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12/13 (103)
건빵이랑 놀자
08 文人之休, 國之符也. 望豐屋知名家, 睹喬木知舊都. 鴻文在國, 聖世之驗也. 孟子相人以眸子焉, 心淸則眸子瞭, 瞭者, 目文瞭也. 夫候國占人, 同一實也. 國君聖而文人聚, 人心惠而目多采. 蹂蹈文錦於泥塗之中, 聞見之者, 莫不痛心. 知文錦之可惜, 不知文人之當尊, 不通類也. 인용목차
07 孔子稱周曰: “唐·虞之際, 於斯爲盛. 周之德, 其可謂至德已矣!” 孔子, 周之文人也, 設生漢世, 亦稱漢之至德矣. 趙他王南越, 倍主滅使, 不從漢制, 箕踞椎髻, 沉溺夷俗. 陸賈說以漢德, 懼以帝威, 心覺醒悟, 蹶然起坐. 世儒之愚, 有趙他之惑, 鴻文之人, 陳陸賈之說, 觀見之者, 將有蹶然起坐, 趙他之悟. 漢氏浩爛, 不有殊卓之聲. 인용목차
26 夫舜·禹之德, 不能過堯. 堯葬於冀州, 或言葬於崇山. 冀州鳥獸不耕, 而鳥獸獨爲舜·禹耕, 何天恩之偏駮也? 인용목차
06 文人宜遵五經六藝爲文, 諸子傳書爲文, 造論著說爲文, 上書奏記爲文, 文德之操爲文. 立五文在世, 皆當賢也. 造論著說之文, 尤宜勞焉. 何則? 發胸中之思, 論世俗之事, 非徒諷古經·續故文也. 論發胸臆, 文成手中, 非說經藝之人所能爲也. 周·秦之際, 諸子並作, 皆論他事, 不頌主上, 無益於國, 無補於化. 造論之人, 頌上恢國, 國業傳在千載, 主德參貳日月, 非適諸子書傳所能並也. 上書陳便宜, 奏記薦吏士, 一則爲身, 二則爲人. 繁文麗辭, 無上書文德之操. 治身完行, 徇利爲私, 無爲主者. 夫如是, 五文之中, 論者之文多矣, 則可尊明矣. 인용 목차
중국사(中國史) 목차 개요: 중국역사개관 1) 고대시대(古代時代) 중국역사 십팔사략 삼황(三皇) 시대 천황씨 & 지황씨 인황씨 & 유소씨 & 수인씨 복희씨 & 신농씨 오제(五帝)의 시대 황제씨 황제의 아들 태평성대를 누린 요순시대 ‘격양가’와 요(堯) 임금 효로 선양 받은 순임금 하왕조와 상왕조의 흥망 치수를 잘한 우왕 2) 은주시대(殷周時代) 중국역사 십팔사략 상나라의 탕왕과 주왕 은혜가 새에게도 미친 탕왕 주나라의 고공단보와 문왕 공평무사한 문왕 은나라 정벌과 백이숙제 은나라 폭군 주왕 백이와 숙제 태공망 여상의 이야기 문왕, 여상을 만나다 주공의 치세와 유왕과 포사의 폭정 신중하게 행동한 주공 단 포사에게 빠진 유왕 3) 춘추시대(春秋時代) 중국역사 십팔사략 개요 최초의 패자 제환공과 관중 제환공의..
95. 원나라에 끝까지 굴하지 않은 문천상 江西提刑文天祥, 募兵勤王. 天祥吉州人, 丙辰魁進士第. 後州郡連降, 德祐二年, 元兵距都城三十里, 天祥爲右丞相, 辭不拜. 出使軍前, 辭氣慷慨, 議論不屈. 元將伯顔留之, 元兵入臨安, 天祥得間逸去. 衛王祥興元年, 天祥屯潮陽, 方飯五坡嶺被執. 元將張弘範乃命天祥, 爲書招張世傑. 天祥書所過「零丁洋」詩與之, 其末有云: “人生自古誰無死, 留取丹心照汗靑.” 弘範笑而置之. 厓山旣破, 弘範等置酒大會, 謂天祥曰: “國亡, 丞相忠孝盡矣, 能改心以事元, 不失爲宰相.” 天祥泫然出涕曰: “國亡不能救, 爲人臣者, 死有餘罪, 況敢逃其死, 而貳其心乎?” 弘範義之, 遣送于燕京. 道經吉州, 痛恨不食八日, 猶生, 乃復食. 天祥至燕, 不屈繫獄, 勵操愈堅. 해석 江西提刑文天祥, 募兵勤王. 강서의 제형(提刑..
94. 백성을 위해 한 몸을 바친 야율초재 元中書令耶律楚材卒. 楚材天資英邁, 夐出人表. 雖案牘滿前, 酬答不失其宜, 正色立朝, 不爲勢屈. 欲以身徇天下, 每陳國家利病, 生民休戚, 辭色懇切. 太宗嘗曰: “汝又欲爲百姓哭耶?” 楚材每言: “興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減一事.” 平居不妄言笑, 及接士人, 溫恭之容溢于外, 莫不感其德焉. 해석 元中書令耶律楚材卒. 원나라의 중서령(中書令)인 야율초재(律楚材卒)가 숨졌다. 楚材天資英邁, 夐出人表. 야율초재의 천부적 자질이 뛰어나고 고매해 남보다 뛰어났다. 雖案牘滿前, 酬答不失其宜, 正色立朝, 不爲勢屈. 비록 공문서가 앞에 가득해도 처리함에 마땅함을 잃지 않았고 얼굴색을 바로하고 조정에 설 적엔 세력 때문에 굽히지 않았다. 欲以身徇天下, 每陳國家利病, 生民休戚, 辭色懇切. 몸..
93. 온 나라 사람들이 슬퍼한 사마광의 죽음 神宗崩, 太子卽位. 司馬光, 門下侍郞, 光居洛十五年, 兒童走卒, 皆知司馬君實. 元祐元年, 光爲相, 八閱月而薨, 贈太師溫國公, 諡文正. 光在位遼人夏人使來, 必問光起居. 而遼人戒其邊吏曰: “中國相司馬矣, 切毋生事開邊隙.” 及卒, 京師民罷市, 及葬四方來會者, 哭之如哭其親戚. 光嘗語曰: “吾無過人, 但平生所爲, 未嘗有不可對人言者耳.” 人問光一言可以終身行之者, 光曰: “其誠乎!” 해석 神宗崩, 太子卽位. 신종이 붕어(崩御)하자 태자가 즉위했다. 司馬光, 門下侍郞, 光居洛十五年, 兒童走卒, 皆知司馬君實. 사마광은 문하시중이 되었고 사마광이 서울에 산 지 15년에 아이들과 심부름꾼까지 모두 사마군실【사마군실(司馬君實): 군실(君實)은 사마광의 자이다.】을 알 정도였다. ..
92. 주돈이의 인품과 기질 周惇頥, 字茂叔. 博學力行, 聞道早, 遇事剛果, 有古人風. 爲政嚴恕, 務盡理, 以名節自勵, 雅有高趣. 牕前草不除曰: “與自家意思一般.” 黃庭堅稱其人品甚高, 胸中灑落, 如光風霽月. 有『太極圖』ㆍ『通書』, 行于世. 해석 周惇頥, 字茂叔. 주돈이(周惇頥)는 자(字)가 무숙(茂叔)이다. 博學力行, 聞道早, 遇事剛果, 有古人風. 널리 배우고 힘써 행하여 도 듣길 빨리 했으며 일을 처리함에 강직하고 과단성 있게 하였고 옛 사람의 풍모가 있었다. 爲政嚴恕, 務盡理, 以名節自勵, 雅有高趣. 정치를 할 땐 엄격하면서도 용서하며 모든 이치에 힘썼고 명예와 절개에 스스로 힘써 우아한 높은 뜻이 있었다. 牕前草不除曰: “與自家意思一般.” 창 앞에 풀을 없애지 않고서 “우리 집에서의 뜻과 일반이구나..
91. 논어로써 2대의 황제를 섬긴 조보 趙普初以吏道聞, 寡學術. 太祖嘗勸以讀書, 普遂手不釋卷. 每朝有大議輒闔戶, 自啓一篋, 取一書閱之. 及卒, 家人視其篋, 則『論語』也. 嘗謂上曰: “臣有『論語』一部, 以半部, 佐太祖, 定天下; 以半部, 佐陛下, 致太平.” 해석 趙普初以吏道聞, 寡學術. 조보(趙普)는 애초에 관리의 도로 이름 났지만 학문과 재술엔 과문했다. 太祖嘗勸以讀書, 普遂手不釋卷. 태조가 일찍이 독서하길 권면하자 조보는 마침내 손에서 책을 놓질 않았다. 每朝有大議輒闔戶, 自啓一篋, 取一書閱之. 매번 조정에서 큰 회의가 있을 적엔 문득 문을 닫고 스스로 한 상자를 열어 한 책을 가져다 그걸 보았다. 及卒, 家人視其篋, 則『論語』也. 숨지자 집 사람들이 상자를 보니 『논어』였다, 嘗謂上曰: “臣有『論語..
90. 송태조(宋太祖)를 도와 남당을 멸망시킨 조빈 太祖開寶八年, 曹彬圍金陵急. 南唐主李煜遣徐鉉入貢, 求緩兵, 鉉言: “江南無罪.” 上怒按劍曰: “不須多言, 江南亦有何罪? 但天下一家臥榻之側, 豈容他人鼾睡乎?” 鉉惶恐而退. 金陵受圍, 自春徂冬, 勢愈窮蹙, 彬一日忽稱病. 諸將來問, 彬曰: “諸公若共爲信誓, 破城不妄殺一人, 則彬病愈矣.” 諸將皆許諾, 焚香約誓. 翌日城陷, 彬還, 舟中惟圖籍衣衾. 閤門通榜子曰: “奉勅幹事回.” 其不伐如此. 해석 太祖開寶八年, 曹彬圍金陵急. 태조 개보 8년에 조빈(曹彬)이 금릉을 포위하길 급하게 했다. 南唐主李煜遣徐鉉入貢, 求緩兵, 남당의 임금인 이욱(李煜)이 서현(徐鉉)을 보내 공물을 드리며 병사들을 늦춰주길 구하자, 鉉言: “江南無罪.” 서현은 태조에게 “강남은 죄가 없습니다...
89. 신하들이 떨었던 당선종 宣宗臨朝對群臣, 未嘗有惰容. 每宰相奏事, 旁無一人, 威嚴不可仰視. 奏事畢, 忽怡然閑語一刻許, 徐復整容曰: “卿輩善爲之, 常恐卿輩負朕, 不得再相見.” 令孤綯嘗謂人曰: “吾十年秉政, 最承恩遇, 每延英奏事, 未嘗不汗沾衣也.” 해석 宣宗臨朝對群臣, 未嘗有惰容. 당 나라 선종(宣宗) 조정에 와서 여러 신하를 대할 적에 일찍이 나태한 모습이 없었다. 每宰相奏事, 旁無一人, 威嚴不可仰視. 매번 재상이 일을 상주(上奏)할 때 곁에 한 사람도 없더라도 위엄이 있어 우러러볼 수 없었다. 奏事畢, 忽怡然閑語一刻許, 徐復整容曰: 정사를 상주하길 마치면 갑자기 화색이 감돌며 짧은 시간동안[一刻] 한가롭게 말하다가 천천히 다시 용모를 정제하고서 말했다. “卿輩善爲之, 常恐卿輩負朕, 不得再相見.” “..
88. 당선종의 뛰어난 기억력 宣宗聰察强記. 嘗密令學士韋澳纂次州縣境土風物, 及諸利害, 爲一書號曰處分語. 刺史有入謝而出者曰: “上處分本州事, 驚人.” 建州刺史入辭, 上問: “建州去京師幾何?” 曰: “八千里.” 上曰: “卿到彼爲政, 朕皆知之, 勿謂遠. 此階前, 則萬里也.” 해석 宣宗聰察强記. 당나라 선종(宣宗)은 귀 밝고 살필 줄 알며 잘 기억했다. 嘗密令學士韋澳纂次州縣境土風物, 及諸利害, 爲一書號曰處分語. 일찍이 비밀스레 학사 위오(韋澳)에게 주와 현의 경계 내의 풍물(風物)와 모든 이해(纂次)를 편집[纂次]하도록 명령해 한 책을 짓게 하고선 처분어(處分語)라 이름지었다. 刺史有入謝而出者曰: “上處分本州事, 驚人.” 자사가 들어가 사례하고 나오며 “선종께서 우리 고을의 일을 적절히 처분해주어 사람을 놀래키..
87. 안녹산을 토벌한 안진경과 안고경 平原太守顔眞卿, 起兵討賊. 上始聞河北從賊, 嘆曰: “二十四郡, 曾無一人義士邪?” 及眞卿奏至, 大喜曰: “朕不識眞卿何狀, 乃能如此.” 常山太守顔杲卿, 起兵討賊, 河北諸郡皆應之. 十五載, 賊將史思明陷常山, 執杲卿, 送洛陽. 祿山數其反己, 杲卿曰: “我爲國討賊, 恨不斬汝, 何謂反也? 臊羯狗, 何不速殺我?” 祿山大怒, 縛而冎之, 比死, 罵不絶口. 해석 平原太守顔眞卿, 起兵討賊. 평원 태수 안진경(顔眞卿)이 병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했다. 上始聞河北從賊, 嘆曰: “二十四郡, 曾無一人義士邪?” 현종이 처음 하북지방이 적을 따른다는 걸 듣고 “24군에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의로운 이가 없는가?”라고 탄식했다. 及眞卿奏至, 大喜曰: “朕不識眞卿何狀, 乃能如此.” 안진경의 상주문에 ..
