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정
정(征)
‘부세(賦稅)’를 말한다.
정(鼎)
솥(鼎)이 발이 셋이므로 삼공(三公)에 비유한다.
정(定)
정(靜)과 통하므로 선정(禪定)에 빌어 쓰이다. 삼매(三昧)의 역어(譯語)인데, 온갖 생각을 끊고 정신이 통일된 상태를 말한다. 불교에서 선(禪)을 수행하여 법(法)을 관찰하고 적정삼매(寂靜三昧), 곧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며 또한 청정(淸淨)한 마음을 가리킨다.
정(井)
남방 주작(南方朱雀) 7성의 하나. 『협기변방서의례오(協紀辨方書義例五)』
정(鄭)
춘추시대(春秋時代) 정(鄭) 나라에 음탕한 음악이 유행한 데서 즉 음탕한 음악을 이른 말이다.
정(鯖)
한(漢) 나라 때 오후(五侯)가 즐겼다는 요리로서, 생선과 육류(肉類) 등을 한데 섞어 끓인 것인데, 맛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정가식객(鄭家食客)
인색하던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에게 풍성한 음식 대접을 받던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을 두고 당시 사람들이 일컫던 말이다.
정각(凈角)
전통극에서 성격이 강렬하거나 거친 남자배역.
정간(井幹)
한 무제(漢 武帝)가 장안(長安)에 지은 누각. 정자(井字) 모양으로 나무를 쌓아 올려지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정감문(鄭監門)
북송(北宋) 시대 감안상문(監安上門)으로 있었던 정협(鄭俠)을 가리킨다. 정협은 평소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이 백성들에게 큰 병폐가 됨을 극언했었는데, 뒤에 오랫동안 가뭄이 듦으로써 유민(流民)들이 살 곳을 잃어 도로에 가득하게 되자, 이때에 백성의 참상(慘狀)을 자세히 그려서 유민도(流民圖)를 신종(神宗)께 올리니, 신종이 이 그림을 보고는 당장 구언(求言)의 조서를 내림과 동시에 신법을 혁파함으로써 며칠 뒤에 바로 큰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송사(宋史)』 卷三百二十一
정강(靖康)
송 나라 흠종(欽宗)의 연호인데, 정강 2년에 금군(金軍)이 남하하여 송 나라의 수도인 변경(汴京)이 함락되고 상황(上皇)인 휘종(徽宗)과 흠종이 모두 사로잡힌 일이 있었다.
정강지변(靖康之變)
북송(北宋) 정강 2년에 금군(金軍)에 의해 송도(宋都)의 변경(汴京)이 함락되었고 휘종(徽宗)ㆍ흠종(欽宗)이 잡혀간 사변을 말한다.
정강화(靖康禍)
북송(北宋) 정강 2년에 금(金) 나라 군대가 남하하여 송 나라의 수도인 변경(汴京)을 함락시키고 휘종(徽宗)과 철종(哲宗) 두 황제와 황족들을 포로로 잡아간 사건으로, 이로써 북송이 망하였다.
정거(定居)
집에 가서 좌정함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채미(采薇)」에 “어찌 감히 가만히 있을 수 있나 한 달에 세 번은 이겨야지[豈敢定居 一月三捷].”하였다.
정거궁(淨居宮)
승가람마(僧伽覽摩)의 준말이다. 승원(僧園) 또는 정사(精舍)로 번역되는데, 사원(寺院)의 이칭(異稱)이다.
정건(鄭虔)
당대(唐代)의 산수(山水) 명화가. 미관 말직의 신분으로 두보(杜甫)와 우정을 나눈 사이로서, 당 현종(唐玄宗)으로부터 시(詩)ㆍ서(書)ㆍ화(畫) 삼절(三絶)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정건삼절(鄭虔三絶)
시(詩), 서(書), 화(畫)에 모두 뛰어난 자질을 구비했다는 말이다. 당(唐) 나라 정건(鄭虔)이 시를 써서 그림과 함께 현종(玄宗)에게 바치니, 현종이 그 끝에다 ‘정건삼절(鄭虔三絶)’이라고 대서특필해 주었던 고사가 전한다. 『신당서(新唐書)』 卷202 「정건전(鄭虔傳)」
정경(正卿)
아경(亞卿)과 상대되는 말로 육부(六部), 또는 육조(六曹)의 정식 장관이나 이와 동등한 관직을 가리킨다.
정경(井陘)
중국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산 이름으로 태항산(太行山)의 지맥(支脈)인데, 사면은 높고 중앙은 낮아 마치 우물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곧 험난한 산길을 말한다.
정계(停啓)
‘사뢰는 것을 멈춘다’는 뜻이다. 특히 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ㆍ홍문관(弘文館) 등이 전부터 논계(論啓)하여 오던 일을 정지하는 것. 전에 이미 아뢴 것을 ‘전계(前啓)’라 하고 새로 아뢴 것을 ‘신계(新啓)’라 하며, ‘전계(前啓)’를 계속하여 다시 아뢰는 것을 ‘연계(連啓)’라 하고 전계를 전부이건 일부이건 멈추는 것을 ‘정계(停啓)’라 한다.
정계(㫌棨)
정기(旌旗)와 계극을 말한다. 두보(杜甫)가 적명부(狄明府)에 부친 시 중에, “汝曹又宜裂土食 身使門戶多旌棨”라고 보이는데, 그 주에는, “杜田引唐制節度使就第賜旌節 三品以上門立戟”이라고 하였다.
정계(丁鷄)
진읍(鎭邑)에서 일상의 영위(營爲)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적(籍)에 실려 있는 장정의 숫자를 헤아려 물품을 징수하는 세목(稅目)의 일종. 닭을 징수하는 것을 정계(丁鷄), 물고기를 징수하는 것을 정어(丁魚), 술을 징수하는 것을 정주(丁酒)라 하였다.
정계(淨界)
① 청정한 세계.
② ‘초야의 은거생활’을 말한다.
정계금지(淨界金地)
불사(佛寺)가 자리한 정결한 지역에는 대지가 온통 황금으로 되어 있다는 설화로, 『송고승전(宋高僧傳)』 「감통(感通)」 당오대산죽림사법조전(唐五台山竹林寺法照傳)에 “現其五台諸寺 盡是金地”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정고몽(丁固夢)
정고(丁固)의 꿈에 소나무가 배(腹) 위에 났다. 해몽(解夢)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송(松)은 십팔공(十八公)이니, 십팔년 후에 공(公)이 될 것이다.” 하였다.
정고옥(鄭古玉)
고옥(古玉)은 중종~선조 때의 학자인 정작(鄭碏)의 호이다. 그는 술을 즐겨 주선(酒仙)이라 불려졌고, 시와 글씨에도 능했다.
정곡(鄭谷)
한(漢) 나라 정자진(鄭子眞)이 은둔해 살았던 곡구(谷口)를 말한다. 정자진은 수도묵수(修道墨守)하면서 권세가인 대장군 왕봉(王鳳)의 예빙(禮聘)에도 일체 응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곡구자진(谷口子眞)으로 일컬어졌다. 『한서(漢書)』 卷72ㆍ『고사전(高士傳)』 中
정곡공신(正哭功臣)
중종 때 이곤(李坤)이 자신에게 공이 있음을 울며 호소하여 공신에 참여되었다 하여 그 사람을 가리켜 한 말이다.
정공(鄭公)
① 당 태종의 신하 위징(魏徵)인데, 그의 봉호(封號)가 정국공(鄭國公)이다. 그는 직간(直諫)으로 유명하였다.
② 선정(善政)을 베푸는 지방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북제(北齊)의 정술조(鄭述祖)가 그 아비의 뒤를 이어 지방에서 훌륭한 정사를 펼치자, 사람들이 “그 대정공에 그 소정공이로다. 세월은 오십 년 흘렀어도 풍교는 어찌나 똑같은지[大鄭公 小鄭公 相去五十載 風敎猶尙同].”라고 노래한 고사에서 유래하여, 정공이 군수(郡守)의 별칭으로 되었다. 『북제서(北齊書)』 卷29 「정조술열전(鄭述祖列傳)」
정공(正供)
‘정식으로 조정에 바치는 공물’이라는 말로, 부세(賦稅)와 방물(方物)을 말한다. / 인용: 嶺南歎(윤현)
정공경개(程公傾盖)
『공자가어(孔子家語)』 「치사(致思)」에 “공자가 정자(程子)와 길에서 만나 일산을 기울이고 말씀하였다[孔子遇程子於途 傾蓋而語].” 하였다.
정공논점십(鄭公論漸十)
정공은 당(唐) 나라 위징(魏徵)이 정국공(鄭國公)에 봉하여졌으므로, 그를 지칭한 것이다. 그는 열 가지 조짐에 대해 깊이 생각할 것을 열거하여 당 태종(唐太宗)에게 상소하였다. 십점지소(十漸之疏). 『당서(唐書)』 卷七十七
정공수채범저망(鄭公遂採范雎亡)
위(魏)의 범저(范雎)가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의 중상으로 위 나라 공자(公子) 위제(魏齊)에게 매를 맞고 거짓 죽어 나와, 뒤에 정안평(鄭安平)의 도움으로 변성명을 하고 진(秦) 나라로 망명할 수가 있었다. 『사기(史記)』 卷79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
정공향(鄭公鄕)
① 한나라 말년의 유명한 학자인 정현(鄭玄)이 있었는데, 그 때에 황건적(黃巾賊)의 난리가 나서 온 세상이 들끓었는데, 그 황건적들이 정현이 사는 마을 앞에 와서 이 마을은 정공(鄭公)이 사는 마을이니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다 한다.
② 후한 때 공융(孔融)이 경학자(經學者)인 정현(鄭玄)이 사는 마을을 특별히 ‘정공향’이라 명명한 데서 온 말인데, 정현의 집에는 계집종들도 『시경(詩經)』을 잘 알아서 보통 대화할 때에 시경의 구절을 척척 인용하였다 한다.
정과정(鄭苽亭)
고려 의종(毅宗) 때 정서(鄭敍)가 죄 없이 참소로 동래(東萊)에 귀양가서 임금을 그리워하여 거문고를 타고 슬피 노래한 곡조.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
정과정곡(鄭瓜亭曲)
고려 의종 때에 정서(鄭叙)가 동래(東萊)로 귀양가 있으면서 임금을 생각하여 비파를 탔는데, 그 곡조를 정과정곡(鄭瓜亭曲)이라 한다. 과정(瓜亭)은 정서의 호(號)다.
