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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영국의 탄생 독일의 철벽 수비는 노르만족의 이동을 동쪽으로만 우회하게 만들지 않았다. 당시 독일의 심장부는 슈바벤과 바이에른 등 남부였고, 작센과 프랑켄도 기껏해야 중부에 해당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 북부는 독일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덴마크라는 데인족(노르만족의 일파)의 근거지가 되어 있었다(당시까지는 스칸디나비아가 한 덩어리였으며, 스웨덴과 노르웨이, 덴마크로 분립하는 시기는 11세기 이후다). 게다가 바이킹이라는 별명을 얻은 데서 알 수 있듯이, 노르만족의 장기는 육로보다는 바닷길에 있었다(노르만족은 일찍부터 해상 진출에 활발히 나서서 멀리 북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까지 탐험했다. 그린란드에 최초로 상륙한 유럽인도 바이킹이었다). 따뜻한 바닷길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넓은 ..
기본형과 활용형 샤를마뉴가 프랑크 왕국을 제국으로 건설할 무렵, 유럽의 북쪽에서는 또 다른 변화의 바람이 서서히 불고 있었다. 메르센 조약으로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라는 서유럽의 기본형이 형성될 무렵, 그 바람은 폭풍우로 변해 남쪽으로 밀어닥치고 있었다. 바로 2차 민족대이동, 그러니까 노르만의 민족이 동이 시작된 것이다. 게르만이 그렇듯이, 노르만 역시 하나의 단일민족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당시 북유럽과 스칸디나비아 일대에 살았던 여러 민족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노르만이라는 말 자체가 ‘북쪽 사람’이라는 뜻이다), 4세기에 시작된 게르만 1차 민족대이동이 서유럽 세계의 ‘기본형’을 확립했다면, 9세기에 진행된 2차 민족대이동은 서유럽 세계의 ‘활용형’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활용’의 주된 결..
환생한 샤를마뉴 서프랑크를 차지하게 된 샤를은 행운아였다. 그는 막내에다 이복 형제였는데도 둘째 형(피핀)이 죽는 바람에 알짜배기 땅을 물려받게 된 것이었으니까. 그에 비해 루이 1세의 셋째 아들인 루이(루트비히 2세)는 억세게도 운이 없었다. 삼형제였을 때는 막내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가장 오지인 동프랑크를 물려받았는데, 첫째 형과 둘째 형이 모두 죽었어도 여전히 그는 동프랑크에 만족해야 했다. 옛 로마의 속주였던 데다 프랑크 왕국의 중심지였던 서프랑크에 비하면 동프랑크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샤를마뉴가 설치한 주들도 동프랑크 지역에는 많지 않았으며, 따라서 당시 첨단의 제도인 봉건제도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주민들도 문명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하고 여전히 옛 게르만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고..
원시 프랑스 중세의 골격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샤를마뉴는 알렉산드로스-콘스탄티누스로 이어지는 ‘대제(大帝)’의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경우처럼 그가 역사에 대제로 기록되는 이유는 로마 가톨릭의 전파에 지대한 역할을 한 덕분에 그리스도교 역사가들에게서 점수를 땄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평가는 대개 사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샤를마뉴가 종교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진정한 대제가 되려면 그가 세운 프랑크 제국이 계속 존속하고 발전했어야 한다. 그러나 프랑크는 샤를마뉴에게 더 이상의 영광은 주지 않았다. 그가 죽자마자 제국의 면모는 금세 사라져버렸다. 원래 프랑크 제국은 지역마다 민족과 언어, 관습이 달랐으므로 제국으로서의 통합성은 크게 부족했다. 물론 샤를마뉴가 이룩한 종교와 경제에서의..
중세의 원형 옛 로마 제국도 명실상부한 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될 때까지는 정복 활동이 끝나고 나서도 상당히 오랜 기간이 걸렸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것은 후발 주자의 고유한 이점이다. 그러나 제국의 하드웨어는 초고속으로 갖추었어도 신생 프랑크 왕국이 제국의 소프트웨어마저 완비하기란 애초부터 무리였다. 물론 프랑크는 교황에게서 로마의 상속자라는 자격을 부여받기는 했으나 명칭만 그랬을 뿐이고 로마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까지 이어받지는 못했다. 과연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었던 것이다. 우선 샤를마뉴는 제국의 영토를 많은 주께로 나누었으나 그것들은 로마의 속주처럼 되지 못했다. 수치로만 보면 300개에 달했으니까 로마의 속주에 못지않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에 미치지 못했다(로마 제국의 계승을 꿈..
서유럽 세계의 탄생 종교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로마 교황은 세속에서도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종교와 달리 세속의 독립선언을 하려면 실제로 독립을 유지할 만한 물리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교황은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을 정식 파트너로 삼기로 했다. 마침 그럴 만한 계기도 있었다. 751년 롬바르드 왕국이 라벤나를 점령하고 로마를 노리자 교황 스테파누스 3세는 다급해졌다. 불감청 고소원이라 했던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때 피핀이 프랑크 왕 힐데리히의 왕위를 찬탈하고 교황에게 쿠데타의 승인을 요청했다. 사실 교황은 비잔티움 측에 원조를 요청할 수도 있었고, 또 과거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마땅히 그래야 했다. 더구나 비잔티움 제국은 아직도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관할하고 있었다..
3장 원시 서유럽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립 투르에서 마르텔이 구해낸 것은 단지 프랑크 왕국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문명권 전체였다. 그리스도교 세계가 위기를 모면한 것을 가장 환영한 사람은 로마 교황이었다. 300년 전에 클로비스는 이단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해 교황에게 힘을 보태주더니 이제 그의 후손은 무시무시한 이슬람의 침략도 막아주었다. 교황으로서는 프랑크 왕국이 예쁘기만 했다. 따라서 마르텔이 일등공신의 위치를 넘어 프랑크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는 데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왕위는 마르텔의 당대에 얻어지지 않았다. 그는 보잘 것 없는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기보다는 그냥 유력한 지방 호족으로 남는 편이 더 낫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아들 피핀(Pepi..
부활한 오리엔트 이슬람 제국이 탄생하고 성장함에 따라 인류 문명의 고향이었던 오리엔트는 옛 페르시아가 무너진 이후 1000년 만에 다시 세계 문명의 중심지라는 위상을 되찾았다. 로마가 멸망한 뒤 지중해 문명이 서유럽 세계로 전달되기까지의 공백기(서유럽의 중세 초기에 해당하는 기간)를 틈타 문명의 서진이 잠시 유보되고 동쪽으로 회귀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슬람 제국의 칼리프들 중에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군주들이 많았다. 그 덕분에 이 시기에는 아랍 문화가 절정기에 달했다. 특히 아바스 왕조는 피정복지의 원주민들을 신분과 인종의 차별없이 관직이나 학술계에 많이 받아들였으므로, 이 시기에 이슬람 문화는 이슬람권에만 국한되지 않고 세계 문화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게다가 이슬람 문화권이 중앙아시아로 확산되..
서아시아 세계의 형성 비록 유럽의 정복은 단념했지만, 이슬람 세력은 최소한 그간의 정복지만큼은 확실하게 챙겼다. 그리스도교권이던 북아프리카는 이슬람권으로 탈바꿈했고(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에스파냐도 이슬람 문화로 새 포장을 했다. 오늘날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로 이어지는 북아프리카 지중해권 지역이 모두 이슬람교 국가인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1492년까지 800년 동안이나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에스파냐에도 지금까지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그러나 아라비아 본토 이의의 지역들 중 이슬람이 침투하면서 가장 크게 변모한 지역은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였다. 오늘날의 이라크와 이란을 포함해 이슬람 문명권의 서아시아 세계가 탄생한 것은 바로 그 시기에 기원..
문명의 충돌 이슬람 제국이 단기간에 놀라운 팽창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물론 종교의 힘도 컸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오리엔트 지역은 권력의 공백 상태로 남아 있었다【단지 권력의 공백만이 아니라 종교의 공백이기도 했다. 당시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였는데, 이것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멸망하면서 함께 힘을 잃었다. 조로아스터교보다 더욱 강력하고 세계적인 종교는 그리스도교와 불교였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탄생한 그리스도교가 서쪽(유럽)으로 전달되고,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가 동쪽(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으로 전달되면서 팔레스타인과 인도 사이의 오리엔트 일대는 종교적 공백 상태에 빠졌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속주였으므로 당연히 비잔티움 제국이 챙겨야 했..
제국으로 성장한 공동체 메디나에 도착한 뒤 무함마드는 우선 이곳을 세력 근거지로 만들어 장차 있을 메카와의 전쟁에 대비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을 따라 메디나로 옮겨온 이주민 집단과 메디나 현지 유력 가문들의 갈등을 해소하고 여러 씨족을 한데 묶어 움마(Umma)라는 종교 공동체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조그만 공동체로 시작했지만, 수십 년 뒤 이 움마라는 말은 우마이야라는 강력한 이슬람 왕조의 이름에 실려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슬람이라는 말은 원래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신의 명령은 신의 사자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 따라서 신도들은 신의 사자가 말하는 것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 7세기라면 문명의 오지를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 제정일치 사회가 매우 드문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
2장 또 하나의 세계 종교 사막의 바람 로마 제국의 멸망은 유럽에만 큰 파장을 남긴 게 아니었다. 유럽이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 세계와 비잔티움 제국이 지배하는 동유럽 세계로 분립하기 시작할 무렵, 문명의 옛 고향인 오리엔트에도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하지만 이번에 오리엔트의 주역으로 떠오른 곳은 유서 깊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가 아니었다. 아득한 옛날 인류 문명을 탄생시킨 그 지역들은 이미 수백 년 동안 로마의 속주로 역사를 쌓아온 곳이었으므로 새로운 변화의 주역이 되기는 어려웠다. 바람의 진원지는 아라비아 사막, 정확히 말하면 사막의 군데군데에 발달한 오아시스였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류 문명이 태어날 때도,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으로 헬레니즘 세계가 구축될 때도, 로마 ..
홀로 남은 로마 유럽 전역에서 오늘날 유럽 국가들의 원형이 생겨나기 시작할 즈음, 로마도 그 물결에 합류했다. 물론 과거와 같은 통일 제국의 로마도 아니고 서방 제국도 아닌 동방 제국, 즉 동로마다. 제국의 중심을 동방으로 옮긴 두 명의 의사(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의 판단은 절반만 옳았다. 제국의 수명을 늘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결국 서방 제국을 잃음으로써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유럽 신흥 왕국들과 경쟁하는 고만고만한 수준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동방 로마 제국을 로마의 연장선상에서 보지 않고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 부른다(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이 비잔티움인 데서 나온 이름이다). 옛 로마의 화려한 영광은 잃었어도 비잔티움 제국은 여전히 강국이었다. 게르..