86. 정사를 전횡한 간신 이임보 玄宗天寶十一載, 李林甫卒. 林甫媚事上左右, 迎合上意, 以固寵, 杜絶言路, 掩蔽聰明. 嘗語諸御史曰: “不見立仗馬乎? 一鳴輒斥去.” 妬賢嫉能, 排抑勝己, 性陰險, 人以爲口有蜜, 腹有劍. 每夜獨坐偃月堂, 有所深思, 明日必有誅殺. 屢起大獄, 自太子以下, 皆畏之. 在相位十九年, 養成天下亂, 而上不悟. 然安祿山畏林甫術數, 故終其世, 未敢反. 해석 玄宗天寶十一載, 李林甫卒. 현종 천보(天寶) 11년에 이인보(李林甫)가 숨졌다. 林甫媚事上左右, 迎合上意, 以固寵, 杜絶言路, 掩蔽聰明. 임보는 현종[上]의 측근[左右]에 아첨하며 섬겨 현종의 뜻에 영합함으로 총애를 굳힘으로 언로를 막고 끊어 현종의 총명함을 덮고 가리었다. 嘗語諸御史曰: “不見立仗馬乎? 一鳴輒斥去.” 일찍이 여러 어사(御..
85. 당현종이 두려워한 한휴 玄宗開元二十一年, 韓休同平章事. 休爲人峭直, 上或宴遊小過, 輒謂左右曰: “韓休知否?” 言終諫疏已至. 左右曰: “休爲相, 陛下殊瘦於舊.” 上歎曰: “吾雖瘠, 天下肥矣.” 休罷 張九齡繼之 해석 玄宗開元二十一年, 韓休同平章事. 현종(玄宗) 개원 21년에 한유(韓休)가 동평장사(同平章事)가 되었다. 休爲人峭直, 上或宴遊小過, 輒謂左右曰: “韓休知否?” 한유의 사람됨이 올곧고 정직해 당현종이 혹 연회에서 놀다가 조금의 잘못이 있으면 갑자기 좌우의 신하에게 “한휴가 아느냐 모르느냐?”라고 말했는데 言終諫疏已至. 말이 끝나자마자 간하는 소장(疏狀)이 이미 이르렀다. 左右曰: “休爲相, 陛下殊瘦於舊.” 좌우의 신하가 “한휴가 재상이 되고서 폐하께선 유달리 예전보다 야위었습니다.”라고 말씀..
84. 좋은 신하가 되도록 해달라고 청한 위징 魏徵嘗告太宗曰: “願使臣爲良臣, 勿使臣爲忠臣.” 上曰: “忠良異乎?” 徵曰: “稷ㆍ契ㆍ皐陶, 君臣協心, 俱享尊榮, 所謂良臣; 龍逢ㆍ比干, 面折廷爭, 身誅國亡, 所謂忠臣.” 上悅. 해석 魏徵嘗告太宗曰: “願使臣爲良臣, 勿使臣爲忠臣.” 위징이 일찍이 당태종에게 “원하기론 저를 좋은 신하가 되게 해주시되 저를 충성스런 신하가 되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씀드렸다. 上曰: “忠良異乎?” 당태종이 “충성스런 신하와 좋은 신하는 다른가?”라고 말했다. 徵曰: “稷ㆍ契ㆍ皐陶, 君臣協心, 俱享尊榮, 所謂良臣; 위징이 말씀드렸다. “후직(后稷)과 설(契)과 고요(皐陶)와 같은 경우는 임금과 신하가 마음을 모아 함께 존귀함과 영화로움을 누렸으니 소위 좋은 신하이고 龍逢ㆍ比干, ..
83. 당태종을 성군으로 이끌었던 위징 貞觀十七年, 鄭公魏徵卒. 太宗曰: “以銅爲鏡, 可正衣冠; 以古爲鏡, 可見興替; 以人爲鏡, 可知得失. 徵沒, 朕亡一鏡矣.” 徵葬, 上自製碑書石. 東征之役, 不能成功, 上深悔之, 歎曰: “魏徵若在, 不使我有此行也.” 해석 貞觀十七年, 鄭公魏徵卒. 정관 17년에 정공(鄭公)【정나라에 제후로 봉해졌다는 의미로 위징을 이렇게 부르지만, 실제로 위징은 측근으로 간관의 역할을 하다 숨졌다】이 위징이 숨졌다. 太宗曰: “以銅爲鏡, 可正衣冠; 以古爲鏡, 可見興替; 以人爲鏡, 可知得失.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정제할 수 있고 옛날로 거울을 삼으면 흥망을 볼 수 있으며 사람으로 거울을 삼으면 득실을 알 수 있지. 徵沒, 朕亡一鏡矣.” 위징이 숨졌으니 짐은 하나의 거울을 잃었다.”..
82. 수성과 창업의 어려움 太宗嘗問侍臣: “創業守成孰難?” 房玄齡曰: “草昧之初, 群雄竝起, 角力而後臣之, 創業難矣.” 魏徵曰: “自古帝王, 莫不得之於艱難, 失之於安逸, 守成難矣.” 上曰: “玄齡與吾共取天下, 出百死得一生, 故知創業之難; 徵與吾共安天下, 常恐驕奢生於富貴, 禍亂生於所忽, 故知守成之難. 然創業之難, 往矣, 守成之難, 方與諸公愼之.” 해석 太宗嘗問侍臣: “創業守成孰難?” 당 태종이 일찍이 측근의 신하에게 “나라를 세우는 것과 나라를 지키는 것 중 무엇이 어려운가?”라고 물었다. 房玄齡曰: “草昧之初, 群雄竝起, 角力而後臣之, 創業難矣.” 방현령(房玄齡)이 “창업의 초기엔 여러 영웅이 아울러 일어나 힘을 다투며 이후에 그를 신하로 삼으니 창업이 어렵나이다.”라고 말씀드렸다. 魏徵曰: “自古帝王..
81. 당태종의 정관(貞觀)의 치(治) 有上書請去佞臣者, 曰: “願陽怒以試之, 執理不屈者直臣也, 畏威順旨者佞臣也.” 上曰: “吾自爲詐, 何以責臣下之直乎? 朕方以至誠治天下.” 或請重法禁盜, 上曰: “當去奢省費, 輕徭薄賦, 選用廉吏. 使民衣食有餘, 自不爲盜, 安用重法邪?” 自是數年之後, 路不拾遺, 商旅野宿焉. 해석 有上書請去佞臣者, 曰: “願陽怒以試之, 執理不屈者直臣也, 畏威順旨者佞臣也.” 글을 올려 아첨하는 신하를 없애길 청하는 사람이 “원하기론 거짓으로[佯] 화를 내어 그들을 시험하여 도리를 잡고 굽히지 않는 이는 정직한 신하이고 위세에 떨며 뜻을 따르는 이는 아첨하는 신하입니다.”라고 말했다. 上曰: “吾自爲詐, 何以責臣下之直乎? 朕方以至誠治天下.” 당 태종이 “내가 스스로 거짓을 행하고서 어찌 신하의..
80. 당태종의 욕망을 자제시킨 위징 太宗嘗曰: “君依於國, 國依於民. 刻民以奉君, 猶割肉以充腹, 腹飽而身斃, 君富而國亡矣.” 又嘗謂侍臣曰: “聞西域賈胡, 得美珠, 剖身而藏之, 有諸?” 曰: “有之.” 曰: “吏受賕抵法, 與帝王徇奢欲而亡國者, 何以異此胡之可笑邪?” 魏徵曰: “昔魯哀公, 謂孔子曰: ‘人有好忘者, 徙宅而忘其妻.’ 孔子曰: ‘又有甚者, 桀紂, 乃忘其身.’ 亦猶是也.” 해석 太宗嘗曰: “君依於國, 國依於民. 당 태종이 일찍이 말했다. “임금은 나라에 의존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존한다. 刻民以奉君, 猶割肉以充腹, 腹飽而身斃, 君富而國亡矣.” 백성을 해쳐 임금을 받든다는 것은 육신(肉身)을 베어 배를 채우는 것과 같으니 배는 부르지만 몸은 피폐해지고 임금은 넉넉해지지만 나라는 망한다.” 又嘗謂侍臣曰:..
79. 관직을 버린 도연명 宋文帝時, 晉徵士陶潛卒. 潛字淵明, 潯陽人, 陶侃之曾孫也. 少有高趣, 嘗爲彭澤令, 八十日, 郡督郵至. 吏曰: “應束帶見之.” 潛歎曰: “我豈能爲五斗米, 折腰向鄕里小兒.” 卽日解印綬去. 賦「歸去來辭」, 著「五柳先生傳」, 徵不就. 自以先世爲晉臣, 自宋高祖王業漸隆, 不復肯仕. 至是終世, 號靖節先生. 해석 宋文帝時, 晉徵士陶潛卒. 송나라 문제(文帝) 때에 진(晉)의 징사(徵士)【나라의 부름을 받은 학덕이 높은 선비를 일컫는다. 동진(東晉)에 저작좌랑(著作佐郞)의 관직으로 불렀지만 응하지 않았다】인 도잠이 죽었다. 潛字淵明, 潯陽人, 陶侃之曾孫也. 도잠의 자(字)는 연명(淵明)으로 심양(潯陽) 사람인데 도간(陶侃)의 증손이다. 少有高趣, 嘗爲彭澤令, 八十日, 郡督郵至. 젊어서 고상한 의..
78. 큰 뜻을 품었던 왕맹 王猛字景略, 倜儻有大志, 隱居華陰. 聞桓溫入關, 被褐謁之, 捫蝨而談當世之務, 傍若無人. 溫異之, 問猛曰: “吾奉命除殘賊, 而三秦豪傑, 未有至者, 何也?” 猛曰: “公不遠數千里, 深入敵境, 今長安咫尺, 而不渡㶚水. 百姓未知公心, 所以不至.” 溫黙然無以應. 其後, 有薦猛於秦王苻堅者, 一見如舊, 自謂, 如玄德之於孔明. 一歲中五遷官, 擧異才, 修廢職, 課農桑, 恤困窮, 秦民大悅. 해석 王猛字景略, 倜儻有大志, 隱居華陰. 왕맹(王猛)의 자(字)는 경략(景略)인데 성격이 호탕하여 큰 뜻이 있었지만 화산(華山)의 북쪽에 은거했다. 聞桓溫入關, 被褐謁之, 동진(東晉)의 정서장군(征西將軍)인 환온(桓溫)【전진(前秦)의 왕 부건(苻健)이 장안을 수도로 정하고 중국 북부에 나라를 세우자 토벌하기..
10. 위나라 조씨 정권의 몰락, 오의 멸망과 진(晉)의 성립 ① 위(魏)의 정권을 장악한 사마씨 정권 1. 대장군이 된 조상(曹爽)은, 인척이란 유리함으로 사마의의 지위를 명목상으로 올려줬을 뿐 실권은 빼앗음. 2. 새해에 조상(曹爽)이 임금 조방(曹芳)을 따라 멀리 떠나자, 사마의는 쿠데타를 일으켜서 성공함으로 지휘권을 받고 조상의 일가를 물살시킴. 3. 이후로 사마사(司馬師)와 사마소(司馬昭) 형제가 정권을 장악했으며 조조의 손자인 조환(曹奐)을 꼭두각시 천자로 세워놓고 모든 정권을 오로지함. ② 진(晉)의 성립 1. 촉이 멸망한 지 2년 후의 사마소가 죽고 그의 아들 사마담(司馬炎)이 즉위했으며 위나라 마지막 임금인 조환은 제위를 양위한다는 조서를 발표함. 2. 황제의 인수를 받은 사마염은 나라 ..
77. 제갈량의 선정과 읍참마속(泣斬馬謖) 諸葛亮病篤, 有大星, 赤而芒, 墜亮營中, 未幾亮卒. 楊儀整軍還, 百姓奔告司馬懿. 懿追之, 姜維令儀, 反旗鳴鼓若將向懿, 懿不敢逼. 百姓爲之諺曰: ‘死諸葛走生仲達’ 懿笑曰: “吾能料生, 不能料死” 亮嘗作八陣圖, 懿歎曰: “天下奇才也” 亮爲政無私. 馬謖素爲亮所知, 及敗軍, 流涕斬之, 而卹其後. 李平․ㆍ廖立, 皆爲亮所廢, 及聞亮之喪, 皆歎息流涕, 平至發病死. 해석 諸葛亮病篤, 有大星, 赤而芒, 제갈량의 병이 위독해졌을 때 붉으면서도 꼬리가 있는 별이 墜亮營中, 未幾亮卒. 제갈량의 병영 가운데로 떨어지니, 얼마 있지 않아 제갈량은 죽었다. 楊儀整軍還, 제갈량의 죽음으로 전의를 상실한 군대를 양의가 정돈하고 물러서니, 百姓奔告司馬懿. 백성들이 달려가 사마의에게 그 상황을 ..
