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조
조(條)
명조(鳴條). 탕이 걸을 정벌한 곳으로, 지금의 산서안읍을 말한다.
조가(朝歌)
은(殷)나라의 도읍. 화남성 기현. 『한서(漢書)』나 염철론(鹽鐵論)에는 모두 이명(里名), 시자(尸子)나 「추양전(鄒陽傳)」에는 현명(縣名)으로 되었다.
조간(趙簡)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本貫)은 김제(金堤)이며, 충렬왕(忠烈王) 5년(1279)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고, 이듬해 문신(文臣)을 대상으로 한 시부(詩賦) 시험에서 또 수석을 차지하였다.
조간행(釣竿行)
한(漢) 나라 때 요가(饒歌)의 이름으로, 원사(元詞)는 즉 성황(聖皇)의 덕이 요순(堯舜)과 같고 또 강태공(姜太公)의 보좌가 있어 대공(大功)을 세우고 태평성대를 이룬 것을 주제로 한 노래이다
조감(藻鑑)
품조(品藻)ㆍ감별한다는 뜻으로, 조경(藻鏡)과 같은 말이다. 즉 ‘선비 뽑는 데 필요한 명찰(明察)함’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을 잘 알아보는 안목’을 말한다.
조갑추련옥녹로(照匣秋蓮玉轆轤)
칼자루에 녹로, 즉 차륜(車輪) 형태의 옥 장식을 가한 녹로검(轆轤劍)이라는 보검을 말한다.
조강(祖江)
개풍군(開豐郡) 덕수(德水) 남쪽, 통진(通津) 동쪽 15리.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이 합하는 곳의 나루.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 앞에 조강나루터가 있었다. 『여지승람(輿地勝覽)』 / 인용: 祖江行(신유한)
조강연월한가천(鳥江煙月漢家天)
항우(項羽)가 도망하여 오강(烏江)에 이르자 강동(江東)으로 건너가지 않고 목을 찔러 자살하니 한(漢)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다.
조강지처(糟糠之妻)
조강(糟糠)은 지게미와 쌀겨를 가리키는 것으로, 가난한 사람이 먹는 변변치 못한 음식을 말한다. 쌀겨나 술지게미와 같은 거친 식사로 끼니를 이어가며 어려운 시절을 같아 살아온 아내를 이르는 말이다. 어려울 때 고생을 함께 견뎌온 아내.
조개(皁蓋)
검정 비단으로 만든 수레 위에 치는 일산(日傘). 지방 관원의 행차를 말한 것. 『후한서(後漢書)』 여복지(輿服志)에, “중이천석(中二千石)ㆍ이천석(二千石)은 모두 검정색 일산에다 붉은 두 표기 차림을 한다.” 하였다.
조개(皂盖)
관원들이 쓰는 검은 색의 일산(日傘)이다.
조객(趙客)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 나라 평원군(平原君)의 식객(食客) 모수(毛遂)를 가리킨다. 『사기(史記)』 제76권 「평원군열전(平原君列傳)」
조갱(調羹)
국을 끓일 때 조미료 역할을 한다는 말로,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얻어 정승을 삼고 나서 “내가 술을 만들면 그대가 누룩이 되고, 내가 국을 끓이면 그대가 소금과 식초 역할을 하라[若作酒醴 爾惟麴蘗 若作和羹 爾惟鹽梅].”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서경(書經)』 「열명(說命)」 下
조거(釣車)
낚싯줄을 감아 당기는 도구이다.
조경(鼂卿)
일본인 안배중마려(安倍仲麻呂)의 중국 이름이다. 일본의 사신으로 중국에 왔다가 중국의 문물을 흠모한 나머지 50년 동안이나 경사(京師)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한 이백(李白)의 시 ‘곡조경형(哭晁卿衡)’이 전한다. 『이태백시집(李太白詩集)』 卷24
조계(曹溪)
① 불교 선종(禪宗)의 한 파인 조계종을 말함이다.
② 중국 광동성 곡강현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진수(溱水)로 흘러들어가는 물 이른다. 당(唐)나라 때 선종(禪宗)의 육조(六祖) 혜능(慧能)이 보림사(寶林寺)를 세우고 불법(佛法)을 크게 일으킨 곳이다. 후대에는 흔히 절 주위에 흐르는 시냇물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③ 중국(中國)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물 이름이다. 전등록(傳燈錄)에 “양(梁) 나라의 중 지락(智樂)이 배를 타고 조계의 입구에 이르자 향취가 진동하므로, 그 물을 맛보고 ‘이 강(江) 상류에 승지(勝地)가 있다.’ 하고, 터를 닦아 절을 세우고 보림사(寶林寺)라 명명하였다[梁天監元年有僧智藥泛舶至韶州曹溪水口 聞其香嘗其味曰 此水上流有勝地 遂開山立名寶林]’. 그리고 이어 ‘앞으로 170년 뒤에 훌륭한 법사가 여기서 설법할 것이다.’ 하였다.” 한다.
조계(朝啓)
‘아침에 대궐에 들어가 일을 아뢰던 것’을 말한다.
조계단압(操鷄摶鴨)
태봉(泰封) 말년에 당상(唐商) 왕창근(王昌瑾)이 궁예(弓裔)에게 바친 옛 거울에 새겨 있었다는 도참문(圖讖文) 중의 일절.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먼저 계림을 정복하고 뒤에 압록강을 취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조계일작수(曹溪一勺水)
조계의 한 잔 물. 중국 선종(禪宗)의 제6조(祖)인 당(唐) 나라 혜능(慧能)이 조계산(曹溪山) 보림사(寶林寺)에서 선종의 이른바 남종(南宗)을 창시하였으므로, 선불교 수련의 궁극적 경지를 이야기할 때 인용하는 표현인데, 보통은 조계일적(曹溪一滴)으로 많이 쓴다.
조계학(曹溪學)
중국 남방에 조계산(曹溪山)이 있는데, 선종(禪宗)의 육조(六祖)인 혜능(惠能)대사가 거기서 제자를 가르쳤다.
조고(吊古)
‘옛일에 감동되어 슬퍼함’을 말한다.
조고(趙高)
진(秦) 나라의 환관(宦官). 진시황(秦始皇)이 죽자 승상(丞相) 이사(李斯)와 짜고 조서를 고쳐서 부소(扶蘇)를 죽이고 차자 호해(胡亥)를 이세 황제(二世皇帝)로 세우고 승상(丞相)이 되어 이사(李斯)를 무고하여 죽이고, 이세를 속여 조정의 정사를 그르쳐 드디어 진나라를 망하게 했다. 그가 임금을 속인 유명한 한 예(例)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指鹿爲馬).” 한 것이다. 『사기(史記)』 卷六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조고(操觚)
‘죽간을 잡는다’는 말의 집간(執簡)과 같음. 육기(陸機)의 문부(文賦)에, “或操觚以率爾”라 하였고 그 주에, ‘고(觚)는 방목(方木)인데 옛사람이 사용하여 글을 썼다.’ 하였다.
조곤(釣鯤)
구걸(求乞)하는 일. 조선 후기에 수령(守令)이 부임하면, 그 관아의 사령(使令)들이 수령에 대한 문안을 핑계하여 동령(動鈴) 혹은 조곤이라 칭하면서 백성에게 그 비용을 거두었는데 동령은 맨손으로 구걸하는 것, 조곤은 술을 가지고 구걸하는 것이다.
조공(曹公)
조비(曹丕, 魏文帝)가 한(漢)나라의 제위(帝位)를 빼앗은 뒤에, 오(吳)나라를 삼키려고 출병하였다가 양자강(揚子江)에 이르러, “하늘이 이 강을 가지고 남북을 한계하였도다.” 하고 돌아왔다 한다. 대개 조조(曹操)를 조공(曹公)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그 부자(父子)를 아울러 말한 것이다.
조과(鳥窠)
당(唐) 나라 때에 어느 중이 산 위 높은 소나무 위에 깃들여 사는데, 사람들이 그를 새둥주리 선사(鳥窠禪師)라 일렀다. 다시 까치가 그 옆에 깃들이니, 사람들이 “까치집 화상[鵲巢和尙].”이라 일렀다. 『전등록(傳燈錄)』
조과선사(鳥窠禪師)
당(唐) 나라 고승(高僧) 도림선사(道林禪師)를 말한다. 그의 성은 오씨(吳氏), 이름은 원경(元卿)으로, 진정산(秦亭山)에 들어가 큰 일산처럼 생긴 소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사는데 까치가 그 옆에 둥지를 짓고 깃드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조과선사라 불렀다. 『전등록(傳燈錄)』 卷四, 『연감유함(淵鑑類函)』 卷三百十七
조과입실(操戈入室)
후한(後漢) 때 하휴(何休)가 공양학(公羊學)을 좋아하여 공양묵수(公羊墨守)ㆍ좌씨고황(左氏膏肓)ㆍ곡량폐질(穀梁廢疾)을 지었는데 정현(鄭玄)이 그에 반박하는 설을 짓자, 하휴가 보고서 탄식하기를 “강성(康成)이 내 집에 들어와 내 창을 잡고서 나를 친단 말이냐.” 했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卷三十五 「정현전(鄭玄傳)」
조관(照管)
‘밝게 살핀다’는 뜻이다.
조관(條貫)
조리(條理)와 같은 뜻이다.
조괄(趙括)
전국(戰國) 시대 조(趙) 나라 장군 조사(趙奢)의 아들. 병법(兵法)을 배워 조금 알고는 천하에 자기를 당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늘 자부하였으므로 자기 아버지로부터, 조 나라 군대를 망칠 사람은 틀림없이 괄(括)일 것이라는 경계를 받았다. 그 후 염파(廉頗)를 대신하여 장군이 되어서는 자기 멋대로 전쟁을 수행하여 진(秦) 나라 장수 백기(白起)에게 크게 패하여 죽고 말았다. 『사기(史記)』 卷八十一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조교교장(曹交較長)
조교는 조(曹) 나라 임금의 아우로 맹자(孟子)와 동시대 사람. 그는 맹자에게, 사람은 누구나 요순(堯舜) 같은 성자가 될 수 있는가를 물으면서 말하기를, “문왕(文王)은 신장이 십척이고 탕(湯)은 구척이었다고 들었는데, 지금 나는 신장은 구척 사촌이나 되면서 하는 것이라곤 곡식 먹는 일 뿐이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하였다. 『맹자(孟子)』 「고자(告子)」 下
조구(糟丘)
① 술 찌꺼기를 쌓아 놓은 것이 언덕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은(殷) 나라 주왕(紂王)이 술로 채운 연못(酒池)을 만들자 소처럼 엎드려 마시는 자가 3천 인이었으며, 그 지게미를 쌓아 놓은 언덕(糟丘)이 10리 밖에서도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한시외전(漢詩外傳)』 卷4
② 술지게미로 쌓은 작은 언덕이란 뜻이다. 신서(新序)의 절사(節士)편에 “걸왕이 술로 연못을 만들었는데 배도 띄울 수 있을 정도였고, 쌓아놓은 술지게미는 칠 리 밖에서도 보였다[桀爲酒池 足以運舟 糟丘足以望七里]”라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조구만숭(早韭晩菘)
주옹(周顒)이 산중에 있을 때에 임금이 묻기를, “산중에서 무슨 맛난 것을 먹는가.” 하니, 그는, “첫봄에 부추와 늦가을에 배추가 맛이 좋습니다.” 하였다.
