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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4. 대화란 타자와의 상호조율 과정이다 그렇다면 장자 본인의 언어 사용은 어떠한가? 당연히 그의 언어는 화려한 수사들로 은폐된, 다시 말해 사변적이고 메타적인 성격과는 무관한 것이다. 흔히 도가사상은 언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장자가 비판했던 언어가 사변적이고 메타적인 합리적 철학의 언어였을 뿐이라는 점을 망각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그는 결코 모든 언어를 부정했던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의 후학들은 그의 자유로운 언어 사용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언(寓言), 중언(重言), 그리고 치언(巵言)이다. 그런데 이런 세 종류의 문체들..
3. 합리적 철학이 망각한 것들 이제 다시 장자의 언어에 대한 이해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장자에게 인간의 사회적 삶에서 언어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삶의 연관을 떠나 메타적인 이론체계로 변할 때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장자는 이런 본래 기능을 망각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로 세계의 기원과 통일에 대한 거대담론이나 혹은 언어를 가지고 유희하는 혜시(惠施)를 언급하고 있다. 「제물론(齊物論)」 편을 보면 혜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세계(天地)는 나의 더불어 태어났고, 만물들과 나는 하나다[天地與我並生, 而萬物與我爲一].” 혜시에 따르면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이 세계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늘은 내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에 우리..
2. 현실주의에 저항하는 법 특정한 개념 체계를 통해서 다양한 세계들이 다르게 분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해석된 세계들 너머로 하나의 유일한 세계가 실재하는 것은 아니냐는 반문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반문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역사적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로 되어가는 이념적 존재다. 물론 인간이 특정한 공동체 속에 던져져서 이 특정한 공동체의 규칙을 맹목적으로 배운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규칙이든 인간을 철저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이 규칙을 문제삼고, 이 규칙을 넘어서서 새로운 규칙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이 점이 인간..
3. “사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처럼 보인다[物謂之而然].” 1. 『자본론』 이전과 이후의 노동자 다음으로 언어의 의미 계열이 무엇을 함의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장자는 “외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처럼 보인다[物謂之而然]”라고 말하고 있다. 장자에 따르면 우리 앞에 분절되고 구분되어 현상하는 어떤 대상[物]도 그런 분절과 구분을 본질적으로 자신의 본성으로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단지 대대(待對)의 논리로 작동하는 언어가 특정 공동체나 이로부터 구성된 자의식에 의해 사용됨으로써 그 대상은 그런 논리에 의해 분절되어 현상하는 것일 뿐이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떤 타자에 대해 이러저러하다고 부여한 이름이나 속성은 본질적으로 그 타자와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예를 들..
4. 거울을 닦듯이 우리는 장자가 마음을 거울에 비유한 논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거울은 나무 앞에 있으면 나무를 비춘다. 이 거울이 사람 앞에 있으면 사람을 비춘다. 이것은 너무 자연스러워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거울은 항상 무언가를 비추고 있다. 그러나 이 거울이 사람을 비출 때, 이 전에 비추던 나무의 상을 지니고 있으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혹은 이 거울이 항상 사람만을 비추려는 거울이면 어떻게 될까? 장자가 거울의 비유로 마음을 설명하려는 논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장자에게 거울은 때가 끼었든 맑든 항상 무엇인가를 비추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장자의 거울은 우리 인간의 삶과 마음이 세계-내적임 또는 타자와 소통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비유다. 그러므로 거울의 ..
3. 사진 같은 마음과 거울 같은 마음 문제는 자신의 도가 가진 태생적 제약성을 망각하고, 우리가 자신의 도를 보편적이라고 자임하는 데 있다. 이런 착각 속에서 소통의 흔적으로서의 도는 절대적 기준이자 원리로 추상화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눈길을 걷고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이 걸었던 길에는 발자국이 남게 되고, 바로 그것이 길[道]이 된다. 애초에 정해진 어떤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모든 길은 이런 식으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긴 길은 뒷사람들에게는 안전한 길로 보이게 된다. 그래서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고, 어느 사이엔가 이 길은 절대적인 길로 변해버린다. 절대적인 길은 이제 모든 인간들에게는 결코 회의될 수 없는 절대적..
