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역사&절기/세계사 (395)
건빵이랑 놀자
3. 왕망의 퇴출과 외효와 공손술의 섬멸하며 후한의 기틀을 잡은 유수 ① 왕망 퇴출을 위한 남양봉기군 1. 유수(劉秀)의 형 유인(劉縯)은 왕망의 신(新)에 반대해 여러 장수들을 설득해 군사를 모으기 시작함. 2. 군대를 통솔할 인물을 추대하려는 논의 가운데 유연의 명석함과 지나친 결단력을 두려워하여 유현을 경시장군으로, 유연을 대사도(大司徒), 유수를 장군으로 삼음(이후 유연은 경시제로서 황제의 자리에 오름). 3. 유수의 3천 명의 군대가 왕망의 40만 대군을 기습하여 성공하자 왕측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주변세력들이 왕망정부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남. 4. 남양봉기군 내에서 유현이 유수의 형 유연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유수는 오히려 사죄하며 유유자적하자 유현도 곤양의 싸움에서 수훈..
2. 왕망이 건국한 신나라 15년의 역사 ① 왕망의 이상형인 주(周) 나라를 모방한 정책 1. 유교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 주나라의 관제를 설명한 유가 경전인 『주례(周禮)』에 의거해 모든 관제를 바꿈. 2. 토지 개혁을 위해 매매를 일체 허용하지 않고 토지를 국가가 거둬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하려 함. ② 이상과 현실의 차이 1. 탁상공론적인 정책은 관료들의 부패로 시행되기가 어려워 토지 개혁은 3년 만에 폐지됨. 2. 노비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토지 문제의 방치와 가혹한 형벌로 범법자가 날로 늘어남으로 더욱 가중되기만 함. 3. 사회 현실과는 동떨어진 왕망의 개혁은 사회를 혼란스럽게 했으며 농민 폭동이 곳곳에서 일어나며 멈춤. ③ 반란의 시작 1. 산동 태산에서 낭야 출신 번숭(樊崇)이 반..
후한 시대(後漢時代) 1. 혼란의 시작과 한나라를 장악한 왕망 ① 호족의 대두 1. 향촌 사회는 자치 운영으로 유지되었으나, 화폐 경제의 유입으로 돈이 많은 호족이 등장함. 2. 농민들은 점점 빈곤해져 유랑민ㆍ도적이 되거나 대부분 호족의 농지를 소작하며 노비가 되기도 함. 3. 이와 같이 공동체 관계가 무너졌을 뿐 아니라 빈농의 반란이 일어나 사회적, 경제적 위기가 초래됨. ② 왕망의 명망과 관직 진출 1. 왕망(王莽)은 원제(元帝)의 황후 왕씨의 동생인 왕안(王晏)의 아들로, 원제가 죽고 어린 나이로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황후인 왕씨가 실권을 장악함. 2. 왕씨의 일족이었으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에 가난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며 효도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음. 3. 왕망은 왕봉의 추천으로 관직에 오..
10. 사마천과 사기 ① 사마담(司馬談) 1. 사마천의 아버지로, 무제(武帝)의 태사령(太史令)으로 비밀리에 행해지는 봉선(封禪)에 낄 줄 알았으나 자신은 끼지 못함. 2. 수행인원에까지 끼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며 죽던 중에 아들인 사마천에게 자기가 저술하려던 책을 이어 완성해줄 것을 청하고 죽음. ②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책을 이어 저술하다 1. 어렸을 때 동중서와 공안국 밑에서 수학했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체험을 한 것을 바탕으로 태사령(太史令)에 오르자마자 집필자료를 모음. 2. 시ㆍ서ㆍ춘추ㆍ전국책 등과 국중에 비장된 각종 서적을 섭렵하고 아버지의 책을 이어 집필하기 시작함. ③ 궁형의 고통 끝에 완성된 『사기(史記)』 1. 책을 저술한 지 5년 째 되던 때에, 이릉(李陵)이 5천 보병부대를 이끌고 ..
9. 무제의 대외정책과 선제의 선정 ① 흉노와의 강경화 정책 1. 화친정책으로 일관해오던 흉노와의 관계를 강경책으로 전환함. 2. 장건(張騫)의 서역 여행은 서역 제국과 동맹을 맺어 흉노를 철저하게 무찌르기 위한 것으로 2회에 걸쳐 파견됨. 3. 흉노에게 격파당한 월지(月氏)는 복수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기에 한(漢)은 장건(張騫)을 써서 월지와 동맹을 체결하려 했으나 무효가 됨. ② 장건의 13년 만의 귀국과 비단길 개척 1. 장건은 오는 길에도 흉노에 붙잡히게 되었으나 흉노의 내분을 틈타 도망함. 2. 13년 만에 한나라에 도착하여 장건의 복속에 따른 흉노족에 대한 기억 덕분에 흉노를 처벌하는 데 큰 도움이 됨. 3. 이후 아시아 각국과 문물을 교류했고 비단길도 이때에 개척됨. 인용 개관 사기 목차 ..
8. 전한 시대의 전성기를 구가한 무제의 대내정책 ① 무제(武帝)의 즉위 1. 기원전 141년, 경제가 죽고 황태자 철(徹)이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되니, 이가 바로 무제이며 전한의 황금기를 이룩함. 2. 안정된 기반 위에 과감한 정치를 펴서 풍요로운 사회를 만듦. ② 대내정책 1. 중앙집권의 강화: 승상 전분이 임명을 맘대로 하자 조용히 타이르며 서서히 임명권을 확보함은 물론 제후들의 권력을 약화시킴. 2. 경제면에서 화폐제도를 통일하고 정부가 화폐를 구조하게 함. 3. 균수법(均輸法): 각 지방의 특산물을 세금 대신 내어 장안 등지에서 비싸게 팔아 이익을 국가가 환수함. / 평준법(平準法): 물자가 많을 때는 보관을, 적을 때는 파는 형식으로 물가를 평균하여 정부의 수입을 증가시킴. 4. 동중서(董仲..
7. 전한의 기틀을 제대로 닦은 문경지치의 시대 ① 문제(文帝)의 국치 1. 손수 농사를 지으며 솔선수범했으며, 모두 농사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계몽하고 가난한 농민에게는 오곡의 씨앗을 대여해 줌. 2. 고조의 1/15 세(稅)를 1/30 세(稅)로 바꿔 시행하고 농지와 조세를 12년 동안 면제하여 사회와 경제를 크게 발전시킴. 3. 검약을 기본으로 삼고 가장 총애하는 신부인(愼夫人)에게도 검약을 강조하였으며 어진 정치를 베풀어, 한 왕실이 가장 융성해짐. ② 경제(景帝)의 국치 1. 문제(文帝)가 제위 23년 만에 죽고 그 뒤를 이어 경제가 즉위함. 2. 아버지를 본받아 백성을 잘 다스리고 법과 제도의 정비에 힘씀. 3. 노장사상인 여민휴식(與民休息) 정책을 실시하여 사회 경제는 전무한 발전을 이뤘고 사..
6. 여태후 한나라 정권을 장악하다 ① 소제(少帝) 공(恭)의 등극과 여태후의 득세 1. 혜제가 재위 7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어린 태자가 그 뒤를 이어 황제인 소제(少帝) 공(恭)이 되었기에 여태후의 전횡은 더욱 심해짐. 2. 여태후는 어린 황제가 자기에게 반항하자 폐위시켜 소제(少帝) 홍(弘)을 세움. 3. 연호를 원년(元年)으로 하지 않고 전 황제를 이어 5년으로 함. 4. 여태후는 여씨 일족으로 왕을 세워 둘째 오빠 조왕(趙王) 여록(呂祿)에게 북군 지휘를, 양왕(襄王) 여산(呂産)에게 남군 지휘를 맡겨 군대를 장악함. 5. 여태후의 집권 시기는 혜제 재위 8년을 포함하여 15년 간에 이름. ▲ 여씨 일족 토벌 작전(삽화 - 권미영) ② 여태후의 말기 1. 기원전 180년 여태후는 세상을 떠났음...
5. 한고조 이후의 혜제 등극과 여후의 막장드라마 ① 정세와 태자 책봉 문제 1. 유씨 정권도 처음부터 견고한 것은 아니어서 고조의 부인 여후(呂后) 일족이 한바탕 정권을 휘두르던 시기가 지나서야 유씨 정권이 뿌리 내림. 2. 고조는 경포(黥布) 토벌에 나갔다가 화살에 맞은 상처가 날로 악화되고 있었으며 그때 고조는 여후를 멀리하고 후궁 척부인을 총애하고 있었음. 3. 고조는 영(盈)이 유약하므로 불만이 있던 터에 척부인이 낳은 여의(如意)를 태자로 책봉하려다가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정하지 못하고 죽음. ② 혜제(惠帝)의 등극과 척부인ㆍ여의에 대한 여후의 보복 1. 태자 영(盈)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혜제(惠帝)로 등극했으나 유약하고 나이도 어려 실권은 여후가 장악하게 됨. 2. 여후는 척부인을 한 번..
4. 왕권 강화를 위한 공신 숙청작업 ① 군국제의 실시 1. 공신에게 왕의 봉직을 주어 한신을 초왕(楚王)으로, 팽월을 양왕(襄王)으로 삼음으로 여러 왕국들이 생겨 다시 전국시대로 돌아간 형세가 됨. 2.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장안을 중심으로 한 지역과 서북 군사 요충지는 황제 직속의 군현으로 두고, 나머지 땅은 대표적 공신에게 분봉하여 나누어 다스리게 한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함. ② 공신의 처단 1. 한왕조의 지배력이 안정권에 접어들자 이성(異性) 제후왕들은 커다란 위협이 되어 모반의 누명을 씌워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함. 2. 한신의 역모죄로 초왕에서 회음후(淮陰侯)로 격하되자 ‘토사구팽(兎死狗烹)’을 외치며 고조 10년 조(趙) 재상 진량(陳倆)이 대(代)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군..
3. 한나라 수도 이전과 체제 정비 ① 수도 결정문제 1. 한고조는 주왕실의 융성을 이어받고 싶었고 대부분의 군신들의 낙양을 수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함. 2. 장량은 낙양이 교통은 편하나 공격을 받기 쉽기에 진나라 도읍인 관중이 기름진 평야가 있어 천하의 요새이기에 관중으로 삼아야 한다고 함. 3. 장량의 판단을 믿은 고조는 관중 근처 장안에 새 수도를 정하고 새로운 궁전인 미앙궁(未央宮)을 지음. ② 제도 정비 1. 소하(蕭何)ㆍ숙손통(叔孫通) 등에게 여러 문물과 제도를 제정하게 했는데, 대부분은 진의 제도를 계승함. 2.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제도의 운용은 오히려 민심의 향배에 맡기고 커다란 범주만을 규제하는 방침을 택함. 3. 진나라의 연좌법이나 삼족구멸법 등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조세도 수확..
