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12/20 (194)
건빵이랑 놀자
다음으로 황정욱(黃廷彧)의 「차이백생순인영옥당소도(次李伯生純仁詠玉堂小桃)」을 보인다. 대부분의 시선집에 「차옥당소도운(次玉堂小桃韻)」으로 수재(收載)되고 있어 줄여진 이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無數宮花倚粉墻 궁중에 핀 꽃들이 담장 위에 기대니 遊蜂戱蝶趁餘香 벌 나비 향기 맡고 어지러이 날아 든다. 老翁不及春風看 그러나 이 늙은이 봄이 온 줄도 모르고 空有葵心向太陽 공연히 해바라기 마음으로 태양을 향하네. 옥당(玉堂)의 소도(小桃)를 두고 이순인(李純仁)의 「야직(夜直)」에 차운(次韻)한 작품이다.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59에서 이 시를 함의(含意)가 심원(深遠)하고 조사(措辭)가 기한(奇悍)하다고 평하기도 하였거니와 당시의 세태(世態)를 심원(深遠)한 우의(寓意)로 그려낸 것이 이 ..
황정욱(黃廷彧)은 특히 칠율(七律)에 솜씨를 보여 대부분의 명편(名篇)이 칠율(七律)로 제작되고 있다. 대표작 「송심공직충겸부춘천(送沈公直忠謙赴春川)」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淸平山色表關中 청평산(淸平山) 산색(山色)이 관동(關東)의 모습 드러내고 下有昭陽江漢通 아래는 소양강(昭陽江)이 한강(漢江)으로 통하네. 馳出東門一匹馬 도성문을 나올 땐 한 필 말에 몸을 맡기고 泝洄春水半帆風 봄물 따라 올라갈 땐 강바람에 의지했네. 送人作郡鬼爭笑 남을 군수(郡守)로 보내기만하여 귀신도 다투어 웃고 問舍求田囊久空 밭 사들여 농사 짓자니 주머니 빈 지 오래네. 爲語當時勾漏令 당시의 구루령(勾漏令) 갈홍(葛弘)에게 말하노니 衰顔須借點砂紅 다 늙은 얼굴에 그 곳 단사(丹砂)로 화장하게 해주오. 김만중(金萬重)이 『서포만필..
황정욱(黃廷彧)은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 중에서 가장 후배이다. 그는 많은 시를 쓰기보다는 힘들여 시를 썼기 때문에 시인으로서의 명성에 비하여 남긴 시작(詩作)이 적은 편이다.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이 있었으나 불우하여 만년(晩年)에야 문병(文柄)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불행이 이어져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함경도에서 두 왕자와 함께 왜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항복권유문을 쓴 죄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는 강서파(江西派)인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를 배워 소재(蘇齋)보다는 호음(湖陰)과 시세계가 가깝다. 허균(許筠)은 「제황지천시권서(題黃芝川詩卷序)」에서 그의 시가 박상(朴祥)에게서 나와 호음(湖陰)과 소재(蘇齋) 사이를 출입(出入)하였지만 삼가(三家)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하였..
노수신(盧守愼)의 또 다른 명작으로 꼽히는 「벽정대인(碧亭待人)」은 다음과 같다. 원제(原題)는 「十三日到碧亭待人)」이다. 曉月共將一影行 새벽달이 그림자 하나를 함께 데리고 가는데 黃花赤葉政含情 국화꽃 단풍잎이 잔뜩 정을 머금었네. 雲沙目斷無人問 모래밭 저 끝까지에도 물어볼 사람 없어 依遍津樓八九楹 기둥에 기대어 빙글빙글 돌아보네. 위의 대표작 두 편은 모두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 「벽정대인(碧亭待人)」은 소재(蘇齋)에게 또다른 시세계가 엄존(嚴存)하고 있음을 사실로써 보여준 것이다. 노두(老杜)의 격력(格力) 못지않게 황진(黃陳)의 기굴(奇崛)도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케 하는 작품이다. 새벽녘에 혼자 걸어가는 모습을 “효월공장일영행(曉月共將一影行)”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강정(江亭) 주..
40편이 넘는 명작 가운데서도 노수신(盧守愼)의 대표작(代表作)으로 알려진 「십육야환선정(十六夜喚仙亭)」은 다음과 같다. 二八初秋夜 三千弱水前 열엿새날 초가을 밤 삼천리 약수(弱水) 앞에 있네. 昇平好樓閣 宇宙幾神仙 태평성세에 누각이 좋은데 우주에는 신선(神仙)이 얼마나 되는가? 曲檻淸風度 長空素月懸 굽은 난간에 맑은 바람 지나가고 긴 하늘에는 흰 달이 걸려 있네. 愀然發大嘯 孤鶴過蹁躚 서글피 길게 휘파람 부니 외로운 학 너울너울 날아가누나. 미련(尾聯)의 시원하게 달리는 기상은 마치 이색(李穡)의 「부벽루(浮碧樓)」를 다시 보는 듯하다.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여얼(餘孼)로 남황(南荒)으로 유배되던 해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몸은 배소(配所)에 있지만 태평성세(太平盛世)를 구가하고 있다. 누..
1. 관각(館閣)의 대수(大手) 문장(文章)은 흔히 그 향유(享有)하는 계층에 따라 대각(臺閣)의 문장(文章), 선도(禪道)의 문장(文章), 초야(草野)의 문장 등으로 나누어 말하기도 한다【서거정(徐居正)은 「계정집서(桂庭集序)」】. 이때 대각(臺閣)의 문장(文章)이란 반교문(頒敎文)ㆍ교서(敎書)ㆍ윤음(綸音)ㆍ옥책문(玉冊文)ㆍ전문(箋文) 등 이른바 관각문자(館閣文字)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전기의 문형(文衡) 가운데서도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ㆍ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ㆍ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 등은 대제학(大提學)의 영직(榮職)에 있으면서 특히 시에 능하여 각각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詩人)으로 추앙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따로 ‘관각삼걸(館閣三傑)’ 또는 관각(館閣)의 ‘호소지(..
1. 관각(館閣)의 대수(大手) 문장(文章)은 흔히 그 향유(享有)하는 계층에 따라 대각(臺閣)의 문장(文章), 선도(禪道)의 문장(文章), 초야(草野)의 문장 등으로 나누어 말하기도 한다【서거정(徐居正)은 「계정집서(桂庭集序)」】. 이때 대각(臺閣)의 문장(文章)이란 반교문(頒敎文)ㆍ교서(敎書)ㆍ윤음(綸音)ㆍ옥책문(玉冊文)ㆍ전문(箋文) 등 이른바 관각문자(館閣文字)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전기의 문형(文衡) 가운데서도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ㆍ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ㆍ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 등은 대제학(大提學)의 영직(榮職)에 있으면서 특히 시에 능하여 각각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詩人)으로 추앙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따로 ‘관각삼걸(館閣三傑)’ 또는 관각(館閣)의 ‘호소지(..
7.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豊饒)와 화미(華美) 조선 초기의 안정에 힘입어 풍요로운 목릉성세(穆陵盛世)를 이룩한 선조인조년간(宣祖仁祖年間)은 시단에 있어서도 또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성시를 이룬다.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 중에서도 풍격(風格)과 기상이 가장 뛰어난 노수신(盧守愼)은 선조(宣祖) 초기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노두(老杜)의 격력(格力)을 깊이 얻은 학두자(學杜者)로 알려져 있다.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 중 가장 후배인 황정욱(黃廷彧)은 많은 시를 쓰기보다 힘들여 시를 썼기 때문에 시인으로서의 명성에 비하여 시작(詩作)이 적은 편이다. 노수신(盧守愼)도 그의 시작(詩作)에서 강서시파(江西詩派)의 기상기구(奇想奇句)를 시험한 부분들이 보이지만, 특히 황정욱(黃廷彧..
조식(曺植, 1501 연산군7~1572 선조5, 자 楗中, 호 南冥)은 이황(李滉)과 동시대를 살았지만 퇴계(退溪)와는 달리 지리산 백운동(白雲洞)에서 은거하며 학문만을 닦은 학자이다. 그는 ‘이정과 주희 이후론 저서가 불필요하다[程朱後不必著書]’라 하여 자신의 독특한 학설을 주장하기보다 성명(性命)을 닦은 후의 실행(實行)을 주창하는 실천적 학문경향을 보이었다. 그는 1558년 4월 지리산을 등반하여 기상을 키우고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기기도 하였거니와 그의 대표작 「천왕봉(天王峰)」 또한 그의 자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請看千石鐘 非大扣無聲 천석 무게 저 종을 쳐다보시오, 큰 것이 아니면 두드려도 소리나지 않네. 萬古天王峯 天鳴猶不鳴 만고(萬古)의 천왕봉(天王峰), 하늘이 울어도 울지..
또 이황(李滉)은 다음의 「차운(次韻)」과 같이 그의 이학자적(理學者的) 관심을 직접 언표(言表)에 드러내지 않고서도 자연의 리(理)를 청신하게 읊조린 높은 수준의 작품도 제작하고 있다. 草有一般意 溪含不盡聲 풀에는 한결같은 의미가 있고 시냇물은 언제나 끝없는 소리 있네. 遊人如未信 蕭洒一虛亭 할 일 없는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만 씻은 듯이 깨끗한 빈 정자로다.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있는 경렴정(景濂亭)을 읊은 것이다. 그러나 자기 속에 내재(內在)하는 리(理)를 통하여 자연의 리(理)를 바라본 것이 이 시의 높은 곳이다. 인용 목차 서사한시 한시미학 16~17세기 한시사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이황(李滉, 1501 연산군7~1570 선조3, 자 景浩ㆍ季浩, 호 退溪ㆍ陶翁ㆍ退陶)은 우리나라 성리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해동주자(海東朱子)로까지 일컬어진 바 있는 학자이다. 그는 서경덕(徐敬德)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반대하고 이언적(李彦迪)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내세웠다. 그는 다른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시가 성정(性情)의 바름을 구하는데 긴요하다는 문학관을 지녀 시작(詩作)에도 상당히 힘을 기울였다[先生喜爲詩, 平生用功甚多, 其詩勁建典實, 不衒華彩, 初看似無味, 愈看愈好. 嘗言, ‘吾詩枯淡, 人多不喜, 然於詩用力頗深, 故初看雖似冷淡, 久看則不無意味’ 又曰: ‘詩於學者, 最非緊切, 然遇景値興, 不可無詩矣’]. 그의 시에 대해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
이언적(李彦迪, 1491 성종22~1553 명종8, 자 復古, 호 晦齋ㆍ紫溪翁)은 중앙관계에 진출한 영남 사림의 선구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직접 선배이다. 사간(司諫)의 직책에 있을 때 당시의 권신인 김안로(金安老)를 논박하다 파직당하자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성리학을 궁구하였으며 을사사화(乙巳士禍)로 강계배소(江界配所)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서경덕(徐敬德)과는 달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여 음양(陰陽)의 기(氣)보다 태극(太極)의 리(理)가 선행하는 것으로 인륜도덕의 근원이 된다고 파악하였다. 『구인록(求仁錄)』, 『봉선잡의(奉先雜儀)』,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의 저술을 남기고 있는 그는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득도(得..
조욱(超昱, 1498 연산군4~1557 명종12, 자 景陽, 호 愚菴ㆍ保眞齋ㆍ龍門ㆍ洗心堂)의 「낙천음(樂天吟)」, 「자경음(自警吟)」, 「효강절선생수미음(效康節先生首尾吟)」 등의 ‘음체(吟體)’는 곧 자신의 철학적 견해와 사회적 인식을 산문적인 시로 기술한 것이며, 때문에 이단하(李端夏)는 「답둔촌서(答遁村書)」에서 ‘대략 여러 편을 보면 『격양집(擊壤集)』의 읊조림과 유사함이 있다[略觀數篇, 有似擊壤集吟泳].’라고 하여 그의 시는 소옹(邵雍)의 문집인 『격양집(擊壤集)』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평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다음의 「견도(見道)」와 같은 작품은 주희(朱熹) 설리시(說理詩)의 틀을 아우르고 있음을 쉽게 알게 해준다. 萬理用雖異 一原體自同 만가지 이치의 쓰임은 비록 다르지만 한가지 ..