2. 도란 타자와의 소통 흔적이다 행(行)이라는 글자를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자. 이 글자는 인격적으로는 ‘걸어간다’, ‘다닌다’, ‘움직인다’의 의미로 쓰이고, 비인격적으로는 ‘작용된다’, ‘운행된다’, ‘흐른다’의 의미로 쓰인다. 우선 비인격적인 예를 먼저 들어보자. ‘물이 흘러간다’고 해보자. 물은 어떻게 흐르는가? 물은 기본적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결국 물이 흘러간다는 것은 차이(difference)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사건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느 곳으로 가려고 할 때, 아니 정확하게 가고자 할 때, 우리는 자신이 속한 곳과 차이나는 곳으로 가려고 한다. 예를 들어 보부상이 사과를 메고 장사를 하러 갈 때 그는 어느 곳으로 가겠는가? 사과가 많이 나는 곳으로..
2. “길은 걸어다녔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道行之而成)” 1. 걸어갔기에 완성된 길 이제 직접 발제 원문을 읽어보자. 발제 원문의 핵심은 하단부에 놓여 있다. 그러나 발제 원문의 하단부는 너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 구조는 마치 새끼를 꼬듯이 도를 중심으로 삼은 이야기들과 언어를 중심으로 삼은 이야기들이 교차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편의상 이 구조를 풀어헤칠 필요가 있다. 원래 문장들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도는 무엇에 가리어져 진실한 도와 거짓된 도의 구분이 생긴 것일까? 말하기는 무엇에 가리어져 시비판단이 생긴 것일까? 우리가 어디로 가든 도가 부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디에 있든 말하기가 부정될 수 있겠는가? 도는 작은 것의 이룸으로 가리어지고,..
3. 도란 실천적 함축과 실행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비록 장자 후학들이 지은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실천적 진리로서의 도의 의미, 즉 기술, 방법, 길이라는 본래적인 도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유명한 ‘윤편(輪扁) 이야기’를 직접 읽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천도(天道)」편에 실려 있다. 환공(桓公)이 회당의 높은 곳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윤편은 회당 낮은 곳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나무망치와 끌을 밀쳐두고 올라와서 환공에게 물었다. “공께서는 지금 무슨 말들을 읽고 계십니까?” 齊桓公讀書於堂上, 輪扁斲輪於堂下. 釋椎鑿而上, 問桓公曰: “敢問公之所讀者, 何言邪?” 환공이 “성인의 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윤편은 “그 성인은 살아 있습니까?”라..
2. 공자가 ‘朝聞道, 夕死可矣’라고 말한 이유 최소한 공자에게 있어 도란 용어는 길, 방법, 기술 등과 같이 실천적인 진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수영을 잘 하는 방법’을 듣고 ‘아! 이제 죽어도 좋을 정도로 행복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직 그 방법을 가지고 직접 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해보고, 그 방법을 몸에 익혔을 때에만,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결국 공자가 들은 도는 실천적 진리였던 것이다. 실천적 진리는 이론적 진리와는 차이가 난다. 가령 ‘물은 액체다’라는 이론적 진리는 우리가 물과 어떤 관련을 맺어야 하는지, 혹은 우리가 물에 대해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지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반면 ‘물에서는 손을 이렇게 휘젓고 발은 이렇게 놀려야 한다’는 실천적 진리는 직..
