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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200. 양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200. 양

건방진방랑자 2020. 4. 28.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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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

많고 적음을 다는 기구.

 

()

소연(蕭衍)이 세운 중국 남조(南朝)의 제3왕조(502557). 소량(蕭梁)이라고도 한다. 남제(南齊) 말 내란이 일어나자 옹주자사(雍州刺史) 소연은 501년 건강(建康; 南京)을 공략, 폭군 동혼후(東昏侯)를 퇴위시키고 남강왕(南康王)을 화제(和帝)로 추대하여 스스로는 상국(相國)이 되었으나, 502년 화제를 선양(禪讓)받아 제위(武帝)에 오르고 국호를 양이라 하였다. 무제가 다스린 48년간의 전반은 내정의 정비에 힘썼고, 후반에는 무제 스스로가 불교신앙에 열중하여 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내정의 질서는 흩어졌다. 548년 북조(北朝)의 동위(東魏)에서 망명한 후경)侯景)이 건강에서 반란을 일으켜 궁중에 유폐된 무제는 병사하고, 2대 간문제(簡文帝)도 피살되었다. 후경의 난은 왕승변(王僧弁)ㆍ진패선(陳覇先)에 의해 평정되었으나, 그 뒤 이들 사이에 쟁투가 벌어져 이에 따라 황제의 폐립이 빈번하였다. 5544대 원제(元帝)가 서위(西魏)의 공격을 받고 죽자 2대 간문제의 아들인 악양왕(岳陽王) 소찰(蕭樽)은 서위의 보호 아래 괴뢰정권인 후양(後梁)을 세웠다. 한편 앞서 후경의 난을 평정한 진패선은 555년 민제(閔帝)와 경제(敬帝)를 잇달아 5, 6대 황제로 옹립하여 양나라의 법통을 이었으나, 557년 경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 나라를 세워 제위에 오르고 양나라는 멸하였다.

 

()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물 이름인데, 그 지방 사람들은 산골짜기에서 강으로 흘러내려 가는 물을 양이라고 하는바, 두보(杜甫)가 일찍이 기주(夔州)에서 살 적에 양수의 동쪽과 서쪽 등으로 여러 차례 이사하며 살았던 데서 온 말이다. 두보의 기주가(夔州歌)양동과 양서에는 일만 호의 집이요 강북과 강남에는 봄과 겨울의 꽃이로다[瀼東瀼西一萬家 江北江南春冬花].”하였다. 두소릉집(杜少陵集)卷十五

 

()

후한 성도인(成都人) 양웅(揚雄)이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고 성제(成帝) 때에 황제가 불러서 감천(甘泉), 하동(河東), 장양(長楊) 등의 부를 올렸다. 한서(漢書)卷八十七

 

양가대사릉소한(梁家臺榭凌霄漢)

양씨는 후한(後漢) 때 왕실의 외척으로 발호(跋扈)하여 조권(朝權)을 전횡했던 양기(梁冀)를 이르는데, 그는 고루 거각(高樓巨閣)을 짓고 금은 주옥(金銀珠玉)으로 장식하여 엄청난 사치를 누렸으므로 한 말이다. 후한서(後漢書)卷三十四

 

양가장(楊家將)

북송(北宋)의 명장인 양업(楊業)의 가문에 대대로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들 중에서도 기예가 출중한 영웅들이 배출되었으므로 양가장(楊家將)이라는 미칭이 있게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송사(宋史)』 「양업전(楊業傳)

 

양간낙일(兩竿落日)

해가 지려면 아직도 한 장대만큼 거리가 남았다는 것이다.

 

양갑(羊胛)

양의 어깨 뼈.

 

양갑숙(羊胛熟)

시간이 짧고 빠름. 골리알부(骨利斡部)는 한해(瀚海) 북쪽에 있는데, 거기서 또 북으로 바다를 건너면 낮이 길고 밤이 짧아, 해가 지자 양의 어깻살(羊胛)을 삶아 익을 동안에 동쪽이 벌써 밝는다.

 

양갑적숙(羊胛適熟)

양의 어깨뼈 부위(羊胛)는 쉽게 삶아지기 때문에 시간의 빠름을 나타낼 때 쓰는 표현인데, 신당서(新唐書)회흘전(回紇傳)골리알부(骨利斡部)는 한해(瀚海)에 있는데, …… 더 북쪽으로 건너가면 낮이 길고 밤이 짧기 때문에, 해가 질 때 양의 어깨뼈를 삶기 시작해서 그것이 다 익을 때쯤엔 벌써 동쪽 하늘이 밝아 온다[晝長夜短 日入烹羊胛 熟東方已明].”는 기록이 있다. 신이경(神異經)』 「동황경(東荒經)

 

양강(楊江)

소동파(蘇東坡)가 임술년(壬戌年) 7월 기망(旣望)에 적벽(赤壁)에서 노닌 고사를 본떠, 택당(澤堂)이 벗들과 함께 여강(驪江)의 하류인 양강(楊江)의 대탄(大灘)에서 회동하여 사흘 낮밤을 보내었다. 전적벽부(前赤壁賦)

 

양거(羊車)

()이 끄는 수레. 일명은 연거(輦車)라고도 하는데, 진 무제(晉武帝)가 총애하는 궁녀가 하도 많아 어느 궁녀를 찾아가야 될 줄 모르므로 항상 이 양거를 타고 양이 가는 대로 따라가서 침소를 정하였기 때문에 궁녀가 자기 문 앞에다 대잎을 따다 꽂고 땅에다 염즙(鹽汁)을 뿌려서 양거를 유인하였다 한다. 진서(晉書)』 「호귀빈전(胡貴嬪傳)

 

양경(兩京)

동경(東京)과 서경(西京), 즉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을 가리킨다.

 

양경(兩京)

평양(平壤)과 개성(開城)을 합칭한 말이다.

 

양경(楊卿)

한 선제(漢宣帝) 때의 명사(名士)로서 곽씨(霍氏)의 모반을 고변하여 지위가 경()에 오르고 통평후(通平侯)에 봉해졌던 양운(楊惲)을 가리킨다. 그는 뒤에 참소를 입어 폐서인이 되었다가 끝내 처형되었다.

 

양경(襄磬)

양의 경쇠. ()은 주()나라 말기에 경쇠 치는 일을 맡은 악관(樂官)을 이른다. ()가 무도하므로 난을 피하여 바다로 들어갔다고 한다. 논어(論語)』 「미자(微子)

 

양경취후남산편(楊卿醉後南山篇)

양경(楊卿)은 한 선제(漢宣帝) 때에 곽씨(霍氏)의 모반(謀反)을 고변하여 열경(列卿)에 오르고 평통후(平通侯)에 봉해진 양운(楊惲)을 말한다. 그는 본디 염결(廉潔)하고 재주가 뛰어난 선비로서 평소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고 남의 음사(陰私)를 파헤치기 좋아한 것 때문에 조정에 그를 원망하는 자가 많았다. 그리하여 태복(太僕) 대장락(戴長樂)이 그를 임금에게 참소하자, 임금이 그를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관작을 삭탈하여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그러자 양운은 집에서 재산을 모으고 빈객을 모아 노니는 것을 즐기므로, 그의 친구 손회종(孫會宗)이 자중하라는 뜻으로 편지를 보내 충고하니, 그가 손회종에게 답한 글에 대략 죄가 많은 사람으로서 의당 조용히 농사나 짓다 죽어야겠으나, 때로는 안주를 장만해놓고 두주(斗酒)로 자신을 위로하는데, 술이 거나해지면 하늘을 쳐다보고 질장구를 두드리며 노래를 하노니, 그 시에 저 남산에 밭이 있노니 묵어서 다스리지 못하도다. 한 이랑의 콩을 심었더니 떨어져서 빈 줄기만 남았도다[田彼南山 蕪穢不治 種一頃豆 落而爲萁].’라고 한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의 내용은 곧 조정의 황란(荒亂)함과 자신의 방기(放棄)된 처지를 풍자한 것이다. 한서(漢書)卷六十六

 

양계(兩戒)

당서(唐書)』 「천문지(天文志)온 천하에 산하(山河)의 형상이 두 경계(兩戒)에 달렸으니, 북쪽 경계는 융적(戎狄)까지 한계를 하였고, 남쪽 경계는 만이(蠻夷)까지 한계를 했다.” 하였다.

 

양계이간유묘격(兩階已看有苗格)

우순(虞舜)이 두 섬돌 사이에서 간우(干羽)를 춤추자 유묘가 감복한 것을 가리킨다. 우순은 순 임금을 말하고, 간우는 방패와 깃털을 들고 춤을 추는 하 나라 무악(舞樂)의 이름이며, 유묘는 남방에 사는 오랑캐의 이름이다. 서경(書經)』 「우서(虞書), “임금이 문교와 덕을 크게 펴고 방패와 새 깃을 들고 두 섬돌 사이에서 춤을 추자 70일 만에 유묘가 감복하였다.” 하였다.

 

양고주(羊羔酒)

미주(美酒)의 이름이다. () 나라 때 도곡(陶穀)이 당가(堂家)의 미희(美姬)를 얻어 살면서 겨울철에 설수(雪水)로 차를 끓이며 말하기를 당가에서도 이런 풍미(風味)를 알더냐?”하니, 미희가 대답하기를 저 추솔한 사람에게 어찌 이런 풍미가 있겠습니까. 다만 화류가(花柳家)에서 노래하며 양고주나 마실 뿐입니다.” 하였다.

 

양곡(梁鵠)

동한(東漢) 때 사람. 자는 맹황(孟皇). 선부상서(選部尙書)를 지냈으며 팔분(八分)을 잘 썼다.

 

양곡(暘谷)

해가 돋는 곳을 말한다. 서경(書經)』 「요전(堯典), “희중(羲仲)을 분명(分命)하여 우이(隅夷)에 택()하게 하니 이른바 양곡(暘谷)이다.” 하였고,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에는 해가 양곡(暘谷)에서 나와 함지(咸池)에서 목욕한다.” 하였다.

 

양곡우연(暘谷虞淵)

양곡(暘谷)과 우연(虞淵). 양곡(暘谷)은 전설 속에 나오는 해가 뜨는 곳이며, 우연(虞淵)은 해가 져서 들어가는 곳을 말한다.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 “해가 뜨는 곳을 양곡이라고 한다.” 하였고, “해가 우연에 도달하는 것을 일러 황혼이라고 한다.” 하였다.

 

양곡훈(暘谷暈)

일출(日出) 직전 혹은 직후의 노을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양곡은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나오는 말로, 해가 뜨는 곳을 가리킨다.

 

양공(梁公)

당 나라 무후(武后)가 당실(唐室) 이씨(李氏)를 제거하고 무씨(武氏)의 종묘(宗廟)를 세웠는데 적인걸(狄仁傑)의 무리가 중종(中宗)을 받들어 반정(反正)하여 당실(唐室)을 회복시켰다. 적인걸을 양공(梁公)에 봉하였다.

양국공(梁國公)에 봉해진 당 나라의 적인걸(狄仁傑)을 가리킨다. 적인걸이 강남 순무사(江南巡撫使)가 되었을 때 오초(吳楚) 지방에 음사(淫祠)가 몹시 많았는데, 17백 곳의 음사를 철거하였다. 구당서(舊唐書)89 적인걸열전(狄仁傑列傳)

 

양공(羊公)

진 무제(晉武帝)의 신하 양호(羊祜)를 말한다. 양호는 경치가 좋은 현산을 사랑하여 언제나 이 산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내가 죽어서 혼백(魂魄)이 있으면 응당 이 산에 오를 것이다.” 하였다. 진서(晉書)卷三十四 양호전(羊祜傳)남조(南朝) 때 송()의 포조(鮑照)는 무학부(舞鶴賦)를 지었는데, 그 부에 양호의 전신(前身)이 우물속에 빠져 죽었다.” 하였다.

 

양공(楊公)

명 나라 양조(楊照)를 가리킨다. 양조는 가정(嘉靖) 연간에 여러 차례 무공을 세워 요동 총병관(遼東總兵官)이 되어 호적(胡賊)을 막기 위해 축도(築道)를 쌓았다.

 

양공종옥(楊公種玉)

양공(楊公)은 한() 나라 때의 효자인 옹백(雍伯)을 가리킨다. 옹백은 낙양(洛陽) 사람으로 무종산(無終山), 즉 옥전(玉田)에서 살았는데, 어떤 사람이 돌 한 되를 주면서 땅에 심게 하였다. 몇 년 뒤에 서씨(徐氏) 집에 딸이 있어서 옹백이 장가들고자 하였는데, 그 집에서 백옥 한 쌍을 폐백으로 바치라고 하였다. 이에 옹백이 돌을 심었던 밭에 가서 다섯 쌍의 백옥 구슬을 캐서 바치니 서공이 딸을 주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구름 속에서 용이 내려와 이들 부부를 맞이해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그 후손들이 밭 가운데 비석을 세워 그 일을 기록하였다.

 

양공천읍인(楊公薦邑人)

한 무제가 사마상여(司馬相如)자허부(子虛賦)를 읽다가 짐이 이 부를 지은 사람과 한 시대에 나지 못하였다.”고 아쉬워하자 옆에 있던 양득의(楊得意)그 부는 바로 신의 한 고향 사람 상여가 지었다.”고 대답하니 무제가 흠칫 놀라며 상여를 불러 사실을 알고 나서 다시 상림부(上林賦)를 짓도록 하였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양공탄설(羊公炭屑)

양공(羊公)은 양수(羊琇)를 말한다. 진서(晉書)39양수는 경헌황후(景獻皇后)의 종제(從弟)로 성품이 매우 사치스러웠는데, 당시 낙양(洛陽)에 숲이 적어 숯이 곡식처럼 귀하였으나 수()는 숯가루를 만들어 이것으로 짐승의 모양을 만들었다.” 하였다.

