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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미국과 유대인 현금의 세계질서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미국이다. 미국의 군사력은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의 군사력을 합친 것보다 더 막강하다. 이 지구의 역사에서 한 나라가 그토록 강성한 유례는 없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시기에도 중국에는 한제국, 인도에는 쿠샨왕조가 있었고, 그리고 로마의 동점을 막고 있었던 파르티아제국(Parthian Empire)도 있었다.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미국이라고 한다면,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이다. 이 세계는 실제로 유대인들에 의하여 지배 당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미국의 금융, 언론, 학술, 엔터테인먼트산업에 있어서 거의 독점적인 위치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칼 맑스, 프로이드, 아인슈타인, 노암 촘스키, 스필버그, ..
다이애스포라 신세 유대인은 또다시 자기 고향을 잃고 이역의 다이애스포라(Diaspora)에 살아야만 되는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이 ‘떠돌이 신세’는 자그마치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the State of Israel)가 공표되기까지 1800여년 동안 계속되었던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김춘추가 당(唐)이라는 대국의 힘을 빌어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되, 통일의 주체라는 신라까지 말아멕혔다면 어찌 되었을까? 지금도 예산에 가면 임존성(任存城)의 잔해가 남아있어 백제인들의 마지막 항쟁의 치열했던 함성이 메아리 친다. 당장(唐將) 소정방(蘇定方)은 의자왕을 비롯 수없는 왕족ㆍ대신ㆍ장사(將士)들을 포로로 하여 당으로 돌아갔고, 이세적(李世勣)은 보장왕을 비롯 다수의 귀족과 20여만..
바르 코크바와 랍비 아키바 AD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도 로칼한 시나고그들은 유대교의 구심체로서 기능했고, 기독교 교회들도 특히 갈릴리지역에서는 번창해나갔다. 로마인들은 정치적 저항에는 가혹했지만 원칙적으로 유대인들이 유대교에 귀속되는 권리까지 침해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AD 66~73년 사이의 제1차 독립전쟁시기에서 사두개인들은 많이 죽임을 당하였지만 바리새인들은 내면적으로 결속하여 유대인 공동체의 정신적 토대를 오히려 공고히 다져나갔다. 미쉬나(Mishnah)와 탈무드(Talmud)를 중심으로 한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형성의 주축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AD 132년 하드리안 황제(Hadrian, AD 76~138, 재위 117~138)는 유대인의 할례와 일체의 거세를..
요한복음 속의 예수 나사렛의 예수는 물론 유대인이었다. 예수는 안식일을 지켰고, 유대의 율법과 관습을 잘 알았다. 그의 제자도 모두 유대인이었고, 그를 따르던 군중도 모두 유대인이었다. 그의 선교활동 전체가 팔레스타인 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예수는 유대인의 민족적 메시아는 될 수 없었다. 요한복음 속의 예수는 그를 심문하는 빌라도 총독에게 이와 같이 반문한다. 빌라도 총독: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죄인 예수: “나를 ‘왕’이라니, 그건 네 자신의 말이냐? 그렇지 않으면 딴 사람들이 들려준 말을 네 입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냐?” 빌라도 총독: “네가 날 유대인으로 알고 그따위 질문을 하는 거냐? 너를 왕이라고 고소한 놈들은 바로 네 동족들이다. 넌 도대체 그들에게 뭔 짓을 했느냐?” 죄..
예수에게는 메시아라는 자기인식이 없었다 일반 유대 민중에게 있어서 ‘메시아’의 일차적 의미는 그들에게 정치적 독립, 즉 이민족지배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주는 다윗왕과 같은 역사적 인물이었다. 역사적 예수는 이러한 맥락에서의 ‘메시아’로서 자기인식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문제는 메시아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최후의 승리자이다. 그런데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메시아’ 라는 것은 일반 대중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메시아의 모습이었다. ‘죽는 메시아’(dying Messiah),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killed Messiah)는 상상키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복음서 저자들에게는 이 ‘부활’(Resurrection)과 ‘재림’(Parousia)이라고 하는 문제가 흩어져가는 민족에게..