서경덕(徐敬德)은 남긴 시편도 많지 않거니와, 현전하는 시는 대부분 철학적 이치를 담담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서경덕(徐敬德)은 그의 「원리기(原理氣)」에서 “太虛湛然無形, 號之曰先天, 其大無外, 其先無始, 其來不可究. 其湛然虛靜, 氣之原也.”라 했고 「리기설(理氣說)」에서 “無外曰太虛, 無始者曰氣, 虛卽氣也, 虛本無窮, 氣亦無窮.”라 했으며 「태허설(太虛說)」에서 “氣無始也, 無生也, 氣無始何所終, 氣無生何所滅?”라 하며 보여준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은 비록 그것이 주자학(朱子學)의 정통(正統)으로 용납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이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유물(有物)」 역시 그의 氣哲學..
6. 유가(儒家)의 시편(詩篇) 조선조에 이르러 주자학(朱子學)이 정치이념으로 채택되면서 ‘문이재도(文以載道)’와 같은 일정한 문학관념을 성립시켰으며 이것이 문학발전을 저해하는 부정적 기능을 하게 되지만 이후에도 100여년간은 주자학이 사림(士林)의 속상(俗尙)으로 보편화되지는 않았다. 서거정(徐居正)ㆍ김종직(金宗直) 등이 앞장서서 효용론적(效用論的)인 문학관(文學觀)을 큰소리로 외쳤지만, 이들은 모두 조선초기 시단(詩壇)의 토대를 구축한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 서경덕(徐敬德)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조식(曺植) 등의 선구들에 있어서는 오도(悟道)의 경지를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설리성(說理性)이 강한 시풍(詩風)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자연의 흥취를 통해 순수한 성정(性情)을..
6. 유가(儒家)의 시편(詩篇) 조선조에 이르러 주자학(朱子學)이 정치이념으로 채택되면서 ‘문이재도(文以載道)’와 같은 일정한 문학관념을 성립시켰으며 이것이 문학발전을 저해하는 부정적 기능을 하게 되지만 이후에도 100여년간은 주자학이 사림(士林)의 속상(俗尙)으로 보편화되지는 않았다. 서거정(徐居正)ㆍ김종직(金宗直) 등이 앞장서서 효용론적(效用論的)인 문학관(文學觀)을 큰소리로 외쳤지만, 이들은 모두 조선초기 시단(詩壇)의 토대를 구축한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 서경덕(徐敬德)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조식(曺植) 등의 선구들에 있어서는 오도(悟道)의 경지를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설리성(說理性)이 강한 시풍(詩風)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자연의 흥취를 통해 순수한 성정(性情)을..
다음은 나식(羅湜)의 「여강(驪江)」이다. 日暮蒼江上 天寒水自波 해가 지는 푸른 강물 위에 날씨는 차고 물 절로 일렁인다. 孤舟宜早泊 風浪夜應多 외로운 배 일찌감치 대야 하리니 풍랑이 밤에는 응당 거세지겠지. 『장음정유고(長吟亭遺稿)』에 제목이 「한중우음(閑中偶吟)」으로 되어 있으며, 『국조시산(國朝詩刪)』ㆍ『기아(箕雅)』ㆍ『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여강(驪江)」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지봉유설(芝峯類說)』 시화 7과 『소화시평(小華詩評)』 권하 3에서는 최수성(崔壽峸)의 작품이라 하고 있다. 또 『국조시산(國朝詩刪)』은 제목 아래 “혹자는 정허함이 지었다고 말한다[或云, 鄭虛菴作]”이라 주를 달아 이 작품이 정희량(鄭希良)의 것이라는 이설(異說)을 제시하고 있는데, 정희량(鄭希良)의 『허암선생속집(..
나식(羅湜, 1498 연산군4~1546 명종1, 자 正原, 호 長吟亭)은 을사사화(乙巳士禍)에 동생이 피죄(被罪)됨에 따라 그도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그래서 그의 문집 『장음정유고(長吟亭遺稿)』에는 겨우 50여수가 수습되고 있을 뿐이어서 시세계의 전정(全鼎)을 맛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제화원(題畵猿)」, 「여강(驪江)」도 작자를 최수성(崔壽峸) 또는 정희량(鄭希良)이라하여 귀일(歸一)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타고난 시취(詩趣)가 있어, 허균(許筠)도 그의 시가 성당(盛唐)의 권역(圈域)에 근접하고 있다 하였다. 「제화원(題畵猿)」은 다음과 같다. 老猿失其群 落日枯槎上 늙은 원숭이 제 무리 잃고, 지는 해에 외론 나무가지에 ..
최수성(崔壽峸, 1487 성종18~1521 중종16, 자 可鎭, 호 猿亭ㆍ北海居士)은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학문연구에 정진하여 사림(士林)에 명망(名望)이 있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실의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산수간을 유람하였으나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그래서 최수성의 시작(詩作)은 온전하게 수습되지 못하여 각종 시선집에 몇편의 시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전하는 「제화원(題畵猿)」은 나식(羅湜)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조시산(國朝詩刪)』 소재(所載) 「증승(贈僧)」도 김정(金淨)의 것이라는 이설(異說)이 있다. 「증승(贈僧)」은 다음과 같다. 嶺外寒山寺 逢僧眼忽靑 대관령 밖 한산사에서, 스님을 만나니 눈이 홀연히 반갑네. 石泉同病客 天地一浮..
임억령(林億齡)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우인(示友人)」(七絶)은 다음과 같다. 古寺門前又送春 옛적 절 문앞에서 또 봄을 보내니 殘花隨雨點衣頻 남은 꽃 비를 따라 옷에 자주 점을 찍네. 歸來滿袖淸香在 돌아올 때 온 소매에 맑은 향기 남아 있어 無數山蜂遠趁人 무수한 산벌들이 먼 데까지 따라오네. 3수 가운데 마지막 것이다. 규모를 크게 잡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감(美感)의 표현도 정적(靜的)인 쪽에 가까와 전편(全篇)이 높고 낮은 데도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허균(許筠)은 이 작품을 가리켜 유독 당인(唐人)의 풍격(風格)이 있다고 하였는지도 모른다. 김인후(金麟厚)의 화제작인 「등화대(登火臺)」(五律)는 다음과 같다. 梁王歌舞地 此日客登臨 양(梁) 효왕(孝王)이 가무(歌舞)하던 곳에 오늘에사 ..
임억령(林億齡, 1496 연산군2~1568 선조 1, 자 大樹, 호 石川)과 김인후(金麟厚, 1510 중종5~1560 명종15, 자 厚之, 호 河西ㆍ澹齋)는 호남계(湖南系) 소단(騷壇)의 중진이다. 임억령(林億齡)은 박상(朴祥)의 문인(門人)으로 해남(海南) 출신이며, 김인후(金麟厚)는 송순(宋純)의 문하(門下)를 출입한 장성(長城) 출신이다. 이들은 인품이 고매(高邁)하여 시(詩) 또한 사람과 같다는 평이다. 임억령(林億齡)은 고금(古今)의 각체시(各體詩)를 두루 익히면서 일생 동안 시업(詩業)으로 일관했으므로 그의 문집도 대부분 시(詩)로써 채워져 있으며 문(文)은 다만 수필에 불과하다. 김인후(金麟厚)는 학문이 깊어 그의 시(詩)도 침착(沈着)ㆍ준위(俊偉)한 것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젊었을 때 그..
기준(奇遵, 1492 성종23~1521 중종16, 자 敬仲, 호 復齋ㆍ德陽)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덕성(德城)에 유배되었으며, 신사무옥(辛巳誣獄)에 김정(金淨) 등 살아남은 기묘명현(己卯名賢)들이 죽음을 당할 때 그도 배소(配所)에서 교살되었다. 그의 시세계에 대해서는 다음 작품 「강상(江上)」(五律)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적소(謫所)에서 두만강을 바라보며 읊조린 것이다. 遠遊臨野戍 高會惜年華 멀리 떠돌다 거친 변방에 이르러 좋은 모임에 나와 봄을 아쉬워하네. 夜靜胡天月 春深古塞花 밤은 오랑캐 땅의 달 아래 고요하고, 봄은 오래된 요새의 꽃 속에 깊어 있구나. 長江誰作酒 哀唱不成歌 긴 강을 누가 술로 만들었나? 슬피 노래..
이 밖에도 김정(金淨)은 그의 『해도록(海島錄)』에 오율(五律)의 「절국(絶國)」, 「유회(遺懷)」 등 명편을 남겼다. 「절국(絶國)」은 다음과 같다. 絶國無相問 孤身棘室圍 절해고도라 찾아 올 사람 없고, 외로운 몸은 가시 덤불에 갇혀 있네. 夢如關塞近 僮作弟兄依 꿈에서도 변방이 가까운 줄 알겠거니 종놈들도 형제처럼 의지하며 살아가네. 憂病工侵鬢 風霜未授衣 근심과 병은 교묘히 살쩍을 파고드는데, 바람과 서리에도 겨울 옷을 마련 못하네. 思心若明月 天末寄遙輝 그리는 마음은 밝은 달과 같아서, 하늘 끝에서 먼 빛을 보낸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진도(珍島)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의 작품이다. 어렵게 살아가는 적소(謫所)의 현장을 그대로 읊은 것이지만, 쉽고 간결하여 청신(淸新)한 맛을 느끼게 한다. 인용 목차..
허균(許筠)은 특히 신광한(申光漢)의 「만망(晩望)」(五律)과 김정(金淨)의 「춘아증봉군조서왕송도인반고림(春夜贈奉君朝瑞往松都因返故林)」(五律)에 관심을 보였다. 신광한(申光漢)의 「만망(晩望)」은 다음과 같다. 峻盡滄江遠 沙平水驛開 산골짜기 다하니 푸른 강물 멀어지고 모래밭 평평한 곳 나룻터가 열렸네. 收烟花外沒 夕鳥日邊回 밥 짓는 저녁 연기 꽃밭에서 잦아지고 저녁에 날아드는 새 해를 빙빙 도는구나. 故國無消息 孤舟有酒盃 고국(故國)에선 아직도 소식 없는데 외로운 배에는 술과 잔이 있네. 前山侵道峻 何處望蓬萊 앞 산이 길을 막아 우뚝이 서 있으니 어느 곳에서 봉래산을 바라보리요? 군더더기 없이 맑기만 한 작품이다. 허균(許筠)은 특히 성운(聲韻)에 촛점을 맞추어 위맹(韋孟)의 고운(高韻)이라 하였지만 오..
신광한(申光漢, 1484 성종15~1555 명종10, 자 漢之ㆍ時晦, 호 企齋ㆍ駱峯ㆍ石仙齋ㆍ靑城洞主)과 김정(金淨, 1486 성종17~1521 중종16, 자 元沖, 호 沖菴ㆍ孤峯)은 모두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걸리었으나 김정(金淨)은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죽음을 당하고 신광한(申光漢)은 살아 남아 후일 문형(文衡)의 영예를 누리었다. 그러므로 김정(金淨)은 시인의 이름보다는 오히려 김식(金湜)과 더불어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행(李荇)과 박은(朴誾) 등이 황진(黃陳)을 배우고 있을 때 스스로 당풍(唐風)을 익혀 조선전기 소단(騷壇)을 다채롭게 해주었다. 신광한(申光漢)의 시(詩)는 허균(許筠)이 『성수시화(惺叟詩話)』 39에서 청절(淸絶)하여 아취(雅趣)가 있다고 일..
「수정한림유별운(酬鄭翰林留別韻)」은 다음과 같다. 江城積雨捲層霄 강성(江城)의 장마 비 씻은 듯이 개이고 秋氣冷冷老火消 가을 기운 서늘하며 늦더위 사라지네. 黃膩野秔迷眼發 기름진 들판의 벼는 눈 어지럽게 피어 있고 綠疎溪柳對樽高 푸르고 성긴 버들은 술독 앞에 드높으네. 風隨舞袖如相約 바람은 기약한 듯 춤추는 소매 따르고 山入歌筵不待招 산은 부르지 않았어도 노래자리에 드네. 慚恨至今持斗米 부끄럽고 한스러운 것은 지금도 벼슬길에 있어 故園蕪絶負逍遙 고향 동산 묵히고 소요하는 일 저버린 거다. 시상(詩想)이 범속(凡俗)을 초탈(超脫)하고 있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그의 시세계에 대해서는 신위(申緯)는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 14에서 ‘기건(奇健)’이라 평가한 것과 남용익(南龍翼)이 『호곡시화..
