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12/05 (40)
건빵이랑 놀자
6. 이해 못할 「국화 옆에서」 특정 어휘의 속뜻을 알아야 시를 맛볼 수 있다 앞서 어떤 시인이 부른 노래가 사람들의 정서를 파고들어 깊은 공감을 일으키면, 이것이 자주 여러 시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어떤 특정 단어 위에 사전적 의미를 넘어선 정운(情韻)이 얹히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남포(南浦)’나 ‘절류(折柳)’, 그리고 ‘추선(秋扇)’과 ‘의루(倚樓)’ 등이 다 그런 예들이다. 한시에는 이런 정운(情韻)이 풍부한 어휘들이 유난히 많다. 한시의 언어 특성 상 이러한 어휘들은 시가(詩歌) 언어의 함축을 더욱 유장하고 깊이 있게 해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한시 감상에 있어 이러한 어휘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수반되지 않으면, 전혀 엉뚱하게 읽어 시의 의미를 곡해할 염려가 크다. 대개 ..
5. 저물녘의 피리 소리 예전 진(晉) 나라 때 향수(向秀)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었다. 뒤에 칠현(七賢)이 죽거나 뿔뿔이 흩어진 후 예전 함께 노닐던 산양(山陽) 땅 옛 벗의 집을 지나다가 이웃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듣고 옛 생각에 사무쳐 「사구부(思舊賦)」를 지었다. 이후 석양 무렵의 피리 소리는 지나간 옛날을 그리워함, 또는 가고 없는 벗을 그리워함의 의미가 되었다. 當時逐客幾人存 그때에 쫓겨간 이 몇 이나 남았던고 立馬東風獨斷魂 봄바람에 말 세우니 홀로 애가 끊는다. 烟雨介山寒食路 안개 비 자욱한 개산 한식 길에서 不堪聞笛夕陽村 저물녘 피리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네. 신광한(申光漢)이 참판 김세필(金世弼)의 옛 집을 지나며 지었다는 「과개현김공석구 유감(過介峴金公碩舊 有感)」라는 시..
8. 난간에 기대어② 雲鬟梳罷倚高樓 검은 머리 곱게 빗고 누각에 기대 鐵笛橫吹玉指柔 쇠 피리 빗겨 부는 부드러운 손. 萬里關山一輪月 관산월 한 가락에 그대 그리워 數行淸淚落伊州 두 줄기 맑은 눈물 떨구었다오. 강혼(姜渾)이 은대선(銀臺仙)이라는 기생에게 준 「정성주기(呈星州妓)」란 작품이다. ‘관산월(關山月)’ 구슬픈 피리 곡조에 얼음 같이 맑은 눈물이 떨어진다. 가녀린 손가락도 알지 못할 슬픔에 하릴 없이 곡조 속으로 잠겨만 간다. 윤기 나는 머리를 곱게 빗어 땋고서 누각에 기대 앉아 피리 부는 여인. 피리 소리는 달에까지 사무치고, 그 소리에 달빛조차 흐느끼며 서쪽 나라로 떠내려간다. 넷째 구의 ‘낙이주(落伊州)’는 당나라 때 어느 여인이 멀리 벼슬살이 가서 소식조차 없는 님을 그리며 지었다는 「이주..
4. 난간에 기대어 그리워 난간에 기댔죠 한시에서 자주 보이는 표현 중에 하나가 누각에 올라 난간에 기댄다는 표현이다. 누각 위에는 왜 오르는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때문이다. 난간에는 왜 기대는가? 기다림에 지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루(登樓)’, ‘의루(倚樓)’, ‘의란(倚欄)’ 혹은 ‘빙란(憑欄)’ 등의 표현 속에는 ‘그리움’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난간은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그곳에 올라보면 먼 곳에서 오는 사람을 잘 알아볼 수 있는 까닭이다. 이경(李璟)이 「탄파완계사(攤破浣溪沙)」에서 “보슬비에 꿈을 깨니 닭울음소리 아득하고, 작은 누대 위에서 부는 젓대 소리 서늘해라. 구슬처럼 지는 눈물에 한(恨)은 끝이 없어, 난간에 기대이네[細雨夢回鷄塞遠, 小樓吹徹玉笙寒. 多少淚珠無限恨, 倚..
6. 가을 부채에 담긴 사연② 버려진 신세=가을부채 가을 부채가 버림 받은 여인의 상징으로 쓰이게 된 것은, 한 나라 때 반첩여(班婕妤)가 지은 「원가행(怨歌行)」이란 작품 때문이다. 新裂齊紈素 鮮潔如霜雪 제나라 고운 비단 새로 자르니 깨끗하기 마치 눈 서리 같구나. 裁爲合歡扇 團團似明月 말라서 합환선을 만들었는데 밝은 달 모습처럼 둥그렇구나. 出入君懷袖 動搖微風發 님께서 출입할 제 손에 들고서 흔들흔들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네. 常恐秋節至 凉飇奪炎熱 언제나 근심키는 가을이 와서 싸늘한 바람이 무더위 앗아가면, 棄捐篋笥中 恩情中道絶 고리 속에 깊숙히 내던져 져서 사랑하심 중도에 끊어질까 함일세. 제나라의 질 좋은 흰 비단을 잘 말라서 둥근 합환선(合歡扇)을 만들었다. 이를 님께 드리니 님은 늘 품 속에 지..