정관(貞觀)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이다.
정관정요(貞觀政要)
당 나라 오긍(吳兢)이 저술한 것인데, 당시의 법제 정령(政令)과 사적을 기록하였다.
정관지치(貞觀之治)
정관은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이다. 당 태종은 영주(英主)로서 이 정관 연간에 방현령(房玄齡)ㆍ두여회(杜如晦) 등의 현상(賢相)과 위징(魏徵) 등 직신(直臣), 이정(李靖)ㆍ이적(李勣) 등의 명장(名將)을 등용하여 천하가 태평하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정관혐(整冠嫌)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을 고쳐쓰지 않는다’는 것으로, ‘괜한 의심을 받을 일은 하지 말라’는 말이다.
정구(庭衢)
소요(逍遙)하는 뜨락과 길거리를 말한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진(晉) 나라 유령(劉伶)의 「주덕송(酒德頌)」 첫머리에 “대인 선생이 있었으니, 그는 천지개벽 이래의 시간을 하루아침으로 삼고, 천만년을 순간으로 여겼으며, 해와 달을 창문과 빗장으로 삼고, 광활한 천지를 뜨락과 길거리로 여겼다[有大人先生. 以天地爲一朝, 萬期爲須臾, 日月爲扃牖, 八荒爲庭衢].”라는 구절이 나온다.
정국(鄭國)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진 당(唐) 나라의 유명한 직신(直臣) 위징(魏徵).
정군산하중소혈(定軍山下中宵血)
제갈량(諸葛亮)이 오장원(五丈原)에서 위(魏) 나라 사마의(司馬懿)와 대치하다가 54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하여 정군산(定軍山)에 묻힌 것을 말한다. 『삼국지(三國志)』 卷35 「촉지(蜀志)」 「제갈량전(諸葛亮傳)」
정군평(鄭君平)
군평(君平)은 정두경(鄭斗卿)의 자(字)이다.
정규지묵(庭珪之墨)
이정규(李庭珪)가 만든 먹은 천하의 진품(珍品)이었다.
정금남(鄭錦南)
금남은 정충신(鄭忠信)의 봉호(封號)이다.
정기(鼎器)
단약(丹藥)을 굽는 솥을 말한다.
정기(正氣)
바른 기운. 일종의 심술(心術).
정기의(正其誼)
동중서(董仲舒)의 말에, ‘군자는 그 의(誼; 義)를 바루고 그 이(利)를 꾀하지 아니하며, 그 도(道)를 밝히고 그 공(功)을 헤아리지 아니한다.” 한 말이 있다.
정남(正南)
공자가 말하기를, “순(舜)은 몸을 공경히 하여 남면(南面)하는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恭己正南面而已矣].” 하였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정남의이(征南薏苡)
정남은 한 광무제(漢光武帝)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이 되어 남쪽의 교지(交趾)를 정벌하였던 마원(馬援)을 가리킨다. 마원이 교지를 평정하고 돌아올 때 약으로 쓰기 위해 많은 양의 율무를 수레로 실어왔는데, 그를 시기하는 자들이 진주를 실어왔다고 비방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정내(鼎鼐)
솥과 가마솥, 재상(宰相)을 말한다.
정내암(鄭萊菴)
조선조 중기의 문신 정인홍(鄭仁弘)의 자가 내암(萊菴)이다.
정년(停年)
인재를 가리지 않고 다만 관직에 있는 햇수와 공적(功績)에 따라 그 자격을 인정하여 승진 등용하는 제도를 이르는데, 이 제도는 맨 처음 위(魏) 나라 최량(崔亮)에게서 시작되었다 한다. 『위서(魏書)』 「최량전(崔亮傳)」
정년격(停年格)
후위(後魏)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 최량이 처음 건의하여 만든 제도로서, 즉 인재의 현우(賢愚)를 따지지 않고 재직(在職) 연한에 따라 자격을 인정하여 승진 등용(昇進登用)하던 제도이다.
정뇌경(鄭雷卿)
조선조 인조(仁祖) 때의 문신(文臣). 자는 진백(震伯)이며 호는 운계(雲溪).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심양(瀋陽)에 잡혀 갈 때 수행하였으며 청 나라에 귀화한 정명수(鄭命壽)ㆍ김돌(金突)이 우리나라에서 보내는 세폐(歲幣)를 가로채므로 그 죄상을 고하고 처벌할 것을 주장하다가 마침내 청 나라에서 잡혀 죽었다.
정능(靖陵)
중종(中宗)의 능. 정릉은 처음에 원당(元堂)에 있는 희릉(禧陵)에다가 합장(合葬)하였다가, 명종 17년(1562)에 광주(廣州)의 선릉(宣陵) 곁으로 천릉(遷陵)하였다.
정단매용라(正旦賣慵懶)
옛날 정월 초하룻날에 게으름을 판다는 풍속이 있었다.
정당(政堂)
‘지방 관아’를 말한다.
정대(鞓帶)
‘무늬를 수놓은 붉은 가죽띠’를 말한다.
정대경(鄭大卿)
대경(大卿)은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의 자이다.
정덕기(鄭德基)
덕기(德基)는 정유성(鄭維城)의 자(字)이다.
정덕여(鄭德餘)
덕여(德餘)는 정백창(鄭百昌)의 자(字)이다.
정도호가(丁都護歌)
악부(樂府)의 노래 이름이다. 송 고조(宋高祖)의 딸의 남편 서규(徐逵)가 노궤(魯軌)에게 피살되자 고조가 도호인 정우(丁旴)에게 장사지내 주도록 하였는데, 서규의 처가 울부짖으며 찾아와 장례에 관한 일을 물어 볼 때마다 정도호를 애달프게 불렀던 고사로서 그 소리가 애절하였으므로 후대의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한다. 『창곡집(昌谷集)』 註
정독(亭毒)
길러지다, 화육(化育)한다는 말이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51장에 “정지독지(亭之毒之)”라 하였는데, 그 주에 “정(亭)은 그 형(形)을 품(品)하는 것이요, 독(毒)은 그 질(質)을 이루는 뜻으로 화육(化育)한다는 말이다[亭謂品其形, 毒謂成其質].”라고 하였다. / 인용: 昭代風謠序(오광운)
정동(征東)
고려 신종 5년 12월에 경주(慶州)에서 적도 패좌(孛佐) 등이 난을 일으키자 김척후(金陟侯)ㆍ최광의(崔匡義)ㆍ강순(康純) 등 세 대장군을 나눠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世家 卷二十一
정동명(鄭東溟)
동명(東溟)은 조선조(朝鮮朝)인 현종(顯宗) 때의 문신(文臣)이며 학자였던 정두경(鄭斗卿)의 호이다.
정동성(征東省)
중국 원(元) 나라가 우리나라 개경(開京)에 두었던 관아. 원 세조(元世祖)가 일본(日本)을 정벌할 때에는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라 하였고, 그 뒤에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이라 하여 원 나라 관리를 내주(來駐)시키고 고려의 내정(內政)을 감시하였다.
정두(飣餖)
① 안주나 과일을 포개 놓은 것.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에 “或如臨食案 肴核紛飣餖”라 하였다.
② 두정(餖飣)이라고도 한다. ‘미사여구나 군더더기로 진부한 문장을 지은 것’을 말한다. 『옥매(玉梅)』에 “당(唐) 소부감(少府監)에서 어찬(御饌)에는 구반장루(九盤裝纍)를 쓰는데 이름을 구정식(九飣食)이라 하였다. 그래서 지금 시속의 연회에는 점과(黏果)를 자리에 진열해놓고 이를 간석정좌(看席飣坐)라 한다. 옛날에는 정좌(飣坐)라는 칭호가 있는데 앉아서 보기만 하고 먹지는 않음을 이름이다.” 하였다.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에 “或如臨食案 看核紛飣餖”라 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문사(文詞)의 퇴체(堆砌)를 일러 정두라 한다.
정락(井絡)
일반적으로 장안(長安)에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촉(蜀)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람(精藍)
정사 가람(精舍伽藍)의 준말로 불교의 사원(寺院)을 말한다.
정려(鼎呂)
구정(九鼎)과 대려(大呂), 구정은 우(禹) 임금이 구주(九州)의 쇠를 거두어 주조한 9개의 솥이고, 대려는 주(周) 나라 종묘(宗廟)에 설치한 종(鍾)인데, 모두가 천하의 보기(寶器)로 일컬어진 것이다.
정려(精廬)
정사(精舍), 즉 사원(寺院)을 말한다.
정력(定力)
선(禪)을 굳게 지키어 속된 생각에 흔들리지 않는 힘.
정령사공융(精靈似孔融)
이른 나이에 문채(文彩)를 발하는 재사(才士)라는 뜻이다. 후한(後漢)의 공융(孔融)이 10세 되던 해에 이응(李膺)을 찾아가 기발한 문답으로 좌중을 압도했던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卷100
정령욕화갈파운(精靈欲化葛陂雲)
대나무 그림을 묘사한 것이다. 후한(後漢) 비장방(費長房)이 호공(壺公)에게서 신선술을 배운 뒤 죽장(竹杖)을 타고 집으로 날아와 갈파(葛陂) 호수 속에 죽장을 던지니, 그 정령이 청룡(靑龍)으로 화하여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신선전(神仙傳)」 「호공(壺公)」
정령위(丁令威)
한(漢) 나라 때 요동(遼東) 사람으로 영허산(靈虛山)에서 신선술을 배워 학(鶴)이 되어 천년 만에 요동으로 돌아왔다 한다. 「수신후기(搜神後記)」에, “丁令威 本遼東人 學道于靈虛山 後化鶴歸遼 集城門華表柱 時有少年 擧弓欲射之 鶴乃飛 徘徊空中而言曰 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 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冡纍纍 遂高上沖天”이라고 보인다.
