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역사&절기/세계사 (395)
건빵이랑 놀자
2. 전통과 결별한 한족 왕조 황제가 된 거지 몽골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한족의 품에 돌려준 주원장(朱元璋)은 1368년 새 제국의 국호를 명(明)으로 정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백련교(白蓮敎)의 한 갈래인 명교(明敎)의 우두머리인 탓에 국호를 명이라고 정했다지만, ‘밝다’는 뜻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명 제국을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역대 어느 왕조의 건국자보다도 희한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일찍이 수, 당, 송 제국을 세운 양견(楊堅), 이연(李淵), 조광윤(趙匡胤)은 모두 중원 북방의 유력한 무장 출신이었으며, 더 이전의 진시황(秦始皇)은 전국시대 제후라는 당당한 신분이었다. 실력이든 가문이든 배경이든 이들은 제각기 내세울 만한 요소가 있었다. 한 고조 유방(劉邦)도 이들에 비해서는 한참..
깨어나라, 한인들아! 대규모 정복 활동을 전개할 때 드넓은 전선을 하나의 일사불란한 지휘로 감독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몽골은 칭기즈 칸 때부터 전선에 파견된 군 지휘관들의 독자적인 작전권을 인정했다. 이 지휘관들은 언제 어느 방면으로 진격하라는 등의 기본 전략은 중앙의 지시를 받았으나 전투 지역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작전을 수립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방식은 몽골군 특유의 기동력을 더욱 활성화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이 아니면 효율성이 떨어졌다. 정복 전쟁이 끝나고 안정적인 정치와 행정이 필요할 때는 오히려 제국의 통합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칭기즈 칸이 죽은 뒤 원 제국이 몰락할 때까지 내내 이어진 치열한 권력 다툼과 분열은 바로 그 점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동서 문화의 교류 세조의 한화(漢化) 정책은 35년의 긴 재위 기간 동안 꾸준히 실천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중국식을 모방하는 데 그쳤을 뿐 그다지 독창적인 요소는 없었다. 겉으로만 보면 중국식 관료제를 충실히 따랐지만 핵심 부서의 최고책임자는 몽골인 또는 친몽골적 한인만 중용했기 때문에 내실 있는 관료제가 되지는 못했다. 1315년에 부활된 과거제(科擧制)도 합리적으로 운영된 게 아니라 철저한 신분 차별을 바탕으로 했다. 이를테면 문제 출제도 몽골인과 색목인에게 유리했을 뿐 아니라 한인들은 과거에 합격한다 해도 승진할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더욱이 민족마다 별도로 합격 정원제를 두었으니 요즘으로 말하면 심각한 ‘인종차별’이었다. 그러나 경제정책에서는 종전의 모든 한족 제국을 뛰어넘는 수준과 독창..
중국식으로 살자 1211년 금을 공략하면서 시작된 몽골의 정복은 몽케 칸에게서 끝났다. 서유럽 입성을 눈앞에 두고 바투의 원정군이 유럽 전선에서 철수한 게 마지막이다. 몽케 칸은 왜 정복을 계속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남송 때문이었다. 주변의 모든 나라가 몽골군의 말발굽에 짓밟힐 때도 남송은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몽골은 서쪽으로만 진군했을 뿐 100여 년 전부터 금에 눌리면서도 강남에 버티고 있는 남송의 숨을 끊지는 않았다. 언제든지 손만 대면 집어삼킬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정복을 늦추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몽케 칸에 이르러 몽골의 대외 정책은 크게 바뀐다. 몽골 제국이 분열되어 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 그리고 바투의 킵차크 칸국이 사실상 독립했다. 이런 마당에 몽케 칸..
몽골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불세출의 정복 군주 칭기즈 칸이 죽었으니 정복 사업은 끝난 걸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사실 그는 역사적 명성에서만 아버지에게 뒤질 뿐 실상은 아버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정복 군주였다. 보통 칭기즈 칸을 대칸이라고 부르지만 그 이름의 뜻이 ‘위대한 칸’이었을 뿐이고, 칭기즈 칸 본인도 대칸이라는 직위를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고타이는 스스로 대칸이라고 자처했으니 그의 야심을 짐작할 수 있다. 과연 오고타이는 즉위하자마자 쿠릴타이를 열어 칭기즈 칸의 정신을 이어받아 제국을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무시무시한 정복자가 죽었다는 소식에 혹시나 하던 주변 국가들, 특히 금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러나 눈을 ..
불세출의 정복 군주 12세기 후반까지 몽골은 금의 지배 아래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의 힘이 약해지면서 몽골 초원에도 통일의 바람이 불었다. 통일의 중심은 일찍이 부족들 간의 다툼에서 아버지를 잃은 테무진이라는 청년이었다. 테무진은 먼저 자신의 부족인 보르지기드족을 통합한 뒤 케레이트족의 왕칸, 같은 부족의 자무카와 동맹을 맺고 주변 부족들을 하나하나 복속시켰다. 예상보다 빠르게 테무진이 세력을 키운 데 놀란 왕칸과 자무카가 등을 돌리자 그들도 통일의 적이 되었다. 결국 케레이트족을 정복하고 마지막 남은 서쪽의 나이만을 복속시키는 것으로 몽골 초원의 주인은 정해졌다. 1206년 테무진은 쿠릴타이(몽골족의 부족 연맹 회의)에서 몽골 제국의 대칸(황제)으로 추대되었는데, 그가 바로 칭기즈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1. 역사상 가장 강했던 제국 슈퍼스타의 등장 한족의 송 제국을 강남으로 밀어내고 화북을 지배한 거란의 요나 여진의 금은 예전과 같은 유목 국가가 아니었다. 예전의 북방 민족들은 힘이 강성해지면 중국을 침략하고 약탈하는 데 그쳤지만, 요와 금은 아예 중원에 들어앉아 중국 대륙을 공동 명의로 하자고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흔히 이전의 유목 국가들을 침투 왕조라고 부르고, 요나라 이후의 유목 국가들을 정복 왕조라고 부른다【정복 왕조라는 용어는 20세기의 경제학자인 카를 비트포겔(Karl August Wittfogel)이 10세기 이후 크게 달라진 유목 국가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만든 용어다. 사실 이 용어는 문제가 있다. 중국의 한족 국가들을 기준으로 중국 역사를 볼..
3부 섞임 몽골 제국 시절부터 중국은 일찌감치 세계화의 길로 나선다. 그러나 낡은 제국 체제는 발전에 내내 걸림돌이 되었고, 결국 중국은 밀려오는 서양 세력 앞에 비참하게 몰락한다. 통일보다 분열이 자연스러웠던 인도는 영국의 손에 의해 통일을 이루면서 식민지 시대를 맞는다. 일본의 대외 진출은 곧 침략 전쟁이었다. 한반도를 놓고 중국과 경쟁하던 일본은 마침내 꿈을 이루지만 군국주의의 덫에 걸려든다. 인용목차한국사 / 서양사
떠오르는 별, 노부나가 하극상의 시대가 한동안 지속되면서 점차 실력의 우열이 드러났다. 처음에는 저마다 대권 후보로 나서겠다고 외쳤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이 어지러이 벌어졌다. 그 결과 남은 후보들은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라는 한 가지 용어로 통일되었다. 센고쿠 다이묘들은 누구나 대권을 꿈꾸었으나 이들 간에도 점차 떠오르는 별이 생겨났다. 가장 빛나는 별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였다. 노부나가는 능력도 출중했으나 인재를 보는 안목도 뛰어났다. 그는 고향인 오와리(尾張, 지금의 나고야 동쪽)에서 일어나 인근 미카와(三河)의 다이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를 휘하에 끌어들였다. 그 덕분에 불과 스물여덟 살인 1560년에 도카이(東海) 최고의 다..
하극상의 시대 바쿠후의 권력이 안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전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책봉으로 확보된 외부의 권위도 무사 정권 특유의 불안정성을 말끔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전통의 적인 세력 가문들의 도전은 그럭저럭 물리칠 수 있었으나, 그 대신 지역 사회에서 성장한 슈고들이 바쿠후의 권력을 위협할 만큼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무로마치 바쿠후는 권력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슈고들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슈고를 휘하에 복속시키면 유사시에 군사를 모으기도 쉬울뿐더러, 대개의 반란을 슈고가 일으키므로 위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의미도 있었다. 따라서 바쿠후는 슈고들을 배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슈고들은 전통의 장원 영주들을 잠식하면서 대영주로 성장했다. 슈고 출신이 다이묘가 되었기에 ..
3. 통일과 분열, 분열과 통일 그래도 답은 바쿠후 각고의 노력 끝에 권력을 잡은 고다이고 천황은 연호를 건무(建武)로 고치고 천황 정치를 부활하려 애썼다. 그러나 100여 년 전 고토바(後鳥羽)의 노력이 그랬듯이, 좋았던 옛날‘로 복귀하려는 고다이고의 꿈도 환상이었다. 우선 고다이고는 무사들의 반발을 고려해 이전의 고쿠시(國司)나 슈고(守護) 제도는 그대로 두고 그 지위에 자기 사람을 앉혔다. 다분히 절 충적인 방식이니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에게는 불만이다. 게다가 그는 바쿠후 타도에 앞장선 무사들의 논공행상에서 실패한 탓에 그들의 불만을 샀다. 나아가 천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대규모 건축 사업을 일으킨 것도 커다란 실책이었다. 고다이고의 중흥 정치는 1년도 못 되어 파탄에 이르렀다. 이런 사태의 추이..
곪아가는 바쿠후 체제 비록 태풍의 덕이었으나, 일본 역사 전체를 통틀어 최대의 위기라 할 몽골 침략마저 물리친 바쿠후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일본 역사를 굴절시킨 것은 바깥의 적이 아니라 안에서 곪는 상처가 아니었던가? 바쿠후 체제도 안에서부터 곪아가고 있었다. 무사 계급은 전쟁을 기본 기능으로 한다. 전쟁이 없는 평화기에는 할 일도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일에 무능력할 수밖에 없다. 그전까지는 새로 생겨난 바쿠후 체제가 안정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진통과 후유증, 그리고 몽골이라는 대적의 침략 등으로 모순이 표면화되지 않았다. 역설적이지만 바쿠후 권력이 안정을 찾으면서 무사 계급 자체에 내재된 문제점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찍이 반전제가 무너지면서 탄생한 소규모 자..