3. 가을 부채에 담긴 사연 가을부채로 자신의 신세를 대변하다 이왕 사랑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시에서 사랑과 연관되어 상징적 의미로 쓰이는 어휘를 더 살펴보자. ‘추선(秋扇)’ 즉 가을 부채가 그것이다. 예전에도 한 번 소개한 바 있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감상해 보기로 한다. 銀燭秋光冷畵屛 은 촛불 가을빛은 병풍에 찬데 輕羅小扇搏流螢 가벼운 비단 부채로 반디불을 치누나. 天際夜色凉如水 하늘 가 밤빛은 물처럼 싸늘한데 坐看牽牛織女星 견우와 직녀성을 오두마니 바라보네. 두목(杜牧)의 「추석(秋夕)」이란 시이다. 가을밤의 애상적 분위기가 물씬한 작품이다. 방 안에는 은촉불이 타고 있고, 방에는 화사한 그림 병풍이 둘려 있다. 그녀의 손에는 가벼운 비단 부채가 쥐어져 있다. 한 눈에도 매우 넉넉한 귀족풍의 ..
4. 버들을 꺾는 마음② 김극기의 통달역(通達驛) 감상 烟楊有地拂金絲 내낀 버들 어느새 금실을 너울대니 幾被行人贈別離 이별의 징표로 꺾이어짐 얼마던고. 林下一蟬椛別恨 숲 아래 저 매미도 이별 한을 안다는 듯 曳聲來上夕陽枝 석양의 가지 위로 소리 끌며 오르누나. 고려 때 시인 김극기(金克己)의 「통달역(通達驛)」이란 작품이다. 역시 버들가지가 이별의 징표로 쓰이고 있는 예이다. 1구에서 ‘연양(烟楊)’이라 했으니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봄날임을 알겠다. 파릇파릇 물 오른 버들개지의 여린 초록빛을 ‘금사(金絲)’로 표현한 데서 이점은 더 분명해진다. 그 여린 가지는 푸른 잎을 달아보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의 손에 수도 없이 꺾이었다. 헤어지는 장소가 역참(驛站)이고 보니, 으레 수많은 이별을 이 수양버들은 지켜..
2. 버들을 꺾는 마음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 감상하기 김만중(金萬重)도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정지상(鄭知常)의 위 작품을 두고 우리나라의 ‘양관삼첩(陽關三疊)’이라 하였다. ‘양관삼첩(陽關三疊)’이란 저 유명한 왕유(王維)의 「송원이사지안서(送元二使之安西)」가 널리 훤전(喧傳)되어 악곡(樂曲)으로 편입된 뒤의 이름이니, 결국 이에 버금가는 이별 노래의 절창이란 뜻이다. 渭城朝雨湎輕塵 위성(渭城) 아침 비가 가벼운 먼지 적시니 客舍靑靑柳色新 객사엔 파릇파릇 버들빛이 새롭고야. 勸君更進一杯酒 그대에게 다시금 한 잔 술 권하노라 西出陽關無故人 양관(陽關)을 나서면 아는 이 없을지니. 땅으로 사신 가는 벗 원이(元二)를 송별하며 지은 시이다. 위성(渭城)은 당나라 때 수도인 장안(長安)의 서쪽, 지금..
2. 남포(南浦)의 비밀② 송인(送人) 감상 다시 시로 돌아가 보자. 1구에서는 비가 개이자 긴 둑에 풀빛이 곱다고 했다. 겨우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긴 둑에 봄비가 내리자, 그 아래 어느새 파릇파릇 돋아난 봄풀이 마치 갑자기 땅을 헤집고 나온 것처럼 제 빛을 찾았던 것이다. 지루했던 겨울의 묵은 때를 말끔히 씻어 내리는 봄비를 맞는 마음은 설레이는 흥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춥고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이제 막 생명이 약동하는 봄을 맞이하면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있으니, 그 처창(悽愴)한 심정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김동환은 「강이 풀리면」에서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면은 님도 탔겠지. 님은 안 타도 편지야 탔겠지.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라고 노래..
5. 버들을 꺾는 뜻은, 한시(漢詩)의 정운미(情韻味) 1. 남포(南浦)의 비밀 사신에게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던 송인(送人) 雨歇長堤草色多 비 개인 긴 둑에 풀빛 고운데 送君南浦動悲歌 남포에서 님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別淚年年添綠波 해마다 이별 눈물 푸른 물을 보태나니. 너무나도 유명한 정지상(鄭知常)의 「송인(送人)」이란 작품이다. 필자는 이 시만 보면 고등학교 1학년 국어 첫 시간에 배웠던 이수복 시인의 시,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엔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를 외우던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대동강 가 연광정(練光亭)에는 고금의 시인들이 지은 제영시(題詠詩)가 수없이 많이 ..
