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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그러나 태평성세를 구가하던 숙종대(肅宗代)의 번영은 정치내부에서 불붙기 시작한 당론(黨論)의 가열로 말미암아 사림(士林)은 빛을 잃고 소단(騷壇)은 다시 산림(山林) 속으로 자복(雌伏)하여 명맥만 유지해 왔다. 때문에 시문(詩文)에 대한 논설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으며, 한문학의 전통이 사실상 끝장날 무렵에 김택영(金澤榮)이 『소호당집(韶護堂集)』 권8이란 잡언(雜言)을 남겨준 것이 고전비평의 마지막 문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기본적으로는 잡록(雜錄)이며, 문학을 논한 부분에 있어서도 문론(文論)이 시론(詩論)보다 양적으로 우세하다. 뒤늦게 나온 조긍섭(曹兢燮)이 김택영(金澤榮)과 주고 받은 『암서집(巖西集)』에서 나온 「여김창강(與金滄江)」란 왕복서(往復書)도 도학자(道學者)의 문장론(文章論)이..
목릉성세(穆陵盛世)는 조선전기의 안정이 이룩한 당연한 결과이거니와, 임병양란(壬丙兩亂)을 치르고 난 소단(騷壇)의 황량은 이후 70여년 동안 적막 그대로다. 외세의 압박으로부터 화평을 되찾은 조선후기 숙종대(肅宗代)에 이르러 문풍(文風)이 다시 일어나고 비평의 문자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김득신(金得臣)의 『종남총지(終南叢志)』를 비롯하여 홍만종(洪萬宗)의 『소화시평(小華詩評)』과 『시평보유(詩評補遺)』, 남용익(南龍翼)의 『호곡시화(壺谷詩話)』, 김만중(金萬重)의 『서포만필(西浦漫筆)』 김창협(金昌協)의 『농암잡지(農巖雜識)』 등이 모두 이때의 것이다. 그러나 홍만종(洪萬宗)이 역대의 시화(詩話)를 집대성하여 『시화총림(詩話叢林)』을 편집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의 대부분은 기왕의 중요 비평서(批..
그러나 비평은 역시 문장가의 것이며 사장학(詞章學)의 부침(浮沈)과 기복(起伏)을 같이 한다. 서거정(徐居正)ㆍ성현(成俔) 이후에도 조선중기에 이르러 이수광(李睟光)ㆍ신흠(申欽)ㆍ허균(許筠) 등이 나타나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를 누리면서 시학(詩學)도 시대의 산물임을 증명해 주고 있으며, 조선후기에도 한 차례 호황을 누리기 때문이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은 백과사전식으로 된 기사일문집(奇事逸聞集)이지만 그 문장부(文章部)에서 행한 실제비평의 노력은 단순한 기문일사(奇聞逸事)의 채록 수준에서 뛰어넘어 일자일운(一字一韻)의 형식적인 기교에 이르기까지 높은 안목을 과시하고 있다. 특히 성운(聲韻)에 대한 그의 관심은 허균(許筠)의 『성수시화(惺叟詩話)』와 더불어 우리나라 비평사에서 가장..
조선왕조는 태조(太祖)때부터 문치(文治)를 숭상하였으므로 이후 100여년 동안 문풍(文風)이 크게 떨쳤으며 많은 문사(文士)들이 배출되었다. 성현(成俔)은 그 태평한 시대에 『용재총화(傭齋叢話)』를 썼다. 그의 쉽고도 아름다운 문장(文章)으로 진기(珍奇)한 풍물도(風物圖)를 그린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역대의 문장(文章)을 논함에 있어서는 그의 필하(筆下)에 완전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삼엄(森嚴)했다. 사자(四字)로 된 평어(評語)를 사용하여 포(褒)와 폄(貶)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높은 조감(藻鑑)은 후대(後代)의 신흠(申欽)ㆍ허균(許筠)과 더불어 조선시대 실제비평의 선구가 되고 있다. 서거정(徐居正)과 성현(成俔) 이후의 비평 양상도, 시(詩)의 본질..
조선왕조의 성립으로 문학관념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며 형식적으로는 도학(道學)과 문학(文學)이 그 길을 달리하게 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문단기습(文壇氣習)은 전대(前代)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으며 걸출(傑出)한 시인의 배출(排出)도 볼 수 없다. 개국초원(開國初元)이었으므로 문(文)은 대부분 조명(詔命)과 장주(章奏)였고 시(詩)는 가영(歌詠)과 송도(頌禱)의 사(辭)가 많았다. 그러나 국초(國初) 이래의 문치(文治)에 힘입어 전대(前代)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시문(詩文) 선발책자(選拔冊子)가 이루어졌으며 그 편찬의 주역을 담당한 서거정(徐居正)에 의하여 『동인시화(東人詩話)』가 편찬된다. 전대(前代)의 축적이 시평서(詩評書)의 출현을 가능케 하리만큼..
