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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황하를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건너며 깨달은 것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박지원(朴趾源) 거침없이 흐르는 황하 河出兩山間, 觸石鬪狼. 其驚濤駭浪憤瀾怒波哀湍怨瀨, 犇衝卷倒, 嘶哮號喊, 常有摧破長城之勢. 戰車萬乘, 戰騎萬隊, 戰砲萬架, 戰鼓萬坐, 未足諭其崩塌潰壓之聲. 沙上巨石屹然離立, 河堤柳樹, 窅冥鴻濛, 如水祗河神爭出驕人, 而左右蛟螭試其挐攫也. 或曰此古戰場故河鳴然也, 此非爲其然也. 河聲在聽之如何爾. 내 감정이 소리를 변화시키네 余家山中, 門前有大溪. 每夏月急雨一過, 溪水暴漲, 常聞車騎砲鼓之聲, 遂爲耳崇焉. 余嘗閉戶而臥, 比類而聽之. 深松發籟此聽雅也, 裂山崩崖此聽奮也, 群蛙爭吹此聽驕也, 萬筑迭響此聽怒也, 飛霆急雷此聽驚也, 茶沸文武此聽趣也, 琴諧宮羽此聽哀也, 紙牕風鳴此聽疑也. 皆聽不得其正, 特胸中所意設而耳爲之..
만물의 변화무쌍함을 코끼리와 ‘상(象)’자를 보며 알게 되다 상기(象記) 박지원(朴趾源) 두 번의 코끼리를 보았던 추억 將爲怪特譎詭恢奇鉅偉之觀, 先之宣武門內, 觀于象房可也. 余於皇城, 見象十六, 而皆鐵鎖繫足, 未見其行動. 今見兩象於熱河行宮西, 一身蠕動, 行如風雨. 余嘗曉行東海上, 見波上馬立者無數. 皆穹然如屋, 弗知是魚是獸, 欲俟日出, 暢見之, 日方浴海, 而波上馬立者, 已匿海中矣. 今見象於十步之外, 而猶作東海想. 코끼리의 생김새 其爲物也, 牛身驢尾, 駝膝虎蹄. 淺毛灰色, 仁形悲聲, 耳若垂雲, 眼如初月. 兩牙之大二圍, 其長丈餘, 鼻長於牙, 屈伸如蠖, 卷曲如蠐. 其端如蠶尾, 挾物如鑷, 卷而納之口. 코끼리의 코를 보고도 착각하는 사람들 或有認鼻爲喙者, 復覓象鼻所在, 蓋不意其鼻之至斯也. 或有謂象五脚者, 或謂象目如..
과정록(過庭錄) 목차 1권 꿈에 붓을 얻다 자서 1 2 3 4 5 6연암의 성향을 걱정한 장인 이보천 7 8 9 10 11 12 13 14 15과거급제엔 전혀 관심도 없어라 16어렵게 금강산에 가다 연암이 지은 총석정시를 보고 놀란 홍상한叢石亭觀日出17 18 19 20형과 형수를 부모처럼 모시다 21 22급제시키려는 사람들과 피해 다니는 연암 23‘연암’으로 자호를 삼은 사연 24 25돈독한 친구 홍대용 손기술이 뛰어난 석치와 토론을 밤새도록 했던 무관ㆍ혜풍ㆍ재선과 제일 아낀 강산26 27음악을 좋아한 연암ㆍ담헌ㆍ효효재ㆍ풍무자「伐木」28 29 30권력자 홍국영을 거슬러 연암으로 피하다 31학문의 즐거움을 연암협에서 전수하다 32 33 34아버지의 세초된 작품들에 대한 아쉬움 35홍국영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열하일기(熱河日記) 목차 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 1. 도강록(渡江錄)6월 24일에서 7월 9일까지. 압록강을 지나 요양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 渡江錄序六月二十四日辛未二十五日壬申二十六日癸酉二十七日甲戌二十八日乙亥二十九日丙子七月初一日丁丑初二日戊寅初三日己卯初四日庚辰初五日辛巳初六日壬午初七日癸未初八日甲申初九日乙酉舊遼東記遼東白塔記關帝廟記廣祐寺記 2. 성경잡지(盛京雜識)7월 10일에서 14일까지, 십리하(十里河)로부터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 동안의 기록 秋七月初十日丙戌十一日丁亥粟齋筆談商樓筆談十二日戊子古董錄 十三日己丑十四日庚寅盛京伽藍記山川記略 3. 일신수필(馹汛隨筆)7월 15일에서 23일까지. 신광녕(新廣寧)에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9일간의 기록 馹汛隨筆序秋七月十五日辛卯北鎭廟記車制戱臺市肆店舍橋梁十六日壬辰十..
11. 윤음을 멋대로 유포하는 사람에게 충고하다 丙申冬, 先君適在鄕舍, 有鄕人士來謁曰: “有綸音行京洛, 故錄來耳.” 出諸袖中以進之, 先君覽其首語數行, 還與其人, 而誡之曰: “子是鄕人也. 儻有朝綸, 早晚自縣道頒布, 得而讀之, 可矣. 私錄公家文字, 流布鄕曲, 出入京洛, 傳說京洛音耗, 此亂民之事, 切不可爲也.” 其人憮然而去. 未幾, 有僞綸音傳布之獄, 上親鞫, 株連甚衆. 해석 丙申冬, 先君適在鄕舍, 병신(1776)년 겨울에 선군은 마침 시골집에 계셨는데 有鄕人士來謁曰: “有綸音行京洛, 故錄來耳.” 시골 선비가 뵈고서 “서울에서 배포된 윤음이 있었기 때문에 기록하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出諸袖中以進之, 先君覽其首語數行, 소매에서 꺼내 드리자 선군께선 첫 몇 줄을 보시고 還與其人, 而誡之曰: 다시 그 사람에게 ..
10. 선경지명으로 사람을 꿰뚫어 보다 先君先見之明, 往往有出人意表者. 少時, 在遺安公座, 有一姻婭人, 來拜而去. 先君曰: “噫! 某其死矣.” 公正色曰: “何其言之易也?” 後數日, 果死而訃至, 公呼先君曰: “君何以知某之死也?” 先君曰: “疇昔, 見其進止, 形與神已離矣.” 해석 先君先見之明, 往往有出人意表者. 선군께선 선견지명이 있어 이따금 사람의 의표를 벗어나는 생각이 있으셨다. 少時, 在遺安公座, 어렸을 적에 유안공 이보천의 집에 계실 적에 有一姻婭人, 來拜而去. 친척 한 사람이 와서 절을 하고 떠나갔다. 先君曰: “噫! 某其死矣.” 그러자 아버지는 “아! 아무개가 죽겠는데요.”라고 말했다. 公正色曰: “何其言之易也?” 유안공은 정색하며 “어째서 말을 쉽게 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 後數日, 果死而訃至..
9. 처남 이재성에 대한 평가 先君嘗言: “芝溪之文, 沉容典則, 不露鋒穎. 少時多讀『戴記』所致, 若與吾文, 性不相契合, 而其於論文, 有隻眼, 能知古人苦心處.” 每一篇出, 必曰: “爲我評隲之.” 芝溪公嘗曰: “燕岩筆力雄强, 識致精到, 近代諸作家, 所未有也.” 半生一室, 有偲怡ㆍ塤篪之樂, 論文知心, 一人而已. 해석 先君嘗言: “芝溪之文, 선군께서는 일찍이 말씀하셨다. “지계공 이재성의 문장은 沉容典則, 不露鋒穎. 침착하고 용의주도하며 법칙이 있지만 자기의 생각은 붓끝으로 드러나질 않는다. 少時多讀『戴記』所致, 어렸을 적에 대부분 『예기』를 읽은 것이 지극했던 것이니 若與吾文, 性不相契合, 나의 문장과는 성격이 서로가 맞지가 않다. 而其於論文, 有隻眼, 그러나 문장을 논한 것에 있어선 식견이 있어 能知古人苦心..
8. 글을 쓸 때의 모습과 다 쓴 후의 모습 先君之爲文也, 每遇題締構, 輒專心致思. 苟於自己議論有未契者, 雖先儒斷論, 亦不欲阿隨苟同. 必用烏絲欄紙, 操筆淨書, 點畫不草率. 其有字句, 當塗改處, 雖篇將垂畢, 必從頭更寫, 易藁而新之. 每一篇出, 便可編入★弓+二縛. 不若此則如病在躳, 雖在忙遽中, 亦然. 해석 先君之爲文也, 每遇題締構, 선군께서 글을 지으려 매번 제목을 짓는 순간에 마주치거나 구성을 엮으려는 순간엔 輒專心致思. 갑자기 마음을 전일하게 하셨고 생각을 집중하셨다. 苟於自己議論有未契者, 만약 자기의 의견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게 있다면 雖先儒斷論, 비록 선배 유학자들의 확고한 논리가 있더라도 亦不欲阿隨苟同. 또한 아부하며 따르거나 구차하게 같아지려 하진 않으셨다. 必用烏絲欄紙, 操筆淨書, 반드시 오사..
7. 남보다 책 읽는 속도가 느린 연암 先君看書甚遲, 日不過一卷書. 常曰: “吾記性甚短, 每看書, 掩卷卽忘, 胸中茫然, 若無一字. 至或臨事處宜, 或命題構思, 始也頭頭現出, 終焉森森羅布. 古人往蹟及先輩格言之襯當於目前情境者, 有左右逢原, 不可勝用之意.” 芝溪公嘗言: “燕岩看書甚遲, 我下三四板之頃, 僅下一板. 且其記誦之才, 若差損於我, 而至如上下商論, 較絜長短, 則有如酷吏斷獄, 無微不勘. 始知公之遲看, 蓋有所究竟到底者故耳.” 해석 先君看書甚遲, 日不過一卷書. 선군께선 책을 보는 속도가 매우 느려 하루에 한 권의 책도 채 읽지 못하셨다. 常曰: “吾記性甚短, 每看書, 항상 말씀하셨다. “나의 기억력은 매우 짧아 매번 책을 보다가 掩卷卽忘, 胸中茫然, 若無一字. 책을 덮으면 곧 잊어버려 머릿속에 아득히 한 글자도..
5. 「주공탑명」에 대한 여러 사람의 이현령비현령 先君少時, 著有「麈公墖銘」, 輩行金公魯永讀之曰: “此至精之文.” 遂記誦焉, 每凉宵晴朝, 輒朗咏一過. 後內從李正履爲余言: “近者更讀「麈公墖」, 得知其爲闢佛文字, 金公所云至精之文, 深得旨意也.” 不肖每聽人論此篇, 未嘗有此解. 一日示一老衲, 老衲一讀, 便憮然曰: “是乃闢佛文.” 해석 先君少時, 著有「麈公墖銘」, 선군께선 어렸을 적에 「주공탑명」을 저술한 적이 있는데 輩行金公魯永讀之曰: “此至精之文.” 일행인 김노영이 이것을 읽고 “이것은 지극히 정밀한 문장이다.”라고 말했다. 遂記誦焉, 每凉宵晴朝, 마침내 기억하고 암송하며 매일 서늘한 밤이 갠 아침에 輒朗咏一過. 갑자기 낭낭하게 한 번 지나치듯 읊조렸다. 後內從李正履爲余言: 훗날 사촌인 이정리가 나를 위해서 ..
4. 초년과 중년과 만년의 문장 차이 先君初年得力, 專在於『孟子』ㆍ『馬史』. 故氣槩之發越於文章者, 可知其根基之所在也. 至如『左』ㆍ『國』ㆍ韓ㆍ歐, 亦嘗心摹手追, 深得其神理義法. 中年以後, 脫畧世網, 隱居ㆍ遠遊, 往往寓言諧笑遊戱之作, 出入『莊』ㆍ『佛』二家者有之. 晚年最好賈陸奏議之文ㆍ朱子論事之書, 公私書牘多出於此, 此先君文章初晚之別也. 해석 先君初年得力, 專在於『孟子』ㆍ『馬史』. 선군께서는 초년에 힘을 얻음이 온전히 『맹자』와 『사기』에서 있었다. 故氣槩之發越於文章者, 그러므로 기의 뼈대가 문장에서 발산되어 초월하는 것은 可知其根基之所在也. 근본이 있는 것임을 알 만하다. 至如『左』ㆍ『國』ㆍ韓ㆍ歐, 『좌전』과 『국어』와 한유와 구양수의 경우에 이르러서 亦嘗心摹手追, 또한 일찍이 마음으로 모방하고 손으로 따라 ..
