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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죽음으로부터의 도피 호열자? 죽음의 귀신?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면서 쭈뼛, 동욱의 의식 속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가 엇갈렸지요. 이 동네를 내리 깔고 있는 죽음의 적막, 그 실체를 알고 나자 엄습하는 것은 공포였습니다. 그 순간, 살고 싶으면 멀리 도망치라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든 말든 맨살이 터져 피가 배어나는 것도 모르고, 오직 죽음의 영역을 벗어나야겠다는 일념으로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먼 언덕바지에 있는 느티나무 밑에 기대어 한숨을 돌렸을 때, 공포와 피곤의 극에 달한 동욱이는 비를 맞으면서도 그냥 깊은 잠에 떨어지고 말았지요. ‘호열자(虎列刺)’라는 말은 본시 콜레라(Cholera)의 음역에서 생겨난 말이에요. 끝 글자가 원래는 ‘호열랄(虎列剌)’인데 ‘어그러질 랄[剌]’..
천안에서 만난 귀신 혼자 터덜터덜 발걸음을 재촉하여 천안 풍세면 근방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한문표기로는 ‘豊歲’라고 하는데 우리는 어릴 적부터 ‘풍새’로 발음). 갑자기 천둥벼락이 치고 억센 비바람이 휘몰아치면서 날이 저물었습니다. 광풍을 피하기 위해 어느 집 대문 앞 추녀 밑에 서있다가 아무래도 그칠 비가 아니라서 하룻밤 신세를 질 요량으로 그 집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두드려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다가 한참 후에나 빼꼼 집 대문이 열렸어요. “이보시오, 이보시오, 문 좀 열어주오.” “아니, 도대체 누구간데 이 빗속에 대문을 두드리시오?” “예, 저 지나가는 객승이온데 ……” 말이 끝나자마자 문을 쾅 닫고 빗장을 지르면서 빨리 가버리라고만 소리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너무 황당했지만 뭔가 속사정이..
경허 동학사에 오다, 구척 장신의 강백 경허가 천리길을 걸어 동학사에 당도한 것은 1862년 바람결이 쌀쌀한 늦가을이었습니다. 만화 스님은 몇 마디 건네보고 동욱이가 진실로 큰 그릇임을 알아차리지요. 만화 스님은 아낌없이 동욱에게 불교경전의 묘리를 다 가르칩니다. 동욱이는 『능엄경』, 『대승기신론』, 『금강경』, 『화엄경』, 『묘법연화경』, 우리나라 불교의 소의경전이며 대승의 교리를 집대성한 『원각경」, 선문의 공안을 집대성한 『선문염송』 등을 다 깨우치고, 강원의 대교과(大敎科)에 이르는 4단계의 교육과정을 예리한 기억력과 한학의 소양에 힘입어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모두 마칩니다. 경 허가 동학사에서 공부하기 시작한 지 9년째, 스물세 살의 경허는 기골이 장대한 청년이 되었고, 학승으로서, 그리고 경지..
계허와 만화 계허 스님은 동욱이가 박 처사 밑에서 글공부를 한다는 것을 알고도 말하지 않았어요. 자기가 가르칠 능력이 없으니 모르는 체한 것이죠. 계허 스님은 동욱의 향학열을 막고싶지는 않으셨을 거에요. 보통 스님들 같으면 “아~ 이놈! 속가의 알음알이를 익혀서 사람 버리겠다”하고 몽둥이를 들 것입니다. 그러나 동욱이의 한학 경지가 높아지는 것을 감지한 스님은 동욱이가 스님이 안되고 한학자가 될까봐 두려워, 자기의 도반으로(어릴 때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였다. 건봉사는 고성군에 위치) 당대 최고의 강백이었던 계룡산 동학사(東鶴寺, 계룡산 동쪽 자락에 있으며 서쪽 자락에 있는 갑사甲寺와 함께 계룡산을 대표한다)의 만화(萬化) 스님에게 동욱이를 보냅니다. 동욱이는 청계산에서 동학사까지 도대체..
경허의 죽음 이 점에서 보면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를 산 경허의 삶은 돋보이는 것이 있지요. 바로 경허처럼 단단한 학식, 그것도 한학의 기초를 다진 스님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죠. 경허는 세칭 이단비도(異端非道)의 스님, 막행막식의 선승처럼 이해되고 있지만 경허처럼 무서운 학승이 없고, 그의 싯구에 담긴 한학의 소양은 그저 흉내만 내는 스님들의 화려함이 미칠 수 없지요. 경허가 64세(1912년) 함경도 삼수갑산 도하동 어느 글방에서 홀로 쓸쓸하게 죽어갔을 때, 그의 수제자 중의 한 사람인 만공이 이렇게 읊었어요. 遷化向甚麽處去 천화향심마처거 아~ 우리 선생님이 가셨다니 어디로 가셨을꼬 酒醉花面臥 주취화면와 아~ 술에 취해 꽃밭에 반드시 누워계시겠지 물론 경허는 술 먹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그러..
천자문 돈오와 불교와 한학, 그리고 해석학적 방법론 사실 경허라는 인간에게 있어서 이 순간이야말로 스님의 거창한 오도송(悟道頌)보다 더 위대한 ‘깨달음’의 순간이었습니다. 성철당이 말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보다 더 돈(頓)한 개안의 순간이었죠. 어린 경허는 박 처사라는 사람 밑에서 체계적으로 문자수업을 받게 됩니다. 박 처사는 당대 조선유학의 정통을 잇는 대학자였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경허라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만남은 이 유학자와의 만남이었을 겁니다. 경허는 이 박 처사 밑에서 사서삼경은 물론 『사기』ㆍ『한서』ㆍ『후한서』, 그리고 『노자』ㆍ『장자』 등의 도가경전까지 다 배우게 됩니다. 경허가 짧은 시간에 이것을 다 통달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그가 청계사에 머문 것은 5년 가량이다) 어린 시절에 이..
독경하고 싶거들랑 천자문부터 밥 짓고 나무하고 청소하고, 행자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절깐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동욱은 나는 언제나 중이 되려나, 언제나 큰 스님처럼 저렇게 염불을 근사하게 할 수 있으려나 하고, 틈이 나는 대로 대웅전 옆문에 귀를 바짝 대고 서서 스님 염불소리를 주의 깊게 귀담아듣곤 했습니다. 그 선망의 발돋움은 참으로 순결한 것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양주보살이 와서 말을 겁니다. “아니 동자 스님, 법당문에 귀를 바짝 갖다 대고 뭘 하시는 거예요?” “아~ 우리 스님 독경하시는 걸 잘 들어두었다가 나도 하려구요.” “원 참 동자 스님두, 아 ~ 독경이야 글로 배우셔야지, 귀동냥 가지고 배워지나요?” “글로 배우다니요?” “거 왜 있잖아요. 하늘 천 따 지 하는 천자..
경허 송동욱 조선조 말기에 서산의 맥을 이은 자로서 참으로 존경스러운 한국불교의 거목이 한 분 태어납니다(편양언기鞭羊彦機 계열이다). 경허(鏡虛, 1849~1912)라는 문제인물로 인해 조선불교의 선풍이 크게 진작되게 되죠. 경허는 헌종 15년(1849년 기유己酉: 일지一指는 1846년 병오丙午설을 주장. 나는 방한암의 「선호경허화상행장先呼鏡虛和尙行狀을 따른다) 전라북도 전주 자동리(子東里)에서 여산 송씨 두옥(斗玉)을 아버지로, 밀양 박씨를 어머니로 해서 태어났는데 분만 후 사흘 후에나 울음이 터졌다고 합니다. 다음 해는 헌종이 죽고, 강화도에서 나무꾼 노릇을 하던 강화도령 이원범이 왕위에 오르죠. 이 강화도령 철종의 시대야말로 우리민족이 근대를 준비해야 할 중요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국정이 방치되어..
서산과 삼가귀감 서산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는 서산이 원효나 보조 지눌에 비해 좀 지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즈음 생각이 바뀌었어요. 서산은 수행자로서도 탁월한 인물이지만 매우 심오한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선(禪)ㆍ교(敎) 양면을 깊게 통달한 사람입니다. 그는 『선가귀감(禪家龜鑑)』ㆍ『유가귀감(儒家龜鑑)』ㆍ『도가귀감(道家龜鑑)」이라는 책을 썼는데, 나는 대학교 4학년 때 이 책들을 원문으로 다 통독을 했어요. 그리고 나는 그 당시는 그다지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어요. 우선 책의 내용이 너무 소략하다고 느꼈죠. 그런데 나이가 들고 여러 번 읽으면서 서산은 진정으로 유ㆍ불ㆍ도 삼가(三家)를 회통(會通)한 대사상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간결한 언어 속에는 무궁한..
거시기와 예수, 거시기와 철학 거시기를 ‘예수’로 바꾸어 놓고 보아도 똑같습니다. 보통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상이 신앙의 대상으로서 거시기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궁극에 도달한 자는 깨달을 것입니다. 예수가 나의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곧 예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내가 곧 십자가를 멘 예수가 될 때에만이 그리스도(구세, 救世)의 의미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서산이 말한 거시기를 ‘철학’으로 바꾸어놓고 생각해봐도 동일하죠. 제가 철학과를 들어갔을 때는 물론 ‘철학(philosophy)’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철학자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저 거시기 초상화가 걸려있듯이, 도상화 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상체계, 그림화 될 수 있는 언어의 건물을 완..
서산의 입적시 서산은 하나의 승려로서, 하나의 사상가로서 매우 심오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입적할 때 쓴 시만 보아도 그 인격의 깊이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가 입적할 때(선조 37년[1604] 정월 23일)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는 엄청나게 많은 제자들이 시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제자에게 후사를 부탁하는 글을 따로 써놓았습니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설법을 했습니다. 그리고 설법을 마치자 자기의 영정(초상화)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걸개 뒷면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입적의 순간에도 이러한 적멸송(寂滅頌)을 쓸 수 있는 정신력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나도 죽는 순간에 이런 시 한..
임진왜란과 승과 사실은 ‘진짜 중’ ‘가짜 중’ 얘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여기까지 흐르고 말았는데, 하여튼 조선불교의 대맥(大脈)은 서산이 승통을 일으키면서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과시하게 됩니다. 사실 의승군에 기꺼이 목숨을 바친 스님들의 열렬한 소망은 단 하나였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국난을 계기로 해서라도 승과가 부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생들에게 교육과 출세의 길로서 주어지는 과거시험과도 같은 승려들의 과거시험(승과僧科, 고려시대에는 승려가 국사가 될 수 있는 존엄한 국가제도로서 존속되었다. 조선시대에 폐지되었다가 명종 6년에 부활됨.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다시 폐지된다)이 부활되기를 갈망했던 것이죠. 선조(宣祖)야말로 이 승과를 부활시킬 수 있는 명분을 가지고 있..