조구임협(曹丘任俠)
의기(義氣)를 중히 여겨 약한 자를 도와주는(任俠好義) 사람으로 유명하였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조구생(曹丘生)이 계포(季布)의 임협(任俠)을 가는 곳마다 찬양하여 계포의 이름이 더욱 떨쳐지게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사기(史記)』 卷100 「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
「조굴문(弔屈文)」
초나라 회왕(懷王)에게 직간(直諫)하다가 참소를 만나 귀양가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은 충신 굴원(屈原)을 조상한 부(賦)를 말하며 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지었다.
조궁(朝宮)
‘조회 받는 궁’을 말한다.
조균(調均)
‘음률을 조화롭게 하다’라는 뜻이다.
조균(朝菌)
아침 나절에만 사는 버섯으로서 태양만 보면 죽으므로 매우 단명함을 비유한 말이고, 대년(大年)은 매우 장수함을 말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조금지유의(操琴知有意)
공자(孔子)가 지었다는 금곡(琴曲)인 의란조(猗蘭操)를 말한다. 공자는 여러 나라를 찾아 다녔지만 제후들은 아무도 등용해주지 않았는데, 위(衛) 나라에서 노(魯) 나라로 돌아오는 길에 깊은 산골짜기에 향기로운 난초가 외로이 있는 것을 보고는 탄식하기를 “난초는 임금의 향초(香草)가 되어야 하는데, 이제 외로이 잡초들 옆에 있으니, 이는 마치 현자(賢者)가 때를 만나지 못하여 비부(鄙夫)와 짝이 되는 것과 같다.” 하고는 마침내 수레를 멈추고 거문고를 타 스스로 슬퍼하니, 이것이 바로 이 곡조라 한다. 『고금악록古今樂錄』
조기지분고(祖己之奔告)
문왕(文王)이 서백(西伯) 시절에 여국(黎國)을 정벌하여 이기자 조기(祖己)의 후손인 조이(祖伊)가 은 나라 국운이 다 되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두려워서 주(紂)에게로 달려와 그 사실을 고하고 정신을 차릴 것을 말하였다. 『서경(書經)』 「서백감려(西伯戡黎)」
조나(朝那)
한(漢) 나라 때 설치한 성으로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평량현(平涼縣) 서북쪽에 있는데, 흉노(匈奴)가 자주 침입해 온 지역이다.
조나주(趙羅州)
조박(趙璞)이 나주 목사를 역임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조낭(皁囊)
임금에게 글을 올릴 때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봉서를 넣는 검은 비단 주머니이다.
조낭유저(皁囊有貯)
비밀스런 일을 임금에게 아뢸 때는 검은 보자기에 싸서 밀봉하여 올리는 것인데, 후한(後漢) 말에 재변이 자주 일어나자, 임금이 채옹(蔡邕)에게 조칙하기를, “경술(經術)을 갖춰 진술하여 검은 보자기에 봉하여 올리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卷六十
조노(造怒)
‘화를 내다’라는 뜻이다.
조대(漕臺)
양곡의 조운(漕運)을 총괄하는 관직으로 해운 판관(海運判官)을 말한다.
조대(糟臺)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에서 한수를 두고 읊기를 “이 강물이 술로 변한다면 누룩으로 보루를 만들고 찌꺼기로 대를 쌓으리라[此江若變作春酒 壘麴便築糟糟邱臺].”라 하였다.
조대(措大)
‘청빈한 선비’를 말한다.
조대년(趙大年)
대년(大年)은 송(宋) 나라 조영양(趙令穰)의 자. 훌륭한 재주와 고상한 행실이 있었고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송사(宋史)』 卷三十八
조도(釣徒)
낚시꾼. 『당서(唐書)』 장지화전(張志和傳)에 “지화는 한 은사로서 자칭 연파조도(煙波釣徒)라 하고 현진자(玄眞子)라는 글을 지었는데, 낚시꾼 노릇은 해도 낚시에 미끼를 달지 않고 고기잡이에 뜻을 두지 않았다.” 하였다.
조도(祖道)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을 위하여 도로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술대접을 하면서 전송하는 것을 말한다.
조도(鳥道)
새들만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험준한 산길을 말한다.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 시에 “서쪽으로 태백성(太白星)을 바라보니 조도가 있다.” 하였다.
조도(調度)
‘헤아려 보다’라는 뜻이다.
조도소요(操刀所要)
일을 순리에 따라 처리함을 말한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백정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는데 문혜군이 그가 칼질을 잘하는 것을 감탄하자, 백정이 말하기를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은 두께가 없으니 두께 없는 칼로 틈이 있는 곳에 들어가면 반드시 넉넉한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고 했다.” 하였다.
조도수처회회(操刀隨處恢恢)
기예(技藝)가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백정이 소를 잡을 때, 두께가 없는 칼날을 틈새가 있는 뼈마디 사이에 집어넣음에, 칼 놀리는 공간이 넉넉하여 여유가 있었다[彼節者有間而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間 恢恢乎其於遊刃心有餘地矣]는 ‘포정해우(庖丁解牛)’의 고사가 있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
조도연(祖道筵)
조도제(祖道祭)와 같다.
조도제(祖道祭)
먼 길 떠날 때에 행로신(行路神)에게 제사지내는 일. 옛적에 황제의 아들 누조(累祖)가 여행길에서 죽었으므로 후인이 행로신으로 모신다고 한다.
조동(晁董)
한(漢) 나라의 조조(晁錯)와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킨다. 조조는 문제(文帝)가 직접 책문(策問)으로 과거 시험을 보일 때에 수백 명 중에서 장원을 하여 곧장 중대부(中大父)로 발탁되었으며 동중서는 무제(武帝)의 책문 시험에서 유명한 ‘천인 삼책(天人三策)’을 논하여 강도상(江都相)으로 발탁되었다. 『한서(漢書)』 卷4, 卷6
조두(俎豆)
노자(老子)의 제자인 경상초(庚桑楚)가 노자에게서 도를 배우고 외루(畏壘)라는 곳에 가서 사는데, 그가 있은 지 3년에 외루가 크게 풍년이 들자, 외루 사람들이 그를 성인(聖人)에 가깝다고 여겨 임금으로 받들고자 하였다. 그러자 그 사실을 들은 경상초가 남쪽을 향해 앉아서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외루 사람들이 나를 현인으로 높이어 임금으로 삼고자 하니, 이는 곧 내가 바로 표적(標的)의 인간이 된 것이다.”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
조두(刁斗)
놋쇠로 만든 한 말 들이 솥 같은 기구인데, 군중(軍中)에서 낮에는 여기에 음식을 만들고, 밤에는 이것을 두드려 경계(警誡)하는 데에 썼다고 한다. 일설(一說)에는 소령(小鈴)을 말한다.
조등(曹騰)
조조(曹操)의 아버지인 숭(嵩)의 양부(養父). 원래 황문 종관(黃門從官)으로서 30여 년에 걸쳐 네 황제를 모시면서 대과 없이 지냈으므로 뒤에 공로로 비정후(費亭侯)에 봉해지고 그가 죽자 숭(嵩)이 양자로 그 뒤를 이었음. 『후한서(後漢書)』 「환자열전(宦者列傳)」
조래(徂徠)
산 이름이다. 『시경(詩經)』 노송(魯頌) 「비궁(閟宮)」에 “조래의 소나무(徂徠之松)” 하였다.
조래가식(徂徠嘉植)
『시경(詩經)』 노송(魯頌) 「비궁(閟宮)」에 “조래산의 소나무와 신보산의 잣나무를, 자르고 쪼개고 재고 맞추어서, 커다란 재목 만드니 웅장한 궁궐이 완성되네[徂徠之松 新甫之柏 是斷是度 是尋是尺 松桷有舃 路寢孔碩].”라는 말이 나온다.
조래상기(朝來爽氣)
『세설신어(世說新語)』 간오(簡傲)에 진(晉) 나라의 왕휘지(王徽之)가 거기장군(車騎將軍) 환충(桓沖)의 기병 참군(騎兵參軍)으로 있을 적에 “서산의 아침 기운이 매우 삽상하다.(西山朝來 致有爽氣)”는 똑같은 말을 한 고사가 있다.
조량전(照凉殿)
임금이 판각(版閣)에서 화산대(火山臺) 불놀이를 구경할 때 임시로 만들어 놓는 관망대(觀望臺)를 말한다.
조령모개(朝令暮改)
아침에 내린 명령과 법령이 저녁에 다시 바뀜. 상부에서 내린 법령이 일관성 없이 자주 바뀜. 또는 법령을 자꾸 바꿔서 종잡을 수 없음을 비유. 자주 변함을 이름
조례(皁隷)
조선시대 경아전의 하나이며, 경호·경비·사령(使令) 등 잡역에 종사하던 하급군관이었다. / 인용: 용재총화(성현)
조로연천헌(鳥路連天巘)
새가 아니면 통과할 수 없는 높고 험한 산봉우리를 말한다.
조롱괘벽사(雕籠掛碧紗)
당(唐) 나라 때 왕파(王播)가 빈궁하여 양주(揚州)의 혜소사(惠昭寺)에 가서 밥을 얻어먹을 적에 중들이 그를 꺼리어 밥을 먹고 난 다음에 종을 치곤 하므로, 왕파가 이를 부끄럽게 여겨 시 한 수를 써 놓고 그곳을 떠났는데, 뒤에 그 지방장관이 되어 다시 그 절을 찾아가 보니, 이전에 자신이 써 놓았던 시를 푸른 깁에 싸서 잘 보호하고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조롱수(朝隴首)
일명 백린가(白麟歌)라고도 하는데, 한 무제(漢武帝) 원수(元狩) 원년 10월에 옹(雍) 땅에 행행하여 백린(白麟)을 얻고 이 노래를 지었다 한다
조룡(雕龍)
①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 나라의 추석(騶奭)을 가리킨다. 추연(騶衍)은 하늘에 관해서 이야기를 잘 했고, 추석은 추연의 학문을 받아들여 마치 용 무늬처럼 꾸미기를 잘 했으므로, 당시에 “하늘을 얘기하는 추연이요, 용 무늬처럼 꾸미는 추석이로세[談天衍 雕龍奭].”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② 용의 문채를 아로새겼다는 말로 좋은 문장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최인전(崔駰傳)」에 “대대로 조룡을 전해 왔다.” 했는데, 그 주(注)에 “추석(鄒奭)이 추연(鄒衍)의 글을 수식한 것이 용의 문채를 아로새긴 것 같다.”고 한 말이 있다.
조룡(祖龍)
진시황(秦始皇)을 가리킨다. 조(祖)는 시(始)의 뜻이요 용은 임금의 상징이니, 시황(始皇)의 은어(隱語)이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금년에 시황이 죽었다(今年祖龍死).” 하였다.