박상(朴祥, 1474 성종5~1530 중종25, 자 昌世, 호 訥齋)은 전라도 광주(光州) 출신으로 호남계(湖南系) 시단(詩壇)을 열어준 선구이기도 하지만 이행(李荇)ㆍ신광한(申光漢)ㆍ김정(金淨)ㆍ정사룡(鄭士龍) 등과 함께 중종 연간의 시단(詩壇)을 빛내준 대표적인 시인이다. 정치 현실에서도 서로 처지를 달리했거니와 시업(詩業)에 있어서도 개성 있는 시작(詩作)으로 다양한 전개를 보이었다. 박상(朴祥)은 김정(金淨)과 함께 폐비(廢妃) 신씨(愼氏)의 복위(復位)를 주창하다가 훈구(勳舊) 세력으로부터 폄척(貶斥)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그는 이른바 기묘완인(己卯完人)으로 살아 남았다. 그의 문집인 『눌재집(訥齋集)』은 대부분이 시(詩)로써 채워져 있으며 문장(文章)은 겨우 10여편을 남..
남곤(南袞, 1471 성종2~1527 중종22, 자 士華, 호 止亭)도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서변(西邊)에 유배되기도 했지만, 중종반정 후 대제학의 영예를 누리었으며, 심정(沈貞) 등과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조작하여 명유(名儒)들을 숙청하고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가 후일 관작(官爵)이 삭탈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문은 사람과 같지 않다는 것이 후대의 평가다. 그는 후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의 글이 후세에 또다른 사화를 일으키는 화근이 될 것을 우려하여 대부분의 사고(私稿)를 없앴다 한다. 그의 대표작으로 고평을 받은 「제신광사(題神光寺)」 6수 중 그 첫 번째 것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千重簿領抽身出 천겹 문서더미에서 몸을 빼내, 十笏禪房借榻眠 한 칸 절방에 잠..
그러나 다음의 「차계문운(次季文韻)」을 보게 되면, 그 역시 황진(黃陳)을 추수(追隨)하던 당시의 풍상(風尙)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過眼如雲事事新 구름처럼 눈을 스치는 일은 일마다 새로운데, 狂歌獨立路岐塵 어지러운 세상에서 미친 노래 부르며 홀로 우노라. 百年三萬六千日 백년 삼만육천일을, 四海東西南北人 사방 동서남북 떠도는 신세라네. 宋玉怨騷悲落木 송옥의 원통한 노래는 낙엽 때문 아니었고, 謫仙哀賦惜餘春 이태백의 슬픈 가락은 남은 봄을 애석해 한 것이라. 醉鄕倘有閒田地 취향에 한가한 땅이 남아 있다면, 乞與劉伶且卜隣 유령에게 이웃하자 청하고 싶구나.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송시학(宋詩學)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 고려중기 임춘(林春)의 「차우인운(次友人韻)」을 다시 보는 듯하다. 제1구..
정희량(鄭希良)의 「압강춘망(鴨江春望)」은 다음과 같다. 邊城事事動傷神 변방에선 일마다 마음이 상하는데, 海上狂歌異隱倫 바닷가의 미친 노래는 은자의 것이 아니라네. 春不見花猶見雪 봄에도 꽃은 보이지 않고 아직도 눈만 보이며, 地無來雁況來人 이곳에는 기러기도 오지 않거니 하물며 올 사람 있으랴? 輕陰漠漠雨連曉 봄 기운이 스산하여 비는 새벽까지 이어지고, 細草萋萋風滿津 가는 풀이 무성한데 바람이 나루에 찼네. 惆悵芳時長作客 슬프다, 좋은 시절에 항상 나그네 되었으니, 可堪垂淚更添巾 흐르는 눈물이 또 수건 적심을 어이하랴? 이 작품은 의주(義州) 유배지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봄 풍경을 읊조리고 있지만 시인에게 있어서는 봄같지 않다는 것이 주지다. 정희량(鄭希良)의 시가 황진(黃陳)에 근접하고 있는 것으로..
정희량(鄭希良)의 「압강춘망(鴨江春望)」은 다음과 같다. 邊城事事動傷神 변방에선 일마다 마음이 상하는데, 海上狂歌異隱倫 바닷가의 미친 노래는 은자의 것이 아니라네. 春不見花猶見雪 봄에도 꽃은 보이지 않고 아직도 눈만 보이며, 地無來雁況來人 이곳에는 기러기도 오지 않거니 하물며 올 사람 있으랴? 輕陰漠漠雨連曉 봄 기운이 스산하여 비는 새벽까지 이어지고, 細草萋萋風滿津 가는 풀이 무성한데 바람이 나루에 찼네. 惆悵芳時長作客 슬프다, 좋은 시절에 항상 나그네 되었으니, 可堪垂淚更添巾 흐르는 눈물이 또 수건 적심을 어이하랴? 이 작품은 의주(義州) 유배지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봄 풍경을 읊조리고 있지만 시인에게 있어서는 봄같지 않다는 것이 주지다. 정희량(鄭希良)의 시가 황진(黃陳)에 근접하고 있는 것으로..
다음은 강혼(姜渾)의 「기성주기(寄星州妓)」이다. 扶桑館裏一場懽 부상관 속엔 한바탕 즐거운 사랑, 宿客無衾燭燼殘 자는 객은 이불 없고 촛불도 가물가물. 十二巫山迷曉夢 열두봉 무산(巫山)에서 새벽꿈에 미혹되어 驛樓春夜不知寒 역루의 봄밤이 찬 줄도 몰랐네. 이 시는 강혼이 영남감사(嶺南監司)로 내려갔을 때 성주(星州) 기생 은대선(銀臺仙)을 사랑하여 부상역(扶桑驛)에서 하루밤을 같이 지낸 체험적인 사실을 시화(詩化)한 것이다. 우리나라 한시에서 염정시(艷情詩)는 대체로 악부제(樂府題)를 빌리거나, 아니면 3인칭 시점의 관망자(觀望者) 처지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체험적인 사랑의 사연을 작자의 직접적인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어 전통시대 염정문학으로서는 소중한 것이 아닐 수..
강혼(姜渾)의 「응제(應製)」는 다음과 같다. 淸明御柳鎖寒煙 청명날 궁궐의 버들은 찬 안개에 잠겨 있는데, 料峭東風曉更顚 스산한 봄바람은 새벽에 더욱 거세어지네. 不禁落花紅櫬地 꽃잎이 대지를 붉게 물들임을 어찌할 수 없어, 更敎飛絮白漫天 다시 버들개지로 하늘을 하얗게 덮게 하였네. 高樓隔水褰珠箔 연못 건너 높은 누각에선 주렴이 걷히고, 細馬尋芳躍錦韉 꽃구경 가는 준마는 비단 안장이 휘황하네. 醉盡金樽歸別院 좋은 술에 실컷 취하여 별채로 돌아가니, 綵繩搖曳畫欄邊 아름다운 난간 가에 그네줄이 출렁이네. 이 시는 「폐조응제(廢朝應製)」 또는 「폐조응제어제 한식동림삼월근 낙화풍우오경한(廢朝應製御題“寒食園林三月近, 落花風雨五更寒”)」으로 시선집에 전하고 있거니와 강혼이 연산군의 근신(近臣)으로 있을 때, 어제시(..
강혼(姜渾, 1464 세조10~1519 중종14, 자 士浩, 호 木溪)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지만, 젊은 시절 연산군의 근신(近臣)으로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무오(戊午)ㆍ갑자사옥(甲子史獄)에도 신명(身命)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는 이름 높은 학자ㆍ문인들이 다수 배출되었거니와 특히 강혼(姜渾)ㆍ이주(李胄)ㆍ정희량(鄭希良) 등은 시로써 이름을 얻었다. 대부분의 문인들이 무오(戊午)와 갑자사옥(甲子史獄)에 연루되어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지만, 강혼과 신용개(申用漑)는 원유(遠流)되었다가 풀려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후일 대제학의 영직(榮職)에 올랐다. 그러나 강혼은 시문(詩文)이 온전하게 전하지 않아 그의 『목계일고(木溪逸稿)』에는 겨우 19~20여수(餘首)의 시편이 ..
신종호(申從濩, 1456 세조2~1497 연산군3, 자 次部, 호 三魁堂)는 신숙주(申叔舟)의 손자이며, 종제(從弟) 용개(用漑)ㆍ광한(光漢) 등 일문(一門)이 문명(文名)을 떨쳤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상춘(傷春)」(七絶), 「무제(無題)」(七絶), 「정월망도중여자군도옥하교(正月望都中女子群渡玉河橋)」(七律) 등은 모두 풍류가 넘치는 작품들이다. 특히 「상춘(傷春)」 같은 작품은 그 기교가 섬세하여 그의 시세계를 당풍(唐風)으로 논하기에 충분하다. 「정월망도중여자군도옥하교(正月望都中女子群渡玉河橋)」는 다음과 같다. 露浥瓊花萬萬條 만 그루 가지마다 이슬이 매화꽃을 적시고, 香風吹送玉塵飄 향기로운 바람은 흰 꽃잎을 날려 보내네. 不隨月姊歸蟾闕 항아를 좇아 월궁으로 가지 않고, 共學天孫度鵲橋 직녀를 흉내..
5. 당시(唐詩) 성향의 대두 고려 중기에 이르러 만당(晩唐)의 섬미(纖靡)를 거부하고 기호의활(氣豪意豁)한 소식(蘇軾)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소단(騷壇)은 200여년 동안 송시(宋詩)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습상(習尙)은 달라진 것이 없었으며 다만 정이오(鄭以吾)ㆍ이첨(李詹) 등이 당시(唐詩)의 풍기(風氣)를 보였을 뿐이다. 서거정(徐居正)의 아성(牙城)에 도전한 김종직(金宗直)에 이르러 스스로 호방(豪放)과 신경(新警)을 멀리하고 엄중(嚴重)ㆍ방원(放遠)한 시세계를 구축하면서 당시(唐詩)의 영역에 근접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중종 연간에 시업(詩業)이 크게 떨치면서 황진(黃陳)의 시풍(詩風)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박은(朴誾)ㆍ이행(李荇) 등이 이로써 소단(騷壇)을 크게 울렸..
5. 당시(唐詩) 성향의 대두 고려 중기에 이르러 만당(晩唐)의 섬미(纖靡)를 거부하고 기호의활(氣豪意豁)한 소식(蘇軾)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소단(騷壇)은 200여년 동안 송시(宋詩)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습상(習尙)은 달라진 것이 없었으며 다만 정이오(鄭以吾)ㆍ이첨(李詹) 등이 당시(唐詩)의 풍기(風氣)를 보였을 뿐이다. 서거정(徐居正)의 아성(牙城)에 도전한 김종직(金宗直)에 이르러 스스로 호방(豪放)과 신경(新警)을 멀리하고 엄중(嚴重)ㆍ방원(放遠)한 시세계를 구축하면서 당시(唐詩)의 영역에 근접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중종 연간에 시업(詩業)이 크게 떨치면서 황진(黃陳)의 시풍(詩風)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박은(朴誾)ㆍ이행(李荇) 등이 이로써 소단(騷壇)을 크게 울렸..
정사룡(鄭士龍)의 시편(詩篇)은 시선집(詩選集)에서 뽑아준 것만으로도 40편에 이르고 있어 그는 선문가(選文家)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시인이기도 하다. 그가 제작한 명편(名篇)들도 모두 칠율(七律) 중에 있거니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기회(記懷)」, 「황산전장(荒山戰場)」, 「후대야좌(後臺夜坐)」도 모두 칠율(七律)이며 특히 「후대야좌(後臺夜坐)」는 평가(評家)들의 화제에 자주 올랐던 작품이다. 기작(奇作)으로 널리 알려진 「기회(記懷)」는 다음과 같다. 四落階蓂魄又盈 뜰 앞 명협초 떨어지니 달이 또 차는데 悄無車馬閉柴荊 말 탄 사람 사립문을 드나들지 않네. 詩書舊業抛難起 시서(詩書) 읽던 옛 공부 한번 놓으면 다시 하기 어렵고 場圃新功策未成 전가(田家)의 새로운 일도 생각대로 되지 않네. 雨氣壓..
