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1/12/21 (230)
건빵이랑 놀자
한국한시사(韓國漢詩史) 목차 민병수(閔丙秀) 1. 서설(序說) 1) 한시연구의 과제 2) 자료의 선택 문제 ⑴ 『청구풍아(靑丘風雅)』와 송시학(宋詩學)의 극복 ⑵ 『국조시산(國朝詩刪)』과 격조론 ⑶ 『기아(箕雅)』와 절충론 ⑷ 풍요(風謠)와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의지 ⑸ 『대동시선(大東詩選)』과 민족의식(民族意識) 3) 작품의 평가 문제 ⑴ 고려의 시화집 ⑵ 조선의 시화집 2. 한시의 초기 모습 1) 대륙(大陸)의 노래 ⑴ 공후인(箜篌引) ⑵ 황조가(黃鳥歌) ⑶ 인삼찬(人蔘讚) 2) 북방(北方)의 기개(氣槪) ⑴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與隋將于仲文) ⑵ 정법사의 영고석(詠孤石) 3) 남방(南方)의 서정(抒情) ⑴ 진덕여왕의 직금헌당고종(織錦獻唐高宗) ⑵ 김지장의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 ⑶ 설요의 반속요(..
종언(終焉) 이상에서 의병장이 남기고 간 우국시를 소략하게나마 찾아보았다. 그러나 초기의 의병항쟁에 참여한 몇몇 유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거개(擧皆)가 시문집이 전하지 않고 있어, 그들이 죽음에 임하여 남기고 간 한두 수의 「임절시(臨絶詩)」를 볼 수 있을 뿐이다. 몇 편밖에 안 되는 우국시이긴 하지만, 이들 시작(詩作)에서 얻어 볼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을 추려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의병장들은 거개가 문학 수업을 전주(專主)로 한 문인들이 아니기 때문에 작품 자체는 졸박(拙朴)한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임절시(臨絶詩)」에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는 즉현실적(卽現實的)인 사의(思意)가 그대로 표출되고 있어 언외(言外)의 언(言)을 찾아볼 수 있는 한시학의 오묘를 느..
전해산(全海山, ?~?)은 임실(任實) 출신의 한학자이다. 근위병대참위(近衛兵隊參尉) 이초래(李初來)와 함께 기의하여 후기 의병항쟁에 참여하였다가 영산포(榮山浦)에서 체포되어 대구 왜옥(倭獄)에서 순절하였다. 옥중에서 지은 「임절시(臨絶詩)」 한 수가 있다. 書生何事着戎衣 서생이 무슨 일로 갑옷을 입었던고? 太息如今素志違 먹은 맘 다 틀어지니 한숨만 나오네. 痛哭朝廷臣作孽 조정 신하 하는 짓 통곡만 나오고 忍論海外賊侵圍 해외에서 쳐들어오는 적 차마 다 말하리까? 白日呑聲江水逝 백일 아래 강물은 울먹이며 흐르고 靑天咽泪雨絲飛 청천에 실비는 눈물을 날리네. 從今別却榮山路 이로부터 영산 길 영영 하직할지니 化作啼鵑帶血歸 죽어서 두견새 되어 피울음을 울리라. 『매천야록』, p.523. 유사(儒士)가 기의하게 된..
정환직(鄭煥直, 1854~1907)은 영천(永川) 출신이다. 을사늑약에 통분한 고종의 밀지를 받아 아들 용기(鏞基)와 이한구(李韓久) 등에게 거의할 것을 지시, 후일을 기약하였으나 그의 아들이 전사하자 도찰사(都察使)로 있던 정환직이 분연히 달려와 영덕(盈德)ㆍ청송(靑松) 등지에서 혈투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동대산(東大山) 전투에서 패퇴, 고천(高川)에서 체포되었다. 영천으로 끌려가면서 지은 우국시 한 수가 전한다. 身亡心不變 義重死猶輕 몸은 죽어지나 마음마저 변할 건가? 의리가 중하면 죽음이야 가벼운 것, 後事憑誰託 無言坐五更 남아 있는 뒷일을 누구에게 맡기리? 말없이 오경을 앉아서 지새는구나, 인용 목차 서사한시 한시미학 16~17세기 한시사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이은찬(李殷瓚, 1878 고종15~1909 융희3)은 양평 출신의 유생이다. 홍천에서 거의한 관동의병장 이인영(李麟榮) 등과 함께 서울까지 진격하려다가 패퇴, 후일 밀정의 고발로 체포ㆍ처형되었다. 『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에 우국시 한 수가 전한다. 一枝李樹作爲船 오얏나무 한 가지로 배를 만들어 欲濟蒼生泊海邊 온 겨레 건지고자 바닷가에 이르렀네. 未得寸功身先溺 한 치 공도 못세우고 이 몸 먼저 빠졌으니 誰算東洋樂萬年 뉘라서 동양 평화 도모하리요? 뜻한 바 있어 거의하였다가 이루지 못하고 먼저 가게 된 안타까운 우국충정이 잘 나타나 있다 정환직(鄭煥直, 1854~1907)은 영천(永川) 출신이다. 을사늑약에 통분한 고종의 밀지를 받아 아들 용기(鏞基)와 이한구(李韓久) 등에게 거의할 것을 지시, 후..
김도현(金道鉉, 1852 철종3~1914, 자 明玉, 호 碧棲)은 영양(英陽) 출신의 유사(儒士)다. 병신년(丙申年)에 거의하여 여러 번 패했으나 물러나지 않았다. 을사(乙巳)ㆍ경술(庚戌) 간에도 거의(擧義)하려 했으나 90 노친이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나중에 부상(父喪)을 지내고 동해(東海)에 나아가 투신자살했다. 역시 임절시 1수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다음이 그의 「임절시(臨絶詩)」다. 我生五百末 赤血滿腔腸 조선왕조 마지막에 세상에 나왔더니 붉은 피 끓어 올라 가슴에 차는구나. 中間十九歲 鬚髮老秋霜 그 사이 십구년을 헤매다 보니 머리털 희어져 서릿발이 되었구나. 國亡淚末己 親沒痛更張 나라 잃고 흘린 눈물 마르지도 않았는데 어버이마저 가시는 슬픈 마음 더욱 넓다. 獨立故山碧 百計無一方 홀로 고향..
이강년(李康秊, 1858 철종9~1908 융희2, 자 樂仁ㆍ樂寅, 호 雲崗) 역시 을미거사 때 유인석(柳麟錫)ㆍ이인영(李麟榮) 등과 기의하였다가 정미의거에도 다시 참가, 호서(湖西) 창의대장(倡義大將)으로 활약하였다. 『운강선생창의록(雲岡先生倡義錄)』에 전하는 자탄시(自嘆詩) 한 수와 『기려수필(騎驢隨筆)』에 실려 있는 임절시 한 수가 있다. 특히 이 임절시에는 순국의 최후가 너무도 처절하게 새겨져 있으며, 최후의 순간에도 굴하지 않는 장부의 기개가 불타고 있다. 「임절시(臨絶詩)」는 다음과 같다. 五十年來辦死心 오십년을 걸려서 죽을 마음 정했지만 盟師在出終難復 어려운 일 정작 당하니 생각이 많더이다. 臨難已有區區心 맹세코 다시 나왔지만 회복하지 못하였나니 地下有餘冒劍心 저승에 가서라도 칼을 버리지 않으..
이인영(李麟榮, 1867 고종4~1909 융희3)은 초기의 을미거사 때 유인석(柳麟錫)ㆍ이강년(李康秊) 등과 기의하였다가 후일 정미거의(丁未擧義) 때 다시 참가, 13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허위(許蔿)ㆍ민긍호(閔肯鎬)ㆍ이강년(李康秊) 등과 함께 일거에 서울에까지 진공하였다가 중도에서 부친상으로 퇴거하였다. 『기려수필(騎驢隨筆)』에 옥중에서 지은 임절시 1수가 전하고 있다. 分明日月懸中州 밝고 밝은 해와 달 중주(中州)에 떠 있는데 四海風潮濫○流 온누리에 새 물결 넘쳐 흐르는구나. 蚌鷸緣何相持久 조개와 황새는 어쩌면 저렇게 붙들고만 있는가? 西洲應見漁人收 서양의 어부들이 틀림없이 쓸어 가리라.322) 이 시에는 동양과 서양 사이에 개재하고 있는 이질 감각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공연히 서로 싸우기만 하다가..
김복한(金福漢, 1860 철종11~1924, 자 元五, 호 志山)은 홍주(洪州) 출신이다. 선원(仙源) 김상용(金尙鎔)의 후손이며, 의병장 이설(李偰)과는 내외종간(內外從間)이다. 그는 단발령이 내렸을 때에는 이설 등과 함께 기의하였으며, 1906년에는 다시 민종식(閔宗植)과 함께 홍주에서 기의하였고, 세칭 6의사의 한 사람이다. 그가 남기고 간 우국시편 가운데는 이미 앞에서 보인 「이충문공묘(李忠武公墓)」를 비롯하여 이설(李偰)의 담자운(談字韻)에 차운(次韻)한 「차부암이공담자운(次復菴李公談字韻)」과 「문안중근사유감(聞安重根事有感)」이 특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차부암이공담자운(次復菴李公談字韻)」을 아래에 보인다. 獨坐悄然誰公談 초연히 홀로 앉아 누구와 말을 할까? 面墻無路見終南 담벽만 보노라니 남산을..
다음은 중국을 원망한 유인석(柳麟錫)의 「책망중화(責望中華)」이다. 中華夷狄薰蕕似 중화와 이적(夷狄)은 본래 서로 다른데 開化云云合理哉 개화를 운운하여 합리화하단 말가! 如不可無開化事 어쩔 수 없이 개화를 해야 할 판국이라면 宜開吾化化他開 마땅히 내 먼저 하고 남을 개화할지니라. 『毅菴集』권3. 철저한 화이사상(華夷思想)으로 무장된 도학자 의암이었지만 개화를 운위하는 중국의 처사를 그대로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대세가 개화를 하여야만 할 형편이 되더라도 내 먼저 개화를 하고 남을 개화하여야 한다는 그의 주체적인 마음 바탕이 잘 나타나 있다. 인용 목차 서사한시 한시미학 16~17세기 한시사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의병항쟁은 대체로 그 항쟁을 전개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에 따라 이를 전후 2차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의 반포에 반발하여 기의(起義)한 것이 그 전기의 항쟁이며, 을사늑약을 전후한 시기에 국권수호를 위하여 거의(擧義)한 것이 그 후기의 항쟁이다. 그러나 의병장 중에는 초기의 의병항쟁을 주도한 척사파 지도자들과 같이 명망이 있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을사늑약 이후의 의병항쟁에 참가한 의병장들은 그 대부분이 지방의 궁유(窮儒)가 아니면 상민(常民) 계층에 속하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적이나 시문ㆍ잡저와 같은 문학적인 업적은 그 대부분이 처음부터 없었거나 아니면 처음에 있었더라도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우국의 시편이나 임절시를 전하고 있는 의병장으로..
의병항쟁은 대체로 그 항쟁을 전개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에 따라 이를 전후 2차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의 반포에 반발하여 기의(起義)한 것이 그 전기의 항쟁이며, 을사늑약을 전후한 시기에 국권수호를 위하여 거의(擧義)한 것이 그 후기의 항쟁이다. 그러나 의병장 중에는 초기의 의병항쟁을 주도한 척사파 지도자들과 같이 명망이 있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을사늑약 이후의 의병항쟁에 참가한 의병장들은 그 대부분이 지방의 궁유(窮儒)가 아니면 상민(常民) 계층에 속하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적이나 시문ㆍ잡저와 같은 문학적인 업적은 그 대부분이 처음부터 없었거나 아니면 처음에 있었더라도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우국의 시편이나 임절시를 전하고 있는 의병장으로..