2. 유방이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요인 ① 한고조의 성공요인 문답 1. 5년에 걸친 전쟁 끝에 승리를 거둔 유방은 기원전 202년에 즉위식을 가지고 황제가 되었으며 성대한 잔치를 벌임. 2. 천하를 차지하게 된 요인을 묻자, 고조가 항우보다 거만하지만 공적이 있는 자들을 잘 챙겨주었기 때문이라고 왕릉(王陵)이 말함. 3. 그러자 고조는 장량ㆍ소하ㆍ한신의 인걸(人傑)을 잘 쓴데 반해 항우는 범증마저도 잘 쓰지 못했기에 잃은 거라 말하니, 모두가 탄복함.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한고조와 삼걸(張良ㆍ蕭何ㆍ韓信)의 문답 한신(韓信)과 한고조(漢古祖)의 문답(問答)
전한시대(前漢時代) 1. 개요 ① 특징 1. 한고조 유방은 봉건제의 장점과 군현제(郡縣制)의 장점을 살린 군국제(郡國制)로 한왕조의 기틀을 접음. 2. 초기엔 한신과 팽월 등 창업 공신들을 숙청하여 황제권을 강화했으며 문제(文帝)ㆍ경제(景帝) 때엔 선정이 베풀어져 태평성대였음. 3. 무제(武帝)는 대내적으론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운영할 방안을 마련하고 대외적으론 흉노를 정벌하고 변방을 개척하며 전성기를 구가함. 4. 화려한 외형의 이면에는 재정이 궁핍해지고 외척이 정치에 관여하는 혼란이 있어 14대 평제 때에 이르면 외척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찬탈하고 신(新)이란 나라를 세움(이때부터 후한임). 5. 신은 제도개혁에 실패하여 15년 만에 망하여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다시 한왕조를 세우게 됨. ..
8. 항우의 패왕별희와 유방의 승리 ① 해하전투와 항우의 자살 1. 항우는 무장을 풀고 동쪽으로 갔으며 유방은 서쪽으로 가려 했으나 장평과 진평의 설득으로 해하(垓下)에서 대치하게 됨. 2. 한신은 초나라 사람들에게 밤마다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하여 초나라 군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함. 사면초가(四面楚歌) 3. 항우는 패배를 직감하고 연회를 벌여 우희라는 애첩과 우(虞)라는 명마와 마지막을 즐긴 후 우희를 죽임. 패왕별희(覇王別姬) 4. 겹겹이 에워싼 한나라 군대를 피해 항우는 도망가다가 오강에 이르러 스스로 자살함. ② 한고조 유방의 탄생 1. 진나라 타도의 수훈갑은 항우였지만 최후 승리의 열매는 유방이 땀. 2. 농민 출신으로 항우보다 뛰어나진 않았지만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않고 인재를 잘 활용..
7. 진평의 이간질과 든든한 지원으로 유리한 상황에 놓인 유방 ① 진평의 이간질과 허무한 범증의 죽음 1. 진평(陳平)은 항우와 범증 사이를 이간질하러 항우의 사자가 형양에 왔을 때 초호화 상을 조촐한 상으로 바꿔서 주며 ‘범증이 아닌 항우가 보낸 사자였냐’며 실망한 투로 말함. 그러자 항우가 범증을 의심하게 됨. 소식의 『范增論』 이제현의 『范增論』 일반론 진평의 이간질로 항우와 범증 사이가 멀어졌다. 질의 범증이 三傑(소하ㆍ장량ㆍ한신)보다 뛰어난가? 반론 否! 아니다! 死宋義 → 弑義帝 → 遠范增 이간질 이전에 송의장군을 죽였을 때 이미 소원해져 있었다. 응답 항우는 不信ㆍ不仁ㆍ不義하여 왕이 되긴 글렀고 유방은 하늘도, 사람도 허여해줘 왕이 될 인물이었는데도 범증은 그걸 몰라봤다. 질의 범증은 신하인..
6. 유방, 전멸의 위기에 몰리다 ① 항우의 군대 제나라에 묶이다 1. 항우는 유방이 관중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정벌하려 가려 하나 조(趙)ㆍ제(齊)가 연합해 배반할 기미가 보이기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함. 2. 장량은 항우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유방이 관중왕이 된다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보냄. 3. 제(齊) 토벌에 나선 항우는 제(齊)의 성을 불태우고 항복한 이를 생매장하려 하자, 몰살당할 처지에 놓인 제나라 잔병들은 필사적으로 싸워 항우의 군대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음. ② 유방군의 분발과 항우의 기민함 1. 유방의 군대가 함곡관을 넘어 동으로 진격하여 낙양에 들어가니 신성의 동공(蕫公)이 항우에 시해되었음을 알고 제후들에게 도움을 청함. 2. 제후들이 유..
5. 서초패왕 항우와 한왕 유방의 탄생 ① 항우의 실책 1. 홍문회합 며칠 후 항우는 함양에 들어가 재물을 약탈하고 아방궁을 불태우고 여산릉까지 파헤침(통일 후 3대 15년 만에 진나라 역사는 끝남) 2. 범증과 상의하여 변방을 유방에게 주어 한왕(漢王)으로 칭해주고 관중을 3등분 해 유방을 견제케 함(한나라 역사의 시작). 3. 관중을 도읍으로 하잔 의견을 묵살하고 고향 팽성(彭城)을 도읍으로, 국호를 서초(西楚)로, 스스로를 서초패왕(西楚覇王)으로 함. ② 유방의 반격 1. 변방에 봉해진 유방은 화가 났으나 소하(蕭何)의 만류로 서서히 도모하기로 함. 2. 한신(韓信)의 계책에 따라 옛길로 진출하여 눈 깜빡할 새에 함곡관을 차지함.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4. 홍문의 회합 ① 항우 관중을 차지하고 유방과 붙다 1. 항우는 함곡관을 깨부수려 했으나 백성들이 저항하여 실패했고 사잇길로 돌파하여 홍문에 이름. 2. 항우 40만 군대, 유방 오합지졸 10만 군대로 굴욕적으로 항복함. ② 홍문회합(鴻門會合) 1. 범증의 죽이자는 간언에도 항우는 연회를 엶. 2. 범증은 항장(項莊)에게 칼춤을 추게 하자 장량은 번쾌로 좌중을 진압케 하고 유방을 몰래 도망가게 함. 3. 유방이 본진에 도착할 때쯤 장량은 선물을 항우에게 줬고 항우는 만족해했지만 범증은 소인배라 비꼼.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유방을 죽이려는 범증(范增) 유방을 피신시킨 장량과 번쾌
3. 유방, 관중왕이 되었으나 훗날을 위해 잘 처신하다 ① 유방의 득세와 범증의 견제 1. 범증이 초회왕의 손자 심(心)을 왕으로 내세워야 반란이 승리한다고 하며 의제(義帝)로 세워 진을 크게 이김. 2. 연승으로 거만해진 항량은 무리하게 전투하자 전사했고, 의제는 상장(上將)으로 송의(宋義)를, 차장(次將)으로 항우(項羽)를, 말장(末將)으로 범증(范增)을 임명하여 조(趙) 평정. 3. 진을 평정할 적임자 선발을 위해 의제는 “진(秦)의 동대문인 함곡관(函谷關)에 먼저 오는 이를 관중왕(關中王)으로 삼겠다”고 명령함. 4. 항우는 송의가 미적대자 그를 죽이고 관에 이르렀으나 유방이 벌써 도착하여 그곳을 지키고 있었음. ② 유방의 함양 입성 1. 영은 진(秦) 조고(趙高)가 호해(胡亥)를 죽이고 세운 왕..
2. 항우와 유방 ① 항우(項羽) 1. 초(楚) 귀족의 후예로 명장 항연(項燕)의 아들이자, 숙부 항량(項梁)에게 의지하여 병법을 배움. 2. 진시황의 순수(巡狩)를 보고 자신도 저 자리에 있겠다고 꿈을 키웠으며 진승과 오광의 난을 접하고 회계군수를 죽이고 군사를 모음. ② 유방(劉邦) 1. 농민의 아들이며 관상가 여공(呂公)은 그의 남다른 풍채를 보고 여식을 주니, 그녀가 훗날 황제의 부인이 됨. 2. 여산능 공사의 인솔자로 끌고 가던 중 이탈자 속출로 따를 자만 따르게 하여 패현의 관리를 죽이고 패공(沛公)이 됨. ▲ 전주객사는 유방과 관련이 있다. '풍패지관'은 유방의 본향이 패현이기에 '건국자의 본향'이란 고유명사로 쓰였다.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항우의 어린시절과 항우의 시작
초한쟁패(楚漢爭霸) 1.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 1. 호해(胡亥)의 폭정: 반대파 숙청 및 이사까지 요참형(腰斬刑)으로 죽이고 잦은 장정과 징집으로 원성 높아짐. 2. 북쪽 변방 수비의 명을 받고 어양으로 향하던 중 폭우로 기일 내 도착이 불가능해지자 인솔자 죽이고 항쟁 시작. 3. 진(陳)을 함락하고 진승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나 부하에 살해당함으로 6개월 만에 끝났고 반란은 계속 발생함.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진나라의 멸망을 알린 진승과 오광의 반란
7. 진시황의 죽음과 유서조작으로 왕이 된 호해 ① 진시황의 죽음과 유서 1. 진시황은 회계를 거쳐 낭야로 향하는 순행길 도중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어 장남 부소에게 줄 유서를 씀. 2. 유서의 내용은 ‘군사는 몽염에게 맡기고 나의 관을 함양에서 장사 지내라’라는 것이었음. 3. 이미 진시황은 죽고 유서와 국새는 족(趙高)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발표하지 않고 함양으로 돌아옴. ② 조작된 유서와 호해의 왕위 등극 1. 조고는 호해(胡亥)를 가르친 적이 있어 승상 이사와 논의하여 호해를 태자로 세운 후 시황제의 죽음을 발표함. 2. 위조된 유서엔 ‘부소와 몽염을 죽여라’는 내용이었기에 장남 부소는 자결했고, 몽염은 굴복치 않고 체포되어 사약을 받고 죽게 됨.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한시미학산책
6. 진나라의 만리장성, 진시황릉, 아방궁 ① 진시황릉과 아방궁의 무리한 건설 1. 진시황은 13세에 즉위했을 때부터 여산 기슭에 자신에 능묘를 만들기 시작했고 50세가 될 무렵에 완성됨. 2.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이 공사에만 무려 75만명의 죄수가 동원되었다고 함. 3. 역대로 내려온 함양궁(咸陽宮)은 아무래도 위엄이 서지 않는다 하여 대규모 궁전을 새로 짓기로 했으나 완성되기 전에 진나라는 멸망함. ② 만리장성의 축조 1. 전국시대 여러 제후나라에서 쌓았던 장성을 보강하여 쌓은 것으로 가혹한 부역 수탈의 전형물임. 2. 흉노세력이 강화되어 국경을 위협할 염려가 있어 장군 몽염(夢恬)에게 몰아내고 장성을 쌓도록 함. 3. 이런 이유로 대공사를 벌였고 장성 부근 지방에 군현을 두고 백성을 강제로 이주시..
