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07 (943)
건빵이랑 놀자
포복절도(抱腹絶倒)② 그런 ‘예인적’ 천재성은 필담을 할 때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먹어치우고, 태우고, 찢어버리는 등 금기의 벽에 도전하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연암은 긴장을 이완시키고,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끊임없이 유머를 구사한다. 작은 국자로 국물을 뜨기만 했다. 국자는 숟가락과 비슷하면서 자루가 없어서 술잔 같았다. 또 발이 없어서 모양은 연꽃잎 한 쪽과 흡사했다. 나는 국자를 잡아 밥을 퍼보았지만 그 밑이 깊어서 먹을 수가 없기에 학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빨리 월나라 왕을 불러오시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월왕의 생김새가 긴 목에, 입은 까마귀 부리처럼 길었다더군요.” 내 말을 들은 학성은 왕민호의 팔을 잡고 정신없이 웃어댄다. 웃느라 입에 들었던 밥알을 튕겨내면서 재채기를 수없이 해댄..
포복절도(抱腹絶倒) 퀴즈 두서너 가지, 『열하일기』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먹거리는? 술, 『열하일기』에서 돈보다 더 유용한 교환가치를 지닌 물건은? 청심환, 가장 큰 해프닝은? ‘판첸라마 대소동!’이 정도만 맞혀도 『열하일기』의 진면목에 꽤나 접근한 편이다. 그럼 『열하일기』에 가장 자주 출현하는 낱말은? 정답은 포복절도! 여행의 목적이 마치 포복절도에 있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연암은 이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그 자신이 남을 포복절도하게 만들 뿐 아니라, 사소한 일에도 그 자신 또한 기꺼이 포복절도한다. “내 성미가 본디 웃음을 참지 못하므로, 사흘 동안 허리가 시었다”고 할 때, 그건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그래서 연암이 움직일 때마다 ‘웃음의 물결’이 출렁거린다. 열하에서 윤가전, 기려천 등과 ..
4부 범람하는 유머 열정의 패러독스 1장 유머는 나의 생명! ‘스마일[笑笑] 선생’ ‘호모 루덴스’가 펼치는 ‘유머와 역설의 대향연’ ―― 만약 『열하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나는 예고편의 컨셉을 이런 식으로 잡을 작정이다. 고전을 중후하게 다루기를 원하는 고전주의자(?)들은 마뜩잖아 할 터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유머 없는 『열하일기』는 상상할 수조차 없으니.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열하일기』는 유머로 시작하여 유머로 끝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도처에서 유머를 구사한다. 그것은 배꼽잡는 해프닝이 일어날 때만이 아니라, 중후한 어조로 이용후생을 설파할 때, 화려한 은유의 퍼레이드나 애상의 분위기를 고조시킬 때, 언제 어디서나 수반된다. 이를테면 유머는 『열하일기」라는 ‘고원’을 관류하는 ..
23. 안의현의 도둑들을 없애는 방법 邑底有一漢, 常以打罵人討酒食為能事, 每日鬪鬨, 或被罪官庭, 逞憾尤甚, 人皆閃避不與較也. 一日, 吏有匍匐喘息, 手持一大椎, 入庭號訴者曰: “某甲持此椎, 欲打殺小人.” 先君笑曰: “促召刻工來!” 使刻之椎上, 曰: “噫巨椎, 誰所作? 曰某甲. 酗肆惡, 出乎爾, 反乎爾, 理莫逭, 漢律疻, 用之掛, 里門側. 有不悛, 人共擊. 官所許, 證此刻.” 吏亦笑而退, 某甲聞此言也, 更不敢起鬧. 邑底素多穿窬. 一日, 夜有內衙盜警, 先君趣令入軍器庫鐵蒺藜, 又令治匠多造以入, 及入, 家人有稟請布諸垣下. 先君曰: “不必布, 只令偷兒聞之耳.” 自此近衙, 無穿窬之警. 如此事, 往往以詼諧傳之. 每使詗盜於場市之間, 隨現捉致, 則討捕營校卒輒來現. 所謂討捕營卽營將也, 而專管治盜者也. 校卒因以作姦, 與盜偕行..
9. 엄격한 사람임에도 세상의 화를 피할 수 있었던 이유 每於事爲, 其在大體法網處, 一用謹嚴規度, 雖在上官, 必爭辨之. 至於汗漫不打緊之事, 或論議不一, 或囑托沓至, 疲於酬接, 事難究竟處, 輒用詼諧漫語, 緩其機而解其紛, 故事無不成而人亦不怒. 松園金公(履度), 常語人曰: “以燕岩嚴厲之氣像高峻之性格, 若無誠諧一着以彌縫之, 則難乎免於今之世矣.” 인용 목차 유쾌한 시공간
50. 자기 당파로 들어오길 원하는 친구들을 물리치는 방법 先君窮居, 到老始登蔭路, 世人猶不知無復當世志, 或欲推輓之. 如沈鄭諸人, 俱少時交, 來致意欲使與聞世事, 而先君輒以笑語漫漶若未曉者, 遂不復來. 인용 목차 유쾌한 시공간
달라이라마를 만나다! 청왕조는 판첸라마를 황제의 스승으로 모시는 한편, 피서산장 근처에 황금기와를 얹은 전각을 마련해두고서 극진히 대접했다. 이렇게 판첸라마를 떠받든 것은 티베트의 강성함을 억누르기 위한 정치적 방편이기도 했지만, 그 못지않게 티베트 불교의 신성함을 존중하는 유목민의 유연한 태도 역시 작용했다. 그럼, 조선의 사행단은 어떠했던가? 청나라조차 오랑캐라고 보는 마당에 ‘황당무계한’ 티베트법왕에게 머리를 숙일 리 만무했다. 열하에서의 ‘한바탕 소동’은 이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다. 이름하여, ‘판첸라마 대소동!’ 「찰십륜포(札什倫布)」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예부에서 조선 사신들도 판첸라마에게 예를 표하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사신단은 “머리를 조아리는 예절은 천자의 처소에서나 하는 것인데, 어찌 ..
환생과 이적 잘 알고 있듯이, 달라이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환생으로 간주된다. 연암은 윤회와 환생의 차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법왕이 남의 몸을 빌려 태어나는 것과 윤회는 어떻게 다릅니까[余曰目今法王投胎奪舍之法 非輪回之證耶]?” 윤형산의 대답은 이렇다. “그것은 몸을 바꾸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밝게 빛나는 지혜와 금강의 보체(寶體)는 본디 젊지도 늙지도 않는 것입니다. 장작 하나가 다 타고 나면 다른 나무로 불이 옮겨 붙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維此光明信識 金剛寶體 固無童耄 薪盡火傳].” “비유컨대, 천 리를 가는 자가 집을 짊어지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 반드시 숙소를 옮겨 가면서 길을 가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천하에 다정한 사람이라 해도 주막집에 정이 들었다고 그대..
흰 수건과 대보법왕 먼저 다음 장면부터 음미해보자. 때는 2001년 여름쯤이고, 장소는 인도의 북부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궁전 앞이다. 궁을 나섰을 때 나는 정말 놀랐다. 궁으로부터 보드가야의 대탑에 이르는 연도에는 수천수만의 티베트 군중들이 달라이라마를 한번 뵙기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 모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더더욱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그 순간에 전개된 군중들의 모습이다. 달라이라마와 내가 궁을 나서는 순간, 갑자기 온 거리가 정적에 휩싸였다. 영화의 뮤트 슬로우 모션처럼. 온 세계가 너무도 조용해진 것이다. 미동의 소리도 없었다. 그들은 달라이라마를 육안으로 쳐다보는 그 감격을 가슴으로, 눈빛으로만 표현했다. (중략) 달라이라마는 그들의 군주였고, 다르마의 구..
마술이 예지가 되는 순간 다음은 ‘판타지아’ 「환희기(幻戱記)」의 클라이맥스이자 대단원이다. 요술쟁이는 큰 유리 거울을 탁자 위에 놓고 시렁을 만들어놓는다. 거울을 열어 모두에게 구경시키니, 여러 층 누각과 몇 겹 전각이 단청을 곱게 칠했다. 관원 한 사람이 손에 파리채를 잡고 난간을 따라 서서히 걸어 간다. 아름다운 계집들이 서넛씩 짝을 지어 보검을 가지고 혹은 금병을 받들고, 혹은 봉생을 불고 혹은 비단 공도 차며, 구름 같은 머리와 아름다운 귀걸이가 묘하고 곱기가 비할 데가 없다. 방 안에는 백 가지 물건과 수없는 보물들이 그득하여 참으로 부귀가 지극하니, 여러 사람들은 부러움을 참지 못하여 서로 구경하기에 바빠서 이것이 거울인 줄도 잊어버리고 바로 뚫고 들어가려 한다. 그러자 요술쟁이가 즉시 거울..
판타지아(fantasia) 등불이 노끈에 이어져 저절로 불이 붙어 타오른다. 노끈을 따라 타면서 또 다른 등불로 이어진다. 4~50등이 일시에 타면서 주위가 환하게 밝아진다. 1천여 명의 미모의 남자들이 비단 도포에 수놓은 비단 모자를 쓰고 늘어섰다. 각각 정자 지팡이 양쪽 끝에 모두 조그만 붉은 등불을 달고 나갔다 물러섰다 하여 군진(軍陳) 모양을 하더니 순식간에 삼좌(三座) 오산(鼇山, 자라 등 위에 얹혀 있었다는 바닷속 산으로 신선이 산다고 함)으로 변했다가 다시 일순, 변해서 누각이 되고, 또 졸지에 네모진 진형으로 바뀐다. 황혼이 되자 등불빛은 더욱 밝아지더니 갑자기 ‘만년춘(萬年春)’이란 석 자로 변했다가 갑자기 ‘천하태평(天下太平)’ 네 글자로 변한다. 이윽고 두 마리 용이 되어 비늘과 뿔과..
부와 권력에 눈 먼 이들에게 다시 서두의 논의로 돌아가면, 그에게 있어 이용과 후생은 정덕을 위한 교량이다. 정덕(正德)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건 삶의 지혜이다. 이것이 뒷받침되지 않는 부와 편리함이란 무의미하다. 그런 점에서 연암이 추구한 문명론을 ‘근대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오히려 그의 문명론은 물질과 부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근대적 패러다임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취한다. 따라서 이용후생학자로서 연암을 다룰 때, 반드시 그가 ‘삶의 지혜’를 설파하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장대기(將臺記)」와 「황금대기(黃金臺記)」가 좋은 텍스트다.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이 얼마나 큰지 모를 것이고, 산해관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며, 관 밖의 ..
수레와 의학을 통한 이용후생 그의 관심은 이렇게 벽돌, 가마, 온돌에서 시작하여 수레, 말로 이동한다. 수레와 말은 공간적 한계를 가로지를 수 있는 이동수단이기 때문이다. “대개, 수레는 천리로 이룩되어서 땅 위에 행하는 것이며, 물을 다니는 배요, 움직일 수 있는 방이다. 나라의 쓰임에 수레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시급히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조선에도 수레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조선의 수레는 바퀴가 온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자국이 틀에 들지 않으니, 이는 수레 없음과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사대부들은 “우리나라는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고 한다. 언어도단! 수레를 쓰지 않으니 길이 닦이지 않는 것인데, 사태를 거꾸로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결론은 “사방이..