서산과 해남 대둔사 서산은 살아있을 때, 해남 대둔사(대흥사)를 여러 번 간 것 같습니다. 말년에도 노구를 이끌고 갔던 것 같습니다(세부적인 일정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이 지역을 많이 다닌 것은 확실하다. 나는 대둔사도 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입적하는 그날 아침 제자들에게, “내가 죽은 뒤 내 의발(衣鉢, 법통의 상징)과 주상이 내린 교지를 해남현 두륜산 대둔사에 보관하게 하고, 제사를 주관케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ㆍ정조 시기에 대둔사에 휴정, 유정, 처영 대사를 모신 표충사가 건립됩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목숨을 바친 무명의 승려들, 이순신(李舜臣)이나 유생들은 후손이 있어 제사라도 모시지만 후손이 없는 이 무명의 승려들의 고혼(孤魂)은 지금까지도 흠향을 받지 못하고 ..
유정의 눈부신 활약상도 제대로 기록 안 됨 사명대사 유정의 이러한 엄청난 외교적 성과도 유신(儒臣)들의 시기 때문인지 『선조실록』에 언급조차도 없습니다. 참 치사한 놈들이지요. 『수정선조실록」에나 간단히 실렸을 뿐이지요. 하여튼 서산대사는 선조(宣祖)가 무사히 서울로 환궁한 후(선조 26년 10월), 곧바로 모든 관직을 내던지고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갑니다. 의승군(義僧軍)의 지속적인 관리는 유정(惟政), 처영(處英) 등에게 맡기고 세속에서 떠납니다. 건방지게 관복 입고 말 타고 다닌다고 씹어대는 벼슬아치놈들의 꼬락서니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겠지요. 떠나는 서산을 선조는 붙들지 않습니다. 떠나는 서산에게 선조는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존호(..
이순신을 도운 승군의 활약상, 유정의 위대한 마무리 이순신(李舜臣) 이 그 처절한 명량해전을 치를 수 있었던 것도 조직력과 희생을 불사하는 탁월한 정신력을 갖춘 승군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7년 동안의 참혹한 전화 후에도 그것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능력이 국가에 거의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전후에 복구대책이나 방비사업도 서산대사의 수제자인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이 주도하였고, 일본에 가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까지 만나고 조선인 3천여 명을 귀환시키는 대사업을 마무리 지은 것도 유정이었습니다. 실제로 3,500명 정도의 조선인 포로를 귀환시킨다는 문제가 얼마나 방대한 국가 대 국가 규모의 사업인가, 그것은 일본측의 극진한 성의와 외교적 예우가 없이는 근원적으로 이루어..
말 탄 서산을 끌어내리는 유생들 지금 조선시대의 불교가 얼마나 고난의 길을 걸었는가, 그리고 그 고난 때문에 얼마나 순결한 선가(禪家)의 맥을 이었는가 하는 것을 말하려다 이야기가 곁가지로 흐르고 말았는데, 이런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서산대사가 서울이 수복된 후, 서울의 치안을 돌보기 위하여 궁궐 밖에서 승군들과 함께 왔다갔다 하면서 분주히 일을 하고 있었는데, 서산은 당연히 이미 74세의 노구에 병까지 얻은 상태였기 때문에 말 위에서 지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신(朝臣)들이 그 앞을 걸어가면서 비위가 몹시 상했던 것 같습니다. 자기들은 말도 못 타고 걸어가면서 서산대사를 치켜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사헌부에서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은 터무니 없는 악담을 늘어놓습니다. 휴정은 오직..
적서지별이 망국지본이 되다 혹자는 선조(宣祖)의 옹졸한 마음이, 조선왕조 왕위계승역사에 있어서 그가 최초의 서자(전대의 왕인 명종은 후손이 없었다. 그래서 그 전 왕 중종의 서손庶孫인 하성군河城君이 왕위에 올랐다. 하성군이 바로 선조이다)라는 특이성, 그 불안감에서 유래되었다고 보기도 하죠. 동학운동의 리더인 해월 선생은 적서지별(嫡庶之別, 적자와 서자의 구별)은 망가지본(亡家之本)이요, 반상지별(班常之別, 양반과 상놈의 구별)은 망국지본(亡國之本)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적서의 차별은 왕가 내의 분위기에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나봐요. 하여튼 선조는 매우 영민한 사람이었고, 학식도 뛰어났고, 또 글씨도 잘 썼어요. 서산대사의 품격을 알아보고 그를 선대(善待)한 것이 국난을 당해 큰 도움을 얻게 된 것이..
선조의 애ㆍ증 콤플렉스 정여립(鄭汝立)이 과연 국가를 전복시킬 만한 혁명의 모의를 했을까? 그 진정한 명분은 무엇이었을까? 하여튼 정여립의 모반사건은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그 왕조체제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여립사건으로 인해 일어난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로 1천여 명의 쟁쟁한 인물들이 도륙 당했습니다. 진실로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터무니없는 비극이 없었습니다. 동인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날벼락이었죠. 여러분들이 잘 아는 시인 정철(鄭澈)이 이 기축옥사를 주도했는데 너무도 가혹하게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 난리통에 어느 스님이 서산대사 또한 정여립(鄭汝立) 사건에 가담했다고 하면서 대사가 쓴 구절 하나를 증거로 제출하..
선조와 서산대사의 인연 영규 스님이 거느린 승병 800여 명이 금산전투에서 거의 전원 용감하게 전사함으로써 끝내 금산을 탈환하고야 만 처절한 상황을 보고받은 선조는 승군이야말로 국가수호의 효율적인 방편이 될 수 있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당시 선조(宣祖)는 평양성까지 내버리고 북쪽 국경지대인 의주로 도망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전국 스님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던 묘향산의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묘향산의 별명이 서산이다.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기에 서산대사라고 불렀다. 휴정이 그의 법명이다. 속명은 최여신崔汝信, 완산 최씨)를 의주로 부릅니다. 휴정은 이미 그때 나이가 73세였습니다. 선조와 서산대사는 그 전에 안면이 있었습니다. 서산대사는 3년 전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갇혀있..
비겁한 유생들의 작태 이토록 찬란한 전과를 기록한 승군과 영규대사의 활약상을 보고하면서도 유생들은 이들에게 상이나 주고 빨리 환속(還俗)시키라고 권고합니다. 다시 말해서 승군의 조직력이 두려운 것이죠. 그러한 조직을 격려하고 합심하여 국난을 국복해야 할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시기에 승군이 어떤 정치세력을 형성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죠. 청주성의 회복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전체 전세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결정적 호운의 기세였습니다. 왜군들은 청주에서 서남으로 곧바로 내려가 호남곡창지대를 장악할 계획이었습니다. 만약 승군이 청주를 탈환하여 그 계획을 무산시키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순신(李舜臣)의 해군도 호남의 지지기반을 상실함으로써 무기력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후 의병장 조헌(趙憲, 1544~159..
영규대사: 최초의 육지에서의 승전 최초의 승군은 무술에 탁월한 실력을 갖춘 충남 공주사람 영규(靈圭) 대사였습니다. 계룡산 갑사에서 출가했고, 휴정(休靜, 서산대사) 문하에서 법을 깨우친 큰 인물이었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분을 참지 못하고 3일을 통곡하고 승병을 조직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승병장이 됩니다. 승군 800여 명을 이끌고 청주로 진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1592. 음8.1) 최초의 육지에서의 승전을 기록합니다. 조선에서 가장 강한 장군으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 대장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끝까지 사력을 다해 분투하다가 자살하고만(1592. 음4.28) 슬픈 이야기를 기억하는 민중들에게, 영규대사의 청주탈환이야기는 환호작약할 수밖에 없는 희..
임진왜란: 멸사봉공의 자비 스님들은 출가자이기 때문에 우선 가족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님들은 산사에서 살면서 호랑이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무술과 날랜 체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좌선과 무술은 같은 정신수양방법입니다. 그리고 스님들은 계율을 지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특별한 조직력이 있었고, 상하명령계통이 매우 질서있게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禪)의 수행은 영활(靈闊)한 정신력을 길러줍니다. 스님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불살생(不殺生)’이라는 계율이겠으나, 기실 대규모 살생을 목적으로 남의 나라를 침범하는 왜군을 죽이는 것은 살생이라는 개념에 해당될 수가 없습니다. 선종의 교리로 본다면 죽이는 자나 죽임을 당하는 자나 모두 공(空)일 뿐, 오직 더 큰 살..
이순신 장군과 서산대사 물론 이순신(李舜臣)의 활약상은 인류의 전쟁사에서 가장 눈부신 기적적 대첩으로 기록될 만한 위대한 것입니다. 비슷한 시대의 엘리자베스여왕 때 영국의 제독들이 스페인의 막강한 무적함대를 무너뜨린 것보다도 더 극적이고 통쾌한 전승이었습니다(‘무적함대Grande y Felicisima Armada’라 해봤자 130개의 배로 구성된 것이었고, 스페인측의 총 전사자는 2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이순신(李舜臣) 의 활약상은 어디까지나 바다 위에서 펼쳐진 것이죠. 물론 이순신의 제해권(制海權)은 육지로 올라간 왜군들의 보급을 차단시키는 효과가 컸기 때문에 해전의 승리는 육지의 싸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기실 이순신 장군과 똑같은 무게를 지니는 명장으로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2장 한국불교의 흐름과 그 본질적 성격 진짜 중과 가짜 중 요즈음 가깝게 지내는 도반(道伴, 길을 같이 가는 사람)으로서 명진(明盡)이라는 스님이 있습니다. ‘진짜 중’ 이지요. 스님에 대해 진짜다. 가짜다 이런 말을 쓴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고, 또 그런 분별심의 기준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를 따지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좀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진짜다’ ‘가짜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상식적 기준은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세상에 하도 가짜 중, 가짜 목사, 가짜 무당, 가짜 교주들이 많기 때문에 내가 어렵게 얘기를 하지 않아도 ‘가짜’가 무엇인지는 일반대중이 더 먼저 정확히 알아요. 나는 결코 스님의 정신적 경지의 고하(高下)를 가지고 가짜다 진짜다라는 말을 쓰지는 않아요. 그것은 스님의 ..
엄마의 공안 나는 그 길로 짐을 쌌습니다. 그리고 스님생활을 청산했습니다. 나는 승복을 입고 옛 스님들이 쓰던 큰 삿갓을 눌러 쓰고 광덕사를 나섰습니다. 그리고 풍세천을 걸어나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에게 다 공손하게 절을 하는 거예요. 꼬부랑 할머니들까지! 이때 나는 우리나라에 불심이 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조선문명의 여파를 절실하게 느껴보았습니다. 풍세에서 천안까지 시외뻐스를 탔고, 천안에서 서울까지 그때 갓 개통이 된 한진고속뻐스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신촌, 어머니가 계신 집까지 승복을 입은 채 달려왔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평생을 기독교에 헌신한, 새벽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고 하는 독실한 기독교인, 아니 심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나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걱..