3-2. 시대적 옳음을 담아내는 글을 써라 嘗言: “惟忠武侯, 識其大者. 爲文之道, 亦貴乎識其大者.” 해석 嘗言: “惟忠武侯, 識其大者. 일찍이 선군께선 말씀하셨다. “오직 충무후 제갈량은 큰 도를 아는 사람이었으니 爲文之道, 亦貴乎識其大者.” 글을 짓는 방법이란 또한 그 큰 도를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인용 목차
3-1. 옛 사람들과 지금 사람들의 글짓는 자세 차이 嘗言: “今人學八家文, 不能得其神理, 徒習粗跡. 凡作一篇文字, 其起伏照應, 關鎖結尾, 務要歷歷, 分明模索, 可知其工者爲之, 已不足喜. 況拙者, 只得以字眼彌縫, 尤無足論矣. 古人有許大心胸, 許大學問, 發言吐辭, 只要明鬯典雅, 不是用意安排, 而自然有成章之妙. 後來批評家, 段分句析, 挑出層節, 不害爲拈示古人精神注處, 俾初學之士有所開發. 但謂古人操䉉臨紙, 胸中先具此一篇排鋪, 則不可. 學古文者, 當求自然層節. 生出在自家文字, 不宜竊古人言語去, 塡寫格子上耳. 難易之分, 於是乎在, 而眞贋之辨, 隨而定焉. 留下一副格子, 千篇萬篇, 一範榻出者, 其唯今人科體文字乎!” ▲ 김홍도의 [화첩평생도] 중 '소과응시' 부분이다. 해석 嘗言: “今人學八家文, 선군께선 일찍이 말씀..
33-2. 야만스러움을 변화시키려는 사람 時有客在松園金公座, 談胡服之說. 金公遽曰: “君曾見綰髻之胡乎?” 曰: “未也. 胡辮.” 金公又曰: “曾見衣純之胡乎?” 曰: “胡衣無純.” 金公曰: “吾聞燕岩衣玄純之衣, 印童皆令解辮綰髻. 然則, 燕岩用夏變胡者也.” 해석 時有客在松園金公座, 談胡服之說. 당시 손님 중 송원 김이도의 댁에 있던 사람은 ‘호복임민(胡服臨民)’의 이야기에 대해 말했다. 金公遽曰: “君曾見綰髻之胡乎?” 김공이 갑자기 “그대는 일찍이 관을 쓰고 상투를 튼 오랑캐를 보았는가?”라고 물었다. 曰: “未也. 胡辮.” 그러자 손님이 “아닙니다. 오랑캐는 변발을 하지요.”라고 대답했다. 金公又曰: “曾見衣純之胡乎?” 김공이 또한 “일찍이 옷에 가선을 두른 오랑캐를 보았는가?”라고 물었다. 曰: “胡衣無..
33-1. 안의에 있을 때 ‘오랑캐를 따른다’는 비난을 받다 1. 몽고의 풍속을 바로잡았지만 비난을 사다 先君嘗病吾東婦人服飾及童子辮髮專襲蒙古. 盖高麗忠宣王, 自元而歸也, 效其俗, 辮髮而出. 當時士大夫郊迎者, 皆飮泣不忍見. 其後國俗因襲不改, 流弊至今. 吾東雖嚴於尊攘, 而此等陋俗, 恬不知恥. 及宰安義, 義乃桐溪鄭先生之鄕也. 先生之斥和歸鄕也, 童子皆令解辮雙髻. 尤菴先生之居巴串也, 亦用此制, 盖深痛一世之不復識華制也. 又其鄕之賢士劉君處一, 遵林葛川ㆍ盧玉溪之所嘗被服者, 倣朱子野服, 爲素衣玄純之制, 先君愛其高雅, 荷堂竹館, 時或以燕居焉, 知印童子之辮髮者, 皆令解而丱之. 不肖亦以四袿雙丱髻, 侍側焉, 皆先君好古曠惑之意. 而鄰宰過客, 皆瞠其駭俗也. 且荷堂甎築, 亦涉刱見, 或戲問曰: “此皆胡制歟?” 先君哂鹵莽也, 而不與辨...
1. 몽고의 풍속을 바로잡았지만 비난을 사다 先君嘗病吾東婦人服飾及童子辮髮專襲蒙古. 盖高麗忠宣王, 自元而歸也, 效其俗, 辮髮而出. 當時士大夫郊迎者, 皆飮泣不忍見. 其後國俗因襲不改, 流弊至今. 吾東雖嚴於尊攘, 而此等陋俗, 恬不知恥. 及宰安義, 義乃桐溪鄭先生之鄕也. 先生之斥和歸鄕也, 童子皆令解辮雙髻. 尤菴先生之居巴串也, 亦用此制, 盖深痛一世之不復識華制也. 又其鄕之賢士劉君處一, 遵林葛川ㆍ盧玉溪之所嘗被服者, 倣朱子野服, 爲素衣玄純之制, 先君愛其高雅, 荷堂竹館, 時或以燕居焉, 知印童子之辮髮者, 皆令解而丱之. 不肖亦以四袿雙丱髻, 侍側焉, 皆先君好古曠惑之意. 而鄰宰過客, 皆瞠其駭俗也. 且荷堂甎築, 亦涉刱見, 或戲問曰: “此皆胡制歟?” 先君哂鹵莽也, 而不與辨. 해석 先君嘗病吾東婦人服飾及童子辮髮專襲蒙古. 선군께서 일찍이 ..
32-1. 박지원을 불편하게 여긴 정조 1. 순정한 글을 지어 올리라고 분부하다 時上以文風不古, 屢下嚴旨. 詞垣諸臣, 皆有訟愆之作. 一日上下敎于直閣南公轍曰: “近日文風如此, 莫非朴某之罪也. 『熱河日記』, 予旣熟覽, 焉敢欺隱? 『日記』行世後, 文體如此, 自當使結者解之. 斯速著一部純正之書, 卽爲上送, 以贖『日記』之罪, 雖南行文任, 豈有可惜者乎? 不然則當有重罪, 須以此意, 卽爲貽書.” 南公書畧曰: “此實出於我聖上敦世敎ㆍ振文向ㆍ正士趨之苦心至德, 敢不對揚其萬一? 况執事則其在訟愆贖罪之道, 尤不容暫緩”云云. ⇒해석보기 2. 주상의 분부에 답한 내용 先君答書畧曰: “天地之大, 無物不育, 日月之明, 無微不燭, 豈意兎園之遺册, 上汚龍墀之淸塵哉? 疎野一个之賤, 而恩敎無間於近密. 不惟不加以兩觀熒惑之誅, 乃反命贖其一部純正之書,..
4. 글을 지으란 하교를 어기는 이유 時在衙諸文士, 皆欣踊. 操管札攤書卷, 將以替勞草寫及攷證之事. 先君語之曰: “上之此敎, 固曠絕恩眷也. 上方以此爲罪, 其在臣分, 惟當受而爲罪, 可也. 安有荷譴之蹤, 作爲文字, 自許純正, 要掩前愆? 且况以文任二字, 開其自新之路, 若因此揚揚著作進呈, 則此希覬也. 希覬, 人臣之大罪也. 不復以著進爲計畧, 選著作若干篇, 幷南中所著幾篇, 作數卷册子, 若更有俯索之敎, 將以黽勉承膺, 粗伸臣分而已.” 해석 時在衙諸文士, 皆欣踊. 당시 안의현에 있던 선비들이 모두 기뻐하며 뛰었다. 操管札攤書卷, 將以替勞草寫及攷證之事. 붓을 잡고 책을 펼쳐 장차 대신하여 베껴 쓰거나 고증하는 일을 하려 했었다. 先君語之曰: 선군께서 말씀하셨다. “上之此敎, 固曠絕恩眷也. “주상이 이번 하교는 참으로 전에도..
3. 순정한 글을 쓰라는 편지가 쇄도하다 先是, 上進覽『武藝圖譜通志』, 指李德懋著「禦倭」諸論, 敎曰: “諸篇皆圓好.” 又敎曰: “此燕岩體也.” 是以京中諸公, 皆以爲: “此實非怒之敎, 將有格外異數. 且聖敎中, 歷數諸人之愆, 而特擧朴某爲罪魁者, 乃大聖人抑而進之, 推任文權之意. 又况擧『熱河日記』爲眞贓, 而加以熟覽字以寵之乎! 是必有一部文字趁早撰進.” 皆書勸其著作, 芝溪公書畧曰: “執事之文, 筆力高强, 而用字則不甚矜古, 何嘗是明淸小品? 特其典則之作, 人未嘗見, 而『日記』盛行一世故耳. 盖其不自珍惜, 放倒不矜重, 則有之矣, 何嘗纖靡委弱如近時諸人之爲耶? 若曰: ‘學執事而文風至此’ 則誠冤矣. 愚意則就『日記』中, 揀別其一分詼氣而去之, 則此便是純正之書”云云. 해석 先是, 上進覽『武藝圖譜通志』, 이에 앞서 주상께서 『무예도보..
2. 주상의 분부에 답한 내용 先君答書畧曰: “天地之大, 無物不育, 日月之明, 無微不燭, 豈意兎園之遺册, 上汚龍墀之淸塵哉? 疎野一个之賤, 而恩敎無間於近密. 不惟不加以兩觀熒惑之誅, 乃反命贖其一部純正之書, 蟣蝨賤臣, 何以得此? 僕中年以來, 落拓潦倒, 不自貴重, 以文爲戱, 有時窮愁無聊之發, 無非駁襍無實之語. 性又懶散, 不善收檢, 旣自誤而誤人, 或以訛而傳訛. 文風由是而不振, 士習由是而日頹, 則是固傷化之災民, 文苑之棄物也, 得兎憲章, 亦云幸矣. 究厥本情, 雖伎倆之所使, 是誠何心? 自楚撻而爲記, 敢不亟圖黥刖之補, 無復作聖世之辜民也”云云. 해석 先君答書畧曰: “天地之大, 無物不育, 선군께서 답한 편지는 대략 이렇다. “천지가 커서 사물마다 기르지 않은 게 없고 日月之明, 無微不燭, 해와 달아 밝아 미물이라도 밝히지 ..
1. 순정한 글을 지어 올리라고 분부하다 時上以文風不古, 屢下嚴旨. 詞垣諸臣, 皆有訟愆之作. 一日上下敎于直閣南公轍曰: “近日文風如此, 莫非朴某之罪也. 『熱河日記』, 予旣熟覽, 焉敢欺隱? 『日記』行世後, 文體如此, 自當使結者解之. 斯速著一部純正之書, 卽爲上送, 以贖『日記』之罪, 雖南行文任, 豈有可惜者乎? 不然則當有重罪, 須以此意, 卽爲貽書.” 南公書畧曰: “此實出於我聖上敦世敎ㆍ振文向ㆍ正士趨之苦心至德, 敢不對揚其萬一? 况執事則其在訟愆贖罪之道, 尤不容暫緩”云云. 해석 時上以文風不古, 屢下嚴旨. 당시에 주상께서 문풍이 예스럽지 못하다고 여겨 자주 엄한 교지를 내리셨다. 詞垣諸臣, 皆有訟愆之作. 한림원의 뭇 신하들은 모두 잘못을 다스려 바로잡는 글을 지어야 했다. 一日上下敎于直閣南公轍曰: 하루는 주상께서 직각 남..
2-2. 고문은 그 당시엔 금문이었다 又曰: “古人爲文, 在當時, 何嘗義奥而旨微耶? 『書』之「典」ㆍ「謨」, 『詩』之「風」ㆍ「雅」, 『易』之「彖」ㆍ「象」, 『春秋』諸傳, 卽當時之今文, 人皆曉之, 後來世彌降而義漸晦, 所以有傳箋註疏也. 今人不知此義, 必模擬依樣, 强作險澀之態, 自以爲簡古也, 可笑哉! 若使他人讀自家文, 便費自家註釋, 將焉用是文爲哉?” 해석 又曰: “古人爲文, 선군께서 또 말씀하셨다. 옛 사람이 지은 문장이 在當時, 何嘗義奥而旨微耶? 당시대에 있었지 어찌 일찍이 뜻이 심오하고 내용이 미세한 데 있었던가? 『書』之「典」ㆍ「謨」, 『詩』之「風」ㆍ「雅」, 『서경』의 「요전(堯典)」과 「대우모(大禹謨)」, 『시경』의 「풍」과 「아」와 『易』之「彖」ㆍ「象」, 『春秋』諸傳, 『주역』의 「괘사」와 「효사」, ..
2-1. 지금 사람이 지은 비지문은 너무 진부하다 先君又嘗言: “吾於文無他長, 惟紀事狀物之才, 稍勝於今人. 今人碑誌之作, 大抵多印板例套, 一篇之作, 可移用於人人. 而其人之神精典型, 從何想見? 此三淵翁所謂: ‘東人文集, 如人家哭婢聲’者, 是也. 古人所謂: ‘貌圓方寫, 貌長短寫’者, 馬傳韓碑所以可讀, 而今人不知此義. 但取累累滿紙陳談死句曰: ‘如此然後, 可謂典實.’ 吾不知此爲何許文法.” 해석 先君又嘗言: “吾於文無他長, 선군께서는 또한 일찍이 말씀하셨다. “나는 글에 대하여 다른 장점은 없지만 惟紀事狀物之才, 稍勝於今人. 오직 사태를 기술하고 사물을 형상하는 재주는 조금 지금 사람보다 낫다. 今人碑誌之作, 大抵多印板例套, 지금 사람의 묘지명 작품은 대체로 많이들 판을 찍어낸 듯 상례(常例)되어 진부하기만 해서..