이용(利用)ㆍ후생(厚生)ㆍ정덕(正德) ‘이용(利用)’이 있은 뒤에야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뒤에야 정덕(正德)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롭게 사용할 수 없는데도 삶을 도탑게 할 수 있는 건 세상에 드물다. 그리고 생활이 넉넉지 못하다면 어찌 덕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도강록(渡江錄)」 利用然後可以厚生 厚生然後正其德矣 不能利其用而能厚其生 鮮矣 生旣不足以自厚 則亦惡能正其德乎 이게 그 유명한 ‘이용후생’이라는 테제가 담긴 문장이다. 연암을 실학자 중에서도 ‘이용후생파’라고 분류하는 건 이런 명제들에 근거한다. 근데 어째서 ‘정덕’이라는 항은 생략되었을까? 덕을 바로 잡는다는 게 너무 추상적이어서 ‘헛소리’처럼 느껴진 건가? 아니면 너무 지당한 말이라 ‘하나마나’ 하다고 간주한 탓일까? 깊..
호모 루덴스(Homo Rudens) 그러니 이런 악동의 눈에 길 위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건이 유쾌한 이야깃거리가 된다. 한번은 길에서 소낙비를 만나, 비를 피하느라고 점포에 들러 차대접을 받고 있었다. 점포의 앞마루에 여인네들 다섯이 부채에 붉은 물감을 들여 처마 밑에 말리고 있는데 별안간 말몰이꾼 하나가 알몸으로 뛰어들었다. “머리에 다 해어진 벙거지를 쓰고, 허리 아래에 겨우 한 토막 헝겊을 가릴 뿐이어서 그 꼴은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고 그야말로 흉측했다.” 마루에 있던 여인들이 왁자그르 웃고 지껄이다가 그 꼴을 보고는 모두 일거리를 버리고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주인이 화가 치밀어 팔을 걷어붙이고는 뺨을 한 대 때렸다. 말몰이꾼의 말인즉슨, “말이 허기가 져서 보리찌꺼기를 사러 왔는데 당신은 ..
벽돌과 돌과 잠 그는 타고난 장난꾸러기다. 사람들 사이의 장벽을 터주면서 동시에 자신 또한 기꺼이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사건들마다 ‘유쾌한 악센트’를 부여하는 악동! 새벽에 길을 떠나면서 보니 지는 달이 땅 위에서 몇 자 안 되는 곳에 걸려 있다. 푸르고 맑은 기운이 감도는데, 모양은 아주 둥그렇다. 계수나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고, 옥토끼와 은두꺼비가 가까이서 어루만져질 듯하다. 항아의 고운 비단 옷자락에 살포시 흰 살결이 내비친다. 나는 정진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참 이상도 하이.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뜨네그려.” 정진사는 처음엔 달인 줄도 모르고 나오는 대로 응수한다. “늘상 이른 새벽에 여관을 떠나다 보니 동서남북을 분간하기가 정말 어렵구만요.” 일행이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일신수필(馹汛隨..
예기치 않은 사건 속을 경쾌히 질주하다 정진사ㆍ조주부ㆍ변군ㆍ내원, 그리고 상방 건량판사(乾粮判事)인 조학동 등과 투전판을 벌였다. 시간도 때우고 술값도 벌자는 심산이다. 그들은 내 투전 솜씨가 서툴다면서 판에 끼지 말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술만 마시란다. 속담에 이른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격. 슬며시 화가 나긴 하나 어쩔 도리가 없다. 그렇지만 옆에 앉아 투전판 구경도 하고 술도 남보다 먼저 먹게 되었으니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 與鄭進士 周主簿 卞君 來源 趙主簿 學東 上房乾粮判事 賭紙牌以遣閒 且博飮資也 諸君以余手劣 黜之座 但囑安坐飮酒 諺所謂‘觀光但喫餠’也 尤爲忿恨 亦復柰何 坐觀成敗 酒則先酌也 非惡事 벽 저쪽에서 가끔 여인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가냘픈 목청에 교태 섞인 하소연이 마치 제비나..
변화무쌍한 시공간을 은유로 담다 그러나 중원의 풍경이 이렇게 매혹적이기만 할 리가 없다. 땅의 크기만큼이나 거대한 스케일로 움직이는 대기의 흐름은 종횡무진으로 구름과 비를 몰고온다. 특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공할 소낙비를 만났을 때, 그것은 일종의 경외감을 자아낸다. 이제묘(夷齊廟)에서 야계타(野雞坨)로 가는 도중 날씨가 찌는 듯하고 한점 바람기가 없더니 갑자기 사람들의 손등에 한 종지 찬물이 떨어지며, 마음과 등골이 섬뜩해지기에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아무도 물을 끼얹는 이가 없다. 다시 주먹 같은 물방울이 모자와 갓 위에 떨어진다. 그제야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해 옆으로 바둑돌만 한 구름이 나타난다. 맷돌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삽시간에 지평선 너머 사방에서 자그마한 구름이 일어난다...
3장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목소리’ 분출하는 은유 『열하일기』 곳곳에는 이국의 풍광과 정취가 매혹적으로 그려져 있다. 거대한 스케일과 무시로 변화하는 중원의 대자연을 포착하기 위해 그는 환상의 은유, 공감각, 돌연한 비약 등 화려한 수사학을 구사한다. “황대경씨의 글이 사모관대(紗帽冠帶)를 하고 패옥(佩玉)을 한 채 길가에 엎어진 시체와 같다면, 내 글은 비록 누더기를 걸쳤다 할지라도 앉아서 아침 해를 쬐고 있는 저 살아 있는 사람과 같다”고 자부했던 바대로, 그는 풀잎과 새의 울음, 별과 달의 움직임까지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기꺼이 ‘언어의 연금술사’가 된다. 그 이미지들은 때론 화려한 스펙터클로, 때론 그윽한 서정으로, 때론 공포의 어조로 변주되면서 은유와 환유의 퍼레이드를 펼친다. 먼저 그는 ..
대단원 열하에서 보낸 시간은 모두 엿새였다.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연암의 심정은 못내 아쉽다. “일찍부터 과거를 폐하여 하찮은 진사 하나도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별안간 나라를 떠나서 만 리 밖 머나먼 변방에 와 엿새 동안을 노닐”다 이제 다시 돌아가자니, 감회가 없을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떠나고 머무는 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사항이다. 국가간 외교사절단을 쫓아온 것이니만큼 공식일정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열하는 정녕 매혹적인 공간이었다. 거기다 황제의 특별한 배려까지 더해져 연암은 생애 가장 특이한 엿새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인생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황제의 편애는 조선 사신단에 예기치 않은 불운을 안겨다준다. 바로 티베트의 지도자 판첸라마를 접견하도록 은혜(혹은 명령)를 베푼 ..
낯선 세계와의 만남 이때만 해도 그렇다. 황제의 70세 잔치인 천추절 당일날 황제가 있는 곳까지 부르는 바람에 엄청난 규모의 진공(進貢)행렬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연암이 보기에, 세계 곳곳에서 당도한 수레가 만 대는 될 듯하다. 사람은 지고, 약대는 신고, 가마에 태우고 가는데, 마치 형세가 풍우와 같았다. 거대한 바람이 움직이는 듯한 진공대열에서 연암의 눈을 사로잡은 건 억센 쇠사슬로 목을 맨 범과 표범, 그리고 길들인 사슴, 크기가 말만 하고 정강이는 학처럼 우뚝 선 악라사(鄂羅斯, 러시아의 옛이름) 개, 모양은 약대 같고 키가 서너댓 자나 되는데 하루 300리를 간다는 타계 등 기이한 금수(禽獸)들이었다. 반양(盤羊)이라는 동물도 신기하기 짝이 없다. 사슴의 몸에 가는 꼬리가 있으며, 두 뿔이 구..
열하, 그 열광의 도가니 삼도량에서 잠깐 쉬고 합라하를 건너 황혼이 될 무렵에 큰 재 하나를 넘었다. 조공을 실은 수레들이 앞다투어 달려간다. 서장관과 고삐를 나라히 하여 가는데 깊은 계곡에서 갑자기 범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두세 번 들려온다. 그러자 동시에 모든 수레가 길을 멈추고서 함께 고함을 친다. 소리가 천지를 진동할 듯하다. 아아, 굉장하구나!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少歇三道梁 渡哈喇河 黃昏時 踰一大嶺 進貢萬車 爭道催趕 余與書狀倂轡而行 崖谷中忽有二三聲虎嘷 萬車停軸 共發吶喊 聲動天地 壯哉 연암으로 하여금 수도 없이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게 했던 열하는 이렇게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그 위용을 드러냈다. 열하는 동북방의 요새답게 수레들이 달리는 소리, 범의 포효를 효과음으로 선사한 것이다...
‘천신만고(千辛萬苦)’ 그러나 가장 힘든 건 뭐니뭐니해도 ‘야간비행’이다. 일정을 당기기 위해서는 쉴참을 건너뛰는 것, 밤을 도와 행군하는 것 말고 달리 방도가 없었다. 마침내 온 나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리는 마지막 난코스가 시작되었다. 무박나흘의 ‘지옥훈련’! 하인들이 가다가 발을 멈추면 모두 서서 존다. 나 역시 졸음을 이길 수 없어, 눈시울은 구름장을 드리운 듯 무겁고 하품은 조수가 밀려오듯 쉴 새 없이 쏟아진다. 눈을 빤히 뜨고 사물을 보긴 하나 금세 기이한 꿈에 잠겨버리고, 옆사람에게 말에서 떨어질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일깨워주면서도 정작 내 몸은 안장에서 스르르 옆으로 기울어지곤 한다. 下隷行且停足者 皆立睡也 余亦不勝睡意 睫重若垂雲 欠來如納潮 或眼開視物 而已圓奇夢 或警人墜馬 而身自攲鞍 창대가 ..
열하로 가는 험난한 여정 물론 이건 수난의 서곡에 불과했다. 북방의 기후는 한마디로 예측불허 그 자체였다. 느닷없이 구름이 덮여 하늘은 깜깜해지고 바람이 삽시간에 모래를 날려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으니, 하루에 도 천국과 지옥을 수시로 오르내려야 했다. 중류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남쪽에서 한 조각 검은 구름이 거센 바람을 품고 밀려왔다. 삽시간에 모래를 날리고 티끌을 말아올려 자욱한 안개처럼 하늘을 덮어버리니,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배에서 내려 쳐다보니 하늘빛이 검푸르다. 여러 겹 구름이 주름처럼 접힌 채, 독기를 품은 듯 노여움을 발하는 듯 번갯불이 번쩍번쩍하고 벽력과 천둥이 몰아쳐 마치 검은 용이라도 튀어 나올 듯한 모습이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方渡至中流 忽有一片烏雲裹..
비약과 단절의 연암식 기법 열하로 가는 길은 연경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하다. 지리지에는 450여 리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700리, 그것도 험준한 산과 물을 수도 없이 지나야 하는 코스다. 길은 멀고 일정은 빠듯한지라 인원을 최소한으로 제한해야 했다. 연암은 비공식수행원이라 가도 되고 안 가도 상관없는 처지다. 그래서 연암은 머뭇거린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요해의 땅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북경에 남아 이국(異國)의 친구들을 사귈 것인가. 정사이자 삼종형인 박명원은 그에게 중국에 온 뜻을 되새기면서 이번 길이야말로 좀처럼 얻기 어려운 기회라며 꼭 가야 한다고 충고한다[汝萬里赴燕爲遊覽 今此熱河 前輩之所未見 若東還之日 有問熱河者 何以對之 皇城人所共見 至於此行 千載一時 不可不往]. 연암도 그..