1. 중국 철학에서 도(道)의 의미 1. 도는 실천적 진리 성급한 연구자들은 장자가 언어를 부정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장자를 노자와 동일한 사유를 전개한 사람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생긴 선입견으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도덕경(道德經)』 제1장을 보면,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항상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는 구절이 나온다. 왕필(王弼)과 같은 역대의 주석가들과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구절이 언어적으로 표현된 도는 진정한 도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나아가 우리의 사유가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사유를 통해서는 결코 도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실 매우 단순하다. 이들에 따르면 도..
Ⅳ. 말과 길 말하기는 숨을 쉬는 것만이 아니다. 말하기에는 말하려는 것(= 의미)이 있다. 夫言非吹也, 言者有言. 말하기의 의미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실재로 말을 한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어떤 말도 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만일 우리가 말한다는 것이 새들의 지저귐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구별의 증거는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其所言者特未定也. 果有言耶? 其未嘗有言耶? 其以爲異於鷇音, 亦有辯乎? 其無辯乎? 도는 무엇에 가리어져 진실한 도와 거짓된 도의 구분이 생긴 것일까? 말하기는 무엇에 가리어져 시비판단이 생긴 것일까? 우리가 어디로 가든 도가 부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디에 있는 말하기가 부정될 수 있겠는가? 道惡乎隱而有眞僞? 言惡乎隱而有是非? 道惡乎往而不存? 言惡乎存..
3. 고착된 자의식의 폭력성 이제 발제 원문을 읽을 준비가 된 것 같다. 노나라에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노나라 임금은 그 새를 너무 사랑해서, 마치 큰 나라에서 온 사신인 것처럼 응접하였다. 술도 권하고, 맛있는 고기도 주었고, 음악도 들려주면서 그는 극진하게 자신의 애정을 아낌없이 그 새에게 쏟았다. 그러나 새는 슬퍼하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사흘 만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발제 원문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노나라 임금이 새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새라는 타자를 자기의 고착된 자의식 또는 내면에 근거한 외면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새는 새가 아니라 사람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사람을 대접하는 방식으로 새를 대접했으니 어떻게 그 새가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
2. 소통은 항상 무매개적으로 이루어진다 한 가지 분명하게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장자가 권고하는 타자와의 소통은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대화와 토론, 그리고 그 결과로 달성되는 동의와 일치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장자가 문제삼고 있는 소통은, 우리 인간이 지닌 마음[心]의 역량에 존재론적으로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사소통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활동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의사소통은 이미 합리적 이성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해지는 소통이다. 그러나 합리적 이성은 보편적 이성이 아니라 단지 서구적 이성일 뿐이다. 결국 의사소통의 논의에는 사전에 이미 다른 문명권의 사람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독창적인 예술가들, 어린아이들, 환자들, 새들, 꽃들..
3. 새를 새로 키우는 방법 1. 임시적 자의식과 고착된 자의식 여기서 우리는 고착된 자의식이라는 표현과 임시적 자의식이라는 표현을 명확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 물[水]의 비유를 통해서 임시적 자의식과 고착된 자의식 사이의 차이를 이해해보도록 하자. 유동적인 물이 있다고 하자. 이 물은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네모나게 드러나고, 세모난 그릇에 담기면 세모나게 드러난다. 여기서 유동적인 물 자체가 비인칭적인 마음[虛心]을 상징한다면, 상이한 그릇을 만나서 규정된 모양을 띠는 세모난 물과 네모난 물 등은 임시적 자의식을 상징한다. 반면 세모난 그릇에 담긴 물이 얼었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릇으로부터 이 세모난 얼음을 빼어내도 이 얼음은 세모난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이 세모난 얼음은 고착된 자의식을 상징한다..
3. 삶의 문맥에서 도래하는 부득이함 장자가 문제삼고 제거하려는 것은 성심 자체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을 작동시키는 성심을 절대적 표준으로 삼는 사태’라고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장자는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특정한 성심표준으로 삼는 고착된 자의식’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 즉 임시적 자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성심은 인간의 유한성에 존립하는 자연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심은 된 자의식과 필연적 관계를 지니지만,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 자체도 가능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의식에는 고착된 자의식과 아울러 임시적 자의식도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결코 임시적 자의식과 관련된 성..