36. 음악을 좋아했지만 악기를 없애버린 사연, 안의현을 음악고을로 만든 사연 家中舊有笙琴諸器, 或風舞輩來, 使之彈吹. 及哭湛軒, 遂有絃斷之悲, 不復入耳也. 後五年, 偶過湛軒宅, 歸而忽愴然, 竝散其器以與人. 是以不肖幼時, 未得見匏絃之屬. 及宰安義也曰: “山水旣絶勝, 且時屬昇平, 宜有以賁飾之.” 適有梨園老樂師流落嶠南者, 召而廩置之, 使敎習工伎歌樂數月間, 並傳京腔, 時稱此邑絲管爲一道最. 해석 家中舊有笙琴諸器, 집 안엔 오래된 생황과 거문고 등의 악기들이 있어 或風舞輩來, 使之彈吹. 간혹 풍무 김억의 무리들이 오면 그들에게 연주하게 했다. 及哭湛軒, 遂有絃斷之悲, 담헌이 돌아가시자 마침내 거문고 줄을 끊는 슬픔이 있어 不復入耳也. 다시 귀로 듣지 않으셨다. 後五年, 偶過湛軒宅, 5년이 지나 우연히 담헌의 집을..
31. 안의현에서의 치적과 연회에 관심 갖던 정조 時上嘗語閣臣某曰: “朴某平生無一畝之宅, 流離栖屑於窮鄕江干, 今白首一麾, 宜若汲汲於求田問舍, 而聞構亭鑿池, 邀致文酒之朋於千里之外, 文人事, 信是不俗, 難矣哉! 且聞其吏治極善.” 後數日, 敎朴齊家曰: “朴某之邑, 文人多往遊, 而汝獨縻公不能往, 宜有向隅之歎. 乞暇一往, 可也.” 齊家遂承命來會, 誦致前後恩敎如此. 해석 時上嘗語閣臣某曰: 이때에 임금께서 일찍이 각신 아무개에게 말씀하셨다. “朴某平生無一畝之宅, 流離栖屑於窮鄕江干, “박지원은 평생 한 넓이의 집도 없이 궁벽한 시골이나 강가에서 유리걸식하며 살다가 今白首一麾, 宜若汲汲於求田問舍, 이제 늙어서야 한 번 고을수령이 되었지만 마땅히 밭과 집에 대한 일에만 급급할 것이다. 而聞構亭鑿池, 邀致文酒之朋於千里之外,..
29. 안의현감이 되어 친구들을 초대하여 시회를 열다 邀芝溪公及金公箕懋光瑞ㆍ李甥鍾穆維肅ㆍ李甥謙秀益之, 以爲溪山文酒之遊. 及癸丑春, 倣蘭亭故事, 流觴咏詩, 一世傳誦爲盛事. 按芝溪與人書有曰: “僕到花林邑之別號, 四十日處荷風竹露之館. 主人使君, 時豐政簡, 封篆可有, 三分日晷, 輒來居客位. 琴樽古雅, 書劒整暇, 韵釋名姬, 動在左右, 酒酣縱談千古文章事, 此樂可敵百年. 不知僕他日能擁麾專城如花林之勝, 安能得客如燕岩其人乎?” 同時來者, 有李喜經聖緯ㆍ尹仁泰五一, 皆門下士也, 韓惠仲ㆍ梁元聘諸人, 皆燕峽時門生也. 時設妓樂於別館, 必撰屨先歸, 任其跌蕩. 芝溪公邀臨, 凡三度. 해석 邀芝溪公及金公箕懋光瑞ㆍ李甥鍾穆維肅ㆍ李甥謙秀益之, 선군께서는 지계공과 광서 김기무ㆍ큰 사위 유숙 이종목ㆍ작은 사위 익지 이겸수를 맞이하여 以爲溪山文酒..
37-2. 『열하일기』를 비판하는 사람들 人有囫圇說「渡江」諸編句語, 妄有評論. 不肖出「筆談」一編, 試使讀之, 不識其爲何語, 亦不能屬其句讀. 文理疎短如此, 而尙復論評人文字, 殊令人無限慚愧然, 而此猶無足道者. 至如以虜號之藁四字, 造謗而劫辱者, 大爲鹵莽. 嗚呼, 尙何足言哉! 說見下. 해석 人有囫圇說「渡江」諸編句語, 사람 중에 우물쭈물 「도강록」의 여러 편과 구어를 말하며 妄有評論. 망령되이 평론하는 사람이 있었다. 不肖出「筆談」一編, 試使讀之, 내가 「혹정필담(鵠汀筆談)」 한편을 꺼내 시험삼아 그에게 읽게 하니 不識其爲何語, 亦不能屬其句讀. 무슨 말인지도 몰랐으며 또한 구도조차 떼질 못했다. 文理疎短如此, 而尙復論評人文字, 문리가 어설프고 짧은 게 이와 같은데 오히려 다시 남의 글을 논평하여 殊令人無限慚愧然,..
37-1. 『열하일기』가 탈고하기도 전에 세상에 유행하다 先君嘗歎息言: “吾中年以來, 灰心世路, 漸有滑稽逃名之意, 而末俗滔滔, 無可與語. 每對人, 輒以寓言笑談, 爲彌縫打乖之法, 而心界常鬱鬰, 無可自樂. 及其遊燕而還也, 大方所見聞, 頗有可述, 往來山中, 筆硯隨身, 檢取槖中散草而漫書之, 以爲老年消閑之資. 裒然成幾編書, 初未嘗以傳後爲計也. 誰料脫藁未半, 人已傳寫, 遂至遍行一世, 莫可收藏. 初甚怵然自悔, 撫心長歎, 末亦無可柰何, 亦復任之而已. 至於未見其書面目, 而輒隨衆訿毀者, 吾亦如之何哉!” 해석 先君嘗歎息言: 선군께서는 일찍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吾中年以來, 灰心世路, “나는 중년 이후로 세상사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 漸有滑稽逃名之意, 而末俗滔滔, 점점 골계와 이름을 숨기고자 하는 뜻이 늘어나 말세의 풍속이..
27. 음악을 좋아한 연암ㆍ담헌ㆍ효효재ㆍ풍무자 先君精於審音, 而湛軒公尤曉樂律. 一日先君在湛軒室, 見樑上掛歐羅鐵絃琴數張. 盖因燕使歲出吾東, 而時人無解彈者. 先君命侍者解下, 湛軒笑曰: “不解腔何用爲?” 先君試以小板按之曰: “君第持伽倻琴來, 逐絃對按, 驗其諧否也.” 數回撫弄, 腔調果合不差, 自是鐵琴始盛行於世. 時有琴師金檍, 號風舞子, 嘐嘐齋所命也. 爲娛新飜鐵琴, 會湛軒室, 時夜靜樂作, 嘐嘐公乘月不期而至, 聽笙琴迭作, 意甚樂, 扣案上銅盤以節之, 誦『詩』「伐木」章興勃勃也. 已而嘐嘐公起出戶, 久不入, 出視之, 不見公. 湛軒語先君, “吾輩恐有失儀, 令長者歸也.” 遂與共步月, 向嘐嘐宅, 至水標橋. 時方大雪初霽, 月益明, 見公膝橫一張琴, 岸巾坐橋上望月. 衆皆驚喜, 移設杯盤樂具, 陪遊盡歡而罷. 先君嘗語此而曰: “自嘐嘐公沒..
41. 이야기 벗 이광려 李叅奉匡呂, 文章奇偉士也. 先君之寓平谿也, 嘗與芝溪公, 聯袂過鄰衕, 見人家柴門內有小車. 制頗精工, 就視之. 主人下堂迎笑曰: “君豈非朴燕巖乎? 吾乃李匡呂也.” 遂上堂坐, 輒論文章. 先君問之曰: “君平生讀書, 識得幾個字?” 座客皆大駭, 心笑之曰: “孰不知李公文章博洽士也?” 李公點檢良久語曰: “僅識得三十餘字.” 座客又大駭, 不知其何謂也. 自是李公定爲一言知己, 頻頻來訪. 有新成詩文, 必袖以請評. 每先君過訪, 必盥手設時菓于案上曰: “此待尊賓禮也.” 談辨竟日, 未嘗一言及於黨論歧異者云. 해석 李叅奉匡呂, 文章奇偉士也. 참봉 이광려는 문장이 기이하고 위대한 선비다. 先君之寓平谿也, 嘗與芝溪公, 선군께서 평계에 사실 적에 일찍이 지계공 이재성(李在誠)과 함께 聯袂過鄰衕, 見人家柴門內有小車. 소매..
35. 홍국영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옛 친구도 모두 죽다 庚子撤還京師, 寓平谿, 卽芝溪公宅也. 時洪國榮敗, 禍色始熄, 而老成舊要, 凋謝殆盡. 風氣一變, 非復舊日者. 益濩落自放, 反喜其爲存身之訣. 然常鬱鬱, 有遐擧之想. 會先君三從兄錦城都尉, 以賀使赴燕, 要先君共行. 五月啓程, 六月渡江, 八月入燕京. 尋又轉向熱河, 是月復還燕京, 十月歸國. 及歸, 尤徜徉無韵况. 時獨入處燕峽, 或經年或半歲, 乃歸. 해석 庚子撤還京師, 寓平谿, 경자(1780)년에 서울로 철수하여 돌아와 평계에 사셨는데 卽芝溪公宅也. 곧 처남인 지계공 이재성(李在誠)의 집이었다. 時洪國榮敗, 禍色始熄, 당시 홍국영이 실각하여 재앙의 빌미가 비로소 식었지만 而老成舊要, 凋謝殆盡. 어른스럽던 옛 친구들 중 죽은 이들이 거의 다였다. 風氣一變, 非復舊日..
25. 아버지의 친구들 1. 돈독한 친구 홍대용 先君天姿豪邁, 於名利戒愼若浼. 中歲旣不輒赴場屋, 而交遊亦簡, 惟洪湛軒大容ㆍ鄭石癡喆祚ㆍ李薑山書九, 時相往還, 而李懋官德懋ㆍ朴在先齊家ㆍ柳惠風得恭, 常從遊焉. 湛軒公長先君六歲, 學識精邃, 亦廢擧閑養. 與先君爲道義交, 最相親篤, 而言辭稱謂, 相敬如初交時也. 先君常病吾東士大夫, 多忽於利用厚生ㆍ經濟ㆍ名物之學, 類多因訛襲謬, 麤鹵已甚. 湛軒平日持論亦如此. 每相盍簮, 輒留連累日, 上自古今治亂興亡之故, 古人出處大節, 制度沿革, 農工利病, 貨殖糶糴, 與夫山川關防, 曆象樂律, 以至艸木鳥獸, 六書算數, 無不貫穿該括, 皆可記而誦也. ⇒해석보기 2. 손기술이 뛰어난 석치와 토론을 밤새도록 했던 무관ㆍ혜풍ㆍ재선과 제일 아낀 강산 石癡文雅, 有絕藝. 凡機轉諸器, 如引重ㆍ升高ㆍ磨轉ㆍ取水..
2. 손기술이 뛰어난 석치와 토론을 밤새도록 했던 무관ㆍ혜풍ㆍ재선과 제일 아낀 강산 石癡文雅, 有絕藝. 凡機轉諸器, 如引重ㆍ升高ㆍ磨轉ㆍ取水之類, 能心究手造. 皆欲倣古試今, 需諸世用也. 懋官ㆍ惠風ㆍ在先, 皆博學治聞之士, 每有攷據, 輒應口辨證, 於先君執禮惟謹. 每聚會談讌, 不覺焚膏以繼晷也. 薑山年最少, 而穎拔出羣, 沈靜有識量, 先君愛重之. 家中老傔僕, 亦往往說當時事, 多可聞. 해석 石癡文雅, 有絕藝. 석치 정철조는 문학에 대한 식견이 있고 예술적 수완이 뛰어났다. 凡機轉諸器, 대체로 기계가 움직이는 여러 기구들, 如引重ㆍ升高ㆍ磨轉ㆍ取水之類, 예를 들면 무거운 거 당기는 기계(引重), 높이 올리는 기계(升高), 갈며 도는 기계(磨轉), 물 끌어들이는 기계(取水) 등을 能心究手造. 마음에 연구하고서 손수 만들 ..
1. 돈독한 친구 홍대용 先君天姿豪邁, 於名利戒愼若浼. 中歲旣不輒赴場屋, 而交遊亦簡, 惟洪湛軒大容ㆍ鄭石癡喆祚ㆍ李薑山書九, 時相往還, 而李懋官德懋ㆍ朴在先齊家ㆍ柳惠風得恭, 常從遊焉. 湛軒公長先君六歲, 學識精邃, 亦廢擧閑養. 與先君爲道義交, 最相親篤, 而言辭稱謂, 相敬如初交時也. 先君常病吾東士大夫, 多忽於利用厚生ㆍ經濟ㆍ名物之學, 類多因訛襲謬, 麤鹵已甚. 湛軒平日持論亦如此. 每相盍簮, 輒留連累日, 上自古今治亂興亡之故, 古人出處大節, 制度沿革, 農工利病, 貨殖糶糴, 與夫山川關防, 曆象樂律, 以至艸木鳥獸, 六書算數, 無不貫穿該括, 皆可記而誦也. 해석 先君天姿豪邁, 선군께서는 천부적인 자질이 호탕하고 고매하여 於名利戒愼若浼. 명예와 이익에 있어 내 몸을 더립힐까 경계하고 삼가셨다. 中歲旣不輒赴場屋, 而交遊亦簡, 중년..