5. 분서갱유(焚書坑儒)와 이사 ① 승상(丞相) 이사(李斯)의 사상 통일을 위한 분서갱유(焚書坑儒) 1. 진(秦)의 서적 이외 서적은 모두 태워버려야 하며, 옛 서적을 숨기고 내놓지 않으면 도형(徒刑)에 처함. 2. 옛일을 돌이켜 지금의 정치를 비방하는 자는 일족을 멸함. ② 시행의 결과 1. 실용서적 외에 모두 불살라 버리자 유생들이 불만을 품고 저항했으며, 이런 유생 460명을 생매장시킴. 2. 반발을 일으켜 통치 기반을 약화시켰으며, 문화역량을 크게 위축시킴.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중용강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위한 이사(李斯)의 변장남(長男) 부소(扶蘇)를 북방(北方)으로 쫓아내다
4. 진나라의 통일 직후 체제정비 ① 통일되기 전까지의 상황 1. 진효공(秦孝公)은 상앙(商央)을 등용해 법질서의 개혁을 단행하고 군주제를 강화했으며 법질서를 확립시킴. 2. 전국시대 후기에 1/3의 영토를 차지했으나, 경제력은 60%에 달할 정도로 천하통일의 기초를 다짐. 3. 진시황은 법가의 인물을 등용해 국정을 보좌하게 하고 6국을 멸망시키는 전쟁을 일으켜 17년 만에 통일을 이룸. ② 통일 후의 기반 마련 1. 삼황오제(三皇五帝)의 공을 한 몸에 겸했다는 뜻으로 ‘황제’란 호칭을 처음으로 쓰게 됨. 2. 왕관 등이 왕자를 지방에 봉하는 통치방법을 주장했으나, 이사(李斯)가 주왕조를 예로 들며 중앙집권체제를 주장하자, 이사의 말을 받아들여 36개 군(群)과 군 밑에 현(縣)을 두어 직접 통치하는 군..
3. 진나라의 천하대일통(天下大一統) ① 통일을 위한 초석 1. 2백 여년 동안의 전쟁으로 진나라는 세력이 강해진 반면, 여섯 나라는 국력이 약화됨. 2. 이사(李斯)ㆍ정국(鄭國)ㆍ위요(尉邀)와 같은 관리 등을 등용하여 법가 정책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군사적으로도 힘을 키움. 3. 합종책(合縱策)을 깨기 위해 내부부패를 이용하여 군주와 신하 사이를 이간질함. 4. 한(韓) 기원전 230년에, 조(趙)가 기원전 228년에, 위(魏)가 기원전 225년에, 연(燕)이 차례로 멸망됨. ② 초나라와의 마지막 전투 1. 초나라와의 전투에 젊은 장군 이신(李信)은 20만이면 충분하다 했고, 왕전(王翦)은 60만명이 필요하다고 하여 왕은 이신을 보냈다가 대패함. 2. 왕전에게 사과하고 왕전을 보내자 초군이 공격해와서 ..
2. 자초(子楚)의 즉위에서 세자 정(政)의 등극까지 ① 자초의 즉위 1. 6년 후 진소왕(秦昭王)이 죽고 안국군이 즉위하여 효문왕(孝文王)이 되었고, 그가 즉위 3일 만에 죽자 자초가 즉위하여 장양왕(莊襄王)이 됨. 2. 장양왕은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候)로 봉했으며 10만 호를 식읍으로 줌. 3. 장양왕은 즉위 3년 만에 죽고 정(政)이 계승했으나 13살로 어렸기에, 모친 태후와 여불위가 섭정함. ② 여불위의 섭정 1. 진나라의 국력 신장 및 자신 가문의 번창을 위해 유능한 빈객을 후대했고,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찬함. 2. 정(政)의 생모와 계속해서 정을 통하다 발각되어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그는 그녀와의 관계를 끊을 만한 대책을 생각함. 3. 노애(嫪毐)를 들이게 하여 태후와..
5. 진나라 시대 1. 여불위(呂不韋)의 통일제국을 위한 큰 그림 ① 여불위(呂不韋)와 자초(子楚) 1. 전국 말기의 대상인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여 재산을 축적한 대부호임. 2. 어느 날 조나라 수도 한단에 갔다가 인질로 와 있는 진나라 왕자로 진소왕의 둘째 아들 안국군(安國君)의 가운데 아들로 비중 없는 인물이었던 자초(子楚)를 만나게 되었고, 사귀어 둠. ② 여불위의 큰 그림 1. 자초를 등극시키기 위해 빈객과 사귈 수 있는 돈을 줬고 안국군이 사랑하는 화양부인(華陽夫人)의 입김을 빌리기로 함. 2. 화양부인은 그의 언니 말을 잘 따른다는 걸 알고 제물을 주어 자초에 대해 좋은 평을 얘기하도록 언니를 구워삶음. 3. 언니는 자식이 없는 동생 화양부인에게 자초를 후계자로 삼아야 버림 ..
5. 연횡책으로 최후의 승자가 된 장의와 초나라 애국시인 굴원 ① 장의(張儀)와 초반의 비굴함 1. 장의는 초반에 등용되지 않았고 초(楚) 재상의 잔치에 갔다가 도둑으로 몰려 매질당하는 수모와 절친 소진(蘇秦)에게 문전박대 당하는 수모 겪음. 2. 마침내 진혜왕(秦惠王)에게 등용됨. 위와 맹약을 맺고 초회왕(楚懷王)을 만나 제(齊)와 맹약을 끊도록 하자, 초회왕이 제(齊)에 모욕스런 편지를 보내게 됨. 그러자 진(秦)-제(齊) 친교 맺음. 3. 화난 초회왕이 진을 공격했지만 크게 패했고, 오히려 진은 빼앗은 땅을 돌려주며 화친을 요구함. ② 최후의 승자가 된 장의 1. 이에 초회왕은 땅보단 장의가 화근임을 알고 장의을 보내달라 요구했지만, 조정 내 친진파(親秦派)의 활약으로 풀려났고 화친까지 맺도록 간언..
4. 합종책으로 승승장구한 소진의 최후 ① 정세 1. 진(秦)은 세력이 막강해져 동으로 진출해오는 반면, 나머지 6국은 개별적으로 대항하기에 역부족임. 2. 연횡책(連橫策)과 합종책(合縱策) 연횡책(連橫策) 합종책(合縱策) 장의(張儀)가 주장, 진 중심의 연맹 구축 소진(蘇秦)이 주장, 6국 연합으로 진에 저항 ② 소진(蘇秦)과 합종책(合縱策) 1. 낙양 출신으로 귀곡자에게 사사 받았고 집에서 병서 탐독 후 진(秦)과 조(趙)에서 유세했으나 퇴짜 맞음. 2. 연문후(燕文候)는 합종책에 찬동했으며 소진은 6국을 돌아다니며 성사시켜 6국의 재상이 됨. 3. 조숙후(趙肅侯)에게 맹약 증서를 보이자 그를 무안군(武安君)으로 봉했고 그 증서를 진(秦)으로 보내니 15년간 쳐들어오지 못함. 4. 그 후 진(秦)은 ..
3. 상앙(商央)의 변법개혁 ① 진(秦)을 변법으로 바꾸다 1. 상앙(商鞅)은 위(魏)에서 태어났으며 위앙(魏鞅) 또는 공손앙(公孫鞅)으로 불려 오기를 내쫓은 공숙좌(公叔座)의 밑에서 일함. 2. 위혜왕(魏惠王)에게 등용될 수 있었으나, 위혜왕은 너무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다하여 등용치 않음(훗날 위나라에 처절히 복수함). 3. 진효공과 4차에 걸친 대담으로 좌서장으로 삼음. 법을 공표하기 전에 나무를 옮기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고 공표한 후 나무를 옮긴 사람이 나오자 상을 줘서 법에 대한 신뢰도를 높임. 4. 태자가 법을 어기자 엄벌주의를 보여주고자 후견인과 스승을 처벌했고 그렇게 10년이 지나자 법이 자리를 잡음. ▲ 徙木立信(나무를 옮겨 신뢰를 쌓다)는 고사의 장면.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② 법치주..
2. 손빈과 방연, 그리고 마릉전투 ① 방연의 질투심 1. 방연(龐涓)과 손빈(孫臏)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손자는 춘추시대의 손무(孫武)임, 동일 인물 아님】은 동문수학했으나, 방연이 위혜왕(魏惠王(맹자에 나오는 양혜왕과 동일 인물)에게 등용되어 손빈을 간첩으로 몰아 앉은뱅이로 만든 후 가둠. ② 두 번의 복수전을 감행한 손빈 1. 손빈은 제(齊)에서 온 사신의 수레를 타고 탈출했으며 제(齊)의 장군 전기(田忌)의 빈객으로 능력 발휘를 하여 왕에게 추천되도록 함. 2. 위(魏)가 조(趙)를 침략하자 조(趙)는 제(齊)에 구원을 요청함(魏 VS 趙ㆍ齊). 손빈은 비어있는 위(魏)를 치도록 하여 대승을 거둠(1차 복수). 3. 13년 후에 위(魏)와 조(趙)가 한(韓)을 침략하자 한은 제(齊)에 구원을..
4. 전국시대(戰國時代) 1. 정세와 위나라의 오기(吳起) ① 정세 1. 진(晉)의 실권이 대부에게 넘어가 BC 453년에 조(趙)ㆍ위(魏)ㆍ한(韓)으로 분열됨. 2. 전국칠웅(戰國七雄)이 등장했고 위(魏)ㆍ제(齊)ㆍ진(秦) 세 나라가 가장 강국이었음. ② 상황 위(魏)가 제(齊)의 서쪽,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을 공략, 초(楚)의 황하 이남을 차지함. ③ 공자의 제자 자하의 문하생인 오기(吳起)의 오기(傲氣) 오기의 이동 동선 위(魏)⇒노(魯)⇒위(魏)⇒초(楚) 1. 위(魏) 출신으로 등용되길 바랐으나 되지 않자 30명을 죽이고 ‘등용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떠나, 노(魯)에서 관직을 얻음. 2. 제(齊)가 노(魯)를 공격할 때 노(魯)의 장군으로 등용하려 했으나 오기의 부인이 제(齊) 출..
5. 춘추시대의 걸출한 인물, 공자 1. 공자의 일생 / 공자의 생애 2. 공자의 공직생활 3. 살해위협에 처한 공자 4. 시․서․역․춘추를 정리한 공자 5. 공자 관련 기록 – 論語 / 孔子家語 / 孔子世家 / 仲尼弟子列傳 / 공자의 제자들 / 논어한글역주 / 공자의 생애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4. 오나라와 월나라, 그리고 와신상담 ① 배경 진(晉)과 초(楚)가 남북에, 제(齊)와 진(秦)이 동서에 있는 4강 시대에 남쪽에 위치한 오(吳)와 월(越)은 신전략을 모색함. ② 오의 합려와 오자서 1. 수몽(壽夢)에겐 4명의 아들이 있었고 장자 제번(諸樊)이 왕이 되어야 했지만 오히려 동생들에게 넘겨주려 함. 2. 그러나 동생들이 받지 않아 셋째 동생의 아들 요(僚)가 왕이 됨. 3. 제번의 아들 광(光)은 오자서(伍子胥)를 빈객으로 맞았고 자서는 잔치에 요(僚)를 불러 장수에게 죽이도록 하여 광을 왕으로 등극시켜 합려(闔閭)가 됨. 4. 오자서(伍子胥)는 초(楚)에서 대접을 받는 가문이었으나 비무기(費無忌)의 모략으로 아버지와 형은 죽임 당했고, 자신은 송으로 망명한 과거가 있었음. 5. 즉위하여..