정사룡(鄭士龍, 1491 성종22~1570 선조3, 자 雲卿, 호 湖陰)은 관각(館閣)의 큰 솜씨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른바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 중의 한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문형(文衡)의 영예를 누리었지만 그들이 재능을 발휘한 것은 시(詩)이기 때문에 시(詩)로써 이름 높은 세 사람의 문형(文衡)을 골라 ‘호소지(湖蘇芝)’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시(詩)를 할 때에는 이행(李荇)과 경향을 같이 하였으며 생활인으로서도 이행(李荇)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행(李荇)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사사로이 시작(詩作)을 주고 받기도 하였으며 이행(李荇)의 시(詩)를 스스로 간행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칠언율시(七言律詩)에 뛰어나 그의 득의구(得意句)도 모두 칠율(七律)에 있다. 김창협..
「제천마록후(題天磨錄後)」는 다음과 같다. 卷裏天磨色 依依尙眼開 책 속의 천마산색(天磨山色), 아직도 어렴풋이 눈 앞에 있네. 斯人今已矣 古道日悠哉 사람은 가고 없고 고도(古道)는 날로 멀어져 가네. 細雨靈通寺 斜陽滿月臺 가랑비 영통사(靈通寺)에 내리고 석양은 만월대(滿月臺)에 진다. 死生曾契闊 衰白獨徘徊 생과 사는 본래 만날 수 없는 것, 허옇게 된 머리로 홀로 배회하네. 박은(朴誾)ㆍ이행(李荇)ㆍ남곤(南袞) 등 3인이 개성(開城)에 있는 천마산(天磨山)에서 놀 때 지은 시집(詩集) 『천마록(天磨錄)』을 보면서 1503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희생된 박은(朴誾)을 그리워한 작품이다. ‘사생계활(死生契闊)’은 물론 『시경(詩經)』 패풍(邶風) 「격고(擊鼓)」의 “사생계활 여자성설(死生契闊 與子成說).”에..
이행(李荇)의 시(詩)는 시선집(詩選集)에서 뽑힌 것만 30수가 넘어 조선조 제일대가(第一大家)의 면모를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게 한다. 그의 대표작은 「팔월십오야(八月十五夜)」(七絶)와 「제천마록후(題天磨錄後)」(五律)다. 「팔월십오야(八月十五夜)」는 다음과 같다. 平生交舊盡凋零 평생에 사귄 벗들 다 죽고 없는데 白髮相看影與形 백발(白髮)이 되어 몸과 그림자가 서로 보게 되네. 正是高樓明月夜 이야말로 높은 누각 달 밝은 밤인데 笛聲凄斷不堪聽 처량한 피리소리 차마 들을 수 없네. 다듬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그였지만, 정감과 시어(詩語)가 한데 어울어져 읽을 수록 무한한 감회(感懷)가 구슬픔을 더해줄 뿐이다. 특히 기구(起句)는 자신의 몸과 그림자가 서로 본다는 것으로 혼자 살아 남은 자신의 처지를 적실하..
이행(李荇, 1478 성종9~1534 중종29, 자 擇之, 호 容齋)은 덕수이씨(德水李氏)의 명문가(名門家)에서 태어나 문형(文衡)의 영예를 누리면서 벼슬이 재상에까지 올랐으나 무오(戊午)ㆍ갑자(甲子)ㆍ기묘사화(己卯士禍)의 와중에서는 네 차례나 유배지의 신고(辛苦)를 감내하여야만 하였으며 끝내 유배지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러나 그는 생활 환경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손수 시고(詩藁)를 만들어 생생한 삶의 체험을 후세에 남겼다. 그때 만든 11편의 시(詩)가 『용재집(容齋集)』에 전하고 있어 그의 삶과 시세계를 한꺼번에 가르쳐 주기도 한다. 그의 문집에 전하는 것으로는 조천록(朝天錄)을 비롯하여 적거록(謫居錄)ㆍ남천록(南遷錄)ㆍ해도록(海島錄)ㆍ창택록(滄澤錄)ㆍ남유록(南遊錄)ㆍ영남록(嶺南錄)ㆍ차황화시집(次皇華..
다음은 박은(朴誾)과 신교(神交)를 맺은 사이로 알려진 시우(詩友) 이행(李荇)에게 준 「재화택지(再和擇之)」이다. 深秋木落葉侵關 깊은 가을 떨어진 잎이 문간에 침노하고 戶牖全輸一面山 창문으로 온통 산을 통째로 들여 보내네. 縱有盃尊誰共對 비록 술이야 있지만 누구와 함께 대작할까? 已愁風雨欲催寒 벌써 비바람이 추위를 재촉할까 근심스럽네. 天應於我賦窮相 하늘이 응당 나에게 궁한 팔자를 내려 주었으련만, 菊亦與人無好顔 국화 또한 사람과 같이 좋은 얼굴이 없네. 撥棄憂懷眞達士 근심 걱정 내던지는 것이 진정한 달사(達士)이니, 莫敎病眼謾長潸 병든 눈에 부질없이 눈물 흐르게 하지 마오.. 1502년 파직되었을 때의 작품이다. 가을과 작자의 처지를 한묶음으로 처리하여 비감(悲感)을 더하고 있는 솜씨가 일품이다. 허..
4. 해동(海東)의 강서시파(江西詩派) 우리나라에도 강서시파(江西詩派)가 있음을 드러내어 말한 사람은 신위(申緯)가 아닌가 한다. 김창협(金昌協)도 일찍이 박은(朴誾)의 시(詩)를 말하는 가운데서 그가 황진(黃陳)을 배웠다고 하였지만, 우리나라 시인의 구체적인 작품을 통하여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시풍(詩風)을 확인한 것은 신위(申緯)가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서시파(江西詩派)란 중국 송대(宋代) 시단(詩壇)의 한 유파로 황정견(黃庭堅)을 시종(詩宗)으로 삼는 진사도(陳師道) 이하 일군의 시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황정견(黃庭堅)의 고향이 강서(江西)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긴 하지만 그밖의 시인들이 모두 강서(江西)지방 출신인 것은 아니다. 송시(宋詩)는 구양수(歐陽修)ㆍ소식(蘇軾)에 의하여 크게 바..
4. 해동(海東)의 강서시파(江西詩派) 우리나라에도 강서시파(江西詩派)가 있음을 드러내어 말한 사람은 신위(申緯)가 아닌가 한다. 김창협(金昌協)도 일찍이 박은(朴誾)의 시(詩)를 말하는 가운데서 그가 황진(黃陳)을 배웠다고 하였지만, 우리나라 시인의 구체적인 작품을 통하여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시풍(詩風)을 확인한 것은 신위(申緯)가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서시파(江西詩派)란 중국 송대(宋代) 시단(詩壇)의 한 유파로 황정견(黃庭堅)을 시종(詩宗)으로 삼는 진사도(陳師道) 이하 일군의 시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황정견(黃庭堅)의 고향이 강서(江西)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긴 하지만 그밖의 시인들이 모두 강서(江西)지방 출신인 것은 아니다. 송시(宋詩)는 구양수(歐陽修)ㆍ소식(蘇軾)에 의하여 크게 바..
「산행즉사(山行卽事)」는 다음과 같다. 兒打蜻蜓翁掇籬 아이는 잠자리 잡고 늙은이는 울타리를 고치는데 小溪春水浴鸕鶿 작은 시내 봄 물에는 물새가 멱을 감는다. 靑山斷處歸程遠 청산이 끝났지만 돌아갈 길은 멀어 橫擔烏藤一个枝 등나무 한 가지 꺾어 비스듬히 메고 가네. 등나무 가지로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다니다가 그것도 힘에 겨워 비스듬히 등에 짊어지고 떠나가는 ‘횡담오등일개지(橫擔烏藤一箇枝)’의 경지는 바로 방랑시인(放浪詩人) 김시습(金時習) 자신의 모습이다. 뛰어난 걸재(傑才)라 하더라고 상상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이밖에도 그의 「관동일록(關東日錄)」에는 특히 명편(名篇)이 많다. 「유객(有客)」, 「등루(登樓)」, 「도중(途中)」, 「독목교(獨木橋)」 등도 이 가운데 드는 것들이다. ..
그의 시작(詩作) 중에서 시선집(詩選集)에 뽑히고 있는 것은 20수에 이르고 있거니와 특히 다음의 시편(詩篇)들은 김시습(金時習)의 “초매(超邁)”를 한눈으로 알게 하는 작품들이다. 「산행즉사(山行卽事)」(七律), 「위천어주도(渭川漁釣圖)」(七絶), 「도중(途中)」(五律), 「등루(登樓)」(五律), 「소양정(昭陽亭)」(五律), 「하처추심호(何處秋深好)」(五律), 「고목(古木)」(七律), 「사청사우(乍晴乍雨)」(七律), 「등목교(獨木橋)」(七律), 「무제(無題)」(七律), 「유객(有客)」(五律) 등이 그것이다. 「등루(登樓)」는 다음과 같다. 向晚山光好 登臨古驛樓 저녁 되자 산빛이 하도 좋아서 옛 역 다락에 올라 보았네. 馬嘶人去遠 波齧棹聲柔 말이 우니 사람은 멀리로 가고 물결 씹는 노젓는 소리 부드럽구나..
현재까지 그의 시문집(詩文集)에 전하는 시편(詩篇)만 하더라도 2,200여수(餘首)나 되지마는 실제로 김시습(金時習)의 시작(詩作)은 이보다도 훨씬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문집(詩文集)을 편성하는 과정에서도 10년을 걸려 겨우 유편(遺篇) 3권을 수습하였다는 것으로도 짐작이 간다(李耔, 「梅月堂集序」 참조)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대체로 그러하지만, 김시습(金時習)의 시(詩)에서도 가장 흔하게 보이는 주제적(主題的) 소재(素材)는 ‘자연(自然)’과 ‘각(閣)’이다. 몸을 산수(山水)에 내맡기고 일생(一生)을 그 속에서 노닐다가 간 김시습(金時習)에게 자연(自然)은 그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러나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이 그 일부(一部)가 되곤 했다. 평소 도연명..
김시습(金時習, 1435 세종17~1493 성종24, 자 悅卿, 호 梅月堂ㆍ東峯ㆍ淸寒子)은 타고난 재주 때문에 어린 나이에 이미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그 장래가 약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과 뜻이 서로 어그러져 지상에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詩)로써 즐길 거리를 삼으며 방랑으로 일생을 마쳤다. 스스로 술회(述懷)한 대로 그는 소시적부터 질탕(跌宕)하여 세상의 명리(名利)나 생업(生業)과 같은 것은 돌보지 아니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산수(山水)로 방랑(放浪)하면서 경치를 만나면 시(詩)나 읊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민병수, 「梅月堂의 시세계」, 『人文論叢」 제3집,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1978 참조】. 역대(歷代)의 소인(騷人) 가운데서 김시습(金時習)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시(詩)로써 말한..
웅혼(雄渾)ㆍ호방(豪放)으로 일세(一世)에 이름을 드날린 이규보(李奎報)ㆍ이색(李穡)ㆍ정몽주(鄭夢周)의 시작(詩作) 가운데에서도 호방(豪放)한 것으로 정평(定評)이 나 있는 작품들은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 선발하지 않았으며 또한 완려(婉麗)ㆍ신경(新警)한 것도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완려(婉麗)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온 이규보(李奎報)의 「하일즉사(夏日卽事)」도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정몽주(鄭夢周)의 칠언율시(七言律詩) 가운데서도 「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나 「중구일제익양수이용명원루(重九日題益陽守李容明遠樓)」 등도 모두 질탕(跌宕)ㆍ호방(豪放)한 작품으로 후세의 칭송을 받았지만 역시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는 뽑아주지 않았다...
서거정(徐居正)의 『동문선(東文選)』에 대항하기 위하여 『동문수(東文粹)』와 『청구풍아(靑丘風雅)』를 편찬할 때의 김종직(金宗直)은 분명히 시인(詩人)이요 문인(文人)이다. 이때까지도 소단(騷壇)의 습상(習尙)이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김종직(金宗直)은 당시(當時)의 풍상(風尙)에서 멀리 떨어져 엄중(嚴重)ㆍ방달(放達)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성현(成俔)이 김종직(金宗直)의 『청구풍아(靑丘風雅)』를 가리켜 “조금이라도 호방(豪放)한 듯한 것은 버리고 수록하지 않았으니[稍涉豪放者, 棄而不錄]”이라 한 것도 그의 시관(詩觀)이 송시학(宋詩學)의 호방(豪放)한 기격(氣格)을 사실상 극복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후대(後代)의 비평(批評) 가운데서도 차천로(車天輅)와 신흠(申欽)은 ..