34. 연암가의 청렴결백 1. 선조 박상충과 박은의 청렴결백한 예화 嘗詔不肖輩曰: “爾曹, 他日雖得祿食, 毋望家計之足也! 吾家傳世淸貧, 淸貧卽本分耳.” 因歷擧家傳故事曰: “吾先祖潘南先生, 旣以斥元尊明, 爲羣兇所阸, 卒於靑郊驛. 未能返櫬, 而葬于其地, 卽國東門外耳. 其貧無以爲力, 可知也. 平度公自言: ‘孤貧且疾, 志氣猶存.’ 及際會風雲, 久秉匀軸, 猶不免脫粟飯, 幾乎狼狽. 公家在駱山下. 一日, 太宗倉卒臨門, 怒公出迎之遲也. 公曰: ‘臣適得粟飯, 恐妨奏對, 水漱然後敢出也.’ 上命取而視之, 愈怒曰: ‘無亦公孫布被耶? 安有大臣而飯荒粟者?’ 左右言: ‘大臣之宗族親友, 待而擧火者甚衆, 祿米入室, 一夕散盡.’ 上憮然曰: ‘予之過也! 予爲國君, 使布衣故人, 不厭麤糲, 予不及卿之賢, 遠矣!’ 卽席賜興仁門外鼓巖田十結. ⇒..
5. 할아버지 박필균과 할머니의 청빈 曾王父有德無年, 尹夫人辛勤敎養, 成就王父兄弟. 王父纔釋褐, 而尹夫人下世, 未享一城之奉. 王父兄弟廬墓于通津之鳯翔邨, 此地本崔簡易別業, 忠翼公嘗買而居之. 以此王父兄弟, 亦有薄田一區, 瀕海斥鹵, 歲率失稔. 從姪章翼公居留沁都, 常繼米鹽醬豉之屬, 得行饋奠. 王父位躋列卿, 而屢空如寒士. 城西弊廬樸陋逼窄, 平生不易居. 嘗有頽圮甚處, 客請修葺之, 適除外任. 王父謂: ‘作守令而修室屋, 不可也.’已之. 通津薄田, 海溢堰缺, 方築之, 適拜畿伯. 又謂: ‘作道伯而治農庄, 不可也.’ 送人停其役. 客恨之曰: ‘爲方伯守宰, 將以撥貧也, 如公家則反有害焉.’ 傳以爲笑. 其時士大夫, 亦多廉白立家, 而吾家規模, 在當時亦以太過稱之. 然而猶避名不居. 外邑例有饋問, 時方屢空, 分裂其腒鱐之屬, 以代朝饍. 或..
4. 증조부 박미와 증조모 정안옹주의 검약 國朝儉德, 固出前代, 而亦吾祖妣, 性有所安. 仁穆后喪畢, 分賜服御器物諸王子女家, 率得金銀珍玩, 貞安主獨取宣廟御畵蘭竹一屛以歸, 所尚在此, 則所不屑可以知也. 文貞公雖早貴, 而車馬僕從不能備也. 嘗有詩云: ‘八十導前卒, 蹣跚鞚馬奴. 小童且隨後, 嚴沍尙無襦. 市井嘲儀簡, 妻孥愧跡孤. 試看呼唱處, 猶使路人趨.’ ‘八十導前卒’者, 引路卒, 歷事三世, 年將八十云. 盖分窶如此, 而處之泊如也. 公之風流文采, 輝映當時, 座客常傾一代之選. 性又喜酒, 然往往不得一醉, 鎭日淸坐而罷, 猶且急人之難, 脫驂分宅, 曾無吝色. 忠翼公久謫南荒, 全家隨往, 公旣抱隱痛, 疋馬短衣, 長在道路. 又遭母夫人之喪, 長姑叔弟, 皆卒於南千里之外, 三返旅櫬. 是時貞安主獨處京舍, 摒當拮据, 辦應有無, 甁罄槖倒, 鞠..
3. 충익공의 근검절약과 부마 문정공의 청렴함 及忠翼公, 早被上知, 歷敭顯要. 而皆在國步艱難之日, 身且不得自顧, 况家事乎哉? 搶攘八年之間, 吾家多在延安ㆍ遂安ㆍ安州之地, 流轉飄泊, 飢困萬狀. 中興以來, 公亦復出鎭雄蕃, 入掌邦計. 然長於謀國, 而短於謀家, 田畝之入, 不足以支數朔, 養生之具, 十闕七八, 終身銀盃, 乃策勳日賞賜也, 餘無一酒鎗茶鼎. 酷好書畵, 嘗遇良畵師, 篋無一絹之貯, 謀之又不得, 乃漂洗朝衣以繪之. 晚處謫籍, 蔬糟屢空, 見於詩牘者亦多. 蓋冢子文貞公, 駙馬也, 而其窘乏猶如此焉. 文貞公初被儀賓之選, 賜宅於貞洞, 以其侈大而辭之, 更占太平洞第, 亦爲近於親舍, 以便覲省也. 忠翼公舊宅, 今尙在倉洞, 其外堂爲房二間板廳一間而已. 文貞公最受宣廟眷愛, 然於王子女應給田結外, 別無私賜與. 貞安主被服, 雖垢汙渝黦, 命宮..
2. 야천 선생과 다섯 아들의 청렴결백 冶川先生, 慍于羣小, 遯跡流寓, 卒於嶺表, 竟亦不能返葬. 于時, 長子贊成公十九歲, 次子潘城公九歲, 三子文貞公八歲, 四子吾七世祖都憲公五歲, 季子都正公三歲, 啼號滿室. 洪夫人左提右挈, 間關北歸. 吾在嶺邑, 屢拜先生之墓, 獨立在萬疊空山, 追念當日情事, 每思之欲哭, 患難貧窮, 一至於此. 及夫五子登朝, 皆爲名公卿賢大夫, 而贊成公屢典郡邑, 往往不得挈家, 文貞公方食卿祿, 一半分獻邱嫂. 每公退, 不脫朝衣, 往問何有何無, 躬發甁甔而視之, 有空者, 辦而充之. 然文貞公冰蘖淸操, 畏服一世, 其食貧, 固自如也. 潘城公貴爲國舅, 而一室蕭然. 大婚時, 中外助資, 故事也, 獨不受一物, 儉以成禮. 而吾先祖都憲公, 時方有新進雅望, 乃自以地近戚畹, 謙約彌甚, 杜門掃跡, 唯以書史花竹自娛, 以此平生, ..
1. 선조 박상충과 박은의 청렴결백한 예화 嘗詔不肖輩曰: “爾曹, 他日雖得祿食, 毋望家計之足也! 吾家傳世淸貧, 淸貧卽本分耳.” 因歷擧家傳故事曰: “吾先祖潘南先生, 旣以斥元尊明, 爲羣兇所阸, 卒於靑郊驛. 未能返櫬, 而葬于其地, 卽國東門外耳. 其貧無以爲力, 可知也. 平度公自言: ‘孤貧且疾, 志氣猶存.’ 及際會風雲, 久秉匀軸, 猶不免脫粟飯, 幾乎狼狽. 公家在駱山下. 一日, 太宗倉卒臨門, 怒公出迎之遲也. 公曰: ‘臣適得粟飯, 恐妨奏對, 水漱然後敢出也.’ 上命取而視之, 愈怒曰: ‘無亦公孫布被耶? 安有大臣而飯荒粟者?’ 左右言: ‘大臣之宗族親友, 待而擧火者甚衆, 祿米入室, 一夕散盡.’ 上憮然曰: ‘予之過也! 予爲國君, 使布衣故人, 不厭麤糲, 予不及卿之賢, 遠矣!’ 卽席賜興仁門外鼓巖田十結. 해석 嘗詔不肖輩曰: 일찍이 ..
47-2. 사라져버린 어머니를 애도하며 지은 시 先妣喪, 有悼亡詩二十絕句, 失稿不得承見, 嗚呼痛惜! 해석 先妣喪, 有悼亡詩二十絕句,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아버지께서 도망시 20 절구를 지으셨지만 失稿不得承見, 嗚呼痛惜! 원고를 잃어버려 받들어 볼 수 없으니, 아! 애통하고 서글프구나! 인용 목차
47-1. 두 편의 애도시와 이덕무의 비평 七月遭伯父喪, 窆于燕巖屋後子坐之兆. 戊戌伯母恭人李氏之喪, 先窆于此, 今祔焉. 先君後入燕峽也, 嘗臨流而坐, 悲摧不自勝, 有詩自悼云: “我兄顔髮曾誰似, 每憶先君看我兄. 今日思兄何處見, 自將巾袂映溪上.” 李懋官讀而揮涕曰: “情到語, 令人涙無從, 始得謂眞切. 吾於公詩, 讀而垂涙者再. 其舟送姉氏喪行云: ‘去者丁寧留後期, 猶令送者淚沾衣. 扁舟一去何時返, 送者徒然岸上歸’ 眼水自不禁潸然.” 해석 七月遭伯父喪, 窆于燕巖屋後子坐之兆. 7월에 큰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연암협 집 뒤 자좌의 자리에 하관했다. 戊戌伯母恭人李氏之喪, 先窆于此, 무술(1778)년 큰 어머니 공인 이씨께서 돌아가셔서 먼저 이곳에 하관했는데 今祔焉. 이제 합장한 것이다. 先君後入燕峽也, 嘗臨流而坐, 선군께서 ..
46. 아내와의 일화, 그리고 어려운 살림을 책임 진 형수님 丁未正月初五日甲戌, 遭先妣淑人全州李氏喪, 遺安處士諱輔天女. 先妣與先君同年生, 自幼薰陶遺安公敎訓, 已有女士行, 十六歸先君. 時章簡公, 位躋亞卿, 而淸貧如布衣時. 家舍狹窄, 無所容庇, 故少時多在遺安翁側. 中年以來, 食貧喫苦, 流離遷徙, 殆不堪其憂, 而未嘗皺眉, 如固窮讀書之君子也. 及先君筮仕未半歲, 而先妣下世焉. 嗚呼慟哉! 先君嘗言: “吾少時, 嘗有用餘錢二千, 念淑人衣具缺用, 齎衣襆以遺之. 淑人言: ‘伯嫂中饋常艱乏, 何乃以此入私室乎?’ 吾時甚慚其言, 至今不能忘也.” 伯母性度賢淑, 養育先君. 先妣友愛篤至. 而久經貧困, 晚來病在痰火, 言語之間, 或有不能忍煩者. 先妣輒溫顏左右, 默以待之, 得降辭色然後, 始歸私次執業. 及伯母卒而無育, 吾先兄年甫十許歲, 當入..
20. 형과 형수를 부모처럼 모시다 王考喪後, 先君事伯兄及嫂氏如父母. 親戚知友間, 多擧溫公之事伯康以況之. 嫂氏李恭人, 飽經貧寒, 鞠瘁已甚, 有時躁鬱不能遣. 先君一以和顏好語慰藉之. 每有所得, 雖甚微細, 必不入私室, 敬納於嫂氏. 해석 王考喪後, 先君事伯兄及嫂氏如父母.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선군은 큰 형과 형수 섬기기를 부모 같이 했다. 親戚知友間, 多擧溫公之事伯康以況之. 친척들과 친구들은 많이들 사마온공이 백강을 섬긴 것을 들어 비유했다. 嫂氏李恭人, 飽經貧寒, 형수인 이공인은 실컷 가난함과 추위를 경험하여 鞠瘁已甚, 有時躁鬱不能遣. 몸이 야윈 게 너무 심하였고 이따금 조울증을 풀어낼 수 없었다. 先君一以和顏好語慰藉之. 선군께선 한결같이 온화한 표정과 좋은 말로 형수를 위로해드렸다. 每有所得, 雖甚微細,..
39. 홍대용과의 우정 癸卯哭洪湛軒. 先君中年交遊益鮮, 惟湛軒公終始無替, 有物外許心之契. 嘗於燕峽, 答湛軒書曰: “平生交遊, 不爲不廣, 挈德量地, 皆許以友. 然其所與者, 不無馳名涉世之嫌, 所見者, 惟名勢利而已. 今僕自逃於蓬藋之間, 山高水深, 安用名爲? 古人所謂: ‘動輒得謗, 名亦隨之’者, 殆亦虛語. 纔得寸名, 已招尺謗, 好名者老當自知. 每中夜自檢, 齒出酸㳄, 名實之際, 自削之不暇, 况復近之耶? 勢與利, 亦嘗涉此塗. 盖人皆思取諸人而有諸己, 未嘗見損諸己而益於人. 名兮本虛, 人不費價, 或易以相與, 至於實利實勢, 豈肯推以與人? 徒自近油, 點衣而已. 旣去此三友, 始乃明目求見, 所謂友者, 盖無一人焉. 俛仰今古, 安得不鬱鬱於心耶? 入山以來, 亦絕此念. 每念德操趣黍, 佳趣悠然, 沮ㆍ溺耦耕, 眞樂依依, 登山臨水, 未嘗不..