3. 고난을 겪고 등극한 진문공 ① 여희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형제 1. 헌공(獻公)에겐 신생(申生)ㆍ중이(重耳)ㆍ이오(夷吾)의 세 아들이 있음. 2. 애첩 여희(驪姬)의 음모로 태자는 자살했고 두 아들은 적과 양으로 망명했음. 그러자 여희(驪姬)와의 사이에서 낳은 혜제(奚齊)에게 왕위를 주려함. 3. 헌공이 죽자 신하들이 해제를 죽였고 이오(夷吾)는 진목공(秦穆公)의 도움으로 진혜공(晉惠公)으로 등극함. 4. 그러나 진(秦)이 어려울 때도 도와주지 않자 침공해 쑥대밭으로 만들고 이오(夷吾)를 데려감. 5. 가까스로 귀국한 혜공은 중이(重耳)를 죽여 입지를 세우려 했으나 실패함. 6. 제(齊)로 도망간 중이(重耳)는 대접 받으며 살지만 그걸 못마땅하게 여긴 아내가 술에 취하게 한 후에 수레에 태워 진(晉..
2. 춘추 최초의 패자 제환공과 그의 모사 관중 ① 치열한 왕위 쟁탈 1. 희공(僖公)에겐 제아(諸兒)ㆍ규(糾)ㆍ소백(小白)의 세 아들이 있어, 그가 사망하자 제아(諸兒)가 제양공(齊襄公)으로 즉위함. 2. 제양공의 폭정으로 해를 당할까 두려워 규는 관중(管仲)을 데리고 노(魯)로, 소백(小白)은 포숙아를 데리고 거(莒)로 망명함. 3. 사촌동생 무지(無知)가 반란에 성공하여 제양공(齊襄公)을 죽이고 왕이 되나 어리버리하여 살해당함. 4. 신하들이 소백을 후계자로 삼고 초빙하려 하자, 관중에 매복해 있다가 화살을 쏘아 소백을 맞춤. 그러나 혁대에 맞아 목숨을 건짐. 5. 소백(小白)은 왕이 되고 자신을 죽이려한 규(糾)는 유배 보낸 후 죽였고 관중(管仲)도 죽이려 했으나 포숙아(鮑叔牙)의 만류로 재상으로..
3. 춘추시대(春秋時代) 1. 개요 ① 주나라와 춘추전국 시대의 구분 동주(西周) 서주(東周)=춘추전국(春秋戰國) BC 11세기~771년 낙양(洛陽)으로 도읍 옮기기 전 BC 770~256 낙양 천도 후 진(秦) 통일 전까지 ②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차이점 춘추(春秋) 전국(戰國) 국명유래 공자(孔子)가 쓴 역사서 이름에서 유래 유향(劉向)이 쓴 책의 이름에서 유래 국가개념 자연발생적 성읍국가 모든 권력이 전제군주에게 있는 영토국가 특징 춘추오패(春秋五覇)가 등장하나, 주(周)의 권위는 인정 진(晉)이 조(趙)ㆍ위(魏)ㆍ한(韓)으로 분리되며 약육강식의 세상 전쟁양상 전차중심 전투, 무기는 청동기 보병 중심 전투, 무기는 철기, 쇠노의 등장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5. 주나라 주공의 치세와 유왕과 포사의 폭정 ① 주나라의 융성 1. 무왕(武王)이 병사하고 태자가 성왕(成王)으로 등극하지만 나이가 어려 주공(周公)이 7년간 섭정하며 ‘토포악발(吐哺握髮)’의 성어를 남긴 정치를 한 후 돌려줌. 2. 성왕의 뒤를 이은 강왕(康王)도 어진 정치를 펴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함. ② 주나라의 종말 1. 여왕(厲王)은 착취에 능한 이공(夷公)을 등용하여 쫓겨났고, 유왕(幽王)은 후궁 포사(褒姒)에 휘둘려 실정을 함. 2. 포사에 정비(正妃)의 자리를 뺏기자 신족(申族)은 북방 유목민인 견융(犬戎)과 결합하여 유왕을 처단함. 3. 견융이 월권을 행하자 몰아내나, 자주 침략함으로 수도를 낙양(洛陽)으로 천도하여 서주(西周)시대를 마치고 동주(東周, 춘추전국시대) 사대의 개막. 인..
4. 태공망 여상의 이야기 ① ‘태공망(太公望)’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 1. 여상(呂尙)은 주(周)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젊었을 때 글공부만 하다가 서백(西伯)인 문왕(文王)에 의해 발탁됨.2. 고공단보(古公亶父)가 기대하는 인물이라 하여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리었고, 성이 강(姜)씨이기에 ‘강태공(姜太公)’이라 불림. ② 아내에게 분풀이한 여상 가난을 이기지 못한 아내를 제(齊, 강태공에게 분봉됨)에 귀국하는 길에 보게 되지만, ‘쏟아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覆水不返盆]’며 쳐다보지도 않음. 인용개관사기목차동양사문왕이 여상을 만나다
3. 은나라 정벌과 백이숙제 ① 은나라 주왕에 반성을 촉구한 무왕 1. 창(昌)은 대업을 이루기 전에 죽고 그의 아들【훗날에 무왕(武王)이라 불림】 발(發)이 여상(呂尙)의 자문을 받아 은(殷) 나라를 칠 준비를 함. 2. 무왕(武王) 즉위 9년에 진두지휘하며 은으로 진군했고 주에게 반성만을 촉구하며 돌아옴. ② 반성하지 않는 주를 정벌하고 은나라를 멸망시킨 무왕 1. 주(紂)는 오히려 충신 비간(比干)을 죽여 민심이 더욱 흉흉해짐. 2. 결국 무왕에 의해 정벌되어 주는 자살했고 도읍을 호경(鎬京)으로 옮김. 이 정벌이 부당하다 하여 고죽국(孤竹國)의 두 형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수양산(首陽山) 숨어들어 굶어죽음. 3. 여상(呂尙)에겐 제(齊)를, 주공(周公)에겐 노(魯)를 주어 다스리게 함. ..
2. 주나라의 고공단보와 문왕 ① 주나라의 기틀 다듬기 1. 후직(后稷)의 11대 손인 고공단보(古公亶父) 때에 기산(岐山)으로 도읍을 옮겨 기틀을 갖춤. 2.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겐 태백(太伯)ㆍ우중(虞仲)ㆍ계력(季歷)의 세 아들이 있었고, 그 중 계력(季歷)이 훗날의 서백(西伯: 서쪽 우두머리)인 창(昌)을 낳음. 3.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창(昌)에게 왕위를 주려한다는 사실을 알고 두 형제는 떠났고, 결국 창(昌)이 이어받아 문왕(文王)이 되었고 나라를 성장시킴.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너무도 공평한 주나라 문왕
2. 은주(殷周)시대상(商) 나라로 불리다가 반경(盤庚) 왕이 마지막으로 옮긴 도읍지가 은(殷)이기에 은나라로도 바꿔부르게 됨 1. 상나라의 탕왕과 주왕 ① 탕(湯) 임금의 내력 1. 시조가 ‘설(契)’이며 설은 우임금을 도와 치수에 많은 공을 세움. 설(契)의 14대 손임. 2. 왕과 귀족으로 정권을 구성했으며 고대 국가의 면모를 갖춤. ② 상(商) 나라 말기의 풍경 주(紂)는 젊었을 땐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유역을 넓혔으나, 달기(妲己)의 꾀임으로 충신 비간(比干)을 죽임. 인용개관사기목차동양사은혜가 새와 짐승에도 미친 은나라 탕왕
4. 하왕조와 상왕조의 흥망 ① 하왕조(석기⇒청동기) 1. 우(禹)에 의해 세워져 이때부터 왕위세습제(계급사회로 진입)가 확립되고 농업도 목축을 주로 함. 2. 걸(桀): 마지막 왕으로 애첩 말희(妹喜)의 건의에 따라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이루어 백성들에게 원망을 삼. ② 상왕조 상족의 두령인 탕(湯)은 걸(桀)을 사로잡아 상(商) 왕조를 세움. 인용개관사기목차동양사치수를 잘한 하나라 우왕
3. 태평성대를 누린 요순시대 ① 이상시대 1. 요(堯)는 제요도당씨(帝堯陶唐氏)로, 왕위를 이어 ‘당(唐)’이라 한다. 2. 순(舜)은 제순유우씨(帝舜有虞氏)로 그 뒤를 이어 ‘우(虞)’라 함. ② 치수와 순 1. 요(堯) 70년에 큰 홍수가 제후인 사악(四岳)에게 순을 다음 왕의 후보로 추천 받음. 2. 요(堯)는 순(舜)이 효성스럽단 말을 듣고 왕위를 물려줬고 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시집보냄. 3. 순의 외아들 상균(商均)이 현명하지 못해, 곤(鯤)에게 치수를 맡겼고 우에게 왕위를 물려줌. 이때까지 선양(禪讓)의 기간이고, 이후부턴 왕위세습 기간으로 우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줌. 4. 즉위한 지 39년 만에 창오(蒼梧)에서 병사함. 인용개관사기목차동양사‘격양가’의 왕인 요 임금효로 나라를..
2. 오제(五帝)의 시대 ① 오제(五帝) 1. 오제(五帝): 소호(少昊)ㆍ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제요(帝堯)ㆍ제순(帝舜) 2. 황하 중류 지역에 황제(黃帝)를 두령으로 하는 종족과 염제(炎帝)를 두령하는 종족과 동쪽 해안의 동이(東夷)족이 가장 왕성함. 3. 황제(皇帝)와 염제(炎帝)가 세 번 싸워 황제가 이겼고 동이족 두령인 치우(蚩尤)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황제에 패함. 4. 황제(皇帝)가 천자로 추대되어 인류에게 최초의 문명을 준 제왕으로 숭상됨. 인용 개관 사기 목차 종횡무진 동양사 1. 최초의 천자가 된 황제씨 2. 태평성대를 구가한 황제의 아들
1. 고대(古代) 시대 1. 삼황(三皇) 시대 ① 삼황(三皇) 1. 삼황(三皇)을 나누는 방식엔 여러 이설(異說)이 있다. ① 복희씨(伏羲氏)ㆍ여와씨(女誣氏)ㆍ신농씨(神農氏)② 천황씨(天皇氏)ㆍ지황씨(地皇氏)ㆍ인황씨(人皇氏)로 되어 있거나 여와씨(女誣氏)→수인씨(燧人氏)로 되어 있기도 함 2. 업적이름업적복희씨(伏羲氏)팔괘(八卦) 제작, 고기 잡는 법 전수신농씨(神農氏)농사 기술 전수여와씨(女誣氏)황토와 물을 섞어 인간 창조. 3. 의의: 정식 역사라 할 순 없으나, 신화 가운데 중국 원시부족 사회의 생활 모습이 투영됨. 인용개관사기목차종횡무진 동양사1. 천황씨와 지황씨2. 인황씨와 유소씨와 수인씨3. 복희씨와 수인씨
중국사 개관(槪觀) 1) 고대시대 & 춘추전국시대 & 진나라 夏ㆍ殷(BC 2070~6C)周ㆍ春秋戰國(11C~256 , 770~221)秦(221~206)시대배경황하문명시작西周11C~771 / 호경(鎬京)시황제 통일東周770~256 / 낙양(洛陽)사회ㆍ정치 체제 1. 봉건제(封建制) 붕괴2. 철제 농기구 사용1. 문자통일(소전)2. 만리장성 축조학문 경향 제자백가(諸子百家)법가사상 통치이념유가ㆍ도가의 경향춘추전국(春秋戰國)유가(儒家)공자, 맹자, 순자도가(道家) 노자, 장자문학사하은(夏殷) 이전요(堯)의 「격양가(擊壤歌)」진(秦)1.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낮은 문화 수준.2. 이사(李斯) 「간축객서(諫逐客書)」: 소체(騷體)와 부체(賦體) 조화은대 문학갑골문(甲骨文)선진(先秦)북방: 시경(詩經)① 민간의 자..