김종직(金宗直, 1431 세종13~1492 성종23, 자 季昷ㆍ孝盥, 호 佔畢齋)은 도교(道學)의 연원계보(淵源系譜)에서 보면 고려(高麗)의 성리학(性理學)을 조선조에 이어준 학자(學者)이며, 정치사적(政治史的)으로는 영남사림(嶺南士林)의 사종(師宗)이기도 하다. 일문(一門)이 선산(善山)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김숙자(金叔滋)가 길재(吉再)로부터 정몽주(鄭夢周)의 이학(理學)을 이어받아 아들 김종직(金宗直)에게 전(傳)할 수 있었으며 김종직(金宗直)은 다시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을 거쳐 조광조(趙光祖)에까지 학통(學統)을 전수(傳授)하게 된다. 그리고 김종직(金宗直)은 출생지가 밀양(密陽)이므로 이러한 지연(地緣)에 힘입어 영남(嶺南) 사류(士類)의 종장(宗匠)이 될 수 있었다. 그러..
서거정(徐居正)의 시편(詩篇)은 후대의 선발책자(選拔冊子)에서 20여수를 뽑아주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일즉사(夏日卽事)」(七律), 「칠월탄신하례작(七月誕辰賀禮作)」(七律), 「춘일(春日)」(七絶), 「고의(古意)」(七古) 등이 명편(名篇)으로 꼽히고 있으며 「추풍(秋風)」(五律)의 “유봉비부정 한압수상의(遊峰飛不定, 閑鴨睡相依)”는 특히 가구(佳句)로 훤전(喧傳)되어 온 것이다. 「하일즉사(夏日卽事)」는 다음과 같다. 小晴簾幕日暉暉 반만 개인 햇살이 주렴에 비치는데 短帽輕衫暑氣微 짧은 모자 가벼운 적삼에 더운 기운이 스미네. 解籜有心因雨長 껍질 벗은 죽순은 비를 맞아 자라고 落花無力受風飛 떨어지는 꽃잎은 바람을 받아 나네. 久拚翰墨藏名姓 오래전에 붓 던지고 이름도 감추었으며 已厭簪纓惹是非 벼슬길에 ..
서거정(徐居正, 1420 세종2~1488 성종19, 자 子元ㆍ剛中, 호 四佳亭ㆍ亭亭亭)은 뛰어난 재주를 타고나 일찍부터 그의 기재(奇才)가 중국에까지 알려졌으며 40여년을 관료로서 영예를 누리었다. 26년 동안 문형(文衡)의 자리를 고수하여 김수온(金守溫)ㆍ강희맹(姜希孟)ㆍ김종직(金宗直) 등 일시의 문장들이 그로 말미암아 진출의 길이 막혔다고도 하지만 그러나 대각(臺閣)의 높은 솜씨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선발책자(選拔冊子)의 편찬에 주역을 담당하였으며, 처음으로 시화(詩話)라는 이름을 붙인 『동인시화(東人詩話)』를 따로 편찬하여 사장(詞章)의 재능을 남김없이 과시하였다.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할 때의 서거정(徐居正)은 이미 효용론자(效用論者)로 급선회하였지만 『동인시화(東人詩話)』를 편찬할 때..
성간(成侃, 1427 세종9~1456 세조2, 자 和仲, 호 眞逸齋)은 형 임(任), 아우 현(俔)과 더불어 일세(一世)에 이름을 나란히 하였으며 특히 그는 학문에 포부가 커 경사백가서(經史百家書)에 깊이 빠져들었다 한다. 30세에 요절하여 많은 시작(詩作)을 남길 기회를 가지지 못했지만, 조선 초기에 드물게 보이는 의고시인(擬古詩人)으로 꼽힌다. 「효도징군(效陶徵君)」(五古), 「효안특진(效顔特進)」(五古), 「효포참군(效鮑參軍)」(五古) 등이 모두 그러한 작품이다. 특히 그는 당인(唐人)의 악부제(樂府題)를 차용하여 「나홍곡(羅嗔曲)」(五絶) 12수를 제작하고 있으며, 그밖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도중(道中)」(七), 「유성남(遊城南)」(七絶), 「궁사(宮詞)」(七) 등도 당시(唐詩)의 유향(遺響..
3. 초기(初期)의 대가(大家)들 조선왕조는 태조(太祖) 때부터 문치(文治)를 숭상하여 이후 100여년 동안 문풍(文風)이 크게 떨쳤거니와 특히 세종(世宗)ㆍ성종(成宗) 연간에는 국초(國初)의 문물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사들이 배출되었다.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ㆍ성석린(成石璘)ㆍ강회백(姜淮伯)ㆍ박의중(朴宜重)ㆍ이첨(李詹)ㆍ정이오(鄭以吾)ㆍ변계량(卞季良) 등은 모두 전조(前朝)에서 문학수업이 이루어졌거나 양조(兩朝)에 사환(仕宦)한 관료들이어서 국초(國初)의 정지작업(整地作業)에서 중요하게 기여도 하였지만, 반면에 창업의 역사적 성격을 흐리게 한 장본인이라는 부정도 함께 걸머져야 할 인물들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순수하게 조선왕조의 토양에서 생장하여 조선전기의 문풍을 일으킨 인물로는 이석형..
3. 초기(初期)의 대가(大家)들 조선왕조는 태조(太祖) 때부터 문치(文治)를 숭상하여 이후 100여년 동안 문풍(文風)이 크게 떨쳤거니와 특히 세종(世宗)ㆍ성종(成宗) 연간에는 국초(國初)의 문물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사들이 배출되었다.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ㆍ성석린(成石璘)ㆍ강회백(姜淮伯)ㆍ박의중(朴宜重)ㆍ이첨(李詹)ㆍ정이오(鄭以吾)ㆍ변계량(卞季良) 등은 모두 전조(前朝)에서 문학수업이 이루어졌거나 양조(兩朝)에 사환(仕宦)한 관료들이어서 국초(國初)의 정지작업(整地作業)에서 중요하게 기여도 하였지만, 반면에 창업의 역사적 성격을 흐리게 한 장본인이라는 부정도 함께 걸머져야 할 인물들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순수하게 조선왕조의 토양에서 생장하여 조선전기의 문풍을 일으킨 인물로는 이석형..
유방선(柳方善, 1388 우왕14~1443 세종25, 자 子繼, 호 泰齋)은 유주부(柳主簿)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주부(主簿)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권근(權近)ㆍ변계량(卞季良) 등에게 배워 일찍이 문명(文名)이 있었으나 오랜 유배생활로 현실에 뜻을 잃고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시(詩) 가운데는 「우제(偶題)」(五絶), 「서회(書懷)」(七絶), 「설후(雪後)」(七絶), 「효우승사(曉遇僧舍)」(五律) 등이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이들 작품은 모두 불우했던 그의 인간 경애(境涯)를 확인케 한다. 「효우승사(曉遇僧舍)」는 다음과 같다. 東嶺上初暾 尋僧扣竹門 동령(東嶺)에 해 돋을 때 중을 찾아 죽문(竹門)을 두드리네. 宿雲留塔頂 積雪擁籬根 자던 구름 탑 위에..
정이오(鄭以吾, 1354 공민왕3~1434 세종16, 자 粹可, 호 郊隱)는 많은 것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죽장사(竹長寺)」(七絶), 「차운기정백용(次韻奇鄭伯容)」(七絶)이 특히 가작(佳作)으로 알려져 왔으며 「신도설야(新都雪夜)」(七律)도 그 구법(句法)이 평담(平淡)하여 기림을 받은 작품이다. 「차운기정백용(次韻奇鄭伯容)」은 다음과 같다. 二月將闌三月來 이월이 다가고 삼월이 오니 一年春事夢中回 일년의 봄빛이 꿈속에 돌아드네. 千金尙未買佳節 천금으로도 오히려 좋은 시절 살 수 없는데 酒熟誰家花正開 누구 집에 술이 익어 꽃이 저리 피었나? 정감의 유로(流露)가 전혀 절제됨이 없다. 당시(唐詩)가 어떠한 것인가를 확인하는 데 매우 적절한 작품이다. 그래서 이 시(詩)를 가리켜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
이첨(李詹, 1345 충목왕1~1405 태종, 자 中叔, 호 雙梅堂)은 「저생전(楮生傳)」의 작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재능을 발휘한 것은 시(詩)이다. 「용심(慵甚)」(七絶), 「등주(登州)」(五律), 「자적(自適)」(五絶), 「야과한벽루문탄금(夜過寒碧樓聞彈琴)」(七絶), 「주행지동양역(舟行至潼陽驛」(五律) 등이 각종 시선집(詩選集)에서 두루 뽑아준 대표작이다. 대체로 한원(閑遠)한 서정이 전편(全篇)에 펼쳐져 있어 동적(動的)인 미감(美感)은 찾아보기 어려운 작품들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용심(慵甚)」도 그러한 것 가운데 하나다. 平生志願已蹉𧿶 평생 뜻하던 일 이미 다 틀렸는데 爭奈慵踈十倍多 게으름은 더 많아지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午寢覺來花影轉 낮잠에서 깨어나니 꽃 그림자도 옮겨가 ..
정도전(鄭道傳, 1337 충숙왕 복위6~1398 태조7, 자 宗之, 호 三峯)의 대표작으로는 「정조봉천문외구호(正朝奉天門外口號)」(七絶), 「방김거사야거(訪金居士野居)」(七絶), 「산중(山中)」(五律), 「오호도조전횡(嗚呼島弔田橫)」(五古), 「공주금강루(公州錦江樓)」(七古) 등이 꼽히거니와 각체(各體)에서 두루 명편(名篇)을 뽑아낸 그의 시재(詩才)는 가리워질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방김거사야거(訪金居士野居)」는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마주하는 것 같아 당인(唐人)의 솜씨에 모자람이 없다. 권근(權近, 1352 공민왕1~1409 태종9, 자 可遠ㆍ思叔, 호 陽村)의 시작(詩作) 중에는 「탐라(耽羅)」(七律), 「금강산(金剛山)」(七律), 「항래주해(航萊州海)」(七律), 「차조정승준(次趙政丞浚)」(七律)..
그리고 다음 시편(詩篇)은 모두 귀양에서 풀려난 양인(兩人)의 처지를 제각기 읊조린 것이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두 시세계의 먼 거리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도전(鄭道傳)의 「공주금강루(公州錦江樓)」는 다음과 같다. 君不見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賈傅投書湘水流 가태부(賈太傅)가 호수(湖水)에 글을 던지고 翰林醉賦黃鶴樓 이태백(李太白)이 황학루(黃鶴樓)에서 시(詩)를 읊던 것을.. 生前轗軻無足憂 생전(生前)의 불우(不遇)를 근심하지 마오, 逸意凜凜橫千秋 호일(豪逸)한 기개(氣槪)가 천추(千秋)에 늠름하네. 又不見 또 보지 못하였는가? 病夫三年滯炎州 병든 몸 3년 동안 염주(炎州)에 묶였다가 歸來又到錦江頭 돌아올 때 또 다시 금강루(錦江樓)에 오른 것을. 但見江水去悠悠 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것만 보았..
2. 국초(國初) 소단(騷壇)의 양상 조선왕조는 국초(國初)부터 문치(文治)를 표방하였지만, 개국초원(開國初元)에는 걸출(傑出)한 시인(詩人)이 배출되지 않았다. 문(文)은 고명(誥命)ㆍ장주(章奏)와 같은 관각문자(館閣文字)를 필요로 했으며 시(詩)에 있어서도 새 왕조의 위업과 서울의 새 풍물을 읊조린 가영(歌詠)ㆍ송도(頌禱)의 사(辭)가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ㆍ정이오(鄭以吾)ㆍ이첨(李詹)ㆍ조운흘(趙云仡)ㆍ유방선(柳方善) 등의 시편(詩篇)이 각종 선발책자(選拔冊子)에 자주 뽑히고 있지만, 이 가운데서 유방선(柳方善)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조(前朝)에서 과거로 입신(立身)하여 양조(兩朝)에 사환(仕宦)한 관료의 전형이다. 다만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은..
