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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대상으로서의 실천 첫째는 ‘대상’으로서의 실천입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첫번째 테제에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 ―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포함하여 ― 의 주요한 결함은 대상, 현실을 객체의 형식으로만 파악했고 그것을 실천으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는 대상, 현실을 실천이란 형태로 파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포이어바흐는 “인간이란 자기가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인간이란 단백질 덩어리란 말이죠. 이 극단적인 문장에서 포이어바흐가 생각하는 유물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래서 그의 유물론을 흔히 ‘기계적 유물론’이라고 하지요. 맑스가 보기에 이런 유물론은 대상이나 현실을 단백질처럼,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고정적인 객체로..
1. 맑스 : 역사유물론과 근대철학 맑스의 ‘유물론 비판’ 맑스가 관념론을 비판했다는 사실은, 그가 유물론자였다는 사실만큼이나 유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물론자’ 맑스가 사실은 유물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했다는 주장을 한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맑스가 근대철학과 근본적인 구획선을 그으면서 달라지는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맑스는 ‘실천’이란 개념을 철학에 끌어들인 장본인입니다. 또한 근대 철학을 해체하는 데 맑스가 사용하는 결정적인 개념 역시 ‘실천’입니다. 다시 말해 실천이란 개념을 통해 맑스는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을 넘어섭니다. ▲ 빈약한 부엌 브뤼겔(Brueghel/Bruegel)의 그림 「빈약한 부엌」(Die magere Kiche)이다. 브뤼겔은 장애인이나 아이들의..
제4부 근대철학의 해체 : 맑스, 프로이트, 니체 지금까지 초기 대륙의 이성주의 철학과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 그리고 독일 고전철학을 보았습니다. 그 속에서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이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이 야기하는 딜레마는 무엇이었고, 그로 인해 생긴 난점들은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과 연관해서 근대철학자들의 대처는 어떠했는지 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근대철학이 그 근본적인 딜레마로 인해 위기에 처하게 되는 과정과 그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에 의해 새로운 사고방식들이 출현하는 과정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이 역동적 과정을 통해 근대철학의 역사가 어떻게 풍부하게 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했듯이 근대철학 내부에 있는 그 딜레마는 근대적 문제설정 안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
‘철학의 종말’, 근대철학의 종말 그렇지만 근대적 문제설정 안에 있었던 헤겔로선 또 다른 딜레마를 절감하게 됩니다. 진리란 스스로 돌아보며 자기가 갖고 있는 기준을 계속 정정해 가는 과정이라는 헤겔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헤겔이 생각해낸 이 진리의 기준 역시 이후 정정되고 폐기될 수 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헤겔 자신이 제시한 진리의 기준은 초역사적으로 타당하다고 하는 순간, 진리의 기준이 정정되어 가는 과정을 통찰한 헤겔 자신의 진리 개념은 장벽에 부닥칩니다. 이는 논리적인 난점이지만, 사실 진리 개념에 대한 입론을 제출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난점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기준 자체의 정정 과정을 파악하는 입론의 현실성이요 효과니까요. 그러나 확고한 진리를 추구하는 근대적 문제..
근대철학을 정점에 올리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이러한 헤겔의 사상은 스피노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입니다. 우선 셸링의 자연철학 자체가 그렇습니다. 자연을 정신으로 간주하는 관점은 자연을 실체의 양태로 간주하는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유추한 것입니다. 헤겔에게 절대자(절대정신)란 스피노자식으로 표현하면 ‘실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외화되어 만들어내는 자연, 사회, 역사는 스피노자 개념에서 ‘양태’에 해당되지요. 한마디로 말하면 스피노자의 실체/양태 개념을 주체와 객체의 통일성을 이루어가는 목적론적 과정에 적용한 것입니다. 다른 한편 지식과 진리에 대한 변증법 역시 그렇습니다. 헤겔은 진리에 대한 판단에 앞서 진리의 기준을 미리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스피노자의 명제를 받아들여..
지식과 진리의 변증법 그러면 이러한 관점에서 헤겔은 진리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까요? 이와 관련해 우리는 헤겔이 말하는 지식과 진리의 변증법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헤겔에게 현실은 주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다시 말해 인식의 대상은 주체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이를 의식 내부에 있는 거라고 표현하지요. 이러한 사고법은 피히테에게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모르는 것을 먹을 대상이라고 생각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먹을 수 있고,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은 지식을 “대상에 대한 주체의 연관”이라고 정의합니다. 물론 이것은 의식 내에서 만들어지는 연관입니다. 그렇지만 피히테와 달리 헤겔은 대상을 정립하는..
‘절대정신’의 변증법 헤겔 역시 사물 자체와 주관, 현실과 주체를 분리시키지 않기 위해선 근원적인 통일을 처음부터 설정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피히테는 이 근원적인 통일을 ‘자아’를 절대화해서 만들어냈지요. 하지만 헤겔이 주목하는 건 오히려 친구였던 셸링의 방법입니다. 셸링 역시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을 ‘절대자’라고 생각하며, 그런 절대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히테의 생각처럼 자아가 비아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비아가 자아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피히테와 달리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자아를 근거로 자연을 도출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비판합니다. 오히려 주체-객체의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자연을 주체화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즉 자연이 곧 주..
3. 헤겔 : 정점에 선 근대철학 비판철학과 헤겔 헤겔은 ‘변증법’이란 이름이 살아 있는 한 그 이름을 잊기는 어려울 정도로 변증법적 사고를 체계화한 철학자로 유명합니다. 특히 헤겔의 제자임을 자처했던 맑스를 통해서, 그리고 맑스주의 내의 유수한 철학자들을 통해서 헤겔은 헤겔철학의 영역 밖으로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해 왔습니다. 20세기의 중반기까지, 그리고 일부 지역에선 지금까지도 헤겔은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헤겔의 사상은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며 걸쳐 있는 범위가 방대해서, 지금과 같은 자리에서 제대로 요약하는 것은 능력을 떠나 어려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저 역시 이런 무리한 욕심은 애초부터 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와 관련해서 헤겔의 입론을 가능..
자아철학의 봉쇄장치 지금까지 본 것처럼 피히테는 선험적 주체를 발견하려는 칸트의 기획을 좀더 근원으로 밀고 가려고 했습니다. 즉 선험적 기획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는 칸트의 선험적 자아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서 무규정적 자아에서 출발합니다. 칸트적인 선험적 주체조차 거기에 의존해야 하는 자아의 존재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피히테는 근대철학적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있음 그 자체가 ‘자명한’, 존재로서의 자아로 말입니다. 이 자아가 활동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아는 존재하고 있음이 자명하다고 합니다. 비록 이 자아를, 데카르트처럼 사유한다는 사실에서 도출하는 게 아니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자아’는 주체와 대상을 연관지어주는 활동입니다. 즉 주체와 대상을 자기 안에 포괄하고 있는..
피히테의 철학적 테제 피히테의 철학 전체를 특징짓는 세 가지 테제가 있습니다. 그 각각은 테제, 안티-테제, 진테제란 성격을 갖고 있는데, 이는 흔히 변증법을 요약할 때 등장하는 단어들이지요. 이 세 개의 테제를 통해 피히테는 지식학을 구성하려고 합니다. 첫째 테제 ― “경험 등 모든 사실의 설명에 근거가 되는 이 자아는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자아 자신 안에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자아의 정립(定立)’이라고 요약됩니다. 피히테에게 자아는 모든 정신적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절대적인 근거입니다. 경험이나 인식의 절대적인 출발점이자 근거를 이룬다는 점에서 절대적 자아인 거지요. 이러한 절대적 자아가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인식도 경험도 불가능합니다. 마치 인식하는 내가 없이는 어떤 인식도 불가능..
2. 피히테 : 근대철학과 자아 ‘자아’의 복권 피히테는 오직 12개의 범주만을 가지고 있는 칸트의 선험적 주체가 확실한 만큼이나 공허하다고 생각하며, 주체(피히테 용어로는 자아)의 활동과 무관하게 정의되어 있다고 비판합니다. 오히려 판단의 범주나 원리는 자아(주체)의 활동과정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특히 그가 주목하는 지점은 칸트철학의 인식론적 문제점입니다. 그것은 ‘사물 자체’와 ‘선험적 주체’라는 칸트의 개념에 관련된 것입니다. 피히테는 일단 ‘사물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봅니다. 칸트에 따르면 사물 자체는 ‘있기는 있으되 인식되지 않는 무엇’입니다. 그러나 사물 자체가 인식되지 않는 무엇이라면 사물 자체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인식했는가 하고 피히테는 반문합니다. 무언가가 있는데..
그늘 진리에 관한 문제 이로써 칸트철학은 근대적 문제설정의 딜레마를 해소하고 위기의 요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한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뿌리깊은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해결은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생성시키거나 ‘전이’시킵니다. 칸트철학 자체 내에는 이미 새로운 위기의 요소들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앞서처럼 세 가지 차원에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진리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는 진리를 주관화하는 전략과 관련된 것입니다. 칸트는 현상이란 우리가 지각하고 인식한 것이고, 따라서 주관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하지요. 대신 주관 밖에는 ‘사물 자체’를 남겨두고 말입니다.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고 우리의 인식을, 진리를 단지 현상에 관련된 것으로 제한합니..
칸트철학의 영광 칸트는 흄에 의해 전면화된 ‘근대철학의 위기’ 속에서 작업했습니다. 그는 위기 속에서 붕괴된 근대철학의 지반을 새로이 복구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근대적 문제설정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기둥으로서 ‘진리’와 ‘주체’를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한 칸트의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진리의 주관화입니다. 즉 진리를 외부의 사물이나 대상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주체 자체의 내부에서 찾자는 것이지요. 둘째는 주체(주관)의 객관화입니다. 모든 주체가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경험이나 인식의 기초가 되는 필수적인 형식을 주체 내부에서 찾아냄으로써 그것이 모든 주체들에게 공통된 것임을, 따라서 객관적인 것임을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이 두 과정의 복합으..