시련과 극복 가마쿠라 바쿠후의 새 주인이 되고 나서도 호조 가문은 몇 차례 고비를 더 넘어야 했다. 호조는 가문의 이름도 ‘도쿠소(得宗)’로 바꾸고 가문의 수장을 ‘싯켄(執權)’이라고 불렀지만, 현실은 마냥 도쿠소와 싯켄으로 머물게 놔두지 않았다【도쿠소나 켄이나 말뜻으로는 권력을 장악했다는 의미다. 도쿠소는 원래 요시토키의 법명(法名)이었으나 호조 가문의 대명사가 되었고, 켄은 도쿠소의 지배자라는 직책의 명칭이었으나 호조 가문이 세습함으로써 이 가문의 우두머리를 가리키게 되었다. 쇼군은 형식상으로 여전히 바쿠후의 서열 1위였지만 바쿠후를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호조의 켄이었다】. 조큐의 난 이후 호조에 반대하는 호족 가문들이 단결해 도전해오는가 하면 심지어 쇼군이 바쿠후를 타도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자유경쟁을 통해 독점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지닌 지도자가 죽고 나면 혼란이 뒤따르는 법이다. 드라마틱한 일생을 산 초대 쇼군 요리토모가 1199년 쉰셋의 나이로 죽자 신생 바쿠후 정권은 위기를 맞았다. 바쿠후 체제의 수립에 공을 세운 지방 호족들이 점차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요리토모의 치세에 그들은 요리토모의 고케닌으로서 철저히 복종했으나 그의 아들 요리이에(賴家, 1182~1204)가 2대 쇼군이 되자 태도가 달라졌다. 특히 호조(北條) 가문의 도키마사(時政, 1138~1215)와 그의 아들 요시토키(義時, 1163~1224)는 요리토모의 미망인이자 요리이에의 어머니인 마사코(그녀는 요리토모가 사망하자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었으나 남편의 후광으로 ‘여승 쇼군’이라 불리며 여전히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를..
2. 무인들의 세상이 열리다 권좌에 오른 무사들 미나모토를 무찌르고 권력의 핵심에 오른 다이라 기요모리는 순수한 무장이었으니 정치와 행정의 경험이 있을 리 없다. 모르면 베껴라. 그는 바로 전까지의 권력 구조였던 칸 정치를 흉내 내기로 한다. 우선 천황의 외척이 되면 부족한 권력의 정통성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려면 천황부터 갈아치워야 한다. 그래서 그는 1169년에 자신의 조카, 즉 고시라카와(後白河, 1127~1192) 천황과 자기 처제의 여덟 살짜리 어린 아들을 내세워 다카쿠라(高倉, 1161~1181) 천황으로 삼고 자기 딸을 황후로 들였다【이 천황 부부는 서로 이종사촌인 셈인데, 고대에는 어느 나라 역사에서는 왕실 내에 근친혼이 잦았다. 우리 역사에서도 신라의 김유신과 김춘추는 서..
모방을 버리고 독자 노선으로 일본이 진통을 겪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동북아시아 전체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한동안 국제 질서의 핵심이었던 당 제국은 8세기 중반 안사의 난 이후 당말오대의 말기적 증상에 시달렸다. 당의 율령제가 붕괴하는 시기와 일본의 율령제가 붕괴하는 시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일본은 율령제의 성립만이 아니라 붕괴까지도 모방한 셈이다. 아니면 율령제의 한계가 그랬거나. 그러나 중국의 동요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한반도와 일본은 서로 달랐다. 통일신라는 당과 함께 중앙 권력이 무너지고 혼란기에 빠졌으나【신라는 당과 함께 말기적 증상을 보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난 8세기 중반의 혜공왕(재위 765~780)부터 당이 수명을 다하는 9세기 말 진성여왕(재위 887~897)까지 신라 ..
순수 무장의 집권 천황의 지위는 쇠락 일로에 있었다. 당대의 실력가인 후지와라 가문은 자기 딸을 황후로 집어넣어 외손을 천황으로 즉위시키는 방법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외척 정치와 같은 셈인데, 차이가 있다면 그래도 실권을 가진 중국의 천자에 비해 일본의 천황은 한층 초라한 존재였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후지와라 가문의 독재라고 할 수 있었으나 권력의 정상에 오르면 분열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내 후지와라도 네 가계로 나뉘어 권력투쟁을 일삼았다(그 가운데 북가北家의 세력이 가장 컸다). 마침내 858년에 섭정이 된 후지와라 요시후사(藤原良房, 804~872)는 천황을 완전히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시켰다. 황족이 아닌 사람이 섭정에 오른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섭정 정치가 ..
귀족이 주도한 율령제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으로 탄생한 율령 체제의 경제적 토대는 모든 토지가 국가, 즉 천황의 것이라는 공지제(公地制)였다【앞에서 보았듯이, 왕토 사상은 동북아시아 문화권에 내재해 있었다. 일본의 공지제가 아니더라도 어느 나라 어느 왕조는 개국 초에는 왕토 사상을 철저히 지키게 마련이다. 사회적 원리의 면에서도 그렇지만 지배층에게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이전 왕조의 경제적 토대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개국 공신을 비롯한 새 정치 세력에게 토지를 분급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신라를 접수한 고려, 고려를 타도한 조선은 초기에 왕토 사상을 표방하고 나섰다. 그러나 처음에는 관리들에게 독봉으로 토지의 점유권만 인정하지만 얼마 못 가서 점유권은 사실상 소유권이 되어버린다. 왕토 사상..
6장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1. 무한 내전의 출발 모방의 한계 645년의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을 통해 일본은 비로소 고대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당대의 동북아시아 여러 민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7세기 중반이면 한참 늦은 출발이기는 하지만, 중국 문화권의 한반도보다 800년이나 늦게 신석기시대를 졸업한 일본 민족으로서는 비약적인 발전이라 하겠다. 그런 성과를 이룬 데는 섬나라라서 외적의 침입이 없었다는 지리적 여건과 아울러 일본 민족 특유의 뛰어난 모방 솜씨가 큰 역할을 했다【섬이란 사실 양면적인 조건이다. 외부의 ‘침략’을 막기에는 더없이 좋지만 동시에 외부의 ‘영향’마저 가로막혀 폐쇄적으로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양면적 조건은 주체의 역량에 따라 좋게 작용할 수도 있고 나쁘게 작용할 ..
유능한 군주들이 일군 전성기 역사에 이름을 남긴 뛰어난 군주는 대개 한 측면에서만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는다. 아크바르도 역시 대외 정복이나 정치와 행정 같은 제국의 하드웨어에서만 성과를 거둔 게 아니라 문화와 예술 같은 소프트웨어에서도 치적을 남긴 군주였다(그가 해결한 종교 문제는 일반적으로 제국의 소프트웨어에 속하겠지만 인도의 경우에는 하드웨어로 보아야 한다). 또한 그는 호화로운 궁전에서 각종 화려한 행사를 주최해 절대 권력과 권위를 과시하면서도 매일 이른 아침에 창문을 열고 백성들의 인사를 직접 받을 정도로 여론에 민감했다. 그런 자질을 갖추었기에 아크바르는 정복 군주이자 문화 군주라는 보기 드문 선례를 보여주었다. 전통과 첨단을 매끄럽게 접합하는 아크바르의 솜씨는 종교만이 아니라 문화에서도 ..
최초의 중앙집권 제국 아크바르는 1556년 열세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50년 가까이 재위하면서 무굴 제국을 크게 발전시킨 탁월한 군주다. 무굴 제국 초기만 해도 라지푸트족의 반발과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델리까지 위협하는 이들을 복속하지 않고서는 제국이 반석에 오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라지푸트와 격전을 벌여 제압했다. 거기서 그쳤다면 아크바르는 평범한 군주에 머물렀을 텐데, 과연 그는 싹수가 달랐다. 힘으로 적의 항복을 받아낸 다음에는 그들을 포용해 사회의 지도층으로 폭넓게 등용한 것이다. 아크바르가 어떤 의도를 품었는지는 몰라도 그 정치적 효과는 매우 컸다. 북인도의 전통적인 지배층이자 상류층인 라지푸트를 제압하고 동화시키자 이내 나머지 인도인들도 뒤따르게 되었다. 나아가 아크바르는 라지푸트의..
4. 최초이자 최후의 제국 다양한 매력의 지배자 16세기 초반 아프가니스탄계의 로디(Lodi) 왕조가 델리 술탄국의 맥을 잇고 있을 무렵, 우즈베크 출신의 한 영웅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칭기즈 칸의 16대손이자 중앙아시아의 ‘칭기즈 칸’이었던 티무르(Timur, 1336~1405)【티무르는 14세기 중앙아시아 튀르크족의 지배자인데, 인도사에 속하는 인물은 아니므로 여기서 간단히 살펴보자. 몽골이 중앙 아시아에 수립한 차가타이 칸국이 와해되자(7장 참조) 티무르는 그 혼란을 수습하고 몽골 제국의 후예로 자처했다(물론 종교와 문화는 이슬람이다). 뛰어난 정복자였던 그는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남 러시아 일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손에 넣었다. 1405년 그가 병사한 뒤 후손..
이슬람이 지배한 힌두 평화와 안정에 지나치게 익숙해지면 변화에 무뎌진다. 인도는 결국 오랜 기간 평화(아울러 정체)를 누린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11세기부터 북인도에는 그전의 어느 이민족보다도 더 강하고 무자비한 이민족이 쳐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이슬람 세력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 자리 잡은 가즈니(Ghazni) 왕국의 마흐무드(Mahmud) 왕은 펀자브의 비옥한 영토를 노리고 북인도에 침입했다. 그는 재위 시절에 10여 차례나 인도를 침략해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으니, 인도의 입장에서 보면 두렵고도 끔찍한 원수였다. 오랜 평화에 나태해져 있던 인도군은 이슬람군의 빠른 기동력에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인도에는 원래부터 양질의 말이 태부족이었고 인도군은 전통적으로 코끼리를 ..
3. 이슬람과 힌두가 만났을 때 정체를 가져온 태평성대 굽타 제국이 붕괴한 이후 12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 동안 또 다시 인도의 고질병이 도졌다. 특별한 중심 세력이 형성되지 않고 소국들이 공존하는 분열의 시대다. 다행스런 것은 이 오랜 기간 동안 이민족의 침입이 거의 없었고 비교적 태평성대가 이어졌다는 점이다. 강적이었던 흉노는 인도 남하를 포기하고 터키와 유럽으로 가버렸다. 비록 소국가들 간의 충돌과 분쟁은 끊이지 않았으나 전체적으로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그러나 평화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진통이 없이는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듯이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는 태평성대보다는 적절한 자극이 필요하다. 더구나 당시 세계 무대는 땅 밑에서 용암이 막 분출되려는 듯한 기세였다. 유럽에서는 십자군 ..
가장 인도적인 제국 굽타와 바르다나 시절은 인도의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문화가 발달했다. 특히 이민족의 침탈이 잦은 시대였기 때문에 인도인들의 민족의식이 크게 성장하고 토착 문화가 꽃을 피웠다. 중앙집권이 미약하고 속국들이 거의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던 것은 이미 인도의 고유한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마우리아부터 굽타에 이르기까지 그 점은 거의 변한 게 없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후진을 면치 못했어도 학문은 전에 없이 크게 발달했다. 특히 인도의 수학과 천문학은 당시 세계 첨단의 수준이었다. 인도인들은 당시에 세계 최초로 0의 개념을 발견했으며, 십진법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오늘날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진 숫자 체계와 십진법은 사실 인도의 것을 아랍 세계에서 도입해 로마에 전한 것이었으니 근원을 찾..
