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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25. 허균 시론, 깨달음의 시학 1. 조선의 문제아 당대 최고의 비평가 허균, 그의 이름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그는 국문소설 「홍길동전」의 작가이면서, 『성수시화(惺叟詩話)』ㆍ『학산초담(鶴山樵談)』 등의 시화를 엮은 당대 최고의 비평가였다. 그를 ‘천지간(天地間)의 일괴물(一怪物)’이라고 폄하하던 사람조차도 시를 보는 그의 안목만은 높이 인정하였다. 역대로 가장 훌륭한 엔솔로지(anthology)라는 평가를 들은 『국조시산(國朝詩刪)』을 엮은 것도 바로 그였다. 그는 다채로운 지적 편력을 거쳐, 당대에 성행했던 도교와 내단 수련 방면에도 정심한 이론과 실천을 보였다. 남궁두와 송천옹, 그리고 유형진 등 당대에 이름난 도류(道流)들과 교유하였고, 단학(丹學) 이론에도 밝았다. 스스로 100상자가..
24. 사랑이 어떻더냐 1. 담장가의 발자국 사랑은 아름답다. 슬퍼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슬프다. 평소 한시를 고리타분하게만 생각하다가 막상 가슴 저미는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노래한 정시(情詩)를 대하고는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많다. 흔히 염정시(艶情詩) 또는 향렴체(香匳體)라고도 불리는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정시(情詩)를 감상해보기로 하자. 凌波羅襪去翩翩 비단 버선 사뿐 사뿐 가더니만은一入重門便杳然 중문을 들어서곤 아득히 사라졌네.惟有多情殘雪在 다정할 사 그래도 잔설이 있어屐痕留印短墻邊 그녀의 발자욱이 담장 가에 찍혀 있네. 강세황(姜世晃)의 「노상소견(路上所見)」이란 작품이다. 길을 가다 앞서 가는 어여쁜 아가씨의 뒷모습에 넋을 놓고 만 연모의 노래다. 사뿐사뿐 걸어가는 아..
23. 시(詩)와 역사(歷史): 시사(詩史)와 사시(史詩) 1. 할아버지와 손자 白犬前行黃犬隨 흰둥이 앞서 가고 누렁이 따라가는野田草際塚纍纍 들밭 풀가에는 무덤들 늘어섰네.老翁祭罷田間道 제사 마친 늙은이는 두둑 길에서日暮醉歸扶小兒 손주의 부축 받고 취하여 돌아오네. 이달(李達)의 「제총요(祭塚謠)」란 작품이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광경이다. 흰둥이가 컹컹 짖으며 저만치 앞서 가자 누렁이도 뒤질세라 뒤쫓아 간다. 잠시 두 놈의 장난질에 시선이 집중되는 동안 카메라는 그 뒤에 즐비하게 늘어선 무덤으로 초점을 당긴다. 다시 무덤들이 원경으로 처리되면서 개 짖는 소리 사이로 두 사람이 나타난다. 해질 무렵의 양광(陽光)이 빗기는 가운데 술에 까부룩 취한 할아버지와 그 옆에서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있는 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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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실낙원의 비가(悲歌) 1. 풀잎 끝에 맺힌 이슬 인간에 낙원은 있는가? 낙원은 없다. 따지고 보면 인생은 절망과 비탄의 연속일 뿐이다. 믿었던 것들로부터 배반당하고, 사랑하던 사람마저 하나 둘 떠나보낸 후 빈 들녘을 혼자 헤매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뒤돌아보면 뜻대로 된 일은 하나도 없다. 한나라 때 악부시 「해로(薤露)」는 풀잎 끝에 맺힌 이슬만도 못한 인생을 이렇게 노래한다. 薤上露풀잎 위에 이슬何易晞너무 쉽게 마르네露晞明朝更復落내일아침 이슬은 다시 내리겠지만人死一去何時歸한 번 떠난 사람은 돌아올 줄 모르누나 고대 중국인들이 상여 메고 나갈 때 덧없는 인생을 슬퍼하며 불렀다는 노래다. 중국 위진 시대의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과 마주하게 된다. 人生奇一世 奄..
21. 산수(山水)의 미학(美學), 산수시(山水詩) 1. 가어옹(假漁翁)과 뻐꾸기 은사 天翁尙不貰漁翁천옹(天翁)은 어옹(漁翁)을 받지 않으려는지故遣江湖少順風 일부러 강호에 순풍 적게 보내네.人世險巇君莫笑 인간 세상 험하다 그대여 웃지 마오自家還在急流中 그대 외려 급류의 한가운데 있는 것을. 고려 김극기(金克己)의 「어옹(漁翁)」이다. 어옹(漁翁)은 순풍을 기대하고 강호에 들어왔다. 그런데 뜻밖에 강호에서조차 순풍은 좀체 불 생각을 않는다. 순풍을 잔뜩 기대하고 강호를 찾은 어옹(漁翁)은 강호행(江湖行) 이전 순풍은커녕 역풍에 온갖 고초와 신산(辛酸)을 겪었음에 틀림없다. 현실의 거센 풍파를 피해 강호의 순풍 속에 안기려는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강호에서 조차 순풍은 잘 불어주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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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선시(禪詩), 깨달음의 표정 1. 선사들이 깨달음의 순간 시를 선택하는 이유 언어란 본래 부질없는 도구다. 말로 무언가를 설명하고 남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간다. 툭하면 오해를 낳고, 곁길로 샌다. 옛 시인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고 노래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다. 언불진의(言不盡意), 말은 뜻을 다 전달할 수 없다. 이 생각은 옛 사람들을 늘 절망케 했다. 말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뜻, 말의 범위를 넘어서는 의미는 어떻게 전달되는가? 오묘한 깨달음의 세계는 늘 언어를 저만치 벗어나 있다. 수레 깎던 윤편(輪扁)은 제 자식에게조차 그 기술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주역(周易)』의 대답은 ‘입상진의(立象盡意)’다. 말로 하려들지 말고, 이미지를..
19. 선시(禪詩), 깨달음의 바다 1. 산은 산, 물은 물 노승(老僧)이 30년 전 참선(參禪)하러 왔을 때는 산을 보면 산이었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뒤에 와서 선지식(善知識)을 친견(親見)하고 깨달아 들어간 곳이 있게 되자,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몸뚱이 쉴 곳을 얻으매 예전처럼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일뿐이로다. 성철(性澈) 스님의 법어(法語)로 해서 유명해진 청원유신(靑源惟信) 선사의 공안(公案)이다. 선사(禪師)는 30년간의 수행 끝에 처음 본래 자리로 돌아와 앉아 있다. 그러고 보면 30년의 공력은 본래 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고초일뿐이었다. 한때 눈앞이 번쩍 열리는 깨달음의 빛 속에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때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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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관물론(觀物論), 바라봄의 시학(詩學) 1. 지렁이의 머리는 어느 쪽인가 지렁이를 두고 사람들은 수미(首尾)도 없고 배도 등도 없다고들 말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실지로는 수미(首尾)와 복배(腹背)가 있어 해를 피하고 리(利)에 나아가며, 정욕(情欲)을 모두 갖추고 있다. 옹(翁)은 말한다. 물건의 어리석고 굼뜬 것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하물며 사람과 같이 칠규(七竅)와 오장(五臟)을 하나도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것에게 있어서이겠는가? 말을 듣고 빛깔을 보아 지각함이 어둡지 않은데도, 사람 가운데는 간혹 방향을 잃어 길을 잃는 자가 있으니 슬프다. 지렁이의 머리는 어느 쪽인가? 해를 피해 나아가는 쪽이다. 배는 어느 쪽인가? 바닥에 닿는 쪽이다. 앞에 소금을 뿌려두면 지렁이는 고개를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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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해체의 시학(詩學): 파격시의 세계 1. 요로원(要路院)의 두 선비 절대적 진리도, 선도 없다는 해체주의는 세상 일에 집착하지 않는 일종의 허무주의다. 왜곡된 현실을 왜곡되게 표현하는 해체시에서 온갖 비속어, 욕설 등이 서슴없이 구사되는 언어의 테러리즘을 보게 된다. 해체시의 어조는 진지하지 않고 너무나 유희적이고 거칠다. - 김준오 『도시시와 해체시』 중에서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는 숙종(肅宗)조의 한 시골 선비가 서울서 과거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충남 아산 어름의 요로원에 잠자리를 찾아 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병든 말에 초췌 남루한 행색의 나그네는 가는 곳마다 홀대와 업신여김을 받았다. 그가 여관방에서 서울의 행세하는 집안의 끌끌한 선비와 함께 묵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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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시(詩)와 문자유희(文字遊戱): 한시(漢詩)의 쌍관의(雙關義) 1. 초록 저고리, 국수 한 사발 조선 중기의 학자 김일손(金馹孫)이 젊어 산사(山寺)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그가 띄운 편지 한 통이 장인에게 배달되었는데, 편지의 사연이 야릇하였다. 文王沒 武王出 周公周公 召公召公 太公太公 이를 현대어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문왕(文王)이 돌아가시자, 무왕(武王)이 나오셨네. 주공(周公)이여 주공(周公)이여! 소공(召公)이여 소공(召公)이여! 태공(太公)이여 태공(太公)이여!” 예전 은(殷) 나라가 임금 주(紂)의 포학한 통치로 혼란에 빠지자, 제후였던 문왕(文王)은 어짊으로 백성을 다스려 모든 제후들이 그를 존경하여 따랐다. 그가 세상을 뜬 뒤에도 주(紂)의 포학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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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실험정신과 퍼즐 풀기 1. 빈 칸 채우기, 수시(數詩)ㆍ팔음가(八音歌)ㆍ약명체(藥名體) 부단한 언어의 실험정신, 질곡을 만들어 놓고 그 질곡에서 벗어나기, 언어의 절묘한 직조(織造)가 보여주는 현란한 아름다움, 잡체시는 단순히 이런 것들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오늘의 시단에 던진다. 또한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실험되고 있는 형태시들이 기실은 까맣게 잊고 있던 전통의 재현일 뿐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세상은 이렇듯 돌고 도는 것이며, 우리는 이 모든 현상들 앞에서 수없는 상호 텍스트화를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다. 一生苦沈綿 二月患喉撲 일생동안 병고에 괴로웠는데 이월에도 감기 들어 목이 쉬었네.三夜耿不眠 四大眞是假 삼일 밤을 끙끙대며 잠 못 이루니 사대 등신 멀쩡한 몸 헛것이로다.五旬尙..