근대적 윤리학 확립 셋째, 근대적 윤리학(도덕철학)의 확립입니다. 칸트가 윤리학 혹은 도덕철학의 문제를 다룬 책은 알다시피 『실천이성 비판』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행동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이 책에서, 칸트가 던지는 도덕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 “인간의 의지(및 행동)는 이성의 힘만으로 규제될 수 있는가?” 바꿔 말하면 인간의 의지와 행동을 규제하는 원리가 인간의 이성 안에 있을 수 있는가,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할 보편적인 원리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이는 근대적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신에게서 독립해 존재하고, 인식하며, 행동할 수 있는가가 근대철학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질문이었으니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를 규제할 보편적인..
근대적 주체의 재건 둘째, 근대적 ‘주체’의 재건입니다. 근대철학의 확실한 기초요 출발점이었던 주체는 흄의 비판을 통해 ‘지각의 다발’ ‘관념의 다발’로 해체되어 버렸습니다. 진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에 더해 이젠 아예 인식하는 주체조차 불가능하다는, 극히 부담스런 결론에서 칸트는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디든 길은 찾는 자에겐 있게 마련입니다. 칸트는 죽음 직전의 위기에서 근대적 ‘주체’를 살려냅니다. 과연 어떻게 살려낼까요? 칸트가 보기에 인간의 인식은 경험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물론 흄이 지적한 것처럼 경험적 인식은 매우 불확실해서 진리가 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경험을 통해 인식한다고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뭔가가 있을 겁니다. 도대체 그게 ..
진리 개념의 전환과 재건 그렇다면 이제 칸트가 어떤 식으로 근대철학의 기초를 재건하는지 살펴봅시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얘기하는 게 유용할 것 같습니다. 첫째는 ‘진리’ 개념의 전환과 재건입니다. 알다시피 흄은 귀납론과 인과법칙을 부정했습니다. 귀납론을 빌려, “이제까지 본 모든 까마귀가 다 까맸다. 따라서 모든 까마귀는 까맣다”고 한다 합시다. 그러나 이후에 갈색 까마귀나 회색 까마귀가 안 나온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고, 혹시라도 그런 까마귀가 한 마리라도 발견되는 날이면 앞서 한 말은 거짓이 됩니다. 또 인과관계란 관찰한 사람이 갖는 습관적인 추론이라고 했지요. 이렇게 되면 경험적 지식은 어떤 확실한 지식, 참된 지식을 줄 수 없습니다. 즉 진리는 경험을 통해 얻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칸트가..
제3부 독일의 고전철학 : 근대철학의 재건과 ‘발전’ 1. 칸트 : 근대철학의 재건 근대철학의 위기와 칸트철학 앞서 말했듯이 ‘근대철학의 비조’라는, 지금까지도 데카르트가 누리고 있는 영광은 신학의 지배 아래 있던 철학, 신의 지배 아래 있던 인간을 신학과 신으로부터 독립시킴으로써 근대적 사고를 가능케 하는 근대적 문제 설정을 기초지우고 방향지웠다는 공적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로선 자명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생각하는 나’ 즉 인식주체가 매우 불확실하며, 진리 역시 극히 취약한 기초를 갖고 있음이 흄으로 인해 드러났습니다. 진리는커녕 인과법칙조차도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주체가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지각의 묶음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데카르트가 마련한 근대철학의 전제가, 그 출발점과 ..
5. 근대철학의 위기 유명론과 경험론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로크ㆍ버클리ㆍ흄의 사상을 유명론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유명론은 로크에 의해 근대적인 문제설정으로 포섭되었습니다. 그 결과 유명론이 가지고 있었던 반관념론적인 성격은 근대철학 내부에서 딜레마를 드러내고, 결국 극한으로까지 가게 됩니다. 버클리와 흄의 작업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유명론은 관념론으로, 혹은 회의주의로 전환되었지요. 경험적 지식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한 경험주의는 그 반대물로, 즉 경험이라는 것은 도대체 믿을 수 없고 진리를 형성할 수 없다고 하는 반대물로 전화되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함으로써 근대철학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회의주의’는 극한에 선 근대철학..
탈출도, 귀환도 아닌…… 흄이 수행한 근대철학의 해체는 분명 근대적 문제설정의 경계 내부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단지 그 안에만 머물러 있었다고 하는 것은 정확한 평가가 아닐 것 같습니다. 때로 그는 그 경계선 밖으로 넘어갑니다. 여기서 두드러진 것은 믿음에 대한 흄의 이론입니다. 흄에게 인과관계는 습관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상이나 관념을 결합시켜 어떤 지식을 형성합니다. 이 지식은 ‘법칙’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즉 참된 지식이나 진리 대신에 믿음이란 개념이 들어서는 것입니다. 흄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현재의 인상과 관련이 있는, 혹은 그것들로 결합되어 있으며 그것들로 연합되어 있는 생생한(살아 있는!) 원리”라고 말입니다. 믿음은 힘을 가지며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그..
근대철학의 전복 위에서 본 것처럼 흄은 근대철학의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진리’ 혹은 ‘과학’의 불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나아가 좀더 근본적으로 근대철학의 입지점인 ‘주체’ 자체가 결코 안정적이거나 자명한 것이 아님을 또한 보여주었습니다. 근대의 과학주의는 물론, 주체철학 자체가 어떤 근본적 곤란에 처해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는 근대적인 문제설정이 안고 있었던 딜레마를 폭발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근대철학의 ‘극한’이요 ‘한계지점’이었습니다. 이로써 근대적 문제설정은 해체되며, 근대철학의 ‘위기’라는 사태가 초래됩니다. 그래서 그 이후의 대다수 철학자가 이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노력을 하게 되고, 이것이 그 이후의 근대철학을 새롭게 발전시키게 됩니다. 어쨌..
주체의 해체, 주체철학의 해체 흄은 버클리가 남겨둔 유보조항을 비판하면서 경험주의를 좀더 극단으로 밀고 갑니다. 버클리는 지각된 것을 관념이라 하고, 지각하는 것을 정신이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물건을 보고 ‘사과’로 지각한다면 ‘사과’는 관념이고, 그걸 지각한 것은 정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라고 하며, 지각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지각하는 정신만은, 지각되는 게 아니지만 존재한다고 합니다. 요컨대 지각하는 ‘주체’, 인식하는 주체(데카르트)가 ‘정신’이란 이름으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흄은 이런 예외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흄은 사물을 보고 생긴 것은 인상이요, 그 인상의 기억이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게 ..
4. 흄 : 근대철학의 극한 과학주의에서 회의주의로 근대철학을 그 극한으로까지 몰고 갔던 사람은 누구보다 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하 알다시피 흄의 철학은 ‘회의주의‘로 불려지는데, 대개는 회의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그의 사상에 대한 평가를 일축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한 근대철학에서 그러한 회의주의가 나타난 것은 무엇 때문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근대철학 전반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매우 역설적인 중요성을 갖습니다. 흄의 출발점은 로크와 비슷합니다. 그 역시 엄격한 과학적 지식을 추구합니다. 그에 따르면 “자연과학의 성과를 빌려 인간학을 구성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는 과학의 일종으로 간주되던 심리학에 기초해서 ‘경험적 인간학’을 구성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경험과 관찰이 일차적 위치를..
관념론으로 다른 한편 버클리는 ‘물질’이란 실체를 제거하지만, 정신에 대해선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각하는 정신이 없다면 대체 경험이 어떻게 가능하겠으며, 지각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따라서 버클리에게는 정신이란 실체만 존재하며, 이 실체가 지각하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정신’이란 실체 앞에서 버클리는 유명론에 일종의 유보조항을 달아두고 있는 셈입니다. 자기가 비판했던 로크처럼 말입니다. 요약하자면, 버클리의 주장은 유명론에서 관념론으로 나아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중세의 유명론은 실재론에 대항하는, 반관념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뜻에서 흔히 유명론을 중세의 유물론이라고도 하지요. 로크의 유명론 역시 이런 성격이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데카르트 철..
3. 버클리 : 유명론에서 관념론으로 로크에 대한 두 가지 비판 버클리는 로크 비판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입론을 세웁니다. 그의 로크 비판은 일단 두 가지로 나누어 얘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실체의 개념에 대한 비판입니다. 로크는 모든 복합관념은 오성(정신)이 결합한 것이고 명목적인 것일 뿐이라고 하면서, ‘실체’에 대해서만은 예외로 한다고 합니다. 즉 물질과 정신이라는 실체는 ‘예외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겁니다. 버클리는 이런 예외조항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둘째, ‘제1성질’에 관한 비판입니다. 로크는 대상의 성질이란 모두 인식주체가 경험한 것이요 주관적이라고 하면서, 오직 제1성질만은 예외로 둡니다. 그러나 버클리는 제1성질만 유독 물질 그 자체에 속하는 객관적 성질이라고 할 이..
유명론의 근대화 앞서 우리는 로크의 경험주의가 두 가지 지반 위에 서 있다고 말했습니다. 표면상으로 그것은 근대철학과 과학주의였지만, 사실상은 근대철학과 유명론이었음을 보았습니다. 중세에 유명론은 보편 개념이 실재한다는 주장의 반론으로 제출되었고, 실재하는 것은 개별자라는 ‘존재론적’ 성격의 사상이었습니다(중세에 별도로 존재론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성격은 존재론이라고 나중에 불리는 것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따옴표를 쳐 ‘존재론적’이라고 한 것입니다). 보편자에 대한 개별자의 우위를 주장하는 ‘존재론’이었지요. 그것은 신학적 문제설정 속에 있었으나, 본질적으로 신학과는 화해하기 힘든 것이어서 끊임없이 신학과 충돌하고 억압받기도 했습니다. 반면 로크에 이르러 유명론은 근대적 문제설정에 포섭되게 됩니다. ..