마가복음서 집필상황과 이스라엘민족의 애환 이런 상황에서 마가는 복음서를 썼다. 복음서는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하여 쓴 책이 아니다. 당대의 크리스챤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전쟁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복음서의 저자들도 이 민족적 비극을 객화시켜서 담담하게 묘사할 뿐 자기내면의 상처와 아픔으로 그리고 있질 않다. 그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서의 유대민족의 정치적 해방에 관심이 없었으며, 결국 자기민족인 유대인들의 몰이해와 박해 속에서 죽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의 출현은 완전히 민족적 프라이드와 아이덴티티를 상실하고 좌절 속에 해체되어만 가고 있었던 유대인 커뮤니티 속에 새로운 민족적 구심점을 창출하려는 한 노력으로도 볼 수가 있다. 그들은 예수를 진정한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로 그리..
마사다 요새 AD 70년 유월절 기간 동안에 티투스의 4개 군단과 강력한 지원군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처참한 파괴가 이루어진 이 사건으로 6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났다.(사망자가 100만 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자그마치 팔레스타인 유대주민의 4분의 1이 죽은 것이다. AD 73년, 아마도 74년초까지 사해의 서쪽해안 난공불락의 산 정상에 있는 마사다 요새에서 항쟁을 계속했던 유대의 독립투사들은, 금남로 도청에 포위되었던 광주시민처럼 상황이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결을 결정하였다. 지하의 수도관에 숨어있던 두 명의 아낙과 다섯 어린이들만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유대인 독립투사들의 비참한 항쟁의 종말을 지켜보았다. 마사다 요새를 로마군이 함락시켰을 때는 시체만 즐비하게 널려있었던..
예루살렘교회 전통과 복음양식 바로 마가의 복음서양식의 출현은 이러한 바울의 추상적 이방선교에 대한 예루살렘교회 전통의 회복을 의미하는 사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예루살렘교회와 팔레스타인 곳곳의 토착교회에는 바울의 추상적 논술과는 달리 보다 구체적인 예수의 이야기, 즉 1세대ㆍ2세대의 직전 담론들이 짤막한 케리그마(kerygma, κῆρυγμα)의 형태로 지속되어 내려오고 있었다. 마가는 이러한 단편적 케리그마의 유형들을 하나의 일관된 수난극의 플롯 속에서 묶어내어 예수라는 사건의 전모를 드러내는 포괄적인 새로운 케리그마를 구상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었다. 그런데 복음서의 출현은 AD 70년 예루살렘멸망을 전후로 한 정치 상황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이때만 해도 기독교는 아직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지 않았..
바울 비젼의 독자성 3년 후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지만 그는 자신의 개종체험을 인가받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간 것이 아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정통성이나 권위를 전혀 인정하고 있지 않다. 예루살렘에서 만나서 15일을 같이 유숙했다고 하는 ‘게바’(Cephas)도 주석가들의 통념처럼 꼭 베드로이어야만 하는 보장도 없다. 게바(베드로의 아람말)와 베드로는 어원의 문제를 떠나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 이외에는 다른 사도들, 즉 예수의 직전제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았고 만날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그의 이방선교에 대한 사도 권능의 원천이 전혀 예수의 제자들과는 무관한 것임을 자랑스럽..
사도 바울과 아라비아 사막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이다. 바울은 아주 명료하게 ‘유대교’(Judaism)라는 표현을 썼다. 즉 유대전통이 그의 의식 속에서 이미 하나의 개념으로서 소외되어 있고 객화되어 있는 것이다. 유대교에 대한 열렬한 충성심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그토록 열심히 핍박했던 그가 그의 아들 예수를 ‘내 속에서’ 계시된 형태로 만난 사건을 계기로 어떤 심정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개종체험’의 대사건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그 체험의 사건에 관하여 일체 가까운 사람, 혈육 그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라비아로 갔다. 그리고 다메섹으로 돌아갔다. 개종체험이 있은 후 당연히 그는 그 개종에 관하여 기독교단을 리드하는 사람들로부터 인가를 얻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
사울의 개종체험 이렇게 본다면 바울이 다메섹(다마스커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둘러 비추어 음성이 들리면서 눈이 멀었고, 사흘 후에나 아나니아라는 제자의 안수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고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에피파니(epiphany, 하나님 현현)의 체험, 그리고 제자 아나니아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매우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사도 바울에 관한 환상적 이야기들이 후대에 다양하게 전승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생생한 이야기의 진실, 기독교사의 최대의 역전적 계기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주 확실하고도 안전한 방법이 있다. 사도 바울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사도 ..
