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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이병연(李秉淵, 1671 현종12~1751 영조27, 자 一源, 호 槎川)은 그의 아우 이병성(李秉成)과 함께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의 문하에서 시명(詩名)을 드날린 문인이다. 같은 문하인 윤봉조(尹鳳朝)나 이천보(李天輔) 등에게서 이미 인정을 받았을 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이덕무(李德懋)에게서도 “사천과 같은 때에 화가로는 관아재 조영석, 겸재 정선이 함께 백악산 아래에 살면서 문채와 풍류가 일시에 찬란했다[槎川之時 畫則趙觀我齋榮祏 鄭謙齋㪨 俱居白岳下 文采風流 輝暎一時 「淸脾錄」].”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그는 김창협(金昌協)ㆍ김창흡(金昌翕)에 의해 주도된 진시운동을 계승하여 조선의 산천을 시로써 형상화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시작(詩作) 활동은 그의 평생 지기(知己)인 겸재 정..
오광운(吳光運, 1689 숙종15~1745 영조21, 자 永伯, 호 藥山)은 고시언과 채팽윤이 편찬하다가 못다하고 간 『소대풍요(昭代風謠)』를 마무리하여 간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위항문학을 세상에 드러나게 한 문인기도 하다. 오광운(吳光運)은 사대부문학 뿐만 아니라 ‘천(天)’을 온전히 간직한 위항문학을 포괄해야만 조선문학의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양반들이 홀로 감당할 수 없어 중인이나 한미한 선비의 집【규두(圭竇): 규(圭) 모양의 길쭉한 쪽문이라는 뜻으로, 지극히 빈한한 선비의 거처를 가리킨다. 『예기』 유행(儒行)에 “선비는 가로 세로 각각 10보(步) 이내의 담장 안에서 거주한다. 좁은 방 안에는 사방에 벽만 서 있을 뿐이다. 대를 쪼개어 엮은 사립문을 매달고, 문 옆으로 규 모양의..
남유용(南有容, 1698 숙종24~1773 영조49, 자 德哉, 호 雷淵)은 영조 시대의 문풍을 주도한 관각문인(館閣文人)이었지만, 앞서 살핀 이들과 마찬가지로 천기론적 시론을 펼치면서 시작을 겸하였다. 남유용(南有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에 가득한 것이 모두 나의 시이다. 그 항상된 것은 산천초목(山川草木)에 있고 그 변하는 것은 풍운연월(風雲煙月)에 있다 天下者皆吾詩也, 其常在山川草木, 其變在風雲煙月. 『雷淵集』, 「鐘巖詩卷跋) 이 발언을 통해 경물에 대한 관심을 시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러한 남유용(南有容)의 시세계를 다음의 「기우(騎牛)」를 통해 보기로 한다. 春雨濛濛過一簑 봄비가 몽롱하게 도롱이를 스쳐지나는데 片雲出峽與婆娑 조각 구름은 골짜기를 너울너울 빠져나간다. 極知..
홍세태(洪世泰, 1653 효종4~1725 영조1, 자 道長, 호 柳下)는 역관출신으로 그 시명이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까지 알려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위항시인이다. 홍세태(洪世泰)는 스스로 『유하집(柳下集)』 권6 「추회시(秋懷詩)」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骨相判爲當世棄 뼈의 생김새야 판이하여 당세를 위해 버려졌지만 文章留與後人知 문장만은 남아 후배들에게 알려지리. 이처럼 문학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정립코자 하였다. 이에 그는 역관이라는 자신의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독서지사(讀書之士)’ 또는 ‘소유(小儒)’로 인식하면서 평생을 가난 속에서 여행과 시업(詩業)으로 일관하였다. 또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위항인 48인의 작품을 모아 『해동유주(海東遺珠)』를 편찬하여, 이 다음의 『소대풍요(昭代風謠)..
조성기(趙聖期, 1638 인조16~1689 숙종15, 자 成卿, 호 拙修齋)는 높은 포부와 학문이 있었지만 세상에 쓰이지 못했던 문인이다. 특히 그는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어 농암(農巖)ㆍ삼연(三淵) 형제에게서 높이 평가받았으며, 또 그들과 서로 시에 대한 견해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스스로 다음과 같이 작시(作詩)의 원칙을 밝히기도 했다. 이런 까닭으로 내가 꽃을 볼 적에 일찍이 외부의 노랗고 붉은 것을 탐하여 볼 뿐만이 아니라 실제론 사물에 따라 형체에 부여된 변화롭고 기교로우며 무궁하면서도 오묘한 조화와 때에 따라 피고 지는 생물의 색과 모습의 쉼이 없음을 감상한다. 是以僕之看花, 未嘗耽看外面之黃紅而已, 實賞其隨物賦形化工無窮之妙造, 逐時榮悴物色生態之不息. 작시(作詩)의 원칙을 밝힌 그대로, 그의..
김창흡(金昌翕, 1653 효종4~1722 경종2, 자 子益, 호 三淵)은 문보다는 시에 뛰어나 형 김창협(金昌協)의 문장과 병칭되기도 한다. 홍만종(洪萬宗)이 『시평보유(詩評補遺)』 하편(下篇)에서 “삼연 김창흡은 과거시험 공부를 일삼지 않고 시재로 세상에 이름이 나 이따금 흥을 붙여 지은 작품이 격조가 높고 마음이 깊어 남들이 도달할 수 없다[金昌翕三淵, 不事科業, 以詩名於世, 時時寓興之作, 格高心玄, 人莫能及].”라 한 그대로, 삼연(三淵)의 일생은 시로 시작해서 시로 끝났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삼연(三淵)은 새로운 이론과 창작의 실천을 통하여 18세기 시단에 활력과 변화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삼연(三淵)을 지지하는 많은 작가들에 의하여 이후 그는 이 시기 시단의 맹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
2. 백악시단(白嶽詩壇)과 진시운동(眞詩運動) 17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인왕산(仁旺山)과 북악산(北嶽山) 사이의 산록(山麓, 壯洞)에 시단(詩壇)을 만들고, 새로운 시를 써야 한다고 다짐하는 일군의 시인들이 모여 들면서, 조선후기 시단에 새로운 기풍이 일기 시작했다. 이들이 함께 모인 곳을 백악시단(白嶽詩壇)이라 부르기도 하고 이 새로운 시세계의 지향을 모색하는 움직임을 ‘시운동(詩運動)’이라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 형제가 중심이 되고, 이들의 문하에서 이병연(李秉淵)ㆍ이하곤(李夏坤)ㆍ김시민(金時敏)ㆍ김시보(金時保)ㆍ유척기(兪拓基)ㆍ홍세태(洪世泰) 등이 호응하여 조선후기 소단(騷壇)에 참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화단(畵壇)에서도 겸..
홍만종(洪萬宗, 1643 인조21 ~1725 영조1, 자 于海, 호 玄默子)은 정두경(鄭斗卿)에게 시를 배웠고, 김득신(金得臣)과 망년의 사귐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저술활동에 주력하여 『해동이적(海東異蹟)』(24세), 『소화시평(小華詩評)』(33세), 『순오지(旬五志)』(36세), 『시평보유(詩評補遺)』(49세),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63세), 『증보역대총목(增補歷代總目)」(64세), 『시화총림(詩話叢林)』(70세), 『명엽지해(蓂葉志諧)」(미상) 등을 남기고 있다. 이 중 『소화시평(小華詩評)』ㆍ『시평보유(詩評補遺)』ㆍ『시화총림(詩話叢林)』 등은 각각 우리나라 비평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강백년(姜栢年, 1603 선조36~1681 숙종7, 자 叔久, 호 雪峰)은 특별한 시론(詩論)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정두경(鄭斗卿)ㆍ김득신(金得臣) 등과 종유하며 당시풍의 아름다운 시편을 많이 남겼다. 「금강도중(金剛道中)」을 보인다. 百里無人響 山深但鳥啼 백리를 지나도록 사람 말 들리지 않고 산이 깊어 다만 새 소리만 들리네. 逢僧問前路 僧去路還迷 중을 만나 갈 길을 물어 보았지만 중 떠나자 길이 다시 혼미해지네.. 이 시를 정두경(鄭斗卿)에게 보이자, 정두경(鄭斗卿)은 승구(承句)의 단(但)을 산(山)자로 바꾸면 더욱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이에 강백년도 동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득신(金得臣)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姜叔久栢年 金剛山道中詩曰 百里無人響 山深但鳥啼 逢僧問前路 僧去路還迷 ..
김득신(金得臣, 1604 선조37~1684 숙종10, 자 子公, 호 柏谷)은 시화서(詩話書) 『종남총지(終南叢志)』를 저술한 시론가이며 시인이다. 그는 정두경(鄭斗卿)ㆍ임유후(任有後)ㆍ홍석기(洪錫箕)ㆍ홍만종(洪萬宗) 등 당대의 시인들과 망년의 사귐을 맺었다. 그가 교유했던 이들이 대체로 당시(唐詩)를 숭상하였거니와 그 자신도 또한 당풍(唐風)에 경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의 시를 평할 때의 기준이 당시에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는 타고난 천재로 시를 쓴 시인이기보다 후천적인 단련으로 좋은 시를 남긴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독수기(讀數記)」에서 「백이전(伯夷傳)」을 일억독(一億讀)했다고 하고 자신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 붙였다 하거니와, 그를 곁에서 본 홍만종(洪萬宗)도 서슴없이 그의 재질이..
1. 시론가(詩論家)의 시업(詩業)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 양난(兩亂) 이후의 황량한 시단에 전대(前代)의 시작(詩作)들을 정리하는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된다. 시선집을 다시 내고, 시화를 창작하거나 기존의 시화를 모아 새로이 총집으로 발간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대표적 인물이 남용익(南龍翼)ㆍ김득신(金得臣)ㆍ홍만종(洪萬宗) 등이다. 이들은 스스로 전인(前人)들의 시작(詩作)을 수집ㆍ정리ㆍ비평하고 있지만, 그들이 생산한 시작(詩作)이 반드시 비평가의 명성에 걸맞는 것은 아니다. 남용익(南龍翼, 1628 인조6~1692 숙종18, 자 雲卿, 호 壺谷)은 숙종년간(肅宗年間) 오랫동안 예조판서ㆍ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시선집 『기아(箕雅)』를 편찬하는 한편, 시화비평서(詩話批評書) 『호곡시화(壺谷詩話)..
8. 조선후기(朝鮮後期)의 황량(荒凉)과 조선시(朝鮮詩)의 자각(自覺)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시단까지도 황량하게 하였다. 흔히 천하가 어지러울 때 인물이 배출된다고 하지만,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는 오로지 전 시대의 안정에 힘입은 결과이며 병란 때문에 인물이 쏟아져 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이후 숙종(肅宗)대에 이르는 70여년간의 시단은 문자 그대로 황량과 적막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정두경(鄭斗卿)과 이민구(李敏求)가 적막에서 일어나 우뚝하게 시단을 돋보이게 하였다. 숙종대에 이르러 모처럼 태평성세를 구가하는 안정을 되찾았지만 정치 내부에서 불붙기 시작한 당론(黨論)의 가열로 사림(士林)은 빛을 잃고 소단(騷壇)은 다시 산림(山林) 속으로 자복(雌伏)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 왕..