로크의 딜레마 그런데 로크는 곧 딜레마에 빠집니다. 이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 데 하나는 실체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에 관한 것입니다. 첫째로 실체에 관한 것. 로크는 경험을 통해 우리의 감각은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로크가 환각이나 착각에 의한 경험을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경험을 통해 ‘나’를 자극하는 요인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어떤 사물을 보고 ‘빨갛다’고 지각했다면, 나로 하여금 빨갛다고 생각케 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 그게 없다면 나는 착각한 거거나 꿈을 꾸고 있는 거겠지요. 물론 경험이나 관찰한 바가 잘못되어서 나중에 수정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게 원래 빨간 건지, 아니면 다른 건데 우리가 그렇게..
‘본유관념’ 없는 진리를 위하여 데카르트가 진리의 근거를 이성과 이성의 본유관념에서 찾았다는 것은 앞서 거듭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크가 보기에 이런 본유관념이란 중세적이고 스콜라철학적인 잔재였습니다. 로크가 지금 있다면 이런 식으로 예를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불을 찾아서」란 영화가 있지요. 불을 사용하던 원시인들이 불씨가 꺼지자 불을 찾아오라고 몇 사람의 대표를 보내고, 이들은 고생 끝에 불을 찾아옵니다. 그러나 원시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불을 물에 빠뜨려 꺼뜨리고 맙니다. 그런데 이때 주인공은 그걸 찾는 과정에서 배운 불피우는 법을 써서 불을 피우려고 하지요. 물론 잘 안 되어, 그걸 가르쳐준 여자가 대신 피워 주지요. 불을 피울 줄 몰랐던 원시인이라면 어디엔가 있는 불을 찾아 쓸 줄밖..
2. 로크 : 유명론과 근대철학 로크의 입지점 알다시피 로크는 경험주의를 하나의 사조로, 흐름으로 만들어낸 사람입니다. 이러한 로크의 철학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지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데카르트가 새로운 장을 열었던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입니다. 신에게서 독립한 주체, 그래서 존재ㆍ인식ㆍ가치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던 근대적 주체가 로크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지반이 됩니다. 진리라는 인식의 목표 역시 마찬가지지요. 다른 한편 그는 갈릴레이, 뉴턴, 호이겐스 등이 이룩한 과학혁명의 획기적 효과 속에서 사고했습니다. 즉 근대 초의 과학혁명이 로크의 사상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제 과학은 진리에 이르는 가장 커다란 길, 어쩌면 암묵적으로는 유일한 길로 간주됩니다. 데카르트가 기초를 닦아놓은 ..
유명론과 경험주의 지금까지 우리는 중세철학에서 유명론과 실재론의 대립을 살펴보았습니다. 근대철학, 특히 경험주의를 다루는 자리에서 이토록 장황하게 중세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찌보면 뜬금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유명론과 경험주의의 관계를 본다면 이런 장황함은 용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알다시피 유명론은 중세 전체를 지배한 실재론에 대한 반대로서 제기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데아와 유사한 보편자가 세계를 만들어내고 움직인다는 사고에 대한 반대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데아와 같은 관념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관념론에 대한 비판으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반대는 주로 개별적인 사물이나 현실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예컨대 하늘에 떠다니는 이데아나 관념에다가 사물을 꿰어..
윌리엄 오컴 반대로 윌리엄 오컴(William of Ockham)이라는 사람은 당시의 유명론자로 가장 유명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편 개념은 기호다. 이 기호에 상응하는 실재는 없다. 사물에 앞서가는 보편자는 신의 정신 속에도 없다. 예를 들어서 추상적인 ‘언제’ ‘어디’ 같은 것은 실재하지 않으며, 오직 구체적인 장소와 구체적인 시간만이 실재한다고 합니다. 관련된 사물들은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것을 떠난 ‘관계’라는 추상적인 존재란 없으며, 1, 2, 3 같은 숫자들은 실재하지만 일반적인 ‘수’라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결국 보편 개념은 이름일 뿐이지 실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컴은 이런 논리가 기독교 교리에까지 적용된다면, 신학적 교의 자체가 붕괴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
토마스 아퀴나스 보편논쟁은 유명론자들을 억압함으로써 종식되었습니다. 실재론자가 승리한 것인데, 당시로선 당연한 결과인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이 논쟁에서 제기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억압되고 은폐되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논쟁이나 문제가 억압한다고 없어지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논쟁은 뒤에 가서 다시 나타납니다. 중세 후기에 유명론과 관련해 새로운 주장들이 다시 나타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오컴(William of Ockham)이 두 개의 대비되는 입장을 대표합니다. 유명론과 관계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은 ‘중용적 실재론’이라고도 불립니다. 반면 오컴은 유명론의 입장을 명확하게 했지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에 대한 번역 및 주석의 대가였던 알베르투스 마..
보편 논쟁 ‘보편논쟁’이라 불리는 논쟁을 통해서 유명론은 비로소 자기 이름을 얻게 됩니다. 이 논쟁은 짐작하다시피, 실재론자와 유명론자들이 싸운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실재론자들에 해당되는데, 신(보편자)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며, 개별자들은 신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죽으면 다시 신에게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라틴어로 universalis ante res, 즉 “보편이 앞선다”(“보편이 먼저다”)라고 말합니다. 에우리게나, 안셀무스, 기욤 드 샹포라는 사람이 대표적인 실재론자이지요. 안셀무스는 신의 본체론적인 증명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신은 ‘완전한 존재’다. 존재라는 속성이 없다면 그건 불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존재는 존재를 속성으로 가져야 한다. 그러..
스콜라철학의 탄생 이렇듯 보편 개념은 단지 이름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 유명론이고, 보편 개념이 실재한다고 보는 것이 실재론입니다. 그 이견의 뿌리는 고대철학까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실재론적 입장은 플라톤 이래 주된 흐름이 되었습니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가 실재하고, 인간의 지식이란 그 이데아 세계에 대한 기억이며, 따라서 진리란 그 ‘기억’을 되살려 이데아의 세계에 다시 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데아라는 보편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며, 모든 보편 개념은 이데아의 세계에 근거하고 있기에 역시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지요. 이런 점에서 플라톤은 강력한 실재론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반면 유명론은 이름에 걸맞는 입장이 분명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
제2부 유명론과 경험주의: 근대철학의 동요와 위기 1. 유명론과 경험주의 실재론과 유명론 근대철학의 다음 장은 경험주의라고 불리는 철학적 흐름입니다. 이는 주로 영국에서 발달했고, 지금까지도 영국의 미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흐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식주체의 경험이 지식의 연원이자 진리의 근거”라는 것입니다. 철학사에서 이런 경험주의의 중요한 사상가로 꼽히는 사람은 아시다시피 베이컨과 로크, 버클리와 흠입니다. 그러나 경험의 중요성을 얘기한 것으로 경험주의 사상가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베이컨은 흔히 알고 있는 이 사상가들의 반열에 오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러셀조차도 “베이컨은 자신이 과학에 대해 그토록 강조했으나 사실은 당시의 가장 중요하고 일반적인 과..
스피노자의 탈근대적 ‘이탈’ 이상에서 본 것처럼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 철학적 사고를 시작했지만, 데카르트가 열었던 근대적 문제설정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명시적으로 보여주었던, 그리고 과학에 대한 신뢰 뒷편에 자리잡고 있던 근대적인 ‘반자연주의’에 대해 스피노자는 명확하게 반대의 깃발을 내건 셈입니다. 또한 주체를 대상에서 분리해내며, 그 ‘주체’를 사고와 판단의 중심으로, 나아가 세계의 중심으로 삼으려고 했던 ‘주체철학적인’ 문제설정에서 애시당초 벗어난다는 것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럼으로써 주체-객체(대상)의 일치라는 문제 자체가 스피노자에겐 제기되지 않으며, 나아가 인식이 진리를 제공하리라는 근대철학적 신념과 달리 차라리 진리가 인식에 앞서, 판단에 앞서 존재해야 한다는..
‘무의식’의 윤리학 따라서 데카르트라면 당연히 이성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할 이 ‘욕망’이 스피노자에겐 바로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게 됩니다. 육체와 정신을 합일시키려는 힘으로서 코나투스가 인간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셈이니 말입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처럼 그것을 억누르거나 통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억제하거나 통제하려는 것은 어쩌면 소용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프로이트라면 이 점에 관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얘기를 하고 있지요. 한편 스피노자는 이 욕망이라는 것이 타자에 의존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욕망 역시 하나의 ‘양태’로서 타자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한양태’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합니다. 스피노자에게 유한하다는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한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
코나투스 다음으로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보겠습니다. 윤리학은 스피노자에게 독특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스피노자에게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영역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어떻게 작동해서 어떻게 대상을 파악하고, 어떻게 오류를 범하고, 어떻게 감정을 갖거나 감정에 매이게 되고, 어떻게 욕망이라는 것이 생겨나는지, 나아가서 그 욕망을 어떻게 해야 하고, 욕망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연구하려고 합니다. 이런 관심을 다루는 것이 ‘윤리학’인 거지요. 스피노자는 이것을 가장 중요한 주제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책 제목이 『에티카』( ‘윤리학’이란 뜻입니다)인 것을 보면 이는 상당히 설득력을 갖습니다. 사실 스피노자의 문제설정에서는 근대철학의 꽃이었던 인..
진리와 공리 이는 사실 과학의 역사에서도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서 뉴턴 시대에 누가 “운동하는 물체의 속도가 빨라지면 그 질량이 늘어난다”고 말했다면 그 말은 거짓이요, 그 사람은 물리학의 ABC도 모르는 사람으로 간주될 겁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는 ‘질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가 ‘속도가 빨라지면 질량이 늘어난다’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가르는 기준이 된 겁니다. 상대성이론이 새로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대라면 사정은 정반대가 되겠지요. 요컨대 사유와 연장이 실체의 속성이라는 스피노자의 주장은 데카르트적인 문제, 즉 근대철학의 중심이 되는 문제를 애초부터 피해 갑니다. 그런 문제는 스피노자에게서는 제기조차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근대적인..