갈리아의 판도 서유럽에 있던 로마의 속주들 가운데서 가장 주목해야 할 곳은 갈리아였다. 갈리아는 제국의 변방이면서도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했고, 속주들 가운데 가장 역사가 길고 가장 로마화되었던 곳이다. 그러므로 로마의 멸망으로 서유럽 세계의 원형이 생겨난다면 당연히 갈리아는 그 중심이야 할 것이며, 동시에 로마 문명의 상속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갈리아는 기원전 1세기에 카이사르에게 정복된 이래로 수백 년 동안이나 로마의 속주였고 로마의 ‘특별 관리‘를 받았으므로 제국이 멸망할 무렵에는 로마와 다를 바 없는 문명의 수준을 자랑했다. 하지만 갈리아도 작지 않은 지역이므로 갈리아 내에서도 편차가 심했다. 크게 가름하면, 이탈리아에 가까운 남부는 로마화가 크게 진척되었으나 북부는 그렇지..
1장 유럽 세계의 원형 포스트 로마 시대 로마 제국이 무너진 후유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미 3세기부터 로마가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을 동과 서로 나눔으로써, 그리고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의 본체를 포기하고 동방 제국을 중시함으로써 제국의 수명을 연장했으나 제국을 되살리지는 못했다. 결국 이 응급조치들이 시효를 다하면서 로마는 최종적으로 멸망한 것이다. 로마가 멸망한 시점에서 유럽의 판도를 한번 그려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나타난다. 이 무렵이면 벌써 현대 유럽 세계의 원형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서유럽과 동유럽은 멀리 보면 로마 제국의 분열과 서방 제국의 멸망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서방 제국의 자리를 대신한 게르만족의 여러 ..
4부 줄기 정치적으로는 분권적이고 종교적으로는 통합적인 기묘한 사회가 서양의 중세다. 하나의 신성한 정부를 둘러싸고 여러 세속의 정부가 경쟁과 다툼을 벌이면서 서서히 오늘날의 유럽 세계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서유럽 국가들의 원형이 생겨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아직도 힘에서는 동방에 뒤져 있던 서유럽 세계는 십자군 전쟁으로 그리스도교권을 확대하고자 한다.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이 전쟁으로 유일은 하나의 문명권이 된다. 여기에 이베리아와 스칸디나비아 등 ‘변방’ 지역들까지 차례로 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후기로 접어들어 교황권이 쇠퇴하면서 중세는 뚜렷한 해체의 조짐을 보인다. 이제 서양 문명의 굳건한 줄기는 화려한 개화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인용 목..
제국의 최후 의사가 담당 환자보다 먼저 죽는다면 그 환자의 앞날은 뻔할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죽자 로마 제국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그 뒤로도 제국은 150년 가까이 더 존속하지만, 산소 호흡기로 겨우 명맥을 유지했을 뿐 제대로 산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세상의 어느 누구도 로마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병든 사자를 공격하는 하이에나들의 이빨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4세기 후반부터 이민족들은 로마를 거세게 물어뜯었다. 367년에 브리타니아의 여러 부족은 서로 힘을 합쳐 브리타니아 속주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브리타니아야 원래부터 반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아직 단일한 정체성이 없던 픽트족과 색슨족, 스코트족이 연계해 로마에 대항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서곡일 뿐이었다. 주제곡은 375..
정치적 무기가 된 종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라는 뛰어난 의사가 연이어 출현한 덕분에 로마 제국은 늙고 병든 몸으로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에 비해 콘스탄티누스의 개혁은 그다지 새로울 게 없었고, 제국의 골간을 이루는 농민들의 삶을 낫게 해준 것도 없었다(오히려 그는 세금 부담을 늘렸고, 콜로나투스를 더욱 강화했다). 그런데도 후대의 역사가들은 콘스탄티누스를 그냥 황제라고 부르지 않고 대제(大帝)라고 부른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물론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도 그런 호사스런 칭호를 얻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313년의 밀라노 칙령이 없었다면 콘스탄티누스는 그저 그런 황제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밀비우스 전투에서 승리해 서방 정제가 된 이듬해에 그는 밀라노 칙령..
두 번째 의사 과연 강력한 권력이 사라지자 즉각 그 체제는 무너졌다. 체질상 전제군주에 맞지 않았고 정치적 야심도 크지 않았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5년 홀연히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고향인 달마치야의 해변에 집을 짓고 은거해버렸다(그 무렵 그는 비록 예순 살의 노인이기는 했으나 권력의 절정에 있었고 경쟁자도 없었던 터라 그의 돌연한 은퇴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기둥이 빠져나갔으니 체제가 온전하기는 어려웠다. 그전부터 기미를 보이던 인플레는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화폐를 믿지 않고 현물 거래에 나섰다. 심지어 세금마저도 현물로 납부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통화 체계가 무너질 테고, 제국의 경제가 송두리째 붕괴할 게 뻔했다. 그러나 더 직접적인 위협은 권력 승계의 문제였다..
수명 연장 조치 말기 암 환자를 앞에 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최후의 수단인 수술에 의지하기로 했다. 첫 번째 수술은 권력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의사로 있는 기간이 최소한 어느 정도는 확보되어야 수술이든 무엇이든 할 게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지에서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군벌들을 달래야 했다. 이를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모험에 가까운 시도를 했다. 그것은 제국을 분할하는 것이었다. 286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료인 막시미아누스를 서방 황제로 삼고 자신은 동방 황제가 되었다【로마 제국이 동서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은 지도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방 제국(지중해 동부와 소아시아, 이집트)과 서방 제국(이탈리아, 갈리아, 에스파냐, 북아프리카)의 차이는 로마 초기부터 뚜렷했다. 동방은 오..
위기는 위기를 부르고 지금까지 우리는 로마 황제들의 치적을 소상히 밝혀가며 로마의 역사를 더듬어왔지만,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다. 말기적 증상을 완연하게 보이는 3세기 이후의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가 거의 무능력하고 무의미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우선 재위 기간이 극히 짧고 권력이 대단히 불안정했다. 카라칼라의 제위를 이은 마크리누스(Marcus Opellius Macrinus, 164~218)는 겨우 1년, 그다음 황제인 헬리오가발루스(Heliogabalus, 204~222)는 겨우 4년밖에 재위하지 못했다. 심지어 235년부터 284년까지 50년 동안 로마 황제는 무려 26명이었으니, 평균 재위 기간이 2년도 채 안 된 셈이다. 가히 ‘황제 인플레이션’의 시대였다(세베루스가 제위에 오른 193년부터 ..
5장 추락하는 제국 몰락의 시작 번영과 몰락의 교체는 한순간이었다. 5현제의 끝, 그러니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끝으로 로마 제국은 순식간에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그러나 그 단초는 역설적이게도 아우렐리우스가 제공했다. 아우렐리우스는 5현제 중에서 유일하게 아들을 낳은 황제였다(로마 황제 모두를 통틀어도 아들을 낳은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인지상정일까? 그는 몇 대째 지속되어온 양자 상속제를 파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몇 대째 지속되어온 로마의 평화를 파괴하는 결과를 빚게 될 줄은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현명하다고 아들도 현명할 수는 없다. 마르쿠스의 아들로 제위를 계승한 콤모두스(Commodus, 161~192)는 우선 아버지가 시작한 모든 정복 사업을 포기해버렸다. 하..
서양 문명의 뿌리 카르타고를 물리치고 지중해 세계의 패자가 되었을 때만 해도 로마는 달리지 않으면 쓰러지는 자전거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정복의 중단을 유언으로 남겼을 무렵, 이미 로마는 더 이상의 정복이 필요 없는 제국이 되었다.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정복은 밀린 숙제를 해결한 것일 뿐 예전처럼 정복의 절실한 필요성에서 강행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로마는 정복하지 않아도 번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 하나의 예가 라티푼디움이다. 노예 노동으로 경작하던 라티푼디움은 처음 생겨날 때만 해도 정복이 계속되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었다. 노예는 주로 정복에서 획득한 전쟁 포로들로 충원했기 때문이다. 정복이 줄어듦에 따라 노예도 줄어들었다. 심지어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수시로 노예해방이 이루어졌다...
로마의 평화 네르바의 치세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까지 100년 가까운 기간을 흔히 ‘5현제(五賢帝) 시대’라고 부른다.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가 연이어 다스렸다는 데서 나온 말인데,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는 유명한 말을 낳은 시대이기도 하다. 그 한복판에 트라야누스가 있다. 트라야누스는 에스파냐 출신인데, 속주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황제가 된 사람이다. 그런 만큼 그는 속주의 운영과 행정에서 뛰어난 능력을 선보였다. 그의 치하에 속주들은 로마 본토의 수준에 이를 정도로 발전했다. 속주가 발달해야 제국의 면모가 제대로 선다는 점에서 트라야누스는 진정한 로마 제국을 성립시킨 황제였다. 물론 트라야누스가 속주 경영에만 힘썼다면 로마 시민들은 섭섭했을 것이다. 그는 시민들에..
평화와 번영의 준비 제정이 시작된 지 100년이 지났지만 그 기간 중 아우구스투스의 치세가 워낙 길었고 그의 업적이 워낙 화려했던 탓에, 후대의 황제들은 그 빛에 가려 강력한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황제라 해도 시민들의 인기를 잃으면 제위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네로의 운명은 뻔했다. 다만 20대의 젊은 나이에 그 운명이 닥쳤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68년 참다못한 군대가 그에게 반항했고, 여기에 힘을 얻은 원로원이 황제를 로마의 적으로 규정했다. 네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예전 황제들처럼 살해당하기 전에 자살을 택하는 것뿐이었다. 네로의 죽음은 다시 로마의 제위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왔다. 그전까지의 황제들은 카이사르와 클라우디우스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황제..
초기 황제들 쉰다섯의 나이에 제위에 오른 늙은 황제 티베리우스는 애초부터 자신이 아우구스투스의 카리스마를 이을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얼마 안 가 친위대장인 세야누스에게 정치를 맡긴 채 나폴리 앞바다의 카프리 섬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하지만 고양이가 생선을 잘 관리할 리는 만무하다. 세야누스의 전횡으로 로마 정치는 엉망이 되었으며, 그 욕은 티베리우스가 고스란히 얻어먹었다. 덕분에 황제가 죽자 로마 시민들은 환호를 올렸고, 타키투스(Cornelius Tatitus, 56년경~120년경)를 비롯해 후대의 역사가들은 티베리우스에 대한 혹평에 열을 올렸다. 티베리우스에 뒤이어 조카의 아들인 가이우스(Gaius, 12~41)가 잠시 제위를 계승했지만 그는 정신 질환에 걸려 잔혹한 짓을 일삼다가 암..