고려말에 이르러,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에도 시평의 단편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삼천년래(三千年來) 제일대가(第一大家)로 추앙받은 대수(大手)로서도 특정한 시인을 포폄(褒貶)하는 일은 함부로 하지 않았다. 시풍(詩風)을 같이하는 일군의 시인들을 한데 묶어 그 장처(長處)를 추숭(推崇)하는 겸양을 보이고 있다. 시작법(詩作法)의 상식인 용사(用事)나 신의(新意) 따위를 논의하는 것도 그에게 무의미한 것은 물론이다. 다만 이 책에서 점화(點化)의 묘를 논하고 있는 것이 주목할 곳이기도 하지만, 이는 만상(萬象)을 구비한 이제현(李齊賢)의 시세계가 그렇게 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가 바로 우리나라 한시(漢詩)의 전통이 정착의 단계에서 안정을 추구하던 시기였던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사정..
『보한집(補閑集)』은 그 제명(題名)에 있어서도 『파한집(破閑集)』을 보(補)한 것이거니와 시기적으로도 소단(騷壇)의 한 시대를 통관(通觀)할 수 있는 고려중ㆍ말엽의 산물이다. 그래서 최자(崔滋)는 위로는 정지상(鄭知常)으로부터 당세(當世)의 명가(名家) 등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시작(詩作)에 품평(品評)을 가하고 있으며, 특히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대해서는 일월(日月)로도 그 칭예(稱譽)를 다하지 못할 것이라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는 이미 이규보(李奎報)의 문집이 세상에 행(行)하고 있었으므로 그 시작(詩作)의 전정(全鼎)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였지만 그는 『보한집(補閑集)』 권중(卷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 이규보(李奎報)를 철저한 개성주의자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규보(李奎報)는..
이규보(李奎報)의 『백운소설(白雲小說)』은 수백 년 뒤 홍만종(洪萬宗)의 『시화총림(詩話叢林)』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것은 이규보(李奎報) 자신이 찬술(撰述)한 것인지 혹은 후대인에 의하여 편집된 것인지 확증을 잡아낼 수 없으나 이규보(李奎報)의 문집(文集)에 전하는 다른 글, 예를 들면 「논시중미지약언(論詩中微旨略言)」이나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 등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규보(李奎報)의 것이라 하여 잘못될 것은 없다. 또는 이미 있었던 『백운소설(白雲小說)』이라는 잡록(雜錄)을 홍만종(洪萬宗)이 『시화총림(詩話叢林)』을 편찬할 때 시화만 따로 뽑아낸 것이라 해도 이규보(李奎報)의 것임에는 틀림없다. 『백운소설(白雲小說)』의 요체(要諦)는 의기론(意氣論)이다. 시(詩)에..
2) 조선의 시화집 조선왕조의 성립으로 문학관념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되며 형식적으로는 도학(道學)과 문학(文學)이 그 길을 달리하게 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문단기습(文壇氣習)은 전대(前代)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으며 걸출(傑出)한 시인의 배출(排出)도 볼 수 없다. 개국초원(開國初元)이었으므로 문(文)은 대부분 조명(詔命)과 장주(章奏)였고 시(詩)는 가영(歌詠)과 송도(頌禱)의 사(辭)가 많았다. 그러나 국초(國初) 이래의 문치(文治)에 힘입어 전대(前代)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시문(詩文) 선발책자(選拔冊子)가 이루어졌으며 그 편찬의 주역을 담당한 서거정(徐居正)에 의하여 『동인시화(東人詩話)』가 편찬된다. 전대(前代)의 축적이 시평서(詩評書)의 출..
3. 작품의 평가 문제 1) 고려의 시화집 우리나라 고전문학의 경우, 비평은 한문학의 전유물이며 그 가운데서도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시이다. 오늘날의 문학은 소설이 판을 치는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한문학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 구어(口語)로 된 소설의 것이 아니라 문어(文語)로 된 문장(文章)의 역사다. 다시 말하면 시(詩)나 문(文)의 역사이며 실질적으로는 시(詩)가 주종(主宗)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고전문학 비평의 현실은, 문학일반에 관한 이론이나 본격적인 시론(詩論)과 같은 것은 흔하지 아니하며, 대부분이 소박한 실제 비평으로 채워져 있다. 옛사람들이 즐겨 쓰던 방식 그대로 개연적(蓋然的)인 평어(評語) 수준에서 그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방면에 대한 학계의 ..
5) 『대동시선(大東詩選)』과 민족의식(民族意識) 『대동시선(大東詩選)』은 한시(漢詩)의 선발책자(選拔冊子)로서는 총결산에 해당한다. 표제(標題)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고조선(古朝鮮)에서부터 구한말(舊韓末)에 이르기까지 역대 2,000 여가(餘家)의 각체시(各體詩)를 선집(選輯)하여 12권(卷)으로 출판한 것이다. 구한말의 학자요 언론인이기도 한 장지연(張志淵)이 편집하여 1918년 신문관(新文館)에서 신활자(新活字)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장지연(張志淵)의 연보와 장홍식(張鴻植)의 발문에 따르면, 이 책의 원편(原編)은 1917년에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권수(卷首)의 범례(凡例)에서는, 서둘러 이를 편집, 간포(刊布)하기 때문에 유루(遺漏)된 것에 대해서는 보유(補遺)의 간행을 기다린다고 하였으나 이..