새색시의 인가 그 다음날 아침, 나는 바지는 중옷을 입고, 윗도리는 흰 난닝구 하나 걸친 채로 별당과의 반대편으로 나있는 계곡(안산으로 올라가는 계곡)을 올라갔습니다. 그 계곡에는 당시 화전민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계곡 아래쪽에 서너 채가 있었고 꼭대기에 또 서너 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한 채의 매우 정감이 서린 초가집이 있었습니다. 그곳을 올라가려면 반드시 들를 수밖에 없는 집이었죠. 남서향에 툇마루가 반듯하고 불 때는 부엌이 옆으로 있는 전형적인 초가집이었어요. 저는 그곳 툇마루에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부엌에서 아주 인상이 밝고 젊은 새색시 같은 여인이 나오는 거였어요. 아마도 시집온 지 얼마 안 되는 그 집 며느리 같았어요. 그런데 저를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
소쩍새 울음의 신비 이렇게 3개월쯤 지난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나는 잊지 못할 체험을 했습니다. 나는 매일 밤, 별당에 촛불을 켜놓고 앉아(당시 물론 전기가 그곳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좌선을 했습니다. 한밤중에 홀로 거대한 세 부처님 좌상 앞에서 좌선을 하는 영광이랄까 유아독존이랄까요? 일종의 포만감, 고독감, 정결한 느낌, 뭐 그런 것들이 어린 나를 휘감았습니다. 정말 열락(悅樂)이 따로 없었어요. 어느 날 밤 늦게까지 제가 쌍가부좌를 틀고 오지게 정진을 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쌍가부좌를 튼 몸이 쌍가부좌를 튼 채로 부응 뜨는 것이었습니다. 서서히 공중으로 부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점점 올라가더니 가운데 부처님 얼굴 앞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살아 움직이더라구요. 그리고 부처님과 대화를..
별당 용맹정진 대웅전 뒤로 산허리에 높게 자리잡은, 웅장한 세 부처님을 모셔놓은 별당이 있었는데(그 전각의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실상 당시에 별당은 대웅전보다도 더 고취가 풍기고 더 웅장하고 더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 별당에는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별당이야말로 나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죠. 매일 청소를 하고, 하루종일 시간이 나는 대로 앉아 용맹정진을 했습니다. 쌍가부좌를 틀다가, 반가부좌를 번갈아 틀다가, 일어나서 걷다가 하면서 하루종일 좌선을 했지요. 스님들에게 좌선하는 방법을 배웠지요. 좌선의 당면한 목적은 일단 사유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주더군요. 콧구멍에 장미꽃잎을 대어도 그것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마셔라! 그리고 숨..
첫 만남의 충격적 인상: 이것은 반불교다! 여러분들께 나의 모호한 감성에서 부각되는 전혀 새로운 논리를 이 프롤로그에서 전달한다는 것에 관해 뭔가 뒤죽박죽이 된 느낌이 드는군요.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KBS 「도올아인 오방간다」라는 젊은이들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하면서 젊은이들과의 소통이라는 주제의식이 강렬하게 부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쉽게 책을 써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많은 내용을 전달하지 말고 간결하게 나의 견해를 밝히자! 이런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반야심경』 260자를 해설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간결한 문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사의 방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선 제가 『반야심경』을 만나게 된 최초의..
최초의 해후: 『반야심경』 밑씻개 어느 날 똥을 누느라고 변소깐에 무릎을 웅크리고 앉아있을 때였죠. 그때는 변소깐도 나무로 엉성하게 만든 것이고 퇴비 만든다고 아래가 다 터져 있었죠. 변을 보느라고 웅크리고 앉아있는데 이상한 문자들이 내 눈에 띄었어요. 밑씻개로 신문쪽지나 종이들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반야심경』이 쓰여진 종이쪽지였습니다. 나는 그때만 해도 『반야심경』이라는 게 뭔지 잘 몰랐습니다. 그것을 스님들이 염불로서 암송한다는 것은 알았어도, 그것이 진언(眞言, Mantra)이나 주구(呪句)와 같은 기호의 나열이지 그 자체로 의미를 전달하는 평범한 문장이 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습니다. 자아~ 이게 웬일일까요? 한 글자 두 글자, 센텐스 바이 센텐스, 주어..
광덕사로 가는 길 그러나 내가 갔을 때는 주지 스님도 안 계셨고 거의 폐찰에 가까울 정도로 쇠락한 모습이었습니다. 이 광덕사 주변이야말로 천안호도과자가 유명하게 된 그 호도의 원산지입니다. 호두나무가 꽉 들어차있는데, 호두나무잎에서는 매우 싱그러운 향내가 납니다. 그 냄새는 정말 좋아요. 그런데 더욱 신기한 것은 그 냄새를 모기가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두나무숲에는 모기가 없는 편입니다. 정말로 광덕사에는 모기가 적었습니다. 풍세면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그곳에서부터는 풍세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천변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어요. 주변에 풍요로운 농촌의 광경이 있고 그 사이로 풍성한 수량의 풍세냇갈이 흐르고 있습니다. 천안 부근에는 물이 박합니다. 오직 광..
철학을 전공하다 나는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다시 편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했습니다. 이미 삶의 깊은 고뇌의 체험을 통하여 자각적으로 선택한 철학의 길이었기 때문에, 내가 철학이라는 학문을 대하는 태도는 일반 철학과 학생들과는 좀 달랐습니다. 나의 주체적 삶의 체험 속에서 철학적 진리를 용해(鎔解)시키려고 맹렬하게 노력했습니다. 신학에서 철학으로 제가 문학(問學, 묻고 배우다)의 길을 바꾼 이유는 실로 매우 단순했습니다. 신학은 전제가 있는 학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무전제의 학문이었습니다. 철학과 3학년 때의 일이었죠. 불교학개론은 이미 저학년 때 들었고, 3학년 때 노장철학과 대승불학을 들었습니다. 점점 불교학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져감에 따라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불교를 실제로 스님이 되어 체험해..
1장 프롤로그 인연 나는 충남 천안시 대흥동 231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천안에서 초등학교를 나왔고 상경하여 보성중ㆍ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1965년에 고려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던 중 신병이 깊어져 학업을 중단하고 낙향을 했습니다. 낙향한 후로도 고생을 심하게 했는데, 그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천안의 고교생들을 상대로 영어성경을 강의했습니다. 나는 그때 신약성경(RSV영어성경판) 전체를 류형기 주석서와 함께 다 읽었고, 예수와 더불어 사도 바울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나를 목회자로 이끌고 계시다, 그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길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 자신의 신앙과 판단에 따라 수유리에 있는 한국신학대학에..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觀自在菩薩 行深 般若波羅蜜多 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께서 피안(彼岸)에 도달할 때에 다섯 가지가 모두 공(空)한 것임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괴로움과 액란을 제도하였나니라관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다 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即是空 空即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사리자여! 색은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아니하다.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라.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도 이와 같으니라.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사리자여! 이 모든 오온(五蘊)에서 구분하여 둔 색. 수. 상. 행. 식의 그 낱낱과 같은 모든 법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고미숙 서론 초판 머리말 / 개정신판을 내며 프롤로그 여행 / 편력 / 유목 1부 “나는 너고, 너는 나다” 1. 젊은 날의 초상 신체적 특징 태양인 우울증 ‘마이너리그’ 『방경각외전』 2. 탈주ㆍ우정ㆍ도주 미스터리(mistery) 분열자 ‘연암그룹’ 생의 절정 ‘백탑청연’ 연암이 ‘연암’으로 달아난 까닭은? 3. 우발적인 마주침 열하 마침내 중원으로! 웬 열하? 소문의 회오리 4. 그에게는 묘지명이 없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퀴엠’ 높고 쓸쓸하게 “나는 너고, 너는 나다” 2부 1792년, 대체 무슨 일이? 1. 사건스케치 서학과 명청문집 문체 전향서 희생자 이옥과 문체반정의 결과 2. 문체와 국가장치 지식인들을 길들이는 첨단의 기제 소품과 소설..
함께 읽어야 할 텍스트 『열하일기 1, 2, 3』 김혈조 옮김, 돌베개 2009 / 『열하일기 상, 중, 하』 리상호 옮김, 보리, 2004 『열하일기』 완역본은 ‘돌베개’ 판과 ‘보리’ 판 두 가지다. 후자는 북한판을 보리출판사에서 재출간한 것이다. 전자는 명실상부한 완역본이다. 이전에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나온 것이 있긴 했지만 한문식 고어투가 많아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았는데, 이 ‘돌베개’ 판은 그런 단점을 말끔히 해소한 역작이다. 꼼꼼하고 치밀한 고증으로 기존의 오역을 잡아내고 동시에 문장도 아주 깔끔하고 매끄럽다. ‘보리’판은 북한판이라 일상적 구어체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상, 하』(개정판) 고미숙ㆍ김풍기ㆍ길진숙 옮김, 북드라망..
주요용어 해설 기계(machine) 분자생물학자 자크 모노에 의해 정립되었고,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철학적으로 변용된 개념. 기계라고 하면 명령 혹은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 고정된 시스템을 떠올릴 테지만, 그때의 기계는 mechanism에 해당한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기계, 즉 machine은 어떤 활동 내지 에너지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이다. 따라서 접속하는 짝이 달라지면 동일한 것도 다른 기계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입은 식도와 접속하여 영양(음식물)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경우에 ‘먹는 기계’가 되고, 성대와 접속하여 소리의 흐름을 절단 채취하는 경우에 ‘말하는 기계’가 되며, 연인의 입이나 성기와 접속하여 성적 에너지의 흐름을 절단 채취하는 경우에는 ‘섹스..
『열하일기』 등장인물 캐리커처 장복과 창대, 그리고 말 연암의 수행인들, 장복은 하인이고, 창대는 마두(馬頭)다. 술은 입에도 못 대고, 일자무식인 데다 고지식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환상의 커플’ 중화주의가 뼛속까지 침투하여 중국은 ‘되놈의 나라’라며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종종 어이없는 해프닝을 저질러 연암을 질리게 한다. 갑작스럽게 열하행이 결정되면서 장복이만 연경에 남게 되자, 울고불고 하는 바람에 연암이 그걸 빌미로 ‘이별론’을 한바탕 늘어놓는다. 창대는 가는 도중 부상에, 몸살에 거의 죽을 고생을 한다. 덕분에 연암이 창대를 돌보는 처지가 된다. 이 고지식 커플에 비하면 말이 훨씬 더 지혜롭다. 이름은 없지만, 여행 내내 연암과 한몸이 되어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호곡장론(好哭場論)」ㆍ「..
중국의 장관은 ‘상의실종’과 ‘슬리퍼’에 있다?! “청문명의 장관은 버려진 기왓조각과 똥부스러기에 있다[壯觀在瓦礫 曰壯觀在糞壤]!” 『열하일기』 「일신수필(馹汛隨筆)」에 나오는 명문징이다. 기왓조각과 똥부스러기 하나도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재활용하는 하는 걸 보고 연암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거기에는 자기 삶에 대한 존중감이 깊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변방의 가난한 사람들까지 이렇게 자기 삶을 배려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태평천하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연암의 생각이었다. 그럼 지금 중국은 어떤가? 연암이 갔던 그 중국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단 무지하게 먹고 가차 없이 버린다. 한마디로 쓰레기 천국이다. 이번엔 더 심했다. 단동과 책문 근처의 작은 마을들은 폭격을 맞은 듯 황폐했다. 자본주의하..