2. 구성된 마음[成心]을 장자가 부정하지 않은 이유 장자에 따르면 몸을 가지고 사는 우리 인간은 항상 어떤 특정한 삶의 문맥에 처해 살아가는 존재다. 이 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특정한 삶의 문맥에 처해 살아가며, 또 그 문맥과의 소통에 근거하는 구성된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완성된 사람[至人]이나 평범한 사람[愚人]이나 모두 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마치 때가 낀 거울이나 맑은 거울이나 항상 무언가를 비추고 있듯이 말이다. 단지 완성된 사람은 타자와 얽히는 특정한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을 다른 삶의 문맥에 폭력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삶의 문맥에서도 타자와 소통이 가능하기 위한 허심(虛心)을 지니고 있다는 데서 독특할 뿐이다. 우리는 완성된 사람의 마음 상태..
2. 구성된 마음[成心]의 철학적 함축 1. 성심이 있기에 고착된 자의식이 작동한다 이제 성심에 대한 장자의 진단을 직접 읽어보도록 하자. 「제물론(齊物論)」 편에서 장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대저 구성된 마음[成心]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그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반드시 변화를 알아 마음으로 스스로 판단하는 자만이 구성된 마음이 있겠는가? 우매한 보통 사람들도 이런 사람과 마찬가지로 구성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직 마음에서 구성된 것이 없는 데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마치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는 궤변과 같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夫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無師乎? 奚必知代而自取者有之? 愚者與有焉! 未成乎心而有是非, 是今日適越而昔至也. 是..
3. 다시 구성되는 주체 보통 우리는 선입견을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분명 선입견이 타자와의 소통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지 못하는 것은 선입견의 불가피성이다. 우리는 선입견이 없다면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이해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랑’에 대한 선입견이 없다면 『러브스토리』라는 영화를 보아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선입견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선이해이자 선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송나라 사람도 만약 이런 선입견이 없었다면 월나라로 장사하러 갈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철학적 해석학의 대표주자인 가다머(Gadamer)와 같은 사람은 선입견을 철학적으로 긍정했던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에 따르면 선입견은 구체적인 현재의..
2. 송나라의 삶의 문맥을 가지고 월나라에 간 사내 논의의 편의상 먼저 「소요유」편에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읽어보자.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송나라 사람이 ‘장보(章甫)’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로 장사를 갔다. 그런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모자가 필요하지 않았다[宋人資章甫而適越, 越人斷髮文身, 無所用之].” 이 송나라 사람이 살았던 삶의 문맥을 송이라고 하고, 그가 모자를 팔려고 갔지만 모자를 쓸 필요가 없었던 월나라의 삶의 문맥을 월이라고 해보자. 삶의 문맥이 지닌 구체성과 고유성은 우리의 삶이 몸을 통해 타자의 삶과 얽히게 되는 데서 기인한다. 특정 삶의 문맥 송에서 살았던 이 인물이 다른 삶의 문맥 월로 장사하러 가게 된 메카니즘을 재구성해 ..
1. 구성된 마음[成心] 또는 선입견의 의미 1. 성심이 초자아가 될 때의 위험성 발제 원문의 함의를 알아보기 전에 우리는 먼저 구성된 마음으로 번역되는 성심(成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보통 연구자들은 성심을 선입견이나 편견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성심과 관련된 장자의 진단은 이렇게 간단히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만약 장자가 일체의 모든 성심을 부정하였다면, 그는 우리에게 어떤 관점이나 입장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권고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장자가 성심을 문제삼고 있는 이유는 성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성심이 모든 사태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데 절대적인 기준, 즉 초자아가 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데 있다. 예를..