내실 다지기 약관의 나이에 로마 정계의 거물이 되었고 서른이 채 못 되어 제위에 오른 뒤 45년을 최고 권력자이자 재산가로 살았던 복 많은 사나이 아우구스투스는 14년, 유일하게 이루지 못한 꿈인 게르마니아 정복을 포기하라는 내용을 유서로 남기고 죽었다. 정복이 끝났으니 이제 로마는 어떻게 될까? 원래 로마는 정복이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것은 로마가 유년기일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당시의 로마는 힘도 약했고, 곳곳에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 로마는 장성했고, 주변의 적들을 모조리 물리쳐 이제부터는 정복이 없어도 제국을 유지할 만큼 힘을 갖추고 있었다. 덩치만 크다고 어른이 아니듯이 영토만 넓다고 제국인 것은 아니다. 무늬만 제국이 아니려면 제국 내의 모든 영토에 단일한 행정력을..
4장 팍스 로마나 더 이상의 정복은 없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적 감각과 리더십이 뛰어났고, 45년이나 재위할 만큼 건강도 좋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자질보다도 더욱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돈이었다. 제정을 이루면서 로마 제국도 평화를 되찾고 번영을 구가했으나, 아우구스투스의 재산이 불어나는 속도는 제국이 성장하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특히 이집트의 정복으로, 그렇잖아도 로마 최대의 부자인 그는 엄청난 거부가 되었다【이렇게 황제를 최대의 부자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로마 황제와 비슷한 시기 중국 황제의 차이를 말해준다. 중국 황제는 제국 전체의 주인이었고, 천자라는 칭호처럼 하늘의 아들이었으므로, 부자라는 용어 자체를 쓸 수 없다. 그에 비해 로마 황제는 어디까지나 ‘제국의 서열 1위 시민’..
정답은 제정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카이사르가 죽으면 공화정이 회복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카이사르에게 충성을 바치던 군대가 있었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오히려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그의 부관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기원전 82년경~기원전 30)에게 뜻하지 않은 권력을 가져다주었다. 안토니우스는 먼저 암살자들을 처벌하고 싶었으나 아직은 절대 권력자가 죽은 충격으로 인해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를 틈 타 브루투스의 무리는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예전에 폼페이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로 달아났다. 안토니우스는 갓 잡은 권력부터 안정시키기 위해 카이사르의 기병대장이던 레피두스(Marcuss Aemilius Lepidus, 기원전 ?~기원전 13)..
권력과 죽음을 함께 얻은 카이사르 기원전 52년에 갈리아의 영웅 베르생제토릭스의 반란을 어렵사리 진압한 것을 끝으로 카이사르는 군사적 임무를 완수했다. 로마의 영토는 라인 강과 영국 해협까지 확장되었다. 라인 강 너머의 이민족과 브리타니아인에 대해서는, 비록 정복하지는 못했어도 최소한 로마의 영향력 아래 제압했으므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대성공이었다. 예상한 대로 로마에서 카이사르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가 개선한다면 과거에 폰투스를 정복한 술라나 에스파냐 반란을 진압한 폼페이우스의 개선보다 훨씬 무게가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의 공이 높은 만큼 원로원의 경계와 반발도 컸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개선해야 할까? 로마의 법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군대를 거느린 채 개선하면 안 되었다. 그 때..
대권 후보의 등장 사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친척이고 명문 귀족 출신이라는 점 이외에는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다른 두 사람에 비해 나이도 가장 어렸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에게는 군대, 크라수스에게는 돈이 있다면, 카이사르에게는 신분과 자질, 그리고 탁월한 정치적 감각이 있었다. ‘3두’의 한 사람이라는 후광을 이용해 기원전 59년에 집정관이된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무시하고 민회를 통해 정책을 처리했으며, 때로는 민회마저 무시하기도 했다. 일찍부터 그는 독재의 본능을 드러낸 셈이다(집정관은 두 명이었으나 다른 한 명은 전혀 권력이 없었다. 심지어 ‘카이사르와 율리우스가 집정관’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그 바로 전에 집정관을 지냈고 후대에 철학자로도 잘 알려진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
제정으로 가는 과도기 현대사회에서는 독재자의 최후가 대개 비참하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공포정치를 휘두르던 술라는, 비록 수는 충분히 누리지 못했으나 권력의 정상에서 편안하게 죽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군사독재의 경험은 사라지기는커녕 로마 정치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그가 죽자 일단은 원로원이 권력을 되찾기는 했지만, 곧 술라의 뒤를 이어 군인 정치의 전통을 이어갈 인물이 나타났다. 술라가 그랬듯이, 폼페이우스(Magnus Gnaeus Pompeius, 기원전 106~기원전 48)는 술라의 부하였다가 상관의 죽음을 계기로 정치적 도약을 이루었다. 또한 술라가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을 통해 권력을 잡았듯이, 폼페이우스 역시 군인으로서의 능력을 충분히 과시할 만한 사건을 맞이했다. ..
고대의 군사독재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예견했던 대로, 개혁의 실패는 곧장 군사력의 쇠퇴로 이어졌다. 로마는 지중해를 정복했으나 아직 확고한 지위를 획득하지는 못했다. 특히 북부의 강성한 갈리아인과 게르만족【게르만족은 특정한 민족의 명칭이 아니라 남유럽의 로마인들이 중부 유럽에 사는 여러 민족을 총칭하던 명칭이다(즉 게르만족이라는 민족은 없다). 동유럽의 고트족, 독일 북부의 반달족, 수에비족, 서유럽의 프랑크족 등이 다 게르만족에 속한다. 물론 그들이 게르만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게 아니라 로마인들이 그렇게 분류했을 뿐이다. 다만 갈리아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켈트족은 보통 게르만족에 포함시키지 않는다】은 결코 로마의 지배를 용납하지 않았다. 물론 로마 역시 지중해 세계에 안주하는 데 머물 뿐 북쪽의 중부..
3장 제국의 탄생 팽창하는 영토, 누적되는 모순 카르타고와 숙명의 대결을 벌이는 와중에도 로마의 정복 활동은 중단되지 않았다. 정복은 로마의 전 국민적인 활로였으므로 전쟁보다도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인구에 비해 토지가 부족한 상태에서 출범한 로마는 마치 달려야만 쓰러지지 않는 자전거처럼 정복을 계속하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었다. 지중해의 주인을 결정하는 중대한 2차 포에니 전쟁이 벌어지는 도중에도 로마는 정복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실은 전쟁 수행을 위해서라도 늦출 수 없었다). 정복의 방향은 동부의 헬레니즘 세계, 그중에서도 일차적인 대상은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장악하고 있는 마케도니아였다. 처음에는 마케도니아를 영토화하겠다는 의도까지는 없었던 로마는 두 차례의 접전(1, 2차 마케도니아 전쟁..
또 하나의 영웅 이제 로마인들은 정면 대결에서 카르타고군에게 승리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특히 한니발이라는 이름은 자는 아이도 깨울 만큼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여기서 만약 한니발이 로마를 무너뜨리고 이탈리아 전역을 접수했다면 훗날 유럽 대신 북아프리카가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과 같은 유럽 문명은 없었을 테고……. 그런 ‘사태’를 방지한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한니발은 애초부터 로마를 멸망시킬 의도가 없었다. 그의 목표는 로마를 제압하는 정도에서 카르타고와 로마가 공존하도록 하자는 데 있었다. 둘째, 설사 로마를 완전히 멸망시킬 의도가 있었다 해도 실제로 그렇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니발은 로마의 주력군을 궤멸시켰지만 여전히 방어망이 강력한 로마의 도시들..
영웅의 출현 하밀카르는 칼을 뽑아들었지만 무엇을 베지도, 도로 집어넣지도 못했다. 기원전 228년에 그만 암살당하고 만 것이다. 그의 사위인 하스드루발(Hasdrubal, ?~기원전 221)이 총독직을 이어받았으나 그도 몇 년 동안 에스파냐 경영에만 힘쓰다가 장인처럼 암살로 최후를 맞았다. 결국 하밀카르의 유지를 받든 것은 아들 한니발(Hannibal ,기원전 247~기원전 183년경)이었다. 한니발은 아버지와 매부의 뒤를 이어 에스파냐 정복 사업을 계속 전개하면서도 마음은 내내 콩밭에 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로마에 진 빚을 갚는 일이었다.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 나온 『손자병법』 「모공(謀攻)」에서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고 가르쳤다. 로마의 전쟁 방식을 철저히 연구한 뒤 그는 ..
예상 밖의 승리 기원전 264년 로마는 아직 지중해 진출을 꾀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반도의 통일을 이룬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은 데다, 상대는 이제까지 로마가 싸워온 반도 내의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특히 카르타고 용병들의 명성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카르타고는 전통적으로 용병을 이용했는데, 에스파냐 출신의 보병과 누미디아 출신의 기병은 막강한 전투력과 용맹함을 갖추고 있었다(누미디아 기병은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우수한 용병으로 성가가 높았다). 무엇보다 카르타고가 자랑하는 것은 탁월한 능력을 가진 군 지휘관들과 오랫동안 해상무역으로 힘을 키워온 함대였다. 반도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 로마는 카르타고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508년 로마는 카르타고와 우호조약을 맺었는데,..
2장 지중해로 뻗어나가는 로마 서부를 향해 정복이라고 하면 대개 국가적인 정책의 소산이다. 칭기즈 칸의 중앙아시아 정복, 중세 유럽의 십자군 전쟁, 근대 유럽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개척 등등 인류 역사에서 대표적인 정복 활동들은 모두 예외 없이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층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로마의 경우는 다르다. 로마의 정복 활동은 평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전 국민적지지’ 속에서 전개된다. 왜 그럴까? 리키니우스 법에서 보듯이 식민지를 획득해야만 평민들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에 영토 확장은 단순히 국력을 키우는 의미만이 아니라 생존과 존속을 위한 것이었다. 제국으로의 팽창은 모든 로마인에게 선택의 여지없는 필연적인 노선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영토 확장은 사활이 걸린 문제였..
귀족정+민주정+왕정 로마 공화정 기원전 390년 갈리아인의 침입에서부터 통일에 이르는 전란기에도 로마 평민들의 신분 투쟁은 그치지 않았다.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는데 신분 투쟁이라니, 어찌 보면 어울리지 않은 듯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조국을 위해 싸운 것도 바로 평민들이었으니까. 갈리아에 패배했을 때 로마는 몹시 힘든 상황이었다. 막대한 배상금도 배상금이지만 정복 활동이 중지된 게 더 치명적이었다. 그전까지는 식민시를 건설하거나 정복으로 얻은 공유지를 분배하는 것으로 토지 없는 농민들을 달랠 수 있었는데, 그게 불가능해진 것이다. 심각한 경제난 속에서 토지는 갈수록 부족해졌고, 가난한 평민들은 점점 쌓여가는 부채에 시달렸다. 물론 토지와 부채의 임자인 귀족들은 난리 속에서도 끄떡없었다. 아무리 나라가 위..