이상에서 창강(滄江)ㆍ영재(寧齋)ㆍ수당(修堂)ㆍ매천(梅泉) 등 구한말의 대표적인 문인들의 우국한시와 ‘사조(詞藻)’를 일별(一瞥)해 보았다. 여기서 이들 한시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적인 사실을 간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무력한 왕권에 대한 불신이다. 절대적 왕권에 대한 정면적인 항거를 피하고 있는 대신에, 역대의 위인 열사들의 추감(追感)을 통하여 문자 그대로 무인지경의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네 사람의 시인이 한결 같이 충무공을 추상한 시작을 남기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위기의식이 미만(彌滿)해 오던 구한말 사회의 불안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망국으로 줄달음질치고 있는 국가의 운명에 대하여 그들의 투철한 시대정신은 이를 담시..
「황성신문(皇城新聞)」은 1899년 11월부터 사조란을 두고 있으나 우국의 충정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는 학회의 활동범위를 기호지방으로 한정한 데도 이유가 있겠지만 사림의 우국 시편은 거의 볼 수 없고 다만 김윤식의 친일(親日) 차운시(次韻詩)가 독판을 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비교적 많은 우국시를 발표하고 있는 것이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와 「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이다.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의 사조란은 우선 문예란으로서의 본래 목적에 충실하고 있는 느낌이다. 선현들의 시작 가운데서도 명편을 골라 수록하고 있으며 당대 명사들의 작품도 다양하게 게재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물량에 비하..
사조(詞藻)라면 일반적으로 한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을 비롯하여 한말의 학술지에 마련된 사조란(詞藻欄) 즉 한시 발표에 제공된 문예란을 말한다. 학술지로는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를 비롯하여 「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 「대한학회월보(大韓學會月報)」, 「서우회보(西友會報)」,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 등이 그 중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대한협회는 그 성격상 대한자강회를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서우회보(西友會報)」의 발행기관인 서우학회는 뒤에 서북학회로 통합되었다.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는 창간된 것이 1910년이므로 한말의 학술지로서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가지지 못했다. 그..
이기(李沂, 1848 헌종14~1909 융희3, 자 伯曾, 호 海鶴)는 한말의 우국지사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민중계몽과 항일운동에 진력하였으며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려다가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유형원ㆍ정약용(丁若鏞) 등의 학통을 계승하여 당시의 전제ㆍ관제 등 개혁의 필요성과 방법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우국상시(憂國傷時)로 일관한 삶처럼 이기(李沂)의 시문(詩文) 또한 시국에 대한 비분강개와 국가에 대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주조를 이루었다. 그의 우국시(憂國詩) 중에서 「삼호사(三虎詞)」와 「독황성보(讀皇城報)」가 특히 유명하다. 「삼호사(三虎詞)」는 세 마리의 호랑이가 싸우는 모습을 통하여 정부가 일본과의 싸움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피력하였으며, 「독황성보(..
『대동시선(大東詩選)』에 「박충민서원견허비영흥(朴忠愍書院遣墟碑永興」(五絶), 「문영관신명유음(聞瀛館新命有吟)」(七律), 「증손침랑(贈孫寢郞)」(七律) 등이 선발되어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삼전도탄(三田渡嘆)」을 보기로 한다. 昔時三田渡 有碑屹如植 그 옛날 삼전도에는 비석이 심은 듯 높이 솟았었지. 今日三田渡 有碑沙中踣 오늘날 삼전도에는 비석이 모래 속에 묻혀있네.. 踣豈非更快 所嗟由人逼 비석 묻힌 것은 통쾌하지만은 한스러운 것은 사람들에게 핍박받는 것이라네. 舊恨新憤難洗盡 옛날의 한과 오늘의 분함은 씻기 어렵지만 江流日夜無終極 밤낮으로 강물은 쉬임없이 흐르네. 願言執殳爲前駈 원하는 바는, 몽둥이 잡고 선구가 되어 北踏燕雲東日域 북으로 연운과 남으로 일본을 짓밟고 싶다.. 歸來斲得丈餘珉 돌아..
이남규(李南珪, 1855 철종6~1907 융희1, 자 元八, 호 修堂)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ㆍ석루(石樓) 이경전(李慶全)의 예손(裔孫)이다. 북인(北人)의 중심세력에서 일탈하여 남인(南人)으로 색목(色目)을 옮기는 동안, 그 가문은 지배벌열(支配閥閱)에서 소외되었으며, 그 뒤로 그들은 문장(文章)과 풍절(風節)을 닦는 사대부의 수업으로 일관해 왔다. 이러한 가학(家學)의 전통에 의해 체질화된 수당(修堂)의 사대부적 사고는 격동하는 구한말의 정치적 와중에서도 불굴의 주체적 의지를 다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28세가 되던 해, 즉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던 해에 문과에 올라 갑오(甲午)ㆍ을미(乙未)의 격동 속에서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ㆍ동부승지(同副承旨)ㆍ영흥부사(永興府使)의 벼슬을 거치..
다음은 매천(梅泉)이 1896년에 지은 「벽파진(碧波津)」의 마지막 부분이다. 萬死何曾戰功計 만 번을 죽은들 전공(戰功)을 생각했던가? 此心要使武臣知 충무공 이 마음 무신(武臣)들은 배워야지. 至今夷舶經行地 오랑캐 배 드나드는 지금에 와서야 咋指鳴梁指古碑 혓바닥 깨물며 명량(鳴梁)의 옛 비석 가리키네. 『梅泉集』 권2 벽파진은 충무공이 병사들을 조련하던 곳인데 개항을 했답시고 뻔질나게 드나드는 왜놈들 보기가 역겨웠던지 왜적을 무찌르던 그때의 감격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 것이다. 다음은 1898년 작 「의녀논개비(義妓論介碑)」이다. 楓川渡口水猶香 풍천의 강물이 하 그리 향기로와 濯我須眉拜義娘 내 수염 깨끗이 씻고 의낭(義娘)에게 절하노라. 蕙質何由能殺賊 연약한 여자 몸으로 왜적을 죽이다니 藁砧已自使編行 남..
매천(梅泉)은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800년대 후반에서부터 1910년에 이르는 구한말의 격동기에 가장 많은 우국시를 남기고 간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이다. 「충무공구선가(忠武公龜船歌)」, 「벽파진(碧波津)」, 「의기논개비(義妓論介碑)」를 차례로 보인다. 二百年來地毬綻 충무공 가신지 200년에 나라가 열리더니 輪舶東行焰韜日 화륜선이 오락가락 불꽃이 해를 가리네. 熨平震土虎入羊 조용한 양(羊)의 나라에 호랑이가 쳐들어와 火器掀天殺機發 화기(火器)가 하늘을 찔러 살기가 등등하구나. 『梅泉集』 권1. 二百年來地毬綻 충무공 가신지 200년에 나라가 열리더니 輪舶東行焰韜日 화륜선이 오락가락 불꽃이 해를 가리네. 熨平震土虎入羊 조용한 양(羊)의 나라에 호랑이가 쳐들어와 火器掀天殺機發 화기(火器)가 하늘을 찔..
소중화(小中華)를 우습게 알던 창강(滄江)이긴 하였지만 이국(異國)의 하늘 아래서 뒤돌아보아지는 망향(望鄕)의 서정은 조국의 운명이 날로 급박해지자 쉽사리 우국의 충정(衷情)으로 변질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비보를 뒤늦게 전해 듣고 지은 「추감본국시월지사(追感本國十月之事)」의 감회가 그것이다. 爐底死灰心共冷 내 마음 싸늘하기 화로 밑에 죽은 재라, 天涯芳草首難回 이국 땅 하늘 아래 고국 보기 어렵도다. 蘭成識字知何用 유란성(庾蘭成)은 글을 배워 어디 쓰려 하였던고? 空賦江南一段哀 공연히 애강남부(哀江南賦)를 지어 슬픈 정만 더하는구나. 『소호당집(韶護堂集)』권4 그 마지막 부분을 보인 것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사실상 국권은 일제의 장중(掌中)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돌아다볼 ..
그러나 이들 가운데서도 한말의 소단(騷壇)에 가장 많은 우국의 시편을 남긴 것은 역시 황현(黃玹)과 김택영(金澤榮)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이건창(李建昌)의 발천(發薦)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지만, 후일 세 사람은 나란히 가장 가까운 문우로서 성장하여 한문학의 종장에 섬광을 발했다. 다만 이건창(李建昌)은 광무 2년에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순국의 기회나 우국시를 제작할 결정적인 계기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김택영(金澤榮)과 황현(黃玹)은 오래도록 살아남아, 급변하는 역사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김택영(金澤榮)은 개성 출신이다. 때문에 중앙 정부에 대한 개성 시민의 불신 감정은 김택영(金澤榮)에게 있어서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의 모화적(慕華的)인 체질도 따지고 보면 소중화(小..
그러나 일본의 책동은 1897년 조선왕조를 대한제국으로 변신하게 하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이르러 사실상 국권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를 전후하여 다시 후기 의병항쟁이 전개되고 빗발치는 토적소(討賊疏)가 사림(士林)에서 터져나왔다. 그러나 산림(山林)에서 몸을 일으킨 의병의 항쟁으로는 기울어진 조국의 운명을 붙들어잡는 데까지는 미칠 수 없었다. 그나마 총칼을 들고 의병항쟁에도 나아가지 못하는 이 시기의 문인들은, 또는 선비로서 또는 지사(志士)로서 스스로 그들의 변신을 강요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가능했던 일은 우국의 노래를 제조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시인들은 한말의 상황이 난망(亂亡)에 이르기 앞서부터, 공통적으로 인물이 없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지나간 역사에 눈물 지으..
2. 우국(憂國)의 시인(詩人) 한말(韓末)이라는 역사 단계는 정확하게 말해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성립에서부터 비롯하며, 그것은 근대화라는 시대적 임무 수행이 강조되었던 시기라는 점에서 일단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일찍이 한국사가 체험한 어떠한 역사 단계에 있어서도 서구의 ‘근대’를 스스로 시험한 일이 없는 전통사회의 보편적 질서에서 볼 때, ‘개국(開國)=개화(開化)’를 근대화의 결정론으로 파악한 인식체계는 한국의 근대사로 하여금 그 시발(始發)에서부터 망국의 민족사로 얼룩지게 한 것임에 틀림없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형식적으로는 국호가 ‘조선(朝鮮)’에서 ‘한(韓)’으로 바뀌고, 왕(제후)의 나라가 황제의 나라로 격상한 것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이것을 주도한 세력이 침략적인 제국주의 일본이..
그러나 박규수(朴珪壽)는 시작(詩作)에서도 역시 민풍(民風)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바 있어 죽지사(竹枝詞)를 제작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강양죽지사(江陽竹枝詞)」 13수 중 제5수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秋入江陽水不波 가을이 강물에 들어도 물결은 일어나지 않고 凌空石塔皓嵯峨 구름 뚫은 석탑은 허옇게 우뚝 섰네. 一林疎雨紅流路 온 숲에 성긴 비 내리는 홍류동(紅流洞) 길에 誰復騎牛訪脫蓑 누가 다시 소 타고 올 것이며 도롱이를 벗을까? 강양(江陽)은 합천(陜川)의 옛이름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속리산(俗離山)에 들어가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을 방문하고 돌아갈 때, 다음 해 8월 보름에 다시 해인사(海印寺)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기약한 그 날에 연일 비가 왔지만 남명이 비를 무릅쓰고 ..
박규수(朴珪壽, 1807 순조7~1877 고종14, 자 桓卿ㆍ瓛卿ㆍ鼎卿, 호 瓛齋ㆍ桓齋ㆍ桓齋居士)는 구한말의 대표적인 개화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다.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그는, 북학파가 주창했던 실사구시의 학풍에 눈떠 중농주의적인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정약용(丁若鏞)과 서유구(徐有榘)를 사사하기도 하였다. 그가 일생을 통해서 배웠던 학자로는 박지원(朴趾源)ㆍ정약용(丁若鏞)ㆍ서유구(徐有榘)ㆍ김매순(金邁淳)ㆍ조종영(趙鐘永)ㆍ 홍석주(洪奭周)ㆍ윤정현(尹定鉉) 등이 있고, 남병철(南秉哲)ㆍ김영작(金永爵)ㆍ김상현(金尙鉉)ㆍ신응조(申應朝)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문하(門下)에서 김옥균(金玉均)ㆍ박영효(朴泳孝)ㆍ김윤식(金允植)ㆍ유길준(兪吉濬) 등 개화사상의 선구자들이 배출되었다. 1848년(헌종14)에 증광시(增..