Ⅲ. 새를 새로 키우는 방법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구소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 且女獨不聞耶? 昔者海鳥止於魯郊, 魯侯御而觴之於廟, 奏九韶以爲樂, 具太牢以爲膳. 鳥乃眩視憂悲, 不敢食一臠, 不敢飮一杯, 三日而死. 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 인용 목차 장자 원문 트위스트 교육학 철학 삶을 만나다 카자흐스탄 여행기 장자에게 듣는 ..
3. ‘나는 이런 사람이다’란 자의식이 확고해지는 두 가지 상황 장자의 탁월한 점은 충효라는 유가적 이념이 비록 꿈과 같이 근거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특정 공동체에서는 현실적인 물리력을 갖는다는 것을 그가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데 있다. 충효가 삶의 규칙인 공동체에서 충효를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공동체의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고 심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만약 그 공동체의 규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공동체로 떠나야 한다. 그러나 새로 도착한 공동체도 그 나름대로의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공동체를 완전히 떠날 수는 없는 존재다. 그러나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있지 않을까? 산 속에서 혼자 사는 방법을 우리는 택할 수 있지 않을까? 그..
2. 타자를 만나고 나서야 내가 속한 공동체가 드러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물고기가 물 속에서는 물이나 자신이 물고기라는 사실도 의식하지 않지만, 물 바깥에 나와서는 물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물고기라는 것을 의식한다는 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신의 공동체의 규칙을 의식하기 위해서는 다른 공동체와 조우해야만 한다. 문제는 다른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공동체의 규칙에 병적으로 집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데 있다. 우스갯소리로 외국에 가봐야 애국자가 된다는 말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런 애국자가 다른 나라에 대해 배타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점을 우리는 쉽게 간과하고 있다. 사실 애국자와 다른 나라를 미워하는 것은 동시적..
3. 공동체에서의 삶 1. 비합리적으로 보이던 타공동체의 풍속들 공동체들은 시간적으로 혹은 공간적으로 상이한 가치체계들을 가지고 유지되어 왔다. 봉건시대에서 여자가 재혼하는 것은 악으로 그리고 여자가 정절을 지키는 것은 선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자의 재혼을 권장하는 것이 선이고, 여자의 재혼을 금지하는 것은 악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상이한 규정들과는 달리 모든 공동체들이 기본적으로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공유하고, 이 구조에서 자신들이 선이라고 부르던 내용을 절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모든 공동체들의 규칙은 내용은 상이하다고 할지라도 그 구조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관념적으로 보면 모든 공동체의 선/악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자의적인 것처럼 보일 ..
3.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아이가 더 자라게 되면, 이제 이유식을 떼고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김치 등의 음식은 얼마나 자극적이고 불쾌하겠는가? 그럼에도 그 아이는 먹게 된다. 왜냐하면 김치를 먹는 자신을 어머니는 “우리 아기 이쁘구나, 김치도 잘 먹고!”하면서 사랑해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해서 우리는 어머니라는 타자를 통해 그 타자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규칙을 내면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공부 잘하는 자신을 욕망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자신을 공부 잘하는 자신으로 만들 것이다. 하물며 우리는 부모가 원하는 것을 억지로하지 않는 것도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얻기 위한 극단적인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타자가 욕망한다고 상상한 것에..
2. 엄마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최초의 초자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의 규칙을 초자아로 내면화하게 되었을까?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쉽게 그것이 우리에게 가해진 공동체의 폭력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오히려 우리는 주체로서 탄생하기 위해서 공동체적 규칙을 기꺼이 수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우리는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하기 위해서 공동체의 규칙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선악의 규칙을 내면화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과연 공동체 속에서 안정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초자아를 기존의 공동체 속에서 안정적으로 살기 위한 인간이란 동물의 자기 배려라고 이해해야 한다.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가 아니면 삶..