5. 배 속에 넣은 먹물 문학의 기능: 거울과 등불 에이브럼즈(M.H.Abrams, 1912~2015)는 『거울과 등불(The Mirror and Lamp)』이란 책에서 문학의 기능을 거울과 등불의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시인은 캄캄한 밤에 등불을 들고 어둠 속을 헤매이는 영혼들의 갈 길을 일깨워주는 선지자(先知者)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시인은 그 시대를 물끄러미 비춰주는 거울이어야 하는가. 보기에 따라서는 당시와 송시도 거울과 등불이라는 문학의 두 기능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다만 ‘나는 당시풍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송시풍의 시는 시가 아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내가 빨간색을 좋아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파란색을 좋아하면 안 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
7. 송조(宋調), 머리로 쓴 시(詩)② 봄은 바로 곁에 있었는데, 그걸 몰랐구나 그런데 김시습(金時習)의 위 시는 송(宋) 나라 어느 여니(女尼)가 지은 「오도시(悟道詩)」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오도시(悟道詩)란 도를 깨달은 순간의 법열(法悅)을 노래한 시이다. 終日尋春不見春 종일 봄을 찾았어도 봄은 보지 못했네. 芒鞋踏破嶺頭雲 짚신 신고 산 머리 구름 위까지 가 보았지. 歸來偶把梅花臭 돌아올 때 우연히 매화 향기 맡으니 春在枝上已十分 봄은 가지 위에 벌써 와 있었네. 그녀는 봄을 찾기 위하여 하루 종일 온 산을 찾아 헤매이고 있다. 산꼭대기 구름 위에까지 올라가 보았지만 그녀는 봄을 찾지는 못하였다.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이제 봄을 찾으려는 생각을 접어두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바로 그..
4. 송조(宋調), 머리로 쓴 시(詩) 김시습의 이지적인 무제시 당시풍에 대비되는 송시풍의 특징을 일괄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송시는 이 시기 발달한 선종(禪宗)과 성리학(性理學)의 영향으로 인생에 대한 철학적 음미를 내용으로 하는 철리적 성향이 강하고, 쓸데없는 수식을 배제하고 섬세한 관찰과 개성적 표현을 중시하였으며, 제재 상에 있어서는 일상생활에의 관심과 밀착이 두드러짐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에 따라 시의 공용성은 더욱 강조되었고, 표현은 다분히 산문적이고 서술적이 되어, 정감이 풍부하고 유려한 당시에 비해 송시는 이지적이고 심원한 풍격을 갖추게 되었다. 또 송대(宋代)에 발달한 사문학(詞文學)은 시(詩)에 비해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세계를 노래하여, 송대(宋代)에는 시(詩)와 사(詞)..
5. 당음(唐音), 가슴으로 쓴 시② 변방의 추위에 괴롭지만 어머니껜 ‘봄처럼 따뜻합니다’라고 말하다 欲作家書說苦辛 집에 보낼 편지에 괴로움 말하려 해도 恐敎愁殺白頭親 흰 머리의 어버이 근심하실까 저어하여, 陰山積雪深千丈 그늘진 산, 쌓인 눈이 깊이가 천장인데 却報今冬暖似春 금년 겨울은 봄처럼 따뜻하다 말하네. 선조 때 시인 이안눌(李安訥)의 「기가서(寄家書)」란 작품이다. 이안눌은 평생에 두보(杜甫)의 시를 일만 삼천 번을 읽었다는 시인이다. 그가 함경도 북평사의 벼슬을 살러 북방에 가 있을 때 집에 편지를 보내면서 지은 시이다. 문집에 보면 편지를 받고 지은 시가 위 시 바로 앞에 실려 있다. 그 사연인 즉, 지난해 집에서 보낸 편지와 겨울옷을 해를 넘겨서야 받았는데, 집 식구는 남편이 변방에서 고생..
3. 당음(唐音), 가슴으로 쓴 시 이달의 낭만적 느낌이 담긴 시 당시(唐詩)는 가슴으로 쓴 시이다. 여기에는 시인의 웃음과 눈물이 있어, 마음으로 전해오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하다. 이에 반해 송시(宋詩)는 머리로 쓴 시이다. 그래서 인생에 대한 깊고 담담한 관조(觀照)와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조망(眺望)이 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혀 주는 위안과 인간의 정신을 고원(高遠)한 곳으로 이끌어주는 깊이가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시에서 서정함축을 중시하고 의흥(意興)이 뛰어난 시를 ‘당음(唐音)’이라 하고, 생각에 잠기고 이치를 따지며 유현(幽玄)한 맛을 풍기는 시를 ‘송조(宋調)’라고 일컬어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 풍격은 실제 작품 상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를 보여주는가. 먼저 당시풍의 시를 ..