고난 끝의 통일 인류 역사의 어느 시대에나 그랬듯이,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은 로마만이 아니었고 이탈리아만도 아니었다. 에트루리아의 지배를 벗어난 기원전 5세기 무렵만 해도 로마에는 아직 경쟁자들이 많았다. 신생국 로마로서 가장 효과적인 대처 방식은 주변 민족들과 타협하는 길뿐이었다. 그래서 로마는 이웃 라티움인들과 라티움 동맹을 맺고 최초의 지역 통합을 이루었다. 이 동맹은 로마인과 라티움인이 서로 평등한 관계에서 맺은 최초의 평화조약이자 불가침조약이자 상호보호조약이었을 뿐 아니라, 이후 로마의 대외 관계가 나아갈 기본 방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훗날 정복 국가로 알려지게 되는 로마였으나 출발 무렵에는 이렇게 평화조약을 외교 노선으로 삼았다. 평등한 조약으로 출발한 라티움 동맹 내에서 로마는 곧 두각을..
평민들의 총파업 로마 초기 공화정은 귀족들이 주도한 과두정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그리스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솔론의 개혁도 귀족들이 모든 것을 독차지한 폐단에서 생겨났듯이, 로마에서도 귀족들이 토지와 각종 특권을 차지하고 평민들은 철저히 소외된 게 문제였다(로마의 또 다른 신분으로는 노예가 있었는데, 이들은 거의 전쟁 포로들이었다). 귀족들은 원로원【원로원은 라틴어로 세나투스(senatus), 영어로는 senate라고 쓰는데, 양원제를 취하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원’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나중에 보겠지만 서구 근대에 양원제가 성립한 것은 시민계급이 성장해 신분제가 약화되면서 의회가 둘로 나뉘어 귀족들이 상원을 구성하고 시민 대표들이 하원을 구성한 데 기인한다(432..
로마를 빛내준 조연들 여러 민족과 문명이 공존하던 무렵에 이탈리아에서 최고의 선진 문명을 자랑하는 세력은 크게 둘이었다. 반도의 중부에는 에트루리아가 있었고, 남부와 시칠리아에는 옛 그리스의 상인들이 건설한 식민시들인 마그나그라이키아 Magna Groecia(‘큰 그리스’)가 있었다. 이들은 로마가 성장하는 드라마에서 훌륭한 조연의 역할을 하게 된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헬레니즘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는 사실이 말해주듯이, 마그나그라이키아는 헬레니즘 시대에 쇠퇴기를 맞은 그리스 본토보다 훨씬 발달했다. 말이 그리스 식민시일 뿐 사실은 이탈리아로 옮겨온 그리스 문명인 셈이었다. 따라서 마그나그라이키아는 그리스 본토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장점은 지중해 무역을 통한 경제 ..
1장 로마가 있기까지 늑대 우는 언덕에서 정상에 올랐으면 그다음에는 내려가는 게 원칙이다. 등산이나 경기 순환만이 아니라 역사도 마찬가지다.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 문명의 절정인 동시에 쇠퇴의 시작이었다. 페르시아 전쟁과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을 통해 그리스 문명은 그리스 본토를 벗어나 동부 지중해 전역에 퍼졌다. 비록 ‘사람들이 사는 땅’을 모두 아우르지는 못했지만, 이것으로 그리스 문명은 완성되었다. 그것을 당시 또 하나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던 지중해 서부 지역까지 포괄하는 진정한 유럽 문명의 뿌리로 키워내는 것은 그리스 문명의 몫이 아니었다. 그리스가 오리엔트 문명의 씨앗을 받아 그것을 능가하는 문명을 이루었듯이, 또 다른 청출어람(靑出於藍)이 그리스 서쪽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서양..
3부 뿌리② 서양 역사가 온전한 나무로 성장하려면 그리스라는 하나의 뿌리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리스의 서쪽에서 생겨난 로마 문명은 지중해 세계 전체를 터전으로 삼는다. 강력한 도전자 카르타고의 산을 넘고 지중해를 한 바퀴 도는 제국 체제를 갖추면서 비로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게 된다. 그러나 제국의 힘이 약해지자 로마인들이 야만족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던 북방의 게르만 민족들이 제국의 선진 문명을 이어받아 차세대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 게르만족은 로마 문명을 기반으로 로마 게르만이라는 새로운 문명을 건설한다. 여기에 오리엔트의 마지막 선물인 그리스도교가 결합되면서 서양 문명은 줄기를 키워낸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그리스+오리엔트=헬레니즘 필리포스의 마케도니아 왕국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덕분에 제국으로 도약했으나 다시 왕국으로 격하되는 기간도 그에 못지않게 짧았다. 그가 죽자 그의 부관(디아도코이)들은 50년간 피비린내 나는 암살과 치열한 전쟁(디아도코이 전쟁)을 벌인 끝에 세 개의 왕국으로 분립했다. 각국의 강역은 그때까지 존재했던 문명권들과 일치한다. 그리스와 소아시아에는 카산드로스 왕조의 마케도니아가 들어섰고, 메소포타미아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가 차지했으며,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게 되었다.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는 기원전 1세기 무렵까지 존속한 이 왕국들을 헬레니즘 왕국이라고 부른다. 헬레니즘 시대라는 말에서 나온 명칭이다. 그런데 헬레니즘이라니? 헬레네는 그리스를 가리키는 말..
세상의 동쪽 끝까지 간 알렉산드로스 기원전 332년에 이집트까지 정복해 페르시아의 수족을 모조리 자른 뒤, 이듬해 여름 알렉산드로스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메소포타미아의 심장부로 진출했다. 이제는 페르시아로서도 더 이상 물러난다면 죽음을 의미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차피 싸우다 죽거나 굶어 죽거나 마찬가지라면 싸워야 했다. 페르시아는 가우가멜라 평원에 배수의 진을 치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의 접전은 예고편에 불과했고, 이번의 전투가 전쟁 전체의 향방을 가늠하게 될 터였다. 전투를 하루 앞둔 날 밤, 알렉산드로스는 부하들에게 이 전투가 아시아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랬다. 우선 양측 군대의 구성부터 국제적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르면서 수천 킬로미터..
왕국에 접수된 폴리스 체제 쇠락해가던 그리스의 폴리스 체제에 종지부를 찍은 힘은 외부에서 닥쳐왔다. 중심이 약해지면 주변이 강해지게 마련이다. 그리스의 전성기 때는 오지나 다름없었던 그리스 북부에 새로운 구심점이 생겨났다. 이 일대에는 오래전부터 그리스인들이 바르바로이(앞서 말했듯이,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뜻이지 ‘야만인’이라는 의미는 크지 않다)라고 부르던 여러 부족이 살고 있었다. 그리스의 폴리스 체제가 약화되는 것에 때맞추어 드디어 이곳에서는 통일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한복판에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Philoppos, 기원전 382~336)가 있었다. 사실 페르시아 전쟁 때 정작으로 큰 피해를 본 곳은 마케도니아였다. 고래 싸움판의 새우처럼, 마케도니아는 페르시아군의 원정 도상에 있었던 ..
5장 문명의 통합을 낳은 원정 폴리스 체제의 종말 아테네의 시대를 대체한 스파르타의 시대는 짧았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해 무력에서는 그리스의 패자가 될 만한 자격을 보였으나 아테네의 권위를 대신할 수 없었다. 더구나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그리스를 지배하던 시절보다 더욱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폴리스들에 군대와 감독관을 파견하고 공납금의 액수도 더 올린 것이다. 그리스 세계의 체질에 맞지 않는 군국주의에다 민족적인 이질성, 그리고 지나친 독재와 간섭에 폴리스들은 당연히 불만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스파르타의 지배에 균열이 생기는 일이 터졌다. 기원전 394년 페르시아에서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생기자 스파르타는 그 참에 이오니아를 수복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
서양 사상의 골격이 생기다 플라톤 소크라테스가 당대의 명사였던 만큼 그를 계승한다고 자처한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은 각기 소크라테스의 ‘이론’(도덕)이나 ‘방법’(산파술)을 계승했다고 주장했지만, 대부분 일면만을 부각시키거나 형식적 측면을 계승한 데 불과했다. 모든 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진정한 제자는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기원전 348/347)이다. 플라톤은 스승의 철학 방식을 계승해 대화체로 많은 책을 썼다. 그러므로 그의 책에는 당대의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죽은 소크라테스는 멘토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스승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때까지의 모든 사상을 한 데 통합하려는 웅대한 뜻을 품었다. 이오니아 철학의 자연과 그 근원에 대한 관심, 소피스..
그리스로 옮겨온 철학 소피스트 페리클레스 시대에 민주정이 발달한 아테네에서는 토론과 설득의 기술이 중요했다. 자신의 생각을 설득력 있게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출세하는 세상이었다. 물론 전통적인 신분이나 재력도 여전히 중요했지만, 이제는 평민층의 발언권이 커졌으므로 누구든 논리와 수사에 능하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의회나 법정에서 연설을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각 공직자로 발탁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아테네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바로 소피스트이다. 철학(philosophia)이라는 말이 ‘지혜(sophia)를 사랑한다(phailos)’는 뜻이듯이, 훗날 ‘궤변가(詭辯家)’라는 좋지 못한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 소피스트도 원래는 ‘지혜로운 자’라는 뜻이었다. 지혜..
이오니아에서 탄생한 철학 탈레스 다른 모든 것이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았다 해도 철학만큼은 순전히 그리스인의 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철학이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권위의 부재를 틈타 탄생한 것이라면 가장 권위가 약한 곳에서 가장 먼저 철학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그리스 본토보다 앞서 이오니아에서 싹트게 된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소아시아의 밀레투스는 지중해 세계와 오리엔트 세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무역의 중심지로서 번영하는 국제 도시였다. 이 밀레투스에서 최초의 서양 철학자로 불리는 탈레스Thales(기원전 625/624년경~기원전 547/546년경)가 처음으로 철학적인 물음을 던진다【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리스 고전 철학이 성립하는 시기에 마침 중국에서도 제자백가의 시대를 맞았다는 사..
4장 사상의 시대 민주주의가 가능한 이유 서양의 역사가들은 그리스를 서양 문명의 요람으로 간주한다. 그 이전의 크레타와 더 이전의 오리엔트에서 발달한 문명이 그리스 문명의 선구라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리스 시대에 와서야 서양 문명의 골격이 갖추어졌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그리스가 오늘날 유럽에 속하기 때문일까? 천박한 유럽 중심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실제로 그것을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더 충실한 근거를 든다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리스의 민주주의이고, 둘째는 그리스 고전 시대의 사상이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근대 민주주의로 부활했으며, 그리스 시대의 철학과 정치사상은 오늘날까지 서양 사상의 원류가 되고 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에 민주주의가 발달했다는 것을..