76. 후황제 유선에게 올린 상주문(上奏文) 漢丞相諸葛亮, 率諸軍伐魏, 臨發上疏曰: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此危急存亡之秋也. 宜開張聖聽, 不宜塞忠諫之路. 宮中府中俱爲一體, 陟罰臧否, 不宜異同. 若有作姦犯科, 及忠善者, 宜付有司, 論其刑賞, 以昭平明之治. 親賢臣遠小人, 此先漢所以興隆也, 親小人遠賢人, 此後漢所以傾頹也. 臣本布衣, 躬耕南陽,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 先帝不以臣卑鄙, 猥者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由是感激, 許先帝, 以驅馳. 先帝知臣謹愼, 臨崩寄以大事. 受命以來, 夙夜憂懼, 恐付託不效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獎率三軍, 北定中原, 興復漢室, 還于舊都, 此臣所以報先帝, 而忠陛下之職分也.” 遂屯漢中. 해석 漢丞相諸葛亮, 率諸軍伐魏, 한나라..
9. 제갈량의 출사표와 죽음, 그리고 촉한의 멸망 ① 촉한의 멸망 1. 사마소가 등애(鄧艾)와 종회(鍾會)를 장수로 삼아 촉한을 쳐들어가자, 갑작스런 공격에 후주 유선(劉禪)은 당황하고 항복하기로 결정함. 2. 후주의 아들 유심(劉諶)은 간언하였으나 후주가 받아들이지 않자 유비의 사당에 나가 통곡한 다음 자결함. 3. 후주는 43년 만에 멸망함(서기 263년).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후황제 유선에게 올린 상주문(上奏文) 제갈량의 선정(善政)과 읍참마속
75. 유비의 죽음과 제갈량의 정치 昭烈帝在位三年崩, 太子禪卽位, 年十七, 是爲後皇帝. 丞相諸葛亮, 受遺詔輔政, 昭烈臨終謂亮曰: “君才十倍曹丕, 必能安國家, 終定大事. 嗣子可輔, 輔之, 如其不可, 君可自取” 亮涕泣曰: “臣敢不竭股肱之力, 致忠貞之節, 繼之以死” 亮乃約官職, 修法制. 下敎曰: “夫參署者, 集衆思廣忠益也. 若遠小嫌, 難相違覆, 曠闕損矣” 해석 昭烈帝在位三年崩, 소열제 유비가 즉위한 지 3년 만에 돌아가셨고, 太子禪卽位, 年十七, 是爲後皇帝. 태자인 유선이 즉위하였으니, 17살이었고, 이가 바로 후황제다. 丞相諸葛亮, 受遺詔輔政, 승상 제갈량은 유비가 남긴 조칙을 받고서 정치를 도우니, 昭烈臨終謂亮曰: 소열제가 임종 때에 제갈량에게 말했다. “君才十倍曹丕, 必能安國家, “그대의 재주는 조비의 ..
74. 관우의 최후, 오나라 조자의 패기 魯肅已死, 呂蒙代之. 亦勸孫權圖關羽, 權將陸遜, 又襲羽後. 羽狼狽走還, 權軍獲羽斬之, 遂陷荊州. 昭烈帝恥羽之沒, 自將伐權, 權求和不許. 權遣使於魏, 魏封權爲吳王. 魏主問吳使趙咨曰: “吳王頗知學乎?” 咨曰: “吳王任賢使能, 志存經略. 雖有餘閑博覽書史, 不效書生尋章摘句” 魏主曰: “吳難魏乎?” 咨曰: “帶甲百萬, 江ㆍ漢爲池, 何難之有?” 魏主曰: “吳如大夫者, 幾人?” 咨曰: “聰明特達者, 八九十人, 如臣之比, 車載斗量, 不可勝數” 해석 魯肅已死, 呂蒙代之. 오나라의 노숙이 이미 죽자 여몽이 그걸 대신하였다. 亦勸孫權圖關羽, 또한 노숙은 손권에게 관우를 도모할 것을 권했고, 權將陸遜, 又襲羽後. 손권의 장군인 육손 또한 관우를 후방에서 기습했다. 羽狼狽走還, 權軍獲羽..
73. 주유의 통찰을 무시한 손권과 괄목상대인 여몽 劉備徇荊州ㆍ江南諸郡. 周瑜上疏於權曰: “備有梟雄之姿, 而有關羽ㆍ張飛熊虎之將. 聚此三人在彊場, 恐蛟龍得雲雨, 終非池中物也. 宜徙備置吳” 權不從. 瑜方議圖北方, 會病卒. 魯肅代領其兵, 肅勸權荊州借劉備, 權從之. 權將呂蒙, 初不學, 權勸蒙讀書. 魯肅後與蒙論議, 大驚曰: “卿非復吳下阿蒙” 蒙曰: “士別三日, 卽當刮目相對” 해석 劉備徇荊州ㆍ江南諸郡. 유비는 형주와 강남 여러 고을에 군대를 파견하여 점령했다. 周瑜上疏於權曰: 주유는 손권에서 상소하였다. “備有梟雄之姿, 而有關羽ㆍ張飛熊虎之將. “유비는 영웅의 자태가 있고 그에겐 관우와 장비라는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가 있습니다. 聚此三人在彊場, 恐蛟龍得雲雨, 이들 세 사람이 모아 변방에 있게 하면 교룡이 비구름을 ..
8. 위(魏)ㆍ촉(蜀)ㆍ오(吳)의 삼분천하(三分天下) ① 위(魏)가 월등한 세력으로도 통일을 못한 까닭 1. 위(魏):오(吳):촉(蜀)=6:2:1의 월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정에선 귀족이 황제를 억압하고, 지방에선 호종이 중앙간섭을 차단함. 2. 조조 때엔 지방 실력자를 결집하여 나라를 세웠으나, 조비 때엔 귀족세력의 팽창으로 후한 말과 같은 상황이 전개됨. 3. 그런 중심세력이 사마의(司馬懿) 세력으로, 총사령관 직분을 이용하여 차츰 자신의 권력을 증대시켜 나가다가 조예가 죽기 직전에 사마의를 태부(太傅)로 삼아 어린 아들 조방(曹芳)을 보좌하게 함으로, 조씨와 사마씨의 권력다툼이 시작됨.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주유의 통찰을 무시한 손권과 괄목상대인 여몽 관우의 최후, 오나라 조자의 패..
72. 적벽대전, 유종과 손권의 차이 曹操擊劉表, 表卒, 子琮擧荊州降操. 劉備奔江陵, 亮謂備曰: “請求救於孫將軍” 亮見權說之, 權大悅. 操遺權書曰: “今治水軍八十萬衆, 與將軍會獵於吳” 權以示群下, 莫不失色. 周瑜曰: “請得數萬精兵, 進往夏口, 保爲將軍破之.” 遂以瑜督三萬人, 與備幷力逆操, 進遇於赤壁. 瑜部將黃蓋曰: “操軍方連船艦, 首尾相接, 可燒而走也” 乃取蒙衝鬪艦十艘, 載燥荻枯柴, 灌油其中, 裹帷幔, 上建旌旗, 豫備走舸, 繫於其尾. 先以書遺操, 詐爲欲降. 時東南風急. 蓋以十艘, 最著前, 中江擧帆, 餘船以次俱進. 操軍皆指言 “蓋降” 去二里餘, 同時發火, 火烈風猛, 船往如箭, 燒盡北船. 烟焰漲天, 人馬溺燒, 死者甚衆. 瑜等率輕銳, 雷鼓大進, 北軍大懷, 操走還, 後屢加兵於權, 不得志. 操歎息曰: “生子當如孫..
7. 적벽대전 ① 조조의 야심과 유종의 항복 1. 조조는 중국 통일을 목표로 공격 목표를 남쪽으로 돌려 형주와 강동을 집어 삼키려 함. 2. 형주의 유표가 죽고 유종의 뒤를 이은 때였으나, 이미 겁에 질린 유표는 지레 조조에게 항복해 버렸음. 3. 진퇴양난 기로에 놓인 유비는 병력과 물자의 중요보급 기지인 江陵을 향해 퇴각함. 4. 조조는 유비를 추격해 장판파에서 대승하여 유비는 처자를 버리고 도망쳐야 하는 곤욕을 치름. ② 손권과 유비의 연합 1. 손권은 조조의 백만대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군사를 시상(柴桑)에 주둔시킨 채, 정세의 변화를 예의주시함. 2. 별다른 대책이 없던 손권은 노숙을 파견했으며 노숙은 유비에게 연합할 것을 제의하자 승낙했고 제갈량을 시상에 파견하여 작전을 짜게 함. ..
71. 제갈량과 유비의 첫 만남 삼고초려(三顧草廬) 瑯琊諸葛亮, 寓居襄陽隆中, 每自比管仲ㆍ樂毅. 備訪士於司馬徽, 徽曰: “識時務者, 在俊傑. 此間自有伏龍ㆍ鳳雛, 諸葛孔明ㆍ龐士元也” 徐庶亦謂備曰: “諸葛孔明臥龍也” 備三往乃得見亮, 問策, 亮曰: “曹操擁百萬之衆, 挾天子, 令諸侯, 此誠不可與爭鋒. 孫權據有江東, 國險而民附. 可與爲援, 而不可圖. 荊州, 用武之國, 益州險塞, 沃野千里, 天府之土. 將軍帝室之冑, 信義著於四海. 若跨有荊ㆍ益, 保其巖阻, 天下有變, 荊州之軍, 向宛․洛, 益州之衆, 出秦川, 孰不簞食壺漿以迎將軍乎?” 備曰: “善” 與亮情好日密. 曰: “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해석 瑯琊諸葛亮, 寓居襄陽隆中, 낭야 지방의 제갈량은 양양의 융중산에 더부살이하며 每自比管仲ㆍ樂毅. 매일 스스로 관중과 악의에..
6. 손권과 유비, 제갈량을 처음 만나 세상을 논하다 ① 손권의 세력 1. 아버지 손견(孫堅)과 형 손책(孫策)이 단단히 다져논 기반 위에 유능한 장군을 등용해 병력을 키워나감. 2. 양자강 중류에서 절강까지의 세력을 병합하여 기세를 떨침(북으로 조조의 영토와 서쪽으론 영토와 접하고 있음). ② 유비의 세력 1. 유비는 황건적의 난 때 관우ㆍ장비 등과 황건적 토벌군에 가담했으나 안희현 현위가 되었을 뿐, 20년 동안 유랑 생활을 함. 2. 유표의 막하에 들어가 중원 진출을 노렸으나 유표가 반대하여 이루지 못하고 차근차근 준비해 나감.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삼고초려 제갈량과 유비의 첫 만남(三顧草廬)
70. 조조 간웅이란 자신의 평가에 만족해하다 曹操父嵩, 爲宦官曹騰養子, 或曰: “夏侯氏子也” 操少機警, 有權數, 任俠放蕩, 不治行業. 汝南․許劭, 與從兄靖, 有高名. 共覈論鄕黨人物, 每月輒更其題品. 故汝南俗, 有月旦評. 操往問劭曰: “我何如人?” 劭不答, 劫之, 乃曰: “子治世之能臣, 亂世之姦雄” 操喜而去. 해석 曹操父嵩, 爲宦官曹騰養子, 조조의 아버지는 숭으로 환관 조등의 양자가 되었는데, 或曰: “夏侯氏子也” 혹은 “하우씨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操少機警, 有權數, 조조는 어려서 기지가 있고 영민했으며【기경(機警): 기지가 있고 영민하여 정황의 변화에 따라 매우 잘 살필 수 있음[機智靈敏, 對情況的變化覺察得很快]】, 권력을 장악하는 술수와 요령【권수(權數): 권력을 장악하는 술수와 요령[謂掌握權力的..
5. 실력자 원소와 조조의 ‘관도대전’ ① 이곽과 곽사, 그리고 헌제 1. 동탁의 부장인 이곽과 곽사는 동탁의 원수를 갚겠단 명분으로 장안을 공격해 왕윤 등을 죽였으며 둘 사이에 곧이어 정권다툼이 일어남. 2. 헌제는 인질처럼 끌려 다니다가 196년에 낙양으로 돌아와 잿더미 속에서 목숨만을 부지함. ② 관동연합군의 이후 거취 1. 군벌들은 자기 기반 구축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나, 조조는 헌제를 허창(許昌)으로 모셔와 군웅 가운데 가장 두각을 나타냄. 2. 원소는 황하의 중하류 지역에서 여러 호족들을 복종시켜 최대의 군벌 세력이 되었으며, 조조와의 일전은 ‘관도대전’으로 남아 있음. 3. 관도대전에서 조조는 수적, 지형적 열세에 있었으나, 냉철한 판단력으로 이겼으며, 2년 후에 원소가 죽고 아들들이 잠시동..