그러나, 황현(黃玹)의 시는 초기작 가운데 수작(秀作)이 많으며, 그 가운데서도 그의 뛰어난 사실적인 수법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종어요(種菸謠)」다. 작품을 보기로 한다. 大雨一夜川流洪 밤새도록 큰 비 내려 냇물이 불고 霮䨴三日因濛濛 사흘 내내 안개비로 눈 앞이 어둑하네.. 秧務如焚村無傭 모내기에 바빠서 마을에 일꾼이 없는데 何人獨向山雲中 어떤 이가 홀로 산 속으로 가는가? 雉驚格格叢莾翻 꿩은 놀라 꺽꺽대며 덤불에 날고 蓬藟萬朶眞珠紅 넝쿨 딸기는 떨기마다 진주처럼 붉네. 一擔就安松根上 솔 등걸에 한 짐 벗어 쉬고 있노라니 猫耳戢戢靑筠籠 담배 모는 옹기종기 소쿠리에 푸르네. 石崖坡坨不辨畝 돌 벼랑이 험준하여 밭이랑은 희미하고 瓦壟千疊迷溝縫 들쭉날쭉 논두렁에 도랑물이 혼미하네. 無袖布襦半膝褌..
여기서는 황현(黃玹)의 마지막 우국(憂國) 시작(詩作)이자 대표작으로 널리 인구에 회자되어온 「절명시(絶命詩)」 4수 가운데 셋째 수를 보기로 한다. 鳥獸哀鳴海岳嚬 새 짐승 슬피 울고 산하(山河)도 찡그리니 槿花世界已沈淪 무궁화 이 강산이 속절없이 망했구나. 秋燈掩卷懷千古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되새겨 보니 難作人間識字人 글 배운 선비 구실 참으로 어렵구나.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그 울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지은 작품으로 황현(黃玹)의 의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황현(黃玹)은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나라로부터 쌀 한톨 얻어 먹은 은혜도 입은 일이 없지만,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비분강개하던 지사(志士)다. 이 작품에서 그는 나라가 일본에 의하여 패망당한 비극을 조수(鳥..
황현(黃玹, 1855 철종6~1910, 자 雲卿, 호 梅泉)은 전남 광양의 한미한 시골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구한말의 급박한 정세 속에서 가장 많은 우국시를 남긴 당시 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소년 시절부터 청운(靑雲)의 꿈을 간직했으나 34세에 겨우 진사(進士)가 됐으며, 이것도 상경(上京)한 지 10여년 만에 얻은 결과였다. 창강(滄江)과 마찬가지로 이건창(李建昌)의 발천(發薦)으로 서울의 문인들에게 알려지면서 시명(詩名)이 드러났으며 이를 계기로 이건창(李建昌)ㆍ김택영(金澤榮) 등과 문우(文友)의 교분을 다지게 되었다. 그는 문보다는 시에서 빼어났으며, 특히 절구에서 보여준 굳센 힘은 강직한 그의 성품과 함께 타고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백면서생(白面書生) 시절의 시 가운데 수작(秀..
그러나 김택영(金澤榮) 역시 나라가 망해가는 비운의 시절을 그냥 지나치지 아니하고 매천(梅泉)과 더불어 많은 우국시(憂國詩)를 남기고 있다. 을사조약을 눈앞에 두고 망명선(亡命船)에 올랐을 때 술회한 「구일발선작(九日發船作)」과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추감본국십월지사(追感本國十月之事)」 등이 그러한 것 중의 하나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다시 살필 것이며, 다만 그의 우국 시편이자 대표작이 되기도 한 「문의병장안중근보국수사(聞義兵將安重根報國讐事)」 중 첫째 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平安壯士目雙張 평안도 장사가 두 눈을 부릅뜨고 快殺邦讎似殺羊 양새끼 죽이듯이 나라의 원수 죽였도다. 未死得聞消息好 죽기 전에 좋은 소식 하도 반가와 狂歌亂舞菊花傍 국화꽃 옆에 서서 미친듯이 춤추네. 이 시..
김택영(金澤榮, 1850 철종1~1927, 자 于霖, 호 滄江ㆍ韶濩堂)은 개성출신이다. 개성은 정치적으로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정권에서 소외된 지역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상업도시로 각광을 받은 곳이다. 창강(滄江)의 가계는 무반(武班) 출신의 상인 집안이다. 그는 일찍이 과거로 발신(發身)할 것을 꿈꾸었지만 41세에야 겨우 진사(進士)가 되었고 편사국(編史局) 주사(主事)ㆍ중추원서기관(中樞院書記官) 겸내각기록국사적과장(兼內閣記錄局史籍課長) 등을 지냈으나 곧 귀향하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문학세계의 이면에는 배척받은 개성 출신으로서의 비감이 도사리고 있으며 소중화(小中華)를 우습게 여기던 그의 모화(慕華)의 감정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그 해 그는 끝내 조국을 등지고..
이 중에서 평담한 이건창(李建昌)의 시세계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정주남지일(定州南至日)」과 친구를 그리며 읊은 「천마산회우림(天磨山懷于霖)」을 보기로 한다. 一陽南至日 萬里北行人 해가 동지에 이른 날, 만리 북으로 가는 나그네. 忽見梅花發 猶疑漢水春 문득 매화꽃 피어 있어 한강에 봄이 왔나 의심나게 하네. 한겨울 동지(冬至)날, 정주에서 머물고 있을 때 홀연히 매화가 피어난 것을 보고 지은 시이다. 매화는 이른 봄에 피는 꽃이다. 그런데 한겨울 북변(北邊)에 매화가 핀 것을 보고 지금쯤 한강가에도 봄이 왔을 것이라는 심사를 소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에서도 그의 아기(雅氣)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다음은 「천마산회우림(天磨山懷于霖)」이다. 嶻櫱天磨鎭 蕭條蜀莫州 가파른 천마진(개성)이요, 쓸쓸한 ..
이건창(李建昌, 1852 철종3~1898 광무2, 자 鳳藻ㆍ鳳朝, 호 寧齋, 堂號 明美堂)은 강화도 사곡(沙谷)에서 태어났다. 피난지(避難地) 수도(首都)라는 치욕스런 역사의 현장인 강화도는 이건창(李建昌)의 가문(家門)에 있어서는 신임옥사(辛壬獄事)와 나주벽서(羅州壁書) 사건으로 이어지는 정쟁(政爭)으로부터의 피신처이기도 하였으며 양명학(陽明學)이라는 가학(家學)을 이룩한 고장이기도 하다. 이건창(李建昌)은 병인양요(丙寅洋擾)에 조부(祖父) 시원(是遠)의 순절(殉節)을 계기로 강화별시(江華別試)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급제하였다. 그 뒤 벼슬이 참판에 이르는 동안 47년의 생애 가운데 태반을 묘당(廟堂)에서 보냈지만, 관인으로서는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오히려 문명(文名)으로 영채(英彩)를 발하였다. 그..
그는 이건창(李建昌)의 추천에 힘입어 김택영(金澤榮)ㆍ황현(黃玹)과 함께 한말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히었거니와, 비분과 강개가 서린 격조 높은 율시를 많이 남겼다. 그는 그의 문집 외에도 『동문자모분해(東文子母分解)』, 『용학해(庸學解)』, 『손무자주평(孫武子注評)』등의 저서를 남기었으며 그의 시작(詩作) 중에는 『대동시선(大東詩選)』에 「통제영(統制營)」, 「수춘도중(壽春道中)」, 「도중문안유감(道中聞雁有感)」(이상 七絶) 「희차란루경동위당념운(喜次蘭淚京同韋堂拈韻)」(五律), 「쌍계방장(雙溪方丈)」, 「경사우림해사(京師遇林海史)」, 「김노포동구요집일범루(金老圃東耈邀集一帆樓)」, 「제주망양정각기정용산건조기주(濟州望洋亭却寄鄭蓉山健朝記注)」(이상 七律) 등이 뽑혀 있으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쌍계방장(雙..
강위(姜瑋, 1820 순조20~1884 고종21, 자 仲武ㆍ堯章ㆍ韋玉, 호 秋琴ㆍ慈屺ㆍ聽秋閣ㆍ古懁堂)의 가계는 조선중기 이후 문관직과 멀어지기 시작하여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이미 무반신분(武班身分)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는 벼슬이 차단된 신분적 한계로 말미암아 일찍이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학문과 문학에 전념하게 되었지만, 잠시 과거에 뜻을 두고 공부할 시절에는 영의정을 지냈던 정원용(鄭元容)의 집에 기숙하며 그의 손자였던 건조(健朝)와 함께 수학하였다. 또한 당시 이단으로 지목받던 민노행(閔魯行)을 찾아가 4년간 수학하였으며, 민노행의 유언에 따라 제주도에 귀양가 있던 김정희(金正喜)에게도 5년 남짓을 배웠다. 그러나 민노행과 김정희(金正喜)는 모두 고증학에 매료된 대가였으므로, 강위도 또한 고증학..
9. 한시(漢詩) 문학(文學)의 종장(終章) 1. 한말(韓末)의 사대가(四大家) 구한말(舊韓末)은 1800년대 후반부터 1910년대에 이르는 4,50년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전의 전통시대와 그 이후의 일제 식민지 시대와의 불연속상에 놓인 불행한 시기였으며 또한 전통질서의 극복과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침탈을 부정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이 주어진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과정에서 지성인들의 대응 방식은 크게 개화(開化), 위정척사(衛正斥邪), 동학(東學) 등의 상이한 활동을 통해 민족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문학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시대적 당위는 그대로 표출되었다. 1890년대의 「독립신문(獨立新聞)」(1896)이나 「황성신문(皇城新聞)」(1898)에 게재..
다음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한선(寒蟬)」이다. 이에서 과시한 그의 오만(傲慢)이 바로 그의 높은 풍도(風度)임을 알게 해 준다. 寒蟬曉脫去 殼在靑山中 쓰르라미가 새벽에 빠져 나가고 껍질이 청산에 남아 있다네. 樵童摘歸視 天下生秋風 초동이 주워서 집에 돌아와 보니 천하에 갑자기 가을 바람이 일어나네. 원제(原題)는 「탈각(脫殼)」이지만 「한선(寒蟬)」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초동적귀시(樵童摘歸視)”는 전혀 꾸밈을 고려하지 않은 무잡(蕪雜)과 오만(傲慢)을 그대로 보인 것이다. 이는 우리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러나 “천하생추풍(天下生秋風)”에 이르러 대인(大人)같은 그의 풍도(風度)를 절감케 한다. 이러한 기세(氣勢)로 사소한 불평음(不平音)을 초극하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이다. 인용 목차 ..
황오(黃五, ?~?, 호 綠此)는 그를 알게 해주는 어떤 문자(文字)에도 그의 신분이 밝혀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분명히 사회로부터 대접받지 못한 신분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최영년(崔永年)이 쓴 「황녹차선생시집서(黃綠此先生詩集序)」에 의하면, 황오(黃五)가 불가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가 없다[先生佛緣出世, 卓犖不羈, 寄托高風]. 두둥실 거침없이 내닫기만 한 그의 삶의 방식은 그가 이룩한 시의 세계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소재가 광범할 뿐 아니라 꾸미는 일을 도무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세고 거칠고 힘찰 뿐이다. 다음의 작품을 보기로 한다. 小姑十四大於余아가씨는 열네살 나보다 큰데學得秋千飛鷰如그네를 배워서 제비처럼 나네.隔窓未敢高聲語창문 너머 감히 큰 소리로 말 못..