공멸을 가져온 전쟁 아테네는 오히려 전쟁을 바라고 있었다. 육군이 강한 스파르타니까 힘은 제법 쓰겠지만 전쟁은 물리력만으로 되지 않는 법, 결국에는 아테네의 풍부한 재력과 병력이 말을 할 터이다. 더구나 스파르타가 자랑하는 완력은 육군에만 해당할 뿐 해군력에서는 아테네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스파르타에 운이 따른 걸까? 개전하고 얼마가 지난 기원전 430년 여름에 페스트가 아테네를 급습했다. 아테네의 위대한 지도자 페리클레스마저 페스트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려던 아테네로서는 치명타였다. 두 나라의 전력은 이 사건으로 대뜸 엇비슷해졌다. 그 덕분에 이후 전쟁은 지지부진한 지구전으로 10년을 끌었다. 선수들이 지치면 휴식을 취하고 나서 다시 붙을 수밖에 없다. 기원전 421년..
분쟁의 싹 아테네는 민주정과 제국 체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었다. 아테네가 번영하는 만큼 폴리스들은 결집력이 점점 약해지고 반감이 심해졌다. 그렇게 보면 아테네는 처음부터 제국이 되기에 자격 미달인 셈이었다【고대 제국(당시에는 페르시아와 중국)은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먼저 외적 조건으로 속국을 거느리는 것인데, 폴리스들의 군자금을 아테네에 바치는 조공으로 본다면 아테네도 그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국의 내적 조건, 즉 중앙집권은 아테네가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갖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설사 지리적 중심이 있었다 하더라도 아테네는 제국으로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테네가 제국 체제를 지향한 것은 그리스의 폴리스 체제가 수명을 다했다는 것..
전후의 새 질서 페르시아 전쟁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 이후에 그리스 고전 시대가 활짝 열렸고 이를 바탕으로 서양 문명의 뿌리가 자라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란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수십년 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긴 전쟁을 한 차례 더 치르고서야 그리스는 평화를 되찾게 된다. 그런데 묘한 일은 그것을 정점으로 그리스 반도는 외부(마케도니아)의 침략으로 문명이 쇠퇴하고 그 대신 지중해 문명이 싹트게 된다는 점이다. 오리엔트의 대적을 물리친 경험은 그리스 반도에 새로운 판세를 가져왔다. 우선, 비록 승리는 했지만 페르시아는 여전히 공포를 느끼게 하는 존재였으므로 그리스 전체가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대처 방식은 폴리스들이 동맹을 결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맹주는 누굴까..
유럽 문명을 구한 아테네와 스파르타 마라톤 전투에서 재미를 본 그리스 연합군은 이번에도 페르시아의 육군을 상대할 전략적 지점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병력 차이가 워낙 나는 만큼 10년 전처럼 평원에서 막을 수는 없었으므로 그들은 아티카의 관문인 테르모필레의 좁은 산길을 방어 장소로 정했다. 스파르타의 정예병 300인대를 비롯해 3000여 명의 그리스 연합군은 속속 테르모필레로 모여들어 결사 항전의 태세를 취했다. 여기서 페르시아군을 쳐부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오래 저지해야만 페르시아 해군의 측면 공격을 유도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아테네가 준비한 함선들이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테르모필레에서는 절대 열세의 상황에서도 접전이 벌어졌고, 바다에서 아테네 함대는 페르시아 함대와 맞섰다. 그러나 중과..
최후의 승부 마라톤에서의 허망한 패배에 다리우스는 격분했다. 세계의 어느 곳을 정복할 때보다 더 많고 더 강한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페르시아는 그리스 원정에서 두 차례나 보기 좋게 고배를 마셨다. 더구나 1차 파병 때는 주요 목표(이오니아 반란의 진압)를 달성한 다음에 내친 김에 실행한 원정이었고 폭풍을 만나 철군한 것이었으나, 2차 때는 철저한 준비와 계획이 뒷받침된 원정인데도 패했기에 충격이 더욱 컸다. 대군으로 실패했다면 더 큰 대군을 보내리라. 다리우스는 패전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전에 곧바로 3차전의 준비에 들어갔다. 준비의 원칙은 간단했다. 무엇이든 지난번보다 더 많이, 더 크게 준비하라. 조공국들이 할당받은 전쟁 준비물은 함선과 말, 식량, 수송선 등 모든 부분에서 이전의 규모를 훨씬 넘는 것이..
마라톤의 결전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이를수록 좋다. 다리우스는 아토스 곶에서 참사를 겪은 후 불과 2년 만에 다시 그리스 원정군을 발진시켰다. 이번에도 역시 휘하의 조공국들에 임무 분담을 하달한 다음, 다티스와 아르타페네스 두 명을 사령관으로 삼아 대규모의 다국적 연합군을 편성했다. 하지만 2년 전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를 안겨주었던 아토스 곶은 피해야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연안을 따라가는 항해 대신 바다를 가로지르는 해로를 택했다. 사모스에서 키클라데스 제도를 거쳐 아테네로 직진하는 것이다. 기원전 490년, 600척의 함선에 나누어 탄 페르시아의 대군은 먼저 몸풀이 삼아 낙소스 섬을 간단히 제압하고 곧바로 일차 목표인 에우보이아 섬의 에레트리아를 공격했다. 페르시아에 대항할 힘이 없는 ..
최종 목표는 아테네 전쟁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났을 무렵, 페르시아는 소아시아의 해안 지대와 섬의 폴리스들을 모조리 점령했다. 페르시아 측에 협력하는 폴리스에는 지배 관계를 확실히 다지고, 말을 듣지 않는 폴리스는 잔인하게 불태워 파괴하는 식이었다. 결국 이오니아는 뭐하러 반기를 들었나 싶을 만큼 아무런 성과도 없이 쓴맛만 보고 다시 페르시아에 복속되었다【페르시아는 점령한 폴리스의 참주를 내쫓고 민주정을 지원했는데, 이는 민주정을 옹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정복지에 왕정을 승인하지 않으려는 조치였다】. 그런데 반란을 너무도 손쉽게 제압하자 다리우스의 생각이 달라졌다. 마침 이오니아에 출병한 병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내친 김에 말썽 많은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들까지 평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더욱..
3장 전란의 시대 최초로 맞붙은 동양과 서양 페르시아가 안정을 찾고 명실상부한 세계 제국을 이루자 다리우스의 마음은 다시 서방으로 향했다. 동쪽으로 인도, 남쪽으로 이집트와 리비아를 정복했으니 이제 남은 건 서쪽뿐이다. 인도 내륙은 오지여서 정복의 대상이 아니었다(한편, 다리우스는 북방의 스키타이와 싸워 곤욕을 치른 바 있다. 하지만 이들을 북쪽으로 몰아내 이후 침략을 줄이는 데는 일조했다). 물론 다리우스가 인도에서 동쪽으로 더 멀리 가면 동북아시아 지역에 또 하나의 강력한 문명이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서방의 지중해 세계만 정복하면 다리우스는 ‘천하 통일’을 이루는 셈이었다. 사실 다리우스는 그리스까지 정복할 마음은 별로 없었고 이오니아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페르시아..
그리스의 이질적인 요소 스파르타가 아테네 사태에 개입함으로써 그리스 국제사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물론 그 이전에도 스파르타가 다른 폴리스들과 교류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 사건으로 스파르타는 도리스인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자리 잡은 이래 최초로 국제 무대에 등장한 셈이다. 하지만 그리스 전체로 볼 때 더 중요한 사실은 아카이아 전통의 그리스에 처음으로 이질적인 요소가 섞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스파르타는 어떤 점에서 이질적이었을까? 스파르타는 스파르타 교육이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지만, 원래 공식 명칭은 라케다이몬(Lacedemon)이다. 라케다이몬이란 신화 속의 인물인데, 제우스의 아들로 태어나 에우로타스의 딸 스파르테와 결혼해 그 왕위를 계승했다고 한다. 스파르타라는 이름은 스파르테에서 나온 ..
실패한 개혁은 독재를 부른다 귀족의 전성시대는 끝났다. 아직도 그리스에서 가장 힘센 세력을 꼽으라면 단연 귀족이겠지만, 이제는 그들도 과거처럼 토지를 소유하는 것만으로 정치권력도 함께 보장받기는 어려워졌다. 구태의연한 귀족은 몰락하고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시대적 감각에 눈뜬 귀족만이 살아남고 번영할 수 있었다. 그럼 ‘새 시대의 귀족’은 어떻게 했을까? 다른 폴리스들에 비해 그 역사가 상세히 전해지는 아테네의 상황에서 당시의 급변하는 정세를 엿볼 수 있다. 아테네의 귀족들은 우선 전통적인 정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새로이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 평민들의 이해관계를 수용하기로 했다. 전통적인 귀족정치는 과두정, 즉 집단 지배 체제였다. 의사 결정 기관은 아레오파고스(areopagos, ‘아레스의 언덕..
폴리스의 형질 변경 그리스 폴리스들 간의 관계가 마냥 목가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투키디데스는 기원전 8세기~기원전 7세기에 코린토스와 케르키라, 칼키스와 에레트리아 간에 전쟁이 있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폴리스’와 달리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정치적인 문제보다 경제적인 문제로 다투었다. 폴리스에 중요한 것은 영토 확장보다 무역의 독점이었다. 그래서 경제생활의 변화는 곧장 폴리스 체제의 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이 장악한 초기의 폴리스 체제는 애초부터 그리스의 ‘체질’에 맞지 않았다. 그리스는 농경에 의존하는 지역이 아니라 무역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소유한 토지에서는 농경과 목축이 어느 정도 발달했으나 이내 그리스 경제는 무역 지향적으로 궤도..
2장 폴리스의 시대 과두정이 낳은 폴리스 이오니아는 오리엔트와 가까운 만큼 그리스 본토보다 선진 문물을 수입하는 데 유리했으나, 원래 그리스 땅이 아니라 이민족들이 사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개척이 쉽지 않았다. 우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이었다. 이오니아에 온 그리스인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딜까? 바로 해안이다. 그리스인은 원래부터 바다에 익숙했을 뿐 아니라 무슨 사태라도 벌어지면 언제든지 배를 타고 도피해야 했으므로 해안에 근거지를 잡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피난 살림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근거지 주변에 튼튼한 성벽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폴리스의 기원이다. 밀레투스와 에페소스 같은 도시들이 이 무렵에 건설된 이오니아의 그리스 식민시들인데, 특히 밀레투스는 예전부터 있던 도..
