구원 올 길이 끊겨 버렸네...
제대로 쓰였더라면 왜란을 막았을 송 대장군을 기리며 송대장군가(宋大將軍歌) 임억령(林億齡) 1. 도강의 지세 己酉十月海珍叟 遠來道康江村寓 山如怒馬振鬣驟 水作盤龍掉尾走 梗枏橘柚不足數 生此偉人英而武 ⇒해석보기 2. 도강의 지세가 길러낸 송대장군 力拔山兮氣摩宇 目垂鈴兮須懸帚 上接擣藥月裏兔 生縛白額山中虎 腰間勁箭大如樹 匣中雄劍遙衝斗 六十里射若百步 嵯峨石貫如弊屨 項籍縱觀彼可取 韓信頗遭淮陰侮 長鯨豈容一杯魯 蟠龍或困草間螻 千尋巨海夜飛渡 萬疊窮谷聊爲負 能敎野犬吠白晝 盡使海舶山前聚 邊人皆稱米賊酋 王師䝱息安能討 ⇒해석보기 3. 송대장군의 예기치 않은 죽음 那知天借女兒手 一夜絃血垂如縷 壯骨雖與草木腐 毅魂尙含風雷怒 爲鬼雄兮食此土 揷雉羽兮木爲塑 ⇒해석보기 4. 송대장군을 기리는 사당 彼何人兮怪而笑 毀而斥之江之滸 百年蕭條一間廟 ..
고증 4. 민중영웅이 사라지다 그런데 송대장군의 문학적 구비적 형상에는 삼별초 투쟁과 관련된 사실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 선명하게 부각된 것은 민중 구제의 측면이다. 「송대장군가」에서도 그렇거니와, 지역적 구전에서 훨씬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완도는 예로부터 해운의 요충이었던바 물길과 지명까지 낱낱이 들어가며 세미선(稅米船)을 모두 나포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실감이 난다. 곧 송징에게 ‘미적추(米賊酋)’라는 별호가 붙게 된 연유인 것이다. 그리하여 반역향(叛逆鄕)이라는 역사적 특수성과 도서라는 지역적 조건 때문에 억압과 착취를 편중되게 받고 있던 섬사람들을 구제하였으니,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그를 송대장군으로 길이 추모하는 까닭이다. 구한말에 편찬된 『완도군읍지』에서 장재도(長..
고증 3. 송대장군과 삼별초 1987년 10월에 나는 이런저런 궁금증을 안고서 완도로 현지답사를 갔다. 당장 놀라운 점은 송대장군이 완도 지역에서는 마을의 당신(堂神)으로 두루 받들어지고 있는 사실이다. 서해 도서에서 임경업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송대장군의 화신인 왕대를 어떤 왜놈이 함부로 꺼내 깔고 앉았다가 그 자리서 즉사했다고, 일제하까지 그 영웅 형상의 위력이 발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송대장군이 누구냐 물으면 대개 잘 모르겠다는 답변이었다. 그 지역의 향토사가인 박창제(朴昌濟) 옹을 소개받아 물어보게 되었다. 박옹은 송대장군에 관해 구전을 듣고 또 조사해서 가진 지식이 상당히 있는데 그 내용은 모두 『완도군지』(완도군지편찬위원회, 1977)와 『내 고장 전통 가꾸기』(박창제 편, 198..
고증 2. 반체제 우두머리가 민중의 영웅으로 이 송징은 어떤 활동을 벌였기에 대장군이라는 칭호까지 들었던가? 대장군의 직함이 공적인 국가기구에 의해 수여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지방지 기록은 정작 여기에 미쳐서는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 오직 「송대장군가」및 「송장군」의 시적 표현에서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천길이나 깊은 바다 한밤중에 나는 듯 건너와 / 만첩 산중 외진 골짝에 몰래 진을 치고는[千尋巨海夜飛渡 萬疊窮谷聊爲負 ]”이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그는 무리를 거느리고 섬으로 들어와서 천험의 요새를 장악한 모양이다. 그리고 무서운 용력과 비상한 책략을 구사해서 조운선이나 기타 선박의 물화를 탈취했던 듯싶다. 그런 중에 들개나 말을 이용하는 모종의 술수도 포함되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
고증 1.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완주군읍지에 실린 내용 시인은 주인공 송대장군을 분명히 역사상의 실제로 믿어 의심치 않고 그 인물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기려는 뜻에서 이 시를 지은 것이다. 지금 그 형상은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무척 흥미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사실의 측면에서 보면 여러가지 불분명하고 궁금하여 고증을 요하는 사항들이 있다. 이 작품은 시적 표현이라는 한계도 물론 없지 않으나 내용 성향이 원래 좀더 구체적이고도 선명하게 처리하기 곤란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송대장군의 실체를 해명하기 위해 문헌을 더듬고 현지답사를 나가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알아낸 약간의 사실을 정리해서 여기에 붙여둔다. 시인 임억령은 이 「송대장군가」를 장시로 쓰기에 앞서 「송장군」이란 제목의 율시를 지었다[徵也神..