한편 변종운(卞鍾運)은 「지기설(知己說)」을 펴 지기(知己)의 의미를 ‘지아심(知我心)’으로 푸는 등 지기(知己)를 구하는 시를 많이 남기고 있다. 다음의 시에서 보듯이, 자신의 우울한 심정을 토로하여 신분적 한계를 초월한 이해를 원하였음에도 이것이 불가능한 현실을 한탄하고 있다. 「이이의(而已矣)」를 보인다. 我有數卷書 나에게 몇권의 책이 있건만 恨不同學鄒魯諸君子 공맹(孔孟) 제군자(諸君子)를 배우지 못해 한스럽네. 我有一壺酒 나에게 한 병 술이 있건만 恨不同飮燕趙悲歌士 연(燕)과 조(趙) 슬픈 노래 주인공 함께 마시지 못함이 서러워라. 一未能遂平生志 평생의 뜻 하나도 이룬 것 없는데 白髮數莖而已矣 백발만 몇 가닥 났을 뿐이네. 忽然一陣芭蕉葉上雨 홀연히 파초잎에 한바탕 비가 듣더니 胡爲乎滿庭樹木秋聲起 ..
변종운(卞鍾運, 1790 정조14~1866 고종3, 자 朋七, 호 肅欠齋)은 역관 출신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이유원(李裕元)ㆍ윤정현(尹定鉉)ㆍ김공철(金公轍) 등과 깊은 친분을 맺고, 이들이 사행(使行) 길에 오를 때에는 반드시 수행했다 한다. 이유원은 변종운(卞鍾運)의 시를 가리켜 “고상하고 예스러우며 편벽됨을 피했다[高古避僻].”이라 하였고, 이재원은 “성정이 발하는 것에 수식의 화려함을 힘쓰지 않았고 음운과 격조는 고상하길 바라지 않아도 스스로 고상했다[性情所發, 不務藻華, 其音韻格調不冀高而自高].”라 하였는데, 이러한 평가는 바로 변종운(卞鍾運)의 시가 대체로 평이하면서도 격조가 높음을 가리킨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그는 그의 불평음(不平音)을 토로할 때에도 그 분위기는 안온하며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장지완(張之琬)의 시작들은 『침우당집(沈雨堂集)』과 『비연상초(斐然箱抄)』로 정리되어 있는데, 그 대부분이 기행시로 채워져 있다. 인정세태(人情世態)를 진솔하게 묘파한 「남전도중기견(南甸途中記見)」 중 두 수를 보기로 한다. 官道城邊矗石危 도성 주변의 관도에는 쌓아놓은 돌이 위태롭고 粉墻新塑女郞祠 채색한 담장에는 새로 지은 성황당이 있네. 行人漫把金錢擲 지나는 사람들은 어지러이 쇠돈을 던지고 枯樹枝頭五色絲 마른 나무 가지 끝에는 오색실이 걸렸네. 山木蒼蒼鷄犬鳴 푸르른 숲에 개닭이 짖는데 拄筇斜日問前程 저물녘 지팡이 짚고 갈길을 묻네. 村中少女太羞澁 마을의 소녀는 너무 부끄러워 半掩紅裙背面行 붉은 치마로 반쯤 가린 채 등 돌리고 가네. 장지완(張之琬)이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단촐하게 그린 8수 가운데..
장지완(張之琬, 1806 순조6~1858 철종9, 자 玉山, 호 枕雨堂)은 4대에 걸친 무변(武弁) 가계에서 율과(律科) 출신으로 변전(變轉)한 중인(中人)으로 처음에는 아버지 덕주(德冑)에게서 수학하였으나 뒤에 이학서(李鶴棲)의 문인이 되었고, 김초암(金初菴)과 홍직필(洪直弼)을 찾아가 성리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장지완(張之琬)의 생애를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전이나 행장 등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역정은 알 수 없으나,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고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기술관(技術官)의 고뇌를 우회적으로 토로한 술회시(述懷詩)가 산견(散見)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인간경애(人間境涯)를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그가 문학에 바친 열성은 비연시사(斐然詩社)의 결성과 『풍요삼선(風謠三選)』의 간행에 주동적인..
현기(玄錡, 1809 순조9~1860 철종11, 자 信汝, 호 希菴)는 역관 출신이지만 시작(詩作)에 뛰어나 당시의 사람들이 시신(詩神)이라 불렀다. 그는 출신신분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길이 없자 가난과 음주와 시작으로 평생을 보냈으며, 서로 세한붕(歲寒朋)으로 일컫던 정지윤(鄭芝潤) 이 죽자 풍악산에 들어가 스스로 추담선자(秋潭禪子)라 하고 선문(禪門)에 의탁하였다. 많지 않은 그의 시작들이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에 의해 수집되어, 현재 『희암시략(希菴詩略)』에 34수가 전하고 있다. 현기의 시세계는, 스스로 ‘기(奇)’를 좇지 않았지만 시상이 기발한 것이 특색이다. 「차동파운시매은(次東坡韻示梅隱)」을 보기로 한다. 飢時噉飯飽時眠 배고플 때 밥먹고 배부르면 잠드니 一粟人間寄渺然 창해에 좁쌀 같은..
정지윤(鄭芝潤, 1808 순조8~1858 철종9, 자 景顔, 호 壽銅)은 성품이 경개(耿介)하고 얽매이기 싫어하며 ‘벽오기굴(僻奧奇堀)’하였으나 문자(文字)에 매우 총명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기이하게 여겨 정지윤(鄭芝潤)을 머물게 하여 소장한 도사(圖史)를 읽게 했다 한다. 최성환(崔瑆煥)이 그의 시고(詩藁)를 수집하여 하원시초(夏園詩抄) 1권을 간행하였다. 정지윤(鄭芝潤)의 문학론은 장지완(張之琬)과 마찬가지로 성령론적이다. 성령이 한번 붙으면 붓끝을 다할 따름이지 시체(時體)나 신풍(新風)을 좇거나 섬세한 것을 다투지 않는다 性靈一付央毫尖, 不遂時新競巧纖. 『夏園詩草」, 「丁未臘月」 其一 여기서 보이는 성령 역시 인간이 지닌 영묘한 정신작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결국 ..
8. 하대부(下大夫)의 방향(芳香)과 불평음(不平音) 조선후기에 이르러 시단에도 새로운 경향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이른바 위항인(委巷人)의 진출이 상당한 세력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사실이다. 특히 하대부(下大夫) 일등지인(一等之人)으로 자처한 의(醫)ㆍ역(譯) 및 율과(律科) 출신의 중인들은 스스로 그들을 구속하고 있는 신분의 굴레에서 일탈할 수 없는 한계를 감수하면서, 독자적인 시세계를 향유하는데 성공한 시인들도 있다. 물론 역관 출신의 시인 가운데에도 회화시로 이름 높은 이상적(李尙迪)과 같이 이미 이들의 시작이 사대부의 권역(圈域)에 함께 자리할 수 있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시로써 자신의 이름을 신후(身後)에까지 남기는 것으로 자족(自足)하는 위항시인(委巷詩人..
8. 하대부(下大夫)의 방향(芳香)과 불평음(不平音) 조선후기에 이르러 시단에도 새로운 경향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이른바 위항인(委巷人)의 진출이 상당한 세력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사실이다. 특히 하대부(下大夫) 일등지인(一等之人)으로 자처한 의(醫)ㆍ역(譯) 및 율과(律科) 출신의 중인들은 스스로 그들을 구속하고 있는 신분의 굴레에서 일탈할 수 없는 한계를 감수하면서, 독자적인 시세계를 향유하는데 성공한 시인들도 있다. 물론 역관 출신의 시인 가운데에도 회화시로 이름 높은 이상적(李尙迪)과 같이 이미 이들의 시작이 사대부의 권역(圈域)에 함께 자리할 수 있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시로써 자신의 이름을 신후(身後)에까지 남기는 것으로 자족(自足)하는 위항시인(委巷詩人..
대체로 추사(秋史)의 시는 일상적인 삶, 또는 일상적 삶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환경에 대하여 사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주종(主宗)을 이루고 있지만, 역으로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을 통하여 삶의 아픔을 진솔하게 드러내 보인 것도 있다. 아내의 죽음을 애도한 도망시(悼亡詩)가 그러한 것 중에 하나다. 다음이 그의 「도망(悼亡)」이다. 那將月姥訟冥司 어떻게 월하노인 불러 저승에 호소하여 來世夫妻易地爲 내세에는 그대와 내 자리 바꾸어 태어날까? 我死君生千里外 내가 죽고 그대는 천 리 밖에 살아서 使君知我此心悲 그대로 하여금 이 슬픔 알게 했으면, 이 작품은 도망시(悼亡詩) 가운데서도 절조(絶調)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제주도 배소(配所)에서 부인의 부음을 받고 쓴 것이다. 유배지에서 처의 죽음을 당하는 극한 상..
현재 『대동시선』에 선발된 작품만 하더라도 추사(秋史)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취우(驟雨)」 등 15편에 이르고 있는데, 이 가운데 「취우(驟雨)」를 보이면 아래와 같다. 樹樹薰風葉欲齊 나무마다 더운 바람 불어 잎은 가지런하려 하고 正濃黑雨數峰西 봉우리 서쪽에서 먹구름 밀려온다. 小蛙一種靑於艾 쑥보다 더 푸르른 개구리 한 마리, 跳上蕉梢效鵲啼 파초 가지에 뛰어올라 까치처럼 울고 있다. 추사(秋史) 시세계의 한 경향은 일상적인 경험에서 만나는 대상들을 매우 자세하게 관찰하여 치밀하게 묘사하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이는 그가 학문적으로 고증학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관찰과 실험의식이 시작(詩作)에도 자연스럽게 적용된 것이라 하겠다. 여름날의 소나기 오는 풍경을 그린 이 시의 장처(長處)는 바로 전구(轉句)와 결구..
조선후기 소단(騷壇)이 ‘모의(模擬)’를 배척하고 창신(創新)을 선호하여 개성적인 시세계를 강조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추사(秋史)와 자하(紫霞) 역시 선인(先人)의 시세계와는 다르게 새로운 경지를 열어보여야 할 임무가 그들에게 주어져 있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추사(秋史)의 경우, 실제로 ‘법고(法古)’보다는 ‘창신(創新)’에보다 관심을 보인 연암(燕巖) 및 후사가(後四家)와는 다르게 법고(法古)와 창신(創新)의 균형을 중시하였으므로, 후사가(後四家)가 주장한 창신(創新)에의 일방적 경도현상이 가져올 문제점을 예상하고 있었다.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시를 평한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 것을 배우지 않고 마음대로 법도를 버리는 것은 자기만을 말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만약 ..
김정희(金正喜)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훈척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노경(魯敬)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던 백부 노영(魯永)의 양자로 자라났다. 왕가와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 가문의 위세가 대단했던 것은 사실이나 24세에 생원시에 일등입제(一等入第)한 뒤 동지(冬至) 겸(兼) 사은부사(謝恩副使) 김노경(金魯敬)의 연행(燕行)에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수행, 연경(燕京)에서 당대 최고의 석학 완원(阮元)과 옹방강(翁方綱)을 만나 사제지의(師弟之義)를 맺은 일은 김정희(金正喜)의 일생에 일대전환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이 시기 연경의 학풍은 고증학의 수준이 난숙기에 이르러 종래 경학의 보조학문으로 치부되던 금석학, 사학, 문자학, 음운학, 지리학 등이 개별적 학문으로 진척되는 ..
김정희(金正喜, 1786 정조10~1856 철종7, 자 元春, 호 秋史ㆍ阮堂ㆍ禮堂ㆍ詩庵ㆍ果坡ㆍ老果) 역시 신위(申緯)와 마찬가지로 시서화(詩書畵) 모두에 발군(拔群)의 역량을 과시했다. 그는 시인, 서도가, 화가, 정치가, 경학자로서 그 어느 분야에서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남을 과시했다. 실제로 학문과 예술이 상호 융화되어 그 폭이 끝간 데 없이 호한(浩澣)할 뿐만 아니라, 교유관계도 역시 그 폭이 넓었다. 당시 청대의 석학으로 추숭받던 옹방강(翁方綱)ㆍ완원(阮元)으로부터 고증학(考證學)과 금석학(金石學) 및 박학다식(博學多識)의 계몽(啓蒙)을 입은 바 있고, 일찌기 스승으로 삼았던 박제가(朴齊家)로부터 시서화(詩書畵)의 역량을 전수받았는가 하면, 당대에 명망 높은 신위(申緯)ㆍ조인영(趙寅永)ㆍ권돈..