3. 작약의 화려와 국화의 은은함② 신경준의 당시와 송시 평론 조선 후기의 학자 신경준(申景濬)은 「시칙(詩則)」이란 글에서 역대로 많은 시가 있어 왔지만, 시의 작법은 ‘영묘(影描)’와 ‘포진(鋪陳)’, 두 가지를 벗어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인(唐人)은 광경을 즐겨 서술하였다. 그래서 그 시에는 영묘(影描)가 많다. 송인(宋人)은 의론 세움을 즐겨하였다. 그래서 그 시에는 포진(鋪陳)이 많다. 대저 광경을 서술함은 국풍(國風)의 나머지에서 나온 것이니 자못 참되고 두터운 맛이 적다. 의론을 세움은 양아(兩雅)의 나머지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의 자취가 완전히 드러나 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당인은 시(詩)를 가지고 시(詩)를 지었고, 송인은 문(文)을 가지고 시(詩)를 지었다고 ..
2. 작약의 화려와 국화의 은은함 당시와 송시의 차이 송대의 유명한 화가 곽희(郭熙)는 그의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짜 산수(山水)의 안개와 이내는 네 계절이 같지 않다. 봄산은 담박하고 아름다와 마치 웃는 듯하고, 여름산은 자욱이 푸르러 마치 물방울이 듣는 듯하며, 가을산은 맑고 깨끗하여 단장한 듯하고, 겨울산은 어두침침하고 엷어 마치 잠자는 듯하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서 있지만,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면 날마다 그 모습을 바꾼다. 봄산이 좋기는 하지만 여름산의 짙푸름은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가을산의 조촐함과 겨울 산의 담박함은 또 그것대로의 매력이 있다. 사람마다 기호가 같지 않으므로, 꼬집어 어느 산이 더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시 또한 이와 다를 것이 없다. 당시(唐詩)..
4. 보여주는 시(詩)인 당시(唐詩)와 말하는 시(詩)인 송시(宋詩) 1. 꿈에 세운 시(詩)의 나라 대관재몽유록(大觀齋夢遊錄)을 통해 시 나라에 초대된 심의 시인은 캄캄한 밤에 등불을 들고 어둠 속을 헤매이는 영혼들의 갈 길을 일깨워주는 선지자(先知者)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시인은 그 시대를 물끄러미 비춰주는 거울이어야 하는가. 조선 전기의 문인 심의(沈義)가 지은 「기몽(記夢)」은 「대관재몽유록(大觀齋夢遊錄)」이란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지은이가 얼풋 잠이 들었다가 홀연 한 곳에 이르렀는데, 금빛으로 번쩍이는 화려한 궁궐에는 천성전(天聖殿)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그곳은 천상(天上) 선계(仙界)에 자리 잡은 시(詩)의 왕국(王國)이었다. 이 나라의 왕은 최치원(崔致遠)이고 수상은 을지문덕(..
6. 청산 위로 학이 날아간 자취 인종의 물음에 한시로 대답한 관사복 송나라 때 ‘관사복(管師復)’은 스스로 와운선생(臥雲先生)이라 자호(自號)하며 전원에 묻혀 살았던 사람이다. 인종(仁宗)이 그를 불러, “경이 전원에 살며 얻은 것은 어떤 것인가?”하니, 그가 대답했다. 滿塢白雲耕不盡 둔덕 가득 흰 구름은 갈아도 끝이 없고 一潭明月釣無痕 못 속의 밝은 달은 낚아도 자취 없네. 언제나 흰 구름 자옥한 둔덕, 그 구름을 밭 삼아 다 갈아볼 날은 과연 언제이겠는가. 못 위에 둥두렷이 떠오는 밝은 달은 제 아무리 낚아채도 한량없는 무진장이다. 그러니 어떻다는 말인가? 竹影掃階塵不動 섬돌 쓰는 대 그림자, 먼지는 그대로요 月光穿沼水無痕 못을 뚫는 달빛에도 물에는 흔적 없네. 대나무 그림자는 바람에 일렁이며 섬돌..
10.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③ 날 향해 핀 꽃을 얘기하다 春風忽已近淸明 봄바람 문득 이미 청명이 가까우니 細雨霏霏晩未晴 보슬비 보슬보슬 늦도록 개이잖네. 屋角杏花開欲遍 집 모롱이 살구꽃도 활짝 피어나려 數枝含露向人傾 몇 가지 이슬 머금고 날 향해 기울었네. 그리하여 봄은 다시 우리 곁으로 찾아온다. 위 시는 권근(權近)의 「춘일성남즉사(春日城南卽事)」이다. 청명이 가까워진 어느 봄날 성남의 소묘이다. 굳이 ‘두목(杜牧)’의 “청명시절우분분(淸明時節雨紛紛)”을 말하지 않더라도, 이 시절에는 꽃 소식을 재촉하는 봄비가 대지를 촉촉히 적신다. 이른바 행화(杏花)의 시절이 온 것이다. 가을날의 근심이 덧없이 스러진 청춘의 꿈을 애상(哀喪)하는 허탈한 독백이라면, 봄날의 근심은 근심이라기보다는 무언가 알 수 없..