조룡공(釣龍功)
용을 낚았다는 것은 당 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의 도성을 함락시킨 뒤, 어느 날 대왕포(大王浦)하류에 갑자기 태풍이 불어 바위나루에서 낙화암까지 잇대어 있던 수백 척의 당 나라 병선(兵船)이 뒤엎어지는 변고가 일어났는데, 소정방은 이것을 백제를 지켜온 강룡(江龍)의 짓이라 하여 강 가운데에 있는 바위에서 백마(白馬)를 미끼로 그 용을 잡았다 한다. 그리하여 강 이름이 백마강이 되고 용을 낚았다는 바위는 조룡대(釣龍臺)라 하여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조룡문(祖龍門)
조룡(祖龍)은 진시황(秦始皇)의 별칭이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동해에 바위를 세워 두고 …… 이를 진 나라 동문으로 삼았다[立石東海 …… 以爲秦東門].”는 기록이 있다.
조룡편석(祖龍鞭石)
진시황(秦始皇) 동해(東海)에 해 뜨는 것을 보려고 돌로 바다에 다리를 놓으려 하자, 귀신이 돌을 채찍질하여 바다로 몰아 넣으니 돌에 피가 흘렀다 한다.
조류(曺劉)
①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위(魏)의 조식(曺植)과 유정(劉楨)을 이른다. 『문심조룡(文心雕龍)』 「비흥(比興)」
②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조식(曹植)과 유정(劉楨).
조리(螬李)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에 “진중자(陳仲子)는 어찌 청렴한 선비가 아니리오. 오능(於陵) 땅에 있을 때 3일 동안 굶어 듣지도 보지도 못하다가 굼벵이가 반이나 먹은 우물 위의 오얏을 기어가서 주워 먹으니 세 번 삼킨 후에 귀에 소리가 들리고 눈에 물건이 보였다.”는 말이 있다.
조리(曹吏)
예조(禮曹)의 도화서(圖畫署)에 소속된 화원(畫員)을 이른다. 이들의 그림을 화원화(畫員畫)라고 하여, 사대부 출신 화가들이 그린 문인화(文人畫)와 차별하고 그 예술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였다.
조림(祖林)
선림(禪林)과 같은 뜻으로, 선도(禪徒)들이 많이 모여서 수도하는 것을 수풀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조마(曹馬)
한 헌제(漢獻帝)를 몰아내고 천하를 차지한 위(魏)의 조조(曹操)ㆍ조비(曹丕)와 다시 위를 찬탈한 진(晉)의 사마소(司馬昭)ㆍ사마염(司馬炎)을 가리킨다.
조만(操縵)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음색 조정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현을 자유로이 조정할 수 없다[不學操縵 不能安弦].” 한 데서 온 말이다.
조만(曺瞞)
조조(曹操). 삼국지(三國志) 권1의 주에 인용한 조만전(曺瞞傳)에 “태조는 일명 길리라고 하였으며 어렸을 때의 자는 아만이었다[太祖 一名吉利 小子阿瞞].”라고 하였다.
조말(曺沫)
춘추(春秋) 시대 노(魯) 나라 사람. 장공(莊公)이 제(齊)와 싸워 지고는 가(柯)에서 맹약을 할 때 조말이 비수를 들고 제 환공(齊桓公)을 위협하면서 의분에 북받치는 말을 하자 환공은 그 동안 노 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그 자리에서 다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사기(史記)』 卷86 「자격열전(刺客列傳)」
조말척검(曹沫尺劍)
조말(曹沫)은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 나라의 장군으로, 제(齊) 나라와 싸워 세 번이나 패했으나, 제 환공(齊桓公)과 노 장공(魯莊公)이 회맹(會盟)을 할 적에 비수를 들고 가서 제 환공을 위협한 결과, 빼앗겼던 땅을 모두 되찾았던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卷86 「자격열전(刺客列傳)」
조매(調梅)
은 고종(殷高宗)이 부열(傅說)을 정승으로 삼으면서, “만일 국맛을 맞춘다면 너는 소금이요 매실이니라[若作和羹 爾惟鹽梅].” 하였는데, 짠 소금과 신 매실(梅實)이 국의 조미료이므로 정승의 업의 뜻으로 쓰여진다.
조매계(曹梅溪)
매계(梅溪)는 조위(曹偉)의 호이다. 조위는 조선조 성조 때의 문신. 글씨와 시문에 능했다. 저서에는 『매계집(梅溪集)』이 전해진다.
조맹(趙孟)
진(晉) 나라의 경(卿)이다.
조맹견(趙孟堅)
송 나라 말기의 은사(隱士). 호는 이재(彝齋). 그는 송 나라 말기에 한림 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를 지냈고, 서화와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지절(志節)이 높기로 유명하였다.
조명시리(朝名市利)
무슨 일이든 적당한 장소에서 행하여야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조모관녕(皁帽管寧)
삼국 시대 위(魏)의 명사 관녕(管寧)이 항상 검은 모자를 쓰고, 80세가 넘도록 50여 년 동안을 항상 목탑(木榻)에만 꿇어앉았었으므로, 그 목탑 위의 무릎 닿은 곳이 모두 구멍이 뚫리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삼국지(三國志)』 卷十一
조모벌묵수(操矛伐墨守)
식견이 뛰어난 것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권35 정현전(鄭玄傳)에 “임성(任城) 하휴(何休)가 공양(公羊)의 학문을 좋아하여 마침내 공양묵수(公羊墨守)ㆍ좌씨고황(左氏膏肓)ㆍ곡량폐질(ꜘ梁廢疾)을 저술하였는데, 정현이 발묵수(發墨守)ㆍ침고황(鍼膏肓)ㆍ기폐질(起廢疾)을 지었다. 하유가 그 글을 보고 감탄하기를 ‘강성(康成)이 내 집에 들어와 내 창을 잡고서 나를 친단 말인가.’ 하였다.” 하였다.
조문기관(詔文記官)
수향리(首鄕吏)를 일컫는 말이다.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논어(論語)』 「이인(里仁)」
조문민(趙文敏)
문민은 원 나라 조맹부(趙孟頫)의 시호이다.
조문석사(朝聞夕死)
도(道)를 듣게 되면 곧 죽어도 유감이 없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 하였다.
조문왕(操文王)
조조(曹操)는 후한(後漢) 말기의 역신이었으나 당시에 그를 주 문왕(周文王)에 비유했던 일을 가리킨 말이다.
조박(糟粕)
① ‘고인의 진면(眞面)은 추구하지 않고 껍데기만 익히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② ‘학술ㆍ예술 따위 학문을 옛 사람이 다 밝혀내고 남은 찌꺼기’를 말하기도 하며,
③ ‘세상의 명예와 지위’를 말하기도 한다.
‘술찌꺼기’라는 뜻으로, ‘고인(古人)이 남긴 글’을 가리킨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제 환공(齊桓公)이 당(堂) 위에서 글을 읽고 있자, 윤편(輪扁)이 당 아래서 일을 하다 말고 환공에게 묻기를 “공(公)의 읽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므로 환공이 말하기를 “성인의 말이다.” 하였다.”성인이 살아 있습니까?” 하자 “이미 죽었다.” 하니 “그렇다면 공이 읽고 있는 것은 바로 옛사람의 찌꺼기군요.”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장자(莊子)』 「천도(天道)」, 『회남자(淮南子)』 「도응훈(道應訓)」 / 인용: 五學論(정약용)
조박무여미(糟粕無餘味)
제 환공(齊桓公)이 대청에서 독서를 하자, 바퀴 만드는 사람이 “책이란 이미 죽은 성인이 남겨 놓은 술지게미[聖人之糟粕]와 같다.”고 말한 일화가 있다. 『장자(莊子)』 「천도(天道)」, 『회남자(淮南子)』 「도응훈(道應訓)」
조방(曺芳)
삼국시대 위(魏) 나라 명제(明帝; 曺叡)의 양자가 되어 그 뒤를 이었는데, 재위 15년만에 사마사에게 폐위되어 제왕(齊王)이 되었다. 『삼국지(三國志)』 卷四 조방은 조조(曹操)의 증손이고 조비의 손자인 셈이다.
조방의마임구치(早防意馬任驅馳)
뜻이 제멋대로 달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의마(意馬)는 즉 뜻이 안정되지 못하여 마치 달리는 말과 같다는 말이다. 참동계(參同契) 주(註)에 “의마(意馬)가 사방으로 달린다.” 하였다.
조범(鳥凡)
‘새 봉(鳳)’자를 파자(破字)한 모양이다. / 유의어: 범조(凡鳥)
조법(助法)
은(殷)의 조세법으로서 70묘(畝)를 경작하는 농민이 7묘의 공전(公田)경작을 돕는다는 뜻으로, 10분의 1을 조세로 바치는 제도이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上
조벽(趙璧)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최고의 보옥(寶玉)으로 일컬어졌던 화씨벽(和氏璧)을 가리키는데, 그 빛이 희다. 조(趙) 나라 혜문왕(惠文王)이 초(楚) 나라로부터 이를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한비자(韓非子)』 「화씨(和氏)」
조벽완(趙璧完)
조(趙) 나라 인상여(藺相如)가 화씨벽(和氏璧)을 가지고 진정(奏廷)에 갔다가 진왕이 빼앗으려 하므로 꾀를 내어 무사히 구슬을 가지고 돌아왔다.
조변석개(朝變夕改)
‘아침에 고치고 저녁에 또 고친다’는 말로, ‘지겨울 정도로 자꾸 바꾼다’는 말이다.
조보(趙普)
송(宋) 나라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인데, 태조가 여러 번 그의 집에 가서 그의 부처(夫妻)와 대작(對酌)까지 하였다.
조보(造父)
말의 관상을 잘 보는 동시에 말을 잘 모는 사람을 가리킨다. 조보는 주목왕(周穆王) 밑에서 말을 몰았던 사람으로 주목왕에게 하루에 천 리를 치달리는 팔준마(八駿馬)를 바쳤다고 한다.
조북비가(趙北悲歌)
조북(趙北)은 도시 연조(燕趙) 지역을 가리킨 말인데, 연조 지역에는 우국지사들이 많았으므로, 예부터 연조에는 감개비가(感慨悲歌)하는 선비가 많다고 일컬어진 데서 온 말이다.
조불급석(朝不及夕)
형세가 급박하여 아침에 저녁 일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함을 말한다.
조불려석(朝不慮夕)‘아침에 저녁의 일을 헤아리지 못한다’. 당장 눈 앞의 일이나 결정할 뿐이지 앞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 유의어: 조불모석(朝不謀夕)
조불안석(坐不安席)
마음에 불안이나 근심 등이 있어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는 마음상태를 말한다.
조불후목(雕不朽木)
버린 사람이라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재여(宰予)가 낮잠을 자거늘 공자가 ‘썩은 나무에는 새길 수 없다’ 했다.” 하였다.
조비연(趙飛燕)
전한(前漢) 때 성제(成帝)의 황후(皇后). 그는 몸이 가볍고 가무(歌舞)를 잘하였는데 그 모양이 마치 나는 제비(飛燕) 같았다고 한다. 그는 귀풍송원곡(歸風送遠曲)을 손수 지어서 노래하고 춤춘 것으로 더욱 유명한데 귀풍송원이란 회오리바람을 멀리 보낸다는 뜻이다.
조사(漕司)
부세(賦稅)의 독촉 징수와 출납(出納)ㆍ상공(上供) 등의 일을 관장한 기관이다.
조사(曹司)
세곡(稅穀)을 서울로 수송(輸送)하는 관원을 말한다. / 인용: 可興站(김종직)
조사(造思)
생각을 하다.
조사(祖師)
불가의 말로 원래 석가(釋迦)를 칭했는데, 선종(禪宗)의 창시자(創始者) 달마(達摩)를 가리킨다.