14. 놀이하는 인간, 잡체시의 세계 1. 글자로 쌓은 탑 啥豆巴 滿面花 雨打浮沙 蜜蜂錯認家 荔枝核桃苦瓜 滿天星斗打落花 뭐지 콩이야. 얼굴 가득한 꽃 모래밭 빗방울 자국. 꿀벌이 제 집인 줄 알겠네. 여지 열매와 복숭아 씨, 쓴 외 온 하늘의 별들이 지는 꽃잎 때렸나. 이것은 중국 사천 사람들이 곰보를 놀리는 노래이다. 한 글자에서 차례로 한 글자 씩 일곱 자까지 늘여 나갔다. 각 구절의 끝은 같은 운자를 쓰는 면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중국음으로 읽어보면 그 자체로 매우 유쾌한 절주를 형성한다. 처음 무얼까? 하는 의문을 던져 놓고, 바로 콩이지 뭐야 하고 받는다. 다시 그 콩은 얼굴에 핀 꽃을 말하는데, 모래밭에 빗방울이 떨어진 형상과 같다. 벌집 같은 그 모습에 꿀벌도 제 집인양 착각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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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씨가 되는 말, 시참론(詩讖論) 1. 머피의 법칙, 되는 일이 없다 人間細事亦參差 인간의 잗단 일들 언제나 들쭉날쭉動輒違心莫適宜 일마다 어그러져 마땅한 구석 없네.盛世家貧妻常侮 젊을 땐 집 가난해 아내 늘 구박하고殘年祿厚妓將追 늙어 녹이 후해지자 기생이 따르누나.雨陰多是出遊日 주룩주룩 비오는 날 놀러 갈 약속 있고天霽皆吾閑坐時 개었을 땐 언제나 할 일 없어 앉아 있다.腹飽輟飡逢美肉 배불러 상 물리면 좋은 고기 생기고喉瘡忌飮遇深巵 목 헐어 못 마실 때 술자리 벌어지네.儲珍賤末市高價 귀한 물건 싸게 팔자 물건 값이 올라가고宿疾方痊隣有醫 묵은 병 낫고 나니 이웃집이 의원이라.碎小不諧猶類此 자질구레 맞지 않음 오히려 이 같으니楊州駕鶴況堪期 양주 땅 학 탄 신선 어이 기약하리오. 이규보(李奎報)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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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시인(詩人)과 시(詩): 기상론(氣象論) 1. 이런 맛을 아는가? 정약용(丁若鏞)이 쓴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 중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雲牋闊展醉吟遲활짝 펼친 운전지(雲箋紙)에 취중시(醉中詩)가 더디더니 草樹陰濃雨滴時수풀도 잔뜩 흐려 빗방울이 후두둑. 起把如椽盈握筆서가래 같은 붓을 손에 가득 쥐어 들고 沛然揮洒墨淋漓낚아채듯 휘두르니 먹물이 뚝뚝. 不亦快哉또한 유쾌하지 아니한가. 호탕한 임형수 산에 눈이 하얗게 쌓일 때, 검은 돈피 갖옷을 입고 흰 깃이 달린 기다란 화살을 허리에 차고, 팔뚝에는 백 근짜리 센 활을 걸고, 철총마를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골짜기로 들어가면, 긴 바람이 골짜기에서 일어나 초목이 진동하는데, 느닷없이 큰 멧돼지가 놀라서 길을 헤매고 있을 때, 곧 활을..
11. 시인과 궁핍: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론(論) 1. 불평즉명(不平則鳴), 불평(不平)이 있어야 운다 시름이 나를 울게 한다 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할샤 닐러 못다 닐러 불러나 푸돗던가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보리라 신흠(申欽)의 시조이다. 시는 왜 쓰는가? 말로 해서는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을 시름이 있기 때문이다. 말로 해서는 도무지 풀리지 않던 시름도 노래 앞에서는 눈 녹듯 사라진다. 대저 무릇 물건은 그 평(平)을 얻지 못하면 운다. 초목(草木)이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흔들면 운다. 물이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이를 움직이면 운다. 그 솟구치는 것은 혹 부딪치기 때문이요, 그 달리는 것은 혹 막기 때문이며, 그 끓는 것은 혹 불에 데우는 까닭이다. 금석이 소리가 없으나..
10. 시마(詩魔) 이야기 1. 즐거운 손님, 시마(詩魔) 시를 짓지 않고 배길 수 없게 하는 시마 앞에서 이규보(李奎報)의 「시벽(詩癖)」이란 작품을 소개하면서, 시마(詩魔)에 대해 잠시 말한 바 있다. 여기서는 이 시마(詩魔)의 정체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시마(詩魔)란 말 그대로 ‘시 귀신’이다. 이 시마(詩魔)는 어느 순간 시인의 속으로 들어와 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시만 생각하고 시만 짓게 하는 귀신이다. 이 귀신이 한 번 붙고 나면 그 사람은 다른 일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시에만 몰두하게 되며, 짓는 시마다 절창이 아닌 것이 없게 된다. 실제로 예전 시화(詩話)를 보면 이 시마(詩魔)에 관한 삽화를 자주 접할 수 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선조 때 사람 이현욱(李顯..
9. 작시(作詩), 즐거운 괴로움 1. 예술(藝術)과 광기(狂氣) 대상을 향한 미친 듯한 몰두 없이 위대한 예술은 이룩되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하찮은 기교라 할지라도 자신을 온전히 잊는 몰두가 있어야 만이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예로부터 예술의 천재들에게는 스스로도 주체하기 힘든 광기(狂氣)가 있다. 인간의 열정(熱情)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과, 다른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그들 안에서는 느껴진다. 최흥효(崔興孝)는 조선 초의 유명한 명필(名筆)이다. 일찍이 과거를 보러 갔는데, 답안을 쓰다 보니 우연히 한 글자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와 같게 되었다. 넋을 잃고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뚫어지게 그 글자만을 바라보던 그는, 답안지를 차마 제출하지 못하고 그냥 품에 넣고 돌아오고 말았다. 우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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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시안론(詩眼論): 일자사(一字師) 이야기 1. 한 글자를 찾아서 서거정(徐居正)은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무릇 시는 묘(妙)가 한 글자에 달려 있다. 옛 사람은 한 글자를 가지고 스승으로 삼았다[凡詩妙在一字, 古人以一字爲師].”고 하였고, 호자(胡仔)는 『초계어은총화(苕溪漁隱叢話)』에서 “시구는 한 글자가 공교로우면 자연히 빼어나게 되니, 마치 한 낱의 영단(靈丹)으로 돌을 두드려 금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했다. 원매(袁枚)가 『수원시화(隨園詩話)』에서, “시는 한 글자만 고쳐도 경계가 하늘과 땅 차이로 판이한데,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한 것도 다 한 뜻이다. 한 글자가 시를 죽이고 살린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딘가에 있을 꼭 맞는 딱 한 글자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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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정경론(情景論) 1. 가장자리가 없다 山沓水迎 樹雜雲合 산은 첩첩 물은 감돌고 나무들 섞여 있고 구름은 합해지네.目旣往還 心亦吐納 눈길이 갔다가 돌아오면은 마음도 따라서 움직인다네.春日遲遲 秋風颯颯 봄날 해는 느릿느릿 가을바람 스산해라.情往似贈 興來如答 정을 줌은 건네듯이 흥이 읾은 답하는 듯.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 「물색(物色)」의 한 절이다. 산첩첩(山疊疊) 수중중(水重重), 강산은 고운데 제각금의 나무들을 구름이 감싸 안는다.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물인가. 저 나무는 무슨 나무며, 어디까지가 구름인가. 그저 눈앞의 경물이건만 눈길이 한 번 갔다가 돌아오는 사이에 어느새 마음에는 느낌이 자리 잡는다. 사실 하루의 물리적 시간이야 봄가을이 다를 바 없고, 부는 바람 또한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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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즐거운 오독(誤讀), 모호성에 대하여 1. 그리고 사람을 그리다 꿈보다 해몽 언어는 가끔씩 오해를 일으킨다. 필자가 근무하는 대학의 화장실 면전(面前)에 이런 스티커가 붙은 적이 있다. “이단은 당신의 영혼을 노리고 있다.” 그리고는 그 아래 이른바 이단 종파에서 주장하는 상투적 주장을 환기시킨 뒤, 이에 동조하는 여러 교파의 이름을 나열하고, 끝에 가서 ‘김○○ 이단집단대책위원회’라고 써 놓았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이 단체가 이단을 집단으로 대책하는 위원회인지, 이단집단을 대책하는 위원회인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우뚱하곤 했었다. “할머니가죽을드신다”는 “할머니가 죽을 드신다”이냐, 아니면 “할머니, 가죽을 드신다”이냐. “예수가마귀를쫓는다”고 할 때, 예수가 쫓는 것이 마귀인가 까마귀..
5. 버들을 꺾는 뜻은, 한시(漢詩)의 정운미(情韻味) 1. 남포(南浦)의 비밀 사신에게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던 송인(送人) 雨歇長堤草色多 비 개인 긴 둑에 풀빛 고운데送君南浦動悲歌 남포에서 님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別淚年年添綠波 해마다 이별 눈물 푸른 물을 보태나니. 너무나도 유명한 정지상(鄭知常)의 「송인(送人)」이란 작품이다. 필자는 이 시만 보면 고등학교 1학년 국어 첫 시간에 배웠던 이수복 시인의 시,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엔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를 외우던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대동강 가 연광정(練光亭)에는 고금의 시인들이 지은 제영시(題詠詩)가 수없이 많이..
4. 보여주는 시(詩)인 당시(唐詩)와 말하는 시(詩)인 송시(宋詩) 1. 꿈에 세운 시(詩)의 나라 대관재몽유록(大觀齋夢遊錄)을 통해 시 나라에 초대된 심의 시인은 캄캄한 밤에 등불을 들고 어둠 속을 헤매이는 영혼들의 갈 길을 일깨워주는 선지자(先知者)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시인은 그 시대를 물끄러미 비춰주는 거울이어야 하는가. 조선 전기의 문인 심의(沈義)가 지은 「기몽(記夢)」은 「대관재몽유록(大觀齋夢遊錄)」이란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지은이가 얼풋 잠이 들었다가 홀연 한 곳에 이르렀는데, 금빛으로 번쩍이는 화려한 궁궐에는 천성전(天聖殿)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그곳은 천상(天上) 선계(仙界)에 자리 잡은 시(詩)의 왕국(王國)이었다. 이 나라의 왕은 최치원(崔致遠)이고 수상은 을..
3. 언어의 감옥, 입상진의론(立象盡意論) 1. 싱거운 편지 열 두자로 보낸 편지 함경도 안변(安邊) 땅에 벼슬 살러 가 있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서울에 있던 백광훈(白光勳)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반가운 마음에 겉봉을 뜯어보니, 딱 열 두 자 한 줄의 사연이 있었다. 삼천리 밖에서 한 조각구름 사이 밝은 달과 마음으로 친히 지내고 있소.三千里外, 心親一片雲間明月 이만한 사연 전하자고 천리 길에 편지를 띄웠더란 말인가. 그러나 음미할수록 새록새록 정감이 넘나는 뭉클한 사연이다. 한 조각구름 속에 밝은 달이라 했으니, 달은 달이로되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달이다. ‘심친(心親)’이라 하여 그밖에 다른 것에는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음을 보였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이랬거니, 달은 ..