무한히 소급되는 보증인의 문제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예컨대 반지름 5인 원의 면적을 ‘25π다’. 혹은 ‘27π다’라고 상이하게 판단했을 때, 즉 하나의 속성에 대해 상이한 판단이 있을 때, 어떤 것이 대상과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는 피해갈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이와 단련해 유명한 명제가 있는데, 그는 『에티카』의 2부에서 “진리가 진리와 허위의 기준이다”라는 정리를 제출합니다. 비유하자면 “빛이 빛과 어두움의 기준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빛과 어두움은 빛이 ‘있다’ ‘없다’라는 식으로 구별되지, 빛과 어두움 외부에 있는 제3자에 의해 구별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이 ‘있다’ / ‘없다’ 역시 존재가 ‘부재’함으로써 정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와 무의 기준은 존..
스피노자의 진리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논의는 ‘실체’ ‘속성’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됩니다. 그는 데카르트처럼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하면 독립적인 두 개의 실체가 서로 일치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유’와 ‘연장’, 혹은 물질과 정신이라는 것을 실체의 속성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실체는 많은 속성을 가지는데, 그 중에 ‘연장’과 ‘사유’는 인간이 알고 있는 두 가지 속성이라는 겁니다. 잠시 여기서 사유와 연장이 실체의 속성이라고 하는 점에 주목합시다. 스피노자가 ‘신’이라고 불렀던 실체는 기독교적 관념과는 달리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 사유와 연장을 모두 갖고 있는 물질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신이란 영원하고 완전한, ..
주체를 자연에 돌려주다 이 점에서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와 상반됩니다. 라이프니츠는 “개체의 본질은 실체”라고 합니다. 모든 개체 각각이 그 내부에 고유한 힘을 가지며, 개체 각각이 실체라는 거죠. 개체 각각에 존재하는 실체를 라이프니츠는 ‘단자’(monad) 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라이프니츠의 경우에는 모든 개체가 곧 실체인 데 반해,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개체란 실체의 변형된 모습이고 양태입니다. 실체는 이 양태의 근저에서 이 모든 양태들을 모두 싸안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하나임에 반해 라이프니츠에게는 모든 것이 다 실체이기에, 실체는 무한히 많이 있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실체는 자기원인이라고, 즉 그 자체의 원인에 의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실체는 자연 안에 있는 “무언..
스피노자의 ‘자연주의’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실체’(substantia)와 ‘양태’(modus)라는 두 개념으로 요약됩니다. 실체란 개념에 대해선 앞서 말씀 드린 바 있지요. 물론 사상가마다 그 개념에 부여하는 내용에 차이는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둡시다. 실체와 양태에 대해 다시 한번 「터미네이터 2」란 영화를 예로 들어 생각해 봅시다. 자유자재로 변하는 터미네이터 T-1000이란 친구를 전체 세계라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실체는 ‘터미네이터’로서 수행할 임무가 그것인데, 이 친구가 숱하게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지만 그래도 바뀌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거꾸로 그러한 바꿈(변화)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즉 그가 그처럼 수없이 모습을 바꾸는 것은 오직 ‘터미네이터’로서의 임무를..
2. 스피노자 : 근대 너머의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근대철학을 통틀어서 가장 독특하고 변종 같은 철학을 세웠습니다. 그는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 철학을 연구했고,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나름의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했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대부분의 근대철학자가 데카르트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비판의 근본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게 바로 데카르트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스피노자였음은 상당히 역설적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데카르트의 철학이 갖는 특징, 나아가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이 갖는 중요한 특징에 대해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에 대해 다소 상세하게 얘기하는 것은 그런대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셈입니다..
근대철학의 딜레마 그런데 데카르트의 ‘주체’가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은 겁니다. 신으로부터 독립한 거죠. 그렇다면 독립된 ‘나’라는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지 새로이 대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존재론’이라는 철학의 분과를 만들어냅니다. 또한 예전에는 신의 계시에 의해 보증되었던 주체와 객체의 일치가, 신으로부터 독립함과 동시에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게 됩니다. 이제 철학은 주체가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지, 인간의 인식능력이 어디까지 인지를 대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인식론’이라는 분과가 성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유일한 잣대였던 신의 계시 대신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재는 잣대가 필요하게 됩니다. 이것이 ‘가치론’ 혹은 ‘윤리학’(‘도덕론’)입니다. 이리하여 데카르트 이래 존재론, ..
근대철학의 문제설정 지금까지 근대철학은 주체라는 범주를 신으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성립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리와 동시에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일치, 혹은 정신과 육체의 일치라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이처럼 대상에 일치하는 인식을 ‘진리’라고 했으며, 이 ‘진리’가 바로 근대철학이 도달해야 할 목표였음 또한 보았습니다. 이것이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만들어지자마자 곧 딜레마(벗어날 수 없는 곤란)에 빠지게 됩니다. 예컨대 주체가 인식한 것이 대상과 일치하는지 아닌지, 다시 말해 진리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보증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생각보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조금 우회하도록 합시다. 여러분 가운..
이성은 완전성을 타고난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을까요? 여기선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성의 타고난 완전성이란 테제입니다. 이성의 타고난 능력(본유관념)은 완전한 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제가 칠판에 원을 이렇게 그립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완전한 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걸 다섯 개, 열 개, 백 개, 이백 개 그려도 마찬가질 겁니다. 그러나 저나 여러분 모두 완전한 원에 대한 관념,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재하는 모든 원이 사실은 불완전하며 완전한 원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라곤 모두 불완전한 것들뿐인데도, 우리는 완전한 원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
데카르트가 가정한 두 가지 실체 앞서 우리는 주체를 독립시키자마자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습니다. 이 문제는 데카르트에게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건 이중적인 의미에서 그런데, 우선 이 문제가 그의 철학에선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심각했고, 다음으론 그 문제의 해결이 그의 철학이 확고한 자리를 잡는 데 극히 중요했다는 점에서 심각했습니다. 데카르트는 두 개의 실체가 있다고 가정합니다. ‘연장’(延長)과 ‘사유’(思惟)가 그것입니다. 일단 여기서 ‘실체’(substance)라는 말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터미네이터 2」란 영화를 못 보신 분은 별로 없겠지요? 거기 보면 어떠한 모습으로도 변형될 수 있는 괴물 같은 놈이 나옵니다. 이름은 T-1000이라고 하던가요?..
주체의 분리와 진리의 인식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자기의 ‘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주체라는 말에는 언제나 ‘객체’ 혹은 ‘대상’이라는 짝이 따라다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고하는 주체’라면, 이 주체가 사고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먹는 내(주체)가 있다면 먹히는 밥(대상, 객체)이 있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결국 근대철학의 출발점인 주체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피조물인 자연세계(대상)로부터 인간이 분리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인간은 자연세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왜냐하면 전자는 주체고, 후자는 대상이요 객체니까요) 존재가 됩니다. 주체인 인간이 대상인 자연을 지배한다는 생각은 주체 대상의 이런 근대적인 분할에 따른 것입니다. 이럼으로써 다른 자연과 구별..
데카르트의 문제설정 데카르트에게도 ‘확실한 지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불확실한 지식에 확실한 기초를 제공해주어야 합니다. 특히 과학적 지식이 확실한 기초에 서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철학 자신이 확실하지 못한 기초에 서 있다면 대체 이런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철학의 출발점은 더없이 자명하고 확실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자명한 기초는 어떤 의심과 질문에도 견뎌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에서 데카르트는 스스로 회의론자가 됩니다. 즉 확실한 것에 이르기 위해 의심, 회의라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방법적 회의’라고 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모든 ..
두 개의 코기토 데카르트가 근대철학을 열었으며, 따라서 ‘근대철학의 비조’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근대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데카르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데카르트에 대해 말하려면, 근대철학을 연 ‘제1원리’인 코기토에 대해 말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코기토(cogito)라는 말은 ‘생각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cogitare의 1인칭 형태입니다. 즉 ‘나는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이 cogitare는 영어에서 생각하는 것과 관련된 단어들, 예컨대 cognition, recognize와 같은 단어들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철학에서 코기토 라고 말할 때, 그것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가리키는데, 이 말은 ‘코기토 에르고..
중세 너머의 철학 이러한 은폐된 공세에 대항하기 위해서 신학자들은 언제나 새로운 형태의 철학으로 무장하면서 신학을 위한 반론을 펴게 됩니다. 실질적으로는 신학의 반대자들, 정통적인 신학에서 벗어나는 사상가들과의 각축전은 사실은 불가피하게 신학 안에서, 신학적인 껍데기를 입고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10세기 이후에 그러한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로스켈리누스(Roscelinus)나 아벨라르(Abelard, 라틴어로는 아벨라르두스)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명론(nominalism)이라 불리는 견해를 제출합니다. 유명론은 ‘일반적인 개념은 단지 사람들이 붙인 이름일 뿐’이라는 견해인데, 신학적 사고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사상적으..
은폐된 공세 지오다르노 브루노(Giodarno Bruno, 1548~1600)는 일찌감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자신의 시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우주란 무수히 많은 태양과 별들로 가득찬, 그러나 끝도 중심도 없이 운동만을 지속하고 있는 영원한 전체라고 보았습니다. 그가 보기에 신이란 일체의 만물을 지배하며 여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며, 우주의 각 개체 속에 있는 것인 동시에 우주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신과 자연(우주)을 하나로 보는 이런 입장을 범신론(汎神論)이라고 합니다. 이는 중세적인 신의 개념, 기독교적인 신의 개념과 전혀 다른 것이었기에 교회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견해였습니다. 이런 입장은 과학의 이름으로도 철학의 이름으로도 ‘용서받을 수 ..
제1부 철학의 근대, 근대의 철학 1. 데카르트 : 근대철학의 출발점 중세의 철학 이제 근대철학의 출발점이라는 주제로 들어가 봅시다. 근대철학에 대해 얘기하려면 가장 먼저 ‘근대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근대 전체에 대해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야 할 범위를 철학으로 제한해서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면, ‘철학에서 근대란 무엇인가?’ 혹은 ‘철학적 근대란 무엇인가?’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다면 미안한 일이지만, 저는 지금 근대에 대한 어떤 심오한 이야기를 하려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에서 출발하고자 합니다. 근대란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중세와의 대비 속에서 중세와 구분선을 그음으로써 정의되는 그런 시기입니다..