암흑을 가져온 민족 공교롭게도 트로이 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전쟁을 주도한 미케네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미케네는 원래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왕국이었다. 개방성이 강한 크레타의 궁전들에 비해 미케네 왕궁은 강력한 성벽으로 둘러싼 요새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성벽을 이루는 돌들이 워낙 커서 ‘키클로페스의 성벽’이라 불렸다고 한다. 키클로페스는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이다). 예술 양식도 크레타 문명에서 물려받았으나 그 내용은 전쟁이나 사냥을 주제로 한 것들이 많았다. 이렇게 힘센 왕국이 왜 무너졌을까? 문명이란 물리력에 의해 발전하는 게 아니다. 물리력을 통해 문명을 개척할 수는 있겠지만, 그 이후의 지속적 발달을 위해서는 물리력이 오히려 약보다 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앞서 보았던 오리엔트의 강..
신화와 역사의 경계 당시 그리스와 이오니아가 맞부딪는 과정은 두 개의 그리스 신화 속에 전해지고 있다. 첫째는 오프닝 게임에 해당하는 아르고호의 원정이다. 그리스 중부 테살리아 출신의 해적인 이아손은 이오니아에 빼앗긴 그리스의 보물인 황금 양피【황금 양피는 헤르메스 신이 테살리아의 네펠라라는 왕비에게 선물로 준 양의 가죽이었다. 네펠라는 남편이 후궁을 얻자 자기 아이들을 구박할까 두려워 아이들을 양의 등에 태워 멀리 보낸다. 양은 동쪽으로 날아갔는데, 그만 헬레라는 이름의 여자아이가 바다로 떨어졌다. 그래서 그리스 시대에 이 바다는 헬레스폰토스(‘헬레의 바다’)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오늘날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고 있는 터키의 다르다넬스 해협이다. 양은 계속 날아가 흑해 연안의 콜키스 왕국에 사내아이를 내..
크레타를 대신한 그리스 크레타가 지중해의 패자로 군림할 때 그리스 반도에 아무도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아주 옛날 그리스에는 펠라스기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말하자면 그리스의 원주민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기원전 2000년 무렵 북쪽에서 사나운 민족이 내려와 펠라스 기인들을 제압하고 그리스의 지배자가 되었다. 바로 아리아인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 남하한 아리아인들이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을 정복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서쪽의 유럽으로 이동한 아리아인들은 ‘따뜻한 남쪽’을 찾아 그리스 남부에 이르렀다. 인도로 간 아리아인이 인더스 문명을 파괴하고 카스트 제도를 만들어 원주민을 차별한 것과는 달리, 그리스에 온 아리아인은 원주민과 자연스럽게 혼혈과 혼합을 이루면서 새로운 문명을 개척했다【호메로스의..
오리엔트와 그리스의 중매 크레타에 청동기시대가 시작된 시기는 기원전 3000년경이니까 상당히 오래다. 하지만 그 무렵에는 아직 문명이라고 부를 정도가 못 되었고, 본격적인 미노스 문명은 오리엔트 문명의 세례를 받으면서 싹이 트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고대 지중해를 주름잡았던 페니키아 상인들의 공로가 컸을 터이다. 섬이라는 유리한 지형 조건을 이용해 고대 크레타인들은 일찍부터 해상무역(물론 해적질도 포함된다)에 진출해 지중해 동부의 교역에서 큰 몫을 했다. 앞서 말한 수수께끼의 해상 민족들에게 선배가 되는 셈이다. 기원전 2000년쯤 되면 크레타에는 문자가 사용되고 섬 전체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크노소스 궁전을 비롯해 크레타의 여러 건축물은 이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후대의 학자들은 ..
1장 그리스 문명이 있기까지 신화가 말해주는 역사 오리엔트에서 배태된 문명의 씨앗이 처음 뿌리를 내린 곳은 지중해 동부 에게 해의 크레타 섬이었다. 지도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듯이, 에게 해는 유럽의 가장 동쪽에 속하며, 크레타는 수많은 작은 섬이 떠 있는 다도해 남부에 섬들의 맏형처럼 넉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리스 문명 이전에 그 바로 동쪽의 크레타와 에게 해의 섬들에서 문명이 먼저 발생했다는 사실은 오리엔트 문명의 서진 현상을 뚜렷이 보여주는 한 증거다. 크레타 문명은 미노스 문명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전설적인 크레타의 지배자 미노스 왕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미노스의 이름은 다소 낯설지 모르겠지만 미궁이라는 말은 낯익다. 미노스는 바로 미궁으로 유명했던 크노소스 왕궁의 ..
2부 뿌리① 크레타는 지리적 위치 덕분에 오리엔트 문명의 한 자락을 거머쥘 수 있었으나 큰 문명을 담을 그릇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서양 문명의 뿌리는 곧바로 그리스 반도로 넘어간다. 포도와 올리브밖에 자랄 수 없는 척박한 토양,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일찍부터 해상 활동에 나서서 동부 지중해 일대를 주름잡으며 수많은 식민시를 건설한다. 그러나 문명의 뿌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심을 되찾으려는 오리엔트의 강력한 도전을 물리쳐야 했는데, 그것이 페르시아 전쟁이다. 여기서 승리한 아테네를 중심으로 그리스는 오리엔트와 질적으로 다른 문명을 건설한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서양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빛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로마인들은 “빛은 동방에서 왔다.”라는 말로 고대 로마 문명이 오리엔트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혔다(오리엔트라는 말 자체가 원래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이 말을 바꾸면 “빛은 서방으로 갔다.”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빛이 서쪽으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문명의 빛은 왜 처음 태어난 곳에서 계속 자라고 발전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까? 첫 번째 요인은 지리에 있다. 현대 구조주의 역사가인 브로델(Fernad Braudel)은 역사의 가장 깊은 심층에 지리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역사, 이를테면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를 정복했다는 정치사, 어디와 어디가 교역을 했다는 경제사, 관료제와 토지제도가 어떠했다는 사회사 등은 모두 근원적으로는 지리적 ..
열매를 주운 페르시아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고 했던가? 파괴와 정복은 무력만으로 가능하지만 건설과 발전은 문화적 토양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시리아는 진정한 통일 제국의 자격이 부족했다【사실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서 수천 년 간 문명의 중심은 이집트였다. 만약 기원전 13세기 히타이트와의 충돌에서 이집트가 승리하고 그때 오리엔트의 통일을 이루었다면, 문명의 중심은 유럽으로 옮겨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기회가 사라지고 군국주의 아시리아가 통일을 이룩한 데서 이미 오리엔트 문명은 끝을 보이고 있었다】. 오로지 정복만이 유일한 에너지원이었던 아시리아는 막상 정복이 끝나니 더 이상 제국을 굴려갈 동력이 없었다. 엘람을 정복한 최후의 정복 군주 아슈르바니팔이 죽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4장 통일, 그리고 중심 이동 고대의 군국주의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붕괴로 인한 힘의 공백, 그리고 기원전 10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철기 문명은 오리엔트 세계를 다시금 여러 세력의 각축장으로 만들었다. 이집트는 여전히 존재했으나 건재하지는 않았다. 시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오히려 기원전 10세기~기원전 7세기까지 리비아와 에티오피아의 지배를 받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이스라엘 왕국과 페니키아 상인들이 지배하는 도시국가들이 생겨났고, 히타이트의 잔존 세력은 옛 고향 근처인 아나톨리아 동남부로 돌아가 카르케미시, 밀리드, 타발 등의 작은 도시 국가들을 이루고 근근이 살아갔다. 아나톨리아 고원에는 서쪽의 유럽에서 온 프리지아와 새로 통일을 이룬 우라르투가..
서양의 종교를 만든 헤브라이 알파벳을 만들고 오리엔트 문명을 지중해 일대에 퍼뜨린 공적이 없었더라면 역사에서 페니키아라는 이름은 아주 작게 언급되고 넘어갔을 것이다. 페니키아라는 실체 자체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위상을 지닌 민족이 하나 더 있다. 헤브라이(히브리)라고 불리는 민족이다. 지금은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헤브라이인들 역시 페니키아인들처럼 당대에 강성한 나라를 이루고 세력을 떨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페니키아의 알파벳에 못지않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유산을 서구 문명에 전달했다. 바로 그들의 독특한 유일 신앙인 유대교다. 유대교의 신앙과 헤브라이인의 역사를 서술한 경전은 『구약성서』이고, 유대교를 모태로 탄생한 종교는 그리스도교..
서양의 문자를 만든 페니키아 몰락하는 자가 있다면 흥기하는 자도 있는 법이다.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쇠퇴는 오리엔트 세계에 힘의 진공 상태를 빚었다. 특히 히타이트의 붕괴는 그들만이 보유하고 있던 제철 기술을 오리엔트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켜 본격적인 철기 문명으로 전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때마침 제3세력으로서 메소포타미아 동부를 장악한 카시트도 기원전 13세기에 엘람과 아시리아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 상태였다. 상위 랭커들이 몰락하는 것은 하위 랭커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다. 이 기회를 틈타 흥기한 세력은 누굴까? 비옥한 초승달이 부풀기 시작하던 무렵, 지중해 동부 연안에도 문명의 물결이 밀려왔다. 지금의 시리아와 레바논에 해당하는 이지역에는 우가리트, 티로스(티레), 시돈, 비블로스, 베리토스 등 여러..
3장 새로운 판 짜기 수수께끼의 해적들 카데시 전투 이후 오리엔트의 쌍웅인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묘하게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한 탓일까? 물론 그 이유도 있겠지만 카데시 전투 이외에 별다른 전쟁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일단 내부의 문제가 있었다. 이집트는 종교 사제들의 권력과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국가의 기틀이 서서히 무너져갔다. 원래 이집트인들이 섬기는 신은 태양신인 레(또는 라)였는데, 여기에 테베를 수도로 삼은 중왕국 초기에 테베의 수호신이던 아몬을 덧붙여 아몬-레 신앙이 생겨났다. 그러나 기원전 14세기의 파라오인 아멘호테프 4세는 수백 년간 섬겨오던 아몬-레를 버리고 일신교적 성격이 강한 또 다른 태양신인 아톤을 ..
무승부로 끝난 대결 이제 오리엔트의 세력 판도는 아시아의 선두 주자로 부상한 히타이트와 아프리카의 대표 이집트가 시리아 일대에서 맞서는 형국이 되었다(메소포타미아 남부와 옛 바빌로니아 지역은 서쪽 이란 고원 출신의 카시트 왕국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이 오리엔트의 주역으로 떠오르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철제 무기를 앞세운 신흥 강호 히타이트와 선진 문명을 자랑하는 전통의 강호 이집트의 대결은 그 자체로도 흥밋거리겠지만, 역사적으로도 장차 오리엔트 세계의 향방을 좌우할 중대한 사건이었다. 기원전 14세기 중반 히타이트가 강력한 군주 수필룰리우마스 1세의 치하에 미탄니를 복속하고 시리아로 진출하는 동안, 이집트는 내부의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이윽고 기원전 13세기 초반에 즉위한 유능하고 혈기 ..