정록(鋌鹿)
사슴이 죽음에 임박하면 아늑한 곳을 가릴 겨를이 없어 험난한 곳을 허겁지겁 달려간다는 데서 온 말이다. 『좌전(左傳)』 文公 十七
정료(庭燎)
대궐 안에서 밤중에 참내(參內)하는 신하들을 위하여 켜는 큰 횃불이다. 『주례(周禮)』 「추관사구(秋官司寇) 사훼씨(司烜氏)」에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분촉(墳燭)과 정료를 갖춘다.” 하였고, 그 주에 “분(墳)은 크다는 뜻이며, 문 밖에 세우는 것은 대촉(大燭)이라 하고, 문 안에 세우는 것은 정료라 한다.” 하였다. / 인용: 聖主得賢臣頌(왕포)
정룡투(鄭龍鬪)
춘추시대(春秋時代) 정(鄭) 나라에 큰 홍수가 졌는데 용들이 나와 시문(時門)의 밖 유수(洧水)의 못에서 서로 싸웠다 한다. 『춘추좌전(春秋左傳)』 昭公 十九年
정림(亭林)
청 나라 초기의 고증학자인 고염무(顧炎武)의 호이다.
정림일민(亭林逸民)
정림(亭林)은 고염무(顧炎武)의 호이다. 자는 영인(寧人). 일민은 덕행과 학문이 있으면서 세상에 나오지 않고 파묻혀 사는 사람을 말하는데 고염무가 명(明)이 망하자 절의를 지켜 청 나라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한 말이다.
정립신인(鼎立神人)
제주도(濟州島)에는 맨처음 양을나(良乙那)ㆍ고을나(高乙那)ㆍ부을나(夫乙那)라는 세 사람이 있어 그 땅에 나누어 살면서 그 사는 곳을 도(道)라고 이름하였는데, 신라(新羅) 때에 고을나의 후손 고후(高厚)가 그 두 아우와 함께 바다를 건너서 신라에 조회하니, 왕이 기뻐하여 고후에게는 성주(星主)란 호칭을 주고, 그 둘째 아우는 왕자(王子)라 하고, 끝 아우는 도내(都內)라 하고, 나라 이름을 탐라(耽羅)라 했다고 한다.
정마(征馬)
먼 길을 가는 말이다.
정명(淨名)
불가의 용어이다. 또는 경(經)의 이름이다.
정명(貞明)
『주역(周易)』 「계사(繫辭)」 下의 “일월의 도는 바르고 밝은 것이다.”에서 나온 것으로, 임금의 거룩한 덕을 말한다.
정묘(丁卯)
만당(晩唐) 때의 시인 허혼(許渾)을 지칭한 말이다. 그가 단양(丹陽)의 정묘교(丁卯橋) 곁 정묘장(丁卯莊)에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이며, 그의 시집을 『정묘집(丁卯集)』이라 한다.
정묘교(丁卯橋)
다리 이름으로, 당(唐) 나라 때 시인 허혼(許渾)이 이 다리 곁에 별장을 짓고 살았었으므로, 전하여 여기서는 시인 묵객이 사는 곳을 비유한 것이다.
정무(定武)
정무본(定武本) 난정(蘭亭)을 말한다. 당(唐) 나라 석본난정(石本蘭亭)으로는 정무본을 제일 아름답게 여김.
정무신룡(定武神龍)
난정첩(蘭亭帖)의 정무본과 신룡본을 말한다.
정문(程門)
정이(程顥)가 사는 집의 문으로, 송사(宋史) 제428권 양시전(楊時傳)에, “양시가 어느 날 정이를 방문하였는데, 정이가 명상에 잠겨 앉아 있었다. 이에 양시와 유작(游酢)이 곁에 시립한 채 가지 않고 있었다. 정이가 명상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문밖에 눈이 한 자가 쌓였다.” 하였다.
정문부(鄭文孚, 1565~1624)
조선시대 남원부사, 형조참판, 부총관 등을 역임한 문신. 의병장. 1592년 행영(行營)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했는데, 회령의 반민(叛民) 국경인(鞠景仁)이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金貴榮)·황정욱(黃廷彧)·황혁(黃赫) 등을 잡아 왜장 가토(加藤淸正)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이에 격분해 최배천(崔配天)·이붕수(李鵬壽)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였다. 이에 종성부사 정현룡(鄭見龍), 경원부사 오응태(吳應台), 각 진의 수장(守將)·조사(朝士)들과 합세해 의병을 조직하였다. 먼저 국경인·국세필(鞠世弼)을 참수(斬首)하고, 이어 명천·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장덕산(長德山)에서 싸워 대승하고, 쌍포(雙浦) 전투와 이듬해 백탑교(白塔郊) 전투에서 대승해 관북지방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1594년 영흥부사에 이어 온성부사·길주목사·안변부사·공주목사를 거쳐 1599년 장례원판결사·호조참의가 되었고, 그 해 중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전주부윤이 되고, 다음 해 다시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다가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 죽었다. / 인용: 臨溟大捷歌(홍양호)
정문세효(鄭門世孝)
정성근(鄭誠謹)의 아들 주신(舟臣)과 매신(梅臣)을 말한다. 이들 삼부자는 모두 효성스러웠는데 매신은 벼슬살이에 있어서도 청렴결백하였다.
정문일침(頂門一鍼<針>)
정수리에 한 대의 침을 놓음. 정신을 차리도록 하는 따끔한 한 마디의 충고란 뜻으로, ’약점을 찔러 따끔하게 훈계한다‘는 말이다.
정문입설(程門立雪)
유초(遊酢)와 양시(楊時) 두 사람이 눈오는 밤에 스승인 정이천(程伊川)을 모시고 서 있었다는 고사. 제자가 스승을 극진히 섬기는 것을 말한다.
정미방(赬尾魴)
『시경(詩經)』 주남(周南) 「여분(汝墳)」에 “방어는 꼬리가 붉다.”는 말이 있는데 해설하는 자의 말에, “방어는 피곤하면 꼬리가 붉는 것인데 은나라 백성이 포악한 정치에 피곤함을 비유한 것이라.” 한다.
정미벽서(丁未壁書)
을사사화(乙巳士禍) 2년 뒤인 명종 2년(1547)에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은 아래에서 권력을 농락하고 있으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은 뻔한 일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요 …….”라는 내용의 글이 양재역 벽 위에 붙어 있는 것을 정언각(鄭彦慤)이 위에 고하면서 다시 사림(士林)에 화를 끼친 사건이다. 을사사화 당시 대윤(大尹)을 숙청한 소윤(小尹)의 윤원형(尹元衡)ㆍ이기(李芑)ㆍ정순붕(鄭順朋) 등이 대윤의 잔여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집권층인 자신들을 비방하는 내용의 벽서를 조작하여 그 혐의를 유림들에게 뒤집어 씌워 송인수(宋麟壽)ㆍ이약빙(李若氷)은 사사(賜死)되고, 이언적(李彦迪)ㆍ정자(鄭磁)는 극변안치(極邊安置)되는 등 많은 유림들이 화를 당했다.
정반자(鄭半刺)
반자는 통판(通判), 즉 판관(判官)의 별칭이다.
정배대영(停杯對影)
이백(李白)의 「월하독작(月下獨酌)」 시에 “꽃나무 아래 한 병 술 들고 아무도 없이 혼자 잔질한다오. 잔을 들어 명월을 맞이하니 그림자 대하여 삼인이 되었네[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하였다.
정백(鄭白)
① 전국시대(戰國時代) 정국(鄭國)이 쌓은 정국거(鄭國渠)와 한 무제(漢武帝) 때 백공(白公)이 쌓은 백거(白渠), 즉 수로 관개 사업을 말한다.
② 춘추시대(春秋時代) 정 장공(鄭莊公)을 가리키는데, 노 희공(魯僖公) 5년 8월, 위(衛) 나라의 수지(首止)에서 제후(諸侯)들이 회동했을 적에 유독 정백만이 맹약(盟約)에 불참하고 도피하여 돌아갔으며, 노 선공(魯宣公) 11년에 있었던 여(厲) 땅의 전쟁에서도 유독 정백만이 불참해 도피하여 돌아갔던 데서 온 말이다.
정백(亭伯)
후한(後漢) 최인(崔駰)의 자(字)로, 당시 실권자였던 대장군(大將軍) 두헌(竇憲)에게 밉게 보여 요동(遼東) 장잠현(長岑縣)으로 쫓겨났다. 『후한서(後漢書)』 「최인열전(崔駰列傳)」
정백(庭柏)
어느 승려가 조주(趙州)에게 묻기를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하자, 조주가 답하기를 “저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庭前柏樹子].” 했다는 데서 유래하여, 조주백수자(趙州柏樹子)를 말한다.
정백맥(定百脈)
죄인에게 형벌을 행할 목적으로 만든 큰 칼[大枷]에 붙인 이름 중 하나다. 당(唐)나라 만년(萬年) 사람인 내준신(來俊臣)은 어사중승(御史中丞)을 지내고 성품이 잔인하여 죄수들의 혹살(酷殺)을 일삼았다. 그와 색원례(索元禮)는 죄수에게 사용할 큰칼[大枷]를 만들어 열 가지의 이름을 붙였으니 ① 정백맥(定百脈) ② 천부득(喘不得) ③ 돌지후(突地吼) ④ 착즉신(著即臣) ⑤ 실혼담(失魂膽) ⑥ 실동반(實同反) ⑦ 반시실(反是實) ⑧ 사저수(死豬愁) ⑨ 구즉사(求即死) ⑩ 구파가(求破家)가 그것이다. 뒤에 모반(謀反)으로 몰려 형벌을 받아 죽었다. 『구당서(舊唐書)』 卷186 「혹리열전(酷吏列傳)」 / 인용: 詰楊吏(허격)
정백심산지(貞白尋山誌)
도홍경(陶弘景)은 양(梁) 나라 말릉인(秣陵人)인데, 자는 통명(通明)이다. 어려서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을 얻어 보고 문득 양생(養生)의 뜻이 있었음. 책 1만여 권을 읽고 금기(琴棋)를 잘 하였으며, 초예(草隸)에도 익숙하였다. 천성이 저술을 좋아하였는데, 음양ㆍ오행(五行)ㆍ산천ㆍ지리ㆍ방도(方圖)ㆍ산물(産物)ㆍ의술ㆍ본초(本草)에 더욱 밝았으며, 고금도검록(古今刀劍錄)을 지었음. 시(諡)는 정백 선생(貞白先生)이다. 또 청 나라 정유요(丁惟曜)도 자가 정백(貞白)인데 심양산수지(瀋陽山水志)를 지었음.