자하 신위(申緯)의 또 다른 명편으로 절찬을 받은 박연(朴淵)」을 보기로 한다. 俯棧盤盤下 回看所歷懸 잔교를 굽어보며 구불구불 내려와 돌아보니 지나온 길 매달려 있구나. 巖飛山拔地 溪立瀑垂天 바위가 날아 온 듯 산은 땅에서 솟았고 시내가 서있는 듯 폭포는 하늘에 드리웠네. 空樂自生聽 衆喧遂寂然 공중의 음악소리 자생으로 들리는데 뭇 사람 떠드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네. 方知昨宿處 幽絶白雲巓 바야흐로 알겠노니 어제밤 자던 곳이 그윽한 곳 흰 구름 걸린 산마루였음을. 이 작품은 물론 개성에 있는 박연폭포를 보고 읊은 것이다. 자하는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자하의 시는 그림과 같은 정경이 갖추어져 있다. 보통 솜씨로는 그릴 수도 없는 그림을 율문(律文)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신위(申緯)의 이 시와는 달리 의활(意豁)한 송시(宋詩)의 진수를 한눈으로 확인케 하는 「서경차정지상운(西京次鄭知常韻)」을 들어본다. 急管催觴離思多 빠른 곡조 권하는 잔 떠날 생각 많은데 不成沈醉不成歌 깊이 취하지도 아니하고 노래도 되지 않네. 天生江水西流去 천생으로 강물은 서쪽으로만 흘러 不爲情人東倒波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동쪽으로 물길을 돌리지 못하네. 정지상(鄭知常)의 「송인(送人)」에 차운한 시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 가장 빼어난 시편이라 칭송되는 작품이다. 만당풍의 유려한 정지상(鄭知常)의 원시와는 대조적으로, 이 시는 송시(宋詩)의 깊은 듯이 물밑에서 일렁이고 있다. 기구(起句)와 승구(承句)는 빠른 피리 소리가 이별을 재촉하는 상황에 어울리게 시의 호흡 역시 빠르고 격하다. 그러나 전구(..
『대동시선에 선발된 것만으로도 「춘일산거(春日山居)」(五絶), 「차운하상낙엽시(次韻荷裳落葉詩」, 「사월팔일원정절구(四月八日園亭絶句)」, 「녹파잡기제사(綠波雜記題辭)」(이상 七絶), 「우게검물원작(雨憩檢勿院作)」, 「박연(朴淵)」(이상 五律), 「전춘(餞春)」, 「임정견한(林亭遣閒)」, 「회양(淮陽)」, 「회녕령(會寧嶺)」, 「옥선동(玉仙洞)」, 「초하견흥(初夏遣興)」, 「고열행(苦熱行)」 二首(이상 七律), 「추우탄(秋雨歎)」(五古) 등 10여편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신위(申緯)의 「춘일산거(春日山居)」는 다음과 같다. 縣市人心惡 山村物性良 도시의 인심은 나쁘지만 산촌의 물성은 아름다워라. 茅柴四三屋 雞犬畫羲皇 초가집 서너채 모여 있는 곳, 개도 닭도 모두 태평성대라네. 변조(變調)로 알려진 자하 ..
신위(申緯)의 시세계는 그 기조(基調)가 사실적(寫實的)이라는 사실 외에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다. 그는 교유관계에 있어서도 신분계층이나 당색(黨色)을 초월하여 광범하게 사람을 사귀고 있어 이것이 묘하게도 그의 시세계와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신위(申緯)는 그렇게 다양한 경향을 보이면서 그토록 많은 시편을 제작하고서도 정작 자신의 시관(詩觀)을 밝히는 마땅한 산문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에서 김택영(金澤榮)이 진술한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염려(豔麗)할 수 있고 소야(疎野)할 수 있으며 변환(變幻)할 수 있고 돈실(敦實)할 수 있으며 졸박(拙樸)할 수 있고 호방(豪放)할 수 있으며 평이(平易)할 수 있고 기험(崎險)할 수 있으며 천만 가..
신위(申緯)에게 영향을 준 또다른 국내의 문인으로는 후사가(後四家)를 비롯하여 이광려(李匡呂)를 들 수 있다. 중국 시인의 경우에는 국내의 여느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많은 시인들을 학시(學詩)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택영(金澤榮)이 「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시는 소식을 스승으로 삼고 곁으론 서릉과 왕유와 육유의 사이에 출입하였다. 其詩, 蘇子膽爲師, 旁出入于徐陵王摩詰陸務觀之間 소식(蘇軾) 외에도 서릉(徐陵)ㆍ왕유(王維)ㆍ육유(陸游)의 영향을 받았음을 살필 수 있다. 또 그의 문집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황정견(黃庭堅)ㆍ원호문(元好問)ㆍ왕사정(王士禎) 등의 영향도 배제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후사가가 신위(申緯)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실은 「..
신위(申緯, 1769 영조45~1845 헌종11, 자 漢叟, 호 紫霞ㆍ警修堂)는 시(詩)ㆍ서(書)ㆍ화(畵) 삼절(三絶)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799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의 을과(乙科)에 급제하면서 환로에 올랐고, 10여년을 한직(閑職)에 머물다가 1812년에는 서장관 자격으로 연행하여 당대의 대학자로 알려진 청(淸)의 옹방강(翁方綱)을 만나 교유하였다. 이후 병조참판(兵曹參知)ㆍ병조참판(兵曹參判)ㆍ강화부 유수(江華府 留守)ㆍ도승지(都承旨)ㆍ이조참판(吏曹參判)ㆍ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차례로 지냈지만, 몇 차례의 유배와 탄핵을 받는 과정을 겪으면서 순탄하지 않은 일생을 보냈다. 그의 시편은 김택영이 600여수를 정선한 『신자하시집(申紫霞詩集)』이 간행되어 전하고 있다. 그의 문학활동에 직접적인 영향..
7. 추사(秋史)와 자하(紫霞)의 변조(變調) 당시(唐詩)를 선호하는 우리나라 시인들의 기본 성향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시인들이 실제로 제작한 한시작품의 대부분은 시의 뜻이 넓고 깊은 개념(槪念)의 시(詩)를 써 왔으며,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성향의 시작(詩作)으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이룩하여 우리나라 한시의 높은 수준을 과시한 시인이 배출되기도 했다. 그 사람이 곧 신위(申緯)이며, 이 시인에게 직접ㆍ간접으로 영향을 준 또다른 시인이 김정희(金正喜)다. 김정희(金正喜)는 신위(申緯)보다 17년 연하이지만, 신위 시의 창작에 직접 조언(助言)을 하는 등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위의 시적 성향은 율조(律調)를 중요시하는 당시(..
한편 이서구(李書九) 역시 우리나라 전래의 시가에도 관심이 있었던 바, 그가 이보온(李普溫)에게 탄핵당한 뒤 영평(永平)에 은거할 시기에 내놓은 『호산음고(湖山吟稿)』에 서(序)를 쓴 유득공(柳得恭)의 다음 기록, “出其所著, 湖山吟稿, 一卷以示之, 率皆漁歌樵唱.”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에 의하면 그 역시 우리의 풍속과 민간 시가에 관심을 보인 것이 사실로 드러난다. 실제로 그의 시편들 중에 「수표교절구(水標橋絶句)」, 「구마(驅馬)」, 「누원도중(樓院道中)」, 「우부이금언(偶賦二禽言)」 등은 이를 입증해주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한마디로 그의 시작(詩作) 수법은 객관적 경물을 묘사하는 데 승하였다.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이서구(李書九)의 시세계가 왕유(王維)의 자연시와 한정(閑情)에 닮아가는 모..
이서구(李書九, 1754 영조30~1825 순조25, 자 洛瑞, 호 惕齋ㆍ薑山ㆍ席帽山人) 역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의 인연으로 후세에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ㆍ박제가(朴齊家)와 더불어 후사가(後四家)로 일컬어지고 있지만, 그가 속한 사회적 신분이나 그가 향유한 문학세계는 이들과 함께 묶여지지 않는다. 그는 본관이 전주이며, 중종(中宗)의 7자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宣祖)의 12자인 인흥군(仁興君)의 후손이다. 나머지 삼가(三家)와 달리 적출(嫡出)인 그는 20대에 백탑(白塔)을 중심으로 시활동을 벌였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관료로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몇 차례의 유배 생활을 감수해야만 했던 그는 사환(仕宦) 중에도 늘 은거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저술로는 『척재집(惕齋集)』과 ..
후대의 시선집에 전하는 시편으로는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서경(西京」(七絶), 「백운대(白雲臺)」(七絶), 「북한문수사(北漢文殊寺)」(七律), 「서회(書懷)」(七律) 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그가 젊은 날의 정열로 쓴 죽지사(竹枝詞) 「서경(西京」은 다음과 같다. 春城花落碧莎齊 봄날 성에 꽃 지고 잔디는 무성한데 終古芳魂此地棲 옛부터 고운 넋들 여기에 살고 있네. 何限人間情勝語 인간들의 정겨운 말 어찌 끝이 있으리오만, 死猶求溺浣紗溪 죽더라도 완사계(完紗溪)에서 빠져죽고 싶다 하네. 원제는 「평양잡절송이무관(平壤雜絶送李懋官)」으로 되어 있지만, 이 또한 이덕무(李德懋)의 「선연동(嬋娟洞)」과 유득공(柳得恭) 「서경잡절(西京雜絶)」과 마찬가지로 기생(妓生)들의 무덤이 있는 선연동(嬋娟洞)을 읊조린 것이..
박제가(朴齊家, 1750 영조26~1805 순조5, 자 次修ㆍ在先ㆍ修其, 호 楚亭ㆍ貞蕤ㆍ葦杭道人)는 본관이 밀양이며, 승지(承旨) 평(坪)의 서자(庶子)이다. 소년시절부터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나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19세를 전후하여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 등과 교유하였고, 1776년에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시편이 올라 청(淸)의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庭筠)으로부터 호평(好評)을 받았다. 1779년에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ㆍ서리수(徐履修) 등과 초대 규장각 검서관에 배수되었으며, 1778년, 1790년(두 차례), 1801년의 연행을 통하여 대륙의 문물을 직접 목도하고 가까이 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연행에서 청(淸)의 석학인 이조원..
유득공(柳得恭, 1748 영조24~1807 순조7, 자 惠風ㆍ惠南, 호 泠齋ㆍ泠庵ㆍ古芸堂)은 당대 서자는 아니지만, 서류가계(庶流家系)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증조(曾祖) 이래로 일문(一門)의 사회적 진출에는 일정한 제한이 가해진 것으로 보인다. 소년시절부터 홍대용(洪大容)과 박지원(朴趾源) 문하(門下)에 출입하면서 이덕무(李德懋)ㆍ박제가(朴齊家)ㆍ이서구(李書九)와 교유하였고, 20대에는 개경(開京)ㆍ서경(西京)ㆍ공주(公州)ㆍ부여(扶餘) 등을 유람하며 민간의 인정물태(人情物態)를 두루 체감할 수 있었던 경험이 곧바로 「송도잡절(松都雜絶)」, 「서경잡절(西京雜絶)」, 「웅주잡절(熊州雜絶)」 등의 죽지사(竹枝詞)를 낳게 하였음은 물론,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한 역사서의 저술이나 31세에 지은 「이십..
다음엔 체험적인 사랑의 시 「효발연안(曉發延安)」을 본다. 不已霜鷄郡舍東 객사(客舍) 동쪽 새벽닭 울음 그치지 않고 殘星配月耿垂空 새벽별은 달을 짝해 하늘에 반짝인다. 蹄聲笠影矇矓野 말굽소리 갓 그림자 몽롱한 들판에 行踏閨人片夢中 꿈 속에서 아가씨를 밟으며 가네. 『대동시선(大東詩選)』 권7. 기생(妓生)과 부인(婦人)을 제외하고는 이성간(異性間)의 애정(愛情) 교감(交感)이 이루어질 수 없는 전통사회에서 시인이 염정시를 제작할 때에는 허구적인 추체험(抽體驗)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때 시인은 작중의 화자와 작자가 동일시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장치를 사용한다. 그 가운데 가장 흔하게 이용되고 있는 것이 악부(樂府)의 틀을 빌리는 일이며 다음으로는 작자가 시적 정황에 개입하는 것을 억제하느라..