아닌 밤중에 홍두깨 그러나 황제는 연경(북경)에 있지 않았다. 열하에 있는 피서산장에가 있었던 것이다. 사신 일행은 그저 제날짜에 도착하여 예만 표하면 그뿐이라고 여긴 탓에 이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정사만은 연경에 오는 도중 혹 열하까지 오라는 명이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근심을 놓지 않긴 했다. 그러나 연경에 도착하여 나흘 동안 별일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을 놓는 순간, 사태는 예기치 않게 꼬이기 시작했다. ‘예부에 가서 표자문(表咨文)을 내고’ 숨을 돌리는 사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일이 벌어진다. 깊은 밤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요란스레 들려온다. 자다가 놀라 깨어나면서 연암은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안 그래도 관문이 깊이 잠긴 것을 생각하면서 역사적인 변고를 떠..
2장 열하로 가는 ‘먼 길’ 요동에서 연경까지 압록강에서 연경까지가 약 2천여 리. 연경에서 열하까지가 약 700리. 토탈 육로 2천 700여 리. 상상을 초월하는 거리다. 낯설고 이질적인 공간은 언제나 모험의 대상이다. 공간적 이질성이 주는 장벽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여행은 불가능하리라. 다른 한편 두려움과 경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여행은 허망하기 짝이 없다. 스릴도, 서스펜스도 없다면, 대체 뭐 때문에 여행을 한단 말인가? 강을 건너 요동으로, 요동벌판을 지나 성경(지금의 심양)을 거쳐 북경 관내에 이르는 약 2천여 리의 여정은 어드벤처의 연속이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 몸서리 쳐질 만큼 엄청난 폭우, 산처럼 몰아치는 파도 등 대륙의 위력은 만만치 않았다. 강을 건너는 때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소낙비는..
유리창을 헤맨 외로운 늑대 그래서 정말로 연암과 동행한 벗들은 멀리 있는 이들이다. 연암은 추억의 갈피를 들춰 여정마다에서 그들과 대화하고, 흔적을 찾는다. 특히 유리창(琉璃廠)에서 연암은 자기보다 앞서 연행을 했던 친구들 생각으로 깊은 감회에 젖는다. 조선시대 연행에서 ‘유리창’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무려 27만 칸에 달하는 서점, 골동품 가게들이 즐비한 지식의 보고(寶庫), 아니 용광로, 그야말로 세계의 지식이 흘러들어오고 다시 뻗어나가는 곳이 유리창이었다. 그러므로 근대 이전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있어 유리창은 연행의 필수코스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공식적 업무가 없는 지식인들의 경우, 연행의 목적지는 북경이 아니라 유리창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홍대용(洪大容)이 ‘..
소중화가 만든 고지식 하긴 달밤뿐이랴. 한낮의 거리에서도, 시끌벅적한 장터에서도 그는 언제나 ‘솔로’였다. 그것은 무리로 움직이는가 아닌가와는 무관한 사항이다. 가장 가까운 동행자인 장복이와 창대는 뼛속까지 중화주의의 세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대책 없는 고지식 계열의 인물들이다. 책문 밖에서 벌어진 에피소드 하나(「도강록渡江錄」). 아침밥을 먹고 행장을 정돈한즉, 양편 주머니의 왼편 열쇠가 간 곳이 없다. 샅샅이 풀밭을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장복이를 보고, “너는 행장을 조심하지 않고 늘 한눈을 팔더니, 겨우 책문에 이르러서 벌써 이런 일이 생겼구나. 속담에 사흘 길을 하루도 못 가서 늘어진다는 격으로, 앞으로 2천리를 가서 연경에 이를 즈음이면 네 오장인들 어디 남겠느냐. 내 듣건대 구요동(..
달빛 그리고 고독 대상을 투시하는 예리한 시각, 끈적하게 들러붙는 촉감적 능력은 잠행자만의 특이성이다. 대열을 일탈하여 솔로로 움직이고, 대열이 잠들 때 깨어 움직이는, 말하자면 지루하게 반복되는 리듬 속의 ‘엇박’ 같은 존재. 그는 새벽을 도와 먼저 떠나거나 아예 뒤떨어져 떠난다. 사행단의 또 다른 책임자인 부사(副使) 및 서장관과는 압록강에서 120리나 되는 책문을 지나 어느 민가에 들어서야 비로소 인사를 나눌 정도이다. 연암답게 “타국에 와서 이렇게 서로 알게 되니 가히 이역(異域)의 친구로군요[定交於他國 可謂異域親舊].”라는 농담을 잊지 않는다. 그뿐인가. 설령 함께 거리에 나섰다가도 온갖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면밀히 주시하다 보면 일행들이 버리고 떠나기 일쑤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늘 무리 속에서..
티벳 불교에 관한 조선 최초의 기록 클라이맥스는 뭐니뭐니해도 티베트 불교와 관련된 부분이다. 열하에서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티베트의 대법왕(大法王)인 판첸라마와의 마주침이다. 불교 자체를 사교(邪敎)로 취급하고 있던 당시 조선인들에게 밀교적 분위기에 감싸인 티베트 불교는 절대 상종해선 안 되는 이단(異端) 중의 이단이다. 조선 사행단이 벌인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은 뒤에서 자세히 언급될 것이다. 중국 선비들에게도 이 문제는 그리 녹록하지 않았던가 보다. 특히 옹정제(雍正帝)가 티베트 불교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선비에게 찢어 죽이는 형벌을 내린 이후, 그들에게 있어 불교와 티베트에 관한 이야기는 금기 중의 금기였다. 「황교문답(黃敎問答)」에는 추사시(鄒舍是)라는 비분강개형의 투사적 지식인이 하나 나온..
속내를 끄집어내기 위한 동물적 감각 장사치들과의 밀회(?)가 수행원들의 감시를 따돌리기만 하면 되는 수준이라면, 열하에서 만난 재야선비들과의 필담은 거의 비밀 지하조직과의 접선을 연상시키듯 팽팽한 긴장 속에서 진행된다. 잘 알다시피, 당시는 만주족 출신이 지배하던 시절이라 사회 전체에서 이른바 만족과 한족 사이의 갈등이 만연해 있었다. 「피서록(避暑錄)」을 보면, 만주인 기려천(奇麗川)은 나이가 스무살이나 많고 벼슬도 조금 높은 한족 출신 윤형산(尹亨山)을 노골적으로 멸시한다. 그런가 하면 연경에서 돌아와 한인들에게 기려천에 대해 물었을 땐, “점잖은 선비가 어찌 되놈의 새끼를 안단 말이오[士大夫安知靼子]” 한다. 그만큼 두 종족 사이의 알력이 심했던 것. 연암이 만난 이들은 주로 한인들인데, 연암은 이..
스릴 만점의 잠행 실제로 그의 시선 혹은 필력은 불가사의할 정도다. 길에서 만난 여인네들의 장신구, 패션, 머리 모양에서부터 곰이나 범, 온갖 동물들의 모양새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다. 한번은 객관 밖에서 재주부리는 앵무새의 털빛을 자세히 보려고 등불을 달아오는 동안에 주인이 가버리는 일도 있었다. 북진묘에서 달밤에 신광녕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수차(水車) 세 대가 막 불을 끄고 거두어 가려는 것을 잠깐 멈추어 세우고 ‘수총차(水統車)’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그 제도를 상세히 체크하기도 했다. 또 열하에선 담장 너머로 광대 소리가 들리자 일각문 안을 엿보려고 사람들 머리 사이 빈곳으로 바라보는데, 한 사람이 연암이 오랫동안 발꿈치를 들고 선 것을 보고는 걸상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이질적인 것과 접속하려는 욕망 연암의 목적은 관광이 아니다. 명승고적을 둘러보거나 기념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일 따위에는 애시당초 관심이 없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고, 보이는 것에서 숨겨져 있는 것들을 보려 한다. 그런 까닭에 사신을 비롯하여 구종배(驅從輩, 하인들)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되놈의 나라’라서 산천이며 누대조차 노린내가 난다고 눈도 주지 ‘않은’ 채 오직 목적지만을 향해 나아가는 집합적 배치 속에서 연암은 그 길을 함께 밟아가면서도 끊임없이 옆으로 ‘샌다’. 이질적인 것들과 접속하려는 그의 욕망에는 경계가 무궁하다. 북경 안팎에 있는 여염집과 점포들을 유람할 때, 그는 이렇게 투덜거린다. 그러나 이번에 내가 구경한 것은 겨우 그 백분의 일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3부 ‘천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유쾌한 노마드 1장 잠행자 혹은 외로운 늑대 돈키호테와 연암 여행은 압록강을 건너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여행은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한양에서 압록강에 이르기까지도 한 달여가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암은 이 과정은 일체 생략해버렸다. 젊은 날 이미 ‘팔도유람’을 했던 그로서는 조선 내에서의 여정에 대해 특별한 감흥을 맛보기 어려웠을 터, 그러므로 「도강록(渡江錄)」이 『열하일기』의 서두를 장식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는 이 사절단의 비공식 수행원이다. 중요한 결정에는 낄 수도 없고, 공식적인 성명단자에는 포함되지도 않는다. 북경에서 느닷없이 열하로 가게 되었을 때, “정사(正使) 이하로 직함과 성명을 적어서 예부로 보내어 역말 편에 먼저 황제에게 알..
수많은 고원으로 이루어진 텍스트 『열하일기』는 수많은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형식상으로는 압록강을 건너는 지점에서 시작하여 마테오 리치의 무덤에서 끝나지만 그것은 사실 시작도 끝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중도에 있으며, 따라서 어디서 읽어도 무관하게 각각은 서로 독립되어 있다. 또 연행을 마치고 돌아와 연암협에서 다시 메모지를 들고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연암 자신의 윤색도 적지 않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리하다가 만 경우도 있다. 내가 중국에서 돌아온 지 오래되어 당시를 회상하노라면 감감하기는 아침놀이 눈을 가리는 듯하고, 아득하기는 마치 새벽 꿈결의 넋 빠진 상태 같다. 그래서 남북의 방위가 바뀌기도 하고 이름과 실물이 바뀌기도 하였다. 余旣自中國還, 每思過境, 愔愔如朝霞纈眼, 窅窅如曉夢斂魂. ..
5장 『열하일기』 고원 혹은 리좀 벅찬 텍스트 측근 관료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바람은 마침내 그 진앙지로 『열하일기』를 찾아낸다. 정조는 당시 규장각 관료였던 남공철에게 이렇게 분부했다(『과정록過庭錄』 2권). 근자에 문풍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다. 『열하일기』를 내 이미 익히 보았거늘 어찌 속이거나 감출 수 있겠느냐?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된 후로 문체가 이같이 되었거늘 본시 결자해지(結者解之)인 법이니 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을 한 부 지어 올려 『열하일기』로 인한 죄를 씻는다면 음직으로 문임 벼슬을 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너는 즉시 편지를 써서 나의 이런 뜻을 전하도록 해라! 近日文風如此, 莫非朴某之罪也. ..
4. 정조의 권유로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를 짓다 丁已七月, 除沔川郡守, 特命先入侍後謝恩, 及進前, 上下敎曰: “予向飭文體之變改矣. 果改之乎?” 辭敎鄭重, 先君起伏對曰: “聖敎之下, 惶恐無以爲對” 上笑曰: “吾近得一好題目, 欲使爾製出一編好文字者, 久矣.” 因親爲備說濟州人李邦翼漂海事, 首尾纖衣. 又敎曰: “爾能詳聽否?” 又敎曰: “筵說在當日入侍承宣, 處當使之下送, 官衙閑暇時, 須善爲撰著以進也!” 先君遂引邦翼所奏, 逐端攷辨, 爲一編, 送于當日叅筵承宣, 以爲進覽焉. 인용목차유쾌한 시공간
연암체의 실체 그럼 과연 연암체란 어떤 것일까. 지금도 수많은 연구자들이 연암의 문장에 대해 분석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어떤 한 가지로 수렴될 수 없는 ‘리좀(rhizome)’ 같은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리좀은 덩이줄기라는 뜻으로, 수목(樹木)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뿌리를 중심으로 하여 일정한 방향을 향해 가지를 뻗는 것이 수목이라면, 리좀은 뿌리라는 중심이 없을 뿐 아니라 목적도, 방향도 없이 접속하는 대상에 따라 자유롭게 변이하는 특성을 지닌다. 연암의 문체적 특이성을 이 개념보다 더 잘 표현해주는 것도 없다. 흔히 연암의 문장론에 대해 다음의 글을 주목한다. 진실로 ‘법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능히 전아하다면, 요즈음의 글이 바로 옛글인 것이다. (……) 하늘과 땅..