4. 동탁의 전횡과 동탁 토벌작전 ① 동탁의 낙양 입성과 횡포 1.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동탁은 환관과 원소와의 혼란스런 싸움을 틈타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달려가 낙양을 장악해 버림. 2. 낙양을 장악한 동탁은 소제를 폐하고 9살의 협(協)을 황제로 세우니, 이 사람이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임. 3. 하태후를 독살하고 상국(相國)이란 높은 지위까지 올라 황제의 권위를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하며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름. ② 동탁 토벌 작전 1. 횡포가 극심해지자 원소는 낙양을 떠났으며 군벌들은 원소를 맹주로 함곡관 동쪽에서 모임(關東軍). 2. 위기감을 느낀 동탁은 헌제를 데리고 전략적 요충지인 장안으로 향하며 낙양에 있던 모든 것을 불사름. 3. 관동군이 각자의 이해관계로 움직이지 않자 동탁은 ..
3. 후한의 혼란과 원소의 등장 ① 후한 말기의 혼란 1. 후한 왕조는 황건의 난으로 통치기반이 흔들리고 있었으며 영제가 죽자 외척과 환관이 정권을 잡기 위해 싸움을 벌임. 2. 14살인 황태자 변(辯)이 즉위하자 그의 어머니 하태후(何太后)가 섭정하게 되었고 그녀의 오빠인 하진(何進)이 정권을 쥠. 3. 환관 건석은 당대의 실력자임에도 하진이 정권을 잡자마자 건석(蹇碩)을 죽임. ② 원소(袁紹)의 등장 1. 때마침 원소가 하진에게 환관을 주살해야 한다고 권하자 결정을 내릴 수 없던 하진은 하태후와 의논하였으나 하태후가 이를 반대하여 제거 계획은 지연됨. 2. 원소는 용감한 장수를 불러 모으고 있었으며 하진에게 태후를 위협하자고 함(동탁이 수도로 오게 된 배경). 3. 이 소식은 환관의 귀에 들어가 하진..
2. 황건적의 난 ① 태평도(太平道) 1. 실의에 빠진 농민들 사이에서 유행했으며 장각(張角)이란 사람이 황제ㆍ노자의 도를 가르친다는 명목의 신앙단체임. 2. 장각은 10년 동안 신도의 수가 수십만 명에 이르자 신도들을 36방(方)으로 조작하였으며 거사(渠師)라는 두목을 두어 통솔하게 함. ② 황건의 난 1. 184년에 태평도의 각 지부가 군사조직으로 전환되어 일어난 대규모 농민 봉기임. 2. 불에서 흙이 생성된다는 음양오행설로 화덕(火德)인 한(漢)은 망하고 토덕(土德)인 황건의 세상이 온다는 신념으로 황색띠를 동여 매었음. 3. 조정에선 회의를 열어 하진(何進)ㆍ황보숭ㆍ노식을 파견하고 유생의 금고를 해제하여 황건과의 결탁을 막음. 4. 노식을 하북에, 황보숭과 주준을 영천에 파견했으며 황보숭이 장사에..
삼국시대(三國時代) 1. 개요 ① 삼국시대의 정립(鼎立) 1.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군웅이 할거하게 되었으며, 이 가운데 천하를 삼분하여 대치하고 있던 촉한(蜀漢)ㆍ위(魏)ㆍ오(吳)를 삼국시대라 함. 2. 조조(曹操)는 후한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를 맞아들여 천자의 명을 빙자하였으며 당대 명문 출신인 원소를 격파하여 중원 통일의 기초를 마련함. 3. 208년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대군을 강동에 결집시켜 손권ㆍ유비 연합군과 적벽대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여 삼국이 정립하는 형세가 됨. ②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 1. 삼분하여 대치해 있던 삼국은 위의 뒤를 이은 진(晉) 나라에 의해 멸망됨. 위(魏)를 정통으로 삼기에 위진남북조 시대라 부름. 2. 촉한을 토벌한 공로로 진왕(晉王)이 된 사마소의 아들 사마..
7. 2차에 걸쳐 일어난 당고(黨錮)의 화(禍) ① 2차에 걸친 당고의 화 1. 양기의 부인인 손수(孫壽)는 남편의 권력과 동등할 정도로 위세를 부림. 2. 뇌물을 받고 죄를 용서해주었기 때문에 손수의 집에는 뇌물을 바치려는 행렬이 늘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함. ② 1차 당고(黨錮)의 화 1. 이런 혼란 가운데 양태후가 죽었으며 양기의 누이동생으로 환제(桓帝)의 황후였던 양씨도 세상을 떠남. 2. 환제는 이런 틈을 타 양씨 가족을 몰아내기로 함. 3. 환관 당형(唐衡)을 불러 몰아낼 계책을 물으며 모든 호위병들을 집결시켜 양씨 토벌 계획을 실행하여 성공시킴. 4. 그런 기쁨도 잠시 양씨 토벌에 공이 있는 다섯 환관이 열후의 자리에 올라 정치를 자기 마음대로 함. 5. 대학 유생들이 이에 반발하자 환관들은 ..
69. 위기를 기회로 만든 우허의 기지 安帝淸河王慶之子, 章帝孫也. 未冠迎卽位, 鄧后仍臨朝, 鄧騭爲大將軍. 時邊軍多事, 騭欲棄涼州, 竝力北邊, 郞中虞詡以爲不可曰: “關西出將, 關東出相, 烈士武夫, 多出涼州” 衆皆從詡議. 騭惡詡, 欲陷之. 會朝歌賊攻殺長吏, 州郡不能禁. 以詡爲朝歌長. 故舊皆弔之, 詡曰: “不遇盤根錯節, 無以別利器” 及到官, 募壯士, 攻劫者爲上, 傷人偸盜者次之, 收得百餘人. 使入賊中, 誘令劫掠, 伏兵殺數百人. 又潛遣貧人能縫者, 傭作賊衣, 以綵線縫其裾. 有出市里者輒禽之, 賊駭散, 縣境皆平. 해석 安帝淸河王慶之子, 章帝孫也. 안제는 청하왕 경의 아들이자, 경제의 손자다. 未冠迎卽位, 鄧后仍臨朝, 어릴 때 영접되어 즉위하였고 등후가 이 때문에 조정에 들어왔고 鄧騭爲大將軍. 등즐은 대장군이 되었다...
6. 우허의 활약, 그리고 두태후와 양기(梁冀)의 횡포로 서서히 저무는 후한 ① 외척 두태후(竇太后)의 섭정과 환관 1. 화제(和帝)가 10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그의 어머니 두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 두씨 일족이 권력을 장악하게 됨. 2. 장성한 화제는 이러한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측근인 환관 정중(鄭衆)에게 의지하게 됨. 3. 후한의 후반기는 외척과 환관이 번갈아 정권을 농락하는 일이 계속됨. ② 양기(梁冀)의 횡포 1. 양기(梁冀)는 순제(順帝) 황후의 오빠로서, 자신의 누이가 순제의 황후가 되어 서서히 권력을 손에 쥠. 2. 그는 아버지를 집금오(執金吾)에, 자신을 그 아래 자리인 양읍후에 봉한 후 차츰 관직을 높여 대장군 자리를 승계함. 3. 3년 후 순제가 30세로 죽자 두 살의 황태자가..
68. 서역에서 지내며 일생을 지낸 반초의 이야기 和帝徵班超, 還京師卒. 超起自書生, 投筆, 有封侯萬里外之志. 有相者謂曰: “生, 燕頷虎頭, 飛而食肉, 萬里侯相也” 自假司馬入西域, 章帝時爲西域, 將兵長史, 至上以超, 爲西域都護騎都尉, 平定諸國. 在西域三十年, 以功封定遠侯, 至是以年老乞歸, “願生入玉門關” 上許之. 任尙代爲都護, 請敎, 超曰: “君性嚴急. 水淸無大魚, 宜蕩佚簡易” 尙私謂人曰: “我以班君, 當有奇策. 今所言, 平平耳” 尙後果失邊和, 如超言. 해석 和帝徵班超, 還京師卒. 화제가 반초를 부르니 돌아와 낙양에서 생을 마쳤다. 超起自書生, 投筆, 반초는 서생으로부터 시작하여 붓을 던지고 有封侯萬里外之志. 만 리 밖에서 제후에 봉해지는 것에 뜻이 있었다. 有相者謂曰: “生, 燕頷虎頭, 관상가가 반초에..
67. 서역을 평정한 반초 永平十七年, 復置西域都護ㆍ戊ㆍ已校尉. 初耿秉請伐匈奴, 謂“宜如武帝通西域, 斷匈奴右臂” 上從之, 以秉與竇固爲都尉, 屯涼州. 固使假司馬班超使西域. 超至鄯善, 其王禮之甚備, 匈奴使來, 頓疎懈. 超會吏士三十六人曰: “不入虎穴不得虎子” 奔虜營斬其使及從士三十餘級, 鄯善一國震怖. 超告以威德, 使勿復與虜通. 超復使于寘, 其王亦斬虜使以降. 於是諸國皆遣子入侍, 西域復通. 至是竇固等擊車師而還, 以陳睦爲都護, 及以耿恭爲戊校尉, 關龕爲己校尉, 分屯西域. 해석 永平十七年, 復置西域都護ㆍ戊ㆍ已校尉. 영평(후한 2대 황제 명제의 연호) 17년에 다시 서역도호와 무와 기의 교위를 설치했다. 初耿秉請伐匈奴, 처음으로 경병이 흉노족을 정벌하길 청하며 말했다. 謂“宜如武帝通西域, 斷匈奴右臂” “마땅히 한무제 때에..
5. 후한 시대의 서역 정책과 서역을 평정한 반초의 이야기 ① 반초(班超) 1.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 저자인 반고(班固)의 동생으로, 학식이 풍부하며 흉노가 자주 변경에 침범하여 약탈을 하나 대비하고 있지 않단 소식에 격분하여 무장을 갖추어 원정군에 가담함. 2. 흉노 원정관인 두고(竇固)는 반초를 가사마(假司馬)로 삼고 선선국(鄯善國)으로 보내자, 그는 수행원 36명과 선선왕을 굴복시켜 굴복을 맹세케 함. 3. 우전과 소륵을 평정하고, 서역 남로의 제국을 모두 한의 세력권에 넣어 65년 동안 단절되었던 서역과의 교통을 부활시킴. ② 소극적인 서역 정책과 적극적인 서역 정책 1. 3대 장제(章帝)는 소극적인 서역 정책으로 반초에게 군사를 거두고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2. 반초는 탄원서를 올리며..
66. 뇌물을 받으면 하늘도, 너도, 나도 다 안다던 의로운 선비 양진 太尉楊震關西人, 時人稱之曰: “關西夫子楊伯起” 敎授生徒, 堂下得三鱣, 都講以爲, 有三公之象, 取以進曰: “先生自此升矣.” 後嘗爲郡守, 屬邑令有懷金遺之者曰: “暮夜無知者” 震曰: “天知神知我知子知, 何謂無知?” 令慚而退. 及爲三公時, 宦者及上乳母王聖, 用事, 皆有請託, 震不從, 共搆陷之. 飮酖而死, 葬之日名士皆來會, 有大鳥高丈餘, 至墓前俯仰流涕而去. 해석 太尉楊震關西人, 時人稱之曰: “關西夫子楊伯起” 태위 양진은 관서 사람으로, 당시 사람들은 “관자의 부자는 백기 양진이다.”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敎授生徒, 堂下得三鱣, 생도를 교수할 적에 당 아래에서 세 마리의 전어를 얻으니, 都講以爲, 有三公之象, 取以進曰: 수제자【도강(都講): ..
65. 광무제 시기의 어진 신하들 上於臟罪, 無所貸. 大司徒歐陽歙, 嘗犯臟, 歙所授『尙書』弟子千餘人, 守闕求哀, 竟不免死於獄. 所用群臣, 如宋弘等, 皆重厚正直. 上姊湖陽公主嘗寡居, 意在弘. 弘入見, 主坐屛後. 上曰: “諺言, ‘貴易交, 富易妻’ 人情乎?” 弘曰: “貧賤之交不可忘, 糟糠之妻不下堂.” 上顧主曰: “事不諧矣.” 主有蒼頭, 殺人匿主家, 吏不能得. 洛陽令董宣, 候主出行奴驂乘, 叱下車格殺之. 主入訴, 上大怒, 召宣欲捶殺之. 宣曰: “縱奴殺人, 何以治天下? 臣不須捶, 請自殺.” 卽以頭叩楹, 流血被面. 上令小黃門持之, 使叩頭謝主, 宣兩手據地, 終不肯. 上勅, “强項令出” 賜錢三十萬. 當時州牧郡守縣令, 皆良吏. 해석 上於臟罪, 無所貸. 광무제는 횡령죄에 가차 없었다. 大司徒歐陽歙, 嘗犯臟, 대사구 구양흡..
4. 광무제의 나라 정상화 작업 ① 수도 낙양 1. 장안이 정미군에 의해 초토화되었고 남양 출신의 광무제에게는 낙양이 자신의 출신지보다 가까웠기 때문에 선정. 2. 광무제의 창업을 도운 개국 공신들도 대부분 남양 출신임. 3. 고조묘(高祖廟)를 세워 자신의 창업이 한왕조의 부흥이란 사실을 명백히 함. ② 정책과 공신회유책 1. 전한 때 시행된 1/30 세(稅) 제도를 부활시키고 군사제도를 소수 정예화하며 생산 활동을 극대화시킴. 2. 노인, 고아, 빈곤자들에 대해 구제 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혼란스럽던 화폐제도를 개혁해야함. 3. 공신들에게 높은 지위를 줄 경우 황제의 권력을 위협하기에 고조가 택한 토사구팽 정책을 버리고 공신들에게 서열에 해당하는 토지와 식읍을 하사하고 후한 상을 내려 그들의 공로와..