조사림(祖師林)
불교의 한 종파(宗派)를 창시한 선종(禪宗)의 달마(達摩)가 거처하던 숲을 가리킨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선불교(禪佛敎)에서 쓰는 화두(話頭)의 하나로서 달마(達磨)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는 것인데, 즉 불법(佛法)의 근본 대의가 무엇이냐고 하는 것이다.
조사선(祖師禪)
선종(禪宗)의 용어로, 조사(祖師)들이 대대로 서로 전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법(禪法)을 말한다.
조사선거산(趙奢先據山)
조사(趙奢)는 전국시대(戰國時代) 때 조(趙) 나라의 장수이다. 진(秦) 나라가 한(韓) 나라를 공격하자 조 나라에서 조사를 대장으로 삼아 구원하게 하였는데, 군사(軍士) 허력(許歷)이 조사에게 간하기를, “먼저 북산(北山)에 올라가서 점거하는 자는 이기고 뒤에 오는 자는 패할 것입니다.” 하자, 조사가 그의 말에 따라서 즉시 1만 명의 군사를 산으로 올라가게 하였다. 진 나라 군사가 뒤늦게 이르러서 북산으로 올라가려고 하자, 조사가 군사를 풀어서 공격하게 해 대승을 거두었다. 『사기(史記)』 卷八十一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조산초수(釣山樵水)
시비를 따지지 않음을 말한 것. 조산은 산에 가서 낚시질함을 말하며, 초수(樵水)는 물에 가서 나무한다는 뜻으로 이치에 맞지 않음을 말한다. 옛날 노(魯) 나라에 올자인 왕태(王駘)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만물과 혼동(混同)하여 가불가(可不可)가 없었다 한다.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
조삼(朝三)
옛날 저공(狙公)이 원숭이들에게 상수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씩을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다 성을 냈다는 고사를 말한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열자(列子)』 「황제(黃帝)」
조삼구(嘲三韭)
남조(南朝) 제(齊) 나라 유고지(庾杲之)의 밥상에는 늘 부추로 만든 반찬 세 가지(三韭)만이 놓였는데, 삼구(三韭)가 삼구(三九)와 음이 같은 것에 착안하여 “유랑이 어디 청빈하던가, 어채 반찬이 이십칠이나 되는걸[誰謂庾郞貧 食鮭常有二十七種].”이라고 놀린 고사가 있다. 『남제서(南齊書)』 「유경지전(庾杲之傳)」
조삼모사(朝三募四)
송(宋)나라의 저공(狙公)이 원숭이를 많이 길렀었는데, 살림이 빈궁해지자 원숭이의 식량을 줄이려고 고민하다가 ‘아침엔 4개 저녁엔 3개를 주면 어떻겠냐’고 원숭이들에게 물었다. 예상한대로 원숭이들이 화를 내자 ‘아침엔 3개 저녁엔 4개를 주면 되겠냐고’ 하자 원숭이들이 좋아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간사한 꾀로 사람을 속여 희롱함, 눈앞에 당장 나타나는 차이만을 알고 그 결과가 같음을 모르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열자(列子)』 「황제(黃帝)」
조상(條桑)
뽕잎을 따기 위해 뽕나무 가지를 치는 일. 『시경(詩經)』 빈풍(豳風) 「칠월(七月)」에 “잠월이라 뽕나무 가지를 친다[蠶月條桑].” 하였다.
조상(糟床)
술을 거르는 기구 이름으로, 쳇다리 혹은 술주자라고도 한다.
조상(弔湘)
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상강을 지나가면서 억울하게 조정에서 쫓겨난 초(楚) 나라 굴원(屈原)을 생각하며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은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卷84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조생죽선(曹生竹扇)
진(晋) 나라 원굉(袁宏)이 동양태수(東陽太守)로 나가는데 여러 사람이 전송하였다. 사안(謝安)이 갑자기 옆 사람에게서 부채 한 자루를 받아서 원굉에게 주며, “이것을 전송하는 선물로 삼는다.” 하니, 원굉이 곧 그것을 받으며 답하기를, “마땅히 인풍(仁風)을 받들어 드날려서 저 백성들을 위로하겠소.” 하였다.
조생지편(祖生之鞭)
진(晉) 나라 조적(祖逖)을 말한 것으로 남보다 앞서도록 격려하는 말로 쓰이다. 『진서(晉書)』 「유곤전(劉琨傳)」
조생청계(祖生聽雞)
조생(祖生)은 진(晉) 나라 때의 조적(祖逖)을 가리키는데, 조적은 본디 강개한 지절이 있었던 바, 일찍이 유곤(劉琨)과 함께 사주 주부(司州主簿)가 되어 한 이불을 덮고 같이 자다가 때아닌 밤중에 닭우는 소리를 듣고는 일어나 춤을 추며 비장한 기색을 보였던 데서 온 말인데, 밤중에 닭이 우는 것은 사변(事變)의 전조(前兆)라고 하기 때문이었다. 『진서(晉書)』 卷六十二
조생편(祖生鞭)
조생(祖生)은 진(晉) 나라의 조적(祖逖)을 말한다. 유곤(劉琨)은 조적과 친구 사이로 조적이 조정에 발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어 “내가 창을 베고 자면서 역로(逆虜)의 목을 효시(梟示)할 뜻이 있는데, 항상 조적(祖逖)이 나보다 먼저 채찍을 잡을까 두렵다.”고 하였는데, 후세에 남을 권면하는 고사로 사용하였다. 『진서(晉書)』 卷 62 「유곤전(劉琨傳)」
조서(照犀)
옛날 온교(溫嶠)가 우저기(牛渚磯)란 곳에 이르니, 그 곳 물이 깊어서 밑을 볼 수가 없는데, 사람들은 그 속에 괴물이 많다고 하므로, 온교가 물소뿔을 태워서 비추자 그 괴물들이 환히 보였다고 한다.
조서(曹徐)
조(曹)는 위(魏) 나라의 조식(曹植), 서(徐)는 후한(後漢) 건안 칠자(建安七子)의 하나인 서간(徐幹)을 가리킨다.
조서(徂署)
죄인 김처선(金處善)을 미워해서 처서(處署)를 고쳐 부르던 말이다.
조서모동(朝西暮東)
‘지조 없이 이익만 쫓아다니는 위인’을 비유하여 풍자한 말이다.
조서산미궐(祖西山薇蕨)
서산은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고사리를 캐어 먹었다는 수양산(首陽山)으로, 곧 백이ㆍ숙제의 충절(忠節)을 조종(祖宗)으로 삼았음을 말한 것이다.
조서흑두(曹蜍黑頭)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근근이 목숨만 유지해 나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품조(品藻)」에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 같은 인물은 천 년 전에 죽었어도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늠름한데, 조여(曹蜍)와 이지(李志) 같은 무리는 지금 살아 있어도 땅속에 묻힌 사람처럼 어둡기만 하다.”라는 말이 있다.
조석(祖席)
송별연을 베푸는 자리. 한유(韓愈) 「조석시(祖席詩)」에 “낙교(洛橋)에 송별연을 베푸니, 다정한 친구 서로 슬퍼하네.” 하였다.
조석오(朝夕烏)
『한서(漢書)』 「주박전(朱博傳)」에 “어사부(御史府) 안에 잣나무가 열을 지어 있어 항상 들까마귀 수천 마리가 그 위에서 깃들어 자며 새벽에 날아갔다가 저녁이면 돌아오므로 조석오(朝夕烏)라 이름했다.” 하였다.
조선대고(朝鮮大賈)
선조(宣祖) 당시 부경(赴京)하는 사신 일행 가운데 몰래 인삼 등을 소지하고 중국에 가 밀무역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중국사람들이 우리나라 사신 일행을 장사치에 비유하여 기롱한 말이다.
조선술(趙善述)
선술(善述)은 조찬한(趙纘韓)의 자(字)이다.
조소(鳥巢)
조과(鳥窠)와 같은 말로, 당(唐) 나라 고승(高僧)에 조과선사(鳥窠禪師)가 있다.
조소(嘲笑)
‘조롱하며 비웃는 웃음’을 말한다.
조송곡이빈(曹松哭李頻)
당(唐) 나라 시인 조송(曹松)이 건주 자사(建州刺史) 이빈(李頻)에게 후은(厚恩)을 입고서 그가 죽은 뒤에 ‘곡이빈원외(哭李頻員外)’라는 시를 지었는데, 참고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방 장관으로 건주에 부임했다가, 관소에서 그만 세상을 뜨셨는가. 괴로운 시절 그 시문들 펼쳐보지 말지어다, 맑은 자질 파직되어 낭관(郞官)으로 옮겨졌네. 장수(瘴水)가 술잔 올릴 아들도 하나 없이, 고개 너머 청상 과부 아내 있을 뿐. 정녕 묻힌 뼈 향기 감돌아, 동쪽으로 고향 찾아 돌아오리라[出麾臨建水 下世在公堂 苦集休開篋 淸資罷轉郞 瘴中無子奠 嶺外一妻孀 定是浮香骨 東歸就故鄕].” 『전당시(全唐詩)』 卷716
조송설(趙松雪)
송설(松雪)은 원(元) 나라 조맹부(趙孟頫)의 호이다.
조수(曹隨)
‘전임자(前任者)의 법규를 그대로 준수하여 성사(成事)시키는 것’을 말한다. 한(漢) 나라 때 소하(蕭何)를 이어 조참(曹參)이 정승이 되었으나 조참은 소하가 세운 법규를 고치지 않고 준행하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
조수련급직(操修憐汲直)
한 무제(漢武帝)의 직신(直臣)인 급암(汲黯)을 가리킨다. 『한서(漢書)』 「가연지전(賈捐之傳)」에 “가연지의 간하는 성격은 급암의 정직함과 똑같다.” 하였다.
조수은(鳥酬恩)
까마귀는 새끼를 다 키워 놓으면 새끼들이 어미에게 먹이를 갖다 준다 하여 반포조(反哺鳥)라 하므로 한 말이다. 『소이아(小爾雅)』 「황조(廣鳥)」
조수해(嘲誰解)
한 나라 시대 사람인 양웅(揚雄)이 「해조부(解嘲賦)」라는 글을 지은 일이 있다.
조숙온(趙叔溫)
숙온(叔溫)은 조박(趙璞)의 자(字)이다.
조술(操術)
‘자신을 바르게 잘 지키는 방술’을 말한다.