2. 고대 인도의 르네상스 중앙집권을 대신한 군주들 쿠샨 왕조가 무너진 이후 약 1세기 동안 지속된 분열 상태를 해소한 사람은 찬드라굽타 1세였다(마우리아의 건국자인 찬드라굽타와 이름이 같기에 보통 1세라는 말을 붙여 구분한다). 그는 320년 소국가들을 통일하고 굽타 제국을 세웠다. 찬드라굽타는 마가다 지방의 지주출신이었다고 전하지만,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진 명문 귀족인 리치비 가문의 공주와 정략결혼하고 이후에도 그 혈연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 것을 보면 원래는 변변찮은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콤플렉스 때문인지 그는 쿠샨 왕조 때 생겨난 ‘마하라자 드히라자(maharia dhirajs, 왕 중의 왕)’, 즉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한 왕조의 건국자는 후대에 영원히 기억되지만, 따지고 보면..
인도판 춘추전국시대 마우리아가 멸망한 뒤 4세기에 굽타 왕조가 들어설 때까지 인도는 500년간의 분열기를 겪게 되는데, 이 긴 기간 동안 수많은 나라가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분열된 상황에다 정치적 구심점조차 없었던 탓에 이 시기 인도에는 이민족의 침략도 잦았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게 바로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이다. 그가 잠시 펀자브를 장악한 것을 계기로 그리스인들의 일부는 아예 인도의 서북부에 눌러앉아 그 일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숭가 왕조와 그 뒤를 이은 칸바(kanva) 왕조는 전력을 다해 그리스계 민족의 남하를 저지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서북부 지역은 인도인의 손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다. 일찍이 아소카 왕 시절에 인도의 서북부에는 그리스계의 박트리아(대월지)와 파르티아(안식국)가 발..
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1. 짧은 통일과 긴 분열 법에 의한 정복 인도 최초의 통일 제국인 마우리아 왕조는 기원전 322년부터 기원전 187년까지 불과 150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지중해의 로마 제국과 중국의 한 제국이 400년 이상이나 수를 누린 것에 비하면 마우리아는 미니 제국인 셈이다(인도 역사에서는 무굴제국을 제외하면 나중에도 수명이 200년 이상 지속된 왕조가 거의 없었다). 그런 만큼 제국의 성격도 크게 다르다. 마우리아를 비롯해 인도의 역대 통일 왕조들은 중국이나 유럽의 제국에 비해 그다지 강력한 힘을 지니지 못했다. 남인도(인도 반도)까지 포함한 인도 아대륙 전체를 강역으로 하는 국가가 출현한 것도 근대에 와서의 일이다. 사실 인도 역사에서는 중국의 역대 왕조들처럼 강력..
새로운 남북조시대? 송 제국이 당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즈음 요에도 강적이 출현했다. 요가 한창 강성할 때 복속되었던 여진족이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여진은 몽골계의 거란과 달리 만주에서 반농반목(半農半牧) 생활을 하던 민족이었다(요는 발해를 멸망시킨 뒤 발해 유민들도 여진이라고 불렀고 그들의 근거지인 만주는 옛 고구려의 영토였으니, 여진은 우리 민족과 대단히 가깝다고 할 수 있다). 12세기 초반 요의 국세가 약해지는 틈을 타서 완안부(完顔部)의 족장 아골타(阿骨打)는 여진 부족들을 통합해 1115년에 금(金)을 세웠다. 100년이 넘도록 요에 세폐(歲幣)를 바치고 있던 송은 금의 등장을 반겼다. 어차피 제 힘으로 적을 물리칠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송은 계책을 통해 요의 손아귀를 벗어날 마음을..
개혁의 실패는 당쟁을 부른다 화려한 문화의 선진국인 송이 물리력이 약하다는 한 가지 원인 때문에 일찌감치 쇠미의 징후를 보인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직 건국한 지 100년밖에 안 되는 젊은 나라이므로 반전의 실마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되었다. 그래서 등장한 게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신법(新法)이다. 스무 살의 청년 황제 신종(神宗, 재위 1067~1085)의 적극 지원으로 발탁된 왕안석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공격적인 부국강병책을 전개했다. 조공이 야기한 재정난은 부국책으로 막고, 부족한 군사력은 강병책으로 키운다. 왕안석은 부국책의 목적을 농민 생활의 안정, 생산력의 증가, 국가 재정난 타개로 삼고, 이를 위해 ..
문민정부의 아킬레스건 송대에는 학문과 예술만 발달한 게 아니었다. 도시와 상업의 성장으로 서민들의 생활수준도 높아지고 서민 문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웠으며, 해외 무역도 활발해 광저우(廣州)와 항저우 등 항구 도시들이 크게 번영했다. 또한 조선업과 제철업, 군수 산업 등 국가 기간산업도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게다가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눈부신 성과가 있었다. 송대의 발명품은 거의 다 세계 최초의 것들이다. 동양 세계의 4대 발명품 가운데 종이는 후한대인 2세기에 발명되었으나 화약과 나침반, 활판인쇄술은 모두 송대에 발명되었다. 지폐를 사용한 것도 세계 최초다. 문민정부를 토대로 했고 학문과 예술, 산업과 과학기술까지 두루 발달했으니 송은 명실상부한 최고의 강국이 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실은 정반대였다...
꽃피운 문화의 시대 문벌 귀족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 사격이라도 하듯이, 송 태조는 당의 최고 행정기관인 3성 6부에서 귀족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던 문하성과 상서성을 중서성에 통합해버렸다. 이에 따라 문하성이 지니고 있던 황제 명령에 대한 거부권도 없어져 황제의 전제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렇게 보강된 중서성과 더불어 군사권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추밀원(樞密院)을 두어 중서성과 추밀원의 2부(二府)가 최고 정책 결정 기관이 되었다. 또한 지방 행정 기구로는 전국에 15개의 로(路)를 설치했는데, 절도사가 전횡하던 시대처럼 지방 권력이 권력자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로(路)를 관장하는 책임자는 따로 임명하지 않았다. 그 대신 로에도 중앙 관제를 도입해 각 로를 부서별로 나누고 행정을 전문화하는 방..
4. 중원과 북방의 대결 군사정권이 세운 문민정부 거대 제국 당이 쓰러지면서 중국은 남북조시대가 끝난 이래 400년 만에 다시 분열기를 맞았다. 당이 멸망한 907년부터 960년까지의 분열기를 5대10국 시대라고 부르는데, 남북조시대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5호16국 시대와 이름도 비슷하고,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나라가 떴다 지는 양상도 닮은 데가 있다. 사실 이 시기는 남북조시대를 압축해놓은 것 같은 정치적 격변기였다. 제국의 심장을 쏜 주전충(朱全忠)은 후량(後梁)을 세워 5대의 첫 단추를 꿰었다. 5대는 후량(後梁) - 후당(後唐) - 후진(後晉) - 후한(後漢) - 후주(後周)로 이어지는 북방 이민족들의 다섯 개 중원 왕조이며, 10국은 전촉(前蜀)ㆍ후촉(後蜀)ㆍ형남(荊南)ㆍ초(楚)ㆍ오(吳)ㆍ남당(南..
쓰러지는 세계 제국 균전제(均田制)의 붕괴로 뿌리가 흔들리는 가운데 중앙에서는 환관, 지방에서는 절도사의 전횡이 나날이 심해지자 당 제국은 이제 존망의 기로에 놓였다. 사실상 당은 이 무렵(9세기 초반)에 무너졌어야 하는데, 그나마 양세법(兩稅法)과 환관들의 당쟁이 멸망을 지연시켰다고 할 수 있다. 당 제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후 중화 제국들의 원형이었다. 각종 법과 제도도 그렇지만 붕괴하는 과정도 그랬다. 개국 초기에는 너무도 완벽했던 제국이 쓰러지는 과정은 이후 중국 역대 왕조들에서 자주 보게 되는 전형적인 드라마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믿었던 양세법마저 약효를 잃자 정부에서는 어떻게든 재정을 늘리려는 일념에서 지극히 단기적인 처방을 내세웠다. 이를테면 소금의 전매를 강화하는 조치다. 소금 전매는 일..
정점에서 시작된 퇴조 태종이 ‘정관의 치’를 펼쳤다면, 현종의 치세는 ‘개원(開元, 현종의 연호)의 치’라고 부른다. 이 무렵 당은 정치도 안정되고, 경제ㆍ사회ㆍ문화ㆍ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어 전성기를 맞았다. 외척 정치를 직접 깨부수고 황제가 된 현종은 당연히 외척과 환관을 멀리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재위한 탓일까? 아니면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인륜을 저버리는 게 당 황실의 전통으로 굳어져버린 탓일까? 치세 40년 가까이 되자 현종은 며느리 양귀비에게 빠져 국사를 등한시하기 시작한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을 중용한 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반란을 부른다. 원래 양국충과 사이가 좋지 않던 절도사 안녹산(安祿山)은 양국충..
해프닝으로 끝난 복고주의 아무리 관료제가 발달했다 하더라도 황제의 권력과 권위는 천자라는 별칭(別稱)처럼 하늘에 이르는 것이었다【르네상스를 거치며 종교적ㆍ정신적 굴레를 벗고서야 비로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 체제인 절대왕정이 탄생하는 서양 역사와 달리, 이미 고대부터 합리적인 관료제와 절대적인 황권이 공존한 중국의 역사는 서구 역사가들에게 커다란 수수께끼다】.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은 아버지가 이룩한 성과를 이어받아 과업을 마무리했을 뿐 개인적으로는 병약하고 무기력한 인물이었다. 신생국의 중앙 권력이 미흡하다면 아무래도 문제다. 이때 고종의 총애를 받아 권력자로 나선 인물은 놀랍게도 무조(武曌)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었다. 후궁의 신분으로 실권을 장악한 그 여성은 바로 역사에 중국 최초의 여제(女帝..
중화 세계의 중심으로 수ㆍ당 시대는 진 한 시대와 비슷한 출발을 보였으나 성격은 크게 달랐다. 사실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국가의 성립은 수ㆍ당에 이르러서였다고 할 수 있다. 진ㆍ한 제국은 다분히 봉건적 질서에 의존한 반면, 수ㆍ당 제국은 처음으로 율령(律令)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율령이란 말하자면 오늘날의 헌법에 해당하는데, 수 제국 때 처음 도입되었다가 당 제국 때는 통치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다. 당 고조 이연(李淵)은 수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다(이연은 수 양제와 이종사촌 간으로 반란 세력도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3성 6부와 어사대(감찰 및 사법), 구시(九侍, 제사 주관), 감(監, 황실의 교육 담당) 등 중앙 행정 기구도 기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핵심 관..
3. 안방의 세계 제국 반복되는 역사 중국 역대 왕조는 망할 무렵에 이르면 거의 대부분 외적의 침입이나 농민의 반란과 같은 말기적 증상을 보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권력의 부패와 대토지 겸병 같은 사회적 모순이 수백 년씩 덧쌓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후한이 멸망한 때부터 6세기 말까지 수백 년간의 분열기에는 하나의 왕조가 오래 지배하지 못했으므로 그런 모순이 쌓일 겨를이 없었다. 그 덕분에 북조의 마지막 나라인 북주의 귀족 양견(楊堅, 541~604)이 새로운 통일 제국 수(隋)를 세우는 과정은 예상외로 순탄하게 진행된다. 그는 먼저 자기 딸을 태자비로 넣어 외척 권력을 손에 쥐고 나서 반대파를 제거한 뒤 제위를 양도받아 581년에 손쉽게 수 제국을 세웠다(5호16국이나 남북조시대의 여느 ..