정법사(政法師)
송운 유정(松雲惟政)으로, 사명당을 가리킨다.
정변기(正奇)
정(正)과 기(奇)는 병법의 술어로, 적진과 대치하여 교전하는 등의 상법(常法)을 정이라 하고, 매복, 엄습 등의 변법(變法)을 기라 한다. 『손자병법(孫子兵法)』 勢
정병소장송(井甁笑張竦)
정병은 우물가에 매달린 두레박이란 뜻으로 즉 법도 있는 선비를 상징한 말이다. 양웅(揚雄)이 주잠(酒箴)을 지어 주객(酒客)이 법도 있는 선비를 힐난하는 내용으로 물건에 비유하여 말하기를 “자네는 마치 두레박(甁)과 같다. 우물(井) 꼭대기에 걸려 있어 항상 위태롭고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들어오지 않으며 외로이 새끼줄에만 매달려 있으니, 술부대(鴟夷)만 못하다. 술부대는 하루종일 술이 담겨 있고 항상 공가(公家)의 쓰임을 받으니 이렇게 따지면 술이 뭐가 나쁜가.”고 한 데서 온 말인데, 한(漢) 나라 때 장송(張竦)과 진준(陳遵) 두 사람은 매우 친한 친구 사이였으나 장송은 아주 근신하며 법도가 있는 선비였고, 진준은 이와 반대로 아주 술을 좋아하여 매일같이 빈객들을 모아 놓고 주연을 베풀며 조금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분방한 성격이었으므로, 진준이 양웅의 주잠을 보고 스스로 우물의 두레박과 술부대를 들어 친구인 장송과 자신에게 비유한 고사이다. 『한서(漢書)』 卷九十二 『진준전(陳遵傳)』
정복시(貞復時)
봄이 가까웠다는 뜻이다. 정은 내괘(內卦)를 가리키는데, 「지뢰복(地雷復)」의 내괘의 초효(初爻)가 양(陽)이므로 양이 처음 생김을 말한다. 『주역(周易)』 『지뢰복(地雷復)』
정봉(征蓬)
바람에 날리는 쑥대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님을 말한다.
정봉(丁奉)
삼국 시대 오 나라 안풍(安豐) 사람으로, 손량(孫亮)을 섬겼는데, 위 나라와 싸우면서 단병(短兵)으로 접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삼국지(三國志)』 卷五十五
정부(正夫)
이형상(李亨祥)의 자(字), 호는 다계산인(茶溪散人)이다.
정빈(汀蘋)
물가[汀洲]의 빈화(蘋花, 부평초)가 시인(詩人)의 읊음에 자주 나온다.
정사(政事)
관리의 출척(黜陟)ㆍ천전(遷轉) 등에 관한 사령(辭令), 요즈음의 인사행정에 해당하는 말이다.
정사농(鄭司農)
후한(後漢) 때의 경학자(經學者)로 모두 대사농(大司農)을 지냈던 정중(鄭衆) 또는 정현(鄭玄)을 지칭하는 말이다.
정산서원(鼎山書院)
이황(李滉)과 조목(趙穆)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정상간(井上看)
자여(子輿)란 사람이 병이 들었을 때 비틀거리며 우물가에 가서 자기 몸을 비쳐 보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정상색조잔(井上索螬殘)
쓸데없는 청렴을 이른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 나라 진중자(陳仲子)가 오릉(於陵)에 살면서 자기 형이 준 것도 의리가 아닌 녹(祿)이라 하여 먹지 않고 3일이나 굶다가, 귀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엉금엉금 기어 우물가로 가서 굼벵이가 먹다 남은 오얏 하나를 먹고 나서야 귀에 소리가 들리고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정색(精色)
밝은 색, 귤의 외색(外色). 내백(內白)은 껍질 속이 희다.
정서군막(征西軍幕)
묘청(妙淸)의 반란을 토평(討平)하기 위한 군막을 말한다.
정서다좌리(征西多佐吏)
정서장군이었던 유량(庾亮)을 가리키는데, 유량의 막하(幕下)에는 특히 은호(殷浩) 등 재능 있는 좌리(佐吏)가 많았었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진서(晉書)』 卷七十三
정서이견(情恕理遣)
‘잘못이 있으면 온정으로 참고 이치에 비추어 용서한다’는 뜻이다.
정선(鄭歚, 1676~1759)
조선의 화가,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이다.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어 관직에 나갔다. 여행을 즐겨 금강산 등 전국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림.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主調)로 해서 암벽(岩壁)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지만 후계자가 없어 계승은 끊겼다. 문재(文才)가 없었는지 서명과 한 두 개의 낙관이 화폭 구석에 있을 뿐, 화제(畫題)는 없다. / 인용: 觀鄭元伯霧中畫毗盧峯(이병연)
정설(井渫)
‘우물이 이미 준설(浚渫)되었다’는 말로, ‘스스로 몸가짐을 깨끗이 함’을 비유한 것이다. 설(渫)은 더럽고 흐린 것을 쳐버려 깨끗이 함이다. 『주역(周易)』 「정괘(井卦)」에 “깨끗한 우물 물 먹지 않으니 마음 슬프다[井渫不食 爲我心惻].” 하였다.
정설불식(井泄不食)
『주역(周易)』 「정괘(井卦)」 구삼(九三)에 “우물을 깨끗이 쳤는데도 먹지를 않으니 내 마음이 슬프다. 임금이 밝아서 길어다 먹기만 하면 모두 복을 받으리라[井渫不食 爲我心惻 可用汲 王明 並受其福].”라는 말이 있다.
정섭(鄭燮)
청 나라 사람. 호는 판교(板橋). 대를 잘 그리고 서법에 능하며 시를 잘하여 삼절(三絶)이란 칭호를 받았다.
정성(政聲)
정성(正聲)과 같다.
정성(政成)
‘지방관원의 임기가 차는 것’을 말한다.
정소투북(程蘇投北)
송 철종(宋哲宗) 때에 장돈(章惇)ㆍ채경(蔡京) 등의 모함을 받아, 정이(程顥)는 부주(涪州)로 귀양가고 소식(蘇軾)은 경주(瓊州)로 폄척되었던 사실을 말한다. 『송원학안(宋元學案)』 卷十五, 卷九十九
정속구가귀계일(正屬謳歌歸啓日)
중국 황제가 새로 즉위하게 된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만장(萬章)」 上의 “우(禹) 임금이 신하 익(益)을 자신의 후계자로 하늘에 천거하고 7년 뒤에 죽자, 익이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 우 임금의 아들인 계(啓)를 피하여 기산(箕山) 북쪽으로 가 있었는데, …… 찬양하며 노래 부르는 자들이 익에 대한 노래는 부르지 않고 계만을 찬양하여 노래 부르면서 ‘우리 임금님의 아들이시다.’고 하였다[謳歌者不謳歌益 而謳歌啓曰吾君之子]”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정송조(貞松調)
금곡(琴曲)의 이름이다. 명초(明初)의 학자 오희(烏熙)가 거문고에도 정통하여 일찍이 절부(節婦)의 일을 보고 매우 탄모(歎慕)하여 정송조(貞松調)를 지었다 한다.
정수(靜修)
원(元) 나라 때의 고사(高士)인 유인(劉因)의 호이다. 유인은 뛰어난 재기(才器)로서 일찍이 이학(理學)에 전념하였고 시(詩)에도 뛰어났는데, 끝내 자식이 없이 죽었다. 『원사(元史)』 卷一百七十一
정수홀위혈(井水忽爲血)
‘우물물이 갑자기 피로 변했다’는 말로, 신라 말기에 이런 재변이 있었다.
정승(定僧)
‘선정(禪定)에 들어간 승려’를 말한다.
정승(政丞)
의정(議政)의 대신(大臣),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 영의정(領議政)을 삼정승(三政丞)이라고 한다.
정승시(政丞試)
조선시대 성균관에서 유생들에게 차례로 보이는 윤차 제술이다.
정시(正始)
① 『시경(詩經)』의 주남(周南)ㆍ소남(召南) 등의 아악(雅樂)을 말한다. 『시경(詩經)』 대서(大序)에 “주남ㆍ소남은 시초를 바르게 하는 도리이며, 왕화의 기초이다[正始之道 王化之基].”하였다.
② 인륜의 시초인 부부의 관계를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대서(大序) 소(疏)에 “주남(周南)ㆍ소남(召南)은 시초를 바르게 하는 대도(大道)이고 왕업(王業)을 이룩하는 기본이다.”고 하였다.
정시시체(正始詩體)
정시(正始)는 위 제왕(魏齊王)의 연호이다. 그 당시 사대부들이 청담(淸談)을 숭상하였는데, 그 후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이라 불리는 혜강(嵇康)ㆍ완적(阮籍) 등이 그 풍조를 더욱 발전시켜 형성한 표일(飄逸) 청원(淸遠)한 시체이다.
정시음(正始音)
정시풍(正始風)과 같은 말로서 중국 삼국시대 위(魏) 나라 정시(正始) 연간에 성행했던 청담풍(淸談風)의 문체. 혜강(嵇康)과 완적(阮籍) 등의 시체(詩體)를 말한다.
정시지음(正始之音)
정시(正始)는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제왕 방(齊王芳)의 연호로, 그 이후 위진(魏晉) 시대를 풍미했던 청담(淸談) 일색의 시풍(詩風)을 말한다.
정신(挺身)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몸을 빼내다’라는 말로, 곧 ‘어려운 사정에 처했을 때 앞장서서 그 곤란에 대처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정신(呈身)
식면(識面)은 얼굴을 서로 아는 사이를 말하고, 정신은 권력 있는 사람에게 자신을 천거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말하는데, 송(宋) 나라 때 손변(孫抃)이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어 평소 얼굴도 모르는 당개(唐介) 등을 천거하여 대관(臺官)으로 삼자, 혹자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대뜸 천거하는 것이 무슨 까닭이냐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옛 사람은 정신어사(呈身御史)를 부끄럽게 여겼는데, 지금 어찌 식면대관(識面臺官)을 구해서 되겠는가.”고 하였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정신만 집중하면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이루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정실(庭實)
뜨락을 채우는 예물. 제후가 천자를 알현할 때 예물이나 공물을 가지고 가 대궐의 중정(中庭)에 진열한다는 뜻이다. 『좌전(左傳)』 선공(宣公) 14년 조(條)에 “庭實旅百”이라 하였다.