바울과 예수 바울은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돌연한 계시적 체험에 의하여 그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다. 이 개종체험(conversion experience)의 드라마는 사도행전에 꽤 자세히 생생하게 3번이나 기술되어 있다.(행 9:3~19, 22:6~16, 26:12~18). 그러나 이 3번의 상황도 자세하게 뜯어 보면 설명방식이 각기 다르다. 3개의 다른 전승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더욱 결정적인 사실은, 오늘날의 성서연구자들이 확정짓고 있는 일치된 결론은 사도행전의 기록이 결코 사도 바울의 직접적 증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사도 바울과 직접 안면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속의..
공전의 히트 바울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무시간적으로 표백시켜 그 속죄론적 의의만을 강조했던 것과는 달리, 마가는 오히려 생동치는 한 역사적 인간으로서 갈릴리의 평원에서 활동한 예수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논술했다고 한다면 마가는 나사렛 예수의 삶을 기록했다. 여기에 최초의 복음서라는 문학장르의 탄생의 역사적 의의가 있다. 초대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기적과 영광과 권세의 수퍼 히어로(a super-hero), 신인(神人, a divine man)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마가는 그러한 교인들에게 완전히 다른 복음의 드라마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마가의 예수는 힘이 없었고 연약했으며, 사람들을 치유하고 권면했으며, 수난 속에 죽어갔다. 이러한 십자가를 통해 ..
수난복음서 마가는 수난복음서이다. 수난에 관한 이야기전승을 마가는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수난 한 주간의 역사만 해도 복음서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마가복음은 크게 3부로 대별된다. 제1부는 수난사의 서막이다(시작~1:13). 자세히 살펴보면 희랍비극의 서막과 매우 유사한 양식을 취하고 있다. 세례 요한의 출현, 예수의 세례, 광야에서의 시험이 매우 간략하게 서술되면서 예수라는 인물의 진정한 아이덴티티는 베일에 가려진 채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6장에는 살로메의 쟁반 위에 칼로 토막난 세례 요한의 머리가 올려지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생애 자체가 이미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의 암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제2부는 예루살렘 상경 직전까지의 갈릴리호수를 중심으로 한 예수의 선교활동이..
마가의 복음 핵심 그 얼마나 강렬한 드라마인가! 이렇게 위대한 드라마의 엔딩장면을 놓고 밑 안 닦은 것 같다는 식의 투정들, 예수의 부활현현의 장면이 있었을 것이라는 등, 계속된 부분이 여기서 뜯겨져서 없어졌을 것이라는 등, 복음서 저자가 잡혀가는 바람에 완성을 못했을 것이라는 등등의 하찮은 췌언(贅言)을 신학자라는 사람들이 일삼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분명히 말하건대 마가는 16장 8절, 연약한 여인들의 떨림으로 그의 유앙겔리온의 대미를 완벽하게 장식한 것이다. 그것은 의도된 결말이었다. 마가가 전파하고자 한 유앙겔리온의 핵심은 십자가였다. 예수라는 한 인간, 우리의 구세주의 몸으로 겪은 수난이요 희생이었다. 오로지 그 십자가가 그의 관심이었다. 화려한 부활이나 눈부신 승천이 그 주제가 아니었..