2. 그림과 시 1. 그리지 않고 그리기 ‘대교약졸(大巧若拙)’, 정말 큰 기교는 겉으로 보기에는 언제나 졸렬해 보이는 법이다. 시인의 덤덤한 듯, 툭 내뱉듯이 던지는 한 마디가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예리한 비수가 되어 독자의 의식을 헤집는다. 사의전신(寫意傳神)과 입상진의(立象盡意) 전통적으로 시와 그림은 서로 깊은 연관을 맺어 왔다. 옛말에 ‘시는 소리 있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 없는 시’라 하였다. 특히 한시는 경물의 묘사를 통한 정의(情意)의 포착을 중시하는데, 이는 마치 화가가 화폭 위에 경물을 그리면서 그 속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표현하는 것과 같다. 경물은 객관적 물상에 지나지 않는데, 여기에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얹을 수 있는가. 화가는 말을 할 수 없으므로 경물이 직접 말하게 ..
1. 허공 속으로 난 길 1. 푸른 하늘과 까마귀의 날개빛 표면적 진술에만 집착하는 독자는 시를 읽을 자격이 없다. 행간에 감춰진 함축, 언어와 언어가 만나 부딪치며 속삭이는 순간순간의 스파크, 그런 충전된 에너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생취(生趣)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고정관념이 아닌 열린 가슴으로 세상을 대하라 조선 후기의 문호 연암 박지원의 「답창애(答蒼厓)」란 글에는 마을의 꼬마가 천자문(千字文)을 배우는 데 게으름을 부리자, 선생이 이를 야단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자 꼬마가 대답하는 말이 걸작이다. “하늘을 보면 푸르기만 한데, 하늘 ‘천(天)’ 자(字)는 푸르지가 않으니 그래서 읽기 싫어요[視天蒼蒼, 天字不碧, 是以厭耳]!” 천자문(千字文)을 펼치면 처음 나오는 말이 천지현황(..
지은이의 말 한시는 전달의 특수성 때문에 오늘날 그 효용가치를 상실했다. 한시는 전문 연구자들의 학술적 관심사가 되고 있을 뿐, 이미 가시덤불로 막혀버린 낡은 길이다. 그렇다고 한시가 추구한 정신의 깊이나 미학의 너비마저 덤불 속에 버려둘 수는 없다. 먼지 쌓인 역사의 뒤편에 방치된 채 날로 그 빛이 바래가고 있는 한시에다 신선한 숨결을 불어넣고, 막힌 길을 새로 뚫어 현대적 의미를 밝히는 일은 우리에게 맡겨진 책무다. 이 책은 시 전문지 『현대시학』에 1994년 2월부터 1996년 5월에 걸쳐 연재한 글을 보태어 손질하고 차례를 가다듬어 정리한 것이다. 고전 시학의 정수를 오늘의 시인과 독자들이 좀 더 가깝게 느끼고 접근하게 할 수는 없을까? 한시는 정말로 골동적 가치만을 지닌 퇴영적 문화유산에 지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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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 다이어리 목차 철학자와 영화의 만남 프롤로그 철학의 멘토, 영화의 테라피 1. 철학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 2. 행복한 오독의 막춤 3. 영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삶과 철학이 입맞추는 순간 본문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Susan Sontag): 편집되는 고통, 유통되는 슬픔을 넘어 1. 편집되는 고통, 유통되는 슬픔 2. ‘천재’로 호명되는 순간 ‘죄수’로 호명되다 3. ‘천재’라는 꼬리표가 담을 수 없는 것들 4. 당신의 불행이 당신의 질병을 부른다? 5. 전시되는 고통, 소외되는 인간 6. ‘가위손’을 닮은 천재 소년, 사랑에 빠지다 7. ‘연민’의 마지노선을 넘을 수 있을까 8. 난, 널, 사랑하지 않아…… 9. 나는 두렵다, 진짜 나 자신을, 만나게 될까 봐…… 10. 네 잘못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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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황의 시간을 함께 해준 16명의 철학자와 16편의 영화 이야기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혹은 이야기하기조차 금지된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바로 ‘옛날 옛적에(Once Upon a Time)’의 문화적 파워가 아닐까. 철학자와 영화 사이의 커플 매니저를 자청한 것도, 어쩌면 나 자신이 아주 서툰 이야기꾼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네필 다이어리』는 커다랗게 구멍을 내버린 내 마음의 창 너머로, 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세상을 향해 나 자신의 부끄러운 속내를 속속들이 내보이고야 말았다. 내가 사랑한 철학자들과 함께 관람한 이 영화들이 우리가 이룬 ‘성취’가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것, 우리가 미처 꾸지 못한 꿈들의 잔해를 모아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꿈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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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화 속 주인공과 우리들의 닮은 상처 10대 시절에는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20대 시절이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어엿한(?) 30대가 되자 문득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행복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굳이 순위를 따진다면 다는 ‘대단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결국,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이제는 대단한 사람이나 사랑받는 사람보다 ‘그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임을 절감한다. 『시네필 다이어리』를 연재하면서 나는 미처 ‘좋은 사람’이 되기도 전에 덜컥 ‘행복한 사람’이 되어버린 듯하다. 너무 빨리 글 쓰는 사람의 행복을 알아버린 것 같아, 그 행복만큼 커다란 마음의 빚을 지게 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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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 없는 기다림. 무적의(?) 학습 비법 1. 영화야말로 철하고가 접신할 수 있는 안테나 스무 살 무렵, ‘나는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 때문에 잠 못 이루며 한 3년쯤 산에 들어가 책만 읽다. 오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책을 열심히 못 읽기 때문에 나의 무지가 구원받지 못하는 거라 믿었다. ‘언젠가’ 시간이 허락되면 오직 책장에서만 줄기차게 서식하고 있는 필독도서 리스트를 진정으로 마스터하리라. 그러면 바람직한 지식인까지는 아니어도 부끄러운 책상물림 신세는 변하겠지? 하지만 그 언젠가의 기적은 10여년이 지나도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앞으로도 실현되지 못할 것 같다. 스무 살의 무지막지한 탐독의 욕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최근에야 나는 그 ‘탐독의 불가능성’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내 ..
18. 내 안의 너무 많은 나를 긍정하는 법 일반적으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한나 아렌트 비즐러의 행동은 결코 멀리서만 짝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낭만적 희생이 아니었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책을 판매하는 서점 점원이 선물 포장을 원하시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그건 저를 위한 것입니다(Das ist fur mich).”라고. 과묵하고 냉정해 보이기만 하던 비즐러가 이 영화 속에서 가장 따스하게 웃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멋진 라스트 신은 자신의 희생이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웅변하는 듯하다. 비즐러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타인의 사생활을 낱낱이 도청하며 타인의 삶을 파괴할 만반의 준비를 갖..
17. 감사의 마음을 담아 바칩니다 이젠 뭐든 당신 맘대로 쓸 수 있잖소, 이게 당신이 꿈꾸던 나라 아니었소? 하지만, 이렇게 통일된 연방 독일이 진정으로 예술가들이 원했던 거요? 더 쓸 게 남아 있소? 사람들에겐 더 이상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소. 여긴 진정한 자유가 있는 연방공화국인데 말이오.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독일이 통일된 후 2년이 지나고, 드라이만은 크리스타가 주연을 맡았던 연극을 다른 배우가 공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깊은 회한에 잠긴다. 그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씻어내지 못한 채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듯 보인다. 그는 헴프 장관을 우연히 만나 오랫동안 참았던 질문을 던진다. 왜 나를 연금하지 않았느냐고. 왜 나만은 감시대상에서 제외되었느냐고. 헴프 장관은 코웃음을 치며 ..
16. 아무 것도 아닌 인간 우리 시대의 진정한 난점은 전체주의가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후에도 전체주의의 고유한 형식이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 그렇게 비즐러는 모든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커리어’를 잃고 사회적 지위와 명성까지 함께 잃어버린다. 그는 기계적으로 편지봉투를 뜯는 일만 반복하면서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한다. ‘타인의 편지’를 미리 뜯어보아 감시하는 일 또한 ‘이미 해방된’ 비즐러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남아 있는 자신의 삶을 위해 그 비루한 노동을 견딘다. 그처럼 강인한 인간이라면, 정말 20년 동안이라도, 설사 평생이라도, 그 단조로운 노동을 참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역사적 대격변이 일..
15. 표상의 세계에서 현상의 세계로 아렌트가 학생들에게 했던 첫마디는 “이론은 없습니다. 모든 이론을 잊으세요(No theories. Forget all theories).”였다. 그리고 곧바로, “생각을 중지하라”는 것이 자신이 우리에게 한 말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왜냐하면 “사유와 이론은 같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한 사건에 대한 생각은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은 잊혀지고” 그러한 망각은 우리 세계의 유의미성을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나 아렌트, 제롬 콘 편집, 김선옥 옮김, 『정치의 약속』, 푸른숲, 2007, 『정치의 약속』 편집자 서문 중에서. 비즐러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크리스타와 드라이만을 도왔지만, 죽어가는 크리스..
14. ‘what’을 넘어 ‘who’가 되는 법 근대에 무세계성(worldlessness)이 증가한 것, 즉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소멸한 것은 사막의 확산으로도 묘사할 수 있다. (……) 우리가 사막의 조건에서 고통 받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인간적이며 여전히 본래적이다. 위험한 것은 사막의 진정한 거주자가 되어 거기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한나 아렌트, 제롬 콘 편집, 김선옥 옮김, 『정치의 약속』, 푸른숲, 2007, 246~247쪽. 만신창이가 된 영혼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크리스타. 그녀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억지로 씻어내는 몸짓으로, 남편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샤워실에서 목욕을 한다. 말없이 이틀 동안 외박을 하고도 변명조차 하지 않는 아내를 향해, 드라이만은 대..
13. 예술을 볼모로 소중한 사람의 비밀을 밀고하다 완전히 이해를 포기하는 것, 타자가 타자로서 존재하고 타자로 존재하려고 하는 것을 긍정하는 것,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거리를 줄이지 않는 것, 친밀권은 그러한 타자와의 느슨한 관계의 지속도 가능하게 한다. -사이토 준이치 지음, 윤대석/루수연/윤미란 옮김, 『민주적 공공성』, 이음, 2009, 110쪽. 국가안보부는 끝내 크리스타를 체포하여 그녀가 남편을 밀고하도록 종용한다. 그들은 시작부터 치명적인 발언으로 심약한 크리스타의 감정을 자극한다. “당신은 멍청한 남자와 결혼했어요. 그래서 당신이 누려야 할 자유를 많이 빼앗겼죠.” 크리스타가 불안한 눈망울을 굴리며 신문을 받는 동안, 드라이만은 집안을 수색당하고 있다. 목표물은 바로 드라이만이 『미러』지에 ..