다음은 죽지사(竹枝詞) 「선연동(嬋娟洞)」이다. 嬋娟洞艸賽羅裙 선연동의 풀들은 비단치마보다 뛰어나 剩粉殘香暗古墳 남은 분, 향기가 옛무덤에 그윽하네. 現在紅娘休詑豔 현세의 아낙네들 아름다움 자랑하지 마라, 此中無數舊如君 이 속에 무수한 사람 옛날엔 그대 같았네. 『대동시선(大東詩選)』 권7. 공교롭게도 유득공(柳得恭)ㆍ박제가(朴齊家)도 「서경잡절(西京雜絶)」을 통하여 꼭같이 ‘선연동(嬋娟洞)’을 읊조리고 있으며 이들의 자유분방한 사랑에의 정감(情感)이 죽지사(竹枝詞)에 응축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진솔이야말로 사대부의 시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며, ‘선연동초새라군(嬋娟洞草賽羅裙)과 같은 기교는 이덕무(李德懋)의 비범(非凡)이 아니고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다. 인용 목차 서사한시 한시미학 16..
그래서 스스로 평범(平凡)을 거부한 이덕무(李德懋)는 그의 안광(眼光)에 들어오는 일체(一切)의 대상들을 결코 범상(凡常)한 완상물(玩賞物)로 만들지 않았다. 비상(非常)한 진기물(珍奇物)로 제조한 것이 그의 시세계에서 돋보이는 부분들이다. 진솔한 농촌의 생활 풍경을 그린 경물시(景物詩), 지방의 풍물을 사랑으로 바라본 죽지사(竹枝詞), 체험적인 염정시(艷情詩)의 세계를 차례로 보기로 한다. 먼저 「제전사(題田舍)」를 보인다. 荳殼堆邊細逕分 콩깍지 더미 곁으로 오솔길은 나뉘어 있고 紅暾稍遍散牛群 아침햇살 퍼지자 소떼들은 흩어진다. 娟靑欲染秋來岫 가을 든 산등성이는 고운 청색으로 물들려 하고 秀潔堪餐霽後雲 비 갠 뒤 구름은 너무 정결하여 먹음직하네. 葦影幡幡奴鴈駭 갈대 그늘 흔들리자 새끼 기러기 놀라고 禾..
이덕무(李德懋, 1741 영조17~1793 정조17, 자 懋官, 호 炯庵ㆍ雅亭ㆍ靑莊官ㆍ嬰處ㆍ東方一士)는 멀리 정종대왕(定宗大王)의 별자(別子)인 무림군(茂林君)의 후예(後裔)이지만, 부(父) 성호(聖浩)와 모(母) 반남박씨(潘南朴氏) 사이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이덕무(李德懋)의 시세계는 법고(法古)와 창신(創新)을 결합하고 진심(眞心)과 진상(眞象)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지원(朴趾源)이 「영처시고서(嬰處詩稿序)」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덕무(李德懋)는 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 등의 옛시인에게 얽매일 까닭이 없다고 하였으며, 그래서 그는 진솔한 생활모습과 정서를 담은 풍속시를 많이 남겼으며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 찬 죽지사..
한편, 연암(燕巖)이 산문에 극승(極勝)하였다는 점은 유명한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에서 운문(韻文) 부분인 명(銘)이 생략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반증되지만, 결코 그의 시편이 가볍지 않은 것은 『대동시선』에 「필운대간행화(弼雲臺看杏花)」, 「회원수원(懷袁隨園)」, 「담원팔영 선삼(澹園八咏 選三)」, 「원조대경(元朝對鏡)」, 「산행(山行)」, 「강거(江居)」, 「노숙구련성(露宿九連城)」, 「도압록강회망용만성(渡鴨綠江回望龍灣城)」, 「체우통원보(滯雨通遠堡)」, 「도중사청(道中乍晴)」, 「만조숙인(輓趙淑人)」 등 10여편이 선발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의 기발한 시재(詩才)가 돋보이는 「연암억선형(燕巖憶先兄)」을 보기로 한다. 我兄顔髮曾誰似 우리 형님 모습이 누구와 비슷했던가? 每憶先君看..
박지원(朴趾源, 1737 영조13~1805 순조5, 자 仲美, 호 燕巖)은 명문가(名門家)인 반남박씨(潘南朴氏)의 후예임에도 불구하고, 과업(科業)에 특별한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30세에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에게서 지구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접하였거니와, 노론(老論) 벽파(僻派)로 몰려 당대의 실력자인 홍국영(洪國榮)을 피해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하기도 하였고, 삼종형(三從兄)인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44세에 연행(燕行)을 하기도 하였다. 말년(末年)에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가 온포(蘊抱)를 펼 수 있었던 것은 문장(文章)이다. 율문(律文)보다는 산문(散文)에 승(勝)하여서, 「허생전(許生傳)」ㆍ「양반전(兩班傳)」ㆍ「호질(虎叱)」 등은 그의 기지(機智)와 풍자정신(諷刺精..
박지원(朴趾源)과 이서구(李書九)는 현벌가(懸閥家) 태생(胎生)이면서도 당대의 사류(士類)와는 남다른 길을 걸었다. 박지원(朴趾源)은 반남박씨(潘南朴氏)의 명문 출생이면서도 과거를 통한 관료진출을 미루고 홍대용(洪大容)과 사귀면서 북학론(北學論)을 창도(倡導)하였다. 반골적(反骨的)ㆍ현실비판적 기질이 강했던 그는 한때 노론벽파(老論僻派)의 몰락으로 당대 실력자인 홍국영(洪國榮)의 미움을 사서 황해도(黃海道)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피세(避世)하기도 하였거니와, 44세에 삼종형인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연행(燕行)을 다녀와서 유명한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저술했다. 따라서 연암(燕巖)이 후사가(後四家)와 내밀(內密)한 관계를 맺게 된 이유는 그의 진보적 사상이 서얼출신인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
연암(燕巖)과 후사가(後四家)의 시세계는 그 창작정신에서 보면,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이상으로 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정작 그들이 실천한 것은 ‘창신(創新)’에 기울고 있다. 이들이 이처럼 특징적인 시세계를 형성하게 된 데는 그 설명 가능한 이유들이 여러 가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사실은 이들에게 신분상의 제약과 학풍의 특이성이 배후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ㆍ박제가(朴齊家)는 서얼출신의 신분적 제약 때문에 ‘한품서용(限品敍用)’ 의 규제에 걸려 청요직(淸要職)으로의 진출이 어려웠고, 농공상업(農工商業)으로 영달할 길도 차단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당대의 사대부 지식인들의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청(淸)의 사조(..
6. 후사가(後四家)와 죽지사(竹枝詞) 천기(天機)ㆍ진기(眞機)ㆍ본색(本色)ㆍ진색(眞色) 등을 강조하면서 진솔(眞率)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해야 한다고 주장한 삼연(三淵)의 문학론은, 홍세태(洪世泰)를 필두(筆頭)로 한 위항시인(委巷詩人)들과 정선(鄭敾)ㆍ이병연(李秉淵)ㆍ조영석(趙榮祏) 등의 백악사단(白岳詞壇)으로 이어지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왕성한 활동을 벌인 연암(燕巖)과 후사가(後四家)는 국내적으로는 삼연(三淵)의 문학론을 잇고 있다. 백악산(白岳山) 밑을 중심거점으로 동호인 그룹을 형성했던 동국진경산수화(東國眞景山水畵)의 거장 정선(鄭敾), 동국진경풍속화(東國眞景風俗畵)의 대가 조영석(趙榮祏), 동국진체(東國眞體)로 유명한 이병연(李秉淵) 등이 똑같이 백악..
『대동시선』에 선발된 그의 작품은 「출계상득일절(出溪上得一絶)」, 「함종도중(咸從道中)」(이상 七絶), 「야연린사 송윤경도 제홍 출재홍원(夜讌隣舍 送尹景道 濟弘 出宰洪原)」, 「차이두신태승운(次李斗臣台升韻)」(이상 七律), 「동야영회(冬夜詠懷)」(五古) 등이다. 이 중 「함종도중(咸從道中)」을 보이면 아래와 같다. 磴道千回並磵斜 돌길은 구불구불 개울과 함께 빗겼는데 馬蹄磊落蹋崩沙 뚜벅뚜벅 말발자욱 모래톱을 허무네. 崖縫紫菊無人管 언덕 위 자주빛 국화 향내 맡는 이 없지만 自向寒天盡意花 찬 하늘 바라보며 흐드러지게 피었네. 실제로 그의 문장은 각박하리만큼 그 소리가 맑다. 그래서 이것이 도리어 흠으로 잡히기도 하여, 심재(深齋) 조긍섭(曹兢燮)은 김매순(金邁淳)의 문장에 쇠기(衰氣)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김매순(金邁淳, 1776 정조1 ~1840 헌종6, 자 德叟, 호 臺山) 역시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와 같이 ‘대연문장(臺淵文章)’으로 일컬어지는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문장가이다. 세도가벌인 안동김씨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김상헌(金尙憲)ㆍ김수항(金壽恒)ㆍ김창협(金昌協)ㆍ김창흡(金昌翕)으로 이어지는 가계만 보아도 그의 문장이 어디서 온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김매순(金邁淳) 자신이 “경학과 문장이 합하여 하나가 된 사람으로는 오직 우리 집안의 여러 조상이 그러하였을 뿐[經學文章合而爲一者, 惟吾家諸祖爲然. 「答族姪士心」]”이므로 이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한 말이 이를 입증해준다. 20세의 나이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오른 그는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발되는 영광을 누리면서 예문관(藝文館)ㆍ홍문관(弘文館..
경세가로서, 문장가로서의 이름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시인으로서의 홍석주(洪奭周)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는 것이 옳은 평가가 될 것이다. 그의 시편 중에서 『대동시선』에 수록된 가작은 「차영명루한운(次永明樓寒韻)」(七絶), 「장서도중(長湍途中)」, 「강경포(江鏡浦)」(이상 五律), 「장림(長林)」, 「차상사운(次上使韻)」, 「추일등루차포옹운(秋日登樓次圃翁韻)」(이상 七律), 「강여사(姜女祠)」(五古) 등 7편에 이르고 있는데, 이 가운데 「장림(長林)」을 보이면 아래와 같다. 蕭蕭寒雨正催詩 쓸쓸한 찬 비 정히 시(詩)를 재촉하는데 十里平林又一奇 십리(十里)에 뻗은 숲 또 하나 기경(奇景)이로다. 濃翠連綿秋色裏 짙은 녹음은 가을 빛 속에 이어져 있고 半江隱見夕陽時 강물은 은은히 노을질 때 나타나네.. 輕舟渺渺..
홍석주(洪奭周, 1774 영조50~1842 헌종8, 자 成伯, 호 淵泉)는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과 함께 ‘연대문장(臺淵文章)’으로 이름을 얻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문장가이다. 선조의 부마였던 홍계원(洪桂元) 이후 꾸준히 고관대작(高官大爵)의 영예를 누린 그의 가계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더욱 융성하게 되었으며, 아우 길주(吉周)와 현주(顯周) 등도 현달(顯達)하였다. 김창협(金昌協)ㆍ박지원(朴趾源)의 뒤를 이어 한 장석(韓章錫)ㆍ김윤식(金允植)ㆍ이건창(李建昌)ㆍ김택영(金澤榮) 등에 이르는 중간단계에서 고문가(古文家)의 전통을 빛낸 큰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풍산세고(豊山世稿)』를 간행하면서 “우리 집안이 문학을 전수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 십팔대인데 그 성취한 바의 깊이와 높이를 우리 자손들이..