문화의 르네상스 남조의 네 나라(송ㆍ제ㆍ양ㆍ진)는 평균 수명이 40여 년밖에 안 된다. 이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네 나라는 전부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군사력도 북조의 이민족 국가들보다 약했다. 그러나 중원의 호족과 지식인 들이 이민족 치하를 피해 대거 남하하면서 강남 지역의 귀족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처음으로 강남에 중원을 능가하는 화려한 문화가 꽃피우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의 오(吳)와 동진(東晋), 그리고 남조(南趙)의 네 나라를 합쳐 보통 6조(六朝)라고 부른다. 이 6조시대에 남중국에서 발달한 귀족 문화(6조 문화)는 동양의 르네상스로 불릴 만큼 다채롭고 화려했다(시대로보면 서양의 르네상스보다 1000년이나 앞서니까 오히려 르네상스를 ‘서양의 6조시대’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치와 ..
따로 또 같이 남중국의 주인이 송으로 귀착될 때까지 북중국도 심한 몸살을 앓았다. 중원에 진출한 북방 민족들은 유연(劉淵)이 한(漢)을 부활시킨 것을 필두로 전통적인 국호들을 총동원해 나라를 세웠다. 조(趙)ㆍ연(燕)ㆍ진(秦)ㆍ진(晋) 등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유명한 국호들이 부활했고, 심지어 삼대에 속하는 하(夏)까지 등장했다. 이 10여 개의 나라들을 ‘원조들’과 구분하기 위해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국호 앞에 전(前)ㆍ후(後)ㆍ동(東)ㆍ서(西)ㆍ남(南)ㆍ북(北) 등의 접두사를 붙였다(이를테면 後趙, 南燕, 前秦, 東晋 하는 식이다). 역사에는 통합과 분열의 시기가 교대하게 마련이지만 중국의 분열기는 특이한 데가 있다. 로마 제국 이후 분권화의 길을 걸은 유럽과 달리 중국 역사에서 분열은 늘 통일..
고대의 강남 개발 권력의 정통성이 취약했던 위는 삼국을 통일하고도 오래가지 못했다. 위는 비록 선양의 형식으로 한 제국의 뒤를 이었지만, 한 황실의 전통과 역사를 이어받은 게 아니라 실력으로 패권을 잡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더 힘센 자가 나올 경우 위나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강적 촉한을 물리치는 데 빛나는 공을 세운 호족 가문인 사마씨가 곧 그 실력자로 떠올랐다. 과연 그 가문의 사마염(司馬炎, 236~290)은 265년 위의 원제(元帝)에게서 다시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진(晋)을 세우고 초대 황제 무제(武帝)가 되었다. 춘추시대의 옛 제후국들 가운데도 서열 1위를 자랑하는 진이라는 국호를 재활용했다면 사마염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새 왕조의 최대 문제는 정통성의 확립이었다. 진 무제는 ..
2. 분열 속의 발전 『삼국지』의 막후에는 후한 말기 황건적(黃巾賊)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들고일어나 각 지방을 할거(割據)한 호족들의 세력 판도는 한동안 매우 혼란스러웠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분할과 정립의 구도가 고착되었다. ‘정립(鼎立)’의 ‘정(鼎)’이란 원래 세 발 달린 솥을 뜻하는 말이다. 당시의 세 발은 위(魏)ㆍ오(吳)ㆍ촉(蜀)의 삼국인데, 이들이 벌인 60여 년간의 전쟁이 소설 『삼국지』, 즉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진수(陳壽)가 편찬한 역사서 『삼국지』와는 다른 책이지만 다루는 시대는 같다】의 소재가 되었다.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하고 세력 판도에서도 선두를 달린 주자는 후한의 무관 출신인 조조(曹操, 155~220)가 세운 북중국의 위나라였다. 조조의 가문은 후한의 정치를 ..
또다시 분열의 시대로 후한은 처음부터 호족 연합 정권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 역시 황족이긴 했으나 원래부터 황위 계승권자인 게 아니라 지방 호족 출신이었다. 이처럼 후한 시대에는 한 황실의 일족이나 옛 전국시대 명문가의 자손, 전직 고위 관리, 상업으로 부를 쌓은 부호 등이 지방 호족으로 각지에 군림하고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토지를 소유했다는 것이다. 호족은 전한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들이 성장할 만한 여건이 좋았다. 철제 농구가 전면적으로 사용되고 관개시설이 확대됨에 따라 농업 생산력이 크게 발달하고 황무지도 많이 개간되었다. 게다가 비교적 평화로운 통일 제국 시대가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계급 분화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대토지 소유자가 대거 출현했..
외척과 환관의 악순환 후한은 시기적으로만 전한과 구분될 뿐 권력 구조와 각종 제도 등은 전한 시대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고 답습했다. 이는 곧 전한시대의 문제점들이 후한에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왕망(王莽) 같은 모리배(謀利輩)조차 개혁을 구상했을 정도라면 다시 복귀한 제국 정부가 당장 개혁에 착수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과제는 제국을 재건하고 왕망 시대의 후유증을 치유한 후한의 첫 황제인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 정권의 몫이었다. 전한을 멸망시킨 외척 정치의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무엇보다 새로운 관료 정치를 구축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를 위한 무기는 역시 유학이었다. 후한 초기의 황제들이 유학을 적극 장려한 덕분에 국가의 제도적 뒷받침 속에서 유학의 여러 학파가 생겨나고 토론이 활성화..
화려한 겉과 곪아가는 속 이렇듯 강력하고 대내외적으로 안정된 기틀을 갖추었다면 한 제국은 오랫동안 존속하고 발전해야 마땅할 것이다. 실상 한은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존속한 나라다. 그러나 한은 무제의 지배 시절이 전성기인 동시에 퇴조의 시작이었다. 막강한 제국이 왜 일찌감치 퇴조기에 접어들었을까? 초기의 권력기관은 앞에서 말한 3공 가운데 우두머리인 승상이 관할하는 승상부(丞相府)였다. 그러나 무제는 전형적인 전제군주인데다 대외 정복 사업이라는 국가의 생존이 달린 명제가 시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승상부는 위축되었고 모든 것이 황제의 전권에 맡겨졌다. 하지만 거대한 통일 제국을 황제 혼자서 일일이 관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제는 실무를 담당할 행정 기구를 측근에 두..
흉노 정벌의 도미노 한 무제는 내치에서 뒤늦게 국가 기틀을 만드느라 애썼지만, 정작 그의 야심은 바깥에 있었다. 바깥이 안정되지 않으면 안이 튼튼할 수 없고, 바깥을 안정시키려면 정복과 복속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대내적으로 분주한 상황에서도 대외 정복 사업을 서둘렀다.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건국 이후 한을 괴롭혀온 흉노와의 대결이다. 무제는 고조 때부터 이어오던 화친 정책을 버리고 강공으로 나아갔다. 그것도 단순히 방어에 치중하는 게 아니라 멀리 고비 사막을 넘어 흉노의 근거지인 몽골 초원까지 공략하는 것이다. 정복을 지휘한 인물은 위청(衛靑)과 그의 조카인 곽거병(霍去病)이었다. 흉노 정벌의 부산물로 무제는 바라던 것 이상의 큰 소득을 얻었다. 바로 서역 원정이었다. 그때까지 무제는 서역이..
한 무제의 두 번째 건국 전국시대를 거치며 초(楚)ㆍ오(吳)ㆍ월(越) 등 남중국의 이민족들도 중화 질서 속으로 편입되었고, 때마침 통일 제국이 들어서면서 중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 세계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중원과 북중국에서 보기에는 오와 월보다 지리적으로 멀지 않은 북방 민족들은 여전히 오랑캐로 배척을 받았다. 왜 그랬을까? 물론 그들의 강성함을 두려워한 중원 세력이 일찌감치 그들을 배척한 탓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북방 민족들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국시대 남중국 민족들은 중원의 질서를 동경하고 거기에 속하고자 애썼지만, 북방 민족들은 유목민족 특유의 생활 방식과 자주적이고 강인한 기질로 인해서 남에게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중원의 선진 문화를 높이 평가했지만, 언제나 ..
촌놈이 세운 대제국 반란은 농민들이 먼저 일으키고, 지식인들이 뒤를 잇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죽은 지 불과 1년 만인 기원전 209년에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주동자인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하급 장교 출신이었다. 처음에는 이들이 징용에 끌려가던 농민 병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내 일반 농민도 가세하면서 삽시간에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반란군은 황허 이남의 수십 개 성을 함락하고 1년 가까이 맹위를 떨쳤다. 내친 김에 진의 타도를 목표로 삼은 진승은 장초(張楚)라는 국호까지 정하고 자신을 왕으로 자칭했다(국호에 초가 붙은 것은 옛날의 강국 초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이듬해 반란은 간신히 진압되었으나 이 사건은 진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1. 중화의 축 죽 쒀서 개 준 통일 기원전 221년 최초로 드넓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나서 진(秦)의 왕인 정(政)이 최초로 한 일은 자신의 호칭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중국 대륙이 하나의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으니 과거 제후들의 호칭인 왕(王)이나 공(公)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만든 새 호칭은 바로 황제(皇帝)였다. 그는 최초의 황제가 되므로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고 불렀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보통 그를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른다. 또한 사극에서 흔히 보듯이, 왕이 자신을 지칭할 때 쓰는 ‘짐(朕)’이라는 호칭도 진시황이 처음 만들었다. 진 제국은 존주양이(尊周攘夷)를 이념으로 하는 전통의 제후국 출신이 아니었다. 서쪽 변방에서 오로지 자체의 힘만으로..
2부 자람 나라와 민족의 꼴이 제법 갖추어지면서 중국, 인도, 일본은 독자적 발전의 시대를 맞는다. 제국 체제로 접어든 중국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중심이자 국제 질서의 핵으로 자리 잡는다. 중국과 달리 인도는 내내 분권화된 역사를 전개하다가 결국에는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는다. 일본은 대륙과의 교류를 끊고 치열한 내전의 역사로 접어드는데, 그 결과 무사 정권이 탄생하게 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왜에서 일본으로 불교를 일본에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쇼토쿠 태자는 만년에 들어 현실 정치에 흥미를 잃고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다가 622년에 세상을 떠났다. 또한 태자와 더불어 강력한 소가씨의 수장으로 군림한 소가 우마코도 4년 뒤에 사망했다. 이로써 약 30년 간 장기 집권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 고대사의 두 기둥은 사라졌다.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군림하는 법이다. 최고 세력가인 소가 가문은 제 세상을 만난 듯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때마침 대흉작과 대기근이 들어 사회 전체가 매우 어지러워졌다. 사회 불안은 사실 단기적인 흉년만이 원인인 게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왕족과 귀족, 세력가들이 각자 영지를 늘리고 세력을 키우기 위해 백성들을 수탈하기만 하고 재생산을 도모하지 않았던 것..