9.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② 이색, 사립문을 닫은 까닭 이제 입상진의(立象盡意)의 거울에 비추어, 시 몇 수를 감상해 보자. 1수 「팔월초십일(八月初十日)」이고 2수 「신흥(晨興)」으로 다음과 같다. 夜冷貍奴近 天晴燕子高 차운 밤 고양이는 가까이 붙고 개인 하늘 제비는 높이 나누나. 殘年深閉戶 淸曉獨行庭 남은 해 깊이 문 닫아 걸고 맑은 새벽 홀로 뜰을 걸으리. 『소문쇄록(謏聞瑣錄)』에서 한적시(閑寂詩)의 대표적 예로 들고 있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작품이다. 서늘해진 가을 밤, 고양이는 추위를 못 이겨 자꾸 사람 곁을 찾아들고, 하늘 높이 제비는 강남 가는 길을 서두른다. 시인은 고양이와 제비를 빌어 가을이 깊어 감을 말하고 있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고양이만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외롭고 ..
5.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 다시 그림을 가지고 설명해 보겠다. 산수화에서 비가 오는 광경은 어떻게 그리는가? 화면 위에 빗금을 그어 빗줄기를 그리지는 않는다. 눈이 오는 것을 어떻게 그리는가? 학생들이 크리스마스카드를 그릴 때처럼 칫솔에 흰 물감을 묻혀 뿌리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바람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 때는? 바람은 없고 비만 올 때는? 비를 그리지 않고, 눈을 그리지 않고, 바람을 그리지 않으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부는 것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비와 바람을 시로 담는 법 왕유(王維)의 저술로 전해지는 「산수결(山水訣)」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비가 오면 천지가 구분되지 않고 동서를 알 수가 없다. 바람만 불고 비는 오지 않으면, 단지 나무의 가지만 보인다. ..
7. 내 혀가 있느냐?② 부드러운 게 강한 걸 이긴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의 염려 때문에 입상(立象)을 포기할 수는 없다. 직설적 언어의 나열보다 전달면에서 더욱 훌륭한 효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허균(許筠)의 『한정록(閑情錄)』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상용(商容)은 어느 때 사람인지 모른다. 그가 병으로 눕자 노자가 물었다. “선생님! 제자에게 남기실 가르침이 없으신지요?” “고향을 지나거든 수레를 내리 거라. 알겠느냐?” “고향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시군요.” “높은 나무 아래를 지나거든 종종걸음으로 가거라. 알겠느냐?” “노인을 공경하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러자 상용이 입을 벌리며 말했다. “내 혀가 있느냐?” “있습니다.” “내 이가 있느냐?” “없습니다.” “알겠느냐?” “강한 것은 ..
4. 내 혀가 있느냐? 언어가 이처럼 불완전한 도구라면 우리는 언어를 통해 자신의 뜻을 전달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불완전하게 남겨둬 많은 얘기를 담긴다 서진(西晋)의 구양건(歐陽建)은 「언진의론(言盡意論)」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금에 이름을 바로잡으려 힘쓰고, 성현이 말을 능히 떠나지 못한 것은 그 까닭이 무엇인가? 진실로 이치를 마음에서 얻어도 말이 아니면 펼 수가 없고, 사물을 말에 고정시켜도 이름이 아니면 구분할 수 없다.” 언어가 제 아무리 불완전한 존재라 해도, 인간은 언어를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옛 성인의 뜻은 어떻게 전달되는가? 『주역(周易)』 「계사(繫辭)」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성인은 상(象)을 세워서 그 뜻을 다하고, 괘(卦)를 세워서 참과 거짓을 다하..
5. 언덕에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② 스승이 미처 전하지 않은 본질을 떠난 다음에 알아채다 백아(伯牙)의 절현(絶絃)은 지음(知音)이던 종자기(鍾子期)의 죽음 때문이었다. 백아가 물 흐르는 것을 생각하며 연주하면 종자기는 곁에서 “강물이 넘실대는 것 같군.” 했고, 산을 오르는 것을 생각하면 종자기는 또한 그 마음을 그대로 읽었다. 그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고 평생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 「수선조(水仙操)」란 시의 서문에는 이 백아가 처음 성련(成連)에게서 거문고를 배울 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성련에게서 3년을 배운 백아는 연주의 대체를 터득하였으나, 정신을 텅 비게 하고 감정을 전일(專一)하게 하는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성련은 “내가 더 이상은 가르칠 수 없겠구나. 내 스승 방자춘..