 

양곽(羊鞹)

자신의 재능이 부족했다고 겸사한 말로, 자공(子貢)의 말에 문채는 바탕과 같고 바탕은 문채와 같아야 하는 것이니, 범이나 표범의 가죽도 털을 제거하면 개나 염소의 가죽과 같다[文猶質也 質猶文也 虎豹之鞟 猶犬羊之鞟].” 한 데서 온 말이다. ()은 즉 털을 제거한 가죽을 말한다. 논어(論語)』 「안연(顔淵)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의 병칭이다.

 

양관(楊綰)

() 나라 대종(代宗) 때의 예부 시랑으로 진사(進士)ㆍ명경과(明經科)를 폐지하고 효렴(孝廉)의 제도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신당서(新唐書)44 選擧志 上

 

양관곡(陽關曲)

이별을 슬퍼하는 노래.

 

양관무고인(陽關無故人)

양관은 중국 감숙(甘肅) 돈황현(敦煌縣) 서남쪽에 있는 관문이름으로, 고대에 서역(西域)과 통하는 험한 길이다. 왕우승집(王右丞集) 5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권하노니 그대여 한 잔 더 드시게나 서쪽 양관 나서면 정겨운 벗 없으리(勸君更盡一杯酒 西出陽關無故人).”에서 나온 것이다.

 

양관삼첩(陽關三疊)

양관(陽關)은 곡()의 이름인데, () 나라 왕유(王維)의 시에, “渭城朝雨浥輕塵 客舍靑靑柳色新 勸君更進一盃酒 西出陽關無故人이란 것을 뒷사람이 악부(樂府)에 편입시켜 송별의 곡으로 삼았다. 이를 양관곡(陽關曲)이라고도 하는데 이 양관곡을 삼첩(三疊)하는 것을 말한다. 삼첩이란 시()를 창()할 때에 읍경진(浥輕塵), 읍경진, 조우읍경진(朝雨浥輕塵), 조양읍경진, 조양읍경진, 위성조양읍경진(渭城朝雨浥輕塵).”이런 식으로 4()를 창하는 것이다. 이 시의 본래의 제목은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이다.

 

양관삼첩가(陽關三疊歌)

금곡(琴曲) 이름으로, 당 나라 왕유(王維)의 시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의 가사를 주된 내용으로 한 곡인데, 이별의 정을 노래한 곡이며, 원시(原詩)를 세 차례 반복하여 읊으므로 삼첩가라고 한다. 후대에는 범범하게 이별의 노래를 양관곡(陽關曲)이라고도 한다.

 

양관삼첩가(陽關三疊歌)

왕유(王維)의 작별하는 시에, “그대여, 한 잔술 다시 권하노니, 서쪽으로 양관(陽關)에 나가면 고인(古人)이 없느니.” 하였다.

 

양광피발(佯狂被髮)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짓 미치광이 노릇을 한다. () 나라가 망해갈 때 기자(箕子)가 그랬다고 한다. 사기(史記)』 「송세가(宋世家)

 

양교(陽橋)

설원이정(說苑理政)에 의하면, 양교(陽橋)라는 물고기는 생김새가 얇고 맛이 좋지 않다고 하였다.

 

양교(楊喬)

후한 환제(後漢桓帝) 때의 정치가. 자는 성달(聖達). 환제가 그를 부마(駙馬)로 삼으려 했으나, 끝내 듣지 않고 굶어 죽었음. 벼슬이 상서(尙書)에 이른다.

 

양구(陽九)

술수가(術數家)의 설에서 4617년을 일원(一元)이라 하는데, 시작되어 106년이 될 때까지의 사이에 9년의 한재(旱災)가 드는바, 이를 양구라 한다. 또 태을수(太乙數)에서 456년을 양구, 288년을 백륙이라고 하는데, 도가에서는 하늘의 재앙을 양구, 땅의 붕괴를 백륙이라 한다. 곧 험난한 세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양구(羊裘)

양의 가죽으로 만든 갖옷인데, 후한(後漢) 때 은사 엄광(嚴光)이 양구를 입고 늪에서 낚시질하며 은거(隱居)했던 데서 온 말이다. 전하여 은사의 옷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일민전(逸民傳)嚴光

 

양구(羊求)

한 애제(漢哀帝)때 단정하고 청렴하기로 이름난 양중(羊仲)과 구중(求仲)의 병칭(竝稱)이다. 당시에 그들의 벗 장후(蔣詡)왕망(王莽)이 섭정을 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외부와 통하는 길 세 가닥을 터놓고 하나는 자기가, 나머지는 그들이 각기 다니는 길로 삼아 서로 왕래하며 살았다 한다. 삼보결록(三輔決錄)장허(蔣詡)……집 가운데 세 오솔길에서 양중과 구중만이 그를 따라 놀았다.” 하였다.

 

양구수견자릉피(羊裘須遣子陵披)

엄자릉(嚴子陵)처럼 숨는다는 뜻이다. 후한서(後漢書)』 「엄광전(嚴光傳)황제가 어려서 엄광과 함께 배웠으므로 황제가 되매 물색(物色)으로 찾으니 얼마 후 제국(齊國) 땅에 어느 남자가 염소 가죽옷을 입고 못가에서 낚시한다고 아뢰는 사람이 있었다.” 하였다.

 

양구일백륙(陽九一百六)

술수가(術數家)의 설에서 4617년을 일원(一元)이라 하는데, 시작되어 106년이 될 때까지의 사이에 9년의 한재(旱災)가 드는바, 이를 양구라 한다. 또 태을수(太乙數)에서 456년을 양구, 288년을 백륙이라고 하는데, 도가에서는 하늘의 재앙을 양구, 땅의 붕괴를 백륙이라 한다. 곧 험난한 세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양구자(羊裘子)

염소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 ()의 엄광(嚴光)을 말한 것으로 엄광은 자기 학우(學友)였던 무제(武帝)가 제위(帝位)에 오르자 변성명을 하고 세상에 숨어 양피로 된 옷을 입고 여울 가에서 고기를 낚으며 일생을 마쳤다. 한서(漢書)』 「엄광전(嚴光傳)

 

양구재액(陽九災厄)

16년마다 찾아 오는 재액으로서 기막힌 불운(不運)을 말한다.

 

양군정(讓君情)

고죽군(孤竹君)이 작은아들 숙제(叔齊)를 후계자로 정하고 죽은 뒤에, 숙제가 형 백이(伯夷)에게 그 자리를 사양하였으나, 백이가 아버지의 명령을 존중하여 도망치므로 숙제 역시 뒤따라 도망쳐버린 일을 말한다.

 

양귀(良貴)

천부(天賦)의 덕성(德性)인 양심을 말한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귀히 여기는 것은 양귀(良貴)가 아니다. 그러나 조맹(趙孟)이 귀하게 해준 것은 그가 또한 천하게 할 수도 있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조맹은 진() 나라의 경()으로서 작록(爵祿)을 가지고 사람을 귀하게도 천하게도 할 수가 있으나, 본연의 양심인 이 양귀는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맹자(孟子)』 「고자(告子)

하늘로부터 받은 벼슬을 가리키는데, ()ㆍ의()ㆍ충()ㆍ신() 등은 하늘로부터 받은 천작(天爵)이고, ()ㆍ경()ㆍ대부(大夫) 등은 인간이 만든 인작(人爵)인데, 양귀는 천작을 말한다. 맹자(孟子)』 「고자(告子)

본연(本然)의 선()을 말한다. 맹자(孟子)』 「고자(告子), “관작(官爵)은 인귀(人貴)이고, 덕은 본래 타고난 귀함(良貴)이다.” 하였다.

 

양금택목(良禽擇木)

어진 사람은 임금을 잘 가려서 섬긴다는 말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애공(哀公) 11년에 새가 나무를 가려 앉는 법, 나무가 어찌 새를 가리랴[鳥則擇木 木豈能擇鳥]”라는 말이 있다.

 

양기(梁冀)

동한(東漢) 때의 권신(權臣). 양기는 순제(順帝) 때 양 태후(梁太后)의 오빠로서 권력을 잡았으며, 순제가 죽은 뒤 질제(質帝)를 세웠다가, 질제가 미워하자 그를 독살한 다음 환제(桓帝)를 세웠다. 그런데 환제가 자라서는 양기가 발호하는 것을 미워하여 양기의 권력을 빼앗자 자살하였다. 후한서(後漢書)34 梁統列傳 梁冀

 

양기(楊基)

자는 맹재(孟載), 호는 미암(眉菴). 시문과 서화에 능하였다.

 

양기(兩岐)

한 나라 장감(張堪)이 어양 태수(漁陽太守)로 가서 백성에게 농종(農種)을 가르쳐 해마다 풍년이 드니 백성들이 즐거워서 노래하기를 桑無附枝 麥穗兩岐 張君爲政 樂不可支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장감전(張堪傳)

 

양기설(養氣說)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나는 남의 말을 잘 알며(知言)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라고 보인다.

 

양기장(養氣章)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에 맹자가 나는 남의 말을 잘 알며(知言)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양노(楊盧)

양형과 노조린. 왕발(王勃)ㆍ낙빈왕(駱賓王)과 함께 초당(初唐) 사걸(四傑)로 불린 당 나라의 문장가들이다.

 

양능(良能)

천연적으로 발로되는 지능을 말한다.

 

양능촉사(羊能觸邪)

옛날 뿔이 하나인 해태(獬豸)라는 신양(神羊)은 형벌을 알맞게 다스리는 임금의 조정에 나와서 정직하지 못한 자를 뿔로 들이받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양담(羊曇)

() 나라 사람으로, 사안(謝安)이 그를 애지중지하였는데, 사안이 죽자 양담이 그를 사모하여 평소 거하던 서주(西州)의 길은 경유하지도 않다가, 어느 날 만취하여 무의식중에 노래를 부르면서 서주 성문에 이르자 살아서는 으리으리한 집에 살더니 죽어서는 산 언덕에 묻혔구나.”라는 조자건(曹子建)의 시를 읊고 통곡하며 떠났다 한다. 진서(晉書)79 사안전(謝安傳)

 

양담루(羊曇淚)

옛날의 은혜를 생각하며 비감(悲感)에 젖어 흘리는 눈물이다. () 나라 사안(謝安)의 생질인 양담(羊曇)이 사안이 죽은 뒤 술에 취해서 서주(西州)의 문을 지나다가 사안 생각에 산구화옥(山丘華屋)’의 시를 읊고는 통곡하며 떠나간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 「사안전(謝安傳)

 

양담불인과(羊曇不忍過)

옛날의 극진했던 은혜를 생각하면 눈물이 솟구쳐 생전에 거처했던 곳을 차마 지나가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 나라 때 사안(謝安)의 생질인 양담(羊曇)이 사안의 총애를 많이 받다가 그가 죽자 서주(西州)의 길을 차마 지나가지 못했는데, 어느 날 대취(大醉)하여 부지불식간에 서주의 문에 이르자 生存華屋處 零落歸山丘라는 시를 읊고 통곡하며 떠나갔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진서(晉書)79

 

양담한(羊曇恨)

() 나라 양담(羊曇)이 사안(謝安)의 사랑을 듬뿍 받다가 사안이 죽자 음악을 멀리하면서 서주(西州)로 가는 길은 통행을 하지 않았었는데, 언젠가 술에 만취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래를 부르면서 서주의 문에까지 오게 되자, 비감(悲感)에 젖어 말채찍으로 문짝을 두드리면서 生存華屋處 零落歸山丘라는 조자건(曹子建)의 시를 읊고는 통곡하며 떠나갔다고 한다. 진서(晉書)79 양담전(羊曇傳)

 

양답(羊踏)

늘 채식만 하고 육식하는 때가 적은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해록쇄사(海錄碎事)평소에 야채만 먹던 사람이 갑자가 양고기를 먹었더니, 꿈에 오장신(五臟神)이 나타나 말하기를 양이 내 소채밭을 밟아 망쳐놓았다.’ 하였다.” 한다.

 

양답채(羊踏菜)

염소가 채소밭을 밟아 망쳤다는 뜻으로, 평소 채식가가 어쩌다 육식을 한 것을 익살적으로 비유한 말이다.

 

양답채난번(羊踏菜難蕃)

어떤 사람이 항상 채소만 먹다가 갑자기 양고기를 먹었더니, 꿈에 오장신(五藏神)이 말하기를, “()이 나의 채소밭을 짓밟아 망쳤다.” 하였다.

 

양대(陽臺)

남녀가 성교하는 것을 말한다. 초 양왕(楚襄王)이 일찍이 고당(高唐)에서 놀다가 낮잠을 잤는데, 꿈에 한 부인이 와서 저는 무산(巫山)의 여자로서 임금님이 여기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왔으니, 침석(枕席)을 같이해 주십시오.” 하므로, 임금은 하룻밤을 그와 함께 잤다. 그 이튿날 아침에 부인이 떠나면서 저는 무산의 양지쪽 높은 언덕에 사는데 매일 아침이면 구름이 되고 저녁이면 비가 됩니다.” 하였다는 고사이다.

해가 잘 비치는 대.

 

양대녀(襄臺女)

남녀(男女)가 서로 만나 즐기는 곳을 양대라 한다. 초 회왕(楚懷王)이 운몽(雲夢)에 가서 노는데, 한번은 꿈에 신녀(神女)가 나타나 자칭 무산신녀(巫山神女)라 하므로 그곳 산 밑에다 양대(襄臺)를 만들었다 한다.

 

양대몽(陽臺夢)

무산(巫山) 신녀(神女)의 고사를 말한 것이다. 송옥(宋玉)의 고당부서(高唐賦序), “첩은 무산의 남쪽, 고구(高丘)의 아래 있으며 아침에는 조운(朝雲)이 되고 저물녘에는 행우(行雨)가 됩니다.” 하였다.