64. 영토를 넓혀가는 광무제(光武帝) 득롱망촉(得隴望蜀) 十二年, 公孫述亡. 述茂陵人, 自更始時, 據蜀稱帝, 國號成. 上旣平隴右曰: “人苦不自足. 旣得隴復望蜀.” 遣大司馬吳漢等, 將兵, 會征南大將軍岑彭, 伐蜀. 彭戰船竝進, 所向無前. 述使盜刺殺彭. 吳漢繼進, 至成都, 擊殺述, 蜀地悉平. 漢在軍或戰不利, 意氣自若, 上歎曰: “吳公差强人意, 隱若一敵國矣.” 해석 十二年, 公孫述亡. 건무 12년에 공손술이 죽었다. 述茂陵人, 自更始時, 공손술은 무릉 사람으로 경시제의 시기로부터 據蜀稱帝, 國號成. 촉(蜀) 땅에 살며 황제를 자칭했고, 국호는 성(成)이라 했다. 上旣平隴右曰: 광무제가 이미 농우를 평정했고 말했다. “人苦不自足. “사람의 괴로움이란 자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旣得隴復望蜀.” 이미 농땅을 얻고서..
63. 외효가 마원을 공손술에게 보내다. 建武初, 隗囂據天水, 自稱西州上將軍. 嘗遣馬援往成都, 觀公孫述. 援與述舊, 謂當握手歡如平生, 時述已稱帝四年矣. 援旣至, 盛陳陛衛, 以迎援. 援謂其屬曰: “天下雌雄未定, 公孫不吐哺迎國士. 反修飾邊幅, 如偶人形. 此何足久稽天下士乎?” 因辭歸謂囂曰: “述井底蛙耳. 而妄自尊大.” 해석 建武初, 隗囂據天水, 건무(광무제의 연호) 초에 외효가 천수에 의거하여 自稱西州上將軍. 스스로 ‘서주상장군’이라 일컬었다. 嘗遣馬援往成都, 觀公孫述. 일찍이 마원을 파견하여 성도로 보내어 공손술을 살펴보도록 했다. 援與述舊, 謂當握手歡如平生, 마원과 공손술을 옛 친구로 마땅히 손을 잡고 환대하기를 평생의 지기(知己)처럼 할 것이라 했는데, 時述已稱帝四年矣. 이때가 공손술이 이미 황제로 칭한..
3. 왕망의 퇴출과 외효와 공손술의 섬멸하며 후한의 기틀을 잡은 유수 ① 왕망 퇴출을 위한 남양봉기군 1. 유수(劉秀)의 형 유인(劉縯)은 왕망의 신(新)에 반대해 여러 장수들을 설득해 군사를 모으기 시작함. 2. 군대를 통솔할 인물을 추대하려는 논의 가운데 유연의 명석함과 지나친 결단력을 두려워하여 유현을 경시장군으로, 유연을 대사도(大司徒), 유수를 장군으로 삼음(이후 유연은 경시제로서 황제의 자리에 오름). 3. 유수의 3천 명의 군대가 왕망의 40만 대군을 기습하여 성공하자 왕측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주변세력들이 왕망정부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남. 4. 남양봉기군 내에서 유현이 유수의 형 유연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유수는 오히려 사죄하며 유유자적하자 유현도 곤양의 싸움에서 수훈..
2. 왕망이 건국한 신나라 15년의 역사 ① 왕망의 이상형인 주(周) 나라를 모방한 정책 1. 유교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 주나라의 관제를 설명한 유가 경전인 『주례(周禮)』에 의거해 모든 관제를 바꿈. 2. 토지 개혁을 위해 매매를 일체 허용하지 않고 토지를 국가가 거둬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하려 함. ② 이상과 현실의 차이 1. 탁상공론적인 정책은 관료들의 부패로 시행되기가 어려워 토지 개혁은 3년 만에 폐지됨. 2. 노비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토지 문제의 방치와 가혹한 형벌로 범법자가 날로 늘어남으로 더욱 가중되기만 함. 3. 사회 현실과는 동떨어진 왕망의 개혁은 사회를 혼란스럽게 했으며 농민 폭동이 곳곳에서 일어나며 멈춤. ③ 반란의 시작 1. 산동 태산에서 낭야 출신 번숭(樊崇)이 반..
후한 시대(後漢時代) 1. 혼란의 시작과 한나라를 장악한 왕망 ① 호족의 대두 1. 향촌 사회는 자치 운영으로 유지되었으나, 화폐 경제의 유입으로 돈이 많은 호족이 등장함. 2. 농민들은 점점 빈곤해져 유랑민ㆍ도적이 되거나 대부분 호족의 농지를 소작하며 노비가 되기도 함. 3. 이와 같이 공동체 관계가 무너졌을 뿐 아니라 빈농의 반란이 일어나 사회적, 경제적 위기가 초래됨. ② 왕망의 명망과 관직 진출 1. 왕망(王莽)은 원제(元帝)의 황후 왕씨의 동생인 왕안(王晏)의 아들로, 원제가 죽고 어린 나이로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황후인 왕씨가 실권을 장악함. 2. 왕씨의 일족이었으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에 가난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며 효도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음. 3. 왕망은 왕봉의 추천으로 관직에 오..
10. 사마천과 사기 ① 사마담(司馬談) 1. 사마천의 아버지로, 무제(武帝)의 태사령(太史令)으로 비밀리에 행해지는 봉선(封禪)에 낄 줄 알았으나 자신은 끼지 못함. 2. 수행인원에까지 끼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며 죽던 중에 아들인 사마천에게 자기가 저술하려던 책을 이어 완성해줄 것을 청하고 죽음. ②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책을 이어 저술하다 1. 어렸을 때 동중서와 공안국 밑에서 수학했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체험을 한 것을 바탕으로 태사령(太史令)에 오르자마자 집필자료를 모음. 2. 시ㆍ서ㆍ춘추ㆍ전국책 등과 국중에 비장된 각종 서적을 섭렵하고 아버지의 책을 이어 집필하기 시작함. ③ 궁형의 고통 끝에 완성된 『사기(史記)』 1. 책을 저술한 지 5년 째 되던 때에, 이릉(李陵)이 5천 보병부대를 이끌고 ..
62. 신상필벌(信賞必罰)을 분명하게 한 한나라 선제(宣帝) 宣帝者, 武帝之曾孫也. 帝興於閭閻, 知民事之艱難, 勵精爲治. 拜刺史守相, 輒親見問, 常曰: “民所以安其田里而無嘆息愁恨之聲者, 政平訟理也. 與我共此者, 其惟良二千石乎. 以爲太守吏民之本, 數變易, 則民不安.” 故二千石, 有治理之效, 輒以璽書勉勵, 增秩賜金, 漢世良吏, 於是爲盛. 信賞必罰, 綜核名實, 政事文學法理之士, 咸精其能. 해석 宣帝者, 武帝之曾孫也. 선제는 무제의 증손자다. 帝興於閭閻, 知民事之艱難, 선제는 민가에서 생활해봤기에 일반인들의 어려움을 알아 勵精爲治. 정신을 가다듬고 정성껏 정치를 했다. 拜刺史守相, 輒親見問, 常曰: 자사와 태수와 재상을 임명할 적에 친히 보고 물었으며 항상 말했다. “民所以安其田里而無嘆息愁恨之聲者, “백성들이 ..
9. 무제의 대외정책과 선제의 선정 ① 흉노와의 강경화 정책 1. 화친정책으로 일관해오던 흉노와의 관계를 강경책으로 전환함. 2. 장건(張騫)의 서역 여행은 서역 제국과 동맹을 맺어 흉노를 철저하게 무찌르기 위한 것으로 2회에 걸쳐 파견됨. 3. 흉노에게 격파당한 월지(月氏)는 복수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기에 한(漢)은 장건(張騫)을 써서 월지와 동맹을 체결하려 했으나 무효가 됨. ② 장건의 13년 만의 귀국과 비단길 개척 1. 장건은 오는 길에도 흉노에 붙잡히게 되었으나 흉노의 내분을 틈타 도망함. 2. 13년 만에 한나라에 도착하여 장건의 복속에 따른 흉노족에 대한 기억 덕분에 흉노를 처벌하는 데 큰 도움이 됨. 3. 이후 아시아 각국과 문물을 교류했고 비단길도 이때에 개척됨. 인용 개관 사기 목차 ..
8. 전한 시대의 전성기를 구가한 무제의 대내정책 ① 무제(武帝)의 즉위 1. 기원전 141년, 경제가 죽고 황태자 철(徹)이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되니, 이가 바로 무제이며 전한의 황금기를 이룩함. 2. 안정된 기반 위에 과감한 정치를 펴서 풍요로운 사회를 만듦. ② 대내정책 1. 중앙집권의 강화: 승상 전분이 임명을 맘대로 하자 조용히 타이르며 서서히 임명권을 확보함은 물론 제후들의 권력을 약화시킴. 2. 경제면에서 화폐제도를 통일하고 정부가 화폐를 구조하게 함. 3. 균수법(均輸法): 각 지방의 특산물을 세금 대신 내어 장안 등지에서 비싸게 팔아 이익을 국가가 환수함. / 평준법(平準法): 물자가 많을 때는 보관을, 적을 때는 파는 형식으로 물가를 평균하여 정부의 수입을 증가시킴. 4. 동중서(董仲..
7. 전한의 기틀을 제대로 닦은 문경지치의 시대 ① 문제(文帝)의 국치 1. 손수 농사를 지으며 솔선수범했으며, 모두 농사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계몽하고 가난한 농민에게는 오곡의 씨앗을 대여해 줌. 2. 고조의 1/15 세(稅)를 1/30 세(稅)로 바꿔 시행하고 농지와 조세를 12년 동안 면제하여 사회와 경제를 크게 발전시킴. 3. 검약을 기본으로 삼고 가장 총애하는 신부인(愼夫人)에게도 검약을 강조하였으며 어진 정치를 베풀어, 한 왕실이 가장 융성해짐. ② 경제(景帝)의 국치 1. 문제(文帝)가 제위 23년 만에 죽고 그 뒤를 이어 경제가 즉위함. 2. 아버지를 본받아 백성을 잘 다스리고 법과 제도의 정비에 힘씀. 3. 노장사상인 여민휴식(與民休息) 정책을 실시하여 사회 경제는 전무한 발전을 이뤘고 사..
6. 여태후 한나라 정권을 장악하다 ① 소제(少帝) 공(恭)의 등극과 여태후의 득세 1. 혜제가 재위 7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어린 태자가 그 뒤를 이어 황제인 소제(少帝) 공(恭)이 되었기에 여태후의 전횡은 더욱 심해짐. 2. 여태후는 어린 황제가 자기에게 반항하자 폐위시켜 소제(少帝) 홍(弘)을 세움. 3. 연호를 원년(元年)으로 하지 않고 전 황제를 이어 5년으로 함. 4. 여태후는 여씨 일족으로 왕을 세워 둘째 오빠 조왕(趙王) 여록(呂祿)에게 북군 지휘를, 양왕(襄王) 여산(呂産)에게 남군 지휘를 맡겨 군대를 장악함. 5. 여태후의 집권 시기는 혜제 재위 8년을 포함하여 15년 간에 이름. ▲ 여씨 일족 토벌 작전(삽화 - 권미영) ② 여태후의 말기 1. 기원전 180년 여태후는 세상을 떠났음...
5. 한고조 이후의 혜제 등극과 여후의 막장드라마 ① 정세와 태자 책봉 문제 1. 유씨 정권도 처음부터 견고한 것은 아니어서 고조의 부인 여후(呂后) 일족이 한바탕 정권을 휘두르던 시기가 지나서야 유씨 정권이 뿌리 내림. 2. 고조는 경포(黥布) 토벌에 나갔다가 화살에 맞은 상처가 날로 악화되고 있었으며 그때 고조는 여후를 멀리하고 후궁 척부인을 총애하고 있었음. 3. 고조는 영(盈)이 유약하므로 불만이 있던 터에 척부인이 낳은 여의(如意)를 태자로 책봉하려다가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정하지 못하고 죽음. ② 혜제(惠帝)의 등극과 척부인ㆍ여의에 대한 여후의 보복 1. 태자 영(盈)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혜제(惠帝)로 등극했으나 유약하고 나이도 어려 실권은 여후가 장악하게 됨. 2. 여후는 척부인을 한 번..