4장 ‘연암체’ 소문의 회오리 물론 고문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은 국왕이 나서서 치른 공공연한 대결의 장이었다 치더라도, 미시적 차원에서의 충돌 또한 그 못지 않았다. 처남 이재성이 쓴 연암의 제문에는 그런 정황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病世爲文 痴矜自古 말세의 문인들은 고문을 짓는다고 스스로 뽐내며 麤疏是襲 漓餲不吐 거칠고 성근 것을 답습하고 껍데기와 찌꺼기를 본뜨면서 自附純質 乃極冗腐 깨끗하고 질박한 양 착각하나 실은 너절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지요 公所醫俗 反招嗔怒 공은 이 풍속 고치려다 오히려 사람들의 분노를 샀었지요 그리고 그것은 “흡사 위장병 환자가 맛있는 음식을 꺼리는 것과 같고, 눈병 앓는 환자가 아름다운 무늬를 싫어하는 것과 같[如人病胃, 色難濃旨, 如目羞明, 惡..
壬戌冬,遷空章簡公墓于抱川,遭愈氏山變,初286)先君自287) 丁亥事變,倉288)皇權厝,恒289)有占山移空之計,290)至是買山於抱川機池里,先遷奉章簡公墓,既而愈漢售291)陰激其從弟漢寧,潛往掘墓,吾 家要訟:“此有愈氏墳墓乎?”漢烏曰:“無有”“此有家舍乎?”曰:“無 有”“此是愈氏之土地乎?”曰:“非也。”“然則掘墓之義何居?”漢焦乃稱 其先祖所築讀禮窩舊址在其下,先君曰:“然則是非曲直,聽訟者存,先 祖遺址猶足據以為證,則如之何不事訟辦,而遵作悖舉也?”漢曰: “吾不知訟與法,但知掘字”吾家就認識伯,則漢焦乃復抵書畿伯,言皆 悖理,於是,人皆謂:“汝成,六十年讀書士也,如之何一朝有此事也? 且以兩家世好,而忍掘其墓也?是可疑也”是時,愈氏之宗子冬焕,早 而無後,漢焦欺其老母孀婦,潛使人往發其嫁,孀婦慟哭,喻指血為書訟 冤,而不為之止也,竟取其極,移置於吾家墓後尺許地,..
작은 것들의 향연 이처럼 이덕무(李德懋)나 이옥(李鈺)의 문장들은 짧은 건 두세 줄, 길어야 한 페이지를 넘지 않는 소품들이지만, 중세적 사유의 뇌관을 터뜨릴 만한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상투성의 더께가 내려앉은 고문의 틀에서 벗어나 눈부신 생의 경계를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린아이, 여성, 예인(藝人) 등 ‘소수적인’ 존재들에 주목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처럼 한편으론 기존의 중심적 가치를 전복해버리고, 다른 한편으론 전혀 포착되지 않았던, 즉 중세적 표상 외부에 있는 사물들을 문득 솟구치게 하는 것이 바로 소품의 위력이다. 그런 점에서 소품문은 ‘잃어버린 사건들’, ‘봉쇄되었던 목소리들’이 각축하는 향연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소품은 길이가 짧다는 것뿐 ..
이옥과 이덕무 작품으로 본 소품체의 특이성 그 가운데서도 대표주자라면, 단연 이옥(李鈺)과 이덕무(李德懋)가 ‘일순위’로 꼽힐 것이다.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다가 깔깔대며 웃는다. 뒤쪽까지 터져서 그런 줄로만 알고 급히 거울 뒤쪽을 보지만 뒤쪽은 검을 뿐이다. 그러다가 또 깔깔 웃는다. 그러면서도 어째서 밝아지고 어째서 어두워지는지는 묻지 않는다. 묘하구나, 구애됨이 없으니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선귤당농소』 小孩兒窺鏡, 啞然而笑, 明知透底. 而然急看鏡背, 背黝矣. 又啞然而笑, 不問其何明何暗. 妙哉無礙, 堪爲師. 문인이나 시인이 좋은 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시 쓰는 어깨에선 산이 솟구치고, 읊조리는 눈동자에 물결이 일어난다. 어금니와 뺨 사이에서 향기가 일고, 입과 입술에선 꽃이 피어난다. 그러나 ..
3장 대체 소품문이 뭐길래! 소품문의 정의와 특징 我見世人之 譽人文章者 이 세상 사람들을 내 살펴보니 남의 문장을 기리는 자는 文必擬兩漢 詩則盛唐也 문은 꼭 양한(兩漢)을 본떴다 하고 시(詩)는 꼭 성당(盛唐)을 본떴다 하네 曰似已非眞 漢唐豈有且 비슷하다는 그 말 벌써 참이 아니라는 뜻 한당이 어찌 또 있을 리 있소 (중략) 我亦聞此譽 初聞面欲剮 내 또한 이와 같은 기림을 듣고 갓 들을 땐 낯가죽이 에이는 듯싶더니 再聞還絶倒 數日酸腰髁 두번째 듣고 나니 도리어 포복절도 여러 날 허리 무릎 시큰하였다네 盛傳益無味 還似蠟札飷 이름이 널리 알려질수록 더욱 흥미 없어 밀 조각을 씹은 듯이 도리어 맛이 없더군 연암이 지은 「좌소산인에게 주다(증좌소산인, 贈左蘇山人)」라는 시의 한 대목이다. 양한은 사마천(司馬遷)..
소품과 소설과 고증학 그런데 이 견고한 장치에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명말청초의 문집이 유입되면서 고문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언표들이 번성하게 된 것이다. 소품문(小品文), 소설(小說), 고증학(考證學)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내 일찍이 소품의 해는 사학(邪學)보다 심하다 했으나 사람들은 정말 그런지 몰랐다. 그러다가 얼마 전의 사건이 있게 된 것이다. 사학을 물리쳐야 하고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른바 소품이란 문묵(文墨) 필연(筆硯) 사이의 일에 불과하기 때문에, 연소하고 식견이 천박하며 재예가 있는 자들은 일상적인 것을 싫어하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므로 서로 다투어 모방하여 어느 틈엔가 음성(淫聲) 사색(邪色)이 사람의 심술을 고혹시키게 되는 것이..
2장 문체와 국가장치 지식인들을 길들이는 첨단의 기제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이나 광해군을 실각시킨 인조반정, 그리고 문체반정(文體反正), 조선사를 장식하는 ‘반정(反正)’은 이 세 가지가 전부다. 물론 앞의 두 가지와 나머지 하나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있다. ‘유혈의 쿠테타’와 무혈의 ‘문화혁명’(?)이라는 점 말고도,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은 권력 밖의 집단이 거사를 일으킨 데 비해, 문체반정은 국왕이 직접 나서서 사건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정조는 세종과 더불어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지적인 통치자였다. 184권 100책에 이르는 개인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가 단적인 증거다. 경전과 역사에 대한 방대한 섭렵 및 주도면밀한 주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뿐더러, 왕실 아카데미인 규..
희생자 이옥과 문체반정의 결과 정조의 이런 공세적 조처에 대해 반발이 없을 리가 없다. 부교리(副校理) 이동직(李東稷)의 상소가 올려졌다. 소론 출신인 그는 이 찬스를 놓치지 않고 남인의 서학까지 문제의 전면에 내세웠다. 즉, 그는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과 이가환(李家煥)을 겨냥하면서, 남인들의 학문 또한 대부분 이단사설이고 문장 역시 패사소품을 숭상할 뿐이라고 역공세를 취했다. 그러나 뜻밖에도(혹시나 했더니 이번에도 역시!) 정조는 이가환이 ‘초아의 신세’로 불쌍하게 자라서 그런 거라고 감싸주면서 이동직의 상소를 기각했다. 서학으로 향하는 시선들을 계속 패사소품에 묶어놓음으로써 노론 벌열층을 길들이고, 그에 기반하여 남인과 노론 사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정조의 정치적 포석이었던 것이..
문체 전향서 그러던 중 급기야 1791년 진산에 사는 윤지충,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버린 사건이 일어난다. 그 신앙의 강도가 한층 고조된 것이다. 두 장본인을 처형하고 천주교 서적을 압수하여 불사르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 종결되었다. 여기에 자극받은 때문일까? 이번에도 명청문집을 걸고 넘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일회적인 엄포로 넘어가지 않았다. 10월 19일 서곡이 울린 이후 문체를 둘러싼 소용돌이가 권력의 한복판에서 거세게 몰아쳤다. 이른바 ‘문체반정(文體反正)’이란 이 시기를 전후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지칭하는 역사적 명칭이다. 반정의 총지휘자 정조는 서적 수입금지를 강경하게 몰아붙이는 한편, 과거시험을 포함하여 사대부 계층의 글쓰기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을 실시한다. 성균관의 시험 답안지..
2부 1792년 대체 무슨 일이? 1장 사건 스케치 서학과 명청문집 1792년 10월 19일 정조는 동지정사(冬至正使) 박종악과 대사성(大司成) 김방행을 궁으로 불러들인다. 중국 서적 금지령을 강화하는 정책을 공표하기 위해서다. 패관잡기(稗官雜記)는 물론 경전과 역사서까지 모두 수입금지 조처가 내려진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서곡이 울린 것이다. 패관잡기란 ‘시중에 떠도는 까끄라기 같은 글’이란 뜻으로, 소설, 소품, 기타 잡다한 에세이류가 거기에 해당된다. 요즘으로 치면 베스트셀러 목록을 장식하는 글들에 해당되는데, 당시에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럼 패관잡기는 그렇다치고, 경전과 역사서는 무슨 죄가 있다고? 그건 사대부들이 일생 연마해야 할 지식의 보고(寶庫) 아닌가? 그 명분이 참 희한하..
“나는 너고, 너는 나다” 1800년 정조가 죽으면서 한 시대가 막을 내린다. 영조, 정조가 이끌었던 18세기는 조선사의 르네상스라 불릴 만큼 새로운 기운이 만개했었다. 그것이 두 왕의 영도력 때문인지는 따져봐야 할 터이지만, 어쨌든 18세기는 천재들이 각축하는 ‘기운생동(氣運生動)’의 장이었다. 19세기는 그와 달라서 모순과 갈등은 폭발하였지만 한없이 메마르고 노쇠한 징후가 두드러진다. 안동김씨 세력이 세도를 잡으면서 시파(時派)에 대한 벽파(僻派)의 공격이 시작되고, 천주교도에 대한 일대 탄압이 벌어지면서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18세기를 특이한 연대로 만드는 데 있어 연암은 독보적 위상을 점한다. 연암이 없는 18세기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래서인가. 19세기가 되면서 연암..