 

양대불귀지운(陽臺不歸之雲)

한 번 정교(情交)를 맺고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여 말한다.

 

양대성일몽(陽臺成一夢)

양대는 무산지몽(巫山之夢)과 같은 뜻으로, 즉 남녀의 정교(情交)를 이른다. ()나라 양왕(襄王)이 일찍이 고당(高唐)에서 놀다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부인이 와서 저는 무산(巫山)의 여자로서 고당의 나그네가 되었던 바, 임금님이 여기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왔으니, 침석(枕席)을 같이해 주십시오.” 하므로 임금은 하룻밤을 같이 잔 뒤, 이튿날 아침에 부인이 떠나면서 저는 무산의 양지쪽 높은 언덕에 사는데, 매일 아침이면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됩니다.” 하였다는 고사이다. 송옥(宋玉), 고당부(高唐賦)

 

양대우(陽臺雨)

초 회왕이 고당(高唐)에서 놀다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어떤 여자가 와서 저는 무산의 여자인데 침석(枕席)을 원합니다.” 하므로 동침을 하였는데 떠나면서 저는 양대의 아래에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됩니다.”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인용된 것이다. 송옥(宋玉), 고당부(高唐賦)

 

양덕칠일래(陽德七日來)

양의 기운이 완전히 없어진 뒤 7일이 지나면 다시 양의 기운이 소생하기 시작한다는 말로, 음과 양의 기운이 서로 순행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복괘(復卦), “그 도를 반복하니 칠 일 만에 되돌아온다[反復其道 七日來復].”하였다.

 

양도(兩都)

강도(江都)와 송도(松都), 즉 경기 지방의 강화(江華)와 개성(開城)을 가리키는 말이다.

 

양도부(兩都賦)

후한(後漢) 반고(班固)가 지은 동도부(東都賦)ㆍ서도부를 말한다. 전한(前漢)의 서도(西都) 장안(長安), 후한의 동도(東都) 낙양(洛陽)을 각기 치켜 올린 부()이다.

 

양동(瀼東)

양수(瀼水)의 동쪽이다. 두보(杜甫)가 기주에 있을 때 남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농사를 지었다. 두시비해(杜詩批解)卷二十 卜居, 夔州歌十絶句

 

양동서(瀼東西)

중국 기주부(夔州府)에 있는 양수(瀼水)의 동쪽과 서쪽 지역으로, 당 나라 두보(杜甫)가 그곳에서 남의 초가집을 빌려 살았다 하여 은거지를 말한다.

 

양두구육(羊頭狗肉)

양의 머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팜. 겉모양은 훌륭하나 속은 변변치 않음을 말한다. 겉으로 내세우는 말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이 상반되거나 큰 차이가 있을 때, 즉 밖으로 표방하는 것과 실제로 추구하는 것이 전혀 달라 남을 속이는 격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양득의(楊得意)

예전 한무제(漢武帝) 때에 사마상여(司馬相如)가 곤궁하게 지내는데, 그의 친구 양득의가 황제의 개 기르는 감독(狗獨)으로 있으면서, 황제에게 신의 고향 친구 사마상여가 부()를 잘 짓는다고 추천하여 황제가 불러 보고 등용시켰다 한다.

 

양락(羊酪)

양유(羊乳)로 만든 죽으로 고급 식품이다.

 

양락순갱(羊酪蓴鱸)

()나라 명사(名士)들 사이에 북방에는 양락(羊酪)이 맛이 있고 남방에는 순채(蓴鱸) 국이 맛이 있다 하였다.

 

양래답소(羊來踏蔬)

채소를 밟는다.’ 함은, , 어떤 사람이 항상 채소만 먹다가 어느 날 갑자기 양고기를 먹었더니, 그날 밤 꿈에 오장신(五臟神)이 나타나 이르기를 양이 와서 채소밭을 밟아 버렸다.”고 하더라는 고사에서 나온 문자로, 채소만 먹다가 고기 맛을 보게 된다는 것을 익살스럽게 하는 말이다.

 

양량(悢悢)

슬퍼하고 아파하는 모양, 불쌍히 여기어 돌보는 모양

 

양량(凉凉)

친밀감이 없는 모양, 경솔한 모양, 서늘한 모양

 

양렴간(讓廉間)

양렴(讓廉)은 양주(梁州)에 있는 양수(讓水)와 염천(廉泉)을 합칭한 말이다. 남조송(南朝宋)때 양주의 범백년(范柏年)이 송 명제(宋明帝)를 알현했을 적에 명제가 광주(廣州)의 탐천(貪川)을 언급한 다음 범백년에게 묻기를 ()의 고을에도 이런 물이 있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양주에는 오직 문천(文川)ㆍ무향(武鄕)과 염천ㆍ양수가 있을 뿐입니다.” 하므로, 명제가 또 묻기를 경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사는 곳은 염천과 양수의 사이입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남사(南史)』 「호해지전(胡諧之傳)

 

양령오칠포(揚舲烏漆浦)

오칠(烏漆)은 안장(鞍裝)의 별칭인 만큼 말을 치달렸어야 했는데 배를 탔다는 말이다. 송사(宋史) 여복지(輿服志)자라원편(紫羅圓鞭)에 오칠안(烏漆鞍)”이라는 말이 있다.

 

양로(楊盧)

화려한 문장으로 초당(初唐)을 풍미한 양형(楊炯)과 노조린(盧照隣). 왕발(王勃)ㆍ낙빈왕(駱賓王)과 함께 당 나라 초기의 사걸(四傑)로 일컬어졌음. 당서(唐書)卷二百一

 

양록(楊麓)

양구의 옛 이름이다.

 

양류(楊柳)

보통 미인에 비유하여 쓰는 표현으로 특히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는데 참고로 한 수를 소개하면 何處春深好 春深妓女家 眉欺楊柳葉 裙妬石榴花 蘭麝薰行被 金銅釘坐車 杭州蘇小小 人道最夭斜라는 시가 있다. 백락천시집(白樂天詩集)後集 卷9 和春深 第二十首

 

양류병(楊柳甁)

불가의 감로수(甘露水)를 담은 병으로 관음보살이 들고 있다.

 

양류절(楊柳折)

중국사람들은 작별할 때에 버들가지를 꺾어서 주는 풍속이 있다.

 

양류풍류(楊柳風流)

장서(張緖)는 남제(南齊) 오군(吳郡) 사람인데 소시적부터 문재(文才)가 있었고 풍자(風姿)가 청아하였다. 무제(武帝)는 촉류(蜀柳)를 영화전(靈和殿) 앞에 심어두고 일찍이 말하기를 이 버들은 풍류가 가애(可愛)하여 장서의 당년(當年)과 같다.” 하였다.

 

양률초회갈석궁(陽律初回碣石宮)

일양(一陽)이 시생(始生)하는 동지(冬至)가 돌아왔다는 말이다. 갈석궁은 연 소왕(燕昭王)이 추연(鄒衍)을 위해 지어 준 궁 이름인데, 추연이 북방의 한랭한 지역에 율관(律管)을 불어(吹律) 날씨를 따뜻하게 해서 곡식이 잘 자라도록 한 고사가 있기 때문에 원용한 것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鄒衍之吹律 注

 

양리(良吏)

훌륭한 지방 장관을 말한다.

 

양리(楊李)

당 현종(唐玄宗)의 재상으로 나라를 망친 양국충(楊國忠)과 이임보(李林甫)를 가리키는데, () 나라 원진(元稹)연창궁사(連昌宮辭)’권세 부린 재상 이름 분명히 생각은 안 나지만, 어렴풋이 떠오르긴 양리라고 기억되네[弄權宰相不記名 依稀憶得楊與李].”라는 시구가 있다.

 

양린멱양(楊隣覓羊)

열자(列子)』 「설부(說符)양주의 이웃 사람이 염소를 잃고 온 집안이 찾게 되자, 양주의 종에게도 협조를 요청하였다. 양주가 , 한 마리 염소를 잃었는데 왜 따라가는 이가 이토록 많으냐?’하니, 종이 갈림길이 많기 때문입니다.’하였다. 얼마 후에 종이 돌아왔기에, 양주가 염소를 찾았느냐?’하니, 종이 잃어버렸습니다.’하므로 왜 잃어버렸느냐?’하니 갈림길이 하도 많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어 그만 되돌아 왔습니다[歧路之中又有歧焉. 吾不知所之, 所以反也].’했다.” 하였다. , ()의 갈래가 많아 제대로 들어가는 이가 없다는 비유이다.

 

양마(陽馬)

궁전의 네 모퉁이에 나온 짧은 서까래를 떠받치는 나무를 말한다.

 

양마(揚馬)

전한(前漢) 때 사부(詞賦)에 뛰어났던 문장가 양웅(揚雄)과 사마상여(司馬相如)를 병칭한 말이다.

 

양마부(楊馬賦)

양마(揚馬)는 한() 나라의 양웅(揚雄)과 사마상여(司馬相如)인데, 둘 다 부()의 명가(名家)로 임금에게 부를 바쳤다.

 

양만리(楊萬里)

() 나라 때의 시인. 호는 성재(誠齋)이다.

 

양망(兩忘)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당요(唐堯)를 칭송하고 하걸(夏桀)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그 두 가지를 다 잊고 도()에 동화(同化)하는 것이 낫다[與其譽堯而非桀也, 不如兩忘而化其道].”에서 나온 것으로, 세속의 영욕을 잊고 도에 심취하는 것을 말한다.

 

양매(楊梅)

소귀나무를 말한다. 사철나무로 봄에 황홍색의 작은 꽃이 피고 꽃이 진 뒤에 자적색의 열매를 맺는다. 열매가 빨갛고 크기가 탄알 만한데 5월중에 익으며, 맛이 달고 신 것이 매실(梅實) 같으므로 양매(楊梅)라 한다. 본초(本草)』 「양매(楊梅)

 

양목(良牧)

어진 수령.

 

양목지기퇴(樑木之旣頹)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 꿈을 꾸고는 자기의 죽음을 미리 알고 노래를 부르기를, “태산이 무너지련다 대들보가 꺾어지련다. 철인(哲人)이 돌아가려는구나.” 하였다.

 

양묵(楊墨)

양주(楊朱)는 자아(自我)를 위하는 주의로서 한 털을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어도 아니하고, 묵자(墨子)는 겸애(兼愛; 博愛)하는 주의로서 몸을 죽여서라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으면 한다는 것이다.

 

양묵근효경(楊墨近梟獍)

양주(楊朱)묵적(墨翟)은 악한 금수(禽獸)와 비슷하다는 뜻이다. 맹자는 그 당시 겸애설(兼愛說)을 부르짖은 묵적과 독선주의(獨善主義)인 양주를 배척하여 양씨는 나만을 위하니 이것은 임금이 없는 것이며, 묵씨는 모두를 사랑하니 이것은 아버지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없고 임금이 없는 것은 금수이다[楊氏爲我 是無君也 墨氏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 是禽獸也].” 하였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양미(揚眉)

두 눈썹을 갑자기 치켜올리는 것, 선종(禪宗)에서 학인을 제접(提接)할 때 쓰는 일종의 선기(禪機)이다.

 

양미목격(揚眉目擊)

공자(孔子)가 온백설자(溫伯雪子)를 만나서 말을 하지 않으므로, 자로(子路)가 묻기를, “온백설자를 만난 지가 오래인데, 만나서는 말씀이 없으시니 무슨 까닭입니까[吾子欲見溫伯雪子久矣. 見之而不言, 何耶].” 하니, 답하기를, “이런 사람은 만난 것만으로도 도()가 있는데, 소리를 내어 말을 할 필요가 없다[若夫人者, 目擊而道存矣, 亦不可以容聲矣].” 하였다.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

 

양반아(楊叛兒)

이 노래의 옛 가사는, 남제(南齊) 때 여무(女巫)의 아들 양민(楊旻)이 자기 어미를 따라 궁중(宮中)을 드나들다가 하후(何后)에게 총애를 받은 사실을 기롱한 동요(童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 곡명은 양파아(楊婆兒)였는데, 말이 와전되어 양반아가 된 것이라 한다

 

양방사(兩牓士)

당나라 양사복(楊嗣復)이 과거에 시관(試官)이 되었을 때에, 마침 그의 아버지 양오릉(楊於陵)이 지방관(地方官)으로 입조(入朝)하였으므로, 급제한 문생(門生)들을 거느리고 나가서 영접하고 그의 집에서 잔치를 하는데, 오릉은 당상(堂上)에 앉고 사복(嗣復)은 여러 문생과 함께 양편에 앉았었다. 전일에 오릉이 절동관찰사(浙東觀察使) 이사명(李師命)을 급제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때에 그가 같이 있었다. 사람들이 양씨(楊氏)의 상하 문생(門生)이라 칭하였다.

 

양백화(楊白華)

의고악부(擬古樂府)이다. 양백화는 악부 잡곡가사(雜曲歌辭)의 하나인데, () 나라 호태후(胡太后)가 명장(名將) 양대안(楊大眼)의 아들 양백화와 가까이 하며 정을 통했는데, 양백화가 후환을 두려워하여 양() 나라에 항복해 가버리므로, 그를 추모하며 노래를 지은 뒤 밤낮으로 궁녀들을 시켜 부르게 하였다 한다.

 

양번(襄樊)

옛날 주() 나라 서울 안의 읍 이른다. 주 양왕(周襄王) 때 그 땅을 진 문공(晉文公)에게 하사하고 이름을 양번(襄樊)이라 하였다.

 

양별(梁別)

() 나라 이릉(李陵)소무(蘇武)에게 준 송별시에, “손을 잡고 하량에 올라간다[攜手上河梁].” 했는데, 하량은 하수의 다리()이다.