정실(鼎實)
식료를 솥에 넣어 음식을 만든다는 뜻으로 나라에 큰일을 하는 인재에 비유한다. 은 고종(殷高宗)이 신하 부열(傅說)에게 “내가 만약 술을 만들면 네가 누룩이 되고, 만약 국을 만들면 염매(鹽梅)가 되라.”고 했는데, 여기서 인용되었다. 『서경(書經)』 「열명(說命)」 中
정악(鼎嶽)
삼각산(三角山)을 가리킨다. 정(鼎)에 발이 세 개 달려 있는 것처럼 삼각산도 세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렇게 칭하는 것이다. / 인용: 詰楊吏(허격)
정안(征鞍)
‘나그네의 안장’을 말한다.
정약건(鄭若鍵)
정약용(丁若鏞)의 집안 아우가 되는 사람이다.
정양(定襄)
정양군(定襄郡)은 한 고조(漢高祖) 6년에 오늘날의 내몽고(內蒙古) 음산(陰山) 이남에 설치한 행정구역이다.
정양(正陽)
당 나라 종리권(鍾離權)의 호이다. 공동산(崆峒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전하는데 그가 16조의 선술(仙術)에 관한 비결을 지었다 한다.
정양(旌陽)
진(晉) 나라 허손(許遜)으로서 온 가족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어느 날 길가에서 한 소년을 보고는 이무기의 정(精)이라고 하며 곧 황우(黃牛)로 변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얼마 뒤에는 자신이 흑우(黑牛)로 변해 그 황우를 쫓으면서 문인에게 칼로 베어 죽이도록 하였다 한다. 소식(蘇軾)의 신녀묘(神女廟)라는 시에 “정양이 이무기를 베어 죽였다[旌陽斬長蛇].”라 하였다.
정양사(正陽寺)
금강산에 있는 절 이름이다. 표훈사(表訓寺) 북쪽 산의 정맥(正脈) 고지대에 위치하여 시계(視界)가 확 트여서 금강산의 제봉(諸峯)을 모두 볼 수 있다고 한다.
정어중(鄭漁仲)
어중(漁仲)은 송(宋) 나라 학자인 정초(鄭樵)의 자(字)이다. 협제산(夾際山)에 살았으므로 협제 선생(夾際先生)이라 칭하며, 고증학에 밝아 통지(通志) 2백 권을 지었음. 『송사(宋史)』 「정초전(鄭樵傳)」
정언눌(鄭彦訥)
조선조 선조 때의 학자이다.
정업(淨業)
정업호(淨業湖)를 말한다. 오난설의 기유도(記遊圖) 제15의 정업연인(淨業緣因)에 보면 “余與法時帆定交 自積水潭觀荷始 淨業湖花事尤盛 每着綠簑 冒雨而出”이라 하였다.
정역(淨域)
불교 용어로 번뇌의 속박을 떠나서 아주 깨끗한 세상을 가리킨다. 정토(淨土)라고도 한다.
정역(鄭驛)
한(漢) 나라 정당시(鄭當時)가 빈객(賓客)을 좋아하여 장안(長安) 근교(近郊)에 역(驛)을 설치하여 빈객을 청하였다 한다.
정오무심당복사(鄭五無心唐僕射)
정오(鄭五)는 당 소종(唐昭宗) 때 시인이며 재상이었던 정계(鄭綮)를 말한다. 그는 본디 해학적인 시를 많이 써서 매양 조정의 실정(失政)을 풍자했는데, 한번은 소종이 그의 시를 듣고는 그가 불만이 있어서 그러는가 여기어 그에게 예부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제수하자, 정계는 스스로 자신을 재상의 자격이 되지 못한다고 여겨 탄식하기를 “내가 재상이 된다면 천하 사람이 웃을 것이다.” 하고, 또 “내가 재상이 되었으니 국사를 알 만하다.” 하고 굳이 사양했으나 윤허되지 않자 마지못해 정무를 보다가 겨우 3개월 만에 끝내 사직하고 말았다. 『당서(唐書)』 卷二百八十三
정와(井蛙)
마원(馬援)이 공손술을 ‘우물 안 개구리’라고 평가했는데, 견문이 좁음에도 스스로를 높였기에 그런 평가를 한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제24권 마원전(馬援傳)에, “하직하고 돌아감을 인해서 효(囂)에게 말하기를, ‘자양(子陽)은 우물 안 개구리일 뿐으로, 스스로 망녕되이 자존(自尊)하였다[述井底蛙耳. 而妄自尊大].’ 하였는데, 그 주(注)에, 말하자면 뜻과 식견이 편협해서 우물 속의 개구리와 같다는 것이다.” 하였다.
정완(訂頑)
장횡거(張橫渠)가 지은 「서명(西銘)」의 본명.
정완유(鄭緩儒)
『장자(莊子)』 「열어구(列御寇)」에 “정(鄭) 나라 사람 완(緩)이 구씨(裘氏) 땅에서 열심히 학문을 닦더니 3년 뒤에 유자(儒者)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요(政要)
『정관정요(貞觀政要)』의 약칭으로 당 나라 오긍(吳兢)이 저술한 것인데, 당시의 법제 정령(政令)과 사적을 기록하였다.
정우곡(鄭愚谷)
우곡(愚谷)은 정이오(鄭以吾)의 호이다.
정운(鄭運)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큰 공을 세우다가 부산포(釜山浦) 해전(海戰)에서 선봉으로 싸우던 중 전사하였다.
정운(停雲)
① ‘친구를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의 정운시(停雲詩)에 “정운은 뭉게뭉게 떠오르고 시우는 자욱이 내리도다[停雲藹藹 時雨濛濛].”하였고 그 서(序)’에 “정운(停雲)은 친우를 생각해서 지은 시이다.” 하였고, 두보(杜甫)의 시(詩) 「몽이백(夢李白)」에 “落月滿屋梁 猶疑照顔色”이라 하였다.
② 친한 벗을 생각한 시(詩)를 말한다. 도연명(陶淵明)의 시 가운데 친우(親友)를 생각하며 지은 정운시(停雲詩) 4수가 있는데 그 시에 “머물러 있는 뭉게구름 때맞춘 보슬비 먼 곳 친구 생각하며 서성댄다[藹藹停雲 濠濠時雨 良明悠邈 搔首延佇].”하였고, 자서(自序)에 “정운은 친구를 생각하는 시이다.”라고 한 것에서 나온 것으로, 정겨운 벗을 그리워할 때 인용된다.
정운시(停雲詩)
도연명(陶淵明)의 정운시(停雲詩)에 “靄靄停雲 濛濛時雨”라는 구절이 있는데, 자서(自序)에서 “이는 친우(親友)를 생각하며 지은 것이다.” 하였다.
정원(貞元)
당(唐) 덕종(德宗) 연호이다.
정원군(定遠君)
인조(仁祖)의 아버지. 선조(宣祖) 13년에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7년 뒤 정원군에 봉해졌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했던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올랐고, 광해군 11년에 죽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대원군(大院君)에 추존되었다가, 인조 5년에 조정 신하들의 많은 논란 끝에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되었다. 『인조실록(仁祖實錄)』ㆍ『선원계보(璿源系譜)』
정원류불식(貞元流不息)
천도(天道)가 유행함을 말한다. 원형이정(元亨利貞)에서 정은 겨울에 해당 하고 원은 봄에 해당한다. 『주역(周易)』 「건괘(乾卦)」
정원수조(正元受祖)
정원(正元)은 정월 초하루를 말하고, 수조(受祖)는 임금 자리를 종묘(宗廟)에서 선위받는다는 뜻으로, 정월 초하룻날에 요(堯) 임금이 그만둔 천자(天子)의 자리를 순(舜) 임금이 종묘에서 선위받았던 일을 이른 말이다. 『서경(書經)』 「요전(舜典)」
정원투필(定遠投筆)
정원은 한 나라 반초(班超)의 봉호(封號)이다. 반초가 집이 가난하여 관청에서 글씨를 쓰면서 먹고살았는데, 어느 날 글씨를 쓰다가 붓을 내던지면서 “대장부가 별다른 지략이 없더라도 부개자(傅介子)나 장건(張騫)이 이역 땅에서 공을 세운 것을 본받아 봉후(封侯)가 되어야지, 어찌 이 따위 짓을 일삼으랴.”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卷47 「반초전(班超傳)」
정원후(定遠侯)
바로 후한 때의 명장 반초(班超)의 봉호인데, 반초는 일찍이 서역(西域)에 정벌을 나가 장군장사(將軍長史)ㆍ서역도호(西域都護) 등의 관직에 30여 년 동안 재직하면서 서역의 50여 나라들을 위무 안집(慰撫安集)하여 모두 한 나라에 귀순하도록 하였다. 그는 평화를 항상 주장하였다. 『후한서(後漢書)』 卷四十七
정위(廷尉)
진(秦) 나라 때부터 형벌을 맡은 벼슬로, 구경(九卿)의 하나였다. 훗날에 대리(大理)로 고쳤다. / 인용: 汲鄭列傳
정위(庭闈)
부모가 거처하는 방을 이르는 말로, 전하여 부모를 가리킨다.
정위(精衛)
새 이름이다. 서조(誓鳥), 원금(寃禽), 지조(志鳥)라고도 하며, 민간에서는 제녀작(帝女雀)이라 부른다. 염제(炎帝)의 막내 딸 여와(如娃)가 동해에서 놀다가 빠져 죽어 변했다는 신화 속의 새 이름이다. 동해에 대해 원한을 품고서 복수를 하려고 늘 서산(西山)의 목석(木石)을 물어다 빠뜨려 바다를 메우려 한다고 한다. 『산해경(山海經)』
정위(鄭衛)
『시경(詩經)』 정풍(鄭風)과 위풍(衛風)을 말한다.
정위다음분(鄭衛多淫奔)
정(鄭) 나라와 위(衛) 나라는 풍기가 문란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시경(詩經)』의 정풍(鄭風)과 위풍(衛風)은 음분의 시가 많다.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정ㆍ위의 음악은 난세(亂世)의 음악이다.” 하였다.