61. 초왕(楚王) 한신(韓信),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하다 高祖六年, 人有上書告楚王韓信反. 諸將曰: “發兵坑孺子耳.” 上問陳平, 平危之曰: “古有巡狩會諸侯. 陛下第出僞遊雲夢, 會諸侯於陳, 因禽之, 一力士之事耳.” 上從之. 告諸侯會陳, “吾將遊雲夢” 至陳ㆍ信上謁, 命武士縛信, 載後車. 信曰: “果若人言, ‘狡兎死, 走狗烹, 飛鳥盡, 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臣固當烹.” 遂械繫以歸, 赦爲淮陰侯. ▲ 한신과 토사구팽. 한신의 인생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해석 高祖六年, 人有上書告楚王韓信反. 한고조 6년에 사람들이 한고조에게 초왕 한신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글을 올려 알렸다. 諸將曰: “發兵坑孺子耳.” 모든 장수들이 말했다. “병사들을 출동시켜 그 어린 놈인 한신을 묻어버리면 그만입니다.” 上問陳平..
4. 왕권 강화를 위한 공신 숙청작업 ① 군국제의 실시 1. 공신에게 왕의 봉직을 주어 한신을 초왕(楚王)으로, 팽월을 양왕(襄王)으로 삼음으로 여러 왕국들이 생겨 다시 전국시대로 돌아간 형세가 됨. 2.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장안을 중심으로 한 지역과 서북 군사 요충지는 황제 직속의 군현으로 두고, 나머지 땅은 대표적 공신에게 분봉하여 나누어 다스리게 한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함. ② 공신의 처단 1. 한왕조의 지배력이 안정권에 접어들자 이성(異性) 제후왕들은 커다란 위협이 되어 모반의 누명을 씌워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함. 2. 한신의 역모죄로 초왕에서 회음후(淮陰侯)로 격하되자 ‘토사구팽(兎死狗烹)’을 외치며 고조 10년 조(趙) 재상 진량(陳倆)이 대(代)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군..
60. 포로 19년을 버티고 버틴 소무(蘇武) 天漢元年, 遣中郞將蘇武, 使匈奴. 單于欲降之, 幽武置大窖中, 絶不飮食. 武齧雪與旃毛幷咽之, 數日不死, 匈奴以爲神. 徙武北海, 上無人處, 使牧羝曰: “羝乳乃得歸.” 二年遣李廣利, 擊匈奴, 別將李陵, 敗降虜. 始元六年, 蘇武還自匈奴. 武始徙北海上, 掘野鼠去草實而食之, 臥起持漢節. 漢使者至匈奴, 匈奴詭言武已死. 漢使知之言, “天子射上林, 中得雁, 足有帛書云 ‘武在大澤中.’” 匈奴不能隱, 乃遣武還. 武留匈奴十九年, 始以强壯出, 及還須髮盡白. 拜爲典屬國. 해석 天漢元年, 遣中郞將蘇武, 使匈奴. 천한(天漢) 원년에 중서 소무를 파견하여 흉노족에 보냈다. 單于欲降之, 幽武置大窖中, 선우는 소무를 투항하게 하고자 하여 소무를 가두어 큰 움 속에 두고서는 絶不飮食. 아무런 ..
59. 장량(張良)을 가르친 기이한 스승 留侯張良少時, 於下邳圯上, 遇老人. 墮履圯下, 謂良曰: “孺子下取履.” 良欲歐之, 憫其老. 乃下取履, 老人以足受之曰: “孺子可敎, 後五日, 與我期於此.” 良如期往, 老人已先在. 怒曰: “與長者期, 後何也?” 復約五日. 及往, 老人又先在, 怒復約五日. 良半夜往, 老人至乃喜授以一編書曰: “讀此可謂帝者師. 異日見濟北穀城山下黃石, 卽我也.” 旦視之, 乃『太公兵法』. 良異之, 晝夜習讀. 旣佐上定天下, 封於留, 後經穀城, 果得黃石焉, 奉祠之. 해석 留侯張良少時, 於下邳圯上, 유후 장량이 어릴 적에 하비(下邳)의 흙다리 위에서 遇老人. 어떤 노인을 만났다. 墮履圯下, 謂良曰: 그 노인은 다짜고짜 자신의 신발을 흙다리 밑으로 떨어뜨리며 장량에게 말했다. “孺子下取履.” “어린놈..
3. 한나라 수도 이전과 체제 정비 ① 수도 결정문제 1. 한고조는 주왕실의 융성을 이어받고 싶었고 대부분의 군신들의 낙양을 수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함. 2. 장량은 낙양이 교통은 편하나 공격을 받기 쉽기에 진나라 도읍인 관중이 기름진 평야가 있어 천하의 요새이기에 관중으로 삼아야 한다고 함. 3. 장량의 판단을 믿은 고조는 관중 근처 장안에 새 수도를 정하고 새로운 궁전인 미앙궁(未央宮)을 지음. ② 제도 정비 1. 소하(蕭何)ㆍ숙손통(叔孫通) 등에게 여러 문물과 제도를 제정하게 했는데, 대부분은 진의 제도를 계승함. 2.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제도의 운용은 오히려 민심의 향배에 맡기고 커다란 범주만을 규제하는 방침을 택함. 3. 진나라의 연좌법이나 삼족구멸법 등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조세도 수확..
58. 한신(韓信)과 한고조(漢古祖)의 문답(問答) 上嘗從容問韓信, 諸將能將兵多少. 上曰: “如我能將幾何?” 信曰: “陛下不過將十萬.” 上曰: “於君何如?” 信曰: “臣多多益辨” 上笑曰: “多多益辨, 何以爲我禽?” 曰: “陛下不能將兵而善將將. 此信所以爲陛下禽. 且陛下所謂天授, 非人力也.” 해석 上嘗從容問韓信, 한고조가 조용히 한신에게 諸將能將兵多少. 모든 장수가 거느릴 수 있는 병사의 많고 적음에 대해 물었었다. 上曰: “如我能將幾何?” 한고조가 말했다. “나와 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를 거느릴 수 있겠는가?” 信曰: “陛下不過將十萬.” 한신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10만 거느리는 것을 넘어서질 못합니다.” 上曰: “於君何如?” 한고조가 말했다. “그대라면 어느 정도요?” 信曰: “臣多多益辨” 한신이 대..
57. 한고조와 삼걸(張良ㆍ蕭何ㆍ韓信)의 문답 漢王卽皇帝位, 置酒洛陽南宮. 上曰: “徹侯諸將, 皆言. 吾所以得天下者何, 項氏所以失天下者何?” 高起ㆍ王陵對曰: “陛下使人攻城掠地, 因而與之, 與天下同其利, 項羽不然. 有功者害之, 賢者疑之, 戰勝而不豫人功, 得地而不與人利.” 上曰: “公知其一未知其二. 夫運籌帷幄之中, 決勝千里之外, 吾不如子房, 鎭國家撫百姓給饋餉, 不絶糧道, 吾不如蕭何, 連百萬之衆, 戰必勝攻必取, 吾不如韓信. 此三者, 皆人傑也, 吾能用之, 此吾所以取天下, 項羽有一范增而不能用, 此其所以爲我擒也.” 群臣悅服. 해석 漢王卽皇帝位, 置酒洛陽南宮. 한고조가 황제로 즉위하여 낙양 남쪽 궁궐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上曰: “徹侯諸將, 皆言. 한고조가 말했다. “나열지어선 제후들과 모든 장수들은 다 말하라. 吾..
2. 유방이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요인 ① 한고조의 성공요인 문답 1. 5년에 걸친 전쟁 끝에 승리를 거둔 유방은 기원전 202년에 즉위식을 가지고 황제가 되었으며 성대한 잔치를 벌임. 2. 천하를 차지하게 된 요인을 묻자, 고조가 항우보다 거만하지만 공적이 있는 자들을 잘 챙겨주었기 때문이라고 왕릉(王陵)이 말함. 3. 그러자 고조는 장량ㆍ소하ㆍ한신의 인걸(人傑)을 잘 쓴데 반해 항우는 범증마저도 잘 쓰지 못했기에 잃은 거라 말하니, 모두가 탄복함.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한고조와 삼걸(張良ㆍ蕭何ㆍ韓信)의 문답 한신(韓信)과 한고조(漢古祖)의 문답(問答)
전한시대(前漢時代) 1. 개요 ① 특징 1. 한고조 유방은 봉건제의 장점과 군현제(郡縣制)의 장점을 살린 군국제(郡國制)로 한왕조의 기틀을 접음. 2. 초기엔 한신과 팽월 등 창업 공신들을 숙청하여 황제권을 강화했으며 문제(文帝)ㆍ경제(景帝) 때엔 선정이 베풀어져 태평성대였음. 3. 무제(武帝)는 대내적으론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운영할 방안을 마련하고 대외적으론 흉노를 정벌하고 변방을 개척하며 전성기를 구가함. 4. 화려한 외형의 이면에는 재정이 궁핍해지고 외척이 정치에 관여하는 혼란이 있어 14대 평제 때에 이르면 외척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찬탈하고 신(新)이란 나라를 세움(이때부터 후한임). 5. 신은 제도개혁에 실패하여 15년 만에 망하여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다시 한왕조를 세우게 됨. ..
56. 우미인과 이별하는 항우(項羽) 張良ㆍ陳平謂漢王曰: “漢有天下大半, 楚兵饑疲, 今釋不擊, 此養虎自遺患也.” 王從之. 五年, 王追羽至固陵, 韓信ㆍ彭越皆引兵來, 黥布亦會. 項羽至垓下, 兵少食盡. 信等乘之, 羽敗入壁, 圍之數重. 羽夜聞漢軍四面皆楚歌, 大驚曰: “漢已得楚乎? 何楚人多也.” 起飮帳中, 命虞美人起舞, 悲歌慷慨, 泣數行下. 其歌曰: “力拔山兮, 氣蓋世, 時不利兮, 騅不逝, 騅不逝兮, 可奈何, 虞兮虞兮, 奈若何” 騅者羽平日所乘駿馬也. 左右皆泣, 莫敢仰見. 羽乃夜從八百餘騎, 潰圍南出. 渡淮, 至東城, 乃有二十八騎. 羽謂其騎曰: “吾起兵八歲, 七十餘戰, 未嘗敗也. 今卒困此, 此天亡我, 非戰之罪. 今日固決死, 願爲諸君決戰, 必潰圍斬將, 令諸君知之, 皆如其言.” 於是, 欲東渡烏江, 亭長艤船待曰: “江東雖..
8. 항우의 패왕별희와 유방의 승리 ① 해하전투와 항우의 자살 1. 항우는 무장을 풀고 동쪽으로 갔으며 유방은 서쪽으로 가려 했으나 장평과 진평의 설득으로 해하(垓下)에서 대치하게 됨. 2. 한신은 초나라 사람들에게 밤마다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하여 초나라 군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함. 사면초가(四面楚歌) 3. 항우는 패배를 직감하고 연회를 벌여 우희라는 애첩과 우(虞)라는 명마와 마지막을 즐긴 후 우희를 죽임. 패왕별희(覇王別姬) 4. 겹겹이 에워싼 한나라 군대를 피해 항우는 도망가다가 오강에 이르러 스스로 자살함. ② 한고조 유방의 탄생 1. 진나라 타도의 수훈갑은 항우였지만 최후 승리의 열매는 유방이 땀. 2. 농민 출신으로 항우보다 뛰어나진 않았지만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않고 인재를 잘 활용..
7. 진평의 이간질과 든든한 지원으로 유리한 상황에 놓인 유방 ① 진평의 이간질과 허무한 범증의 죽음 1. 진평(陳平)은 항우와 범증 사이를 이간질하러 항우의 사자가 형양에 왔을 때 초호화 상을 조촐한 상으로 바꿔서 주며 ‘범증이 아닌 항우가 보낸 사자였냐’며 실망한 투로 말함. 그러자 항우가 범증을 의심하게 됨. 소식의 『范增論』 이제현의 『范增論』 일반론 진평의 이간질로 항우와 범증 사이가 멀어졌다. 질의 범증이 三傑(소하ㆍ장량ㆍ한신)보다 뛰어난가? 반론 否! 아니다! 死宋義 → 弑義帝 → 遠范增 이간질 이전에 송의장군을 죽였을 때 이미 소원해져 있었다. 응답 항우는 不信ㆍ不仁ㆍ不義하여 왕이 되긴 글렀고 유방은 하늘도, 사람도 허여해줘 왕이 될 인물이었는데도 범증은 그걸 몰라봤다. 질의 범증은 신하인..
55. 정형구 전투와 배수진 漢三年, 韓信ㆍ張耳, 以兵擊趙, 聚兵井陘口, 趙王歇及成安君陳餘禦之. 夜半信傳發輕騎二千, 人人持赤幟, 從間道望趙軍. 戒曰: “趙見我走, 必空壁逐我. 若疾入趙壁, 拔趙幟立漢赤幟.” 乃使萬人先行背水陣, 平旦建大將旗鼓, 鼓行出井陘口, 趙開壁擊之. 戰良久, 信ㆍ耳佯棄旗鼓, 走水上軍, 趙果空壁逐之. 水上軍皆殊死戰. 趙軍已失信等歸壁, 見赤幟大驚, 遂亂遁走. 漢軍夾擊大破之, 斬陳餘禽趙歇. 諸將賀因問曰: “兵法右倍山陵, 前左水澤, 今背水而勝何也?” 信曰: “兵法不曰: ‘陷之死地而後生, 置之亡地而後存乎.’” 諸將皆服. 해석 漢三年, 韓信ㆍ張耳, 한나라 3년에 한신과 장이가 以兵擊趙, 聚兵井陘口, 병사들로 조나라를 치려 정형구(井陘口) 군사를 모으니, 趙王歇及成安君陳餘禦之. 조나라 임금인 헐(歇..