『대동시선』에는 「연광정(練光亭)」 2수(七絶), 「기자묘(箕子廟)」, 「설청(雪晴」(이상 五律), 「견민(遣悶)」, 「백문(白門)」(이상 七律), 「송만덕환탐라(送萬德還耽羅)」(七古) 등이 대표작으로 선발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 「견민(遣悶)」을 보이면 아래와 같다. 蕭條錦樹落天霜 쓸쓸한 나무에 찬 서리 내리고 爲客江關日月長 강남(江南)의 나그네 신세 세월은 느리기만. 千佛風雲供坐臥 천불산(千佛山)의 풍운(風雲)은 앉거나 누워 있고 五山冰雪變衣裳 오산(五山)의 빙설(氷雪)은 입은 옷을 바꾼다. 衰顔賓對蒼生哭 쇠한 얼굴로 백성의 고통 보고만 있으니 往歲虛隨粉署香 지난 세월 벼슬살이 헛되이 하였구나. 薄暮柴門扶杖立 저물녘 사립문에 지팡이 짚고 서서 愁看荒艸野茫茫 아득한 거친 들판 시름겹게 바라본다. 시름을..
이가환(李家煥, 1742 영조18~1801 순조1, 자 廷藻, 호 錦帶ㆍ貞軒)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개척한 이익(李瀷)의 종손(從孫)이며, 엄격한 학자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이용휴(李用休)의 아들이다. 남인(南人) 가계(家系)의 학풍을 체감하며 성장할 수 있었던 그는 환경과,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李承薰)이 그의 외숙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가 천주교에 관심을 가질 조건도 함께 곁들여 있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적으로 교유한 사람들 중에는 정약용(丁若鏞)ㆍ이벽(李檗)ㆍ권철신(權哲伸) 등 남인계 천주교 신자가 많았다. 일찍이 박람강기(博覽强記)로 이름을 얻은 그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가학(家學)에 숙달하여 실학자적 소양과 문장력을 겸비하였으나 그의 명성에 걸맞는 저술이 없는 것이 흠으..
그러므로 시인으로서의 다산(茶山)은 그 평가 기준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대동시선』에 선발된 그의 작품으로는 「적중송죽리김학사리교귀경(謫中送竹里金學士履喬歸京)」, 「능허대(凌虛臺)」, 「우중양기(雨中兩妓)」(이상 七律), 「강천반청도(江天半晴圖)」, 「적성촌사(積城村舍)」(이상 七古)가 있지만, 여기서는 경세가(經世家)와 시인(詩人)의 면모를 함께 찾아볼 수 있는 「탐진농가(耽津農歌)」 넷째 수를 보인다. 穮蔉從來不用鋤 김매고 북돋우기 호미를 쓰지 않고 手搴稂莠亦須除 잡초도 두 손으로 잠깐동안 뽑아내네. 那將赤脚蜞鍼血 어떻게 맨다리에 거머리가 빨아낸 피로 添繪銀臺遞奏書 그림을 그려서 은대에 보낼까. 「탐진농가(耽津農歌)」는 정약용(丁若鏞)이 1801년 신유교난(辛酉敎難)에 연루되어 ..
그래서 다산(茶山)은 그의 문학세계에서 있어서도 전통적인 소인묵객(騷人墨客)과는 스스로 구별되는 특징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2,500여 편에 이르는 방대한 시편(詩篇)들을 제작하고 있지만, 시세계의 장처(長處)를 확인케 하는 것은, 그의 관풍(觀風) 의지가 무겁게 실려 있는 고조장편(古調長篇)이며 산문(散文)의 세계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문장가들이 즐겨 제작한 서발(序跋)ㆍ기(記)ㆍ비지(碑誌) 형식의 문장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정조(正祖)의 문체순정(文體醇正)에 대하여 일찍이 패관소품체(稗官小品體)를 부정했던 다산(茶山)은 허구적인 산문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지원(朴趾源)처럼 오늘날의 기준에 걸맞는 문학적 산문을 양산할 수 없었던 반면 실증성과 실용성을 겨냥한 수많은 산문들을 저술해내었다 할 것이..
5. 경세가(經世家)의 시편(詩篇) 실천적인 유교이념으로 무장된 학자들은 물론, 사장(詞章)으로 이름을 얻은 문장가(文章家)들도 마땅히 경술(經術)로써 명군(明君)을 보좌해야만 하며 문장(文章)으로 경국(經國)의 대업(大業)에 이바지하여야 한다. 정약용(丁若鏞)은 그가 제작한 「탐진농가(耽津農歌)」 등을 통하여 농촌 백성들의 소박한 삶과 고난의 현실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으며, 홍석주(洪奭周)ㆍ김매순(金邁淳)도 고문(古文) 문장가(文章家)의 체질에 걸맞게 화평전실(和平典實)한 시작(詩作)으로 경세(經世)의 일념(一念)을 잃지 않고 있다. 정약용(丁若鏞, 1762 영조38~1836 헌종2, 初字 歸農, 자 美鏞ㆍ頌甫, 호 茶山ㆍ三眉ㆍ與猶堂ㆍ俟菴)은 진주목사였던 재원(載遠)의 4남 2녀 중 제 4남으로 경기도..
박윤묵(朴允默, 1771 영조47~1849 철종1, 자 士執, 호 存齋)은 정이조(鄭彛祚)의 문인으로 규장각서리(奎章閣書吏)와 평신첨사(平薪僉使)를 지냈다. 그의 시는 간결하고 정밀하여 당인(唐人)의 풍격(風格)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우중배대학사석재윤공묘(雨中拜大學士碩齋尹公墓)」를 보기로 한다. 三十年間九度過삼십년 사이에 아홉 번을 지나는데法華山色尙嵯峨법화산(法華山) 모습은 아직도 우뚝하다.松深古道靈風起소나무 우거진 옛 길엔 시원한 바람 불고花落荒原暮雨多꽃 떨어진 거친 들엔 저녁비 내린다.楸舍簡編猶剩馥개암나무 집 책에는 남은 향기 가득하고梣灘樵牧亦悲歌침탄에 초동은 슬픈 노래 부른다.忽聞蜀魄啼無盡갑자기 저렇게 울어대는 두견새 소리 들리니可柰枝頭怨血何나무가지 위에 뿌린 피는 어찌 하겠는가. 박윤묵(朴允默..
천수경(千壽慶, ? ~1818 순조18), 자 君善, 호 松石園ㆍ松石道人)은 일정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서당의 훈도(訓導)로 근근히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천수경(千壽慶)은 시에 능했으며, 또한 자신의 생활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그의 시에서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자족적인 삶을 구가하며 초연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도처에 투영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일섭원(日涉園)」이다. 堆霞復拳石 上有松樹閒 쌓인 노을 거듭 돌을 휘감고 그 위에 소나무 한가히 서 있다. 誅茅寔爲此 柴扉溪上關 띠풀 베고 집을 지은 것은 이 때문이니 사립문은 시냇가에 닫혀 있다네. 軒窓容我膝 林木怡我顔 처마끝 창가에 이 몸 하나 앉을 만하고 숲의 나무는 내 얼굴 편안하게 해준다. 有時看白雲 鎭日..
다음에 보이는 정민교(鄭敏僑)의 「확귀(獲歸)」에는, 시인이 스스로 농부로 등장하고 있어 경이로움 이상으로 감동을 준다. 九月寒霜至 南鴻稍稍飛 구월에 찬 서리 내리고 남녘으로 기러기 날아오기 시작하네. 我收水田稻 妻織木綿衣 나는 논에 나락을 걷고 아내는 목면 옷 짓네. 白酒須多釀 黃花自不稀 흰 술은 모름지기 많이 빚어야 하는 법, 국화는 스스로 많이도 피었네. 於焉聊可隱 且作百年歸 이 곳이야말로 이 몸 숨길 만 하니 백년 뒤에 돌아가리라. 『寒泉遺稿』권1 형식이나 취재의 신기(新奇)를 구하지 아니하고 직접적인 생활 체험을 평담하게 얽어낸 진솔이야말로 위항시에서만 볼 수 있는 진기(珍奇) 그것이 아닐 수 없다. 도연명(陶淵明)ㆍ백거이(白居易) 등이 과시한 전원시(田園詩)를 이으면서도 하천민(下賤民)의 생활..
정민교(鄭敏僑, 1697 숙종23~1731 영조7, 자 季通, 호 寒泉)는 정래교(鄭來僑)의 막내 동생으로, 일찍이 사예(詞藝)로써 진사에 올랐으나 낙척자방(落拓自放)하다가 일찍 죽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형에 앞서 『소대풍요』에 이름을 전하고 있다. 그 사람됨이 자못 소탕하고 구속되는 바가 없었으며, 술을 좋아하고 멀리 여행하기를 좋아하였다 한다. 이들 형제는 삼연(三淵)을 추숭하며 삼연(三淵)의 문하생과 어울려 함께 시작활동을 하는 한편, 홍세태(洪世泰)를 비롯한 여타의 위항시인들과 함께 백사(白社)를 결성하는 등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하였다. 특히 정민교(鄭敏僑)는 여행을 즐겼기 때문에 기행시가 많은데, 오원(吳瑗)은 이에 대하여 “여행의 뇌소(牢騷)를 읊은 것은 모두 정이 진실되고 시어가 새로우며 ..
정래교(鄭來僑, 1681 숙종7~1757 영조33, 자 潤卿, 호 浣巖)는 그의 아우 정민교(鄭敏僑)와 더불어 시문에 뛰어나 당대 사대부들의 추중을 받았던 위항인이다. 1705년 역관으로 통신사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갔다가 그 곳에서 시명(詩名)을 날리기도 하였다. 사대부 문인(文人)으로는 김창협(金昌協)ㆍ김창흡(金昌翕)을 따랐으며, 위항인(委巷人)으로는 홍세태(洪世泰)를 좇아 교유하였다. 정래교(鄭來僑)의 시를 두고 이천보(李天輔)는 “그의 시는 소탕연양(疏湯演瀁)하여 시인의 태도를 얻었는데, 가끔 성조(聲調)가 강개(慷慨)하여 연조(燕趙)의 격축지사(擊筑之士)가 위 아래로 치고받는 것과 같은 점이 있다. 대개 그 연원은 홍세태(洪世泰)에게서 나온 것이니, 천기(天機)로부터 얻음이 또한 많다[其爲詩也疏..
차좌일(車佐一, 1755 영조31~1809 순조9, 자 叔章, 호 四名子)은 차천로(車天輅)의 후손으로 서화(書畵)는 물론 음율, 사예(射藝)에도 능했던 시인이다. 홍양호(洪良浩)ㆍ정약용(丁若鏞) 등과 시로써 사귀었으며, 잠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을 살기도 하였으나 송석원 시사의 일원으로 풍류를 즐긴 일생이었다. 경외(境外)의 사림(詞林)으로 자처한 그였지만, 그는 끝내 “세세생생에 다시는 이 땅에 태어나지 않겠다[哭曰: 世世生生, 不願爲本邦人也. (行狀)]”고 통곡하였다 한다. 차좌일(車佐一)의 「산양역(山陽驛)」은 그러한 그의 삶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落日山陽驛 歸程問牧童 산양역에 해가 질 무렵, 갈 길을 목동에게 묻는다.一身無煖氣 四面有寒風 온 몸에 온기라곤 없는데 사방에는 찬 바람이 분..
한편 장혼(張混)은 사대부시인들의 시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체시(異體詩)를 즐기기도 하였다. 육언시(六言詩)나 모시집구(毛詩集句) 등이 그러한 것이며, 특히 그는 사언시(四言詩)에 힘을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그의 고체(古體)는 “한위(漢魏)의 여향(餘響)이 있다[古體深得漢魏餘響. (李書九)]”거나 “금세(今世)의 시가 아니다[足下之文, 最長於詩, 詩尤長于古體 …… 亦知足下之詩, 非今世詩也. 『淵泉集』권17]”라는 평을 받게 된 것으로 보이며, 또 이 때문에 당대인의 눈에 그의 루백천언(累百千言)이 글자마다 새롭게 보였을 것이다[百千字字新. 『存齋集』 권14]. 이러한 장혼(張混)의 이체시(異體詩)에 대한 관심은 다음의 「군선우지효도체(君善偶至效陶體)」에도 잘 드러나 있다. 羗有人兮 不娶不宦..