12. 한 사람의 힘 드라이만: (자살한 예르스카에 관한 글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내 원고 괜찮을 것 같지 않나? 친구 1: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어. 친구 2: 이런 글을 여기서는 펴낼 수 없다니, 말도 안 돼. 신이 우릴 버렸나봐. 친구 1: 서독의 잡지사에 보내보는 건 어떻겠나? 거기는 제한규정이 별로 없으니 말야. 드라이만은 드디어 ‘행동’을 감행한다. 모든 것을 걸고 예술가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몸짓, 그것은 글쓰기였다. 이제 이 글쓰기의 ‘수신자’가 바뀐다. 국내의 삼엄한 검열장치를 통과하지 않고 직접 외국의 독자들에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알리는 것이다. 드라이만은 언론계 및 예술계에 있는 친구들과 상의 끝에 서독의 『미러』지에 자신의 글을 싣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한다. 그 과정에서..
11. ‘사이’에 존재하는 법 독일민주공화국은 1977년 이후로 자살자의 통계를 내지 않고 있다. 스스로 죽음에 이른 사람들, 그들은 피 흘리지 않는, 열정이 없는 삶을 참지 못했다. 죽음만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9년 전, 자살통계를 중단한 후, 유럽에서 동독보다 사망률이 높은 나라는 단 하나, 헝가리이다. (……) 오늘 내가 쓰려는 것은 얼마 전 자살한 위대한 극작가 예르스카에 대한 것이다. -영화 『타인이 삶』 중에서, 드라이만의 독백 이제 비즐러가 사용하던 ‘도청용 헤드폰’에서는 단지 ‘감시당하는 자의 신상정보’를 넘어서서, 그 이상의 것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자살한 예술가 예르스카가 선물한 악보를 피아노로 직접 연주하는 드라이만. 드라이만이 연주하는 『선한 사람들을 위한 소나타』는 비즐러..
10. 자신을 소중히 다루는 법 버림받음은 (……) 뿌리 뽑힌 잉여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 뿌리 뽑혔다는 것은 타자가 인정하고 보장하는 장소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잉여자란 세상에 전혀 속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한나 아렌트, 이진우/박미애 옮김, 『전체주의의 기원』, 한길사, 2006, 279쪽. 비즐러는 비로소 자신에게는 없지만 드라이만 부부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그는 남부러울 것 없는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자신의 말을 믿고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오직 자신에게로만 쏟아지는 친밀한 시선의 따스함을 느끼지 못한다. 아렌트는 이 친밀한 시선이 미치는 공간, 즉 친밀권(intimate sphere)을 ‘사회적인 것’의 위력, 그 획일주의의 힘에 저항하기 위..
9. 갈등의 파문이 이는 두 경우 정부는 모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 동독인들은 일인당 평균 매년 2.3켤레의 신발을 사고 3.2권의 책을 읽는다 매년 6,743명의 학생들이 올A로 졸업한다 하지만 공개되지 않는 단 하나의 통계가 있다 자살률. 그건 아마도 자연사로 합산되어 발표될 것이다 국가안보부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라 서독과 비교하여 얼마나 많은 용의자들이 자살을 했는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신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적을 것이다 이것이 모두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 모두가 국가의 안전과 안녕을 위한 것이다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남편 드라이만의 눈을 피해 거물급 정치인 헴프 장관을 만나며 자신의 예술적 생명을 보호받는 크리스타. 드라이만은 아내의 불륜을 알면..
8. 나는(보이지 않는 권력의) ‘대리인’일 뿐인가 우리가 함께 먹는 식사 때마다 ‘자유’도 합석하도록 초대를 받는다. 비록 의자는 빈 채로 있지만 자리만큼은 마련되어 있다. -한나 아렌트, 서유경 옮김, 『과거와 미래 사이』, 푸른숲, 2005, 11쪽. 우리 사회의 각종 갈등 처리비용이 무려 300조라고 한다. 공익광고는 이 무시무시한 갈등의 해결 방안이 서로를 향한 따뜻한 배려와 이해심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말 우리 모두 생글생글 웃으며 친절하게 서로를 존중해주면 저 엄청난 갈등들이 해결될 수 있을까. 갈등은 단지 따스한 휴머니즘의 악수로 망각될 수 있을까. 우리가 각종 공공기관에 ‘민원’을 호소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저희 부서 관할이 아닌데요’ 같은 회피의 낱말들이다. 그렇게 ‘모두의 ..
7. 순전한 무사유 존경받을 만한 사회 전체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히틀러에게 굴복했기 때문에 사회적 행위를 결정할 도덕적 준칙들과 양심을 인도할 종교적 계명들(“살인하지 말라”)은 사실상 소멸해버렸다. 옳고 그름을 여전히 구별할 수 있었던 그 소수의 사람들은 실로 그들 자신의 판단들을 따라서만 나아갔고, 그래서 그들은 아주 자유롭게 행했다.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개별 사건들을 적용할 수 있는, 그들이 지켜야할 규칙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각의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왜냐하면 선례가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규칙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한나 아렌트, 김선옥 옮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400쪽. 유대인 학살의 핵심 책임자 아이히만이 체포된 후 예루살렘으로 압송..
6. 타인의 내면을 파괴하는 기술 알버트: (드라이든의 생일 파티에 참가한 사람들의 모습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이 사람들은 이제 자유를 갈망하지 않는군. 드라이든: (체념한 표정으로) 이 상황에서 우리가 뭘 하겠어요? 사람들은 모든 것에 익숙해져요. 알버트: 그래, 예전엔 참지 못하던 것도 결국 다 받아들이지. 이젠 아무도 변화를 기대하지 않아……. 흔히 예술가의 영감은 저마다의 권태와 절망의 ‘바닥’을 치고 나서 폭발하곤 한다. 루쉰이 오랫동안 절필한 끝에 써낸 걸작 『광인일기』를 쓰기 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는 오랜 칩거 생활에 익숙해졌고, 아무리 혼신의 힘을 다해 글을 써도 아무런 메아리도 돌아오지 않는 세상에 절망했으며, 절망 자체에 익숙해져버려 그 어떤 사회적 활동도 하지 않았다...
5. 감시했을 뿐인데 마음에 동요가 생기다 게슈타포는 신체적인 폭력으로 인간을 파괴했습니다. 게슈타포의 선발 기준은 누가 가장 먼저 노년 여성의 얼굴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주먹으로 칠 수 있는가 였는지요. 하지만 동독의 국가보안부는 달랐어요. 심리학적으로 재능 있고 똑똑한 사람을 선별해서 뽑았죠. 사람들의 내면을 부서뜨릴 수 있는 사람을 뽑았어요. 국가보안부는 내면을 파괴하는 사람들이었고 게슈타포는 몸을 파괴하는 사람들이었죠. 국가보안부에게 감시를 당한 사람들은 사실 희생양으로 인정받기도 힘듭니다. 화려한 상처 같은 게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이 내적인 상처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어요. 겉으로 안 보이는 상처들이 얼마나 정교한 계략에 의해서 생긴 것들이었는지 말..
4. 악당과 영웅이 ‘한 사람’의 몸에 공생하는 법 영웅에게는 어떠한 영웅적 자질도 필요 없다. -한나 아렌트 아렌트는 ‘역사의 법칙’ 같은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인간의 우연적 행위’야말로 중요한 정치적 변수라고 믿었다. 인간을 법칙이나 시스템에 구속시킬수록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여하는 행위의 중요성은 약화된다. 사람들은 시스템의 가면 뒤에 숨어서 자신이 짊어져야할 책임감을 잊기 쉽다. 더구나 ‘국가’라는 커다란 단위로 이루어지는 정치 공간 속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직접 살갗을 부대끼면서 서로를 이해해가는 ‘대면성’의 정치가 실종된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태도는 결국 ‘나 하나’의 가치를 스스로 격하시키는 정치적 행위가 된다. 아렌트는 시민 각각의 ‘대면적’ 참여야말로 탈정치화되고 사생활 중심주의에 빠..
3. 영웅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것 더 이상 이 나라를 참을 수가 없어, 인권도 없고 언론의 자유도 없지 모든 시스템이 날 미치게 해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실제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글을 쓰도록 영감을 주는 것도 같은 시스템이지 우리의 양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진정한 걸작이야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영웅에게는 어떠한 영웅적 자질도 필요 없다. -한나 아렌트 『슈퍼맨』, 『007』, 『스파이더맨』 등 각종 액션 히어로 무비를 보고 난 후 극장을 나오면 갑자기 부쩍 ‘작아지는 나’를 느낀다. 이런 영화들은 현란한 스펙터클로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하찮게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한다. 우리가 얼마나 무력하고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지를 보여주는 ..