 

양보(梁甫)

양보음(梁甫吟)이라고도 하는데, 악부(樂府)의 서로 화답하는 가사(歌辭)이다. 옛날 증자(曾子)가 태산 아래서 밭 갈다가 눈이 많이 쌓여 몇 달을 두고 집에 갈 수가 없자 부모가 생각나서 지었다고도 하고, 혹자 제갈량(諸葛亮)이 지은 것이라고도 하는데, 사람이 죽어 양보산(梁甫山)에 장례하였으므로, 장가(葬歌)를 뜻하게 되었다. 악부시집(樂府詩集)相和歌辭 禁調曲

 

양보음(梁甫吟)

악부(樂府) 상화가사(相和歌辭)의 초조곡(楚調曲)의 하나로 만가(挽歌)이다. ()제갈량(諸葛亮)이 아버지 현()이 죽자 남양(南陽)에서 몸소 밭갈이를 하며 양보음을 즐겨 불렀다는 데서 은사의 고상한 노래라는 뜻으로 전용된다.

악부(樂府)의 서로 화답하는 가사(歌辭)이다. 옛날 증자(曾子)가 태산 아래서 밭 갈다가 눈이 많이 쌓여 몇 달을 두고 집에 갈 수가 없자 부모가 생각나서 지었다고도 하고, 혹자는 제갈량(諸葛亮)이 지은 것이라고도 하는데, 사람이 죽어 양보산(梁甫山)에 장례하였으므로, 장가(葬歌)를 뜻하게 되었다. 악부시집(樂府詩集)相和歌辭 禁調曲

제갈량(諸葛亮)이 은거할 때 즐겨 노래하였다는 악부(樂府)의 곡명. 양보는 태산(泰山) 아래에 있는 작은 산으로 본디 그곳에 묻힌 사람들을 슬퍼하는 만가(挽歌)였는데, 후세에 와서는 불우한 처지를 읊은 처량한 시작품을 가리킨다.

 

양보지(楊補之)

청 나라 강서(江西) 청강(淸江) 사람으로 자는 무보(無補)요 호는 고농 (古農)인데 그림을 잘 그렸고 특히 매화로 유명하였다. 왕사정(王士禎)의 시에 布衣曾 說楊無補 筆墨風流又一時라 하였다.

 

양복월(楊僕鉞)

장수가 되었음을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 때에 양복(楊僕)이 누선장군(樓船將軍)이 되어 남월(南越)을 정벌하여 공을 세웠던 데서 온 말이다.

 

양봉래(楊蓬萊)

조선 중기의 서가(書家)로 호가 봉래인 양사언(楊士彦)을 가리키는데, 그는 문재(文才)도 뛰어났다.

 

양부(兩部)

앉아서 연주하는 좌부악(坐部樂)과 서서 연주하는 입부악(立部樂)이 합쳐진 성대한 악대(樂隊)를 말한다. 보통 양부 고취(兩部鼓吹)라 하여 개구리의 노랫소리를 가리키는데, 이는 남제(南齊)의 공치규(孔稚珪)가 자신의 뜨락에서 우는 개구리 소리를 양부 고취에 비유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남제서(南齊書)48 공치규전(孔稚珪傳)

 

양부고취(兩部鼓吹)

고취(鼓吹)는 음악 연주이다. 양부(兩部)는 음악을 연주할 때의 좌부(坐部)와 입부(立部), 임금이 신하에게 보통 부()의 음악만 내리곤 하는바, 양부는 특별히 은사(恩賜)를 내릴 때의 성대한 음악이다. 남제(南齊)의 공규(孔珪)가 개구리 소리를 듣고서 양부 고취라고 했던 고사가 있다. 남사(南史)』 「공규전(孔珪傳)

 

양부성(兩部聲)

고대의 악대(樂隊) 중 좌부악(坐部樂)과 입부악(立部樂)의 합칭(合稱)으로, 성대한 음악 연주를 뜻하는데, 보통 개구리의 합창 소리를 표현하는 말로 쓰이다.

 

양붕회즉편행선(良朋懷卽便行船)

() 나라 때 왕휘지(王徽之)가 눈 내린 달밤에 문득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규(戴逵)가 생각나자, 즉시 배를 타고 섬계를 향해서 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양비(攘臂)

양팔의 소매를 걷어올리다. 맹자(孟子)』 「진심(盡心)

 

양비취옥적(楊妃吹玉笛)

양비외전(楊妃外傳)귀비가 몰래 영왕(寧王)의 옥적을 불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쫓겨났는데 이윽고 다시 부름을 받아 돌아왔다. “ 하였다. 장우(張祐)의 시에 조용한 도원에 아무도 보는 이 없으니, 한가로이 영왕의 옥적을 제가 불고 있네[小桃院靜 無人見 閑把寧王玉笛吹].”하였다.

 

양비풍(攘臂馮)

일의 옳고 그름 따위는 따지지도 않고 인기 편승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이나 경우를 말한다. 맹자(孟子)』 「진심(盡心)/ 유의어: 풍부양비(馮婦攘臂)

 

양빈불(陽濱祓)

양빈은 물의 북쪽 언덕을 가리키는데, 옛날 음력 3상사일(上巳日)이면 궁인(宮人)들이 모두 물가에 나가 불계를 치렀다.

 

양사기(楊士奇)

자는 응우(應遇), 호는 죽재(竹齋), 본관은 청주인데, 형 사언(士彦)과 함께 시에 뛰어 났다.

 

양사주석(揚沙走石)

모래를 휘날리고 돌을 굴린다.

 

양산(楊山)

안악군(安岳郡)의 진산(鎭山)이다.

 

양산가(陽山歌)

김흠운(金歆運)이 양산(陽山)에서 백제인과 싸우다 죽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그를 슬퍼하였다.

 

양산난의(楊山難倚)

양산(楊山)은 빙산(冰山)으로 비유된 당 현종(唐玄宗) 때의 권신(權臣) 양국충(楊國忠)을 말하고, 여름 벌레는 그가 얼음과 같은 줄을 모른 당시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어떤 이들이 진사(進士) 장단(張彖)에게 양국충을 찾아가 인사하라고 권하자 장단이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그를 태산처럼 여길지 모르지만 내 눈엔 빙산으로 보일 뿐이다. 만약 해가 뜨면 여러분들이 의지하던 것이 없어지고 말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양산락(梁山濼)

이견을지서(夷堅乙志序)에 보인다. 이견을지(夷堅乙志)는 일찍이 양산락에 도적 오백명이 항복을 받아들였고 이미 그들을 모두 주살하였다[有梁山濼賊五百人受降, 旣而悉誅之].”고 언급하였다.

 

양상군자(梁上君子)

도적을 지칭한 것임. 후한(後漢) 진식(陳寔)이 태구장(太丘長)으로 있을 적에 밤에 도적이 그 실내에 들어가 들보 위에 숨어 있었다. 진식은 가만히 보고서 자손(子孫)을 훈계하기를, “무릇 사람이 스스로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된다. 착하지 못한 사람도 본시 악한 것이 아니고 버릇이 습성화되어서 마침내 그렇게 된 것이니, 저 양상(樑上)의 군자도 이와 같다.” 하니 도둑이 듣고 놀라서 땅에 떨어졌다.’ . / 유의어: 양상(樑上), 양상자(梁上子), 양상객(梁上客) / 인용: 北風(이학규)

 

양상도회(梁上塗灰)

들보 위에 회를 바른다는 뜻으로, ‘여자가 얼굴에 화장을 너무 짙게 함을 비웃는 말이다.

 

양생(兩生)

한 고조(漢高祖)가 숙손통(叔孫通)을 시켜서 예()를 제정하게 하였더니, 숙손통이 천하의 선비를 불렀는데 노() 나라의 두 선비(兩生)가 부름에 응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예악(禮樂)은 덕을 쌓은 지 백년이 되어야 일으킬 수 있는 것인즉, 지금은 전쟁이 겨우 끝나서 죽은 사람의 장사도 못 다하고 상이(傷痍)한 사람이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무슨 예악이냐.” 하였다. 후세의 선비들이 이 두 선비를 참다운 선비라 한다.

 

양생(陽生)

동짓날에 양()이 처음 생기며 우레가 울기 시작하고, 날이 차차 따뜻해지기 시작한다.

 

양생읍로기(楊生泣路歧)

옛날 양주(楊朱)가 선()과 악()의 분기점에서 악의 길을 향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슬퍼하여 눈물을 흘렸던 양주읍기(楊朱泣歧)”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

 

양서(兩西)

황해도와 평안도를 양서(兩西)라고 불렀다.

 

양서(瀼西)

기주부(夔州府) 성 동쪽 대양수(大瀼水)의 서쪽 지역. 두보(杜甫)가 기주에 있을 때 살았던 곳으로, 고향을 말한다.

사천성(四川省) 봉절현(奉節縣)에 있는 지명인데, () 나라 때 두보(杜甫)의 옛 집이 여기에 있었으므로, 전하여 고향을 의미한다.

새로 터잡아 사는 곳을 말한다.

 

양서결옥(瀼西結屋)

양서는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지명인데, () 나라 두보(杜甫)가 일찍이 여기에 이사하여 살았었다.

 

양서음참(陽舒陰慘)

따뜻하게 펴주고 참혹하게 처벌함을 이른다.

 

양석궁(兩石弓)

두 섬의 무게가 나가는 강한 활이다. 구당서(舊唐書)』 「장홍정전(張弘靖傳)이제 천하가 태평하여 일이 없으니 너희들이 두 섬 무게의 힘겨운 활을 당기기 보다는 정()자 하나를 아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였다. 정자는 매우 쉬운 글자를 예로 든 것이다.

 

양선(陽羨)

상주(常州)에 속한 현명(縣名)이다.

 

양선현어사혜주(陽羨賢於死惠州)

() 나라 때 소식(蘇軾)이 일찍이 혜주(惠州) 등 여러 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끝내는 그의 장자(長子)인 매()가 살고 있는 상주의 양선(陽羨)에서 죽었던 데서 온 말이다. 송사(宋史)卷三百三十八

 

양섭(兩燮)

두 섭(), 정여섭(鄭汝燮)과 정군섭(鄭君燮)을 가리킨 것이다

 

양성(陽城)

() 나라 때 사람. 자는 항종(亢宗), 덕종(德宗)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거쳐 도주자사(道州刺使)를 지냈음.

 

양성설구작(陽城設甌杓)

양성은 당 덕종(唐德宗) 때 사람. 간의대부(諫議大夫)와 도주자사(道州刺史)를 지냈다. 구작(甌杓)을 베풀었던 것은 당서(唐書)194 양성전(陽城傳)양성이 쌀 2()으로 밥을 짓고 물고기 한 가마솥을 끓여 두고 질그릇과 술잔을 길거리에 준비하여 사람들을 불러 함께 먹었다.”는 고사가 있다.

 

양성자주고(陽城自注考)

지방 관원으로 내려가 백성의 편에 서서 정사를 행한 것을 말한다. () 나라 때 양성(陽城)이 도주 자사(道州刺史)로 재직 중 근무 성적을 직접 매겨 올리면서 백성을 어루만져 마음으로 수고만 했을 뿐 세금을 제대로 거두지 못하는 등 정사를 졸렬하게 행했으니 성적이 하의 하에 해당한다[撫字心勞 徵科政拙 考下下].”고 하였다. 구당서(舊唐書)192

 

양성재(楊誠齋)

() 나라 때의 시인 양만리(楊萬里)를 이른다. 성재는 그의 호이다.

 

양성혹(陽城惑)

송옥의 등도자호색부(登徒子好色賦)양성(陽城)에 고혹되고 하채(下蔡)에 미혹된다.” 하였는데, 그 주에 양성과 하채 두 고을은 초 나라 귀공자들의 봉지(封地)로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였다.

 

양소상대(兩蘇相對)

()소식(蘇軾)ㆍ소철(蘇轍) 두 형제가 영해(嶺海)로 귀양살이 가 있을 때 누구 하나 찾아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송사(宋史)』 「소곡전(巢谷傳)

 

양소아(楊小兒)

후한(後漢) 때 유표(劉表)가 은근히 예형(禰衡)에게 지금 천하의 명사(名士)는 누구누구이냐?” 묻자 대아(大兒)로는 공융(孔融), 소아로는 양수(楊修)가 있을 뿐이다.”고 거만스레 대답하였다.

 

양소전촉부전언(良宵剪燭負前言)

멀리 떨어져 있던 벗들끼리 다시 모여 지난 추억을 밤새워 이야기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다. () 나라 이상은(李商隱)이 촉() 땅에서 지은 시 야우기북(夜雨寄北)’돌아갈 날 묻는다만 기약을 할 수 있나, 파산의 밤비 소리 가을 못에 넘쳐나네. 언제쯤 창문 아래 등불을 켜고 함께 앉아, 파산의 밤비 얘기 나누어 볼꼬[君問歸期未有期 巴山夜雨漲秋池 何當共剪西窓燭 却話巴山夜雨時].”라는 표현이 있다.

 

양속현어(羊續懸魚)

뇌물 가져오는 것을 거절한다는 뜻이다. 후한서(後漢書)양속이 남양 태수(南陽太守)로 있을 적에 부승(府丞)이 생선을 선물로 보내오자 속이 그걸 받아서 뜰에 매달아 두었는데, 부승이 또 가져오자 속이 전일에 받았던 것도 아울러 내주어 그의 뜻을 거절하였다.” 하였다.

 

양손장라(楊孫葬裸)

() 나라 때 양왕손은 황로(黃老)의 학술을 익힌 사람으로서, 그는 임종시에 자식에게 유명을 내려 나장(裸葬)을 하도록 하였다. 한서(漢書)卷六十七

 

양수(瀼水)

기주부(夔州府)에 있는 강이다.