빛은 서방에서 조몬 문화처럼 채집과 어업에 의존하는 사회는 인구 이동이 잦기 때문에 온전한 정착 생활이 이루어질 수 없다. 야요이 문화의 도입으로 농경이 지배적인 생활 형태가 되면서 비로소 일본에서는 곳곳에 씨족사회들이 생겨났다. 일본은 가장 큰 섬인 혼슈만 해도 한반도 전체보다 조금 클 정도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인구 밀도는 적지 않았다. 이 인구가 씨족사회로 편제되자 이내 씨족들 간에 격심한 경쟁과 전쟁이 잇달았다. 제법 큰 규모의 씨족사회들은 이미 이 무렵부터 중국과 직접 교섭을 시작했다. 200~300년에 걸친 전란 끝에 드디어 강력한 씨족국가가 탄생했다. 당시 일본은 문자도 없었고 직접 역사를 기록하지도 못했으므로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三國志)』의 「위지(魏志)」(이 문헌은 한반도의 상고사에 관..
3장 일본이 있기까지 금속의 빛을 던져준 야요이 문화 우리나라 역사를 처음 배울 때 신석기시대의 유물로 빗살무늬토기라는 것이 나온다. 일본의 신석기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줄무늬토기가 있었다. 빗살무늬는 한자어로 즐문(櫛文)이지만 줄무늬는 새끼줄로 만들기 때문에 승문(繩文)이라고 하는데, 일본식 발음으로는 조몬이다. 그래서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시작된 일본의 신석기 문화를 조몬 문화라고 부른다. 앞서 중국이나 인도의 역사에서는 생략한 신석기시대를 일본의 역사에서 소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중국은 문명의 발상(황허 문명)에서부터 씨족국가, 고대국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자생적이고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또 인도는 인더스 문명이라는 발달한 자생적인 문명이 있었으나 아리아인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이후에는 예전과 ..
정치적 공백이 이룬 통일 카스트 제도가 처음 성립할 때와 같은 강력한 힘을 이후에도 내내 발휘했다면, 인도에는 고대국가의 성립이 훨씬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신분 질서가 워낙 강한 탓에 국가라는 질서의 중심이 존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아인의 지배가 계속되면서 카스트의 힘은 점차 약해졌다. 처음에는 아리아인과 인도 원주민이 외양에서부터 현저한 차이가 나서 카스트의 구분도 쉬웠으나, 나중에는 서로 융화되면서 인종적 구별이 사라져 직업으로 카스트를 구분해야 했다(코가 뾰족하고 눈동자와 피부색이 검은 오늘날의 인도인들은 수천 년에 걸쳐 아리아인과 원주민이 혼혈을 이룬 결과다). 카스트 제도가 약화되면서 그에 반비례해 각 도시국가에서는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종의 원시적 공화정과 같..
자이나교(Jainism) 자이나교도 힌두교나 불교처럼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답게 윤회와 업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자이나교의 교리는 힌두교보다 불교와 유사한 측면이 많았다. 우선 『베다』 성전의 권위를 부인한 데다 종교 의식을 거부하고 카스트 제도를 배척했으므로, 자이나교 역시 불교처럼 힌두교 질서에 반발하는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불교에서처럼 금욕을 강조하고 불살생의 계율을 중시했다. 그러나 자이나교는 그 점에서 불교보다 한층 극단적인 성격을 지녔다. 자이나교의 5대 계율은 살생, 거짓말, 도둑질, 음행, 소유의 다섯 가지를 금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살생을 하지 말라는 계율이었는데, 그 대상으로 인간과 동식물은 물론 바람이나 물, 흙, 불까지도 포함시켰다. 자연의 모든 ..
불교(佛敎) 불교를 창시한 석가(釋迦, 본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전 6세기 중반 지금의 인도와 네팔 국경 언저리에 있었던 카필라의 왕자로 태어났다. 당시는 아직 영토 국가의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고만고만한 도시국가들이 많았는데, 카필라도 그중 하나였다. 싯다르타는 열여섯 살에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낳고 평온하게 살다가 스물아홉 살에 갑자기 출가(出家)를 결심한다. 당시 출가는 널리 행해지던 사회적 관습이었으므로 출가 자체로 싯다르타의 사람됨을 평가할 수는 없다. 이후 그는 6년여 동안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현인들을 만나고 온갖 고행을 하지만, 애초부터 그가 품고 있던 생로병사의 문제에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고행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하고 명상을 통해 진리를 구하고자 ..
인도와 종교 인도하면 언뜻 생각나는 것이 종교다. 석가모니와 불교가 탄생한 나라이기도 하지만 오늘날에도 종교를 떼어놓고는 인도를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의 인도에서 종교를 연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불교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현재 인도는 힌두교(브라만교를 모태로 하고 있다) 국가이기 때문이다(힌두와 인도는 같은 어원이니, 힌두교는 결국 인도의 전통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인도 서쪽의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과 한 몸이었지만 20세기 중반에 종교 문제로 분리되었다. 또 인도 동쪽의 방글라데시도 이슬람 국가다. 그래서 현재 인도 아대륙 주변에서 불교 국가로 남아 있는 나라는 스리랑카뿐이다. 오히려 타이나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나라들이 불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지만,..
2장 인도가 있기까지 굴러온 돌의 승리 인도의 서쪽 경계 부근을 흐르는 인더스 강 유역은 유명한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다.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마셜은 인더스 강 일대의 모헨조다로에서 대규모 작업을 벌인 끝에 인류 초기 문명의 유적을 찾아냈다. 사막 한가운데 있었던 덕분에 비교적 잘 보존된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 모헨조다로 유적은 바둑판 모양의 도시 구획에다 벽돌로 쌓은 주택, 도로와 하수도 시설, 커다란 목욕탕, 공회당 등 고대 로마에 못지않은 수준의 문명을 보여주었다. 로마에 비해 3000년이나 앞선 기원전 3000년 무렵에 이미 인도에는 이런 선진 문명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도의 역사는 인더스 문명 이후 1000여 년 동안 후대에 알려지지 않았다. 인도의 역사가 다시 ‘진행’되는 것은 기원..
도가 사상(道家 思想) 도가 사상을 창시한 노자(老子)는 공자(孔子)보다 한 세대쯤 위의 인물이었으나 실존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 공자와 만났다는 기록도 전하기는 하지만 『도덕경(道德經)』이라는 짧은 책 한 권 이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가 사상이 발달한 것은 노자의 시대보다 수백 년 뒤인 전국시대 중기 장자(莊子)에 의해서였다. 도가 사상은 제자백가 가운데 가장 철학적인 냄새가 강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유(有)다. 유는 경험 세계에 존재하며, 누구나 그 존재를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유를 만드는 것은 무(無)다. 유는 무에서 생성되어 운동하다가 다시 그 근원인 무로 되돌아간다. 이 우주 만물의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 과정을 관장하는 것이 곧 도(道)다. 그렇..
법가 사상(法家 思想) 법가 사상은 제자백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전국시대 중기에 현실 정치의 경험을 토대로 형성된 사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법의 개념은 춘추시대부터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었다. 춘추시대 정나라에서 제정한 법은 중국 최초의 성문법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진(晋)에서는 형법 서적을 편찬했다고 전한다. 법가는 원래 술(術)을 중시하는 파, 세(勢)를 중시하는 파, 법(法)을 중시하는 파로 나뉘었는데, 이 세 유파를 전국시대 말기에 한비자(韓非子, 기원전 280년경~기원전 233)가 종합해 완성했다. 법가의 기본적인 정신은 성악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람은 본래 도덕을 내재하고 있지 않으므로 법의 다스림을 필요로 한다. 군주가 백성을 지배하는 질서는 유가..
묵가 사상(墨家 思想) 묵가는 전국시대 초기에 묵적(墨翟, 기원전 480년경~기원전 390년경)이 주창했다(묵적은 현인들을 ‘子’로 존칭하는 관습에 따라 墨子라고도 부른다). 묵가 사상가들은 주로 무기나 공구의 제작에 종사한 수공업자 집단이었다. 그래서 유가 사상이 예에 기초한 엄격한 신분 질서를 주장한 데 비해 묵가는 훨씬 평민적인 사상을 전개했으며, 이 점에서 유가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묵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사랑이다. 묵적은 이기적인 사랑을 뜻하는 ‘차별애(差別愛)’를 버리고 화해적인 사랑인 ‘겸애(兼愛)’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시대에 만연한 수많은 전쟁은 모두 자기만의 이익[自利]을 취하기 위한 차별애에서 비롯되었다. 반면 겸애는 상호적인 이익[交相利]을 도모한다. 따라서 겸애를 ..
유가 사상(儒家 思想) 유가를 창시한 공자(孔子)는 노나라 태생이었다. 춘추시대 말기에 유서 깊은 제후국에서 성장한 만큼 공자는 전통적 가치와 이념을 자연스레 몸에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유가 사상에는 과거에 대한 향수, 복고주의의 냄새가 풍긴다. 태평성대의 대명사인 요순시대라는 말을 만들어 쓴 사람도 공자다. 그러나 그가 주로 염두에 둔 ‘과거’는 그의 시대보다도 1000년이나 더 전인 머나먼 요순시대가 아니라 그 바로 전대인 주나라, 즉 서주(西周) 시대였다. 하지만 공자가 오로지 과거에 대한 동경만 품고 있었다면 학문의 일가를 구축하지는 못했을 테고 후대에 위대한 사상가로 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서주(西周) 시대의 전통적 가치는 주나라의 건국이념이라 할 예(禮)의 개념으로 집약된다. 이 예의..
동양 사상의 뿌리 분열기라고 해서 내내 전쟁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는 수많은 전쟁이 전개되면서 아울러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발전도 이루어졌다.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농업혁명이다. 서주(西周) 시대까지 답보 상태에 있었던 농업 생산력은 춘추전국시대에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소를 경작에 이용하고 철제 농구를 사용하게 된 덕분이었다. 이제 농민들은 집단 농경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가족 단위로 단독 농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서주 말기부터 씨족 공동체가 해체되기 시작하자 단독 농경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전쟁이 많았던 만큼 전쟁과 관련된 산업도 크게 발달했다. 사실 당장의 필요 때문에 살상용 무기를 개선하려는 각국의 노력이 없었다면 중국의 철기..
최초의 통일을 향해 춘추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국시대의 막이 오른 계기는 남방의 초(楚)와 대립하던 전통의 강국인 진(晉)이 와해된 것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종법 봉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혈연관계가 희박해져 붕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있었다. 더욱이 진은 일찍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주 왕실의 혈연관계를 대폭 제거했으므로 주 왕실과는 다른 성의 귀족들이 세력 가문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다 결국 내분을 빚었다. 기원전 5세기 중반 진(晋)은 한(韓)ㆍ위(魏)ㆍ조(趙), 세 성씨의 세력가들에게 분할되었다. 이로써 가장 강대한 제후국이던 진은 사라지고 한ㆍ위ㆍ조의 3국이 생겨났다. 춘추시대에 춘추 5패가 있었다면 전국시대를 주도한 나라들은 전국 7웅이라고 부른다. 7웅이란 진이..