『풍요삼선(風謠三選)』은 속선(續選)의 속집(續集)이다. 직하사(稷下社)의 시동우(詩同友)인 유재건(劉在建)ㆍ최경흠(崔景欽) 등이 『풍요속선(風謠續選)』 이후의 위항시인 305가(家)의 시(詩)를 선집(選集)하여 철종(哲宗) 8년 정사(丁巳, 1857)에 인행(印行)한 7권(卷) 3책본(冊本)이다. 『소대풍요(昭代風謠)』가 간행된 지 60년만에 『풍요속선(風謠續選)』이 간행되었고 다시 60년이 되는 해에 『풍요삼선(風謠三選)』이 나왔다. 『소대풍요(昭代風謠)』의 준비기간(準備期間)까지 합치면 120년이 훨씬 넘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도 위항시인들은 그들의 의지를 꺾지 않고 삼선(三選)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이로써 위항시인들의 시편(詩篇)이 대체로 수습되었으며 사실상 이것이 독자적인 위항시인의 시집..
『풍요속선(風謠續選)』은 제명(題名) 그대로 『소대풍요(昭代風謠)』의 속편(續篇)이다. 『소대풍요(昭代風謠)』가 간행된 지 60년 만에 송석원(松石園)의 천수경(千壽慶)과 장혼(張混)이 중심이 되어 『소대풍요(昭代風謠)』 이후의 위항시인 가운데서 333가(家)의 723수를 선집(選輯)하여 그 주갑(周甲)이 되는 정조(正祖) 21년 정사(丁巳, 1797)에 운각자(芸閣字)로 인행(印行)한 7권(卷) 3책본(冊本)이다. 그러므로 『소대풍요(昭代風謠)』에서와 같이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詩人)의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대풍요(昭代風謠)』가 『기아(箕雅)』의 예에 따라 시체별(詩體別) 편제(編第)를 하고 있는 데 반하여, 『풍요속선(風謠續選)』은 고체(古體)ㆍ금체(今體)ㆍ오언(五言)ㆍ칠언(七言)을 가리지..
『소대풍요(昭代風謠)』는 162가(家)의 시편(詩篇)을 시체(詩體)에 따라 선집(選集)하여 영조(英祖) 13년 정사(丁巳, 1737)에 간행되었으며, 원집(原集) 9권(卷)과 습유(拾遺)ㆍ별집(別集)ㆍ별집보유(別集補遺) 등을 합쳐 2책(冊)으로 편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뒷날 『풍요삼선(風謠三選)』을 편찬할 때(哲宗 8, 1857) 『소대풍요(昭代風謠)』가 산망(散亡)될 것을 우려하여 그 이듬해(戊午)에 운각자(芸閣字)로 다시 인출(印出)한 중인본(重印本)이 널리 유행(流行)하고 있다. 편자는 고시언(高時彦, 1671~1734)으로 알려져 왔으나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가 제시된 일은 없다. 오광운(吳光運, 1698~1745)의 서문과 발..
4) 풍요(風謠)와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의지 여기서 풍요(風謠)라고 한 것은 『소대풍요(昭代風謠)』와 『풍요속선(風謠續選)』ㆍ『풍요삼선(風謠三選)』 등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시집(詩集)을 지칭하는 것이다. 시작(詩作)의 수준에 있어서는 사대부(士大夫)의 그것에 비길 것이 되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이름을 신후(身後)에까지 전하려는 중인(中人)ㆍ천예(賤隸)들의 피맺힌 소망이 응결(凝結)되어 있는 특수계층의 시집(詩集)이다. 때문에 그 편성의 과정에 있어서도 여러 사람의 공동참여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으며, 사대부의 도움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위항시인(委巷詩人)이란 대체로 의역중인(醫譯中人)ㆍ서리(胥吏) 등과 같이 중간 계층의 신분에 속하는 시인(詩人)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대부의 기에..
이 책의 전편(全篇)을 보면, 『동문선(東文選)』이나 『청구풍아(靑丘風雅)』에 비해 고시(古詩)와 배율(排律)이 금체(今體)의 율시(律詩)보다 상대적으로 적으며 잡체시(雜體詩)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중국에 비하여 고조장편(古調長篇)에서 뒤떨어지고 있으며 절구(絶句)가 모자라는 것이 사실이지마는,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곧 시(詩)에 있어서 그 소상(所尙)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있음을 단적(端的)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詩)의 내질(內質)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남용익(南龍翼) 자신이 지은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도 이는 사실로 확인된다. 그는 역대의 시가(詩家)를 논함에 있어, 고려시대의 경우에는 색(色)ㆍ성률(聲律)ㆍ기력(氣力)을 시품(詩品)..
3) 『기아(箕雅)』와 절충론 허균(許筠)의 『국조시산(國朝詩刪)』이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시선집(詩選集)이라면,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이 찬집(撰集)한 『기아(箕雅)』는 『국조시산(國朝詩刪)』 이후 조선후기 진신간(搢紳間)에 널리 읽혀진 시선집(詩選集)이다. 임병양란(任丙兩亂)의 실의(失意) 이후 깊은 정적(靜寂) 속으로 빠져 들어간 소단(騷壇)이 다시 활기를 되찾은 숙종(肅宗) 연간에 이 책이 간행된 것은 시대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숙종(肅宗)ㆍ영조(英祖) 연간에 가열된 당론(黨論)으로 말미암아 사림(士林)이 다시 빛을 잃고 시업(詩業)이 침체하기 시작한 조선후기 사단(詞壇)의 현실에서 볼 때 『기아(箕雅)』의 출현은 조선후기 소단(騷壇)의 중간 보고 이상으로 시사적(詩..