 

양수(楊脩)

후한 때 사람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조조(曹操)의 주부(主簿)로 있으면서 조조와 재주를 겨루고, 조조의 뜻을 미리 알아맞혔다가 조조의 시기를 받아 살해되었다. 후한서(後漢書)54 양진열전(楊震列傳)楊脩

 

양수겸장(兩手兼將)

하나의 표적에 대하여 두 방향에서 공격해 들어간다는 뜻이다.

 

양승암(楊升庵)

승암(升庵)은 양신(楊愼)의 호이다.

 

양시(楊時)

송 나라 남검주(南劍州) 장락(將樂) 사람으로 자는 중립(中立)이고, 호는 귀산(龜山)이다. 일찍이 우간의대부 겸국자좨주(右諫議大夫兼國子祭酒)와 공부 시랑(工部侍郞)등 벼슬을 지내다가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하여 정자(程子) 문하 사대제자(四大弟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약식(弱植)

연약하고 무능하여 스스로 일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 인용: 有客行(성해응)

고근약식(孤根弱植)의 준말로, 친척이나 가까이에서 돌보아 줄 사람이 거의 없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양신(楊愼)

() 나라 학자. 자는 용수(用修), 호는 승암(升菴). 기송(記誦)에 해박했고, 저서에는 승암집(升菴集) 81권이 있다.

 

양아(陽阿)

고악곡(古樂曲)의 이른다.

 

양악(陽岳)

안악(安岳)의 옛 이름이다.

 

양앙(梁鴦)

주 선왕(周宣王) 때 목정(牧正). 야생 동물을 잘 길렀으므로 왕이 신임하였으며, 동물들이 잘 따랐다.

 

양양(穰穰)

곡물이 풍요로운 모양

사람이 많아 혼잡한 모양 / 인용: 秧歌五章(이학규)

 

양액(楊厄)

황양나무가 윤달(閏月)의 액운을 만난다.”는 말을 줄여 쓴 말이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의하면 이 나무가 한 해에 겨우 한 치쯤 자라나는데 윤달이 있는 해에는 한 마디가 줄어든다.” 하였다.

 

양액생풍(兩腋生風)

좋은 차를 찬미하는 말로서, 노동(盧仝)주필사맹간의 기신다시(走筆謝孟諫議 寄新茶詩)’일곱 잔을 마시면 양쪽 겨드랑이 밑에 맑은 바람이 일어난다.” 하였다.

 

양액청풍(兩腋淸風)

양액(兩腋)의 청풍(淸風)이란 바로 노동이 차()를 좋아하여 차를 예찬하는 시에서 …… 다섯 잔을 마시면 기골이 맑아지고, 여섯 잔을 마시면 선령이 통하고, 일곱 잔은 미처 다 마시기도 전에 두 겨드랑에서 맑은 바람이 솔솔 일어남을 느끼게 된다[五椀肌骨淸 六椀通仙靈 七椀喫不得 唯覺兩腋習習淸風生].” 한 데서 온 말이다.

 

양약고구 충언역이(良藥苦口 忠言逆耳)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충직한 말은 귀에 거슬림. 바른 말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한다. 충고의 말은 그 당시에는 듣기 싫으나 받아들이면 자신에게 이롭다. / 유의어: 충언역어이(忠言逆於耳), 양약고어구이어병(良藥苦於口而於病), 양약고어구(良藥苦於口)

 

양양(洋洋)

광대한 모양, 성대한 모양, 많은 모양, 충만한 모양, 한없이 넓은 모양, 훌륭하고 아름다운 모양, 의지할 곳 없는 모양, 득의한 모양, 흉중에 걸림이 없이 편한 모양, 천천히 꼬리를 흔드는 모양, 물 흐르는 모양.

 

양양(揚揚)

득의한 모양

 

양양(漾漾)

물에 떠도는 모양, 물결이 출렁거리는 모양

 

양양(佯佯)

선명한 모양, 깊숙한 모양, 심오한 모양

 

양양(襄陽)

성당(盛唐) 시대 양양 출신인 시인(詩人) 맹호연(孟浩然)을 가리킨다.

 

양양(襄陽)

예천(醴泉)의 고호(古號)이다.

 

양양관(襄陽館)

양양(襄陽)은 예천(禮泉) 옛 이름으로 그곳의 객사를 말한다.

 

양양기구(襄陽耆舊)

양양의 덕망 높은 늙은이들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특히 후한(後漢) 때의 방덕공(龐德公)을 이른다. 방덕공은 일찍부터 세상에 나가기를 단념하여, 당시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가 수차에 걸쳐 벼슬길에 나오도록 그를 종용했으나 거절하고서 처자(妻子)와 함께 농사를 짓다가 나중에는 녹문산(鹿門山)으로 처자와 함께 약을 캐러 들어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두보(杜甫)의 견흥(遣興) 시에 옛날에 방덕공은 일찍이 주부엘 들어가지 않았어라. 양양의 기구들 사이에 처사의 절개가 유독 높았구려[昔者龐德公 未曾入州府 襄陽耆舊間 處士節獨苦].” 하였다.

 

양양자시무지기(襄陽自是無知己)

() 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은 양양(襄陽) 사람이다. 오언(五言)시에 능하였다. 그가 서울에 왔을 때에 왕유(王維)가 내서(內署)에 숙직하면서 그를 청하여 놀았더니, 현종(玄宗)이 창졸에 나오므로 호연이 상 밑에 숨었는데, 현종이 물으므로 왕유가 사실대로 아뢰니 기뻐하여 불러내어 그의 시를 외우라 하였다. 그는, “재주가 없으니 명주가 버리시고, 병이 많으매 친구도 성겨지누나[不才明主棄 多病故人疏]”란 구를 외우니, 현종이, “경이 짐()에게 구하지 않았었으니 짐이 일찍 경을 버린 적이 없는데.”라고 하면서 놓아보내었다. / 인용: 소화시평

 

양양제일류(襄陽第一流)

학덕(學德)이 높은 노인을 이른다. 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로서 학덕이 높았던 방덕공(龐德公) 등을 양양 기구(襄陽耆舊)라 일컬은 데서 온 말이다.

 

양억(楊億)

()는 대년(大年), 건주(建州) 포성(浦城) 사람이다. 그가 천성이 영특하다는 소문을 듣고 태종(太宗)11세 된 그를 불러서 비서성 정자(秘書省正字)를 제수하였다. 진종(眞宗)이 즉위한 뒤에는 좌정언(左正言)을 제수하였다. 훗날 그는 전약수(錢若水)와 함께 80권에 달하는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수하는 데 참여하여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였고, 책부원귀(冊府元龜)와 국사(國史)를 편수할 때에도 차례나 체재 등을 모두 그가 정하였다. 벼슬은 호부 낭중(戶部郞中),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고 문장이 화려하여 서곤체(西昆體)라 불렀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 서곤수창집(西昆酬唱集)이 있다. 그 밖에도 편저(編著)한 작품이 매우 많다. 송사(宋史)卷三百五 양억열전(楊億列傳)

 

양엽천(楊葉穿)

사기(史記)卷四 주본기(周本記), 전국책(戰國策)』 「서주책(西周策)양유기(養由基)라는 사람이 활을 잘 쏘는데, 버들잎을 백보(百步) 밖에서 쏘아도 백발 백중했다[楚有養由基者, 善射, 去柳葉者, 百步而射之, 百發百中].” 한다.

 

양영몽(兩楹夢)

예기(禮記)』 「단궁(檀弓)내가 지난밤 꿈에 두 기둥 사이 마루에 앉아서 궤전(饋奠)을 받았다……. 나는 아마 장차 죽을 것이다[予疇昔之夜 夢坐奠於兩楹之間……予殆將死也].” 하였다.

 

양오(兩螯)

() 나라 필탁(畢卓)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술은 수백곡(數百斛) 드는 배()에다 가득 채워 두고 오른손으로는 술잔을 잡고 왼손으로는 게[蟹螯]를 가지고 거기서 한평생을 마칠 수 있으면 족하겠다.” 하였다.

 

양오(陽烏)

태양을 말한다. ‘태양 속에 다리 셋을 가진 까마귀가 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 인용: 女史行(이규상)

 

양옥(梁獄)

억울한 죄수가 갇혀 있는 감옥을 말한다. 서한(西漢) 추양(鄒陽)이 참소를 받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양 효왕(梁孝王)에게 옥중에서 상서(上書)하여 풀려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기(史記)83 노중연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양옥추양(梁獄鄒陽)

() 나라 추양(鄒陽)이 양 효왕(梁孝王)을 섬기다가 참소에 걸려 하옥된 뒤 스스로 상서(上書)하였던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83 노중연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양왕(梁王)

한 나라 때 양 효왕(梁孝王).

 

양왕원(梁王苑)

양왕(梁王)은 한 문제(漢文帝)의 둘째 아들인 양효왕(梁孝王) 유무(劉武)를 말하는데, 그는 일찍이 궁실(宮室)과 원유(苑囿)를 굉장하게 꾸며 두고 사마상여(司馬相如) 등 사방의 문장 호걸들을 초청하여 풍류를 즐기었다.

 

양왕의(襄王意)

무산운우(巫山雲雨), 남녀가 서로 그리는 것을 말한다.

 

양왕일몽(襄王一夢)

()의 양왕(襄王)이 송옥(宋玉)과 함께 운몽(雲夢)에 나가 놀며 고당관(高唐觀)에 머물고 있었는데, 꿈에 무산(巫山)의 신녀(神女)를 만나 즐겼다고 한다. 문선(文選)송옥(宋玉), 고당부서(高唐賦序)

 

양우(陽盱)

늪 이름이다. 광운(廣韻)

위정자가 성심으로 정사를 하는 것의 비유.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극정전(郤正傳)

 

양운부부가(楊惲拊缶歌)

한 선제(漢宣帝) 때 평통후(平通侯) 양운(楊惲)이 죄에 걸려 폐서인(廢庶人)이 된 후로는, 죄를 받은 데에 불만을 품고 열심히 농사를 지어 산림을 일으키면서 자기 친구인 손회종(孫會宗)에게 답한 편지에 농사짓는 일이 무척이나 수고롭기에 세시복랍(歲時伏臘)이 되면 양()을 삶아 안주로 삼고 두주(斗酒)를 마시어 스스로 위로하고, 술이 거나해지면 하늘을 우러러 질장구를 치고 노래를 들으며 즐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卷六十六

 

양웅(揚雄)

() 나라 성제(成帝) 때의 사람으로, 자가 자운(子雲)이며, 성도(成都)에 살았다. 사람됨이 소탈하였으며, 젊어서부터 문장을 잘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임금의 부름을 받아 감천(甘泉)ㆍ하동(河東)ㆍ장양(長楊) 등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학문을 좋아하여 양자법언(揚子法言)태현경(太玄經)등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글 뜻이 아주 심오하였다. 한서(漢書)87 양웅전(揚雄傳)

 

양웅인각송(楊雄麟閣頌)

() 나라 양웅(揚雄)이 지은 조충국송(趙充國頌)’을 말한다. 인각은 기린각(麒麟閣)의 준말로, 한 선제(漢宣帝)가 조충국과 소무(蘇武) 등 공신 11인의 초상화를 그려 이곳에 걸어 놓고 기념하였다. 조충국은 선제(宣帝) 70여 세의 나이로 서강(西羌)의 침입을 격퇴한 명장인데, 성제(成帝) 때 다시 서강의 경보(警報)가 급해지자 옛날의 조충국을 간절히 생각하며, 당시 황문랑(黃門郞)이었던 양웅을 불러 그의 초상화 앞에서 이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였다. 이 글은 시경(詩經)의 상송(商頌)과 비견될 정도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문선(文選)47에 실려 있다.

 

양웅입성문(楊雄入聖門)

양웅(揚雄)()에 비겨, 태현(太玄)을 짓고, 논어(論語)에 비겨 법언(法言)을 지었다.

 

양웅택(揚雄宅)

글을 읽으면서 마음 편하게 지내는 사람이 사는 집을 말한다. ()나라 문장가인 양웅(揚雄)은 성도(成都) 사람으로 조정에서 줄곧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와 한()이 서로 싸울 즈음에 강을 거슬러 올라가 파() 땅의 강주(江州)에 살다가, 다시 성도의 비현(郫縣)으로 옮겨가 그의 선조 양계(揚季)가 남겨놓은 밭 한 뙈기와 집 한 채에 의지해 대대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한다. 한서(漢書)87 양웅전(揚雄傳)

 

양원(梁園)

서한(西漢) 경제(景帝) 때 양 효왕(梁孝王)이 만든 토원(免園)으로, 오늘날 하남(河南) 개봉시(開封市) 동남쪽에 있었는데, 원림(園林)의 규모가 굉장하여 사방 300여 리나 되며, 궁실이 서로 잇달아 있었다. 당시의 명사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추양(鄒陽)ㆍ매승(枚乘)ㆍ장기부자(莊忌夫子)등과 효왕의 빈객으로 몇 해 동안 그곳에서 지낼 때 자허부(子虛賦)를 지어 양효왕에게 올렸다. 남조 송(南朝宋)의 사혜련(謝惠連)이 이 정원의 설경을 배경으로 설부(雪賦)를 지으면서부터 설원(雪園)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양원(楊袁)

양진(楊震)과 원안(袁安)을 가리키는데, 모두가 후한(後漢) 때의 명신(名臣)이다.

 

양원객(梁苑客)

두보(杜甫)처럼 대문장가이면서 대풍류인을 가리킨다. 양원(梁苑)은 한() 나라 양효왕(梁孝王)의 동산으로, 이곳에서 추양(鄒陽)ㆍ매승(枚乘)ㆍ사마상여(司馬相如) 등이 노닐었다.

 

양원동설(梁園同雪)

() 나라 간문제(簡文帝)가 눈 속에서 매화 찾는 시를 읊었음.