경계읽기와 ‘문제설정’ 그렇다면 경계선들을 찾아내고 그 경계선의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이 문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자 자신이 자기 사상의 경계선을 보여주는 경우는 결코 없으며, 철학책 어디를 봐도 경계선을 보여주는 표시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경계선 같은 건 애시당초 없는 건지도 모릅니다. 원뿔을 밑에서 보면 원으로 보이지만 옆에서 보면 삼각형으로 보이는 것처럼, 모든 것은 보는 지점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마찬가집니다. 데카르트를 로크와 대비시켜 경계선을 찾으려 할 때와 칸트와 대비시켜 경계선을 찾으려 할 때, 혹은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와 대비시켜 경계선을 그으려 할 때, 경계선은 모두 다 달라질 것입니다. 또 철학사를 반복의 역사일 뿐이라고 볼 때와 ..
철학의 경계 저는 예전에 쓴 책에서 “철학은 의심하기에서 출발한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철학이란 이런 방법으로 기존의 지배적인 사고방식, 지배적인 철학과 투쟁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철학사는 전장(전쟁터)’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치고받는 이 투쟁을 통해 철학자들이 얻어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때까지 지배적이던 철학 밑에서 사고되지 못했던 것, 또는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을 찾아내고 열어젖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전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의 지배적인 사상 때문에 오히려 보이지 않고 사고되지 않게 된 것을 찾아내고 확보하는 투쟁이 바로 철학인 셈입니다. 사실 철학에선 다른 사상가들과 자신이 어떤 점에서 다르며 어떤 점에서 새롭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
서론 포스트모던 ‘시대정신’ 하나의 사상, 하나의 시대정신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은 이젠 너무도 분명한 듯 보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런 선언을 아직 들어보지 못한 분이 있다면 시대의 조류에 매우 둔감한 분임에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어디서나 거론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는 하나의 사상이나 시대정신이 더 이상 세상을 지배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했습니다. 나아가 최근의 다양한 사회현상들을 ‘포스트모던하다’라는 형용사로 특징짓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직도 이런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 사조들, 예를 들면 맑스주의 같은 것들은 시대착오적이고 낡은 ‘옛이야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에서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제2증보판에 부쳐 이번에 증보하면서는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장을 추가했고, 보론으로 「근대적 지식의 배치와 노마디즘」을 실었다. 그리고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장이 새로 들어가면서 관련된 내용을 결론에 추가했고, 본문 가운데 일부분을 약간 수정했다.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장은, 나로선 어쩌면 가장 가까운 철학적 친구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사람들이라 진작에 들어갔어야 할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지난번 개정증보판을 내면서도 여유가 없어서 원고를 써넣을 수 없었던 것인데, 이제야 비로소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장을 추가하면서 결론에 동일성과 차이, 동일자와 타자의 문제와 관련하여 약간의 글을 추가했다. ‘보론’으로 추가한 것은,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 내지 ‘인문학의 전망’에 대해 강연했던 것인데..
책머리에 데리다는 ‘텍스트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모든 텍스트는 그 외부의 주름이다.’ 물론 여기서 ‘외부’란 단지 통상적 유물론에서 말하듯이 사회경제적 조건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실천적 유물론에서 말하듯이 실천적 맥락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사유 안에 들어와 있는 비-사유고, 각각의 철학이 그 위로 펼쳐지며 나름의 사유의 선들을 그리는 그런 지반이다. 아니, 사유가 그것의 소재로 삼는 모든 것이다. 어느 날 사유에게 다가온 것, 그런 식으로 사유가 만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사유하면서 사용한 모든 것(책이나 언어를 포함하여), 그것이 바로 사유의 ‘외부’다. 공장이나 병원도, 감옥이나 형법도, 과..
도올의 교육입국론 목차 Ⅰ. 총론 1. 호학 민족에게 도래한 혁신교육감 시대충절과 반역, 수구와 혁명호학의 민족사, 『팔만대장경』을 보라! 2. 진보교육감 시대의 의의교육감만 장악하면 역사의 대세를 장악하는 대승대학생들의 아파티세월호 참변에 대한 안타까움 3.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관점 차이교육혁명 없는 정치혁명은 권좌의 교체일 뿐교육은 철학의 목적진보와 보수의 교육에 관한 철학적 담론의 차이: 인간론인식론과 진리론진보세력의 통렬한 반성이 요구되는 시대 Ⅱ. 공부론 1. 공부란 단어의 어원과 용례공부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공부의 어원, 한·중·일 단어의 비교공부라는 말의 역사적 용례 2. 공부와 시간공부의 원의와 희랍인의 아레떼도와 덕공부와 시간공부는 관념상의 변화가 아닌 몸의 단련 3. 공부와 경(..
5. 혁신은 창조적 전진이다. 해체가 아닌 형성이다 엄마가 남긴 교육자의 심상 나에게 있어서 교육자의 심상은 나의 엄마가 내 가슴에 그려놓은 것이다. 나의 모친은 무한한 호기심과 섬세한 미감의 소유자였다. 나의 엄마가 평생 어김없이 새벽기도를 다니신 이야기는 옛 천안 잿배기 가도에 칸트의 산보처럼 전해져 왔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는 새벽기도를 가지 않았다. 왜? 엄마는 나팔꽃처럼 아침에 피어나는 꽃의 동태를 전부 관찰하고픈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꽃이 피어나는 그 모습을 두 눈으로 관찰하고 싶었던 것이다. 벼르고 벼르다가 엄마는 교회를 가지 않고 우리집 화단을 지킨 것이다. 어슴푸레 먼동이 트는 추이와 함께 3시간 동안 꼬박 꽃망울을 응시한 것이다. 내가 잠에서 눈을 떴을 때, “난 보았다!” 그 한마..
4.교육의 목표는 인하게 하는 것 공자의 인 공자가 그의 철학의 핵심을 ‘인(仁)’이라는 한마디로 압축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제자들을 평가할 때도 그 인격체가 가진 덕성의 장점을 허여하면서도, “그가 인(仁)합니까?”하고 물으면 항상 “인하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인’은 그의 세계관의 궁극범주(ultimate category)였다. 그런데도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이 멀리 있다고? 내가 원하면 당장 여기로 달려오는 것이 仁인데[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論語』 「述而」]!”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한다: “인에 당하여서는 선생에게도 양보하지 말라[當仁, 不讓於師 『論語』 「衛靈公」]!” 선생과 학생의 관계에 있어서 공자가 얼마나 비권위주의적이었나 하는 것을 잘 말해준다...
3. 문명의 전사들, 교사 교사의 두 가지 덕성 교사의 자질을 결정하는 두 가지 위대한 덕성이 있다. 그 첫째는 학생들에 대한 따사로운 인간적 사랑이다. 학생들을 인격적 개체로 존중하고 그들의 마음상태에 이입(empathy)하는 정서적 폭을 갖춘 인격이다. 둘째는 자기가 소유한 지식과 자기가 신념으로 생각하는 정당한 가치를 가급적인 한 효율적으로 학생에게 분유시키고자 하는 지적 열정(intellectual ardor)이다. 주입은 그 위대한 방편이요, 토론은 주입의 평화롭고 효율적인 방법론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과목의 성격과 교실의 분위기, 학생들의 수용성과 지적 수준에 따라 상황적으로 결정될 뿐이다. 교육은 하나의 이념적 방법론에 치우칠 수 없다. 인간은 복합적이다. 자유와 필연의 복합체이며, 무..
2. 주입식이냐, 토론식이냐의 공허한 논의 공자의 세미나 공자는 학생들과 종종 세미나를 했다. 그가 유랑생활을 할 때 논두렁에 쪼그리고 앉아서도 틈틈이 세미나를 했다. 그의 유랑길을 시종일관 지킨 것은 자로와 안회였다. 쫓겨 다니면서 논두렁에서 밥을 지어 먹어야 하는 고달픈 인생! 공자는 갑자기 이런 말을 한다: “야들아! 각자 인생 포부를 한 번 말해보기로 하자!” 그러니까 나서기 좋아하는 자로가 먼저 이렇게 말한다: “난 말이유, 천리마가 달린 고급수레 하나 타고 다니는 것이 소원이유.” 요즈음 말로 하면 최고급 벤츠 승용차 하나 굴리고 싶다는 소박한 포부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또 “가벼운 고급 털옷을 유감없이 입어보았으면 좋갔수.” 베르사체 모피외투라도 하나 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안연이..
5. 회고와 전망 1. 공자가 말하는 교학의 방법 교학상장의 실천론, 관계론, 생성론 내 글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들은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이 한마디가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의미맥락으로부터 충격에 가까운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요리가 앞에 있어도 먹어보지 않으면 그 맛을 알 길이 없다[雖有嘉肴, 弗食不知其旨]”라는 것은 교육에 있어서의 모든 실천주의, 과정론적 참여주의, 그리고 요즈음 말하는 체험학습의 의미를 압축한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교육에 있어서 교사의 주체성과 그 존엄을 말하면서도, 교사라는 주체가 일방적인 주체가 아니며 반드시 학생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쌍방적ㆍ상감적(相感的)ㆍ융합적 주체라는 것, 다시 말해서 선생과 학생은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망 속..
5. 교사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제안 교사혁명의 다섯 가지 조건 나는 교사의 존엄성과 학교의 면학분위기를 제고시키기 위한 현실적 개선방향으로서 다음의 다섯 가지 테제를 제시한다. 첫째, 교사는 교육의 커리큘럼을 조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기가 주체적으로 시험문제를 내고 자기가 채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개성 있는 교육이 가능해지는 첩경이다. 수학자ㆍ물리학자로서 20세기의 가장 완정한 형이상학적 우주론을 수립한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1861~1947)는 교사가 자기가 가르치는 과목의 교과과정을 자신의 주체적 판단에 따라 상황적으로 조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인문ㆍ과학교육의 기본여건에 미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현재 입시교육의 전체주의적 엄격성 때문에 그러한 권..