최대립(崔大立, ?~?, 자 秀夫, 호 蒼厓)은 임준원(林俊元)ㆍ최승태(崔承太)ㆍ유계홍(庾繼弘)ㆍ김부현(金富賢) 등과 어울려 낙사(洛社)를 결성하여 시회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이들은 모두 각체시(各體詩)를 두루 시범(示範)하여 뒷날 『소대풍요(昭代風謠)』와 같은 위항시집(委巷詩集)을 빛내고 있다. 최대립(崔大立)의 「상실후야음(喪室後夜吟)」(七絶)과 「풍중화(風中花)」(七古)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睡鴨薰消夜已關 향로에 불기 가시며 밤도 이미 끝났는데 夢回虛閣枕屛寒 꿈에 잠긴 빈 집에는 베개와 병풍이 썰렁하구나. 梅梢殘月娟娟在 매화가지 끝, 지는 달만은 곱디 곱게 남아서 猶作當年破鏡看 그때의 깨어진 거울을 보게 하는구나. 『소대풍요(昭代風謠)』 권3. 이 시의 제목이 「상실후야음(喪室後夜吟)」인 데서 알..
김효일(金孝一, ?~?, 자 行源, 호 菊潭)은 금루관(禁漏官)을 지낸 위항시인으로 역시 시에 능하여, 『육가잡영(六歌雜詠)』에 41수의 시를 전하고 있다. 자신의 처지와 생활을 평담하게 표백하고 있는 「만음(漫吟)」을 보기로 한다. 樂在貧還好 閑多病亦宜 즐거움이 있어 가난도 도리어 괜찮고 한가로움 많아 병 또한 편안하네. 燒香春雨細 覓句曉鍾遲 향불을 태우노라니 봄비가 가랑가랑 내리고 시구를 찾노라니 새벽 종소리 드디 울리네. 巷僻苔封逕 窓虛竹補籬 궁벽진 마을에 이끼는 길을 덮고 빈 창에는 대나무가 부서진 울타리를 기웠네. 笑他名利客 終歲任驅馳 우습구나. 저 부귀영화를 좇는 무리들 한 해가 다가도록 달려가기만 하네. 이 시 또한 좌절하고 있는 작자 자신의 평범한 삶의 주변 부분들을 옮고 있다. 그러나 미..
위항인(委巷人)이란 ‘거리에 버려진 사람’이라는 것이 본래의 뜻이다. 사회로부터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위항시인이란 대체로 중간계층의 신분에 속하는 시인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실제로는 이른바 ‘하대부일등지인(下大夫一等之人)’으로 자처(自處)하는 의역중인(醫譯中人), 서리(胥吏) 등이 핵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서류(庶流)와 하천인(下賤人)들이 포함되기도 한다. 곧 사대부의 반열에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사실상 평민보다는 우위에 있는 이른바 여항의 시인들이다. 이들의 시작(詩作)이 궁극적으로 사대부들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점에서 보면 그 독자적 영역을 인정하기 어렵지만, 한편 사대부와 구별되는 계층에 속하는 지식인이 집단으로 문학활동을 전개한 사실에서 보면 조선..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 명종18~1589 선조22, 本名 楚姬, 자 景樊, 호 蘭雪軒)은 엽(曄)의 딸이자 균(筠)의 누이로 이달(李達)에게 당시(唐詩)를 배워 시재(詩才)를 떨친 여류 한시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는 시인이다. 난설헌(蘭雪軒)의 시(詩)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난설헌(蘭雪軒)은 어려서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8세 때 이미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이라는 명편을 지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기림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남편 김성립(金誠立)과 금슬(琴瑟)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어머니와의 불화, 자식들의 요사(夭死), 친정의 몰락 등 계속되는 시련으로 불우한 생애를 보내야만 하였다. 특히 난설헌(蘭雪軒)의 시 역시 규방의 정한과 삶의..
계생(桂生, 1573 선조6~1610 광해군2, 일명 癸生ㆍ癸娘ㆍ香今, 자 天香, 호 梅窓ㆍ蟾初)은 부안(扶安)의 명기(名妓)로 가금(歌琴), 한시, 시조에 능한 여류시인(女流詩人)이다. 아전 이양종(李陽從)의 딸로 개성의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와 쌍벽을 이루었으며 당대의 문사 유희경(劉希慶), 허균(許筠) 등과 교유가 깊었으나 38세로 요절하였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하 99번에서 근세의 송도(松都) 황진이(黃眞伊)와 부안(扶安)의 계생(桂生)은 그 사조(辭藻)가 문사들과 더불어 다툴 만하니 기이하다고 칭송하였다. 유희경의 『촌은집(村隱集)』에 계생에게 준 시 7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증계낭(贈癸娘)」 시를 보면 “일찍이 남국 계랑의 명성을 들었거니 시운(詩韻)과 가..
이옥봉(李玉峰, ?~?)은 조선중기의 여류시인으로 옥봉(玉峰)은 그의 호(號)다. 옥봉은 옥천군수(沃川郡守) 이봉(李逢)의 서녀(庶女)로 태어나 조원(趙瑗)의 소실(小室)이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직전 35세를 전후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시는 대부분 산일(散逸)되었으나 조원(趙瑗)의 현손(玄孫)인 조정만(趙正萬)이 편한 『가림세고(嘉林世稿)』 편말(編末)에 수록되어 있는 「옥봉집(玉峰集)」에 32수가 전하고 있다. 『가림세고(嘉林世稿)』는 조원(趙瑗)ㆍ조희일(趙希逸)ㆍ조석형(趙錫馨) 등 삼대(三代)의 시문 3권과 옥봉의 시로 편차되어 있다. 허균(許筠)은 옥봉의 시를 맑고 굳세며(淸健ㆍ淸壯) 여성의 화장기가 없어 가작이 많다고 평가하였으며 신흠(申欽)과 홍만종(洪萬宗)도 옥봉이 시문에 ..
황진이(黃眞伊, ?~?, 本名 眞, 一名 眞娘, 妓名 明月)는 중종(中宗) 때의 명기(名妓)로 시서(詩書)와 음률(音律)에 능통하였다. 그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출중한 미모와 예술적 재능을 타고나 15세에 기적(妓籍)에 투신한 이후 당대의 문인 명유와 교유하여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당시 생불(生佛)이라 일컬어지던 천마산(天磨山)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파계시킨 일과 시조 한 수로 벽계수(碧溪守)를 매료시킨 일, 소세양(蘇世讓)과의 교유, 서경덕(徐敬德)과의 사이에 사제관계(師弟關係)가 이루어진 사연 등은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특히 그는 서경덕(徐敬德)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우게 되어 그의 문학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
백대붕(白大鵬, ? ~ 1592 선조25, 자 萬里)은 조선중기 천예출신(賤隸出身)의 시인으로 유희경(劉希慶)과 함께 조선후기 위항문학(委巷文學) 발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출생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학산초담(鶴山樵談)』등에 유희경(劉希慶)ㆍ정치(鄭致)ㆍ허봉(許篈)ㆍ심희수(沈希洙) 등과 교유하였다는 기사를 참고로 한다면 아마도 출생연대는 1550년대 전후로 추정된다. 「취음(醉吟)」시에서 자신의 신분이 군함과 수운의 업무를 행하는 전함사(典艦司)의 노예라고 밝히고 있으나 이 역시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허균(許筠)은 그가 궁궐의 개폐와 왕명의 전달을 맡는 액정서(掖庭署)의 사약(司鑰)을 역임하였다고 하였으나 천인 신분의 그가 정6품 잡직(雜職)인 이러한 지위에 어떠한..
8. 풍요(豊饒) 속의 음지(陰地) 사대부(士大夫) 계층에서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를 누리고 있을 때 이들과 다른 처지에서 외롭게 시를 쓴 시인(詩人)들도 있다. 천예(賤隸) 출신인 유희경(劉希慶)ㆍ백대붕(白大鵬)과, 사대부(士大夫) 계층의 유희적 애정의 대상으로 일세에 풍류를 과시한 황진이(黃眞伊)ㆍ이옥봉(李玉峰)ㆍ계생(桂生)과 같은 기녀(妓女)들이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위항인(委巷人)의 신분으로 『육가잡영(六家雜詠)』과 같은 위항시집(委巷詩集)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최기남(崔奇男)ㆍ김효일(金孝一)ㆍ최대립(崔大立) 등도 모두 음지(陰地)에서 시를 쓴 이 시대의 시인들이다. 유희경(劉希慶, 1545 인종1~1636 인조14, 자 應吉, 호 市隱ㆍ村隱)은 조선중기의 천예(賤隸..
정두경(鄭斗卿, 1597 선조30~1673 현종14, 자 君平, 호 東溟)은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으로 정언(正言)ㆍ교리(校理) 등을 역임하고 만년에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어적십난(禦敵十難)」의 상소를 올렸으며 1650년 풍시(諷詩) 27수를 효종에게 올려 호피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는 을사사화(乙巳士禍)의 간흉(奸凶) 정순붕(鄭順朋)의 증손으로 이것이 그의 사회적 진출에 멍에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의 조상 중에는 렴(磏)과 같은 문사(文土)가 있으며 아버지 지승(之升)도 문명(文名)을 떨쳐 대대로 문장가를 배출한 가계(家系)를 이어 그 역시 시명(詩名)으로 일세(一世)를 울렸다. 임병양난(壬丙兩亂) 이후 숙종대(肅宗代)에..
이명한(李明漢, 1595 선조28~1645 인조23, 자 天章, 호 白洲)은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시인이요, 문장가로 관각응제(館閣應製)의 외교서가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으며 아버지 정구(廷龜), 아들 이상(一相)과 더불어 삼대(三代)가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명문가 출신으로 당시의 문단을 빛내었다. 이명한(李明漢)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반대하였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척화파(斥和派)로 지목되어 두 차례나 심양에 끌려가는 등 절의지사(節義志士)의 삶을 영위하였는데 그가 심양으로 잡혀갈 때 지은 육수(六首)의 시조는 인구에 널리 회자되기도 하였다. 이명한(李明漢)은 이식(李植)과 장유(張維)로부터 시재(詩才)를 인정받는 등 당시 문단에서 주목을 받았다. 후대에 김만중(金萬重)과 홍만종(洪萬宗..
이민구(李敏求, 1589 선조22~1670 현종11, 자 子時, 호 東洲ㆍ觀海)는 이수광(李睟光)의 아들로 문장이 뛰어나고 사부(詞賦)에 능하였다. 부자가 함께 문명(文名)을 떨쳐 아버지 수광(睟光)은 시(詩)로, 아들 민구(敏求)는 부(賦)로 병칭되기도 하였다. 이민구는 평생 4,000여권의 책을 저술하는 등 집필에 왕성한 열의를 갖기도 하였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하 71번에서 이민구(李敏求)의 시세계를 평하여, “처음에는 글이 몹시 어려워 읽기 힘들었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왕을 강화에 안전하게 모시지 못하여 굴욕을 당하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간 이후 시에 진력하여 점점 명창(明暢)하게 되었다[其詩初以佶屈爲主, 晚廢江外, 益肆力焉, 而漸近明暢]”고 하였다. 남용익(..
이안눌(李安訥, 1571 선조4~1637 인조15, 자 子敏, 호 東岳)은 목릉성세기(穆陵盛世期)에 권필(權韠)과 함께 이재(二才)로 칭송받은 시인이다. 동악(東岳)은 海東의 강서시파(江西詩派)로 알려진 이행(李荇)의 증손이자 박은(朴誾)의 외증손으로 시문을 가학(家學)으로 이어받은 시인이다.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인 이식(李植)은 그의 재종질이다. 동악(東岳)은 정철(鄭澈)의 제자로 권필(權韠)ㆍ이호민(李好閔)과 함께 그들의 시재(詩才)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는 특히 석주(石洲)와 함께 전대 문학의 폐해를 시정하고 새로운 문풍을 개척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동악(東岳)은 권필(權韠)과는 달리 시작에 있어 정련(精鍊)을 중시하였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 권하 54에서..