높고 쓸쓸하게 연암은 쉰을 넘어서야 비로소 벼슬길에 올라 선공감 감역, 안의현감, 면천군수 등을 지낸다. 그제야 철이 든 것일까? 그럴 리가! 사실은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의 만년은 더욱 쓸쓸하다. 체질에 맞지도 않는 직장생활(?)을 하고, 그 좋아하던 친구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으니. 그렇다고 그의 만년이 궁상맞은 건 결코 아니다. 가난이야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비록 외부자로 떠돌았지만 마음가는 대로 살았으니 가슴속에 새삼 울울함이나 회한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그의 만년은 쓸쓸하면서도 여유롭다. 그 시절의 주요장면 몇 가지를 음미해보자. 안의현감 시절 낮잠을 자다 일어나 슬픈 표정으로 “대나무 숲 속 그윽하고 고요한 곳을 깨끗이 쓸어 자리를 마련하고 술 한 동이와 고기, 생선, 과일, 포..
40. 송덕비를 세우겠다는 안의 현민을 말리다 丙辰春, 遞付京職. 時以嶺南宣召人李萬運之親老不仕也, 有命道內瓜近邑作窠除送, 而先君瓜期最近, 遂以軍啣遞付焉. 先君爲政, 不以喣喣小惠, 惟務大體, 以不擾民存遠慮爲主. 故莅邑時, 官民相忘, 若固有之, 不知何者爲德政. 及解官歸, 父老鬚白者十餘人 ,隨行至境外, 垂淚拜別曰: “愚民不知也, 久當益思” 及後幾年, 吏有上書告曰: “民間方謀鑄銅爲碑.” 先君答書喻之曰: “此不知吾本意, 况有朝禁! 汝輩必欲爲之, 吾當專送家奴, 推碎理之, 訴營門首謀者抵罪.” 碑議遂止焉. ○ 後三十年, 甲申夏, 有一丐媼, 入桂山草堂曰: “異哉! 堂之制度, 何其與吾邑官亭相似也?” 不肖方坐堂中, 呼而試問之, 果安義人也. 不肖曰: “汝邑官亭, 誰所作也?” 媼曰: “朴府君在任時所建也, 制度與此一般.” 問: ..
19. 백성 구휼을 축제의 장으로 及設賑饋粥也, 先君以爲愍恤之中, 宜存體貌, 饋響之前, 當養廉恥, 制度不立而能不棼亂者, 未之有也. 先於庭中, 劃地塡沙以辨位次, 排位設席以分坊里, 男女分席, 長幼異坐, 士族置前, 庶甿居下, 先君臨軒而坐, 先供一器粥, 器用賑器, 不設盤桌, 輒吸盡無餘曰: “此主人之禮也.” 於是, 饋粥分穀, 肅然無譁. 士民之有識者以爲: “賑庭苟如此, 則吾輩仰哺, 亦何足恥哉!” 後與鄰宰論賑政曰: “惟賑可以用禮.” 有長牘在文集中, 讀者以爲有朱文典則. 後又見鄰倅書, 疲於賑濟, 有憂惱不堪之色, 答書解之曰: “吾輩厚蒙天恩, 忽作富家翁, 庭列數十大鼎, 招倈一千四百餘口顑頷顚連之同胞, 月三與之湛樂, 樂莫樂兮, 何樂如之, 如之何其歎到身命, 自作苦况哉?” 畢賑而餘穀尙有五十餘包, 先君初欲因此設爲社倉, 以備後日歉荒,..
5. 면천군의 서학쟁이들을 다스리는 법 時西洋耶蘇之學, 大行域中, 家染戶漬, 實有深憂, 先君之除是郡也, 歷辭籌司提擧南公(公敵), 南公從容言曰: “是除, 上意也. 此去, 擔負不小也.” 先君驚問其故, 南公沈吟: “往當自知之.” 及莅任也, 邑瘼民弊, 無甚難治, 惟邪敎大熾, 殆無一里不染, 畧已現發, 自監兵營, 隨卽推治, 則蚩蠢無識之民, 看作守義立節, 抵死不服, 雖殺之無悔也. 先君曰: “是不可但以刑威先之也.” 乃報巡使書, 畧曰: “大抵自古異端, 其始也, 何嘗自命爲邪學哉? 民之秉彝, 莫不有樂善好賢之心, 而惟其擇之不精, 辨之不早, 仁義之差而爲楊墨, 其無父無君之禍, 已驗於釋氏矣. 今之禁邪者, 縛致愚民而庭跪之, 直以椼楊臨之, 曰: ‘爾胡爲邪學也?’ 彼以片言遮截曰: ‘小人曾莫之邪學也.’ 爲長吏者, 旣不識其學之所以爲邪, 則..
60. 죽은 친구들이 그리워 술상을 차리다 先君之在嶺邑也, 一日午睡罷, 有愀然之色, 命於竹裏幽靜處掃地設席, 具一大壺酒魚肉菓脯, 盛備爲酒所. 以杖履往, 親自引觴, 滿斟而進之, 默然靜坐久之, 愴然而起, 命撤去, 饋諸在直吏奴焉. 不肯心異之, 後竊稟問, 先君曰: “吾疇昔夢見城西舊遊幾人, 來語余曰: ‘君作宰好山水, 盍設酒飮吾輩?’ 覺而檢之, 皆已死者也. 甚愴然, 遂有一酹之擧. 然此, 無於禮, 特意設耳, 不必說.” 인용 목차 유쾌한 시공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퀴엠’③ 「맏누님 증 정부인 박씨 묘지명[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 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이 잔잔하면서도 애잔한 화음으로 구성된 서정적 비가(悲歌)에 속한다면, 평생의 지기 홍대용(洪大容)의 묘지명은 굵직한 터치, 낮은 목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홍덕보묘지명」은 여러 방식의 언표 배치가 중첩되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덕보(홍대용)가 세상을 떠난 지 사흘이 지난 후에 어떤 사람이 사신 행차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행로가 삼하(三河)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삼하에는 덕보의 벗이 있으니, 이름은 손유의(孫有義)이고 호는 용주(蓉洲)이다[德保歿越三日, 客有從年使入中國者, 路當過三河. 三河有德保之友曰: 孫有義號蓉洲].” 연암이 바로 전해 북경에 들어갔을 때 방문했..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퀴엠’② 본격적인 ‘레퀴엠‘을 듣기 전에 가벼운 아리아 한 곡조.. 我兄顔髮曾誰似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고 每憶先君看我兄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나면 우리 형님 쳐다봤지 今日思兄何處見 이제 형님 그리우면 어드메서 본단 말고 自將巾袂映溪行 두건 쓰고 옷 입고 가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 연암협 시냇가에서 읊은 「연암에서 선형을 생각하다(燕岩憶先兄)」라는 시다. 마치 동시인 듯, 민요인 듯 담백한 말투에 깊은 속정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이덕무(李德懋)는 연암의 시를 읽고 두 번 울었다고 했다. 하나는 바로 이 시이고, 또 하나는 연암이 큰누이의 상여를 실은 배를 떠나보내며 읊은 다음 시이다. 去者丁寧留後期 떠나는 이 정녕히 다시 온다 다짐해도 猶令送者淚沾衣 보내는 ..
4장 그에게는 묘지명이 없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퀴엠’ 연암에게는 묘지명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묘지명이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최근에야 한 젊은 연암연구자를 통해 이 사실을 알았다. 듣고 보니 참 신기했다. 아니, 그 사실에 대해 지금까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고전문학 연구자들(나를 포함하여)이 더 이상했다. 이런 대가한테 묘지명이 없다니. 권력의 보이지 않는 검열이 작용한 때문인가. 아니면 그 명망에 질려 감히 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인가. 원인이 뭐든 ‘묘지명의 부재 혹은 실종(?)’은 연암의 일대기 속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미스터리 목록에 추가될 항목임에 틀림없다. 주지하듯이, 연암은 묘지명의 달인이다. 그가 쓴 묘지명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주옥같은 명문장들이다. 어..
소문의 회오리②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널리 알려지게 된 이 촛불사건은 사실 서곡에 불과했다. 이후 『열하일기』는 언제나 소문의 회오리를 몰고 다닌다. ‘오랑캐의 연호를 썼다’, ‘우스갯소리로 세상을 유희했다’, ‘패관기서로 고문을 망쳐버렸다‘ 등등. 그 하이라이트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웬만큼 세상의 시시비비에 단련된 연암도 이렇게 한탄했을 정도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느냐? 책을 절반도 집필하기 전에 벌써 남들이 그걸 돌려가며 베껴 책이 세상에 널리 유포될 줄을. 이미 회수할 수도 없게 된 거지. 처음에는 심히 놀라고 후회하여 가슴을 치며 한탄했지만, 나중에는 어쩔 도리 없어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책을 구경한 적도 없으면서 남들을 따라 이 책을 헐..
소문의 회오리 연암은 연행을 마치고 돌아와 3년여에 걸쳐 『열하일기』를 퇴고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초고가 나돌아 문인들 사이에 큰 파문을 일으킨다. 여기 『열하일기』를 말할 때면 언제나 따라다니는 유명한 장면이 하나 있다. 뛰어난 문인이자 고위관료였던 남공철(南公轍)이 지은 「박산여묘지명(朴山如墓誌銘)」에 실린 삽화. 내 일찍이 연암과 함께 산여(山如)의 벽오동관에 모였을 적에, 이덕무와 박제가(朴齊家)가 모두 자리에 있었다. 마침 달빛이 밝았다. 연암이 긴 목소리로 자기가 지은 『열하일기』를 읽는다.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과 차수(次修) 박제가는 둘러앉아서 들을 뿐이었으나, 산여는 연암에게, “선생의 문장이 비록 잘 되었지마는, 패관기서(稗官奇書)를 좋아하였으니 이제부터 고문이 진흥되지 않..
웬 열하? 앞에서도 보았듯이, 이전의 중국 기행문은 모두 연기(燕記), 연행록(燕行錄)이라 불린다. 유독 박지원의 것만이 『열하일기』라는 좀 괴상한(?) 이름을 갖고 있다. 왜 연행록이 아니고 『열하일기』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열하? 그러고 보면 이 이름은 또 얼마나 낯선지. 중국기행이 국내여행보다 흔해빠진 요즘에도 열하를 여행 코스로 삼는 이들은 아주 드물다. 그만큼 열하는 여전히 낯설고도 이질적인 공간이다. 『열하일기』에서는 열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강희제 이후 역대 황제들이 거처했던 하계별궁의 소재지로, 북경에서 약 230킬로미터 떨어진 하북성 동북부, 난하지류인 무열하(武烈河) 서안에 위치한다. 열하라는 명칭은 이 무열하 연변에 온천들이 많아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
마침내 중원으로!② 열하로의 여행은 이런 그에게 느닷없이 다가온 행운이었다. 1780년, 울울한 심정에 어디론가 멀리 떠나기를 염원하고 있던 차,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건륭황제(乾隆皇帝)의 만수절(70세) 축하 사절로 중국으로 가게 되면서 그를 동반하기로 한 것이다. 1780년 5월에 길을 떠나 6월에 압록강을 건넜으며 8월에 북경에 들어갔고, 곧이어 열하로 갔다가 그 달에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10월에 귀국하게 되는 5개월에 걸친 ‘대장정’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참고로 인조 15년(1637년) 이후 조선조 말에 이르는 250여 년 동안 줄잡아 500회 이상의 사행(使行)이 청국을 다녀왔고, 그 결과 100여 종이 넘는 수많은 연행록이 쏟아져 나왔다. 일종의 연행 붐이 일었던 것이다. ‘한류’ ..