6. 유방, 전멸의 위기에 몰리다 ① 항우의 군대 제나라에 묶이다 1. 항우는 유방이 관중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정벌하려 가려 하나 조(趙)ㆍ제(齊)가 연합해 배반할 기미가 보이기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함. 2. 장량은 항우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유방이 관중왕이 된다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보냄. 3. 제(齊) 토벌에 나선 항우는 제(齊)의 성을 불태우고 항복한 이를 생매장하려 하자, 몰살당할 처지에 놓인 제나라 잔병들은 필사적으로 싸워 항우의 군대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음. ② 유방군의 분발과 항우의 기민함 1. 유방의 군대가 함곡관을 넘어 동으로 진격하여 낙양에 들어가니 신성의 동공(蕫公)이 항우에 시해되었음을 알고 제후들에게 도움을 청함. 2. 제후들이 유..
54. 항우에게 삶아 죽임을 당한 한생 沛公至軍, 立誅曹無傷. 居數日, 羽引兵西, 屠咸陽, 殺降王子嬰. 燒秦宮室, 火三月不絶. 掘始皇冢, 收寶貨婦女而東, 秦民大失望. 韓生說羽曰: “關中阻山帶河, 四塞之地肥饒, 可都以覇.” 羽見秦殘破, 且思東歸曰: “富貴不歸故鄕, 如衣繡夜行耳.” 韓生退曰: “人言, 楚人沐猴而冠, 果然.” 羽聞之, 烹韓生. 後羽自立爲西楚覇王, 立沛公爲漢王, 王巴ㆍ蜀ㆍ漢中, 是歲漢元年也. 해석 沛公至軍, 유방이 홍문회합에서 가까스로 도망 나와 군진에 이르자, 立誅曹無傷. 곧바로 이간질을 했던 좌사마 조무상을 죽였다. 居數日, 羽引兵西, 자리를 잡은 지 며칠 후에 항우는 병사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가서 屠咸陽, 殺降王子嬰.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을 도륙하고 이미 항복한 진나라의 왕자인 영(嬰)을 ..
5. 서초패왕 항우와 한왕 유방의 탄생 ① 항우의 실책 1. 홍문회합 며칠 후 항우는 함양에 들어가 재물을 약탈하고 아방궁을 불태우고 여산릉까지 파헤침(통일 후 3대 15년 만에 진나라 역사는 끝남) 2. 범증과 상의하여 변방을 유방에게 주어 한왕(漢王)으로 칭해주고 관중을 3등분 해 유방을 견제케 함(한나라 역사의 시작). 3. 관중을 도읍으로 하잔 의견을 묵살하고 고향 팽성(彭城)을 도읍으로, 국호를 서초(西楚)로, 스스로를 서초패왕(西楚覇王)으로 함. ② 유방의 반격 1. 변방에 봉해진 유방은 화가 났으나 소하(蕭何)의 만류로 서서히 도모하기로 함. 2. 한신(韓信)의 계책에 따라 옛길로 진출하여 눈 깜빡할 새에 함곡관을 차지함.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53. 유방을 피신시킨 장량과 번쾌 張良出, 告樊噲以事急. 噲擁盾直入, 嗔目視羽, 頭髮上指, 目眥盡裂. 羽曰: “壯士, 賜之巵酒.” 則與斗巵酒, “賜之彘肩” 則生彘肩. 噲立飮, 拔劍切肉啗之. 羽曰: “能復飮乎?” 噲曰: “臣死且不避, 巵酒安足辭. 沛公先破秦入咸陽, 勞苦而功高如此. 未有封爵之賞, 而將軍聽細人說, 欲誅有功人, 此亡秦之續耳, 竊爲將軍不取也.” 羽曰: “坐!” 噲從良坐, 須臾沛公起如厠, 因招噲出, 間行趨覇上. 留良謝羽曰: “沛公不勝杯杓, 不能辭. 使臣良奉白璧一雙, 再拜獻將軍足下, 玉斗一雙, 再拜奉亞父足下.” 羽曰: “沛公安在?” 良曰: “聞將軍有意督過之, 脫身獨去, 已至軍矣.” 亞父拔劍, 撞玉斗而破之曰: “唉! 豎子不足謀. 奪將軍天下者, 必沛公也.” 해석 張良出, 告樊噲以事急. 장량이 밖으로 나..
52. 유방을 죽이려는 범증(范增) 沛公旦從百餘騎, 見羽鴻門. 謝曰: “臣與將軍戮力而攻秦, 將軍戰河北, 臣戰河南, 不自意, 先入關破秦. 得復見將軍於此, 今者有小人之言, 令將軍與臣有隙.” 羽曰: “此沛公左司馬曹無傷之言.” 羽留沛公與飮, 范增數目羽擧所佩玉玦者三, 羽不應. 增出使項莊入前, 爲壽請以劍舞, 因擊沛公. 項伯亦拔劍起舞以身, 翼蔽沛公, 莊不得擊. 해석 沛公旦從百餘騎, 見羽鴻門. 유방은 아침에 백여명의 기마병을 따라 항우를 홍문(鴻門)에서 뵈었다. 謝曰: “臣與將軍戮力而攻秦, 유방은 사죄드렸다. “신하와 장군은 힘을 모아 진나라를 공격했는데 將軍戰河北, 臣戰河南, 장군은 하북에서 싸웠고 저는 하남에서 싸워 不自意, 先入關破秦. 의도치 않게 먼저 함곡관에 들어와 진나라를 무너뜨렸습니다. 得復見將軍於此, 다..
4. 홍문의 회합 ① 항우 관중을 차지하고 유방과 붙다 1. 항우는 함곡관을 깨부수려 했으나 백성들이 저항하여 실패했고 사잇길로 돌파하여 홍문에 이름. 2. 항우 40만 군대, 유방 오합지졸 10만 군대로 굴욕적으로 항복함. ② 홍문회합(鴻門會合) 1. 범증의 죽이자는 간언에도 항우는 연회를 엶. 2. 범증은 항장(項莊)에게 칼춤을 추게 하자 장량은 번쾌로 좌중을 진압케 하고 유방을 몰래 도망가게 함. 3. 유방이 본진에 도착할 때쯤 장량은 선물을 항우에게 줬고 항우는 만족해했지만 범증은 소인배라 비꼼.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유방을 죽이려는 범증(范增) 유방을 피신시킨 장량과 번쾌
51. 항우(項羽)와 범증(范增)의 이야기를 장량(張良)에게 고하다 項羽率諸侯兵, 欲西入關, 或說沛公, 守關門, 羽至門閉, 大怒攻破之. 進至戱西, 期旦擊沛公. 羽兵四十萬, 號百萬, 在鴻門, 沛公兵十萬, 在覇上. 范增說羽曰: “沛公居山東, 貪財好色. 今入關, 財物無所取, 此其志不在小, 急擊勿失.” 羽季父項伯, 素善張良, 夜馳至沛公軍, 告良. 해석 項羽率諸侯兵, 欲西入關, 항우가 모든 제후를 거느리고 서쪽 함곡관으로 들어가고자 하자, 或說沛公, 守關門, 羽至門閉, 혹자가 유방을 설득하여 관문을 지켜 항우가 도착하자 문을 닫아걸었는데 大怒攻破之. (항우)가 크게 성내며 공격해 부셔버렸다. 進至戱西, 期旦擊沛公. 진격하여 희서(戱西)에 이르러 아침에 유방을 공격하기로 했다. 羽兵四十萬, 號百萬, 在鴻門, 항우의..
3. 유방, 관중왕이 되었으나 훗날을 위해 잘 처신하다 ① 유방의 득세와 범증의 견제 1. 범증이 초회왕의 손자 심(心)을 왕으로 내세워야 반란이 승리한다고 하며 의제(義帝)로 세워 진을 크게 이김. 2. 연승으로 거만해진 항량은 무리하게 전투하자 전사했고, 의제는 상장(上將)으로 송의(宋義)를, 차장(次將)으로 항우(項羽)를, 말장(末將)으로 범증(范增)을 임명하여 조(趙) 평정. 3. 진을 평정할 적임자 선발을 위해 의제는 “진(秦)의 동대문인 함곡관(函谷關)에 먼저 오는 이를 관중왕(關中王)으로 삼겠다”고 명령함. 4. 항우는 송의가 미적대자 그를 죽이고 관에 이르렀으나 유방이 벌써 도착하여 그곳을 지키고 있었음. ② 유방의 함양 입성 1. 영은 진(秦) 조고(趙高)가 호해(胡亥)를 죽이고 세운 왕..
50. 한신, 유방의 책략가로 활짝 피다 初淮陰人韓信, 家貧釣城下. 有漂母, 見信饑, 飯信. 信曰: “吾必厚報母.” 母怒曰: “大丈夫不能自食, 吾愛王孫而進食, 豈望報乎.” 淮陰屠中少年, 有侮信者. 因衆辱之曰: “若雖長大好帶劍, 中情怯耳. 能死刺我, 不能出我胯下.” 信熟視之, 俛出胯下蒲伏, 一市人皆笑信怯. 後項梁渡淮, 信從之. 又數以策干項羽不用. 亡歸漢, 爲治粟都尉. 數與漢王臣蕭何語, 何奇之. 謂王曰: “信國士無雙.” 王乃設壇場具體, 諸將皆喜, 人人自以爲得大將. 至拜乃韓信也, 一軍皆驚. 王遂用信計, 襲秦諸將, 章邯敗死, 司馬欣等皆降. 해석 初淮陰人韓信, 家貧釣城下. 초반에 회음인인 한신은 집이 가난하여 성 아래에서 낚시를 하며 소일하고 있었다. 有漂母, 見信饑, 飯信. 빨래터 아낙이 한신이 굶주린 걸 보고..
49. 범증의 회왕 옹립하기 居鄛人范增, 年七十, 好奇計, 往說項梁曰: “陳勝不立楚後而自立, 其勢不長. 今君起江東, 楚蜂起之將, 爭附君者. 以君世世楚將, 必能復立楚之後.” 於是項梁求得楚懷王孫心, 立爲楚懷王, 以從民望. 해석 居鄛人范增, 年七十, 好奇計, 거소(居鄛) 출신인 범증은 나이 70살이었는데 기이한 계책을 좋아하여 往說項梁曰: “陳勝不立楚後而自立, 가서 항량을 설득했다. “진승은 초나라 후계자를 세우지 않고 자립하고자 하였기에 其勢不長. 그 세력이 길게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今君起江東, 楚蜂起之將, 이제 그대는 강동에서 기병하여 초나라에서 봉기한 장수로, 爭附君者. (누구든) 다투어 그대에게 편입되려 할 것입니다. 以君世世楚將, 必能復立楚之後.” 그대가 대대로 초나라의 장수가 되고자 한다면, 반드..
48. 항우의 어린시절과 항우의 시작 項梁者, 楚將項燕之子也. 嘗殺人, 與兄子籍避仇吳中. 籍字羽, 少時學書, 不成去, 學劍, 又不成. 梁怒, 籍曰: “書足以記姓名而已, 劍一人敵也, 不足學, 學萬人敵.” 梁乃敎籍兵法. 會稽守殷通. 欲起兵應陳涉, 使梁爲將, 梁使籍斬通, 佩其印綬. 遂擧吳中兵, 得八千人. 籍爲裨將, 時年二十四. 해석 項梁者, 楚將項燕之子也. 항량은 초나라 장수 항연의 아들이다. 嘗殺人, 與兄子籍避仇吳中. 일찍이 사람을 죽여 형의 자식인 적과 함께 오중으로 원수를 피해 달아났다. 籍字羽, 少時學書, 不成去, 적의 자는 우인데 어려서 글을 배울 때 성취도 없이 그만뒀으며, 學劍, 又不成. 검을 배울 때도 성취를 내지 못했다. 梁怒, 籍曰: 항량이 성내니, 항우가 말씀드렸다. “書足以記姓名而已, 劍..