30. 권력자 홍국영의 비위를 거슬러 연암으로 피하다 戊戌避世挈家, 入燕巖峽. 兪相公彥鎬, 於先君, 知照最深. 每有事難處, 輒就咨於先君. 以先君言議峻激, 多觸忤權貴, 深戒之. 一日朝退, 忽憂愁不樂, 夜訪先君, 握手歎曰: “君何大忤洪國榮也? 啣之深毒, 禍不可測. 彼之欲修隙, 久矣, 特以非朝端人, 故姑緩之. 今睚眦幾盡, 次及君矣. 每語到君邊, 眉睫甚惡, 必不免矣. 爲之柰何? 可急離城闉.” 先君自念: ‘平日言議徑直, 名譽太盛, 所以招禍.’ 遂有斂影息跡之意. 於是挈家入燕巖峽, 結數椽艸屋而居. 兪公乃求外, 得居留松京, 卽日簡騶徒入峽, 訪先君曰: “溪山大佳, 然白石不可煮. 此去松京一舍耳, 城府中有親知可爲之周旋者否? 近郭亦多精舍可僦, 盍謀之? 我在此, 日得與源, 源亦固喜也.” 時松京人梁浩孟ㆍ崔鎭觀, 慨然有氣義, 聞先..
28. 芝溪公祭之以文曰: “維歲月日, 婦弟完山李在誠, 謹操文, 哭訣于燕岩朴公之靈曰: 嗚呼哀哉! 人固有言, 文章有定品, 人物有定評. 苟無眞知, 曷惟求定? 如彼法寶, 宏麗瓌宕, 心目所罕, 蓋難名狀. 龍文之鼎, 不便鎗鐺; 琱玉之觴, 不適瓠★康+瓦. 赤刀弘璧, 不列市坊; 天書雲篆, 不充篋箱. 神鏡炤妖, 靈珠攝忘, 續弦有膠, 還魂有香. 駭聞刱覩, 詭奇不常, 不見所施, 以爲無當. 嗚呼我公! 名一何盛, 謗一何競? 噪名者, 未必得其情; 吠謗者, 未必見其形. 嗚呼我公! 學不苟奇, 文不苟新, 切事故奇, 造境故新. 家常茶飯, 皆爲至文, 嬉笑怒罵, 亦見天眞. 流水紆遠, 烟瀾泫沄, 巖峀疊重, 乃興霞雲, 自然變態, 非故駭人. 管商功實, 學者羞稱, 賈陸詞華, 文苑不登, 敢問所安, 竊比於我, 何才之高, 何志之下. 病世爲文, 痴矜自古..
16-2. 연암이 지은 총석정시를 보고 놀란 홍상한 先君於金剛之遊, 有「叢石亭觀日出」詩一篇. 洪尚書象漢, 從子舍見之驚曰: “今世能有此筆力乎? 是不可空讀也.” 以湖筆大小共二百枝, 送門下客致之, 寄意鄭重焉. 해석 先君於金剛之遊, 有「叢石亭觀日出」詩一篇. 선군께서 금강산을 유람할 적에 「총석정에서 일출을 보며」라는 시 한 편을 지으셨다. 洪尚書象漢, 從子舍見之驚曰: 상서 홍상한이 아들 집에서 그 시를 보고 놀라며 말했다. “今世能有此筆力乎? 是不可空讀也.” “지금 세상에도 이러한 필력의 작품이 있는가. 이 시는 헛되이 읽을 수 없다.” 以湖筆大小共二百枝, 送門下客致之, 호주부에서 나는 크고 작은 붓 모두 200개를 문하의 객에게 보내 치하하게 했으니 寄意鄭重焉. 뜻의 정중함을 표시한 것이다. 인용 목차
16-1. 어렵게 금강산에 가다 乙酉秋, 東遊金剛. 時兪公彦鎬ㆍ申公光蘊, 方聯鑣入山, 懇先君偕行. 先君爲親在, 不敢自擅遠遊, 往謝且別而歸. 王考問: “汝何不共往? 名山有緣, 年少一遊, 好矣!” 顧無盤纏可帶. 時金公履中, 適至聞之, 歸撤買驢錢一萬以送曰: “此可以遊乎?” 顧無僮指可俱. 乃使小婢, 呼於巷中曰: “有能從吾家小郞, 襆被擔笈, 入金剛山者乎?” 應募者數人. 乃曉發, 抵樓院遇兪ㆍ申二公, 皆驚喜過素約焉. 遍踏表裏諸勝, 題名於萬瀑洞中而歸. 三日浦ㆍ四仙亭, 又有聯句縣板. 해석 乙酉秋, 東遊金剛. 을유(1756, 영조 41년으로 연암 29세)년 가을에 동쪽으로 금강산을 유람하셨다. 時兪公彦鎬ㆍ申公光蘊, 方聯鑣入山, 그때 유언호와 신광온이 금방 말을 나란히 달려 산에 들어가려 하며 懇先君偕行. 선군께 함께 가길..
6. 연암의 성향을 걱정한 장인 이보천 年十六冠, 就館於處士遺安齋李公之門. 處士謹嚴淸高, 以經禮律己. 其弟學士公亮天, 酷嗜書史, 文章甚高. 先君從處士受『孟子』, 從學士受『太史公書』, 已得其立言大致. 嘗倣『項羽本紀』, 作「李忠武傳」, 學士大加歎賞, 以爲有班ㆍ馬地步. 先君自弱冠時, 志氣高厲, 不拘拘於繩墨, 往往詼諧游戱, 而處士特愛重之, 誨責規切, 以古人事業期之. 嘗語學士曰: “某也, 見其才氣, 大非凡類, 必爲異日偉人. 但疾惡太甚, 英氣太露, 是可憂也.” 先君於處士, 平生服膺最深. 해석 年十六冠, 就館於處士遺安齋李公之門. 나이 16살에 관례를 하셨고 처사 유안재 이보천 공의 집안에 장가드셨다. 處士謹嚴淸高, 以經禮律己. 처사는 근엄하고 청렴하고 고결하여 일상적인 예법으로 자기를 구속하였다. 其弟學士公亮天, 酷..
87. 혼자서 쌍륙놀이를 하다 先君於博奕諸器, 皆知其法, 特未嘗接手, 不肖惟見與人對棊者再. 一日雨中, 徘徊軒堂, 忽引雙陸, 以左右手擲骰, 爲甲乙對局. 時非無客子在傍, 而獨自撫弄. 已而, 笑而起, 援筆答人書牘曰: “雨雨三晝, 可憐繁杏, 銷作紅泥. 永日悄坐, 獨弄雙陸, 右手爲甲, 左手爲乙, 呼五呼六之際, 猶有物我之間, 勝負關心, 翻成對頭. 吾未知, 吾於吾兩手, 亦有所私歟. 彼兩手者, 旣分彼此, 則可以謂物, 而吾於彼, 亦可謂造物, 猶不勝私, 扶抑如此. 昨日之雨, 杏雖衰落, 桃則夭好. 吾又未知, 彼造物者, 扶桃抑杏, 亦有所私者歟.” 客笑曰: “我固知先生意, 不在雙陸, 乃爲拈出一段文思.” 해석 先君於博奕諸器, 皆知其法, 선군께서는 장기와 바둑의 여러 놀이 기구에 대해 모두 방법을 아셨지만 特未嘗接手, 다만 일찍이..
68. 백동수와 연암의 인연 白博川東脩, 與先君同庚. 膂力絕倫, 精悍有瞻. 畧事先君執禮, 如褊裨之事主帥, 夷險燥濕, 少無憚勞. 一日從他醉歸, 使酒於前. 先君曰: “君無禮, 可受杖.” 以剪紙板, 打其臀十, 戒其粗率. 白君初以爲戱, 後乃知其誨責也. 自是不復敢被酒入謁曰: “吾嘗被燕岩公責矣!” 해석 白博川東脩, 與先君同庚. 박천군수를 지낸 백동수는 선군과 동갑이다. 膂力絕倫, 精悍有瞻. 팔 힘이 매우 뛰어났고 정신은 예리하고도 담력이 있었다. 畧事先君執禮, 如褊裨之事主帥, 대략 선군을 섬김에 예를 갖췄으니 마치 부하장수가 장군을 섬기는 듯하여 夷險燥濕, 少無憚勞. 평탄하거나 험하거나 마르거나 습할 때 어느 때라도 조금도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았다. 一日從他醉歸, 使酒於前. 하루는 다른 데서 고주망태로 취해 돌아와..
6. 가짜 유학자를 나무라는 글을 쓰다 先君文篇, 或有譏切世儒之假飾盗名者. 於是人或有慍怒不平. 兪忠文笑曰: “此友所譏者, 僞儒耳, 特有激而發. 吾常怪君輩多事出氣力, 代爲僞儒攄憤耳.” 해석 先君文篇, 或有譏切世儒之假飾盗名者. 선군의 문장 중에 간혹 세상 유학자들의 가식적인 모습과 훔친 명성을 나무라고 꾸짖은 것이 있었다. 於是人或有慍怒不平. 그래서 사람 중에선 간혹 화를 내며 불평스러워하는 경우도 있다. 兪忠文笑曰: “此友所譏者, 僞儒耳, 충문 유언호는 웃으며 말했다. “이 벗이 나무란 사람은 가짜 유학자일 뿐으로 特有激而發. 다만 격노하여 발설한 것이네. 吾常怪君輩多事出氣力, 나는 항상 그대들이 많은 일에 기력을 내뿜으며 代爲僞儒攄憤耳.” 가짜 유학자들을 위해 대신하여 분노를 피력하는 게 이상할 뿐이네...
22. 과거시험에 급제시키려는 사람들과 그걸 피해 다니는 연암 庚寅, 赴監試, 俱魁初終場. 出榜之夕, 有特旨入侍卧內, 使知申讀奏試券. 上親叩書案以節之, 盛加奬諭焉. 先君欲不赴會圍, 親友多强勸者, 遂黽勉入場屋, 不呈券而出. 有識者聞之, 皆以爲進取不苟, 有古人風. 遺安翁時在鄕廬, 語其子曰: “某之會圍, 吾不甚喜也. 及聞其不呈券, 甚欣然也.” 盖先君兩場之魁, 皆遇然之得, 而及其偏被隆渥, 名聲益壯. 時議必欲於會圍援引之以爲功. 先君戒其或涉機也, 勇決如此云爾. 해석 庚寅, 赴監試, 俱魁初終場. 선군께서는 경인(1770)년에 감시에 응시해 모두 초종장에서 장원을 하셨다. 出榜之夕, 有特旨入侍卧內, 방이 붙던 날 저녁에 임금께선 寢殿으로 입시하라 명령을 내리고 使知申讀奏試券. 知申事에게 시권을 읽도록 하셨다. 上親叩書..
15. 과거급제엔 전혀 관심도 없어라 時先君文章之名, 已喧動一世, 每有科試, 主試者, 必欲援引. 先君微知其意, 或不赴, 或赴而不呈券. 一日在場屋, 漫筆畵古松老石, 一世傳笑其踈迂. 然盖示其不屑之意者. 해석 時先君文章之名, 已喧動一世, 당시 선군의 문장에 대한 명성이 이미 한 세상을 시끄럽게 할 정도로 유명해 每有科試, 主試者, 매번 과거시험이 있으면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사람이 必欲援引. 반드시 끌어다 급제시키려 하였다. 先君微知其意, 或不赴, 선군께서는 은밀하게 그 뜻을 알아 혹은 시험장에 가질 않았고 或赴而不呈券. 혹은 가더라도 시권을 내지 않았다. 一日在場屋, 漫筆畵古松老石, 하루는 과거시험장에 있었는데 늙은 소나무와 묵은 바위를 일필휘지로 그리고 있었으니 一世傳笑其踈迂. 한 세상 사람들이 급제에 관심..
76. 연암의 시가 적은 이유 先君詩稿甚寡, 古今體共五十首. 古體則專學昌黎, 而奇嶮過之, 情境逼造, 而筆力不窮. 至於律絕諸體, 常病其拘束於聲律之間, 不可直寫胸中所欲言, 故往往一二句而止者, 有之. 李懋官『淸脾錄』稱: “燕岩文章玅天下. 而於詩獨矜愼, 不肯輕出, 如包龍圖之笑, 比河淸, 不得多見”云. 朴在先詩云: “從古文章恨橘鰣, 幾人看見燕岩詩? 優曇一現龍圖笑, 正是先生落筆時.” 해석 先君詩稿甚寡, 古今體共五十首. 선군의 시집은 매우 적어 고체시와 근체시 모두 합해 50수였다. 古體則專學昌黎, 而奇嶮過之, 고체시는 오로지 한유를 배웠지만 기이하고 험한 것이 그를 넘어섰고 情境逼造, 而筆力不窮. 실정과 경치를 묘사함은 핍진하여 필력이 무궁무진했다. 至於律絕諸體, 常病其拘束於聲律之間, 율시와 절구의 모든 시체에 이..