이와 같은 허균(許筠)의 성운(聲韻)에 대한 깊은 조예는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고려시대의 시작(詩作)을 논하는 곳에서도 이채(異彩)를 발하고 있다. 호방(豪放)한 기상(氣象)으로 정평(定評)되어 있는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의 시(詩)에 대해서도 각각 그 음악성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색(李穡)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부벽루(浮碧樓)」에 대하여 『성수시화(惺叟詩話)』 13번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꾸미지도 않고 탐색하지도 않았지만 우연히 음조에 합치하여, 읊조린 것이 신묘하고 뛰어나다. 不雕飾, 不探索, 偶然而合於宮商, 詠之神逸. 스스로 격조(格調)에도 뛰어나고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정몽주(鄭夢周)가 북관(北關)에서 지은 「정주중구 한상명부(定州重九 韓相命賦)」에 대해..
그러나 허균(許筠)이 비평가로서의 높은 조감(藻鑑)을 과시한 것은 성률(聲律)에 있다. 그는 『국조시산(國朝詩刪)』 뿐만 아니라 『성수시화(惺叟詩話)』와 『학산초담(鶴山樵談)』의 도처에서 시(詩)의 음악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는 『국조시산(國朝詩刪)』에 최경창(崔慶昌)과 이달(李達)의 시작(詩作)을 수십편이나 뽑아 넣으면서 그 경위를 『성수시화(惺叟詩話)』 63번과 64번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두 사람의 시(詩)를 내가 『국조시산(國朝詩刪)』에 뽑아 넣은 것이 각각 수십편이나 되는데 음절(音節)은 정음(正音)에 들 만하지만 그 밖에는 뇌동(雷同)을 면치 못한다. 二家詩, 余選入於詩刪者, 各數十篇, 音節可入正音, 而其外不耐雷同也. 그가 이들의 시(詩)를 선발(選拔)한 기준이 음절(..
한편 이 책에는 작자 또는 시작(詩作)과 관련된 제영(題詠)이나 고실(故實)을, 역대의 시화(詩話)ㆍ만록(漫錄)에서 찾아 음각(陰刻)으로 보주(補注)를 붙이고 있다. 이는 아마 고본(稿本)을 재편집(再編輯)하는 과정에서 박태순(朴泰淳) 자신이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서문에도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때에 널리 제본(諸本)을 구(求)하여 거기에 정정(訂定)을 가(加)하고, 또 제가(諸家)의 시화(詩話)에서 따서 같은 종류의 것을 보충하고 베껴서 몇권을 만들었다. 於是, 廣求諸本, 頗加證定, 又取諸家詩話, 以類補綴, 繕寫爲幾卷. 이 언급으로 보아 박태순(朴泰淳)이 한 일임에 틀림 없는 듯하다. 보주(補注) 가운데는 양경우(梁慶遇)의 『제호시화(霽湖詩話)』,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차..
2) 『국조시산(國朝詩刪)』과 격조론(格調論) 『국조시산(國朝詩刪)』의 기본 성격은 허균(許筠)이 초선(鈔選)한 시선집(詩選集)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허균(許筠)은 자신이 선발(選拔)한 작품에 스스로 비(批)와 평(評)을 함께 붙이고 있어 이는 우리나라 비평사상(批評史上) 그 유례가 없는 실제비평의 선구가 되고 있다. 시대사적으로는, 『동문선(東文選)』과 『청구풍아(靑丘風雅)』 이후 목릉성세(穆陵盛世)에 이르는 150년간은 조선 시대의 소단(騷壇)이 전에 없이 다양한 전개를 보이면서 풍요를 누린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허균(許筠)의 높은 조감(藻鑑)으로 이것들이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은, 그 시대에 그 비평이 함께 어울려 이룩한 무비(無比)의 성과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허균(許筠)이 당시(..
당시의 소단(騷壇)이 아직까지도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김종직(金宗直)은 당시의 풍상(風尙)에서 멀리 떨어져 엄중(嚴重)ㆍ방원(放遠)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성현(成俔)이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김종직(金宗直)의 『청구풍아(靑丘風雅)』를 가리켜 “조금이라도 호방(豪放)한 듯한 것은 버리고 수록하지 않았다[稍涉豪放者, 棄而不錄]”이라 한 것을 선관(選觀)의 편향성을 지적한 적평(適評)이라 할 수 있거니와 이는 곧 그의 시가 송시학(宋詩學)의 호방(豪放)한 기격(氣格)을 사실상 극복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후대인의 비평 가운데서도 차천로(車天輅)나 신흠(申欽)이 「선사사(仙槎寺)」의 鶴飜羅代蓋 龍蹴佛天毬 학(鶴)은 신라시대의 일산에 번득이고 용(龍)은 불천(佛天)의 공을 찬..