4. 교육의 주체인 교사를 존중하라 에꼴 노르말의 경우 프랑스가 인류의 인문주의세계에 자랑하는, 세계지성계를 선도한 위대한 사상가들을 배출한 걸출한 교육기관으로서 에꼴 노르말 쉬페리외르(École normale supérieure)라는 것이 있다. 앙리 베르그송, 에밀 뒤르껭, 사르트르, 보봐르, 메를로 퐁티, 알튀세르,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알랭 바디우 …… 이 셀 수 없는 많은 위대한 사상가들이 이 한 교육기관에서 쏟아져 나왔다. 참으로 경이롭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이 프랑스 교육부 산하의 교육기관이 고등학교 교사를 배출하기 위한 ‘사범학교’로서 출발한 기관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프랑스에서는 중ㆍ고등학교 교사도 ‘프로페쇠르(professeur)’라고 부른다. 에꼴 노르..
3. 학생은 온전한 개체이기에 풀어둬도 될까 존 듀이 철학을 왜곡하지 말라 그런데 진보주의교육이 왕왕 자유주의로 오해된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적 가치를 지상의 테제로 삼는 성향이 있다. 개체지상주의는 결국 방종으로 귀결된다. 몬테소리(Montessori), 섬머힐(Summerhill)류의 열린학교가 초창기의 건강한 혁명적 성격과는 달리 실패로 끝나는 이유가 결국 ‘방종’과 ‘훈육의 결여’, ‘결과적 진부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 미국 교육철학의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그의 리버랄리즘적 교육관의 계승자들이 시행한 교육방법론의 파탄은 미국의 공교육을 망쳐버리고 미국 사회를 근원적으로 해체시키는 데 공헌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
2. 소유하려는 마음이 자율을 제약하다 자유에서 자율로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는 일시적인 느낌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는가? 물론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 어떻게? 존재모드를 자유에서 ‘자율’로 전환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자율(自律)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자기에게 스스로 규율을 부과하는 것이다. 인간은 욕망의 주체이다. 욕망은 공생의 진리를 부정하는 강렬한 유혹성을 가지고 있다. 사적인 욕망에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서 법정 스님께서 그토록 가르치시고 실천하신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 우리의 존재모드를 소유모드에서 무소유모드로 전환하는 것, 이 전환을 나는 ‘협력(cooperation)’이라고 부른 것이다. ▲ 법정스님 다비식. 남김 없이 가셨다. 칸트의 자율적 도..
4. 교사론 1. 자유가 대중교육의 목표여선 안 되는 이유 전남대학교 철학과의 경우 인문학 르네상스의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전남대학교 철학과에서는 1학년 정원 35명 중에서 6개의 자리를 특별히 대안학교 출신의 학생들에게 수능점수에 관계없이 배당한다고 한다. 처음에 3명만 받았다가 그들의 성적이 너무 우수하고 또 인간적으로 성숙되어 있어 6명으로 늘렸는데, 이들의 존재는 과의 면학 분위기를 놀랍게 향상시키고 있다고 한다. 자유로운 사색과 억압받지 않는 삶, 그리고 목전의 당면한 성취 스트레스에 오염되지 않은 여유로움을 지닌 어린 생령의 정신능력이 철학을 공부하는 데 훨씬 더 적합한 토양을 보유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입학 내규가 국립대학과 교수들 자체의 합의에 의하..
5. 엘리트를 위한 교육이 아닌 보통을 위한 교육 식민지교육이 폐허에서 피어난 혁신학교운동 일제식민지교육의 폐해를 극복한 것은 우리 학생들 스스로의 깨우침에 의한 것이었다. 3·1운동, 광주학생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을 거치면서 학생들은 그들이 산 시대에 항거했지만 그 항거를 억누르려는 식민통치자의 후손들은 식민지배를 계속 강화해나갔다. 그 변통을 모르는 타락의 소돔과 고모라의 현장에서 민중 스스로의 각성에 의하여 솟은 불길이 바로 해공 신익희가 다닌 바 있었던 너무도 초라한 남한산초교에서부터 시작한 ‘혁신학교’ 운동이다. 이 학교는 1912년 개교한 이래 해공 신익희가 다닌 바 있는 유서 깊은 학교였으나 2000년 3월 기준으로 학생이 26명밖에 남지 않았다. 폐교의 위..
4. 교육의 지향점은 자유가 아닌 협력이다 교육이 지향하는 인간상: 역사이념의 체현 교육이란 그 교육이 처한 역사가 체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상적 상과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교육은 인간형성(Human Building)이다. 빌딩에는 설계도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은 그 역사사회가 구현하고자 하는 이념의 체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희랍인들의 교육은 폴리스에 사는 사람들의 염원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폴리스는 전쟁국가였다. 도시국가간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내는 전사(Warrior)들을 길러내지 못하면 존속이 불가능한 커뮤니티 형태였다. 따라서 희랍의 모든 교육이념은 어떻게 이상적인 전사를 길러내느냐 하는 명제로 집약된다. 플라톤의 『국가』를 읽어보면 너무도 끔찍한 전체주의적 사유에 치를 떨게 된다...
3. 교육보수주의와 식민지 멘탈리티 한국의 보수는 식민지 멘탈리티의 연속태 우리 국민이 가난하고 힘없고 부당하게 억압받던 일제식민지시절! 그나마 구한말로부터 시작하여 경술국치(庚戌國恥) 이전까지 짧은 신교육의 각성기가 있었지만, 그 꿈은 산산이 좌절되었다. 독자적인 폴리테이아(πολιτεία, 플라톤이 『국가』라는 책에서 ‘정부의 형태’라는 의미로 씀)의 주체기반을 갖지 못한 우리 민중에게 있어서 교육을 받아 신분의 상승이나 확보를 성취할 수 있었던 유일하고도 확고한 길이 의대를 가서 의사가 되거나, 법대를 가서 법관이 되는 것이었다. 의사가 되면 돈 잘 벌고 일경에게 정치범으로 몰리지 않고 별 탈 없이 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수 있었고, 법관으로 임관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면 일본인과 거의 대등한 관..
2. 교육보수주의의 실상 보수와 진보의 학교론, 가치론 앞서 나는 보수 교육철학과 진보 교육철학의 진리에 대한 관점을 절대적ㆍ상대적, 고착적ㆍ역동적, 선재적ㆍ상황적인 시각의 차이로써 규정한 바 있다. 그렇게 되면 선(善)에 대한 인식에 관해서도, 불변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보수주의자들은 학생의 행동이나 습관 그리고 그 평가방식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선악의 기준을 선재적으로 전제할 것이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모든 가치는 시대의 변화와 그때마다 등장하는 인류의 욕구에 맞추어 재구성되어야 하며 영구적인 선악의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학교의 존재이유에 관해서도, 이성주의적 입장에서 명료하게 규정하며, 가정환경이나 도제체제로써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집단적 탁월한..
3. 제도론 1. 새로움의 창출만이 퇴몰을 막는다 교육에는 진보ㆍ보수가 없다 교육에는 진보ㆍ보수가 없다. 내가 이 글의 제목을 ‘혁신교육감시대’로 규정한 것도, 교육감을 사소한 몇몇의 방법론적 기준에 의하여 진보와 보수라는 카테고리로써 분류할 수도 없고,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나는 매사에 보수를 싫어하지만 진보주의자는 아니다. 나는 역사의 진보(the Progress of history)를 신봉하지 않는다. 나는 헤겔의 역사철학적 사관이나 칼 맑스의 경제발전단계설적 유물사관류의 필연주의적 역사주의(historicism)를 거부한다.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 역사 그 자체는 인간의 언어행위나 가치관의 소산인 ‘진보’라는 개념에 의하여 규정될 수 없다. 역사는 진보하지도 퇴보하지도 않는다..
3. 공부와 경(敬) 퇴계의 『성학십도』와 경의 철학 퇴계의 말년 걸작인 『성학십도(聖學十圖)』에는 우주와 인간 전체가 상술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명(天命)’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즉 인간에게 명령하는 하늘, 인격적 주재자의 가능성으로서의 천(天)이라는 관념이 소실되어 버린 것이다. “천명, 즉 하늘의 명령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퇴계는 명쾌히 대답한다: “천(天)은 리(理)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 천(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모든 행위는 나의 책임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늘은 곧 나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은 곧 리(理)며 성(性)이다. 나의 마음은 나라는 존재의 일신(一身)을 주재한다. 그런데 그 마음을 주재하는 것은 경(敬)이..
2. 공부와 시간 공부의 원의와 희랍인의 아레떼 현재 중국인이 사용하고 있는 백화적 표현에서 ‘꽁후우(나의 씨케이시스템으로 표기한 ‘쿵후’)’는 쿵후라는 좁은 무술의 개념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신체적 혹은 정신적 단련을 통하여 달성하는 모든 신묘한 경지를 나타낸다. 예를 들면, 선반공이 쇠를 정교하게 깎는다든가, 용접공이 철판 용접을 감쪽같이 해낸다든가, 서예인이 능란하게 붓을 휘두른다든가, 어느 학동이 암산을 귀신같이 한다든가, 도축업자나 요리사가 식칼을 자유자재로 놀린다든가 하는 것을 중국인들은 ‘타더꽁후우뿌추어(他的工夫不錯, 그 사람, 공부가 대단하다)’라고 표현한다. 희랍철학에서 덕(德)이라는 것을 ‘아레떼(aretē)’라고 표현하는데, 아레떼는 바로 칠예(七藝)의 모든 방면에서 한 인..
2. 공부론 1. 공부란 단어의 어원과 용례 공부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말에 ‘공부’라는 말이 있다. 이 ‘공부’라는 말은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교육을 생각할 때, 그 함의의 99%를 차지한다. 나의 자녀를 ‘교육시킨다’는 말은 ‘공부시킨다’는 말과 거의 같다. 나의 자녀에 대한 자랑도 ‘우리 아이는 공부를 잘해요’라는 명제로 표현된다. ‘공부를 잘한다’는 뜻은 과연 무엇일까? ‘공부를 잘한다’는 의미를 복잡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우리 일상언어의 가장 평범한 의미체계를 정직하게 밝히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그것은 ‘학교 시험 점수가 높다’는 뜻이다. 우리 아이 공부 잘한다는 의미에 실제로 딴 뜻이 없다. ‘학교 시험 점수가 높다’는 것은 대학입시에 유리하다는 뜻이고, 대학입시에 유리하다는 것..