3장 우발적인 마주침 열하 마침내 중원으로! 「회우기(會友記)」를 보냅니다. 제가 평상시 중원을 대단히 흠모해왔지만 이 글을 보고 나서는 다시 걷잡을 수 없이 미친 사람이 되어 밥을 앞에 두고서는 수저 드는 것을 잊고, 세숫대야를 앞에 두고서는 얼굴 씻는 것을 잊을 지경입니다. 아아! 정녕 이곳이 어느 땅이란 말입니까? 그 땅이 조선 땅일까요? 제가 보니 절강이고 서호입니다. 그곳은 남북으로 멀기도 하고 좌우로 광활하기 때문에 도로의 이수(里數)를 계산하지 못할 정도로 호호탕탕(浩浩蕩蕩) 광대무변의 땅입니다. 그러나 소와 말도 분간하지 못하는 무리들은 은연중 이 조선만을 실재하는 세상으로 생각하며 수천 리 우리 안에서 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생애를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과연 중원의 존재를 알 수 있..
연암이 ‘연암(燕巖)’으로 달아난 까닭은?③ 이후 연암은 연암협과 서울을 오가면서 지내는데, 이 시절의 모습이 잘 그려진 자료가 있다. 먼저 제자 이서구가 쓴 「하야방연암장인기(夏夜訪燕巖丈人記)」. 5월 그믐밤 이서구가 연암댁을 찾는다. 골목으로 접어들어 집 들창을 살펴보니 등불이 비치고 있었다. 문으로 들어서자, “어른께서는 벌써 사흘째 끼니를 거르고 계셨다. 마침 맨발에 맨상투로 창턱 위에 다리를 걸치고서 문간방의 아랫것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丈人不食已三朝矣, 方跣足解巾, 加股房櫳, 與廊曲賤隸相問答].” 이서구가 온 것을 보고서는 옷을 고쳐 입고 앉은 뒤, “고금의 치란과 당대 문장명론(文章名論)의 파별동이(派別同異)”를 자세히 논했다. 밤은 삼경을 지나고 은하수가 등불에 흔들리는 속에서..
연암이 ‘연암(燕巖)’으로 달아난 까닭은?② 1778년 연암은 전의감동에서의 빛나는 ‘밴드’ 생활을 청산하고 황해도 연암동으로 떠난다. 그러나 이것은 젊은 날의 유쾌한 유람이 아니라 일종의 도주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의 왕위계승을 꺼려하던 인물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정조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홍국영이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삼종형 박재원(朴在源)이 홍국영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면서, 평소 홍국영에 대해 비판적인 언사를 삼가지 않았던 연암 주변에까지 점차 권력의 그물망이 조여들고 있었다. 위기를 감지한 친구들이 그에게 피신할 계책을 세우도록 재촉하는데, 이 장면도 한편의 ‘드라마’다. 『과정록(過庭錄)』 1권에 나오는 이야기다. 홍국영 ..
31. 학문의 즐거움을 연암협에서 전수하다 松京, 以勝國舊都, 爲俗所鄙棄, 居人多以殖貨爲業, 其門地稍淸者, 雖有意文學, 聞見昧陋, 所習不出功令帖括. 及先君之寓琴鶴也, 士人李賢謙ㆍ李行綽ㆍ梁尙晦ㆍ韓錫祜, 日來請業, 及復入燕峽, 皆負笈而從, 跨歲忘歸. 李賢謙, 最以文學名於鄕, 韓錫祜, 性能領悟, 至其子在濂, 以才士稱, 其餘總皆有志槩, 不碌碌, 賢謙嘗言: “吾鄕貿貿士, 不知經史爲何語. 及聞先生敎誨, 始知功合之外, 有文章, 文章之上, 有學術, 學術不可但以句讀訓詁爲也.” 又曰: “先生曾言: ‘諸君所讀, 非不勤也, 於文義理致, 不能透入者, 無他. 以素學功令之習, 不離於紙上口頭, 不復致思於其間故也. 諸君苟欲從我學, 須定一課程, 每日經書一章, 綱目一段, 不要疾讀熟誦, 只細諷精思, 討論辨難, 可也.’ 於是, 諸人遵先生指學..
연암이 ‘연암(燕巖)으로 달아난 까닭은? 연암은 타고난 ‘집시(vagabond)’였다. 과거를 포기한 뒤로, 서로는 평양과 묘향산, 남으로는 속리산과 가야산, 화양동과 단양 등 여러 명승지를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 다녔다. 과거를 포기한 젊은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 유람 말고는 달리 없었던 것이다. 1765년 가을 금강산 유람 때의 일이다. 유언호와 신광온(申光蘊)이 나란히 말을 타고 와 금강산 유람을 제의하자, 연암은 부모님께서 계시니 마음대로 멀리 갈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두 친구가 먼저 떠난 뒤, 연암의 조부가 ‘명산에는 인연이 있는 법이거늘 젊을 적에 한번 유람하는 게 좋다[汝何不共往? 名山有緣, 年少一遊, 好矣]’고 허락했다. 하지만 노자가 없었다. 그때 한 지인이 들렀다 나귀 살 돈..
23. ‘연암’으로 자호를 삼은 사연 遊松京, 得燕嚴洞, 白君(東脩)·童傔(金五福)從. 燕嚴, 時屬海西之金川郡, 地距松京三十里絕峽也. 勝國時, 牧隱·益齋諸賢居之, 後遂荒廢無居者. 先君初登華藏寺, 朝日東望, 有峰揷天, 意有別區, 與白君聯袂而往, 艸木蒙密無徑可由, 只溯溪流而行, 得異境焉. 崗平麓嫩, 石白沙明, 蒼壁削立, 如開画障, 溪流澄澈, 盤石平鋪, 而中有平蕪閑曠, 可以卜築. 有永矢考槃之意, 遂以燕岩爲號. 인용목차유쾌한 시공간
생의 절정 ‘백탑청연(白塔淸緣)’② 실제의 삶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연암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의기투합하는 벗들과 서로 어울려 뒹굴던 때였다. 이름하여 ‘백탑(白塔)에서의 청연(淸緣)’! 백탑은 파고다(탑골) 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석탑을 말한다. 당시 연암과 그의 벗들이 이 근처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1772년에서 1773년 무렵 연암은 처자를 경기도 광주 석마의 처가로 보낸 뒤 서울 전의감동에 혼자 기거하면서 이 모임을 주도하게 된다. 박제가(朴齊家)가 쓴 「백탑청연집서(白塔淸緣集序)」에는 당시 연암의 풍모 및 이 그룹의 분위기가 마치 영화처럼 생생하게 담겨 있다. 지난 무자(戊子), 기축(己丑)년 어름 내 나이 18, 9세 나던 때 미중(美仲)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뛰..
생의 절정 ‘백탑청연(白塔淸緣)’ 에피쿠로스, 스피노자, 이탁오(李卓吾), 연암 —— 이들의 공통점은? 정답은 ‘우정의 철학자’, 20대의 맑스가 박사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고병권 옮김)에서 재조명한 에피쿠로스는 ‘우정의 정원’으로 유명하고, ‘내재성의 철학’을 통해 기독교적 초월론을 전복한 스피노자 역시 우정과 연대를 윤리적 테제로 제시한 바 있다. 명말 양명좌파(左派)의 기수였던 이탁오는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친구이면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그 또한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라며 배움과 우정의 일치를 설파한 중세 철학의 이단자다. 이처럼 시공간을 넘어 주류적 사상의 지형에서 탈주한 이들의 윤리적 무기는 언제나 우정이었다. 연암에게 있어서도 ..
‘연암그룹’③ 앞에 나온 박제가(朴齊家)와 이덕무(李德懋)는 유득공(柳得恭)과 함께 모두 서얼 출신으로, 연암의 친구이자 학인들이다. 정조가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세운 아카데미인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흥미로운 건 이들 모두 정조가 끔찍이 싫어했던 소품문을 유려하게 구사한 작가들이라는 점이다. 특히 이덕무(李德懋)는 18세기를 대표하는 ‘아포리즘(aphorizm)의 명인’이다.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와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청언소품(淸言小品)’들로 흘러넘친다. 서얼 출신인 데다 자신을 ‘간서치(看書痴)’, 곧 책만 읽는 멍청이라고 부를 정도로 책벌레였던 그는 가난과 질병을 숙명처럼 안고 살았다. 유득공 역시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을 터,..
‘연암그룹’② 먼저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은 연암보다 여섯 살 위지만 평생 누구보다 도타운 우정을 나누었다. 그 또한 과거를 폐하고 재야 지식인의 길을 갔는데, 특히 과학과 철학에서 ‘천재적 재능’을 발휘했다. 연암은 「홍덕보(홍대용의 자字) 묘지명[洪德保墓誌銘]」에서 다음과 같이 격찬했다. 율력에 조예가 깊어 혼천의(渾天儀) 같은 여러 기구를 만들었으며, 사려가 깊고 생각을 거듭하여 남다른 독창적인 기지가 있었다. 서양 사람이 처음 지구에 대하여 논할 때 지구가 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는데, 덕보는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논하니, 그 학설이 오묘하고 자세하여 깊은 이치에 닿아 있었다. 尤長於律曆, 所造渾儀諸器, 湛思積慮, 刱出機智. 始泰西人諭地球, 而不言地轉, 其說渺微玄奧. 홍대..
‘연암그룹’ 아버지(연암)는 늘 남들과 함께 식사하는 걸 좋아하셨다. 그래서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언제나 서너 사람은 더 됐다. 先君常喜與人合食, 合食者, 常不下三四人. 『과정록(過庭錄)』 4권에 나오는 참 재미있는 장면이다.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연암의 일상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배적 코드로부터의 탈주는 한편으론 고독한 결단이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늘 새로운 연대와 접속으로 가는 유쾌한 질주이기도 하다. 과거를 포기하고 체제 외부에서 살기로 작정했지만, 연암에게 ‘고독한 솔로’의 음울한 실루엣은 전혀 없다. 그는 세속적 소음이 끊어진 산정의 고고함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으로 부과된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서 온갖 목소리들이 웅성거리는 시정 속으로 들어갔다. 젊은 날 ‘우울증’을 ..
57. 사람과 밥먹기를 좋아하다 先君常喜與人合食, 合食者, 常不下三四人. 인용 목차 유쾌한 시공간
분열자② 연암은 단지 제도의 부조리를 풍자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아수라장에서 간신히 벗어나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으면서 후회막심해하는 표정이 생생하게 손에 잡힐 듯하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러하다면, 이미 십대 후반 입신양명의 문턱에서 ‘과거알레르기 증후군’을 앓았던 그로서는 체질적 거부반응이 한층 심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설령 과거제도가 제대로 시행된다 해도, 그는 무엇보다 “고정된 하나의 틀로 천만 편의 똑같은 글을 찍어내는” 바로 그 과문(科文)을 참을 수 없었다. “사마천(司馬遷)과 반고가 다시 살아난대도 / 사마천과 반고를 배우진 않으리라”고 하여 고문을 답습하는 문풍을 격렬히 조롱했던 그가 까다롭기 그지없는, 게다가 다만 격률의 완성도만 테스트하는 과문의 구속을..
분열자 청년기의 우울증을 거쳐 30대, 젊음의 뒤안길을 통과하면서 연암은 마침내 과거를 폐하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박종채의 『과정록(過庭錄)』을 보면, 연암을 자기 당파로 끌어들이려는 조정의 벼슬아치들에 대한 염증이 그 원인이라고 암시되어 있다. 하지만 선뜻 납득되지는 않는다. 소인배 없는 시절이 어디 있었으며, 당파 싸움 또한 어제오늘 일이 아닌 바에야, 그 정도로 아예 ‘초연히 세상에서 벗어나’겠다는 실존적 결단을 내렸다면 좀 지나친 결벽증 아닌가. 좀더 무게가 실리는 건 정국(政局)에 대한 심각한 회의다. 스승이자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처숙(妻叔) 이양천이, 영의정에 소론계 인물이 임명된 조치에 항의하다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형벌을 받았고, 또 벗 이희천(李羲天)이 왕실을..