‘서프라이즈’ 사랑 여행은 만남이다. 길 위에 나서면 누군가를 만난다. 낯선 이든 혹은 이국인이든, 이번 여행도 그랬다. 다큐팀과의 만남은 아주 생소하고 신선했다. 정규직과 함께 일을 해본 적이 없는 데다 다큐를 찍는 프로들이라 더더욱 그랬다. 평소엔 여유있고 유연하지만 일에 대한 긴장감은 결코 놓치지 않는다. 작업이 끝나면 반드시 회식을 하는 것도 역시 정규직답다!^^ 하지만 나는 잠이 많은 데다 회식체질이 아니어서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대신 나의 룸메이트이자 동반 출연자였던 사랑이와의 만남은 아주 특별했다. 처음 사랑이를 봤을 때 두 번 놀랐다. 얼굴이 꼭 인형같이 생겼다. 무슨 연예인을 데려온 줄 알았다. 동갑내기인 양PD와 비교해도 완전 ‘애송이’처럼 보였다. 또 하나 이름이 ‘사랑’이라..
카메라 : 권력과 은총의 화신 압록강을 건넌 후 연암 일행은 책문에 도착한다. 책문은 조선과 중국 사이의 경계, 곧 국경이다. 검문검색을 통과하느라 연암 일행은 온갖 곤혹을 치른다. 하지만 정작 그건 워밍업에 불과했다. 책문을 넘자 진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폭우다. 한창 장마철에 떠난지라 폭우로 강이 범람하면 말도 사람도 꼼짝할 수가 없다. 노숙을 하면서 하염없이 머무르는 수밖에. 그러다가 홀연 날이 맑으면 정신없이 달려야 한다. 만수절 행사 전에 연경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도착했건만 황제는 연경에 있지 않았다. 열하의 피서산장에 가 있었던 것. 게다가 만수절 행사에 조선 사신단을 꼭 참여시키라고 특별명령까지 내렸다. 이런! 일행은 다시 짐을 챙겨 연경에서 열하..
국경과 자본, 그 사이에서 16시간 향해 끝에 마침내 단동에 도착했다. 제일착으로 나오긴 했지만 촬영장비 때문에 발이 묶였다. 중국정부의 허가를 받은 비자를 보여줘도 막무가내였다. 우리를 담당할 중국관리와 현지 코디(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빠져나간 대합실에 덩그러니 우리 일행만 남을 즈음. 중국관리와 현지코디가 도착했다. 그들 덕분에 간신히 통과하긴 했지만 그때부터 또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나와 사랑이가 단동 관문을 통과하는 장면을 찍으려 하자 현지 관리들은 무조건 안 된단다. 담당관리가 가지고 온 중앙정부의 신임장도 현지에선 통하지 않는다. 공산당 일당체제인데 중앙정부의 명령이 통하지 않는 아주 ‘이상한 제국’이다. 다들 열을 받았지만 결국 포기하고 북한식당에 가서 만찬을 즐..
다시 열하로!(2012년 여름) 인트로: 문득, 망망대해 2012년(임진) 7월(정미) 20일(임오) 오후 5시, 인천항 연안부두 제1 터미널에서 나는 대형선박에 몸을 실었다. 난생 처음하는 항해였다. 강원도 산간 지역 출신이라 그런지 그간 바다와는 통 인연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바다에 대한 욕구가 전혀 없었다는 편이 맞겠다. 내게 있어 바다는 그저 막막하고 심심한 곳이었다. 게다가 뱃멀미에 대한 공포도 적지 않았다. 『열하일기』의 시발점이 단동이고 거기에 가기 위해선 배를 타야 한다는 걸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늘 비행기를 타고 심양으로 간 다음 거꾸로 요양 쪽을 되짚는 방식으로 여행을 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연유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마침내 바다여행을 하기로 한 것이다. 우째 이런 일이? ..
가는 곳마다 길이 되기를……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도무지 갈 데가 없었다. 로사(老舍)에서 보기로 한 경극도 취소되었고, 재래시장, 영화관 등 열린 광장들은 모조리 폐쇄되었다. 물어물어 연암이 다녀간 사찰들을 찾아갔건만, 거기조차 스산한 공고문과 함께 문이 닫혔다. 엄마가 깨를 사오라고 했다는 J와 여름나기 알뜰쇼핑을 계획했던 Y의 희망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L은 심각한 표정으로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댔고, 우리들은 이름없는 공원에 주저앉아 멍한 눈으로 거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열하에 다녀오는 동안 베이징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느긋하게 관망하던 중국공산당이 인터넷 여론에 밀려 마침내 ‘사스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마스크의 행렬, 경계하는 눈빛들 귀국러시. 마치 외계인의 침입을 다..
낙타여! 낙타여! “찾았다!” 열하에서 돌아오는 길, 승합차 뒷좌석에서 L이 갑자기 소리쳤다. 그러고는 『열하일기』의 한 페이지를 내 코앞에 들이밀었다. 놀랍게도 거기엔 연암이 수천 마리의 낙타떼를 목격하는 장면이 또렷이 서술되어 있었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초판에서 연암이 낙타를 번번이 놓쳤다고 썼기 때문이다. 그간 『열하일기』를 수도 없이 읽어댔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텍스트 좀 제대로 읽으세요.” L은 의기양양, 기고만장이다. 윽, 안 그래도 여행 내내 건건사사 신경전을 벌이는 도중이었는데. 이 결정타 앞에서 나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쓰라린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이건 또 어인 곡절인가. 가슴 저 밑바닥이 뭉클해진다. 전공도 다르고, 이번 여행..
달라이라마와 마르코스 ARS 퀴즈 하나. 달라이라마와 마르코스(Marx가 아님)의 공통점은? ① 유머로 승부한다. ② 권력이 없다. ③ 지도자다. 힌트 —— 한 사람은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끄는 수장이고, 또 한 사람은 멕시코 라칸도나 정글에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을 지휘하는 부사령관이다. 한 사람의 얼굴은 사방에 알려져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언제나 검은 마스크에 가려져 있다. 답은? ①, ②, ③번, 요약하면 둘 다 권력이 없는 유머러스한 지도자. 근데 이게 말이 되나? 된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정치적 상상력의 배치를 바꿀 것, 자발적 추대에 의해 구성되는 카리스마, 이데올로기가 아닌 직관의 정치, 적대가 아니라 생성에 기초하는 조직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이 두 사람에게는 ..
열하, 그 열광의 도가니 “노새의 족보는?” “엄마는 말, 아빠는 당나귀.” “맞았어. 말의 힘과 당나귀의 지구력을 겸비한 셈이지. 그럼, 엄마가 당나귀, 아빠가 말인 건?” “그런 놈도 있나? 글쎄다~.” “버새!” “그럼 힘도 없고 지구력도 딸리겠네? 그걸 워디에 써?” “아니지, 그러니까 되려 상팔자지. 우리도 그렇잖아. 푸하하.” L과 N, 그리고 그의 연인 Z의 ‘개콘’식 대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고북구를 나와 열하로 가는 길목 곳곳에서 노새와 당나귀들이 출몰(?)했기 때문이다. 연암은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는「일야구도하(一夜九渡河)」’ 어드벤처를 겪었건만, 지금 그 강들은 겨우 형체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연암이 경탄해 마지않았던, 한 시간에 70리를 달리던 말들은 ..
‘앉아서 유목하기’ "건륭 45년 경자 8월 7일 밤 삼경(三更)에 조선 박지원이 이곳을 지나다[乾隆四十五年庚子八月七日夜三更, 朝鮮朴趾源過此].” 이름이란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던 연암이 이름을 남긴 곳. 그것도 남은 술을 쏟아 먹을 갈고, 별빛을 등불삼아 이슬에 붓을 적셔 자신의 흔적을 새겨넣은 곳, 고북구, 거용관과 산해관의 중간에 있어 험준하기로 이름난 동북부의 요충지다. 연암이 ‘무박나흘’의 고된 여정 속에서 통과했던 이곳을 우리는 베이징을 나선 지불과 반나절만에 도착했다. 백 개가 넘는다고 하는 입구 중 우리가 오른 곳은 반룡산(蟠龍山)에 있는 관문, ‘백두대간’을 연상시키는 천연의 요새 위로 장성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마치 용의 비늘인 양 꿈틀거린다. 오, 놀라워라! 하지만 어쩐..
여성들이여, 제기를 차라 베이징에서 합류하기로 한 후발대 중 세 명이 낙오했다. 사스 때문이란다. 뭔 사스? 아, 그러고보니 우리는 그동안 사스를 잊고 있었다! 요동벌판을 가로질러 오는 동안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었기 때문이다. 황사의 괴력에다, 고속도로 위의 질주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뺨치는 수준이었다. 추월 과속은 기본이고, 중앙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현란한 액션에는 그저 아연할 따름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원시적 공포에 시달리는 동안, 도시에선 사스가 한층 기세를 떨치고 있었던가보다. 폭우로 범람한 강을 건널 때, 누군가 연암에게 물었다. 소경이 애꾸말을 타고 밤중에 깊은 물가에 섰는 것이야말로 위태로움[盲人騎瞎馬, 夜半臨深池]의 최고가 아니겠느냐고, 연암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소경은 아무것도..
사상체질 총출동! 나는 ‘용가리 통뼈’다. 너무 놀라지들 마시라. 마흔이 넘도록 뼈를 다치거나 삔 적이 거의 없기에 하는 말이다. 이번 여행중에도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첫관문이 있다는 발해만(渤海灣)엘 갔다가 택시기사의 실수로 바퀴에 발목을 밟히는 ‘참사’를 당했건만, 5분 만에 멀쩡해졌다. 강원도 산골 출신이라 그런가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신장이 튼튼해서 그렇단다. 사상의학적으로 보면 신장이 튼튼한 사람은 소음인에 해당된다. 소음인, 차분하고 내성적이다. 내가? 그럴 리가! 하긴, 어린 시절엔 하루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그랬던 것도 같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보지 않는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아니나 다를까, 신장 못잖게 폐가 강하다. 날카로운 인상에 목소리가 높고 성질이 좀 급한 편이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산해관을 지나서도 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차창 밖에서는 한겨울의 칼바람 같은 굉음이 들려오고, 고속도로 위의 나무들은 날아갈 듯 휘청댄다. 사진을 찍기 위해 차 밖으로 나설라치면 머리가 사방으로 곤두서고 다리가 꺾일 정도다. 맑은 하늘을 본 게 언제더라? 그래, 거기에 가면 좀 쉴 수 있겠지, 숲도 있고, 물도 있을 테니, 수양산 ‘이제묘’를 찾아갈 때의 심정은 대략 이랬던 것 같다. 아득한 고대, 은나라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아버지인 왕이 세상을 떠나자 ‘형님 먼저, 아우 먼저’하며 군주의 자리를 양보했다. ‘흠, 훌륭한 덕을 갖춘 군자들이로군’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할 때 말고삐를 잡고 만류했으나 듣지 않자 수양산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먹다 죽..