 

양원묵객(梁苑墨客)

양원(梁苑)은 한() 나라 양효왕(梁孝王)의 화려한 원유(苑囿), 이곳에서 함께 노닌 사마상여(司馬相如)ㆍ추양(鄒陽)ㆍ매승(枚乘)ㆍ엄기(嚴忌) 등의 뛰어난 시인들을 말한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수경(水經)』 「휴수(睢水)

 

양원백설(梁園白雪)

양원은 한() 나라 양효왕(梁孝王)의 동산을 말한다. 이태백(李太白)의 양원음(梁園吟)이란 시가 있는데, 그 중에 () 나라 소금이 꽃 같아 백설(白雪)처럼 깨끗하니, 이 소금만 가지고도 술을 마시겠구나.”라고 한 시구가 있다. 이태백문집(李太白文集)卷七

 

양원사인편(楊園寺人篇)

참소하는 말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양원은 낮은 지대이고, 환관은 맹자(孟子)이다. 시경(詩經)소아(小雅) 항백(巷伯), “양원의 길이여, 높은 언덕에 얹혀 있도다. 환관인 맹자가 이 시를 짓는도다[楊園之道 猗于畝丘 寺人孟子 作爲此詩].”하였다.

 

양원설(梁園雪)

양원(梁園)은 한() 나라 양 효왕(梁孝王)의 으리으리한 정원으로 토원(兎苑)이라고도 한다. 문선(文選)에 실려 있는 사혜련(謝惠連)의 설부(雪賦)에 의하면, 양 혜왕이 세모(歲暮)에 눈이 내리자 문사(文士)들을 초청하여 주연(酒宴)을 베풀고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 눈을 노래하게 했다 한다.

 

양원수간(梁園授簡)

왕명(王命)으로 시를 짓는 것을 말한다. () 나라 때 양 효왕(梁孝王)이 토원(兎園)에서 노닐면서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 서간을 보내(授簡) 자신을 위해서 눈에 대한 시를 짓도록 부탁한 고사가 남조(南朝) () 사혜련(謝惠連)설부(雪賦)’에 소개되어 있다.

 

양원오락(梁園娛樂)

() 나라 양효왕(梁孝王; 文帝의 아들)이 엄청나게 규모가 크고 화려한 정원을 만든 뒤, 추양(鄒陽)ㆍ매승(枚乘)ㆍ사마상여(司馬相如) 등과 즐겼다 한다. 수경(水經)』 「휴수(睢水)그런데 사혜연(謝惠連)의 설부(雪賦)에 의하면, 양효왕이 주연(酒宴)을 베풀고 추양과 매승 등을 부르도록 했을 때, 사마상여도 끝에 와 빈객의 오른편에 앉았는데 얼마 안 있어 싸라기눈이 떨어지더니 함박눈이 퍼붓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양월(良月)

음력 10월을 가리키는 말이다. 10이라는 숫자가 꽉 들어찼다(成數)는 의미에서 길월(吉月)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양월(陽月)

10월이다.

 

양유(梁游)

호량유(濠梁游). 친한 벗끼리 둘이 만나 노닒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가 자기 친구인 혜자(惠子)와 함께 호수(濠水)의 다리에 앉아 물고기를 구경하며 노닐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

 

양유(兩羭)

두 마리의 검은 양. 귀장역(歸藏易)점사(占辭)에 나오는 말로 자기의 갈 길을 자기가 미리 점치고 있다는 뜻으로도 쓰이다. 이아(爾雅)

 

양유기(養由基)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대부(大夫)로서 활쏘기에 능하여 1백 보() 앞에 있는 버들잎을 쏘면 백발백중(百發百中)이었다 한다. 사기(史記)卷四 주본기(周本記), 전국책(戰國策)』 「서주책(西周策)

 

양의(兩儀)

음ㆍ양을 말한다.

 

양이(量移)

귀양 간 사람을 조금 나은 곳으로 작량(酌量)하여 옮겨 주는 것이다.

 

양임하(楊臨賀)

() 나라 때 임하(臨賀)의 위()로 쫓겨 나간 양빙(楊憑)을 가리킨다. 자기에게 누()가 돌아올까 봐 친우들이 하나도 위문하지 않는 가운데, 오직 서회(徐晦)만이 전별(餞別)하였는데, 이에 포의(布衣) 때의 지기(知己)인 양 임하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국가를 어찌 저버리겠는가.” 하는 평을 받고서 감찰 어사가 되었던 고사가 있다.구당서(舊唐書)165 소식(蘇軾)의 시에 당시에 전송한 사람 없었던 양 임하요, 지금도 조주의 사당에서 제사 받드는 한퇴지(韓退之)로다[當日無人送臨賀 至今有廟祀潮州].”라는 구절이 있다.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44 과령(過嶺)

 

양자(陽子)

백락(伯樂)의 별칭이다.

 

양자(揚子)

() 나라 때의 문장가인 양웅(揚雄)을 말한다. 성선악혼합설(性善惡混合說)을 제창하였다.

 

양자강(揚子江)

티베트 고원의 북동부에서 발원하여 동중국해로 흘러 들어감. 장강(長江)이라고도 불림.

 

양자력(量自力)

자기 자신의 능력의 정도는 자신만이 안다는 의미이다. 어떤 일을 마음이 곧고 충실하게 탐구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양자루(羊子淚)

() 나라 양담(羊曇)이 은인인 사안(謝安)이 죽은 뒤 생전에 그가 지나다니던 서주문(西州門)을 통과하지 않다가 술이 크게 취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문 앞에 이르러서는, 조자건(曹子建)이 지은 살아서는 화려한 집 거하시더니, 나뭇잎 떨어지듯 산언덕 돌아갔네[生存華屋處 零落歸山丘].”라는 시를 읊고 대성통곡했던 고사가 전한다. 진서(晉書)』 「사안전(謝安傳)

 

양자문장도이소(楊子文章道已疎)

양주(楊朱)전국시대(戰國時代)의 양주(楊朱)를 말하는데, 그는 자기 털 하나를 뽑으면 그것이 천하에 보탬이 된다 하더라도 절대 하지 않는 철저한 이기주의자라는 것이다. 맹자(孟子)』 「진심(盡心)

 

양자운(揚子雲)

양자운은 자가 자운인 한() 나라 때의 유학자인 양웅(揚雄)을 가리킨다. 그의 저서로는 주역(周易)을 본떠 지은 태현경(太玄經)법언(法言)이 유명한데, 그가 태현경(太玄經)를 지었을 때 유흠(劉歆)이 그것을 보고는 양웅에게 지금 학자들은 주역도 모르는데 후세에 현()을 알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였다.

 

양자저서공자부(揚子著書空自負)

양웅(揚雄). 그가 ()에 비겨 태현(太玄), 논어(論語)에 비겨 법언(法言), 창힐(倉頡)로 자처하여 훈찬(訓纂)을 지었다.

 

양자점(梁子漸)

자점은 양경우(梁慶遇)의 자()이다.

 

양자조충(揚子雕蟲)

양자는 한() 나라 때의 문장가 양웅(揚雄)을 말하고, 조충(雕蟲)은 문사(文詞)를 꾸미는 조그만 기예(技藝)의 뜻이다.

 

양자토봉(楊子吐鳳)

() 양웅(揚雄). 양웅이 태현경(太玄經)를 지을 때 꿈에 흰 봉을 토했다.

 

양자현정은(楊子玄亭隱)

() 나라 양웅(揚雄)이 태현정(太玄亭)에서 집필하며 세상을 피했던 것처럼 은거 생활을 한 것을 말한다.

 

양장(羊腸)

양의 창자로, 꼬불꼬불하여 험난한 산길을 말한다. 세상의 길의 어려움에 비한다. 명일통지(明一統志)양장령(羊腸嶺)은 소주부(蘇州府) 천평산(千平山) 남쪽에 있는데 염소 창자같이 구불구불하므로 이름이 되었다.” 하였다.

태행산(太行山) 구절양장(九折羊腸)이 있는 험한 길 아홉 구비가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하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반초전(班超傳)

 

양장구곡(羊腸九曲)

길의 험난함을 말한다. 중국 촉도(蜀道)에 양장판(羊膓坂)이 있어 아홉 구비로 되어서 마치 양의 창자와 같으므로 일컬어진 말이다.

 

양장구절(羊腸九折)

모두 중국의 험난하기로 이름난 비탈길 이름으로, 양장은 산서(山西) 정락현(靜樂縣) 지방에 있고 구절은 사천(四川) 영경현(榮經縣) 서쪽 공래산(邛郲山)에 있다. 흔히 세상길이 험난한 것에 비유한다.

 

양장판(羊腸阪)

태항산(太行山)의 꼬불꼬불한 고개를 가리키는데, 위 무제(魏武帝)의 고한행(苦寒行)양장판은 꼬불꼬불하여 수레 바퀴 굴대가 꺾이도다[羊腸阪詰屈 車輪爲之摧]”하였다.

 

양재(梁載)

본디 원() 나라 연남(燕南)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歸化), 충숙왕의 총신(寵臣)인 왕삼석(王三錫)에게 아부하여 횡포를 부렸으므로 당시에 미움을 받았으며, 뒤에는 조신경(曹莘卿)과 함께 인사권(人事權)을 잡고 정치를 농간하였던 간신이다.

 

양재지종(良才之種)

양재(良才)는 명종(明宗) 때 소윤(小尹)으로서 대윤(大尹)을 숙청하기 위해 이기(李芑)ㆍ정순붕(鄭順朋) 등이 익명의 벽서(壁書)를 조작하여 양재역(良才驛) 벽상에 걸었던 사건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곧 이기ㆍ정순붕 등을 비롯하여 그 벽서를 고발한 정언각(鄭彦慤) 등과 같은 소인의 무리들을 말한다.

 

양저마우간불변(兩渚馬牛看不辨)

장자(莊子)』 「추수(秋水)가을 장마가 지면서 온갖 물줄기가 하수(河水)로 쏟아져 들어와 물이 엄청나게 불어났기 때문에, 물가의 두 언덕 사이에서 소와 말도 분간을 못할 지경이었다[兩涘渚崖之間 不辯牛馬]”라는 말이 나온다.

 

양적(陽翟)

양적대고(陽翟大賈) 여불위(呂不韋)를 가리킨 것으로, 전하여 여불위의 저서인 여씨춘추(呂氏春秋)를 말한다.

 

양적공(攘狄功)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어 주() 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쳤음을 말한다.

 

양전(兩殿)

시부모를 말한다.

 

양전(壤奠)

토산물을 공물(貢物)로 바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양전주명이철곤(陽轉朱明已徹坤)

뜨거운 여름철을 표현한 말이다. 두보(杜甫)의 시 하일탄(夏日歎)’붉은 태양 두터운 대지 위에 깔렸나니, 답답해라 이 한증막 어떻게 벗어날꼬[朱光徹厚地 鬱蒸何由開].”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7

 

양절(襄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명 성조(明成祖)의 처남이기도 한 한확(韓確)의 시호이다.

 

양제(煬帝)

() 나라 제2대 임금 양광(楊廣)의 시호이다.

 

양제(楊濟)

양준(楊駿)의 동생으로 자는 문통(文通)이다.

 

양제(羊蹄)

우설채(牛舌菜)라고도 하는 풀 이름이다.

 

양제금범(煬帝錦帆)

수 양제가 배 타고 운하(運河)를 거쳐 강도(江都)에 놀러 갈 때 비단돛을 달고 흥청댔다 한다.

 

양제변하추랭락(煬帝汴河秋冷落)

수 양제가 주색(酒色)에 빠져 강도(江都)에 순항하여 유련(留連)하다가 변하(汴河)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시해(弑害)되었다.

 

양제주불유(梁鵜咮不濡)

소인(小人)이 조정에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詩經)조풍(曹風) 후인(候人)어살에 있는 사다새 부리도 젖지 않았네.” 하였다.

 

양조(梁藻)

기장(수수)과 물풀.

 

양조(煬竈)

한 사람이 부엌 아궁이를 가리고 앉아 불을 쬐고 있으면 그 뒤에 있는 사람은 그 불빛을 볼 수 없다는 뜻으로, 즉 영행(佞倖)의 무리가 국정(國政)을 천단하여 임금의 밝음을 가리는 데에 비유한 말이다. 戰國 衛策

 

양조묘(楊照廟)

양조(楊照)는 달자(㺚子)들을 방비하기 위하여 온 힘을 쏟느라 당시에 광녕도어사(廣寧都御史)로 있던 제종도(齊宗道)와 알력이 생겨, 제종도의 사주를 받은 가장(家將)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양족(兩足)

불교(佛敎)의 용어로, 부처의 별칭인 양족존(兩足尊)의 준말이다.

 

양졸(養卒)

나무와 밥의 천역(賤役)을 맡은 시양졸(廝養卒)이다.

 

양주(梁州)

악곡(樂曲)의 이름인 양주곡(梁州曲)을 말하며, 일명 양주(涼州)라고도 한다.

 

양주가학(楊州駕鶴)

모든 욕망을 다 이룬다, 헛된 망상을 말한다. 소식(蘇軾)녹균헌(綠筠軒)세상에 어찌 양주 학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 주()옛날 객들이 각각 자기 욕망을 말하는데 혹은 양주자사(揚州刺史)가 되기를 원하고 혹은 재물이 많기를 원했으며 혹은 학을 타고 하늘에 오를 것을 원하였다. 이때 한 사람은 허리에 10만 관의 황금을 차고서 학을 타고 양주에 부임하고 싶다고 하였다[有客相從各言所志. 或願爲楊州刺史, 或願多眥材, 或願騎鶴上昇. 其一人曰腰纏十萬貫, 騎鶴上楊州. 欲兼三者’].”고 하였다. / 유의어: 양주기학(揚州騎鶴), 양주전학(揚州錢鶴), 양주학(揚州鶴)

 

양주곡(涼州曲)

악부 근대 곡사(樂府近代曲辭)의 이른다. 왕한(王翰)의 양주사(涼州詞)이다.