김상헌(金尙憲, 1570 선조3~1652 효종 3, 자 叔度, 호 淸陰)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파직되었고 1639년 명(明)을 치기 위하여 청(淸)의 출병을 요구할 때에도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심양(瀋陽)에 끌려가 옥고를 치르고 돌아왔다. 그의 시조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는 절의를 표방한 작품으로 인구(人口)에 널리 회자되었다. 그의 한시도 대부분 난세에 대한 비분강개와 우국충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후대의 제가들이 청음(淸陰)을 조선의 소무(蘇武)라고 일컬은 것도 여기에서 말미암는다. 그가 심양에 구금되어 있을 때 읊은 「송추일유감(送秋日有感)」은 다음과 같다. 忽忽殊方斷送秋 쓸쓸히 낯선 곳에서 가을을 다 보내니一年光景水爭流 일년의 세월..
임숙영(任叔英, 1576 선조9~1623 인조1, 자 茂叔, 호 疎庵)은 광해군의 난정과 척신(戚臣)들의 무도함을 논박하다 유배의 어려움을 겪는 등 직절청명(直節淸名)으로 이름을 남긴 문신이다. 소암은 특히 대책문(對策文)에 능했는데 그의 변려문(騈儷文)은 육조(六朝)의 서릉(徐陵)과 유신(庾信), 초당사걸(初唐四傑)인 왕발(王勃)ㆍ양형(楊炯)ㆍ노조린(盧照隣)ㆍ낙빙왕(駱賓王)의 체제를 본받아 정두경(鄭斗卿)의 가행체(歌行體)와 병칭될 정도로 알려져 있다. 임숙영(任叔英)은 시(詩)보다는 문(文)에 능했지만 특히 시에 있어서는 굉편거제(宏編巨製)의 장편에 보였다. 오언배율(五言排律) 「술회(述懷)」, 칠언배율(七言排律) 「관창(觀漲)」 삼수(三首)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원제(原題)가 「술회기정강화이동..
이춘영(李春英, 1563 명종18~1606 선조29, 자 實之, 호 體素齋)은 성혼(成渾)의 문인으로서 시문으로 자호(自豪)한 문장가이다. 이춘영은 여러 제가의 시문을 다독(多讀)하여 시문을 지음에도 정련에 힘쓰지 아니하였다. 또한 그의 시문은 부려(富麗)함을 전상(專尙)하여 시격이 높지는 않지만 시재가 도도하고 호한(浩汗)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의 호한함과 정련에 힘쓰지 아니함은 도리어 그의 시가 번쇄하고 난잡한 데로 나가게도 하였다. 신흠(申欽)은 「체소집서(體素集序)」에서 그의 글은 제자(諸子)와 소식(蘇軾)의 글들을 가슴 속에 융합하여 창일한 기운으로 쏟아내는 것이 마치 봄에 저절로 꽃이 피고, 고였던 물이 터져나가는 듯하다고 평하였다. 이춘영은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권필(權韠, 1569 선조2~1612 광해군4, 자 汝章, 호 石洲)은 권근(權近)의 후손이자 권벽(權擘)의 오자(五子)로 사마시(司馬試)에 장원(壯元)하였으나 한 글자의 오서(誤書)로 축방(黜榜)당한 이후 시주(詩酒)로 자오(自娛)하고 방랑하면서 시작에 진력하였다. 그의 시는 두보(杜甫)를 조종(祖宗)으로 삼고 간재(簡齋) 진여의(陳與義)를 배워 시어(詩語)의 뜻이 지극함에 이르고 구법이 아름다워서 당대 및 후세의 대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장유(張維)는 「석주집서(石洲集序)」에서 ‘그 문장이 이루어짐에 정경이 알맞고 성률이 모두 조화로와 대개 천기가 흘러 움직이지 않은 것이 없다[及其章成也, 情境妥適, 律呂諧協, 蓋無往而非天機之流動也]’고 하여 천기의 유동함과 정경의 교융을 높이 평가하였고 허균..
차천로(車天輅, 1556 명종11~1615 광해군7, 자 復元, 호 五山)는 조선중기의 문신, 문학가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아버지 식(軾), 동생 운로(雲輅)와 함께 삼소(三蘇)로 병칭되기도 하였으며 가사(歌辭)와 서예에도 뛰어났다.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그가 작성하여 명나라 사람들로부터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속작(速作)에 뛰어났다고 한다. 특히 시에 능하여 한호(韓濩)의 글씨, 최립(崔岦)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일컬어졌다. 이수광(李睟光)은 차천로의 문장을 평하여 기상이 웅건(雄健)하고 기장(奇壯)하여 정련(精鍊)에 힘쓰지 않아 장강(長江)과 대해(大海)가 쏟아져 내려도 더욱 다하지 않는 것과 같았으며 대우(對偶)의 시문에 특히 장기를 보였다고 하..
7. 난중(亂中)의 명가(名家) 정작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조선전기 마지막 단계의 사단(詩壇)을 황량(荒凉)하게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전쟁의 아픈 체험을 직접 노래한 이호민(李好閔)ㆍ김상헌(金尙憲)ㆍ이안눌(李安訥) 같은 시인(詩人)이 있는가 하면, 어려운 현실의 고경(苦境)을 직접 체험하면서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시를 쓴 시인(詩人)들도 있다. 차천로(車天輅)ㆍ권필(權韠)ㆍ이춘영(李春英)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이민구(李敏求)ㆍ정두경(鄭斗卿) 등은 임병(壬丙) 양란(兩亂)이 지나간 뒤의 황량(荒凉)한 시단에서 일어나 이 시기의 공백(空白)에 섬광(閃光)을 발하기도 했다. 이호민(李好閔, 1553 명종8~1634 인조12, 자 孝彦, 호 五峰)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
이식(李植, 1584 선조17~1647 인조25, 자 汝固, 호 澤堂) 역시 시(詩)에 비하여 문(文)으로 이름을 떨친 고문가다. 이식(李植)의 시문은 성리학적 전범을 좋아 『수촌만록(水村謾錄)』에서 ‘전중아건(典重雅健)하다는 평을 하기도 하였거니와 특히 그의 문장은 평이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어 문장을 수련하는 초심자들이 즐겨 읽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시는 두보(杜甫)의 당풍(唐風)을 중심으로 하고 초사(楚辭)와 황정견(黃庭堅) 등에도 연맥되어 각체를 두루 구비하였다 하며, 시어(詩語)가 간략(簡略)하면서도 의경(意境)이 정미(精微)하다는 평가를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 했지만, 시작(詩作) 역시 문과 마찬가지로 평이한 것이 많다. 새봄에 돌아온 제비를 보고 읊은 「영신연(永新燕)」을 아래에 보인다. ..
장유(張維, 1587 선조20~1638 인조16, 자 持國, 호 谿谷ㆍ默所)는 한문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이식(李植)과 함께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고문(古文)을 시범한 대표적인 문장가이다. 그의 저서로는 『계곡집(谿谷集)』 외에도 『계곡만필(谿谷漫筆)」이 있다. 어려서부터 유가경전(儒家經典)과 노장서(老莊書) 및 양명학(陽明學) 등의 경사(經史) 제서(諸書)를 두루 탐독하고 고문에 전심하여 서른 살을 전후하여 자성일가(自成一家)하였다.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의 고문 작법을 체득하여 박실(朴實)하고 사달(辭達)한 명편(名篇)을 남겨 송시열(宋時烈)ㆍ이명한(李明漢)ㆍ정조(正祖) 등으로부터 고평을 받았다. 시보다는 문장에 관심이 많았지만 계축옥사(癸丑獄事) 이후 이두(李社) 등의 당송(唐宋)시인들의 시를..
이정구(李廷龜, 1564 명종19~1635 인조13, 자 聖徵, 호 月沙ㆍ保晩堂ㆍ凝菴) 역시 신흠(申欽)ㆍ장유(張維)ㆍ이식(李植)과 함께 조선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을 날렸다. 그래서 월사(月沙)는 중국과의 각종 외교문서와 변무주문(辨誣奏文)을 작성하여 당시 선조(宣祖)의 총애를 한 몸에 받기도 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의 사행(使行)을 통하여 중국의 문인 석학들과 교유하여 그의 문명을 중국에까지 드날렸다. 이정구(李廷龜)는 시(詩)보다는 문(文)에 장처(長處)를 보였지만 1,600여수의 시를 남기고 있는 것을 보면 시에도 커다란 관심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의 시는 「조천록(朝天錄)」, 「동사록(東槎錄)」등 중국과 일본에 사신으로 오가면서 쓴 작품이 많다. 중국의 문인 ..
신흠(申欽, 1566 명종21 ~ 1628 인조6, 자 敬叔, 호 象村ㆍ玄翁ㆍ玄軒ㆍ放翁)은 장유(張維)ㆍ이식(李植)ㆍ이정구(李廷龜)와 함께 조선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불린다. 그는 학문에 전념하여 일찍부터 문한직(文翰職)을 겸임하며 대명외교문서의 작성,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 등에 참여하여 문운(文運)의 진작에 크게 기여하였다. 신흠(申欽)은 시보다는 문에 특장을 보였다. 정두경(鄭斗卿)은 이러한 그의 특징을 ‘현옹은 문장이 우월하였지만 시는 본색이 아니다[玄翁行文雖優, 詩非本色]’라 하였다. 그렇지만 이 말은 시가 문에 비하여 열세에 있었던 것이지 시 자체가 열등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는 비단을 얽어놓은 듯이 섬려(纖麗)한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이러한 특징은 원(元) ..
6. 문장가(文章家)의 시작(詩作) 최립(崔岦)의 문(文)과 권필(權韠)의 시(詩)는 나란히 일세(一世)에 이름을 드날렸거니와, 특히 의고문(擬古文)을 숭상한 최립(崔岦)은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너무 높아 그의 시작(詩作)은 문명(文名)에 가리어 빛을 발하지 못한 결과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고문(古文)을 시범(示範)한 월상계택(月象谿澤) 또는 계택상월(谿澤象月)로 불리우는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역시 그들의 시작(詩作)이 문명(文名)에 가리어 후세의 관심에서 소원(疎遠)했던 것이 사실이다. 최립(崔岦, 1535 중종30~1612 광해군4, 자 立之, 호 簡易ㆍ東皐)은 문장에 조예를 보여 월상계택(月象谿澤)의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와 비견되기도 하였다.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하여 ..
허균(許筠, 1569 선조2~1618 광해군10, 자 端甫, 호 蛟山ㆍ惺所ㆍ白月居士)은 재정(才情)이 뛰어난 시인으로 의고주의 문풍에 반대하여 정(情)의 문학을 주창하였으며 시에 대한 조감(藻鑑)은 당대의 제일인자로 지목되었다. 『국조시산(國朝詩刪)』은 그의 조감력(藻鑑力)을 잘 보여준 시선집으로 후대의 제가들에 의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송시(宋詩)가 시리(詩理)가 아닌 성리학적 도리(道理)에 편향되어 시의 참다운 맛을 저상(沮喪)시켰다는 판단에 따라 당대 시문학의 폐습을 일신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언외(言外)의 정(情)을 함축한 시, 곧 당시(唐詩)를 시의 전범으로 삼았다. 이것은 그의 시(詩)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이달(李達)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허균(許筠)은 “문필진한..
이수광(李睟光, 1563 명종18~1628 인조6, 자 潤卿, 호 芝峰)은 조선중기의 학자이자 문장가로 아들 민구(敏求)와 더불어 문명을 날렸다. 그는 역대 제가(諸家)들의 경세책과 문장을 광범위하게 수렴하여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였다. 역대 여러 경전과 제가서(諸子書)에 두루 밝았을 뿐 아니라 성운(聲韻)에도 조예가 깊어 그의 시는 종종 성당(盛唐)의 유풍(遺風)이 있다고 평가되어 왔다. 『지봉유설(芝峰類說)』 시28에서 스스로 “나는 오경 외에 『장자(莊子)』와 사마천(司馬遷)을 좋아하였고 시는 건안(建安)으로부터 초당(初唐)ㆍ성당(盛唐)까지 좋아하였다. 그러나 중당(中唐)과 만당(晩唐) 이하의 것은 그 경구만을 취하였을 따름이다[余於五經, 好莊子司馬子長, 詩好建安以至始唐盛唐, 而中晚以下, 則唯取其驚句..