『청구풍아(靑丘風雅)』와 거의 같은 시기에 『동문선(東文選)』이 간행되었으며, 유몽와(柳夢窩)의 『대동시림(大東詩林)』이 이보다 뒤에 나온 듯하나 이것은 함께 논할 수준의 것이 되지 못한다. 『동문선(東文選)』은 방대한 관찬서(官撰書)로서, 또 시문(詩文)의 총집(總集)으로서 이것이 갖는 자료집(資料集)으로서의 의미는 막중하지만, 그러나 『청구풍아(靑丘風雅)』는 『동문수(東文粹)』(文選集)와 더불어 편자(編者)의 취향과 조감(藻鑑)에 따라 정선(精選)한 사찬서(私撰書)이고 또 이것은 시선집(詩選集)이라는 점에서 양자(兩者)는 좋은 대조를 보인다. 이와 같은 양서(兩書)의 성격은 다음과 같은 제가(諸家)의 기록에서도 사실로 확인된다. 성현(成俔)은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권 10)에서 다음과 같이 말..
1) 『청구풍아(靑丘風雅)』와 송시학(宋詩學)의 극복 『청구풍아(靑丘風雅)』의 기본적인 성격은 조선초기 김종직(金宗直)에 의하여 편찬된 시선집(詩選集)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마는,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형식적인 의미에서 보면, 조선초기에 이르러 전시대(前時代)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정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대관찬사업(大官撰事業)이 진행되고 있을 때,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김종직(金宗直) 개인이 편찬한 사찬(私撰) 시선집(詩選集)이라는 것이며, 둘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당시의 소단(騷壇)이 이때까지도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김종직(金宗直)의 『청구풍아(靑丘風雅)』에 이르러 그 극복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
2. 자료의 선택 문제 한문학사는 문장(文章)의 역사다. 구어(口語)로 된 소설의 역사가 아니라 문언(文言)으로 된 시문(詩文)의 역사이며, 사실상 그 주종(主宗)이 되어 온 것은 시(詩)다. 그러나 우리 문학사의 현실은 이러한 사실(史實)이 사실(事實)로 통용되지 않았다.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필이나 소설과 같은 이른바 문학(文學)에 대한 연구는 시대의 풍상(風尙)으로 각광을 받아왔고 사실상 조윤제(趙潤濟)의 『한국문학사(韓國文學史)』가 이러한 편향(偏向)을 조성하는 데 선도적인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정작 한시(漢詩)에 대한 관심은 작품의 소재 파악이나 기초 자료의 조사 단계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시(漢詩) 전통이 이미 전시대(前..
1. 서설(序說) 1. 한시(漢詩) 연구(硏究)의 과제(課題) 한시를 연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를 검증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한시에서의 자연은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인간들의 삶을 있게 해주는 원천으로 소중한 것이 되고 있으며, 한시에서 인간들은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해법(解法)조차도 이 자연을 통하여 구하려 한다. 그러나 한시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들과 자연이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때, 물아(物我)가 한데 어우러져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게 되며 조화미(調和美)의 극치(極致)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시(漢詩)를 모르면서도 한시(漢詩)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될 어려운 상황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더욱이 우리 학계의 현실은 지금까지도 연구..
‘조선후기 한시 쇄신의 방향과 주자학: 진시(眞詩)’ 후기 목차 1. 형술쌤이 초대한 한시의 세계에서 한바탕 춤을 추다 한문과 마주 보고, 한문과 한바탕 어우러지다 형술쌤 한시의 세계로 들입다 초대하다 2. 건빵이 한시특강을 듣는 이유 참새가 방앗간을 찾듯, 건빵은 한시특강을 듣네 한시특강을 들으러 온 사람들 전공자가 들으니 더욱 유익한 한시 특강 3. 훅하고 들어가 좌중을 압도한 16세기 한시 이야기 나도 모르는 새에 한시의 세계로 빠져들다 당나라 시풍이 우세를 떨치며 개성이 사라진 한시들 4. 복고파가 문단을 휩쓸다 복고파의 의의와 한계 복고파의 억눌림을 뚫고 분출한 생기발랄한 목소리 5. 천기를 문학에 담으려던 사람들 공안파를 비판한 김창협 공안파의 천기와 백악시단 천기는 다르다 6. 천기가 가득 ..