1. 박지원의 문장관 先君之論文章也. 常以爲文無古無今, 不必模楷韓ㆍ歐, 步趣馬ㆍ班, 矜壯自大, 低視今人也. 惟自爲吾文而已. 擧耳目之所睹聞, 而無不能曲盡其形聲, 畢究其情狀, 則文之道極也. 又病吾東之士汨沒於功令之餘習, 綴拾陳談, 依樣畵葫, 而自附純質, 日就鹵莽也. 故曰: “法古者病泥跡, 刱新者患不經. 苟能法古而知變, 創新而能典, 今之文, 猶古之文也.” 又曰: “苟得其理, 則家人常談, 猶列學官, 童謳里諺, 亦屬『爾雅』. 故文之不工, 非字之罪也. 彼評字句之雅俗, 論篇章之高下者, 譬如不勇之將, 心無定策, 猝然臨題, 屹如堅城. 其患常在於自迷蹊徑未得要領.” 又曰: “天地雖久, 不斷生生, 日月雖久, 光輝日新, 載籍雖博, 旨意各殊. 故飛潛走躍, 或未著名; 山川草木, 必有秘靈; 朽壤蒸芝, 腐草化螢. 禮有訟, 樂有議. 書不..
3. 어디에도 쓸 데 없는 글 嘗言: “不痛不癢, 句節汗漫, 優游不斷, 將焉用哉?” 해석 嘗言: “不痛不癢, 句節汗漫, 아프게 하지도 않고 가렵게 하지도 않고 구절마다 優游不斷, 將焉用哉?” 허황되며 우유부단하다면, 그런 글을 어디에 쓸 수 있겠는가? 인용 목차 연암의 글에 반하다 문체반정과 열하일기 순간순간의 감정에 휩쓸리는 사람에 대해
6. 중국의 촌구석도 잘 정비된 걸 보고 질투하는 마음이 일다 復至柵外, 望見柵內, 閭閻皆高起五樑, 苫艸覆盖, 而屋脊穹崇, 門戶整齊. 街術平直, 兩沿若引繩. 然墻垣皆甎築, 乘車及載車, 縱橫道中, 擺列器皿, 皆畵瓷, 已見其制度絶無邨野氣. 往者洪友德保, 甞言大規模細心法, 柵門天下之東盡頭, 而猶尙如此. 前道遊覽, 忽然意沮, 直欲自此徑還, 不覺腹背沸烘. 余猛省曰: “此妒心也. 余素性淡泊, 慕羡猜妒, 本絶于中. 今一涉他境, 所見不過萬分之一, 乃復浮妄若是, 何也? 此直所見者小故耳. 若以如來慧眼, 遍觀十方世界, 無非平等, 萬事平等, 自無妒羡.” 顧謂張福曰: “使汝往生中國何如?” 對曰: “中國胡也, 小人不願.” 俄有一盲人肩掛錦囊, 手彈月琴而行. 余大悟曰: “彼豈非平等眼耶.” 해석 復至柵外, 望見柵內, 다시 책문 밖에 ..
1. 도로 너의 눈을 감아라 是日鴻臚寺少卿趙光連, 聯椅觀幻. 余謂趙卿曰: “目不能辨是非察眞僞, 則雖謂之無目可也. 然常爲幻者所眩, 則是目未甞非妄而視之明, 反爲之祟也.” 趙卿曰: “雖有善幻難眩瞽者, 目果常乎哉?” 余曰: “弊邦有徐花潭先生, 出遇泣于道者曰: ‘爾奚泣?’ 對曰: ‘我三歲而盲, 今四十年矣. 前日行則寄視於足, 執則寄視於手, 聽聲音而辨誰某則寄視於耳, 嗅臭香而察何物則寄視於鼻, 人有兩目而吾手足鼻耳, 無非目也. 亦奚特手足鼻耳? 日之早晏, 晝以倦視; 物之形色, 夜以夢視, 无所障礙, 未曾疑亂. 今行道中, 兩目忽淸, 瞖瞙自開, 天地寥廓, 山川紛鬱, 萬物礙目, 群疑塞胷, 手足鼻耳, 顚倒錯謬, 皆失故常. 渺然忘家, 無以自還, 是以泣爾.’ 先生曰: ‘爾問爾相, 相應自知.’ 曰: ‘我眼旣明, 用相何地?’ 先生曰: ‘還..
2. 趙卿曰 然 世言飛燕太瘦 玉環太肥 凡言太者 已甚之辭也 旣論其肥瘦而輕加以已甚之辭 則已非絶世之佳人 彼二帝之目 獨眩于肥瘦之間 世之無光明眼 眞定見久矣 太伯之文身採藥 幻以孝者也 豫讓之漆身呑炭 幻以義者也 紀信之黃屋左纛 幻以忠者也 沛公其幻也織 張良其幻也石 田單以牛 初平以羊 趙高以鹿 黃霸以雀 孟甞君以鷄 蚩尤之幻銅頭鐵額 諸葛之幻木牛流馬 王莽之金縢請命 幻之未成也 曹操之銅雀分香 幻之破綻也 祿山之赤心 盧杞之藍面 皆幻之拙者也 自古婦人尤能善幻 如褒姒之於烽也 驪姬之於蠭也 然聖人神道設敎 亦有然者 愚雖未敢致疑於階草之指佞 庭鳳之儀韶 而亦未能盡信於負舟之黃龍 流屋之赤烏 自古神聖愚凡 莫不有一番不可知之事 或有嗜瘡痂者 或有好驢鳴者 雖謂之幻可也 雖謂之性 亦可也 幻之爲術也 雖千變萬化 无足畏者 天下有可畏之幻 大姦之似忠也 鄕愿之類德也 余曰 胡廣之三..
옛 전쟁터의 분위기가 지금도 감도는 고북구를 밤에 나오며 夜出古北口記 고북구의 지리적 특성 自燕京至熱河也, 道昌平則西北出居庸關, 道密雲則東北出古北口. 自古北口循長城, 東至山海關七百里, 西至居庸關二百八十里, 中居庸山海而爲長城險要之地, 莫如古北口. 蒙古之出入常爲其咽喉, 則設重關以制其阨塞焉. 기록에 나타난 고북구 羅壁「識遺」曰: “燕北百里外, 有居庸關, 關東二百里外, 有虎北口, 虎北口, 卽古北口也.” 自唐始名古北口, 中原人語長城外, 皆稱口外, 口外皆唐時奚王牙帳. 按『金史』, 國言稱留斡嶺, 乃古北口也, 葢環長城稱口者, 以百計. 緣山爲城而其絶壑深磵, 呿呀★穴+坎陷, 水所衝穿則不能城而設亭鄣. 皇明洪武時, 立守禦千戶所, 關五重 고북구를 지나는 감정을 적다 余循霧靈山, 舟渡廣硎河, 夜出古北口, 時夜已三更. 出重關, 立..
出阜成門 行數里 道左列石柱四五十 上架葡萄方爛熟 有石牌樓三間 左右對蹲石獅 內有高閣 問守者 乃知爲利瑪竇塚 而諸西士東西繼葬者 總爲七十餘塚 塚域築墻 正方如碁局幾三里 其內皆西士塚也 皇明萬曆庚戌 賜利瑪竇葬地 塚高數丈 甎築墳 形如甗瓦 四出遠簷 望如未敷大菌 塚後甎築六稜高屋 如銕鍾 三面爲虹門 中空無物 樹碣爲表曰 耶蘇會士利公之墓 左旁小記曰 利先生諱瑪竇 西泰大西洋意大里亞國人 自幼眞修 明萬曆辛巳航海 首入中華衍敎 萬曆庚子來都 萬曆庚戌卒 在世五十九年 在會四十二年 右旁又以西洋字刻之 碑左右樹華表 陽起雲龍 碑前又有甎屋 上平如臺 列樹雲龍石柱爲象設 有享閣 閣前又有石牌樓石獅子 湯若望紀恩碑
眞覺寺 俗名五塔寺 又名正覺寺 浮圖高十丈 號金剛寶座 入其內 從暗中螺旋以陟 其頂上爲平臺 復置五方小塔 世傳皇明憲宗皇帝生藏衣冠處 寺或云蒙古人所建 或云皇明成祖皇帝時西番板的達所貢金佛五軀 爲刱此寺以舍之 今我人初見金屋番僧 大驚於心 然中國歷代 必有此等崇奉 則天下共許天子遊神暇豫之地 而兼資冥佑 故雖極崇侈 所以群下不敢指斥 聊相假借之也
崇福寺 本憫忠寺 唐太宗還自征遼 哀憫戰亡將士 爲建此寺以薦福 兩塔對峙 或云安祿山所建 或云史思明所建 高各十丈 要之兩賊所建 而中國人猶以千年舊蹟而不沒也 宋史 謝疊山以元至元二十六年四月 至燕京 問謝太后欑所及瀛國公所在 再拜慟哭 元人送置憫忠寺 見壁間曹娥碑 泣曰 一女子尙爾 遂不食而死 尋張不肯爲史思明頌唐肅宗碑 蘇靈芝所書 今無有 然當以朱彛尊所辨爲正矣 高麗史 忠宣王至大都 帝祝髮置之石佛寺 或云此寺 未可詳也
北藥王廟 殿宇位設 一如南廟 而東臨海子 沿堤萬柳 陰濃湖濱 遊客常滿 天啓中 魏忠賢所建云
火德眞君廟 在北安門日中坊 元至正間建 皇明萬曆時改增 天啓元年 著令以每年六月二十二日 太常官祀火德之神 前殿曰隆恩 後殿曰萬歲 曰景靈 曰輔聖 曰弼靈 曰昭寧 凡六殿 皆碧琉璃瓦 階墄皆綠琉璃甎 殿後水亭臨湖 金碧照映漣漪間 壯麗與藥王廟相並 而勝槩過之 一碑朱之蕃撰 一碑翁正春撰
護國寺 都人稱千佛寺 以其有千佛也 又名隆國寺 有大小佛殿十有一區 雖甚宏傑 而亦多破敗 皇明正德中 勑西藩法王領占班丹及著肖藏卜等居住 所謂班丹藏卜者 如今熱河所置班禪也 未知寺刱何代 而有元丞相脫脫塑像 幞頭朱衣 髯長眉脩 氣宇淸肅 衣冠皆似華制 元時宰相 或不開剃歟 是可異也 旁有鳳冠赤裳老嫗 乃脫脫妻也 又有姚廣孝畵像 姿容蕭灑 髡頂趺坐 萬緣俱空 不似西湖鼓臀獨吟時也 昔司馬遷稱張子房貌類婦人 余於未見此像時 意其有滔天殺氣 今不然矣
聞明因寺 有僞蜀王衍時貫休所畵十六羅漢像 奇奇恠恠 不類世間所傳 思欲一觀 座有初翰林彭齡 亦同余思 遂約日共車至寺 寺在正陽門外三里河東畔 不甚宏麗 只有一僧 病咳且甚頑鄙 牢諱此畵 且不許遊覽 初太史向僧再三叩懇 而僧頑賴轉甚 不肯擧頭應答 良久厲聲叱之 初赧然而退 殊甚敗意 引余同歸 歷護國寺
關帝廟遍天下 雖窮邊荒徼 數家村塢 必崇侈棟宇 賽會虔潔 牧竪饁婦 咸奔走恐後 自入柵至皇城二千餘里之間 廟堂之新舊 若大若小 所在相望 而其在遼陽及中後所 最著靈異 其在皇城 稱白馬關帝廟 載於祀典 則正陽門右關帝廟是也 每年五月十三日致祭 前十日 太常寺題遣本寺堂上官行禮 是日民間香火尤盛 凡國有大災則祭告之 皇明萬曆時 特封三界伏魔大帝神威遠鎭天尊 旨由中出 我國南關廟壁上所揭 葢摹此筆也 焦竤撰廟碑 董其昌書 世稱二絶
訪兪世琦于夕照寺 寺不甚宏傑 而精灑幽敻 眞乃一塵不動 禪林中凈界 此爲初見也 無一僧居住 皆閩越中落第秀才 無資不能歸 多留此中 相與著書刻板以資生 時居共三十一人 爲人賃書 朝出未還 寂無一人 而所居皆凈潔 位置整齊 使人徘徊 想咏不能去 析津日記云 燕京八景 有金臺夕照 此寺之所由名也 兪君本閩人 爲陜西兵備道陳庭學姊婿 今年二月喪妻 無子男 有四歲乳女 置婦家 身獨與小僮 棲息此寺中
隆福寺市日 每月三一 與灣賈鏡贊同行 是日値市 車馬尤爲闐咽 寺中咫尺相失 遂獨行觀玩 碑載景泰三年六月 工部侍郞趙榮董工 役夫萬人 五年四月成 車駕擇日臨幸 太學生楊浩 儀制郞中章綸 俱上䟽諫 卽日罷行 卿士大夫連車騎至寺中 手自揀擇市買 百貨盈庭 珠玉珍寶之物 磊落宛轉于履屐之間 令人足踖如也 心怵如也 而視瞿瞿也 階墄玉欄所布掛 皆龍鳳氈罽 而衣被墻壁者 盡是法書名畵 往往施帷幕 撞金伐鼓者 逞戱售術者也 前年李懋官遊此寺 値市日 逢內閣學士嵩貴 自選一狐裘 挈領披拂 口向風吹毫 較身長短 手揣銀交易 大駭之 嵩貴者 滿洲人 往歲奉勑東出者也 官禮部侍郞 蒙古副都統 我國貧士家 雖乏無尺僮者 未甞敢身至塲市間 與賈竪輩評物高下 爲鄙屑事也 宜其大駭於我人之目 然今吾歷訪賣買者 皆吳中名士 殊非裨販駔儈之徒 以遊覽來者 類多翰林庶吉士 爲訪親舊問訊家鄕 兼買器服 其所覓物 類多古董..