5. 문필가(文筆家)의 시세계 소단(騷壇)에서도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각방면에서 뛰어난 시인이 나와 각각 제 몫을 다해준 결과라 할 것이다. 『어우야담(於于野譚)』을 저작한 유몽인(柳夢寅)과 『지봉유설(芝峰類說)』의 저자 이수광(李睟光), 그리고 『국조시산(國朝詩刪)』의 찬자(撰者)인 허균(許筠) 등은 그들이 제작한 시작(詩作)으로도 일정하게 시사(詩史)에 기여하고 있지만, 특히 이수광(李睟光)과 허균(許筠)은 뛰어난 조감(藻鑑)으로 후세의 기림을 받았다. 유몽인(柳夢寅, 1559 명종14~1623 인조1, 자 應文, 호 於于堂)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로 당대문학의 새로운 기풍을 불러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상투적인 표현을 거부하고..
허봉(許篈, 1551 명종6~1588 선조21, 자 美叔, 호 荷谷)은 허엽(許曄)의 아들로 형 성(筬), 아우 균(筠), 누이 난설헌(蘭雪軒)과 함께 형제간에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남용익(南龍翼)은 『호곡시화(壺谷詩話)』 10에서 허균(許筠)보다 허봉(許篈)이, 허봉(許篈)보다 난설헌(蘭雪軒)의 시격(詩格)이 더 낫다고 말한 바 있다[許荷谷 …… 然詩則絕佳 且知古法 格高於筠 蘭雪軒之詩 或云 筠自作 假稱以欺世 而調格又高於荷谷 筠所不及]. 그는 처음에는 시세(時勢)의 흐름대로 동파(東坡)를 익혔는데, 독서당(讀書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면서 『당시품휘(唐詩品彙)』를 숙독하여 그 시가 비로소 청건(淸健)하게 되었고, 만년에 갑산(甲山)으로 귀양을 가서 이백(李白)의 시를 열심..
임제(林悌, 1549 명종4~1587 선조20, 자 子順, 호 白湖)는 무변 집안의 자손으로 세상 일에 얽매이거나 남들과 무리짓기를 꺼려하여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하였으나, 뛰어난 시재(詩才)와 독특한 제재로써 이룩한 그의 시세계는 분명히 범상(凡常)을 뛰어넘고 있다. 특히 그의 시작(詩作)에는 변새시(邊塞詩)와 염정시(艷情詩)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거니와 호방(豪放)한 기상과 섬농(纖穠)한 기교를 공유하고 있는 그의 시세계는 남다른 풍격을 형성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시세계의 특질은 그의 무인적 기질과 출사(出仕)의 불우함, 만당시인(晩唐詩人) 두목(杜牧)의 영향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임제(林悌)는 출사(出仕)가 불우하여 주로 변방지방의 관리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변새의 풍물과 지방의..
정철(鄭澈, 1536 중종31~1593 선조26, 자 季涵, 호 松江)은 선조 연간의 문신으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김만중에 의해 동방의 이소(離騷)로 칭송을 받은 그의 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및 시조 「훈민가(訓民歌)」, 「장진주사(將進酒辭)」 등은 모두 국문시가문학의 권능(權能)을 아낌없이 보여준 수작(秀作)이다. 또 그의 국문시가는 권필(權韠)과 이안눌(李安訥)의 한시 소재가 되는 등 우리 문학의 폭을 확장하는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철(鄭澈)의 한시는 국문시가에 비하여 높은 성가(聲價)를 얻지 못했다. 정철(鄭澈)의 한시는 충절시(忠節詩), 영물시(詠物詩), 취락시(醉樂詩) 등 다양한 면모를 지닌다. 이정구(李廷龜)는 「송강집서(松江..
고경명(高敬命, 1533 중종28~1592 선조25, 자 而順, 호 霽峰)은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의병장이 된 문신으로 문명을 떨쳤다. 고경명(高敬命)은 정쟁(政爭)에 휘말려 파직되자 광주(光州)로 돌아가 시작(詩作)에 전념하여 호남시단의 풍류를 한층 진작시켰다. 그는 낙향한 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금산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항복(李恒福)은 『제봉집(霽峯集)』의 서문(序文)에서 고경명(高敬命)은 의기로써 뿐만 아니라 시문으로도 이름이 높았다고 칭송하였으며 유근(柳根)도 발문(跋文)에서 ‘문자(文字)는 소절(小節)이요 정기(正氣)가 더 중요하나 이 두 가지를 겸비하였다.’라고 하여 고경명(高敬命)의 시문과 의기를 높이 평가하였다. 고경명(高敬命)의 시는 자연경물을 보고..
정지승(鄭之升, ?~?, 자 子愼, 호 叢桂堂)은 도선가(道仙家) 시인으로 유명한 정렴(鄭磏)과 정작(鄭碏)의 조카이다.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재주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지만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원흉으로 지목된 정순명(鄭順朋)의 손자이기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지 못한 채 불우한 삶을 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에 못지 않을 정도로 당풍(唐風)을 보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으며, 「상춘(傷春)」(五絶), 「유별(留別)」(七絶), 「정숙부(呈叔父)」(七律), 「송성칙우유풍악(送成則優遊楓嶽)」(七古) 등이 유명하다. 「상춘(傷春)」을 보인다. 草入王孫恨 花添杜宇愁 풀 끝에 왕손의 한이 맺히어 꽃은 두견새 시름 더 슬프게 하네. 汀洲人不見 風動木蘭舟 강 가운데 모래 밭에 사람 보이지 ..
이달(李達, ?~?, 자 益之, 호 蓀谷)은 시재(詩才)가 삼당시인(三唐詩人) 가운데 가장 뛰어날 뿐 아니라 조선중기 제일의 비평대가로 손꼽히는 허균(許筠)에게 시를 가르쳐 후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최경창(崔慶昌)과 백광훈(白光勳)이 일찍 세상을 떠나 그 재주를 다 펴기 어려웠던 데 비해 그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지날 때까지 살아 있었으며, 특히 만년에 문장이 크게 진보하여 스스로 일가의 격을 이루었고 허균(許筠)은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유장경(劉長卿)에 비견될 만큼 높이 평가했다. 최경창ㆍ백광훈ㆍ이달(삼당시인)의 시는 모두 바른 소리를 본받았다. 최경창은 맑고도 굳세며, 백광훈은 마르고 담백하니 모두 귀중하다 할 만하다. 그러나 기력이 미치지 못해 조금 일의 두터움에..
백광훈(白光勳, 1537 중종32~1582 선조15, 자 彰卿, 호 玉峯)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시문으로 자적하며 평생을 보낸 시인이다. 당대에는 최경창(崔慶昌)과 함께 최백(崔白)으로 불리웠고, 후일 이달(李達)을 포함하여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웠다. 후세의 평가(評家)에 따르면 최경창(崔慶昌)과 백광훈(白光勳)은 모두 당시(唐詩)를 배워 정도를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둘 가운데서는 최경창(崔慶昌)이 좀더 나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양자(兩者)의 시풍(詩風)은 각각 특징이 달라서 최경창(崔慶昌)의 시풍(詩風)은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선 ‘청경(淸勁)’으로, 『성수시화(惺叟詩話)』 62에선 ‘한경(悍勁)’으로, 『호곡시화(壺谷詩話)』 1에선 ‘청숙(淸淑)’으로 평하여 『호곡시화(壺谷詩話)』 1..
박순(朴淳)의 뒤를 이어 우리 시단에 당시(唐詩)의 풍기(風氣)를 널리 보급하는데 큰 공을 보인 작가는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이달(李達) 세 사람이다.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통칭한 첫 기록은 임상원(林相元)의 「손곡집서(蓀谷集序)이다. ‘선조 연간에 이르러 『상당집(三唐集)』이라 불리는 것이 있었는데,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ㆍ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ㆍ손곡(蓀谷) 이달(李達)을 이른다. 이 세 사람은 힘써 당을 모의하여 간혹 아주 비슷한 것이 있다[當穆陵朝, 有稱三唐集者, 崔孤竹慶昌ㆍ白玉峯光勳ㆍ李蓀谷達也. 是三子者, 刻意摹唐, 間有他相肖者]’라 한 것이다.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합칭(合稱)하여 부르지는 않았지만 이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파악하는 흐름은 허균(許筠)의 『학산초담(..
4. 당파(唐派)의 광망(光芒) 고려조(高麗朝) 시학(詩學)이 융성해지면서 우리 소단(騷壇)은 소식(蘇軾)으로 대표되는 송시학(宋詩學)의 압도적인 영향권 아래에서 그 발전을 이룩해왔다. 선초(鮮初)에 두시(杜詩)를 언해(諺解)한 이래 간헐적으로 이어진 학당(學唐)의 흐름은 조선중기 목릉성세(穆陵盛世)에 들어 비로소 활짝 꽃을 피우게 된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峰類說)』 시평 127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 시인이 송나라와 원나라의 습속에서 벗어나지 않은 지 얼마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주와 유호인과 신종호와 신광한은 당풍에 가깝다 일컬어지지만 깊이 나아가는 공력이 없는 듯하다. 박순과 최경창과 백광훈과 이순인과 이달은 모두 당풍을 배웠으니 지은 시가 칭송 받을 만한 사람들이다. 다만 절..
3. 도선가(道仙家)의 명작(名作) 도교(道敎)는 그 시원(始原)에서부터 신선사상(神仙思想)과 쉽게 습합(習合) 전승(傳承)되어 온 본래적 성격 때문에 문학사상으로서의 도교(道敎)는 따로 말하는 것이 어려울 수 밖에 없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이 일방적(一方的)으로 통행(通行)한 조선조의 분위기에서 도교는 불교보다도 더 깊숙히 숨은 채 겉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때문에 도통(道統)을 잇고 있는 인물들의 자세한 면모는 그리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은밀히 전해져 내려온 도가(道家) 관계의 서적들인 『행동전도록(海東傳道錄)』ㆍ『청학집(靑鶴集)』등과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海東異蹟)』 등을 통해서야 도가(道家)로 인정할 수 있는 인물들의 명호(名號)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조여적(曺汝籍)의 『청..
성혼(成渾, 1535 중종30~1598 선조31, 자 浩原, 호 牛溪ㆍ默庵)은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이이(李珥)의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반대하여 6년간 이 이와 함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이다가 마침내 이이(李珥)를 산하간기(山河間氣)의 인물로 추숭(推崇)하게 된다. 그의 시는 아정(雅正)하여 학자의 탈속(脫俗)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의 소회(所懷)를 잘 보여주는 「우음(偶吟)」을 보인다. 四十年來臥碧山 사십년 동안 푸른 산에 누웠으니 是非何事至人間 시비가 무슨 일로 인간세상에 이르리오? 小堂無限春風地 작은 집 봄바람 부는 곳에 홀로 앉아 있노라니 花笑柳眠閑又閑 웃는 꽃 조는 버들에 한가롭고 또 한가롭다. 이 시와 정구(鄭逑, 1543 중종38~16..
2. 이학자(理學者)의 여기(餘技) 16세기에 들어와서 서경덕(徐敬德)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조식(曺植) 등 성리학자들이 도학파(道學派)의 시세계를 열어준 이후 이들보다 한 세대 가량 뒤에 등장한 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송익필(宋翼弼)ㆍ정구(鄭逑) 등은 성리학 방면에서 보다 진전된 학문 성과를 보여준 이외에도 문학이론이나 실제 시의 창작 방면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이이(李珥, 1536 중종31 ~1584 선조17, 자 叔獻, 호 栗谷ㆍ義菴ㆍ石潭ㆍ愚齋)는 선배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하여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근본사상으로 리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하며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창시한 학자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문책(文策)」에서 후세의 학자들이 실리(實理)를..