잡초는 범람한다! 2003년 4월 14일 오후, 여행의 첫 기착지 심양에 도착했다. 애초엔 배를 타고 단동으로 갈 작정이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일정이 바뀌는 바람에 심양이 출발지가 되었던 것이다. 일행은 나를 포함하여 모두 셋, 연암이 장복이와 창대를 동반했듯, 나 또한 Y와 J, 두 명의 후배와 함께 했다. 연암이 유머의 천재라면, 장복이와 창대는 연암조차 얼어붙게 할 정도의 ‘덤앤더머’였다. 그럼 우리 팀은? ‘갈갈이 패밀리’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Y, 중국어와 한국어에 모두 능통하고, 여성들만 보면 일단 말을 걸고본다. J, 중국어는 물론 모국어인 한국어도 약간 더듬거린다. 여성들 앞에선 더더욱 얼어붙는다. 공항에는 밤열차를 타고 달려온 L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 연구실(연구공간 수유+너머)에..
열하일기의 길을 가다(2003년 봄) 2003년 5월부터 6월까지 『문화일보』에 연재되었던 것임을 밝혀둔다. 군데군데 내용을 약간씩 추가 수정하였다. 천 개의 길, 천 개의 고원 길을 나서기도 전에 여행은 시작되었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열하일기』에 대한 ‘지독한 사랑’에 빠져 있었다. 동서고금 어떤 테마의 세미나에서건 『열하일기』로 시작해 『열하일기』로 마무리했고, 밥상머리에서 농담따먹기를 할 때, 산에 오를 때, 심지어 월드컵축구를 볼 때조차 『열하일기』를 입에 달고 살았다. 나의 원시적(!) 수다에 견디다 못한 후배들이 한때 『열하일기』를 ‘금서’로 지정하는 ‘운동’을 조직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럴 때면, 나는 이렇게 맞섰다. “내가 『열하일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열하일기』가 나를 통해 자..
그들은 만나지 않았다! 윤리학적 태도에 있어서도 그들은 전혀 달랐다. 연암이 ‘우도(友道)’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 데 비해, 다산은 ‘효제(孝悌)’를 일관되게 주창한다. 다산에게 있어 효제는 독서의 근본이자 수행의 근간이다. 고정된 의미화를 거부하는 연암의 철학적 태도는 필연적으로 ‘우정의 윤리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에 반해 주체의 명징성을 강조하는 다산에게는 우정보다는 ‘효제’라는 가치를 실천적으로 확충하는 것이 더 절실했던 것이다. 물론 이 차이는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행로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연암에게는 벗의 사귐이 일상의 요체였지만, 다산의 인맥은 대체로 가문과 당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전자의 경우, 중심적인 가치로부터 벗어나 상하를 가로지르며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데 주력했..
호락논쟁에 대한 관점 차이 한편, 18세기 철학적 논쟁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한 인물성동이논쟁과 관련하여 볼 때, 천기론이 인간과 자연의 연속성을 강조한 동론(同論)의 입장과 연결된다면, 다산의 ‘상제관’은 이론(異論)과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격신의 설정을 통해 이론(異論)보다도 훨씬 더 과격한 인간중심주의를 표방한다. 다산에 따르면 인성과 물성은 결단코 다른 것이어서, 물성은 사물의 자연적 법칙에 한정된다. 인간의 존재는 이 물질계의 어떠한 유(類)로부터도 초월해 있으며, 이 모든 것을 ‘향유’하는 주체이다. 인간이 이러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영명(靈命)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영명은 기타 물질계와의 연속성이 부정된 독자적인 인식의 주체로서 작용한다. 자연의 모든 사물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
우주와 주체에 대한 관점 차이 다음, 우주와 주체에 대하여, ‘천’에 대한 연암의 관점은 ‘천기론(天機論)’의 지평 위에 있다. 연암을 비롯하여,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이옥(李鈺) 등에 의해 구성된 ‘천기론’은 ‘천리론(天理論)으로 표상되는 중세적 초원론을 전복하여 자연을 생성과 변이의 내재적 평면으로 변환시킨 것이다. 욕망, 여성, 소수성(minority) 등 기존의 체계에서 봉쇄되었던 개념들이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장이기도 했다. “참된 정(情)을 편은 마치 고철(古鐵)이 못에서 활발히 뛰고, 봄날 죽순이 성난 듯 땅을 밀고 나오는 것과 같다”는 이덕무의 언급이 그 뚜렷한 예가 된다. 이옥의 다음 글은 가장 명쾌한 선언에 해당된다. 천지만물은 천지만물의 성(性)이 있고, 천지만물의 ..
말과 사물에 대한 관점 차이 연암의 미학적 특질이 유머와 패러독스라면, 다산은 숭고와 비장미를 특장으로 한다. 앞에서 음미한 「양반전(兩班傳)」과 「애절양(哀絶陽)」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유머와 패러독스가 ‘공통관념’을 전복하면서 계속 미끄러져 가는 유목적 여정이라면, 숭고와 비장미에는 강력한 대항의미를 통해 자기 시대와 대결하고자 하는 계몽의 파토스(pathos)가 담겨 있다. 그리고 이런 미학적 차이 뒤에는 몇 가지 인식론적 접점들이 자리하고 있다. 먼저 말과 사물의 관계. 조선 후기 비평담론에 있어 언어와 세계의 불일치는 핵심적인 논제였다. 언어를 탈영토화하기 위한 다양한 모색이 이루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크게 보면, 언어를 탈영토화하는 방향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혁명시인의 비분강개 다산은 그와 달라서 지배적인 담론에 대항하기 위하여 거대한 의미체계를 새롭게 구축한다. 연암이 그러했듯이, 그 또한 문장학의 타락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과거학의 폐해를 이단보다 심하다고 분개해 마지않았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제시한 대안은 그것들이 잃어버린 원초적 의미들 혹은 역사적 가치들을 다시 복원하여 역동성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다산에게 있어 진정한 시란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읽어내고, 세상을 경륜하려는 욕구가 충일한 상태에서 문득 자연의 변화를 마주쳤을 때 저절로 터져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니면 그런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될 수 없[不愛君憂國非詩也 不傷時憤俗非詩也]”다. ..
표현기계의 발랄함 자, 워밍업은 이 정도로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연암이 표현형식을 전복하는 데 몰두한 데 반해, 다산은 의미를 혁명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은 두 사람의 비평적 관점에서도 그대로 확인되는 사항이다. 먼저, 연암 비평의 핵심은 주어진 언표의 배치를 변환하는 데 있다. 당대 고문이 지닌 경직된 코드를 거부하고 우주와 생의 약동하는 리듬을 포착하는 것이 ‘연암체’의 핵심이었다. 문장에 고문과 금문의 구별이 있는 게 아니다. (중략)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에 따라 그 형상과 소리를 곡진히 표현하고 그 정경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만 있다면 문장의 도는 그것으로 지극하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4권 常..
‘표현기계’와 ‘혁명시인’의 거리 蘆田少婦哭聲長 갈밭 마을 젊은 아낙네 울음소리 길어라 哭向縣門號穹蒼 고을문 향해 울다가 하늘에다 부르짖네 夫征不復尙可有 수자리 살러 간 지아비 못 돌아올 때는 있었으나 自古未聞男絶陽 남정네 남근 자른 건 예부터 들어보지 못했네 舅喪已縞兒未澡 시아버지 초상으로 흰 상복 입었고 갓난애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三代名簽在軍保 할아버지 손자 삼대 이름 군보에 올라 있다오 薄言往愬虎守閽 관아에 찾아가서 잠깐이나마 호소하려 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처럼 지켜 막고 里正咆哮牛去皁 이정은 으르대며 외양간 소 끌어갔네 磨刀入房血滿席 칼을 갈아 방에 들어가자 삿자리에는 피가 가득 自恨生兒遭窘厄 아들 낳아 고난 만난 것 스스로 원망스러워라 蠶室淫刑豈有辜 무슨 죄가 있다고 거세하는 형벌을 당했나요..
서학(西學), 또 하나의 진앙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서학이 그것이다. 정조 집권시에는 노론계열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패사소품 외에도 남인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졌던 서학 역시 정치적 소용돌이를 야기하는 또 하나의 진원지였다. 그럼에도 정조는 유독 전자를 문제삼음으로써 후자를 적극 보호해주었다. “서양학을 금지하려면 먼저 패관잡기부터 금지해야 하고, 패관잡기를 금지하려면 먼저 명말청초의 문집들부터 금지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명분이었다. 서학과 패관잡기가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언뜻 비약과 모순투성이로 보이는 이런 논법의 속내는 사실 매우 단순하다. 서학은 교리가 너무 이질적이어서 솎아내기가 쉽지만, 패사소품은 은밀하게 침투하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부를 교란한다는..
그때 ‘다산’이 있었던 자리 비평사적 관점에서 볼 때 문체반정(文體反正)은 하나의 특이점이다. 일단 ‘문체와 국가장치’가 정면으로 대결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그 사건으로 인해 18세기 글쓰기의 지형도가 첨예한 윤곽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열하일기』가 이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었고, 연암이 정조의 당근과 채찍을 교묘하게 피해갔음은 이 책 2부에서 밝힌 바와 같다. 그렇다면 그때 다산은 어디에 있었던가? 혈기방장한 20대 후반을 통과하면서 관료로서의 경력을 쌓고 있었던 다산은 문체반정이 일어나기 직전, 이런 책문을 올린다. 신은 혜성(彗星)ㆍ패성(孛星)과 무지개 흙비 오는 것을 일러 천재(天災)라 하고 한발 홍수로 무너지거나 고갈되는 것을 일러 지재(地災)라 한다면, 패관잡서..
오만과 편견 연암 박지원(1737~1805)과 다산 정약용(1762~1836). 이 두 사람은 조선 후기사에 있어 그 누구와도 견주기 어려운 빛과 에너지를 발산한다. 두 사람이 펼쳐놓은 장은 17세기 말 이래 명멸한 수많은 ‘천재’들이 각축한 경연장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이성의 지대이다. 그래서인가? 그들이 내뿜는 빛에 눈이 부신 탓인가?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서로 유사한 계열로 간주하고, 그렇게 기억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뜻 엿보았듯, 그들은 한 시대를 주름잡은 천재요 거장이라는 공통점 말고는 유사성을 거의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이질적이다. 그런데 어째서 둘은 마치 인접항처럼 간주된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둘을 비춘 렌즈의 균질성이 차이들을 평면화했기 때문이다. ‘중세적..
연암과 다산: 중세 ‘외부’를 사유하는 두 가지 경로 같은 책 다른 독법 그대가 태사공의 『사기(史記)』를 읽었다 하나, 그 글만 읽었지 그 마음은 읽지 못했구료. 왜냐구요. 「항우본기(項羽本紀)」를 읽으면 제후들이 성벽 위에서 싸움 구경하던 것이 생각나고, 「자객열전」을 읽으면 악사 고점리가 축을 연주하던 일이 떠오른다 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늙은 서생의 진부한 말일 뿐이니, 또한 부뚜막 아래에서 숟가락 주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아이가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司馬遷)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발은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해가지고 살금살금 다가가, 손은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호로록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아무도 없고, 계면쩍어 씩 웃다..