天壇之西 有斗姥宮 門前正街 有牌樓三 南坊外額曰與天同壽 內額曰萬壽無疆 東坊外額曰蓬萊深處 外額曰東華注籌 西方內額曰天竺延祥 外額忘焉 三樓鼎峙 金碧璀璨 目難定視也 第一殿榜曰北極殿 安北斗星君 第二殿至第五殿 皆鎖不許人觀 大約土木之盛 藻繪之工 有非心智力量所到 左右廊廡壁上所畵 無非刱覩 而行忙不得諦閱 又至一殿 從窓隙遙窺 雖未知何物寶玩 而熠熠靑碧 如鬼火 礌砢錯落如佛腹 欲曉未曉 如夢讀籙字書 又行至一屋 多置古書畵 米芾天馬賦 山精木魅圖 只閱其標題而去 康煕時 太監顧時行爲太皇太后祈福 捐私財造建碑 文翰林侍讀學士高士奇撰 康煕乙亥立
藥王廟隔墻 有天慶寺 有四大殿 第一曰四王 第二曰圓通 第三曰大延壽 第四曰空相 空相殿中 以寸餘金佛數千萬軀 積纍成大佛像 眉眼如生 額紋衣皴 無非小佛像 橫縱竪倒 如畵筆所摹揩也 以此心手之巧 其於土木之功 丹雘之麗 何難之有 如此大寺刹 只有一老釋與數三小沙彌俱居 廊廡間百工居住 工作紛然 書畵長軸 裝潢標飾 皆就是中 東北隅有高樓 中建十三簷金塔 刻鏤藻繪之盛 殆出鬼手 寺建于皇明天順三年己卯
天壇之北 有藥王廟 武淸矦李誠銘所建也 殿中設太昊伏羲氏 左神農右軒轅 配以歷代名醫如孫眞人 岐伯 扁鵲 葛洪 華陀 王叔和 韋眞人 太倉令張仲景 皇甫士安 多不能盡記 槩倣文廟從享之制 每月朔望 士女雲集 祈禱疾病 燭燼香灺 堆積如雪 方有一女子盛粧叩頭 粉汗漬席 殿宇壯麗 殆與太陽宮相伯仲
崇文門外西南 有金魚池 一名魚藻池 界池爲塘 盛植桃柳 居人歲種 五色魚市易爲業 金色最多 故號金魚池 每歲端午 都人盡出 走馬池邊 池陰一帶 園亭甚多 而安國寺最爲壯麗 寺門左右有鐘鼓閣 有大殿三 殿前東西 廊廡數百間 皆有像設 金碧炫耀 殆難名狀 殿後 又有三大樓 金檻繡牖 縹緲雲霄間 而只有二僧相守 香火稀到 是可恠也
出法藏寺 西行數百步 有太陽宮 香火甚盛 車馬騈闐 內外諸殿 左右廊廡 男女祈禱者 曰千萬計 階墄之間 燭淚成峯 香燼如雪 前殿當中紫微星君 東太陽星君 西太陰星君 後殿九天星君聖母 左一殿關帝 右一殿釋迦 販賣酒食花果 戱弄禽鳥 逞伎售術 輻輳雜沓 寺觀中一大都會也
從天壇北墻 東行數里 有法藏寺 寺刱于金大定中 舊名彌陀寺 皇明景泰二年修之 改稱今名 制視天寧諸寺大同 塔七層高十餘丈 中空螺旋爲級 黑暗如夜 摹循置足 如入鬼窟 旣登一層 八牕洞然 心目爽豁 比登七層 一夢一覺 每層八面 面皆有牕 牕皆有佛 凡五十八佛 佛前皆設一燈 或云上元夜 繞塔燃燈 迭奏笙簫 如出天上 第一層 有我國金公昌業題名 其下又有洪友大容題名 墨光如新 徘徊悵恨 如可晤語 憑闌四望 黃圖全幅 歷歷在眼 眼力旣竆 魄動髮★忄+雙 不可久居 第二殿 有兩碑 一給事中吳獻撰 鴻臚寺丞高岱書 一國子祭酒胡瀅撰 太子賓客淮陰金濂書 左都御使姑蘇陳鑑篆
白雲觀 周遭壯麗 不减天寧寺 道士百餘人居之 牌樓外扁曰洞天佳境 內扁曰璚林閬苑 渡三空橋 入玉皇殿 玉皇具帝者服 遶殿三十三天帝君 拱圭垂旒 皆如玉皇 天蓬神將三頭六臂 各擁兵器 前殿安南極老人星君 騎白鹿 左一殿 安斗母 右一殿 安丘長春 元世祖國師也 玉皇殿扁紫虛眞氣 斗母殿扁大智寶光 俱康煕御筆 道士所居廊廡千餘間 皆明凈肅整 一塵不動 所儲書冊 皆錦卷玉軸 充溢棟宇 鼎彛敦卣 磊砢古奇 屛鄣書畵 往往絶世之寶也
自報國寺 轉至天寧寺 元魏時名光林 隋時名弘業 唐開元中 改額天王寺 金大定二十一年 爲萬安禪林 皇明宣德中 修之曰天寧 正統中 又修之曰萬壽 戒壇臨大道 築臺二層 高可五丈 臺上廂寮周遭 聯絡幾數里 中有大佛殿五 舊說隋文帝仁壽二年正月 帝遇阿羅漢 授舍利一囊 乃以七寶凾 致岐雍等三十州 州建一塔以藏之 今天寧寺塔 卽其一也 塔高二十七丈五尺五寸云 塔凡十三簷 八楞懸鈴 四周萬計 響無斷時 塔頂風磨 銅輪相晶瑩閃歘 映人衣袂 翻靑掣白 舊聞塔影倒入大士殿 日方中 闔殿門 光從門隙入見 塔全影于石上云 此來適値陰霾 不見其影 大士像後 華嚴經障子 奇巧神出 康煕辛未 大興縣李之秀妻劉氏 手寫華嚴全部八十一卷六十萬四十三字 曲折宛轉 作五層殿閣 中置佛像 字細如螘頭而點畫謹嚴 撇拐齊整 無一毫糺棼 殿閣簷甍牕欞 無銖黍之錯 佛像眉眼如生 衣紋襞摺隨勢 噫 不謂一女子心手之用 若是其神 况..
報國寺 在宣武門外迤北一里 月三五爲市日 海內百貨輳集 佛殿三寮廂周遭 而居僧鮮少 皆京外商旅無異闤闠 禪林中一大都會也 第一殿扁曰一塵不到 第三殿後 有毘盧閣 中間爲大路 廛鋪羅列 車馬鬧熱 不獨市日爲然也 余謂史記蘇秦說齊王曰 臨淄之道 車轂擊 人肩磨 揮汗成雨 連袵成帷 始以爲過矣 今觀於九門信然 諸寺如報國隆福 皆如九街 然後益知古人言語文字不爲虛辭夸炫也 列國之時 日尋干戈 而都邑之富庶 猶能若彼 况昇平天子之都乎 上毘盧閣 閣三十五間 中安文昌星君 左右列佛像神將 從北璧踏層梯 登其上閣 黑暗如漆 拾級惟謹 可揣六七丈 及梯盡而白日昭明 上閣十五間 有大金佛十一 循欄一周 皇城九門外內纖毫皆見 荳人寸馬 蠕蠕埃壒間 天寧寺影塔 高入雲霄 太液池一泓澄明 瓊島白塔 晶直自表 寺創于皇明成化初 爲皇太后祈福 翰林侍讀學士劉定之撰碑 汪客書
弘仁寺最後一殿 有觀音變相 千手千目 手各有執像 後所懸大障畵 大海濤瀧 虛舟出沒 而海天雲氣騰騰 化爲卿霱瑞曇 中有金冠玉帶扶擁小兒者 小兒具王者冕服 妙麗端嚴 以手指天 數千人團衛雲氣中 皆頂繞佛光 岸上衆男衆女 頂手仰天者 殆以萬計 無畵者姓名 亦無年月標題 觀者莫辨爲何緣舍施也 余謂此宋之陸秀夫抱帝赴海圖也 何以知其然也 曾見宋君臣圖像 范文正公冠服如此 昨謁文丞相祠 其所塑冠帶 略相彷彿 小兒具王者冕服 必宋之帝昺也 虛舟出沒者 公抱帝墮海而舟中之人 皆從而溺也 騰雲昇天 頂繞佛光者 乃後人之妄想而畵者之苦心也 當此時也 宋之社稷浮在大洋 君臣上下 共寄其蜉蝣之命于颶濤鯨波之間 非水則天 無可往矣 然猶日書大學章句 以斅少帝 雍容暇豫 有若論思於廈氈之上 豈非迂且惑歟 嗚呼 忠臣義士者 不以顚沛覆亡而小懈其眷眷忠愛之心 則誠爲天下國家之本 惟在於意誠而心正 一日無此君臣則已 ..
皇城外內閭閻廛舖之間 所有寺刹宮觀 不特天子勅建 皆諸王駙馬及滿漢大臣所捨第宅 且富商大賈 必刱一廟堂 以資冥佑 與天子競其奢麗 故天子不必更事土木 別置離宮 以奢天子之都也 自皇明正統天順間 發帑所造者二百餘區 而比年所刱 多在內 外人不得見 獨我使至 則有時引納 恣其縱觀 然余所遊歷 僅百分之一 或爲我譯所操切 或爭難門者 方入其中 則顧影怱怱 惟日不足 而建置掌故 非攷碑刻 無以知何代何寺 纔讀一碑 輒移數晷 貝闕琳宮 隙駟灘船 是以五官幷勞 四友俱瘁 恒如夢讀籙書 眼纈海蜃 顚倒依稀 名蹟多錯 歸拾小錄 或紙如蝶翅 字如蠅頭 皆百忙閱碑所潦草也 遂編爲盎葉小記 盎葉者 倣古人書柹葉 投盎中 集而爲錄
朝鮮館使之所 初名玉河館 在玉河橋上 爲鄂羅斯所占 今在正陽門內東城墻下乾魚衚衕 翰林庶吉士院 隔墻 年貢使先至在舘 而更有別使 則分處西舘 故此名南舘 昨年昌城尉使行時 南舘失火 夜方三鼓 舘中鼎沸 一行幣貨委積城底 馬數百匹闐門爭出 已見甲軍數千 嚴衛如鐵城 數十水車 幷驅而入 扁檐兩桶水 隨注車箱 無點水冗費 救火者皆着氈帽氈裘 裘帽皆漬水 手持長柄斧鉤鎌鎗 衝焰冒火 隳突隨意 須臾火滅 寂無喧擾 物貨亂置者 無一閪失 可見中國法度之嚴 每事之不苟艱如此云
試院 墻周幾五里 甎築如城 滑如斤削 高二丈餘 上加荊棘 中置大院宇 四周爲一間 屋數千區 一屋相距半間 左右爲疏牕以納明 前爲板扉 中爲小溫炕 庖湢畢具 外面甎築沒簷 無一區壞墮 外內潔淨 雖欲穿窬作奸 墻壁堅如鐵城 其勢末由也 昨見落第擧人試券 長二尺餘 廣六尺 行用冊紙也 硃印井間 楷字細書 可容千餘言 上首硃印禮部二字 下爲封彌 似是禮部印札試紙 以頒應擧者也 其攷閱之蹟 如批評古人文 下方批曰 本房具啣姓 有數行評語 又列書諸攷官啣與姓 俱爲評目 皆硃書 一井一字 無上中下次外更等第 雖在黜落之科 題品諄複 使作者 曉然知黜落之所以然 丁寧剴切 藹然有師弟子訓誨之意 可見大國塲屋之簡嚴 攷試之詳謹 爲擧業者足以不恨
관상대에서 보고 느낀 것 觀象臺 附城有高臺, 出堞丈餘曰: “觀象臺.” 臺上諸儀器, 遠望有似大紡車, 以攷中星辰, 夜昏明之候. 凡日月星辰風雲氣色之變異, 登此臺占焉. 其下爲府曰欽天監 正堂扁書觀察惟勤 庭中雜置儀器 皆銅造 非但不識其名 形製詭奇 駭人心目 上臺則可以俯瞰一城 而守者牢拒 不得上而歸. 盖臺上諸器, 似是渾天儀ㆍ璿璣玉衡之類, 而庭中所置, 亦有似吾友鄭石癡家所見者. 石癡甞削竹手造諸器, 明日索之, 已毁矣. 甞與洪德保共詣鄭, 兩相論黃赤道南北極, 或擺頭, 或頤可. 其說皆渺茫難稽, 余睡不聽, 及曉, 兩人猶暗燈相對也. 記鄭有言. 我國康津縣, 北極出地幾度, 與黃河入淮口相直. 故耽羅橘渡海, 只康津爲枳云. 其說不爲無據. 해석 附城有高臺, 出堞丈餘曰: “觀象臺.” 성에 덧붙여진 높은 대가 있어 나온 성가퀴가 한 길이 조금 넘으니..