2. 나는 누구인가? 1. 주체란 초자아를 받아들이면서부터 존재한다 어느 여성이 화장을 하려고 거울을 본다. 그리고 그 거울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립스틱을 바른다. 이것은 너무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모습이라 그다지 신기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는데, 거울 안에 비친 얼굴이 내 얼굴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없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는 거울에 비친 얼굴이 자신의 얼굴인지를 알게 되었을까? ‘거울 속의 모습=자신의 모습’인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거울 속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제3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으로 ..
5. 장자의 회의주의는 합리적 철학의 허구성을 비판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장자는 근본적 회의주의라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표면적 평가는, ‘깨어난 후에야 자신의 인식이 꿈이었다는 것을 안다’는 장자의 말에서, 여지없이 부서진다. 장자는 깨어남[覺]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가? 여기서 자기충족적인 언어와 인식의 닫힌 체계로부터, 그 감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단서와 가능성이 보인다. 물론 장자가 권고하는 깨어난 상태는 맑은 연못[淸淵]과도 같은 마음, ‘나는 나다’는 생각을 제거한 비인칭적인 마음의 상태다. 그렇다면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장자의 회의주의는 하나의 학설로서 주장된 것이 아니라 치료적(therapeutic)인 기능을 수행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
4. 반성적 인식의 한계 다음으로 반성적 인식과 근본적 회의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장자의 입장을 알아보기 위해서 「제물론(齊物論)」편에 나오는 다른 두 번째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꿈속에서 잔치를 연 사람이 새벽에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고, 꿈속에서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 새벽에 (즐겁게) 사냥을 하러 나간다. 꿈을 꿀 때, 우리는 자신이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꿈꾸고 있으면서 꿈속에서 꾼 어떤 꿈을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는 깨어나서야 자신이 꿈꾸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단지 완전히 깨어날 때에만, 우리는 이것이 완전한 꿈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들이 깨어 있다고 생각하고, 매우 자세하게 인식하고 있는 척하며 ‘왕이시여!’ ‘하인들아!’라고 말하는데, ..
3. 객관적인 옳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제물론(齊物論)」 편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재구성한다면, 우리는 그의 입장을 좀더 구체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이야기를 읽어보자.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고 반신불수가 되겠지. 미꾸라지도 그럴까? 사람이 나무 위에서 산다면 겁이 나서 떨 수밖에 없을 것일세. 원숭이도 그럴까? 이 셋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거주지’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좋다고 먹지.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맛’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원숭이는 비슷한 원숭이와 짝을 맺고, 순록은 사슴과 사귀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놀지 않는가! 모장(毛嬙)이나 서시(西施)는 남자들..
2. 세 가지 인식론을 비판하다 합리적 철학에 대한 장자의 비판이 가장 분명하게 전개되어 있는 편이 바로 「제물론(齊物論)」편이다. 그가 얼마나 합리적 철학에 대해 비판적이었는지 보여주고 있는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자. 설결(齧缺)이 스승 왕예(王倪)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누구나 옳다고 동의할 수 있는[同是]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齧缺問乎王倪曰: “子知物之所同是乎?”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曰: “吾惡乎知之!” “선생님께서는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아십니까?” “子知子之所不知耶?”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曰: “吾惡乎知之!” “그러면 사물이란 알 수는 없는 것입니까?” “然則物無知耶?”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 말이나 좀 해보세. 도대..
1. 보편적 앎에 대한 장자의 비판 1. 나를 대상화하는 문제점 철학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질 수 있다. 그 하나가 세계와 인간을 포괄적으로 설명(explanation)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체계를 설정하려고 노력하는 철학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런 보편성과 합리성을 회의하면서 실존적 사태에 주어진 것만을 기술(description)하려는 철학이다. 앞으로 편의상 전자를 합리적 철학이라고 부르고, 후자는 기술적 철학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물론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주어진 세계와 인간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합리적 철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종류의 합리적 철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여야만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앞으로 도래해야만 할 합리적 체계를 모색하고 이것을 도달해야..