이름의 중력에서 벗어나 我服地黃湯 내가 지황탕을 마시려는데 泡騰沫漲 印我顴顙 거품은 솟아나고 방울도 부글부글 그 속에 내 얼굴을 찍어놓았네 一泡一我 一沫一吾 거품 하나마다 한 사람의 내가 있고 방울 하나에도 한 사람의 내가 있네 大泡大我 小沫小吾 거품이 크고 보니 내 모습도 커다랗고 방울이 작아지자 내 모습도 조그맣다. (中略) 我試嚬焉 一齊蹙眉 시험 삼아 얼굴을 찡그려보니 일제히 눈썹을 찌푸리누나 我試笑焉 一齊解頤 어쩌나 보려고 웃어봤더니 모두들 웃음을 터뜨려댄다. (中略) 斯須器淸 香歇光定 이윽고 그릇이 깨끗해지자 향기도 사라지고 빛도 스러져 百我千吾 了無聲影 백명의 나와 천 명의 나는 마침내 어디에도 자취가 없네 咦彼麈公 過去泡沫 아아! 저 주공은 지나간 과거의 포말인 게고 爲此碑者 現在泡沫 이 비..
네 이름을 돌아보라!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를 설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먼지’로 이루어졌을 뿐인데,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가 대체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이렇게 되는 순간, 인간 내부의 경계 또한 무의미해진다. 즉 개별인간들에게 부과된 고유한 정체성 역시 불변의 위치를 고수할 이유가 없다. 인연조건에 따라, 배치에 따라 일시적인 주체로 호명될 따름이지, 근원적으로는 모두가 무상(無常)한 것이다.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인간은 자아의 영원성을 지키기 위해 안달한다. 무엇보다 이름이 그러하다. 이름이란 대체 무엇인가? 한번 자신의 이름을 돌아보라! 卽此汝名 匪在汝身 그것이 네 이름이기는 하지만 너의 ..
생태주의 연암은 윤리적인 차원에서도 이런 태도를 실천하려고 했다. 사사로이 도살한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개는 주인을 따르는 동물이다. 하지만 기르면 잡아먹지 않을 수 없으니, 처음부터 기르지 않는 게 낫다”며 집에서 개를 기르지 못하게 했다. 또 한번은 타고 다니던 말이 죽자 하인에게 묻어주게 했는데, 하인들이 공모하여 말고기를 나누어 먹은 일이 있었다. 연암은 살과 뼈라도 잘 수습하여 묻어주게 한 다음 하인의 볼기를 치며, “사람과 짐승이 비록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이 말은 너와 함께 수고하지 않았느냐? 어찌 차마 그럴 수가 있느냐?”며 내쫓았고, 그 하인은 문 밖에서 몇 달이나 죄를 빈 다음에야 비로소 집에 들어올 수가 있었다 한다. 열하에서 종마법에 대해 웅변을 토할 때도 그의 관점은 단지 실용..
인성 물성은 같다! 18세기 철학사의 주요한 이슈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이 될 것이다.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같은가? 다른가? 이것을 둘러싸고 연임이 속한 노론 경화사족들 내부에서 한바탕 논란이 벌어진다. 기본적으로 동양의 사유는 인성과 물성을 연속성의 차원에서 접근한다. 인간과 외부 사이에 확연한 경계를 설정하지 않는 것이 인식의 근본전제이기 때문이다. 물아일체(物我一體) 혹은 천인합일(天人合一) 이 도의 궁극적 지향점인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전제를 공유하면서도 그 내부에서는 인성/물성의 차이 및 상대적인 위계를 강조하는 쪽과 그 둘의 연속성을 극단적으로 지향하는 입장이 갈라졌던 것이다. 후자의 입장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담헌 홍대용(洪大容)이다. 사람에게는 ..
3장 인간을 넘어 주체를 넘어 만물의 근원은 ‘먼지’ 연암은 연행이 시작되자, 말 위에서 중원의 선비들과 만나면 어떻게 논변을 펼칠까를 궁리한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지전설, 지동설로 한판 붙어보는 것.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이미 일반적인 상식이 되었지만, 지구가 돈다는 것은 아직 서양에서도 밝히지 못한 논변이다. 물론 그건 연암이 독자적으로 밝힌 이론이 아니라, 친구 정철조(鄭喆祚)와 홍대용(洪大容)에게서 귀동냥한 것이다. 「곡정필담(鵠汀筆談)」에서 드디어 실전이 벌어진다. 곡정이 묻는다. 우리 유학자들도 근래에는 땅이 둥글다는 설[地球之說]을 자못 믿습니다. 대저 땅은 모나고 정지되어 있고, 하늘은 둥글고 움직인다고 하는 설은 우리 유학자의 명맥이지요. 한데, 서양 사람들이 그것을 혼란스럽게 만들..
소박한 이단 『열하일기』에 그려진 천주교는 그래서 매우 유치한 수준이다. 대저 저 서양인들이 말하는 야소(耶蘇, 예수)는 중국의 군자나 토번의 라마와 비슷합니다. 야소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늘을 공경하여 온 천지에 교리를 세웠지만, 나이 서른에 극형을 당하고 말았답니다. 해서, 그 나라 사람들이 몹시 애모하여 야소회를 설립하고는 그를 신으로 공경하여 ‘천주’라 부르게 되었지요. 그래서 야소회에 들어간 자는 반드시 비통해하면서 야소의 수난을 잊지 않는다고 합니다. 「곡정필담(鵠汀筆談)」 耶蘇者 如中國之語賢爲君子 番俗之稱僧爲喇嘛 耶蘇一心敬天 立敎八方 年三十遭極刑 而國人哀慕 設爲耶蘇之會 敬其神爲天主 入其會者 必涕泣悲痛 不忘天主 왕곡정은 이런 식으로 천주교를 간단히 정리한 뒤, 이것이 비록 부처를 배격하고 있으..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 열하에서 곡정과 필담할 때 담배가 화제에 오른 적이 있다. 이 담배는 만력 말년에 절동(浙東)과 절서(浙西) 지역에 널리 유행했습니다. 이 물건은 사람들의 가슴을 막히게 하고 취해 쓰러지게 하는 천하의 독초이지요. 먹어서 배가 부른 것도 아니건만 천하의 좋은 밭에서 나는 귀한 곡식과 이문이 같고, 부녀자와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고기보다 더 즐기며 차나 밥보다 더 좋아합니다. 쇠붙이와 불을 입에 당겨 대니, 이 또한 세상 운수라 해야 할지. 아무튼 이보다 더 큰 변괴가 어디 있겠습니까.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萬曆末 遍行兩浙間 猶令人悶胸醉倒 天下之毒草也 非充口飽肚 而天下良田 利同佳糓 婦人孺子 莫不嗜如蒭豢 情逾茶飯 金火迫口 是亦一世運也 變莫大焉 그러자 연암은 “만력..
이단과의 강도 높은 접속 정황이 그러하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중국을 유람하다가 마음껏 주희를 반박하는 이를 만나면, 반드시 범상치 않은 선비로 여기고 이단이라면서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차분히 대화를 이끌어 그 속내를 알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를 통해 천하의 대세를 엿볼 수 있으리라. 「심세편(審勢編)」 駁朱者 知其爲非常之士而毋徒斥以異端 善其辭令 徵質有漸 庶幾因此而得覘夫天下之大勢也哉 이 유연한 도움닫기! 여기에서도 역시 영토화하는 선분과 탈영토화하는 선분이 뒤섞여 있다. 그의 위치는? 두 선분의 사이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암은 주자주의와 청왕조, 지식인과 주자학, 주자주의와 반주자주의 등의 선분들이 교차하는 사이를 매끄럽게 왕래한다. 그렇다면 양명학을 포함하여 주자학의 외부, 불학과 도학 ..
주자학과 이단들 주자는 주자주의자일까? 아닐까? 아마도 가장 정확한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일 것이다. 긍정의 경우는 주자주의가 기존의 배치를 동요시키면서 새로운 담론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상황을, 부정의 경우는 주자주의가 교조적 담론으로 기능하는 상황을 상정한 것일 터이다. 즉 이 단순소박한 문답은 어떤 전복적 사유도 시공간적 배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뿐 아니라, 자신에 반하는 의미까지도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을 환기시켜준다. 중세의 텍스트를 다루는 이들에게 주자는 언제나 넘어서야 할, 탈주자주의의 맥락에서만 그 얼굴을 드러내는 존재다. 앞서 간략하게 짚었듯이 16세기 이후 조선은 주자학이 통치이념으로 자리잡았고, 17세기 당파 간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육경(六經)에 대한 주자 이외의 어떤 ..
천하의 형세 분석 물론 그렇다고 연암의 의도가 청문명을 예찬하는 방향으로 귀결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이념적 명분이 아니라 지상에서 펼쳐지는 힘의 배치다. 연암의 정치적 촉수는 이 배치의 미세한 결을 더듬는다. 가령 조선의 선비들은 변발을 비웃는다. 변발은 청이 한족에게 강요한 야만적 습속 중 가장 악질적인 것이다. 그럼 어째서 조선에는 그것을 강요하지 않았는가? 생각하면 정말 의아하기 짝이 없다. 그들의 무력으로서는 조선을 무릎 꿇리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을 터인데. 연암이 보기에 청나라 쪽의 입장은 이렇다. “조선은 본래 예의로 이름이 나서 머리털을 자기 목숨보다 사랑하는데, 이제 만일 억지로 그 심정을 꺾는다면 우리 군사가 돌아온 뒤에는 반드시 뒤엎을 터이니, 예의로써 얽어매어 두느니만 못할..
2장 세 개의 첨점: 천하ㆍ주자ㆍ서양 북벌론이란 관념에 갇히지 않고서 ‘사이의 은유, 차이의 열정’을 당대의 첨예한 이념적 사안들에 투사하면 어떻게 될까? 물론 우리는 이미 앞에서 그가 중화주의, 북벌, 주자학 따위를 어떻게 비틀고 헤집고 다녔는지를 대강 살펴본 바 있다. 그걸 바탕 삼아 몇 가지 첨점들을 좀더 탐색해 보자. 때론 와이드 비전으로, 때론 현미경을 들이대고서. 당시 청왕조 치하의 한족 지식인들의 고심은 이런 것이다. 심정적으로는 절대 만주족 오랑캐의 통치를 인정할 수 없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들이 명왕조를 무너뜨리고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일까. 천하를 통치하는 건 하늘의 뜻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오랑캐로 하여금 천하를 지배하게 한 그 하늘의 뜻은 대체 뭐란 말인가. 「곡정필담(鵠..
그대 길을 아는가? 연암의 손자는 대원군 집정시 우의정까지 지냈고, 개화파의 선구자로 꼽히는 박규수다. 그가 평양감사를 지내던 시절, 친지 중에 한 사람이 박규수에게 이제는 ‘『연암집』을 공간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제안을 했다. 뜻밖에도 ‘공연히 스캔들 일으키지 말자’는 게 박규수의 답변이었다 한다. 연암 사후 무려 수십 년이 지난 19세기 후반까지도 연암의 글은 금기의 장벽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그는 조선 후기 담론사의 외부자였다. 그러던 그가 20세기 초 지식의 재배치 속에서 화려하게 복권되었다. ‘태서신법(泰西新法)’의 선각자로서, 그 이후 내재적 발전론과 더불어 실학이 한국학의 주요담론으로 부상하면서 연암의 텍스트는 탈중세, 민족주의 민중성의 맹아, 근대주의 등등으로 집중적인 스포트라..