장혼(張混, 1759 영조35~1828 순조28, 자 元一, 호 而已广ㆍ空空子)은 규장각서리(奎章閣書吏)를 지낸 인물로, 시에 능하여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그를 좇는 위항의 무리도 많았다 한다. 고대(古代)로부터 명말(明末)까지의 중국 역대 시를 넓게 선발하여 『시종(詩宗)』을 편찬하기도 하고, 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장혼(張混) 문하의 위항시인들이 다음 시기의 위항문학을 선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시사적 위치는 더욱 중요하다 하겠다. 장혼(張混)은 모든 것을 체관한 인생관, 생활관을 말해주는 이이엄(而已广)이라는 그의 자호(自號)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인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의 방식대로 자오하였으며 오직 ‘문학지교(文學之交)’ 만이 영세(永世)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장혼(張混)의 ..
고시언(高時彦)의 「월야(月夜)」는 위의 시와는 대조적으로 한 눈에 신분적 자괴감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해준다. 短裙徘徊小院東 베옷차림으로 작은 뜰을 서성이다가 驚悟一葉乍金風 떨어지는 오동잎 하나에 잠깐 사이 가을임을 깨닫네. 孤城月桂蟲吟裏 달이 걸린 외로운 성은 풀벌레 소리 속에 있고 萬樹秋涵露氣中 가을 빛에 젖은 나무들은 이슬 기운 가운데 있네. 今古紛紜何日了 예나 지금이나 분주한 세상일 언제나 끝나랴? 乾坤遼闊此途窮 하늘과 땅은 멀고 넓은데 이곳은 길이 막혔구나. 家貧無恤還憂國 가난한 집도 돌보지 못하면서 도리어 나라를 근심하니 自笑愚衷膝室同 스스로 이 내 마음 칠실과 같음을 비웃노라. 『소대풍요(昭代風謠)』 「별집(別集)」에는 제명(題名)이 「칠일초납냥수하(七日初納涼樹下)」로 되어 있다. 입의(立..
고시언(高時彦, 1671 현종12~1734 영조10, 호 省齋, 자 國美)은 여러 차례 중국에 다녀온 한어역관(漢語譯官)으로, 역시 시에 뛰어났으며 경사(經史)에도 뛰어났다 한다. 채팽윤과 더불어 위항시의 집성인 『소대풍요(昭代風謠)』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지만 간행(刊行)을 보지 못하고 죽어, 그의 시편이 『소대풍요(昭代風謠)』「별집(別集)」에 수록되어 있다. 「소대풍요권수(昭代風謠卷首)」의 제사(題辭)를 통하여 그는 “『동문선』과 더불어 서로 표리를 이루어 한 시대의 풍아를 찬란히 감상할 수 있다. 귀천의 나은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하늘이 재주를 빌려주어 시를 잘 읊조리는 것은 한 가지다[與東文選相表裏, 一代風雅彬可賞, 貴賤分岐是人爲, 天假善鳴同一響]”라 하여 신분에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위항인의 문..
이언진(李彦瑱, 1740 영조16~1766 영조42, 자 虞裳, 호 松穆館)은 홍세태(洪世泰)ㆍ이상적(李尙迪)ㆍ정지윤(鄭芝潤)과 더불어 역관사가(譯官四家)로 일컬어지는 시인으로 영조 때의 시단에서 혜성같은 존재로 평가된 바 있다. 특히 그는 24세에 일본에 통역관으로 따라가 그곳에서 시명을 떨침으로써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시재에도 불구하고 일찍 요절함으로써 천재시인으로서의 안타까움을 더욱 절실하게 돋보여 평가되기도 하여, 박지원(朴趾源) 등 여러 문인들에게서 입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문집(文集) 『송목관집(松穆館集)』 이 전하고 있다. 이언진(李彦瑱)의 시의 특징은 전통적인 한시의 대부분이 칠언 일색임에 비해, 이언진(李彦瑱)은 파격적으로 육언절구(六言絶句)를 즐겨 짓고 있음을 지적..
여기서는 조수삼(趙秀三)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초기작 「선죽교(善竹橋)」를 보인다. 波咽橋根幽草沒 물결은 다리에 부딛혀 울고 풀들은 물 속에 잠기는데 先生於此乃成仁 선생은 이곳에서 인(仁)을 이루셨다. 乾坤弊盡丹心在 세상은 다하여도 단심(丹心)은 남아있고 風雨磨來碧血新 비바람 몰아쳐도 선혈(鮮血)은 새롭다. 縱道武王扶義士 무왕(武王)이 의사(義士)를 부축하였다 말들하지만 未聞文相作遺民 문상(文相)이 유민(遺民) 되었단 말 듣지 못했네. 無情有恨荒碑濕 무정(無情)한 한(恨)은 거친 비석에 젖어있어 不待龜頭墮淚人 비석 앞에서 굳이 눈물 흘릴 필요 없다네. 선죽교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죽임을 당한 곳으로 알려진 유명한 사적이다. 조수삼(趙秀三)은 이 선죽교를 지나며 정몽주(鄭夢周)의 충절을 회상하고 ..
4. 위항인(委巷人)의 선명(善鳴) 서울의 서대문 밖 인왕산 옥계 기슭에 천수경(千壽慶)ㆍ차좌일(車佐一)ㆍ최북(崔北)ㆍ장혼(張混)ㆍ왕태(王太) 등이 모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송석원(松石園)이란 편액을 걸고 시회를 결성하였다. 이 시사에서 삼사십명 때로는 백여명 씩 모여서 시를 읊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실로 위항문학의 전성기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송석원시사는 1786년 여름부터 1820년 무렵까지 30여년 존속하면서 당시의 사대부 문단 못지 않은 시문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들은 자연을 벗삼아 세속에 물들지 않음을 자부하면서 자신들의 문학을 사대부의 문학과 구별하여 ‘경외(境外)의 사림(詞林)’이라 자존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위항시인으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조..
이용휴(李用休, 1708 숙종34~1782 정조6, 자 景命, 호 惠寰齋)는 이익(李瀷)의 조카로 가학(家學)을 계승하여 영정대(英正代)의 학계(學界)에 크게 영향을 끼친 문인이다. 시역시 학자풍 그대로 엄격하기만 하다. 그의 시세계는 이덕무(李德懋)의 말과 같이 격률(格律)이 엄고(嚴苦)하고 자구(字句)마다 근거가 분명하였으며 음풍농월(吟風弄月)을 일삼지 않았다[詩力追中國, 恥作鴨江以東語, 格律嚴苦, 藻采煥曄, 別關洞天, 峭絶無隣, 博極墳典, 字句有根 …… 不徒作月露風花, 爲無用之言也]. 그래서 그의 시작의 대부분은 연작(連作) 송별시(送別詩)와 만시(挽詩)로 채워져 있으며 이를 통하여 그는 그의 관풍(觀風)의 의지를 확연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이용휴(李用休)의 시세계는 다음의 「전가(田家)..
「사유악부(思牖樂府)」의 또다른 면모로, 숱한 민중적 인물에 대한 형상화 및 부패한 관리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다. 담정(藫庭)이 목도한 북방민중의 고난을 그린 또 한 작품을 보기로 한다. 問汝何所思 무얼 생각하나? 所思北海湄 저 북쪽 바닷가. 嶺北鐵塩勝土塩 영북(嶺北)의 철염(鐵鹽)은 토염(土鹽)보다 나아 味甘色白柔且纖 맛이 좋고 색은 희며 부드럽다.. 塩賤三斗米一斗 소금값 헐할 때는 소금 서말에 쌀 한 말 塩貴與米只相耦 소금이 귀할 때는 쌀값과 거의 같네. 而來塩價忽刁蹬 요즈음 소금값이 갑자기 뛰어올라 塩一米五猶無有 쌀 닷말 주어도 소금 한말 어렵네. 北關父老長太息 북방의 부로(父老)들 한숨을 내쉬면서 對飯嘔衉何由食 밥상 대하면 구역질하니 어떻게 밥 먹을꼬? 喫淡六朔不見塩 여섯달이나 맨음식으로 소금..
기속악부(紀俗樂府)의 성격을 띠고 있는 「사유악부(思牖樂府)」의 창작배경은 담정(藫庭)이 32세의 나이로 강이천(姜彛天)의 유언비어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의 부녕(富寧)으로 유배된 일이다. 담정(藫庭)은 이어 신유사옥에 다시 연루되어 진해로 이배(移配)되었는데, 이때 부령의 백성들 및 당시 자기주변에 있었던 다정한 사람들을 잊지 못한 그리움으로 「사유악부(思牖樂府)」를 짓게 된다. 「사유악부(思牖樂府)」는 부령에서의 생활 및 그곳의 인물, 풍토를 내용으로 한 총 290편의 불제언(不齊言) 단형체로 되어 있다. 問汝何所思 무얼 생각하나? 所思北海湄 저 북쪽 바닷가. 苦雨長夏漲溪漩 긴 여름 장마비에 개울이 넘쳐 五日不覿蓮姬面 닷새나 연희 얼굴 보지 못했네. 今宵雨歇月在沙 오늘밤 비 개고 모래톱에 달이 뜨니 ..
김려(金鑢, 1766 영조 42~1822 순조 22, 자 士精, 호 藫庭)는 소위 ‘강이천사건(姜彛天事件)’에 연루되어 정조로부터 패관소품(稗官小品)에 힘쓰는 자라 지탄받고 유배됨으로써 유명해진 문인이다. 이 사건의 확대로 김려(金鑢)는 10년 가까이 유배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옥사와 유배생활을 통해 김려(金鑢)는 새롭게 역사와 문학을 바라보게 된다. 김려(金鑢)가 만년에 편집한 방대한 분량의 야사총서 『한고관외사(寒皐觀外史)』는 당론에 왜곡된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는 작업이었다. 한편 김려(金鑢)는 자신을 비롯한 주위 문우들의 시문을 수집하여 『담정총서(藫庭叢書)』를 편집하였는데, 특히 이옥(李鈺)의 전(傳)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수집, 정리하였으며 그의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김려(金鑢..
한편 낙하생은 김해 유배시인 1808년 장편의 「영남악부(嶺南樂府)」를 지었다. 「영남악부(嶺南樂府)」는 자서(自序)와 68수의 본시(本詩)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 시는 각기 산문으로 된 시서(詩序)를 두어 그 내용을 개괄한 뒤 이를 다시 잡언체(雜言體)로 읊고 있다. 낙하생은 「영남악부(嶺南樂府)」를 짓기 위해 영남의 역사와 유적, 풍물과 인물을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의 사서를 비롯하여 자신의 견문을 풍부하게 활용하고 있다. 「영남악부(嶺南樂府)」는 그 자서에서 “내가 이것을 지은 것은 대체로 체재와 성율의 엄정함을 가리지 않고 다만 그 본사(本事)를 서술하여 진정(眞情)을 전달할 뿐이다[余之作此, 蓋不擇乎體裁之正ㆍ聲律之嚴, 只以敍其本事, 達其眞情].”라 하였듯이, 실제의 작품들은 ..
이학규(李學逵, 1770 영조46~1835 헌종1, 자 醒叟, 호 洛下生)는 이용휴(李用休)의 외손으로 그 계보는 남인계 실학자에 이어져 있는 문인이다. 일찍이 정조의 지우를 받으면서 문명을 얻었으나, 곧 신유사옥(辛酉事獄)에 연루되어 24년간이란 긴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따라서 낙하생의 문학세계는 바로 이러한 유배생활과 밀접하게 관계를 갖게 된다. 낙하생이 교유한 인물들로 이가환(李家煥)ㆍ정약용(丁若鏞)ㆍ신위(申緯) 등을 꼽을 수 있는데, 특히 정약용(丁若鏞)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낙하생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각기 유배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편지와 시를 주고받으면서 교유하였다. 8살 아래인 낙하생은 다산이 유배지 김해(金海)로 보내오는 시작에 크게 고무되어 왕성한 시작활동을 보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