Ⅱ. 한계가 없는 앎과 한계가 있는 삶 우리의 삶에는 한계가 있지만, 아는 것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것으로 한계가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이다. 그런데도 계속 알려고만 한다면 더더욱 위험할 뿐이다. 吾生也有涯, 而知也無涯. 以有涯隨無涯, 殆已! 已而爲知者, 殆而已矣! 선을 행해도 이름이 날 정도로 하지 말고, 악을 행하더라도 벌 받을 정도로 행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몸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고, 삶을 온전하게 할 수 있고, 어버이를 공양할 수 있고, 주어진 수명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爲善無近名, 爲惡無近刑, 緣督以爲經, 可以保身, 可以全生, 可以養親, 可以盡年. 인용 목차 장자 원문
3. ‘조릉에서의 깨달음’이란 길라잡이 우리는 조릉에서 장자가 터득한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개별자들의 삶은 타자와 밀접하게 관계될 수밖에 없다는 것, 둘째: 타자와의 적절한 관계맺음은 맑은 연못과 같은 맑은 마음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 앞의 깨달음은 인간 삶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유한성에 대한 통찰이다. 유한에 대한 자각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바깥에 외부가 있다는, 즉 자신의 외부에 타자가 존재한다는 자각과 동시적인 사태이기 때문이다. 반면 뒤의 깨달음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자신으로 환원불가능한 타자와의 소통이 우리 마음에서 가능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장자에게 혼탁한 물[濁水]로 비유되는 마음과 맑은 연못[淸淵]으로 비유되는 마음의 차이는 중요하다. 전자..
2. 삶에 조우할 수밖에 없는 타자를 사유하다 장주로 기록된 우화들 가운데 장자철학이 지닌 문제의식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조릉(雕陵)이라는 사냥터에서 장자가 경험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산목(山水)」편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다. 장주(莊周)가 조릉의 울타리 안에서 노닐고 있을 때, 그는 남쪽에서 온, 날개의 폭이 일곱 자이고 눈의 크기가 한 치나 되는 이상한 까치를 보았다. 그 까치는 장주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 밤나무 숲에 앉았다. 莊周游於雕陵之樊, 睹一異鵲自南方來者. 翼廣七尺, 目大運寸, 感周之顙, 而集於栗林. 장주는 말했다. “이 새는 무슨 새인가? 그렇게 큰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날아가지 못하고, 그렇게 큰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를) 보지도 못하는구나..
3. 두 명의 장자와 조릉에서의 깨달음 1. 장주(莊周)와 장자(莊子) 장자는 관직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어느 때 태어나서 어느 때 죽었는지, 혹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장자』에는 장자에 대한 많은 우화들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이 우화들을 통해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간접적으로 추론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우화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두 명의 장자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명은 장자(莊子)라고 불리는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장주(莊周)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장주는 바로 우리가 다루려는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철학자의 실명을 지칭하고 있다. 반면 장자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장 선생님이라는 경칭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
율시 일변도의 문단을 비판하며 민요의 가치를 말하다원시 중(原詩 中) 홍석주(洪奭周) 정이 드러난 여항의 노래엔 시경의 풍조가 살아 있다或曰: “子之言詩也如此, 則唯三百篇, 可以當之, 舍是以往, 皆非詩歟?” 曰: “惡惡可? 氣之在時者, 有盛衰; 而情之在人者, 無古今. 今夫人怒則勃然而咜, 喜則怡然而笑, 悲哀憂戚, 嗚咽而太息者, 斯固人眞情之所動, 而古今不能以隔之者也. 故爲詩之深淺高下, 或不能齊, 而其竗感之機, 固千載而如一日也. 是以, 由其感神明也, 則安世練時, 固無以異乎烈祖ㆍ我將之篇也; 由其感軍旅也, 則鐃歌皷吹, 亦無以異乎小戎ㆍ出車之篇也. 及其奮然而作, 潸然而涕, 令人神𨓏而不知, 則離騷ㆍ九歌, 易水秋風, 固未嘗無興觀羣怨之美也, 至若淫聲曼詞, 使民蕩志而移情, 則雖降而子夜ㆍ讀曲, 亦或不異乎桑間濮上之音也. 唐之與..