정위전해(精衛塡海)
전하는 바로는 염제(炎帝)에게 여와(女娃)라는 딸아 하나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여와가 동해에 놀러갔다가 풍랑과 파도에 휩쓸려 큰 바다로 밀려가 익사하고 말았다. 여와는 죽은 후 그녀의 혼은 정위(精衛)라는 한 마리 새로 변했다. 그녀는 동해의 물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큰 바다를 평평하게 메우려는 뜻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녀는 매일 서산에서 돌이나 나뭇가지를 물어다가 파도가 용솟음치는 큰 바다에 던져 넣었다. 사람들은 이때문에 그녀를 ‘뜻있는 새[志鳥]’, ‘맹세한 새[誓鳥]’, ‘억울한 새[寃鳥]’ 등으로 불렀고, 그녀가 본래 염제의 딸이었기 때문에 또한 ‘제왕의 딸 새[帝女雀]’”이라고도 했다. 여와의 비참한 운명은 사람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며, 죽음으로써 복수하려는 그녀의 불요불굴의 굳센 의지는 사람들을 탄복하고 감동하게 만든다. 『산해경(山海經)』 「북해경(北海經)」
정위조(精衛鳥)
‘사람의 무모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옛날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딸이 동해(東海)에 빠져 죽은 뒤 새로 화하였는데 이 새를 정위조라 한다. 이 새가 항상 서산(西山)에 가서 돌을 물어다가 동해를 메웠다는 고사가 있다. 『산해경(山海經)』ㆍ『태평어람(太平御覽)』
정위화학(丁威化鶴)
한(漢) 나라 때 요동 사람 정령위(丁令威)가 죽은 지 천 년이 지난 뒤에 학으로 변한 것을 말한다. 정령위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된 후 천 년이 지난 뒤에 학이 되어 요동에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오늘에야 돌아왔네.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들은 아니로세. 어찌 신선 아니 배워 무덤이 총총하뇨.”라고 하였다. 『수신후기(搜神後記)』
정유격(程遊擊)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우리나라에 온 명 나라 장수이다.
정유길(鄭惟吉)
자는 길원(吉元), 호는 임당(林塘)으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74세의 나이로 죽었다.
정유상곡생표상(庭有桑穀生表祥)
덕을 닦아 요망한 물건을 없앴다는 뜻이다. 중종은 은(殷) 나라 태무(太戊)이며, 상곡(桑穀)은 요괴스런 뽕나무. 은 나라 서울인 박(亳) 땅에 이상한 뽕나무 두 그루가 뜰에 났는데, 아침에 나서 저녁이 되자 두 움큼이나 자랐다. 태무는 어진 신하 이척(伊陟)의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덕을 닦으니, 이 나무는 곧 말라죽었으며, 은 나라는 다시 정치가 잘 되어 중흥(中興)하게 되었다 한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
정읍(井邑)
정읍사(井邑詞)의 준말로 무고(舞鼓)에 맞추어 부르던 삼국 시대 속악(俗樂)의 창사(唱詞)이다.
정이(鼎彝)
솥과 같은 기물(器物)로 왕가(王家)의 종묘(宗廟)ㆍ사당(祠堂)에 상시 비치해 두는 의물(儀物)이니, 골동을 말한다. 옛날 국가에 공훈이 있는 사람들의 사적을 여기에 새겼었다.
정이(鄭丈)
정추만 지운(鄭秋巒之雲)의 자이다.
정인득해록(鄭人得駭鹿)
『열자(列子)』 「주목왕(周穆王)」에, “정나라 사람이 들에서 사슴을 잡아 죽여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파초 잎으로 덮어두고, 집에 왔다가 다시 가서 보니 사슴 덮은 곳이 어디인지를 잊어 버렸는데 그것이 꿈이라고 생각하였다[鄭人有薪於野者, 遇駭鹿, 御而擊之, 斃之. 恐人見之也, 遽而藏諸隍中, 覆之以蕉, 不勝其喜. 俄而遺其所藏之處, 遂以爲夢焉].” 한다.
정인표(鄭仁表)
당(唐) 나라 정인표(鄭仁表)가 “하늘의 상서(祥瑞)로는 오색 구름이 있고 사람의 상서로는 정인표가 있다.” 하며 자신의 문장을 과시했다 한다. 『당서(唐書)』 卷一百八十二 「정인표전(鄭仁表傳)」
정인홍(鄭仁弘, 1535~1623)
조선조 광해군 때 상신(相臣). 호는 내암(萊庵). 광해군 4년에 영의정이 되었는데, 폐비(廢妃)의 논(論)을 일으키고 포학(暴虐)한 일이 많았음. 문집으로는 『내암집(萊庵集)』이 있다.
정일(精一)
정일집중(精一執中)의 준말인데, 순수한 일념으로 중도(中道)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순 임금이 우 임금에게 나라를 전하면서 말하기를,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희미하니 순수한 일념으로 중도를 지켜야 할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였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
정일두(鄭一蠹)
일두는 조선조 학자 정여창(鄭汝昌)의 호이다. 자는 백욱(伯勗). 그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저서에는 용학주소(庸學註疏)ㆍ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 등이 있었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그의 부인이 모두 소각(燒却)했고, 지금은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 속에 그 유집(遺集)이 일부 전할 뿐이다.
정일방구(正日放鳩)
한단(邯鄲)의 백성이 정월 초하룻날 조간자(趙簡子)에게 비둘기를 선물로 바치니, 조간자는 그 비둘기를 날려보내면서 “은혜를 베푸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하였다. 『열자(列子)』 「설부(說符)」
정일변미위(虞精一辨微危)
정일집중(精一執中)의 준말인데, 순수한 일념으로 중도(中道)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순 임금이 말하기를,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희미하니 순수한 일념으로 중도를 지켜야 할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였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
정자(程子)
낙양(洛陽) 사람으로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의 형제를 일컬은 말이다.
정자(靜者)
『노자(老子)』ㆍ『장자(莊子)』의 학설에 통달하여 청정(淸靜)의 도를 깊이 터득하여 세상에 초연한 사람으로, 보통 은사(隱士)나 승려를 가리킨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심분(審分)」에 “도를 얻은 자는 반드시 고요하게 되고, 고요하게 되면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다[得道者必靜 靜者無知].”라는 말이 있다.
정자(正字)
홍문관ㆍ승문원ㆍ교서관의 정9품 벼슬이다.
정자산(鄭子産)
춘추시대(春秋時代) 정(鄭) 나라의 공손교(公孫僑)이다. 간공(簡公)ㆍ정공(定公)ㆍ헌공(獻公)ㆍ성공(聲公) 등 네 조정에 계속 재상으로 있으면서 뛰어난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당시 패권다툼을 벌이는 진(晉) 나라와 초(楚) 나라 사이에 처한 정 나라를 무사하게 보전하였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자산이 외교문서를 잘 작성했다고 공자가 말한 내용이 있다. 『맹자(孟子)』 「만장(萬章)」
정자용(鄭子容)
자용(子容)은 정홍명(鄭弘溟)의 자(字)이다.
정자원(鄭紫元)
자원(紫元)은 정두원(鄭斗源)의 자(字)이다.
정자정(鄭子精)
약포(藥圃) 정탁(鄭琢)의 자이다.
정자중(鄭子中)
정유일(鄭惟一)이다. 호는 문봉(文峯)이고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정자진(鄭子眞)
한(漢) 나라 때의 은사(隱士) 정박(鄭樸)이다. 그는 도(道)를 닦고 입다물고 앉아서, 성제(成帝) 때에 대장군 왕봉(王鳳)이 예를 갖추어 맞이했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곡구(谷口)의 산 밑에서 농사짓고 살다가 생을 마쳤다. 자호를 곡구자진(谷口子眞)이라 하였다. 『한서(漢書)』 『고사전(高士傳)』
정장(靚粧)
무릇 그림이란 것은 흰 바탕을 귀히 여긴다. 그러므로 채색이 흰 것을 얻어야 비로소 빛이 난다. 자서(字書)에 의하면, “하얗게 분칠하고 까맣게 눈썹을 그리는 것을 정(靚)이라 이른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한퇴지(韓退之)의 이른바, “분이 희고 머리구비가 푸르다.”는 것이 바로 정장(靚粧)이다.
정장(亭鄣)
‘변방의 요새(要塞)에 설치하여 사람의 출입을 검사하는 관문’을 말한다. 박지원(朴趾源)이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에 “물이 부딪쳐 성을 만들지 못하고 정장을 설치했다[水所衝穿則不能城而設亭鄣].”라고 썼다.
정저잠양칠일회(井底潛陽七日回)
일(日)은 월(月)과 같은 뜻으로, 7개월 만에 음양(陰陽)이 서로 교체됨을 이른다. 이를테면 괘(卦)로써 월(月)에 배합시킬 경우, 오월(五月; 구괘(姤卦)에 해당함)부터 양이 사라지기 시작하여 다 없어졌다가, 그 후 7개월 만인 십일월(十一月; 복괘(復卦)에 해당함)에 이르러 양이 다시 생기기 시작하여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정저지와(井底之蛙)
우물 안 개구리란 뜻으로 세상 물정에 어둡고 시야(視野)가 좁은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추수(秋水)」, 「소요유(逍遙遊)」
정전(筳篿)
‘점치는 대조각’을 말한다.
정전(鄭箋)
후한(後漢)의 정현(鄭玄)이란 사람이 많은 경전(經傳)을 주석하였는데, 그 주석을 정전이라 한다.
정전백(庭前栢)
어느 중이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묻되, “어떤 것이 조사(祖師; 達摩)가 서방에서 온 뜻입니까.” 하니, 조주는,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라.” 하였다. 이것을 참선(參禪)하는 사람들의 화두(話頭)라 한다. 이는 아무런 뜻이 없는 것이지만 이것을 오랫동안 연구하면 자연히 아무런 뜻이 없다는 것을 참으로 깨닫게 되어 돈오(頓悟)하게 된다 한다.
정절(旌節)
① 높은 무관(武官)은 깃발과 절(節)을 들고 출입한다.
② 당 나라 때 천자가 절도사(節度使)에게 지방행정의 전권을 부여하는 뜻으로 주는 두 종류의 깃발로 왕의 명을 받고 나온 사자를 말한다.