3.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관점 차이 교육혁명 없는 정치혁명은 권좌의 교체일 뿐 정치적 혁명이야말로 역사에서 강렬하게 표출되는 진정한 전변의 계기인 듯이 보이지만, 대부분의 정치혁명은 권좌의 인간들을 환치(換置)시키는 데 그치고 말 뿐이며, 교육혁명을 수반하지 않는 한 좌절로 끝나버리고 만다. 다시 말해서 정치혁명보다 교육혁명이 역사의 진로를 더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정부형태 이상의 것이며 그것은 공동생활의 형식이요, 공유하는 경험의 양식이다. 교육받은 유권자 없이는 보통선거권은 의미가 없으며, 사회가 민주화되지 않으면 국민이 평등한 교육기회를 가질 수 없다. 민주와 교육은 한 몸이며, 교육은 민주사회의 지표이다. 교육의 바른 방향을 주도하는 세력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의 주체..
2. 진보교육감 시대의 의의 교육감만 장악하면 역사의 대세를 장악하는 대승 우익보수의 한 진실한 대부임을 자만하는 언론인이 이와 같이 말했다: “새누리당이 6·4 지방선거에서 참패해도 전 학생인구의 40%를 관장하는 서울·경기도의 교육감만 장악하면 승리하는 것이요, 반대로 대승한다 하여도 서울·경기도 교육감을 놓치게 되면 대패하는 것이다. 이것은 헌법정신이 사느냐 죽느냐의 대결전이다.” 참으로 통찰력 있는 명언이다. 도대체 그분이 생각하는 헌법담론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국가의 운명을 통시적으로 생각하는 혜안은 가상한 것이 있다. ▲ '반대한민국적 성향=좌파 후보'라는 말이 눈에 띈다. 최근 나는 어느 유수 대학에서 이공계 1·2학년 500여명을 상대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세월호 참변 이후의 참..
1. 총론 1. 호학 민족에게 도래한 혁신교육감 시대 충절과 반역, 수구와 혁명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파랑을 격파하며 나아간다[讀萬卷書, 破萬里浪].” 진리 탐구를 위해 눈물겨운 여정을 감행하였던 신라의 구법승(求法僧)들이 유학 장도에서 읊었던 장쾌한 절구의 한 소절! 어찌 만 리의 파랑이 서해바다의 파랑일 뿐이리오? 그것은 기구한 우리 인생의 파랑이요, 기나긴 반만년 역사의 격랑이요, 충절과 반역, 수구와 혁명, 억압과 자유의 기복으로 점철된 우리 정치사의 풍랑이리라! 공자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열 가호쯤 되는 조그만 마을에도 나처럼 충직하고 신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있다. 그러나 나만큼 배우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論語』 「公冶..
애노희락의 심리학 목차 사상체질 / 책을 읽기 전에 프롤로그: ‘다르다’는 ‘틀리다’가 아니다 1. 갈등의 원인 2. ‘다르다’와 ‘틀리다’다름은 동등하다“알았어”라고 말하는 네 가지 방식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3. 살림의 문화와 죽임의 문화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다른가살림의 문화와 죽임의 문화다른 사람, 다른 접근 방식 4. 출발점에 대한 이해꿈과 현실조차 차별하지 말라체질을 아는 것은 출발점을 아는 것 제1부 사상인의 기본 성정 제1장 사상체질에 관한 개요 1. 체질의 차이가 갈등의 원인이 되는 이유 2. 사상체질이란 무엇인가체질과 마음사상기운과 사상체질 3. 사상인의 마음 씀의 개요 제2장 사상인의 성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1. 기본적인 기능들사상기운(四象氣運)융 심리학에서 제시하는 인간의 기본 기..
마지막으로 마초, 위연, 마속, 강유, 영류왕(헌제), 동탁, 여포, 노숙, 장송, 맹획 등등 사상인의 특성과 박통(博通), 독행(獨行), 사심(邪心), 태행(怠行)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사례들이 아주 많은데, 그 이야기를 다 풀어놓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 아쉬운 대로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자. 더 깊게 공부할 분을 위해서 다른 책을 하나 더 추천하도록 하자. 등장인물의 성격이 아주 선명하게 대비되는 소설로 좋은 것이 있다. 태양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 태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 소양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가 부딪히는 『대망(大望)』이라는 소설이 공부할 만하다. 그런데 오래전에 나온 책이라 필자가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최후의 승자 사마의(司馬懿, 179~251)를 굳이 언급하는 것은 그가 사실상 삼국지 이야기의 최후의 승자이기 때문이다. 조조가 죽은 뒤 조씨 형제끼리의 왕권 다툼으로 위는 왕권의 권위가 떨어진다. 삼국지 후반부에 이르면 사마의가 왕권에 욕심이 있다는 의심을 받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왕을 불신하면서 사마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자연히 그런 현상이 생긴 것이다. 황제인 조예가 사람을 보내 사마의를 떠보려 하자, 병을 가장하고 속여 넘기는 장면이 나온다. 귀도 어두워지고 치매 기운도 시작된 듯한 연기를 자연스럽게 해내는데, 어디서 본 듯한 모습이 아닌지? 유비가 천둥이 치자 상 밑으로 숨으며 조조를 속여 넘기던 모습과 완전히 똑같다. 아주 태음인다운 대처방식이다. 그렇게 조예를..
3. 방통과 사마의 소극적 자세로 주도권 쥐기 삼국지의 클라이맥스라는 적벽대전까지 이야기가 끝났으니 마무리를 해도 되지만, 태음인 이야기가 너무 적은 것이 유감이다. 유비가 어느 정도 언급되었지만, 태음인 중에도 우유부단함이 좀 지나친 편에 속해서 태음인의 전형으로 보기는 좀 그렇다. 방통과 사마의의 이야기를 조금 해서 균형을 잡도록 하자. 이 둘은 특별히 이야기할 만한 이유가 있다. 방통(龐統, 179~214)을 굳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태음인의 ‘소극적 자세로 주도권 쥐기’가 방통에게서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같은 은둔자라도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유비의 삼고초려 전에는 산속에 확실히 숨어 있었다. 세상에 나가면 확실히 나가고 아니면 아예 마는 것이다. 소음인다운 태도다. 그러나 방통은..
적벽대전 손권과 유비의 동맹이 확실해지자, 조조는 더 이상 적들이 크기 전에 확실하게 정벌하려고 한다. 대병을 이끌고 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양자강이다. 위의 병사는 대부분 북쪽 출신이라 수전에 약하다. 일단은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대선단이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된다. 동맹군이 위를 이기는 방법으로 제갈량(諸葛亮, 181~234)과 주유가 생각한 방법은 화공이다. 그런데 화공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배들이 뚝뚝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화공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더 큰 문제는 그 시기가 바람이 오의 진영 쪽으로 부는 계절이었다는 것이다. 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방통(龐統, 179~214)이다. 제갈량과 더불어 복룡과 봉추라고 불리며 병법가로 쌍벽을 이루는 명성을 얻던 그 ..
조조 삼국지 이야기를 한다면서 삼국지에서 가장 멋진 장면이라는 적벽대전을 빼놓기는 아쉽다. 또 인물 분석이 촉한 위주로 되어 조조, 주유 이야기가 없는 것도 아쉬우니, 적벽대전의 이야기를 좀 하도록 하자. 먼저 조조를 조금 이야기하고 가도록 하자. 조조는 소양인으로 보인다. 은근히 태양 기운도 강해서 소양인인지 태양인인지 좀 헷갈리지만, 말년에 동작대를 만드는 일 같은 것을 보면 소양인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백성은 동작대 같은 것으로 위엄을 보여주어야 존경심이 생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 외에도 대중 심리의 파악에 뛰어난 모습을 여러 번 보인다. 특히 패전 후에 부하를 추스르는 방법들을 보면 감정을 움직이는 데 아주 능하다. 어쨌든 소양인이라도 태양 기운 또한 강하기에, 관우를 ..
2. 장판파 전투와 적벽대전 장비와 조자룡 관우의 죽음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하면서 체질의 특성을 검토해보았다. 그러나 유비, 관우,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각각 태음인, 태양인, 소음인의 전형도 아니고, 또 앞의 이야기는 소양인 이야기가 별로 없으니, 이것으로 끝내기는 좀 아쉽다. 이왕 삼국지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시간 순서를 쫓아가면서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도 좀더 하도록 하자. 장판교 전투에서 소음인 조자룡과 소양인 장비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 있으니 그 장면을 한번 짚어보자. 먼저 장비와 조자룡이라는 인물을 간단히 알아보자. 장비(張飛, ?~221)는 언뜻 보기에 무모해 보이기도 하고 성격도 급한 면이 두드러지지만, 의외로 재간(才幹)이 뛰어나다. 원래 장비는 유비의 첫 부인이 된..
촉의 비운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최선의 선택을 했지만, 유비나 장비가 제갈량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 촉의 비극이었다. 유비나 장비가 냉정하고 침착했다면, 촉을 바탕으로 촉한이 삼국을 통일했을지도 모른다. 관우의 죽음이 오히려 촉의 병사들을 분발시킬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관우의 죽음은 장비와 유비를 무너뜨린다. 소양인 장비는 바로 겉으로 드러나게 무너져버린다. 뒤에서 다시 설명되겠지만, 장비는 재간(才幹)도 뛰어나고 도량(度量)도 제법 보여주는 소양인이다. 그러나 장비는 관우가 죽자 한순간에 무너진다. 관우가 존경받던 무장이었으니, 촉의 전체 장병들이 어느 정도는 관우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생각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급 장교나 일반 병사의 마음이 장비의 마음 같기야 했을까..