기나긴 분열의 시대 주나라의 봉건제는 일찍 도입되었으나 일순간에 완비된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봉건제는 주나라의 건국에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발달하고 숙성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나라식의 종법 봉건제는 처음부터 문제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다. 혈연에 바탕을 둔 관계는 가장 끈끈하지만 생명력이 짧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혈연관계란 세대교체가 거듭될수록 아무래도 엷어지게 마련이니까. 주나라가 성장과 발전을 지속하던 전성기까지는 종법 봉건제가 별 문제 없이 기능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혈연관계는 희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강역(疆域)이 팽창하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혈연은 힘을 잃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일종의 계약에 바탕을 둔 제도로 바뀌면서 종법 질서를 발전적으로 ..
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 하나라와 은나라는 말기의 현상이 매우 비슷하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은 말희(妹喜)라는 미녀에게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고,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달기(妲己)라는 미녀에게 탐닉한 폭군이었다. 둘 다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이루었다는 주지육림(酒池內林)이라는 고사성어를 낳은 인물들이다. 수백 년이나 존속한 두 왕조가 결국 한낱 여인 때문에 망했다는 것은 공교로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새 왕조가 옛 왕조를 무너뜨리고 나서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쿠데타의 주역들이 지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전 나라의 마지막 왕을 폭군으로 묘사하는 것은 사실 중국 역대 왕조의 특기이기도 하다. 폭군인 걸왕(桀王)을 무너뜨리고 은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은 당연히 걸왕과..
구름 속의 왕조를 치수(治水) 사업의 공적으로 선양을 통해 순임금의 뒤를 이은 우임금에 이르러 중국은 역사시대로 접어든다.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중국의 첫 고대국가는 하(夏)나라다. 하나라는 기원전 약 23세기 말부터 기원전 18세기 중반까지 500년 가까이 존재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기록으로는 전하지만 그 기록을 뒷받침할 만한 ‘물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공자(孔子)가 편찬한 『시경(詩經)』에 등장하지만, 공자 역시 자신의 시대보다 1000년 이상이나 앞선 옛날의 역사를 정확히 기록할 수는 없었을 터이다. 공자가 상상만으로 책을 쓰지는 않았을 테니 그의 시대까지는 전설이나 기록이 전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역사 자료라고 할 만한 것은 현전하지 않는다. 하나라는 황허 중류, 지금의 뤄양(낙..
1장 중국이 있기까지 신화와 역사의 경계 나는 바오밥 나무란 교회만큼이나 큰 나무라는 것을 어린 왕자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영리하게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오밥 나무도 크기 전에는 조그마할 거 아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아무리 큰 나라라도 처음에 생길 때는 아주 작고 평범하게 마련이다. 고만고만한 여러 마을이 뒤섞여 살아가다가 어느 마을에서 약간 인구가 늘고 기름기가 돈다 싶으면 느닷없이 자기가 이 지역의 주인입네 하고 큰소리치고 나서면서 이웃 마을들을 차례로 복속시킨다. 그런 식으로 어느 정도 나라의 꼴이 갖추어지면 이내 기원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에는 전해지는 이야기나 약간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사실적 근거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기원 이야기의 기본 ..
1부 태어남 황허 문명을 계승한 중원 문명은 발상지를 중심으로 점차 문명의 빛을 밝힌다. 주나라는 중국 왕조의 기틀을 만들고 춘추전국시대에는 중국 사상의 토대가 놓인다. 종교의 나라답게 인도의 역사는 처음부터 종교와 밀접하게 맞물린다. 일본은 대륙에서 문명을 전해받지만 중국과 다른 ‘작은 천하’를 이루면서 특유의 고립된 역사를 전개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프롤로그: 동양의 태어남과 자람, 그리고 뒤섞임 동양이라는 말 보통 해가 뜨는 방향을 동쪽이라고 말하지만, 지구는 둥그니까 어디가 동쪽이라고 못 박을 수는 없다. 동양이라는 명칭은 사실 유럽인의 시각에서 나왔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고대와 중세의 유럽인들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이 지구의 전부라고 여겼다. 그나마도 그들이 아는 아시아는 소아시아와 인도에 불과했고, 아프리카는 사하라 이북에 국한되었다. 아프리카는 유럽의 남쪽에 있으므로 동서 방향과는 무관하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서쪽에 있다고 믿었고, 유럽에서 동쪽으로 멀리 뻗어 있는 아시아를 동양(East)이라고 불렀다. 당시 유럽인들은 아직 동방의 끝까지 와본 적이 없었으므로 주로 지금의 서아시아 지역을 동..
등용문(登龍門) 河津一名龍門, 水險不通, 魚鼈之屬, 莫能上. 江海大魚, 薄集龍門下數千, 不得上, 上則爲龍也. 『후한서(後漢書)』 「이응전(李應傳)」 해석 河津一名龍門, 水險不通, 황하(黃河) 상류의 하진(河津)을 일명 용문이라 하는데 물길이 험해 통하질 않으니 魚鼈之屬, 莫能上. 물고기와 자라의 무리들이 오를 수가 없다. 江海大魚, 薄集龍門下數千, 양자강과 바다의 큰 물고기들이 용문의 아래에 가까이 모인 것이 수천 마리인데 不得上, 上則爲龍也. 『후한서(後漢書)』 「이응전(李應傳)」 오를 수 없지만 오른다면 용이 된다. 인용 고사성어
현인을 모시기 위한 주공의 고군분투 주공악발(周公握髮) 『史記』曰. 武王崩, 周公相成王. 使其子伯禽, 代就封於魯, 戒之曰: “我文王之子, 武王之弟, 成王之叔父, 我於天下亦不賤矣. 然我一沐三握髮, 一飯三吐哺, 起以待士, 猶恐失天下之賢人. 子之魯, 愼無以國驕人.” 해석 『史記』曰. 『사기』에 실린 내용이다. 武王崩, 周公相成王. 무왕이 붕어(崩御)하시자 주공이 성왕을 도왔다. 而使其子伯禽, 代就封於魯, 戒之曰: 아들 백금에게 대신하여 노나라의 봉지(封地)로 나가게 하며 그를 경계했다. “我文王之子, 武王之弟, “나는 문왕의 자식이고 무왕의 아우이며 成王之叔父, 我於天下亦不賤矣. 성왕의 숙부로 나는 천하에 또한 천하지 않다. 然我一沐三握髮, 그러나 나는 한 번 머리 감을 때 머리카락을 세 번 쥐어야 했고 一飯..
순망치한(脣亡齒寒) 한 나라가 망하면 이웃나라도 망하게 된다 晉侯復假道於虞, 以伐虢. 宮之奇諫曰: “虢, 虞之表也, 虢亡, 虞必從之. 晉不可啓, 寇不可翫. 一之謂甚, 其可再乎? 諺所謂輔車相依, 脣亡齒寒者. 其虞ㆍ虢之謂也.” 公曰: “晉, 吾宗也, 豈害我哉?” … (중략) … 弗聽, 許晉使. 宮之奇以其族行曰: “虞不臘. 在此行也, 晉不更擧矣.” … (중략) … 冬十二月丙子朔, 晉滅虢, 虢公醜奔京師. 師還, 館于虞, 遂襲虞, 滅之.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5년 해석 晉侯復假道於虞, 以伐虢. 진후인 헌공(獻公)이 우나라에 길을 빌려 괵나라를 치려 했다. 宮之奇諫曰: “虢, 虞之表也, 궁지기가 간했다. “괵나라는 우나라의 겉면이니 虢亡, 虞必從之.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반드시 따라 망할 ..
배수지진(背水之陣) 목숨을 걸고 도전하다 諸將問信曰: “兵法, 右倍山陵, 前左水澤, 今者將軍令臣等, 反背水陣以勝, 何也?” 信曰: “此在兵法, 顧諸君不察耳, 『兵法』不曰: ‘陷之死地而後生, 置之亡地而後存乎.’ 且信非得素拊循士大夫也, 此所謂驅市人而戰. 予之生地, 皆走, 寧得而用之乎.” 諸將皆服. 『通鑑節要』 「漢紀」 高祖 1년 해석 諸將問信曰: 여러 장수들이 한신에게 물었다. “兵法, 右倍山陵, 前左水澤, “병법에는 산과 언덕을 오른쪽과 등에 지고 물과 연못을 앞과 왼쪽에 둔다고 했습니다. 今者將軍令臣等, 反背水陣以勝, 何也?” 지금 장군은 신하들에게 도리어 물을 등지고 진을 치게 했지만 이건 건 어째서입니까?” 信曰: “此在兵法, 顧諸君不察耳, 한신이 말했다. “이것은 병법에 있는 것인데 다만 그대들이 ..
구상유취(口尙乳臭) 유치한 사람 漢王, 使酈食其, 緩頰往說魏王豹, 且召之, 豹不聽. 於是, 漢王以韓信ㆍ灌嬰ㆍ曹參, 俱擊魏, 漢王問食其, “魏大將誰也?” 對曰: “柏直.” 王曰: “是口尙乳臭, 安能當韓信, 騎將誰也?” 曰: “馮敬.” 曰: “是秦將馮無擇子也, 雖賢, 不能當灌嬰. 步卒將誰也?” 曰: “項它.” 曰: “不能當曹參, 吾無患矣.” 『통감절요(通鑑節要)』 해석 漢王, 使酈食其, 緩頰往說魏王豹, 한왕이 역이기에게 비유를 써가며 위왕 표에게 가서 설득하게 하고 且召之, 豹不聽. 또 그를 불렀지만 표는 듣질 않았다. 於是, 漢王以韓信ㆍ灌嬰ㆍ曹參, 俱擊魏, 이에 한나라왕은 한신ㆍ관영ㆍ조참에게 함께 위나라를 치게 했고 漢王問食其, “魏大將誰也?” 한나라 왕이 역이기에게 “위나라 대장군은 누구인가?”라고 묻자..
원교근공(遠交近攻) 먼 나라와 친하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하는 외교정책 魏人范雎亡入秦, 說秦王曰: “以秦國之大, 士卒之勇, 以治諸侯, 譬如走韓廬而搏蹇兎也, 而閉關十五年, 不敢窺兵於山東者, 是穰侯爲秦謀不忠, 而大王之計, 亦有所失也.” 王跽曰: “願聞失計.” 雎曰: “夫穰侯越韓ㆍ魏而攻齊, 非計也. 今王不如遠交而近攻, 得寸, 則王之寸也; 得尺, 則王之尺也. 今夫韓ㆍ魏, 中國之處而天下之樞也. 王若欲霸, 必親中國, 以爲天下樞, 以威楚ㆍ趙. 楚ㆍ趙皆附, 齊必懼矣, 齊附, 則韓ㆍ魏因可虜也.” 王曰: “善! 乃以范雎爲客卿, 與謀國事.” 『통감절요(通鑑節要)』 「주기(周紀)」 난왕(赧王) 58년 해석 魏人范雎亡入秦, 說秦王曰: 위나라 사람인 범저가 도망쳐 진나라에 들어가 진나라왕에게 유세했다. “以秦國之大, 士卒之勇, 以..