그러나 이러한 문학관념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는 국초 이래의 문치(文治)에 힘입어 이후 100여년 동안 문풍이 크게 떨쳤으며 많은 문사들이 배출되었다.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을 비롯하여 양성지(梁誠之)ㆍ조운흘(趙云仡),ㆍ성현(成俔) 등이 모두 목청을 돋우어 문학의 효용성을 강조했지만 조선조 사장학(詞章學)의 전통이 그들에 의하여 이룩되었으며 막중한 창업의 정지 작업에 문장을 필요로 하는 현실적 요구를 외면하지 않았다. 특히 권근(權近)은 태종(太宗) 7년에 「관학사목(觀學事目)」을 올려 과거제도의 개혁을 꾀한 바 있다. 문과초장(文科初場)의 제술론(製述論)을 골자로 한 문과개정안(文科改正案)이 그것이다. 강경(講經)을 파(罷)하고 제술(製述, 글짓기)로써 고시(考試)할 것을 주장한 그는 문장의 본래적..
조선조에 이르러 정도전(鄭道傳)이 직접 자기 목소리로 재도관(載道觀)을 「도은문집서(陶隱文集序)」에서 개진하게 되며 이것이 선성(先聲)이 된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은 하늘의 문(文, 文飾)이요, 산천초목(山川草木)은 땅의 문(文)이요, 시서예악(詩書禮樂)은 사람의 문(文)이다. 그러나 하늘은 기(氣)로 나타내고 땅은 형(形)으로써 나타내지만, 사람은 도(道)로써 나타낸다. 그러므로 문(文)이란 도(道)를 싣는 그릇이다. 日月星辰, 天之文也; 山川草木, 地之文也; 詩書禮樂, 人之文也. 然天以氣, 地以形, 而人則以道, 故曰: “文者, 載道之器.” 이 글에서 그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은 천(天)의 표현으로 산천초목(山川草木)은 땅의 표현으로, 그리고 시서예악(詩書禮樂)은 인(人)의 표현으로 보았으며, 그 표현 ..
1. 문학관념(文學觀念)의 성립(成立)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건국은 처음부터 이성계(李成桂) 일파(一派)에 의한 왕권(王權)의 도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고려(高麗) 왕권(王權)이 사실상 그 권능(權能)을 상실하고 있을 때, 정쟁(政爭)의 수습에서 성공한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낡은 왕권의 회복과 새 왕조의 창업을 놓고 그들의 진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후자쪽을 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로 고려 왕권을 옹호하던 무력한 문벌관료층(門閥官僚層)이 퇴진하고 개국공신(開國功臣)을 추종하는 신진관료(新進官僚)들이 대거 진출하여 정치판도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신분질서의 재편성이 용이하게 이루어져 지방에서 오랫동안 세력을 부식해온 향리층(鄕吏層, 戶長 등)이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하게 된 것과 같은 것이..
그러나 조선의 시업(詩業)이 다양하게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은 중종대(中宗代)를 전후한 시기이다. 박은(朴誾)ㆍ이행(李荇)ㆍ정사룡(鄭士龍) 등 이른바 해동강서시파(海東江西詩派)의 출현을 보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우리나라의 시는 200년 동안 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의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거니와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조선조의 시업(詩業)이 크게 떨치면서 강서시파(江西詩派)와 비슷한 시풍이 유행하여 박은(朴誾)ㆍ이행(李荇)ㆍ정사룡(鄭士龍) 등이 서로 시의 경향을 같이 하면서 신풍(新風)을 일으키는 데까지 이르렀으며 특히 박은(朴誾)과 이행(李荇)은 조선조(朝鮮朝) 제일대가(第一大家)로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이들이 기상기구(奇想奇句)를 즐겨 하는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시풍(詩風)을 숭상하..
6. 조선전기(朝鮮前期)의 다양한 전개(展開) 조선(朝鮮)은 그 창업과 동시에 성리학(性理學)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함으로써 문학관념에 있어서도 주자학(朱子學, 思想儒敎)이 문학 위에 군림하는 재도관(載道觀)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효용적인 문학관은 결코 문학의 생산을 방해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며 도리어 문학의 내질(內質)에 있어서는 김창협(金昌協)의 말과 같이 시를 보면 그 사람까지도 알게 하는 다양한 전개를 보인다. 다만 국초(國初)에는 문(文)은 고명(誥命)ㆍ장주(章奏)와 같은 관각문자(館閣文字)를 필요로 했으며 시(詩)에 있어서도 새 왕조의 위업과 서울의 새 풍물을 읊조린 가영(歌詠)ㆍ송도(頌禱)의 사(辭)가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지 모른다. 권근(權近)ㆍ정도전(鄭道傳)ㆍ조운..
굉연(宏然, ?~?)의 호(號)는 죽간(竹澗), 자세한 행적은 미상이며 시(詩)에 능하여 문집을 남겼다고 한다. 12편에 이르는 시작(詩作)이 각종 시선집에 전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유자청궁(遊紫淸宮)」을 보인다. 洪涯先生舊所隱 홍애선생이 옛날에 숨었던 곳 階下碧桃花飄零 뜰 아래는 벽도화가 흩날리누나. 夜光出井留丹藥 야광이 우물에서 나와 단약에 남아 있고 春露浥松生茯苓 봄 이슬이 소나무에 젖어 복령이 돋았네. 天女或携綠玉杖 선녀들은 녹옥장을 짚고 있기도 하고 仙人自讀黃庭經 신선들은 스스로 황정경을 읽고 있네. 隣寺歸來不五里 이웃 절에서 돌아오는 길 오리도 안되는데 回頭望斷煙冥冥 머리 돌려도 보이지 않고 연기만 아득하네. 도관(道觀)으로 보이는 차청궁(紫淸宮)에서 놀다가 절로 돌아오면서..
선탄(禪坦, ?~?)은 곡성인(谷城人)으로 시(詩)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탔다는 사실밖에는 그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작품으로는 「와병(臥病)」(七絶), 「능가산중(楞伽山中)」(七絶), 「차보문사(次普門寺)」(七律) 등이 시선집에 전한다. 「와병(臥病)」을 보인다. 鞍馬紅塵半白頭 홍진 세상에서 말 타고 다니며 머리가 세었는데 楞伽有病早歸休 능가산이 그리워 일찍이 돌아 왔네. 一江煙雨西山暯 온 강에 비 내리고 서산에 해 저무는데 長捲踈廉不下樓 성긴 발 늘 걷어둔 채 누각을 내려오지 않는다. 승려의 시작답게 구법(句法)이 까다롭지 않아 초심자의 시 학습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작품이다. 작자의 심정과 처지를 평면적으로 읊조리고 있을 뿐이다. 인용 목차 서사한시 한시미학 16~17세기 한시사 존당파ㆍ존송파..
진정(眞靜, ?~?)의 이름은 천책(天𩑠)이고 진정(眞靜)은 그의 호이다. 그러나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진정(眞靜)의 이름도 천책(天𩑠)이므로 양자간의 이동(異同)이 분명치 않다. 다만 『청구풍아(靑丘風雅)』에 의하면 진정(眞靜)이 만덕사(萬德寺)에서 『호산록(湖山錄)』을 남긴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의 천책(天𩑠)은 진정(眞靜)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대표작 「안봉사(安峯寺)」는 다음과 같다. 幽徑幾多曲 亂山千萬重 그윽한 길 몇 굽이더냐 어지러운 산들 천만겹이네. 靑纏訪古利 白佛餘淸風 푸른 행전으로 옛절을 찾으니 흰 불진에 맑은 바람 분다. 皓月掛虛閣 閑雲低碧空 흰 달은 빈 누각에 걸렸고 한가로운 구름 푸른 하늘에 나직하네. 踈慵不掃地 殘葉滿庭紅 게을러 ..
원감(圓鑑, 1266 원종7~1292 충렬왕18)의 속성(俗姓)은 위(魏), 명(名)은 법환(法桓)으로 뒤에 충지(沖止)로 개명하였다, 호(號)는 복암(宓庵), 원감(圓鑑)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사대부(士大夫)의 집안에서 태어나 문과(文科)에도 급제하였다. 충지(沖止)의 시작(詩作)은 각종 시선집에서 19수를 선발하고 있어 승려로서는 가장 많은 것이 되고 있으며, 특히 「한중잡영(閑中雜詠)」, 「우중수기(雨中睡起)」, 「차박안찰항제밀성(次朴按察恒題密城)」 등은 여러 선발 책자에서 모두 뽑아 주고 있다. 선사(禪師)의 신분이면서도 선속(禪俗) 어느 쪽에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한중(閑中)의 정취(情趣)를 노래한 시작(詩作)들이 읽는 이의 안광(眼光)을 사로잡는가 하면, 어지럽게 널려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
천인(天因, 1205희종 1~1248고종 35)의 속성(俗姓)은 박씨(朴氏), 시호(諡號)는 정명(靜明)이다. 17세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문과(文科)에는 실패하여, 후일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寺)의 제 2세가 되었다. 『청명국사시집(靜明國師詩集)』3권과 『청명국사후집(靜明國師後集)』 1권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승려로서는 충지(沖止) 다음으로 많은 작품이(17편) 각종 시선집에 선발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차운원상인산중작(次韻院上人山中作)」(五古), 「유사선암유작(遊四仙嵓有作)」(五古), 「차운답지(次韻答之)」(七古) 등의 고시(古詩)가 여러 선발책자에 두루 뽑히고 있어, 그의 고조장편(古調長篇)에 대한 능력을 짐작케 한다. 「유사선암유작(遊四仙嵓有作)」을 보인다. 仙遊邈已遠 嘉境轉..
달전(達全, ?~?)은 그 생평(生平)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의 시편은 각종 시선집에서 공통적으로 4편이나 뽑아주고 있으며, 이들이 모두 칠언고시(七言古詩)인 것으로 보아 그의 장처(長處)가 칠언고시에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시선집에 뽑힌 그의 대표작으로는 「차운제현국부(次韻諸賢菊賦)」(七古), 「등연경호천사구층대탑(登燕京昊天寺九層大塔)」(七古), 「차이하장진주운(次李賀將進酒韻)」(七古), 「송이원수부진(送李元帥赴鎭)」(七古) 등이 있다. 다음이 「등연경호천사구층대탑(登燕京昊天寺九層大塔)」이다. 龍蛇窟深如夜黑 용과 뱀의 굴이 깊어 밤처럼 어두운데 日光斜穿滴不滴 햇빛이 뚫어도 스며들지 못하네. 躋攀上了天下白 붙잡고 기어오르니 천하가 하얗고 紅埃腥風一時窮 붉은 티끌 비린 바람이 한꺼번에 없어지네..
6) 운석(韻釋)의 시편(詩篇) 고려(高麗) 왕조(王朝)는 국초부터 유교치국(儒敎治國)을 표방했지만, 사상계를 지배한 것은 저급한 민간신앙(民間信仰)과 불교신앙(佛敎信仰)이었으며, 이러한 기본 성향(性向)은 주자학(朱子學)이 수입된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도 변화의 진폭(振幅)은 크지 않았다. 그러므로 귀족적인 고려 왕조의 문화 풍토에서 배출된 불승(佛僧)들 가운데는 유가(儒家)의 관료적(官僚的) 발신(發身)에 필수과정인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산문(山門)에 들어간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이때의 유교는 기본유학(基本儒學) 즉 문학유교(文學儒敎)의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문학(文學) 수업(修業)은 단순한 종교인의 교양 이상의 것임은 물론이다. 의종(毅宗) 때에 있었던 무신란(武臣亂)으로 문사(文士)들이 ..
이집(李集, 1327 충숙왕1~1387 우왕13, 자 浩然, 호 遁村)은 신돈(辛旽)에게 미움을 받아 현달(顯達)하지 못했다. 그의 『둔촌잡영(遁村雜詠)」은 잡영(雜詠)ㆍ부록(附錄)ㆍ보편(補編)을 합쳐 84에 지나지 않는다. 목은(牧隱)ㆍ포은(圃隱)ㆍ도은(陶隱)ㆍ척약재(惕若齋) 등과 주고받은 시편으로 보아 시세계의 경계(境界)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기정상국(寄鄭相國)」(七), 「여주제영(驪州題詠)」(七絶), 「한양도중(漢陽途中)」(五律) 등이다. 「한양도중(漢陽途中)」을 보인다. 病餘身已老 客裏歲將窮 병을 앓아 몸 벌써 늙었고 나그네 신세 한해가 다하려 하네 瘦馬鳴斜日 羸僮背朔風 여윈 말 석양에 울고 약한 아이 삭풍을 등졌네 臨津冰合凍 華岳雪連空 임진강은 얼음 얼어 걸어..