황정욱(黃廷彧)은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 중에서 가장 후배이다. 그는 많은 시를 쓰기보다는 힘들여 시를 썼기 때문에 시인으로서의 명성에 비하여 남긴 시작(詩作)이 적은 편이다.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이 있었으나 불우하여 만년(晩年)에야 문병(文柄)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불행이 이어져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함경도에서 두 왕자와 함께 왜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항복권유문을 쓴 죄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는 강서파(江西派)인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를 배워 소재(蘇齋)보다는 호음(湖陰)과 시세계가 가깝다. 허균(許筠)은 「제황지천시권서(題黃芝川詩卷序)」에서 그의 시가 박상(朴祥)에게서 나와 호음(湖陰)과 소재(蘇齋) 사이를 출입(出入)하였지만 삼가(三家)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하였..
1. 관각(館閣)의 대수(大手) 문장(文章)은 흔히 그 향유(享有)하는 계층에 따라 대각(臺閣)의 문장(文章), 선도(禪道)의 문장(文章), 초야(草野)의 문장 등으로 나누어 말하기도 한다【서거정(徐居正)은 「계정집서(桂庭集序)」】. 이때 대각(臺閣)의 문장(文章)이란 반교문(頒敎文)ㆍ교서(敎書)ㆍ윤음(綸音)ㆍ옥책문(玉冊文)ㆍ전문(箋文) 등 이른바 관각문자(館閣文字)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전기의 문형(文衡) 가운데서도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ㆍ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ㆍ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 등은 대제학(大提學)의 영직(榮職)에 있으면서 특히 시에 능하여 각각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詩人)으로 추앙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따로 ‘관각삼걸(館閣三傑)’ 또는 관각(館閣)의 ‘호소지(..
7.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풍요(豊饒)와 화미(華美) 조선 초기의 안정에 힘입어 풍요로운 목릉성세(穆陵盛世)를 이룩한 선조인조년간(宣祖仁祖年間)은 시단에 있어서도 또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성시를 이룬다.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 중에서도 풍격(風格)과 기상이 가장 뛰어난 노수신(盧守愼)은 선조(宣祖) 초기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노두(老杜)의 격력(格力)을 깊이 얻은 학두자(學杜者)로 알려져 있다.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 중 가장 후배인 황정욱(黃廷彧)은 많은 시를 쓰기보다 힘들여 시를 썼기 때문에 시인으로서의 명성에 비하여 시작(詩作)이 적은 편이다. 노수신(盧守愼)도 그의 시작(詩作)에서 강서시파(江西詩派)의 기상기구(奇想奇句)를 시험한 부분들이 보이지만, 특히 황정욱(黃廷彧..
조식(曺植, 1501 연산군7~1572 선조5, 자 楗中, 호 南冥)은 이황(李滉)과 동시대를 살았지만 퇴계(退溪)와는 달리 지리산 백운동(白雲洞)에서 은거하며 학문만을 닦은 학자이다. 그는 ‘이정과 주희 이후론 저서가 불필요하다[程朱後不必著書]’라 하여 자신의 독특한 학설을 주장하기보다 성명(性命)을 닦은 후의 실행(實行)을 주창하는 실천적 학문경향을 보이었다. 그는 1558년 4월 지리산을 등반하여 기상을 키우고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기기도 하였거니와 그의 대표작 「천왕봉(天王峰)」 또한 그의 자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請看千石鐘 非大扣無聲 천석 무게 저 종을 쳐다보시오, 큰 것이 아니면 두드려도 소리나지 않네. 萬古天王峯 天鳴猶不鳴 만고(萬古)의 천왕봉(天王峰), 하늘이 울어도 울지..
이황(李滉, 1501 연산군7~1570 선조3, 자 景浩ㆍ季浩, 호 退溪ㆍ陶翁ㆍ退陶)은 우리나라 성리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해동주자(海東朱子)로까지 일컬어진 바 있는 학자이다. 그는 서경덕(徐敬德)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반대하고 이언적(李彦迪)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내세웠다. 그는 다른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시가 성정(性情)의 바름을 구하는데 긴요하다는 문학관을 지녀 시작(詩作)에도 상당히 힘을 기울였다[先生喜爲詩, 平生用功甚多, 其詩勁建典實, 不衒華彩, 初看似無味, 愈看愈好. 嘗言, ‘吾詩枯淡, 人多不喜, 然於詩用力頗深, 故初看雖似冷淡, 久看則不無意味’ 又曰: ‘詩於學者, 最非緊切, 然遇景値興, 不可無詩矣’]. 그의 시에 대해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
조욱(超昱, 1498 연산군4~1557 명종12, 자 景陽, 호 愚菴ㆍ保眞齋ㆍ龍門ㆍ洗心堂)의 「낙천음(樂天吟)」, 「자경음(自警吟)」, 「효강절선생수미음(效康節先生首尾吟)」 등의 ‘음체(吟體)’는 곧 자신의 철학적 견해와 사회적 인식을 산문적인 시로 기술한 것이며, 때문에 이단하(李端夏)는 「답둔촌서(答遁村書)」에서 ‘대략 여러 편을 보면 『격양집(擊壤集)』의 읊조림과 유사함이 있다[略觀數篇, 有似擊壤集吟泳].’라고 하여 그의 시는 소옹(邵雍)의 문집인 『격양집(擊壤集)』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평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다음의 「견도(見道)」와 같은 작품은 주희(朱熹) 설리시(說理詩)의 틀을 아우르고 있음을 쉽게 알게 해준다. 萬理用雖異 一原體自同 만가지 이치의 쓰임은 비록 다르지만 한가지 ..
6. 유가(儒家)의 시편(詩篇) 조선조에 이르러 주자학(朱子學)이 정치이념으로 채택되면서 ‘문이재도(文以載道)’와 같은 일정한 문학관념을 성립시켰으며 이것이 문학발전을 저해하는 부정적 기능을 하게 되지만 이후에도 100여년간은 주자학이 사림(士林)의 속상(俗尙)으로 보편화되지는 않았다. 서거정(徐居正)ㆍ김종직(金宗直) 등이 앞장서서 효용론적(效用論的)인 문학관(文學觀)을 큰소리로 외쳤지만, 이들은 모두 조선초기 시단(詩壇)의 토대를 구축한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 서경덕(徐敬德)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조식(曺植) 등의 선구들에 있어서는 오도(悟道)의 경지를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설리성(說理性)이 강한 시풍(詩風)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자연의 흥취를 통해 순수한 성정(性情)을..
나식(羅湜, 1498 연산군4~1546 명종1, 자 正原, 호 長吟亭)은 을사사화(乙巳士禍)에 동생이 피죄(被罪)됨에 따라 그도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그래서 그의 문집 『장음정유고(長吟亭遺稿)』에는 겨우 50여수가 수습되고 있을 뿐이어서 시세계의 전정(全鼎)을 맛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제화원(題畵猿)」, 「여강(驪江)」도 작자를 최수성(崔壽峸) 또는 정희량(鄭希良)이라하여 귀일(歸一)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타고난 시취(詩趣)가 있어, 허균(許筠)도 그의 시가 성당(盛唐)의 권역(圈域)에 근접하고 있다 하였다. 「제화원(題畵猿)」은 다음과 같다. 老猿失其群 落日枯槎上 늙은 원숭이 제 무리 잃고, 지는 해에 외론 나무가지에 ..
최수성(崔壽峸, 1487 성종18~1521 중종16, 자 可鎭, 호 猿亭ㆍ北海居士)은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학문연구에 정진하여 사림(士林)에 명망(名望)이 있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실의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산수간을 유람하였으나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그래서 최수성의 시작(詩作)은 온전하게 수습되지 못하여 각종 시선집에 몇편의 시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전하는 「제화원(題畵猿)」은 나식(羅湜)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조시산(國朝詩刪)』 소재(所載) 「증승(贈僧)」도 김정(金淨)의 것이라는 이설(異說)이 있다. 「증승(贈僧)」은 다음과 같다. 嶺外寒山寺 逢僧眼忽靑 대관령 밖 한산사에서, 스님을 만나니 눈이 홀연히 반갑네. 石泉同病客 天地一浮..
임억령(林億齡, 1496 연산군2~1568 선조 1, 자 大樹, 호 石川)과 김인후(金麟厚, 1510 중종5~1560 명종15, 자 厚之, 호 河西ㆍ澹齋)는 호남계(湖南系) 소단(騷壇)의 중진이다. 임억령(林億齡)은 박상(朴祥)의 문인(門人)으로 해남(海南) 출신이며, 김인후(金麟厚)는 송순(宋純)의 문하(門下)를 출입한 장성(長城) 출신이다. 이들은 인품이 고매(高邁)하여 시(詩) 또한 사람과 같다는 평이다. 임억령(林億齡)은 고금(古今)의 각체시(各體詩)를 두루 익히면서 일생 동안 시업(詩業)으로 일관했으므로 그의 문집도 대부분 시(詩)로써 채워져 있으며 문(文)은 다만 수필에 불과하다. 김인후(金麟厚)는 학문이 깊어 그의 시(詩)도 침착(沈着)ㆍ준위(俊偉)한 것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젊었을 때 그..
기준(奇遵, 1492 성종23~1521 중종16, 자 敬仲, 호 復齋ㆍ德陽)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덕성(德城)에 유배되었으며, 신사무옥(辛巳誣獄)에 김정(金淨) 등 살아남은 기묘명현(己卯名賢)들이 죽음을 당할 때 그도 배소(配所)에서 교살되었다. 그의 시세계에 대해서는 다음 작품 「강상(江上)」(五律)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적소(謫所)에서 두만강을 바라보며 읊조린 것이다. 遠遊臨野戍 高會惜年華 멀리 떠돌다 거친 변방에 이르러 좋은 모임에 나와 봄을 아쉬워하네. 夜靜胡天月 春深古塞花 밤은 오랑캐 땅의 달 아래 고요하고, 봄은 오래된 요새의 꽃 속에 깊어 있구나. 長江誰作酒 哀唱不成歌 긴 강을 누가 술로 만들었나? 슬피 노래..
신광한(申光漢, 1484 성종15~1555 명종10, 자 漢之ㆍ時晦, 호 企齋ㆍ駱峯ㆍ石仙齋ㆍ靑城洞主)과 김정(金淨, 1486 성종17~1521 중종16, 자 元沖, 호 沖菴ㆍ孤峯)은 모두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걸리었으나 김정(金淨)은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죽음을 당하고 신광한(申光漢)은 살아 남아 후일 문형(文衡)의 영예를 누리었다. 그러므로 김정(金淨)은 시인의 이름보다는 오히려 김식(金湜)과 더불어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행(李荇)과 박은(朴誾) 등이 황진(黃陳)을 배우고 있을 때 스스로 당풍(唐風)을 익혀 조선전기 소단(騷壇)을 다채롭게 해주었다. 신광한(申光漢)의 시(詩)는 허균(許筠)이 『성수시화(惺叟詩話)』 39에서 청절(淸絶)하여 아취(雅趣)가 있다고 일..
박상(朴祥, 1474 성종5~1530 중종25, 자 昌世, 호 訥齋)은 전라도 광주(光州) 출신으로 호남계(湖南系) 시단(詩壇)을 열어준 선구이기도 하지만 이행(李荇)ㆍ신광한(申光漢)ㆍ김정(金淨)ㆍ정사룡(鄭士龍) 등과 함께 중종 연간의 시단(詩壇)을 빛내준 대표적인 시인이다. 정치 현실에서도 서로 처지를 달리했거니와 시업(詩業)에 있어서도 개성 있는 시작(詩作)으로 다양한 전개를 보이었다. 박상(朴祥)은 김정(金淨)과 함께 폐비(廢妃) 신씨(愼氏)의 복위(復位)를 주창하다가 훈구(勳舊) 세력으로부터 폄척(貶斥)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그는 이른바 기묘완인(己卯完人)으로 살아 남았다. 그의 문집인 『눌재집(訥齋集)』은 대부분이 시(詩)로써 채워져 있으며 문장(文章)은 겨우 10여편을 남..