3. 언덕에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 언어로 전할 수 없는 것 『장자(莊子)』 「천도(天道)」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제나라 ‘환공’이 누각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아래서 수레바퀴의 굴대를 끼우던 ‘윤편(輪扁)’이 다짜고짜 계단을 올라와 임금에게 물었다. “전하! 지금 읽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옛 성인의 책이니라.” “그 분은 지금 살아 계신가요?” “죽었지.” “그렇다면 전하께선 옛 사람의 껍데기를 읽고 계신 거로군요.” 제 환공은 화가 났다. 윤편의 수작이 방자하기 그지 없었던 것이다. “네 이놈! 무엄하구나. 그 말이 무슨 뜻인가. 까닭이 있으면 살려 주려니와, 그렇지 않다면 살려두지 않으리라.” 윤편은 대답한다. “저는 저의 일을 가지고 판단할 뿐입니다. 제가 바퀴를 끼운 것..
3. 왜 사냐건 웃지요② 왜 산에 사냐고 물으니, 그냥 산다 하지요 問余何事棲碧山 어찌하여 푸른 산에 사냐 묻길래 笑而不答心自閒 웃고 대답 아니 해도 마음 절로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 복사꽃 흐르는 물 아득히 떠 가거니 別有天地非人間 또 다른 세상일래, 인간이 아니로세.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이다. 산속에 묻혀 사는 나에게, 왜 답답하게 산속에 사느냐고 묻는다. 묵묵부답(黙黙不答), 싱긋이 웃기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말한다고 한들 그가 내 마음을 어이 헤아릴 것이랴. 또 낸들 무슨 뾰족한 대답이 있을 리 없다. 그저 “산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나, “왜 사냐 건 웃지요” 밖에는. 복사꽃이 물 위로 떠가니, 상류 어디엔가 무릉의 도원이 있지나 않을런지. 잠자다 일어나니, 분별하려는 기심조..
2. 왜 사냐건 웃지요 백지 편지에 보내온 센스 가득한 아내의 답장 옛 사람의 글에는 야단스러움이 없다. 간결하게 할 말만 하고, 때로 아무 말도 않기도 한다. 그래도 마음은 글자 사이로 흘러, 행간에 고여 넘친다. 예전 중국의 곽휘원(郭暉遠)이란 이가 먼 데로 벼슬 나가 있다가 집에 편지를 보냈는데, 착각하여 백지를 넣고 봉하였다. 그 아내가 오랜만에 온 남편의 편지를 꺼내 보니 달랑 백지 한 장뿐이었다. 답시를 보냈다. 碧紗窓下啓緘封 푸른 깁창 아래서 봉함을 뜯어보니 尺紙終頭徹尾空 편지지엔 아무 것도 써 있질 않더이다. 應是仙郞懷別恨 아하! 우리 님 이별의 한 품으시고 憶人全在不言中 말 없는 가운데 그리는 맘 담으셨네. 청나라 원매(袁枚)의 『수원시화(隨園詩話)』 「기부(寄夫)」에 나오는 이야기다. ..
3. 언어의 감옥, 입상진의론(立象盡意論) 1. 싱거운 편지 열 두자로 보낸 편지 함경도 안변(安邊) 땅에 벼슬 살러 가 있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서울에 있던 백광훈(白光勳)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반가운 마음에 겉봉을 뜯어보니, 딱 열 두 자 한 줄의 사연이 있었다. 삼천리 밖에서 한 조각구름 사이 밝은 달과 마음으로 친히 지내고 있소. 三千里外, 心親一片雲間明月 이만한 사연 전하자고 천리 길에 편지를 띄웠더란 말인가. 그러나 음미할수록 새록새록 정감이 넘나는 뭉클한 사연이다. 한 조각구름 속에 밝은 달이라 했으니, 달은 달이로되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달이다. ‘심친(心親)’이라 하여 그밖에 다른 것에는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음을 보였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이랬거니, 달은 나 있는..
13. 마음에서 얻어 뜻으로 깨달으니③ 기러기에 자신의 감정을 얹다 차천로(車天輅)는 「영고안(詠孤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山河孤影沒 天地一聲悲 산하엔 외로운 그림자 없어지고 천지에 한 소리만 비장하더라. 날아가던 기러기의 외로운 그림자는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도 아직 시인의 귀에는 천지를 가득 메운 기러기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러기야 무슨 외롭고 말고 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깊은 밤 까닭 모를 근심에 겨워 잠 못 이루고 뜨락을 서성이던 시인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아,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기러기라는 대상에 자신의 감정을 얹어 노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큰 기교는 졸렬해 보인다 대개 이러한 것이 경물과 시인의 정신이 만나 결합되는 양상들이다. 이렇듯 한 편의 훌륭..