6. 천기가 가득 담긴 한시를 맛보다 한 시간 정도 만에 16세기 조선 문단의 시풍(詩風) 변화를 훑어봤다. 이게 바로 우리가 전문가에게 강의를 들어야 할 이유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주제의 내용을 알기 위해선 여러 자료를 뒤적이며 몇 달을 끙끙 앓을 정도로 공부해야지만 겨우 윤곽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을 두 시간 정도의 강의만으로 그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16세기 시단에선 당풍이 유행하며 천부적인 자질을 지녀야만 시를 지을 수 있다는 논리가 전개되었고 이런 논의에 반감을 지닌 사람들은 ‘문장은 전한 시대의 것을 따르고, 시는 성당 시대의 것을 따른다[文必秦漢, 詩必盛唐]’이란 구호를 외치며 성당(盛唐)의 시만을 읽고 본받으려 노력하면 충분히 좋은 시를 지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5. 천기를 문학에 담으려던 사람들 조선에 이렇게 생기발랄하게 시를 쓰고 문장을 쓰자는 논의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 공안파(公安派)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공안파의 대표주자인 원굉도와 이지 같은 인물은 억눌려 있던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래서 원굉도는 아예 “본성에 맡기고 발하면 오히려 사람의 희노애락과 기호정욕에 통할 수 있으니, 이것이 기쁠 만하다[任性而發, 尚能通於人之喜怒哀樂, 嗜好情欲, 是可喜也].”라는 충격적인 말까지 했으며, 이지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곧 진짜 마음이다[夫童心者, 眞心也].”라는 말까지 했다. 유학에선 억눌러야 했던 기(氣), 리(理)에 방해만 된다고 보았던 기(氣)를 그들은 한없이 긍정하며 ‘심즉리(心卽理)【성리학의 ‘성즉리(性卽理)’와 완전히 반대되는 얘기..
4. 복고파가 문단을 휩쓸다 당나라 시를 무작정 모방하는 풍조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 복고파다. 복고파는 제대로 시를 지으려면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목청껏 외쳤던 사람들이다. 복고파의 의의와 한계 이들은 두 가지 부분에서 그전 시대와 다른 점이 있다. 이들은 “문장은 전한 시대의 것을 따르고, 시는 성당 시대의 것을 따른다[文必秦漢, 詩必盛唐]”라는 구호를 만들어 외쳤다. 이 말을 통해 전 시대와는 두 가지 부분에서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첫째는 시든 문장이든 천부적인 재능에 따라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에 따라 잘 쓰고 못 쓰고가 나누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니 좋은 시를 짓고 싶거든 명편들을 열심히 읽고 따라 써보며 노력한다면 그만한 시를 쓸 수 있다고 보았다. 둘째는 모범이 될..
3. 훅하고 들어가 좌중을 압도한 16세기 한시 이야기 나에게 만약 ‘비전공자들을 대상으로 한시 특강을 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면, ‘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한시에 대한 개념부터 정리한 후에 내가 하고 싶은 얘길 풀어가겠다’고 말할 것이다.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로 초대하는 것이니 만큼, 알지 못하는 세계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 이번 강의는 전주대에서 전주시민 대상으로 마련하여 진행되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한시의 세계로 빠져들다 그런데 형술쌤은 훅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16세기부터 중국에서 유행한 복고파 시와 전후칠자(前後七子)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이런 부분에서 도입부는 16년 1월에 초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진행됐..
2. 건빵이 한시특강을 듣는 이유 최근에 ‘킹덤’이란 드라마가 방영되었는데 거기서 김은희 작가는 ‘넷플릭스 측에서는 어느 것도 건드리지 않았다. 뭘 하든, 뭘 얼마만큼 죽이든 가만히 내버려 두더라’라는 내용으로 인터뷰를 했었다. ▲ 외국자본을 투자 받아 한국형 좀비 드라마를 만들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찾듯, 건빵은 한시특강을 듣네 거기엔 ‘우리가 이미 당신의 실력을 알고 모신 만큼 맘껏 기량을 펼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처럼 자신의 기량이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할 수 있는 용기’, ‘실패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나온다. 해리포터의 작가 j.k 롤링은 아예 하버드대 졸업식 연설에서 ‘실패를 많이 해보라. 그게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말할 정도이니, 무작정 해보는 도전정신이 있다면 우린 크게..
1. 형술쌤이 초대한 한시의 세계에서 한바탕 춤을 추다 긴 시간 돌고 돌아 다시 한문 임용을 준비하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는 걸 느끼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단재학교에서 교사로서의 경험과 무수한 얘기들을 썼던 글쓰기가 한문공부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교사 경험이나 글쓰기 경험은 학문을 하는 진정성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사태를 제대로 보려는 진지한 마음이 있는 것이고, 그걸 그 누구의 말이 아닌 나의 말과 나만의 이해방식으로 흡수하는 것이니 말이다. ▲ 웰 컴 투 더 월드 오브 한시 ~ 그 매력에 빠져보실까요^^ 한문과 마주 보고, 한문과 한바탕 어우러지다 예전엔 무언가를 고민하기도 전에, 뭘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모든 게 나에게 닥쳐 있었다...
조선후기 한시 쇄신의 방향과 주자학: 진시(眞詩) 목차 김형술(전주대 한문교육과) 1. 16C~17C 동아시아 문예론의 전개 ① 명나라 전후칠자(前後七子)의 복고론 ② 명대 복고파 이론의 영향력 1) 17세기 조선의 정두경(鄭斗卿, 1597-1673) 2) 18세기 에도 문단의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 3) 명말청초 공안파(公安派)의 명대 복고파 비판 4) 조선후기 백악시단(白嶽詩壇)의 명대 복고파 비판 2. 백악시단이 주창한 조선후기 한시 쇄신의 방향 3. 진시(眞詩) 창작의 핵심 이론: 천기론(天機論) 4. 시(詩)의 실상 ① 산수에의 밀착과 형신(形神)을 통한 진면목의 묘파(描破) ② 민생의 핍진한 사생 ③ 물아교감(物我交感)의 이지적(理智的) 일상 ④ 情의 울림 上 / 下 인용 ..