‘사이’의 은유② 그러므로 ‘사이’의 은유들은 연암 사유를 떠받치는 기저를 이룬다. 이 점을 좀더 파고들기 위해 『열하일기』 바깥의 텍스트들을 음미해보자. 먼저 「낭환집서(蜋丸集序)」, 장님이 비단옷 입고 대로를 걷는 것과 멀쩡한 사람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 이 둘을 비교하면 어느 편이 나은가? 이 황당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연암은 먼저 ‘옷과 살’의 사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옛날에 황희 정승이 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 딸이 맞이하며 묻기를, “아버님께서 이를 아십니까? 이는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옷에서 생기지요?” 하니, “그렇단다.” 하므로 딸이 웃으며, “내가 확실히 이겼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며느리가 묻기를, “이는 살에서 생기는 게 아닙니까?” 하니, “그렇고 말고.” 하..
‘사이’의 은유 초월적인 중심을 전복하고 현실의 변화무쌍한 표면을 주시할 때 진리 혹은 선악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만약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만 본다면 허무주의(nihilism)로 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치의 무화라는 벡터(vector)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변화하는 흐름을 예의주시하면서 때에 맞게 새로운 가치들을 생성시켜야 한다. 그 구체적인 방편이 바로 ‘사이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열하로 가는 무박나흘의 대장정’을 아직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의 비몽사몽 상태를 연암은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솔솔 잠이 쏟아져서 곤한 잠을 자게 되니 천상의 즐거움이 그 사이에 스며 있는 듯 달콤하기 ..
코끼리에 대한 상상 그 구체적 결과물이 「상기(象記)」다. ‘코끼리의 철학’이라 부를 만한 이 텍스트는 초월적 주체에 대한 의혹으로부터 시작된다. 아, 사람들은 세상의 사물 중에 터럭만 한 작은 것이라도 하늘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그러나 하늘이 어찌 하나하나 이름을 지었겠는가, 형체로 말한다면 천(天)이요, 성정(性情)으로 말한다면 건(乾)이며, 주재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상제(上帝)요, 오묘한 작용으로 말하자면 신(神)이니, 그 이름도 다양하고 일컫는 것도 제각각이다. 이(理)와 기(氣)를 화로와 풀무로 삼고, 뿌리는 것과 품부하는 것을 조물(造物)로 삼아, 하늘을 마치 정교한 공장이로 보아 망치 도끼 끌 칼 등으로 조금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噫! 世間事物之微, 僅若毫末, 莫非稱天, 天何..
5부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1장 사이에서 사유하기 말똥구리에서 코끼리까지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을 아껴 여룡(驪龍)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룡 또한 여의주를 가지고 스스로 뽐내고 교만하여 저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螗琅自愛滚丸, 不羡驪龍之如意珠; 驪龍亦不以如意珠, 自矜驕而笑彼蜋丸. 이 글은 연암의 벗이자 제자인 이덕무(李德懋)의 것으로, 연암이 「낭환집서(蜋丸集序)」에서 재인용하면서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회자된 아포리즘(aphorizm)이다. 요점은 척도를 고정시키지 말라는 것. 진리 혹은 가치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놓이는 자리, 곧 배치에 따라 달라질 따름이다. 지극히 낮고 천한 미물인 말똥구리와 신화적 상상력에 감싸인 여룡을 대비함으로..
북벌(北伐) 프로젝트 물론 이런 정도로 중화사상이 골수에 박힌 자들이 설복당할 리가 없다. 연암 또한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강경한 전략을 구사한다. 먼저 표적을 북벌론(北伐論)으로 잡았다. 잘 알고 있듯이 소중화(小中華)주의는 북벌론과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다. 조선이 ‘작은 중화’라면, 마땅히 청나라 오랑캐를 물리쳐 중원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북벌론의 요지다. 병자호란 때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한 이후 인조는 북벌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다. 복수에 눈이 먼 인조와 그 추종자들에게 청과 조선의 역학 관계 따위가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청문명의 역동적 기류에 눈뜬 소현세자가 조선에 돌아와 뜻을 펴지도 못한 채 의문의 죽음을 당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소현세자를 ..
모두가 오랑캐다! 조선이 청문명을 거부하는 이유는 청이 북방의 유목민이고, 그들의 문화는 오랑캐라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역시 동이, 곧 동쪽 오랑캐다. 차이가 있다면, 농경민이라는 것뿐이다. 오랑캐가 오랑캐를 타자화하는 것, 이것이 소중화(小中華) 주의의 내막인 셈이다. 그럴 수 있는 근거는 조선은 비록 종족적으로는 오랑캐지만, 정신은 더할 나위없이 순수한 중화라는 것이다. 더구나 중화문명의 수호자인 한족이 멸망했으니, 이제 문명은 중원땅에서 동쪽으로 이동했다. 중화의 지리적, 종족적 실체가 사라진 마당에 이제 헤게모니는 누가 더 중화주의를 순수하게 보존하느냐에 달린 셈이다. 조선 후기 들어 주자학이 도그마화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주자학이란 송나라 때 주희에 의해 완성된 유학의 한 분파다. 주희는 당..
3장 “문명은 기왓조각과 똥거름에 있다” 문명과 똥 ‘똥과 문명의 함수’ 아니면 ‘똥의 역사’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웬 ‘개똥’ 같은 소리냐 싶겠지만, 이건 정말 진지한 담론적 이슈다. 똥이야말로 문명의 배치를 바꾸는 데 있어 결정적인 요소였던바, 어찌 보면 똥의 역사야말로 태초 이래 인류의 궤적을 한눈에 집약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까닭이다. 요즘 사람들의 똥에는 파리가 들끓지 않는다고 한다. 너무 독성이 강해서 파리떼도 기피한다는 것이다. 이러다간 ‘똥파리’라는 종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똥파리 없는 똥’,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만큼 인류가 현재 처한 상황을 잘 말해주는 것도 없지 않은가? 생태계의 파괴, 이성의 경계, 타자성 등, 지금 소위 ‘포스트 모던’ 철학이 씨름하..
말의 아수라장 그의 패러독스는 모든 차이들을 무화시켜 동일성으로 환원하려는 도그마에 대한 통렬한 웃음이 깔려 있다. “중요한 것은 이데아를 파면시키는 것이고, 이념적인 것은 높은 곳이 아니라 표면에 있다”(들뢰즈), 그의 언어가 가장 높은 잠재력에 도달하는 것도 이 ‘역설의 열정’에서이다. 물론 자신도 그 프리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유머와 개그의 주인공이 언제나 연암 자신이었듯이, 타자의 시선, 혹은 역설의 프리즘은 연암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투사된다. 사신을 따라서 중국에 들어가는 사람에겐 모름지기 부르는 호칭이 있다. 역관은 종사(從事)라 부르고, 군관은 비장(裨將)이라고 부르며, 나처럼 한가롭게 유람하는 사람은 반당(伴當)이라고 부른다. 소어(蘇魚)라는 물고기를 우리나라 말로는 ‘밴댕이[盤當]’..
전족에 대한 시선 한족 여인들의 전족(纏足) 문제만 해도 그렇다. 전족이란 여성들이 발을 작게 만들기 위해 발을 꼭꼭 싸매는 습속이다. 예쁘고 작은 발이야말로 가장 성적인 표징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금병매(金甁梅)』를 보면, 여주인공 반금련의 걸음걸이를 연보(蓮步), 즉 연꽃 같은 발걸음에 비유하는 경우가 종종 나오는데, 그게 바로 이런 맥락이다. 보기에는 좋을지 모르나, 그걸 위해선 아주 어릴 때부터 두 발을 조일대로 조여 성장을 멈추게 해야 했으니, 이 습속이야말로 여성에 대한 신체적 억압의 대표적 사례인 셈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전족의 거부’를 핵심 강령의 하나로 채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것이 철저히 한족의 습속이라는 점이다. 『열하..
판첸라마의 동불도 받지 못하는 편협함 어떻든 이처럼 외부자 혹은 타자의 시선으로 ‘우리’를 보면, 전혀 예기치 않은, 혹은 보이지 않던 면목들이 ‘클로즈 업’ 된다. 시선의 전복을 통한 봉상스(bon sens)의 해체! 이런 식의 수법은 단지 풍속의 차원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안을 평가할 때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열하에서 판첸라마가 동불(銅佛)을 하사했을 때, 조선 사신단이 마치 꿀단지에 손 빠뜨린 것처럼 당혹스러워하며 한바탕 소동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 일에 대해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이번 구리 불상도 반선이 우리 사신을 위해 먼 길을 무사히 가도록 빌어주는 폐백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이라도 부처에 관계되는 일을 겪으면 평생 누가 되는 판인데, 하물며 이것을 준..
우리의 술문화 시점변환이야말로 연암이 즐겨 사용하는 기법 중 하나다. 말하자면, 타자의 눈을 통해 조선의 문화나 습속을 바라봄으로써 익숙한 것들을 돌연 ‘낯설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조선 사신들의 의관은 신선처럼 빛이 찬란하건만, “거리에 노는 아이들까지도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서” 도리어 연극하는 배우 같다고 한다. 또 도포와 갓과 띠는 중국의 중옷과 흡사하다. 연암이 변관해와 더불어 옥전의 어느 상점에 들어갔더니, 수십 명이 둘러서서 자세히 구경하다가 매우 의아하게 여기면서 서로 말하기를, “저 중은 어디에서 왔을까” 한다. 유학자보고 중이라니?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대체 중국의 여자와 승려와 도포들은 옛날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조선의 의관은 “모두 신라의 옛제도를 답습한 것이 많..
타자의 시선으로 ‘이목(耳目)의 누(累)’는 시선의 문제로 수렴된다. 시선은 대상을 보는 주체의 관점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공고해질 경우, 견고한 표상의 장벽이 구축된다. 소중화(小中華)주의나 ‘레드 콤플레스’ 등 한 시대를 관통하는 이데올로기 또한 결국은 시선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연암의 패러독스는 무엇보다 시선의 자유로운 이동을 수반한다. 밀운성에서 한 아전의 집에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정사가 불러서 청심환 한 알을 주자 여러 번 절을 해댄다. 몹시 놀라고 두려워하는 기색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막 잠이 들었을 즈음 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어 나가보니 사람 지껄이는 소리와 말 우는 소리가 시끌벅적한데, 모두 생전 처음 듣는 것이었을 테니. 게다가 문을 열자 벌떼처럼 뜰을 가득 메우는 사람들, 이들은..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봉상스(bon sens)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각에 의한 ‘알음알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울음을 단지 슬픔에만 귀속하는 것이 울음의 잠재력을 위축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각에 사로잡히는 순간, 인간의 지식은 한없이 비루해진다. 이목에 좌우되어 대상의 본래 면목을 보지 못하는 사유의 한계, 그것을 격파하고자 하는 것이 연암의 진정한 의도이다. 여행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문의 번화함을 마주한 연암은 기가 팍 꺾여 그만 돌아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치민다. 순간, 온몸이 화끈해진다. 이것도 남을 시기하는 마음이지. 난 본래 천성이 담박해서 남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는데. 이제 다른 나라에 한 발을 들여놓았을 뿐, 아직 이 나라의 만분의 일도 못 보았는데 ..