2. 항우와 유방 ① 항우(項羽) 1. 초(楚) 귀족의 후예로 명장 항연(項燕)의 아들이자, 숙부 항량(項梁)에게 의지하여 병법을 배움. 2. 진시황의 순수(巡狩)를 보고 자신도 저 자리에 있겠다고 꿈을 키웠으며 진승과 오광의 난을 접하고 회계군수를 죽이고 군사를 모음. ② 유방(劉邦) 1. 농민의 아들이며 관상가 여공(呂公)은 그의 남다른 풍채를 보고 여식을 주니, 그녀가 훗날 황제의 부인이 됨. 2. 여산능 공사의 인솔자로 끌고 가던 중 이탈자 속출로 따를 자만 따르게 하여 패현의 관리를 죽이고 패공(沛公)이 됨. ▲ 전주객사는 유방과 관련이 있다. '풍패지관'은 유방의 본향이 패현이기에 '건국자의 본향'이란 고유명사로 쓰였다.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항우의 어린시절과 항우의 시작
47. 진나라의 멸망을 알린 진승과 오광의 반란 陽城人陳勝, 字涉. 少與人傭耕, 輟耕之隴上, 悵然久之曰: “苟富貴無相忘.” 傭者笑曰: “若爲傭耕, 何富貴也?” 勝太息曰: “嗟呼! 燕雀安知鴻鵠之志哉?” 至是與吳廣起兵于蘄, 時發閭左, 戌漁陽, 勝ㆍ廣爲屯長. 會大雨道不通, 乃召徒屬曰: “公等失期, 法當斬, 壯士不死則已, 死則擧大名. 王侯將相, 寧有種乎?” 衆皆從之. 乃詐稱公子扶蘇項燕, 稱大楚, 勝自立爲將軍. 廣爲都尉. 해석 陽城人陳勝, 字涉. 함양 사람 진승의 자는 섭이다. 少與人傭耕, 輟耕之隴上, 어려서 어떤 이와 함께 농사일에 고용되어 언덕 위에서 밭 갈다 그만두고 悵然久之曰: “苟富貴無相忘.” 쓸쓸히 “진실로 (훗날) 부귀해지면 서로 잊지 말자.”라고 말했다. 傭者笑曰: “若爲傭耕, 何富貴也?” 그랬더니..
초한쟁패(楚漢爭霸) 1.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 1. 호해(胡亥)의 폭정: 반대파 숙청 및 이사까지 요참형(腰斬刑)으로 죽이고 잦은 장정과 징집으로 원성 높아짐. 2. 북쪽 변방 수비의 명을 받고 어양으로 향하던 중 폭우로 기일 내 도착이 불가능해지자 인솔자 죽이고 항쟁 시작. 3. 진(陳)을 함락하고 진승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나 부하에 살해당함으로 6개월 만에 끝났고 반란은 계속 발생함.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진나라의 멸망을 알린 진승과 오광의 반란
7. 진시황의 죽음과 유서조작으로 왕이 된 호해 ① 진시황의 죽음과 유서 1. 진시황은 회계를 거쳐 낭야로 향하는 순행길 도중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어 장남 부소에게 줄 유서를 씀. 2. 유서의 내용은 ‘군사는 몽염에게 맡기고 나의 관을 함양에서 장사 지내라’라는 것이었음. 3. 이미 진시황은 죽고 유서와 국새는 족(趙高)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발표하지 않고 함양으로 돌아옴. ② 조작된 유서와 호해의 왕위 등극 1. 조고는 호해(胡亥)를 가르친 적이 있어 승상 이사와 논의하여 호해를 태자로 세운 후 시황제의 죽음을 발표함. 2. 위조된 유서엔 ‘부소와 몽염을 죽여라’는 내용이었기에 장남 부소는 자결했고, 몽염은 굴복치 않고 체포되어 사약을 받고 죽게 됨.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한시미학산책
6. 진나라의 만리장성, 진시황릉, 아방궁 ① 진시황릉과 아방궁의 무리한 건설 1. 진시황은 13세에 즉위했을 때부터 여산 기슭에 자신에 능묘를 만들기 시작했고 50세가 될 무렵에 완성됨. 2.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이 공사에만 무려 75만명의 죄수가 동원되었다고 함. 3. 역대로 내려온 함양궁(咸陽宮)은 아무래도 위엄이 서지 않는다 하여 대규모 궁전을 새로 짓기로 했으나 완성되기 전에 진나라는 멸망함. ② 만리장성의 축조 1. 전국시대 여러 제후나라에서 쌓았던 장성을 보강하여 쌓은 것으로 가혹한 부역 수탈의 전형물임. 2. 흉노세력이 강화되어 국경을 위협할 염려가 있어 장군 몽염(夢恬)에게 몰아내고 장성을 쌓도록 함. 3. 이런 이유로 대공사를 벌였고 장성 부근 지방에 군현을 두고 백성을 강제로 이주시..
46. 장남(長男) 부소(扶蘇)를 북방(北方)으로 쫓아내다 三十五年, 侯生盧生, 相與譏議始皇, 因亡去. 始皇大怒曰: “盧生等, 吾尊賜之甚厚, 今乃誹謗我. 諸生在咸陽者, 吾使人廉問, 或爲妖言, 以亂黔首.” 於是使御史悉按問諸生, 傳相告, 引乃自除, 犯禁者, 四百六十餘人. 皆坑之咸陽. 長子扶蘇諫曰: “諸生皆誦法孔子, 今上皆重法繩之, 臣恐天下不安.” 始皇怒. 使扶蘇, 北監蒙括軍於上郡. 해석 三十五年, 侯生盧生, 相與譏議始皇, 35년에 후생과 노생이 서로 함께 시황제를 기롱하며 의론을 하였고, 因亡去. 처벌될까 두려워하며 도망가 버린 사건이 있었다. 始皇大怒曰: 시황제는 매우 화내며 말했다. “盧生等, 吾尊賜之甚厚, “노생 등의 무리는 내가 존중하며 하사하길 심히 후하게 했음에도 今乃誹謗我. 이제 나를 비방하고 ..
45.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위한 이사(李斯)의 변 三十四年, 丞相李斯, 上書曰: “異時諸侯竝爭, 厚招遊學. 今天下已定, 法令出一, 百姓當家則力農工, 士則學習法令. 今諸生不師今而學古, 以非當世, 惑亂黔首. 聞令下, 則各以其學議之, 入則心非, 出則巷議, 率群下以造謗. 臣請. 史官非秦記, 皆燒之, 非博士官所職, 天下有藏詩書百家語者, 皆詣守尉雜燒之. 有偶語詩書者, 棄市, 以古非今者族. 所不去者, 醫藥卜筮種樹之書, 若有欲學法令, 以吏爲師.” 制曰: “可” 해석 三十四年, 丞相李斯, 上書曰: 34년 승상 이사가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다. “異時諸侯竝爭, 厚招遊學. “다른 때엔 제후들이 함께 싸워, 후하게 유학하는 이들을 초빙했습니다. 今天下已定, 法令出一, 이제 천하는 이미 정해져 법령이 한 군데서 나오..
5. 분서갱유(焚書坑儒)와 이사 ① 승상(丞相) 이사(李斯)의 사상 통일을 위한 분서갱유(焚書坑儒) 1. 진(秦)의 서적 이외 서적은 모두 태워버려야 하며, 옛 서적을 숨기고 내놓지 않으면 도형(徒刑)에 처함. 2. 옛일을 돌이켜 지금의 정치를 비방하는 자는 일족을 멸함. ② 시행의 결과 1. 실용서적 외에 모두 불살라 버리자 유생들이 불만을 품고 저항했으며, 이런 유생 460명을 생매장시킴. 2. 반발을 일으켜 통치 기반을 약화시켰으며, 문화역량을 크게 위축시킴.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중용강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위한 이사(李斯)의 변장남(長男) 부소(扶蘇)를 북방(北方)으로 쫓아내다
44. 통일제국을 위해 진시황의 명령 秦王政初幷天下, 自以‘德兼三皇, 功過五帝’ 更號曰皇帝. 命爲制, 令爲詔, 自稱曰朕. 制曰: “死而以行爲諡, 則是子議父, 臣議君也, 甚無謂, 自今以來, 除諡法. 朕爲始皇帝, 後世以計數, 二世三世, 至于萬世, 傳之無窮.” 收天下兵, 聚咸陽, 銷以爲鍾鐻金人十二, 重各千石. 徙天下豪富於咸陽, 十二萬戶. 해석 秦王政初幷天下, 진나라 왕 정은 초반에 천하를 병합하고 自以‘德兼三皇, 功過五帝’ 스스로 ‘덕으론 삼황을 겸했고, 공으론 오제를 뛰어넘었다’고 여겼기에 更號曰皇帝. 호칭을 고쳐 ‘황제’로 부르게 했다. 命爲制, 이때까지 써온 ‘명(命)’이란 호칭을 ‘제(制)’로, 令爲詔, 自稱曰朕. 이때까지 써온 ‘령(令)’이란 호칭을 ‘소(詔)’로, 임금 자신을 일컫는 말은 ‘짐(朕)..
4. 진나라의 통일 직후 체제정비 ① 통일되기 전까지의 상황 1. 진효공(秦孝公)은 상앙(商央)을 등용해 법질서의 개혁을 단행하고 군주제를 강화했으며 법질서를 확립시킴. 2. 전국시대 후기에 1/3의 영토를 차지했으나, 경제력은 60%에 달할 정도로 천하통일의 기초를 다짐. 3. 진시황은 법가의 인물을 등용해 국정을 보좌하게 하고 6국을 멸망시키는 전쟁을 일으켜 17년 만에 통일을 이룸. ② 통일 후의 기반 마련 1. 삼황오제(三皇五帝)의 공을 한 몸에 겸했다는 뜻으로 ‘황제’란 호칭을 처음으로 쓰게 됨. 2. 왕관 등이 왕자를 지방에 봉하는 통치방법을 주장했으나, 이사(李斯)가 주왕조를 예로 들며 중앙집권체제를 주장하자, 이사의 말을 받아들여 36개 군(群)과 군 밑에 현(縣)을 두어 직접 통치하는 군..
3. 진나라의 천하대일통(天下大一統) ① 통일을 위한 초석 1. 2백 여년 동안의 전쟁으로 진나라는 세력이 강해진 반면, 여섯 나라는 국력이 약화됨. 2. 이사(李斯)ㆍ정국(鄭國)ㆍ위요(尉邀)와 같은 관리 등을 등용하여 법가 정책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군사적으로도 힘을 키움. 3. 합종책(合縱策)을 깨기 위해 내부부패를 이용하여 군주와 신하 사이를 이간질함. 4. 한(韓) 기원전 230년에, 조(趙)가 기원전 228년에, 위(魏)가 기원전 225년에, 연(燕)이 차례로 멸망됨. ② 초나라와의 마지막 전투 1. 초나라와의 전투에 젊은 장군 이신(李信)은 20만이면 충분하다 했고, 왕전(王翦)은 60만명이 필요하다고 하여 왕은 이신을 보냈다가 대패함. 2. 왕전에게 사과하고 왕전을 보내자 초군이 공격해와서 ..
2. 자초(子楚)의 즉위에서 세자 정(政)의 등극까지 ① 자초의 즉위 1. 6년 후 진소왕(秦昭王)이 죽고 안국군이 즉위하여 효문왕(孝文王)이 되었고, 그가 즉위 3일 만에 죽자 자초가 즉위하여 장양왕(莊襄王)이 됨. 2. 장양왕은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候)로 봉했으며 10만 호를 식읍으로 줌. 3. 장양왕은 즉위 3년 만에 죽고 정(政)이 계승했으나 13살로 어렸기에, 모친 태후와 여불위가 섭정함. ② 여불위의 섭정 1. 진나라의 국력 신장 및 자신 가문의 번창을 위해 유능한 빈객을 후대했고,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찬함. 2. 정(政)의 생모와 계속해서 정을 통하다 발각되어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그는 그녀와의 관계를 끊을 만한 대책을 생각함. 3. 노애(嫪毐)를 들이게 하여 태후와..
5. 진나라 시대 1. 여불위(呂不韋)의 통일제국을 위한 큰 그림 ① 여불위(呂不韋)와 자초(子楚) 1. 전국 말기의 대상인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여 재산을 축적한 대부호임. 2. 어느 날 조나라 수도 한단에 갔다가 인질로 와 있는 진나라 왕자로 진소왕의 둘째 아들 안국군(安國君)의 가운데 아들로 비중 없는 인물이었던 자초(子楚)를 만나게 되었고, 사귀어 둠. ② 여불위의 큰 그림 1. 자초를 등극시키기 위해 빈객과 사귈 수 있는 돈을 줬고 안국군이 사랑하는 화양부인(華陽夫人)의 입김을 빌리기로 함. 2. 화양부인은 그의 언니 말을 잘 따른다는 걸 알고 제물을 주어 자초에 대해 좋은 평을 얘기하도록 언니를 구워삶음. 3. 언니는 자식이 없는 동생 화양부인에게 자초를 후계자로 삼아야 버림 ..
43. 모수, 자신감으로 초나라 임금과 한판 떠서 동맹을 성사시키다 秦攻趙邯鄲, 趙平原君求救於楚. 擇門下文武備具者二十人, 與之俱得十九人. 毛遂自薦, 平原君曰: “士處世若錐處囊中, 其末立見. 今先生處門下三年, 未有聞.” 遂曰: “使遂得處囊中乃脫穎而出, 非特末見而已.” 平原君乃以備數, 十九人目笑之. 至楚定從不決. 毛遂按劍歷階升曰: “從之利害, 兩言而決耳. 今日出而言, 日中不決何也?” 楚王怒叱曰: “胡不下, 吾與而君言, 汝何爲者?” 毛遂按劍, 而前曰: “王所以叱遂, 以楚國之衆也. 今十步之內, 不得恃楚國之衆也. 王之命, 懸於遂手. 合從爲楚, 非爲趙也.” 王曰: “唯唯, 誠若先生之言, 謹奉社稷以後.” 遂曰: “取鷄狗馬之血來.” 捧銅盤, 跪進曰: “王當歃血而定從, 次者吾君, 次者遂.” 左手持盤右手招十九人, 歃血於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