2. 정치적 선택 속에서 정체성이 매순간 만들어지고 있다 폭력은 항상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총구로부터, 가장 빠르고 완전한 복종을 가져오는, 가장 효과적인 명령이 나올 수 있다.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은 권력이다. -한나 아렌트 서로가 서로에게 ‘잠재적 파파라치’가 되는 사회. 개인의 자발적 행위 하나하나가 시스템의 질서로 환원되어버리는 세계. 이런 세계에서는 의미 있는 공동체(meaningful community)가 만들어지기 어렵다. 사람들은 타인을 바라볼 때 우선 경계심과 의혹을 먼저 갖게 되며 타인에 대한 선의의 호기심이나 기본적인 배려조차 상실하기 쉽다. 『타인의 삶』이 묘사하고 있는 동독사회뿐 아니라 ‘www’ 시스템으로 이제 실시간으로 서로의 삶을 지치지도 않고 탐색..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너’와 ‘나’를 넘어 ‘그 사이’에 존재하기 위하여 1. 타인의 삶을 빼앗는 기술 결백한 사람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로 오랫동안 심문을 받으면 분노에 휩싸이거나 자살을 하려고 하지. 반면에 죄가 있는 사람은 종종 말하기를 거부하거나 울어댄다. 자신이 그곳에 있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기 때문이지. 유죄인지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걸 인정할 때까지 계속 신문하는 거야.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이곳에서는 모든 시민들에게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그들은 이름이나 성격이 아니라 번호와 기호로 대상화된다. 이곳에서는 누군가의 잘못이 곧 누군가의 감시와 처벌로 즉각 처벌된다. 이곳에 예술은 있지만 예술가의 자유는 없다. 영화 『타인의 삶』은 1984년 동독, 정보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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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돌이킬 수 없는 차이로 인해 내가 더욱 풍요로워지는 그곳 송지원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가족을 되찾게 되고, ‘이한규’의 동생 티가 팍팍 나는 새로운 이름 ‘이상규’도 갖게 되었다. 이한규가 영국에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비행기 표를 선물하고는 자신도 몰래 그 비행기를 탄 이상규-송지원. 언뜻 보아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송지원이 아무리 이상규가 되어도 다가갈 수 없는 ‘평범한 삶’의 아득한 장벽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지만 남파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은 그를 평생 따라다닐 것이다.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의 ‘편’도 아니기에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마음 편히 살 수 없게 된 송지원. 교육비는 물론 생활비 자체가 터무니없이 비싼 한국은 송지원 같은 ‘무리 안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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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나의 존재가 무한히 작아질수록 타인의 고독에 무한히 가까워질 수 있다 인간은 예술 속에 있을 때는 삶 속에 있지 않고, 삶 속에 있을 때는 예술 속에 있지 않다. (……) 내가 예술에서 체험하고 이해한 모든 것이 삶에서 무위로 남게 하지 않으려면 나는 그것들에 대해 나 자신의 삶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책임은 죄과와도 결합되어 있다. 삶과 예술은 서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해 죄과도 떠맡아야 한다. (……) 무책임을 정당화하기 위해 ‘영감’에 의지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삶을 무시하고, 그 자신이 삶에게 무시당하는 영감은 영감이 아니라 사로잡힘이다. (……) 삶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창조하는 것이 더 쉽고, 예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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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간신히 친구가 될 뻔하다가 변신은 개인의 삶 전체를 좀 더 중요한 위기의 순간 속에서 그려내는 방법의 토대가 된다. 그것은 한 개인이 어떻게 과거의 자신과 달라지게 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의 진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한 인간의 위기와 갱생만을 볼 뿐이다. -바흐친, 『소설의 시간 형식과 크로노토프 형식』 중에서 두 사람의 상처가 은밀하게 연대하는 이 순간. 이한규가 송지원으로 인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듯 송지원도 이한규의 시선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변신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 순간. 뜻밖의 사건이 터지고 만다. 국정원 후배의 연락을 받고 급히 외출하는 이한규. 그를 송지원은 조용히 미행한다. 이한규가 달려간 병원 영안실에는 송지원의 친구 손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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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는 네가 아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완전히 사라져버리지는 않는다. 모든 의미는 미래의 어느 날에는 환영파티를 갖게 될 것이다. -미하일 바흐친 이한규에게 칼을 겨눈 송지원의 눈에는 전에 없던 분노와 살기가 서린다. “왜 날 데리고 있었어? 왜 신고 안 했어?” 이한규는 자신을 향해 날카롭게 번득이는 칼을 보고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한다. “너 하나 잡아서 뭐하겠냐? 잡으려면 간첩단 정도는 돼야지.” 가눌 수 없는 분노로 결국 송지원은 이한규의 팔에 상처를 내고 만다. “그래 요샌 나 같은 놈 잡으면 얼마 준답니까?” 이한규는 피가 뚝뚝 흐르는 팔을 부여잡고도 평온한 표정으로 송지원을 진정시킨다. “모든 일이 잘되면, 우리 사업이나 제대로 키워보자.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대박 날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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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상처 입은 사람만이 알아보는 서로 닮은 상처 우리는 타인의 육체를 포옹하거나 덮어주면서 육체 안에 갇혀 있고 육체로 표현되는 그의 영혼을 포옹하거나 덮어주는 것이다. -미하일 바흐친 흔들리는 눈빛 연기가 힘들었다. 겹겹이 싸인 감정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이 답답했다. 상황 상황마다 감독님과 얘기하면서 감정선을 정리하고 이런저런 욕심을 버리고 눈빛으로 많이 표현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캐릭터가 밋밋해질까 걱정도 하고…… 눈으로만 감정을 전달하는 게 힘드니까 나중에는 감독님께 못하겠다면서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배우 강동원 인터뷰 중에서 두 사람은 함께 살면서도 서로의 앞모습보다는 옆모습이나 뒷모습에 익숙하다. 자신의 표정을 숨기고 겹겹이 포장된 상대방의 내면을 읽어야 할 때가 많으므로. 옆모습과 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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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어깨에 무겁게 닻을 내리고 있는 조직 이한규: (송지원이 미행하여 자신의 통화를 도청 중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영국에 있는 딸에게 전화한다.) 알버트가 피아노 가르쳐 줬어? 새 아빠 좋아? 아빠가 더 좋아? 생일 선물로 뭐 갖고 싶어? 디카? 그건 그쪽에도 사도 되잖아. 아빠가 돈 더 보내줄 테니까 엄마한테 사달라고 그래. (명절이라 바쁜 일도 전혀 없으면서) 아빠 바빠서 그만 끊을게. 송지원: (이한규의 통화를 도청하던 중, 깊은 한숨을 내쉰다. 딱히 도청할 내용조차 없는 이한규의 신산한 삶이 안쓰럽다. 지독하게 고독한 저 중년 남자의 뒷모습을 빤히 보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그 순간 송지원의 가명 박기준을 향해 문자메시지가 도착한다.) 이한규가 보낸 문자메시지: 기준아. 저녁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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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에고’와의 내전(內戰) 에고이스트는 마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나 부드러움과 유사한 그 어떤 것도 체험하지 못한다. 문제는 그가 이러한 감정들을 전혀 모른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자기보호는 일체의 사랑스럽고 애틋하며 미적인 요소들을 결여한 차갑고 가혹한 정서적-의지적 태도이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길, 2007, 44~45쪽. 에고이스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수많은 대상 중에 평등하게 ‘자기’를 포함시키는 건 어쩐지 은밀한 반칙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은 본질적으로 ‘타자’를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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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인물에 완전히 동화되지도, 인물과 완전히 거리를 두지도 않는 지탱점 송지원: 그런데…… 부인은 왜 떠나신 거예요? 이한규: (원망도 미움도 남아 있지 않은 표정으로 담담하게) 내가 잘 못 해줘. 애 엄마는 영국인이랑 재혼했어. 알버트라고. 알버트가 애 이름을 영국식으로 지었다는데, 에이미래 에이미. 에이씨! 애 이름을 에이미가 뭐야, 에이미가!! 송지원: (이런 순간에도 특유의 유머를 잃지 않는 이한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렴풋이 웃는다.) 이한규: 돈 많이 벌어서 우리 딸 결혼할 때 집 한 채 해주고 싶어. 송지원: (아빠 얼굴을 한 번도 못 본 자신의 딸을 생각하는 듯, 아련한 눈빛으로) 그러실 수…… 있을 거예요.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또 다른 목소리가 발화하는 순간들이 있다. 분명히 내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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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 나 자신의 입술은 오직 타자의 입술에만 닿을 수 있으며, 오직 타자에게만 나의 손을 올려놓을 수 있으며, 타자만을 적극적으로 딛고 일어설 수 있고, 그의 모든 것을 덮어줄 수 있으며, (……) 그의 육체와 그의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을 덮어줄 수 있는 것이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길, 2007, 74~75쪽. 농부: (아내를 다시 찾아준 이한규와 송지원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표정을 담아) 사례를 해야 할 텐데. 이한규: 찾는 데 200, 데려오는 데 200, 총 400 되겠습니다. 송지원: 부인이 직접 오셨으니까 사례는 필요 없습니다. 이한규: (사장도 아닌 송지원이 제멋대로 사례비를 눈앞에서 공중분해 시키자 어안이 벙벙한 채로 송지원을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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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을 통과하는 동안 제아무리 견고하다 해도 현실은 인간의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므로, 인간은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감각이 바뀌면서 현실이 무르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마련인데, 이를 두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이라고 불렀다. 모든 성인들은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해 그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현실이 오직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다. 하지만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을 경험한 그 다음 순간, 모든 성인들은 감각적 현실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계인지 깨닫게 된다. 현실이 감각적으로만 성립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모든 게 덧없을 뿐이라는 허무주의에 빠져야 할 텐데, 아이로니컬하게도 더욱더 그 감각적인 생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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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너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너를 안다 송지원: (도망간 베트남 처녀를 잡아오는 길. 이한규가 그녀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저기요.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이한규: 한 번 잡은 사람 또 도망가면 그 다음엔 대책이 없어. 송지원: 차가 달리고 있는데 어떻게 도망갑니까? (……) 우리가 경찰도 아니고, 저 사람은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인간적으로 합시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할 때,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버릴 정도로 깊이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아무리 사랑해도 가닿을 수 없는 존재의 견고한 벽을 느끼곤 한다. 그건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 자체의 본성일 것이다. 사랑은 원래 아무리 해도 부족하게 느껴지게 마련이고 사랑을 통해 타인의 벽을 오히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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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두 사람의 빛 지명훈: (수척해진 지원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자수하는 건 어떻겠니? 송지원: 제게 사상교육을 해주신 건 선생님이셨어요. 이제 조국을 배신하라고요? 교수님처럼요? 지명훈: (조국을 배신한 자의 괴로움과 스승으로서의 노여움이 복잡하게 오가는 표정으로) 그만 해라. 송지원: (스승을 상처주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고민을 털어놓을 친구가 필요했던 그는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힌다.) 지난 6년간 도망만 다녔습니다. 이제 무슨 일이든 결단을 내려야죠. 다시 찾아오지 않겠습니다. 그의 얼굴은 조명이 어두울 때 더욱 빛을 발한다. 그의 빛은 쾌활하고 명랑한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빛이 아니라 슬픔과 고독을 공깃돌 삼아 오랫동안 혼자 놀아본 사람의 빛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빛은 언뜻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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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얼굴 위에 새겨진 이야기의 우주 독자는 자신을 주연배우에게 감정이입하고, 주인공을 완결하는 모든 특징들(무엇보다도 주인공의 외양)을 무시하면서 마치 자신이 그 삶의 주인공인 양 주인공의 삶을 체험한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길, 2007, 59쪽. 미술시간에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는 자화상 그리기였다. 거울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하루 종일 거울 앞에 붙어 있어도 내 생김새를 정확하게 포착해낼 수가 없었다. 그림 속에서나마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마구 내 모습을 ‘성형’해보고 싶기도 했고, 명랑만화 주인공처럼 내 모습의 코믹한 부분을 극대화시켜보고도 싶었지만, 온종일 결국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채 멀뚱하게 앉아 있었다. 애꿎은 스케치북에는 좀처럼 알아볼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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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타인의 이해가 어렵다는 걸 이해하는 순간 그림자: (공중화장실 문을 잠그고 송지원과 손태순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엉뚱한 제안을 한다) 춤 한번 춰봐라. 여기 아이들 유행하는 춤. 송지원과 손태순: (그림자의 진의를 몰라 한참 머뭇거린다. 그러다가 둘 다 엄청나게 수줍어하며, 정말 어쩔 수 없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한의 유명 아이돌의 춤을 춘다.) 그림자: 잘한다, 야. 공부하라고 지원해줬더니! (송지원을 가리키며) 네가 더 민첩하니까 넌 나하고 올라간다. (손태순을 가리키며) 넌 아래 있고. 남파 공작원 세 명의 급작스러운 조우를 묘사한 감독의 재치가 번뜩이는 장면이다. 베테랑 공작원 ‘그림자’의 냉혹한 카리스마와 주도면밀한 성격, 송지원의 내성적이고 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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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있는 그대로를 최대한 담담히 보여주기 위해 “당신은 내 전체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 인물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나의 전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당신은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고 계십니다.” 이런 주인공은 작가에게 미결정적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계속하여 다시 태어나며, 계속해서 새로운 완결 형식을 요구하면서도 이 형식을 주인공이 자신의 자의식으로 파괴해버린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길, 2007, 47쪽. 우리가 타인의 인상을 판단할 때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외모와 직업이야말로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정체성의 덫’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의형제』의 주인공 송지원과 이한규는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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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형제와 미하엘 바흐친 피사체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앵글을 찾아서 1. 피사체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앵글을 찾아서 내가 완결되고 사건이 완결되었다면, 나는 살 수 없으며 행동할 수 없다. 살기 위해서는 완결되지 않아야 하며, 자신에게 열려 있어야만 한다. -미하일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길, 2007, 38쪽. 우리는 가족이나 연인, 절친이나 룸메이트처럼 가장 가까운 타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타인을 엿보며 끊임없이 탐색전을 펼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자신도 모르게 신경 쓰며 하루를 보낸다. 소설을 쓰는 작가와 소설 속 주인공의 관계, 영화를 만드는 감독과 주인공의 관계 또한 그렇다. 한 쪽은 끈질기게 엿보고 한 쪽은 좀처럼 자신을 보여주려 하지 않..