마가가 그리는 예수의 색신 사마천이 그린 공자(孔子)의 모습이 과연 역사적인 실상에 가까운 공자의 모습인가에 관하여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공자세가(孔子世家)」를 구성하는 단편자료들 사이의 중복, 모순, 불일치, 시대적 배열의 문제점들이 수없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천이 그리려고 하는 공자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한 인간의 충실한 전기적 구성이다. 그러나 마가는 애초부터 그런 식으로 예수를 바라보지 않는다. 앞서 내가 복음서의 예수를 바울의 법신적 예수에 비하여 색신(色身)적 예수라고 말했지만, 이 색신이라는 것도 사마천이 공자를 바라보는 것과도 같은 역사적 인물로서의 색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색신은 그 자체가 하나의 복음이며, 그 색신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이다. 마가..
마가복음과 공자세가 독자들은 마가복음과 「공자세가(孔子世家)」를 병렬하여 논구하는 나 도올의 견식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못마땅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깊게 양자를 모두 문헌학적 측면에서 검토해보면 그 성립과정이나 집필방식에 놀라운 유사성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0세기 신학자들이 발전시킨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이나 양식비평(form Criticism)의 모든 문제점이 「공자세가(孔子世家)」 속에서도 드러나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정의로운 주장 때문에 요참(腰斬)의 사형언도를 받고 또 그것을 당대 사대부로서는 최대의 치욕이었던 궁형(宮刑, 거세)으로밖에는 모면할 길이 없었던, 너무나 처절하고도 끔찍했던 실존적 고뇌를 감내해야만 했던 사마천! 그 사마천은 「공자세가..
사기의 공자세가 우리는 인류문명의 7대 불가사의(Seven Wonders)니 뭐니 운운하지만 이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스케일의 위대한 불가사의가 하나 있다. 『사기(史記)』라는 서물이 그것이다. 이 『사기』 속에는 ‘의(義)를 돕고 결연히 나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세운 사람’, 암혈지사(巖穴之士), 유협지사(遊俠之士), 덕행으로 명성을 날린 시정의 장사치 등등, 후세의 이름을 남긴 영웅호걸이나 위인들의 바이오그라피(傳記)가 열전(列傳)이라는 장르 속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열전을 아무리 뒤척여도 공자(孔子)의 전기는 보이지 않는다. 노자(老子)나 한비자(韓非子)의 이름은 나와도 공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공자의 전기는 세가(世家)라는 장르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세가’는 천자(天子)..
로기온과 논어(論語) 복음서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 관한 단편적 이야기들이나 그의 말씀, 그러니까 로기온(logion)이라고 부르는 설법토막들이 전승되어 오고 있었다. 아마도 교회 내에서 암송이나 독송의 형태로 내려오는 구전자료들, 그리고 신도들 앞에서 크게 공적으로 낭독하는 어떤 예수어록집 같은 문서기록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어록의 말씀은 역사적ㆍ상황적ㆍ감정적 맥락이 단절된 단편적인 것이었다. 그런 것은 아무리 들어도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한 인간에 대한 심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록에는 그 인간의 라이프 스토리라든가 그 말을 의미 있게 만드는 전후 내러티브(narrative, 서술적 담론)가 없는 것이다. 일례를 들면 우리가 아무리 『논어』를 열심히 읽어도 공..
제8장 복음서의 출현 복음서와 대승기독교 역사적 상황은 다르지만 기독교 복음서의 출현은 동일한 헬레니즘 문명권내에서 대승불교가 출현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의미맥락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복음서 출현이 약간 빠르다). 그러니까 복음서라는 새로운 문학양식의 출현은 기독교를 대승화시키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바울이 말하는 부활의 그리스도가 아닌 팔레스타인의 풍진 속에서 역사하는 나사렛 예수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재미있고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기독교의 대승화작업에 최초의 전기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마가(Mark)라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대승화작업의 정점에 요한복음이 자리잡고 있다. 요한복음의 로고스기독론과 『금강경』(金剛般若波羅蜜多經, Vajracchedikā-Prajñāpāram..