조슬(操瑟)
전국시대(戰國時代) 때 거문고를 잘 타는 사람이 제 나라에서 벼슬을 하기 위해 거문고를 들고 제 나라 왕을 찾아가 3년 동안이나 왕을 만나려 했으나 되지 않았다. 어떤 자가 꾸짖기를 “왕은 피리를 좋아하시는데 그대는 비파를 두드리니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왕이 좋아하지 않는 판에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오백가주창려문집(五百家注昌黎文集)』 卷十八 「답진상서(答陳商書)」
조슬제문(操瑟齊門)
자신의 재능이 시속의 숭상함과 서로 다름을 비유한 말이다. 제문은 제왕(齊王)의 문이란 뜻으로, 옛날 제왕이 피리(竽)를 좋아했는데, 제 나라에 벼슬을 구하는 자가 비파를 가지고 가서 제왕의 문에 3년이나 서있었지만 들어가지 못하자, 어떤 이가 그에게 말하기를 “왕은 피리를 좋아하는데 그대는 비파를 타니, 비파를 아무리 잘 탄들 왕이 좋아하지 않음에 어찌하랴.”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창려집(韓昌黎集)』 「답진상서(答陳商書)」
조슬진부(趙瑟秦缶)
진왕(秦王)과 조왕(趙王)이 우호를 다지기 위해 민지(澠池)에서 회동했을 때 술이 거나하자 진왕이 일부러 조왕의 입장을 곤혹스럽게 만들기 위하여 조왕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직접 퉁기게 했다. 이때 조왕을 배종했던 인상여(藺相如)가 역시 진왕으로 하여금 진의 고유 악기인 장군(缶)을 치게 하여 보복하였다. 『사기(史記)』 卷八十一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조습(燥濕)
‘마르고 젖는다’는 뜻이다.
조승(趙勝)
전국시대(戰國時代) 조 혜문왕(趙惠文王)의 아우로서 평원군(平原君)이라 부르는데, 천하의 인재를 받아들여 식객(食客)이 항상 수천 명에 이르렀다. 『사기(史記)』 卷七十六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
조승명주(照乘明珠)
위 나라 혜왕(惠王)이 자기 나라에는 앞뒤 수레 열두 채를 환하게 비출 수 있는 명주(明珠)가 있다고 제(齊) 나라 위왕(威王)에게 자랑했다는 고사.
조시(朝市)
① 조정과 시장이니 곧 서울을 말한다.
② 조정과 시정(市井). 즉 ‘명리(名利)와 경쟁이 심한 곳’을 말한다.
조시구(釣詩鉤)
술의 별칭이다. 술이 시를 짓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므로 이렇게 칭한다. 소식(蘇軾)의 시 에, “응당 시를 낚는 낚시를 부르고, 또한 시름을 쓰는 비도 부르리라[應呼釣詩鉤 亦號掃愁帚].”하였다.
조식(調息)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인데, 즉 고요히 앉아서 숨을 쉬는 것을 말한다. 복기(服氣)ㆍ태식(胎息)이라고도 한다. 정신을 평안하게 하는 일종의 호흡법인데, 이것은 천지간에 널리 퍼져 있는 원기를 흡입, 체내에 저장하여 신체가 늙지 않게 하는 수행법이다. 『동파지림(東坡志林)』에, “바로 앉아서 눈을 감고 조식을 하는데, 이는 오래 하는 것으로써 공(功)을 삼는다.” 하였다. 주자(朱子)가 지은 「조식잠(調息箴)」이 유명하다.
조식(曹植)
조조(曹操)의 셋째 아들. 뛰어난 시재(詩才)를 시기하는 형 문제(文帝)의 명을 받고 지은 칠보시(七步詩)는 특히 유명하다.
조신(鳥申)
도가(道家)에서 장생불사(長生不死)하기 위해 수련하는 도인법(導引法)의 한 가지, 마치 새가 목을 쭉 빼고 있는 것같이 하여 호흡을 단련하는 것이다. 『장자(莊子)』 「각의(刻意)」
조신(竈神)
부엌 귀신으로, 권신(權臣)을 말한다. 『논어(論語)』 「팔일(八佾)」에서 왕손가란 사람이 공자에게 “아랫목 신하에게 아첨하기보다 차리라 부뚜막 신에게 아첨하는 게 어떻습니까[與其媚於奧, 寧媚於竈, 何謂也]”라고 말했던 고사가 실려 있다.
조심전속백등광(祖心傳續百燈光)
불법(佛法)의 깨달은 묘리(妙理)를 등불에 비유한 것, 즉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경지를 말한 것이다.
조씨(趙氏)
송 나라 휘종(徽宗)을 말한 것인데 성이 조씨(趙氏)다.
조아(爪牙)
맹수(猛獸)가 어금니와 발톱(爪牙)으로 몸을 보호하므로 ‘무장(武將)을 임금의 어금니와 발톱’이라 한다.
조아지사(爪牙之士)
손톱과 이빨은 새나 짐승이 자기를 보호하는 무기이니. 즉, ‘국가를 보필하는 신하’를 말한다.
조악(潮鱷)
당(唐) 나라 한유(韓愈)가 불골표(佛骨表)를 올렸다가 좌천되어 조주 자사(潮州刺史)가 되었는데, 그때 악계(惡谿)의 악어가 사람과 가축을 해치자, 한유가 「악어문(鱷魚文)」을 지어 물리쳤다고 한다.
조야백(照夜白)
당 현종(唐玄宗) 때 서역(西域) 대완(大宛)에서 들여온 준마(駿馬)의 이름이다.
조양(朝陽)
아침해가 뜨는 동산으로, 오동나무가 이곳에서 자라 봉황새가 산다고 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니, 저 높은 산에서 우는도다. 오동이 자라니, 저 조양에서 자라는 도다[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이라 하였는데, 그 주에 “산의 동쪽을 조양이라 한다.” 하였다.
조양(潮陽)
당 나라 한유(韓愈)가 불골표(佛骨表)를 올리고 나서 귀양을 간 조주(潮州)를 가리킨다. 이때 무지한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향교를 세우고 수업을 받게 하였는데, 이 교육을 담당한 사람이 조덕(趙德)이었다는 내용이 소식(蘇軾)의 「조주 한 문공 묘비(潮州韓文公墓碑)」에 나온다.
조양(朝陽)
주나라의 문왕(文王) 때에 기산(箕山)이라는 산에서 아침 해가 돋을 때 봉황(鳳凰)새가 울었다 한다. 그 후로 조정에서 바른 말하는 것은 아침 볕에 봉황이 운다고 말하여 왔다.
조양봉(朝陽鳳)
조양은 산 동쪽 볕바른 곳. 『시경(詩經)』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봉황새 훨훨 날아 높은 뫼에 앉아 우네. 오동나무는 동녘 산에 볕바른 데 우뚝 섰네[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兮 于彼朝陽].” 한 데서 온 말이다.
조양봉명(朝陽鳳鳴)
당(唐) 나라 저수량(褚遂良) 등의 간신(諫臣)이 죽은 뒤로 감히 직간하는 신하가 없었는데, 이선감(李善感)이 어느 날 직간을 하므로 사람들이 ‘조양에서 붕새가 우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는 고사.『당서(唐書)』 「이선감전(李善感傳)」 ‘조양에서 붕새가 운다[鳳鳴朝陽].’함은 원래 『시경(詩經)』 대아(大雅) 「권아(卷阿)」의 “鳳凰鳴矣于彼高岡 梧桐生兮于彼朝陽”에서 나온 말로, 태평 성세의 상징으로 쓰이는 문자다.
조양실봉황(朝陽失鳳凰)
조정에서 인재들이 쫓겨난 것을 말한다. 조양(朝陽)은 햇빛이 비취는 산의 동쪽으로서, 『시경(詩經)』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나니 저 높은 산 언덕, 오동나무 서 있나니 저기 산 동쪽[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이라고 하였다.
조어산성(釣魚山城)
송(宋) 나라 여개(余玠)가 사천성(四川省)의 조어산에 쌓은 성 이름이다. 몽고(蒙古)의 몽가한(蒙哥汗)이 군대를 총 동원하여 침공하였으나 몇 개월 동안이나 함락되지 않았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四川 重慶府 合州
조언(鳥言)
새소리라는 말이니, 연경에서 만난 안남, 유구, 섬라의 사신들이 쓰는 언어를 말한다. / 인용: 臨溟大捷歌(홍양호)
조업(祖業)
신하의 조상들이 임금의 선왕을 받들어 ‘왕업을 창건한 것’을 말한다.
조업(曹鄴)
당(唐) 나라 사람. 자는 업지(鄴之). 태상박사(太常博士)와 양주 자사(洋州刺史)를 역임하였다. 저서에는 『조사부집(曹祠部集)』이 있다.
조여(曺蜍)
진(晉) 나라 팽성(彭城) 사람 조무(曹茂)의 소자(小字)로 이지(李志)와 함께 변변찮은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글씨를 잘 썼지만 남들의 눈에 보일 만한 기개가 없어 당시 사람들이 그를 하찮게 여겼다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품조(品藻)」에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는 천 년 전에 죽었어도 아직 늠름하게 생기(生氣)를 발하고 있는 반면, 조여(曹蜍)와 이지(李志) 같은 무리들은 비록 살아 있다 하더라도 구천(九泉) 아래에 있는 자들이나 다름이 없다. 사람들이 모두 그들과 같다면 결승(結繩)의 시대에 썼던 방법으로도 다스릴 수 있겠지만, 그들이 죽고 나면 뒤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이 여우나 오소리가 그 육신을 모조리 먹어 치워 버릴 따름이다.”라는 말이 있다.
조여(曺呂)
설정(雪江) 조문수(曺文秀)와 동강(東江) 여이징(呂爾徵)을 가리킨다.
조여이지(曹蜍李志)
조여와 이지는 모두 진(晉) 나라 때 사람들로 글씨를 대단히 잘 썼으나 인품이 워낙 부족하여 글씨가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는 뜻에서, 전하여 소인의 무리에 비유한 것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품조(品藻)」에 의하면 “염파(廉頗)ㆍ인상여(藺相如)는 죽었지만 늠름하여 생기가 있고, 조여ㆍ이지는 살아 있어도 마치 죽은 사람과 같다.” 하였고, 황정견(黃庭堅)이 우군첩(右軍帖) 뒤에 쓴 글에는 “조여ㆍ이지 무리가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와 겨룰 만했지만 전하기에는 부족하다. 편지 한 장의 글씨라도 수백 세를 전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사람의 인품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였다.
조연(조然)
일본 중의 이름인데, 송(宋)나라 때에 송나라에 와서 금문(今文)인 정현(鄭玄)의 주석한 『효경(孝經)』을 헌상하였다 한다.
조염매(調鹽梅)
염매(鹽梅)는 소금과 매실. 소금은 아주 짜고 매실은 아주 시기 때문에 두 맛을 잘 조화하여 알맞도록 한다는 뜻으로, 곧 신하가 임금을 잘 보좌하여 올바른 정사를 하게 한 데 비유한 말인데, 『서경(書經)』 「열명(說命)」 中에 “만약 맛있는 국을 만들려거든 그대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 주오.” 한 데서 온 말이다.
조영인(趙永仁)
본관은 횡성(橫城), 시호는 문경이다. 고려 의종(毅宗) 때 문과에 올라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조영청담혹자익(照影淸潭或自溺)
꿩이 물속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되어 계속 춤을 추다가 탈진되어 빠져 죽는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이원(異苑)』 3
조예(鑿枘)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持方枘欲內圓鑿 其能入乎”라 하였고, 『장자(莊子)』 「재유(在宥)」에, “吾未知仁義之不爲桎梏鑿枘也”라 하였고, 『색은(索隱)』에, ‘方枘是筍也 圓鑿其空也 謂工人斲木以方筍而內之圓 空不可入也’라 하였다. 이상의 설로 미루어 보면, ‘서로 용납되지 않음’을 말한다.
조오(釣鰲)
① 이백(李白)이 어느 재상을 찾아갔는데 명함에, ‘해상조오객 이백(海上釣鰲客 李白)’이라 하였다. 주인이 묻기를, “새우(鰲)를 낚는 데는 무엇을 미끼로 하는가.” 하니, 이백은 “천하에 무의(無義)한 사람으로써 미끼를 삼는다.” 하였다.