아리아인의 등장 오리엔트 세계가 산고를 치를 무렵,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세력 판도에는 새로운 변화가 발생했다. 인도·유럽어족의 국가들이 새로 생겨난 것이다【원래 민족 구분은 혈통이 아니라 언어를 기준으로 한다(최근 유전학의 발달로 고대 민족들의 혈통을 추적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충분치 않다). 그러므로 셈족과 인도유럽어족이라는 명칭은 언어의 계통 분류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하위 구분으로 고대사에 등장하는 여러 민족 이름들은 대부분 지역의 이름에서 나온 것들이다】. 당시 이 일대의 여러 나라는 특별히 동질적인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기본적으로는 셈족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판도에 느닷없이 등장한 인도ㆍ유럽어족은 과연 어디서 온 걸까? 그 해답은 인도의 초기 ..
최초의 국제사회 힉소스가 이집트를 공략하려고 준비하던 무렵, 그때까지 혼란과 분열을 겪던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서서히 안정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수메르의 우르 왕조가 쇠퇴하자 서쪽의 아모리인들이 그들 세력을 대신했다. 아카드와 수메르의 중간 지점인 바빌론(지금의 이라크 바그다드 남쪽)을 중심으로 흥기한 이들은 점차 세력을 키워 메소포타미아 고대사에서 처음으로 비중 있는 나라로 기록되는 바빌로니아를 세웠다【기원전 7세기에 등장하는 신바빌로니아와 구분해 이때의 바빌로니아를 고(古)바빌로니아라고 부른다】. 불과 수십 년밖에 이름을 떨치지 못한 고바빌로니아가 후대에까지 특별히 기억되는 이유는 바로 바빌론의 슈퍼스타 함무라비 왕(기원전 1792~기원전 1750)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에 ..
초승달의 양 끝이 만났을 때 이집트와는 달리 메소포타미아는 사방이 탁 트인 지역이다. 그러므로 문명의 씨앗도 한 곳에만 치중되지 않고 여러 군데에 골고루 퍼져나갔다. 아나톨리아의 고원에서 내려온 민족의 후예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중류인 아카드와 하류인 수메르 지역에 터를 잡고 여러 개의 도시국가들을 세웠으나 그들 이외에도 이 일대에서는 문명의 빛이 곳곳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아라비아 사막 출신의 셈족 유목민들은 몇 차례의 민족이동으로 사막 지대를 벗어나 서쪽과 북쪽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서쪽으로 간 사람들은 지중해 동부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고대 문명을 열었고, 기원전 8000년경~기원전 7000년경 지금의 요르단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도시로 기록되는 예리코(ericho, 『구약성서』에는 ..
2장 충돌하는 두 문명 신국의 역사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3000년 동안 수십 개의 왕조가 등장하고 퇴장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결코 단일한 역사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편의상 그것들을 뭉뚱그려 이집트 왕국이라고 부르고 각 왕조에 일련번호를 매겨 구분하지만, 각각의 왕조는 사실상 별개의 나라나 다름없었다(우리 역사에 등장했던 고대 삼국과 고려, 조선을 ‘한반도 왕국’이라고 통칭할 수 있을까?). 당시 이집트인들은 단일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역사를 진행한 게 아니었다.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중국이 곧 천하였듯이, 이집트인들에게 이집트란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세계 전체였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천하의 주인은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였다. 반면 이집트인들의 ‘천자’는 바로 파라오였다. 사실 파라오는 천자보다..
강에서 일어난 사람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비슷한 시기에 이집트의 나일 강변에서도 독자적인 문명이 발생했다. 나일 강은 메소포타미아의 강들과 다른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나일 강 하구 유역에는 특별한 지형적 굴곡이 없어 걸핏하면 강물이 범람했던 것이다. 일단 그 결과는 홍수였지만 장기적으로 그것은 재해가 아니라 축복이었다. 상류로부터 내려온 퇴적물이 쌓이면서 나일 강 삼각주의 토양이 비옥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도 치수는 중요했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이 지역의 지배자들은 오히려 적당한 시기에 강물이 범람해주기를 기원했다. 그러니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 기원전 484년경~425년경)가 이집트를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부른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그가 이집트에 ..
1장 두 차례의 혁명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 그것은 혁명이었다. 인류는 마치 500만 년 전에 탄생한 이후 499만 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번데기로 지내다가 1만 5000년 전에 갑자기 화사한 나비로 탈바꿈한 듯했다. 그러고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햇빛을 누릴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는 모르지만……. - 『최초의 혁명』에서 인류의 ‘화려한 변태’를 낳은 것은 농업과 사육이었다.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이나 구석기로 생활하다가 1만 5000년경부터 신석기시대로 접어들었다. 두 시대는 단순히 ‘신구’의 차이만 있는 게 아니다. 같은 석기시대라도 신석기시대는 구석기시대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음식물을 구하는 방법에 있다【예전에는 석기를 만든 방식을 기준으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나누었다. 구..
1부 씨앗 문명의 빛이 처음 내리쬐인 지역은 오늘날 터키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 고원으로 추정된다. 그와 거의 동시에 남쪽 나일 삼각주에서도 이집트 문명이 싹튼다. 두 문명은 초승달 모양의 이 일대를 점차 환하게 밝힌다. 초승달의 양 끝이 만나면서 오리엔트 문명이 생겨나고 인류 역사상 최초의 국제사회가 형성되지만, 이 지역은 갈수록 확대되는 문명을 담당할 중심지가 되지 못한다. 오리엔트 문명은 점차 서쪽으로 중심을 이동하면서 유럽 대륙의 동쪽 끝자락인 크레타와 그리스에 전해진다. 이후 오리엔트는 문자(알파벳)와 종교(그리스도교)의 두 가지 큰 선물을 서양 문명에 전함으로써 뿌리의 역할을 다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프롤로그: 끊임없이 중심을 이동하며 꽃피운 서양 문명 바람에 날려간 씨앗이 인류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을 말할 때 사람들은 흔히 4대 문명의 발상지라는 말을 쓰지만, 실은 2대 문명이라고 해야 한다. 먼저 하나는 황허 문명인데, 이것은 지금 동양 문명의 뿌리다. 나머지 세 문명은 황허 문명처럼 궤적이 확실하지 않다. 인더스 문명은 도시 유적만 남겼을 뿐 후대에 전승되지 않았고,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은 한데 합쳐져 서양 문명의 모태가 되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문명은 크게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의 두 가지인 셈이다(물론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아메리카에도 고대 문명이 있었지만, 오늘날과의 관련성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마이너’ 문명일 수밖에 없다). 동양 문명은 곧 중국 문명이다. 중..
중국사(中國史) 목차 개요: 중국역사개관 1) 고대시대(古代時代) 중국역사 십팔사략 삼황(三皇) 시대 천황씨 & 지황씨 인황씨 & 유소씨 & 수인씨 복희씨 & 신농씨 오제(五帝)의 시대 황제씨 황제의 아들 태평성대를 누린 요순시대 ‘격양가’와 요(堯) 임금 효로 선양 받은 순임금 하왕조와 상왕조의 흥망 치수를 잘한 우왕 2) 은주시대(殷周時代) 중국역사 십팔사략 상나라의 탕왕과 주왕 은혜가 새에게도 미친 탕왕 주나라의 고공단보와 문왕 공평무사한 문왕 은나라 정벌과 백이숙제 은나라 폭군 주왕 백이와 숙제 태공망 여상의 이야기 문왕, 여상을 만나다 주공의 치세와 유왕과 포사의 폭정 신중하게 행동한 주공 단 포사에게 빠진 유왕 3) 춘추시대(春秋時代) 중국역사 십팔사략 개요 최초의 패자 제환공과 관중 제환공의..
10. 위나라 조씨 정권의 몰락, 오의 멸망과 진(晉)의 성립 ① 위(魏)의 정권을 장악한 사마씨 정권 1. 대장군이 된 조상(曹爽)은, 인척이란 유리함으로 사마의의 지위를 명목상으로 올려줬을 뿐 실권은 빼앗음. 2. 새해에 조상(曹爽)이 임금 조방(曹芳)을 따라 멀리 떠나자, 사마의는 쿠데타를 일으켜서 성공함으로 지휘권을 받고 조상의 일가를 물살시킴. 3. 이후로 사마사(司馬師)와 사마소(司馬昭) 형제가 정권을 장악했으며 조조의 손자인 조환(曹奐)을 꼭두각시 천자로 세워놓고 모든 정권을 오로지함. ② 진(晉)의 성립 1. 촉이 멸망한 지 2년 후의 사마소가 죽고 그의 아들 사마담(司馬炎)이 즉위했으며 위나라 마지막 임금인 조환은 제위를 양위한다는 조서를 발표함. 2. 황제의 인수를 받은 사마염은 나라 ..
9. 제갈량의 출사표와 죽음, 그리고 촉한의 멸망 ① 촉한의 멸망 1. 사마소가 등애(鄧艾)와 종회(鍾會)를 장수로 삼아 촉한을 쳐들어가자, 갑작스런 공격에 후주 유선(劉禪)은 당황하고 항복하기로 결정함. 2. 후주의 아들 유심(劉諶)은 간언하였으나 후주가 받아들이지 않자 유비의 사당에 나가 통곡한 다음 자결함. 3. 후주는 43년 만에 멸망함(서기 263년).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후황제 유선에게 올린 상주문(上奏文) 제갈량의 선정(善政)과 읍참마속
8. 위(魏)ㆍ촉(蜀)ㆍ오(吳)의 삼분천하(三分天下) ① 위(魏)가 월등한 세력으로도 통일을 못한 까닭 1. 위(魏):오(吳):촉(蜀)=6:2:1의 월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정에선 귀족이 황제를 억압하고, 지방에선 호종이 중앙간섭을 차단함. 2. 조조 때엔 지방 실력자를 결집하여 나라를 세웠으나, 조비 때엔 귀족세력의 팽창으로 후한 말과 같은 상황이 전개됨. 3. 그런 중심세력이 사마의(司馬懿) 세력으로, 총사령관 직분을 이용하여 차츰 자신의 권력을 증대시켜 나가다가 조예가 죽기 직전에 사마의를 태부(太傅)로 삼아 어린 아들 조방(曹芳)을 보좌하게 함으로, 조씨와 사마씨의 권력다툼이 시작됨.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주유의 통찰을 무시한 손권과 괄목상대인 여몽 관우의 최후, 오나라 조자의 패..