9. 시(詩)의 실상: 情의 울림② ⑥ 김시보(金時保) 『모주집(茅洲集)』 권8 「우중만장여행(雨中挽長女行)」 不有田家雨 行人得久淹 농가에 비가 내리지 않았던들 갈 사람을 오래도록 붙잡아 두었겠나. 喜逢子孫醉 睡過卯時甘 딸아이 만나서 기뻐 취하고 묘시가 넘도록 달게 잤더니 川漾萍樓埭 風廻花撲簾 냇물 불어 개구리밥 보에까지 붙고 바람 불어 꽃잎은 주렴을 치는구나. 吾詩殊未就 莫謾整歸驂 내 시가 아직 안 되었다 자꾸만 타고 갈 말 챙기지 말렴. ⑦ 이하곤(李夏坤) 『두타초(頭陀草)』 책8 「사가(思家)」 風急天將黑 山寒路自斜 바람 거세고 날도 어둑해지려는데 산은 춥고 길은 자꾸만 오르막이라. 來時愁雪片 歸日對梅花 올 적엔 눈송이를 걱정했는데 돌아가면 매화를 마주하겠네. 臘盡還爲客 年衰漸戀家 섣달이 다 되도록..
8. 시(詩)의 실상: 情의 울림① ① 홍세태(洪世泰) 『유하집(柳下集)』 권2 「술애(述哀)」 1 自我罹窮阨 生趣若枯木 나는 궁액(窮阨)에 빠진 뒤로 생의 흥취는 말라 죽은 나무 같았지만 賴爾得開口 聊以慰心曲 그래도 네가 있어 입을 열었고 늘 서글픈 마음을 위로 받았다. 嗟汝今已矣 令我日幽獨 아! 네가 떠나간 지금 나의 하루하루는 더욱 고독해져 入室如有聞 出門如有矚 집에 들면 어디선가 네 목소리 들리는 듯 문 나서면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너를 찾게 된다. 觸物每抽思,如繭絲在腹 무엇을 마주해도 늘 뽑혀 나오는 네 생각 마치 뱃속 가득 채워진 고치실 같은데 哀彼一抔士 魂骨寄山足 서글퍼라! 저 한 줌의 흙으로 네 넋과 뼈를 산발치에 묻었구나. 平生不我遠 今夜與誰宿 평생에 나를 멀리 떠난 적 없었는데 오늘 ..
7. 시(詩)의 실상: 물아교감(物我交感)의 이지적(理智的) 일상 ① 김창흡(金昌翕) 『삼연집(三淵集)』 권4 「십구일(十九日)」 荏苒芳華事 猶殘小圃春 고운 꽃 핀 봄날 풍경 사라지는데 작은 밭에 봄이 아직 남아있구나. 愁中紅日駐 睡起綠陰新 시름할 땐 붉은 태양 꼼짝 안더니 자고 나니 녹음이 싱그럽구나. 樊竹通雞逕 蔬花化蝶身 대밭엔 닭이 다녀 길이 생겼고 배추꽃엔 나비가 알을 붙였네. 靜看機出入 忘却我爲人 고요 속에 천기(天機)의 출입을 보다가 내 자신이 사람인 줄도 잊게 되었네. ② 김시보(金時保) 『모주집(茅洲集) 』 권7 「월야금운(月夜琴韻)」 夜冷霜生竹 樓虗月上琴 밤이 차서 서리가 대나무에 엉기고 누대는 비어 달만 거문고 위로 떠오르는데 泠然廣灘水 流入大餘音 차가운 광탄의 물 대여음(大餘音)으로 ..
6. 시(詩)의 실상: 민생의 핍진한 사생 ① 김창흡(金昌翕) 『삼연집(三淵集)』 권8의 「작천무량(鵲川無梁)」 我過淸州境 觀風一喟然 내가 청주의 경계를 지나며 풍속을 살펴보니 탄식만 나오네. 誰爲懶明府 民病涉寒川 누가 관가의 부름에 늑장피우랴? 백성은 병든 채로 찬 냇물을 건너네. 斫脛傷仁酷 乘輿用惠偏 정강이 깨졌으니 인을 해침이 가혹하고 수레를 타는 일도 그 혜택이 치우쳤구나. 行人能殿最 可畏豈非天 행인들도 행적을 평가할 줄 아니 어찌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② 권섭(權燮) 『옥소고(玉所稿)』 「시(詩) 1」의 「동면민가(東面民歌)」 (前略) (전략) 松脂杻骨杻皮令 송진 싸릿대 싸리껍질 채취 명령 白蠟五味山葡賦 밀랍 오미자 산포도 채취 부역 生鮮日次白土掘 하루걸러 생선 잡고 백토도 파야하는데 種種難酬..