17. 타인의 추억을 앓는 산책자를 위하여 맥스는 누들스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이 냄새나는 거리에서 살아갈 거냐고. 이 더러운 거리의 넝마주이 같은 삶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믿었던 맥스는 뉴욕의 화려한 스카이뷰에 감춰진 뒷골목의 기억, 그 거리를 지나간 모든 사람들의 흔적을 담고 있는 더러운 땅바닥의 냄새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더럽고 시끄럽고 정신없는 뒷골목의 분위기야말로 누들스가 그 거리에서 느꼈던 소중한 아우라의 일부였다. 마약에 흠뻑 취해서라도, 그 허망한 환각과 도취 속에서라도 되찾고 싶은 세계의 아우라는 『섹스 앤 더 시티』식의 화려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거리에 단지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거나 소매치기 대상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거리의 부산스러움 자체를 사랑하고, 그 거리만이 지..
16. 되살이 하고 싶은 욕망, 오마주 내가 보고 있는 사물들은, 내가 그 사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폴 발레리 우리는 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 그리워하는 것일까. 뚜렷한 그리움의 대상이 없이도 무언가 아득히 멀리 있는 것을 향한 그리움이 강렬하게 솟구칠 때, 그 그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세상 어디에도 없지만 소설 속에서만은 생생하게 묘사된 도시, ‘무진’을 그리워하듯이, 우리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통해 각인된 머나먼 타인의 체험을 그리워할 수 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ome in America)』의 시대 또한 ‘체험하지 못했지만 얼마든지 그리워할 수 있는’, 현대인의 노스탤지어를 아프게 건드린다. 100년 후에도..
15. 길을 잃어야만 포착할 수 있는 풍경 나는 비 많이 내리는 나라의 왕 같아. 부자이지만 무력하고 아직 젊지만 늙어버려. (……) 사냥가도, 매도, 아무것도 그에게 즐거움 되지 못한다. 발코니 앞에서 죽어가는 자기 백성마저도. 총애 받던 광대의 우스꽝스런 노랫가락도 이 견디기 어려운 병자의 이맛살을 펴지 못한다. 나리꽃으로 수놓은 그의 침상은 무덤으로 바뀌고, 왕이라면 아무나 반해버리는 치장 담당 시녀들이 제 아무리 음란한 치장술을 만들어내도 이 젊은 해골로부터 미소를 끌어내지는 못한다. 그에게 금을 만들어주는 학자마저도 그의 몸에서 썩은 독소를 뽑아내지 못한다. 권력자들이 말년에 갈망하는 로마인들이 전해준 피의 목욕도 그 속에 피 대신 푸른 ‘망각의 강’이 흐르는 이 마비된 송장을 데울 수 없다. ..
14. 욕망의 만화경적 파노라마 완전히 같으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감조차 잡지 못하고 지나쳐 가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을 줄이야! -발터 벤야민 이 영화는 범죄 스릴러 특유의 퍼즐 맞추기식 긴장감을 조성하지도, 남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팜므 파탈을 미화하지도, 마초적 의리와 무책임한 순수를 강조하지도 않는다. 멀리서 바라본다면 그저 암흑가의 갱스터나 할리우드의 셀러브리티(celebrity, 유명인사)로서 확실한 성공가도를 달려온 사람들, 혹은 멀리서 본다면 그저 인생의 실패자이자 뒷골목 룸펜의 전형인 사람들의 삶을 ‘성공 신화’나 ‘피해자의 넋두리’로 그려내지도 않는다. 이 영화는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 남부러울 것 없는 인간이나 남에게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인간, 행복해 보이는 인간이나 불행해 ..
13. 모두 가졌지만 허한 이 느낌은 나는 성스러운 교향곡 속에 잘못 끼어든 불협화음이 아닌가. (……) 나는 상처이며 칼! 나는 따귀 때리기이자 뺨! 나는 깔리는 팔다리이자 짓누르는 바퀴. 또 사형수이자 사형집행관! 나는 내 심장의 흡혈귀, 영원한 웃음의 선고를 받고도 미소 짓지도 못하는 버림받은 중죄인! -보들레르, 「자신을 벌하는 사람」 중에서(윤영애 옮김, 『악의 꽃』, 문학과지성사, 2003) 가장 친한 친구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너무 일찍 삶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누들스. 그가 현실의 고통을 잊는 유일한 방책은 바로 마약이었다. 중국인이 경영하는 아편굴에서 환각에 빠져 있는 누들스는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함으로써 고통을 잊으려 한다. 맥스가 연방은행을 털자는 황당한 계획을 털어놓자,..
12. 꿈의 시체로 만든 별자리들 맥스: 언제까지 이 냄새나는 거리에서 살 거야? 누들스: 난, 이 거리가 좋아. 금주법의 감시망을 피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맥스의 서재는 값비싼 수집품으로 가득하다. 그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휘황찬란한 의자에 앉아 스스로를 암흑가의 제왕으로 임명하는 우스꽝스런 제스쳐도 서슴지 않는다. 오직 한 여자의 사랑을 얻을 정도만큼의 재산 이상은 바라지 않는 낭만주의자 누들스에 비해 맥스의 물욕은 퇴폐와 광기로 얼룩져 있다. 그는 강간이나 살인뿐 아니라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악행을 빠짐없이 저지르면서도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처럼 행동한다. 맥스의 데보라에 대한 마음 또한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값비싼 물건’을 손에 넣고자 하는 수집가의 집착과 다르지..
11. 추악한 것을 도려내는 순간 아름다운 것도 사라진다 시간은 순간순간 나를 삼킨다. 마치 그치지 않고 내리는 눈이 굳은 몸을 덮듯이. -발터 벤야민 이 사회는 동물처럼 우둔하지만 동시에 동물이 가진 희미한 직관은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들은 맹목적인 대중으로서 온갖 위험, 바로 코앞에 닥쳐온 위험에조차 희생당하게 되며, 개인들의 목표와 다양성은 개인들을 규정하는 힘들의 동일성 앞에서는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일방통행로』, 새물결, 2007, 43쪽. 가장 아름다운 것조차 가장 추악한 것 속에 고여 있다. 추악한 것을 도려내는 순간 아름다운 것도 함께 사라진다. 누들스의 삶 자체가 그렇다. 누들스에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은 그의 가장 추악한 기억, 즉 맥스와의 기억과 ..
10. 자본의 찬란한 빛과 자본의 음습한 어둠의 대변자 산책자의 마지막 여행. 그것은 죽음으로의 여행이다. -발터 벤야민 그에게는 ‘현재’가 없다. 그에게는 ‘미래’ 또한 없다. 그에게는 오직 되돌아오는 과거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과거야말로 그의 유일한 ‘현재’다. 문제는 ‘그의 과거’와 ‘사람들의 현재’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들스는 해묵은 과거의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지만, 사람들은 이미 각자의 생생한 현재 속에서 과거 따위는 잊고 살아간다. 그래서 노인이 된 누들스를 뜻하지 않게 재회한 옛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길을 걷다 유령과 마주친 듯 놀란 표정이다. 누들스는 그가 자라난 도시에서 사실 이제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철지난 유령이 되어버린 것이다...
9. 매일 눈앞에서 볼 수 있는데 가질 수 없다니 세계를 완전히 분해해 다시 조립해보려고 했지만 고립무원 속에서 진행되다가 결국 우주론적 ‘실패’로 끝나고만 그(벤야민)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과 작업은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실패한’ 20세기를 정직하게 되돌아볼 수 있는 새로운 사유의 용광로가 되어줄 것이다. -조형준, 『아케이드 프로젝트』, 한국어판 옮긴이 서문 중에서 보시오, 그러나 만지지 마시오! 이것이 벤야민의 ‘만보객’ 혹은 ‘산책자’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이었다. 마음껏 바라볼 수는 있지만 결코 만져서는 안 될 무엇. 마음껏 바라볼 수 있기에 만질 수 없는 고통이 더욱 커지는 대상. ‘화폐’로 구입하여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다면 쉽게 만져볼 수 없는 상품들. 누들스에게 더없이 소중..
8. 멜랑콜리의 도시 바로 지금 삶을 구성하는 힘은 신념이 아니라 사실이다. -발터 벤야민 아마도 누들스의 삶을 구성하는 ‘사실’만을 모아, 아무런 은유도 해석도 없이 건조한 다큐멘터리로 만든다면, 그의 삶은 ‘실패한 갱스터의 나쁜 예’에 불과할 것이다. 그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관객의 동경과 누들스 그 자신의 덧없는 기억에 대한 짙은 멜랑콜리(melancholy, 우울)다. 동경이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어려운 머나먼 존재에 대한 물증 없는 판타지라면, 멜랑콜리는 자신의 것일 수밖에 없는 슬픔에 대한 뼛속 깊은 자기연민이 아닐까. 누들스가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향한 깊은 멜랑콜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사회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7. 기억의 별자리, 그릴수록 희미해지는…… 이야기는 참으로 오래된 소통 형식이다. 이야기는 정보처럼 순수한 사건 자체를 전달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말하는 사람의 삶 속에 뿌리박혀 듣는 사람의 경험으로 전달된다.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 중에서 누들스는 이 도시가 버린 모든 것의 상징이다. 이 도시가 내동댕이친 모든 허접쓰레기들이 누들스를 키운 문화적 자양분이었다. 그는 거지와 매춘부와 소매치기와 넝마주이와 조직폭력배들 틈바구니에서 자라났고, 그들 모두의 버려진 삶이야말로 누들스가 매일 등교했던 ‘내면의 학교’였다. 이 내면의 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이라는 점에서 누들스와 맥스는 서로 통했지만, 둘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갔다. 누들스는 맥스에게 돈가방과 데보라와 친구..