양상군자(梁上君子) 가난하기에 나쁜 짓을 하다 陳寔, 字仲弓, 潁川許人也. … (중략) … 寔在鄕閭, 平心率物. 其有爭訟, 輒求判正, 曉譬曲直, 退無怨者. 至乃歎曰: “寧爲刑罰所加, 不爲陳君所短.” 時歲荒民儉. 有盜夜入其室, 止於梁上, 寔陰見, 乃起自整拂, 呼命子孫, 正色訓之曰: “夫人不可不自勉. 不善之人, 未必本惡, 習以性成, 遂至於此, 梁上君子者是矣.” 盜大驚, 自投於地, 稽顙歸罪. 寔徐譬之曰: “視君狀貌, 不似惡人. 宜深剋己反善, 然此當由貧困.” 令遺絹二匹, 自是一縣無復盜竊. 『후한서(後漢書)』 「진식열전(陳寔列傳)」 해석 陳寔, 字仲弓, 潁川許人也. 진식의 자는 중궁이고 영천 허 사람이다. … (중략) … 寔在鄕閭, 平心率物. 진식이 고향이 있을 적에 마음에 평상심을 유지했고 사물에 모범이 되었다..
백년하청(百年河淸) 전혀 이루어질 희망이 없다 冬, 楚子囊伐鄭, 討其侵蔡也. 子駟ㆍ子國ㆍ子耳, 欲從楚, 子孔ㆍ子蟜ㆍ子展, 欲待晉. 子駟曰: “周詩有之曰: ‘俟河之淸, 人壽幾何. 兆云詢多, 職競作羅.’ 謀之多族, 民之多違, 事滋無成. 民急矣, 姑從楚, 以紓吾民, 晉師至, 吾又從之. 敬共幣帛, 以待來者, 小國之道也. 犧牲玉帛, 待於二竟, 以待彊者, 而庇民焉. 寇不爲害, 民不罷病, 不亦可乎.”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8년 해석 冬, 楚子囊伐鄭, 겨울에 초나라 자낭이 정나라를 친 것은 討其侵蔡也. 정나라가 채나라를 침범한 것에 대한 토벌이었다. 子駟ㆍ子國ㆍ子耳, 欲從楚, 자사ㆍ자국ㆍ자이는 초나라를 따르려 했고 子孔ㆍ子蟜ㆍ子展, 欲待晉. 자공ㆍ자교ㆍ자전은 진나라를 기다리려 했다. 子駟曰: “周詩有..
자신의 주제를 넘어서 베푸는 인정 송양지인(宋襄之仁) 冬十一月己巳朔, 宋公及楚人戰于泓. 宋人旣成列, 楚人未旣濟. 司馬曰: “彼衆我寡, 及其未旣濟也, 請擊之.” 公曰: “不可.” 旣濟而未成列, 又以告, 公曰: “未可.” 旣陳而後擊之, 宋師敗績, 公傷股, 門官殲焉. 國人皆咎公, 公曰: “君子不重傷, 不禽二毛. 古之爲軍也, 不以阻隘也. 寡人雖亡國之餘, 不鼓不成列.”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22년 해석 冬十一月己巳朔, 겨울 11월 기사 초하루에 宋公及楚人戰于泓. 송양공(宋襄公)이 초나라 사람들과 홍수(泓水)에서 싸웠다. 宋人旣成列, 楚人未旣濟. 초나라 사람들이 이미 대열을 정비했지만 초나라 사람은 아직 건너질 않았다. 司馬曰: “彼衆我寡, 及其未旣濟也, 사마가 말했다. “저 군사들은 많고 우리들..
갈피가 잡히지 않아 혼란스럽다 오리무중(五里霧中) 張楷字公超, 通『嚴氏春秋』ㆍ『古文尙書』, 門徒常百人. 性好道術, 能作五里霧. 時關西人裴優, 亦能爲三里霧, 自以不如楷, 從學之, 楷避不肯見. 桓帝卽位, 優遂行霧作賊, 事覺被考, 引楷, 言從學術. 楷坐繫廷尉詔獄, 積二年, 恒諷誦經籍, 作『尙書』注. 後以事無驗, 見原還家. 建和三年, 下詔, 安車備禮聘之, 辭以篤疾, 不行. 年七十, 終於家. 『후한서(後漢書)』 「장해열전(張楷列傳)」 해석 張楷字公超, 通『嚴氏春秋』ㆍ『古文尙書』, 장해의 자는 공초인데 『엄씨춘추』와 『고문상서』를 통달하여 門徒常百人. 문하생이 항상 100명이나 됐다. 性好道術, 能作五里霧. 성품이 도술을 좋아해 5리의 안개를 만들 수 있었다. 時關西人裴優, 亦能爲三里霧, 이때에 관서사람 배우는 또..
초나라의 애국시인 굴원 屈原, 名平, 楚之同姓. 爲懷王左徒, 博聞强志, 明於治亂. 嫺於辭令, 王甚任之. 上官大夫與之同列, 爭寵而心害其能, 因讒之, 王怒而疏平. 後秦昭王欲與懷王會, 平曰: “秦虎狼之國, 不如無行.” 懷王稚子子蘭勸王行, 王死於秦. 長子頃襄王立, 以子蘭爲令尹. 子蘭使上官大夫, 短原於王, 王怒而遷之. 原至江濱, 被髮行吟澤畔, 顔色憔悴, 形容枯槁. 漁父問曰: “子非三閭大夫歟, 何故至此?” 原曰: “擧世混濁, 而我獨淸; 衆人皆醉, 而我獨醒, 是以見放.” 漁父曰: “夫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擧世混濁, 何不隨其流而揚其波; 衆人皆醉, 何不餔其糟而啜其醨? 何故懷瑾握瑜, 而自令見放爲.” 原曰: “吾聞之,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誰能以身之察察 受物之汶汶者乎? 寧赴湘流, 而葬乎江魚腹中耳, 又安能以皓..
완벽(完璧) 결점이 없다 趙王得楚和氏璧, 秦昭王欲之, 請易以十五城. 趙王以問藺相如, 對曰: “秦以城求璧, 而王不許, 曲在我矣, 我與之璧, 而秦不與我城, 則曲在秦. 臣願奉璧而往. 使秦城不入, 請完璧而歸.” 相如至秦, 秦王無意償趙城. 相如乃紿秦王, 復取璧, 遣使者懷歸趙. 而以身待命於秦, 秦王賢而弗誅, 禮而歸之. 趙王以相如爲上大夫. 『통감절요(通鑑節要)』 「주기(周紀)」 난왕(赧王) 32년 해석 趙王得楚和氏璧, 조나라 왕이 초나라 화씨의 구슬을 얻었는데 秦昭王欲之, 請易以十五城. 진소왕이 그걸 욕심내어 15개 성으로 바꾸길 청하였다. 趙王以問藺相如, 對曰: 조나라 왕이 인상여에게 물으니 인상여가 대답했다. “秦以城求璧, 而王不許, “진나라가 성으로 구슬을 구하려 하는데 왕이 허락지 않으면 曲在我矣, 잘못은 저..
스스로를 추천하여 실력발휘한 모수 秦以王陵, 攻邯鄲. 武安君曰: “邯鄲實, 未易攻也, 且諸侯之救, 日至, 破秦軍必矣.” 辭疾不行. 乃以王齕, 代王陵. 趙王, 使平原君, 求救於楚, 平原君, 約, 其門下食客文武備具者二十人, 與之俱, 得十九人, 餘無可取者. 毛遂自薦於平原君, 平原君曰: “夫賢士之處世也, 譬若錐之處囊中, 其末立見. 今先生處勝之門下三年於此矣, 勝未有所聞, 是先生無所有也.” 毛遂曰: “臣乃今日, 請處囊中爾. 使遂蚤得處囊中, 乃穎脫而出, 非特其末見而已.” 平原君乃與之俱, 十九人相與目笑之. 平原君至楚, 與楚王言合從之利害, 日出而言之, 日中不決. 毛遂按劒歷階而上, 謂平原君曰: “從之利害, 兩言而決爾. 今日出而言, 日中不決, 何也?” 楚王怒叱曰: “胡不下? 吾乃與而君言, 汝何爲者也?” 遂按劒而前曰: “王之..
조창의 모함으로 옥사 당한 정숭 尙書令趙昌佞諂, 素害崇, 知其見疏, 因奏. “崇與宗族通, 疑有姦, 請治.” 上責崇曰: “君門如市人, 何以欲禁切主上?” 崇對曰: “臣門如市, 而臣心如水, 願得考覆.” 上怒, 下崇獄, 窮治, 死獄中. 『자치통감(資治通鑑)』 해석 尙書令趙昌佞諂, 상서령 조창이 아첨하길 좋아해 素害崇, 知其見疏, 평소에 정숭을 해치려 했는데 황상과 사이가 멀어졌음을 보아 알고 因奏. 그로 인해 주청했다. “崇與宗族通, 疑有姦, “정숭이 친척들과 내통하여 간사한 일을 꾸미나 의심되오니, 請治.” 이 일을 처리해주시길 청하옵니다.” 上責崇曰: 임금께서 정승을 꾸짖었다. “君門如市人, 何以欲禁切主上?” “그대 집 문이 저자거리 같은데 어째서 나와 관계를 끊으려 하는가?” 崇對曰: “臣門如市, 而臣心如..
계명구도(鷄鳴狗盜) 하잘 것 없어 보이지만 요긴한 재주 秦王聞孟嘗君之賢, 使涇陽君, 爲質於齊以請, 孟嘗君來入秦. 秦王以爲丞相, 或謂秦王曰: “孟嘗君相秦, 必先齊而後秦, 秦其危哉.” 秦王乃以樓緩爲相, 囚孟嘗君, 欲殺之. 孟嘗君, 使人, 求解於秦王幸姬. 姬曰: “願得君狐白裘.” 孟嘗君有狐白裘, 已獻之秦王, 無以應姬求. 客有善爲狗盜者, 入秦藏中, 盜狐白裘以獻姬, 姬乃爲之言於王而遣之. 王後悔, 使追之. 孟嘗君至關, 關法, 鷄鳴, 而出客. 時尙早, 追者將至, 客有善爲鷄鳴者, 野鷄聞之, 皆鳴. 孟嘗君乃得脫歸. 『통감절요(通鑑節要)』 「주기(周紀)」 난왕(赧王) 17년 해석 秦王聞孟嘗君之賢, 使涇陽君, 진나라 왕이 맹상군이 어질다는 걸 듣고 경양군에게 爲質於齊以請, 孟嘗君來入秦. 제나라의 인질이 되어 보길 청하니 맹..