② 『장자(莊子)』에 나오는 임공자(任公子)를 가리킨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임공자가 큰 낚시와 굵은 줄을 준비한 다음 50마리의 황소를 미끼로 하여 회계산(會稽山)에 걸터앉아 동해에다 낚시를 던졌다.” 하였다.
조오창명(釣鰲滄溟)
옛날에 용백국(龍伯國)의 거인이 다섯 선산(仙山)을 떠받치고 있는 여섯 마리의 큰 자라를 낚시질하여 한꺼번에 다 낚아서 이를 짊어지고 그 나라로 돌아가자, 두 산이 북극으로 흘러가서 큰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조옥수(曹玉水)
조강(曹江)의 자인데 호는 석계(石谿)이다.
조와(爪蜑)
지금의 ‘자바섬’을 말한다.
조용(租庸)
지세(地稅)와 부역(賦役).
조우(遭遇)
‘임금의 신임을 받는다’는 뜻이다.
조우도(操牛刀)
공자(孔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공자가 들렀더니, 글 읽고 거문고 타는 소리가 들렸다. 공자는 자유를 보고 웃으며, “닭을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이것은 이 조그만 고을을 다스리는 데 나라를 다스릴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을 쓰는 것을 희롱 섞어 칭찬한 말이다. 『논어(論語)』 「양화(陽貨)」
조욱(朝旭)
‘아침 해’를 말한다.
조운(朝雲)
① 소식(蘇軾)의 애첩(愛妾) 이름이다.
② 후위(後魏) 때 하간왕(河間王)의 기녀(妓女) 이름인데, 그녀는 매우 총민하여 가무에 능하였다.
③ 송옥(宋玉) 고당부(高唐賦) 서(序)에 “초 양왕(楚襄王)이 운몽대(雲夢臺)에서 놀다가 고당(高唐)의 묘(廟)에 운기(雲氣)의 변화가 무궁함을 바라보고 송옥(宋玉)에게 ‘저것이 무슨 기운이냐?’고 묻자 ‘이른바 조운(朝雲)입니다. 옛날 선왕(先王)이 고당에 유람왔다가 피곤하여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여인이 「저는 무산(巫山)에 있는 계집으로, 침석(枕席)을 받들기 원합니다.」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정을 나누고 떠날 적에 「저는 무산 남쪽에 사는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늘 양대(陽臺) 아래 있습니다.」 했습니다.’고 하였다.” 하였다.
조운모우(朝雲暮雨)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 ‘남녀간의 애정이 깊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조원수(調元手)
음양(陰陽)의 원기(元氣)를 조화시키는 솜씨, 즉 국가의 대정(大政)을 주관하는 정승의 경륜을 말한다.
조월천(趙月川)
조목(趙穆)의 호이다.
조위구억손(曹衛久抑損)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약소국인 조(曹) 나라나 위(衛) 나라처럼, 사이에 끼어 괜히 몸을 움츠리는 신세가 되었다는 뜻의 겸사(謙辭)이다.
조위우(趙魏優)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맹공작(孟公綽)은 조위(趙魏)의 원로가 되기에 넉넉하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맹공작은 염정 과욕(廉靜寡欲)하여 인망이 높으므로, 대가(大家)의 원로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헌문(憲問)」
조유(曹劉)
위(魏) 나라의 조식(曹植)과 유정(劉楨)을 가리킴인데, 이들은 모두 당대의 문장가로서 독특한 문체를 이루어 조유체(曹劉體)가 생기게 되었다.
조유도사(曹劉陶謝)
조류는 삼국(三國) 시대 위(魏) 나라의 재자(才子)인 조식(曹植)과 유정(劉楨)을 말하고, 도사는 진(晉) 나라 때의 고사인 도잠(陶潛)과 남조(南朝) 송(宋) 나라의 사영운(謝靈運)을 말한다.
조육(糟肉)
‘술과 고기’라는 뜻이다.
조읍(漕邑)
흉년에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식량을 조운(漕運)하는 고을을 말한다.
조의(朝儀)
조정(朝廷)의 의식(儀式). 『사기(史記)』 숙손통전(叔孫通傳)에, “叔孫通說上曰 臣願徵魯諸生 共起朝儀 上曰可”라고 보인다.
조의루(趙倚樓)
당(唐) 나라의 시인 조하(趙嘏)를 가리킨다. 두목(杜牧)이 조하가 지은 「조추시(早秋詩)」에 “잔별 몇 개 사이로 기러기 하늘을 날고, 긴 젓대 한 소리에 사람은 누에 기대네[殘星幾點鴈橫塞 長笛一聲人倚樓].”란 시구를 몹시 좋아하였는데, 여기에서 의루(倚樓) 두 자를 따서 조의루라고 불렀다 한다.
조의자대(皁衣頳帶)
조의(皁衣)는 관복(官服)이고 자대는 붉은 띠로서 높은 벼슬을 말한다.
조이(趙李)
한(漢) 나라 때 미모(美貌)와 가무(歌舞)가 뛰어났던 성제(成帝)의 황후 조비연(趙飛燕)과 무제(武帝)의 이 부인(李夫人)을 합칭한 말이다.
조이불망(釣而不網)
이 말은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공자는 낚시는 하되 그물질은 않고, 자는 새는 잡지 않았다[子釣而不綱, 弋不射].”란 말을 인용한 것이다.
조이숙(趙怡叔)
이숙(怡叔)은 조희일(趙希逸)의 자(字)이다.
조익(蜩翼)
익(翼)은 갑(甲)을 이른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의 “蜩翼”의 주(註)에 보인다. 이는 대개 ‘옛일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조인(祖印)
조사(祖師)의 법인(法印)을 뜻하는 말이다. 송(宋) 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시 「차운지명입청원산구(次韻知命入靑原山口)」에 “산세와 조인, 드높기 서로 비슷[山形與祖印 岑絶兩相當]”이라는 구절이 있다.
조인보(趙仁甫)
인보(仁甫)는 조정호(趙廷虎)의 자(字)이다.
조일(朝日)
‘아침’을 말한다.
조일온(趙日溫)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 나라 대부인 조최(趙衰)는 겨울철의 태양빛과 같이 다수웠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백성들에게 은애(恩愛)가 미쳤음을 비유한 말이다. 『좌전(左傳)』 文公七年
조일장(趙日章)
일장(日章)은 조경(趙絅)의 자(字)이다.
조일포(朝日袍)
천자가 청정(聽政)하는 날에 입는 옷을 말한다.
조자건(曺子建)
조조(曹操)의 차자(次子) 조식(曹植)의 자가 자건(子建)이기에 이렇게 불린다. 중국 삼국 시대 위 무제(魏武帝)의 세째 아들이자 문제(文帝)의 아우로 그는 글을 잘하여 무제에게는 사랑을 받았으나 문제에게는 시기를 당한 나머지 처음엔 동아왕(東阿王)에 봉해졌다가 얼마 후 진왕(陳王)으로 봉해진 이후로는 벼슬에 등용될 길이 없자, 병이 나서 죽고 말았다. 『삼국지(三國志)』 권19. / 인용: 昭代風謠序(오광운)
조자고(趙子固)
자고(子固)는 송 나라 조맹견(趙孟堅)의 자이고 호는 의재(毅齋)이다.
조자실(曺子實)
자실(子實)은 조문수(曺文秀)의 자(字)이다.
조장(祖帳)
전별(餞別)을 고하는 자리.
조장(助長)
알묘조장(揠苗助長)의 준말로, ‘좋지 않은 일을 부추긴다’는 뜻이다. 싹이 쉬 자라지 않음을 걱정하여 싹을 억지로 뽑아내는 것같이 억지로 도와 키우는 것. 성질 급한 농부가 아직 나오지도 않은 싹을 빨리 나오라고 잡아당겨 놓는다(助長)는 우화에서 비롯된 말이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上
조장군(祖將軍)
진(晉) 나라 조적(祖逖)이 강을 건너면서 중류(中流)에서 돛대를 치며 맹세하기를, “조적이 중원(中原)을 숙청하지 않고는 다시 이 강을 건너지 않으리라.” 하였다.
조장준우(雕墻峻宇)
『서경(書經)』에, “임금이 높은 궁궐담을 아로새기면 망하지 않는 법이 없다.”는 말이 있다.
조적(鳥跡)
「설문해자서(說文解字序)」에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이었던 창힐(肹頡)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서 처음으로 서계(書契)를 창조하였다[黃帝之史倉頡 見鳥獸蹏迒之迹 知分理之可相別異也 初造書契].” 하였는데, 모양이 올챙이와 같다 하여 과두문자(蝌蚪文字) 또는 과두조전(蝌蚪鳥篆)이라 한다.
조적문계(祖逖聞鷄)
조적(祖逖)은 진(晉) 나라의 장군인데, 유곤(劉琨)과 함께 사주(司州) 주부(主簿)가 되어 같은 이불에 자다가 밤중에 닭의 울음을 듣고는 유곤을 차서 깨우고 일어나 춤을 추면서, “닭이 일찍 울면 난리가 난다. 대장부 난세를 만나 공을 세우자.” 하면서 원제(元帝) 때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북벌(北伐)했고, 석륵(石勒)을 격파하고 황하 이남 땅을 회복하였다.
조적즙(祖逖楫)
조적(祖逖)은 진(晉)의 명신. 일찍이 예주 자사(豫州刺史)가 되어 황하를 건너면서 돛대를 치고 중국 본토를 수복할 것을 맹세하였다.
조적편(祖逖鞭)
진(晉) 나라 때 조적(祖逖)이 평소 강개(慷慨)한 기질이 있었는데, 그가 조정에 등용되자, 그의 친구인 유곤(劉琨)이 그 소식을 듣고는 다른 친구에게 준 편지에 “내가 창을 베고 아침을 기다리며 역로(逆虜)를 효시하는 데에 뜻을 두고서 항상 조생(祖生)이 나보다 먼저 채찍을 잡을까 염려해 온 바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먼저 채찍을 잡는다는 것은, 곧 남보다 앞서 공(功)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조전(彫篆)
기소유(紀少瑜)가 일찍이 꿈에 육수(陸倕)에게 푸르게 아로새긴 붓 한 묶음을 받았더니, 그 때부터 필력(筆力)을 얻어 문장이 되었다. 『남사(南史)』
조절(藻梲)
동자기둥에다 그림을 그려 장식하는 것으로, ‘왕공귀인(王公貴人)의 거소’를 말한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장문중이 점복(占卜)에 쓰는 거북껍질을 보관하되 기둥머리의 두공(斗拱)엔 산 모양으로 조각하고 들보 위 동자기둥엔 수초(水草)를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리오[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라고 실려 있다.
조정(朝正)
정월(正月)에 제후(諸侯)가 천자(天子)에게 조회하여 정교(政敎)를 받는 것을 말한다.
조정(調鼎)
조갱(調羹)과 같은 뜻이다. 『서경(書經)』 「열명(說命)」 下에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내가 국을 요리하거든 네가 소금과 매실이 되라.” 하였는데, 여기서 소금과 매실은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의 역할’을 의미한다.