유숙(柳淑, 1324 충숙왕11~1368 공민왕17, 자 純天, 호 思菴)은 문집을 남기지 않아 그의 시세계에 대해서는 시선집에 전하는 「벽란도(碧欄渡)」(五絶)와 「차가야사주노(次加耶寺住老)」(七律)를 통하여 짐작힐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공민왕(恭愍王)의 지우(知遇)를 입었으며 흥왕사(興王寺)의 변란에도 대공(大功)을 세워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으나, 그의 충직(忠直)을 두려워 한 신돈(辛旽)에 의하여 죽음을 당했다. 「벽란도(碧欄渡)」를 본다. 久負江湖約 風塵二十年 오랫동안 강호의 기약 저버리고 풍진 세월 이십년 白鷗如欲笑 故故近樓前 백구도 비웃는 듯 울음 울며 다락 앞으로 다가오네 벽란도(碧瀾渡)는 송사(宋使)가 뱃길로 이르던 곳이다. 유숙(柳淑)이 벽란도(碧欄渡)를 지나며 자연에 은거하지 못..
김구용(金九容, 1338 충숙왕 복위7~1384 우왕10, 자 敬之, 호 惕若齋)은 숭유(崇儒)의 군주(君主)로 알려져 있는 공민왕(恭愍王)이 성균관(成均館)을 창건하였을 때 정몽주(鄭夢周)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朴宜中)ㆍ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교관(敎官)이 되었으며 이때 정이천(程伊川)의 역전(易傳)과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注)를 논(論)하는 등 주자학(朱子學)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작(詩作)에는 강호자연(江湖自然)을 사랑하는 흥취(興趣)가 작품의 도처에 넘치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 「여강기둔촌(驪江寄遁村)」(七絶), 「무창(武昌)」(七絶), 「기달가종군(寄達可從軍)」(五律), 「범급(帆急)」(五律), 「차이호연(次李浩然)」(七律), 「강수(江水)」(..
설손(偰遜, ?~1360 공민왕9, 호 近思齋)은 원래 위구르[回鶻] 사람으로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 고려(高麗)에 귀화하여 부원후(富原侯)에 봉해졌던 인물이다. 그의 조상들이 설련하(偰輦河)에서 살았으므로 고려 왕실에서 그에게 ‘설(偰)’로 사성(賜姓)을 하였다. 그의 대표작 「산중우(山中雨)」를 본다. 一夜山中雨 風吹屋上茆 한 밤중 산 속에 비 내리는데 바람은 지붕의 띠풀에 분다네 不知溪水長 祗覺釣船高 시냇물 불어난 것은 알지 못하지만 다만 낚싯배 높아진 것만 깨달을 뿐이네 밤 사이 비가 온 산중의 풍경을 읊은 작품이다. 고깃배가 높이 떠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시냇물이 길게 불어난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돋보인다. 평범하면서도 속기(俗氣)가 보이지 않는다. 기(起)ㆍ승구(承句)와 전(轉..
정추(鄭樞, ?~1382 우왕8, 자 公權, 호 圓齋)는 아버지 정포(鄭誧)와 더불어 유려(流麗)한 풍격(風格)으로 이름높은 시인이다. 여러 선발책자(選拔冊子)에 뽑히고 있는 것 가운데서도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 것은 「정주도중(定州途中)」(七絶), 「금란굴(金幱窟)」(五律), 「만경대(萬景臺)」(五律), 「숙청심루(宿淸心樓)」(五律), 「기암둔(寄嚴遁)」(七律), 「오리동박헌납용진간재운부지(汚吏同朴獻納用陳簡齋韻賦之)」(五古) 등이다. 다음은 그의 「정주도중(定州途中)」이다. 定州關外草萋萋 정주 관문 바깥에는 풀만 무성하고 沙磧無人日向西 모래밭에 사람 없고 해는 서쪽으로 기우네 過海腥風吹戰骨 바다의 비린 바람 전사자의 해골에 불어 白楡多處馬頻嘶 느릅나무 많은 곳에 말 자주 울더라 이 작품은 결구(結句)의..
한수(韓脩, 1333 충숙왕 복위2~1384 우왕10, 호 柳巷)의 저작은 『유항시집(柳巷詩集)』 38장(張)이 전하고 있을 뿐 문집이 온전히 전하지 않는다. 일찍부터 시명(詩名)을 얻어 익재(益齋)와 목은(牧隱)으로부터 칭상(稱賞)을 받은 그는 특히 목은(牧隱)과 친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좌차두공부시운(夜坐次杜工部詩韻)」(五律), 「봉화한산군(奉和韓山君)」(五律), 「척약재승주내방음주중(惕若齋乘舟來訪飮酒中)」(七律), 「요목은선생등루완월(邀牧隱先生登樓翫月)」(七律), 「야좌(夜坐)」(七古) 등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대부분의 작품이 율시 가운데 있다. 두보(杜甫)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지은 「야좌차두공부시운(夜坐次杜工部詩韻)」을 보인다. 此日亦云暮 百年眞可悲 오늘도 날이 저물었으니 평생..
이달충(李達衷, ?~1385 우왕11, 호 霽亭)은 성품이 강직하여 신돈(辛旽)의 전횡 시대에 신돈에게 직언을 하다가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신돈이 주살(誅殺)된 후 다시 등용되어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고시(古詩)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낙오당감흥(樂吾堂感興)」(五古), 「취가(醉歌)」(七古)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낙오당감흥(樂吾堂感興)」을 보기로 한다. 將行有河海 將涉無舟航 가려니 강과 바다 건너려니 배가 없네 要見我所思 欲往還彷徨 다만 생각하는 사람 보려함이나 가려다가 도리어 주저하네 才非傅說楫 世運亦未昌 재주는 부열의 노가 되지 못하고 세상의 운 또한 트이지 않네 潛光且竢命 妄動遭禍殃 빛 숨기고 천명을 기다려야지 망령되이 움직이다 재앙을 만날 걸세 『동문선(東文選)..
한종유(韓宗愈, 1287 충렬왕13~1354 공민왕3, 자 師古, 호 復齋)는 충숙(忠肅)ㆍ충혜왕(忠惠王)의 복위 과정에서 원(元0나라를 내왕하며 왕권(王權) 수호에 공을 세웠으며 벼슬이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그의 시작(詩作)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대동시선(大東詩選)』 등에 전하고 있는 「한양촌장(漢陽村莊)」이 있을 뿐이다. 작품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十里平湖細雨過 십리 길 조용한 호수에 보슬비 지나가고 一聲長笛隔蘆花 한 가닥 피리 소리 갈대꽃 저 편에 들리네 直將金鼎調羹手 금솥에서 국 끓이던 그 솜씨로 還把漁竿下晚沙 도리어 낚시대 들고 저녁 모래밭으로 내려가네 젊은 시절에는 양화도(楊花徒)라 불리울만큼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재상이 되어서는 공명을 이루어 이름을 떨쳤다. 만년(晩年)에..
5) 려말(麗末)의 시인(詩人)들 목은(牧隱)ㆍ포은(圃隱)ㆍ도은(陶隱) 등 이른바 삼은(三隱)을 전후한 시대에는 안정된 우리의 진귀(珍貴)를 맛보게 하는 많은 소인(騷人)들이 배출되었다. 그들을 일일이 적어 보일 수는 없지만 그 중에서도 높은 이름을 후세에까지 전하고 있는 일부만 보이면 다음과 같다. 박상충((朴尙衷)ㆍ권한공(權漢功)ㆍ민사평(閔思平)ㆍ신천(辛蕆)ㆍ전녹생(田祿生)ㆍ한종유(韓宗愈)ㆍ백문보(白文寶)ㆍ오순(吳珣)ㆍ최원우(崔元祐)ㆍ이공수(李公遂)ㆍ이달충(李達衷)ㆍ탁광무(卓光茂)ㆍ한수(韓脩)ㆍ정추(鄭樞)ㆍ설손(偰遜)ㆍ이인복(李仁復)ㆍ김구용(金九容)ㆍ유숙(柳淑)ㆍ이집(李集)ㆍ이존오(李存吾)ㆍ원천석(元天錫)ㆍ원송수(元松壽)ㆍ길재(吉再) 등이 려말(麗末)에서 선초(鮮初)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성망(聲望)..
5) 려말(麗末)의 시인(詩人)들 목은(牧隱)ㆍ포은(圃隱)ㆍ도은(陶隱) 등 이른바 삼은(三隱)을 전후한 시대에는 안정된 우리의 진귀(珍貴)를 맛보게 하는 많은 소인(騷人)들이 배출되었다. 그들을 일일이 적어 보일 수는 없지만 그 중에서도 높은 이름을 후세에까지 전하고 있는 일부만 보이면 다음과 같다. 박상충((朴尙衷)ㆍ권한공(權漢功)ㆍ민사평(閔思平)ㆍ신천(辛蕆)ㆍ전녹생(田祿生)ㆍ한종유(韓宗愈)ㆍ백문보(白文寶)ㆍ오순(吳珣)ㆍ최원우(崔元祐)ㆍ이공수(李公遂)ㆍ이달충(李達衷)ㆍ탁광무(卓光茂)ㆍ한수(韓脩)ㆍ정추(鄭樞)ㆍ설손(偰遜)ㆍ이인복(李仁復)ㆍ김구용(金九容)ㆍ유숙(柳淑)ㆍ이집(李集)ㆍ이존오(李存吾)ㆍ원천석(元天錫)ㆍ원송수(元松壽)ㆍ길재(吉再) 등이 려말(麗末)에서 선초(鮮初)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성망(聲望)..
이숭인(李崇仁)의 시는 그의 문집에 3권이 전하고 있으며 시선집(詩選集)에 뽑히고 있는 작품도 40여수에 이른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촌거(村居)」(五絶)를 비롯하여 「제승사(題僧舍)」(七絶), 「의장(倚杖)」(五律), 「억삼봉(億三峯)」(五律), 「추회(秋回)」(七律), 「오호도(嗚呼島)」(七古), 「신설(新雪)」(五律) 등이 알려진 것들이다. 이 가운데서 「신설(新雪)」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蒼茫歲暮天 新雪遍山川 아득한 세모(歲暮)의 하늘에 첫눈이 산천에 깔렸네. 鳥失山中木 僧尋石上泉 새들은 산 중의 나무를 잃고 중[僧]은 돌 위에 샘을 찾는다. 飢烏啼野外 凍柳臥溪邊 주린 가마귀 들 밖에서 우짖고 얼어붙은 버드나무 시냇가에 누웠네. 何處人家在 遠林生白煙 어느 곳에 인가(人家)가 있길래 저 멀리 숲 ..
이숭인(李崇仁, 1349 충정왕1~1392 태조1, 자 子安, 호 陶隱)은 이색(李穡)의 문인이며 이색(李穡)이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을 때 정몽주(鄭夢周)ㆍ김구용(金九容) 등과 더불어 교관(敎官)으로 일했다. 이숭인(李崇仁) 역시 이색(李穡)ㆍ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유가(儒家)이자 정치가로서 시가(詩家)를 겸하였지만, 특히 문장(文章)이 전아(典雅)하여 당시의 표전사명(表箋詞命)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원(元)으로부터 금은마포(金銀馬布)의 세공(歲貢)을 감하게 한 것도 그의 힘이었다고 한다【『고려사(高麗史)』ㆍ 열전(列傳), 「이숭인조(李崇仁條)」】. 그러나 그 역시 정몽주당(鄭夢周黨)으로 몰리어 멀리 내쫓겨야 했으며, 끝내는 정도전(鄭道傳)이 보낸 황거정(黃居正)에 의하여 장살..