종횡무진 동양사 목차 남경태 연표 선사 ~ 위만조선 삼국건국 ~ 신라통일 남북국 고려 조선 건국~연산군 중종~임란 발발 임란~정조 순조~조선 말기 대한제국~현대사 책 머리에 2009년 통속적인 역사책에 싫증을 느낀 독자에게 2014년 지은이의 향기가 나는 종횡무진 시리즈가 되기를 바라며 프롤로그: 동양의 태어남과 자람, 그리고 뒤섞임 1부 태어남 제1장 중국이 있기까지 신화와 역사의 경계 구름 속의 왕조를 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 기나긴 분열의 시대 최초의 통일을 향해 동양 사상의 뿌리(유가, 묵가, 법가, 도가) 2장 인도가 있기까지 굴러온 돌의 승리 인도와 종교(불교, 자이나교) 정치적 공백이 이룬 통일 3장 일본이 있기까지 금속의 빛을 던져준 야요이 문화 빛은 서방에서 왜에서 일본으로 2부 자람 4..
에필로그: 문명의 뒤섞임, 차이와 통합을 아우르는 시대로 1. 이것으로 중국ㆍ인도ㆍ일본의 동양 3국을 다룬 동양사의 여정은 끝났다. 모두 1940년대 후반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전후 질서’가 수립된 시점 언저리에서 끝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후의 역사는 다른 시대, 즉 ‘현대‘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이 현대는 ‘진행 중의 역사’이므로 역사라기보다는 ‘시사(時事)’에 가깝다. 따라서 역사책보다는 신문을 참고하는 게 더 좋을 듯하다. 게다가 현대의 역사는 한 지역의 역사가 아니다. 지금까지는 동양사를 세계사에서 떼어내 별도로 이해하는 방식이 유용했으나 이제부터는 전 세계를 하나의 역사권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현대의 역사는 더 시간이 지나야만 지금과 같은 의미의 ‘역사’로 서술될 수 있..
정치와 경제의 부조화 경제에 대해서는 성장과 발전이라는 말을 쓸 수 있으나 정치는그렇지 않다. 정치는 경제를 담아내는 그릇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경제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기는 해도 그것을 성장이나 발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정치의 목적은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경제와 조화를 이루는 데 있다(예를 들어 자본주의 시대에 팽창한 경제를 봉건제의 정치로 감당할 수는 없다). 그래서 경제는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데 반해 정치는 다소 인위적으로 진행된다. 이 점에서 서양사와 동양사는 차이를 보인다. 동양의 역사에서도 경제는 꾸준히 성장하고 발전했지만, 정치는 경제와 조화를 이루기는커녕 어긋나고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예가 일본의 역사다. 일본은 1868년의 메이..
군국주의의 말로 일본 군부는 중일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그것은 허세가 아니었다. 만주사변 이래 여러 차례 벌어진 국지전에서도 연전연패한 중국이 전면전으로 나온 일본을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당시 중국은 경제적으로 수십 년 동안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군사적으로는 아편전쟁 이래 국제전에서 단 한 차례도 승리하지 못한 약소국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전략은 승패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타격을 가해야만 중국이 항일을 포기할 것이냐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1938년의 난징 대학살은 바로 중국의 항복을 강요한 일종의 대규모 무력시위였다. 그러나 중국의 저항은 의외로 완강했다. 일본군은 곳곳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했으나 중국은 거점을 차례차례 빼앗기면서도 항전을 ..
중국을 먹어야 일본이 산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경제적ㆍ군사적으로 명실상부한 대국이 된 일본의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독점자본주의로의 길이다. 이미 일본은 유럽 열강에 뒤지지 않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으므로 서구적인 독점 자본주의, ‘정통’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할 자격이 충분했다. 다른 하나는 군국주의로의 길이다. 군사적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일본은 경제적인 침략보다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군사적 침략을 실행할 힘도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경제 노선과 군사 노선 중 일본이 택한 것은 무엇일까? 힌트는 군부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던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1870~1931) 총리가 극우 세력에게 암살된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도 1929년의 세계 대공황이 없었다..
5. 동양식 제국주의의 결론 ‘군부’라는 개념 강대국인 청과 러시아를 상대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두자 일본 정치에서 군대의 지위는 더없이 확고해졌다. 이제 군은 행정부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렸으며, 정부의 대내외 주요 정책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영향력과 발언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군은 향후 일본의 최종 목표를 중국 정복으로 정했다. 조선을 병합하고 나서부터는 ‘군부(軍部)’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군대가 아닌 군부라는 말은 군이 정부에 못지 않은, 아니 그 이상의 위치에 있음을 뜻한다. 더구나 군부라는 말은 군 내부에서 만들어 사용한 것이므로, 이미 군 자체가 스스로 정치 세력으로 탈바꿈했음을 나타낸다. 19세기 전 세계를 주름잡았던 영국 제국주의를 뒷받침한..
제국주의의 명패를 달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1000여 년이나 꿈꾸어온 동양의 패자가 되었다. 이제 일본은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넘어 중국을 압박하는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그것으로 일본이 서구 열강과 같은 반열의 명실상부한 제국주의 국가가 된 것은 아니다. 원조가 아니므로 어디까지나 후발 제국주의 혹은 아제국주의에 불과한 처지다. 이런 ‘서러움’은 당장에 현실로 나타났다. 원조가 텃세를 부린 것이다. 랴오둥 반도를 받는다면 일본은 대륙 침략에 교두보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지 불과 6일 만에 단꿈에서 깨야 했다.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이 함께 랴오둥을 청에 반환하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것을 삼국간섭이라고 부르는데, 실상 주도한 나라는 러시아였다. 겉으로 내세운..
300년 만의 재도전 내부의 저항을 진압한 일본 정부는 이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노골적으로 바깥을 향해 아(亞)제국주의 군국주의 노선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일차 목표는 일찍부터 노리던 한반도였다. 없는 계기라도 만들어야 할 판에, 때마침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발생했다. 개화파인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것이다. 일본은 김옥균을 지원해 쿠데타를 성공시켰으나 정변은 사흘 만에 수구파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본은 오히려 쿠데타가 성공한 것보다 상황을 더욱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소득을 얻었다. 하나는 일본 공사관이 습격을 당했다는 훌륭한 ‘전과’이고, 다른 하나는 청의 군대가 수구파를 지원했다..
유신의 결론은 군국주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자체에 군사적 성격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신 직후부터 곧바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 노선은 일본 사회 전체가 동의한 게 아니었다. 저항의 가능성은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메이지 유신의 기본적인 성격에 내재해 있었다. ‘위로부터’였으므로 민중의 권익을 위한 게 아니었다. 또한 ‘근대화’였으므로 전통적인 기득권층이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은 민중의 거센 저항과 상인, 지주층의 반발을 샀으며, 때로는 그 두 가지가 결합된 도전을 받았다. 민중 세력의 성장에 힘입어 서구적 자유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새로운 지식인층과 정치 지도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근대화의 이념에 동의했으나 방향은 정부와 반대로 ‘아래로터의 근대화..
4. 제국주의의 길 대외 진출은 늘 침략으로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은 외부의 침입을 막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대외로 진출하는 데는 커다란 걸림돌이다. 물론 하기에 따라서는 대외 진출에도 얼마든지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외부의 간섭 없이 완벽한 내부 준비를 갖추고 나서 내실 있게 대외 진출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 여기서 핵심은 내부를 다지는 주체의 역량이 어느 정도냐에 있다. 주체가 무능하면 내정도 불안정하고 당연히 대외 진출도 무리수가 되지만, 주체가 유능하면 성공적인 내정이 그대로 대외로 연장될 수 있다. 지금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제외하면, 2000년에 걸친 일본 역사에서 국가적인 규모의 대외 진출은 두 차례 있었다(무역이나 문화 교류와 같은 민간 부문은 ..
일본의 머리에 서양의 손발 천황이 실권을 가지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양식 절대왕정 같은 체제가 수립된 것은 아니다. 영국의 튜더와 스튜어트 왕조,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로 대표되는 서양의 절대군주는 군주 자신이 최대의 봉건영주로서 정치와 외교, 군사 등 모든 분야의 최고 결정자였다. 그러나 일본의 천황은 법제상으로만 절대 권력을 지닐 뿐 현실적으로는 휘하 관료들이 권력을 소유하고 집행했다. 그렇다 해도 천황은 이제 과거의 상징적 존재와는 달랐다. 관료들은 모든 권력을 ‘천황의 이름으로’ 행사했으므로 천황은 모든 권력의 원천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일본의 천황은 절대 권력자를 넘어 신적 권위를 지닌 존재였다. 이 점에서 천황은 유럽의 어느 절대군주도, 심지어 중국의 황제조차 미치지 못하는 위상..
바쿠후의 몰락 전통의 지배층인 다이묘들이 바쿠후에 집착하는 동안 새 시대를 담당할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다이묘와 번주(藩主) 들의 휘하에 있던 무사들을 비롯해 로닌, 지주, 상인 계층이었다. 그들은 정치 개혁에 뜻을 두었으므로 시시(志士, 우리말에서는 민족을 위해 몸 바친 ‘지사’를 가리킨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시시들은 바쿠후 정권이 흔들리고 부패한 17세기 중반부터 성장한 민중 세력이 결집된 표현이었다(물론 그들이 민중의 이익을 대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바쿠한 체제가 붕괴하면서 시시들도 받들어 모시던 바쿠후와 번주 등 기존의 지배층과 어느 정도 유리되었으므로 비교적 발언과 주장이 자유로웠다. 그들은 바쿠후의 개혁에 동참하기보다는 바쿠후 자체를 거부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내세운 대체 권력..
타의에 의한 복귀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한 것은 서구 열강으로서도 놀라운 사건이었지만 일본으로서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일본은 늘 중국과 대등하다고 천명하면서도 힘에서나 국제 무대의 권위에서나 동양 질서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것을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중국이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열강에 무릎을 꿇었다. 그렇다면 일본이 견디지 못하리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바쿠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힘을 앞세운 무사 집단으로 출발해 전국을 통일하고 지배했던 만큼, 바쿠후의 힘이 외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곧 권위의 뿌리가 흔들린다는 것을 뜻했다. 마치 이런 기미를 눈치라도 챈 것처럼, 1846년 영국과 프랑스의 군함들이 일본 근해에 출몰하자 오랫동안 현실 정치에 간여하지 못했던 천황..