정절(靖節)
진(晉)의 고사(高士) 도잠(陶潛)의 사시(私諡). 그는 팽택령(彭澤令)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오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었으며 시주(詩酒)로 한가하게 여생을 보냈다. 『진서(晉書)』 「도잠전(陶潛傳)」
정절동고소(靖節東臯嘯)
도연명(陶淵明)의 시호이다.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한 구절 “동편 언덕에 올라 멋대로 휘바람 분다[登東皐而舒嘯].”
정절망산도(靖節望山圖)
시호가 정절인 동진(東晉) 때의 고사(高士) 도잠(陶潛)이 남산(南山)을 관망하는 것을 묘사한 그림을 말한다. 도잠이 일찍이 팽택령(彭澤令)으로 있을 적에 독우(督郵)가 그곳에 이르자, 아전이 도잠에게 의관을 갖추고 독우를 보아야 한다고 하므로, 도잠이 탄식하기를 “내가 오두미(五斗米) 때문에 그런 향리 소인(鄕里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 하고는, 당장 인끈을 풀어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종신토록 은거하였다.
정절삼경(靖節三徑)
정절은 도잠(陶潛)의 시호이다.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삼경(三徑)은 묵었지만 송국(松菊)은 여전하구나.”라고 하였는데, 삼경은 세 곳의 오솔길이다.
정절족복공속(鼎折足覆公餗)
일국의 대신이 어진 인재를 기용하여 국가 정무를 잘 수행하는 자기 직분을 다하지 못하고 소인배와 가까이 지내면 국가를 망치고 자신에게도 죄가 돌아온다는 비유. 『주역(周易)』 卷5 鼎
정절집(靖節集)
도연명(陶淵明)의 문집. 도연명의 시호가 정절이므로 ‘정절집’이라 함
정절책자(靖節責子)
정절은 동진(東晉) 때의 고사 도잠(陶潛)의 시호이다. 도잠이 불초한 다섯 아들을 나무란 시에 “두 귀밑은 이미 백발이 되었고 몸뚱이도 건강하지 못한데, 다섯 사내아이가 있기는 하나 모두가 지필을 좋아하지 않네 …… 천운이 진실로 이러하다면 오직 술이나 마셔야지[白髮被兩鬢 肌膚不復實 雖有五男兒 總不好紙筆 …… 天運苟如此 且進杯中物].” 한 데서 온 말이다. 『도연명집(陶淵明集)』 卷三 責子
정정(整整)
단정히 갖추어진 모양
정정(丁丁)
도기로 나무를 찍는 소리, 바둑을 두는 소리, 말뚝을 박는 소리, 비파타는 소리, 새 우는 소리, 빗방울 듣는 소리, 패옥의 쟁그랑거리는 소리
정정(渟渟)
물이 가득 차 있는 모양
정정(挺挺)
① 바르고 곧은 모양
② 시체가 경직된 모양
③ 똑바른 모양 / 인용: 驅詩魔文(이규보)
정정(正正)
바른 모양, 정돈된 모양, 세력이 왕성한 모양
정정(涏涏)
반질반질한 모양, 기름기가 조르르 흐르는 모양
정정(晶晶)
반짝반짝 빛나는 모양
정정(婷婷)
아름답고 예쁜 모양, 꽃이 흔들리지 않는 모양
정정(怔怔)
움직이지 않고 바라보는 모양, 하염없이
정정(井井)
일이나 행동에 절도가 있는 모양, 정결 고요한 모양
정정(停停)
초목의 성장이 중지된 모양, 아직 발동하지 않고 정지 상태인 모양, 높은 모양, 아름답고 좋은 모양
정정(定鼎)
하우씨(夏禹氏)가 구정(九鼎)을 지어 부어 구주(九州)를 상징하였는데, 상(商)을 거쳐 주(周)에 이르도록 모두 전국(傳國)하는 중기(重器)로 삼았다. 『좌전(左傳)』에, “성왕(成王)이 정정(定鼎)하다.” 하였으니, 정정이란 건도(建都)란 말과 같다.
정정(棖棖)
현악기의 소리, 회초리로 사람을 꾸짖는다고 하는 지옥에서 온 사자
정정벌목성(丁丁伐木聲)
친구들과 모여서 잔치를 벌이면서 깊은 정과 우의를 나누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나무 찍는 소리 정정하거늘, 새 울음소리 앵앵하도다[伐木丁丁 鳥鳴嚶嚶].”하였다.
정정연(丁丁然)
바둑돌 소리를 표현한 의성어.
정조하(朝霞)
아침 안개. 아침의 정기.
정조합(精粗合)
정(精)은 알기도 어렵고 행하기도 어려운 심오하고 은미한 이치이고, 조(粗)는 알기 쉽고 행하기 쉬운 일을 말한다. 합한다는 말은 성인의 도는 어려운 곳도 있고 쉬운 곳도 있지만 그 소이연의 이치만은 하나로 관통된다는 것이다. 『논어(論語)』 「자장(子張)」
정종(鼎鍾)
국가에 큰 공훈(功勳)이 있으면 종(鍾)과 정(鼎)에 새겨서 영원히 전한다.
정종명(鼎鐘銘)
솥과 종. 옛적에 훌륭한 공적이 있으면 그 사실을 솥과 종 등에 새겨 기렸다.
정주(程朱)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말한다.
정주(定州)
함남 정평(定平)의 옛 이름이다.
정주자(定州瓷)
정주(定州)는 곧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정현(定縣)을 말하는데 송대(宋代)에 이 고을 사람들이 만든 자기가 아주 유명하여 세상에서 정요(定窯)라고 일컫기까지 하였다.
정중동(靜中動)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 나타나는 심상으로서 시적 기교 중 일종의 역설이다.
정중인(定中)
‘선정(禪定)에 든다’는 의미다. 불교(佛敎)에서,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진리(眞理)를 직관(直觀)하는 것을 말한다.
정중지와(井中之蛙)
우물 안 개구리. 견문이 좁고 세상 형편을 모름. 『장자(莊子)』 「추수(秋水)」, 「소요유(逍遙遊)」에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구애하기 때문이다. 여름 벌레가 얼음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여름 한 철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일밖에 모르는 사람과 도(道)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자기가 배운 것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정중천(井中天)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면 극히 일부분만 보이듯이, 깊은 골짜기에 살고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 「소요유(逍遙遊)」
정중폭죽(庭中爆竹)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문 뒤에다 복숭아나무를 꽂아서 사귀(邠鬼)를 물리치고 뜰에는 폭죽(爆竹)을 터뜨려서 사귀를 쫓는다.
정중훤(靜中喧)
훤(喧)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이니, ‘고요한 가운데 시끄럽다’는 의미이다.
정지상(鄭知常)
고려 인종(仁宗) 때 문신으로 처음 이름은 지원(之元), 호는 남호(南湖). 그는 지제고(知制誥)로서 왕명을 받아 산재기(山齋記)를 지었음. 인종 13년에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나자 이에 관련되어 김부식(金富軾)에게 참살되었다. 저서에는 『정사간집(鄭司諫集)』이 있다.
정진(征塵)
‘사신(使臣) 행차가 달려가면서 일으키는 먼지’를 말한다.
정진리(鼎津鯉)
서신(書信)을 말한다. 고악부(古樂府)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에 “손님이 먼 데서 찾아와, 나에게 잉어 두 마리를 주었네. 아이 불러 잉어를 삶게 했더니, 뱃속에서 편지가 나왔네[客從遠方來 遺我雙鯉魚 呼童烹鯉魚 中有尺素書].” 한 데서 온 말이다.
정찬협이주위(程竄峽而舟危)
송 철종(宋哲宗) 때, 정이가 부주(涪州)로 귀양가는 도중에 강을 건너다가 중류에서 배가 거의 뒤집힐 뻔했는데, 이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부르짖으며 통곡하였으나, 정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단정히 앉아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송원학안(宋元學案)』 卷十六
정참잠경개(停驂暫傾蓋)
공자(孔子)가 길을 가다가 정자(程子)를 만나 수레를 멈추고 일산을 기울이고서 이야기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정채(丁蔡)
송(宋) 나라의 정위(丁謂)와 채양(蔡襄) 두 사람을 합칭한 말인데, 복건성(福建省) 건주(建州)에서 생산되는 용단차(龍團茶)를 전후에 걸쳐 이 두 사람이 제조하였다.
정채(淨債)
청정채(淸淨債)의 준말로, 남에게 시를 지어 주어 보답해야 할 빚을 말한다. 소식(蘇軾)의 시에 “이번 유람 기념하는 새 시 짓지 않는다면, 산속의 청정한 빚 지게 될까 두렵도다[不將新句紀玆游 恐負山中淸淨債].”라는 구절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卷19 與胡祠部 游法華山
정책국로 문생천자(政策國老門生天子)
국가의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국로(國老, 국가의 어른)와, 자기들이 만들어낸 천자라는 뜻의 정책국로문생천자(政策國老門生天子) 고사성어다.
정천산(定天山)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화살 세 개로 적장 세 사람을 쏘아 죽이니, 적군이 패하여 천산(天山)을 평정하였다.
정첨윤(鄭詹尹)
굴원(屈原)이 「복거부(卜居賦)」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자신의 처신할 여러 가지 길을 태복(점장이) 정첨윤(鄭詹尹)에게 물었다.
정총(鄭摠)
여말 선초(麗末鮮初)의 문신(文臣)으로, 호는 복재(復齋)이고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정충(精忠)
순결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를 가리킨다.
정충신(鄭忠信)
봉호(封號)는 금남(錦南).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본관은 나주(羅州), 윤(綸)의 아들로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석주(錫柱) 때부터 병영(兵營)의 서리를 지낸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지모가 뛰어나고 문무의 재주를 겸비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갑자년에 이괄(李适)의 반란을 진압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이 되었으며, 정묘호란 때는 부원수로서 적과 싸우는 등 전후에 걸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광주의 경렬사(景烈祠)에 제향,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정칙(正則)
올바른 법이라는 뜻으로 굴원(屈原)의 본명이다.
정침(頂鍼)
정문침(頂門鍼)이라고도 하는데, 침구법(鍼灸法)에서 뇌문(腦門)으로부터 내려가는 침을 말한 것. 이로써 행사의 긴요성을 비유했다.