해설. 민중 영웅의 형상화 이 시는 송대장군이라는 이름으로 추억되는 한 민중영웅의 형상을 부각시켜서 찬미한 노래다. 전체 구성이 복잡한 편인데 7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부는 서시로서 그 지역의 산천이 특히 수려함을 들어 영웅의 탄생을 예언한 다음, 제2부에서 걸출한 영웅의 실체를 드러낸다. 이 대목은 작품의 가장 요긴한 부분이니 주인공을 얼마나 위대한 모습으로 제시하느냐에 따라 뒤로 이어지는 제3부에서 제7부까지의 내용이 살아나느냐 맥 풀리느냐가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송대장군을 처음부터 돌출시키고 과장화의 필치를 구사하여 영용신출한 인물로 그려보였다. 제3부는 영웅의 비장한 최후 및 그 영혼이 민중에 의해 신으로 만들어진 사실을 소개한다. 제4부에서는 고루한 유생들이 이 영웅의 의미를 제대로 ..
7. 흔적조차 남지 않은 그대를 시로 담아낸 이유 壯公我髮豎 貴公吾腰俯 장한 그대여 나의 머리 쭈뼛 서고 귀한 그대여 나의 허리 구부리네.在古時未遇 於今骨已朽 옛날에 있어 때 만나지 못해 지금은 뼈가 이미 썩었겠지. 生爲海中寇 死棄海中霧살아선 해적이 되었다가 죽어선 바다의 안개에 버려졌네. 靑山本無墓 遺民誰爾後 청산엔 본디 무덤이 없으니 남겨진 백성 누가 당신의 후손이려나?問之於古老 首尾得細剖옛 노인에게 물어보니 시작부터 끝까지 자세히 알게 됐네. 太史徵人口 列傳猶不誤 역사가가 사람 입으로 증험해야 열전은 오히려 잘못되지 않으리. 莫道吾詩漏 庶幾國史補나의 시가 어설프다 말하지 마소. 거의 국사에 보탬이 될 테니.「石川先生詩集」 卷之五 인용 전문 해설
6. 용맹은 빼어났지만 제대로 못해 왜구의 침입을 당하다 聖朝如今帶戎虜 성스런 조정임에도 지금처럼 융로가 한 줄로 있으니 邊隅隨處羅防戍 변방 곳곳마다 방어를 위한 진 벌려 있네. 時時怯掠海島賈 이따금 섬의 장사치 겁탈하며 歲歲蕩盡司贍布 해마다 사섬포 탕진한다네. 明君包容每含垢 명군은 포용적이라 매번 때를 머금지만 邊將怯弱長縮首 변방의 장수는 나약해 길이 목을 움츠리네. 只是朝庭乏牙爪 다만 조정엔 용맹한 장수가 부족해 坐令蜂蠆喧庚午 앉은 채 벌과 전갈 같은 왜적들이 경오년에 시끄럽게 했지. 인용 전문 해설
5. 자로와 번쾌 같던 장군 公之勇健是天授 공의 용맹과 건강, 이것은 하늘이 준 것이니, 天之生也誰得究 하늘이 낳음을 누가 궁구할 수 있겠는가? 閔見蒼生塗炭苦 백성들 도탄에 빠진 괴로움 괴롭게 보기 때문에 故遣將軍欲一掃 장군 보내어 한 번 쓸어버리게 했네. 時無駕御英雄主 이때에 길들여 부리려는 영웅의 주인이 없어 長使奇才伏草莽 길이 기이한 재주임에도 풀섶에 엎드려 있었지. 若敎生漢遇高祖 만약 한나라 시기에 태어나 고조를 만났더라면 不曰安得四方守 “어이 용맹한 인재 얻어 지키랴.”라고 말하지 않았겠는가? 功名肯與噲等伍 공력과 명예는 기꺼이 번쾌 등과 같은 대열이기에 灞上棘門俱乳臭 패상극문의 장수들 모두 구상유취였네. 又使生魯見尼父 또한 만약 노나라에서 태어나 중니를 보았다면 不曰自吾得子路 “내가 자로를 얻..