조정(調鼎)
음식물을 조리하는 것으로, ‘재상이 국가의 일을 다스리는 것’을 비유한 말이며, 맛을 조절하는 데에는 소금과 매실을 가지고 간을 맞춘다. 한시외전(韓詩外傳) 제7권에, “이윤(伊尹)은 유신씨(有莘氏)의 후손으로, 정(鼎)을 지고 조(俎)를 잡고 오미(五味)를 조절(調)하다가 조정에 들어가서 재상이 되었다.” 하였다.
조정침(朝政沈)
고려 때 개성(開城) 동쪽 동파역(東坡驛) 20리 지점에 있던 초현원(招賢院)의 속칭. 의종(毅宗) 24년, 정중부(鄭仲夫) 등이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한 왕을 따라갔다가 난을 일으켜, 배향한 조정의 문ㆍ무관을 모조리 죽여 근처에 있는 호수에 던졌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조정이 가라앉았다.’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다 한다.
조제(雕題)
① 먹실로 이마에 문신을 새기는 것으로, 남만의 풍속이다.
② 오랑캐를 가리킨다. 조제는 이마에 문신을 하는 서융(西戎)의 풍습을 말한다.
조제모염(朝薺暮鹽)
냉이와 소금만으로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몹시 빈곤한 생활을 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조조(懆懆)
근심하여 마음이 편하지 못한 모양
조조(調刁)
나뭇가지가 바람에 부대껴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흔들거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사나운 바람이 한차례 지나고 나면 나무의 뭇 구멍들이 텅 비게 되는데, 그럴 때에도 그대는 나뭇가지들이 여전히 크고 작게 간들거리는 모습을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厲風濟則衆竅爲虛 而獨不見之調調之刁刁乎].”라는 구절이 있다.
조조(慥慥)
독실한 모양, 성의있는 모양
조조(朝朝)
매일 아침
조조(刁刁)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모양, 가볍게 흔들리는 모양.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조조(嘈嘈)
소리의 시끄러운 모양
조조(嬥嬥)
오가는 모양, 홀로 걸어가는 모양, 아리따운 모양
조조(早早)
일찍, 빨리
조조(條條)
조리가 서 있는 모양, 헝클어지는 모양, 슬기가 있는 일
조조(佻佻)
혼자가는 모양, 경박하고 노고를 헤아리지 않는 모양, 근심과 괴로움이 절박한 모양
조조(嘲嘲)
희롱하는 모양
조조간상기(朝朝看爽氣)
‘시답지 않은 세상일에 대해서는 아예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가 거기장군(車騎將軍) 환충(桓沖)의 기병 참군(騎兵參軍)으로 있으면서 전혀 업무를 볼 생각을 하지 않자, 환충이 이를 질책하니 왕휘지가 수판(手版)으로 턱을 괴고 먼 산을 쳐다보면서 “서산의 아침 공기가 참으로 상쾌하기만 하구나[西山朝來 致有爽氣].”라고 말했던 고사가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간오(簡傲)」
조족(絛鏃)
‘사냥매의 부리와 발톱’을 비유한 말이다.
조족지혈(鳥足之血)
‘새발의 피’란 뜻으로, ‘아주 보잘 것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조존(操存)
선심을 잡아 간직함을 말한다. 마음을 미발(未發) 상태로 잘 유지하여 본성(本性)을 함양(涵養)하는 것으로 정(靜) 공부에 해당한다.
조종(朝宗)
물이 바다로 모이는 것처럼 제후(諸侯)들이 천자(天子)에게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강수와 한수 흘러흘러 바다에 인사드린다[江漢朝宗于海].”하였고, 『시경(詩經)』 소아(小雅) 「면수(沔水)」에, “沔彼流水 朝宗于海”라고 하여 천하의 모든 물이 바다로 모이는 것을 말했는데 뒤에는 이를 빌어 제후가 천자를 봄에 뵙는 것을 조(朝), 여름에 뵙는 것을 종(宗)이라 하였다.
조주(趙州)
조주화상(趙州和尙). 당(唐) 나라의 선승(禪僧) 종심(從諗)을 가리킨다. 본성(本姓)은 학(郝)씨이다. 남천보원(南泉普願)의 법제자로 조주(趙州)의 관음원(觀音院)에 주석하면서 법화(法化)가 크게 떨쳐 조주고불(趙州古佛)의 명호를 얻었다. 승려 하나가 조주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祖師西來意]이 무엇이냐.”고 묻자, “뜰 앞에 있는 잣나무[庭前栢樹子]”라고 대답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조주곡(朝晝梏)
사람의 마음이 사물을 접하기 전인 평조(平朝)의 즈음에는 선량한 마음이 발현되었다가도 낮(朝晝)에 온갖 사물을 접함에 이르러서는 그 선량한 마음을 어지럽히어 없어지게 된다는 데서 온 말이다. 『맹자(孟子)』 「고자(告子)」上
조주다(趙州茶)
조주의 차(茶). 조주는 당(唐) 고승(高僧) 종심(從諗)의 법호(法號)로, 그 문하(門下)에서 도화(道化)가 크게 일어났는데, 조주와 곡천선사(谷泉禪師) 사이의 선문답(禪問答) 가운데 차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오등회원(五燈會元)』
조주무(趙州無)
중이 조주(趙州)에게 묻기를, “구자(狗子)는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하니, 조주는, “없다”(無)고 하였다. 이 무(無)라는 답은 곧 참선하는 이가 많이 쓰는 화두(話頭)이다.
조주인(釣周人)
강 태공(姜太公)을 가리킨다. 주(周) 나라 때 강 태공이 위천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다가 문왕(文王)을 만나서 세상에 나왔고, 또 무왕(武王)을 도와 천하를 평정하였다.
조중봉(趙重峯)
중봉(重峯)은 조헌(趙憲)의 자(字)이다.
조중유증삼(鳥中有曾參)
효조(孝鳥)로 알려진 까마귀를 말한다. 증삼은 효성스럽기로 이름났었다.
조지(棗芰)
증자(曾子)의 아버지 증석(曾晳)은 양조(羊棗)를 즐겨 먹었으며, 굴도(屈到)는 지(芰)를 좋아하였는데 모두 춘추시대(春秋時代) 사람이다. 『맹자(孟子)』 「진심(盡心)」
조직(釣直)
『사기(史記)』 권32에 “강태공(姜太公)이 문왕(文王)을 만나기 전 숨어살며 낚시로 소일할 때 곧은 낚시를 사용했는데, 이는 때를 기다리는 데에 뜻이 있지 고기를 잡으려 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조진궁필장(鳥盡弓必藏)
한신(韓信)이 한고제(漢高帝)에게 속아서 잡힐 적에, “높은 새를 다 잡고 나면 좋은 활이 감추어지고 토끼를 다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천하가 평정되고 나니 내가 죽게 되는구나.” 하였다.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조진여(趙陳予)
조경황(趙景貺)과 진이상(陳履常)과 동파(東坡) 자신을 가리킨다. 동파의 시에 “꿈길에서 돌아오자 발소리 들려오며, 누군가 조진여를 불러 대누나[夢回聞剝啄 誰呼趙陳予].”라는 구절이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卷34 與趙陳同過歐陽叔弼新治小齋戲作
조착동시변(鼂錯東市邊)
조조(鼂錯)는 한 경제(漢景帝) 때에 특히 재변(才辯)으로 총애를 받아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영진(榮進)하였으나, 제후들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그 봉지(封地)들을 삭감하려 하다가 오초(吳楚)를 비롯한 칠국(七國)이 들고 일어나자, 그 사건을 진압하기 위한 명분에 몰리어 동시(東市)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한서(漢書)』 卷四十九
조찰(啁哳)
새가 연달아 우는 모양.
조참(篠驂)
죽마(竹馬)와 같은 뜻으로, 아이들이 장난할 때 말처럼 두 다리로 걸터타고 다니는 대막대기를 말한다.
조참(朝參)
매달 네 차례씩 문무 백관이 검은 조복(朝服)을 입고 정전(正殿)에 나가 임금에게 문안을 드리고 정사를 아뢰는 것을 말한다.
조참(曹參)
한(漢)의 조참이 소하(蕭何)를 대신해 승상이 되어 밤낮 술만 마시고 일을 돌보지 않았다. 경대부(卿大夫) 및 빈객(賓客)이 이를 말하려고 찾아가면 조참이 순주(醇酒)를 먹여 취하게 하므로 끝내 입을 열지 못하곤 하였다. 『사기(史記)』 「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
조창(趙昌)
송(宋) 나라 때의 화가(畫家)로 특히 화과(花果)를 잘 그렸다.
조처사(趙處士)
조연귀(趙衍龜)를 가리킨다.
조천관(朝天館)
제주도 세 고을을 경유하여 육지로 나가는 자는 모두 여기에서 바람을 기다리고, 전라도를 경유하여 세 고을로 들어오는 자도 모두 이곳과 애월포(涯月浦)에 배를 댄다고 한다.
조천기린석(朝天麒麟石)
기린굴(麒麟窟)의 조천석을 말한다. 평양 부벽루(浮碧樓) 아래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동명왕(東明王)이 기린마를 타고 이 굴로 들어가 땅속으로부터 조천석으로 나와서 하늘로 올라갔다.” 하는데 그 말굽자국이 지금도 돌 위에 있다.
조천대(朝天臺)
부벽루(浮碧樓) 아래 있는 기린굴(麒麟窟) 남쪽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되 동명왕이 기린말을 타고 이 굴에 들어갔다가 땅속에서 조천석이 되어 솟아나와 하늘로 올라갔다 하며, 그 말발굽 자국이 돌 위에 있다고 한다. 『여람(輿覽)』
조천부미약(朝天鳧未躍)
‘서울로 오는 수령이 출발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후한(後漢) 현종(顯宗) 때 하동(河東) 사람 왕교(王喬)가 섭현(葉縣)의 영(令)이 되었는데, 매달 삭망(朔望)에 대궐에 나와 조회에 참석하였다. 황제가 그가 자주 오는데도 수레가 보이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태사(太史)로 하여금 몰래 엿보게 하였다. 그러자 태사가 그가 올 때에는 두 마리의 오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온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오리가 오는 것을 보고 그물을 펴서 잡으니, 단지 신발 한 짝만 있었다. 『후한서(後漢書)』 卷82 「방술열전(方術列傳)」 王喬
조천촉(照天燭)
옛날 밝은 관원을 조천촉(照天燭)이라 칭도한 고사가 있다.
조철(助徹)
조세법의 일종인 조법(助法)과 철법(徹法)을 말한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조청(朝請)
‘제후(諸侯)가 천자(天子)를 조회하는 것’인데, 봄에 하는 것을 조(朝), 가을에 하는 것을 청(請)이라 한다. 여기서는 백관의 조회 받는 것을 말한다.