7. 적벽대전 ① 조조의 야심과 유종의 항복 1. 조조는 중국 통일을 목표로 공격 목표를 남쪽으로 돌려 형주와 강동을 집어 삼키려 함. 2. 형주의 유표가 죽고 유종의 뒤를 이은 때였으나, 이미 겁에 질린 유표는 지레 조조에게 항복해 버렸음. 3. 진퇴양난 기로에 놓인 유비는 병력과 물자의 중요보급 기지인 江陵을 향해 퇴각함. 4. 조조는 유비를 추격해 장판파에서 대승하여 유비는 처자를 버리고 도망쳐야 하는 곤욕을 치름. ② 손권과 유비의 연합 1. 손권은 조조의 백만대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군사를 시상(柴桑)에 주둔시킨 채, 정세의 변화를 예의주시함. 2. 별다른 대책이 없던 손권은 노숙을 파견했으며 노숙은 유비에게 연합할 것을 제의하자 승낙했고 제갈량을 시상에 파견하여 작전을 짜게 함. ..
6. 손권과 유비, 제갈량을 처음 만나 세상을 논하다 ① 손권의 세력 1. 아버지 손견(孫堅)과 형 손책(孫策)이 단단히 다져논 기반 위에 유능한 장군을 등용해 병력을 키워나감. 2. 양자강 중류에서 절강까지의 세력을 병합하여 기세를 떨침(북으로 조조의 영토와 서쪽으론 영토와 접하고 있음). ② 유비의 세력 1. 유비는 황건적의 난 때 관우ㆍ장비 등과 황건적 토벌군에 가담했으나 안희현 현위가 되었을 뿐, 20년 동안 유랑 생활을 함. 2. 유표의 막하에 들어가 중원 진출을 노렸으나 유표가 반대하여 이루지 못하고 차근차근 준비해 나감.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삼고초려 제갈량과 유비의 첫 만남(三顧草廬)
5. 실력자 원소와 조조의 ‘관도대전’ ① 이곽과 곽사, 그리고 헌제 1. 동탁의 부장인 이곽과 곽사는 동탁의 원수를 갚겠단 명분으로 장안을 공격해 왕윤 등을 죽였으며 둘 사이에 곧이어 정권다툼이 일어남. 2. 헌제는 인질처럼 끌려 다니다가 196년에 낙양으로 돌아와 잿더미 속에서 목숨만을 부지함. ② 관동연합군의 이후 거취 1. 군벌들은 자기 기반 구축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나, 조조는 헌제를 허창(許昌)으로 모셔와 군웅 가운데 가장 두각을 나타냄. 2. 원소는 황하의 중하류 지역에서 여러 호족들을 복종시켜 최대의 군벌 세력이 되었으며, 조조와의 일전은 ‘관도대전’으로 남아 있음. 3. 관도대전에서 조조는 수적, 지형적 열세에 있었으나, 냉철한 판단력으로 이겼으며, 2년 후에 원소가 죽고 아들들이 잠시동..
4. 동탁의 전횡과 동탁 토벌작전 ① 동탁의 낙양 입성과 횡포 1.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동탁은 환관과 원소와의 혼란스런 싸움을 틈타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달려가 낙양을 장악해 버림. 2. 낙양을 장악한 동탁은 소제를 폐하고 9살의 협(協)을 황제로 세우니, 이 사람이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임. 3. 하태후를 독살하고 상국(相國)이란 높은 지위까지 올라 황제의 권위를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하며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름. ② 동탁 토벌 작전 1. 횡포가 극심해지자 원소는 낙양을 떠났으며 군벌들은 원소를 맹주로 함곡관 동쪽에서 모임(關東軍). 2. 위기감을 느낀 동탁은 헌제를 데리고 전략적 요충지인 장안으로 향하며 낙양에 있던 모든 것을 불사름. 3. 관동군이 각자의 이해관계로 움직이지 않자 동탁은 ..
3. 후한의 혼란과 원소의 등장 ① 후한 말기의 혼란 1. 후한 왕조는 황건의 난으로 통치기반이 흔들리고 있었으며 영제가 죽자 외척과 환관이 정권을 잡기 위해 싸움을 벌임. 2. 14살인 황태자 변(辯)이 즉위하자 그의 어머니 하태후(何太后)가 섭정하게 되었고 그녀의 오빠인 하진(何進)이 정권을 쥠. 3. 환관 건석은 당대의 실력자임에도 하진이 정권을 잡자마자 건석(蹇碩)을 죽임. ② 원소(袁紹)의 등장 1. 때마침 원소가 하진에게 환관을 주살해야 한다고 권하자 결정을 내릴 수 없던 하진은 하태후와 의논하였으나 하태후가 이를 반대하여 제거 계획은 지연됨. 2. 원소는 용감한 장수를 불러 모으고 있었으며 하진에게 태후를 위협하자고 함(동탁이 수도로 오게 된 배경). 3. 이 소식은 환관의 귀에 들어가 하진..
2. 황건적의 난 ① 태평도(太平道) 1. 실의에 빠진 농민들 사이에서 유행했으며 장각(張角)이란 사람이 황제ㆍ노자의 도를 가르친다는 명목의 신앙단체임. 2. 장각은 10년 동안 신도의 수가 수십만 명에 이르자 신도들을 36방(方)으로 조작하였으며 거사(渠師)라는 두목을 두어 통솔하게 함. ② 황건의 난 1. 184년에 태평도의 각 지부가 군사조직으로 전환되어 일어난 대규모 농민 봉기임. 2. 불에서 흙이 생성된다는 음양오행설로 화덕(火德)인 한(漢)은 망하고 토덕(土德)인 황건의 세상이 온다는 신념으로 황색띠를 동여 매었음. 3. 조정에선 회의를 열어 하진(何進)ㆍ황보숭ㆍ노식을 파견하고 유생의 금고를 해제하여 황건과의 결탁을 막음. 4. 노식을 하북에, 황보숭과 주준을 영천에 파견했으며 황보숭이 장사에..
삼국시대(三國時代) 1. 개요 ① 삼국시대의 정립(鼎立) 1.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군웅이 할거하게 되었으며, 이 가운데 천하를 삼분하여 대치하고 있던 촉한(蜀漢)ㆍ위(魏)ㆍ오(吳)를 삼국시대라 함. 2. 조조(曹操)는 후한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를 맞아들여 천자의 명을 빙자하였으며 당대 명문 출신인 원소를 격파하여 중원 통일의 기초를 마련함. 3. 208년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대군을 강동에 결집시켜 손권ㆍ유비 연합군과 적벽대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여 삼국이 정립하는 형세가 됨. ②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 1. 삼분하여 대치해 있던 삼국은 위의 뒤를 이은 진(晉) 나라에 의해 멸망됨. 위(魏)를 정통으로 삼기에 위진남북조 시대라 부름. 2. 촉한을 토벌한 공로로 진왕(晉王)이 된 사마소의 아들 사마..
7. 2차에 걸쳐 일어난 당고(黨錮)의 화(禍) ① 2차에 걸친 당고의 화 1. 양기의 부인인 손수(孫壽)는 남편의 권력과 동등할 정도로 위세를 부림. 2. 뇌물을 받고 죄를 용서해주었기 때문에 손수의 집에는 뇌물을 바치려는 행렬이 늘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함. ② 1차 당고(黨錮)의 화 1. 이런 혼란 가운데 양태후가 죽었으며 양기의 누이동생으로 환제(桓帝)의 황후였던 양씨도 세상을 떠남. 2. 환제는 이런 틈을 타 양씨 가족을 몰아내기로 함. 3. 환관 당형(唐衡)을 불러 몰아낼 계책을 물으며 모든 호위병들을 집결시켜 양씨 토벌 계획을 실행하여 성공시킴. 4. 그런 기쁨도 잠시 양씨 토벌에 공이 있는 다섯 환관이 열후의 자리에 올라 정치를 자기 마음대로 함. 5. 대학 유생들이 이에 반발하자 환관들은 ..
6. 우허의 활약, 그리고 두태후와 양기(梁冀)의 횡포로 서서히 저무는 후한 ① 외척 두태후(竇太后)의 섭정과 환관 1. 화제(和帝)가 10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그의 어머니 두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 두씨 일족이 권력을 장악하게 됨. 2. 장성한 화제는 이러한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측근인 환관 정중(鄭衆)에게 의지하게 됨. 3. 후한의 후반기는 외척과 환관이 번갈아 정권을 농락하는 일이 계속됨. ② 양기(梁冀)의 횡포 1. 양기(梁冀)는 순제(順帝) 황후의 오빠로서, 자신의 누이가 순제의 황후가 되어 서서히 권력을 손에 쥠. 2. 그는 아버지를 집금오(執金吾)에, 자신을 그 아래 자리인 양읍후에 봉한 후 차츰 관직을 높여 대장군 자리를 승계함. 3. 3년 후 순제가 30세로 죽자 두 살의 황태자가..
5. 후한 시대의 서역 정책과 서역을 평정한 반초의 이야기 ① 반초(班超) 1.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 저자인 반고(班固)의 동생으로, 학식이 풍부하며 흉노가 자주 변경에 침범하여 약탈을 하나 대비하고 있지 않단 소식에 격분하여 무장을 갖추어 원정군에 가담함. 2. 흉노 원정관인 두고(竇固)는 반초를 가사마(假司馬)로 삼고 선선국(鄯善國)으로 보내자, 그는 수행원 36명과 선선왕을 굴복시켜 굴복을 맹세케 함. 3. 우전과 소륵을 평정하고, 서역 남로의 제국을 모두 한의 세력권에 넣어 65년 동안 단절되었던 서역과의 교통을 부활시킴. ② 소극적인 서역 정책과 적극적인 서역 정책 1. 3대 장제(章帝)는 소극적인 서역 정책으로 반초에게 군사를 거두고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2. 반초는 탄원서를 올리며..
4. 광무제의 나라 정상화 작업 ① 수도 낙양 1. 장안이 정미군에 의해 초토화되었고 남양 출신의 광무제에게는 낙양이 자신의 출신지보다 가까웠기 때문에 선정. 2. 광무제의 창업을 도운 개국 공신들도 대부분 남양 출신임. 3. 고조묘(高祖廟)를 세워 자신의 창업이 한왕조의 부흥이란 사실을 명백히 함. ② 정책과 공신회유책 1. 전한 때 시행된 1/30 세(稅) 제도를 부활시키고 군사제도를 소수 정예화하며 생산 활동을 극대화시킴. 2. 노인, 고아, 빈곤자들에 대해 구제 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혼란스럽던 화폐제도를 개혁해야함. 3. 공신들에게 높은 지위를 줄 경우 황제의 권력을 위협하기에 고조가 택한 토사구팽 정책을 버리고 공신들에게 서열에 해당하는 토지와 식읍을 하사하고 후한 상을 내려 그들의 공로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