12. 마음에서 얻어 뜻으로 깨달으니② 자연과 인간의 대비 이색(李穡)은 그의 「부벽루(浮碧樓)」에서 노래하였다. 城空月一片 石老雲千秋 성은 텅 빈 채 달 한 조각 있고, 바위(조천석)는 천년 두고 구름뿐인데, 텅 빈 성과 조각달, 바위와 구름의 대비는 읽는 이로 하여금 참으로 많은 생각에 젖게 한다. 예전 번성했던 성엔 이제 사람의 자취는 찾을 길 없고 조각달만 옛 기억처럼 희미하게 떠 있을 뿐이다. 그나마 그 달마저 얼마 안 있어 그믐의 암흑 속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 아닌가. 바위에는 세월이 할퀴고 간 흔적만이 남았다. 그 위로 또 무심한 구름은 천년 세월을 덧없이 흘러갔다. 그 세월 동안 인간 세상의 영고성쇠는 또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이렇듯 각 구절의 사이에는 말하지 않고 남겨 둔 여운이 길고도..
5. 마음에서 얻어 뜻으로 깨달으니 10자의 글자에 형상화하기 구양수(歐陽修)의 『육일시화(六一詩話)』에 보면, 매요신(梅堯臣)과 시에 대해 논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매요신은 “반드시 능히 묘사하기 어려운 경치를 형상화하여 마치 눈앞에 있는 것 같이 하고, 다하지 않는 뜻을 머금어 말 밖에 드러나게 한 뒤라야 시가 지극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구양수는 묘사하기 어려운 경물을 형상화 하여 다하지 않는 뜻을 머금는다는 것은 어떤 시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매요신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짓는 사람은 마음에서 얻고, 보는 이는 뜻으로 깨달으니, 말로써 무어라고 꼬집어 진술하기는 어렵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또한 그 방불함을 대략 말할 수는 있다. 온정균(溫庭筠)의 “주막집 달빛에 ..
10. 정오의 고양이 눈② 안목 있는 사람의 눈엔 덧칠한 게 보인다 홍만종(洪萬宗)의 『소화시평(小華詩評)』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호민(李好閔)이 어느 날 소낙비가 창문을 두드리자 갑자기 시 한 구절을 얻었는데, “산 비가 창문에 떨어짐이 많구나[山雨落窓多]”라 하였다. 그리고는 이를 이어 다시 짓기를, “시냇물은 대 숲 뚫고 졸졸 흘러가네[磵流穿竹細]”라 하고, 마침내 시 한편을 이루어 이산해(李山海)에게 보였다. 그러자 그는 ‘산우락창다(山雨落窓多)’에만 비점을 찍어 돌려보냈다. 이호민이 그 까닭을 묻자 이산해는 이렇게 말하였다. “공이 실제 경물과 만나 먼저 이 구절을 얻었을 것이다. 나머지 구절은 그 다음에 만든 것이다. 시 전편의 참된 뜻이 모두 이 구절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만 비점을 ..
4. 정오의 고양이 눈 마음을 놓치면 졸작이 된다 옛날에 절묘하다고 세상에 전하는 그림이 있었다. 장송(長松) 아래 한 사람이 고개를 들어 소나무를 보는 모습을 그렸는데 신채(神采)가 마치 살아 있는 듯하여, 천하의 명화로 일컬어졌다. 처사(處士) 안견(安堅)이 말하기를, “이 그림이 비록 묘하기는 하지만, 사람이 고개를 올려 보면 목 뒤에 반드시 주름이 잡히는 법인데, 이것은 없으니 그 뜻을 크게 잃었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마침내 버린 물건이 되었다. 古有買妙畵於中國者. 畵長松下, 有人仰面看松, 神采如生, 世以爲天下奇畵也. 處士安堅曰: “是畵雖妙, 人之仰面也, 項後必有皺紋, 此則無之, 大失其旨.” 自此終爲棄物. 또 옛날 그림으로 묘필(妙筆)을 일컬은 것이 있었다. 늙은이가 손주를 안고 숟가락으로 밥을..
8. 장수는 목이 없고, 미인은 어깨가 없다② 노새에게 덧붙여진 짐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이런 시가 실려 전한다. 한 사나이가 길을 가다가 나귀를 타고 가는 미인을 만났다. 선녀가 적강(謫降)한 듯 아름다운 모습에 그는 그만 발길이 얼어붙었다. 연정의 불길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는 즉석에서 시를 써서 그녀에게 보냈다. 心逐紅粧去 身空獨倚門 마음은 미인 따라 가고 있는데 이 몸은 부질없이 문 기대 섰소. 넋은 이미 그대에게 빼앗겨 버리고 나는 빈 몸뚱이만 남아 문에 기대 섰노라는 애교 섞인 푸념이었다. 그녀가 답장을 보내왔다. 驢嗔車載重 却添一人魂 노새는 짐 무겁다 투덜대는데 그대 마음 그 위에 또 얹었으니. 그녀의 대답은 도무지 뚱딴지같다. 당신이 내 마음을 온통 다 가져 가 버렸..