2장 탈주ㆍ우정ㆍ도주 미스터리(mistery) 從古文章恨橘鰣 예로부터 훌륭한 글은 얻어보기 어려운 법 幾人看見燕岩詩 연암시를 본 이 몇이나 될까? 曇花一現龍圖笑 우담바라꽃이 피고 포청천이 웃을 때 正是先生覔句時 그때가 바로 선생께서 시 쓸 때라네 이 시는 ‘연암그룹’의 일원인 박제가(朴齊家)의 「연암이 율시를 지은 걸 축하하며(하연암작율시賀燕岩作律詩)」라는 시이다. 3천 년에 한 번씩 피는 꽃, 우담바라. 살아서는 서릿발 같은 재판으로 이름을 날리고 죽어선 염라대왕이 되었다는 포청천(包靑天), 본명은 포증(包拯), 송나라 때 유명한 판관이다. 한때 「포청천」이라는 중국 드라마가 우리나라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그에게서 웃는 모습을 기대하기란 요원하다. 그런데 박제가는 연암의 시짓기를 우담바..
‘마이너리그’ 『방경각외전』② 그런 점에서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은 일종의 마이너(minor)들의 보고서다. 민옹과 김신선은 특히 ‘튀는’ 인물들이고, 그 밖의 경우도 대략 유사한 계열에 속한다. 「마장전(馬駔傳)」에 나오는 송욱(宋旭), 조탑타(趙闒拖), 장덕홍(張德弘) 등은 거리를 떠도는 ‘광사’들이고, 「광문자전(廣文者傳)」의 주인공 광문이는 비렁뱅이이며,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의 주인공 엄항수(嚴行首)는 서울 변두리에서 똥을 져다주면서 먹고사는 분뇨장수, 「우상전(虞裳傳)」의 주인공인 우상 이언진(李彦眞)은 역관 신분인 탓에 국내에서는 전혀 빛을 보지 못하다가 일본에서 이름을 날린 불우한 문장가다. 직업도 신분도 다르지만, 이들은 주류(major)에서 벗어난 ‘소수자’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마이너리그’ 『방경각외전』 병을 치료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명의를 찾아 몸을 의탁하거나 약이나 침, 혹은 특별한 양생술에 의존하거나, 아니면 물 좋고 공기 좋은 한적한 곳을 찾아 요양을 하거나. 그런데 앞에서 보았듯이 연암은 아주 독특한 치료법을 택한다.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채집하여 글로 옮기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글쓰기를 치료의 방편으로 삼은 건 그렇다 치고, 글의 소재들이 주로 시정의 풍문, 그것도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야담들이라는 건 정말 희한하기 짝이 없다. 성인들의 말씀이나 현자의 지혜를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시정에 떠도는 이야기’를 통해 마음을 수양하다니. 이런 발상이 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그 내막을 좀더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텍스트가 「민옹전..
우울증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1737년(영조 13년) 2월 5일 새벽, 서울 서소문 밖 야동에서 박사유(朴師愈)와 함평 이씨 사이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뒷날 집안 사람이 어느 북경의 점쟁이에게 그의 사주를 물었더니, “이 사주는 마갈궁(磨蝎宮)에 속한다. 한유(韓愈)와 소식(蘇軾)이 바로 이 사주였기 때문에 고난을 겪었다.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과 같은 문장을 타고났지만 까닭없이 비방을 당한다[此命磨蝎宮, 韓昌黎ㆍ蘇文忠以此故窮, 班ㆍ馬文章, 無事致謗](『과정록過庭錄』 1권).”고 했다나. 소급해서 적용해보자면, 이 사주풀이는 비교적 적중한 편이다. 한유와 소식, 반고와 사마천에 견줄 만한 불후의 문장가가 되었고, 명성에 비례하여(?) 갖은 구설수와 비난에 시달렸으니. 그의 집..
2. 점쟁이의 사주 崇禎三丁巳, 我英廟十三年二月五日癸亥寅時, 先君生於城西盤松坊冶洞第. 後 家人以先君年命, 問休咎於燕中術士. 術士日: “此命磨蝎宮, 韓昌黎ㆍ蘇文忠以此故窮, 班ㆍ馬文章, 無事致謗.” 인용 목차 유쾌한 시공간
30. 사람에 대한 선호가 분명하다 先君對人談笑, 未嘗不淋漓傾倒, 而若有不可意人, 錯席儳說, 便索然敗意, 雖竟日相對, 更不能酬接一語, 知者多病之. 蓋先君疾惡之性, 根於天得, 凡於人之雷同ㆍ苟悅ㆍ回互ㆍ矯餙之態, 不能黽勉容假, 一以鄕愿鄙夫斷之, 則雖欲强爲款曲, 心口不應也. 嘗自言: “此吾氣質之病, 矯揉之久, 終莫能改. 一生備經險巇, 未嘗不由於此”云. 인용목차유쾌한 시공간
태양인 그와 관련해 『과정록過庭錄』 4권에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있다. 만년에 면천군수를 지내던 시절, 성 동문에 올라 “앞이 훤히 트여 가슴속의 찌꺼기를 씻어낼 만하구나[眼界稍豁, 可以盪胸]”하며, 밤늦도록 달구경을 하다 돌아온 적이 있다. 그날 밤 귀신이 그 동리의 한 여자에게 들러붙었다. 귀신이 그 여자를 통해 말하기를, “나는 원래 객사에 있었는데, 새 군수가 부임해 오자 그 위엄이 무서워 동문에 피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군수가 동문에 와서 달을 구경하니 나는 어디 갈 데가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 너한테 붙어 살아야겠다[吾曾居客舍之中, 城主莅邑, 吾畏其威而避之東門, 城主又來臨焉, 吾無處托矣. 從此托汝而居]!”고 했다. 발광하여 고래고래 소리치는 여인을 남편이 붙들어다 관아 문밖에 데려다 놓았는데..
71. 연암의 기에 눌린 귀신 先君嘗登沔城東門, 曰: “眼界稍豁, 可以盪胸.” 遂看月, 侵夜而歸. 其夜, 有鬼降於里中女, 作狂譫田: “吾曾居客舍之中, 城主莅邑, 吾畏其威而避之東門, 城主又來臨焉, 吾無處托矣. 從此托汝而居.” 女遂狂叫亂走, 居然一鬼也. 其夫乃執, 致之官門外, 時値點衙, 先君大聲論事, 女聞而驚㥘, 叫號而走, 病遂良已. 인용 목차 유쾌한 시공간
1부 “나는 너고, 너는 나다” 1장 젊은 날의 초상 신체적 특징 거대한 몸집에 매의 눈초리. 연암의 둘째 아들 박종채(朴宗采)가 쓴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희병 옮김, 원제는 『과정록過庭錄』)에는 대략 이런 인상을 풍기는 한 선비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특별한 표기가 없는 한, 1부 전체의 내용은 이 책에서 인용된 것임을 밝힌다). 조선시대 인물화는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대략 엇비슷하기 때문에 이 그림 역시 ‘연암다운’(?) 분위기를 선명하게 포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 연암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이 그림을 본다면, 그저 절의가 곧고 기상이 드높은 유학자 정도로 기억할 터이다. 그러나 마음을 크게 먹고(?) 한 번 더 들여다보면, 연암의 신체적 특징 몇 가지가 감지되기는 한다. ‘훤..
유목 유목은 단순한 편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유랑도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면서 머무르는 것이고, 떠돌아다니면서 들러붙는 것이다. ‘지금, 여기’와 온몸으로 교감하지만, 결코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어디서든 집을 지을 수 있어야 하고,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세상 모두를 친숙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마침내는 세상 모든 것들을 낯설게 느끼는 것이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 신비주의 스콜라 철학자 ‘빅톨 위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인용되면서 널리 회자된 구절이다. 친숙함과 낯섦의 끝없는 변주, 여행이 도달할 ..
편력② ‘그들’(!)과의 만남 이후 나는 그간 ‘철의 강령’처럼 지니고 다녔던 ‘근대, 민중, 민족’이라는 척도를 놓아버렸다. 마지막으로 ‘문학’이라는 척도까지. 이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근대주의’라는 목적론의 산물이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조차도 궁극적으로는 그 ‘필드(field)’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뼈아프게 확인해야 했다. 근대성에 대한 계보학적 탐색을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편력이 시작되었다. ‘탈 근대’ 혹은 ‘근대 외부’라는 새로운 화두를 들게 되면서 삶과 지식 혁명과 일상에 대한 새로운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위로서 80년대를 통과한 친구들을 만나 집합적 관계를 구성하면서 분과학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횡단을 감행..
편력(遍歷) 나는 편력을 좋아한다. 20대 시절, 내 사주에는 역마살(驛馬煞)이 끼어 있다고 어떤 얼치기 점쟁이가 말한 적이 있다. 그걸 들었을 때 나는 아주 기뻤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 점쟁이는 얼치기가 아니었다. 이후의 내 삶의 여정을 보면 편력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싫어하는 자의 편력이라? 여행이 주로 지리적 이동을 통해 낯선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라면, 편력은 삶의 여정 속에서 예기치 않은 일들에 부딪히는 것을 말한다. 고대 희랍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식으로 말하면, 직선의 운동 속에서 일어나는 편의(偏倚) 이른바 ‘클리나멘(clinamen)’이 그것인 셈. 돌연 발생하는 방향선회, 그것이 일으키는 수많은 분자적 마주침들, 편의란 이런 식으로 정의될 수 있을 터, 내가 ..
PROLOGUE 여행ㆍ편력ㆍ유목 여행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길맹’ 혹은 ‘공간치’라고 불릴 정도로 워낙 방향 감각이 없기도 하지만, 웬만큼 멋진 풍경이나 스펙타클한 기념비를 봐서는 도통 감동을 받지 않는 쿨한 성격 탓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공간지각력이 제로에 가까운 편인데, 거기다 남한 최고의 오지인 강원도 정선군에 속한 산간부락인 함백 탄광 출신이라 이국적 풍경에 대한 호기심이 별로 없다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어린 시절 내게 여행이란 늘 기차를 타고 도시를 향해 가는 것이었을 뿐, 이국적 풍경을 찾아 떠난다는 의미는 전혀 없었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사계절 변화무쌍한 풍광을 즐길 수 있는데, 대체 무엇이 아쉬워 또 다른 ‘풍경’을 찾아다닌단 말인가.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개정신판을 내며 초판을 낸 지 꼭 10년이 흘렀다. 초판이 나오던 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시작되는 바람에 몹시 우울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난 4월 하순, 연구실 후배 몇 명과 연암이 갔던 길을 따라 요동벌판에서 북경을 거쳐 열하로 이어지는 코스를 다녀왔다. 요동에선 천지를 뒤흔드는 모래바람을 만났고, 북경에선 아시아의 지축을 뒤흔든 ‘사스와의 전쟁’을 목격했다. 그 체험을 『문화일보』에 연재했는데, 그 여행기가 부록으로 첨가되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2012년 여름, 이번엔 OBS팀과 함께 ‘신열하일기’ 다큐 촬영을 위해 다시 한번 연암의 여정을 고스란히 되밟게 되었다. 사스도, 황사도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배를 타고 단동에서 출발했다. 덕분에 전혀 다른 중국, 아주 낯선 열하를..
초판 머리말 하나 나는 천재를 좋아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 90퍼센트의 실패를 겪은 뒤에야 10퍼센트의 성취를 이루는 둔재의 ‘콤플렉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대부분의 천재들이 지닌 원초적 ‘싸늘함’이 체질에 안 맞기 때문이다(참고로, 나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이념보단 체질을 더 중시한다. 체질이 훨씬 더 정직하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은 천재다. 내 지적 범위 내에서는 그 견줄 바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매혹시켰다. 다름아닌 그의 유머 때문이다. ‘유머’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가슴에서 나온다. 말하자면, 그는 천재인데도 가슴이 따뜻한, 천지간에 보기 드문 사람인 것이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동서고금의 천재 가운데 그처럼 유머를 잘 구사한 인물은 없으리..