금강경(金剛般若波羅蜜多經, Vajracchedikā-Prajñāpāramitā-Sūtra) 요진 천축삼장 구마라집역(姚秦 天竺三藏 鳩摩羅什譯)무술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戊戌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국역 도올 김용옥 1. 법회의 말미암음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는 사위국【舍衛國, 나라 이름】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는데, 큰 비구들 천이백오십인과 더불어 계시었다.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2. 이 때에, 세존【世尊, 세상에서 존경받는 분이란 뜻이며 부처님의 10가지 이름 중의 하나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밥 때가 되니 옷을 입으시고 바리를 지니시고 사위 큰 성으로 들어가시어 밥 빌으셨다. 爾時, 世尊食時, 著衣持鉢, 入舍衛大..
대승불교 시작의 계기 현 파키스탄내의 페샤와르(Peshāwar)지역에서 이러한 불상이 대거 출토되는데 이 지역의 미술을 통칭하여 간다라미술(Gandhara Ar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간다라 미술과 더불어 인도의 웃따르쁘라데쉬(Uttar Pradesh)지방의 마투라(Mathura) 불상들이 흥기하였고 이로 인하여 이전의 초기불교의 금기를 깨고 인도전역으로 ‘불상 조각붐’이 열병처럼 번져나갔다. 한편 전륜성왕 아쇼카왕 이후 인도에는 스투파신앙이 보편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붓다의 돌무덤인 스투파(stūpa: 원래 분묘였는데 점점 우리가 알고있는 탑양식으로 발전해갔다) 주변을 빙빙 돌면서 붓다를 흠모하는 ‘탑돌이’ 문화가 생겨났다. 이 탑돌이를 하는 사람들은 몇날 몇 달을 죽치고 계속하는 습속이 있..
예수의 법신과 색신 초기불교시대에 있어서는 입적한 싯달타(Siddhartha)에 관하여 일체의 형상을 구체화할 수 없었다. 싯달타(예수에 비교) 즉 붓다(그리스도에 비교)는 윤회의 고리를 끊고 완벽하게 열반(涅槃, nirvāṇa)의 세계로 들어가버린, 다시 말해서 일체의 색신의 가능성이 없어져버린 해탈자(물질적 세계를 완전히 벗어난 자)였기 때문에 그를 다시 육신의 모습으로 구현한다는 것은 금기였고 불경(不敬)이었다. 불타의 생애를 말해주는 초기불전도(初期佛傳圖)에도 발자국 같은 것만 표현되어 있을 뿐 일체의 형상이 없다. 그런데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 불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바로 알렉산더가 뿌린 헬레니즘문화와 관련이 있다. 알렉산더는 인도북부지역 중앙아시아까지 정복의 발길을 뻗치면서 그곳에..
신약성경의 저작연대 도표화 그냥 인상적으로, 상투적으로 현재의 27서 신약성경을 접하는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편제(編制)에 의거하여 그것의 저작연대도 그냥 그 순서대로인 것처럼 생각하기가 일쑤다. 그런 문제에 별로 신경을 안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 있는 4복음서의 성립연대가 뒤에 있는 바울의 서한보다 뒤늦다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쯤은 항상 머리에 넣고 있어야 한다. 쓰여진 저작연대로만 말하면 27서 중에서 갈라디아서나 데살로니카전서가 제일 첫머리에 나와야 할 문헌이다【많은 학자들이 데살로니카전서야말로 신약성서 중에서 최고의 문헌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것은 AD 50년 겨울 고린도에서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물론 AD 50년의 상한선을 소급할 수는 없다. 그리고 바울의 저작성에 관해서도 이론이 ..
마르시온의 11서 체제 마르시온(Marcion, ?~160)이 바울의 편지 10개와 누가복음 1서, 즉 11서의 체제로써 최초의 크리스챤운동의 정경을 창출한 행위는 매우 과감하고 혁신적이며 효율적인 발상의 소치였다. 결국 그후의 모든 정경화작업이 이 체제의 심층구조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시온의 일차적 해후는 바울의 편지였다. 바울의 편지는 그에게 있어서는 유대율법과의 단절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관한 위대한 논술이었다. 그러나 이 논술만으로는 부족하다. 신도들이 예수를 믿게 만들기 위해서는 논술이 아닌, 역사 속에서 살아움직인 구체적인 예수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바울의 추상적인 예수에 대하여 구체적인 예수가 곧 복음서 속에 그려지고 있는 예수였던 것이다. 불교에 비유하자면 바울의 편지들은..