3. 장수는 목이 없고, 미인은 어깨가 없다 과장과 왜곡으로 본질을 강조하다 이왕 그림 이야기가 나왔으니, 몇 가지 더 보기로 하자. 형호(荊浩)의 「화론(畵論)」을 보면 “장수는 목이 없고, 여인은 어깨가 없다[將無項, 女無肩].”이란 말이 나온다. 무슨 말일까? 목이 없는 장수가 어디 있는가. 여인은 어째 어깨가 없을까.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림을 그릴 때, 장수의 기상은 목을 없는 듯 짧게 그리는 데서 드러나고, 미인의 가녀린 모습은 어깨 없이 부드럽게 흘러내린 곡선을 통해 강조된다는 말이다. 또 왕유(王維)가 「원안와설도(袁安臥雪圖)」를 그렸는데, 고사(高士) 원안(袁安)이 눈 쌓인 파초 아래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실제 파초는 남국(南國)의 식물이므로, 눈 내리는 추위 속에서는 시들고 만..
6. 말하지 않고 말하기③ 주변을 읊어 자기감정을 얘기하다 獨坐無來客 空庭雨氣昏홀로 앉아 오는 손님도 없고 빈 뜰엔 빗 기운만 어둑하구나.魚搖荷葉動 鵲踏樹梢飜물고기 흔드는지 연잎이 움직이고 까치가 밟았는가 나무가지 흔들리네. 琴潤絃猶響 爐寒火尙存거문고 젖었어도 줄은 울리고 화로는 싸늘한데 불씨는 남아 있네.泥途妨出入 終日可關門 진흙길이 출입을 가로 막으니 하루 종일 문을 닫아 걸고 있으리. 서거정(徐居正)의 「독좌(獨坐)」란 작품이다. 일견 속세를 떠나 칩거하고 있는 은사의 유유한 생활을 노래한 작품인 듯하지만, 속사정을 따져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찾아오는 손님 없이 혼자 앉아 있다는 1구는, 아무도 나를 찾아올 리가 없다는 체념과, 그래도 혹시 누군가 오지는 않을까 하는 기다림의 마음이 뒤섞인 모순..
5. 말하지 않고 말하기②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시 다음은 두보(杜甫)의 유명한 「춘망(春望)」이란 시이다.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나라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 봄 성엔 초목만 무성해. 感時花溅淚 恨別鳥驚心 때에 느꺼워 꽃을 대해도 눈물 쏟아지고 이별 한스러워 새 보아도 마음 놀라네. 이 시를 지을 당시 두보는 안록산(安祿山)의 난리 중에 반군의 손에 사로잡혀 경성에 갇혀 있는 처지였다. 만신창이가 된 종묘사직과 도탄에 빠진 백성의 생활은 그로 하여금 무한한 감개에 젖어들게 했다. 그는 이러한 감개를 흐드러진 봄날의 경물에 얹어 노래하고 있다. 사마광(司馬光)은 이 시를 평하여 『온공속시화(溫公續詩話)』에서 이렇게 적었다. “산하(山河)가 남아 있다고 했으니 나머지 물건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 초목이 우거..
2. 말하지 않고 말하기 화가가 달을 그리지 않고 달을 그리는 방법과, 시인이 말하지 않고 말하는 수법 사이에는 공통으로 관류하는 정신이 있다. 가렸기에 보여진다 구름 속을 지나가는 신룡(神龍)은 머리만 보일 뿐 꼬리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한 글자도 나타내지 않았으나 풍류를 다 얻었다[不著一字, 盡得風流].”는 말이 있다. 또 “단지 경물을 묘사할 뿐이나 정의(情意)가 저절로 드러난다[只須述景, 情意自出].”고도 한다. 요컨대 훌륭한 한 편의 시는 시인의 독백으로써가 아니라 대상을 통한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iative)의 원리로써 독자에게 전달된다. 즉 시인은 자신의 정서를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 대상 속에 응축시켜 표달해야 한다. 그래서 “산은 끊어져도 봉우리는 이어진다[山斷..
3. 그리지 않고 그리기③ 호접몽중가만리(胡蝶夢中家萬里)와 임금께 바칠 춘화도 그려내는 법 또 가령 “호랑나비 꿈속에 집은 만 리 밖[胡蝶夢中家萬里]”라는 화제(畵題)가 제출되었다면, 화가는 꿈속에 향수에 젖어 있는 나그네의 모습을 그려야 하는데, 그러자면 화면에는 잠든 사람이 있어야 하고, 또 그가 지금 고향 꿈을 꾸고 있음을 나타내 보여주어야 한다. 1등에 뽑힌 화가는 소무(蘇武)가 양을 치다가 선잠이 든 모습을 그렸다. 소무(蘇武)는 한(漢) 무제(武帝) 때 흉노에 사신 갔다가 억류되어 흉노의 회유를 거부하여 사막에서 들쥐를 잡아먹으며 짐승처럼 살다가, 무려 20년 만에야 고국으로 돌아왔던 인물이다. 황제의 사신으로 왔다가 어처구니없이 포로로 억류되어 아무도 없는 사막 가운데 버려진 채 양을 치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