남곤(南袞, 1471 성종2~1527 중종22, 자 士華, 호 止亭)도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서변(西邊)에 유배되기도 했지만, 중종반정 후 대제학의 영예를 누리었으며, 심정(沈貞) 등과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조작하여 명유(名儒)들을 숙청하고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가 후일 관작(官爵)이 삭탈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문은 사람과 같지 않다는 것이 후대의 평가다. 그는 후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의 글이 후세에 또다른 사화를 일으키는 화근이 될 것을 우려하여 대부분의 사고(私稿)를 없앴다 한다. 그의 대표작으로 고평을 받은 「제신광사(題神光寺)」 6수 중 그 첫 번째 것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千重簿領抽身出 천겹 문서더미에서 몸을 빼내, 十笏禪房借榻眠 한 칸 절방에 잠..
정희량(鄭希良)의 「압강춘망(鴨江春望)」은 다음과 같다. 邊城事事動傷神 변방에선 일마다 마음이 상하는데, 海上狂歌異隱倫 바닷가의 미친 노래는 은자의 것이 아니라네. 春不見花猶見雪 봄에도 꽃은 보이지 않고 아직도 눈만 보이며, 地無來雁況來人 이곳에는 기러기도 오지 않거니 하물며 올 사람 있으랴? 輕陰漠漠雨連曉 봄 기운이 스산하여 비는 새벽까지 이어지고, 細草萋萋風滿津 가는 풀이 무성한데 바람이 나루에 찼네. 惆悵芳時長作客 슬프다, 좋은 시절에 항상 나그네 되었으니, 可堪垂淚更添巾 흐르는 눈물이 또 수건 적심을 어이하랴? 이 작품은 의주(義州) 유배지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봄 풍경을 읊조리고 있지만 시인에게 있어서는 봄같지 않다는 것이 주지다. 정희량(鄭希良)의 시가 황진(黃陳)에 근접하고 있는 것으로..
강혼(姜渾, 1464 세조10~1519 중종14, 자 士浩, 호 木溪)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지만, 젊은 시절 연산군의 근신(近臣)으로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무오(戊午)ㆍ갑자사옥(甲子史獄)에도 신명(身命)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는 이름 높은 학자ㆍ문인들이 다수 배출되었거니와 특히 강혼(姜渾)ㆍ이주(李胄)ㆍ정희량(鄭希良) 등은 시로써 이름을 얻었다. 대부분의 문인들이 무오(戊午)와 갑자사옥(甲子史獄)에 연루되어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지만, 강혼과 신용개(申用漑)는 원유(遠流)되었다가 풀려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후일 대제학의 영직(榮職)에 올랐다. 그러나 강혼은 시문(詩文)이 온전하게 전하지 않아 그의 『목계일고(木溪逸稿)』에는 겨우 19~20여수(餘首)의 시편이 ..
5. 당시(唐詩) 성향의 대두 고려 중기에 이르러 만당(晩唐)의 섬미(纖靡)를 거부하고 기호의활(氣豪意豁)한 소식(蘇軾)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소단(騷壇)은 200여년 동안 송시(宋詩)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습상(習尙)은 달라진 것이 없었으며 다만 정이오(鄭以吾)ㆍ이첨(李詹) 등이 당시(唐詩)의 풍기(風氣)를 보였을 뿐이다. 서거정(徐居正)의 아성(牙城)에 도전한 김종직(金宗直)에 이르러 스스로 호방(豪放)과 신경(新警)을 멀리하고 엄중(嚴重)ㆍ방원(放遠)한 시세계를 구축하면서 당시(唐詩)의 영역에 근접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중종 연간에 시업(詩業)이 크게 떨치면서 황진(黃陳)의 시풍(詩風)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박은(朴誾)ㆍ이행(李荇) 등이 이로써 소단(騷壇)을 크게 울렸..
정사룡(鄭士龍, 1491 성종22~1570 선조3, 자 雲卿, 호 湖陰)은 관각(館閣)의 큰 솜씨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른바 ‘호소지(湖蘇芝)’ 삼가(三家) 중의 한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문형(文衡)의 영예를 누리었지만 그들이 재능을 발휘한 것은 시(詩)이기 때문에 시(詩)로써 이름 높은 세 사람의 문형(文衡)을 골라 ‘호소지(湖蘇芝)’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시(詩)를 할 때에는 이행(李荇)과 경향을 같이 하였으며 생활인으로서도 이행(李荇)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행(李荇)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사사로이 시작(詩作)을 주고 받기도 하였으며 이행(李荇)의 시(詩)를 스스로 간행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칠언율시(七言律詩)에 뛰어나 그의 득의구(得意句)도 모두 칠율(七律)에 있다. 김창협..
이행(李荇, 1478 성종9~1534 중종29, 자 擇之, 호 容齋)은 덕수이씨(德水李氏)의 명문가(名門家)에서 태어나 문형(文衡)의 영예를 누리면서 벼슬이 재상에까지 올랐으나 무오(戊午)ㆍ갑자(甲子)ㆍ기묘사화(己卯士禍)의 와중에서는 네 차례나 유배지의 신고(辛苦)를 감내하여야만 하였으며 끝내 유배지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러나 그는 생활 환경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손수 시고(詩藁)를 만들어 생생한 삶의 체험을 후세에 남겼다. 그때 만든 11편의 시(詩)가 『용재집(容齋集)』에 전하고 있어 그의 삶과 시세계를 한꺼번에 가르쳐 주기도 한다. 그의 문집에 전하는 것으로는 조천록(朝天錄)을 비롯하여 적거록(謫居錄)ㆍ남천록(南遷錄)ㆍ해도록(海島錄)ㆍ창택록(滄澤錄)ㆍ남유록(南遊錄)ㆍ영남록(嶺南錄)ㆍ차황화시집(次皇華..
4. 해동(海東)의 강서시파(江西詩派) 우리나라에도 강서시파(江西詩派)가 있음을 드러내어 말한 사람은 신위(申緯)가 아닌가 한다. 김창협(金昌協)도 일찍이 박은(朴誾)의 시(詩)를 말하는 가운데서 그가 황진(黃陳)을 배웠다고 하였지만, 우리나라 시인의 구체적인 작품을 통하여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시풍(詩風)을 확인한 것은 신위(申緯)가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서시파(江西詩派)란 중국 송대(宋代) 시단(詩壇)의 한 유파로 황정견(黃庭堅)을 시종(詩宗)으로 삼는 진사도(陳師道) 이하 일군의 시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황정견(黃庭堅)의 고향이 강서(江西)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긴 하지만 그밖의 시인들이 모두 강서(江西)지방 출신인 것은 아니다. 송시(宋詩)는 구양수(歐陽修)ㆍ소식(蘇軾)에 의하여 크게 바..
김시습(金時習, 1435 세종17~1493 성종24, 자 悅卿, 호 梅月堂ㆍ東峯ㆍ淸寒子)은 타고난 재주 때문에 어린 나이에 이미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그 장래가 약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과 뜻이 서로 어그러져 지상에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詩)로써 즐길 거리를 삼으며 방랑으로 일생을 마쳤다. 스스로 술회(述懷)한 대로 그는 소시적부터 질탕(跌宕)하여 세상의 명리(名利)나 생업(生業)과 같은 것은 돌보지 아니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산수(山水)로 방랑(放浪)하면서 경치를 만나면 시(詩)나 읊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민병수, 「梅月堂의 시세계」, 『人文論叢」 제3집,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1978 참조】. 역대(歷代)의 소인(騷人) 가운데서 김시습(金時習)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시(詩)로써 말한..
김종직(金宗直, 1431 세종13~1492 성종23, 자 季昷ㆍ孝盥, 호 佔畢齋)은 도교(道學)의 연원계보(淵源系譜)에서 보면 고려(高麗)의 성리학(性理學)을 조선조에 이어준 학자(學者)이며, 정치사적(政治史的)으로는 영남사림(嶺南士林)의 사종(師宗)이기도 하다. 일문(一門)이 선산(善山)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김숙자(金叔滋)가 길재(吉再)로부터 정몽주(鄭夢周)의 이학(理學)을 이어받아 아들 김종직(金宗直)에게 전(傳)할 수 있었으며 김종직(金宗直)은 다시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을 거쳐 조광조(趙光祖)에까지 학통(學統)을 전수(傳授)하게 된다. 그리고 김종직(金宗直)은 출생지가 밀양(密陽)이므로 이러한 지연(地緣)에 힘입어 영남(嶺南) 사류(士類)의 종장(宗匠)이 될 수 있었다. 그러..
서거정(徐居正, 1420 세종2~1488 성종19, 자 子元ㆍ剛中, 호 四佳亭ㆍ亭亭亭)은 뛰어난 재주를 타고나 일찍부터 그의 기재(奇才)가 중국에까지 알려졌으며 40여년을 관료로서 영예를 누리었다. 26년 동안 문형(文衡)의 자리를 고수하여 김수온(金守溫)ㆍ강희맹(姜希孟)ㆍ김종직(金宗直) 등 일시의 문장들이 그로 말미암아 진출의 길이 막혔다고도 하지만 그러나 대각(臺閣)의 높은 솜씨로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선발책자(選拔冊子)의 편찬에 주역을 담당하였으며, 처음으로 시화(詩話)라는 이름을 붙인 『동인시화(東人詩話)』를 따로 편찬하여 사장(詞章)의 재능을 남김없이 과시하였다.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할 때의 서거정(徐居正)은 이미 효용론자(效用論者)로 급선회하였지만 『동인시화(東人詩話)』를 편찬할 때..
3. 초기(初期)의 대가(大家)들 조선왕조는 태조(太祖) 때부터 문치(文治)를 숭상하여 이후 100여년 동안 문풍(文風)이 크게 떨쳤거니와 특히 세종(世宗)ㆍ성종(成宗) 연간에는 국초(國初)의 문물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사들이 배출되었다.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ㆍ성석린(成石璘)ㆍ강회백(姜淮伯)ㆍ박의중(朴宜重)ㆍ이첨(李詹)ㆍ정이오(鄭以吾)ㆍ변계량(卞季良) 등은 모두 전조(前朝)에서 문학수업이 이루어졌거나 양조(兩朝)에 사환(仕宦)한 관료들이어서 국초(國初)의 정지작업(整地作業)에서 중요하게 기여도 하였지만, 반면에 창업의 역사적 성격을 흐리게 한 장본인이라는 부정도 함께 걸머져야 할 인물들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순수하게 조선왕조의 토양에서 생장하여 조선전기의 문풍을 일으킨 인물로는 이석형..
3. 초기(初期)의 대가(大家)들 조선왕조는 태조(太祖) 때부터 문치(文治)를 숭상하여 이후 100여년 동안 문풍(文風)이 크게 떨쳤거니와 특히 세종(世宗)ㆍ성종(成宗) 연간에는 국초(國初)의 문물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사들이 배출되었다.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ㆍ성석린(成石璘)ㆍ강회백(姜淮伯)ㆍ박의중(朴宜重)ㆍ이첨(李詹)ㆍ정이오(鄭以吾)ㆍ변계량(卞季良) 등은 모두 전조(前朝)에서 문학수업이 이루어졌거나 양조(兩朝)에 사환(仕宦)한 관료들이어서 국초(國初)의 정지작업(整地作業)에서 중요하게 기여도 하였지만, 반면에 창업의 역사적 성격을 흐리게 한 장본인이라는 부정도 함께 걸머져야 할 인물들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순수하게 조선왕조의 토양에서 생장하여 조선전기의 문풍을 일으킨 인물로는 이석형..