祇謁文丞相祠 祠在柴市 卽先生成仁之地也 坊曰敎忠 元時塑以儒服 明正統十三年 順天府尹王賢奏改塑 宋時丞相冠服 其登祀典 在永樂六年 每歲春秋仲朔 天子遣順天府尹 設爵三果五帛一羊一豕一 余再拜而退 喟然嘆曰 千古興亡之際 天意斷可知矣 其見于妖孽禎祥而爲之驅除 爲之扶植 必於其所篤而力焉 雖婦人孺子 灼見其天意之有在 而乃忠臣義士者 徒欲以隻手與天抗 豈不悖且難歟 威武足以得天下 而不能屈一介之士 是一士之抗節 强於百萬之衆 而萬世之綱常 重於一代之得國 則是亦天道之攸寄也 若興王者 自知克審 而其得此大器也 天命之耶 抑且吾以力取之也 天旣命此大器 而不容吾力焉 則亦將使吾任天下之責耶 抑且以天下利吾身也 天旣欲以吾身利天下 則其利天下之術 固亦將有其道矣 吾受天之命 拯救斯民于塗炭之中而已矣 故武王之伐紂也 非武王伐之也 以有道伐無道也 堂堂乎其有天下而武王不與焉 是故在天無疑..
文丞相祠 在柴市 坊曰敎忠 祠三楹 前爲門 又前大門 祠之西 爲懷忠會館 江右士大夫 歲時集此祭公 皇明洪武九年 北平按察副使劉菘 始請建祠 永樂六年 太常博士劉履節奉命正祀典 謂天祥忠于宋室 而燕京乃其死節之所 請祠祀 從之 按劉岳申信公傳 公至燕館 供帳如上賓 公義不寢處 坐達朝 張洪範至具言不屈狀 送兵馬司械繫空宅中十餘日 解縛去械 囚四年 爲詩有指南錄三卷 後錄五卷 集杜二百首 皆有自序 趙弼信公傳言 公至柴市 觀者且萬人 公南向再拜 是日大風揚沙 天地晝晦 宮中秉燭行 世祖問張眞人 對曰 此殆殺文丞相所致也 乃贈公特進金紫光祿大夫開府儀同檢校太保中書平章政事廬陵郡公謚忠武 令樞密王積翁書神主 灑掃柴市 設壇祀之 丞相孛羅行初奠禮 狂飈旋地 卷主入雲中 改書前宋右丞相 天始開霽 初江南十義士 舁公藁葬南門外道旁 大德二年 繼子陞見織綾戶婦 公舊婢綠荷也 爲陞語 遂以歸葬廬陵 宣..
石鼓十枚 以十干爲第次 列置大成門左右戟門之內各五 周宣王大蒐岐山之陽 斲石爲鼓 以記其事 高二尺餘 徑一尺有奇 其文史籒之迹 其辭類風雅 所以頌美天子之田也 初在陳倉野中 唐韓愈爲博士時 請於祭酒 欲轝置太學而未果 宰相鄭餘慶帥鳳翔 取鼓置鳳翔夫子廟後 値五代之亂 鼓皆散失 及宋司馬池知鳳翔 搜得鼓 復置府學 而亡其一 皇祐四年 向傳師得亡鼓 遂足十數 大觀二年 自京兆移之汴京 詔以金塡其字陰 初置辟雍 後移寶和殿 靖康二年 金人陷汴 重氈輦至燕 剔其金 置鼓王宣撫家 復移大興府學 元大德十一年 虞集爲大都敎授 得之草泥中 始置國學 其已 鼓因民間窪其頂爲臼 文字尤益漫漶 然盖古蹟之最奇者 無如石鼓 余年十八 始讀昌黎東坡石鼓歌 奇其文辭 獨未見石鼓全文爲恨 今手撫石鼓 口讀潘廸音訓碑 豈非外國人厚幸也歟
國子監進士題名碑 始自皇明宣德五年 林震榜訖 崇禎十三年庚辰 魏德藻榜 凡七十一通 其下尙可容兩碑而帝厭薄進士 將下第擧人史惇 吳康矦等 盡留特用 惇等請援進士例 謁聖釋菜 樹碑題名 帝可之 太學士周延儒奉勅撰文 立于庚辰碑次 而十六年癸未 楊廷鑑榜後 遂無隙地可以樹碑 則明之進士題名碑 止此云 今淸省闈之制 悉遵明舊而題名之碑 密若葱畦 不可殫記 苟使淸德馨香 曆祚遐延 或函夏迭興 恒爲帝都 而太學樹碑 不廢故事 則吾未知螭首龜跗 更設何地也
潘廸石鼓音訓碑 在大成門左戟門 元大德十一年 加封聖號詔碑一通 在外持敬門 至順二年 加封先聖父母妻 並四配 制詞碑一通 在門西 皇明洪武三年 申明學制碑一通 十五年 勅諭太學碑一通 十六年 定學規碑一通 三十年 欽定廟學圖碑一通 嘉靖七年 作敬一亭 御製聖諭碑一通 正統九年 御製重修太學碑一通 洪武四碑 想應南太學所樹 而後世追刻更立之此中也 今淸仁皇帝所撰先聖贊一通 顔曾思孟贊一通 俱康煕二十八年閏三月立 平阿魯德猷 御製獻馘碑一通 康煕四十三年立 使趙譯達東分錄諸碑 而不能盡錄 文多可觀而未得遍閱 可歎也已
昨有歐陽助敎者 錄示國子監內外學舍之制 內號之在廣居門右 門一座曰退省 號舍四連 共四十九間 其南湢室與廁 自退省門 漸北折而西 爲天 地 人 知 仁 勇 文 行 忠 信 規 矩 準 繩 紀 綱 法 度共十八號 每號計二十一間 度字號北 有保安堂五間 以處監生之有疾者 彛倫堂後 有格致誠正四號 計九十八間 嘉靖七年 改建敬一亭外 東號 在廟左共三十四間 大東號 在居賢坊賽萬百倉西門街 門二 一曰登俊 號舍東西二連共四十間 一曰集英 號舍二十七間 新南號 在北城二條衚衕東口 門一座 東西房二連共三十四間 南北四間 小北號 在居賢坊衚衕 門一座 南北房二連共八十間 交趾號 在監之南 門一座 南北房二連共二十八間 西號 在成賢街之西北 去監五十步 舊雲閒寺址也 小房十間 又房二層 計九間 本監屬官 遞居之 北小房四間 南一間 近西小房十六間 此只監生棲息之所 夜與來源籌之 通計五百八十餘間 ..
皇城東北隅坊曰崇敎 西牌樓街曰成賢 牌樓內皆書國子監 永樂二年成左廟右學 宣德四年八月修大成殿前兩廡 先是 太學因元之陋 吏部主事李賢 奏請修擧 從之 正統九年正月 太學成 天子臨視 祗謁先聖 行釋奠禮 退御彛倫堂 命祭酒李時勉進講 弘治改元 駕臨太學有聖駕臨雍錄 具載敕旨 章奏 禮儀 文移 講議 官職等事 太學儀制于時大備 萬曆庚子 聖殿易琉璃瓦 從司業傅新德請也 崇禎十四年 重修太學成 八月車駕臨雍 祭酒南居仁坐講皐陶謨 司業羅大任講易咸卦 文武三品以上俱坐聽 賜茶 講畢天子入敬一亭 觀世宗所立程子四箴碑 石鼓殘闕 亦令察補進呈 長安客話云 國初 高麗遣金濤等四人 入太學 洪武四年 濤登進士歸國 按太學志 隆慶元年 駕幸國子監 朝鮮陪臣李榮賢等六員 各具本等衣冠 赴彛倫堂 立文臣班次之次 余從副使 書狀 庭行再拜 余曩謁熱河太學 制視京學 今周瞻廟貌 想因明舊 而較之太和殿 則雖似..
皇城東北隅柴市 對樹兩坊曰育賢 兩坊之中 爲順天府學 入欞星門 門內鑿池如半月 是爲泮水 爲三空橋 欄以白石 橋之北 有三門 中曰大成 左金聲 右玉振 聖殿外扁曰先師廟 內題曰萬世師表 康煕皇帝書也 位牌題至聖先師孔子之位 四配曰 復聖顔子 述聖子思之位 在東 宗聖曾子 亞聖孟子之位 在西 兩廡之間 多古栢樹 世傳許魯齋衡手植 或云耶律楚材所植 明倫堂在聖殿之東 啓聖祠在明倫堂之北 奎文閣在明倫堂之東北 文丞相祠在明倫堂之東南 中門之外 左爲名宦祠 右爲鄕賢祠 府學 故報恩寺也 元至正末 有遊僧募緣湘潭以造寺 未及安像 而明師下燕 戒士卒毋得入孔子廟 僧蒼黃借宣聖木主 置殿中 後不敢去 遂爲北平府學 遷都北京 則爲順天府學云
皆艸花 最多繡毬 秋海棠 石竹 諸色膽甁排揷者 皆四季花 翠觚揷一朶紅蓮 大僅匏花 葉如掌 時方秋菊盛開 皆我東所有 而最多鶴翎 而莖不特長 獨金菊最異 花朶僅如錢大 而如新鍍金箔 水仙未及開花 蘭似萱艸而深翠 無香可嗅
舖中百鳥啾喧 如山牕春曉 皆銕絲小籠 一籠一鳥 或兩鳥則雌雄也 鳥皆我東所有 然不識其名 籠中皆置小盒貯水 懸數莖粟穗 以資飮啄 持空籠至者 肩相摩也 初翰林彭齡與周擧人 各提空籠至舖中 易雙鳥 籠鳥卽我俗所名 뱝새 無甚奇稀 而値錢五十 錦鷄 形類家鷄而無冠 胡亦無雙珥 咮頸俱丹 白尾雙長 其端小彎 有翠錢一點 置大槽貯水 外周柵 上覆網 養錦鷄其中 大鐵籠置白鷴 大如鵲 雙尾如錦鷄
琉璃廠 在正陽門外南城下 橫亘至宣武門外 卽延壽寺舊址 宋徽宗北轅 與鄭后同駐延壽寺 今爲廠 造諸色琉璃瓦甎 廠禁人出入 燔造時 尤多忌諱 雖匠手 皆持四月糧 一入毋敢妄出云 廠外皆廛鋪 貨寶沸溢 書冊鋪最大者曰文粹堂 五柳居 先月樓 鳴盛堂 天下擧人 海內知名之士 多寓是中
回子館外門甎築 制樣絶奇 非天主堂所見 入門僅移數武 雙犬突至 張口狺狺 大驚卻立 回童數十 拍掌齊笑 門內左右 對値大柱 以數丈銕連鎖 鎖狗頸 繫之柱下以守門 狗見人雖突起 限鎖長而止 常不及人數步 而其勢則甚怖凜也 回女十餘人出視 皆壯健如男子 頰紅顴闊 眉靑眼赤 其中一少婦 抱數歲嬰兒而立 頗有艶姿 皆白衣裳 總總綰髮 爲十餘辮髽垂背後 上加白帽 如優人突帽 衣如我國帖裏而袖窄
出崇文門 南行二十里 有囿曰南海子 方一百六十里 自元時爲天子蒐獵之所 皇明時繚以周垣 設海戶以守 視皇城外內 絶罕鳥雀 葢無林藪故也 未及海子數里 一望蒼蔚 而烏鳶鷺鶖 已蔽天矣 趙譯達東追至爲言 時方海戶癘疫大熾 不可投足 且日力短 此距大紅橋二十里 自大紅橋至按鷹臺 十餘里 其內有三大澤 積水空明 有七十二橋 而行殿樓臺 不過沿道所見 所養奇禽異獸 非走馬可竟 今自此疾還 猶難及門限也 挽之甚力 遂悵然回轅 歷天寧寺白雲觀 疾驅入正陽門 已踰黃昏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