그러나 포은시(圃隱詩)의 가장 높은 경지는 ‘기실(紀實)’에 있다. 「홍무정사봉사일본(洪武丁巳奉使日本)」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11수 중 그 네번째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平生南與北 心事轉蹉跎 평생 남북으로 돌아다니는 신세, 마음과 일도 따라서 어긋나네. 故國海西岸 孤舟天一涯 고국은 서해안에 있고 외로운 이 몸 멀리 하늘가에 있네. 梅窓春色早 板屋雨聲多 매화 핀 창에는 봄빛이 빨리 오고 나무 지붕에는 빗소리가 크네. 獨坐消長日 那堪苦憶家 홀로 앉아 긴 날을 보내노라니 고향 생각 괴로움을 어찌하리요? 동사의 사용을 최대한으로 억제하고 있지만, 전편의 구도(構圖)가 크고 넓어 호방(豪放)한 그의 기상(氣象)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실(事實)의 기술(記述)만으로도 명작(名作)을 가능케 한 학자시(學者詩..
「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는 다음과 같다. 定州重九登高處 정주(定州)에서 중구(重九)날 높은 곳에 오르니 依舊黃花照眼明 국화꽃 예와 같이 눈 앞에 환하네. 浦敍南連宣德鎭 개펄은 남으로 선덕진(宣德鎭)에 이어졌고 峯巒北倚女眞城 산봉우리는 북으로 여진성(女眞城)에 기대었네. 百年戰國興亡事 백 년 동안의 전쟁은 흥하고 망하는 일, 萬里征夫慷慨情 만리(萬里)에 온 병사는 강개(慷慨)로운 정일세. 酒罷元戎扶上馬 술 끝나자 대장이 말 위에 올려 주니 淺山斜日照紅旌 얕은 산 빗긴 해가 붉은 깃발 비추네. 이 작품은 물론 관북(北關)에서 지은 것이기도 하지만, 호방(豪放)한 기상(氣象)이 달리는 듯하다. 김종직(金宗直)이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 이 작품을 뽑아주지 않은 것도 이 ‘호방(豪放)’을 싫어..
그의 시작(詩作)은 시문집(詩文集) 외에도 각종 시선집(詩選集)에 40여수나 전하고 있어 이것만으로도 그의 시세계를 알아보는 데는 모자람이 없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는 「춘흥(春興)」(五絶), 「강남곡(江南曲)」(七古), 「정부원(征婦怨)」(七絶) 등 수작(秀作)이 많지만 특히 그의 호방(豪放)한 기상(氣象)을 알게 해주는 것은 율시(律詩)에 더 많다. 그러한 작품으로는 「홍무정사봉사일본(洪武丁巳奉使日本)」(五律), 「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七律), 「중구일제익양수이용명원루(重九日題益陽守李容明遠樓)」(七律)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춘흥(春興)」은 다음과 같다. 春雨細不滴 夜中微有聲 봄비 가늘어 방울 듣지 않더니 밤중에사 조그맣게 소리 들리네. 雪盡南溪漲 草芽多少生 눈이 녹아 남쪽 개울..
4) 정몽주(鄭夢周)의 호방(豪放)과 이숭인(李崇仁)의 전아(典雅) 정몽주(鄭夢周, 1337 충숙왕 복위6~1392 공양왕4, 자 達可, 호 圃隱)는 인종(仁宗) 때에 문명(文名)을 드날린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다. 그는 이색(李穡)ㆍ이숭인(李崇仁)과 더불어 유가(儒家)ㆍ정치가로서 시가(詩家)를 겸한 여말(麗末)의 학자 문인이다. 그가 우왕(禑王)ㆍ창왕(昌王)을 폐할 때 이성계(李成桂)에게 협력하였다 하여 이를 흠으로 일컫는 후대의 비평도 있지만 그러나 그는 기울어져 가는 고려 왕실을 붙들려다가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해 피살된 고려왕조의 마지막 보루였던 것은 틀림없다. 이성계(李成桂) 세력을 제거하려다 실패한 그였지만, 그의 정충대절(精忠大節)만은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려사(高麗史)』에서도 ..
목은(牧隱)의 시작(詩作)은 문집 밖에도 70여 수가 시선집(詩選集)에 전한다. 호방(豪放)한 그의 시풍 때문에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는 선발(選拔)에 인색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서도 「부벽루(浮碧樓)」(五律)와 「독두시(讀杜詩)」(七律)가 특히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여기서는 「부벽루(浮碧樓)」만 보인다. 昨過永明寺 暫登浮碧樓 어제 영명사(永明寺)를 지나다가 잠깐 부벽루(浮碧樓)에 올랐네. 城空月一片 石老雲千秋 텅빈 성에는 한 조각 달이 걸려 있고 늙은 돌 위에 구름도 천추(千秋)나 되었네. 麟馬去不返 天孫何處遊 기린마(麒麟馬)는 떠나가고 돌아오지 않는데 천손(天孫)은 어느 곳에서 노닐고 있는고? 長嘯倚風磴 山靑江自流 난간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 부니 산은 푸르고 강물 절로 흐르네. 훤칠한 이색(李穡)..
특히 목은(牧隱)의 시는 중체(衆體)를 구비하여, 웅혼(雄渾)한가 하면 곱고 예쁘며, 준결(峻潔)한 것이 있는가 하면 호섬(豪贍)한 것이 있으며 엄중(嚴重)한 것도 있고 오심(奧深)한 것이 있어 전정(全鼎)을 맛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시에 대한 평가다. 이로써 보면 일찍이 서거정(徐居正)이, 웅준(雄峻)한 포은(圃隱)과 전아(典雅)한 양촌(陽村)과, 간결(簡潔)한 도은(陶隱)과 호매(豪邁)한 삼봉(三峯)도 모두 선생의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 평가는 목은(牧隱)의 시세계를 가장 포괄적으로 파악한 최초의 발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목은시(牧隱詩)의 장처(長處)를 가장 감동적으로 지적한 것은 조선후기의 신위(申緯)가 아닌가 한다. 그는 「동인논시(東人論詩)」에서 정지상(鄭知常)의 「송인..
3) 이색(李穡)의 박채불유(博採不遺) 이색(李穡, 1328 충숙왕15~1396 태조5, 자 穎叔, 호 牧隱)의 문장(文章)은 그 폭이 넓을 대로 넓어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것으로 정평(定評)되어 있지만, 각체(各體)의 도처에서 명문(名文)을 양산하고 있는 그의 문장(文章)은 높은 곳도 없고 낮은 곳도 없다. 쫓거나 내닫는 성급함도 없이 한가롭고 여유에 차 있다. 애써 꾸미려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말이 풍부하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말한 그대로 먹을수록 맛있고 배부르게 해준다. 『목은집(牧隱集)』의 문장(文章)은 그가 사거(死去)한 수백년 동안 그것을 헐뜯는 입놀림이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을 울렸다. 문장(文章)을 대하는 풍상(風尙)이 달라진 조선중기 이후에 있어서도 그의 이름은 흔들리..
정포(鄭誧, 1309 충선왕1~1345 충목왕1, 자 仲孚, 호 雪谷)는 최해(崔瀣)의 문인(文人)이며 추(樞)의 아버지다. 그는 소년등제(少年登第)하여 충숙왕(忠肅王)의 사랑을 받았으며 벼슬은 충혜왕(忠惠王) 때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서 그쳤다. 뒤에 원(元)에 들어갔다가 승상별가보화(丞相別哥普化)의 사랑을 입어 원제(元帝)에게 천거하려 할 때 그곳에서 병졸(病卒)했다. 그는 타고난 시재(詩才)가 있어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시어가 간략하고 예스러우며 필적 또한 오묘하다[詩詞簡古, 筆蹟亦妙].”라 하였으며 이색(李穡)은 “설곡의 시는 맑지만 쓰지 않고 곱지만 음탕하지 않아 말의 기운이 우아하고 깊지만 도교의 풍속을 즐기지 않았다[雪谷之詩, 淸而不苦, 麗而不淫, 辭氣雅遠, 不肯道俗].”이라 하였다...
2) 최해(崔瀣)의 곤돈(困頓)과 정포(鄭誧)의 유려(流麗) 최해(崔瀣,1287 충렬왕13~1340 충혜왕복위1, 자 彦明父ㆍ壽翁, 호 拙翁. 猊山農隱)는 이제현(李齊賢)과 동시대의 문인이다. 등제후(登第後) 충숙왕(忠肅王) 때 원(元)에 들어가 그곳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개주판관(盖州判官)을 지내고 환국(還國)하여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서 그쳤다. 그는 재기지고(才奇志高)하여 독서와 문사(文辭)에 있어서 사우(師友)의 지도에 힘입지 않고 자득(自得)하였다고 하며 방탕감언(放蕩敢言)하고 권귀(權貴)에게 아첨하기 싫어하여 크게 쓰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 초기의 선발책자(選拔冊子)인 『동인지문(東人之文)』을 편찬했으며 시선집(詩選集)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을 비주(批注)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곡(李穀, 1298 충렬왕24~1351 충정왕3, 자 仲父, 호 稼亭)은 초명(初名)이 예백(藝白)이며 이색(李穡)의 아버지다. 그의 가계(家系)는 한산(韓山)의 향리층(鄕吏層)이었으며 이곡(李穀)의 부자대(父子代)에 이르러 중앙에 진출하게 되었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등제(登第)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로 있다가 원(元)의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그곳에서 한림국사원검열(翰林國史院檢閱)까지 지냈으며 그 뒤에도 원(元)과의 왕래가 자주 있었다. 그의 문학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에 ‘與中朝文士, 交遊講劘…辭嚴義興, 典雅高古, 不敢以外國人視也.’라 한 것으로 보아 중국에까지 그 이름을 떨쳤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는 시문집(詩文集)인 『가정집(稼亭集)』에 전하는 것 외에도 『동문선(東文選)』등 선발..
이 밖에도 이제현(李齊賢)은 민간에서 유행하던 시속(時俗)의 노래들을 칠언(七言)으로 번역하고 이를 소악부(小樂府)라 하였다. 그의 『익재난고(益齋亂藁)』에 11수가 수록되어 있으며 형식은 모두 칠절(七絶)로 되어 있다. 「처용가(處容歌)」ㆍ「서경별곡(西京別曲)」ㆍ「정과정곡(鄭瓜亭曲)」은 원가(原歌)가 전해지고 있으나 그밖의 「장암가(長巖歌)」ㆍ「거사련(居士戀)」ㆍ「제위보(濟危寶)」ㆍ「사리원(沙里院)」ㆍ「소년행(少年行)」ㆍ「오관산(五冠山)」은 실전(失傳) 가요이므로 이 소악부(小樂府)를 통하여 원가(原歌)의 내용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원가(原歌)가 전하고 있는 작품의 경우를 보면 한 노래의 전편(全篇)을 직역한 것이 아니고 그 정서를 살리기는 하되 정채(精彩)만 표현하고 있는 느낌이..
이제현(李齊賢)의 시는 시문집(詩文集)인 『익재난고(益齋亂藁)』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각종 시선집(詩選集)에 50수 가까운 시편(詩篇)이 수록되어 있어 시가 정종(正宗)의 면모를 알아내는 데는 이로써도 충분하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보덕굴(普德窟)」(五絶), 「산중설야(山中雪夜)」(七絶)를 비롯하여 「팔월십칠일 방주향아미산(八月十七日 放舟向峨嵋山)」(七律), 「구요당(九曜堂)」(七絶), 「표모분(漂母墳)」(七絶), 「범려(范蠡)」(七絶), 「탁군(涿郡)」(七絶), 「업성(鄴城)」(七絶), 「황토점(黃土店)」(七律), 「민지(澠池)」(五古)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이것들은 대부분 재원(在元) 시절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산중설야(山中雪夜)」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紙被生寒佛燈暗 종이 이불 한기가 돌고 불등(..
이제현(李齊賢)의 초명(初名)은 지공(之公), 검교정승(檢校政丞) 이진(李瑱)의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 삼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현달(顯達)한 문학세가(文學世家)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20대에 백이정(白頤正)을 사사(事師)하여 남먼저 정주(程朱)의 학(學)을 배웠다. 그러나 28세 때, 원(元) 나라에 머물고 있던 충선왕(忠宣王)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 연경(燕京)으로 가게 되었으며, 그곳 만권당(萬卷堂)에서 충선왕(忠宣王)을 모시면서 요수(姚燧)ㆍ조맹부(趙孟頫)와 같은 당대의 석학들과 사귀어 학문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2년 뒤에 왕명(王命)으로 남촉(南蜀)에 주유(周遊)하게 되자 그는 가는 곳마다 시를 남기어 시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했다. 33세 때에는 충선왕(忠宣王)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