병에 걸렸기에 삶에 너그러워진 세 가지 이유병해 이(病解 二) 조귀명(趙龜命) 순식간인 삶 속에 아픔도 순식간인 것을余有病而自寬者三. 夫天地一元之數爲十二萬九千六百年, 此可謂久矣. 而達者猶以瞬息視之. 人生於其間, 號爲壽者, 不過八九十, 其爲瞬息, 亦甚矣. 縱使有疾痛憂苦, 亦幾何忍哉? 此其自寬者一也. 건강한 이는 모를 아픈 이만이 누리는 기쁨八珍之味, 惟貧者食之, 知其爲異味也, 而富厚之子弟, 習於口, 未嘗以爲異, 異味而不以爲異, 則是實不知天下之味者也. 彼强健者, 亦然. 惟終身而無所痛苦, 故彼反恬於强健, 不謂其眞可喜也. 今夫癃疾之人, 一歲而或得一日健, 一日而或得一時蘇, 方其蘇而健也, 百骸調適, 手足宴安, 忽若忘身, 其幸無比. 如此佳境, 豈强健者之所能知乎? 於是, 無風之夕, 不雨之朝, 二三友朋, 杖屨逍遙, 東陌..
3. 장자에 대한 선입견을 뚫을 때 장자와 만나게 된다 통용되는 33편의 곽상의 판본은 선집임에도 불구하고, 「내편」 7편을 거의 건드리지 않고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곽상의 판본에 실린 「내편」 7편이 『장자』를 최초로 편찬한 한대의 고본 『장자』의 「내편」과 크게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곽상 당시에 아직도 이 고본 『장자』와 최소한 세 종류의 선집본 『장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함부로 자신이 선집한 『장자』에 자신의 글을 삽입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이런 추론은 『장자』라는 책의 진위문제를 제기한 소식(蘇軾, 1037~1101) 이래로 주장되었던 지금까지의 많은 학자들의 일반적인 의견과 일치한다. 이런 의견에 따르면 「내편」에는 기원전 4세기 말에 살았..
2. 황로학파가 고본 『장자』를 편찬했다 「내편」 7편의 편명이 세 글자로 되어 있다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52편의 장자, 고본의 편찬자가 누구인지를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은 한대(漢代)의 위서(緯書)의 편명이 지닌 특징, 즉 세 글자로 편명이 구성된다는 특징과 일치하는 것이다. 결국 『장자』 고본은 늦어도 기원전 2세기경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학자들은 이 고본의 편찬자들을 곽상 판본의 「외ㆍ잡편」 중 천(天)으로 시작되는 편들인 「천지(天地)」, 「천도(天道)」, 「천운(天運)」, 「천하(天下)」와 「각의(刻意)」를 지은 사람들로 추정하고 있고, 이들을 황로파(黃老派)라고 부른다. 황로(黃老)라는 표현은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당시 제자백가(諸子百家)들에게..
2. 『장자』라는 책의 구성과 편찬자 1. 장자가 남기고 싶었던 진정한 가르침 통행되는 『장자』의 판본은 곽상(郭象: 252~312)이 편집한 것으로, 총 33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33편은 「내편」, 「외편」, 그리고 「잡편」으로 묶여 있는데, 「내편」은 7편, 「외편」은 15편, 그리고 「잡편」은 11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서기 1세기 경에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를 보면, 『장자』는 전체 52편으로 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서 장자는 10여만 언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통용되는 곽상의 판본에 따르면 『장자』는 6만 4606자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곽상이 편집한 것은 사마천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