닫힌 문을 두드리는 열강 일본 바쿠후가 쇄국의 기치를 드높이 치켜들고 있던 18세기 후반 무렵 유럽 세계는 유사 이래 가장 활발한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대륙 국가들에 비해 봉건제의 굴레가 약했던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자본주의의 새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미 17세기 초반부터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경영하는 데 앞장섰던 영국은 18세기 중반 프랑스를 꺾고 단독으로 인도를 식민지화하는 데 성공했다(8장 참조). 영국에 패한 프랑스는 엄청난 변화의 회오리를 맞게 되었다. 바로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다. 이 혁명과 뒤이은 나폴레옹 전쟁은 전 유럽의 지각을 뒤흔들어 근대적 국민국가의 성립을 촉진시켰다. 이와 같은 전통의 강호들 외에 새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 나라들도 등장했다. 러시아는..
3. 번영을 낳은 쇄국, 유신을 낳은 개항 일본식 시민사회? 세계와의 접촉을 전쟁으로 시작한 일본은 쇄국 이후 다시금 기나긴 독자적 역사를 전개하게 된다. 그러나 쇄국은 의식적으로 세계와의 단절을 기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쇄국기의 역사는 종전의 쇄국기(9~16세기)와 달랐다. 집 안에 틀어박혀 산다 해도 바깥의 존재를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를 테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이 시기 일본의 역사는 세계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해당한다. 바쿠한 체제는 봉건적이면서도 탈봉건적인 요소를 품고 있었다. 지방의 번들은 원래 정치적인 목적에서 성립된 것이었으나, 에도 바쿠후의 장기 집권으로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고 쇄국으로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데 힘입어 점차 경제ㆍ행정상에서의 비중을 더해..
쇄국을 통한 안정 제국의 면모를 갖추면서 내부가 안정되자 일본의 시선은 다시 밖으로 향했다. 중국이 수비형 제국이라면, 히데요시의 야망에서 보았듯이 일본은 기회만 닿으면 밖으로 눈을 돌리는 공격형 제국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히데요시와 같은 침략이 아니라 경제적 해외 진출이었다. 어느 바쿠후보다도 경제에 관심이 많았던 에도 바쿠후는 노부나가 시절부터 맛들이기 시작한 해외 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무역은 상인들이 하는 일이지만 바쿠후가 앞장서는 무역이니 당연히 바쿠후의 이익이 최우선적으로 보장되어야 했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사무역을 금지하고 모든 무역은 바쿠후의 허가를 받도록 하면 된다. 마침 명의 감합 무역이 본받을 만한 모범이 되었다. 에도 바쿠후는 바쿠후의 면허장을 받은 선박에게만 해외 무역을 ..
바쿠후를 보완한 바쿠한 오랜 전란의 시대를 거치며 최후의 승자에 오른 데다 강적인 오사카의 히데요리마저 물리친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 바쿠후는 선배 바쿠후 가문인 가마쿠라나 무로마치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무엇보다 전란의 시대 동안 자연스럽게 전국이 통일되었다는 게 가장 큰 차이였다. 예전의 바쿠후들은 무사 계급의 우두머리라는 점에서는 전국적인 세력이었지만, 정치ㆍ행정의 측면에서는 교토에서 간토에 이르는 도카이 일대의 패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에도 바쿠후는 무사들만이 아니라 전국 다이묘들을 지배함으로써 군사적인 측면은 물론 경제적인 측면까지 장악했다. 또한 예전 바쿠후들이 전제 권력을 행사하는 데 늘 걸림돌이 되었던 교토의 천황과 전통적인 귀족 세력은 에도 시대에 이르러 이름과 상징적 지위만 남았을 뿐..
마지막 내전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와 미쓰나리의 싸움이었으나 그와 동시에 오사카와 에도의 싸움이기도 했다. 여기서 에도 측이 승리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일본의 수도는 도쿄가 아니라 오사카가 되었을 것이다. 승자가 이에야스였기 때문에, 천황이 있는 교토에서 오사카보다 훨씬 더 먼 쇼군의 텃밭이 일본 전체의 중심이 되었다. 센고쿠 시대 이래 한동안 맥이 끊겼던 쇼군이 부활했으니 바쿠후도 부활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일본 역사에서 마지막 바쿠후가 될 이에야스의 에도 바쿠후다. 바쿠후가 부활했다는 것은 이제야 비로소 하극상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음을 뜻한다(하극상은 바쿠후 권력을 부인하면서 시작된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바쿠후의 지휘자인 쇼군 직도 세습되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쇼군에 오른..
2. 작은 천하와 작은 제국 최후의 승자가 된 2인자 죽는 순간까지 히데요시가 가장 걱정한 것은 여섯 살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秀賴, 1593~1615)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신뢰하던 5대로(五大老)에게 아들을 부탁한다는 특별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그 자신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아들과 손자를 팽개치고 권력을 잡은 터에 그 유언이 충실히 지켜지기를 바랐다면 지나친 욕심이다. 5대로 중에는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Tokugawa Ieyasu)가 포함되어 있었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를 섬기면서 무려 40년 동안이나 2인자의 역할을 고수한 이에야스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히데요시가 살아 있을 때도 그는 사실상 동국(東國, 교토 동부에서 에도까지)의 지배자로 군림했으며, 히데요시에게서..
대외로 연장된 하극상 히데요시의 통일로 일본은 사상 처음으로 강력한 중앙집권 제국이 되었다. 일찍이 고대의 율령 국가도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국가라기보다는 권력 구조에 불과할뿐더러 일본 전역을 지배한 것도 아니었다. 초기 바쿠후 정권 역시 그 점에서 마찬가지다. 따라서 히데요시의 일본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중앙집권 제국이라고 할 수 있다【정치 체제를 중심으로 볼 때 동서양의 역사는 대체로 다음 단계들을 거친다. ① 도시국가(그리스의 폴리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 일본의 야마토 정권), ② 고대적 전제 국가(유럽의 로마 제국, 중국의 고대 제국들, 일본의 고대 천황제, ③ 중세적 봉건제 국가(유럽의 중세, 일본의 귀족 지배 체제, 중국의 한 당 제국 시대에 발..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1. 내전을 국제전으로 하극상의 절정 100년에 걸친 센고쿠 시대를 끝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장수로서의 용맹과 정치 지도자로서의 지략이 두루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 자신이 센고쿠 시대를 특징지은 하극상의 제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1582년에 노부나가는 출병을 앞두고 교토의 혼노사(本能寺)에 머물다가 예기치 않게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 1528~1582)의 배신으로 반란군에 포위된 상황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당시 그가 혼노사에 간 이유는 모리(毛利) 가문을 공격하던 부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노부나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모리 측에게 그 사실을 숨긴 채 즉각 강화를 ..
인도에서 종교란 종교적 자유가 완전히 허용된 사회에서는 오히려 종교를 편협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특정한 신을 모시거나, 특정한 내세관을 가지거나, 특정한 종교적 규율에 따르는 것, 요컨대 ‘신앙’을 종교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종교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이 첨단의 시대에 아직도 종교를 가지고 싸우느냐고 혀를 찬다. 종교를 첨단과 대비시킬 만큼 낡아빠진 것으로 보는 견해다. 하지만 종교가 단순한 신앙이라기보다 생활 방식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도 많다. 수천 년에 달하는 역사를 통해 그 점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나라가 바로 인도다. 고대에 인도는 아소카와 카니슈카 등 불교를 기반으로 통치한 군주들이 많았고, 중세에는 외래 종교인 이슬람교의 지배를 받았으며, 영국의 식민지..
독립과 동시에 분열로 애초부터 인도인들의 반영 감정을 적당히 얼버무리기 위해 실시된 유화책은 오래가지 못했다. 1880년대 영국에서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 (1809~1898)의 자유당 정부가 집권하면서 정점에 달한 유화책은 그 이후부터 본격적인 반동으로 돌아섰다. 급기야 영국은 인도의 영토마저 손을 대기 시작했다. 1903년 영국은 행정을 개선하다는 명목으로 벵골을 동과 서의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서벵골은 캘커타가 중심이고, 동벵골은 아삼 지방, 그러니까 지금의 방글라데시가 중심이었다. 인종도 벵골인으로 같고 언어도 벵골어로 같은 데다 특별한 지리적 경계선마저도 없는 지역을 왜 굳이 둘로 나누었을까? 서벵골은 힌두교권이었고 동벵골은 이슬람교권이었다는 점을 알면 영국의 진..
2. 간디와 인도 독립 민족의식에 눈뜨다 근대화에는 빛과 그늘이 있다. 식민지만이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영국의 산업혁명은 영국을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로 끌어올린 동시에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아동 노동으로 악명을 날리게 했다. 주체적 근대화를 이룬 서구세계에서도 그럴진대 식민지적 근대화 과정을 거친 인도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근대적인 지세 제도가 들어서면서 인도의 전통적 관계는 뿌리째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토지 소유자가 자기 재산에 해당하는 만큼의 세금을 낸다는 원칙은 영국에서 보면 지극히 간단하다. 그러나 근대적인 토지 소유 관계에 익숙하지 못한 전통의 지주들은 당혹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무엇보다 사유지에 대한 관념이 미약하다. 그냥 ‘이 언덕에서부터 저..
식민지적 발전? 영국의 ‘정식’ 식민지가 되었으니 이제 그에 걸맞은 통치 기구가 필요했다. 인도에 영국식 관료 행정 기구를 이식하는 작업은 벵골을 식민지화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지나치게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부패와 착취만을 일삼은 동인도회사의 짧은 통치 경험은 영국에 커다란 교훈이 되었다. 1772년 동인도회사의 벵골 지사로 파견되었다가 운 좋게도 정부의 방침이 바뀌는 바람에 느닷없이 총독(벵골 총독)으로 신분이 상승한 헤이스팅스와 그 후임 총독인 콘월리스는 뛰어난 행정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두 총독이 지배하던 시기에 벵골의 식민지 행정은 확고한 골격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 전 인도 지배에도 관철된다. 벵골에서 영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관리들의 급료를 챙겨주는 것이었다. 동인도회사 시절에..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다 인도 전체를 통틀어 아직 영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 최후의 세력을 꼽자면 마라타가 있었다【실은 카르나타카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인도에는 영국에 당당히 맞선 나라가 있었다. 마이소르(Mysore)라는 왕국이었다. 마이소르는 특히 하이데르 알리와 그의 아들 티푸 술탄이 지배하던 18세기 후반에 남인도에서 영국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일찍부터 영국의 진출에 위협을 느낀 하이데르와 티푸는 군대를 근대화하고 내정을 개혁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들은 당시 인도인으로서는 드물게 국제적인 안목을 지니고 있어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인근의 여러 나라와 동맹을 맺으려 백방으로 노력했다. 특히 티푸는 유럽에서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을 때 스스로 자코뱅당에 가입하는 등 특이하다 할 만큼 세계..