형주에 남겨진 사석(捨石) 결국 유비와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조조와 손권이 가장 눈독을 들이는 형주에 관우를 남겨놓고 촉을 정벌하러 떠난다. 처음에 제갈량은 형주에 남고 유비와 방통이 황충, 위연과 함께 촉으로 간다. 그러나 낙봉파에서 방통이 죽게 되자 장비, 조자룡 등을 다 끌고 제갈양이 촉으로 간다. 관우가 무장치고는 지략이 높기는 하지만, 주유, 사마의, 육손, 여몽 같은 전문적인 지략가의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제갈량은 관우 옆에 아무도 남기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 지역을 잘 아는 방통을 관우 옆에 남기고, 자신이 촉으로 유비를 따라갔다면 역사가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장수 역시 거의 남은 사람이 없다. 요화야 산도적 출신이고, 미방은 장사꾼 출신이다. 관우의 아들들을 제외하면 주창 ..
화용도(華容道) 마지막에 가장 첨예해진 것이 형주 처리 문제이고, 이것이 왕권 문제와도 연관되기에 그 이야기를 먼저 했지만, 관우와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코드가 맞지 않는 부분은 처음부터 나타난다. 관우는 능력 있는 사람이 난세에 초야에 묻혀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백성들이 고초를 겪으면 당연히 나서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유비에 대한 존경 때문에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따라가지만, 속이 썩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 탐구에만 매달려 산속에 은거하고 있는 사람을 굳이 찾아간다는 일이. 제갈량 쪽에서도 관우가 그리 편하지는 않다. 각각 자신이 맡은 일을 차질 없이 행해서 구조적이고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선호하는 소음인의 관점에서 볼 때, 관우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
1. 관우는 왜 형주에서 죽어야만 했나 왕위계승의 문제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소음인이다. 경륜(經綸)의 경지에 도달했기에 가히 사람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 병법을 쓰지만,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이 동요되거나 들뜨는 일이 없다. 자신의 감정을 헤아려 타인의 감정을 아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움직임을 연구하여 이해한 것이기에, 자신의 감정은 늘 고요하면서도 타인의 감정을 이용할 줄 안다. 또 남만정벌에서 보면, 새로운 환경에 당황하지 않고 그 환경에 맞는 새로운 전술을 바로 창안한다. 전술로 안 되면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 쓰기도 한다. 이것은 식견(識見)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증거다. 여기까지는 장점이다. 소음인이 갖는 한계도 조금 드러난다. 모든 것을 구조화해서 안정적으로 돌리려는 마음이 지나치..
부록 삼국지 이야기 책이 좀 어려워도 마지막이 재미있으면 재미있는 책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사상인의 심리연구’라는 만만치 않은 주제를 끝까지 잘 따라와 준 독자분들에 대한 보답으로 마지막에는 재미있는 삼국지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자.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들의 진짜 성격이 어땠는지는 알 방법이 없고, 또 안다고 해도 공부에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보다 소설을 통해 가공된 인물 쪽이 오히려 공부거리가 된다. 소설가들이 마구 인물을 만드는 것 같아도 인물의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려다보면 사상인 중의 한 모습을 묘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실존 인물보다는 소설 속에서 약간 가공되어 나오는 인물들을 관찰하는 것이 사상기운을 느끼기에 더 쉽다. 어쨌..
2. 한의사, 한의학도들에게 이 책은 한의사나 한의학도보다는 일반 독자들을 더 염두에 두고 씌어졌다. 그러나 한의사나 한의학도 중에 이 책을 읽을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되기에 그분들께 부탁의 말을 남기고자 한다. 이 책은, 마무리한다는 기분이 아니라 물꼬를 튼다는 기분으로 씌어졌다. 『동의수세보원』에는 사람마다 자기 체질을 알고 체질에 따라 노력할 바를 알아 마음을 상하지 말기를 바라는 동무(東武) 선생님의 간절한 바람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지금 시중의 책은 동무(東武) 선생님의 바람을 만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시중의 사상의학과 관련된 책은 대충 두 종류다. 하나는 한의사와 한의대생을 대상으로 하는 책들이다. 그런 책들은 대부분 성정(性情)에 관한 부분은 간단히 다루고 임상에 관한 내용으로 ..
에필로그 노력하는 만큼 좋아진다 1. 일반 독자들에게 이로써 사상인의 마음 돌아가는 것에 대해 필자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얼추 다 한 것 같다. 사상인의 기본적인 성정(性情), 그 기본적인 성정(性情)이 드러나는 모습, 약점을 극복하는 과정과 잘못되어 빗나가는 모습, 마지막으로 가장 타락했을 때 나오는 모습까지 다 짚어보았으니, 꼭 해야할 이야기는 다 끝난 듯하다. 뒤에 부록으로 붙인 삼국지 이야기가 남았지만, 그것은 이론적인 이야기는 아니니까, 이 정도에서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도록 하자.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결론으로 남길 만한 것은 몇 가지 안 된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세상에 대처하는 주된 기능은 사람마다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1. 사람을 하나의 기준으로 우열을 매겨서는 안 된다. 2..
2. 의(義)와 지(智)의 충돌 인과 예가 부딪히듯이 의(義)와 지(智)도 부딪히는 경향이 있다. 의(義)란 여러 사람이 좋아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다. 감성적인 면이 있다. 또 결과 지향적인 면이 강하다. 지(智)란 타당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사고의 영역에 속하고 과정 중시의 측면이 강하다. 의만 따지면 방법을 무시하게 되고, 지만 따지면 남들의 느낌에 관심이 없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보충 설명이 좀 필요하다. 의(義)를 주로 ‘옳을 의’로 새긴다. 이 글에서 ‘옳다/그르다’라는 표현은 주로 논리적 판단의 내용에 써왔다. 그러나 의를 말할 때 쓰는 ‘옳다’는 논리적으로 타당하다는 뜻이 아니다. “대중과 관련된 일에서는 여럿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하는 것이 ‘옳다’”까지가 포함된 개념이다. 즉 의란 근본적..
제11장 인의예지와 체질 앞에서 각 체질별로 가장 타락한 모습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박정희의 변신을 이야기할 때였다. 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이 부분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이 내용은 인의예지라는 유교의 기본 덕목과 관련된다. 동양적인 가치관에 중점을 두는 독자에게는 인의예지와의 관련 부분을 언급하는 것이 체질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1. 인(仁)과 예(禮)의 충돌 유교에서는 인간의 덕목으로 인의예지를 꼽는다. 이 모두가 어느 정도 이상의 경지에 가면 서로 부딪히는 일이 없겠지만, 낮은 경지에서는 좀 다르다. 인(仁)과 예(禮)가, 의(義)와 지(智)가 서로 부딪히는 경향이 있다. 인(仁)은 직관적으로 작용한다. 또 인은 나와 가깝고 멀고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 아이가..
5. 태양인의 급진 성향 태양인은 기본 성향에 있어서는 확실히 급진적인 면이 있다. 무엇보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네 체질 중에 가장 적게 느낀다. 따라서 기존의 체제를 바닥부터 흔드는 변화라 할지라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주저 없이 이를 주장한다. 또 태양인들은 공통된 기준을 지키는 일에 별로 연연하지 않는다. 태양인들이 교우(交遇)에 능하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자신이 잘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보통은 공통된 기준을 많이 가질수록 사람들끼리 어울리기 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우(交遇)에 능한 태양인은 그걸 잘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서로가 공통된 기준이 많지 않은 사람들과도 쉽게 어울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려면 공통된 기준이 넓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
4. 소양인의 진보 성향 소양인의 기본 성향은 개혁적이다. 성정(性情) 문진표에 ‘부당하다고 느끼면 참지 못한다’는 문장을 넣어놓고 소양인을 판별하는 문항으로 사용하는 한의사들이 꽤 많다. 집안의 가구 배치가 좀 불편하다고 느끼면 그날로 바꿔놓아야 직성이 풀린다는 사람도 대부분 소양인이다. 대외적으로도 개혁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가 다른 체질보다 높게 나타난다. 동네 반상회, 학교 학부모회, 회사의 업무개선 회의 등등의 자리에 가보면 바로 눈에 띈다. 그러나 다른 체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성향들이 바로 사회적 문제의 진보 성향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보편과 특수를 이야기할 때 강조했듯이, 소양인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즉 다수를 추종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3. 태음인의 보수 성향 태음인의 기본 성향은 보수적이다. 감각을 중시하고 경험적 접근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보수적이기 쉽다. 기존의 것이 익숙하고, 익숙한 것이 바뀌는 것은 불편하기 때문이다. 또 약간의 불편은 고치려 하기보다 그냥 감수하는 경우가 많다. 희성(喜性)이 발달되어서 웬만한 상황은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출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음인이라고 기존의 가치관을 답습하지는 않는다. 소음인이 자신의 논리로 받아들이기 힘든 제도 교육의 왜곡을 거부하는 것과 비슷하다. 태음인은 배운 것보다 경험한 것을 중시하는 천성이 있기 때문이다. 소음인이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의 하나로 가는 경향이 있다면, 태음인은 반쯤만 받아들이거나 삼분의 일쯤만 받아들이거나 하는 식이다. 즉 ‘책은 ..
2. 소음인의 수구 성향 소음인은 기본 성향에서 수구적이다. 바꿔 말하자면, 수구적인 태도를 견지해도 문제없다 싶을 정도로 확신이 들어야 그 부분을 자신의 기준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간디의 비폭력주의는 한번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고는 평생 변하지 않았다. 테레사 수녀의 빈민 사랑도 마찬가지고, 이른바 수구적 태도와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아주 근접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음인이 자신의 기준으로 받아들인 확신이 그 사회를 기준으로 볼 때 아주 급진적인 생각인 경우도 있다. 그 경우에 소음인은 그 급진적인 사고를 변치 않고 지켜간다. 급진적 사상을 수구적 태도로 지켜낸다는 것이다. 종교적 맹신자의 경우, 급진인지 수구인지 애매한 경우가 있다. 바로 그런 경우다. 하지만 소음인의 그런 경향이 크게 문제되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