의려이망(倚閭而望) 문에 기대어 기다리는 애틋한 부모의 마음 齊淖齒之亂, 王孫賈從湣王, 失王之處. 其母曰: “汝朝出而晩來, 則吾倚門而望, 汝暮出而不還, 則吾倚閭而望. 汝今事王, 王走, 汝不知其處, 汝尙何歸焉?” 王孫賈乃攻淖齒, 殺之. 於是, 齊亡臣, 相與求湣王子法章, 立以爲齊王, 保莒城, 以拒燕. 『통감절요(通鑑節要)』 「주기(周紀)」 난왕(赧王) 32년 해석 齊淖齒之亂, 王孫賈從湣王, 제나라 요치의 난으로 왕손가는 민왕을 수행하다가 失王之處. 왕이 계신 곳을 잃어버렸다. 其母曰: “汝朝出而晩來, 則吾倚門而望,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아침에 나가 늦게 돌아오면 나는 문에 기대어 기다렸고 汝暮出而不還, 則吾倚閭而望. 네가 저녁에 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마을문에 기대어 기다렸다. 汝今事王, 王走,..
삼고초려(三顧草廬) 인재를 구하고자 하는 절실함과 윗사람을 향한 노력의 진심 玄德曰: “大丈夫, 抱經世奇才, 豈可空老於林泉之下? 願先生, 以天下蒼生, 爲念, 開備愚魯, 而賜敎.” 孔明笑曰: “願聞將軍之志.” 玄德, 移坐促席, 而告曰: “漢室, 傾頹, 奸臣, 竊命, 備不量力, 欲伸大義於天下, 而智術淺短, 迄無所就. 惟先生, 開其愚, 而拯其厄, 實爲萬幸.” 孔明曰: “自董卓, 造逆以來, 天下豪傑, 竝起. 曹操, 勢不及袁紹, 而竟能克紹者, 非惟天時, 抑亦人謀也. 今操, 已擁百萬之衆, 挾天子, 以令諸侯, 此誠不可與爭鋒. 孫權, 據有江東, 已歷三世, 國險而民附, 此可用爲援, 而不可圖也. 荊州, 北據漢水, 利盡南海, 東連吳會, 西通巴ㆍ蜀, 此用武之地, 非其主, 不能守. 是殆天所以資將軍, 豈可棄乎? 益州, 險塞, 沃..
백미(白眉) 재능이 뛰어난 이 馬良字季常, 襄陽宜城人也. 兄弟五人, 竝有才名, 鄕里爲之諺曰: “馬氏五常, 白眉最良.” 良眉中有白毛, 故以稱之. -『三國志』 「촉서(蜀書)」 마량전(馬良傳) 해석 馬良字季常, 襄陽宜城人也. 마량의 자는 계상으로 양양 의성 사람이다. 兄弟五人, 竝有才名, 형제 다섯 사람이 함께 재주에 따른 명성이 있었는데 鄕里爲之諺曰: 마을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말했다. “馬氏五常, 白眉最良.” “마씨의 다섯 형제 중에 흰 눈썹을 지닌 이가 가장 뛰어나다.” 良眉中有白毛, 故以稱之. -『三國志』 「촉서(蜀書)」 마량전(馬良傳) 마량의 눈썹 가운데 흰 털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인용 고사성어 수업실연
망매지갈(望梅止渴) 매화를 상상하니 갈증이 멈추네 操曰: “適見枝頭梅子靑靑, 忽感去年征張繡時. 道上缺水, 將士皆渴. 吾心生一計, 以鞭虛指曰: ‘前面有梅林.’ 軍士聞之, 口皆生唾, 由是不渴. 今見此梅, 不可不賞, 又値煮酒正熟, 故邀使君小亭一會.” -『삼국연의(三國演義)』 해석 操曰: “適見枝頭梅子靑靑, 忽感去年征張繡時. 조조가 유비에게 말했다. “마침 가지 끝에 매화열매가 푸른 걸 보니 갑자기 작년에 장수를 칠 때가 생각났소. 道上缺水, 將士皆渴. 길가에 물이 없어 장수와 졸병들이 모두 갈증이 났네. 吾心生一計, 以鞭虛指曰: ‘前面有梅林.’ 나는 내심 한 계책을 내어 채찍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앞에 매화숲이 있다.’고 말했지. 軍士聞之, 口皆生唾, 由是不渴.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 입에서 모두 침이 생겨 ..
도원결의(桃園結義) 복숭아 나무 아래서 의형제를 맺다 次日, 於桃園中, 備下烏牛白馬祭禮等項, 三人焚香再拜而說誓曰: “念劉備ㆍ關羽ㆍ張飛, 雖然異姓, 旣結爲兄弟, 則同心協力, 救困扶危, 上報國家, 下安黎庶. 不求同年同月同日生, 只願同年同月同日死. 皇天后土, 實鑒此心, 背義忘恩, 天人共戮.” 誓畢, 拜玄德爲兄, 關羽次之, 張飛爲弟. -『삼국연의(三國演義)』 해석 次日, 於桃園中, 備下烏牛白馬祭禮等項, 다음날 복숭아 동산에서 까마귀 소와 흰 말과 제사용품 등의 항목을 갖추고 三人焚香再拜而說誓曰: 세 사림이 향을 사르고 재배하며 맹세했다. “念劉備ㆍ關羽ㆍ張飛, 雖然異姓, 旣結爲兄弟, “바라건대 유비와 관우와 장비가 비록 다른 성이지만 이미 맺어 형제가 되었으니 則同心協力, 救困扶危, 같은 마음으로 협력하여 곤궁함..
계륵(鷄肋) 修字德祖, 好學, 有俊才, 爲丞相曹操主簿, 用事曹氏. 及操自平漢中, 欲因討劉備, 而不得進, 欲守之, 又難爲功. 護軍不知進止何依. 操於是出敎, 唯曰: “鷄肋.”而已. 外曹莫能曉, 修獨曰: “夫鷄肋, 食之則無所得, 棄之則如可惜, 公歸計決矣.” 乃令外白稍嚴, 操於此廻師. 修之幾決, 多有此類. 修又嘗出行, 籌操有問外事, 乃逆爲答記, 勅守舍兒. 若有令出, 依次通之. 旣而果然 如是者三. 操怪其速, 使廉之知狀, 於此忌修. 且以袁術之甥, 慮爲後患, 遂因事殺之. - 『후한서(後漢書)』 「양웅열전(楊震列傳)」 해석 修字德祖, 好學, 有俊才, 양수(楊修)의 자는 덕조인데 배우길 좋아하고 넉넉한 재주가 있어 爲丞相曹操主簿, 用事曹氏. 승상 조조의 주부가 되어 조씨의 일을 도맡아 했다. 及操自平漢中, 欲因討劉備, ..
거안제미(擧案齊眉) 남편을 정성스레 대우하다 梁鴻字伯鸞, 扶風平陵人也. … (중략) … 後受業太學, 家貧而尙節介, 博學無不通. … (중략) … 鄕里勢家慕其高節, 多欲女之, 鴻竝絶不娶. 同縣孟氏有女, 肥醜而黑, 力擧石臼. 擇對不嫁, 至年三十, 父母問其故, 曰: “欲得賢如梁伯鸞者.” 鴻聞而聘之. … (중략) … 遂至吳, 依大家皐伯通, 居廡下, 爲人賃舂. 每歸, 妻爲具食, 不敢於鴻前仰視, 擧案齊眉. 伯通察而異之曰: “彼傭能使其妻敬之如此, 非凡人也.” 乃方舍之於家. -『후한서(後漢書)』 「일민전(逸民傳)」 해석 梁鴻字伯鸞, 扶風平陵人也. 양홍의 자는 백란으로 부풍 평릉의 사람이다. … (중략) … 後受業太學, 家貧而尙節介, 훗날 태학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집은 가난했지만 절개를 숭상했고 博學無不通. 널리 배워 통..
닭갈비 鷄肋 操收兵於斜谷界口扎住. 操屯兵日久, 欲要進兵, 又被馬超拒守; 欲收兵回, 又恐被蜀兵耻笑, 心中猶豫不決. 適庖官進鷄湯. 操見碗中有鷄肋, 因而有感於懷. 正沉吟間, 夏侯惇入帳, 禀請夜間口號, 操隨口曰: “鷄肋, 鷄肋.” 夏侯惇傳令衆官, 都稱鷄肋. 行軍主簿楊修, 見傳鷄肋二字, 便敎隨行軍士, 各收拾行裝, 準備歸程. 有人報知夏侯惇. 惇大驚, 遂請楊修至帳中間曰: “公何收拾行裝?” 修曰: “以今夜號令, 便知魏王不日將退兵歸也. 鷄肋者, 食之無肉, 棄之有味. 今進不能勝, 退恐人笑, 在此無益, 不如早歸. 來日魏王必班師矣, 故先收拾行裝, 免得臨行慌亂.” -『삼국연의(三國演義)』 해석 操收兵於斜谷界口扎住. 조조가 병사들을 사곡의 입구에 거두어 주둔시켰다. 操屯兵日久, 조조가 병사를 주둔시킨 지 오래되었는데 欲要進兵, ..
거안제미(擧案齊眉) 남편을 정성스레 대우하다 梁鴻字伯, 扶風平陵人也. 家貧而尙節介. 同縣孟氏有女, 肥醜而黑, 力擧石臼. 擇對不嫁., 曰: “欲得賢如梁伯者.” 鴻聞而聘之, 字之曰‘德曜,’ 名孟光. 至吳爲人賃, 每歸, 妻爲具食, 不敢於鴻前, 仰視, 擧案齊眉. -『후한서(後漢書)』 「양홍전(梁鴻傳)」 梁鴻字伯, 扶風平陵人也. 家貧而尙節介. 同縣孟氏有女, 肥醜而黑, 力擧石臼. 擇對不嫁., 曰: “欲得賢如梁伯者.” 鴻聞而聘之, 字之曰‘德曜,’ 名孟光. 至吳爲人賃, 每歸, 妻爲具食, 不敢於鴻前, 仰視, 擧案齊眉. -『후한서(後漢書)』 「양홍전(梁鴻傳)」 해석 梁鴻字伯, 扶風平陵人也. 家貧而尙節介. 양홍의 자는 백으로 부평 평릉 사람이다. 집은 가난했지만 절개를 숭상했다. 同縣孟氏有女, 肥醜而黑, 같은 고을에 맹씨의..
풀을 묶어 은혜를 갚다 結草報恩 秋七月, 秦桓公伐晉, 次于輔氏. 壬午, 晉侯治兵于稷, 以略狄土, 立黎侯而還. 及雒, 魏顆敗秦師于輔氏, 獲杜回, 秦之力人也. 魏武子有嬖妾, 無子. 武子疾, 命顆曰: “必嫁是.” 疾病則曰: “必以爲殉.” 及卒, 顆嫁之曰: “疾病則亂, 吾從其治也.” 及輔氏之役, 顆見老人結草以亢杜回, 杜回躓而顚, 故獲之. 夜夢之曰: “余而所嫁婦人之父也. 爾用先人之治命, 余是以報.” -『春秋左氏傳』 「宣公」15년 해석 秋七月, 秦桓公伐晉, 次于輔氏. 가을 7월(기원전 594년) 진나라 환공이 진나라를 치러 진(晉) 나라의 보씨에 주둔했다. 壬午, 晉侯治兵于稷, 임오일에 진경공(晉景公)이 직에서 군대를 훈련하고 以略狄土, 立黎侯而還. 적토를 공략하여 여후를 세우고 돌아왔다. 及雒, 魏顆敗秦師于輔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