나라를 내주고 얻은 통일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은 남인도가 무대였지만, 영국의 승리를 결정지은 전투가 벌어진 플라시는 인도 동북부 벵골의 한 지방이었다(영국은 이미 전쟁 전부터 벵골의 중심지인 캘커타[2000년 콜카타로 이름을 고침]에 진출해 있었다). 이는 곧 전후 영국의 지배가 남인도에만 국한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사실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한 것은 한낱 30대 초반의 병참장교에 불과한 클라이브의 공적만이 아니었다. 당시 벵골의 장군이었던 미르 자파르(Mir Jafar, 1691~1765)는 벵골의 태수 자리를 노리고 영국을 적극 지원했다. 현직 태수와 미르 자파르의 싸움은 곧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이 벵골 내부에서 전개되는 것과 같았다.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자 자연히 미르 자파르..
8장 외부에서 온 인도의 통일 1. 분열된 조국과 통일된 식민지 남의 집에서 벌인 힘겨루기 18세기 중반 이후 무굴 제국은 1차 부도가 난 상태에서도 100년이나 더 존속하다가 1858년에야 ‘최종 부도’ 처리되었다. 이 기간 동안 무굴은 제국의 지위가 아니라 한낱 지방정권에 불과한 위상으로 그저 명맥만 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무굴이 남긴 정치적 공백은 누가 메웠을까? 중국과 달리 인도의 역사는 통일 제국이 아니라 늘 분권화된 상태가 중심이었다. 그렇다면 인도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 쇠락했을 때 그 찬란한 통일의 빛만큼 짙은 분열의 그늘이 드리워진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번은 그 이전의 어떤 분열기와도 달랐다. 과거의 분열은 기본적으로 인도 토착 왕조들이나 인근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이 세력 다툼을..
중국식 사회주의의 문제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을 취한 정당이다. 1920년 전국대표회의에서 공산당을 창립한 코민테른 대표 보이틴스키(Grigori Voirinsky)와 중국의 지식인 리다자오(李大釗), 천두슈(陳獨秀)는 모두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들에 비해 이론적인 깊이는 부족했지만, 그들과 창당을 함께한 마오쩌둥도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처음부터 그들과 달랐다.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한 마르크스는 원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면 낡은 체제가 되어 자동으로 붕괴한다. 그 과정에서 사회 발전의 다음 단계인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떠한 사회 질서도 그 내부에서 발전할 여지가 있는..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생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일본과 싸우는 중국은 자연히 연합국의 반파시즘 국제 통일전선의 일부가 되었고, 중일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었다. 그 덕분에 중국은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연합국 측의 직접적인 군사 원조를 받기 시작했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 혼자만의 힘으로 강대국 일본을 맞아 선전한 중국은 비로소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항일 전쟁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미국의 주선으로 중국이 연합국 4대 강국에 포함되어 장제스는 1943년 12월의 카이로 선언에서 루스벨트, 처칠과 자리를 함께하는 영광을 누렸다. 전황은 크게 호전되었어도 한 번 금이 간 국민당과 공산당의 관계는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회복은커녕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향해 달려갈수록 ‘전쟁..
합작의 성과와 한계 1차 합작은 군벌이 신생 공화정을 위협하는 대내적 상황에서 이루어졌지만, 2차 합작은 바깥의 일본 제국주의에 공동으로 맞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 달랐다. 공동의 적을 눈앞에 둔 만큼 1차 때와 달리 이번 합작은 일단 결정이 난 뒤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열세에 놓여 있다가 합작에 한껏 고무된 공산당은 토지개혁이나 계급투쟁 등 사회주의의 기본 이념에서 크게 양보하고, 필요하다면 홍군이라는 명칭도 바꾸겠다고 제안했다. 공산당의 전향적인 자세에 국민당도 기분 나쁠 리 없었다. 양당 간에는 자못 따뜻한 화해의 기류가 흘렀다. 행정 수반은 장제스가 맡았으며, 홍군은 국부군 내로 편입되었다. 곧이어 합작의 효과를 과시할 만한 사건이 터졌다. 1937년 7월 7일, 베이징 외곽의 루거우차..
안이 먼저냐, 바깥이 먼저냐 장제스가 공산당의 토벌에 여념이 없던 1931년 9월 18일에 만주에서는 한밤중의 정적을 뚫고 느닷없이 포성이 울렸다.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의 관동군이 남만주철도 폭파사건을 조작하고, 그것을 구실로 만주의 중국군을 기습한 것이다. 이 9ㆍ18사건이 바로 만주사변의 시작이다. 본국 정부의 승인도 없이 관동군이 독자적으로 시작한 전쟁이었으므로 선전포고 같은 절차도 없었다(사실 일본은 임진왜란壬辰倭亂부터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숱한 침략 전쟁을 도발했으나 한 번도 선전포고를 한 적이 없다). 관동군은 단기전으로 만주를 점령해버릴 속셈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서구 열강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만주를 중점적으로 개발했다. 관동군은 일본이 건설한..
한 지붕 두 가족 초라하게 시작한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금세 세력을 확장했다. 코민테른은 쑨원과도 접촉해 혁명당과 혁명군을 조직하라고 권고했다. 당시 코민테른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을 이루어 함께 반제국주의 투쟁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는 통일전선 전술을 권장하고 있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아직 조직력에서 미약한 공산당이 국민당의 조직을 이용해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에 따라 공산당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해 일부는 중앙 집행위원에 올랐다. 이로써 국민당과 공산당은 1924년에 1차 국공 합작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념과 노선이 크게 다른 두 세력이 하나의 조직에 속해 있다는 것은 언제나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공산당 세력은 국민당 ..
전혀 새로운 정치 세력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터졌다. 유럽 최후의 전제군주국이던 제정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타도된 것이다【유럽과 아시아의 전통적 전제군주국인 청과 러시아는 불과 5년의 간격을 두고 차례로 무너졌다. 공교롭게도 1910년대는 세계적으로 제국들이 무너지는 시기였다. 두 제국 이외에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멸망했다. 15세기 부터 터키와 발칸 반도, 동유럽 일대를 지배했던 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의 동맹국으로 참전했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해체되고 터키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수천 년간 세계를 이끌었던 제국 체제는 이미 낡은 체제가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에는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새로운 사회..
5. 새 나라로 가는 길 험난한 공화정 시행착오를 거듭하던 중국의 근대화 노력은 결국 공화정 체제로 개혁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결론으로 모아졌다. 19세기 이후 100여 년이나 중국의 근대화가 질척거린 것은 외세의 침략이라는 바깥 요인 때문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치의 무능과 부패에도 큰 책임이 있었다. 더욱이 외세야 중국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정치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개혁이 가능한 게 아닌가? 그런 점에서 공화정을 택한 것은 필연이자 올바른 결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길 역시 쉽지 않다는 데 있었다. 서구 공화정의 역사는 로마 시대까지 무려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며, 영국의 의회민주주의도 700년의 역사에 이른다. 근대 서구 공화정만 해도 수백 년 동안 중세와 절대주의..
마지막 황제 푸이 서양의 문물을 본받으려는 자구책(양무운동과 변법)이나 서양의 것을 배척하려는 자구책(의화단운동)이나 다 실패했다. 이제 중국에는 남은 카드가 없다. 마지막으로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은 양자를 절충하는 것뿐이다. 서태후 보수파 정권은 ‘신정(新政)’이라는 이름으로 뒤늦은 변법에 착수했다. 신정의 목표는 명백했고, 그래서 그 과정도 뻔했다. 우선 군사제도를 개혁하고 서양식 군관 학교를 세웠다. 근대식 상업을 육성하기 위해 상부(商部)라는 기구를 설치했다. 그리고 교육제도를 개혁해 서양식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것으로 수 문제가 만든 이래 1400년간이나 관리 임용 제도의 근간을 이루었던 과거제(科擧制)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통치 능력을 상실한 정부가 하는 개혁이 효과를 볼 리 없었다. 신정이 ..
자구책Ⅱ 캉유웨이(康有爲)가 서양의 정신적 힘이 그리스도교에 있다고 본 것은 옳았다. 오랫동안의 중세를 거치며 종교적 통합을 이룬 유럽은 비록 국가는 여럿이었으나 정신적ㆍ종교적으로는 한 몸이나 다름없었다【오늘날 유럽연합이 결성된 것도 그런 배경 덕분이다. 반면 한ㆍ중ㆍ일 3국은 수천 년 동안 동질적인 한자 유교 문화권을 이루어왔어도 지역적 블록을 이루기는 어렵다】. 영국, 프랑스, 독일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서구 전체의 이익이 문제시될 때는 즉각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다. 그러나 캉유웨이가 보지 못했던 것은, 그리스도교는 서양의 ‘정신적 힘’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중국에 온 서양의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를 포교하려는 의도만 가진 게 아니었다. 16세기 명대에 온 선교사들은 유럽에서 신교가 세력을 장악한 탓에..
자구책Ⅰ 외세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태평천국 세력은 청의 뒤를 이어 중국에 다시 한족 왕조를 세울 가능성이 컸다. 역대 왕조들의 흥망을 고려해볼 때에도 그게 ‘순리(順理)’였다. 이렇게 본다면 이 역사의 순리를 간단히 거스른 서구 열강의 힘은 과연 놀라운 것이었다. 태평천국군은 순전히 서구의 우세한 무기와 화력에 당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특히 반란의 진압을 계기로 중앙 정치에 발언권을 얻게 된 증국번(曾國審, 1811~1872)과 이홍장(李鴻章, 1823~1901) 등 유력 군벌들은 서양의 힘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아편전쟁 때도 서구의 무력을 실감했으나 이번에는 우군의 입장이었으므로 바로 곁에서 똑똑히 본 터였다. 증국번과 이홍장, 좌종당(左宗棠, 1812~1885)은 서양식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정..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천국 난징 조약의 또 다른 문제점은 그것이 하나의 전범이 된다는 데 있었다. 이제 중국의 실력은 백일하에 드러났으며,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은 아무도 청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양 질서의 핵이었던 중국이 그럴진대 다른 나라는 볼 것도 없었다. 1854년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이 일본을 개항하는 것은 난징조약의 후속 조치나 다름없었다(당시 서구인들은 한반도를 중국의 일부로 여겼으므로 조선에 대해서는 직접 통상 요구를 하지도 않았다). 곧이어 1844년에는 미국과 프랑스가 청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아편전쟁으로 중국의 문을 연 주체는 영국이었고 난징 조약에는 엄연히 영국에 최혜국(最惠國) 대우【최혜국 대우란 이후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 그 나라에 부여하는 이익은 모두 자기 ..
4. 중국으로 몰려오는 하이에나들 전쟁 아닌 전쟁 꾸준한 한화 정책은 청을 여느 한족 제국과 별로 다를 바 없이 만들었다. 한족의 선진 문화를 본받은 것까지는 좋지만 문제는 나쁜 점도 닮는다는 데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전성기 직후 곧바로 쇠락기가 시작되는 역대 한족 왕조의 운명이다. 너무 오래 통치한 탓일까? 중국 역사상 최대 영토를 일군 건륭제는 기나긴 재위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황제가 국정에 대한 관심을 놓으면 부패가 잇따르게 마련이다. 북방 민족의 제국들은 한족 제국과 달리 환관 정치에 휘말리지 않았는데, 청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등잔 밑이 어두웠을 뿐이다. 우선 건륭제가 신임하고 국정을 맡긴 신하가 부정을 저질렀다. 이래저래 짜증이 난 건륭제는 1795년에 아들에게 제위를 넘겨버렸다..