열하일기(熱河日記) 목차 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 1. 도강록(渡江錄)6월 24일에서 7월 9일까지. 압록강을 지나 요양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 渡江錄序六月二十四日辛未二十五日壬申二十六日癸酉二十七日甲戌二十八日乙亥二十九日丙子七月初一日丁丑初二日戊寅初三日己卯初四日庚辰初五日辛巳初六日壬午初七日癸未初八日甲申初九日乙酉舊遼東記遼東白塔記關帝廟記廣祐寺記 2. 성경잡지(盛京雜識)7월 10일에서 14일까지, 십리하(十里河)로부터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 동안의 기록 秋七月初十日丙戌十一日丁亥粟齋筆談商樓筆談十二日戊子古董錄 十三日己丑十四日庚寅盛京伽藍記山川記略 3. 일신수필(馹汛隨筆)7월 15일에서 23일까지. 신광녕(新廣寧)에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9일간의 기록 馹汛隨筆序秋七月十五日辛卯北鎭廟記車制戱臺市肆店舍橋梁十六日壬辰十..
27. 앙엽기(盎葉記) 盎葉記序 皇城外內閭閻廛舖之間 所有寺刹宮觀 不特天子勅建 皆諸王駙馬及滿漢大臣所捨第宅 且富商大賈 必刱一廟堂 以資冥佑 與天子競其奢麗 故天子不必更事土木 別置離宮 以奢天子之都也 自皇明正統天順間 發帑所造者二百餘區 而比年所刱 多在內 外人不得見 獨我使至 則有時引納 恣其縱觀 然余所遊歷 僅百分之一 或爲我譯所操切 或爭難門者 方入其中 則顧影怱怱 惟日不足 而建置掌故 非攷碑刻 無以知何代何寺 纔讀一碑 輒移數晷 貝闕琳宮 隙駟灘船 是以五官幷勞 四友俱瘁 恒如夢讀籙書 眼纈海蜃 顚倒依稀 名蹟多錯 歸拾小錄 或紙如蝶翅 字如蠅頭 皆百忙閱碑所潦草也 遂編爲盎葉小記 盎葉者 倣古人書柹葉 投盎中 集而爲錄 弘仁寺 弘仁寺最後一殿 有觀音變相 千手千目 手各有執像 後所懸大障畵 大海濤瀧 虛舟出沒 而海天雲氣騰騰 化爲卿霱瑞曇 中有金冠玉帶扶擁小兒者..
알성퇴술(謁聖退述) 順天府學 皇城東北隅柴市 對樹兩坊曰育賢 兩坊之中 爲順天府學 入欞星門 門內鑿池如半月 是爲泮水 爲三空橋 欄以白石 橋之北 有三門 中曰大成 左金聲 右玉振 聖殿外扁曰先師廟 內題曰萬世師表 康煕皇帝書也 位牌題至聖先師孔子之位 四配曰 復聖顔子 述聖子思之位 在東 宗聖曾子 亞聖孟子之位 在西 兩廡之間 多古栢樹 世傳許魯齋衡手植 或云耶律楚材所植 明倫堂在聖殿之東 啓聖祠在明倫堂之北 奎文閣在明倫堂之東北 文丞相祠在明倫堂之東南 中門之外 左爲名宦祠 右爲鄕賢祠 府學 故報恩寺也 元至正末 有遊僧募緣湘潭以造寺 未及安像 而明師下燕 戒士卒毋得入孔子廟 僧蒼黃借宣聖木主 置殿中 後不敢去 遂爲北平府學 遷都北京 則爲順天府學云 太學 皇城東北隅坊曰崇敎 西牌樓街曰成賢 牌樓內皆書國子監 永樂二年成左廟右學 宣德四年八月修大成殿前兩廡 先是 太學因元之陋 吏..
25. 황도기략(黃圖紀略) 皇城九門 皇城周四十里 若棊局然 九門正南曰正陽 東南曰崇文 西南曰宣武 正東曰朝陽 東北曰東直 正西曰阜成 西北曰西直 北西曰德勝 北東曰定安 皇城之內 爲紫禁城 周十七里 紅墻覆黃琉璃瓦 門西北曰地安 南曰天安 東曰東安 西曰西安 紫禁城之內爲宮城 正南曰太淸門 第二卽紫禁城之天安門 第三曰端門 第四曰午門 第五曰太和門 後門曰乾淸 乾淸之北曰神武 東曰東華 西曰西華 皇城九門樓 皆三檐 皆有瓮城 瓮城皆有二層敵樓鐵裹門關 與城門相直 而左右皆有便門 正南一面爲外城 有七門 制同九門 正南曰永定 南左曰左安 南右曰右安 東曰廣渠 西曰廣寧 廣渠之東隅曰東便 廣寧之西隅曰西便 地安門外爲鼓樓 鼓樓之北 爲鍾樓 角樓 六水關 三城壕 發源玉泉山 經高梁橋 河分兩支 一循城北轉東折而南 一循城西轉南折而東 入紫禁城 爲太液池 繞出九門 經九牐滙 至大通橋 而..
24. 구외이문(口外異聞) 盤羊 盤羊 鹿身細尾 兩角盤 背上有蹙文 夜則懸角木上以防患 狀若騾 群行 暑天塵露相團 角上生草 或曰麢羊 或曰羱羊 說文麢大羊而細角 陸佃埤雅 羱羊 似吳羊而大 今萬壽節 蒙古來獻 皇帝以供班禪 彩鷂蝴蝶 康煕四十年 帝避暑口外 喇里達番頭人 進彩鷂一架 靑翅蝴蝶一雙 鷂能擒虎 蝶能捕鳥 見王貽上香祖筆記 高麗珠 中國人寶東珠 以爲高麗珠 色淡白如硨磲 今帽前簷端嵌安一箇 以表南北 東珠八分已上爲寶 皇帝有東珠七錢重 爲鎭夢魘寶 皇后東珠六錢四分重 形如白茄子 乾隆三十年 皇后失東珠 回后讒 皇后搜得東珠鑾儀衛卒家 后遂廢幽之冷宮 貴州按察使奇豐額帽簷東珠 色殊不佳 奇言珠六七釐 價銀四十兩 余言珠非土產 或有食蛤得之牙頰間 謂之陸珠 瑣細不足珍 婦女簪珥所粧 皆倭珠 有紅光可寶 奇按察笑曰 否也 這是蠣房磨圓 非珠也 所寶東珠者 無貝氣 自有天然寶光..
23. 산장잡기(山莊雜記) 옛 전쟁터의 분위기가 지금도 감도는 고북구를 밤에 나오며 夜出古北口記 고북구의 지리적 특성 自燕京至熱河也, 道昌平則西北出居庸關, 道密雲則東北出古北口. 自古北口循長城, 東至山海關七百里, 西至居庸關二百八十里, 中居庸山海而爲長城險要之地, 莫如古北口. 蒙古之出入常爲其咽喉, 則設重關以制其阨塞焉. 기록에 나타난 고북구 羅壁「識遺」曰: “燕北百里外, 有居庸關, 關東二百里外, 有虎北口, 虎北口, 卽古北口也.” 自唐始名古北口, 中原人語長城外, 皆稱口外, 口外皆唐時奚王牙帳. 按『金史』, 國言稱留斡嶺, 乃古北口也, 葢環長城稱口者, 以百計. 緣山爲城而其絶壑深磵, 呿呀★穴+坎陷, 水所衝穿則不能城而設亭鄣. 皇明洪武時, 立守禦千戶所, 關五重 고북구를 지나는 감정을 적다 余循霧靈山, 舟渡廣硎河, 夜出古北口..
22. 환희기(幻戱記) 幻戲記序 朝日過光被四表牌樓 樓下萬人簇圍 市笑動地 驀然見鬪死橫道者 蔽扇促步而過 從者後 俄而追呼有怪事可觀 余遙問謂何 從者曰 有人偸桃天上 爲守者所擊 塌然落地 余叱爲怪駭 不顧而去 明日又行其地 葢天下奇伎淫巧雜劇 皆趁千秋節 待詔熱河 日就牌樓 演較百戱 始知昨日從者所見 乃幻術之一也 葢自上世有此能 役使小鬼 眩人之目 故謂之幻也 夏之時 劉累擾龍以豢孔甲 周穆王時 有偃師者墨翟君子也 能飛木鳶 後世如左慈費長房之徒 皆挾此術以游戱人間 而燕齊迂怪之士 談神仙以誑惑世主者 皆幻術 當時未之能覺 意者其術出自西域 故鳩羅摩什佛圖澄達摩 尤其善幻者歟 或曰 售此術以資生 自在於王法之外而不見誅絶何也 余曰 所以見中土之大也 能恢恢焉並育 故不爲治道之病 若天子挈挈然與此等較三尺 窮追深究 則乃反隱約於幽僻罕覩之地 時出而衒耀之 其爲天下患大矣 故日令..
21. 금료소초(金蓼小抄) 金蓼小抄序 吾東醫方未博 藥料不廣 率皆資之中國 常患非眞 以未博之醫命 非眞之藥 宜其病之不效也 余在漠北 問大理尹卿嘉銓曰 近世醫書中 新有經驗方 可以購去者乎 尹卿曰 近世和國所刻小兒經驗方 最佳 此出西南海中荷蘭院 又西洋收露方極精 然試之多不效 大約四方風氣各異 古今人禀質不同 循方診藥 又何異趙括之談兵乎 正績金陵瑣事 亦多錄入 近世經驗 又有蓼洲漫錄 又苕翡草木注 橘翁草史略 寒溪胎敎 靈樞外經 金石同異考 岐伯侯鯖醫學紺珠 百華精英 小兒診治方 俱近世扁倉所錄 京師書肆中 俱可有之 余旣還燕 求荷蘭小兒方及西洋收露方 俱不得 其他諸書 或有粤中刻本云 書肆中俱不識名目 偶閱香祖筆記 得其所錄 金陵瑣事及蓼洲漫錄 其元書 未必皆醫方 而貽上所錄 俱係經驗 余故拈其數十則錄之 餘外誌記及古方雜錄之載筆記中者 倂爲抄錄 目之曰金蓼小抄 余山中無醫..
20. 행재잡록(行在雜錄) 行在雜錄序 嗚呼 皇明 吾上國也 上國之於屬邦 其錫賚之物 雖微如絲毫 若隕自天 榮動一域 慶流萬世 而其奉溫諭 雖數行之札 高若雲漢 驚若雷霆 感若時雨 何也 上國也 何爲上國 曰中華也 吾先王列朝之所受命也 故其所都燕京曰京師 其巡幸之所曰行在 我效土物之儀曰職貢 其語當宁曰天子 其朝廷曰天朝 陪臣之在庭曰朝天 行人之出我疆塲曰天使 屬邦之婦人孺子語上國 莫不稱天而尊之者 四百年猶一日 葢吾明室之恩 不可忘也 昔倭人覆我疆域 我神宗皇帝提天下之師東援之 竭帑銀以供師旅 復我三都 還我八路 我祖宗無國而有國 我百姓得免雕題卉服之俗 恩在肌髓 萬世永賴 皆吾上國之恩也 今淸按明之舊 臣一四海 所以加惠我國者 亦累葉矣 金非土產則蠲之 綵馬衰小則免之 米苧紙席之幣 世減其數 而比年以來 凡可以出勅者 必令順付以除迎送之弊 今我使之入熱河也 特遣軍機近臣道迎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