바울의 예수관 예수의 사도로서 글을 쓸 줄 아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의 반열에 낄 수 있는 최초의 인물이 아마도 바울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유대민족의 말인 히브리말에도 정통했으며 당대 세계공용어(lingua franca)인 희랍어(당대의 영어)에 통달했으며 로마시민권 소유자였으며 그레코ㆍ로망 수사학과 문학의 달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이 예수의 사도임을 자처하면서도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 관하여 관심을 표명한 적이 없다. 예수의 생전의 행적이나 말씀에 관하여 일체의 구체적 언급이 없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직전제자들을 만나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 관한 전기자료를 수집할 꿈도 꾸지 않았다. 바울에게 있어서의 예수는, 역사적 색신(色身)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다. 오로지 부활하신 예수일 뿐이다. 그는 부활..
기독교는 경전종교가 아니었다 사도행전에 보면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행 4:13)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학문없는’이라고 번역한 원문은 ‘아그람마토이’(agrammatoi)인데 그것은 ‘글 쓸 줄 모르는’(illiterate)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베드로와 요한은 외견상 무식한 촌무지랭이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문맹이었다. 그의 제자들이 거개 글 쓸 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가 말한 것을 전하고 가르치고(to teach, 마 28:20) 설파하라(to preach, 막 3:14)고 명령했지, 그의 말씀을 써놓으라고 권고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는 출발부터 말씀(구두)의 종교요 행위의 종..
불타와 예수 불타는 깨달음(大覺) 자체가 매우 지적인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설법은 매우 지적이었다. 그리고 아난(阿難陀, Ānanda)과 같은 다문(多聞)의 지적인 제자가 있어 그의 설법의 기록을 전담했다. 물론 아난의 기록은 암송의 형태였다. 그리고 불타가 입적한 직후에 이미 500명의 장로ㆍ비구가 왕사성(王舍城, Rājagṛha)에 모여 불타의 말씀을 결집하여 아함과 율장의 일정한 형태로 만들었다(물론 이것도 구송의 결집이었는데 제3차 결집 때에 문서화시켰다.) 그러니까 불교는 출발부터 경전불교였던 셈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예수는 유대교전통 전체를 뒤엎을 만큼 대단한 지력의 소유자였지만 그의 강론의 내용은 전혀 지적인 것이 아니었다. 불타의 깨달음 속에는 요즈음 말..
예수의 말 예수는 당대 아람어(Aramaic)라는 히브리어와 비슷하면서 다른, 속화된 토속말(vernacular)을 사용한 사람이었다. 이 아람어는 히브리어와는 달리 페니키아 알파벳(the Phoenician alphabet)으로 표기되었다. 요번에 발견된 쿰란문서에도 아람어 텍스트가 많이 나왔다. 아람어는 원래 히브리어와 계보를 달리하는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언어였는데(아브라함도 아람어를 쓴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 26:5), 기원전 6세기경부터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속어로서 자리잡았다. 그것은 특히 갈릴리지방의 흔한 일상구어였다. 그러나 유대지방에서는 일상구어로서 히브리말이 통용되었다. 예수는 히브리말을 몰랐을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일반군중들은 물론(막 10:5..
가톨릭교회 정경화작업의 시작 마르시온(Marcion, ?~160)이 정경화작업을 이미 AD 150년경에는 완성하였고, 그를 이단으로 몰아친 바에야, 그리고 그의 교세가 날로 융성하여 마르시온 정경이 점점 보편화되고 있는 판에 그것을 비판하고 가톨릭교회 자체 내에서 정경을 따로 정립하려는 노력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사도저작성(Apostolicity)을 기준으로 성경문헌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는 책들은 모두 AD 50년~150년 사이의 1세기에 쓰여진 것이다. 이 1세기 동안 쓰여진 책만 하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는 어중이떠중이가 쓴 책이 너무도 많다. 27서 정도의 범위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AD 150년 이후에는 계속해서 어중이떠중이가 쓴..