조청려(照靑藜)
유향(劉向)이 천록각(天祿閣)에서 교서(校書)를 하면서 전심치지로 거기에만 몰두하고 있었는데, 밤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 청려장(靑藜杖)을 꽂아 두고 문을 두드렸다가 유향이 어둠 속에서 혼자 앉아 글 외우는 것을 보고는 그 노인이 청려장 꽂아둔 데로 다시 가서 그 지팡이 끝을 입으로 부니 거기에서 환한 빛이 발하여 유향에게로 비추어 주었다고 한다. 『습유기(拾遺記)』
조체행상면(棗蔕幸相免)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조식(曹植)이 형인 문제(文帝)로부터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위 문제가 동생인 임성왕(任城王) 조창(曹彰)을 시기하여, 대추 꼭지에 몰래 독(毒)을 발라 놓고는 함께 바둑을 두면서, 자기는 먹어도 좋은 것만을 골라서 먹고 조창에게 먹을 것을 권하여 교묘하게 독살시킨 고사가 있다. 그 뒤에 조식(曹植)도 치죄(治罪)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태후(太后)가 이를 알아차리고 진노하는 바람에 폄작(貶爵)하는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우회(尤悔)」
조최(漕漼)
철벅철벅. 의성어로 물을 건너갈 때 나는 소리.
조축(釣築)
때를 만나지 못해 큰 뜻을 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조(釣)는 주(周) 나라 여상(呂尙)이 반계(磻溪)에서 낚시질한 것을 가리키고, 축(築)은 은(殷) 나라 부열(傅說)이 공사장에서 막노동한 것을 가리킨다. 강태공(姜太公)은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주 문왕(周文王)에게 발탁되어 재상이 되었고, 부열(傅說)은 부암(傅巖)에 은거하면서 죄인들과 함께 무너진 도로를 수축(修築)하다가 은 고종(殷高宗)에게 발탁되어 재상이 되었던 데서 온 말이다.
조충(雕蟲)
① 조충소기(雕虫小技)의 준말로, 벌레 모양이나 전서(篆書)를 조각하듯이 미사여구(美詞麗句)로 문장을 꾸미는 조그마한 기교라는 뜻인데, 즉 자기의 문장이 하찮다는 겸사이다.
② 조충전각(彫蟲篆刻), 조충소기(彫虫小技)니 하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시문(詩文)ㆍ사부(詞賦) 등의 문예(文藝)를 도덕이나 사업에 비하면 조충의 조그만 기교(技巧)란 말이다.
조충국(趙充國)
조충국은 전한 무제(武帝) 때 후장군(後將軍)으로 자는 옹손(翁孫)인데 무예가 뛰어나 흉노와 서강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한서(漢書)』 「조충국전(趙充國傳)」
조충소기(雕虫小技)
① 미사여구(美辭麗句)로 문장만을 꾸미는 조그마한 기교.
② 문장을 비하(卑下)한 겸사(謙辭)이다.
조충수호(雕蟲繡虎)
벌레를 새기고 범을 수놓는다는 말로, 아름다운 문장을 가리킨다.
조충장부치(雕虫壯夫恥)
양웅(揚雄)의 글에, “벌레를 아로새기는 잔재주는 대장부가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문장(文章)의 기교(技巧)를 일삼는 것을 비웃는 말이다.
조침상(弔沈湘)
가의가 장사로 가는 길에 상수(湘水)를 건너면서 초 나라의 충신으로 상수에 빠져 죽은 굴원(屈原)을 조상(吊喪)하였다. 「조굴원부(弔屈原賦)」
조태위지안오비어창읍(條太尉之按吳濞於昌邑)
한 고조(漢高祖)의 조카인 오왕 비(吳王濞)가 반란을 획책하자 천자가 태위(太尉)인 조후(條侯) 주아부(周亞夫)를 보내 대처하게 했는데, 조후는 회양(淮陽)에 이르러 자기 아버지 주발(周勃)의 옛 문객인 등 도위(鄧都尉) 말을 듣고, 창읍(昌邑) 남쪽에다 벽을 쌓고 들어앉아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고 오병(吳兵)의 예봉이 꺾이기를 기다렸다가, 뒤에 출동하여 전승을 거두었음. 『사기(史記)』 「오왕비전(吳王濞傳)」
조태허(曺太虛)
태허(太虛)는 조위(曺偉)의 자이다.
조택목(鳥擇木)
『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저 새들을 보라. 저들도 벗을 찾고 있지 않은가[相彼鳥矣猶求友聲].”하였다.
조토(胙土)
‘국가에 공로가 있어 그 대가로 국가로부터 받은 땅’을 말한다.
조편(祖鞭)
조생지편(祖生之鞭)의 준말로, ‘남보다 먼저 착수한다’ 또는 ‘선편(先鞭)을 잡는다’는 뜻이다.
조포(朝飽)
잠시동안의 정의 만족. 순간의 만족. 하루 아침의 배부른다. 남녀간의 정사를 가리키는 은어.
조하(漕河)
대운하처럼 조운(漕運)하는 강물이란 뜻으로, 한강을 가리킨다.
조하(鳥下)
아주 쏘아 떨어뜨리기 어려운 수리(雕)를 쏘아 잡은 명사수를 이른다. 이광(李廣)이 흉노와 싸울 적에 수리를 떨어뜨릴 만한 흉노의 장사 3인을 만나서 한군(漢軍)도 많은 사상자가 나왔는데, 이광은 끝내 그들을 다 쏘아 죽였었다.
조하원호(鳥下猿號)
춘추 때에 초(楚)나라에 활 잘 쏘는 양유기(養由基)가 활에다 화살을 메우면 새와 원숭이가 놀래고 두려워하였다 한다.
조해(朝海)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제후가 마치 천자를 뵙듯 강한의 물이 바다로 흘러든다[江漢朝宗于海].”라는 말이 있다.
조해(調諧)
‘조화(調和)’와 같은 말이다.
조해소경(鳥駭巢傾)
가족 전체가 화를 당할까 염려하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공융(孔融)이 조조(曹操)에게 체포당했을 때, 7세 된 딸과 9세 된 아들이 태연히 바둑을 두면서 “둥지가 부서졌는데 새 알이 깨지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安有巢毁而卵不破乎]”하고 스스로 각오했다는 소경란파(巢傾卵破)의 고사가 전한다. 『후한서(後漢書)』 「공융전(孔融傳)」
조핵요기(棗核療飢)
대추씨로 요기한다는 말은 곧 후한(後漢) 때 방술사(方術士)인 학맹절(郝孟節)이 대추씨만 입에 머금은 채, 밥을 먹지 않고도 5년, 10년을 지낼 수 있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卷八十二
조혁금액(鞗革金厄)
조혁(鞗革)은 고삐의 머리를 가죽으로 꾸민 것이요, 액(厄)은 액(軛)과 통하는데, 수레 횡목(衡木)의 두 끝을 이른다. 금으로 액한다는 것은 즉 그것을 금으로 장식한다는 말이다. 주자 집주에는, “鞗革革 轡首也 金厄 以金爲環 纑搤轡首也”라 하였다.
조현백(嘲玄白)
시류(時流)에 영합하지 않고 담백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문필 작업에 열정을 쏟겠다는 뜻이다.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태현경(太玄經)』를 집필하면서 담백한 생활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권세에 아부하여 출세한 자들이 “아직도 완전히 검어지지 않고 흰 부분이 있어서 출세하지 못한다.(玄尙白)”고 조롱하자, 해조(解嘲)를 지어 스스로 해명했다고 한다. 『한서(漢書)』 「양웅전(揚雄傳)」下
조협명리(兆協明离)
황태자의 책봉을 칭송한 말이다. 『주역(周易)』 「이괘(離卦)」의 상(象)에 “밝음 두 개가 이괘를 이루나니, 대인이 이로써 밝음을 이어 받아 사방을 비추느니라[明兩作离 大人以繼明 照于四方].”하였는데, 여기에서 명리(明离)가 황태자를 뜻하는 말로 되었다.
조호(雕胡)
줄(菰)의 열매인 고미(菰米)를 말하는데, 식용(食用)으로 쓴다.
조호미(雕胡米)
구황(救荒) 식물로 많이 먹었던 고미(苽米) 즉 줄풀의 열매를 말한다.
조화소아(造化小兒)
고칠 수 없는 중한 병을 말한다. 아이란 곧 병마(病魔)의 뜻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진 경공(晉景公)이 병들었을 때, 두 아이(二豎子)가 고황(膏肓)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그 후 의원을 데려왔으나 의원은 병이 고황에 들어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 『좌전(左傳)』 成公 十年
조화입노추(造化入爐槌)
노추(爐槌)는 쇠붙이를 달구고 두들기는 기구로 곧 인간의 만사가 도야(陶冶)에 의하여 이루어짐을 말한 것이다.
조황옹(釣璜翁)
강태공(姜太公)이 반계(磻溪; 璜河)에서 낚시질하고 있었는데, 뒤에 무왕(武王)에게 발탁되었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조황후(趙皇后)
요여조황후(腰如趙皇后). 전한(前漢) 때 효성제(孝成帝)의 황후(皇后)이던 조비연(趙飛燕)을 이름이니, 그는 몸이 가볍고 가무(歌舞)를 잘하였는데 그 모양이 마치 나는 제비(飛燕) 같았다고 한다. 그는 귀풍송원곡(歸風送遠曲)을 손수 지어서 노래하고 춤춘 것으로 더욱 유명한데, 귀풍송원이란 회오리바람을 멀리 보낸다는 뜻이다.
조회(曹鄶)
조(曹)와 회(鄶)는 주 나라 초기에 봉해진 나라들로서 춘추시대(春秋時代) 제후국 중 가장 빈약한 나라들이다. 『시경(詩經)』에 조풍(曹風)ㆍ회풍(鄶風)이 남아 있다. 『좌전(左傳)』 양공(襄公) 29에 “계찰(季札)이 회(鄶)ㆍ조(曹) 두 나라의 가요에 대해서는 평론이 없었다.” 한 주에 “계찰이 두 나라의 가요를 듣고 너무나도 미약하고 보잘것이 없어서 평론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였다.
조회(藻繪)
‘문채(文彩)’를 말한다이다.
조후(條侯)
한 문제(漢文帝) 때의 명장 주아부(周亞夫)의 봉호이다.
조후견벽야래경(條候堅壁夜來驚)
조후(條侯)는 한(漢) 나라 문제(文帝)ㆍ경제(景帝) 때의 장군 주아부(周亞夫)의 봉호이다. 경제 때에 앞서 제왕(諸王)들로 봉해진 오(吳)ㆍ초(楚)ㆍ조(趙)ㆍ교서(膠西)ㆍ교동(膠東)ㆍ치천(菑川)ㆍ제남(濟南) 등 7개국이 강력한 군대로써 서로 연합하여 모반하자, 주아부가 태위(太尉)로서 명을 받고 그들을 정벌하러 나갔는데, 이때 주아부는 그들에게 먼저 싸움을 걸지 않고 성벽(城壁)을 견고히 하여 지키고만 있던 가운데, 어느 날 밤에 주아부의 군중(軍中)이 경동(驚動)하여 내란(內亂)이 일어났던 데서 온 말이다. 그런데 그 내란은 이내 진정되었고, 끝내 주아부의 군사가 7개국을 크게 격파하여 평정했었다. 『사기(史記)』 卷 五十七
조훈(祖訓)
조사(祖師)의 교훈이다.
조흘강(照訖講)
과거시험에 응하는 유생에 대하여 성균관에서 먼저 그의 호적을 대조한 뒤에 유교 경전의 하나인 『소학(小學)』을 외워 바치게 하는 시험이다.
조희(調戱)
‘희롱하여 놀림’이란 말이다. / 인용: 有客行(성해응)
조희(曹喜)
후한(後漢) 때 사람. 전서(篆書)를 잘 썼으며 비서랑(秘書郞)을 지냈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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