정태복(鄭太卜)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불우하기만 한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려고 찾아갔다는 점관(占官) 정첨윤(鄭瞻尹)을 가리킨다. 『이소경(離騷經)』 卷24 「복거(卜居)」
정토(淨土)
부처나 보살(菩薩)이 산다는 청정(淸淨)한 세계를 말한다.
정통(正統)
명 나라 영종(英宗)의 연호로, 영종은 9세에 즉위하였다.
정파(正葩)
『시경(詩經)』의 시를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시경의 시야말로 바르면서도 아름답다[詩正而葩].”라는 말이 있다.
정팽제언(鼎烹齊偃)
제언(齊偃)은 한 무제(漢武帝) 때의 제(齊) 나라 주보언(主父偃)을 말한다. 주보언은 처음에 종횡술(縱橫術)을 배우다가 나중에 『주역(周易)』ㆍ춘추(春秋) 등을 배운 학자로서 무제 때에 한 번의 상서(上書)로 인하여 한 해에 네 번 승천하여 중대부(中大夫)가 되고 이어 국사를 전횡한 것이 많았다. 그러자 혹자가 전횡이 너무 심하다고 말하니, 주보언이 대답하기를 “장부가 살아서 오정식(五鼎食)을 하지 못할 바엔 차라리 오정에 삶아져 죽을 뿐이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주보언은 끝내 죄를 얻어 멸족을 당하고 말았다. 『사기(史記)』 卷一百十二 「평진후주보열전(平津侯主父列傳)」
정평(正平)
후한 말 고사(高士)로 이름난 미형(禰衡)의 자이다. 공융(孔融)이 조조(曹操)에게 천거하였으나 천성이 강직하여 아부하지 않자, 조조는 그를 형주 자사(荊州刺使) 유표에게 보내버렸고 유표는 또 강하 태수(江夏太守)황조(黃祖)에게 보냈는데, 결국 황조에게 죽고 말았다. 『후한서(後漢書)』 卷八十下 「녜형전(禰衡傳)」
정포(鄭圃)
옛날 열자(列子)가 살던 곳으로, 곧 현자(賢者)가 사는 곳을 말한다. 『열자(列子)』 「천서(天瑞)」에 “열자가 정포에 40년 동안이나 살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子列子居鄭圃, 四十年人無識者].” 하였다.
정포객(鄭圃客)
정포의 나그네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열자(列子)가 정 나라의 들밭에서 40년 동안 은거하였다 하여 그를 가리킨다. 『열자(列子)』 「천서(天瑞)」
정포은(鄭圃隱)
포은은 정몽주(鄭夢周)의 호이다. 정몽주는 명 나라와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다. 우왕(禑王) 1년에 정몽주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왜구(倭寇)의 침입을 금지시켜 줄 것을 교섭하였는데, 그때 사신다운 풍채가 있어서 일본 사람들이 매우 존경하였다고 한다.
정풍파(定風波)
신라 옥적(玉笛)이 ‘만파식곡(萬波息曲)’이었는데, 이 적을 불면 외국의 군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에 비가 오며 장마가 개고, 바람은 진정되고 물결이 잔잔해지므로(風定波平),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불렀다.
정한(程限)
‘정해진 기한’을 말한다. / 유의어: 정도(程度), 한도(限度), 정한(定限) / 인용: 海南吏(정약용)
정향가(丁香歌)
마음에 맺혀 풀리지 않는 감정을 나타내는 노래. 이상은(李商隱) 대증시(代贈詩)에, “파초 잎은 피질 못하고 정향은 맺혀 있어, 봄바람을 함께 향해 제각기 수심이로세[芭蕉不展丁香結 同向春風各自愁]”하였다.
정현(鄭玄)
동한(東漢) 시대의 대학자. 경전(經傳)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일대를 풍미했으며, 삼경(三經)을 비롯하여 의례(儀禮)ㆍ『효경(孝經)』ㆍ『논어(論語)』ㆍ상서대전(尙書大傳) 등 많은 경전의 주서(註書)를 남기고, 그 밖에도 천문(天文)ㆍ예설(禮說) 등 방대한 저술을 남겼음. 『후한서(後漢書)』 卷六十五
정현곡(鄭玄谷)
현곡(玄谷)은 정백창(鄭百昌)의 호이다.
정현침(鄭玄針)
후한(後漢) 때 경학가(經學家)인 하휴(何休)가 일찍이 좌씨고황(左氏膏肓)을 저술한 데에 대하여 정현(鄭玄)이 침고황(針膏肓)을 지은 데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卷三十五
정협(鄭俠)
북송(北宋) 시대 복청(福淸) 사람으로 자는 개부(介夫)로 문신이다. 일찍이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극력 반대하였기에 감안상문(監安上門)으로 재직할 적에는 류리분산(流離分散)하여 곤고(困苦)를 겪는 백성들의 참상을 화공(畫工)에게 그리도록 하여 신종(神宗)에게 올렸다. 신종은 이것을 보고 나서 그다음 날 바로 방전(方田), 보갑(保甲), 청묘(靑苗) 등의 법(法)을 폐지하였다. 이 그림을 「정협도(鄭俠圖)」 또는 「유민도(流民圖)」라고 한다. 『송사(宋史)』 卷321 「정협열전(鄭俠列傳)」 / 유의어: 정협유민도(鄭俠流民圖) / 인용: 伐木行(성현)
정형(井陘)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지명으로 관문이 있어 진한(秦漢) 시대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한 패공(漢沛公)의 대장군이었던 한신(韓信)은 일찍이 장이(張耳)와 함께 이곳에서 조(趙) 나라의 진여(陳餘)와 대전했었는데, 진여는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의 지구전을 반대하고 맞아 싸우다가 한신의 꾀에 빠져 패망하였다. 『한서(漢書)』 「한신전(韓信傳)」
정혜사(定慧寺)
충남 회덕현(懷德縣) 동쪽 3리에 있는 사찰의 이름이다.
정혜해당(定惠海棠)
송(宋) 나라 소동파(蘇東坡)가 황주(黃州)로 귀양가서 정혜원(定惠院)이란 절에 있을 때 절 동쪽에 해당화 한 그루가 있는데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신세에 비겨 탄식하여 시를 지었다. 『고문진보(古文眞寶)』 前集 「정혜원해당(定惠院海棠)」
정호(鼎湖)
지명인데, 옛날 황제(黃帝)가 이곳에서 솥을 주조하다가 솥이 다 이뤄지자, 용을 타고 승천(昇天)하였으므로, 전(轉)하여 ‘붕어(崩御)한 제왕’을 말한다. 『사기(史記)』 「효무본기(孝武本紀)」
정호궁검(鼎胡弓劒)
황제(黃帝)가 정호에서 신선이 되어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때에 활과 칼을 떨어뜨렸다 한다.
정호궁장(鼎湖弓藏)
‘임금의 죽음’을 말한다. 순(舜)임금은 남쪽으로 순수하다가 창오의 들에서 죽어 그곳에 장사하였고, 황제(黃帝)는 정호(鼎湖)에서 솥을 주조하고 나서 용(龍)의 수염을 타고 승천(昇天)하였는데, 이때 황제의 활만 공중에서 내려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上
정호신(鄭虎臣)
송(宋) 나라 때 사람으로, 그의 아버지가 일찍이 가사도(賈似道)에 의해 해(害)를 당하였는데, 덕우(德祐) 초기에 가사도가 탄핵을 받고 순주(循州)에 안치(安置)되었을 때, 정호신이 그를 살해하였다. 『송사(宋史)』 卷四百七十四
정호용(鼎湖龍)
정호(鼎湖)는 하남성(河南省) 문향현(閿鄕縣)의 남쪽 형산(荊山) 아래 있는 지명.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의 구리를 캐어 이 형산 아래서 솥을 주조했는데 솥이 완성되자 용(龍)이 내려와 황제를 맞으므로, 황제가 그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
정호용거(鼎湖龍去)
황제가 사망했다는 뜻이다.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의 동(銅)을 캐 형산(荊山)의 밑에서 솥을 주조하였다. 솥이 완성되자 하늘에서 수염을 드리운 용이 황제를 맞이하였으며, 황제가 신하와 후궁 70여 명과 함께 용을 타고 올라갔다. 나머지 신하들은 올라타지 못하고 용의 수염을 붙잡자 그 수염이 떨어지면서 황제의 활도 함께 땅에 떨어졌다. 황제가 하늘로 올라간 뒤에 백성들이 용 수염과 활을 붙들고 통곡하였다. 이때문에 그 곳을 정호(鼎湖), 그 활을 오호(烏號)라 불렀다. 『사기(史記)』 卷 28 「봉선서(封禪書)」
정호음(鄭湖陰)
호음(湖陰)은 성종~선조 때 시문으로 유명한 정사룡(鄭士龍)의 호이다.
정호화금슬(靜好和琴瑟)
화락하면서도 정도에 지나치지 않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정풍(鄭風) 「여왈계명(女曰鷄鳴)」에, “자리에 있는 금과 슬도, 모두 다 고요하고 아름답도다[琴瑟在御 莫不靜好].”하였다.
정홍(鄭弘)
『후한서(後漢書)』 「정홍전(鄭弘傳)」에 “정홍이 회음 태수(淮陰太守)가 되어 순행할 때 사슴 두 마리가 수레 옆에 바짝 붙어서 떠나지 않기에 주부(主簿) 황국(黃國)에게 ‘이것이 무슨 이유일까?’ 물었다. 황국이 절하고 축하하면서 ‘옛날 삼공(三公)이 타는 수레에는 사슴을 그림으로 새겼다 하니 아마 명부(明府)도 재상(宰相)이 될 징조인 듯합니다.’ 했는데, 정홍은 과연 나중에 태위(太尉)가 되었다.” 하였다.
정홍단(征鴻斷)
정홍(征鴻)은 멀리 날아가는 큰 기러기를 말한다. 고향의 소식이 두절되었다는 것이다.
정화(菁華)
정화(精華)와 같은 말로 ‘젊은 영기(英氣)’를 말한다. 훌륭한 재덕(才德)을 지닌 사람. 사물 중의 가장 뛰어나고 화미한 부분을 말한다.
정회(貞悔)
『주역(周易)』 괘(卦)에 대하여 일컫는 말로 내괘(內卦)를 정(貞), 외괘(外卦)를 회(悔)라고 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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