무라토리 정경 초대교회에는 성경이 없었다. 18세기의 발굴자이며 출판인이었던 무라토리(Lodovica Antonio Muratori, 1672~1750)가 AD 170~180년경에 로마에서 희랍어로 작성되었다고 하는 성경목록을 번역한 7ㆍ8세기 라틴어 단편원고를 발견했다(1740). 이것을 우리가 무라토리 단편이라고 부르고 이 무라토리 단편에 쓰여진 성경목록을 무라토리 정경(Muratorian Canon)이라고 부른다. 이 무라토리 정경이야말로 정통파 신약의 최초의 모습을 알게 해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생각해왔다.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목록에는 ‘4복음서’가 들어가 있는데 누가복음이 ‘복음서의 세 번째’로 지목되고 있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순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르시온 정경: 정경화작업의 최초 계기 누가복음과 아포스톨리콘(the Apostolikon, 바울의 10개 서한)! 이것이 마르시온 교회의 최초의 정경이자 기독교역사에서 출현한 최초의 신약성경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마르시온은 이 정경작업에 오늘날 문헌비평(벨하우젠, 홀츠만)이나 양식사학(궁켈, 디벨리우스로부터 불트만까지)의 선구적 작업이라고 평가될 수 있는 비판적 자세를 견지했다. 그는 상기의 문헌에서 전반적으로 구약과 관계되는 부분을 삭제시켰다. 하나님을 심판자로 묘사하거나, 유대교의 예언의 성취에 관한 부분, 또는 하나님의 징벌에 관한 문구들을 삭제시켰다. 그리고 예수가 구약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구절이나 예수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구약의 인용은 모두 빼버렸다. 누가복음에서도 예수의 유아시절..
아포스톨리콘과 누가복음의 선택 마르시온(Marcion, ?~160)의 ‘구약과의 단절’이라는 테제와 관련하여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모습을 결정케 만든 교회사의 가장 중요한 사실은 구약에 대립되는 신약의 실체에 관한 것이다. 마르시온은 자기의 주장을 확고히 신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성경에 비견할 수 있는 크리스찬들의 성경을 문헌적으로 확정지을 필요를 느꼈다.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문헌들을 제한하여 교회 성경(ecclesiastical scriptures)으로 그 권위를 확립해야만 그의 신약사상을 확고히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우선 바울의 서한이었다. 그가 바울에게 경도된 것은 바울의 반율법사상(antinomianism)이었다. 그는 사도 바울이야말로..
시리아의 마르시온교회 2세기 중엽부터 5세기 중엽까지 마르시온 교회는 300년간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특히 시리아에서는 마르시온파가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끝까지 버티었다. 바울은 시리아의 다메섹(다마스커스)으로 가는 도중에 홀연히 하늘에서 빛이 둘러 비추어 개종케 되었다(행 9:3). 기독교 교회건물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명문이 새겨져 있는 건물은 다마스커스 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에 있는 한 교회다. 그 교회에 희랍어로 명백히 새겨져 있는 명문은 다음과 같다: ‘레바논의 마을에서 마르시온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처. 장로 바울의 리더십 아래 있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이 명문은 318~319년의 것으로 비정된다. ‘마르시온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당..
파문의 결과 물론 당시의 파문이라는 것이 후대의 교황의 파문과도 같은 그러한 권위나 권세를 갖지 못했다. 황제의 정치권력의 백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시온(Marcion, ?~160) 자신도 파문에 승복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마르시온의 교설이 조금도 기독교의 정통교설에 위배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시온을 파문한 것은 교부들이었지 신도들이 아니었다. 로마교회내에서 그의 인기는 열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요즈음의 분파주의자나, 사교(邪敎) 교단을 만들어 자기가 재림 예수라는 둥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둥 그따위 허탄(虛誕)한 말을 둘러대는 사기꾼과는 질이 달랐다. 마르시온은 자신을 ‘교양있는 평신도’로서만 생각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와 바울의 참된 가르침에 가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