6. 방황의 기술을 연구하다 한때 파스칼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는 사람만큼 불쌍하게 죽는 사람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억의 경우에도 이 말은 그대로 해당될 것임에 틀림없다. 단지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기억은 상속자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 183쪽. 누들스의 기억을 촉발하는 세 번째 매개체는 ‘돈가방’이다. 도망 중이던 그가 기차역에서 찾아가기로 했던 돈가방. 그 안에는 그의 인생을 걸고 벌였던 커다란 도박판의 승리를 증명하는 돈다발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의 미래를 보장해줄 것으로 믿었던 그 돈가방에는 마치 그의 꿈을 조롱하듯 철 지난 신문뭉치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 돈다발을 가져가버린 것은 둘도 없는 친구 맥스였고, 그 돈가방을 통해 누들스가 ..
5. 가장 순수했을 때 사랑했던 단 한 사람과의 추억 나타나기만 하면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지는 요정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러나 자기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를 기억해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도 거의 없다. -발터 벤야민, 『겨울날 아침』 중에서 이제는 그만 둔감해질 때도 되었는데. 누군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아주 사소한 자극이 다시금 옛 기억을 건드리기만 해도, 간신히 봉합해놓은 영혼의 상처는 불현듯 속절없이 파열되고 만다. 내가 가장 순수했을 때, 어떤 배신과 굴욕에도 영혼의 관통상을 입지 않았을 때. 바로 그때 사랑했던 단 한 사람과의 추억. 그 이후의 어떤 화려한 추억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이 세상 하나뿐인 맨 처음의 아..
4. 단순한 회고가 아닌 기억의 끊임없는 다시 쓰기 나의 어머니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나의 반항심과 나의 얼뜬 거리 배회를 꾸짖었는데, 이때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도시의 거리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언젠가는 어머니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어렴풋하게 감지하였다. 아무튼 어머니와 어머니가 속한 계급, 그리고 나 자신이 속한 계급을 거부하고자 하는 감정 —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감정은 따지고 보면 그런 척하는 감정이었지만 — 은 어느 거리에서 창녀에게 말을 거는, 그 어떤 것에도 비견될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드는 원인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벤야민, 『거지와 창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1, 21쪽. 누들스에게 유년의 기억을 촉발하는 첫 번째 매개체는 ‘시체’다. 한때 ..
3. 남루하고 비참한 어른이 되어서야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이미 사냥꾼이 되어 있다. 아이는 사물 속에서 영혼들의 흔적을 냄새 맡고 그것들을 추적한다. (……) 숲으로부터 아이는 전리품을 집으로 끌고 와 그것을 깨끗이 하고 딱딱하게 만들고, 그것들에게 걸린 마법을 풀어버린다.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일방통행로』, 새물결, 2007, 90쪽. 어린 시절 누들스, 짝눈, 팻시, 뚱보는 함께 뒷골목을 어울려 다니며 좀도둑질을 일삼는다.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 인사불성이 된 주정뱅이의 시계를 훔치려던 누들스는 프랑스에서 이제 막 이민 온 낯선 소년 맥스에게 선수를 빼앗긴다. 이 인연으로 친구가 된 누들스와 맥스는 이후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절친’이 된다. 누들스 일당은 맥스와 함께 갱단의 ..
2. 어린 시절 그대로 남은 게 하나 없지만 아이의 책상 서랍은 무기이자 동물원, 범죄 박물관이자 납골당이다. (……) 아이의 삶에서는 끔찍하고 기괴하고 암울한 측면이 보인다. 교육자들은 아직 루소의 꿈에 매달려 있지만 링겔네츠 같은 작가나 클레 같은 작가는 아이들의 포악하고 비인간적인 측면을 포착했다. -발터 벤야민, 『오래된 장난감들』 중에서 시궁창 밑바닥에서 인생을 시작한 주인공이 최고의 자리를 꿈꾸다가, 최고의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을 때, 혹은 최고가 되자마자 처절하게 몰락하는 스토리는 갱스터 무비의 전형이다. 실제로 미국 영화에서 갱스터 무비의 원형이 확립된 시기는 1930년대, 대공황의 광기가 휩쓸던 암흑기였다고 한다. 1930년대 하면 떠오르는 대공황과 금주법을 배경으로 하면서 갱스터 무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타인의 추억을 앓는 산책자를 위하여 1. 부랑자들, 혹은 비정한 도시의 산책자들 국가는 전당포와 복권으로 프롤레타리아를 농락한다. 오른손이 베푼 것을 왼손이 빼앗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이 소년들은 도시의 쓰레기와 찌꺼기와 잔해들을 먹고 산다. 사람들이 무심코 버린 모든 쓰레기들이 이 소년들에게는 ‘사업’의 대상이 된다. 이 소년들은 이 도시의 비밀을 신문이나 뉴스가 아닌 ‘온몸의 감촉’으로 속속들이 알고 있다. 만약 이 도시에서 오늘 일어난 살인, 절도, 방화 사건의 원인이 궁금하다면 경찰이나 교사나 공무원보다는 이 소년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 도시의 가장 맛있는 빵집을 알고 싶거나,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를 알고 싶을 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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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몽상의 스트레칭, 이성의 근육 이완법 우리가 어떤 사람을 바라보면,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 그 사람의 시선은 자신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로 향하게 된다. 우리가 바라보는 어떤 대상에게 아우라를 느끼는 것은 결국 그 사물에 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벤야민, 『보들레르에 대한 몇 가지 주석』 중에서 몽상의 세계는 의식에 발 딛고 무의식의 세계를 갈망한다는 점에서, 무의식의 환상을 체현하면서도 의식의 감각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예술가의 창조 작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화가가 자신의 몽상을 캔버스 위에 실현하는 순간, 그는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로 흔들린다. 환상과 의식 사이,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몽상을 특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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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기적적인 찰나의 순간, 수직적 시간 이윽고 시시신이 스러져간 대지 위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숲, 모든 것이 불타버린, 이제는 ‘숲’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거대한 폐허 위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꽃과 나무와 식물들이 피어오른다. 시시신을 해묵은 전설의 귀신쯤으로 여기던 사람들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 수군거린다. “시시신은 싹을 틔우는 신이었나 봐…….” “시시신은 꽃을 피어나게 하는 신이었나 봐…….” 모두가 이 숲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마법처럼 피어오르는 꽃들을 바라보며 행복해 한다. 자신을 겨냥하는 에보시의 화승총 위에까지 아름다운 꽃을 피워 올렸던 시시신의 넋은 그렇게 아름답게 부활했다. 그는 자신의 온몸을 대지에 공양하여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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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시시신을 죽이다 팽팽한 활의 떨리는 활시위여 달빛에 수런거리는 그대의 마음 예리하게 연마한 칼날의 그 아름다운 칼끝을 닮은 그대의 옆얼굴 슬픔과 분노에 숨어있는 진실한 마음을 아는 자는 숲의 정령 모노노케(원령)들뿐 모노노케들뿐…… -『원령공주』의 주제곡 중에서 재앙신의 몸에서 솟아오르는 저주의 촉수에 갇혀 함께 재앙신이 되어버릴 위기에 처한 원령공주. 에보시를 설득하고 원령공주를 구해내려는 아시타카. 아시타카의 충언에 아랑곳 않고 시시신을 기어코 살해하려는 에보시. 그리고 에보시의 군사들과 옷코토누시의 멧돼지들과 들개들. 이 모두가 벌이는 전쟁의 아수라로 숲은 짓밟히고 불탄다. “숲과 마을이 함께 살 수는 없나요?” 아시타카는 만나는 사람마다, 들개마다, 멧돼지마다 붙들고 이렇게 질문하지만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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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균형이 깨져버린 숲 한편 에보시의 군대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를 피워 올려 멧돼지를 숲 밖으로 유인하여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책을 세운다. 모로는 멧돼지 부족의 최후를 예견한다. “옷코토누시는 다 알면서도 정면공격할 거야. 그게 멧돼지의 긍지라고. 마지막 한 마리까지 덤비고 쓰러지겠지.” 원령공주는 모로의 품에 안기며 눈물을 글썽인다. “엄마, 난 떠나야겠어. 옷코토누시의 눈이 되어줄래. 그는 연기 때문에 제대로 달릴 수도 없을 테니.” 모로는 사랑하는 딸 ‘산’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만 같은 슬픈 예감을 뒤로 하고 딸을 위로해준다. “난 괜찮다. 넌 저 젊은이와 함께 살 수 있는 길도 있을 텐데…….” 원령공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인간은 싫어.” 이때 아시타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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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더 커다란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두려움을 잊다 멈출 수 없는 총알이 관통할 수 없는 벽에 가닿을 때, 우리는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정확히 바로 이 지점에서 성장이 일어난다. 융은 “상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그의 다음 성장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다”라고 말했다. 자아(ego)란 망치와 모루 사이에 있는 금속 같은 것이다. -로버트 존슨, 고혜경 역,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에코의 서재, 2008, 117쪽. 아시타카에게 ‘관통할 수 없는 벽’은 바로 인간도 들개도 아닌 원령공주였다. 그러나 아시타카도 원령공주의 강철 방어벽 못지않은 힘으로 돌진하는, ‘멈출 수 없는 총알’이었다. 아시타카는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에 맞섬으로써 통과의례의 마지막 장벽을, 이제껏 그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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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상생과 적대 한편 아시타카가 깨어나는 순간 거대한 멧돼지들의 무리가 원령공주와 모로를 방문한다. 에보시의 손아귀에 곧 파괴당할 위기에 놓인 시시신의 숲을 지키려고 왔다는 멧돼지들, 그 커다란 무리를 이끄는 수장은 ‘옷코토누시’다. 원령공주의 ‘엄마’인 들개 모로. 모로는 낯선 인간 아시타카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옷코토누시에게 말한다. “시시신이 이 청년의 상처를 치료해줬어 그래서 안 죽이고 돌려보낸다.” 옷코토누시는 대경실색한다. “시시신이 인간을 구했다고? 인간은 살리면서 왜 ‘나고신’은 구해주지 않았나? 시시신은 숲의 수호신이지 않은가?” 재앙신이 되어 아시타카의 마을을 공격한 거대한 멧돼지가 바로 ‘나고신’이었던 것이다. 모로는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타이른다. “시시신은 생명을 구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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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니무스의 눈물, 아니마의 미소 나의 가치를 키우려면, 그대의 사랑을 더 키우라(Make thy love larger to enlarge my worth)! -엘리자벳 브라우닝 몽상가의 몽상은 전 우주를 꿈꾸게 할 수 있다. 몽상가의 휴식은 물, 구름, 미풍을 쉬게 할 수 있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76~77쪽. 우리의 휴식의 원리인 아니마는 그 자체로 충족되는 우리 속의 본성이다. 그것은 조용한 여성성이다. 우리의 깊은 몽상의 원리인 아니마는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물’의 존재이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82~83쪽. 아시타카가 원령공주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시간. 