이첨(李詹, 1345 충목왕1~1405 태종, 자 中叔, 호 雙梅堂)은 「저생전(楮生傳)」의 작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재능을 발휘한 것은 시(詩)이다. 「용심(慵甚)」(七絶), 「등주(登州)」(五律), 「자적(自適)」(五絶), 「야과한벽루문탄금(夜過寒碧樓聞彈琴)」(七絶), 「주행지동양역(舟行至潼陽驛」(五律) 등이 각종 시선집(詩選集)에서 두루 뽑아준 대표작이다. 대체로 한원(閑遠)한 서정이 전편(全篇)에 펼쳐져 있어 동적(動的)인 미감(美感)은 찾아보기 어려운 작품들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용심(慵甚)」도 그러한 것 가운데 하나다. 平生志願已蹉𧿶 평생 뜻하던 일 이미 다 틀렸는데 爭奈慵踈十倍多 게으름은 더 많아지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午寢覺來花影轉 낮잠에서 깨어나니 꽃 그림자도 옮겨가 ..
2. 국초(國初) 소단(騷壇)의 양상 조선왕조는 국초(國初)부터 문치(文治)를 표방하였지만, 개국초원(開國初元)에는 걸출(傑出)한 시인(詩人)이 배출되지 않았다. 문(文)은 고명(誥命)ㆍ장주(章奏)와 같은 관각문자(館閣文字)를 필요로 했으며 시(詩)에 있어서도 새 왕조의 위업과 서울의 새 풍물을 읊조린 가영(歌詠)ㆍ송도(頌禱)의 사(辭)가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ㆍ정이오(鄭以吾)ㆍ이첨(李詹)ㆍ조운흘(趙云仡)ㆍ유방선(柳方善) 등의 시편(詩篇)이 각종 선발책자(選拔冊子)에 자주 뽑히고 있지만, 이 가운데서 유방선(柳方善)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조(前朝)에서 과거로 입신(立身)하여 양조(兩朝)에 사환(仕宦)한 관료의 전형이다. 다만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은..
1. 문학관념(文學觀念)의 성립(成立)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건국은 처음부터 이성계(李成桂) 일파(一派)에 의한 왕권(王權)의 도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고려(高麗) 왕권(王權)이 사실상 그 권능(權能)을 상실하고 있을 때, 정쟁(政爭)의 수습에서 성공한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낡은 왕권의 회복과 새 왕조의 창업을 놓고 그들의 진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후자쪽을 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로 고려 왕권을 옹호하던 무력한 문벌관료층(門閥官僚層)이 퇴진하고 개국공신(開國功臣)을 추종하는 신진관료(新進官僚)들이 대거 진출하여 정치판도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신분질서의 재편성이 용이하게 이루어져 지방에서 오랫동안 세력을 부식해온 향리층(鄕吏層, 戶長 등)이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하게 된 것과 같은 것이..
6. 조선전기(朝鮮前期)의 다양한 전개(展開) 조선(朝鮮)은 그 창업과 동시에 성리학(性理學)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함으로써 문학관념에 있어서도 주자학(朱子學, 思想儒敎)이 문학 위에 군림하는 재도관(載道觀)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효용적인 문학관은 결코 문학의 생산을 방해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며 도리어 문학의 내질(內質)에 있어서는 김창협(金昌協)의 말과 같이 시를 보면 그 사람까지도 알게 하는 다양한 전개를 보인다. 다만 국초(國初)에는 문(文)은 고명(誥命)ㆍ장주(章奏)와 같은 관각문자(館閣文字)를 필요로 했으며 시(詩)에 있어서도 새 왕조의 위업과 서울의 새 풍물을 읊조린 가영(歌詠)ㆍ송도(頌禱)의 사(辭)가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지 모른다. 권근(權近)ㆍ정도전(鄭道傳)ㆍ조운..
6) 운석(韻釋)의 시편(詩篇) 고려(高麗) 왕조(王朝)는 국초부터 유교치국(儒敎治國)을 표방했지만, 사상계를 지배한 것은 저급한 민간신앙(民間信仰)과 불교신앙(佛敎信仰)이었으며, 이러한 기본 성향(性向)은 주자학(朱子學)이 수입된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도 변화의 진폭(振幅)은 크지 않았다. 그러므로 귀족적인 고려 왕조의 문화 풍토에서 배출된 불승(佛僧)들 가운데는 유가(儒家)의 관료적(官僚的) 발신(發身)에 필수과정인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산문(山門)에 들어간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이때의 유교는 기본유학(基本儒學) 즉 문학유교(文學儒敎)의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문학(文學) 수업(修業)은 단순한 종교인의 교양 이상의 것임은 물론이다. 의종(毅宗) 때에 있었던 무신란(武臣亂)으로 문사(文士)들이 ..
김구용(金九容, 1338 충숙왕 복위7~1384 우왕10, 자 敬之, 호 惕若齋)은 숭유(崇儒)의 군주(君主)로 알려져 있는 공민왕(恭愍王)이 성균관(成均館)을 창건하였을 때 정몽주(鄭夢周)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朴宜中)ㆍ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교관(敎官)이 되었으며 이때 정이천(程伊川)의 역전(易傳)과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注)를 논(論)하는 등 주자학(朱子學)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작(詩作)에는 강호자연(江湖自然)을 사랑하는 흥취(興趣)가 작품의 도처에 넘치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 「여강기둔촌(驪江寄遁村)」(七絶), 「무창(武昌)」(七絶), 「기달가종군(寄達可從軍)」(五律), 「범급(帆急)」(五律), 「차이호연(次李浩然)」(七律), 「강수(江水)」(..
한수(韓脩, 1333 충숙왕 복위2~1384 우왕10, 호 柳巷)의 저작은 『유항시집(柳巷詩集)』 38장(張)이 전하고 있을 뿐 문집이 온전히 전하지 않는다. 일찍부터 시명(詩名)을 얻어 익재(益齋)와 목은(牧隱)으로부터 칭상(稱賞)을 받은 그는 특히 목은(牧隱)과 친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좌차두공부시운(夜坐次杜工部詩韻)」(五律), 「봉화한산군(奉和韓山君)」(五律), 「척약재승주내방음주중(惕若齋乘舟來訪飮酒中)」(七律), 「요목은선생등루완월(邀牧隱先生登樓翫月)」(七律), 「야좌(夜坐)」(七古) 등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대부분의 작품이 율시 가운데 있다. 두보(杜甫)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지은 「야좌차두공부시운(夜坐次杜工部詩韻)」을 보인다. 此日亦云暮 百年眞可悲 오늘도 날이 저물었으니 평생..
5) 려말(麗末)의 시인(詩人)들 목은(牧隱)ㆍ포은(圃隱)ㆍ도은(陶隱) 등 이른바 삼은(三隱)을 전후한 시대에는 안정된 우리의 진귀(珍貴)를 맛보게 하는 많은 소인(騷人)들이 배출되었다. 그들을 일일이 적어 보일 수는 없지만 그 중에서도 높은 이름을 후세에까지 전하고 있는 일부만 보이면 다음과 같다. 박상충((朴尙衷)ㆍ권한공(權漢功)ㆍ민사평(閔思平)ㆍ신천(辛蕆)ㆍ전녹생(田祿生)ㆍ한종유(韓宗愈)ㆍ백문보(白文寶)ㆍ오순(吳珣)ㆍ최원우(崔元祐)ㆍ이공수(李公遂)ㆍ이달충(李達衷)ㆍ탁광무(卓光茂)ㆍ한수(韓脩)ㆍ정추(鄭樞)ㆍ설손(偰遜)ㆍ이인복(李仁復)ㆍ김구용(金九容)ㆍ유숙(柳淑)ㆍ이집(李集)ㆍ이존오(李存吾)ㆍ원천석(元天錫)ㆍ원송수(元松壽)ㆍ길재(吉再) 등이 려말(麗末)에서 선초(鮮初)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성망(聲望)..
이숭인(李崇仁, 1349 충정왕1~1392 태조1, 자 子安, 호 陶隱)은 이색(李穡)의 문인이며 이색(李穡)이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을 때 정몽주(鄭夢周)ㆍ김구용(金九容) 등과 더불어 교관(敎官)으로 일했다. 이숭인(李崇仁) 역시 이색(李穡)ㆍ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유가(儒家)이자 정치가로서 시가(詩家)를 겸하였지만, 특히 문장(文章)이 전아(典雅)하여 당시의 표전사명(表箋詞命)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원(元)으로부터 금은마포(金銀馬布)의 세공(歲貢)을 감하게 한 것도 그의 힘이었다고 한다【『고려사(高麗史)』ㆍ 열전(列傳), 「이숭인조(李崇仁條)」】. 그러나 그 역시 정몽주당(鄭夢周黨)으로 몰리어 멀리 내쫓겨야 했으며, 끝내는 정도전(鄭道傳)이 보낸 황거정(黃居正)에 의하여 장살..
4) 정몽주(鄭夢周)의 호방(豪放)과 이숭인(李崇仁)의 전아(典雅) 정몽주(鄭夢周, 1337 충숙왕 복위6~1392 공양왕4, 자 達可, 호 圃隱)는 인종(仁宗) 때에 문명(文名)을 드날린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다. 그는 이색(李穡)ㆍ이숭인(李崇仁)과 더불어 유가(儒家)ㆍ정치가로서 시가(詩家)를 겸한 여말(麗末)의 학자 문인이다. 그가 우왕(禑王)ㆍ창왕(昌王)을 폐할 때 이성계(李成桂)에게 협력하였다 하여 이를 흠으로 일컫는 후대의 비평도 있지만 그러나 그는 기울어져 가는 고려 왕실을 붙들려다가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해 피살된 고려왕조의 마지막 보루였던 것은 틀림없다. 이성계(李成桂) 세력을 제거하려다 실패한 그였지만, 그의 정충대절(精忠大節)만은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려사(高麗史)』에서도 ..
3) 이색(李穡)의 박채불유(博採不遺) 이색(李穡, 1328 충숙왕15~1396 태조5, 자 穎叔, 호 牧隱)의 문장(文章)은 그 폭이 넓을 대로 넓어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것으로 정평(定評)되어 있지만, 각체(各體)의 도처에서 명문(名文)을 양산하고 있는 그의 문장(文章)은 높은 곳도 없고 낮은 곳도 없다. 쫓거나 내닫는 성급함도 없이 한가롭고 여유에 차 있다. 애써 꾸미려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말이 풍부하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말한 그대로 먹을수록 맛있고 배부르게 해준다. 『목은집(牧隱集)』의 문장(文章)은 그가 사거(死去)한 수백년 동안 그것을 헐뜯는 입놀림이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을 울렸다. 문장(文章)을 대하는 풍상(風尙)이 달라진 조선중기 이후에 있어서도 그의 이름은 흔들리..