안정 속의 쇠락 예전까지 중국의 역대 통일 제국들은 대부분 전성기가 건국 초기 수십 년에 불과했고, 100년을 넘겨 번영한 나라는 당 제국이 유일했다. 그에 비해 청은 사직도 여느 왕조에 못지않았고 번영을 누린 시기도 당보다 좀 더 길었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어느새 근대의 문턱에 들어왔다. 중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것은 이제 중국 자체보다 동북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의 정세였다. 일단 대내적으로 청은 번영을 누릴 만한 모든 요건을 갖추었다. 강희제의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 조치 덕분에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1712년부터 백성들은 아무리 아이를 많이 낳아도 인두세를 추가로 물지 않았다. 장기간의 번영으로 가뜩이나 불어나는 추세에 있던 중국의 인구는 그것을 계기로 봇물 터진 듯 늘어났다. ..
장수의 비결 청 제국 이전에 북방 민족들이 세운 국가는 대개 정복에는 능했어도 통치에는 서툴렀다. 남북조시대에 화북을 지배한 북조 나라들이나 10세기 거란의 요, 12세기 여진의 금, 13세기 몽골의 원 등은 모두 군사력에서는 뛰어났으나 지배 기술이나 문화에서는 전통의 한족 왕조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중국에 북방 민족의 제국이 들어설 때에는 언제나 지배 민족이 소수였고 피지배 민족이 다수였다. 그래서 소수의 북방 민족은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 주로 차별과 억압의 수단을 사용했다. 그러나 힘만 세다고 해서 뒤진 문화가 앞선 문화를 오래도록 지배할 수는 없다. 더구나 힘이란 언제까지나 강할 수만은 없는 법이다. 차별과 억압을 통한 지배는 지배하는 측의 힘이 약해지면 금세 밑천이 드러나고 만다. 북방..
현대의 중국 영토가 형성되다 옹정제가 만든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의 첫 수혜자는 건륭제 고종(高宗)이다. 건륭제 역시 아버지 옹정제처럼 맏이가 아닌 다섯째 아들로서 제위에 올랐으며,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문무를 겸비하고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걸출한 군주였다. 건륭제는 강희제의 『고금도서집성』과 더불어 청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편찬 사업으로 꼽히는 『사고전서(四庫全書)』를 11년에 걸쳐 완성했다. 『사고전서(四庫全書)』는 당대의 문헌들을 유학ㆍ역사ㆍ사상ㆍ문학의 네 가지[四庫]로 분류해 총정리한 대규모 출판 사업이었다. 『고금도서집성』과 마찬가지로 『사고전서(四庫全書)』 역시 일종의 백과사전이었으나, 학문적인 목적 이외에 정치적인 의도를 상당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우선 편찬 과정에서 만주 ..
아이디어맨 옹정제 실로 오랜만에 중원을 정복한 이민족 왕조였으므로 강희제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민심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중심이 약해지면 언제든 다수가 들고일어날 것이다. 지배하는 소수는 관용만이 아니라 강력한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그다음 황제인 옹정제(雍正帝, 1678~1735)의 과제였다. 지배 체제를 공고화하려면 무엇보다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하다. 우선 그는 의정왕대신회의(議政王大臣會議)와 내각으로 이원화되어 있는 통치 체제를 단일화하기로 결정하고, 군기처(軍機處)를 설치해 두 기관의 기능을 한데 통합했다. 군기처는 만주족과 한족의 군기대신으로 구성된 최고 의사 결정 기구였으나 황제 직속이었으므로 황제의 비서실과 같은 기능을 했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이 국무..
해법은 또다시 한화 정책 베이징을 점령한 뒤에도 청은 한동안 통일 제국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다. 한 번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는 한족의 저항은 매우 거셌다. 강북은 그런대로 지배할 수 있었으나 강남은 여의치 않았다(남북조시대부터 북방 민족은 중원을 여러 차례 지배했으나 강남까지 손에 넣은 이민족 왕조는 몽골이 유일했다). 그래서 청은 강남에 대해 간접 지배의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마침 청이 중원을 지배하게 된 데는 투항한 한인들의 공이 컸으니 이들을 이용하면 된다. 청은 오삼계를 비롯해 한인 공신 세 명에게 각각 번국(藩國)을 할당해 그 세 개의 번국으로 강남을 통제했다. 한동안 번국들은 거의 독립국이나 다름없이 행세했다. 각자 군사권을 지니고 있었던 데다 청 제국으로부터 막대한 재정 지원까지 ..
3. 최후의 전성기 급변하는 만주 역대 통일 왕조가 그랬듯이 명 제국도 외부의 침략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멸했다. 마지막 황제인 의종이 즉위하던 해부터 발발한 농민 반란은 점차 전국으로 번지며 규모가 커졌다. 비가 잦으면 벼락이 치는 법이다. 중원 북서쪽 산시에서 벼락이 울렸다. 지방관이던 이자성(李自成, 1605~1645)은 그 지역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관직을 팽개치고 반란군을 규합했다. 쿠데타와 건국의 차이는 나라를 바꾸느냐, 못 바꾸느냐에 있다. 1643년에 그는 시안에서 대순(大順)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베이징을 공략해 손에 넣었다. 도성이 함락되고 의종이 목을 매 자살하는 것으로 명 제국의 사직은 명이 끊겼다. 이자성이 계속 권력을 유지했더라면 명 제국을 대신해 ‘순(順) 제국..
우물 안의 제국 정확한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서양에 비해 경제와 문물에서 앞섰던 동양이 서양에 뒤처지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명대부터라고 볼 수 있다. 몽골족의 원 제국은 처음부터 동양과 서양의 교류에 대한 관심 때문에 중앙아시아로 진출해 세계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뒤이은 명대에는 원대에 발달한 해외 무역과 교역이 거의 단절되었으며, 송대에 비해서도 상업과 무역이 크게 위축되었다. 여기에는 몽골이라는 이민족의 지배가 100여 년간 지속된 탓도 있다. 명은 오랜만에 복귀한 한족 왕조였으므로(내내 북방 민족에 억눌려 지낸 송대까지 합치면 당 제국 이후 무려 400년 만의 제대로 된 한족 통일 왕조다) 초창기부터 제국 운영에서 경제 논리보다는 정치 논리를 앞세웠다. 정화의 원정이 서양에서와 같은 대항해로 ..
기회는 죽고 당쟁은 살고 명대에는 농업과 공업, 상업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황제와 무능한 정부, 무능한 정치에 발목이 잡혀 사회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총체적 무능으로 일찌감치 쇠락의 길을 걸었던 명이 그나마 300년 가까운 사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따금씩 운 좋게도 수명을 늘리는 특효약을 처방 받은 덕분인데, 그중 하나가 장거정(張巨正, 1525~1582)의 개혁이다. 송에 왕안석(王安石)이 있었다면 명에는 장거정이 있다. 장거정은 1572년 신종(神宗, 1563~1620)이 열 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어린 황제를 대신해 전권을 위임받았다. 그 전대 수십 년간의 정치 문란을 목격하면서 개혁의 뜻을 품고 있었던 장거정은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강력한 혁신 정치를 폈다. ..
조공인가, 무역인가 중화사상(中華思想)이 이론과 현실에서 완성된 것은 송대의 일이었으나 물리력이 약한 송은 중화사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이상으로만 간직했다. 그러다 결국 ‘오랑캐’인 몽골족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그런데 100여 년 뒤 한족의 명 제국이 복귀했다. 송대에 지금은 비록 오랑캐 세상이지만 한족이 다시 중심이 되리라던 주희(朱熹)의 이론이 사실로 증명된 걸까? 한족 왕조 명은 그 점을 의식했는지 개국 초부터 적극적으로 중화적 세계관을 주변에 강요했다. 영락제 시대 정화의 남해 원정도 그 작업의 일환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정화의 원정은 유럽이 본격적인 대항해시대를 여는 것보다 시기적으로 앞섰으므로 충실하게 진행되었더라면 이후 중국사, 아니 세계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17..
사람 잡는 은납제 역대 한족 왕조들이 그렇듯이, 명 제국도 전성기는 짧았고 퇴조기는 길었다. 294년의 사직 중 처음 100년도 채 못 되는 시점에서부터 벌써 정치가 부패하기 시작했다【중국 역대 통일 왕조들의 평균 수명은 300년이 채 못 되는데, 세계사적으로 보면 결코 짧지 않다. 그러나 한반도에 들어선 역대 왕조들의 평균 수명은 무려 600년이 넘는다. 중국에 비해 한반도 왕조들이 정치를 잘했기 때문일까? 물론 아니다. 우선 한반도는 중국만큼 넓지 않기 때문에 중앙 정부의 통제가 지방에까지 쉽게 전해졌다. 또 한반도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외교와 군사 측면에서 중국의 지휘를 받았다. 중국 역대 왕조들은 한반도의 군대 징발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반도의 국제 관계도 거의 중국이 관장하는 식이었다. 왕..
환관의 전성시대 영락제는 대외적으로 한 무제와 당 태종에 맞먹는 탁월한 군주였으나, 대내적으로는 장차 제국의 운명을 위태롭게 할 씨앗을 뿌려 놓았다. 그것은 곧 환관이었다. 역대 한족 왕조들은 사대부 국가인 송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환관의 발호로 인해 정치 불안과 부패가 빚어졌다. 이 점을 일찌감치 간파한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환관의 정치 개입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 환관에게는 문자조차 습득시키지 말라는 유시를 남기고 이 내용을 적은 철패(鐵牌)까지 세웠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환관 문제에서도 어긋났다. 영락제는 조카의 권력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환관의 협조를 받은 일이 있었던 탓에 환관에 대한 경계심이 없고 오히려 그들을 깊이 신뢰했다. 권력의 정통성이 결여되었다는 불안도 작용했을 것이다. 정당한 권..
영락제의 세계화 걸출한 군주인 명 태조는 자신의 사후에 대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원래 나라를 처음 세운 건국자가 죽으면 후계를 둘러싸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는 법이다【우리의 조선조 역사에서는 이를 ‘왕자의 난’이라 부르지만 이런 종류의 사태는 거의 모든 나라의 개국 초기 역사에서 볼 수 있다. 고려의 건국자 왕건이 죽고 나서는 그의 배다른 아들들이 각자 자기 어머니의 외척 세력을 등에 업고 정권 다툼을 벌였으며, 조선의 이성계는 살아 있는 동안에 정권 다툼의 와중에 한 아들(이방원)이 두 아들(방석과 방번)과 개국공신(정도전)을 죽이는 비극을 목격했다. 중국 역사도 마찬가지다. 진시황(秦始皇)이 죽자 승상이 태자를 죽이고 자신이 지지하는 황자를 즉위하게 했는가 하면, 한 고조 유방(劉邦)이 죽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