 

양주기로(楊朱岐路)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양주(楊朱)가 십자로(十字路)에 서서 어느 길로 한 발을 들여놓느냐에 따라 앞으로 엄청난 차이가 빚어지게 될 것을 생각하고 슬프게 통곡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순자(荀子)』 「왕패(王覇)

 

양주도(楊朱道)

자기 혼자만을 위하는 길. 맹자(孟子)』 「진심(盡心), “양자(楊子)는 나를 위하는 입장만을 택하여 털 하나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한다고 하더라도 하지 않을 자이다.” 하였다.

 

양주두목(揚州杜牧)

양주(揚州)의 두목(杜牧)이란 곧 두목이 양주 자사(揚州刺史)를 지냈기 때문에 이름이다.

 

양주루수(楊朱淚垂)

양주(楊朱)는 전국 때 사람으로 두 갈래 길에 당도하여 울었는데, 이는 사람이 선()의 길로 가느냐 악()의 길로 가느냐의 판가름이 마치 이 기로(岐路)에서 갈라지는 것과 같아서였다 한다.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

 

양주몽(揚州夢)

() 나라 때의 시인(詩人) 두목(杜牧)이 일찍이 양주 자사(揚州刺史)로 있으면서 청루(靑樓)의 많은 미인들과 사귄 적이 있었으므로, 후일 그의 견회시(遣懷詩), “십 년 만에 한 번 양주의 꿈을 깨고 나니, 미인에게 무정하단 이름만 실컷 얻었네[十年一覺揚州夢 羸得靑樓薄倖名].”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양주비시발모인(楊朱非是拔毛人)

양주(楊朱)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므로, 자신의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더라도 하지 않는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맹자(孟子)』 「진심(盡心)

 

양주읍로기(楊朱泣路歧)

세상의 도가 기구함에 상심하여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말한다. 순자(荀子)』 「왕패(王覇), “양주가 네거리 길에서 통곡을 하면서 말하기를, ‘반 걸음이라도 길을 잘못 가면, 깨닫고 난 뒤에는 이미 천 리를 잘못 가 있다.’ 하면서 슬프게 곡을 하였다[楊朱哭衢涂曰, 此夫過擧蹞步而覺跌千里者夫].” 하였다.

 

양주일몽(揚州一夢)

당 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우승유(牛僧儒)를 따라 양주의 지방관으로 나갔을 때 창루(倡樓)에 드나들며 풍류를 즐기다가 낙양(洛陽)으로 돌아와 항상 그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꿈처럼 화려했다고 말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번천집(樊川集)外集 遣懷

 

양주증곡로다기(楊朱曾哭路多岐)

양주(楊朱)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로, 이기주의(利己主義)를 제창하여 겸애주의(兼愛主義)를 제창한 묵적(墨翟)과 대립한 자인데, 그가 길을 가다가 갈림길에 이르러, 동으로도 갈 수 있고 서로도 갈 수 있어 울었다는 고사이다. 즉 사람도 갈림길에서 갈리듯이 누구나 마음쓰기 여하에 따라, 착한 사람도 될 수 있고 나쁜 사람도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 / 몽구(蒙求)

 

양주청루몽(揚州靑樓夢)

양주의 청루몽(靑樓夢)은 즉 양주몽(揚州夢)과 같은 말인데, 양주몽이란 중국의 가장 번화한 양주(揚州)에서 호화롭게 놀던 옛 추억이라는 뜻이다. 두목(杜牧)의 시에 십 년 만에 양주몽을 한 번 깬다[十年一覺揚州蒙].” 하였다.

 

양주학(楊朱學)

전국(戰國) 때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한 학자로 이기주의를 말한다. 맹자(孟子)』 「진심(盡心)양자(楊子)는 자신만을 위하니 머리털 하나를 뽑아 천하가 유익하더라도 하지 않는다.” 하였다.

 

양준(楊駿)

진 무제(晉武帝)의 장인. 그는 무제가 죽고 혜제(惠帝)가 서자 국정을 도맡아서, 자기의 친당(親黨)만을 등용, 정권을 농락하다가 가후(賈后)에게 미움을 받아 결국 삼족(三族)이 멸하였다.

 

양중(兩中)

남자 무당의 일종으로 속칭 화랑이라 하는 것인데, 민간에서 신에게 제사할 때에 주석(主席)이 되며, 노래하고 춤춘다. 혹 수염이 없는 젊은 자는 여자로 분장하고 인가에 드나들며 음탕한 짓을 하므로 나라에서 금하였다. 낭중(郎中)이라고도 한다.

 

양중(羊仲)

한 애제(漢哀帝)때 단정하고 청렴하기로 이름난 사람. 당시 그의 벗 장후(蔣詡)왕망(王莽)이 섭정을 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외부와 통하는 길 세 가닥을 터놓고 하나는 자기가, 나머지는 그들이 각기 다니는 길로 삼아 서로 왕래하며 살았다 한다.

 

양중경(羊仲逕)

다정한 친구만이 오가는 길. ()왕망(王莽)이 정권을 쥐고 제멋대로 하자 연주 자사(兗州刺史) 장허(蔣詡)가 병을 핑계하고 들어앉아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집 앞 대나무밭 사이로 오솔길 세 개를 내놓았는데, 당시 성명을 숨기고 숨어 살던 구중(求仲)ㆍ양중(羊仲)두 사람만 왕래하였다. 상우록(尙友錄)卷二十二

 

양중빈래송경숙(羊仲頻來松逕熟)

친한 친구가 자주 찾아옴을 말한다. 양중은 한()의 고사(高士)이며, 송경은 소나무 밑의 오솔길을 말한다. 삼전결록(三轉決錄)장허(蔣詡)가 두릉(杜陵)에 은거하였는데 집에 있는 세 길에 오직 양중과 구중(求仲)만이 다녔다.” 하였다.

 

양지(兩地)

지수(地數)2를 말하고 삼천(參天)은 천수(天數)3을 말한 것으로, 지수 2와 천수 3을 서로 곱하면 6(六同)이 된다.

 

양지(良知)

배우지 않을 수 있는 타고난 지능. 양명학(陽明學)에서의 마음의 본체.

 

양지(養志)

부모의 뜻에 맞추어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이루(離婁)상에 증자(曾子)는 그의 아버지 증점(曾點)을 봉양할 적에 반드시 술과 고기를 장만하고는 식사가 끝나면 반드시 누구에게 주지 않으시렵니까?’ 하고 물었으며, 또한 남은 것이 있느냐?’ 물으면 반드시 있습니다하였으니, 이는 뜻을 맞추어 봉양한 것이다. 그 후 증원(曾元)은 그의 아버지 증자를 봉양하게 되자, 반드시 술과 고기를 장만했으나 누구에게 줄 것을 묻지도 않으며, 남았는가 하고 묻더라도 반드시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다시 드리기 위한 것으로 구체만을 봉양한 것[養口體]이다.” 하였다.

 

양지(楊枝)

() 나라 때 백거이(白居易)의 애첩인 소만(小蠻)의 별명인데, 소만은 특히 춤을 잘 추었다 한다.

 

양지(讓之)

질책하다. 나무라다.

 

양지삼천(兩地參天)

삼천양지(參天兩地)와 같은 말로서 하늘의 숫자는 홀수인 3이고 땅의 숫자는 짝수인 2라는 뜻인데 주역(周易)()에서 숫자를 설정한 것이다. 여기서는 천지 이치를 말한다. 주역(周易)설괘(說卦)하늘은 3이고 땅은 2로서 서로 숫자가 어울린다[參天兩地而倚數].” 하였다.

 

양지양능(良知良能)

맹자(孟子)』 「진심(盡心)에 나오는 말로, 배우지 않고도 알고 행할 수 있는 천부적인 지능(知能)을 말한다.

 

양진(兩晉)

동진(東晉)과 서진(西晉)을 가리킨다.

 

양진(揚塵)

푸른 바다가 뽕밭이 되어 먼지가 날린다는 것이다.

 

양진(梁塵)

옛날 음악의 명가(名家)인 노() 나라 우공(虞公)이 노래할 적에 들보 위의 먼지가 움직여 날았다고 한다. 유면별록(劉面別錄)노 나라 사람 우공은 발성(發聲)이 맑고 높아서 노래할 적에 들보의 먼지가 움직였다.” 하고, 육기(陸機)의 의고시(擬古詩)한 번 부르매 만인 탄식하고 재차 부르매 들보의 먼지가 난다[一唱萬夫歎 再唱梁塵飛].” 하였다.

 

양진(楊震)

일찍이 형주 자사(荊州刺史)가 되어 행차가 창읍(昌邑)을 지나니, 전에 천거 받은 형주 무재(荊州茂才) 왕밀(王密)이 창읍령(昌邑令)이 되어 알현(謁見)하고 밤에 찾아와서 황금 10근을 바쳤다. 그러자 양진이 말하기를 고인(故人)은 그대를 아는데, 그대는 고인을 알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왕밀이 말하기를 깊은 밤에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양진이 말하기를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아는 자가 없다 하겠는가?” 하였다. 후한서(後漢書)54 양진열전(楊震列傳), 소학(小學)』 「선행(善行), 십팔사략(十八史略)

 

양진사지(楊震四知)

후한(後漢) 양진(楊震)이 왕밀(王密)을 추천하였더니, 왕밀이 창읍령(昌邑令)으로 가면서 밤에 금 10근을 품고 가 그에게 주며 어두운 밤에 알 자가 없다.” 하니, 그가 말하되,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자네가 알고 내가 아니, 어찌 앎이 없다 하느뇨[天知神知子知我知 何得無知].” 했다. 후한서(後漢書)54 양진열전(楊震列傳), 소학(小學)』 「선행(善行), 십팔사략(十八史略)

 

양집극(楊執戟)

태현경(太玄經)를 저술한 한() 나라 양웅(揚雄)이 오래도록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서 집극(執戟)하는 보잘것없는 관직에 머물러 있었던 데에 연유하여 그의 별칭으로 되었다. 두보(杜甫)의 시에 寂寞抱關歎蕭生 耆老執戟哀揚子라는 표현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8 至秀州 贈錢端公安道 並寄其弟惠山老

 

양집극(揚執戟)

() 나라 양웅(揚雄)을 가리킨다. 집극은 진()ㆍ한() 때에 궁정을 시위하는 관직의 별칭인데, 양웅이 급사황문랑(給事黃門郞)을 지냈으므로 한 말이다.

 

양차공(楊次公)

() 나라 양걸(楊傑)을 이른다. 차공은 그의 자이다. 일찍이 고려(高麗)의 승려 의천(義天)이 송 나라에 사신갔을 때, 양걸이 명을 받고 관반(館伴)이 되어 의천과 함께 삼오(三吳) 지방에 노닐었던 일이 있다.

 

양창서(楊滄嶼)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출전한 명 나라 장군 양호(楊鎬)를 말한다.

 

양천(陽川)

양천 허씨(陽川許氏)인 서장관 허성(許筬)을 가리킨다.

 

양천(楊穿)

활을 아주 잘 쏘는 것을 말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때 초() 나라 사람 양유기(養由基)가 활을 아주 잘 쏘았는데, 백 보 바깥에서 버들잎을 쏘면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사기(史記)卷四 주본기(周本記), 전국책(戰國策)』 「서주책(西周策)

 

양천공(亮天工)

천공(天工)은 곧 하늘의 일이란 뜻으로, 즉 직무를 수행하여 국정(國政)을 돕는 일을 말한다. 서경(書經)』 「요전(舜典)

 

양천유하리(養蚕有何利)

고문진보(古文眞寶)전집(前集) 잠부(蠶婦)어저께 성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수건에 가득했지. 몸에 비단을 두르고 있는 이들은 누에를 기른 사람이 아니더라[昨日入城市, 歸來淚滿巾. 徧身羅綺者, 不是養蠶人.].” 하였다.

 

양천자(陽川子)

양천 허씨(陽川許氏)인 허봉을 가리킨다.

 

양철애(楊鐵崖)

원말 명초의 시문가. 이름은 유정(維楨), 자는 염부(廉夫), 호는 철애(鐵崖)이다.

 

양촌(陽村)

조선 초기의 유학자 권근(權近)의 호이다.

 

양최사홀제(梁摧事忽諸)

철인(哲人)의 죽음을 가리킨다. 예기(禮記)』 「단궁(檀弓)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하였다.

 

양춘(陽春)

양춘백설(陽春白雪)의 준말이다. 고대 가곡(歌曲)의 이름이다.

 

양춘가(陽春歌)

옛날에 고상하지만 따라 부르기 힘들기로 유명했던 초() 나라의 가곡(歌曲) 이름이다.

 

양춘곡(陽春曲)

고아(高雅)하고 심오한 흥취가 우러나는 문예 작품을 가리킨다.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의 양춘곡(陽春曲)과 백설곡(白雪曲)은 너무도 곡조가 고상해서 따라 부를 수 있는 자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세상에 도를 아는 고명한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양춘과 하리는 다 곡명(曲名)인데 양춘은 그 수준이 높고 하리는 민간의 통속적인 것으로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문선(文選)45 대초왕문(對楚王問)처음 하리(下里)ㆍ파인(巴人)을 노래할 때는 국중에서 그에 화답한 자가 수천 인이었고 …… 양춘ㆍ백설(白雪)을 노래할 때는 국중에서 그에 화답한 자가 수십 인에 지나지 않았다.” 하였다.