2) 최해(崔瀣)의 곤돈(困頓)과 정포(鄭誧)의 유려(流麗) 최해(崔瀣,1287 충렬왕13~1340 충혜왕복위1, 자 彦明父ㆍ壽翁, 호 拙翁. 猊山農隱)는 이제현(李齊賢)과 동시대의 문인이다. 등제후(登第後) 충숙왕(忠肅王) 때 원(元)에 들어가 그곳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개주판관(盖州判官)을 지내고 환국(還國)하여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서 그쳤다. 그는 재기지고(才奇志高)하여 독서와 문사(文辭)에 있어서 사우(師友)의 지도에 힘입지 않고 자득(自得)하였다고 하며 방탕감언(放蕩敢言)하고 권귀(權貴)에게 아첨하기 싫어하여 크게 쓰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 초기의 선발책자(選拔冊子)인 『동인지문(東人之文)』을 편찬했으며 시선집(詩選集)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을 비주(批注)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곡(李穀, 1298 충렬왕24~1351 충정왕3, 자 仲父, 호 稼亭)은 초명(初名)이 예백(藝白)이며 이색(李穡)의 아버지다. 그의 가계(家系)는 한산(韓山)의 향리층(鄕吏層)이었으며 이곡(李穀)의 부자대(父子代)에 이르러 중앙에 진출하게 되었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등제(登第)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로 있다가 원(元)의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그곳에서 한림국사원검열(翰林國史院檢閱)까지 지냈으며 그 뒤에도 원(元)과의 왕래가 자주 있었다. 그의 문학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에 ‘與中朝文士, 交遊講劘…辭嚴義興, 典雅高古, 不敢以外國人視也.’라 한 것으로 보아 중국에까지 그 이름을 떨쳤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는 시문집(詩文集)인 『가정집(稼亭集)』에 전하는 것 외에도 『동문선(東文選)』등 선발..
2. 한국시(韓國詩)의 정착(定着) 1) 이제현(李齊賢)과 이곡(李穀)의 관풍의식(觀風意識) 이제현(李齊賢)과 이곡(李穀)은 주자학(朱子學)의 보급이 아직도 일반화되지 않은 중간 과정에서 특히 풍교(風敎)의 떨침에 같은 관심을 보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의지는 근엄한 이곡(李穀)의 시작(詩作)에 천근(千斤)의 무게로 자리하고 있으며 이제현(李齊賢)에 있어서는 따로 소악부시(小樂府詩)를 마련하여 민풍(民風)을 정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제현(李齊賢, 1287 충렬왕13~1367 공민왕16, 자 내思, 호 益齋ㆍ櫟翁)은 분명히 우리나라 문학사의 한 시기를 구획하는 데 중요하게 구실한 시인이요 문장가(文章家)임에 틀림없다. 그는 중국의 음률(音律)에 정통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드물게 보는 악부(樂府)의 작자로서,..
5. 성리학(性理學)의 수입과 한국시(韓國詩)의 정착(定着) 1. 성리학의 수입과 문학관념(文學觀念)의 대두(對頭) 고려는 국초부터 유교치국(儒敎治國)을 표방하였지마는 충렬왕(忠烈王) 대에 이르기까지 기본유학(基本儒學),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학유교(文學儒敎)로 일관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은 일찍이, 당시의 유사(儒士)들이 과거(科擧)의 문장(文章)만 익히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한 자가 없는 것을 개탄하여, 일경일사(一經一史)에 통한 사람을 국자감(國子監)에 교수(敎授)케 하라고 한 사실을 보면 이때까지도 국자감(國子監)에 경사(經史)에 통한 교수(敎授)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충렬왕(忠烈王) 30년에 안향(安珦)이 양현고(養賢庫)가 탄갈(彈渴)하여 선비를 기를 수 없는 것을 걱정하여, ..
2. 한국시(韓國詩)의 발견(發見) 임춘(林椿)과 이인로(李仁老)의 동파시(東坡詩)에 대한 관심은 동파시(東坡詩)를 배우고 익히던 초기 단계의 일이거니와, 이 뒤의 후진(後進)들에게 있어서도 풍골(風骨)과 의경(意境), 사어(辭語)와 용사(用事)의 기교(技巧)에 이르기까지 동파시(東坡詩)의 예술적인 경계를 포괄적으로 배운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당시 시인(詩人)ㆍ묵객(墨客)들의 동파시(東坡詩)에 대한 일반적 관심은 동파(東坡)를 한갖 시수업(詩受業)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최자(崔滋)가 명쾌하게 진술하고 있다. 근세에 동파(東坡)를 숭상하는 것은 그 기운이 호매(豪邁)하고 뜻이 깊고 말이 풍부하고 고사(故事)의 원용(援用)이 광박한 것을 사랑해서 거의 그 체(體)를 본..
이 밖에도 김지대(金之岱), 곽예(郭預), 홍간(洪侃), 이장용(李藏用) 등이 각종 시선집(詩選集)에 여러 편의 시작(詩作)을 남긴 시인들이며 그 가운데서도 김지대(金之岱)의 「유가사(瑜伽寺)」(七律), 곽예(郭預)의 「상련(賞蓮)」(七絶), 이장용(李藏用)의 「강수(江樹)」(七律) 등은 모두 명편으로 꼽히는 것들이다. 김지대(金之岱, 1190 명종 20~1266 원종 7, 초명 仲龍)는 섬교한 시풍(詩風)을 보인 시인으로 특히 요체(拗體)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그의 대표작 「유가사(瑜伽寺)」를 보인다. 寺在煙霞無事中 절은 안개와 노을 고요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亂山滴翠秋光濃 들쑥날쑥 푸른 물 든 산 가을빛 무르익었네. 雲間絶磴六七里 구름 사이 비탈진 육칠리 산길 天末遙岑千萬重 하늘가에 아득한 묏부리 ..
5) 이규보(李奎報)의 후예들 최자(崔滋, 1188 명종18~1260 원종1, 호 東山叟)는 이규보(李奎報)를 뒤이어 일시에 문병(文炳)을 잡았다. 당시 국정(國政)을 전담한 최이(崔怡)가 이규보(李奎報)로 하여금 그 후계를 천거(薦擧)케 하였을 때 이규보(李奎報)는 최자(崔滋)를 첫째로 천거(薦擧)하고 다음으로 김구(金坵)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각각 『동문선(東文選)』 등에 10여편의 시작(詩作)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시작(詩作)은 이규보(李奎報)를 따르지 못했으며 알려진 명편(名篇)도 남긴 것이 별로 없다. 최자(崔滋)의 『속파한집(續破閑集)』【즉 『보한집(補閑集)』】과 김구(金坵)의 『지포집(止浦集)』이 지금까지도 유전하고 있다. 먼저 최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남제유(南堤柳)」..
4) 이규보(李奎報)의 종의분방(縱意奔放) 이규보(李奎報, 1168 毅宗 22~1241 高宗 28, 자 春卿, 호 白雲居士ㆍ止軒ㆍ三酷好先生)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기동(奇童)으로 불리었지만, 한미(寒微)한 가계(家系)에서 태어난 그는 소년 시절부터 시주(詩酒)를 좋아하고 스스로 구속받기를 싫어하여 40대 초반까지도 신통한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한 채 불우하게 청년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는 일시도 시(詩)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을 정도로 시(詩)를 좋아했다고 하지만 시 말고는 따로 할 것이 없어 시(詩)를 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시(詩)ㆍ주(酒)ㆍ금(琴)을 너무 좋아하여 스스로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부르기도 하였지만, 벼슬에 대한 집착도 과상(過常)할 정도로 대단했다. 고위관료의 시(..
조충(趙沖, 1171 명종 1~1220 고종7, 자 湛若) 역시 일찍이 사원(詞苑)에 있어서 고문대책(古文對策)을 많이 쓰고 여러 번 예위(禮圍)를 맡아 명사(名士)를 선발하였다. 김양경(金良鏡, ?~1235 고종 22, 초명 仁鏡)은 조충(趙沖)을 따라 거란(契丹)을 토벌한 바 있거니와, 문무이재(文武吏才)를 구비(具備)하고 시사(詩詞)를 잘하여 일시에 이름을 드날렸다. 그의 시작(詩作)은 9편이 시선집(詩選集)에 전하고 있을 뿐이지만 최자(崔滋)가 『보한집(補閑集)』 권중 3에서 그를 평하여 ‘글자를 사용함에 반드시 맑고도 신선하였기 때문에 매번 한 편의 글이 나오면 당시의 풍속을 감동시키며 놀래켰다[凡使字必欲淸新 故每出一篇 動驚時俗]’이라 한 것을 보면 청신(淸新)한 그의 시(詩)가 일시를 울렸던 ..
3) 한림제유(翰林諸儒)와 사원(詞苑)의 흥기 元淳文 仁老詩 公老四六 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 沖基對策 光鈞經義 良經詩賦 위 試場ㅅ景 긔 엇더하니잇고 琴學士의 玉荀文生 琴學士의 玉筍文生 위 날조차 몃부니잇고 이는 고종(高宗) 때의 한림제유(翰林諸儒)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한림별곡(翰林別曲)」의 첫 장이다. 의종(毅宗) 때의 무신란(武臣亂)으로 한때 문신(文臣)들이 지기(志氣)를 잃고 산림(山林)에 자복(雌伏)하는 퇴영적인 풍조가 미만(彌滿)하였으나 사장(詞章)을 숭상한 전시대(前時代)의 안정기반에 힘입어 최충헌(崔忠獻)이 정권을 전횡(專橫)하던 신종(神宗)ㆍ고종(高宗) 연간에 이르러 현량(賢良)과 문학지사(文學之士)가 일시에 성황을 이룬다. 「한림별곡(翰林別曲)」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그 중의 일부다..
진화(陳澕)는 무인(武人)의 가계(家系)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금(金)에 다녀온 뒤 직한림원(直翰林院)에 뽑히어 우사간(右司諫) 지제고(知制誥)로 지공주사(知公州事)로 나갔다가 죽었다. 그의 문집(文集)인 『매호유고(梅湖遺稿)』가 전하고 있지만 이는 조선조 영조대(英祖代)에 편집된 것이며【진화(陳澕), 『매화유고(梅湖遺稿)』ㆍ서문(序文) 참조(參照)】 그 내용은 대개 역대(歷代)의 시화서(詩話書)에서 수집한 것이므로 실질적으로는 시선집(詩選集)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진화(陳澕)의 시(詩)는 대개 청신(淸新)ㆍ유려(流麗)한 것으로 정평(定評)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의 시세계는 최자(崔滋)가 『보한집(補閑集)』 권중 3에서 말..
김극기(金克己)는 그 많은 시작(詩作)에 비하여 그의 행적을 알게 하는 기록은 너무도 빈약하며 시화서(詩話書)에 일화(逸話)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개구성장(開口成章)하여 경인어(驚人語)가 많았으나 등과후(登科後)에는 서울에 오지 않고 일인운사(逸人韻士)와 산림(山林)에서 소오(嘯傲)하다가 고종(高宗) 때에 벼슬이 한림(翰林)에 이르렀고 사신(使臣)으로 금(金)에 갔다가 그곳에서 문명(文名)을 떨쳤으나 중도(中途)에 객사(客死)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생평(生平)의 전부다. 그러나 그의 저술은 『김원외집(金員外集)』【『보한집(補閑集)』】, 『김거사집(金居士集)』【『용재총화(傭齋叢話)』 8권 6번】 등으로 불리운 시문집(詩文集)이 있어 조선초기까지도 유전(流傳)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
2) 김극기(金克己)와 진화(陳澕)의 소이(小異) 김극기(金克己, ?~?, 호 老峯)와 진화(陳澕, ?~?, 호 梅湖)는 시대적으로도 선후(先後)의 차가 있을 뿐 아니라 개성의 빛깔에서도 서로 농도를 달리 하는 소이(小異)가 발견되지만, 남용익(南龍翼)은 그의 『기아(箕雅)』 서문(序文)에서 이들의 시세계를 ‘유려(流麗)’로써 한 데 묶었다[流麗則鄭司諫ㆍ金內翰ㆍ李銀臺ㆍ陳翰林ㆍ鄭雪谷ㆍ鄭圓齋]. 그러나 진화(陳澕)에 대해서는 「한림별곡(翰林別曲)」 제1장에서 ‘원순문 인로시 공로사육 이정언 진한림 쌍운주필(元淳文, 仁老詩, 公老四六, 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이라 한 것을 비롯하여 『고려사(高麗史)』에서 ‘어려서 이규보와 명성을 나란히 하여 당시엔 이정언과 진한림으로 불렸다[少與李奎報齊名, 時號李正言ㆍ陳..