그가 죽음과 삶의 경계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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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자아의 그림자를 만나다 『원령공주』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낸 숲의 수호신 시시신은 아마도 바슐라르적 몽상의 힘이 다다를 수 있는 상상력의 극단일 것이다. 생명력으로 충만하던 원령공주의 숲에 밤이 깃드는 시간. 시시신이 거대한 몸집을 지닌 푸르고 투명한 데다라신의 모습으로 변해 아름다운 숲을 거니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몽상의 세포가 깨어나는 시간. 대지와 휴식의 몽상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아시타카는 시시신의 물속에서 치유의 밤을 맞이하고 있다. 사경을 헤매는 아시타카 가까이로, 시시신이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그의 발자국 위에 아름다운 꽃과 식물이 피어난다. 시시신이 아시타카의 상처를 천천히 핥아주자 사경을 헤매던 아시타카는 거짓말처럼 상처를 딛고 일어난다. 어느새 마술처럼 돋아난 새살에 아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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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명의 진보 vs 몽상의 몰락 범선이나 증기선을 발명한다는 것은 곧 난파를 발명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열차의 발명은 탈선의 발명이며, 자가용의 발명은 고속도로 위에서 일어나는 연쇄 충돌의 발명이고, 비행기의 발명은 곧 추락의 발명이다. -폴 비릴리오, 『미지수(Unknown Quantity)』, 2003, 24쪽. 진보의 핵심은 시간의 불가역성이다. 기차가 발명되어 교통 시스템이 일단 바뀌고 나면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나룻배의 낭만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기차로 정상적인 통행을 할 수 있을 때’, ‘여분의 쾌락’을 찾아나서는 감정의 사치에 속한다. 기차의 속도에 일단 길들어지면, 처음에는 공포와 경탄의 대상이었던 기차도 어느새 당연한 습관이 된다. 기차보다 조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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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몽상의 여유가 없는 이들 몽상이 우리의 휴식을 강조하러 올 때는 온 우주가 우리의 행복에 기여하러 오는 것이다. 잘 꿈꾸려는 자에겐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선 행복하세요. 그러면 몽상이 자기의 진정한 운명을 답파(踏破)한다. 그것은 시적 몽상이 된다. 그 시적 몽상을 통해, 그것 속에서 모든 것은 아름답게 된다. 몽상가가 ‘손재주’를 가지고 있으면 자기의 몽상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작품은 웅장할 것인데 왜냐하면 꿈속의 세계란 자동적으로 웅장하기 때문이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22쪽. 에보시의 총탄에 맞은 들개 모로의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한밤중에 타타라 마을에 잠입한 원령공주. 에보시 일족은 모두 모여 원령공주와 들개들의 침입에 맞서고, 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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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협소해져버린 문명인의 상상력 한편 아시타카는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힌 재앙신이 바로 타타라 마을의 부족장 에보시의 총에 맞아 한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에보시가 가져온 풍요로운 삶에 만족하여 그녀를 향한 절대적인 응원을 보낸다. 화승총을 비롯한 무기 제작 기술에 뛰어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불로 연마한 철’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자연의 힘에 조화롭게 순응하던 인간이 ‘자연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된 상징적인 이미지다. 불과 철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게 된 인간은 무기와 농기구를 비롯한 각종 첨단의 문명을 발전시키게 된다. 아시타카는 타타라 마을 사람들이 추앙하는 에보시의 총에 맞은 멧돼지신이 재앙신으로 변했다는 사실, 재앙신의 저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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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숲을 정복하려는 사람들과 지키는 늑대 반 고흐의 황색은 연금술적인 황금이며, 무수한 꽃으로부터 채취되어 햇빛에 굳어진 꿀과 같이 만들어진 황금이다. 그것은 결코 단순히 밀이나 불꽃이나 밀짚의자의 황금빛이 아니다. 천재의 한없는 꿈에 의해 영원히 개성화된 황금빛이다. 그것은 이미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재산, 한 인간의 마음, 전 생애를 통한 응시(凝視) 속에서 발견된 근원적인 진실이다. -바슐라르, 김현 역, 『꿈꿀 권리』, 열화당, 1995, 72쪽. 그저 단순한 노란색이 아니라 반드시 ‘고흐빛 노랑’이라 불러야 할 것만 같은 빛깔 앞에서 우리는 흐뭇이 미소를 흘린다. 단지 물감이 아니라 ‘무수한 꽃으로부터 채취되어 햇빛에 굳어진 꿀’을 바른 듯한, 이 세상 하나뿐인 황금빛의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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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4시간 ‘ON AIR’의 세계에서 길을 잃다 나의 수줍은 램프를 격려하려고 광대한 밤이 그 모든 별들을 켠다 -타고르, 『반딧불』 중에서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보면, 전기가 어둠을 서양의 바깥으로 몰아낸 것을 뚜렷이 감지할 수 있어. (……) 성서에는 빛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고 묘사되었는데, 이와 반대로 여기에서는 빛이 어둠을 몰아내네. (……) 파괴된 도시들의 운명에 대한 근심으로 예언자들이 비탄에 잠겨 울부짖던 옛날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는 숲이나 사막, 카르투지오회의 수도원과 사원, 사유하기에 좋은 정적과 고독 등의 상실과 파괴를 슬퍼하고 있어. 도시-빛은 어두움 속으로 파고들고, 떠들썩한 소란으로 고요함을 깨뜨리고, 자연의 침묵에 문자를 들러붙게 하고, 생물을 멸종시키지.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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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균 없는 곳에서는 상상력이 배양되지 않는다? 객관적 인식의 측면에서는 진실한 것이 아니지만 무의식적 몽상에서는 매우 실재적이고 활발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 꿈은 경험보다 더욱 더 강력하다.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중에서 바슐라르는 어느 날 정원에서 둥지를 틀고 알을 품은 새를 발견한다. 알을 품고 있지만 않았다면 부리나케 도망갔겠지만, 품고 있는 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새는 인간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묵묵히 버틴다. 바슐라르는 그 새가 몸을 바르르 떨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차마 도망칠 순 없지만 인간에 대한 두려움까지는 숨기지 못하는 새의 마음이 고스란히 바슐라르에게 전해진다. 그는 『공간의 시학』에서 이때의 경험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새를 그렇게 떨게 했기 때문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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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창조적 몽상은 너와 나의 ‘다름’에서 시작된다 1. 설명하고 분석할 수 있는 이미지는 이미지가 아니다 나는 바슐라르를 대할 때마다 경탄을 금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딛고 있는 문명을 정면으로 부인한 사람이다. 그는 서구 인식 전체를 향해 덫을 놓은 사람이다. -미셸 푸코, 바슐라르 탄생 100주년 기념 인터뷰 중에서 실용적 과학교육에서 철학교육으로 옮겨왔건만, 나는 완전히 행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불만족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지요. 어느 날 디종(프랑스 도시 이름)에서 한 학생이 ‘나의 살균된 세계’를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건 하나의 계시였어요. 사람은 살균된 세계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는 법이지요. 그 세계에 생명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미생물 세균들을 들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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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샤헤일루와 미메시스와 브리콜라주 고고학은 수만 년 동안 현생인류의 마음의 구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는 것을 밝혀왔다. 인류의 마음 밑바닥에는 야생의 꽃이 피는 들판이 지금도 존재하는 것이다.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옮김, 『대칭성 인류학』, 동아시아, 2005, 323쪽. 이 전쟁에 지더라도 ‘배신자’ 제이크만은 확실히 처단할 태세인 쿼리치 대령은 사력을 다해 제이크에게 돌진한다. 쿼리치는 ‘아바타’와 ‘원본’ 사이의 링크를 끊어버리고 원본의 제이크마저 판도라의 유독가스에 노출시켜 죽이려 한다. 제이크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네이티리는 목숨을 걸고 쿼리치에 맞서 그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아바타’의 링크가 끊어졌지만, 네이티리는 ‘원본’인 제이크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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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I will fly with you…… 제이크: 쯔테이. 당신 도움이 필요해. 나와 함께 싸워 주겠나? 쯔테이: 당신과 함께 날겠소. 신화는 인간과 풍토가, 시간과 공간이 빚어낸 영혼의 성감대지. -최인훈, 『회색인』 중에서 제이크는 자신의 힘으로 제6대 토루크 막토가 됨과 동시에 드디어 나비족의 일원이 된다. 그는 쯔테이와 함께 인간들과의 총력전을 지휘하며 나비족뿐 아니라 판도라 행성에 사는 다양한 부족들을 연합하는 데 성공한다. 급속도로 늘어나는 판도라의 전사들을 보면서 당황한 쿼리치 대령은 총력전을 계획하며 부하들을 다그친다. 그는 나비족의 믿음의 원천인 영혼의 나무를 공격하여 나비족들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충격과 공포’를 심어 주려한다. 쿼리치 대령은 나비족의 믿음의 원천을 조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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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과학의 끝에서 신화를 만나다 제이크: (영화가 시작된 직후, 제이크의 내레이션) 형은 대단한 과학자이지만 나는 부상당해 다리로 못 쓰는 퇴역 군인일 뿐이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내가 받는 연금으론 다리를 고칠 수 없다. 지구에선 자유를 위해 싸우던 군인이었지만 여기선 회사에 고용된 용병일 뿐이다. 쿼리치 대령: (아바타 프로그램에 지원한 병사들을 겁주며) 지옥도 여기에 비하면 휴양지나 다름없지.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가 제군들을 간식으로 먹어치울 것이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 중얼거리던 제이크가 이제는 자신이 ‘박멸’해야 할 적군의 리더, 나비족의 열혈 전사가 되었다. 판도라에서 나비족의 일원이 되지 않았다면, 제이크는 ‘다리도 쓰지 못하는 퇴역군인’이라는 사회가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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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I See You 에리봉: 당신은 자신의 자아를 잘 모른다고 생각합니까? 레비스트로스: 거의 몰라요. 에리봉: 그 점은 당신에게만 고유한 것인가요, 아니면 인류 정신의 특성인가요? 레비스트로스: 그게 나만의 특성이라고 자부하진 않겠어요. 개인적인 정체성의 감정을 우리에게 부과한 것은 바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 사회는 당신이 어떠 어떠한 사람이기를 원하며, 그 사람이 자신이 행하고 말하는 바의 책임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회적인 압력이 없다면, 개인적인 청체성의 감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체험한다고 믿는 것처럼 강렬하지는 않다고 확신해요. -디디에 에리봉 대담, 송태현 역,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강, 2003, 257~258쪽. 사경을 헤매는 그레이스 박사를 바라보며 제이크는 고민에 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