 

양춘백설(陽春白雪)

범속한 세상을 초탈하여 격조가 높은 시문을 말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초 나라에서 어떤 나그네가 하리(下里)와 파인(巴人) 노래를 부르니 수천 명이 따라 불렀고, 양아(陽阿)와 해로(薤露) 노래를 부르니 몇 백 명이 따라 불렀는데, 양춘(陽春)과 백설(白雪) 노래를 부르니 몇십 명밖에는 따라 부르지 못했다는 고사가 전한다[其爲陽阿薤露, 國中屬而和者數百人; 其爲陽春白雪, 國中屬而和者不過數十人而已]. 문선(文選)송옥(宋玉), 대초왕문(對楚王問)/ 인용: 贈李子範時楷(이안눌)

 

양춘백설곡(陽春白雪曲)

따라 부르기 어렵기로 유명한 옛날 초() 나라의 고아(高雅)한 가곡(歌曲) 이름이다.

 

양춘창영(陽春唱郢)

양춘(陽春)은 초()의 고상한 사곡(詞曲) 이른다. 송옥(宋玉)이 초왕에게 한 사람이 영중(郢中)에서 양춘과 백설(白雪) 같은 고상한 곡조를 부르니 화답할 자가 겨우 수십 명뿐이었습니다.” 하였다.

 

양출제입(量出制入)

나가는 것을 측량해서 들어오는 것을 제한한다는 뜻으로, 곧 필요한 양을 재서 미리 수입의 양을 조정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양치(揚觶)

()는 술잔인데, 향사례를 마친 뒤에 주인이 상자(相者)를 시켜 빈()과 대부(大夫)에게 술잔을 들어 올리게 하는 의식이다.

 

양칭(亮秤)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이 정사와 상벌(賞罰)에 경중(輕重)을 잘 저울질해 적당하게 하였다.

 

양퇴(梁頹)

공자가 죽기 전에 스스로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진다, 대들보가 무너진다. 철인(哲人)이 죽는다.” 하였다.

 

양파어(陽坡語)

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 두 학사(學士)가 척화(斥和)했던 인물로 잡혀갈 때 최명길이 오랑캐 진영으로 압송하면서 양파(陽坡)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쉬면서 죽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두 공을 달랬는데, 그가 한 말은 모두 애걸복걸 살기만 구하라는 말들이었다.

 

양패구상(兩敗俱傷)

쌍방이 다 함께 패하고 상처를 입음

 

양포지구(楊布之狗)

양포(楊布)가 외출할 때는 흰 옷을 입고 나갔다가 비를 맞아 검은 옷으로 갈아 입고 돌아왔는데, 양포의 개가 알아보지 못하고 짖어대서 개를 때리려 했더니, 양주(楊朱)가 말하기를 네 개가 나갈 때는 흰 옷을 입고 나갔다가 검은 옷을 입고 돌아온다면 너 역시 괴상하게 여기지 않겠냐[子無扑矣!子亦猶是也. 嚮者使汝狗白而往黑而來, 豈能無怪哉]”고 나무랬던 일화에서 비롯된 말이다. ‘겉모습이 변한 것을 보고, 속까지 변해버렸다고 판단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열자(列子)』 「설부(說符), 한비자(韓非子)』 「세림(說林)

 

양표(揚鑣)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재능을 드날린 것을 비유한 것이다[喻顯揚才華].”라고 했다.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송신원외북상서(送辛員外北上序)글 짓는 곳에서 재주를 드날렸으며 공문서 작성하는 곳에서 의연하였다[揚鑣翰墨之塲, 游刃簿書之藪].”라고 말했다.

 

양피백리해(羊皮百里奚)

백리해는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의 현신(賢臣)으로 불우하게 떠돌아다니다가 잘못 초() 나라에 억류되었는데, 이때 진 목공(秦穆公)이 그의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는 암양[] 가죽 다섯 벌을 초 나라 사람에게 주고 억류된 백리해를 데려와 정승으로 삼았다. 그래서 백리해를 오고대부라고도 한다. 맹자(孟子)』 「만장(萬章),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

 

양필(良弼)

() 나라 고종(高宗)이 꿈에 어진 보필(良弼)을 얻고 깨어나서 부열(傅說)을 찾아내었다.

 

양하(兩河)

() 나라 때 안사(安史)의 난을 겪고 나서 하남(河南)과 하북(河北) 2()를 일컬은 말이다.

 

양하(羊何)

남제(南齊) 때 문장가로, 남조(南朝) () 나라의 사영운(謝靈運)ㆍ사혜련(謝惠連) 등과 사우(四友)로 일컬어졌던 태산(泰山)의 양선지(羊璿之)와 동해(東海)의 하장유(何長瑜)를 가리킨다.

 

양하(蘘荷)

식물 이름이다. 고독(蠱毒)을 치료하는 약재로 쓰인다. 정의(正義)

 

양학동몽(羊鶴氃氋)

세설신어(世說新語)진 무제(晉武帝)의 신하 양호(羊祜)의 집에 있는 학()이 춤을 잘 추었다. 어느 때 손님에게 자랑하자, 손님이 한 번 보기를 청했는데, 학은 털만 흩뜨리고 춤을 추지 않았다.”는 고사가 있다.

 

양함(陽咸)

물귀신인 양후(陽侯)와 유명한 점쟁이였던 무함(巫咸)을 말한다.

 

양해(梁海)

진시황(秦始皇)이 석교를 놓아 바다를 건너가서 해뜨는 곳을 보려고 하는데 신인(神人)이 바다로 돌을 몰아 넣었으나 돌이 빨리 가지 않자 채찍질을 하니 돌이 피를 흘렸다 한다. 삼국약기(三齊略記)

 

양현보(羊玄保)

() 나라 때 바둑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양형(楊炯)

() 나라 사람. 화려한 문장으로 초당(初唐)을 풍미하였다. 그는 어려서 신동(神童)으로 천거되어 교서랑(校書郞)이 되었다. 당시에 왕발(王勃)ㆍ노조린(盧照隣)ㆍ낙빈왕(駱賓王)과 함께 사걸(四傑)로 칭해졌음.

 

양호(兩湖)

호남(湖南)과 호서(湖西), 즉 전라도와 충청도를 말한다.

 

양호(養浩)

마음속의 깨끗한 기운인 호기(浩氣)를 기르다는 뜻이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양호유환(養虎遺患)

호랑이를 키우는 것은 후환(後患)을 남기는 것이다. 호랑이를 키워 후에 그 호랑이에게 해를 입는다는 말이다.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한테 도리어 손해를 입게 된다. 혹은 스스로 화를 만들어 당함을 뜻하는 말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와 같은 의미다. / 유의어: 양호이환(養虎貽患)

 

양홍(梁鴻)

후한(後漢) 장제(章帝) 때의 고사(高士) 양홍이 산수 좋은 회계산에 들어가 농사지으며 살았는데, 처음 맹광과 결혼했을 때 맹광이 성장(盛裝)을 한 것을 보고 일주일 동안이나 말을 하지 않다가 농사꾼 차림을 하고 나오자 크게 기뻐했으며, 이후 서로들 손님을 대하듯 공경하며 살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장제가 그를 찾았으나 성명을 바꾸고 오() 나라로 떠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후한서(後漢書)』 「일민전(逸民傳)양홍(梁鴻) / 인용: 滕王閣序(왕발)

 

양홍(鑲紅)

청 태조(淸太祖)가 창업(創業)하던 당시에 공로가 있었던 사람의 자손들로 조직한 병제(兵制)로서 팔기병(八旗兵)의 하나이다.

 

양홍맹광(梁鴻孟光)

모범이 될 만한 부부간을 비유한 말이다. 양홍(梁鴻)은 후한 때의 은사(隱士)이고 맹광은 바로 그의 아내인데, 특히 맹광은 부덕(婦德)이 훌륭하여 남편을 잘 섬겼다 한다. 양홍은 본디 가난한 선비였는데, 맹광이 부유한 가정에서 시집을 와서 처음에 비단옷을 입고 화장을 하곤 하므로, 양홍이 말하기를 나는 거친 베옷을 입은 사람과 함께 깊은 산 속에 은거하려고 했었는데, 지금 그대는 비단옷을 입고 분단장을 하니,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하자, 맹광이 대번에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베옷을 입고서 양홍의 앞에 나타나니, 양홍이 말하기를 진정한 양홍의 아내이다.” 하고는, 함께 패릉산중((霸陵山中)으로 들어가 살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卷八十三

 

양홍오희(梁鴻五噫)

후한(後漢) 때 양홍(梁鴻)이 경사(京師)를 지나면서 오희가(五噫歌)를 지었다. 오희(五噫)5가지 슬픔을 말한 것으로 저 북망(北芒)을 오르매 슬프고, 제경(帝京)을 돌아보매 슬프고, 궁실(宮室)이 높으매 슬프고, 백성들이 수고하매 슬프고, 아득하여 다하지 아니하매 슬프다.” 하였다.

 

양홍처(梁鴻妻)

양홍(梁鴻)은 동한(東漢) 때 사람인데 자()는 백란(伯鸞)이다. 집은 가난하나 절의를 숭상하고 모든 책을 박람하여 정통하였다. 같은 고을 맹씨(孟氏)의 딸 맹광(孟光)이 몹시 못생겼는데 31세가 되어도 결혼하려 들지 않자 부모가 연유를 물으니 양홍같이 훌륭해야 합니다.” 하였다. 양홍이 이 말을 듣고 그에게 장가들었는데 장식이 대단히 화려하니 7일이 지나도 말을 하지 않았다. 아내가 이에 퇴계(椎髻) 포의(布衣)로 앞에서 일을 하니 양홍이 기뻐하며 참으로 양홍의 아내다.” 하였다. 뒤에 부부가 함께 패릉 산중에 들어가 손수 농사짓고 길쌈하였다. 그러다 황제의 부름을 피하여 오()로 가서 고백통(皐伯通)의 행랑에서 삯방아를 찧으며 살았는데 아내가 밥상을 들고 올 때는 눈썹 높이와 가지런하게 들어 공손한 예를 다하였다. 남편에게 공순하게 예를 다하고 남편과 해로한 여인을 양홍의 아내(梁鴻妻)라 한다.

 

양화(陽和)

동짓달인 11월을 말한 것이다. 주역(周易)10월은 곤괘(坤卦)에 해당되는데 순음(純陰)의 상이다. 11월은 복괘(復卦)인데 일양(一陽)이 맨 밑에서 생기고 12월은 임괘(臨卦)인데 이양(二陽)이 밑에서 생기고 정월은 태괘(泰卦)인데 삼양(三陽)이 밑에서 생긴다고 하였다.

 

양화(陽貨)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이다. 이는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양화가 말하기를 ()를 하려면 인()을 할 수 없고, 인을 하려면 부를 할 수 없다.’ 하였다[爲富不仁矣, 爲仁不富矣].”고 인용하였다.

 

양화도(楊花徒)

고려 때 복재(復齋) 한종유(韓宗愈)가 저도(楮島)에 살면서 언제나 술만 취하면 일어나 춤을 추면서 양화사(楊花詞)를 노래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일러 양화도(楊花徒)라고 하였다.

저자도(楮子島)에는 고려 때의 명상(名相) 한종유(韓宗愈)의 별장이 있는데, 한종유가 만년에 여기에 은거하면서 명사들과 함께 노닐다가 술이 취하면 양화사(楊花辭)를 읊었으므로, 그가 양화도로 불리웠던 데서 온 말이다.

 

양화자(痒和子)둥글개를 말한다.

 

양화호로(樣畫葫蘆)

송대(宋代)의 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 도곡(陶穀)이 오랜 기간 한림원에서 발휘한 자신의 문재(文才)를 과시하면서 다른 사람을 통해 높은 직위로 승진되기를 은근히 희망하자, 태조(太祖)가 웃으면서 그가 지은 글을 보면 모두 다른 사람의 작품을 베껴 가며 조금씩 말만 바꾸었을 뿐이다. 이는 세상에서 말하는 바 매달린 조롱박을 보고 그럴듯하게 본떠 그려 놓은 것일 따름이니[此乃俗所謂依樣畫葫蘆耳], 그가 힘을 쓴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동헌필록(東軒筆錄)1

 

양효왕(梁孝王)

양 효왕은 두 태후의 막내아들로서 극진한 사랑을 받아 엄청난 호화생활을 하였는데, 사방 3백여 리에 달하는 동원(東苑)과 거대한 궁실들을 연결하는 복도(復道)를 설치했는가 하면, 천자의 정기를 하사받아 출입할 때 감히 천자의 흉내를 내며 행동하기도 하였다. 경제 2911월 율태자(栗太子)를 폐하자 두 태후가 양효왕으로 후사를 삼게 하도록 은근히 압력을 넣었는데, 원앙(爰盎) 등 의신(議臣)이 태후를 설득하여 그만두게 한 일이 있었다. 이에 양 효왕이 유감을 품고 원왕 및 의신 10여 인을 때려 죽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경제가 양 효왕의 모사인 양승(羊勝)과 공손궤(公孫詭)를 죽이는 것으로 마무리 지음으로써 황제가 내 아들을 죽인다[帝殺吾子].”고 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울던 태후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한서(漢書)卷四十七

 

양후(陽侯)

해신(海神), 또는 파도신(波濤神)을 말한다. 원래 바다에 인접한 능양국(陵陽國)의 제후였는데, 물에 빠져 죽은 뒤에 큰 파도를 일으켜 사람을 해치는 악귀(惡鬼)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초사(楚辭)九章 哀郢註 / 인용: 李忠武公龜船歌(황현)

 

양후의(陽侯義)

양후는 늘 풍파(風波)를 일으켜 배를 전복시킨다는 물귀신의 이름이다.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무왕(武王)이 주()를 칠 때 맹진을 건너는데, 양후의 물결이 역류하여 주 나라 군사를 막았다.” 했는데, 그 주에 양후는 양릉국(陽陵國)의 제후인데 그가 물에 빠져 죽어 그 귀신이 큰 물결을 일으킨다.” 하였다.

 

양흔(羊欣)

남조(南朝) 시대 송() 나라 서예가. 황로학(黃老學)을 숭상하고 예서(隸書)에 능했다.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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