4. 송대장군을 기리는 사당 彼何人兮怪而笑 저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괴이하다 비웃으며 毀而斥之江之滸 헐어버리고 강가에 물리치는가? 百年蕭條一間廟 100년 동안 쓸쓸한 한 칸의 사당엔 歲時伏臘鳴村鼓 세시와 복일과 납일 제사에 마을의 북 울린다네. 翩翩落日野巫禱 나풀나풀 떨어진 해에 들판의 무당은 기도하니 颯颯西風寒鴉舞 스산한 서풍에 추운 까마귀 춤추네. 靈之來兮飄天雨 영이 옴이여 하늘에 비가 쏟아지고 神之床兮瀝白酒 신이 자리함이여 흰 술을 거르네. 嗟呼此豈淫祠類 아! 이것이 어찌 음사의 종류이겠는가? 甚矣諸生識之陋 심하구나! 여러 사람들 식견의 비루함이여. 翦紙招魂着自古 종이 잘라 초혼함은 예로부터 그러했는데 往往下降叢林藪 이따금 혼이 우거진 수풀에 하강했네. 인용 전문 해설
3. 송대장군의 예기치 않은 죽음 那知天借女兒手 어찌 알았으랴? 하늘이 여자 아이의 손을 빌려 一夜絃血垂如縷 하룻밤에 시위에 피가 실 같이 드리워질 거라는 걸. 壯骨雖與草木腐 장골이지만 비록 초목과 썩어 毅魂尙含風雷怒 굳센 혼이기에 아직도 바람과 우레를 머금고 분노하지. 爲鬼雄兮食此土 귀신되어 웅장하기에 이 땅에 받아들여져 揷雉羽兮木爲塑 꿩깃털 꽂아지고 나무로 새겨졌다네. 인용 전문 해설
2. 도강의 지세가 길러낸 송대장군 力拔山兮氣摩宇 송대장군은 힘으론 산을 뽑아버릴 만하고 기로는 우주 어루만질 만하며 目垂鈴兮須懸帚 눈은 방울을 드리운 듯하고 수염은 빗자루 달아놓은 듯하네. 上接擣藥月裏兔 위로는 약을 찧는 달 속 토끼를 대하고 生縛白額山中虎 살아선 산 속의 백액호를 포박하지. 腰間勁箭大如樹 허리 사이엔 굳센 활의 크기가 나무 같고 匣中雄劍遙衝斗 상자 속 웅장한 검은 아득한 북두칠성 찌를 듯하지. 六十里射若百步 60리에서 활 쏘나 100보에서 쏘는 듯하여 嵯峨石貫如弊屨 우뚝한 바위 뚫린 게 헌 짚신인 것 같다네. 項籍縱觀彼可取 항적은 멋대로 보며 “진시황 자리 차지하리.”라고 말했고 韓信頗遭淮陰侮 한신은 심히 회음에서의 모욕을 당했지. 長鯨豈容一杯魯 긴 고래가 어찌 한 잔의 노주(魯酒)를..
1. 도강의 지세 己酉十月海珍叟 기유(1549)년 시월 해진의 늙은이 遠來道康江村寓 멀리 도강에 와서 강촌에 우거한다네. 山如怒馬振鬣驟 산은 화난 말이 갈기 휘날리며 달리는 것 같고 水作盤龍掉尾走 물은 서린 용이 꼬리 흔들며 달아나는 것 같네. 梗枏橘柚不足數 도라지와 녹나무와 귤과 유자는 세지 못할 정도이니 生此偉人英而武 여기서 태어난 사람은 위대한 사람으로 영특하고도 무예 넘치지. 인용 전문 해설
01 永平十一年, 廬江皖侯國{民}際有湖. 皖民小男曰陳爵·陳挺, 年皆十歲以上, 相與釣於湖涯. 挺先釣, 爵後往. 爵問挺曰: “釣寧得乎?” 挺曰: “得!” 爵卽歸取竿綸. 去挺四十步所, 見湖涯有酒罇, 色正黃, 沒水中. 爵以爲銅也, 涉水取之, 滑重不能擧. 挺望見, 號曰: “何取?” 爵曰: “是有銅, 不能擧也.” 挺往助之, 涉水未持, 罇頓衍更爲盟盤, 動行入深淵中, 復不見. 挺·爵留顧, 見如錢等, 正黃, 數百千枝(枚), 卽共掇摝, 各得滿手, 走歸示其家. 爵父國, 故免吏, 字君賢, 驚曰: “安所得此?” 爵言其狀. 君賢曰: “此黃金也!” 卽馳與爵俱往. 到金處, 水中尙多. 賢自涉水掇取. 爵·挺鄰伍並聞, 俱競採之, 合得十餘斤. 賢自言於相, 相言太守. 太守遣吏收取. 遣門下掾程躬奉獻, 具言得金狀. 詔書曰: “如章則可. 不如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