5. 시(詩)의 실상: 산수에의 밀착과 형신(形神)을 통한 진면목의 묘파(描破) ① 김창흡(金昌翕)의 「구룡연(九龍淵)」을 통해 본 특징 다음은 김창흡(金昌翕) 『삼연집(三淵集)』 권2의 「구룡연(九龍淵)」이란 연작시 몇 편을 보자. 2 二淵懸瓢似 瀑流喧吐呑 둘째 못은 달아 맨 바가지던가 멍멍하게 폭포 물을 삼켰다 뱉네. 誰知呀然小 逈洞搏桑根 누가 알랴? 우묵하게 고인 작은 물이 멀리 통해 부상의 뿌리에까지 맺힐 줄. 5 五淵急回軋 南岸側成釜 다섯째 못 급히 돌며 콸콸 대는데 남쪽 언덕 비스듬하여 솥이 되었네. 馳波迭後先 赴隘徘徊舞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달리다가 좁은 곳에선 빙빙 돌며 춤추는 듯. 6 六淵美如璧 清涵石紋粹 여섯째 못 아름답기 구슬 같은데 맑게 씻긴 바위 무늬 티도 없구나. 竦髮注眸深 高雲正..
4. 진시 창작의 핵심 이론: 천기론(天機論) 의고파의 가짜 복고를 벗어나 고인의 정신을 자득하고, 관습화되고 형해화된 정과 경을 진실하게 표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시인은 부단한 학문과 수양을 거쳐야 하며 이를 통해 민멸(泯滅)된 시도(詩道)를 진작해야 한다. 1)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편의 “기욕(嗜慾)이 깊은 사람은 천기가 얕다[其嗜慾深者, 天機淺也].”라는 말이 있다. 2) 『주자어류(朱子語類)』 권62 「중용(中庸) 1」에서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솔개는 솔개의 성(性)이 있고 물고기는 물고기의 성(性)이 있어 그 날고 뜀에 천기(天機)가 절로 완전하니 곧 천리(天理)의 유행이 발현되는 오묘한 곳입니다. 그래서 자사께서 우선 이 한두 가지로 도(道)가 없는 곳이 없음을 밝히신 ..
3. 백악시단이 주창한 조선후기 한시 쇄신의 방향 김창협(金昌協)은 『농암집(農巖集)』 권34 「잡지 외편(雜識 外篇)」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에서는 우리 조선의 시가 선조(宣祖) 때보다 성한 때가 없었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시도(詩道)가 쇠한 것이 실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선조 이전에는 시를 짓는 이들이 대체로 다 송(宋) 나라의 시를 배웠기 때문에 격조가 대부분 전아하지 못하였으며 음률도 간혹 조화롭지 못하였지만 요컨대 또한 질박하고 진실하며 중후하고 노련하면서도 힘이 있었기에 겉치장을 하거나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서 각자 일가(一家)의 언(言)을 이루었다. 世稱‘本朝詩, 莫盛於穆廟之世.’ 余謂詩道之衰, 實自此始. 蓋穆廟以前, 爲詩者, 大抵皆學宋, 故格調多不雅馴, 音律或未諧適. 而要亦..
2. 16C~17C 동아시아 문예론의 전개② 3) 명말청초 공안파(公安派)의 명대 복고파 비판 원굉도(袁宏道)는 『해탈집(解脫集)』 권4 「척독(尺牘)」의 「구장유(丘長孺)」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저 물(物)은 참되면 귀합니다. 참되면 내 얼굴이 그대의 얼굴과 같을 수 없으니 하물며 고인의 모습이겠습니까? 당(唐)에는 당의 시가 있으니 반드시 『문선(文選)』의 체(體)일 필요는 없습니다. 초당(初唐)ㆍ성당(盛唐)ㆍ중당(中唐)ㆍ만당(晩唐)에는 각자의 시가 있으니 반드시 초당, 성당일 필요가 없습니다. …(중략)… 大抵物眞則貴, 貴則我面不能同君面, 而況古人之面貌乎? 唐自有詩也, 不必選體也; 初ㆍ盛ㆍ中ㆍ晚自有詩也, 不必初盛也; 李ㆍ杜ㆍ王ㆍ岑ㆍ錢ㆍ劉, 下迨元ㆍ白ㆍ盧ㆍ鄭, 各自有詩也. 不必李ㆍ杜也. (中略)..
1. 16C~17C 동아시아 문예론의 전개① ① 명나라 전후칠자(前後七子)【전칠자(前七子): 이몽양(李夢陽), 하경명(何景明), 서정경(徐積卿), 변공(貢), 강해(康海), 왕구사(王九思), 왕정상(王廷相) / 후칠자(後七子): 이반룡(李擊龍), 왕세정(王世貞), 사진(謝秦), 종신(宗臣), 양유예(梁有譽), 서중행(徐中行), 오국륜(吳國倫)】의 복고론 이몽양(李夢陽, 1472-1529)은 홀로 전대의 위약(萎弱)함을 비판하고, “문장은 반드시 진한(秦漢)시대의 것이어야 하고, 시는 반드시 성당(盛唐)의 것이어야 한다.”고 부르짖으며 이것이 아닌 것은 말하지 않았다[夢陽獨護其萎, 倡言文必奏漢, 詩必盛唐, 非是者弗道. -『명사(明史)』 권286 「이몽양전(李夢陽傳)」]. 이반룡(李攀龍, 1514-15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