2장 시선의 전복, 봉상스의 해체 ‘호곡장(好哭場)’? 유머가 만들어놓은 매끄러운 공간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물론 범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 중세적 엄숙주의와 매너리즘이 전복되면, 그 균열의 틈새로 전혀 예기치 못한 일들이 솟구치기 때문이다. 그 순간, 18세기 조선을 지배했던 통념들은 가차없이 허물어진다. 무엇보다 그의 유머에는 언제나 패러독스가 수반된다. 주지하듯이 패러독스, 곧 역설은 통념의 두 측면인 양식(bon sens)과 상식에 대립한다. 봉상스, 그것은 한쪽으로만 나 있는 방향이며, 그에 만족하도록 하는 한, 질서의 요구를 표현한다. 그에 반해 역설은 예측불가능하게 변하는 두 방향 혹은 알아보기 힘들게 된 동일성의 무의미로서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패러독스란 봉상스의 둑이 무너진 ..
판첸라마 대소동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판첸라마 대소동!’이다. 천신만고 끝에 열하에 도착한 일행에게 또 하나의 ‘불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티베트의 판첸라마를 만나 예를 표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춘추대의(春秋大義)’로 무장한 그들로선 만주족보다 더 망측한 서번의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린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날벼락’이었다. “모두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당번 역관들은 허둥지둥 분주하여 술이 덜 깬 사람들 같았다. 비장들은 공연히 성을 내며 투덜거렸다. 거 참, 황제의 분부가 고약하기 짝이 없네. 망하려고 작정을 했나.”라는 극단적 발언이 오고가는 그 아수라장 속에서 연암은 무얼 했던가? 나야 한가롭게 유람하는 처지인지라 조금도 참견할 없을 뿐더러 사신들 ..
술 마시기 사건 다음은 ‘코믹 액션’의 일종이다. 열하에 도착해서 거리를 어슬렁거리다 한 술집에 들어선다. 마침 몽고와 회자 패거리들이 수십명 술집을 점거하고 있다. 오랑캐들의 구역에 동이족(東夷族) 선비가 느닷없이 끼어든 꼴이 된 셈이다. 워낙 두 오랑캐들의 생김새가 사납고 험궂어 연암은 후회막심이나 이미 술을 청한 뒤라 괜찮은 자리를 골라 앉았다. 연암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넉 냥 술을 데우지 말고 찬 것 그대로 가져오게 한다. 심부름꾼이 웃으면서 술을 따라 가지고 오더니 작은 잔 둘을 탁자 위에 먼저 벌여놓는다. 나는 담뱃대로 그 잔을 확 쓸어 엎어버렸다. “큰 술잔으로 가져 와!” 그러고는 큰 잔에다 술을 몽땅 따른 뒤, 단번에 주욱 들이켰다.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酒傭笑而斟來 先把兩小盞 ..
상갓집 사건과 기상새설 사건 먼저 상갓집 해프닝, 연암이 십강자(十扛子)에 이르러 쉬는 사이에 정진사, 변계함 등과 함께 거리를 거닐다가 한 패루(牌樓)에 이르렀다. 그 제도를 상세히 구경하려 할 즈음에 요란스런 음악이 시작된다. 정과 변, 두 사람은 엉겁결에 귀를 막고 도망치고, 연암 역시 귀가 먹을 것 같아서 손을 흔들어 소리를 멈추라 하여도 영 막무가내로 듣지 않는다. 다만 할끔할끔 돌아보기만 하고 그냥 불고 두드리고 한다. 호기심이 동한 연암은 상갓집 제도가 보고 싶어 따라가니, 문 안에서 한 상주가 뛰어나와 연암 앞에 와 울며 대막대를 내던지고 두 번 절하는데, 엎드릴 땐 머리가 땅에 닿도록 조아리고 일어설 땐 발을 구르며 눈물을 비오듯 흘린다. 그러고는 “창졸에 변을 당했사오니 어찌해야 좋을지..
주인공은 바로 ‘나’ 이처럼 장쾌한 편력기답게 『열하일기』에는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그러나 그 가운데 단연 도드라진 인물은 연암 자신이다. 그는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신의 심리를 미세한 부분까지 아낌없이 드러내 보인다. 불타는 질투심과 호기심, 우쭐거림, 머쓱함 등, 그 생동하는 파노라마는 이 편력기에 강렬한 색채를 부여한다. 여행이 시작되고 얼마 있다 그는 꿈을 꾼다. 밤에 조금 취하여 잠깐 조는데, 몸이 홀연 심양성 안에 있다. 꿈속에서 보니 궁궐과 성지와 여염과 시정들이 몹시 번화ㆍ장려하다. 연암은 “이렇게 장관일 줄이야! 집에 돌아가서 자랑해야지[余自謂壯觀]”하고 드디어 훌훌 날아가는데, 산이며 물이 모두 발꿈치 밑에 있어 마치 소리개처럼 날쌔다. 눈 깜박할 사이..
중국 아이와의 우정 그 숱한 엑스트라들 중에 아역이 없을 리 없다. 호삼다(胡三多)라는 꼬맹이 친구가 바로 그다. 나이는 열두 살, 얼굴이 맑고 깨끗하며 예도에 익숙하다. 일흔세 살된 노인과 함께 곡정 왕민호에게 글을 배운다. 매일 새벽이면 삼다는 노인과 함께 책을 끼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걸음을 맞추어 와선 곡정을 뵙는다. 곡정이 바쁠 때면, 노인은 즉시 몸을 돌려 동자인 삼다에게 고개를 숙이고 강의를 받고선 간다. 돌아가선 여러 손자들에게 다시 배운 바를 가르쳐준다고 한다. 노인은 스스럼없이 어린 삼다를 동학(同學) 혹은 아우라 부른다. 연암은 이들 짝궁을 보고, “늙은이는 젊은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젊은이는 늙은이를 업신여기지 않[老者不恥 稚者不侮]”는 변방의 질박한 풍속에 감탄해 마지않는다. 한..
중국 문인들과의 우정 중국 장사치들과의 만남이 아름답고 애틋한 ‘우정의 소나타’라면, 선비들과의 교제는 일종의 ‘지적 향연(symposium)’이다. 고금의 진리, 천하의 형세, 민감한 정치적 사안들을 두루 망라하는 색채로 비유하면 전자는 경쾌한 블루 톤에, 후자는 중후한 잿빛 톤에 해당될 것이다. 연암은 서울을 떠나는 순간부터 중원의 선비들과의 만남을 준비한다. 내가 한양을 떠나서 여드레 만에 황주에 도착하였을 때 말 위에서 스스로 생각해보니, 학식이라곤 전혀 없는 내가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중국에 들어갔다가 위대한 학자라도 만나면 무엇을 가지고 의견을 교환하고 질의를 할 것인가 생각하니 걱정이 되고 초조하였다. 余離我京八日 至黃州 仍於馬上 自念學識固無藉手 入中州者 如逢中州大儒 將何以扣質 以此煩寃 그..
중국 상인들과의 우정 중국인 친구들에 대한 터치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중국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그저 그런 인물들이지만, 연암이 연출하는 ‘필드’ 안에 들어오는 순간, 빛나는 엑스트라가 된다. 예속재(藝粟齋)는 골동품을 다루는 점포로 수재(秀才) 다섯 명이 동업을 하는데, 모두 나이가 젊고 얼굴이 아리따운 청년들이다. 또 가상루(歌商樓)는 먼 곳에서 온 선비들이 운영하는 비단점이다. 연암은 가상루에 들러 사람들을 이끌고 예속재로 가기도 하고, 예속재의 친구들을 꼬드겨 가상루로 가기도 한다. 연령은 10대에서 4, 50대까지 걸쳐 있다. 그런데도 다들 동갑내기들처럼 허물이 없다. 「속재필담(粟齋筆談)」과 「상루필담(商樓筆談)」은 그들과 주고받은 ‘우정의 향연’이다. 연암이 그들과 접선하는 코드는 매..
정진사와 득룡 스케치 이제 독자들도 장복이와 창대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상당히 낯이 익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연암의 시종들이라서가 아니다. 만약 연암이 그들을 그저 그림자처럼 끌고 다니기만 했다면, 장복이와 창대는 벌써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연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 행동, 생김새까지 눈에 삼삼하도록 생생한 호흡을 불어넣었다. “한참 서성거리다 몸을 돌이켜 나오는데 장복을 돌아보니 그 귀밑의 사마귀가 요즘 더 커진 듯했다.” 귀밑의 사마귀까지 캐치하는 놀라운 관찰력. 그래서 그들은 별볼일 없는 인물이지만 출현하는 장면마다 강렬한 악센트를 부여한다. 이름하여 ‘빛나는 엑스트라.’ 누구든 그렇다. 연암과 함께 움직이면, 혹은 연암의 시선에 나포되면 누구든지 ..
말의 아수라장② 연암은 특히 언어문제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말들이 부딪히는 장면들을 예의주시한다. 「피서록(避暑錄)」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가 보기에 “중국 사람들은 글자로부터 말 배우기로 들어가고[中國因字入語]”, 조선인들은 “말로부터 글자 배우기로 옮겨 가므로 중화와 이적의 구별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로 인하여 글자를 배운다면 말은 말대로 글은 글대로 따로 되는 까닭이다[我東因語入字 故華彛之別在此 何則 因語入字則語自語書自書].” 예를 들면 천자문을 읽을 때, 한날천(漢捺天)이라고 한다면, 이는 글자 밖에 다시 한 겹 풀이하기 어려운 언문이 있게 된다. 그러니 아이들이 애당초에 ‘한날’이란 무슨 말인 줄을 알지 못하니, 더군다나 천을 알 수 있겠는가. 말하자면, 경전을 익히는 데 있어 이중적인 ..
말의 아수라장 ‘워밍업’을 위한 퀴즈 하나 더, 『돈키호테』의 저자는? 세르반테스 정말 그렇다고 믿는가?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하게 있으면 그 사람은 분명, 책을 읽지 않았다. 그럼 세르반테스가 아니냐구? 물론 제자는 세르반테스다. 그러나 『돈키호테』를 읽다보면 원저자가 따로 있고 세르반테스 자신은 마치 번역자인 것처럼 너스레를 떠는 대목들과 도처에서 마주친다. 처음엔 웃어넘기다가도 같은 말을 자주 듣다보면, 웬만큼 명석한(?) 독자들도 머리를 갸우뚱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2부는 1부의 속편이 아니다. 1부에서 돈키호테가 한 기이한 모험들이 책으로 간행되어 사람들 사이에 널리 유포된 상황이 2부의 출발지점이다. 말하자면 돈키호테는 자신이 저지른 모험을 확인하기 위한 순례를 떠나는 것이다. 이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